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대수양/46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46

[편집]

그해 (계유년) 동짓달 어느 날이었다.

밤─

수양은 연침에 조카님을 모시고 세상 이야기를 여쭙고 있었다. 비록 수양은 외신(外臣)이라 하지만, 왕의 친숙이요, 또한 곤전(坤殿)이 없는 내전이라 밤에도 연침에서 가끔 모시고 하였다.

밤에 바람이 꽤 차고 서늘쩍한 기운이 꽤 돌므로 왕께는 몸을 안석에 편히 기대기를 청하고, 시종을 불러 옥체를 덮을 작은 이불을 하나 가져오라 분부하였다.

분부는 환관에게 하였는데 처네를 하나 받들고 온 것은 여관이었다.

비스듬히 기댄 옥체에 여관은 처네를 덮어 드렸다. 보매 열육칠세 났을까 하는 피어오르는 꽃 같은 여관이었다. 여관은 조심조심히 옥체에 이불을 걸어 올렸다.

왕은 몸소 손을 꺼내어 이불이 바로 덮이지 않은 곳을 고치고 하였다. 여관이 그것을 보고 자기가 바로 펴 덮어 드린다.

그때 수양은 걸핏 보았다. 이불을 고칠 때에 왕과 여관이 손이 한 데서 움직이고, 그 한순간 왕의 손이 아닌 체하고 여관의 손을 잠깐 덮었다가 놓았다. 여관은 얼굴이 주홍빛으로 변하며 얼른 이불을 덮어 올리고 절하고 물러 나갔다.

그 밤 수양은 집으로 돌아와서 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연침이 좀 쓸쓸합니다.』

하였다.

부인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 눈으로 무슨 말인가고 물었다. 수양이 설명하였다.

『상감도 내일 모래면 벌써 열넷이 되시는구료.』

『그렇지요.』

그래도 뜻을 모른다. 수양은 잠시 생각한 뒤에 또 말하였다.

『내가 열네 살에 창가(娼家) 출입을 했거든─』

『듣기 싫어요. 무슨 큰 자랑이라구─』

수양은 고소하고 잠간 있다가 또 말을 꺼내었다.

『남아 열다섯 대장부 열넷에 시지색(始知色)이라, 열셋에 시규색(始窺色)이라, 열둘에 뭐일까……』

하고 일단 말을 끊었다가 또 잇는다.

『상감 보령 열셋, 명년 열넷─』

수양 부인은 말뜻의 윤곽만은 짐작이 간 모양이었다.

『그래 어떤 일이 계셔요?』

『곤전 책봉을 계청해야겠어.』

『나으리도, 아직 양암(諒闇) 중이 아니셔요?』

『단상을 하지.』

『단상까지 하셔서 해야 하겠어요?』

『아니, 그저 그렇단 말이외다.』

뒤끝을 흐렸다.

이튿날 입궐하기 전에 수양은 부인께 조용히 단 한 마디.

『덕과 재와 인물이 겸전한 규수를 어디 하나 마음 꼽아 보시오.』

부탁하였다. 이만한 부탁이면 부인은 넉넉히 알아챌 것이었다.

어느 재상과도 의논을 해야 할 것이었다. 조카님이 어리다 하여 생각도 안 하였더니, 여관의 손을 잠깐 잡아보는 것을 보니 〈성(性)〉에 눈뜬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니 그럴 듯한 것으로, 자기는 열네 살에 창가(娼家)를 찾아다닌 일까지 있은 것이었다.

왕의 고적한 환경을 위함에 지금껏 자기는 왕을 그냥 소년으로 알고 놀이 동무를 구해 드리는 데만 노력하였다. 마땅히 생물이 가질 바 〈짝〉이라는 것을 생각도 안 하였던 것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 한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 한들, 배우자 이상의 친구가 어디 있으랴, 넓은 대궐을 혼자서 지키시는 것이 애연하고 민망하여, 위안 방도를 늘 강구하였지만, 가장 당연하고 가장 효과 있는 방법을 지금껏 제외하고 있었다.

왜?

첫째로는 아직 너무 어리시다고 (자기 자신의 과거도 안 생각하고) 알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아직 양암 중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결코 어리시지는 않았다. 어리시지만 않으면 양암이 무슨 문제랴. 그런 문제에 구속되어 인간 본능을 어찌 무시하랴?

고적하신 조카님, 그 심경을 위로키 위해서 왜 돌림길을 생각했으며, 고식책을 생각했느냐?

대궐 안에서 놀 고귀한 한 쌍의 원앙─ 생각만 하여도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고려조부터 전해 내려온 왕비 간택의 규습─ 삼간택은 조카님께서는 쓸 수가 없다. 대비(大妃)나 모후(母后) 없으매, 수양의 부인이 이를 대신하여야 할 것이며, 임금 당신과 아랫사람밖에 없는 대궐이니 대궐에 불러들여서 간택할 수속도 쓸 수 없어, 수양은 부인께 간단히 부탁하여 두었다.

그러나 재상과 유생들이 반드시 반대를 할 것이었다. 양암 중에 왕비 책립이 첫째로 문제요, 만약 단상을 한다 하면 그것 또한 반대할 것이었다. 삼고의 예의를 가장 큰 신조로 하는 그들이 어찌 인정과 인간 본능을 이해하리요.

수양은 좌우간 이 일을 어느 재상과 의논을 해보아야 할 터인데, 누구와 할까 하였다.

당연한 순서로는 좌상 정인지와 의논해야 할 것이지만, 정인지는 〈유자(儒者)〉 행세를 하느니만치 곧 반대할 것이었다. 측면으로 달래 보면여니와 정면으로 의논해서 반대를 받으면 도리어 말썽이 커지고, 커지면 실행이 힘들게 된다. 정인지는 우선 뽑고, 다 방침이 결정된 뒤에 고압적으로 내리 씌우기로 작정하였다.

수양은 입궐하여 용안을 여러 번 엿보았다. 엿볼 때마다 이 고귀한 조카님께 배합될 행복된 처녀가 누구일까? 천하 아무 데를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훌륭한 배우자를 구해 드리자.

반대? 억누를 뿐이다. 정당한 일에 대하여 오르는 반대는 억누를 뿐이로다.

신숙주를 저녁에 조용히 불렀다. 왕비 책립에 관해서 재상 중에 의논하려면 신숙주밖에는 없었다. 쓸데없는 이론이나 작은 절에 구애되지 않고, 대체와 대의를 옳은 눈으로 보고 옳은 비판과 단안을 내릴 사람으로는 신숙주로, 뜸을 삼을 수밖에는 없었다.

종일품(從一品) 좌찬성 숙주는 수양의 분부로 저녁에 금관조복으로 수양댁으로 왔다.

수양은 조카님의 심경과 대궐의 공허를 대략 말한 뒤에 왕비 책립에 대하여 숙주의 의견을 물었다. 그랬더니 숙주는 곧 대답하였다.

『시생도 그런 의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찬성도?』

『네, 양암 중의 전하시니 그런 말씀을 나으리께도 여쭐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습니다마는 위로는 전하를 위해서─ 다음에는 나으리를 위해서 곤전 영립을 해야겠습니다.』

『나를 위해서?』

『네, 나으리께서도 나으리의 일에는 못 살피시는 데가 계십니다.』

『나는 왜 끼오?』

『나으리 못 살피셔요? 여당 잔당들의 퍼치는 소문이겠지만, 나으리께 황송한 소문이 간간 들립니다. 차차 커갈 겁니다.』

『응? 무슨 소문이오?』

무엇이 가슴에 짚이는 듯하였다.

『나으리, 그만치 아뢰었으면 나으리께서도 짐작을 하실 일이 아니오니까?』

무론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갔다. 잔당 여당들이 수양에게 못된 소문을 퍼친다 하면 무슨 소문인지 짐작이 간다.

─ 수양이 어린 왕을 속여서 중신(重臣)들을 모두 없이하였다. 먼저 중신들을 없이했으면 그 다음은 무엇을 겨눌까?

이것일 것이다.

자기네를 변명하기 위해서는 혹은 원수(수양)를 갚기 위해서든, 당연히 그들이 퍼칠 소문은 이것이 아닌가?

어찌 이 점을 왜 아직 생각지 못했던가? 첫째로는 뒤처리가 바쁘기 때문에, 둘째로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에, 셋째로는 동생 안평에게 내린 처분이 가슴에 걸리어 거기 관련되는 문제는 일체 생각조차 회피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러나 숙주에게 깨우치고 보니까, 너무도 당연한 일을 자기는 어리석게도 꿈도 안 꾸고 있었다.

『찬성, 그 소문이 꽤 높소?』

『아직 높지는 못한 모양입지만 나날이 높아가는 형세인 듯하옵니다.』

『흐─ㅁ!』

『그래서 시생은 생각하고 했습니다. 이런 소문을 박멸할 방책은 아주 쉽습지만, 아뢰기 힘든 말씀이와 잠자코 있었습니다.』

『…………』

『전하께오서 곤전을 영립하오시면─ 그러옵고 원자(元子) 탄생되오면 그런 악풍문은 저절로 박멸되올 것─』

숙주 기특하다 부르짖고 싶었다. 만약 정인지 같은 사람이 이런 일에 봉착했다 하면, 그 대책으로는 〈그런 악풍문을 내는 자들을 엄벌하여 풍문의 뿌리를 자릅시다, 그런 풍문을 못 내게 합시다.〉 과즉 이런 대책을 꾸며낼 것이었다.

이런 일에 봉착해서 직접으로 그런 풍문에 탄압을 가하지 않고, 도리어 간접으로 〈왕비를 맞아 왕자가 탄생되면 저절로 그런 풍문은 없어지리다〉 하는 대책을 강구한 숙주의 지혜와 정치 수단에 감탄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양암(諒闇) 중이오라, 감히 그런 생각도 내서는 안 되겠사옵고 그래서 나으리께 여쭙고 싶기는 간절하면서도 못하왔습니다.』

『그게야 권(權)으로 하면 될 일─』

『시생은 그런 지혜까지는 못 냈습니다.』

못 내기야 했으랴. 말하기가 어려운 일이라 못했을 것이었다.

『시생 근심되는 바는, 전하께옵서 청납하는 점이올시다.』

『글쎄!』

『전하의 효성 지극하오시매 탈상 전에 감히……』

수양은 내심 미소하였다. 벌써 성에 눈뜨신 조카님, 체면이 있고 남의 이목이 있으니 표면 거절하실 것이나, 퍽 흥미를 가지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전하도 전하시려니와 정부와 집현전에서 가만 있을까? 어떻소?』

『곧 찬의를 표하지 않으리다. 양암 중에 계시니─』

『그럼 범옹이는 어떻소?』

『시생이야 나으리께 일부러 진언까지 하지 않습니까?』

수양은 머리를 수그렸다. 잠시 생각하였다.

『되겠지. 어떻게든 되도록 해 봅시다그려. 이게 범옹이 말씀한 바와 같이 내게로 날아오는 불씨, 즉 내게 대한 폄만 피하려고 하는 수단일 것 같으면 나도 스스로 양심에 걸려서 힘있게 계청을 할 염치도─ 할 맥도 없지만, 우리 전하를 위로 드리려, 우리 전하를 애모하는 지성에서 나온 일인 바에야 나도 내 있는 힘 다해서 계청할 수 있으니까, 내가 힘써 계청하면 전하께서도 청납하실 것 같소이다.』

『글쎄옵니다.』

숙주가 미안 미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젯밤 처음 보고 오늘밤 눈여겨 보아서, 왕이 여인에게 분명히 호기심을 가졌다는 점을 간파한 자기이기에, 지금 왕께 계청하면 청납될 줄을 믿는 바이지, 자기로서도 어제 이전에는 아직 왕을 그 방면에다 아무 호기심도 안 가진 순진한 소년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냥 미안미안해 하는 숙주를 수양은 역시 미소로써 바라보았다.

『염려 마시오. 전하께는 내 어떻게 해서든 윤허를 얻을 테니, 신서장(申書狀: 이전 수양이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숙주를 서장관으로 데리고 갔었으므로, 그 뒤도 수양이 숙주에게 마음 흡족할 때는 신서장이라고 부르고 하였다)은 못 얻지만 나는 윤허를 얻을 수 있으니 그 일은 염려 마시오.』

『나으리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데야 더 무에라 하리까? 그렇지만 나으리, 그러면 이 일을 혜빈(양씨)께 의논해서 혜빈으로 윤허를 얻게 하시면 어떠리까?』

『여보게 숙주!』

뜻하지 않고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종일품 좌찬성의 대접으로는 국왕도 상당한 존칭을 하는 것이지만, 숙주의 너무도 슬기로움에 수양은 입에 익은 말로 부른 것이었다. 수양도 아닌 게 아니라 이 일을 혜빈에게 부탁하려 하였던 것이었다. 왕께 어머님을 대신하여 젖을 올린 양씨야말로 이런 임무에 가장 적당한 사람이었다.

『옳은 말일세.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네. 간택에 관해서는 내가 부대부인(수양 부인)에게 당부했지만, 성심을 움직이게 하는 데는 내야 좀 감당키 어려워, 혜빈께 부탁허지. 하여간 내 범옹이는 깊이 믿는 바니 의논했지만, 다른 재상들에게는 발설했다가는 도리어 일이 안 될 것 같아. 그래서 아직 감추어 두는 바니, 범옹이도 그렇게 알고 아직은 누설치 말아 주오.』

『분부 안 계신들……』

알아차리오리다 하는 숙주의 얼굴에 수양은 만폭의 신임의 눈을 부었다.


이리하여 첫째로는 왕의 고적한 주위를 위로하고, 둘째로는 왕비 영립─ 원자 탄생으로서 사직을 튼튼히 고정시키고, 셋째로는 이리 하여서 사직을 엿보려는 자도 없이할 겸, 또 겸하여 수양 자기의 위에 덮인 의혹이며 혹은 풍문을 일소하기 위하여 수양은 왕비 책립을 굳게 마음먹었다.

수양 부인이 입궐하여 조카님께도 절하고 혜빈과 하루를 보내면서 밀의한 바가 있었다.

그 뒤 수양 부인과 혜빈 사이에는, 혹은 하인의 왕래, 혹은 서간의 왕래로 의논이 무르익었다.


라이선스

[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주의
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