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55
55
[편집]왕과 정인지, 권남의 사이에만 의논이 거듭되고 한확(우의정)이 잠깐 참여한 이외에는 일체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 문제(왕의 선위)는 그것이 수양께까지 넘어가자 수양과 정인지의 언쟁으로 온 조정에 소문이 퍼졌다.
조카님에게서 놀라운 분부를 받고 아득하여 정부로 나온 수양은 거기서 정인지를 힐난하였다.
정인지는 끝끝내 침묵으로 응하였다. 한참 힐난하다가 수양은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사랑에 자리하고 누웠다.
아아, 모든 계획이 깨어졌구나! 무슨 낯을 들고 사람을 대하랴? 세상에 그런 소문이라도 없었으면여니와, 그렇지 않아도 고약한 풍설이 돌던 데다가 왕에게서 그런 분부까지 났으니 이제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수양이 왕이 되려고 계유년 사변이라는 것을 빚어내어, 문종 고명의 신하들뿐 아니라 같은 부모를 모신 친동생까지 죽이고, 또 그 뒤 두 형제를 귀양보내고 종내 찬탈까지 하였다.
이렇게 잡힐지라도 무엇이라 변명하랴.
이제 자기가 자기의 결백을 변명하려면 단 한 가지의 길─ 들에 길게 누워서 아무 일에든 간섭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아, 근신하는 한 길밖에는 없다. 장구한 세월을 이렇게 지내노라면 세상의 오해도 자연 벗어지고 청백도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이 나라는 어찌하는가? 세종 말엽의 환후의 몇 해, 문종 재위의 전 기간, 금상 등극 초의 한동안 정치를 돌보는 이가 없기 때문에 피폐한 국가를 바로잡는 것도 큰일이려니와 마음에 늘 그려 두던 원대한 희망까지도 모두 버려야 하는가 자기의 희망 하나는 버리거나 말거나 자기 개인의 사소한 문제지만, 자기가 희망을 버리자면 이 땅은 어디로 굴러갈 것인가? 고려 말엽과 같은 어수선한 암흑천지로 화해 버려서, 마지막에는 사직이 전복까지 되지 않을까? 기막히고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이 길도 취할 수 없고 저 길도 취할 수 없는 양난의 처지였다.
하인이 들어와서 신숙주와 박팽년이 뵈러 왔다는 것을 보하였다. 수양은 만날까 말까 잠시 주저한 뒤에, 만나기로 마음을 작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을 영내까지 불러들였다. 자리도 잡기 전에 오늘 일에 대하여 말을 꺼냈다.
『네…… 무론 듣자왔습니다. 그 일로 인수(팽년)와 함께 뵈러 왔습니다.』
『난 치사하려네.』
『혹 그러실까 보아 그런 일 없도록 진언하러 일부러 범옹이(신숙주)를 의정부로 찾아서 작반해 왔습니다.』
박팽년의 말이었다.
『그러니 여보게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주상을 뵈며 또 세인을 대하겠나?』
『좀 어려우실 줄 시생들도 압니다. 그래도 지금 나으리 은퇴하시면, 그 뒤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사를 생각하셔서 나으리 어려우신 것 좀 참아 주셔야지……』
팽년의 이 말에 숙주가 뒤를 받았다.
『나으리, 귀택하신 뒤에 시생이 좌상(정인지)께 그사이 경유를 여쭈어 봤는데, 좌상 말씀은 전하께서 먼저 하실 뜻을 권이참(權吏參)께 분부가 계셔서, 그래서 중대한 일이라 발설치도 못하고 은밀히 좌상과 이참이 내밀히 의논하고 의논해서 나리께서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되어 계상한 게라 합디다. 좌상이 주상 전하께 계상한지는 벌써 여러 날이 된다는데 전하께서는 그사이 생각하시고 또 생각하며 오늘에야 분부가 계신 듯합니다. 그러니까 시생네들의 생각으로는 전하 돌연히 생각하신 바가 아니고, 여러 날을 생각하신 나머지에 결정하신 게니까 수명하시는 게 옳지 않을까 합니다.』
『세상의 구설 비난을 어떻게 하는가?』
『나으리 그건 받으셔요. 드리기 죄송스러운 말씀이나, 나라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욕 좀 잡수셔요. 이걸 조르러 일부러 왔습니다. 또 별로이 욕 구설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전하께서 진정으로 선위하실 생각으로 그런 분부를 하신 게 아니면, 나으리 그냥 영의정으로 국정을 보아 주셔요. 거기 무슨 구설이 있으리까?』
그것은 그렇기도 하였다.
『또 만약 진정으로 선위하시려면 나으리 수선하시고 전하를 상왕으로 우러르고, 나으리 신례(臣禮)로 상왕을 하시면 거기 또 무슨 구설이 있으리까? 나리께서 주상 전하께 취하시는 태도 여하로 구설의 유무가 결정될 바이옵니다.』
수양은 두 사람에게 명일부터 여전히 정부에 나아가 시무하기를 약속하고 돌려보냈다. 돌려보내고는 혼자 생각하였다.
집현전 학사 중에도 빼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의 의견은 정당하였다. 자기가 벼슬을 버리고 집에 누우면 자기 위에 씌워졌던 악명은 벗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 조카님과 이 방토를 어찌하랴?
조카님은 아직 국정이라는 것에 대하여 무관심한 분이다.
재상이라 하는 것은 제아무리 재간이 비범하다 할지라도, 좋은 웃사람의 아래서야 그 본질을 발휘하지, 그렇지 못하면 재질을 헛되이 썩혀 버린다. 세종조에 세종을 협조하여 찬란한 문화를 빚어내었던 이 재사들이 세종 말엽과 문종 재위의 전 기간을 무사히 보낸 것으로 보아도 넉넉히 알 것이다.
조카님으로 하여금 피폐한 국가의 암약한 임금으로 날을 보내다가, 더욱이 실수하여 사직까지 넘어뜨려 놓으면, 이것은 조카님께만 불충할 뿐 아니라, 조종께 불충이요, 국가에 불충이다.
조카님이 꼭 선위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꼭 선위하겠다면 달갑게 받자. 국가에 대해서는 받자. 국가에 내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을 부어 기르고, 일방으로는 조카님을 상왕으로 모시고 영화롭고 안온한 일생을 보내게 해드리자. 왕으로서 누릴 권세와 영화를 다 드리고, 왕으로서 받을 번거로움과 책무를 깨끗이 제해 드리고─ 또 관제를 고쳐서 상왕의 적장(嫡長)은 세습적으로 그 영화와 존귀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하면 상왕께들 무슨 부족이 있으며, 조종껜들 무슨 부끄럼이 있으랴?
만약 진정으로 물려 주시기만 하겠다면 달갑게 받으리라. 간간 들어오는 번거로움에도 그렇게 못 견디어하시는 조카님 마음에 아무 티도 없이 진정으로 물려 주시려면, 조카님으로 하여금 〈물려 주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시도록 심신 아울러 평안하고 영화로운 일생을 보내시도록 해드리자. 그리고 겸하여 자기는 〈옷을 격하여 가려운 데를 긁는 듯〉한 느낌이 있던 국정을 마음대로 자유로이 주물러서, 이후 지하에 조종의 영께 뵈올 때 잘했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해보자.
이렇게 생각하매, 수양의 마음에는 다시 만만한 야심이 일어났다. 자기의 손으로 자유로이 조종할 수가 있는 이 방토─여기 꽃을 피우자, 훌륭한 열매를 맺게 하자!
그러는 일방으로는 자기는 현재 단지 수양대군일 뿐이라는 자기의 지위가 생각났다. 국왕은 역시 조카님이요, 자기는 왕의 사사로운 숙부요 영의정일 뿐이다. 조카님이 그저 그런 말씀을 하신 뿐이지, 선위가 결정된 바도 아니었다.
수양은 은근히 자기가 국왕이나 된 듯한 공상을 하던 자기에게 도리어 놀랐다. 스스로 혀를 찼다.
이튿날 수양이 바야흐로 예궐하려고 할 때에 정인지의 청지기가 달려와서 정승이 잠깐 오겠다는 것을 아뢰고 뒤이어 곧 인지가 찾아왔다.
『어제 나으리 과히 노하시기에 아무 말씀도 안 드렸지만, 퇴위하시는 것이 주상 전하의 진심이신데 왜 주저하십니까?』
이런 말을 하였다.
『또 나으리 이보셔요. 그 분부가 단지 습관되셔서 저절로 나오신 말씀이라 해도 나으리 수선을 하시는 일이 어느 편으로 보아도 복이 아니오니까? 생에게야 어느 분을 섬기면 임금이 아니오리까? 나으리 영구히 수상으로 안 계실 테니, 나으리 떠나시면 생이 수상이 될 것, 나으리의 밑에서보다 주상 전하의 밑에서─ 좀 황송한 말씀이지만 생께는 평안하오리다. 그걸 굳이 나으리께 조르는 건 무슨 까닭이오니까? 연전에 안평대군께서도 생을 부르셨는데, 거기는 안 가고 나리께로 온 건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나으리께 오늘날이 있을 줄 알고, 사내 세상에 났다가 한 번 훌륭한 국가의 재상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선위 하시렬 때에 받으셔요. 나으리, 장차 수선하신 뒤에 전왕께 대한 대접 하나만 부족 없으시면, 전왕 이하 관민이 모두 기꺼워할 경사 아니오니까? 받으셔요.』
요컨대 신숙주, 박팽년의 말과 비슷한 말이었다.
『경우 보아 좋도록 처리하리다.』
이만치 말하여 먼저 돌려보내고 자기도 뒤따라 예궐하였다.
그 전에도 왕은 비교적 내전에만 있었지 외전에 잘 나지 않았는데, 그날은 한 번도 외전에 안 났다. 무슨 부부가 있으려면 내관을 대신 시켰다. 수양이 보자는데도 몸이 불편하다 하여 물리쳤다. 다른 재상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 유월도 지나고 윤유월, 윤유월도 닷새가 지나고 엿새가 지났다.
그동안에 수양은 단 네 번을 잠깐씩 뵈었다. 용안은 몹시 침울하였다. 사무적인 말 몇 마디로 다시 입어하려는 것을 수양이 한 번은 가로막았다.
『전하, 근자 왜 그렇게 우러르옵기 힘드오니까? 신께 무슨 죄라도……』
『아니, 내 뭐 좀 생각하는 일이 있어요. 숙부님 결코 근심 마셔요』 . 노엽거나 불쾌한 음성이 아니었다.
『그 사이 좌상은 몇 번이나 보셨습니까?』
『좌상도 한 너덧 번, 한데……?』
『전하, 좀 참람된 말씀이오나 한동안 좌상을 만나지 마시오. 이 복염에 전하 어디 청량한 곳에 한동안 피접이라도 가오시면……』
『내게 관해서는 아무 염려 마셔요. 이 더운데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정무나 잘 보아 주세요.』
하고는 왕은 그냥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양은 무슨 유언이나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망연히 왕의 뒷모양을 절하였다.
수양은 정인지에게 대해서도 정무에 관한 일 이외는 말하기가 이상하여 아무 말도 않았다. 그 사이 정인지가 사, 오차나 왕께 뵈었다 하며, 정무에 관한 일이면 영상되는 수양 자기에게 마땅히 보고가 있어야 할 터인데, 늘 정부에 함께 있으면서도 한 마디도 보고가 없는 것은 웬일일까?
한명회며 권남의 무리도 요즈음은 한 번도 수양 댁을 찾아오지 않았다.
자기의 신상과 관련되는 일이라 이리저리 알아보기도 수상하였다.
지금의 수양의 심경으로는 왕이 진심으로 (마음에 털끝 만한 불만도 없이) 선위를 하려면 달갑게 받을 생각이었다. 달갑게 받은 뒤에 내놓은 분의 마음에 요만한 후회도 안 생기도록, 그분의 개인 신상에도 안락을 드리고, 겸해서 부탁받은 일을 그분께 넉넉히 자랑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자기의 마음은 청천백일 같았다. 만약 그분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아수한 생각이 있는 눈치만이라도 보이면, 결코 딴생각이 (아깝다든가) 없이 깨끗이 정무에만 몰두하여, 그분의 아래서 자기의 가능한 힘을 다 쓰리다.
자기의 심경이 그렇거늘, 이제 누구에게 그 일에 관해서 한 마디라도 입을 벌리면 반드시 오해를 살 것이었다. 그 오해를 사기가 싫어서 왕께조차 여쭈어보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또 어찌 입을 벌리랴.
이리하여 지내기를 하루 또 하루─
윤유월 초 열흘이었다.
수양이 저녁을 끝내고 서늘한 저녁 바람에 종일 받은 더위를 씻으려 대청에 나려 할 때에 대궐에서 급사가 이르렀다.
곧 참내하라는 것이었다.
수양에게는 의외였다. 아까 대궐에서 뵙자 할 때에도 보지 않았다. 이즈음 왕의 부름이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뵙자고 여러 번 여쭈어야 간신히 한 번 만나 주었다. 특별히 왕께 뵈올 용무는 적으므로 뵈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렇거늘 오늘은 부르는 것이었다. 의외로 생각하며 가슴도 철썩하였다. 뵙자 해도 안 보던 왕이매, 무슨 변이나 돌발한 것이 아닌가?
황황히 예궐하였다.
왕은 편의로 내전에서 수양을 보았다.
용안이 창백은 하지만 오늘이라고 무슨 특별히 노엽다든가 불쾌하다든가 하는 기색이 없어 도리어 반가이 수양을 맞았다.
『숙부님, 더운데 오시라고 해서……』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숙부님, 이제 내가 하는 말을 믿으시고 내 부탁을 들으셔서 날 낙심치 않게 해 주셔요.』
『무슨 분부시오니까?』
『어보를 숙부님께서 맡으시고 이 백성들을 숙부님이 맡아 길러 주셔요.』
수양은 가슴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즈음 흔히 생각하던 바요, 지금 소명을 받고 올 때도 혹은 그 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였지만, 급기 당하니 가슴이 철썩하였다.
『전하! 전하!』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목소리도 물론 떨렸다. 이런 일이 있을지도─ 생길지도 모르리라는 생각은 해본 일이 있었지만, 이런 일을 당하여 어떻게 복제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으므로, 뒤만 조급하고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건 내가 사양을 한다든가 뉘게 떠밀리어 하는 말씀이 아니야요. 내 어린 몸으로 철모르고 아버님 승하하신 뒤를 이어 오르기는 올랐지만, 과연 철없어서 그랬어요. 지금이라고 갑자기 무슨 철이 든 바는 아니지만, 지금 지각만도 못할 시절에 지금만만 해도 처음부터 사양할 게야요. 조부님 승하하시고 아버님 승하하시고……』
옥음에는 어열(語咽) 상반이었다.
『고독한 몸뚱이 의지할 데 없는 걸 숙부님이 거두어 주셔서 삼년 나마 보(寶)를 받들고 홀(笏) 잡고 용상에 앉아 백료를─ 숙부님이 곁에 붙들어 안 주셨더면 어찌 지탱했으리까? 고명받은 신료가 배반하고, 피를 나눈……』
왕이 숨을 돌리노라고 말을 끊은 기회를 잡아 수양이 아뢰었다.
『전하? 과거에도 그랬거니와 금후도 수양 꼭 어측을 떠나지 않고 대소사를 도와 올리오리다. 어려운 일 계시면 전하 한동안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 년, 이 년이라도 한가히 쉬셔요. 산천 유람, 입산 휴양, 양녕대군을 배행케 하옵고, 유렵(遊獵)도 좋습니다. 전하 좋으실 대로 하오셔요, 전하 안 계실 동안 수양이 미력하나마 꽉 잡고 사직의 흔들림이 없도록 하오리다. 다른 생각은 아예 잡숫지 마시고……』
『아니, 산천 유람을 하든 유렵을 하든 간에, 내가 이 보의 주인인 동안은 마음 걸려서 못 견디겠어요. 너는 죽어라, 너는 정배 가거라. 너는 매 맞거라. 이게 모두 내 이름으로 되는 게 아니오니까? 이게 내겐 무섭고 진저리나요. 저 내관들에게 일부러 물어서 안 바인데, 민간에서 가장(家長) 하나이 (죄는 있고 없고 간에) 죽거나 원배 가거나 하면, 온 가족이 유리걸식을 한다니, 이게 차마 할 노릇이오니까? 난 더 못하겠어요. 역한 일을 숙부님께 맡긴다는 건 비례의 일이지만, 그래도 국가 수성(守成)의 주인으로 숙부님밖에는 다른 이가 없습니다그려. 맡아 주셔요. 그저 부탁은 영묘(세종) 어우의 백성같이 왕덕을 찬송하는 백성만 되게 해주셔요. 그러자고 숙부님께 드리는 게니까.』
『전하, 다시 생각하소서. 좋지 못한 풍설이 항간에 돌던 데다가 이런 일이 생기면 백성은 반드시 의혹하올 것, 회의하면 심복치 않을 것, 심복치 않는 백성을 어떻게 복되게 하오리까?』
『그것도 내 생각해 봤어요. 내가 숙부님께 드린다는 뜻을 천하에 공포하면, 백성은 회의치 않을 게 아니오니까? 절개를 태산보다도 중히 여기는 유신(儒臣)에게 내가 분부해서, 집현 제학(提學)에게 교서를 짓게 하고 성균사성(成均司成)에게 송시(誦詩)를 짓게 해서 천하에 공포하면 회의는 없어질 것입니다. 숙부님, 전일 내게 상중 납비를 강권하셨지요? 그 품갚이외다.』
『그 품갚음으로 다른 걸 분부하시면 사양치 않으오리다만, 이 일은 더 생각하오며 서서히……』
『생각했어요. 문득문득 그저 싫어지기 시작한 건 벌써 옛날이요, 숙부님께 물려드리자고 마음먹고 생각한 것도 벌써 오래였어요. 두고 두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래도 아까운 생각도 들고,어떤 때는 누구 다른 이에게 드릴 만한 분이 없는가도 생각하고, 이모저모로 두고두고 오래 생각했어요. 전일 권참판(남)이 갑자기 의외의 말을 하고, 뒤이어 정좌상(인지)이 숙부님을 천거할 때, 처음엔 괘씸하다고 불쾌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두고두고 생각해야 이 한 가지 길밖에는 딴 길이 없습니다. 사양치 마시고 나를 이 고경에서 구해 주셔요. 어린 조카를……』
마지막에는 옥음이 탄원하는 듯하였다.
수양은 한참을 머리를 묻고 생각했다.
『신께 수일간만 수유를 주십사. 신 잘 생각하와 복계하오리다.』
『생각은 숙부님 마음대로 하시거니와 사양은 마음대로 못하십니다. 사양은 내가 허락치 않겠어요.』
수양은 왕이 내리는 선온도 사양하고 집으로 물러 나왔다. 부인과 의논해 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대궐에 들기는 하였지만, 수양답지 않게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서 푹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대내 쪽에서 사람이 나올 때마다 흠칫흠칫 놀랐다.
낮 조금 지나서 대내에서 내관 전균(田鈞)이 나왔다. 나와서는 우선 영상께 절하고 다음 좌상께 절하고 우상께 절하고는 우상 앞에 꿇어앉았다.
『상감님께서 우상 대감께 전교가 계시오이다.』
『내게? 무슨 전교시냐?』
한확은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네이, 상감님의 전교─ 과인 유충해서 중외의 대사를 살필 줄 모르고, 간물들의 화단까지 생겨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아 과인 같은 소년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 대임을 영의정께 전하노라─ 하시는 전교시옵니다.』
수양은 절식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한확이 내관에게 말하였다.
『중외의 대소사를 통 영의정이 보시거늘, 더 무엇을 맡기시는지 신 미련하와 알 수 없습니다─고 들어가 여쭈어라』
내관은 다시 들어갔다. 청내는 죽은 듯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소리는 못냈지만 눈물만 샘같이 솟았다.
전균은 다시 나왔다.
『이 뜻은 과인이 오래전부터 갖고 이미 굳게 작정한 바니 어서 거행할 차비나 하랍시는 전교옵니다.』
왁, 곡성이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서 수양의 말소리가 가장 크게 났다.
『어명 거역하는 죄를 짓고 대죄한다고 들어가 여쭈어라.』
인간적 감정의 절반은 잃은 환관(불구자)은 이 통곡의 방에서 또다시 내전으로 들어갔다. 들어갔다가 조금 뒤에 또 나왔다.
같은 분부를 다시 전했다. 그리고 왕도 경회루 아래로 날 터이니 대신들도 곧 그리로 오라는 분부가 더 붙었다.
모두들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묵묵히 있었다.
환관은 다시 예방승지(禮房承旨) 성삼문을 찾아서 〈어보를 받들고 경회루 아래로 오라〉는 분부를 전하였다. 성삼문은 어보를 관리하는 벼슬을 겸임하고 있었다.
여기서 대신들은 다시 한번 전균을 왕께 보냈다. 전하 직접 외전에 나셔서 분부하시기 전에는 거행키 힘들다는 뜻으로─그러나 전균이 채 대내까지 다 가기 전에 대내에서는 독촉 환관이 또 나와서, 어서 거행하라는 재촉과 함께 왕은 벌써 경회루로 들 준비를 한다는 것을 알렸다.
하릴없었다. 수양이 다른 대신들에게 좌우간 경회루로 가자고 발의를 하려 할 때 정인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으리, 일이 이렇게 된 이상은 봉행할 외에는 수가 없으리다. 생이 그사이 수삼차 성지를 들었는데, 확고부동의 결의가 벌써 서신 지 오랬습니다. 성지 거스르는 일이면 죽음으로 거역도 하겠지만, 이 일은 봉행하는 편이 전하는 무론이요, 아무 데로 보아도 좋을 줄 압니다. 자 일어서십시오. 한의정도─ 자 경회루로 듭시다.』
정인지의 재촉으로 의정부의 당상관들은 일어섰다.
앞에는 예방승지 성삼문이 어보를 전균에게 들리어 앞서고, 그 뒤로 의정부 삼공과 좌우 찬성, 참찬, 그 뒤는 다섯 승지와 사관이 따라서 경회루로 돌아갔다. 아무도 무슨 말을 하는 사람도 없고 기침 소리 하나 안 들렸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의정부 관원과 내관 전균이 아는 뿐, 어보를 받든 성삼문도 무슨 까닭으로 어보를 받들고 정승들과 경희루로 가는지 몰랐다.
이들이 경회루 앞에까지 이르매, 그때야 왕은 소련에 몸을 싣고 내관 몇 명을 거느리고 나오는 것이었다.
걸핏 우러르매 용안이 놀랍게도 초췌하고 창백하였다. 사람 한 개의 요마한 장난감도 버릴 때는 애석하거든 하물며 만의 존귀한 자리를 내놓으려매 어찌 마음 편하랴?
그 심경 수양은 짐작이 갔다. 아직 정식으로 공포한 바가 아니니, 조카님이 가까운 생각이 과하여 이 자리의 이 부름은 무슨 딴 일로 어름거리고 그냥 도로 들어 중소사─가슴에 고통(육체적의)까지 느끼면서 수양은 이렇게 말없이 빌었다.
왕은 연에서 내렸다. 내관의 부액으로 누하(樓下)에 들었다.
누하에 든 왕은 수양을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수양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갔다. 그 뒤로 어보를 받는 승지와 붓을 든 사관(史官)이 따랐다.
수양이 가까이 오매 왕은 호상에서 일어섰다. 그 앞에 수양은 부복하였다.
『숙부님, 돌연히 놀라시겠지만, 내 어리고 약한 몸이 도저히 임금의 전위를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숙부님께 이 대보를 부탁합니다.』
『전하!』
『…………』
또다시 울음이 터졌다.
『신께 너무 큰 짐이로소이다. 종신(宗臣)과 도당에 묻고 결정하시옵소서.』
『내 굳게 작정한 바니 받아 주셔요.』
영문은 모르고 뒤따라 왔던 성삼문은 어보를 받든 채 와들와들 떨기만 했다.
왕이 어보를 이리 보내라고 손을 폈지만, 삼문은 당황하여 전혀 인식 못하였다.
드디어 왕이 손을 내밀어 어보를 삼문의 손에서 받았다.
『어보, 숙부님 받으셔요.』
『전하!』
『어서 받으셔요.』
그리고는 내관을 돌아보았다.
『영의정을 부액해 드려라.』
내관이 좌우로 부액하였다. 한 명은 어보를 받들었다.
수양은 대군청(大君聽)으로 나왔다.
잠시 머리가 휑하여 아무것도 인식치를 못하였다. 뜰에 어수선한 소리가 나므로 내다 보매. 어느덧 백관이 열을 지어 뜰에 시립하고 시위병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상의원에서는 수양에게 맞을 만한 익선관과 곤룡포를 벌써 등대하였다.
왕이 수양에게 약속하였던 바, 집현전 제학에게 교서를 짓게 하마 한 것은 집현전 부제학 김내몽의 솜씨로 벌써 작정되는 즈음이었다.
즉위식을 위한 헌가(軒架)도 근정전에 설치되는 중이었다. 대체 즉위식이라 하는 것은 대행왕의 구(柩) 앞에서 거행되는 것이라, 경사보다도 비극에 가까우매, 식의 절차에 그때 그때의 편법으로 거행되었다. 예조와 선공감에서 나와서 지휘하였다.
익선관과 곤룡포로 몸을 장식한 수양─이제 전에 나가서 수선의 절차와 즉위의 절차만 거행하면 이제는 신왕이었다. 그 뒤에는 조카님께 뵙고 받았습니다는 말씀을 여쭙고, 종묘에 봉고하고, 선위와 즉위의 교서를 반포하면 완전히 이 강산의 새 주인이 된다.
수양─이제부터는 신왕은 아까 조카님의 용안이 초췌한 양이 눈앞에 어릿거려 마음이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넓게 벌어지지만 않았으면 도로 모두 물시해 버리고 싶었다.
지금 뜰에 하례를 하러 시립한 백관들의 얼굴도 한결같이 모두 당황하였다. 너무 돌연한 일이요, 또한 괴상한 풍설을 들은 그들이라, 오늘의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갈피를 못 차리는 모양이었다. 의혹의 눈, 혹은 기쁨의 눈, 경악의 눈, 비통의 눈, 가지각색의 눈이 몰래 신왕의 용안을 엿보고 한다.
내가 못할 일을 했는가? 신왕은 몇 번을 속으로 자문하였다.
그러나 거기 대한 대답은 명료히 그의 마음에 일었다.
─아니로다. 천상천하 아무데를 내놓을지라도 추호 부끄러운 데 없다. 다만 조카님의 부탁과 같이 이 백성을 내 힘으로 넉넉히 안락되게 하며, 이 땅을 기름지게 키우는 데 성공하겠느냐 못하겠느냐 하는 문제뿐이로다.
온 힘을 다 쓰자. 뼈를 부수고 몸을 갈아서라도 조카님의 뜻에 봉답하고, 또 어린 마음에 고통을 받으시며 물러서신 조카님을 이후 마음과 몸이 아울러 평안하시도록 온힘을 다 쓰자. 신왕은 굳게 마음에 결심하였다.
신왕은 조카님이 보내 주신 옥련에 몸을 싣고 백관과 강병의 장위로서 근정전으로 돌아갔다. 거기 가설된 헌가에서 수선의 절차를 밟고, 이 새로 당신의 품안으로 들어온 백관에게 하례의 숙배를 받았다.
그리고는 지금 조카님이 좌어하신 사정전(思政殿)으로 들어가서 조카님께 〈임금〉과 〈신하〉로서의 최후의 배알을 하였다.
여기서 근정전으로 나가서 〈즉위식〉이라는 간단한 식만 거행하면 조카님께 대해서도 이제는 왕이었다. 그 조카님은 신인 당신이 〈상왕〉으로 높여 드리지 않으면 한낱 〈전〉왕인 〈신위(臣位)〉에 지나지 못한다. 이 삽시간에 달라지는 신분을 생각할 때에, 신왕은 이러한 지위에서 떠나신 조카님을 어떻게든 위로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커갔다.
조카님께 뵙고 인사의 말씀 몇 마디 더 드리고, 신왕은 근정전으로 나와 정식으로 즉위의 절차를 밟았다.
이리하여 새 임금은 이 나라에 군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