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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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종로를 지나는 한 행차─ 하인배를 앞뒤로 거느린 권남의 행차였다. 섭정 수양대군의 총애를 받고, 따라서 왕의 총애도 두터운 위에, 그의 벼슬이 이조(吏曹)의 아경(亞卿)으로 있느니만치 서슬이 꽤 푸르렀다.
계유년 시월 정난의 직후에는 전조(銓曹: 이조)에 판서로는 수양이 몸소 들어앉았다. 그랬다가 시국이 좀 안돈이 되자, 정창손(鄭昌孫)으로서 이판의 자리를 맡게 하고 수양은 물러섰다. 지금 정창손의 아래서 권남은 차관(次官)의 임무를 보는 것이었다.
권남도 정인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같다 한댔자 정인지같이 영상의 자리를 바라보기에는 권남은 아직 위가 너무 얕았다. 낮은 관원 자리는 한 벼슬에도 여러 자리씩이 있으므로 승차하기도 쉬우나 정이품 위로 올라가자면 그렇지 못하였다. 육조의 판서가 한 조에 한 명씩 합계가 여섯 명, 유수(留守) 세 명, 이렇게 정이품은 다 합하여 아홉 자리, 그 밖에는 차관으로 좌우참찬과 금부지사가 있을 뿐이다. 거기서 올라가자면 종일품으로 금부판사 한 자리와 의정부 좌우찬성 각 한 자리씩 합계가 단 세 자리다.
거기서 더 올라가자면 우의정 단 한 자리, 또 더 올라가면 좌의정 한 자리, 또 더 올라가면 영의정 한 자리, 그 뒤에는 중추부(中樞府)의 한직(閑職)이다.
요컨대 참찬이나 판서(判書)는 권남의 눈앞에 있는 자리니 그다지 요원하달 것도 없지만, 거기서부터는 단 두 자리 있는 찬성(替成)인데, 자리는 단둘이나 바라보는 사람은 시임과 전임(時前任)의 수두룩한 정이품들이다. 더 수두룩한 경쟁을 뚫고 찬성의 자리에 올라서야 이제는 틀림없는 정승의 자리에 들게 되는데 그것이 참 요원하였다.
사람이란 도대체 운수가 틔어야 무슨 일이든 되는 것이다. 권남 자기로 볼지라도 서른다섯 살까지를 과거에는 연해 낙제만 하고, 늙은 서생으로 지내지 않았는가? 그렇거늘 단 두 자리 있는 〈찬성〉이라는 열매야 어찌 쉽게 따질 것인가? 우선 현임 찬성이 의정으로 오르든가 벼슬을 사퇴하든가 해서 그 자리가 비어야 대임자의 필요가 생길 것이고, 대임자의 필요가 생겨야 수두룩한 시전임(時前任)의 정이품관 가운데서 한 명이 뽑혀 올라갈 터이니 까까마아득한 노릇이다. 게다가 자기는 아직 정이품조차 못되고 종이품이라는 자리이니 종이품에서 정이품이라는 것은 이 또한 단 한 계단에 지나지 못하지만 어려운 몫이다. 종이품관이라는 것은 굉장히 수효가 많다. 그 많은 가운데서 뽑혀서 정이품까지 올라가기가 여간한 것이 아니다. 종이품으로 그치는 사람이 많다. 현재 자기는 수양을 통하여 왕의 신임을 사고 있으니 이 점만은 다른 사람보다 마음이 든든하였지만, 거기서부터 위는 자리의 수효가 너무 국한되고, 뒤를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 몫〉이라고 예단할 수가 없었다.
그런지라, 정승의 자리를 바라보기는 좀 지나친 욕심이었다.
정인지는 좌의정에서 영의정으로─ 거기는 경쟁자도 없고 딴 길도 없이 다만 현임 영의정이 없어지기만 하면 자연의 세로 정인지가 그리로 오르게 될 것이지만, 권남이 의정의 자리를 바라보기는 너무도 멀었다.
다만 정인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하는 것은 권남도 정인지와 마찬가지로 수양이 궁극 위에까지 오를 것이라고 믿고 있는 점이었다.
수양의 궁극의 위에까지 오른다 할지라도, 권남이 일약하여 정승으로 오를 것은 스스로도 바라지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히 수양이 정치적 수완을 믿어서, 수양이 오르면 이 나라이 훌륭해지겠다는 애국적 사상으로 인해서도 아니었다. 또한 수양께 대해서 개인적으로 특별한 호감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수양이 휘하에 사람들을 모을 때에 맨 처음 수양의 휘하에 든 것이 권남이었다. 아니, 적절히 말하자면 수양께 휘하인을 모으라고 협의한 것이 권남이었다.
그때에 권남은 벌써 〈수양이 장차 가만있지 않을 사람〉이라 보았다.
그랬으므로 수양의 일거일동을 모두 권남 자기의 선입관으로 보고 해석하였다.
그랬더니만치 이번 왕비 영립을 가장 의외로 생각하고 가장 놀란 사람 가운데 권남도 있었다.
왕비가 영립된 지 석 달, 넉 달─ 두고 관찰해야 수양의 태도에서는 추호만치도 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날도 대궐에서 권남은 왕과 수양 숙질분이 의좋게─ 남 보기에 부러울 만치 다정히 왕도를 강론하던 모양을 보고 지금 퇴궐하는 길이었다.
며칠 만에 한명회나 만나서 이야기라도 하고 싶어서 이조의 하인을 군자감으로 보내 보았더니, 벌써 명회는 집으로 돌아갔다 하므로 지금 명회의 집으로 행차를 분부한 것이었다. 계유 시월에 군기시 녹사에 붙어서 초배에 초배를 거듭하여 겨우 다섯 달에 (한명회의 놀라운 기략을 활동하여) 종삼품관에 오르고, 많은 노비(奴婢)와 전장의 하사를 받아 빈손으로 서울로 뛰쳐 올라온 명회가 지금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많은 노비 전장을 갖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피차일반이지만, 땟국 흐르는 도포와 깨어진 것을 튀켜 쓰고 수양 댁을 찾아다니던 것이 겨우 반 년 전, 지금 누리는 부귀를 생각하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노창 벽제의 소리 우렁차게 저편에서 나오는 한 행차가 있었다. 그 의주로 보아서 왕자나 정승의 행차가 분명하였다. 권의 행차는 재빨리 옆길로 피하였다.
그 행차는 피하고 기다리는 권남의 행차가 있는 곳까지 이르러서 멈추었다. 보매 좌의정 정인지의 행차였다.
권남은 얼른 초헌에서 내렸다. 그리고 정승께 등지고 돌아섰다. 그랬더니 정승은 하인을 보내서 권남을 부르는 것이었다.
정승께 가까이 나아가려 하매, 정승은 자기의 행차를 가자고 분부하고, 권남에게는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권남은 자기의 행차를 뒤따르라 분부하고 자기는 걸어서 정승의 행차를 따라갔다.
수양 댁에서 돌아가는 정승이었다.
정승(인지)의 집까지 이르러, 정승은 사랑에 좌정하고 권남은 영외에 읍하고 섰다. 인지는 읍하고 서 있는 권남을 사랑 앞으로 불러들여서 무릎 마주하고 대좌하였다.
수양의 마음보라 하는 것은 인신된 자의 입 밖에 내어 의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정난 공신이라 하여, 계우 시월의 사변으로 공신 호를 받은 사람끼리도 마음대로 의논할 수 없는 일─ 인지가 수양조차 노골적으로 못 물어본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 정인지와 권남 두 사람끼리는 늘 마음을 터놓고 병인 밀의하고 하였다. 권남이 한명회에게조차 터놓고 의논치 못한 일, 또 인지가 우의정 한확이나 신숙주에게도 터놓고 의논하지 못한 일을 인지와 권남은 터놓고 의논하고 하였다. 누구 딴 사람의 귀에 들어가기만 하면 단박에 고변해서 부귀를 얻을 수 있을 만큼 끔찍끔찍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던 사이였다.
『수양대군 댁에서 귀가하는 길일세.』
인지는 이 말부터 꺼내었다.
예에 의지하여 사람들을 물리쳤다. 그러고도 더 경계하는 뜻으로, 웬만한 긴요한 이야기는 필담(筆談)으로 하였다. 필담을 한 뒤에는 그 초지는 불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그날 아직 해가 꽤 높을 때에 인지 댁에 온 권남은 밤도 꽤 깊어서야 의논을 끝냈다. 밀담과 필담으로 주고받은 뒤에, 마지막에 권이 인지에게 대하여 보통 음성으로 회복하여 가지고,
『그래서 소인은 한 번 대감을 찾아 뵈올까 하던 길에 마침 아까 노상에서 대감께 뵙게가 되었습니다.』
하는 것으로 밀담은 끝이 났다.
저녁을 여기서 얻어먹고 밀담 끝난 뒤에는 약주도 몇 잔씩 나눈 뒤에 밤중에야 권남은 인지의 집을 나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정승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최고 기밀에 속하는 일과 상품관 정도로서야 알 수 있는 정부 중견 계급의 사상 동태 등에 관한 정보를 정인지는 권남을 통하여 그리고 권남은 정인지를 통하여 서로 교환하고 거기 대한 대책을 협의하고 하던 것이었다.
이것은 수양에게도 비밀이요, 한명회에게도 비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