대수양/39
39
[편집]수양은 드디어 마지막 결심을 하였다.
첫째로는 용안이 나날이 노숙해 가고 꾹 구중을 봉한 채 아무 하교도 없이 사위에 대해서 경계하는 기색만 농후하여 가는 것이 보기에 민망하였다. 숙청할 이를 얼른 숙청해 버려서 왕께 안심을 드리고 다시 소년다운 활기를 회복하도록 해 드려야 할 것이었다.
둘째로는 저편 상대 쪽을 경계만 하고 감시만 하기가 수양에게도 차차 숨이 차왔다. 저편을 경계하자니 이편도 언제까지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저편은 저편대로 이편의 감시가 하도 엄중하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착수도 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지나자면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서로 대치하여 있기만 할 밖에는 도리가 없다. 끝장날 날이 없다. 이것이 차차 지루하고 숨이 찼다.
셋째로는 이편에서 경계만 하는 동안에 저편에서 몰래 선착수를 하게 되는 날에는 큰 변이다.
이런 귀찮은 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이편에서 선착수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었다.
본시는 저편에서 무슨 실질적의 행동을 시작할 때에 그 꼬리(증거)를 잡아 가지고 일어서려고, 아직 유예 미결하던 바였다. 그러나 일전에 양년 백부가 한 말! 하다가 흐려버린 말─
『선참 후주하려무나.』
하던 그 암시는 수양에게 광명을 주었다. 벼락치듯 이쪽에서 일을 실행해 버리고 그 뒤에 왕께 아뢸 것─ 이 방책이 듣고 보니 최상책이었다. 저편에서 실질적으로 움직이기를 기다리다가 덜컥 저편에서 먼저 손쓰는 경우에는 다 망쳐 버리는 일이다. 더욱이 안평의 문제로─ 만약 저편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아 착수하여 저편을 국문을 하고 하는 경우에는 그 심술 곱지 못한 위인이 저 혼자 끌려들기가 싫어서 안평을 끌고 들어가면 무가내, 안평에게도 국법에 의지하여 극형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포 상잔이라는 이 비극을 피하기 위하여서 이편에서 벼락치듯 일을 결행해 버리기로 결심을 하였다.
시월 초하룻날─
아침부터 내리붓는 비가 이 땅에는 쉽지 않은 현상으로 그냥 오후까지 줄기차게 내리붓는다. 장마 때 이외에는 한나절을 비가 계속 오지 않고, 혹 온다 칠지라도 혹은 가랑비 혹은 소나기로 알맞추 오는 이 땅에서 그 격식을 무시하고 아침부터 소나기가 오후까지 그냥 쏟아진다.
이런 날 수양은 자기의 결심을 실천에 옮기고자 그 뜻을 한명회에게 피력하였다. 조용히 이런 의논을 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날이었다.
김종서 등 몇몇(아홉 사람이다)을 없애 버릴 것은 기위 작정한 방침이지만 어떤 수속을 밟아야 할지, 어떤 방식을 처치를 할지는 그 생장이 고귀한 수양으로서는 잘 알지 못하는 바였다. 이 실천 순서를 한명회와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나이 사십이 지나도록 맨 하급 관리 생활과 허튼 생활만 해 왔고 그러나 또한 지혜 덩어리인 한명회는 이런 방면에 있어서 종횡의 기지를 수양께 알려 바치는 것이었다.
『이보게! 저자들은 다 합하면 아홉 명이라 하지만, 원흉 김종서만 없애버리면 뒤는 말할 게 없는데 어찌 해야 되겠나?』
이 말에 대하여 한명회는 대답하였다.
『이렇게 합시요. 옛날 태종의 정사(定社)의 선례도 있거니와, 아무리 성재(聖裁)를 받아 가지고 일을 한다 해도 정부에 문의하면 역시 이렇다 저렇다 잔소리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 다 집어치우고 어느 좋은 날 택해서 일을 실행합는데, 그 날 장사 몇 명을 택해 좌상(左相)댁에 매복시켰다가 좌상 퇴궐 귀택하기를 기다려서 일을 합는데, 불문곡직하고 「어명」 소리 한마디로 좌상은 없애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구말구.』
『그런 뒤에는 장사들이 사대문에 지켜서 좌상댁 사변이 문안에 소문 못 들어오게 하고, 나으리께서는 곧 어전에 상달합시고 성재를 받아서 없애버릴 사람들을 어명으로 대궐로 불러들여 국문 국사 다 쓸데없이 벼락치듯……』
이런 계획에 있어서 명회는 치밀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 명회의 꾸며낸 「실행 순서」라 하는 것은 요컨대 수양이 세운 안인 「선참 후주」를 사무적으로 치밀하게 순서 따져서 실행 순서 안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 의견으로 말하자면 원흉 김종서를 불문곡직하고 제거해 버리고 그 뒤에 왕께 수양이 직접 김종서를 처치한 이유를 계달하고, 그 뒤 김종서와 연락하여 수양 배척의 운동을 이면으로 꾸며나가던 사람들을 대궐로 불러들여서 어명으로 치죄하자는 것이 원 줄거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밟아야 할 사무적 순서를 꾸민 것이었다.
『거기 씌울 사람 누구는 무엇을 하고 누구는 어디 지키고 하는 건 죄 자네가 맡아서 하게.』
대략 순서가 결정된 뒤에 수양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건 소인이 하오리다.』
『또 일자는 중(重)십일로, 이달 열흘로 하기로 하고……』
『네……』
대략한 의논은 여기서 끝났다.
이것으로 끝막음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에 한명회가 무엇에 좀 미진한 듯이 수양을 쳐다보았다. 그 눈치를 알아보고 수양은 물어보았다. 거기 대해서 명회는 잠시 주저한 뒤에 입을 열었다.
『나으리. 안평대군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서요?』
수양은 대수롭지 않게,
『어쩔 것 있나? 모른 체해 버리고 말지.』
하였다.
『나으리.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대군을 첫째로는 도리상 그냥 둘 수 없지 않습니까? 국사(鞠詞) 없이 처리하니 대군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세상의 의혹을 어찌합니까? 좌상이 신기(玉璽)를 엿보았다고는 세상이 믿지도 않을 것이옵고, 설사 요행 이번에 그냥 지나게 된다 할지라도 이 뒤 또 다른 김종서가 또 생기고 하면 어쩝니까? 나무를 웃동이만 자르고 밑동이를 그냥 두면 자른 보람이 어디 있습니까?』
수양은 슬그머니 부정하였다.
『그건 자네가 모르는 소릴세. 내 동생이나 보호하자는 내 욕심 때문만이 아니라, 안평의 위인이 좁고 잘아서 뒤에 누가 들추어내는 자만 없으면 움직일 생각을 못 해. 김종서만 없애 놓으면 안평은 저절로 가라앉고 말 위인일세.』
『그러기에 말입쇼. 대군은 스스로 아무 일도 못 하시겠지만, 대군이 하도 남의 충동에 동하기 잘하는 분이니까 또 다른 누구가 생겨날 게 아닙니까? 다른 김종서가 또 생기지 않으리까? 금상께오서 유충합시고 안평대군은 남의 말 잘 듣는 분이옵고 또 비위 동할 만한 일이니깐 다른 김종서가 왜 생기지 않으리까?』
『그래도 김종서의 일만 처리되면 겁나서 다시 덤벼들 자도 잘 생겨나지 않으리.』
수양은 이 문제를 가볍게 치워 버리려 하였다.
그러나 명회는 쉽게 그 문제를 버리지 못하였다.
『나으리도 세상을 너무 허투루 보십니다그려. 누구든 죄지을 때 이 죄가 장차 발각되리라고 생각하고 짓겠습니까? 자기만은 곱게 면하고 좋은 일 보겠다고 하는 겝지, 하도 욕심낼 만한 일이라 반드시 다른 김종서가 생겨날 겝니다.』
『글세, 그렇게 말하면 그럴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안 그럴 걸세.』
수양은 그냥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명회는 그냥 완강히 그 문제에 매어 달려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나으리도, 온! 어떤 근거로 안 그러리라고 하십니까?』
『……』
『네?』
『그저 그렇게 생각되네그려.』
말에는 좀 몰렸다. 근거 없이, 이유 없이, 다만 안평은 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부인하는 것이었다.
『나으리! 화초밭에 김을 매는 사람이 잡초를 아주 뽑아 버리지 않고 그 잎만 뜯어버리면 됩니까? 손댄 김에 아주 뿌리까지 뽑아야지─』
『그럼 어떻게 하잔 말인가? 자네 의견은 어떻게 하여야 되겠단 말인가?』
『글쎄, 뿌리를 없애 버려야겠단 말씀이 아닙니까?』
『비유로 말하지 말고 분명히 밝혀 말해 보게.』
『밝혀 말하자면 안평대군도 좌상 등과 같이 해얍지요.』
수양은 눈을 들어 명회를 보았다.
『안평도 처치한다?』
『그럼요.』
『김종서와 같이 말이지?』
『……』
명회는 그렇단 뜻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수양은 이 대답에 대하여 무거운 눈치를 명회의 얼굴에 부은 뿐이었다. 그 눈치와 일반으로 마음도 사실 무거웠다.
이 나라 벼슬아치들의 성미는 수양이 잘 아는 바다. 현재 자기의 수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물론이요, 장차 (일을 결행한 뒤에) 다른 벼슬아치들도 지금 한명회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안평이 그냥 있으면 숙청의 본의를 잃은 것이라는 근심으로 이런 거조에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수양의 마음을 제 뜻대로 해석하여 「이리 하여야 수양의 고임을 받으리라」고 생각하고 조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지금 김종서를 처치하려 하면서 여기서 예전 김종서가 부왕(세종)게 양녕대군을 죽입시다고 성화시키던 그와 흡사한 일을 자기가 스스로 당하는 기괴한 운명에 마주쳤다.
한명회의 심정은 수양이 잘 안다. 명회는 이러함으로써 더 고임 받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러함이 첫째로는 국가에 안전하고, 둘째로는 수양과 및 명회 자신에게 안전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임은 짐작한다. 그러고 명회의 말에 일리 있는 것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수양은 명회의 말과 같은 일을 실행하기는 싫었다. 그것은 결코 장차 악명을 남기기 싫다든가 하는 공명심에서 나온 바가 아니고, 이런 일로 형제 상잔의 유혈극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서방! 한서방의 생각은 그렇지만 난 차마, 내 동생을 어떻게 하라고 할 수가 없어. 이 일이 말하자면 이씨 왕실을 흥성케 하자는 일인데, 이씨 왕실 흥성케 하자는 일에 어떻게 이씨 임금의 지친(至親) 되는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겠나? 못할 일이야.』
『그렇지만, 나으리, 세상사는 명분(名分)을 밝혀야 하는 겐뎁쇼. 좌상께만 죄를 씌우고 대군께는 아무 말도 없으면 명분이 흐려지고 명분이 흐리면 백성의 신망을 어떻게 얻겠습니까? 백성의 신망이 없으면 나라를 처리하는 데 잘 되겠습니까?』
수양은 머리를 숙이고 생각한 뒤에 대답하였다.
『하여간 난 못하겠네. 내 인정도 인정이려니와 우리 전하께서도 윤허하시지 않을 게야. 그러니까……』
계속하는 말을 명회가 끊었다.
『그게야 역시 좌상같이……』
선참 후주하자는 뜻일시 분명하였다.
『다른 것보다도 내가 할 수 없어. 하니까 그 이야기는 내게는 다시 하지 말게. 듣기도 싫으이.』
『그래도……』
그래도 무슨 의견을 끼려는 것을 수양은 내려 씌우듯이 막았다.
『그만 둬, 그만 둬! 누구 위해서 하자는 노릇이라고 내 동생 해치겠나? 아예 다시는 말도 말게.』
내려 씌우는 바람에 명회는 말을 계속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수양은 내심 꽤 무거운 기분이 생기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명회는 지금 내리 씌워 막아 버렸으니 입을 봉하기는 할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사정으로 따져 보아 (명회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서라도) 반드시 일어날 문제였다.
이 일은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이 나라 벼슬아치들의 심정으로든 또는 전후의 사정으로든 안평을 처치하자는 의견은 크게 일어날 것이었다. 예전 양녕 백부 때는, 양녕 백부는 청백 무구한 사람이거늘, 그때도 그런 문제가 크게 일었었으니, 이 안평에게는 더 맹렬히 일어날 것이었다. 진실로 귀찮았다.
수양은 탄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