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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양/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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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고요히 흘렀다. 오 년, 십 년─

장난꾸러기 소년 왕자 진평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하였다. 이름도 진평대군이던 것을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쳤다.

그것은 동궁과 수양, 안평 등의 아버님인 왕(세종대왕)의 즉위 삼십 년 축연이 굉장히 경회루에서 열린 날 저녁이었다.

그날 낮에 경회루에서 세자와 그의 동생 수양과의 사이에 조그만 충돌이 있었다. 그것은 문제도 그다지 문제라고 될 것이 아니요 충돌이라고 일컬을 만한 충돌도 아니었다.

왕이 사랑하는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개가 연석에 뛰쳐 들었다. 그것을 세자가 환관에게 명하여 내어쫓으려 하였다. 그 때에 수양(진평)이 곁에 있다가 상감이 사랑하는 짐승이니 그냥 두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고 말렸다.

수양은 특별히 깊은 뜻이 없이 한 말임을 왕은 잘 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 동궁이 문득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짐승이 외람되어 어전을 더럽히었으니 당장에 내다가 베라고 엄명하였다.

이런 경우에 싱글싱글 웃기 잘하는 수양도 이번에는 웃지를 못하고 눈이 둥그렇게 되어 성난 세자를 우러러보았다.

동궁의 노염이 뜻밖에도 너무 컸으므로 수양도 어쩔 바를 모른 것이었다. 만약 수양에게서 무슨 말이 한 마디 더 나오면 세자는 수양에게 호령이 내릴 형편이었다.

왕은 이 형세를 보았다. 이즈음 동궁이 매우 수양을 미워하고 꺼리고 그 감정이 나날이 더해 가는 것을 늘 보아 왔다. 몸이 약하고 마음이 약하니만큼 동궁의 마음에는 나날이 수양을 투기하는 감정이 가속도로 높아 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심경을 아는지라 왕은 동궁의 편을 도와서 그 짐승을 내다 베게 하여서 동궁의 뜻을 세우고 수양의 뜻을 꺾었다.

그러나 왕의 마음은 매우 불안하고 어지러웠다.

밤에 왕은 강녕전(康寧殿)에 들어서 세자를 조용히 불렀다.

『동궁. 아까 낮에 경회루의 일을 기억하는가?』

동궁이 북면(北面)하여 자리를 잡은 뒤에 왕은 곧 이렇게 물었다.

동궁의 안색은 문득 벌겋게 되었다가 금시 도로 창백하게 되었다.

『네……』

모기 소리와 같은 대답.

『동궁의 뜻을 세워 주기 위해서 짐승을 내다 베게는 했지만, 짐승이 사랑하는 주인을 그려서 찾아오는 것이 그다지 큰 죌까. 내가 늘 쓸어주고 붙안아 주고 침전에까지 드나드는 짐승인 줄은 동궁도 잘 알겠지?』

왕은 눈을 감았다. 약하기 때문에 차차 마음이 외틀어져 가는 세자를 앞에 두고 어떡허든 형제의 의를 상하지 않게 하여 보려고 왕은 눈을 감고 잠시를 생각한 뒤에, 그냥 눈을 감은 채,

『누구 오너라.』

고 고함쳤다.

지밀상궁(至密尙宮) 한 사람이 달려 왔다.

『음. 나가서 수양대군이 아직 퇴궐하지 않었거든 내가 이리로 부른다고……』

그러고 왕은 조금 자리를 비켰다.

『동궁. 이리로 와서 앉아.』

당신이 비켜서 곁에 낸 자리를 동궁에게 지시하였다. 거기 앉으면 남면(南面)하여 앉는 것이 된다. 동궁은 황공하여 머리만 더 푹 숙였다.

『자. 어서.』

『신이 어찌─』

『아니. 동궁은 장래의 나랏님이니……』

그래도 주저하는 동궁을 왕은 억지로 남면하여 앉게 하였다.

수양이 이른 때는 왕은 용안 전면에 수심이 가득하여 있고, 동궁은 그 곁에 거북한 듯이 남면하여 앉아 있는 때였다. 수양은 들어서면서 먼저 눈이 동그렇게 되었다. 그러고는 부자분의 맞은편 쪽에 북면하여 단정히 꿇어앉았다.

『불러 곕시오니까?』

『오냐. 불렀다.』

왕은 잠시 생각한 뒤에 말을 계속하였다─

『너 아까 경회루의 일이 생각나느냐?』

『네이.』

수양은 곧 대답하였다.

『어느 편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왕은 손을 들어 세자를 가리켰다─

『이분은 네게 누구 되시는 분이냐?』

『형님이올시다.』

왕은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국왕 전하오며 계분으로는 아버님이올시다.』

여기서 수양은 비로소 깨달은 모양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형님은 또한 공(公)으로는 동궁전하오며 장래 임금이올시다.』

왕의 약간 찌푸렸던 듯하던 눈살은 도로 펴졌다.

『그렇지. 너는 북면(北面)하고 칭신(稱臣)해야 할 신분인 줄 알지.』

『네……』

『그러면 너 왜 아까 네가 잘한 줄 알면 동궁께 그대로 여쭙지 않았느냐? 신자의 도리로서 군왕의 실수를 알고도 모른 체하면 될까?』

『동궁마마의 분부시기에 가만있었습니다. 전하의 분부시면 가만있지 않었겠습니다.』

『내가 말할 때는 왜 가만있었느냐?』

『그것은……』

수양은 말을 끊었다. 하기 어려운 듯이 머뭇거렸다.

『그것은 그래 어떻단 말이냐?』

왕이 채근하였다.

『네─동궁마마의 기를 펴 주시려는 어버이의 뜻이신 줄 짐작이 갔기에 가만있었습니다.』

왕은 미소하였다.

『그 말을 너한테서 듣고자 일부러 불렀다. 좀 가까이 오너라.』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온 수양의 손을 당신의 왼손으로 잡고 동궁의 손을 당신의 오른손으로 잡아서 두 손을 마주 갖다 대었다.

『자. 너희들한테 당부할 것은 끝끝내 군신의 의와 형제의 정을 저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는 군신간의 자리라기보다 부자간의 자리로서 서로 흠 없이 이야기하자. 자, 너희들은 장래 끝까지 서로 돕고 서로 의를 지키고 정을 상치 않게 지내겠다고 맹세를 해라.』

『네이. 맹세하오리다.』

그것은 수양의 대답뿐이었다. 동궁은 얼굴이 발갛게 되며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동궁은?』

『신도 그러하오리다.』

부왕의 채근을 받고야 나온 동궁의 대답은 마치 여인의 목소리와 같이 가늘고 작은 음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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