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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鬪爭 生涯篇[투쟁 생애편][편집]

第一章[제일장] 少年時代[소년 시대][편집]

─ 快哉亭[쾌재정]의 雄辯[웅변] ─

금수강산의 이름이 있는 대동강 연안이 선생의 고향이요, 출생지요, 만년(晩年)의 잠시간 칩거지(蟄居地)다.

안씨의 세거지(世居地)는 평양 동촌(東村)이니 대동강 동안(東岸) 낙랑(樂浪) 고분(古墳) 남연이요, 선생이 출생하기는 대동강 하류에 있는 여러 섬 중의 하나인 도롱섬이다. 이는 그 부친이 농토를 구하여 동촌으로부터 도롱섬으로 이거 한 까닭이요, 그후에 그 백씨는 다시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로 이사하기 때문에 선생의 적이 강서로 된 것이다.

선생의 이름은 창호(昌浩), 호는 도산(島山), 서력 一八七八[일팔칠구]년 무인 년 십一[일] 월 십一[일] 일에 위에 말한 도롱섬 일 농가(農家)의 차남(次男)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에 있는 사숙(私塾)에서 공부하는데, 그 천성의 명민함이 이미 드러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일청전쟁의 갑오년은 무인생인 도산이 십七[칠]세 되던 해였다. 그는 평양에서 일본군과 청군이 접전하는 양을 보고 또 전쟁의 자취를 보았다. 평양의 주민은 헤어지고 고적과 가옥은 파괴되었다.

총각 안창호는 어찌하여 일본과 청국이 우리 국토 내에 군대를 끌고 들어 와서 전쟁을 하게 되었나 생각하였다. 그의 소년 시대의 동지요, 수년 연상인 필대은(畢大殷)과 이 문제를 토의하노라고 야심토록 담론하였다. 그래서 도산은 한 결론을 얻었다.

『타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 와서 설레는 것은 우리 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라고.

다음 해가 을미년, 일청전쟁에 청국이 일본에게 패하여 마관 조약(馬關條約)에서 조선의 독립이 두 나라로부터 승인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국의 태종(太宗)의 조선 침입, 조선 인종(仁宗)의 남한산성(南漢山城)항복 이래 二[이]백 수십 년간 청국이 조선에 대하여서 가졌던 종주권(宗主權)을 승전자 일본의 요구에 의하여 포기한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은 국호를 고쳐서 대한이라하고, 대군주(大君主)를 고쳐 대황제(大皇帝)라 하고, 동서 열강과 외교관을 교환하고, 겉으로는 독립국의 체면을 꾸몄다.

이때에 황제와 그 근신(近臣)은 무엇에 주력하였는가. 궁전(宮廷)의 예의를 황제식으로 고치고, 목조(穆祖)에서 태조(太祖)까지 四[사]대를 황제로 추숭(追崇)하고 등등 체재를 정비하기에 골몰했다. 경갈(罄渴)한 국고(國庫)는 매관 매 작(賣官賣爵)으로 충용(充用)하는 한(漢) 조착(晁錯)의 논법을 썼으니, 방백(方伯) 수령(守令)을 비싼 값으로 사가지고 간 사람들은 적어도 본전의 몇 배를 벌 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그들은 남원 부사 변학도(卞學道)의 방법을 배웠다.

이리하여 독립이 왔기 때문에 국보(國步)는 더욱 간난하고 민생은 더욱 도탄에 괴로워하였다.

도산은 생각하였다 ─.

<힘이 없구나!>

힘은 없고 이름만 있는 대한의 독립이었다. 총각 안창호도 이러한 무력한 국토를 노리는 자가 있는 것을 간파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전패한 청국은 차치하고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의 뒤떨어진 운명을 만회하려고 표트르대제 이래도 분기 하였다. 다른 민족들이 모두 바닷가, 기후·풍토가 좋은 지역을 차지하여 안락과 부강을 누릴 때에 슬라브족은 무슨 연고인지 아무도 살기를 원치 아니하는 동토(凍土)·흑토(黑土)·적도(赤土)의 밤과 낮이나 차고 더운 것이 고루지 못한 세계의 뒷골목에서 칩거(蟄居)하고 있었다.

슬라브 민족이 이 불운한 처지를 벗어나는 길은 서쪽으로 대서양과 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이 제일의 길, 남으로 인도양이 제이의 길, 동으로 태평양이 제삼의 길이었다. 그중에서 제일의 길은 당시 영·불·독(英·佛·獨)의 세 강국이 있어서 도저히 범접할 희망이 없고, 제이의 길인 인도양 길은 영국의 세력 범위 내요, 오직 하나만만한 데가 제삼의 길인 태평양 길이었다. 이에 러시아는 노(老) 청 제국(淸帝國)을 압박하여 네르친스크 조약에 흑룡강 이북의 땅을 할양(割讓)케 하고, 만주의 모든 권익을 승인케 하며, 조선을 엿보는 것이였다.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주의의 초점을 삼는 지점이 둘이 있으니, 그것은 곧 지중해 로 나아가는 다다넬스 해협과 태평양 상의 기지로 조선이었다.

총각 안창호는 새로 독립을 얻은 조국이 북으로는 러시아의 수연(垂涎)의 대상이 되고, 동으로는 일본의 대륙 진출의 기지로서의 대상이 된 것을 알았다. 일본이 청국에 대한 승전의 결과로 조선의 독립을 주요한 요구로 한 것은, 우선 조선을 청국의 농중(籠中)에서 꺼내어 놓고 서서히 자가 농중에 넣을 공작을 하려는 혼담인 것은 삼척동자라도 추측할 수 있을 일이었다.

이때에 조선이 할 일은 급급히 서둘러서 러시아와 일본이 덤비기 전에 국력을 충실히 해서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하거늘 묘당(廟堂)의 의(議)는 이에 나아갈 줄을 모르고 혹은 러시아에 아첨하고, 혹은 일본에 친하여 일시 구안(苟安)을 찾거나 자가 자파의 세력 부식에만 급급하였다.

이때에 러시아와 일본의 악독한 어금니를 피할 방책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하는 구투(舊套)를 쓴 것이 광무제의 영·미·불·독,(英·美·佛·獨)등 여러 강국을 끌어 들여 호시탐탐한 러시아 일본 두 나라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외국인 고문을 채용한 것이 이것이다. 이로 하여서 한성(漢城)은 여러 강국의 외교 쟁패의 음모장이 되었다.

이때에 미국에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서 재필(徐載弼)이 미국 시민 자격으로 저 선 정부의 고문이 되어서 한성에 돌아 왔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등과 같이 거사하다가 실패하여서 미국으로 망명하매 그의 삼족은 모조리 잡혀 죽임을 당하였고, 그 자신 역시 사형을 받을 죄인이었다. 광무제가 바로 김옥균들의 손으로 경우궁(景祐宮)에 파천(播遷)되었던 이요, 청군에 의부(依附)한 민씨 일파의 구세력에게 돌라붙어 김옥균 이하를 내어버린 이다.

서재필은 망명 신세로 조국을 떠난지 십수년 만에 조국의 독립 완성, 모든 정치를 새롭게 하자는(庶政一新) 웅자한 계획과 열정을 품고 고국에 돌아 왔다.

그는 나라의 독립과 부강이 국민의 각성과 단결에 있음을 역설하여 이 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 동지를 규합하여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獨立新聞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사대(事大)의 유물(遺物)인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이라고 개칭하여, 거기서 조선에서는 처음 인연설회를 연속 개최하여 세계의 대세와 정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과 국가의 나아갈 길을 논하고, 일변으로 서재필 자신이 광무제와 당시의 코 높은 관리들을 혹은 계몽하고 혹은 힐책하여 나라의 운명이 알을 포개어 놓은 것처럼 위태함을 경고하였다. 독립협회는 범위를 확대하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되었다.

이때에 총각 안창호는 동지 필대은 등과 함께 평양에서 궐기하여 쾌재정(快哉亭)에 만민공동회 발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감사 조민희(趙民熙)를 앞에 놓고 수백 명 집회 중에 일대 연설을 하여 조민희로 하여금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하고 안창호의 명성이 관서 일대에 진동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산은─

『힘이다. 힘이다.』

하고, 힘이 독립의 기초요, 생명인 것을 통감하였다.

그러면 힘이란 무엇이냐?

국민이 도덕 있는 국민이 되고 지식 있는 국민이 되고 단합하는 국민이 되어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남에게 멸시를 아니 받도록 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국민이 되는 길은 무엇이냐?

국민 중에 덕 있고 지 있고 애국심 있는 개인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길은 무엇이냐?

우선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덕 있고 지 있고 애국심 있는 ─ 즉 힘있는 사람이 되면 우리 나라는 그만한 힘을 더하는 것이다.

또 나 자신이 힘이 없이 없이 남을 힘있게 할 수 없음은 마치 내가 의술을 배우지 아니하고 남의 병을 고치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공부하자.

도산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이러한 사고 방법은 도산이 평생에 쓰는 방법이었다.

그때에도산은 이씨 부인과 약혼 중에 있었으나 혼인은 공부하고 돌아 온 뒤에 할 터이니 그때를 기다리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다른 데로 출가시키라, 십년 전에는 돌아올 기약이 없다고 이씨 집에 선언하고는 미국으로 향하는 길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시국을 관망하면서 정동 미국 선교사의 사숙 (培材[배재]의 母體[모체])에서 얼마 동안 공부하다가 만민공동회가 구세력의 사주(使嗾)를 받은 보부상파(褓負商派)의 습격을 받고 정부의 큰 탄압을 받아 부서지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물러가고, 윤치호(尹致昊)는 중국으로 빠져 나 가고, 이 승만은 감옥에 갇히게 된 이듬해인 기해년, 二[이]십二[이]세 때에 인천서 미국선을 편승하고 미주로 향하였으니, 이때에 이씨 부인은 죽을 데를 가더라고 같이 간다 하여 편발(編髮)로 도산을 따라 와서 바로 배 타기 직전 인천에서 초례(醮禮)를 행하고 남편 도산의 뒤를 따랐다.

第二章[제이장] 美州遊學時代[미주유학시대][편집]

─ 僑胞[교포]의 組織[조직]과 訓練[훈련] ─

도산이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북미에 상륙한 때는 二[이]십二[이]세의 청년이었다. 그의 목적은 학업에 있었으나 당시에 미국에 이민한 한국 동포들의 현상은 도저히 그로 하여금 학창에 전념할 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우에 상륙한지 얼마 아니 된 어떤 날 도산은 길가에서 한인 두 사람이 상투를 마주 잡고 싸우는 광경을 미국인들이 재미있게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도산은 뛰어 들어가 그들의 싸움을 말리고 그 싸우는 연고를 물었다.

그들은 이 근방에 흩어져 사는 중국 교민들에게 인삼행상을 하는 이들이었다.

이때에는 아직 가게를 벌이고 정당한 상업을 경영하는 한인은 없고 대부분이 인 삼 장수와 노동자였다. 도산이 길가에서 싸움을 말린 두 동포의 싸움의 이유는 협정한 판매 지역을 범하였다는 것이었다.

도산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샌프란시코우에 재류하는 동포를 두루 찾아 그 생활 상태를 조사하였다.

그래서 ─ 당당한 독립 국민의 자격이 『 없다. 이들이 이러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보기를 미개인이라 하고 독립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라고 결론하였다.

도산은 여러 날 고민한 끝에 공부한다는 목적을 버리고 우선 미주 재류 동포가 문명한 국민다운 생활을 하도록, 그리하여서 보기에 한국인은 문명한 민족이다, 넉넉히 독립국가를 경영할 만한 소질도, 실력도 있는 국민이라고 볼 수 있는 정도까지 끌어 올리기에 노력하리라고 결심하였다.

도산은 이 뜻을 동지로 동행한 이 강(李剛)·김성무(金成武)·정재관(鄭在寬)등에게 통하였다. 그들도 동감이라 하며 우리 四[사]인은 이 목적을 달하기까지에는 이 사업을 중지하지 말자고 약속하고, 또 도산의 생활비는 다른 三 [삼]인이 벌어 대일 테니 도산은 동포 지도에 전력하라고 도산을 격려하였다.

도산은 더욱 감격하여서 미국에 있는 동포의 생활 향상을 위하여 분골쇄신(粉骨碎身)하기로 스스로 맹세하고 그날부터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몸을 바쳐서 민족 운동을 한 첫날이었다. 빛나는 정치 운동이나 혁명 운동이 아니라 만리 타국에 유리하여 와 있는 불과 몇 백명의 무식한 동포의 계몽을 위 하여 청운(靑雲)의 웅지(雄志)를 버리고 나서는 二[이]십二[이]세의 청년 안창호를 상상할 것이다.

그는 그날부터 재류 동포의 호별 방문을 시작하여 그들의 생활 상태를 시찰하였다. 첫째로 그의 눈에 뜨인 것은 동포들이 거주하는 거처가 불결한 것이었다.

세방이나 셋집을 물론하고 장식이 없고 소제가 불충분하여서 밖에서 얼른 보아도 어느 것이 한인이 사는 집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첫째, 한인이 거처하는 집으로 눈에 뜨이는 것은 유리창이 더럽고 문장(門帳)이 없는 것이었다. 서양인의 창에는 반드시 그것이 있었다. 둘째로 눈에 뜨이는 것은, 문 앞이 더러울 뿐더러 오는 손님을 기쁘게 하는 화초가 없는 것이요, 세째로는, 실내가 불결하고 정돈되지 아니하고 또한 미화되지 아니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집을 찾아 다닌 결과로 발견된 것은, 집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이 냄새로 하여 서 인접한 서양인이 살 수가 없어서 집을 떠나는 일도 있었다. 그 다음에 이웃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고성 담화(高聲談話)와 훤화(諠譁)였다.

이에 도산은 몸소 한집 한집 청소 운동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동포들이 도산의 하는 일을 의심도 하고 거절도 하였으나 차차 신임하여서도산을 환영하였 다 그는 손수 비로 쓸고 . , 훔치고, 창을 닦고 또 헝겊과 철사를 사다가 창에다가 얌전하게 커어튼을 만들어 치고, 문전에 화분을 놓거나 꽃씨를 뿌리고 주방과 변소까지도 깨끗이 치었다.

도산은 소제 인부가 되어서 이 모양으로 동포의 숙소를 청결히 하고 미화하였다. 이것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동포의 생활을 일변케 하였다. 그것은 다만 거처의 외양만이 일변한 것이 아니요, 그 정신 생활에까지 변화를 일으켰다.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히 하면 중심(中心)이 필칙(必飭)」한다는 말과 같이 더럽고 산란한 환경에 기거하는 것과 정결하고 정돈한 데 있는 것과는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이 다른 것이었다. 동포들은 어느새에 면도를 자주 하고, 칼라와 의복을 때 아니 묻게 하게 되고, 담화도 이웃에 방해가 아니 되도록 나지막한 소리로 하게 되고, 이웃 사람이 싫어하는 냄새나 음성이나 모양을 아니 보이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양코놈들한테 왜 눌리느냐. 그놈들이야 무에라든지 내 멋대로 한다.』

하고 뽐내던 몇 동포도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 이웃을 위하는 것이 문명인의 도리요, 또 여기서 한 한인이 미국인에게 불쾌한 생각을 주면 이는 전 미국인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 전체를 불쾌하게 생각하게 하는 것인 줄을 깨닫게 되었다.

이 모양으로 하는 동안에 도산은 동포들의 신뢰를 받아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의논하러 오고, 또 도산을 집에 청하여서 식사도 대접하였다. 도산은 이러한 신뢰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묵묵히 소제 인부와 심부름군의 노역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동포의 신뢰를 얻게 되매 도산이 처음으로 동포간에 제의한 것은 인삼 행상의 구역을 공평하게 정하되 일 개월씩 서로 구역을 교환하는 것과, 인삼의 가격을 협정하여서 서로 경쟁하여 값을 떨어뜨리게 하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도산은 이 모양으로 점차 동포에게 협동과 준법(遵法)의 훈련을 하여서 될 수 있으면 인산 행상들을 단합하여 계(契)를 만들어 매입과 매출을 한 큰 조직에서 함으로 신용과 이익의 안전을 보장하려 하였다.

둘째로는 노동력의 공급에 관한 것이니, 한인의 노동력을 통합·공급하는 기관을 만들어서 거기서 미국인의 노동력 주문을 받고 한인의 노동력 공급을 함으로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을 보장하고 또 실직이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도산은 그의 평생의 사업 원리를 직용하였으니, 그것은(一 [일])점진적으로 민중의 자각을 기다려서 하는것, (二[이]) 민중 자신 중에서 지도자를 발견하여 그로 하여금 민심을 결합케 하고 결코 도산 자신이 지도자의 자리에 사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세우고 《共立新報[공립 신보]》을 발간하고 다시 확대하여 미주국민회가 되고 《新韓民報[신한민보]》라는 신문이 될 때에도 도산은 늘 배후에 있었다. 그가 국민회장이 된 일이 있 으나 그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도산이 이 모양으로 독특한 민족 운동을 시작한 지 일년쯤 하여 이 운동의 효과가 미국인에게 반영된 결과가 생겼다.

필자는 그의 씨명을 잊었거니와, 샌프란시스코우의 자본가의 하나요, 가옥을 많이 가지고 있는 모 미국인이 그의 집에 세로 들어 있는 한국인에게,

『당신네 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왔소?』

하고 물었다. 무엇을 보고 그러느냐 한즉 그 미국인은,

『당신네 한인들의 생활이 일변하였소. 위대한 지도자 없이는 이리 될 수 없소.』

하므로, 한국인들은 안창호라는 사람이 와서 지난 일년 동안 우리를 지도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그럴 것이요. 나 그이 한 번 만나고 싶소.』

하여 도산이 그와 면회하였다. 그는 도산이 백발을 흩날리는 노인이 아니요, 새 파란 젊은이인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고 한다.

그 미국인의 집 주인은 도산을 극구 칭양하고 도산의 공적에 감사하는 뜻을 표 하기 위하여 자기 가옥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집세를 매년 일 개월을 감하겠다는 것을 선언하고, 또 도산이 한국인을 지도하기에 사용할 회관 하나를 무료로 제공할 것을 자청하였다. 이리하여 얻은 집이 한국인의 최초의 회관이요, 예수교회가 되었다.

이에 공립협회가 조직되고 순국문으로 《共立新報[공립신보]》가 발간되고, 샌프란시스코우뿐만 아니라 캘리포오니아주 여러 도시에 흩어 있는 한국인을 조직하고, 나아가서는 하와이, 맥시코에 있는 동포까지도 합하여 대한인 국민회(大韓人國民會·Korean National Association)를 형성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는 그 출발로 보아, 또 조직자요 지도자인 도산의 의도와 인격으로 보아 단순한 교민 단체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일종의 민족 수양운동이요, 독립을 위한 혁명 운동이요, 민주주의 정치를 실습하는 정치 운동이었다. 그러 나 그뿐이 아니었다. 대한인 국민회는 재미동포의 보호 기관이요, 취직 알선 기관이요, 노동 조합이요, 권업 기관(勸業機關)이요, 문화 향상 기관이었다. 이제 그 실제 활동의 한두 예를 들어서 그 본래의 성격과 공적을 살펴 보자 ─.

캘리포오니아주 행정청에서 한인에 대한 것은 국민회에 자문하였고, 또 한인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이 회를 통하여서 하였다.

미국에 새로 입국하는 한인은 여권이 없거나 법정 휴대금이 없는 경우에라도 국민회에서 이민국에 보증하면 통하였다.

사업주들이 노동력이 필요할 때에는 국민회를 통하여서 한인 노동력을 구하였고 국민회는 응모하는 동포의, 보증인이 되었으며, 사업주와 동포간의 이해 충 동리 있을 때에는 국민회가 나서서 동포의 이익을 보호하였다.

국민회는 동포에게 매년 五[오] 달라의 국민 의무금을 징수하고 각 지방 대의원과 총회장의 선거를 투표로 하여서 민주 정치의 훈련을 하였다.

본국으로부터서 여행자나 유학생이 을 때에는 이들의 편의를 위하여 주선하였다. 동포 상호간의 쟁의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미국 법정에 끌고 가지 아니하고 재결하였다.

생활 개선을 지도·장려하여서 국민의 명예를 보전·발양하도록, 외인의 비웃음을 받지 아니하도록 하였다.

제일차 세계대전이 휴전이 되자 곧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 명의의 신임 장으로 이승만 박사를 와싱턴으로 파견하여 독립 운동을 개시하였으니, 이것은 상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김규식(金奎植) 박사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것과 아울러 한국 독립 운동의 중요한 사실이었다.

회원의 성금을 모아 이승만 박사의 와싱턴 위원부의 경비를 부담하고, 또 상해 임시정부의 경비의 절반과 중경 체재중의 임정 요인의 생활비를 보내었다.

제 이차 대전 끝에는 재미 한족연합회(在美韓族聯合會)를 조직하여 대표자 십 五[오]인을 본국에 파송하여 독립운동에 합력케 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실로 四[사]십여 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 운동 단체로서, 그 수명으로나 공적으로나 우리 민족사에 대서특서할 위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국민회는 제일차 대전 전까지에는 시베리아에도 원동(遠東)지부가 있어서 바로 제일차 대전이 터지던 여름에도 치따에서 원동 각지 국민회 대의원회가 열려 三 [삼]일간 회의를 계속하였다. 그때에 출석 인원은 五[오]십 명이 넘었거니와, 멀리 크라스노야르스크, 옴스크 지방에서까지 대의원이 와 있었다. 치따에는 이 강(李剛)이 중심이 되어 있었고, 기관지로 《正敎報[정교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전이 일어난 뒤에 러시아 영토 안의 국민회 운동은 소멸되고 말았다.

도산이 북미주 동포를 조직하여 놓았을 때에 일아 전쟁이 끝이 나고 조국의 운명이 그당시 우리 신문지상에 예투(例套)로 쓰는 문자로「누란급업」(累卵岌)이었다. 이에 도산은 북미 동포의 재촉으로 일본은 경유하여 고국에 돌아 왔으니, 이른바 을사 신조약이 이미 한국의 자주 독립권의 일부를 박탈하여 일본의 한국 병탄이 오늘인가 내일인가 한 때였다.

第三章[제삼장] 新民會時代[신민회시대][편집]

─ 韓末風雲[한말 풍운]과 民族運動[민족운동] ─

포오츠머스 조약에서 중재자인 미국 대통령 데오도어·루우스벨트씨는 일본의 한국과 만주에 대한 특수 권익이란 것을 인정하여 버렸다. 영국도 이것을 승인하였다. 러시아가 한국의 북위 三[삼]십 九[구]도선 이북을 일본과 자기 나라사이의 중간 지대로 하여 서로 주병(駐兵)하거나 기지를 세우지 말자던 일본과의 조약의 권리를 상실한 것은 물론이어니와, 용암포(龍岩浦)를 러시아의 기지로 한국에 강요한 것은 마산포(馬山浦)의 강요와 아울러 일본을 격발하여 일아전쟁을 일으킨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도산은 환국하는 길에 동경에서 유학생 중의 저명한 인물들과 만났다. 그때에 동경에는 태극학회(太極學會)라는 유학생 단체가 있었다. 유학생 단체라고는 하나 일종의 애국적 정당이어서, 그 회합에서는 국가의 운명과 시국에 대한 대책을 토론하였고 《太極學報[태극학보]》를 발행하여 널리 국내 동포에게 정치적 계몽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 《太極學報[태극학보]》가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손에 꼽히는 애국적·정치적인 잡지였다. 얼마 후에 대한유학생회라는 것이 생겼다. 도산은 이 태국학회외 간부를 방문하였고, 그가 주최한 학생회에서 일장의 강연회를 행하였으니, 이것은 크게 청중에게 우리 나라에 큰 인물이 났다 하는 감격을 주었다.

그때는 도산이 처음 고국을 떠난 지 八[팔]년 후로 三[삼]십세의 청년이었다.

도산은 동경에서 첫 명성을 높인 것도 한 원인이 되어서 서울에 들어오는 길로 전 사회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당당한 풍채라든지, 웅장한 음성이라든지, 열성 있는 인격이라든지는 얼마 아니 되어 유근(柳瑾)·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 언론계의 지도자와 유길준(兪吉濬) 등 관계(官界)의 선각자와 이갑(李甲)·이동휘(李東輝)·노백린(盧伯麟)등 청년 장교요지사들이며,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전덕기(全德基)·최광옥(崔光玉)·이승훈(李昇薰)·유동열(柳東說)·유동주(柳東 作)·김구(金九) 등과 동지의의를 맺게 되었다.

특히 도산의 연설은 유명하였다. 도산의 연설이 있다면 회장이 터지도록 만원이 되었다. 그의 신 지식과 애국·우국의 극진한 정성과 웅변은 청중을 감동시키지 아니하고는 마지 아니하였다. 그는 거의 연일 연설하였다.

그가 동포에게 호소하는 주지는 일관하였으니, 곧 지금 세계가 민족 경쟁 시대라, 독립한 국가가 없고는 민족이 서지 못하고 개인이 있지 못한다는 것과, 국민의 각원이 각성하여 큰 힘을 내지 아니하고는 조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과, 큰 힘을 내는 길은 국민 각 개인이 각자 분발·수양하여 도덕적으로 거짓 없고 참된 인격이 되고, 지식적으로 기술적으로 유능한 인재가 되고 그러 한 개인들이 국가 천년의 대계를 위하여 견고한 단결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의 대세를 설하고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어떻게 미약하고 위태하여 흥망이 목첩에 있음을 경고하고, 그런데 정부 당국자가 어떻게 부패하고 국민이 어떻게 무기력함을 한탄하고,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결함을 척결(剔抉)하기에 사정이 없었다. 지금에 깨달아 스스로 고치고 스스로 힘쓰지 아니하면 망국을 뉘 있어 막으랴라고 눈물과 소리가 섞이어 흐를 때는 만장이 느껴 울었다. 그러나 그는 뒤이어서 우리 민족의 본연의 우미성과 선인의 공적을 칭양하여, 우 리가 하려고만 하면 반드시 우리나라를 태산반석(泰山磐石) 위에 세우고 문화와 부강이 구비한 조국을 이룰 수 있다는 것으로 만장 청중으로 하여금 서슴치 않고,

『대한 독립 만세.』

를 고창하게 하였다.

이 모양으로 도산의 귀국은 국내에 청신한 기운을 일으켰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의 민족 운동 이론의 체계였다. 다만 우국·애국의 열만이 아니라 구국제세(濟世)의 냉철한 이지적인 계획과 필성 필승(必成必勝)의 신념이었다. 도산의 사념과 신념은 당시의 사상계에 방향을 주고 길을 주었으니, 곧 각 개인의 자아 수양과 애국 동지의 굳은 단결로 교육과 산업 진흥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도산은 식자간의 여론 통일에 노력하였으나,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급진론자가 많았다. 그때에 급진론이라면, 당장에 정권을 손에 넣어서 서정(庶政)을 혁신하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니, 이 급진론은 도산이 그 중심 인물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이 급진이 성공 못할 것을 역설하고, 오직 동지의 결합훈련과 교육과 산업으로 국력·민력을 배양하는 것만이 유일한 진로라고 단정하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급진론자는 「국가의 존망이 목첩에 달린 이때에 국력, 민력의 배양을 말하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도산의 정로 점진론(正路漸進論)을 불만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힘없는 혁명이 불가능함을 말하였다. 갑신 정변의 김옥균 일파의 독립당 운동도 그러하였고 정유년의 서재필·이승만의 독립당 운동도 그러하였다. 번번히 「시급」을 말하고 「백년하청」을 탄하여서 「있는 대로 아무렇게나」로 거사하여서는 번번히 실패하지 아니하였는가. 「갑신년부터 단 결과 교육 산업주의로 국력 배양 운동을 하였던들 벌써 二[이]십여 년의 적 축(積蓄)이 아니겠는가. 정유년부터 실력 운동을 하였어도 벌써 십년 생취(十年生 聚), 십년 교훈이 아니었겠는가. 오늘부터 이 일을 시작하면 십년 후에는 국가를 지탱할 큰 힘이 모이고 쌓이지 아니하겠는가. 이 힘의 준비야말로 독립 목적 달성의 유일무이한 첩경(捷徑)이라」고 도산은 주장하였다.

도산이 급진론자를 경계하는 또한 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조정에 뿌리 박은 수구파 세력과 이등박문(伊藤博文)을 대표로 하는 일본 세력이었다.

급진론의 주장과 같이 신인들이 정권을 잡는 길은, 하나는 수구파(守舊派)와 합작하는 일이요, 또 하나는 일본의 후원을 받는 길이었다. 갑신의 김옥균이나 갑오의 박영효나 다 일본의 후원으로 수구파를 소탕하고 정권을 잡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외력을 빈다는 것이 원체 대의에 어그러질 뿐더러 비록 외국의 위력으로 일시 반대파를 억압한다 하더라도 억압된 반대파가 반드시 매국적 조건으로 그 외력과 다시 결합하여 신파에게 보복할 것이다. 하물며 이미 충군 애국(忠君愛國)의 정신을 멸여(蔑如)한 양반 관료랴. 그러므로 일본의 후원을 비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고 도산은 역설하였다.

이때에 최석하(崔錫夏)가 이등박문과 자주 만나서 한국 정치의 혁신 공작을 하고 있었고, 그는 안창호 내각을 출현케 하는 것이 한국의 혁신을 위하여 가장 양책임을 이등에게 진언하였다. 동시에도산에게 대하여서도 이등의 진의가 결코 한국의 병탄에 있지 아니하고 일본과 한국과 청국과의 삼국 정립 친선(三國鼎立親善)이야말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을 막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이등의 정견을 도산에게 전하였다.

이등도 도산을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표시하였다.

당시 이등은 한국의 조정에 인물이 없음을 잘 알고 또 반복 무상(反覆無常)하 여 신뢰할 수 없음을 아므로 민간지사 계급과 접근하여 이들 중에서 심복을 구 하기를 원하였다.

도산, 이등 회견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이 일이 있게한 것은 이 갑, 최석하의 권유도 원인이 되거니와, 도산도 이등을 만나 그 인물과 정견을 알아보자는 필요와 욕망을 느꼈다.

이등과 회견하였던 도산의 후일의 기억은 대강 이러하였다.

『이등은 일본의 동양 제패의 야심을 교묘한 말로 표시하였다. 자기의 평생의 이상이 셋이 있으니, 하나는 일본을 열강과 각축할 만한 현대 국가를 만드는 것 이요, 둘째는 한국을 그렇게 하는 것이요, 셋째는 청국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일본에 대하여서는 이미 거의 목적을 달하였으나 일본만으로 도저히 서양 세력이 아시아에 침입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으매, 한국과 청국이 일본 만한 역량을 가진 국가가 되도록 하여서 선린(善隣)이 되어야 한다고. 그러므로 자기는 지금 한국의 재건에 전심력을 경주하고 있거니와, 이것이 완성되거든 자기는 청국으로 가겠노라고. 이렇게 말하고 이등이 넌지시 도산의 손을 잡으며 그대와 나와 같이 이 대업을 경영하지 아니하려느냐고 공명을 구하였다.

그리고 이등은 도산더러 자기가 청국에 갈 때에는 그대도 같이 가자고. 그래서 삼국의 정치가가 힘을 합하여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자고. 이렇게 심히 음흉하게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도산은 삼국의 정립 친선이 동양 평화의 기초라는 데는 동감이다.

또 그대가 그대의 조국 일본을 헌신한 것은 치하한다. 또 한국을 귀국과 같이 사랑하여 도우려는 호의에 대하여서는 깊이 감사한다. 그러나 그대가 한국을 가장 잘 돕는 법이 있으니, 그대는 그 법을 아는가 하고 도산은 이등에게 물었다.

이등은 정색하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였다.

도산은 일본을 잘 만든 것이 일본인인 그대인 모양으로 한국은 한국 사람으로 하여금 헌신케 하라. 만일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미국이 와서 시켰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명치 유신은 안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고 최후에, 도산은 일본이 한국 사람이나 청국 사람에게 인심을 잃는 것은 큰 불행이다. 그것은 일본의 불행이요, 등시에 세 나라 전체의 불행이다. 이것은 그대가 열심히 막으려는 서쪽 세력이 동쪽으로 쳐들어오는 유인이 될 것이다. 일본의 압박 밑에 있는 한인은 도움을 영국,미국이나 러시아에 구할 것이 아닌가. 일본의 강성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여러 강국은 한국인의 요구를 들어 줄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은 여러 강국의 적이 되고 동양 여러 민족의 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노라.

도산은 다시, 그대가 만일 사이 좋은 이웃 나라의 손님으로 한양(漢陽)에 왔다면 나는 매일 그대를 방문하여 대 선배로, 선생님으로 섬기겠노라. 그러나 그대 가 한국을 다스리러 온 외국인이매 나는 그대를 방문하기를 꺼리고 그대를 친근하기를 꺼리노라.

한국의 독립을 제삼 제사 보장하고 일청,일아 양 전쟁후도 한국의 독립을 위함이라던 일본에 대하여 한인은 얼마나 감사하고 신뢰하였던가. 그러나 전승의 일본이 몸소 한국의 독립을 없이할 때에 한국인은 얼마나 일본을 원수로 보는가.

한,일 양국의 이 현상이 계속되는 동안 한인이 일본에 협력할 것을 바라지 말 라. 또 그대가 청국을 부축하여 도울 것을 말하나, 그것은 한국의 독립을 회복한 뒤에 하라. 청국 四[사]억 민중은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서 보호 관계를 맺은 일로 하여 결코 일본을 신뢰하지 아니할 것이다.

도산은 상당히 흥분한 연설 구조로 여기까지 말하고, 끝으로, 「이 삼국을 위하여 불행힌 사태를 그대와 같은 대 정치가의 손으로 해결하기를 바라노라」하였다.』

도산은 이등과의 면회에서 더욱 목하의 정처 운동이 무의미·무효과함을 알았 다. 심히 삼가는 이등의 말에서 도산은 두 가지를 발견하였다. 하나는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이것을 내어놓을 수 없다는 굳은 의도요, 또 하나는 현재 국내의 정치가로서는 역량에 있어서 이등과 겨를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등은 그 탁월한 식견과 수완 위에 전승 일본의 무력이라는 배경을 가지지 아니 하였는가. 이 이등과 협력한다는 것은 곧 그의 약낭(藥囊)에 들어 가는 것과 같 은 것이었다.

도산은 이 갑·최석하 등이 등을 이용하자는 정객들에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뿐더러 까딱하면 이등에게 역이용을 받아서 일진회(一進會)의 복철(覆轍)을 밟을 우려가 있다는 것을 정중히 경고하였다.

그리고 도산은 자기가 미국서부터 품고 온 계획대로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의 조직에 착수한 것이다.

그는 우선 기본되는 동지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기본되는 동지를 구하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믿을 만한 사람이요, 하나는 각도에서 골고루 인물을 구하는 것이니, 이것은 본래 여러 가지로 불쾌한 악습이 된 지방색이란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구한 동지가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최광옥(崔光玉)·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김동원(金東元)·이덕환(李德煥)·김구(金九)·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유동주(流動株)·양기탁(梁起鐸) 등이었다.

이러한 동지를 기초로 신민회를 조직하니, 그 목적은 (一[일]) 국민에게 민족 의식과 독립 사상을 고취할 것, (二[이]) 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의 역량을 축적할 것, (三[삼]) 교육 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의 교육을 진흥할 것, (四[사]) 각종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을 증진할 것 등이었다.

신민회는 비밀 결사로서 각도에 한 사람씩 책임자가 있고 그 밑에는 군 책임자 가 있어서 종으로 연락하고, 횡으로는 서로 동지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입회 절차는 심히 엄중하여서 「믿을사람」,「애국 헌신할 결의 있는 사람」,「단결의 신의에 복정할 사람」등의 자격으로 인물을 골라서 입회를 시키는 것이요, 지원자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회가 조직된 지 몇 해가 지내어도 그 가족 친지까지도 그가 신민회원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비밀을 엄수하는 것」을 신민회원은 공부하였다.

신민회가 있다는 소문이 나고 일본 경찰이 이것을 탐색하게 된 것은 합병 후였던 것으로 보아서 이 단결이 어떻게 비밀을 엄수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소위 사내 총독 암살 음모 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으로 七[칠]백여 명의 혐의 자가 경무총감부 명석 원이랑(明石元二郞)의 명령으로 검거될 적에야 비로소 세상은 신민회라는 것과 누가 그 회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민회는 중부와 남부에는 발달이 안 되고 경기 이북, 그중에도 황·평양서에 서 가장 많이 회원을 획득하였으니, 그것은 그때에 신 사상이 기독교회와 함께 경기 이북에 발달이 되고 충청 이남에는 아직 깜깜하였던 때문이다.

신민회는 그 자체는 비밀 결사였으나 사업은 공개하였다. 그 사업으로 가장 드러난 것은 평향 대성 학교, 평양 마산동 자기 회사, 평양·경성·대구의 태극서관과 여관등이었다(평양 대성 학교는 당시의 유지 김진후씨가 그땟돈 二[이]만원을 회사하여 설립했다.) 대성 학교는 각도에 세울 계획이었으나 평양 대성 학교는 그 제일 교요, 표본 교였다. 평양 학교를 실험적으로 모범적으로 완성하여서 그 모형대로 각도에 대성 학교를 세우고, 그 대성 학교서 교육한 인재로 도내 각군에 대성 학교와 같은 정신의 초등 학교를 지도하게 하자는 것이니, 그러므로 당시의 평양 대성 학교는(一[일])민족 운동의 인재, (二[이]) 국민 교육의 사부(師傅)를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도산은 평양 대성 학교의 무명한 직원으로서 교장을 대리하는 것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도산이 무엇에나 자신이 표면에 안 나서고 선두에 안 나서는 사업 방침에서 나온 것이어서 실지로는 도산이 대성 학교의 교주요 교장이었다.

도산이 대성 학교에 전심력을 경주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다만 생도 만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교원들을 동지의 의로 굳게 결속하였다. 그의 인격의 감화력이 어떻게 위대한 것은 잠시라도 대성 학교의 생도이던 사람은 평소에 도산을 앙모하게 된 것과, 어떤 사람이든지 대성 학교의 교원으로 들어오면 수 주일 내에 도산화한 사실로 보아서 추측할 것이다.

대성 학교의 생도는 창립 일주년이 되기도 전에 평양 신민의 경애를 받게 되 고, 휴가에 각각 향리에 돌아 가면 그 생도들은 대 선생의 훈도(薰陶)를 받은 선비의 품격이 있다. 하여 부로(父老)와 동배에게 놀람과 존경을 받았다. 이러하기 때문에 멀리 함북과 경남에서까지 책보를 끼고 대성 학교의 문을 두드렸고, 각지에 신설되는 학교들은 대성 학교를 표본으로 하였다.

도산은 생도의 정신 훈육을 몸소 담당하고 교무는 그때 유일한 고등 사범학교 출신인 장응진(張應震)씨가 말아서 하였다.

도산의 교육 방침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있었다.

도산이 주장하는 건전한 인격이란 무엇인가. 성실로 중심을 삼았다. 거짓말이 없고 속이는 행실이 없는 것이다. 생도의 가장 큰 죄는 거짓말, 속이는 일이었 다. 이에 대하여서는 추호의 가차(價借)도 없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이것이 도산이 생도들에게 하는 최대의 요구였다. 약속을 지키는 것, 집합하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 모두 성실 공부요, 약속을 어그리는 것, 시간을 아니 지키는 것은 허위의 실천이라고 보았다.

상학 시간 五[오]분 전에 교실에 착석할 것― 이것이 엄격히 이행되었다. 동창회나 강연회나 정각이 되면 개회를 선언함이 없이 자동적으로 개회가 되었다.

그처럼 시간 엄수에 훈련의 요목으로 역점을 두었다.

학과 시간에는 학과만 생각하는 것이 성실이었다. 다른 생각,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허위였다. 대성 학교 학과 시간에는 생도들은 목석을 깎은 사람들과 같이 고요하고 그들의 눈은 선생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강연회에 출석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벌제위명(伐齊爲名)이 조국을 쇠퇴케 한 원수라고 도산은 말했다.

동(動)할 때에 동에 전 심력을 기울이고, 정(靜)할 때에 정에 그리하여라. 흐리멍덩하고 뜨뜻미지근한 것으로 애국자는 못된다는 것이었다.

『대신이 이름만 대신이요 다른 일을 하므로 우리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다.』

도산은 이렇게 훈계하였다. 허위로 쇠한 국세를 회복하는 길은 오직 성실이 있 을 뿐이다. 제자(諸子)가 만인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됨으로 우리 민족이 만국에 신뢰받는 민족이 되게 하라. 이밖에 우리 나라를 갱생시키고 영광 있게 할 길이 없다고 효유(曉諭)하였다.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

하고, 도산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학도에게 타일렀다. 도산은 교내에 까다로운 규칙을 세우지 아니하였다. 법이 번(繁)하면 지키기 어려운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번 정한 법은 엄수하고 여행케 하였다. 준법(遵法)이야말로 국민 생활의 제일 의 조건이요, 의무다. 이미 법일진댄 지키는 데 대소와 경중이 없고, 상하와 귀천이 없다. 학교의 규칙이나 회의 규약이나 기숙사의 전례나 모두 법이다 단체 생활은 곧 법의 생활이다. 국가란 법의 위에 선 것이다. 법이 해이(解弛)하면 단체는 해이한다. 그러므로 도산은 학생들이 회를 조직할 때에는 입법을 신중히 하여서 지킬 수 있는 정도를 넘기지 말 것을 가르쳤다. 열심 있는 나더지에 가 번(苛繁)한 법을 만드는 것이 오래 가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였 다. 그 대신에 회원 중에 법을 범하는 자가 있거든 단호히 법에 정한 벌에 치할 것이요, 결코 용대(容貸) 있거나 사정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냉혹하게 말하였 다. 법은 냉혹한 것이다. 법과 애정을 혼동하는 곳에서 기강(紀綱)이 해이한다.

한 사람에게 하정을 씀으로 전체의 법이 위신을 잃고, 법이 위신을 잃으면 그 단체가 해이하고 만다.

이것도 도산이 우리 민족이 경법 준법(敬法遵法)의 덕이 보족함을 느낀 데서 온 대증요법(對症療法)이었다. 이씨 조선의 끝말에 소위 세도라는 것이 생기고, 매관 육작(賣官毓爵)이 생겨 악법 오리(惡法汚吏)가 횡행하매 국민은 법을 미워 하고 법을 벗어날 것만 생각하여서 경법,준법 관념이 희박하여지고 말았다.

이러한 반면에 도산은 학도들을 사랑하였고 모든 긴장을 풀고 유쾌하게 담소 오락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돌 것을 잊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좌석에서 도산 자신도 노래하고 우습광스러운 흉내도 내어서 남을 웃겼다. 학생들도 파겁(破 怯)을 하여서 어엿하게 나서서 제 장기대로 할 것을 권하였다.

도산은 학도들에게 노래를 부르기를 권고·장려하였다. 자기도 많은 노래를 지 어서 학생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자연의 경치와 음악·미술을 사랑하는 것 이 인격을 수련하고 품성을 도야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도산이 대성 학교를 완성치 못하고 제일회 졸업도 보지 못한 채 망명의 길을 떠났거니와, 그 짧은 기간에 청년에게 미친 감화는 말할 수 없이 컸다. 남강(南 崗) 이 승훈(李昇薰)이 오산 학교를 세운 것도, 함북에 경성 중학(鏡城中學)이 선 것도, 그 밖에 크고 작은 무수한 사립학교들이 서북 지방에 울흥(蔚興)한 데는 도상과 대성 학교의 공이 대단히 컸던 것이다.

남강 이승훈은 상인이었다. 그는 선천 오 치은(吳致殷) 집 자본으로 평양에서 인천 등지에 상업을 경영하여 거상이 되었다. 그는 재산을 얻었으나 문벌이 낮은 것을 한탄하여서 금력으로 양반집과 혼인을 하고, 자손을 위하여 경서(經署)를 준비하고, 고향에서당을 설립하여 아무리 하여서라도 그 자손으로 하여금 상놈이라는 천대를 면하고 양반 행세를 하게 하기를 결심하였다. 그는 자기 집 이 양반이 되려면 이문 일족(李門一族)이 함께 양반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흩어 져 있는 일가를 고향인 정주군 오산면 용동(定州郡五山面龍洞)으로 모아서 천한 직업을 버리고 농사짓는 데 종사하고, 자제를 교육하도록 마련하고 남강 자신의 주택과 이문의 서당을 건축 중에 있었다. 남강이 보기에 양반촌에는 사랑문을 열어 놓고 양객(養客)하는 집과 현송지성(絃誦之聲)이 끊이지 아니하는 서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때에 남강은 평양에서 도산의 연설은 들었다. 「나라가 없고서 일가와 일신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를 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리 수가 없 소」하는 구절을 듣고 그는 도산과 면회하여 도산의 민족론·교육론을 듣고는 죽일로 상투를 자르고 고향으로 돌아 와서 자기 주택과 서재의 공사를 중지하고 그 재목과 기와를 오산 학교에 썼으니, 이것이 오산 학교의 기원이다. 마산동 자기 회사(磁器會社)는 이 승훈이 사장이 되어서 물건 만들기를 시작하였다. 평양은 고려 자기의 발상지다. 고려인은 평양 부근의 석탄을 이용하여 고열(高熱) 을 발하기에 성공하였던 것이라 한다.

그때에는 한국이 거의 일본의 독점 시장이 되어서 일본인들은 일본 제품을 지고 홍수같이 반도로 밀려 들어왔다. 도산을 한국의 경제적 파탄을 막을 길이 자작 자급 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중에도 공업의 진홍은 한국의 생명선이라고 보았다. 그는 신민회의 동지에게 조국을 살리는 것이 다만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력이라는 거을 역설하였다. 도산은 대중에 대한 수다한 연설에도 산업을 진흥함이 곧 애국이요, 구국(救國)이라는 것을 말하고 경제적 침략이야말로 군사적 침략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인식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도산은 부자 친구도 소중히 여겼다. 그것은 부자가 학교도 세우고 산업도 일으킬 실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선천의 오 치은은 도산과 협력한 부자 친구 중에 하나였다. 그때에는 아직 회사라는 것이 드물었다. 다수인의 자본을 모아서 대 자본을 만들어서 대규모의 상공업을 경영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마산동 자기 회사는 아마도 민간 최초의 주식회사였을 것이다. 부자는 제 자본을 가지고 제가 경영하거나, 신임하는 어느 한 사람에게 자본을 주어서 경영하는 것 밖에 몰랐다. 이것은 기업 지식이 없는 것도 원인이어니와 신용이 박약한 까닭이었다. 도산은 우리 나라의 산업을 진흥함에도 가짓말 말기 운동, 신의 지키기 운동이 기본이 됨을 절실히 느꼈다. 다행히 이승훈이 평양 상계에서 신용으로 성공한 사 람이기 때문에 마산동 자기 회사가 성립된 것이다.

도산은 평양 대성 학교를 완성하여 그 성가(聲價)와 실적을 보임으로 전국에 교육의 모범이 되어 학교 설립의 자극이 되게 하려고 한 모양으로, 마산동 자기 회사를 성공케 하여 전국에 산업 운동을 일으키는 본보기를 삼으려 하였다.

도산은 「본보기」라는 것을 심히 중요시하였다. 이론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실천되어서 한「본보기」를 이루기 전에는 널리 퍼질 방책이 생기지 못한다고 도산은 보았다. 학교 교육에 대한 천 마디 말보다도 본보기 학교 하나를 이루어 놓는 것이 요긴하니, 그리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방하려 하는 것이다. 새로운 이론을 내는 것도 천재적 독창력을 요하거니와, 어떤 이론을 응용하여 구체적으 로 실행하는 것도 천재적인 비범한 인물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훌륭한 이론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현실화하는 힘을 가진 인물이 아니 나기 때문에 이론이 이론대로 묵어 버리고 마는 예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한번 본보기가 생기면 그것을 모방하기는 성력(誠力)만 있는 인물이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도산은 본보기 첫 사업을 중요시한 것이었다. 평양 대성 학교를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좋은 학교로 만들어 놓기만 하면 우리나라에는 그와 같은 학교가 많이 생길 수가 있고, 마산동 자기 회사가 좋은 물건도 만들고, 이익을 내기만 하면 전국에 그러한 회사가 많이 생기리라고 믿었다. 도산은 인격 수련에 대하여서도 이 본보기라는 「 」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중에 하나 거짓 없는 사람이 생기면 거짓 없는 많은 사람이 생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도산은 항상 말하기를,

『나 하나를 건진 인격을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하였다. 나 하나만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느냐.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나를 먼저 새사람을 만들어 놓아라 그러하면 내가 잠자코 있어도 나를 보고 남이 본을 받으리라― 이러한 생각이었다.

태극서관은 서적을 발행하고 보급하는 것이 원체 목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도산은 출판 사업을 평생에 중요시하였다. 어떤 사상과 지식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서 널리, 길게 전하는 것이 도서(圖書)니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보급·향상하려면 출판 사업이 요긴하다. 그러나 그보다 이상으로 태극서관의 사명을 중대하게 하는 것은 민중에게 건전한 출판물을 제공함이었다. 민중의 저급한 기호(嗜好)에 투(投)하여 그 품격을 타락케 하는 서적을 퍼뜨린다든가, 또는 국민을 잘못 인도하는 사상을 침투시키는 그러한 출판물은 회복하기 어려운 해독을 주는 것이니. 출판 사업은 마땅히 영리적 이해 타산을 초월하여 국가 민족을 위하는 높은 견지에서 할 것이라 하는 것이 도산의 출판 사업관이었다.

『책사(冊肆)도 학교다. 책은 교사다. 책사는 더 무서운 학교요, 책은 더 무서운 교사다.』

도산은 이러한 견지에서 태극서관이 우리 민족에게 건전하고 필요한 서적을 공급하는 모범 기관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우선 평양과 경성(京城)과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운 것이니 이 사업의 중심 인물은 안 태국(安泰國)이었다.

태극서관이 장차 인쇄소를 가지고 저술부·편집부 등을 두어서 각종 정기 간행물과 도서를 출판할 계획을 가졌음은 물론이었다.

서적과 출판물을 민족 문화 향상, 민력 발휘의 근원으로 중요시하는 도산은 자연히 문사라는 것을 대단히 존중하였다. 그는 좋은 문사가 민족의 힘의 중요한 구실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가 후에 조직한 수양 단체를 흥사단(興士團)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유길준(兪吉濬)의 홍사단을 전습하는 동시에 「士[사]」를 양성하는 단체라는 뜻이었다. 「士[사]」라는 것은 천하 국가를 위하여 살고 일신의 이해 고락·생사 영욕(生死榮辱)을 초월한 사람을 일컬음이니,「士[사]」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어, 하나는 문사요, 하나는 무사라, 국가는 이 양사에 의하여 수호되고 발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산이 생각하는「士[사]」는 우리가 종래에 생각하던 사류(士類)와는 달랐다 종래의 사류라는 것을. 학문과 문무로만 업을 삼는 일종의 계급적 존재지만, 도산에 의하건댄 농(農)이나 공(工)이나 상(商)이나 선공후사(先公後私)하여 나라의 이익과 백성의 복을 염두에 두는 자면 다 사류였다. 그가 신민회원으로 모으고자 하는 것이 이러한 사류였다.

그러나 순수한 사류는 문사와 무사였다. 그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로서만 만족하지 아니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를 행의 목표로 삼는 자이기 때문이다. 문 사는 일관필(一貫筆)로, 무사는 일정검(一仗劒)으로 위국효사(爲國效死)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 문사로 신문이나 잡지에 집필한 명사로는 《皇城新聞[황성신문]》에 유근(柳瑾)과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에 양기탁(梁起鐸)과 신채호(申采浩) 등이 가장 저명하였다.《帝國新聞[제국신문]》에는 최영년(崔永秊)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문학의 선비로서 박여 암 지원(朴燕巖地源)의〈熱河日記[열하일기]〉, 유길준의 〈西遊見聞[서유견문]〉, 청국 양계초(梁啓超)의〈飮氷室文集[음빙실문집]〉에서 세계 대세와 신 사상을 흡수한 이들로서 독립주의의 정치론은 주르 집권 계급인 원로 관로(元老官療) 양반배를 공격하였다.

최광옥은 아직 청년이었으나 기독교인으로 조행이 심히 깨끗하고 애국 지사요, 또 국어를 연구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법을 저작하였으며, 글의 재주도, 말의 재주도 있었고 도산의 민족 향상 사상과 방책에 전폭적으로 공명하였다. 도산의 생각에 최광옥으로써 청년학우회의 인격자의 모법을 삼으려 하였다.

청년학우회야말로 신민회나 대성 학교 이상으로 도산이 심력을 경주한 사업이 요, 또 민족 향상의 가장 중요한 길이라고 보는 방편이었다.

신민회에도 수양의 일면이 있었다. 구습을 고치고 새로운 국민성을 조성한다는 의도와 노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성 인물의 자아 혁신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三[삼]십세 이상이 된, 게다가 일류 명사로들 자처하는 인사들이 사정 없이 냉혹하고 날카롭게 자기를 양심의 법정에 피고로 내세워서 반성하고 비판하여 어린아이처럼 겸허한 재출발을 도모하는 것은 여간한 현인 구자 아니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 성인의 안중에는 이해관과 사업욕이 앞을 서기 때문에 자아 혁신의 도덕적 수련이 깊은 흥미를 끌지 못한다. 하물며 반성 자수(反省自修)의 기풍이 소잔(銷殘)한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민족 향상은 각 사람의, 그중에서도 지도자층의 각 사람의 자기 개조가 아니고는 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역사상으로 보더라도 한 번 쇠하기 시작한 민족은 부흥의 벼루로 거슬러 오름이 없이 멸망의 구렁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도산의 눈에는 국가의 정치적 독립 여부 이상으로 민족의 홍망이 보였던 것이다. 민력·민기(民力民氣)가 흥왕하면 국가의 독립과 창성(昌盛)은 필연적으로,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현재 상태로는 비약의 사망이 묘연(渺然)하였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민족 혁신 운동이 시급하였다.

이를테면, 우리 민족을 도덕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경제 능력으로나 영국민만 한 정도에 끌어 올려야 우리 나라가 영국만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니, 민족의 역량은 요만한 채로 국가의 영광은 저만하자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여서라도, 그야말로 무슨 짓을 하여서라도 우리 민족의 픔 격과 역량의 향상을 도모하여야 하겠고, 그도 급속히 하여야 한다고 도산은 보았다.

신민회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어니와, 그보다도 기본이 되는 것은, 아직 구습에 물 안 들고 대지(大志)와 열정이 그대로 있는 청년, 그중에 학도들을 결합하여서 일대 수양운동, 즉 민족 향상 운동을 일으키려고 하여서 조직된 것이 청년학우회였다. 청년학우회는 합병 전해인기유년에 발기되었다.

그 주의·정신은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사대 정신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 생활의 훈련을 힘쓰며, 한가지 이상의 전문 학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하고, 평생에 매일 덕(德)·체(體)·지(智) 삼육에 관한 행사를 하여서 건전한 인격자간 되기를 기하자는 것이었다.

이때는 통감 정치(統監政治)도 벌써 수년이 지나서 일본의 경찰망이 한국인의 언행을 무시로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배일적인 색채가 보이면 탄압하던 때라 모든 단체가 다 그 경제망에 걸리지 아니하도록 전선긍긍하던 때요, 또 무슨 집회나 경사나 한국인이 하는 것은 다 내부 대신의 허가를 얻어야 할 때였다.

청년학우회는 정치적 성질을 띤 것이 아니라고 하여서 내부 대신의 허가를 받 았다.

사실상 청년학우회는 정말로 비정치적 결사일 뿐더러 또 정치적이어서는 아니 된다고 도산은 역설하였으나 당국은 물론이요 동지들 중에까지 이 결사의 비정 치성을 아니 믿고 그것은 한 카무플라즈라고 생각하였다. 그때에 국내는 일본에 대한 의구(疑懼)로 국가의 운명에 대한 의식이 심히 민감하였기 때문에 무슨 행동이나 정치성을 아니 띠기가 어려웠고, 또 도산이 아무리 자기는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사실상 평양 대성 학교에 칩거하여 외계와 접촉이 없는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당국이나 온 나라 사람이 다 그를 정치가요 혁명가로 주목하였다. 도산은 이 청년학우회 운동과 대성 학교에 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대중을 향한 연설도, 서울 오는 것도 피하고 있었다.

도산은 민족 향상 운동은 도덕 운종이지 정치 운동이 아니라고 절연(截然)히 구분하였다. 그것은 다만 당시 일본의 누르는 밑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완전히 독립권을 회복한 뒤에라도 민족 운동은 정치성을 띠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도산의 이 의견은 민족 운동을 위하여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그가 민족 항상 운동이 정치적이어서는 아니 된다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 인 두 가지로 가를 수가 있다. 내 적인란 것은 민족 향상 운동자가 정치적 야심을 가지게 되면 그 운동을 정치에 이용할 걱정이 있고, 또 도덕적 민족 향상의 가치를 정치보다 아래로 떨어뜨릴 근심이 있다. 민족 향상 운동은 정치보다도 무 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우리 민족으로서는 이 민족 향상 운동이 아니고는 심하면 멸망하고, 적어도 금일의 빈천의 경지를 탈출할 수가 없다. 아무러한 정치라도 향상되지 아니한 민족으로 좋은 국가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망국하던 민족이 그대로 홍국하는 민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쓰러진 집을 썩은 재목으로 새 집을 세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민족 향상 운동은 인(因)이요. 정치는 과(果)다. 민족 향상 운동은 구원(久遠)한 것이요, 정치 운동은 일시적인 것이다. 정치가 민족 향상 운동을 원조하고 촉진할 수는 있어도 정치가 곧 민족 향상 운동을 못되는 것이니, 민족 향상 운동은 정치가가 권세도 할 것이 아니라 도덕가가, 지사가. 오직 헌신적인, 종교적인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다.

도산은 조국이 부강한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른 동지들과 다름이 없 었다. 오직 한 가지 다른 점은, 다른 동지들은 이 민족을 그냥 가지고 혁명 운동만으로 또는 정치 운동만으로 당장에 그 부강한 조국을 이루자는 데 대하여, 도산은 민족의 품격과 역량을 향상하는 것이 혁명이나 정치에게도 어머니다 되 나니, 부강한 조국에 급속히 도달하는 길에는 향상 운동의 관문을 통과하지 아 니하는 지름길은 없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하기 때문에 민족의 영원한 생명과 그 성쇠 흥망을 염두에 두는 도산에게는 정치의 일시적 오르내림보다도 민족의 항구적 운명이 관심되었다. 이것이 내적으로 민족 향상 운동이 정치성을 띠어서는 아니 된다는 이유였다.

그 외적 이유란 이러하다. 원래 정치적 세력이란 언제나 소장(消長)이 있는 것 이다. 정권은 갑(甲)파에서 을(乙)파로 이동되는 것이니 정권에 붙어 의지하는 자는 물론이어니와 거기 관련을 가진 자도 그 세력과 소장(消長)을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구하여야 할 사업은 정치적 권세의 권외에 초연(超然)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학우회는 민족 향상 운동의 근원이 될 사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민족 향상 운동의 근원이 될 사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민족의 생명과 길기를 같이 하여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이 단결 속에서 수련된 인물이 정치가도 되 고 군인도 문사도 실업가도 , ,, 되려니와, 이 수양 기관 자체에는 정치성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다. 도산은 이 원칙을 후일 흥사단의 조직에도 적용하였음은 물론이다.

다른 생각이 다 그러한 것같이, 이 생각도 도산의 독창임은 물론이어니와 역사 상으로 보더라도 불교나 예수교가 정권과 관련하기 때문에 국가에는 폐해가 되 고, 그 자체에는 타락된 예는 매거(枚擧)키 어려울 만하다.

아무려나 민족의 질을 변하여 의식적으로, 목적적으로 향상하여서 민족을 구하 자는 도산의 이 운동이 우리 나라에서만 초유의 일이 아니라 실로 세계사상에 유례가 없는 일이니, 굳이 그와 비슷한 예를 말한다면 옛날 프러시아의 수덕단(修德團·Tugend Bund)일 것이다.

옛날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그의 조국인 아테네를 구하려고 청년과 문답의 방법으로 궤변을 타파하고 진과 선을 주장하기로 일생을 바쳐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지행할일(知行合一)의 철학을 이루었으나, 그는 단결이라는 방편을 사용하 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곧 그 운동의 죽음이 되어서 조국 구제의 목적을 달치 못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철학을 지으려고 철학을 한 것이 아니요,. 그의 조국을 구하려는 노력이 철학이 된 이었다. 도산은 이러한 큰 포부로 민족의 영원한 번창과 영광을 염원하면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청년학구회 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경성·개성·대구·평양·오산·의주 등 중학교가 있는 지역에 청년학우회가 생겼다. 중앙에는 연합회를 둘 계획이었다. 그러나 합병의 비운이 다닥뜨려 모든 결사와 신문이 해산을 당하매 청년학우회도 발기위원회인 채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것은 수년 후에 북미에서 다시 도산의 손으로 흥사단이 되어서 계승되었고, 국내에서는 수양 동우회라는 명칭으로 십수년 계속하다가, 연전(年前) 일본 남차랑(南次郞) 총독 시대에 동우회 사건으로 일망 타진되어 사십여 명이 四[사]년간 미결에 신음하는 통에 해산 명령을 받았고 도산도 이 사건으로 입옥 중에 병사하였다. 흥사단과 도산의 죽음에 관하여서는 다른 장에서 말할 때가 있을 것이다.

第四章[제사장] 亡命[망명][편집]

― 失國前後[실 국전후]의 劇的 事案[극적 사안] ―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병탄의 의도는 기(機)를 따라 명백하여지고 그 압력은 날로 심하여졌다.

一九○七[일구공칠]년 해아 평화 회의(海牙平和會議)에 광무 황제가 이 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偉鍾)등 밀사를 보내어서 일본의 한국에 대 한 보호권 설정은 일본 측의 무력의 협박에 의한 것이요, 한국 황제의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루우스벨트 미국 대통령이하 각국 대표간에 선전하고 회의 참가를 요구하다가 거절되어 이 준이 할복 자살한, 소위 밀사 사건을 이유로 일본 외무대신임 훈(林薰)이 직접 서울에 와서 광무 황제가 황태자에게 양위를 강요함이 되고, 인하여 징병령 실시까지라는 핑계로 한국의 군대를 해산한 것은 합병에 다음가는 비극의 절정이었다.

서울에는 해산당한 군대와 민중의 시위 반항이 일어나 이미 일본의 수중에 들어 간 한국의 경찰과 일본 군대의 탄압으로 수일간 피가 흘렀고, 각지에는 의병이 봉기하여서 일군에게 진정될 때까지에는 삼만 명이나 전사하였다.

그러나 조정에는 인물이 없을 뿐더러 벌써 이른바 칠적(七賊)이라는 친일파가 발호하여 송병준(宋秉畯) 같은 자는 광무 황제에게 일본으로 가서 사죄를 하고 장곡천(長谷川) 일본군 사령관 앞에 친히 가서 사죄하라고 권하였고, 이 병무(李秉武), 조 중응(趙重應) 같은 자는 황제 앞에서 혹은 칼을 빼기도 하고 혹은 전화선을 끊음으로 임금을 협박하여 일본의 요구에 응종케 하였다. 이완용(李完用)이 친일파의 괴순이 성격도 점차로 탄로하였다.

김 윤식(金允植)·민영소(閔泳昭)등 원로라는 자들도 일본의 위엄에 눌러 다 만 문을 닫고 밖에 나오지 않거나 병이라 칭하고 입을 봉하고 입을 봉하는 것이 로 일을 삼았고, 혹시 어전에 불리어 책임 있는 태도를 표시하지 아니치 못할 경우에는 「불가불가」(不可不可)식 궤변을 썼다.

이것은 모원로가 보호 조약에 대한 필답으로 「불가하다, 불가하다」하는 강한 반대의 의사로도 해석되고 불가불 가하다는 부득이라는 의사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일본 사신이 황제에게 의사를 물으면 황제는 대신과 원로에게 미루고, 대신과 원로들에게 물으면 황제에게 미루어 버렸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는 자가 없었다. 일본에게 미움을 받기도 무섭고 국민에게 누명을 쓰기도 무서웠다. 어찌어찌 교묘하게 일신 일가의 위엄을 벗어나자 하는 것이 그들이 심사였다.

그러면 민간 지사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큰 단결도 없고 다른 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개인 개인으로 도끼를 메고 상소(上疏)를 하거나 순국적 자살을 하는 일이었다. 과연 이러한 일을 하는 이는 많았다. 그것이 국민의 애국적 도의심을 자극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대세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밖에 할 수 있는 일은 당로 대관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군대 해산에 동의 한 군부 대신 이 병무(李秉武)는 자기 집 침실에서 암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군대 해산을 막을 수는 물론 없었다. 기유년, 즉 一九〇九[일구 공구]년 가을에 안중근(安重根)은 나라의 원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하르빈 정거장 앞에서 쏘아 죽이어 세계를 용동(聳動)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대세의 움직임을 전환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안중근 자신의 한 일로 보아서 분명하다. 그는 의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서 국내에 쳐들어 왔었다.

만일 二[이]천만이 응하기만 하면 이것으로 정면 대항을 하자는 것이었다. 불행히 二[이]천 국민은 거기 응할 준비도 역량도 없어서 안중근은 일병에게 패하여 겨우 두 명의 수종자를 데리고 도망하였다. 이에 그는 대거 항전의 시기가 아님을 한탄하고 단신 항전을 결행한 것이었다.

一九〇七[일구공칠]년, 즉 정미 칠조약 이후 한국에는 해산 전 한국 군대보다도 수배나 되는 일본군이 국내 각지에 수비대라 하여 배치되고, 헌병과 경찰이 물 부어 샐 틈 없이 경계망을 펴 놓았다. 그야말로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론 기관도 엄중한 겸열을 받아서 오직 영국인 배설(裵設)의 《大韓每日申報 [대한매일신보]》와 《英文[영문] 서울 프레스》만이 자유로웠다.

국가의 앞 길은 암담하고 의병의 비극은 산비(酸費)하였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한탄하면서 오직 술이 취하여 노래를 부름으로 비분강개(悲憤慷慨)의 심회를 발산하였다.

『 석탄 백탄 타는 데는 연기나 펄펄 나건만 요내 간장 타는 데는 연기도 불길도 아니 난다.』

하는 것이 당시 청년 지사들이 사랑해 부르던 사발가였거니와, 이 노래는 그때 애국자의 심경을 잘 표현하였다고 할 것이다.

이등박문이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이용하여, 또 군벌에게는 적이던 이등박문이 없음을 좋이 여겨 군벌 거두 계태랑(桂太郞) 일본 수상은, 육군 대신이요 역시 군벌 거두인 사내 정의(寺內正毅)를 한국 통간으로, 산현유붕(山縣有朋)의 아들 산현이 삼랑(山縣伊三郞)을 부통감으로, 육군 소장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을 경무총감으로 하여 한국에 파견하니, 이것이 바로 경술년 七[칠]월이었다. 볼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최후적 강압 정책의 준비인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명석 원이랑은 서울에 부임하여 도착하는 즉시로 일변 한국의 명사를 초연하여 그 의향을 타진하고, 다수의 밀정을 놓아서 민간 유지들의 행동을 염탐하였다.

그리하여서 친일파·배일파의 명부를 작성하여서 七[칠]월 하순경에 벌써 민간 유지의 헌병대 검속이 시작되었으니, 안창호는 개성 헌병대에, 이 갑·이동 위·유동열 등은 용산 헌병대에 유치되었다. 명석의 판단으로는 서북인, 그중에서도 군대 출신이요 안창호. 일파라고 지목되는 자를 탄압함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이 기회에 이동휘에 관하여 한 마디 할 필요가 있다. 이동휘는 함남 단천 사람으로, 군대 헤산 당시 육군 참령(陸軍參領)으로 강화 진위대(江華鎭衛隊) 대 대장이었다. 군대가 해산된 후 그는 개성을 벽두로 각지로 유세하여 학교 설립을 권장하여 二,三[이,삼]년 내에 백여 학교를 세웠다. 웅변은 아니나 그의 열변은 연설로나 좌담으로나 사람을 움직임이 컸고, 안창호와는 아우 형님으로 서로 부르며, 이 갑과는 문경지교(刎頸之交)였다. 그가 경무총감부에 잡혔을 때에 심문관에게,

『너희가 같은 동양인으로 우리 한국에서 이러한 불법부도(不法不道)를 행하면 너희 일본인의 잔등에 맞는 서양인의 채찍 자국에서 구더기를 파내는 것을 내 눈으로 볼테다.』

하고 호령한 것이 오늘날 와서 보면 꼭 맞는 예언이 된 것도 신기한 일이다.

도산이 개성 헌병대에 수금되었을 때에는 남녀 학생들이 밤에 헌병대 주위에서 애국가, 기타 도산이 지은 창가를 부르고, 혹은 전화로 도산에게 창가를 불러 드려 준 여학생도 있었다.

이때에 밖에서 운동한 것이 최석하(崔錫厦)였다. 최석하는 동경 명치 대학 법과 출신으로, 일본말에 능하고 또 일아 전쟁에는 학생으로서 통역으로 종군한 일이 있으며 외교적 재능이 있어서 이등 통감 시대 이래로 일본측과 교섭하여 오던 경력이 있었다.

사내는 최석하에게, 일본의 본의는 한국의 독립을 존중하여 사이좋은 이웃을 만드는 데 있지마는 한국 황제와 정부가 매양 일본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제삼국에 대하여 음모를 일삼으며 또 한국의 내정도 정대로 개선이 아니 되니, 이 대로 가면 필시 제삼국의 간섭을 끌어 들여 화가 일본과 동양에 미칠 것을 염려 하므로 일본으로서는 중대한 결의를 아니할 수 없거니와, 만일 한인이 자진하여 일본에 대한 모든 조약의 신의를 이행한다면 그런 다행이 없으니 안창호 내각을 조직하여 일본과 협력케 함이 어떠하냐 하였다. 이에 최석하는 자기가 그대로 힘쓸 터이니 각 헌병대에 구금된 안창호, 기타를 즉시 석방하기를 청했다.

사내는 곧 명석원이랑에게 안창호 등의 석방을 명하였다.

추측컨댄, 안창호등을 헌병대에 구금하여 거처를 자유롭게 하고 외부와의 전화 연락까지 허용하도록 우대한 데는 사내측에서는 예정한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본으로서는 합병의 단행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비록 일영 동맹의 갱신(更新)이 있었다 하나 그것이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견제(牽制)인 것을 모를 리가 없고, 또 러시아가 비록 일본에게 패하였으나 혁명란이 일어나 로마노프 제국이 무너질 듯하던 것이 의외에 다시 안정이 되어서 그의 호시탐탐한 태평양 진출의 숙원을 실현하려고 동할는지도 모르는 것이며, 겸하여 한국의 합병이 중국의 민심에 미쳐 일본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격발(激發)할 것도 모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합병이라는 대죄 대악(大罪大惡)을 범함이 없이 그 실속만을 체우려 함이 이등박문의 소위 은화파(穩和派)의 의향이었던 것이다. 합병을 목적으로 왔을 사내가 지사에게 한번 교섭을 건네어 보는 심사가 여기 있었을 것이다.

최석하는 원동(苑洞)이 갑의 집에 도산, 기타 주요 인물을 모으고 사내의 의향을 통하였다. 그러고 밤이 깊도록 이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의론이 많았다. 최석하는 일본의 진의(眞意)가 반드시 한국을 합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 지금 잘 하면 일본과 충돌되지 아 니하고도 국맥(國脈)을 보전할 수 다는 것을 역설하여 일본측의 최초요 최후의 제안인가 싶은 민간 지사와 손잡자는 의도를 거절할 것이 아니라 하여 도산의 결의를 재촉하고, 이 갑은 최 석하와는 다른 견지에서 역시 호기물실(好機勿失) 을 주장하였다. 이 갑의 견지라 하는 것을 다름이 아니었다. 어떻게 잡든지 한 번 정권을 손에 잡기만 하면 무단정책(武斷政策)을 써서 일사천리로 수구파를 복멸하고 서정(庶政)을 혁신하여서 일본으로 하여금 간섭할 구실을 찾지 못하게 하면서 급속히 나라의 힘을 배양하여 일본의 겸제(箝制)를 벗어나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논에 대하여 도산은 시종 침묵을 지키고 다만 경청하고 숙려(熟廬)하는 양을 보였다. 최후에도산은 입을 열어서 일본의 제안에 응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단정적으로 반대하고 서서히 그 이유를 말하였다.

첫째로, 이번 사내가 통감이 되어서 온 것은 일본으로서는 한국에 대하여 이미 최후의 결심을 하고 앞에 남은 것은 오직 그 실현 방책뿐이다. 가장 언정 이순(言正理順)하게 가장 세계의 비난을 적게 받고 한국 병탄의 목적을 달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을사와 정미의 조약 때처럼 이 번 병합이 폭력으로 강압으로 된 것이라고 비난받을 일이다. 이 비난을 면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병합을 한국의 민의라고 내세우기에 이용할 만한 핑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 민간 지사에게 정권을 주다는 것은 백성의 원망의 과녁이 된 귀족 계급― 일본의 허수아비라는 친일파의 속에서 말고, 애국지사라 하여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민간인 정권으로 그 손에서 주권의 양여(讓與)를 받자는 혼담(魂膽)이니 우리가 이제 정권을 받는 것은 그 술책 속에 빠지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비록 권모로 하는 일이라 (權謀)하더라도 정권을 손에 가진 우리가 꾿꾿 하게, 강경하게 자주 독립을 견지하여 한사코 항거하면 좋지 아니하냐 하는 이론에 대하여 도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일본의 손으로 주는 정권을 받은 우리가 손에 촌철(寸鐵)이 없이 무엇으로 일본의 의사를 항거하는 정책을 행하랴. 그러 므로 한번 우리가 정권을 받는 날은 우리는 일본의 수족이 되는 길 밖에 없느리라는 것이었다.

도산은 또 말하였다. 설사 백보를 양보하여 민당 정부가 생겨서 어떤 기간 혁신 정책을 쓸 것을 일본이 방임한다 하더라도 자기 주머니 속 물건으로 알아 오던 정권을 잃은 귀족 관료는 필시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일본에게 아부하여 정권 획득 운동을 할 것이다. 그리되면 일본은 싼 값으로 판다는 물주를 고맙게 여겨 민간 정권을 배제할 것이 아닌가. 만일 우리가 음모로써 음모를 대하고, 아부로써 아부를 항(抗)한다 하면 우리 민간 지사라는 것도 결국 이완용·손병준배와 가릴 것 없는 무리가 되어 버리지 아니하는가.

그러면 국가의 흥망이 경각에 달린 이때에 우리 무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다 만 수수방관(袖手傍觀)할 것인가. 하고 깊은 밤중에 앉은 좌석에는 비분한 살기 가 있었다. 도산의 이론에 수긍은 하면서도 최후 일전(最後一戰)의 호기를 놓치는 듯한 생각이 누구에게나 있는 동시에 기울어지는 나라를 버틸 길이 없는 안타까움이 북받쳐 올랐다. 도산은 최후의 단안을 내렸다. 우리 애국자에게 남은 길이 오직 하나가 있다. 그것은 눈물을 머금고 힘을 길러 장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망국의 비운을 당한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은 까닭이니, 힘이 없어 잃은 것을 힘이 없는 대로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내에 있을 수 있는 자는 국내에서, 국내에 있을 수 없는 자는 해외에서 수양·단결·교육·산업으로 민력을 배양하는 것이 조국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도산은 낙루하였다. 만좌가 느껴 울었다.

이리하여 망명할 일이 결정되었다. 우선 사내에게 대하여서는 며칠 동안 고려할 여유를 청한 뒤에 안창호·이갑·이 동년·이시영·유동열·이동휘·이종호·신체호·조성환 등이 망명할 준비를 하였다. 안창호·이갑은 구미에서 동포 지도와대 외교섭하는 일을 맡고, 이동녕은 러시아의 연해주, 이동휘는 북간도, 이 시영, 최석하는 서간도, 조성환은 북경, 이 모양으로 각각 해외에 가서 활동할 구역을 분담하고, 국내에 남아 있을 이로는, 서울에 전덕기, 평양에 안태국, 평북에 이승훈, 황해도에 김 구, 이 모양으로 떼어 맡고, 이종호는 해외로 나가서 하는 모든 사업의 자본을 대기로 하였다. 이종호는 이용익(李容翊)의 장손으로 보성학교, 보성관 등 교육·출판사업을 경영하고 그때에 상해의 덕화은행(德華銀行)에 그 조부가 하여 놓은 거액의 예금이 있었다.

이상은 다 신민회로서의 계획이었다.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와 서·북간도에는 이미 수십만으로 헤아릴 동포가 거주하고 있었거니와 을사·정미 이래로 망명 겸한 재산 있고 지식 있는 인사의 이 주로 급격히 늘어 갔다. 이 동포들을 지도 계발하여 문화와 산업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독립 운동의 한 날개를 삼자는 것이다.

조성환은 북경에 있어서 일변 중국 인사와 교제를 맺고, 일변 국내로부터 남녀 유학생을 북경에 보내어 학문을 하면서 중국 유학생들과 친우가 되어서 장래에 대비하자는 것이니, 대개 한국 독립 문제는 중국의 협력을 얻음으로만 해결 될 수 있을 뿐더러 아시아 대륙 침략의 일본의 제국주의를 막는다는 점에서도 한국과 중국과의 동지적 친교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중국 인사에게 인식시키자고도산도 그의 동지도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도산은 우리의 독립이 오직 우리 민족의 자력에 있음을 확신하고 또 힘써 말하였거니와, 국제 관계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看過)하지 아니하였다. 도산의 염두(念頭)에 있는 한국의 우방으로는, 첫째로 중국, 둘째로 미국이었다. 이 갑·이동휘 등은 러시아를 중요시하였으나 도산은 러시아를 위험시하였다. 그것은 러시아가 증왕에 한국에 대하여 군사 기지를 강요한 과거도 과거려니와, 러시아의 전통적인 태평양 진출책의 기지로 가장 요긴하고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목표가 된 것이 한반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세력이 꺾이는 날이 있다면 그때에 일본을 대신하여 한반도를 수중에 넣으려 할 자는 중국도 아니요, 미국 도 아니요, 러시아라고 도산은 보았다. 러시아가 지중해도 진출하는 길에 대한 토이기, 인도양에 대한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아프가니스탄과 아울러 한국은 표트르 대제 이래로 외교와 군사의 목표였었다. 그러므로 당장 일본에 대하여 이해가 일치된다는 목전의 편이로 러시아에 지나치게 접근한다는 것은 한국을 위하여 후환을 남길 걱정이 있다는 것이 도산의 의견이었다. 정치가의 짧은 소견이 매양 일시적인 이해에 현혹하여 뒷날의 큰 환란을 불러 들인다는 것을 도 산은 항상 경계하고,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도 이러한 관점으로 보아서 반드시 일본을 위하여 큰 후환의 원인이 될 것을 이등박문에게도 설파하였다.

도산은 오직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대하여 탐욕(貪慾) 없는 친구가 될 나라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동휘·이시영·조성환 같은 유력자를 중국에 머물게 하는 것을 주장하고, 도산 자신은 재미 동포와 미국에 올 유학생과 미국 국민과의 친교를 위하여 일할 것을 맡고, 이 갑은 그의 지론(持論)인 친로·친독론도 있고 해서 유럽에 머무를 예정이요, 이 조호는 상해나 청도에 있어서 재정과 연락을 맡기로 되었던 것이다.

이 모양으로 조각 회의가 변하여 망명과 국내·해외 신민회 운동, 즉 독립 운동의 부서 분담의 비장하나마 건설적인 회의가 되었던 것이다.

중의(衆議)는 일결(一決)하였다. 이에 도산은 거국가(去國歌)라는 슬픈 노래 한곡조를 남기고 마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장연(長淵)에 이르러 거기서 청인의 소금 배를 타고 청도로 향하였고, 다른 동지들도 저마다 변장 밀행으로 국경을 탈출하여 청도에서 상봉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경술년 합병되기 수주일 전이었다. 도산의 거국가는 구 후 여러 해를 두고 전국에 유행되었다. 그 노래는 이러 하였다.

一[일],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 가게 하니 간다 한들 영 갈소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二[이],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가 지금 너와 작별한 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널 때도 있을지오 시베리아 만주 들로 다닐 때도 있을지라 나의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 있든지 너를 생각할 터이니 저도 나를 생각하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三[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이별할 때에는 빈 주먹만 들고 가나 이후 성곡하는 날엔 기를 들고 올 것이니 악풍 폭우 심한 이때 부대부대 잘 있거라 훗날 다시 만나 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이 노래는 진실로 작자의 뼈를 깎아 붓을 삼고 가슴을 찔러 피로 먹을 삼아서 조국의 강산과 동포에게 보내는 하소연이요 부탁이었다.

그는 조국의 일시의 치욕을 단념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그 영광을 회복할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이 노래 둘째 절 그대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몇 번이나 건넜고 시베리아·만주로 다녔다. 그리고 이 노래에 약속한 대로 그의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 있든지 나라를 생각하고 사랑하고 그것을 위하여서 일하였다.

수없는 청년 남녀가 혹은 둘에서, 혹은 산에서 일본 경찰의 귀를 피하여 가며 이 노래를 부르고는 울었다.

그뿐 아니라 이 노래를 읊조리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작자의 뒤를 따랐다.

도산이 지은 노래는 여러 십편이 있거니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와 이 거국가와 또 흥사단가가 가장 잘된 작품이다. 흥사단가는 이러하다.

조상 나라 빛내랴고충의 남녀 일어나서무실역행 깃발 밑에 늠늠하게 모여 드네 부모국아 걱정 마라 무실역행정신으로 굳게 뭉친 흥사단이 네 영광을 빛내리라.

도산이 나라를 떠난 뒤 八[팔]월 二[이]십 九[구]일에 대한 제국이 일본에게 병합한 바 되어서 四[사]천여 년 국맥이 일시 끊어지고 말았다.

그때에 할레 혜성(彗星)의 꼬리가 지구를 감아서 세상이 멸망한다는 뜬 소문이 있었고, 또 八[팔]월 하순에 들어서는 짙은 안개가 사방에 가득차서 그렇지 아 니하여도 인심이 흉흉하던 즈음에, 「대한 제국 대황제는 그 국토와 인민을 완전 또 영구히 대일본 제국 대황제에게 양도」운운의 최후 조서 등사물이 전국 각 철도 정거장, 사람 많이 모여 있는 지점에 일제히 나붙었다.

학교에서는 한밤, 혹은 새벽에 학생을 비상 소집하여 통곡하는 예를 행하고 죽기로써 광복할 것을 맹세하였다. 민족 운동의 주요 인물은 혹은 망명의 길을 떠나고 혹은 경찰서와 헌병대에 감금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벌써 한국의 군대는 해산되고, 경찰과 통신 기관은 을사와 정미에 벌써 일본의 손에 들어가 고, 민간의 무기라고는 칼을 제하고는 모조리 압수된 뒤라 마치 쭉지를 묶이고 발톱을 잘린 수리와 같아서 오직 가슴이 터질 뿐이요, 뭄을 놀려서 반항할 길이 없었다. 우리 나라는 독립이 마관 조약으로 승인된지 십 五[오]년, 대한 제국이라 칭한지 십三[삼]년, 일본이 을사의 한일 협정으로 침략을 개시한지 五[오]년 에, 부끄럽게도 맥없이도 소멸되고 말았다.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합병 조약이란 무력의 협박 밑에서 쓰여진 한 조각의 서면이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양심의 승인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한국을 병합한 것은 일본의 역사에 가장 큰 죄악이었다. 그는 혈통으로는 같은 근원이요, 문화로는 스승이요, 지리적으로는 이웃인 우리나라에 대하여 마치 문명국이 야만 미개한 지역에 대함과 같은 죄악을 범하였다.

천리로 보아 일본은 조만간 이 죄악에 대한 보복을 받을 운명에 있다. 그러나 사욕에 눈이 어두워 천리를 보지 못하는 일본은 더한 죄악으로 이미 저지른 죄악의 소득을 확보하고 소화하려 하였다. 그것이 합병 후 三[삼]십六[육]년간 일본이 한국에 있어 한 모든 어리석은 노력이요 죄악의 관영(貫盈)이 된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 합병은 그의 자살적인 행위였다. 첫째로는 일본이 한민족의 원부(怨府)가 되고, 둘째로는 四[사]억만 중국 민족의 의구과 증오의 적이 되었다.

러시아와 미국과의 불화를 산 것도 그 근본 원인은 일본의 그릇된 한국에 대한 정책이었다. 만일 일본이 한국에 대한 이 큰 과오, 큰 죄악이 아니었던들 만주 사변도 없었을 것이요, 국제연맹 탈퇴로 세계에서 고립되는 불행도 없었을 것이 요, 소위「지나 사변」,「대동아 전쟁」으로 오늘의 수치를 당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화는 일본을 통하여 인과율이 추호도 어긋나지 아니함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오는 인과만 보고 우리 자신의 인과에 눈을 가리워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四[사]십 년간 일본에게 받은 고초가 또한 우리의 죄 값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도산은 망국의 책임을 국민 각자가 질 것이라는 말로 이 뜻을 표현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조국을 망하게 한 것은 이완용만이 아니다. 나도 그 책임자다. 내가 곧 그 책임자다.』

우리는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게 돌리고, 이완용에게 돌리고, 양반 계급에게 돌리고, 조상에게 돌리고, 유림에게 돌리고, 민족 운동자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 책임 아니질 자는 오직 나 하나뿐인 것같이 장담한다. 그러나 우리민족 각 사람이 힘있는 국민이었을진댄 일본이 어찌 담비며 이 완용이 어찌 매국 조약에 도장을 찍을 수가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이 완용을 책하는 죄로 우리 자신을 죄(罪)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이 저마다 내가 망국의 책임자인 동시에 또한 나라를 다시 찾을 책임자라고 자각할 때가 우리 나라에 광복의 새 생맥이 돌 때요.』

도산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도산은 일찍 무슨 일이 잘못된 데 대하여 남을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가 원망하고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하나 있으니 그것은 곧 저라고 보았다.

청도에서 망국의 슬픈 소식을 들은 도산은 통곡하였으나 실망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광복이 내가 하기에 있다. 내가 하면 된다.』

고 믿었기 때문이다.

국내의 최후 회합에서 약속하였던 대로 몇 동지가 청도에 회합하여서 이른바 청도 회의를 열었다. 유동열(柳東說)·이갑(李甲)·신채호(申采浩)·이종호(李鍾浩)·김지간(金志侃)·조성환(曺成煥)·이강(李剛)·박영로(朴泳魯)·김희선(金羲善)등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의 결과는 도산이 바라던 바와 같지는 못하였다. 의론이 합치 아니 되는 점은 급진(急進)과 점진(漸進)에 관하여서니 이것은 차후로도 줄곧 양립한 대로 기미 삼일 운동에 이르렀다.

급진이라 함은 서북간도와 러시아령에 있는 동포의 재력과 인력은 규합하여 당장에 일본에 대한 무력적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으로 이동휘가 이 주장의 대표자요, 점진론이란 것은 실력없는 거사를 하면 달걀로써 돌을 때리는 것이라 성공할 희망이 없을 뿐더러 (一[이]) 재외동포의 경제력과 인명을 소모하고, (二[이]) 국내 동포에 대한 적의 경계와 압박이 더욱 엄중하여 문화와 경제적 향상이 저지될 것이니 우선 서북간도, 러시아령, 미주등에 재류하는 동포의 산업을 진흥시키고 교육을 보급시켜서 좋은 기회가 돌아 오면 큰 힘을 내일 수 있도록 준비 공작을 하자는 것이니 이것은 물을 것도 없이 도산의 주장이었다.

『나라가 망한 이때에 산업은 다 무엇이고 교육은 다 무엇이냐, 둘이 모이면 둘이 나가 죽고 셋이 모이면 셋이 나가 죽어서 싸울 것이라.』

고 이동휘는 자기설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도산은 회담을 길게 끌어서 동지들이 망국의 격분에서 생긴 정신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려고 혹은 관광(觀光), 혹은 주연(酒宴),이 모양으로 일정을 연장하였으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 모두 청도를 떠나서 각자의 길을 걸으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도산으로 서는 그 이상 더 동지들을 설복할 힘이 없었다. 만일 이종호가 도산의 뜻을 좇아 그의 사재를 기울여서 도산의 경륜대로의 시설을 하기에 동의하였다면 일의 방향이 약간 변할 듯도 하였으나 이종호도 도산의 실력양성론보다 즉전즉결론 (卽戰卽決論)에 기울어지고 말았다.

양 주장의 결렬을 조화하려고 애쓴 것은 성격상, 경력상 이 갑이었다. 이 갑은 서울에 있을 때부터도 언제나 조화의 임무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도 과를 얻지 못하여 청도 회합은 분렬의 결과로 끝을 막고 도산과 이 갑은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를 향하여 떠나고, 다른 이들도 다 각기 목적 하는 곳으로 향하였다.

도산은 러시아 수도에서 이 갑과 작별하고 백림에 잠간 머물러 영국 수도를 거쳐서 미국으로 갔다.

도산이 백림에 두류하던 독일 사람의 집 가족이 도산을 심히 후대하여 정거장에서 작병할 때는 그 주인 모녀가 꽃다발을 주고 도산을 안고 뺨을 맞추어서 친족과 같은 예로 석별하였다. 그때 독일은 신흥국으로서 카이젤 빌헬름 三[삼] 세 전성기로 그가 제일차 구주 애전을 일으키기 四[]사년 전이었다. 도산은 신흥 독일의 백성의 기운과 교육을 주의하여 보았다. 일인 일기(一人一技), 만인 개업(萬人皆業), 근검(勤儉), 정제(整薺), 애국등 당시 독일 국민의 노력 생활은 도산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게다가 백림 주인집의 도타운 우정을 받은 도산은 독일국민의 복을 빌면서 국경을 나섰다.

뉴욕에 상륙하여 캘리포니아로 돌아 가는 도산은 감개 무량하였다. 나라 있어서 떠났던 집에를 나라를 잃고 돌아 오는 몸이었다. 그나 그뿐인가. 나라를 잃고 망명하는 그는 국경을 넘을 때 여행권 사증이 있을 적마다 국적이 문제가 되었다. 한국 신민이라는 옛날 여행권은 가끔 말썽을 일으켰다. 더군다나 일본과는 동맹국이던 영국에서는 「일본 신민」이라고 선언하기를 요구하였으나 정치 망명가라는 것으로 무사히 통과되었다. 이로부터 도산은 미국에서 발행한

“Without Pass Port"(무여행권)라는 여행권으로 여행하게 되었다. 그것은 국적 없는 백성이라는 뜻이다.

第五章[제오장] 美洲活動時代[미주활동시대][편집]

―살아 있는 太極旗[태극기]와 愛國歌[애국가]―

도산은 미국 로스앤젤리스의 집에 五[오]년만에 돌아 왔다. 거기는 부인과 二 [이]남 一[일]녀가 있었고 여러 친우와 동지가 있어서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나라를 붙들러 갔다가 잃고 돌아 온 도산에게 기쁨이 없었다.

도산이 본국에 돌아간 뒤에도산의 부인은 삯빨래로 생활비를 벌어서 자녀를 길렀다. 도산 부인은 집 사람과 생업을 돌아 보지 않는 남편을 좋아할 수 없었다. 남 모양으로 돈을 벌면서 집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도산은 곧 토목 공사의 인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체력으로는 이러한 근육 노동을 오래 계속할 수가 없어서 서양인 주택의 소제 인부가 되었다. 이것은 총 채로 떨고 비로 쓸고 걸레로 훔치면 되는 일이었다. 「하우스윅」이라는 것이다.

도산 내외가 저축한 돈이 천불쯤 되었을 때에도산은 심히 불행한 기별을 들었다. 그것은 추정 이 갑(秋汀李[추정리])이 러시아 서울에서 시작한 엄지 손가락의 신경마비가 전신불수로 화하여 미국에 오려다가 뉴욕에서 상륙 거절을 당하고 시베리아로 돌아가 병으로 눕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정의 사람인 도산은 병석에 누운 지우(志友)를 위하여 울었다. 도산은 이 갑과 민족 운동의 이론에 있 어서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아니하였다. 이 갑은 급진론자요,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을 가리지 아니하는 전략적 행위도 때를 따라서는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이 갑은 몸이 작으나 그의 몸은 전부담(膽)이며 호쾌(豪快)한 성격이었다. 그는 민영준(閔泳畯)에게서 받아 내인 거액의 재물을 애국 운동에 흩어 버리고 말았고, 또 그는 미녀를 끼고 화월(花月)에 취하는 풍류(風流)도 있었으며 필요하면 살육도 한 수단이라고 하였다. 이런 것은 다 도산과는 맞지 아니하였다. 그러므 로 이 갑이 청년학우회에 관계하고 싶은 의사를 보일 때에도산은,

『추정은 청년학우회원은 못돼.』

하고 언하(言下)에 거절하였다 도산은 청년학우회는 도덕적으로 일점 비난할 수 없는 인격자들이 되게 하고 싶었다. 청년학우회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도 덕으로 세계에 으뜸이요, 모본이 되는 국민이 되게 하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적더라도 우리 민족이 거짓 없는 국민, 사랑하는 국민 뭉치는 국민, 부지런한 국민만은 되게 하고 싶었고 또 그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도산의 이러한 사상에 대하여 추정은 비록 경의는 표하지마는 「도산다운 고달 (高達)한 이상」이라고 미소하는 실제 정치를 하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추정은 도산의 고집을 아까와하였다.

이 모양으로 도산과 추정은 반드시 성미가 맞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를 잊고 나라에 바치는 점을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여서 이것이 굳은 우정의 변치 아니할 바탕이 된 것이었다.

도산은 그의 부인과 의논하여 저축한 돈 천불을 이 갑의 치료비로 보내었다.

여기 동의한 부인도 어지간한 사람이다. 또 도산의 성품으로 보아서 그 부인의 동의 없이 부권(夫權)을 행사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니 내외간의 교섭 곡절을 남이 알 수는 없으나 부인이 승낙한 것만은 사실이다.

도산이 보낸 금 일천불을 받은 추정이 소리를 내고 물었다. 함은 추정 자신의 술회여니와 울 만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추정은 또 이만한 우정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그가 한성 정계에서 활동하던 五[오]년간에 그의 재산은 동지의 공유 재산인 관(觀)이 있었다.

어떤 친구가 옷이 없다면 돈을 주고, 여비가 없다면 돈을 주었다. 그는 맛있는 음식을 대하면 벗을 생각하고, 불행한 벗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의 도움이 먼저 있었다. 그는 도산 보다는 연치로나 사회적 지위로 나선배면서도 언제나 도산을 추존하고 자기는 도산보다 늘 일보 뒤에 섰다. 당시 한성 정계의 중심 인물인 실력을 가지면서도 그는 매양 그늘에 돌았다. 「아까운 애국자를 잃었다」 하는 것은 도산만이 한탄이 아니었다. 그는 군대 해산 직전까지 참령으로 육군 대신 부관이었다.

도산은 추정 이 갑의 쾌유(快癒)를 빌면서 얼마 동안 노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미국 재류 동포들은 도산을 가만 둘 수 없었다. 도산은 국민회 총회장의 임을 맡게 되었다.

국민회에 관해서는 이 책 제二[이]장에 대략 말하였거니와 이 기회에 좀 더 말할 필요가 있으니 그것은 미국에 있는 대한인 국민회를 다만 일개 교민 단체로 볼 성질의 것이 아니요 실로 우리 민족 운동의 주요한 세력으로 우리 역사에 대서 특서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술 합병 당시에 미국 (하와이를 포함)에 재류하는 동포는 국민회의 이름으로 대회를 모아 합병 부인의 결의를 하고 이것은 일본 황제를 포함한 각국 원수에게 통고하여 영국으로부터는 동정한다는 회답까지 받았으며, 그 이래로 三[십]십 六[육]년 간 관공사를 물론하고 「Korean」이라고 통하여 왔고 일찍 일본 신민이라고 칭한 일이 없어서 미국 정부에서도 재류 동포에게 관한 공문서는 일본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통하지 아니하고 대한 국민회를 통하여서 하였고, 이번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 중에도 재류 동포는 국민회를 중심으로 한 재미 한족연합회의 주장으로 재산 동결 기타 적국인으로서의 대우를 면하였다. 게다가 제일차 대전 후 국민회는 이 승만 박사를 워싱톤으로 파견하였으며, 제이차의 임시정부의 경비를 부담하고,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 박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그 경비를 부담하였으며 八·一五[팔·일오] 이후에는 십 五[오]명의 대표를 본국에 파견하여 건국 사업을 돕게 하였다. 한 말로 말하면 미국 국민회가 끊어진 반만 년 종사를 三[삼]십 六[육]년 보존한 셈이다. 미국에 한인이 처음으로 입국한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거니와 거기 머물러 산 사람으로는 갑신정변의 서재필이 아닌가 한다. 서재필은 김옥균·박영효 등과 같이 망명하여 김·박은 일본에 머무르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가서 입적하였다. 그의 삼족이 멸하매 그는 미국 여자에게 장가들었다. 서재필이 본국에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국민으로 창간하고 영은문(迎恩門=延 詬門[연후문])터에 독립문을 짓고 태극기와 「독립문」이라는 국문액을 새기고 모화관(慕華館=母岳院[모악원]의 音相似[음상사]로 事大的[사대적]으로 樂[락] 한 것)을 독립관으로 현판을 고쳐 걸고 연설회장을 만든 것, 모처럼 계획한 서정 일신(庶政一新)의 대업이 당시 귀족 수구파의 반동으로 깨뜨려진 것 등은 정 유 무술년 간의 일이거니와 두 번째 망명 후의 서재필은 의약업에 종사하여 다소 재산을 적축하였다가 기미 삼일운동 시에 이 승만과 함께 국민회를 대표하여 활동하는 중에 소비하고 육십 노인이 다시 의학을 공부하여 의업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한인이 대량으로 미국에 입국한 것은 一九○三[일구공삼]년 즉갑진년간(甲辰年間)의 북아메리카 개발회사의 이민이니 이것은 하와이의 농지 개척을 위하여 한 인을 노동자로 데려 간 것이었다. 그들은 혹은 계약 기간 전 탈주와 혹은 계약 만료 후의 고용해제로, 하와이를 주로 하여 캘리포니아주와 멀리 멕시코, 큐바에까지 퍼져서 머물러 살게 되었으니 그 수는 二[이]천명 가량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재미 한족 사회의 건설 기본원이었다.

이보다 먼저 북미에 흘러 들어 간 소수의 동포가 있으니 그것은 인삼 장사이었다. 그때에는 화와이를 중국인들이 신금산(新金山)이라 하고 샌프란시스코를 구 금산(舊金山)이라 하여 많은 중국인이 벌써 건너가 있었다. 이들은 남양과 호주를 거쳐서 흘러 들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인이 가는 데는 반드기 소수의 한국인이 따라 가니 그것은 인삼 장수였다.

중국인, 특히 남방인은 고래로 인삼, 그중에도 홍삼을 귀중히 여기고 애용하였 으며 고려 인삼이라면 천금을 아끼지 않고 다투어 샀다. 이러한 관계로 강남은 물론이어니와 남양까지도 화교가 가는 곳에는 「고려인」이 따르는 것이니 대개 고려인은 중국인이 우리 민족을 부르는 명칭이다.

그래서 개발 회사 이민이 있기 전에 샌프란시스코 일대에는 우리 동포가 수백 인 거주하고 있었다. 도산이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목격한 상투를 맞잡은 동포는 이네들이었다.

하와이로 실러 갔던 개발 회사 이민의 우리 동포들이 하나 둘 미국 본토로 들어 가게 되어 캘리포니아에 한국인이 날로 늘었다.

일구공육 년 一九○六[ ] 즉 정미년 보호 조약이 늑정(勒定)되매 하와이에서는 목사 김성권(金成權)등의 발기로 하와이 통일 발기회라는 것이 생겼다. 여기에 통일이라고 말을 쓴 이유가 있다. 당시 하와이에는 동포가 집단적으로 일하는 농장이 三[삼]십 六[육]개소가 있었으니 농장마다 그 농장주의 지시로 일종의 단체가 있었다. 통일이라 함은 이 三[삼]십 六[육]개 단체를 통일한다는 뜻이었다.

이때 샌프란시스코에는 제 二[이]장에 말한 공립협회 외에 대동보국회(大東報國會)가 있었다. 공립협회에는 회장에 정재관(鄭在寬), 《共立新報[공립신보]》 주필에 최정익(崔正益)이요, 대동보국회는 장경(張慶)이 회장이었다.

이 모양으로 하와이와 북미(재미 동포는 하와이와 북미라고 부른다. 북미는 미국을 지칭하는 명사로 쓰여진다) 에 연락 없이 동포의 단체가 생겨 있었다.

그러던 즈음에 一九○七[일구공칠]년 미국 사람 스티븐슨이 일본에 유리하고 한국에 불리한 말을 하였다는 것을 분개하여 전명운(田明雲), 장인환(張仁煥) 양 동포가 그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한 사건이 일어나매 하와이의 합성협회(合成協會 =통일발기회의 결과로 조직된 단체)에서는 전장 양의사 후원을 위한 의연금을 고립협회로 보내었다. 이것이 하와이·북미 양지 동포 단체의 연락의 개시였다.

一九○九[일구공구]년에 북미의 공립과 대동이 합하고 또 하와이합성 협회와도 합하여 국민회 총회가 되고 북미·멕시코우·화와이·원동(러시아 영토)의 네 개 지방회가 되어도산이 총회장이 되었다.

국민회를 조직하던 사람들의 의도로 보면, 외국에 있는 한족 전체를 망라한 국민회를 만들려 한 것이니 만주에도 국민 지방회를 세우려 함은 물론이었다.

도산은 국민회 총회장으로 선거되었다. 도산의 목표는 회원의 품격을 높여 교 거(僑居)하는 나라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근검 서축을 장려하여 회원 각원이 독립하고 풍족한 생계를 가지게 하며, 단체적으로 거류국 관민의 신회를 얻어 동포의 권익을 보호할 뿐더러 그리함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인을 간섭하는 구실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재류민 대부분은 본국에서부터 무식한 이요 또 단체 생활에 훈련이 없어서 국민회의 정책에 협력하느니보다도 그것을 귀찮게 생각하는 이가 처음에는 적지 아니하였다. 또 그 약점을 타서 국민회에 반대하고 이를 이간시키는 선동자도 없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본국으로부터서 새로 건너 오는 지식 계급인 중에 그러한 사람이 가끔 있었다. 그것은 자기가 권세를 가지려는 야심으로서였다. 그러나 도산의 신망은 점점 더하였다. 도산은 첫째로 회원의 부담을 일정하게 하 는 제도를 썼다. 그것은 一[일]년에 五[오]불의 국민 의무금이라는 것만을 회원에게 징수하여 수입지출을 분명하게 하였다. 종래는 의연금이란 명칭으로 수시로 무제한으로 거두었다. 도산은 이것은 첫째로는 회원에게 불안과 불쾌의 감을 주고, 둘째로는 동포의 부력을 쌓는 것을 저해하는 것이라 하여서 의연금이라는 것을 폐지하였다. 그러므로 회원은 누구나 一[일]년에 五[오]불만 바치면 고만 이었다.

이 의무금의 수입으로 도산은 一[일]년의 예산을 세웠다. 수입의 길이 없는 지출은 도산은 절대로 아니하는 정책을 세웠다. 「힘자라는 데만큼」이란 것이었다. 시급한 일이라 하여서 내게 하는 것은 민심을 떠나게 하고 민력을 피폐케 하 는 것이라고 하였다. 민족 사업은 장원한 일이니 민중을 흥분시켜서 일시적 효과를 거두는 것은 민중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도산은 생각하였다.

다음에, 국민회는 회원의 권익이 침해되거나 기타의 곤란이 있을 때에는 회의 전력을 그 일점에 기울였다. 가령 회원의 소송 사건, 대고용주 쟁의 사건(對雇 傭主爭議事件), 외국 사람에게 업수임을 받은 일 같은 데 대하여 서는 전력을 기울여서 싸우되 합법적으로 하여서 소기의 결과를 보지 아니하고서는 말지 아 니하였다. 그러나 잘못과 그릇됨이 우리 편에 있을 때엔 서슴치 않고 충심으로 사과하였다. 이치에 맞지 않는 역성은 민족의 위신을 보전하는 소이가 아니었다.

생활 개선에 대하여서는 도산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하던 모양으로 거처의 청결을 강조하였다. 「이웃 서인보다 더 깨끗하게」할 것을 권면하였다 (서인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인이란 뜻이다).

예의답게 할 것도 장려하였다. 결코 거짓말을 말고 특별히 서양인과의 교섭과 거래에 「예스」와「노우」를 분명히 하고 한번 언약한 것이면 이해를 불계하고 신용을 지킬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하였다.

『한국인의 상점에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

『한국인의 노동자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다.』

『한국인의 언약이라면 믿을 수 있다.』

이 세 가지 신용만 얻으면 우리는 돈도 벌 수 있고 남에게 대접도 받을 수 있 을 뿐더러 우리 민족 전체의 명예를 재류 국민에게 인상(印象)시킬 수 있다고 도산은 확신하고 동포에게 충고하였다.

회원들은 이 지도를 잘 받았다. 동포의 거주는 정결하여지고 몸가짐은 점잖아 지고 신용은 높아졌다. 사업주들은 국민회가 공급하는 노동자를 신임하였다. 이렇게 회와 회원의 신용이 증대함을 따라서 관헌들도회를 신임하게 되어서 한국인에게 전달될 국가의 의사는 국민회를 통하여서 하게 되고, 심지어 한국인간의 범죄 사고까지도 국민회에 일임하거나 경찰에서 심리하더라도 국민회에 고문하 여 그 의사를 존중하였다. 여행권이 불비하거나 휴대금이 부족한 한국인도 국민 회의 보증이 있으면 미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국민회는 대사관, 영사관과 같았고 국민회로 인하여 재미 한국인은 일본 신민 대우에서 벗어나서 한국 국민으로 대우를 계속하여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힘은 미국 관변에 대한 「운동」에서 온 것이 아니요,. 우리 동포 자신이 국민회의 지도 밑에 자수자득한 신용과 명예의 결과였다. 우리 민족 이 한번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신용을 얻으면 세계 어디를 가도 행하지 못할 데가 없다는 도산의 신념이 사실화한 것이었다.

이것은 미국에서뿐이 아니었다. 멕시코우에서도 그러하고 시베리아에서도 그러 하였다.

도산은 멕시코우에 재류하는 동포의 초청으로 멕시코우에도 갔다. 이곳 국민회 지방회도 그 나라 관민의 신용과 존경을 받았다.

원동지회는 이 강의 손으로 처음에 본부를 해삼위에 두었었으니, 거기는 권업회(勸業會)라는 것이 김입(金立)·윤해(尹海) 등의 손으로 조직되어 국민회에서 분리하고 본부는 자바이칼 주 치 따로 이전하였다.

시베리아 각지에 산재한 동포들은 그 지장마다 국민회를 조직하여 一[일]년에 한번씩 치따에서 대의원회(代議員會)를 열고 또 기관지로 《正敎報[정교보]》라는 월간 잡지를 발행하였다.

여기서도 국민회는 러시아 관민의 신임을 얻어서 「한국 국민」이라는 여행권을 사용하고 일본 신민과 대우를 면하였으며, 따라서 일본 관헌의 절제를 전연 받음이 없었다. 여기서 국민회의 중심 인물로 마지막까지 힘쓴 이는 이 강이었다.

그러나 一九一四[일구일사]년 제일차 구주 대전이 일어나며 러시아는 총동원령이 내려서 국민회의 활동은 정지되고 말았다.

第六章[제육장] 上海時代[상해시대][편집]

― 臨時政府[임시정부]大獨立黨[대독립당]까지―

一九一九[일구일구]년 구주대전이 휴전에 이르렀다.

샌프란시스코우에 있는 국민회 중앙 총회는 이승만에게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할 것을 청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장의 신임장을 가지고 우선 와싱턴으로 갔다.

이때에 국민회 내부에는 이승만에게 대한 불만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 박사가 하와이 국민회를 중앙 총회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앙 총회 회장인 안창호는 이승만 박사가 적임이란 것을 역설하여 내부의 불만을 눌렀다.

이승만은 와싱턴에 갔으나 구주에 가는 여행권을 얻지 못하였다. 마침 상해에 있는 신한청년단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하였기 때문에 그가 우리 민족 대표로 활약하였고 이승만은 구미 위원부장으로 와싱턴에서 외교와 선전의 일을 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안창호 자신은 국민회의 특파로 원동을 향하여서 미국을 떠났다. 이때는 아직도 三[삼]월 一[일]일의 독립 선언이 있기 전이었으나 국민회로서는 구주 대전 휴전 후의 민족 운동에 대처하기 위하여 도산을 원동으로 파송한 것이었다.

도산은 선중에서 三[삼]월 一[일]일 국내의 독립 선언 보도를 접하였다. 그리고는 홍콩을 거쳐서 상해로 왔다. 도산이 상해에 도착한 것이 四[사]월 상순즉 四[사]월 십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조직 발표된 직후였다. 그 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원수로 삼고, 안창호·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김규식(金奎植)·신규식(申奎植) 등을 각 부총장으로 하였고, 여운형(呂運亨)·신익희(申翼熙)·윤현진(尹顯振)·이춘숙(李春塾)등 소장파를 차장으로 한 것이다.

이 기회에 상해에 있던 신한청년단의 활동에 관하여 일언할 필요가 있다.

합병 직후 신규식·김규식·신채호·조용은(趙鏞殷=紊昴[문묘])·문일평(文一平)·홍명희(洪命憙)·정 인보(鄭寅普) 등 지사들이 상해에 망명하여 있었다. 그때에 신규식은 동지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있어 상해 한국인계에 주인격이었다.

그후 한 송계(韓松溪)·선우혁(鮮于爀)·장덕수(張德秀)·김철(金徹)등이 상해로 모여서 신한청년단이라는 것을 조직하고 구주 대전이 휴전되매김철을 국내로 보내어 천도교에서 三[삼]만원을 얻어다가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하는 동시에 여운형을 러시아령으로, 장덕수·선우혁을 국내로 보내고, 또 서·북간도·북경·미주·하와이 등지에도 글을 보내어 이 기회에 내외 일제히 독립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동경 유학생들이 기미 二[이]월 八[팔]일에 동격 청년회관에 모여서 독립을 선언한 것이 상해에 전하자 신한청년단에서도 불란서 조계에 사무소를 내고 선전 과 연락 사무를 시작하였다. 三[삼]월 一[일]일 독립 선언의 제일보가 상해에 도달한 것이 그로부터 약 一[일]주일 후였으니, 파리 회의와 민주, 하와이의 국민회 등 재외 동포 각 단체와 주요한 지도자들에게 삼일 운동의 제일보를 낸 것이 삼 三[ ]월 십일 이었다. 이 일을 한 것이 신한청년단이었다.

또 신한청년단에서는 상해에 있는 영문·한문 등 각 신문사·통신사에 삼일 운동과 계속하여 일어나는 모든 기사를 제공하였고 동시에 민족 운동 여러 지도자가 상해에 회집하도록 초청하였다. 그러는 즈음에 윤현진·신익희·조완구(趙琬九)·이춘숙 등이 본국으로부터 오고, 혹은 동경으로부터서 왔다.

신한청년단은 오직 지도자들을 일당에 모아 놓는 임무만을 다하고는 자기의 존재를 감추고 말았다. 임시 정부와 임시 의정원을 조직하는 회장과 사무소를 마련하고 각지로서 모여 온 지도자를 여러 번 초청하여서 시국을 수습할 것을 요청하는 인사를 하고는 신한청년단은 자진하여 소멸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 운동 사상에 회한한 전례일 것이다.

임시 정부가 조직된 뒤에 신한청년단은 그가 三,四[삼,사]개월간, 특히 최근 一[일]개월에 시설하였던 모든 즙기(汁器)끼지 다 임시 정부에 바쳤다.

이러한 때에 도산이 상해에 온 것이었다.

도산은 상해에 오는 길로 신병으로 하여 홍십자 병원에 입원하였다.

유현진·신익희 등 차장측들은 연일 도산을 방문하여서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여 국무총리를 대리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도산은 듣지 아니하였다. 그때도산이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한 대답은 이러하였다.

파리 평화 회의와 월슨의 민족 자결의 원칙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의 호기가 아님은 아니다. 그러나 첫째로 우리 민족에게는 일본을 물리칠 실력이 미비하고, 둘째로 일본은 이번 전쟁에 연합국의 일원이기 때문에 조선 민족은 민족 자결의 원칙의 적용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고 자주 독립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세계에 표시하는 데 그칠 것이요. 독립의 목적을 이번에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산 자신이 이번에 원동에 온 목적은 독립운동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요다음 기회에는 정말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운동을 하러 온 것이었다. 그 구체안으로 말하면, 남북 만주와 러시아령에 있는 동포를 조직하여 산업과 교육을 장려하여 부력과 문화력을 늘이는 일이었다. 만일 재외 동포의 부력과 문화가 향상되면 그것이 곧 독립의 실력인 동시에 재내 동포를 자극하여 따라서 부력과 문화력을 증진하게 될 것이니 진실로 우리 민족에게 부력과 문화력 곧 있을진댄 언제나 기회있는 대로 독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도산의 의견의 중점은 실력이요, 그와 반하여 다수 민족 운동자가 노리는 것은 기회였다.「이번 기회에는 」하고 기회만을 엿보는 것은 실력이 구비한 자가 하는 일이니, 실력 있는 자에게는 언제나 기회가 오는 것이지마는 실력없는 자에게는 아무러한 호기도 기회가 아니된다 하는 것이 도산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차장측의 소장파는 도산을 가만 두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도산을 설복하려는 논점은 이러하였다.

첫째로 지금 국내에서는 동포가 독립을 위하여 날로 피를 흘리고 투옥되지 않 는가. 이것을 손을 묶고 방관할 수 있는가. 둘째로는 동포에게 실력 양성을 역설하더라도 임시 정부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더욱 힘있지 아니한다. 이에 대하여 도산은 그 첫 논점에는 깊이 감동되었노라고 후에도 말하였다.

이러하는 동안에 二[이]십여 일이나 지났다. 도산은 그래도 처음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자기는 만주에 들어가 동포들 속에서 교육과 산업 운동에 몸은 바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때 도산은 한가지 새로운 책무(責務)를 느꼈으니, 그것은 도산이 각지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있는 거두 돋지들을 상해에 모으는 일이었다. 그들은 한 집에 모아만 놓더라도 도산은 한 짐을 벗어 놓는 것으로 생각하였거니와, 만일 다행히 그 동지들이 신민회 시대의 정의(情誼)를 회복하여서 대독립당이라는 단일 조직 속에서 협력할 수 있게 된다 하면 그런 경사가 없을 것이다. 도산이 독립 을 위한 민족 단일 진영을 주장한 것은 신민회에서도 그러하였다. 그러고 도산 이 자신이 그 진영에 중심이 되기를 피하여서 신민회에나 청년학우회에나 다른 사람을 중심 인물로 추대하고 자기는 무명한 그늘의 사람이 되기로 일관하여 온 것도 자기의 존재로 말미암아 통일이 저해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도산은 우리 나라 인심이 당파적으로 갈리는 경향이 많은 것을 잘 알았다. 그러므로 전 민족적인 단결에 중심 인물이 되기에 합당하려면 현재의 정세로는 한 시골 사람이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였다. 밝히 말하면 그 중심 인물이 될 사람은, 첫째로 기호인(畿湖人)이요. 둘째로 양반이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유길준(兪吉濬)을 민족 운동의 중심 인물로 추대하려고 애쓴 것이 이 때문이었다.

만일 도산 자신이 기호인 이라면 아무 꺼림 없이 소신을 수행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미묘한 사정은 일을 하여 본 사람이라야 아는 것이다. 도산의 필생(筆生)의 신우(信友)요 애우(愛友)요 동지인 송종익(宋鍾翊)은 경상도 사람이어니와, 그는 일찍 도산을 향하여,

『 선생은 왜 기호 양반 가문에 안 태어나고 평안도 놈으로 태어났소?』

하고 농담이 아니라 탄식한 일이 있었다.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도산이 신민회의 조직에 있어서나 홍사단의 조직에 팔도 사람 각 一[일]명으로 발기인을 삼은 것이나 다 이 미묘한 감정을 고려한 것이었다.

도산은 그의 출마를 수십일을 두고 간청하는 소장 동지들에게 대하여 두 가지 조건을 제출하였다 하나는 . 각지에 있는 거두들을 상해로 모으는 일이요, 둘은 그들의 모임을 기다려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 대리를 도산이 사면하고 다른 이에게 원하자는 것이었다.

독립 운동이 이처럼 벌어져도 모이지 않은 거두들에게 대하여 굳세게 불만을 가졌던 소장파들은 도산이 제안한 제일 조건에 반대하였다. 아직도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해로 모이지 아니하는 것은 그 거두들에게 성의가 없거나 딴 뜻이 있거나 한 것이니 그들을 억지로 모아 놓는다고 하여도 결국 의견의 불일치와 파생이 있을 뿐이니, 도산이 중심이 되어서 소장파 내각으로 일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산은 말하였다. 첫째는 의리에 있어서 평생을 애국지사로 바친 선배를 무시하는 것이 불가하고, 둘째로는 사체에 있어서 이 모든 지도자들이 임시 정부에 협력함이 아니면 민족의 총의를 망라하였다는 시실도 명분도 서지 아니 하므로 적으면 임시 정부의 위신이 감손하고, 크면 수다히 임시 정부가 각지에 발생하여서 그야말로 민족 운동이 분열될 염려가 있으니 각지에 산재한 거두들을 일당에 모이게 하는 것은 독립 운동의 절대 조건인 동시에 도산 취임의 절대 조건인 것을 역설하였다.

이에 소장파도 도산의 의견에 찬성하여 모든 것을 도산의 지도대로 할 것을 굳게 언약하고 이에 비로소 도산은 임시 정부에 내무부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도산은 한 번 취임한 이상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첫째로 미주 국민회로부터 二[이]만 五[오]천불을 갖다가 불란서 조제 하비로에 정청(政廳)을 차리고 매일 규칙적으로 정무를 보았다. 거두들은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소장파 차장들이 총장을 대리하였다. 최창식(崔昌植)이 비서장, 신익희가 내무차장, 윤현진이 재무차장, 김구가 경무국장, 이 모양이었다.

정청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산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점잔을 빼던 사람들도 아이들과 같은 열심히 부르게 되었다.

애국가 끝절에,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임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하는 것은,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서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하고 도산이 수정하였다.

원래 이 노래의 사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어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져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하지 아니하였다.

정청을 정제하는 의에 큰일은 《獨立新聞[독립신문]》발행과 민족운동 거두를 일당에 모으는 일이었다.

《獨立新聞[독립신문]》은 어렵지 않게 발간되었다. 조동호(趙東祜)의 고심으로 국문 자모도 되고, 미주 국민회의 송금으로 자금도 조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두들의 회합이었다.

도산은 혹은 사람을 특파하고, 혹은 편지를 보내어 꾸준하게 거두들을 초청하였다. 七[칠]월까지에 이동휘를 최종으로 하여 이동녕·이시영·신규식·조성환·김동삼(金東三)등이 상해에 모였다. 러시아령의 최재형(崔비지깨)은 오지 아니하였고, 좀 더 늦게는 박용만(朴容萬)이 하와이로부터 오고, 이승만 도 왔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거두들이 모이기를 기다려서 도산이 계획한 것은, 첫째는 내각의 개조요, 둘째는 독립 운동 발략의 결정이었다. 내각의 개조는 왜 문제가 되었느냐 하면, 상해에서 발표된 임시 정부 이외에 구후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것, 이동휘를 집정관 총재로 한 것, 이러한 두 정부의 명부가 미국 통신사를 통하여서 세간에 유포된 때문이었다.

이에 도산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고 기타 각 원을 소위 한성 정부 제도 대로 함으로 분열을 방지하고 통일을 도모하자고 발 의하였다. 이 안에 의하면, 내무총장이 이동녕, 노동국 총판에 안창호였다.

그러나 도산의 이 안엔 대하여 가장 격렬하에 반대한 것은 임시 정부의 소장파 차장들이었다 왜 그러고. 하면, 이 안은 필경 이승만과 이동휘를 위하여서 임시 정부를 희생하는 결과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도산은 약 三[삼]주일간 소장파를 각개로 설복하였다. 독립 운동 벽두에 전선이 삼분한다 하면 수치가 아니냐, 통일을 위하여서는 모든 것을 불고하자 하는 것이 거의 주장이었다. 그때에도산은 목이 쉬도록 연일 연야 거두와 소장파를 설복하였다.

이일이 천연하기 때문에 거두들은 각기 돌아 가겠다고 분개하였다. 본국으로부터 망명하여 온 청년들은,

『여러 선배가 모였다가 독립 운동에 관하여 아무 결말도 못 짓고 흩어진다면 우리들은 가만히 있지 아니하겠소. 작정 없이는 한걸음도 상해를 못 떠나리 다.』

하고 거두들을 위협한 이도 있었으니, 그 중심 인물은 한위건(韓偉建)·백남칠(白南七)등이었다.

청년들의 이 위협이 도산이 시킨 것이라고 오해한 거두가 있음은 물론이었으나 도산은 그런 방편을 쓰기에는 너무도 정직한 사람이었다.

도산의 성의는 마침내 노소에 통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일로 정부를 개조하여 三[삼]정부 연립의 불행을 제거하고 독립 전선통일에 우선 형식상으로 성공하였다. 이렇게 되매 각 거두들은 뿔뿔이 돌아간다는 고집을 버리고 상해에 머무르게 되어 자주 국무 회의를 열 개되었다.

도산의 계획으로 이제 남은 것은 독립 운동 방략(獨立運動方略)을 제정하는 것 이었다. 도산의 이 발의가 국무회의에서 채택되어 각 총장과 차장과 기타 민간 중요 인물에게 일 개월 한하고 독립 운동 방략의 사안을 제출하기로 결의한 것이 그해 九[구]월이었다.

도산이 독립운동 방략 제정을 주장하는 이유는 이러하였다.

이번 운동으로 독립이 실현이 된다면 문제될 것도 없거니와, 불행히 그렇지 못하다면 뒤를 잇는 사람들이 계승하고 답습할 주의, 강령과 실천할 계획을 뒤에 남겨서 언제까지든지 독립의 목적을 달하는 날가지 일관한 주의 방침하에 독립 운동을 계속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도산은 지나간 십년간의 독립 운동이 각 사람 각 지방에서 뿔뿔이 진행되었으므로 다만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어떤 일이 있으면 상극·상쇄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난 것을 깊이 반성하여서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반복되어 민족을 분열하고 민력을 소모하는 일이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준비 없는 「 ,. 계획 없는 운동―즉흥적(卽興的)운동」이 우리 민족의 과거의 결점이요 습관이라고 도산은 말하였다. 기록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잃어 버리는 손해를 받고 있다고 도산은 한탄하였다. 그가 상해에서 「독립운동 사료 편찬 위원회」(獨立運動史料編簒委員會)를 세워서 십여 인의 위원으로 하여금 합병 이래의 일본 폭정과 민족 운동의 역사 재료를 편찬하게 한 것도 이 주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독립 운동 방략은 원고지 약 백 이십매였는데, 자세한 해설은 약하고 한 개 조목 한 개 조목으로 기록된 것이었다. 그 대강은 임시 정부 유지 방법, 국내에 향한 운동방법, 건국 방략, 이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첫째로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 관하여서는 독립 운동이 아무리 오래 끌더라도 이것을 독립이 실현되는 날까지 유지하여야 한다. 그리하는 방법은, 척째로 재외 동포를 통일 단결하여서 그들의 정신적 지지와 재정적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임시 정부 유지에 대한 대강이다. 그 실제 방법으로는 북간도·서간도· 러시아령·미주·하와이의 五[오]지역의 동포를 조직하는 것이 제 一[일] 단, 이 五[오]지역의 조직체를 연합 통일하는 것이 제 二[이]단이니 알아 듣기 쉽게 말하면 독립 운동 기간 중에는 이 五[오]지역을 대한 민국의 영토로 보고 거기 거주하는 동포를 국민 전체로 보아서 그들이 납세로 재정적 기초를 삼고 동시에 그들에게 교육과 산업의 발전을 주어 문화력과 경제력을 증진함으로 행정의 목 표를 삼자는 것이다. 이리함으로 三[삼]백만재의 동포는 귀의할 바를 얻어 문화력과 부력을 증진하면서 매년 매인 一, 二[일,이]십원의 납세로 능히 임시 정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독립 운동이 얼마를 끌더라도 임시 정부 유지가 어렵지 아니할 뿐더러 五[오]지역 동포의 문화와 부가 향상하면 할수록 정부의 활동 능력이 증대될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五[오]지역 재류 동포는 벌써부터 각각 조직이 있었고 그 지도자가 곧 임시 정부의 각원들이니, 현재 상해에 모여 있는 민족 운동의 수령들만 일심하여서 분공 합작(分工合作)하면 이것은 충분히 될수 있는 일이었다.

둘째로, 이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앞서 말한 五[오]지역에는 수도라고 할 만한 중심 지구를 택하여 그것을 정신·정치·교육·산업의 중심을 삼고, 될 수 있으면 이 五[오]지역 재류 동포 전체의 수도라 할 만한 곳을 중국의 적당한 지역에 설치하여 문화뿐 아니라 농·공·상·금융의 중심지를 삼자는 것이다.

이것은 독립의 실현이 지연되는 경우에는 재외 동포가 유리민이 될 우려가 있 는 것을 예방하는 동시에, 각국에 흩어져 있어 조국의 보호가 없는 동포로 하여금 정치적 경제적·정신적 원호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재외 한족의 교육에 관하여는 도산은 서·북간도의 어떤 지방과 같이 전연 교육기관이 없는 데는 우리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세울 수밖에 없지만, 미주나 하 와이나 중국에도 개화지나 재류국의 교육 기관이 있는 데서는 그 교육 기관을 이용할 것이지 공연히 동포의 부담을 과중하게 하여서 우리 자신의 학교를 세울 필요가 없고, 다만 우리의 국어와 국사를 가르치는 기숙사를 설비하고 또는 본국으로서 나오는 청년을 위하여 재류국 대학에 입학할 준비 교육 기관을 세우면 고만이라고 하였다.

다음에 산업 정책에 대하여는 거주국의 정책에 순응 협력하면서 우리 민족의 부력을 증진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만주에 있어서는 중국의 요구가 농산물의 증산에있고 또 우리 민족의 장기(長技)가 농작에 있으니 재류 동포의 경지 획득을 용이케 하고 낮은 변리로 농상 자금을 얻은 편이를 강구하고 농사 개량을 지도하며 농산물 판매를 유리하게 하고 또는 농산·축산물의 가공 공업을 진흥시켜서 농민의 생활을 안전하고 윤택하게 하되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집단 부락을 형성하여 도덕·지식·생활, 기타의 문화를 향상하면 재 류국 당국과 국민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 발전함으로 농산물이 증가하고 납세액이 증가하고 농촌과 도시가 문화적으로 되어서 재류국원주민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겠기 때문이다.

이 모양으로 십년 생취(十年生聚), 십년 교훈(十年校訓)을 함으로 재외 한족은 격세(隔世)의 감이 있도록 발전될 것이 아닌가. 이것은 우리 독립당이 三[삼]백 만이 된다는 뜻인 동시에 제 외국에 대하여서는 우리 민족이 문화국민·독립 국민이 될 자격과 능력을 실지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이번에 새삼스럽게 나온 의견이 아니라, 도산이 국내에서도 신민회를 통하여 주장하던 바요, 또 십년 전 망명할 때에도 청도 회의에서도 주장한 바였다. 그러나 경술년 합병으로부터 기미년 삼일운동에 이르는 십 년간 「나가자, 죽자」식으로 민력 배양이 등한시만 되었을 뿐 아니라, 무관 학교를 세운다(하와 이의 「산 너머」와 만주의 白米山[백미산]), 독립군을 수없이 조직한다 하여 민력은 더욱 소모되었다. 도산은 지나간 십년 간의 복철(覆轍)을 밟지 말고 이번 독립운동 개시를 기회로 「자가자, 죽자」대신에 「나갈 준비를 하고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하자」는 것을 상해에 모인 영수 일치(領袖一致)의 의사로 동포에게 표시하자는 것이 도산의 열망이었다.

도산은 자기의 신념을 자기 개인의 명의로 발표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세월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것을 여러 동지 전체의 이름으로 발표되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오직 도산의 겸손만이 이유가 아니요, 발표된 남의 의견에 찬동하기를 싫어하는 우리네의 심리를 고려함이었다. 이것은 애국가의 작자가 자기임을 표시 아니하는 것과 같은 심리에서였다.

이번 독립 운동 방략도 실상은 자기가 작자이면서 이것을 스스로도 말한 일이 없었다.

이상에 말한 것이 그 실은 독립 운동 방략의 요점이었다. 근본이었다.

다음에 약술할 국내 연통제(聯通制)와 국제 선전 방략은 가장 직절(直節)한 듯 하면서도 그 실은 二[이]차적이었다.

연통제라는 것은 국내 각도 각군에 임시 정부의 연락원을 두는 것이니, 이것은 임시 정부의 의사와 행사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제도였다. 그 요령은 각군에 군감일인을 비밀히 택하여 그로 하여금 군내 각 면 각 리의 주요인물에게 의사를 소통케 한다는 것이었다. 국내 동포가 일본의 보도 제한 하에 다만 임시 정부의 동향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정세를 모르니 이 연통제를 통하여 국민에게 바른 인식을 주는 동시에 항시 서로 연락함으로 일단 일이 있는 때에는 일영지 하(一令之下)에 전 국민이 동원할 수 있는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임시 정부와 국내의 전 국민과 연결하는 조직을 二[이]차적이라고 하는 뜻은 다름이 아니다. 첫째로 일본의 경찰 하에 이 조직이 방방 곡곡에 보급되기가 어렵고, 둘째로 설사 일시 보급이 되더라도 오래 계속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다수의 희생자를 내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불원한 장래에 제이차 삼일 운동과 같은 전 국민적인 운동이 일어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아니하면 이것은 다만 일시적인 훈련에 불과하기가 십중 팔구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연통제를 아니 실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강화 회의의 결과로 국제 연맹이란 것이 새로 생기고 민족 자결의 원칙에 의하 여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등 신흥 국가가 연달아 일어나게 되매 이러한 세계 정세도 여실하게 국민에게 알리고 싶었고, 또 독립운동의 방략도 주지케 하고 싶었으며, 또 혹시나 근간에 무슨 기회가 있어도 하는 희망적 관측도 없지 아니 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할 말이어니와, 이 연통제만은 수령들이 흥미를 끌어서 많이 진전되었 으니, 이종욱(李鍾郁)사(師)같은 이는 국내에 잠입하여 경기 이남에 연토제를 실시하다가 중형을 받은 공로자였다. 《獨立新聞[독립신문]》또 이 연통제망을 통하여 국내 넓은 지역에 배부되었다.

그러나 연통제망을 조직하는 데도 많은 인물이 필요하였다. 첫째로 그는 그 지역에서 신임받는 인물이라야 하겠고, 둘째로는 중형을 각오해야 하겠고, 셋째로는 적의 경찰망을 숨어 다닐 만한 기민이 있어야 하겠고, 넷째로는 적의 경찰에 붙들리더라도 입을 봉할 용기가 있어야 하겠었다.

연통제 관계자의 희생을 방지하기 위햐여는 어느 군의 군감은 옆 군의 군감이 누구인 줄을 모르고, 이 모양으로 서로 직계 상급 간부 밖에는 모르게 되어 있었으며 만일 군감 기타의 , , 인원에 사망·검거, 기타의 고장이 생길 때에는 자동적을 그 승계자가 있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신뢰할 만한 인재가 많았던들 연통제는 더 큰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지마는 불행히도 이러한 혁명가적 인재를 구하기가 어려웠었고, 또 임시 정부 부내에서까지 연통제는 비밀히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어 놓고 널리 인재를 구할 수도 없었다.

다음에 국내에 대한 정책으로는, 동지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적의 행정 경찰 지관에 들어 가게 하는 것과, 이 모양으로 일본에 협력을 가장하는 동지를 택할 것도 있었고, 매년 一,二[일,이]차 폭탄이나 소규모의 시위 운동 같은 것으로 국내 동호의 독립의식을 일깨울 것 등이 있었다. 이 일을 위하여서는 상해에 폭탄 제조 기술을 전습하는 처소도 있었고, 결사적인 동지의 결속도 있었으니, 이 일은 주로 김구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국제 선전에 대하여서는 국제 연맹 소재지인 제네바에 대사를 주재시켜서 끊임 없이 한민족의 독립 의사와 일본의 폭정과 야심을 폭로할 것을 주로 삼고, 미국과 중국과 소련에 대하여서도 임시 정부의 신임장을 가진 대사를 주재시켜서 적절한 선전과 외교 행동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문제에 관하여서는 제일착으로 제네바에 사절을 보내기로 하여 인선까지도 되었었으나 경비로 인하여 천연되다가 독립 운동 제이년인 경신년 가을에 혼춘(琿春)에 일어난 일본군의 한족 학살 사건에 대한 대일 선전론으로 하여 독립운동 방략 전체가 휴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다음에 말하려 한다.

대강 이상의 내용을 가진 독립운동 방략이 민국 二[이]년 一[일]월의 국무 회의에서 축조 심의한 결과 만장 일치로 가결되었다.

그 결과로 임시 정부는 준거(準據)할 정책과 일과(日課)할 사무가 많아져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국내 연통제의 실시 재외 五[오]지역의 단결 사료 편찬 등 사무가 날로 진행되었다. 이종욱 사(師)등은 연통제 실시를 위하여 국내로 잠입하고 안동현 봉천 등지에는 교통부의 연락부가 생기고, 국내에도 요처 연락부가 생겼다. 북간도를 위하여는 안 태국이, 서간도를 위하여는 백영엽(白永燁) 이 각각 조직과 연락의 사명을 띠고 출발하기로 되었는데, 안태국을 특히 북간 도로 파견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 북간도는 가장 재류 동포가 많은 지역일 뿐만 아니라 가장 당파 싸움이 많은 곳이었다. 따라서 통일을 위하여 가장 난처한 곳은 하와이를 제하고는 북간도였던 것이다. 이 군웅 할거(群雄割據)하는 북간도에 가서 군웅을 조화할 인물은 오직 동오 안태국(東吾安泰國)뿐이라고 여러 영수의 의견이 일치하였던 것이다.

조화력이 있는 인물, 이것은 다수인이 하는 사업에서는 중요한 존재이다. 인물 중에는 투쟁다가 있고 모략가가 있고 조화가가 있다. 투쟁가와 모략가만 있으면 세상은 살풍경이 되고 신경쇠약만이 되고 만다. 조화하는 인물이 있고서야 비로 서 협화가 생기는 것이다. 조화가는 표면에 이름이 나지 아니하나 그 중요성은 벽돌집의 양희와 같다. 그런데 이 조화를 능히 하는 인물은 구하기가 어렵다.

그는 누구에게나 신임을 받고 친애를 받으면서도 싸우는 쌍방의 심경을 통찰하는 명철이 있어야 하니, 단적으로 말하면, 쌍방 이상의 덕과 지를 겸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물을 가진 나라는 천행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안태국은 당시에는 이러한 인물이었다. 「동오」라 하면 누구의 마음이나 따뜻하여 지고 윤택하여졌다. 그는 신민회 사건으로 악형을 당하고 또 六[육]년 옥고에 안면이 찌그러지고 초췌하였으나, 그가 가는 좌석에는 화기가 돌았다. 그는 침묵하여 말이 적은 사람으로 전연 호식과 모략이 없었고 오직 겸허와 충성이 있었다. 어려운 중에서도 어려운 북간도 통일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러시아령이나 하와이에도 갔을 것이요, 그가 가기만 하면 반드시 화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데 불행히도 동오는 북간도로 향하여 출발할 기일 직전에 병들어 도산의 헌신적 인 간호가 있었으나 二[이]년 五[오]월에 마침내 별세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가정안사로(靜安寺路)의 외국인공동 묘지에 묻히던 날, 생해에 있던 모든 영수들은 물론이어니와, 거의 거류민 전부가 회장(會葬)하여 느껴 울어서 영결하였다.

아마 이렇게 많이 울어 보낸 영결은 드물 것이다.

동오의 죽음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큰 손실이라고 도산은 통곡하였다. 도산은 성나거나 슬퍼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언마는 동오를 위하여서는 아낌 없이 울었다. 도산은 우리 운동에 이러한 인물의 필요를 누구보다도 깊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방 감정이란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가는 곳마다 있었다. 상해에서도 기호파 라, 서북파라, 교남파라 하는 감정의 암류가 없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동오만은 평양 태생이언마는 기호인은 기호인과 같이 보고, 교남인은 교남인과 다름 없이 통정하였다. 그는 전연 내라는 것과 사사로운 것이 없는 때문이었다.

도산은 서도파의 두목이란 말을 간 곳마다 들었다. 그러나 사실상 상해에 가장 개인적으로 다산을 애모한 사람 중에는 경상도 사람인 윤현진과 전라도 사람인 나용균이 있었고, 도산을 배척한 사람 중에는 다수의 평안도 사람이 있었다.

도산은 사람을 처음 대할 때에 그의 고향을 묻는 일이 없었건마는 그를 서도 지방 열이 있는 자라고 참무(讒誣)하는 이가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미주에 있어서도 국민회와 흥사단에서 가장 도산의 심복이 된 이는 송종익이어니와, 그는 대구 사람이요, 또 평생에 도산을 사랑하여 《新韓民報[신한민보]》의 주필이 된 홍언(洪焉)은 경기도 사람이었다.

동오의 죽음으로 통일 대업에 큰 지장이 생긴 것은 대치할 길이 없는 일이어니와, 독립운동 방략은 착착 실천의 궤도에 올랐다.

이동휘도 국무총리로 시무하였고, 다른 두령들도 유쾌하게 협력하여 가는 모양을 보였다.

도산은 이제는 국무총리 대리도 아니요, 내무총장도 아니었다. 노동국 총판이 된 그는 책상 하나를 차지할 필요도 없어서 야인(野人)이 되고 말았다. 도산은 자기의 이 자유로운 처지를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임시 정부로서는 한낱말석각료로 절반은 정부 밖에 있는 자격으로 여러 동지 영수들의 새에 서서 알선할 수도 있었고 또 연통제라든지, 상해 주재 외국 영사와의 교제(이것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아니할 수 없었다)라든지, 이러한 잡무를 맡아 할 수가 있었다.

一九二一[일구이일]년에 도산은 미국의원단과 회견하라는 임시정부 대표의 사명을 띠고 백영엽과 황진남(黃鎭南)을 통역으로 대동하고 북경에 왔다. 백영엽은 남경에서 신학을 배워 목사의 자격이 있고 중국어에 능하고 애국심과 정이 감이 강하여 평소에 도산의 신임을 받는 한 사람이요 흥사단의 다우였다. 후에 백영엽은 서간도 방면 동포를 지도할 임무를 도산에게서 받아 가지고 만주에 들어 갔다가 일본 관헌에게 체포를 당하여 복역하고 출옥하자마자 곧 또 봉천으로 가서 교회 일을 보았으니, 그의 사명을 잊지 아니한 것이었다. 황진남은 도산의 친우의 아들로서 어려서 북미에 가서 미국에서 교육을 받아 영어에 능하여 서 캘리포오니아 대학 재학중임에도 불구하고 도산이 기미년에 상해에 올 때에 수원으로 대동한 사람으로, 도산이 상해에 있는 동안 통역을 맡아 하여서 도산의 사랑을 받았다.

도산은 북경 육국 반점(六國飯店)에서 미국 의원단과 회견할 기회를 얻었다.

백영엽의 추억에 의하면, 그들 사이에는 이러한 담화가 있었다. 도산이 의원 대표단에게,

『중국을 보신 감상이 어떠하시오?』

하고 물으니, 미 의원단 대표는,

『나라는 큰 데 거지가 많소.』

하고 대답하였다. 도산은,

『그 원인이 어디 있다고 보시오?』

하고 한층 깊이 팠다.

미 의원들은 의외의 질문에 접하여다 하는 듯이 자기네끼리 서로 돌아 보다가,

『정치가 나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오.』

하였다. 도산은 고개를 끄덕하며, 과연 그러하오 정치가 좋지 『 . 못하기 때문이요. 그러나 현재의 중국의 정치가 좋지 못한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보시오?』

하고 더욱 깊이 물었다.

『글쎄요, 우리는 단기 여행자니까. 당신은 중국 혁명후의 정치가 좋지 못한 이유가 어데 있다고 보시오?』

하고 미 의원은 도산에게 반문하였다.

도산은 대답하였다.

『혁명 후의 중국 정부와 지사들은 좋은 정치를 하려고 애를 쓰나 밖에서 그것을 방해하는 자가 있소. 중국이 힘있는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는 나라가 있기 때문이요.』

도산의 이 말에 미 의원단은 수긍하였다.

도산은 다시 입을 열어,

『아직 독립국가인 중국도 이러하거든, 아주 제 정치력을 잃어 버린 우리 한국 이야 어떠하겠소?』

하니 미 의원단은 탁(卓)을 치며,

『알았소, 알았소. 아세아를 구할 길이 무엇인지를 알았소. 고맙소.』

하고 도산과 악수하였다. 백영엽은 이날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암암하고 귀에 쟁쟁하다고 한다. 바로 이즈음의 일이었다. 모씨가 북경에서도산을 만났을 때에 하루는 도산이 서산 구경을 가자고 하였다. 도산은 친구가 자기를 찾아 오면, 극진한 정성으로 그를 대우하되 돈과 시간을 아낌이 없었다.

두 사람은 인력거를 타고 서직문(西直門)을 나서서 만수산으로 향하였다. 북경 시내 가로상에서도산을 힐끗 보고는 옆골목으로 피하는 몇 사람을 보았다. 도산은 일일이 그들을 향하여서 손을 들었다. 저편이야 받거나 말거나 이편에서는 인사를 한다는 도산의 예의였다.

도산은 나중에 모씨에게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말하였다. 그리고 탄식하였다.

만리 타향에서 고국 동포를 만나면 서로 피하는 것이 우리 동포라 하고 도산은 길게 탄식하였다. 그들은 대개 도산에게 한두 번 신세를 진 사람이언마는 지금은 도산의 반대파로 저처하는 것이었다.

만수산을 볼 욕심은 없다는 모씨의 말에 도산은 바로 와불사(臥佛寺)로 가서 유명한 백송(白松)과 천지(泉地)와 대리석 와불(臥佛)을 보여 주고 옥천산(玉泉山)도 그냥 지나서서산에 이탁(李鐸)을 찾았다. 이 탁은 신민회적부터의 동지요, 만주에서의 독립 운동에 일생을 마친 지사다. 그는 또 상해에 왔을 때에 흥사단에 입단도 하였다.

서산 밑 작은 주막거리의 더 작을 수 없는 중국 가옥에 이 탁은 중국복을 입고 있었다 그 부인과 딸도 . 중국인으로 차리고 있었다. 지사의 빈궁한 망명 생활이었다. 이 탁은 도산과 모씨를 맞아 들여서 호국수와 배갈로 점심을 차렸다.

그는 키가 크고 뚱뚱하고 눈이 가늘고 얼굴이 검고 말이 적고 외양이 심히 온후하였다. 그러나 도산의 평에 의하면, 그는 일신이 도시의(義)요, 담(譚)이었다. 그는 동지를 지극히 경애하고 무슨 일에나 저를 내세우는 일이 없었다. 그가 유자(孺者)의 가정에서 생장한 것은 그의 독실(篤實)하고 예절답고 근엄한 태도로도 알 수 있었다. 도산은 매양 돌아 간 동오 안태국과 아울러 동우 이 탁을 찬양하였다. 장차 홍사단의 감독으로 청년 수양의 전형이 될 인물이라고까지 격상하였다. 그러나 불행히 그는 만주에서 병사하였다. 동우의 부보(訃報)를 들은 도산은 동오적과 같이 애통하였다.

『왜 이렇게 좋은 동지를 가버리나?』

하고 도산은 탄식하였다.

서산에는 웅희령(熊希齡)의 향산(香山) 모범촌이 있다고 하나 날도 저물고 또 동우를 만난 것으로 만족하여서 저녁 녘에 돌아 올 길을 잡았다. 해전(海甸)에서는 죽림 김 승만(竹林 金承萬)의 은거를 찾았다. 죽림은 예수교의 장로로, 역시 신민회의 동지요, 도산의 지우였다.

도산은 그후에 오래 북경에 머물렀다. 영환공우(瀛寰公寓)라는 셋방 빌리는 집에 일 숙박 二[이]십 五[오]전을 내고 있었다.

도산이 어디 있으나 그렇지마는 북경에 있을 때에 많은 사람이 찾아 왔다.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었으나 젊은이가 더욱 많았다. 도산은 누구가 찾아 오거나 만나보고, 만나면은화하고 공손하게 또 친절하에 접대하였다. 찾아온 사람이 무슨 문제로 가르침을 청하기 전에는 도산은 결코 훈계하거나 충고하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무리 어리석은 말이라도 끝까지 다 들었고, 남이 말 하는 중동을 꺾는 일이 없었다. 도산은 모든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였다. 누구나 의 처지에 대하여 동정하였다. 결코 누구에게 핀잔을 주는 일이 없었다. 비록 어린 사라이라도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할 기회를 주었다. 남이 하는 말에 대하여서 그는 경청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다가 남이 하는 말을 다 들은 뒤에 도 산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 그때에는 성의를 다하여 진실한 의견을 말하였고 조금도 저편의 뜻을 받아 들여 비위를 맞추는 일은 없었다. 안될 일은 안된다고 하고, 아니 믿는 말은 아니 믿노라고 바로 말하였다. 「글쎄」같은 어름어름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말을 도산은 쓰는 일이 없었다. 그의 말은 언제나 분명하게 긍정이거나 부정이었다. 「그렇소」거나 「아니요」였다. 「글쎄」는 없었다.

도산을 찾아 왔던 사람은 반드시 무엇을 얻어 가지고 갔다. 충고도 훈계도 없었건만 회화 중에 언제인 줄 모르게 돋는 자에게 무슨 소득을 주어서, 한번도 산을 만나고 나면 뒤에 잊히지 아니하는 무엇이 남았다. 그것은 그의 모든 말이 정확한 지식과 움직임이지 않는 신념과 또 한마디 한 마디가 애국 애인의 진정에서 나오는 까닭이었다.

천진 남개 대학(天津南開大學)에서 그 총장 장 백령(張伯岺) 박사와 회견한 일이 있었거니와, 장 박사는 그 후 조선 사람을 대하면 그대의 나라에 안 모라는 좋은 지도자가 있으니 부럽다고, 도산의 인격과 식견을 찬양하였다.

도산은 결코 누구를 이용하는 일을 아니하였다. 도산 이 북경에 있을 때에 모 씨가 도산을 위하여 거액의 금전을 구하여 주마고 말하였다. 그 모씨는 대단히 도산을 숭배하는 사람이요, 도산에게 자금만 있으면 나라 일이 잘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또 실상 그는 수단이 놀라와서 몇 만 몇 십만의 돈은 수월하게 만들기도 하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도산은 그가 정당한 일을 하는 인물이 아 니요, 일종의 협잡군인 줄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하였다.

도산은 노 이런 말을 하였다.

『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요, 신성한 일을 신성치 못한 재물이나 수단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오.』

그러하기 때문에 도산은 어떤 재물의 출처를 적실히 알기 전에는 그 재물을 받지 아니하였다. 도산이 레에닌 정부의 돈을 받기를 반대한 것도 이 때문이요, 또 독립 운동 당시에 도산이 부자를 협박하거나 꾀어서 돈을 내게하는 일을 종 시 반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도산의 신념에 의하면, 민족 운동을 하는 자가 도덕적으로 시비를 들어서는 아 니 된다. 동포가 백만 대금을 의심 없이 맡길 만하고 과년의 처녀를 안심하고 의탁시킬 인물이라야 비로소 동포의 신임을 받고 또 모범이 될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때에 티끌만큼이라도 부정하거나 불순한 동기나 순단이나 재물이 섞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다.

도산은 중국말고 문필에 능한 유기석(柳碁石)을 데리고 길림(吉林)으로 갔다.

그가 길림으로 간 목적은 대독립당 강화하였다. 도산의 의향으로는, 길림에 만주 지역 내의 중요한 독립 운동자와 될 수 있으면 국내에서도 몇사람 오게 하여 한 자리에 같이 모여서 독립 운동의 금후방침을 토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인년 一[일]월 二[이]십 七[칠]일 길림 최명식(崔明植)의 집에서 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최명식 등 만주의 거두 二[이]백여 명이 회합하여 회의를 진해하는 도중에 중국 경관과 일본 경관이 돌연히 회장을 포위하고 도산 이하 회의 중의 모든 지사를 포박하여 길림 경찰청에 구금하였다. 일본 영사관에서는 이것을 공산당의집회라고 중국 관헌에게 무고한 것이었다. 중국 명사 중에도산의 신분을 증명하는 사람이 있어 곧 일본 관헌에게 넘기지는 아니하고 약 이십 일간 유치되엇다가 二[ ] 중앙 정부에서 명령도 있어서 일동이 석방되었다. 도산이 길림에 독립 운동의 거두를 모은다고 첩보가 일본 관헌의 귀에 들어 가서 조선 총독부에서는 경시(輕視)이 하 많은 경관을 길림으로 파송하여 도산 이하를 일망 타진하려던 것이었다. 도산은 그후에도 수개월 길림에 머물렀었다.

도산이 길림에 모인 동지들에게 권고하여 말한 것은, 첫째로 통의부(統義府)·정의부(正義府)·의군부(義軍府)등 여러 기관을 통일할 것, 둘째로 운동이 방향을 적은 무력 저항(武力抵抗)에서 대규모 독립 전쟁의 준비로 전환할 것, 그러 하기 위하여 아직은 우리의 조아(爪牙)를 감추고 재류 수백만 동포의 부력과 문화력을 증진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미 파벌이 생긴 지 오래고 당쟁이 성습하여서 일조 일석에 통일이 되기는 어려웠으나 이것이 미구에 조선 혁명당으로 전 만주가 통일될 기운을 조성하였다.

도산은 그해 봄 땅이 풀리기를 기다려서 경박호(鏡拍湖)부근을 답사하였다. 그는 경박호의 풍경을 탄상하고 그 부근의 땅의 맛과 물의 맛이 다 살기 좋은 곳이라고 보아서 흙의 간색과 암석이 표본을 몇 가지 채취하여 가지고 길림으로 돌아 왔다.

도산은 길림에서 북경 남경을 거쳐서 상해로 돌아왔다. 북미의 국민회와 홍사단이 도산이 오랫동안 떠나 있는 것과 삼일 독립 운동에 낙망한 것으로 사기가 저상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서도산을 기다리고, 또 도산의 편으로 보더라 도 대독립당의 견지에서나 해이 이상촌 건설의 계획으로 보거나 북미의 여러 동지와 직접 만나 볼 필요도 있어서 도산은 마닐라를 거쳐서 미국으로 갔다. 후에도산은 필리핀을 본 감상을 이렇게 말하였다.

『배가 마닐라 항구에 들어 가니 경관이나 해관 관리나 모두 필리핀 사람이요, 미국 사람은 승객뿐이었다. 재판사나 검사가 다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미국사람이 있는 것은 오직 총독부뿐인 것같이 보였다. 필리핀은 국기를 썼다.』

이 모양으로 도산은 미국의 필리핀을 통치하는 모양을 말하고 필리핀 민족에 관하여는 향락적이요, 사치하고 나타하여서 독자적으로 분투하는 기상이 적은 듯하였으나, 이것은 기후 풍토의 영향에도 관계되겠지마는 결국은 국민의 자각 이 부족함이 주된 이유였을 것이라고 유감의 뜻을 보였다.

미국으로 가서 약 一[일]년 간 국민회와 홍사단을 위하여서 쉴새 없이 도산은 노력하였다. 첫째로 도산이 재류 동포에게 역설한 것은, 독립 운동은 장원한 것 이니 이번의 실패로 낙심하지 말라는 것과, 더욱더욱 분투 노력하여 각각 부력 을 증진하고 인격을 수양하며 미국인에게 호감을 주도록 하는 것이 당면의 독립 운동이라는 것과, 국민회의 빛난 역사를 지켜서 결코 결코 분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때에는 벌써 미국에도 공산주의 사상도 생기고 또 언제나 우리 민족이 가는 곳에는 불행하게도 반드시 따라 가는 파벌 당쟁의 퍠단이 하나 둘만 아니라 셋, 넷 여럿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 혹은 지금까지 미국에 있던 자가, 또는 새로 본국으로부터 나온 자가 저마다 두목이 되려고 하여서 소군 소당(小群小黨)을 만들어서 국민의 통일을 교란하였다. 무엇을 위한 파쟁인지 알 수 없는 파쟁이었다.

그러나 도산이 미국에 돌아오매 북미 동포는 도산을 믿고 도산의 말을 들었다.

『 선생님, 다시는 북미를 떠나지 마시오. 선생님이 떠나시면 또 우리 동포들의 마음이 떨어지고 헷갈리오.』

이것은 동포의 눈물겨운 진정이었다. 홍사단에는 더욱 어려운 문제가 일어났 다. 그것은 「이 마당에 수양은 다 무엇이냐. 있는 힘을 다해서 곧 독립 운동을 시작하자」하는 일파가 일어난 것이었다.

삼일 운동이 일어나도 흥사단은 단으로서는 나서지 아니하였다. 단우들이 개인으로 나섰다. 도산을 비롯하여 미국에서나 상해에서나 다수의 흥사단우가 요인으로서 독립 운동에 힘을 썼다. 그러나 흥사단으로서는 그 비정치성을 끝까지 지킨 것이었다. 그래서 흥사단의 기본 적립금과 준비 적립금에는 손을 대지 아 니한 것이었다.

흥사단의 참 주지를 깨닫지 못한 단우의 일부는 이것을 불만히 여겼다. 그들은 정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이라고 주장하여서 자칭 신파라 하고, 흥사단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다수를 완고한 수구파라 하였다. 그들의 생각에 수양이란 유치한 청소년이나 몽매한 무식장이들이 할 일이요, 자기네 모양으로 대학을 나온 고급 지식층에는 관계 없는 일이라 하였다. 그들은 인격 수양의 필요를 감득치 못한 것이었다.

도산은 그들에게 대하여 일찍 상해에서 장문의 서한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 서한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유일한 목적은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여 이것을 빛나게 유지 발전함이니, 이 밖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없다 하고, 그러하기 위 하여서 우리는 건전한 인격을 수양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정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고는 저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인과 관계를 역설하고, 그러므로 우리 흥사단의 인격·단결·수양 운동이 곧 유일 무이한 독립 운동이요, 또 모든 정치 운동의 몸체라고 하였다.

「수양 즉 독립」이라는 도산의 근본 사상은 이 서한에서 가장 분명하게 역설되었다. 이 서한이 一九三七[일구삼칠]년 동우희 사건 검거 중에 발견되어서 동 우회 유죄의 가장 큰 증거물이 되었던 것이다.

도산은 독립 국가의 건설을 즐기어서 가옥 건축에 비겼다. 이 비유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기초 공사와 상부 건축의 비유로서, 기초를 잘 다지지 아니한 건축은 오래 못 간다는 것으로, 여기 기초라는 것은 수양된 국민, 즉 국민의 자격을 구비한 국민을 이름이요, 상부 건축이라는 것은 모든 정치적 시설과 행위였다. 구한국이란 계국이 무너진 것이 기초가 부패하고 약한 때문이니 새 나라를 무너진 기초 그대로의 위에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홍사단 약법의 목적에 「우리 민족 전도 대업(前途大業)의 기초를 준비함으로 목적함」한 이 「기초」란 그것을 이름이다. 우리 민족이 도덕적으로는 거짓과 속임이 없어서 안으로는 동족끼리, 밖으로는 열강과 딴 민족에게 신임을 받을 만하고, 지식적으로 국가의 정치경제·산업·교육·학술 각 부문을 담당할 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많은 개인이 수양되고, 또 그것만으로는 아니 되니 이러한 유력한 개인들이 신성하게 뭉쳐서 민족의 중심이 될 단결을 이룬 뒤에라야 완전한 독립이 될 수 있고 또 그 독립이 풍우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반석 위에 영원히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건축에 대한 도사의 비유의 둘째 뜻은 건축과 재목에 관하여서였다. 집을 지으 려면 설계와 장색(匠色)이 필요하거니와, 그보다 더욱 요긴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재목이다. 재목이 없이 아무리 설계를 잘하고 장색이 팔을 부르걷고 덤비더라도 쓸데 없는 것이다. 우선 재목을 구하여야 한다. 있는 재목을 구할 것 이 없으면 씨를 심어 조림(造林)을 하여야 한다.

「방금 급한데 그것을 언제?」라고? 재목은 없더라도 우선 짓자고? 이것은 안 될 말이다. 오직 공론에 불과하다. 만일 백년을 자란 뒤에야 비로소 재목이 된 다 하면 오늘 심은 나무는 백년 후에는 재목이 될 것이다.

『그것을 언제?』

하고 오늘도 아니 심으면 백년 후에도 재목은 없을 것이다. 영 아니 심으면 천 년 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집은 못 지을 것이다.

우리 흥사단은 조림이다. 국가를 건설하고 운용하기에 필요항 재목을 준비하는 데가 곧 흥사단이다. 여기는 어떤 유력자가 하나 있어서, 즉 대 선생이나 대세력 가가 하나 있어서 인재를 양성하는 데가 아니라, 수양의 필요를 깨달은 동지들 이 모여서 한 약법을 작정하고 거기 비추어서 서로 수양하고 서로 연마하는 기관이다. 여기는 주인도 없고 중심 인물도 없다. 단우 저마다 주인이요, 중심 인물이다. 그중에 유덕(有德)한 사람을 중망(衆望)에 의하여 중심 인물로 할 수도 있겠지마는 그것은 오직 모범으로 세우는 것이지 그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아니다. 흥사단을 다스리는 것은 오직 흥사단의 약법과 거기 의하여 선거된 임원이 있을 뿐이다.

도산은 흥사단의 주지(主旨)를 재미 동지에게 다시 설명하고 강조하였다. 언제 도산이 떠나더라도 그 때문에 단의 동요가 있지 않도록 동지가 서로 다스리는 정신을 역설하였다.

이리하여 국민회와 흥사단이 다 안돈된 양으로 도산은 다시 미국을 떠나서 상해로 왔다. 도산이 그때 그 부인과 자녀와 한 작별은 마침내 영결(永訣)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 미국에 왔던 기회에 막내 삼남을 얻었으나 평생에 부자(父子)대면이 없고 말았다.

송종익(宋鐘翊)은 도산이 마지막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 가정 생활에 대하여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도산 내외는 결코 금실(琴瑟)이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도산 부인은 도산이 가 사를 돌보지 아니하는 것을 원망하였다. 세상이 보기에 도산은 높은 지도자이었 으나 부인이 보기에는 결코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마지막 미국에 체재하는 동안 도산은 그 부인을 위하기에 많이 애를 썼다. 부인의 옷도 사 주고 또 동부인하여서 다니기도 하였다.

도산은 그 부인을 가엾이 생각하였다. 빈한한살림에 자녀를 혼자 맡아 길렀고, 가정의 낙은 볼 기회가 극히 적었다. 지사(志士)의 아내란 다 그러한 것이 지마는 아내가 그 남편의 사업을 알아 보지 못할 때에는 그것은 불평이요, 비극일 수 밖엔 없었다. 그러나 도산 부인은 남편을 떠난 가난한살림살이에 오륙 남매를 그쪽이 길러내었으니 그는 현부인임에 틀림 없는 일이었다.

도산은 대독립당과 이상촌과 흥사단 원동 지부의 발전의 계획과 수만금의 동지 의 출자(出資)를 안고 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도산의 뜻을 펼 기회는 막혀 버렸다. 이른바 만주 사변이 일어나서 비단 만주뿐이랴, 관내(關內)에 까지도 일본의 세력이 뻗고, 곧 이어서 일본은 상해에까지도 출병하게 되니 도산의 계획은 베풀 곳이 없었다.

第七章[제칠장] 被四殉國時代[피사 순국 시대][편집]

― 民族精神 [민족정신]의 守護者 [수호자] ―

一九三一[일구삼일]년 四[사] 월 二[이] 십九[구] 일, 의사 윤 봉길(尹奉吉)에서 일본군 최고 지휘관 백천의 측(白川義則) 대장 등을 폭살하는 사건이 생기매 일본 관헌은 조계(租界)관헌에 교섭하여 한국인대 수색을 행할 새도산은 불행히 체포되어 경성(京城)으로 압송되었다.

이날은 마침 도산의 아는 사람의 아들인 어떤 소년의 생일이었다. 도산은 폭탄 사건 발생을 미리 알지 못하고 그 소년에게 생일이 되면 선물을 선물을 준다고 약속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선물을 가지고 그 아는 이의 집을 찾았다. 거기서 잡힌 것이었다.

도산은 상해에 있는 일본 영사관 경찰서에 약 三[삼]주일간 유치되었다가 五 [오]월 하순에 배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당일 인천 부두에는 신문 기자·사진반·친지 등이 많이 출영하였으나 수명의 사법 경관의 옹위(擁衛)를 받은 도산은 거무스름한 스프링을 입고 자갈색 중절모를 쓰고 포승만은 없이 경계 엄중한 속으로 묵묵히 걸어 자동차에 올라 곧 경성으로 향하였다. 신문사 사진반의 건판은 전부 압수를 당하였다.

도산은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 치안 유지법 위반(治安維持法違反)이 그 죄명이었다.

도산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기사가 생해의 신문에 나매「정치범을 잡혀 보내느냐」고 중국 인사들이 항의하였으나 쓸데 없었다.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든 도산은 一[일]개월여의 취조를 받고 송국되어서 서 대문 감옥으로 넘어 갔다. 도산이 감옥으로 가는 날 새벽에 재판소 뜰에는 남녀 동지와 친지등 백명 가까운 사람이 모였다. 이때에는 이러한 자리에 오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이 일 하나만으로도 경찰의 요시찰인 명부에 오를 만하기 때 문이었다.

도산은 일심(一審)에서 四[사]년의 형을 받았으나 상소권을 포기하고 복역하였다.

도산 재판중의 모든 비용은 김성수(金性洙) 등 친우가 몰래 대었고, 서대문 감옥재감 중인 그의 옛 친구요, 동지인 이강(李堈) 부처가 일부러 감옥 옆에 집을 잡고 살면서 조석을 들였다. 도산은 약 一[일]년 후에 대전 감옥으로 이수되었다.

도산이 형기 四[사]개월을 남기고 가출옥이 된 것은 一九三五[일구삼오]년 봄이었다. 대전 복역 중에 도산은 소화 불량증이 심하여졌다. 그는 그물을 뜨고 대그릇을 결었다. 날마다 자기의 감방을 깨끗이 소제하기로 유명하였다.

무인년 출생인 도산이 상해에서 잡힌 것이 五[오]십四[사]세, 대전 감옥에서 나온 것이 五[오]십八[팔]세, 서대문 감옥에 들어 갔다가 병으로 경성 대학병원에 나온 것이 六[팔]심세, 다음해 四[사]월에 그 병원에서 별세한 것이 무인년 환갑인 六[육]십세, 다음해 四[사]월에 그 병원에서 별세한 것이 무인년 환갑인 六[육]십 一[일]세, 향년(享年)이 만 五[오]십 九[구]세 五[오]개월이었다. 최후로 본국의 산천을 비교적 자유로 바라보기만 二[이]개년이었다. 도산 이 대전 감옥에서 나온 때는 추웠다. 상해에서부터 도산의 사랑과 신임을 받던 유상규 의사(劉相奎醫師)는 자기가 강사로 시무하고 있는 경성 의학 전문 병원에 병실을 잡고 도산을 그리로 영접하려 하였으나 웬 일인지 도산은 그 호의를 받지 아니하고 삼각정(三角町) 김병찬(金炳贊)의 여관에 투숙하였다. 출옥 당시에 그의 용모는 못 알아 볼이만큼 부었고 또 그 때문인지 전연 무표정하였다.

도산이 들어 있는 여관은 도산을 찾는 사람으로 현관에 신이 그득하였고 또 시골서 도산을 만나로 오는 사람으로 객실은 만원이었다. 《東亞日報[동아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등 민간지가 있었으나 당시 경찰 법규상 가까스로 도산의 동정을 조그맣게 보도할 뿐이었지마는 도산 출옥의 보도는 전국에 전하였다. 신민회 시대 이래의 도산의 친지와 동지는 물론이어니와, 평소에 만나 본 일이 없는 사람도 경찰의 주목을 꺼리면서도산을 여관에 찾았다. 하루에도 五, 六[오,육]십 명, 어떤 날은 백여 명의 내객이 있었으나 도산은 일일이 접대하였다.

일본 관헌은 도산이 많은 사람을 접하는 것을 싫어하여 불근신(不謹愼)이라고 자주 경고하였다. 그들은 도산의 친근자에 대하여 도산이 먼저 경무국장을 만나 고 총독과 정무총감을 만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나는 일 없는 사람이니, 당국자와 면회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늘 거절하였다. 이것이 첫째로 일본 관헌의 감정을 상하게 한 일이었다.

도산은 서울을 떠나 사백(舍伯) 치호(致鎬)의 집을 방문하고 잠시 용강 온천(龍岡溫泉)에서 정양하였으나 그리로 매일 다수의 방문객이 있어서 경찰은 그곳 여관에 투숙하는 객을 검문하여 도산을 찾아 온 사람이라면 무슨 트집을 잡아서 주재소로 호출하여 밤 깊도록 힐란하였다.

용강 온천에서 한 三[삼]십리 되는 곳에 있는 김씨의 집에서도산을 하루 저녁 초대한 일이 있었다. 도산과 수명의 친지는 세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김씨 가 사는 동리를 찾았다. 때는 석양녘, 어떻게 알았는지 길가에는 십수명씩 도산의 통과를 기다리는 무리가 많아서, 도산 일행이 탄 차는 십수차 정거하지 아 니치 못하였다. 군중 중에는 노인도 부녀들도 있었서 도산이 차에서 내리면 그 앞에 와서 절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는 이도 있었다. 도산이 다시 차에 올라서 멀 리 지나갈 때까지 그들은 꼼짝도 아니하고 도산의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 김씨의 집에 닿을 때에는 수백 명의 촌민이 모여서 환영하려 하였으나, 주 재소 경관에게 해산을 당하여 집집에 쫓겨 들어가서 숨어서 담 너머로 도산의 얼굴을 한번 얻어 보려 하였다. 어떤 담 너모로는 수십 명의 머리로 조롱조롱 넘 겨다 보고 있어서 일본 경관의 질책(叱責)을 받았다.

그날 밤과 그 이튿날 김씨 집을 떠날 때까지 도산은 김씨 집 가족 이외에 어느 부락인과도 말 건네기를 금한다고, 이것은 평안남도 경찰국의 엄령(嚴令)이라고 일본인 순사부장이 도산을 찾아 와서 전하였다. 도산은 아무 말이 없었다.

도산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시찰하고 다음에 평안 북도를 돌았다. 간 데마다다 동포는 정성으로 이 민족적 위인을 환영하였으나, 일본 관헌은 도산이 민중에게 환영받는 것이 싫었다. 조선의 민심이 조선인에게로 돌아 가는 것을 막는 것이 합병 이후의 전통 정책이었던 것이다. 한국민족을 하여금 한국의 역사를 잊게 하고 조상을 잊게 하고 그 대신에 일본의 역사를 잊게하고 조상을 잊게 하고 그 대신에 일본의 역사를 제 역사로, 일본의 조상을 제 조상으로 하도록 조선인이 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실로 과부(夸父)의 망상이었다.

도산이 국내 순회 중에 일본 관헌은 여러 가지 제한을 더하였다. 첫째로는 도산의 말을 듣는 회식을 금하였다. 정주(定州)에서 약 五[오]십 명이 회식할 준비를 한 때에 이 二[이]십 명 이상 금지령이 내리기 때문에 식사를 두 곳에 나누어서 하는 희극이 있었다. 선천에서는 二[이]십인의 제한을 지키는 회식에까지도 경찰관이 입회(立會)가 아니라 좌회(座會)하였다. 신은주에서만은 도지사의 특별 허가로 백여 인의 환영 만찬과 일석의 강연을 허락하였다. 새성 인사들은 지혜로와서 각 가정에서 四,五[사,오]인씩 회식하기를 매일 삼차 수차로 一[일]주 일이나 계속하였다.

도산은 동포에게 폐가 되는 것을 근심하여 국내 순회를 중지하여 버렸다.

도산은 강서 대보산(大寶山) 송태(松苔)에 집 한 채를 짓고 거기 숨어 버렸다.

그 집은 도산이 농가 건축의 한 개의 모범 시안(模範試案)으로 심혈을 경주하여 서 설계하였고, 친히 공사를 감독하였으나 목수 이장(泥匠)들이 잘 알아 듣지도 못하고 또 말을 듣지 아니하여서 퍽 고심하였다.

도산이 송태에 숨어 있을 때에도 일본 관헌은 늘 도산을 괴롭게 하였다. 거의 매일 경관이 올 뿐더러 도산을 찾아 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하였다. 그래서 도산의 얼굴을 한번 보려는 평양, 기타로서 오는 청년들은 일요일이나 휴일을 타서 대보산 등산을 핑계로 큰길을 피하여서 송태를 찾았다. 그 청년들은 더러는 도산을 찾아서 말을 붙이기도 하고, 더러는 안목을 꺼려서 도산이 땅을 파거나 돌을 줍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거나, 또는 묵묵히 거들고 가버렸다. 부인네들 도 십인 二[이]십인 작반하여 음식을 차려 가지고 송태를 찾아 와서도산을 위 로하였다. 이리하여서 평양 강서간의 버스에는 어느 편이고 송태에 오는 손이 아니 내리는 때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송태를 찾는 사람은 도산에게서 반드시 무엇을 얻어 가지고 갔다.

일본 관헌이 이것을 모를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신사참배(神社參拜) 문제로 평양서 교회와 숭실 학교에 존폐문제가 발생되었을 적에 도지사 상내 언책(上內 彦策)은 사람을 보내어서 도산이 조선을 떠나서 미국으로 가지를 권하고 적어도 평안 남도를 떠나기를 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도산은, 나는 본국을 『떠날 생각도 없고 또 대보산을 떠날 생각도 없다.』

하여 이 권고를 거절하였다.

이른바 「지나 사변」이 나던 一九三七[일구삼칠]년 五[오]월 초에 모씨는 동우 회의 금후의 태도에 관한 도산의 지시를 들으려고 송태로 갔다. 그때는 남차랑(南次郞)이 총독으로 와서 국체명징(國體明徵)이란 것을 내어 걸고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여 이 정책에 응하지 아니하는 조선인에 대하여는 단호 탄압을 가한다는 것을, 혹은 유고(諭告)로, 혹은 지사·경찰 부장·사법관 회의에서 누구 이성언하고, 예수교에 대하여서는 신사 참배, 선교사 배척을 강요하고, 기타 재등 문화 정책(齋籐文化政策)으로 허용되었던 약간의 언론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에 대하여서도 근본적으로 정책을 고쳐서 일체 민족주의적·자유주의적 경향을 말살하는 강압 공작에 착수하였다. 이때에 동우회가 문제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인가 싶었다.

애초에 수양동우회는 정치적이 아닌 인격 수양 단체로 재등 총독 시대에 일본 관헌의 양해를 얻었던 것이다. 그후 동후회는 일체 정치적 행동에 참가하지 아 니하였다. 신간회(新幹會) 결성 당시에도 동우회의 태도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인격 수양이야말로 우리 민족에 있어서는 만사의 기초라 하는 견지에서 신간회가 가입을 거절하고 그 대신 동우회원 개인으로서의 정치 단체 참가하는 관계 없다 하여 조병옥(趙炳玉) 등이 개인의 자격으로 신간회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동우회가 만족주의자의 단결이라 하는 데 대하여서는 일본 관헌도 묵인하고 있 었다. 또 회우의 거의 전부가 배일적이요, 독립을 희망하고, 또 독립 운동에 참가하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어찌하여서 일본 관헌이 동우회를 허가 하였던가, 그 이유는 이러하였다.

첫째로, 남차랑(南次朗)이 총독으로 오기까지는 일본은 조선인을 한 민족 단위로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東亞日報[동아일보]》가 「조선 민족의 표현 기관」이라 하는 사시(社是)를 공공연히 언명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또 신간회의 조직을 허락한 것 등이다. 남차랑이 오기까지는 조선 민족은 조선어를 배우는 것을 학교 제도에서도 허락하였고, 따라서 조선 민족이 조선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는 것도 인정하였다. 일본은 조선 민족을 일본 민족으로 화하려는 어리석은 일을 아직 시작하지 아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우회가 민족 정신을 보유하는 것을 해괴하게 생각할 것이 없었다.

둘째로,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의 중축을 삼은 것은 조선 내의 치안 유지였다. 삼일운동 직후의 조선 민심을 일본은 휴화산(休火山)으로 보았다. 때때로 일어나는 폭탄 사건은 일본 관헌의 신경을 과민케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주권을 행위로써 반항하지 아니하는 한에는 비록 민족주의자요 또 독립 운동을, 몸소하던 자라도 잠자코 있기만 하면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서서히 조선이 일본에서 분리될 수 없도록 각종의 정치·경제 공작을 하려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서 《東亞日報[동아일보]》, 기타의 민족주의적 일간 신문이 묵인되는 모양으로 동우회도 두어 두고 하는 양을 보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국체명징」(國體明徵)이라는 간판을 걸고 등장한 남차랑은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종래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둘러엎고 한국 민족의 일본화를 단적으로 강제하려 하였다.

남차랑은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사 참배, 국어 상용(國語常用)이라는 것을 여행(勵行)시켰다. 예수교 신자나, 불교 신자나, 천주교 신자나 다 신사를 참배하는 것으로 존재(存在)의 제일 자격으로 삼았다. 이것을 거절하는 자는 단호히 용대(容貸)하지 않았다. 평양의 목사 주기철(朱基徹)은 신사 참배 불응으로 마침내 옥사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국어 상용」이라는 것은 관공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사람끼리의 공식 회합에도 한국어를 쓰기를 금하고 일본말을 쓰게 하는 것이다. 일본말을 알 만 한 한국 사람끼리 한국말을 썼다 하여 관리나 교원이 면직을 당하였고, 초등학 교 아동이 한국말을 쓰는 것은 큰 죄이어서 이 때문에 타살당한 자조차 있었다.

정학 제명은 항다반사(恒茶飯事)이었다.

인쇄물에는 한국의 역사는 물론이요 민족적 위인에 언급한 것은 삭제를 당하였다. 그 말기에 있어서는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같은 학자의 사진까지도 학교에서 철거를 명하였다. 그들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아주 말살하고 경술 합병 시에 비로소 생긴 민족과 같이 취급하려 하였다. 초등·중등·학교에서는 조선어가 전페되었다. 동우회가 총검거를 당한 것이 소위 지나 사변이 발생되던 一九三七[일구삼칠]년 七[칠]일보다 一[일]개월 앞선 六[육]월 七[칠]일이 거니 와. 그해 三,四[삼,사]월부터 벌써 경찰이 동우회를 건드리는 징조가 보였으니, (一[일]) 모씨에게 문학 회장이 되기를 청한 것, (二[이]) 김 윤경(金允經)에게 심전 개발 강연(心田開發講演)을 청한 것 등이었다. 이 두 가지는 물론 다 거절 되었다. 이 거절이 동우회의 비법력 태도를 표시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위기 일발의 경우에 모씨가 대보산에 도산을 찾았던 것이었다.

도산은 소화 불량으로 안색이 매우 초췌(憔悴)하였으나 미완성의 정원을 혼자 고르고 있었다.

때마침 녹음에 꾀꼬리, 기타 새들이 울었다.「이조성 중오일장」(異鳥聲中午日長)의 경(景)이었다.

도산은 모씨의 남차랑 정책, 동우회 사정, 기타 시사에 대한 보고를 듣고 아무 대답이 없이 다만 모씨를 하루 더 하루 더 하고 만류할 뿐이었다. 이는 도산이 생각하는 표다. 一[일]주일 간 모씨가 송태에 묵은 동안에 평양, 기타에서 六, 七[육,칠]동지가 도산을 찾아 시국답을 하고 사업의 장래를 논의하였으나, 도산은 많이 말하지 아니하고 듣고만 있는 때가 많았다.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어떤 날 저녁에 도산은 몇 사람의 찾아 온 동지와 함께 송대 앞고개턱 잔디 판에 앉아서 밤 경치를 보고 있었다. 이날의 하늘은 실로 장관이었다. 금성과 상현(上弦) 달고 목성이 간격을 맞추어 한 줄에 빗기고 스코오피온의 가운데 별이 불덩어리와 같이 빛났다. 화성도 붉은 빛을 발하면서 뒤를 따랐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었는지 모르거니와. 세상에 큰일이 생길 것 같다는 화제가 나왔다. 만 차랑의 강압 정책에 조선 민심이 동요된다는 말도 났다. 밤이 이슥하도록 말들을 하였으나 도산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튿날도산은 모씨에게 자기가 五[오]월 二[이]십일경에 상경할 터이니 이사회(理事會)를 원만히 모이도록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사회 소집에 관하여서 난관이 생겼다. 그것은 집회허가에 곤야여서 종로서에 서는, (一[일])소집 통지서를 일본문으로 쓸 것, (二[이]) 집회의 용어를 일본 말로 할 것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우회 이사장은 일본말에 능통 치 못하는 이사가 있는 것을 이유로 한국어 사용을 허락하기를 요구하였으나,

『너희 회 이사들이면 영어까지도 능통하는 사람들이 아니냐.』

하고 성을 내었다. 이에 이사회 소집을 단념하였다.

五[오]월 二[이]십일에 상경하마던 도산은 유월 초가 되어도 오지 아니하였다.

뒤에 들은즉 설사로 위석(委席)하였다사 유월 중순에 잡혀 왔다고 한다. 동우회 관계자는 종로서 유치장과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나뉘어 있었다.

경성 지방 법원 검사가 종로 경찰서로 출장하여 도산을 문초하였다. 먼저,

『지금까지 잘못하였느냐?』

하는 말과,

『세상에 나가면 무엇을 하겠느냐?』

하는 두 가지를 불었다.

이에 대하여 도산은,

『지금까지 동우회에 관하여서나 기타에 관하여서는 잘못한 일이 없다. 또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점에 대하여서는 아무 말도 하기를 원치 아니한다.』

하고 대답하였고,

『너는 독립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

하고 다시 묻는 데 대하여서는 도산은,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서 하여 왔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 다.』

라고 대답하였다.

『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묻는 데 대하여서 도산은,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의 독립이 될 것이요, 세계의 공의(公議)가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너는 일본의 실력을 모르느냐?』

하는 심문에 대하여는 도산은,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세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 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인 대한 나라를 유린(蹂躪)하는 것을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二[이]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二[이]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도산 등 四[사]십四[사]명은 一九三七[일구삼칠]년 七[칠]월에 수차에 나누어 송국 수감하였고, 그 나머지 八[팔] 십여 명의 회우는 기소 유예로 석방하였으나,

『동우회는 홍사단과 동일한 것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하는 답변을 강요하여서 기소된 피고들의 방증을 삼았고, 조선 총독부에서는 상해에까지 손을 뻗쳐서 상해에 있는 홍사단 원동 지부로 하여금 홍사단이 독립 운동 단체임을 자인하고 자진 해산한다는 성명서를 발하게 하였다. 이 사건은 검거·공판·판결에 이르기까지 일체 신문 보도를 금지하였다. 민족 운동의 최 후 사건으로 도산과 많은 지명의 인사를 포함하니만큼 인심에 줄 영향을 꺼렸던 것이다.

이 사건 관계자 중에는 악형을 받은 사람도 많아서, 최윤호(崔允鎬)가 보석 중 사망하였고, 김성업(金性業)은 종신지질(終身之疾)을 얻었다. 그러나 도산은 악형을 가하기에는 너무도 쇠약하였었다.

도산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병이 중하여져서 그해 십 二[이]월 말에 경성 대학 병원으로 보석이 되어 익년 三[삼]월에 별세하였다. 도산은 대전 감옥 이래의 숙환인 소화 불량으로 몸이 쇠약한 데다가 페환이 급성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도산이 경성 대학 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중에 방문하는 이도 많을 수 없었다.

도산의 방문하는 것은 감옥에 들어갈 각오를 요하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도산의 동지와 친지의 다수는 감옥에 있었다.

도산 입원의 소식을 듣고 미국 동지들이 치료비를 송금하여 왔다. 엄중한 경계를 무릅쓰고 도산을 병실에 위문하고, 혹은 식료품을, 혹은 급전을 두고 가는 독지(篤志)도 있었다.

도산의 병상에 임종까지 붙어 있던 이는 그의 생질 김 순원(金順元)과 또 청년 박 정호(朴定鎬)와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미움을 받아 가면서도산의 병실에 매일 출입하여 비밀히 외계와 연락하는 일을 한 것은 오모(吳某)였다.

오씨는 이번 동우회 사건에 기소 유예로 석방된 이로서도산을 아직도 찾아 다닌다 하여 경찰에서 여러 번 다시 잡아 넣는다는 위협을 받았다.

조각가 이 국전(李國銓)이 도산의 데드마스크를 떴으나 그것은 빼앗기고, 이 국전과 그의 선생 김복진(金復鎭)은 경찰의 추포(追捕)를 당하였으나 하룻밤의 유치와 후욕(詬辱)만으로 면하였다.

나중에 들은 말을 종합하면, 도산은 최후의 날인 三[삼]월 九[구]일에도 어디 조용한 집을 하나 얻어 가지고 거기서 정양하기를 원하여서 오는 사람에게 집 말을 하였다. 그 후 얼마 아니하여 도산은 무의식 상태에 빠졌다.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하고 웅장한 음성으로 복도에까지 울리도록 몇 번 외쳤다. 그리고는 아무 유언도 없이 자정이 넘어서 운명하였다. 머리맡에는 생질 김 순원이 있었다. 김 순원은 이듬해에 보전(普專) 학생으로서 사상 사건으로 검거되어 이태만에 옥사하였다.

유해는 시체실로 옮겼다. 도사의 친형 치호아친 매 김성탁(金聖鐸) 목사 부인과 질녀 맥결(麥結)등이 오고, 평양서는 도산의 평생의 친우요 동지인 오윤선(吳胤善) 조만식(曺晩植)·김지간(金志侃)등이 왔다. 장례에 관하여서는 경찰의 간섭이 심하고 또 주장할 사람이 없어서 二.三[이,삼]일 장지를 결정치 못하 다가 마침내 동대문 밖 망우리 묘지(忘憂里墓地)로 정하고 二[이]십인 이내에 한하여 장지까지 가기를 허락한다는 경찰의 명령으로 극히 적막하게 장송하였다. 묘지 들어가는 데는 그 뒤 수주일이나 양주 경찰서원이 파수하여 묘지에 들어가는 사람을 수하(誰何)하였고, 그 후에도 一[일]년 간이나 묘직(墓直)에게도산의 분묘를 묻는 사람이면 주소 씨명을 적게 하여서 경찰이 모르게 도산의 산소를 찾는 이는 정로로 가지 아니하고 길 아닌 데로 산을 올라야 하였다.

도산이 돌아 가매, 미국 그 유족에게는 전보로 부고를 보내고 아무도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것이 도산의 六[]육십 一[일] 세 되는 봄이었다. 그해 음력 시월이면 환갑이었다.

도산을 애국자로 청년의 지도자로 육십 평생을 마치었다. 그가 집안 사람을 위 하여 생업으로 한 것은 전후 일년 반 가령이었으니, 반년 간은 미국 캘리포오니 아주 리버사이드에서 과수원 관개 공사(灌漑 工事)에 토목 인부로 노동하였고 약 一[일]년 은 로스앤젤리스 어떤 미국인 여관에서 가옥 소제 인부로 있었다. 도산이 국민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이여관 소제인의 직을 떠날 때에 그 주인은,

『그대가 一[일]년간 내 집 일을 참 잘 보아 주었으니 무슨 소원 하나를 말하면 그대로 하여 주마.』고 할 때에도산은,

『나 있던 일자리에 한국인을 두어 주는 것이 소원이요.』

하여 그 여관에서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한국인을 둔다고 한다.

도산은 오직 대한 나라를 사랑하다 죽었다. 그가 대한 나라의 기초로 가장 정력을 다하던 흥사단 사건으로 옥사하였다. 고래로 이처럼 한 일에 전 생애를 완전히 바친 사람이 있을까.

얼른 보면 도산의 일생은 실패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안중에 성공도 실패 도 노(勞)도 공(功)도 없었다. 오직 애국 애족의 일념에 말려도 말지 못하여 한 일생의 노고(勞苦)였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과연 실패의 일생이었던가. 그는 과연 노이무공(勞而無功) 하였던가. 그는 우리 민족에게 참된 애국심을 심어 주고 민족의 진로를 밝히 보여 주었다. 그리고 몸으로써 애국자의 생활의 본을 보여 주었다. 그의 생활은 과연 실패의 일생일까. 그는 과연 노이무고(勞而無功)일까. 一[일]세기를 두고 보면 다 알 것이다.

國民訓鍊篇[국민훈련편][편집]

第一章[제일장] 自我革新[자아혁신][편집]

건국의 오늘에 있어서 「도산이 지금에 살아 있었으면」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일은 큰데 일을 맡을 사람이 적다는 한탄이려니와, 이때에도산이 살아 있었으면 하는 것은 도산을 참으로 잘 아는 이면 누구나 진정으로 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도산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애국 지사로서의 도산, 웅변가로서의 도산, 신민회(新民會)·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재미 국민회(在美國民會)·흥사단(興士團)·상해의 대한 임시 정부 중심 인물로서의 도산, 일본 관헌의 손에 잡혀 귀국한 이후 四[사]년 징역을 치르고 출옥 후 二[이]년 여에 다시 동우회 사건(同友會事件)으로 잡혀서 옥사(獄死)한 도산에 관하여서는 이마 성년된 우리 동포로서는 모르는 이가 드물 것이다.

물론 이상 열거한 사적(事蹟)만으로도 도산 안창호가 민족적 위인으로 숭배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육십 평생에 전연 집안 일과 생업을 돌아 보지 아 니하고 지사(志士)로서의 절(節)을 완취한 그요, 공생활(公生活)에서나 사생활 (私生活)에서나 일점도 비난할 것이 없는 그다, 살아 있는 자나 이미 죽은 자나를 물론하고 도산을 원망하거나 비훼(誹毁)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는 평생에 누구를 속인 일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야속하거나 부정하게 한 일이 없었다. 그 와 접한 일이 있는 이는 다 그의 사랑과 도우려는 우정(友情)을 받았다. 이것만 하여도 그는 현인(賢人)이요 군자(君子)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가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민족을 어떻게 생각하였 으며, 그의 건국의 이상은 무엇이며, 인류 평화의 바책은 무엇이며, 그의 문화관(文化觀)정치 경제관(政治經濟觀)·연애관(戀愛觀)·가정관(家庭觀)은 무엇인 지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아니할 것이다. 그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없었으므로 그의 의견이 동포에게 널리 전하여질 기회가 없었다. 그의 연설과 친지와의 담화 중에 겨우 그이 사상의 편린(片鱗)이 드러났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연설도 다만 청중(聽衆)의 마음에 박혔을 뿐이요, 기록된 것이 적으며 개인 친지와의 담화는 더욱 그러하였다. 원래 기록이란 것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회인 데 다가 도산의 서간이나 설화(說話)의 필기를 집에 두어 두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도산과 만난 일이 있다는 것으로 요시찰인 명부(要視察人名簿)에 오를 자격이 생기고 도산에게 저녁 한 때를 대접하였다는 죄로 유치장에 들어 갈 죄목이 되는 것이니 하물며 도산의서간이나 연설 기록을 두는 것은 넉넉히 치안 유지법(治安維持法)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한 번 도산 안창호와 말을 건네어 본 이는 반드시 깊이 인상이 되어서 후세에 전하고 싶다는 한두 가지 일 또는 한두 마디 말을 기록하여 두어서 잊으려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배외 사상(拜外思想)에 젖은 사람들은 외국 사람의 말을 존중하고 제 나라 사람의 일이나 말은 몇 퍼센트 떨어뜨려서 평가하는 누습(陋習)이 있다. 이러한 누습이 없었던들 도산은 동포간에 현재보다 수배의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였을 것이다. 만일 도산이 그 포부를 다른 사회에 피력하 였다면 도리어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흔히 도산을 무식한 사람이라고 하고 도산자신도 자기는 무식한 자라고 자처하였다. 사서 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무불능통(無不能通)하는 것이 유식이라면 도산은 과연 무식한 사람이요, 중학대학을 차례로 졸업하고 학사·박사의 학위를 가지지 못한 것이 무식이라면 도산은 문제 없이 무식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주와 인생의 대도(大道)에 철(徹)하고 국가와 사회 의 이론과 실제에 대하여 무애(無礙)의 경지에 투입(透入)하는 것으로 유식이라 할진댄 도산은 지극히 유식한 사람이다. 그의 공부는 독서나 구이(口耳)의 전수(傳授)에서 온 것이 아니요 천지(天地)라는 원본(原本), 국가·사회라는 원본에서 터득(攄得)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지식은 한 번 남의 두뇌와 언어를 통하여서 전하여 온 세컨드 핸드의 것이 아니요 직접 자기의 관찰과 추리(推理)로 도달한 독창이었다. 이것을 사진에 비기면 도산의 것은 남이 찍은 사진을 복제(複製)한 것이 아니요 도산 자시의 카메라로 도산이 눈소 보고 손수 박은 원판이었다.

이 모양으로 도산은 매일 동포의 지도에 분주하면서 그야말로 행유여력(行有餘力)이어든 학문에 힘써서 독서를 하였으나 독서는 그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독창적인 지식과 타인의 그것과의 대조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한 공부, 이 공부로 얻은 지식이므로 도산의 지식에는 도산의 생명의 피가 통하고 있어서 그 지식은 감정과 의지의 동력(動力)을 구비한 활지식(活知 識)이었다. 알기만 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그러한 죽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행하지 아니하고 견디지 못하는 산 지식이었다. 그의 말, 그 의 의견에 힘이 있고 그가지행 함일(知行合一)의 일생을 보낸 것이 이 이유에서 온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가 극장과 국가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 결국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 같은 이론이지마는 마치 금시 초문인 듯한 청신 발랄(淸新潑剌)한 인상을 주어 참으로 극장이란 그처럼 필요한 것이요, 따라서 극장이란 이리이리하여야겠다는 굳은 신념과 결심을 듣는 자의 마음에 일으켜주는 것이다. 책에 있는 지식이 물고기의 그림이라면 그의 지식은 물고기 그것이었다.

이 모양으로 지성으로 터득한 지식을 지성으로 설복하는 곳에 그의 웅변이 있 고 감화력이 있다. 그의 말은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낙인(烙印)같이 파고 들어 그 마음에 변질 작용할 일으키지 아니하고는 말지 아니한다.

신민회(新民會)·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국민회(國民會)·흥사단(興士團) 등의 동지가 四[사]십년, 三[삼]십년, 그 의(誼)를 변치 아니하는 이유가 여기 있으니 연치로 보아서는 도산과 비슷한 이까지도 자신이 늙을 때까지도 도산을 선생으로 여기어 경애의 념을 변치 아니하는 것이다.

도산을 인격자라 하거니와 그의 인격의 본질을 이룬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쉬지 않는 노력이요 수양이요 수양이다. 그의 평생은 철투철미 근엄(謹嚴) 두 글자로 평할 수 있을 이만큼 그는 방심하거나 사지(肆志)하는 일이 없었다.

아마 그의 지인치고 그가 성낸 기색을 보이거나 크게 웃거나 근심에 잠긴 양을 본 기억은 없을 것이다. 그의 일동 일정에는 언제나 예려(叡慮)와 자제(自制)가 있었다. 이른바 「무심코」라는 예가 없었다. 그는 신병이나 피로로 심신이 여 상(如常)치 못함을 자각할 때에는 사람대하기를 피하였고 부득이 접견하더라도 한훤(寒喧) 한담뿐이지 책임 있는 말을 아니하였다. 그는 연설을 하거나 회의에 임석하거나 의견을 토로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자기 의견에 스스로 반대도 하여 보고 찬성도 하여보고 찬성도 하여보고 또 보첨(補添)도 절충도 하여보아서 그야말로 천사만려(千思萬慮), 좌사우탁(左思右度)으로 그 이상 더할 수 없다는 신념에 도달하기 전에는 발언치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한 번 발인된 그의 의견은 아무리 여러 사람이 여러 각도로 반대하더라도 그에게는 언제나 예비한 답변이 있어서 도저히 그 의견을 깨뜨릴 수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로 하여금 논적(論敵)의 미움을 받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의 도덕적 검속(道德的 檢束)에 있어서도 그는 독창적이었다. 그는 성경을 읽었고 유교 경전도 읽어 어디서나 그의 양식을 구하였지마는 어느 한곳에 기울어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무슨 도덕율(道德律)이나 자기의 양심과 이성(理性)의 비판을 거쳐서 자기의 도덕율에 편입하는 것이었다.

그는 의복·식사·거처에 모두 자율적인 규구(規矩)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집하는, 이른바 도덕가의 교주고슬(膠柱鼓瑟)은 아니었다. 그는 도덕이 인생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인생이 도덕을 위하여 있지 아니하다는 것과, 도덕이란 결코 별다른 일이 아니라 개인으로서는 인성(人性), 즉 생리적 심리적 자연에 합하고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는 그 공동체의 약속과 복리에 위반됨이 없다 는 것이라고 믿었다.

동시에 그는 도덕이 예의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예의는 각 개인의 반복 실행 (反復實行)에 의하는 습관 형성력(習慣形成力)이 아니면 자리잡힐 수 없는 줄을 알았다. 그는 사람이 도덕으로 행동을 검속(檢束)함은 사람이 기예(技藝)를 습득함과 마찬가지어서 학습하는 동안의 괴로움이 있으나 습득된 뒤의 평안함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일상 생활로 하여금 예의 형성의 수련을 쌓았다. 예를 들면 그는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몸을 단정히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앉을 때에 허리를 굽히지 아니하고 설 때에 몸을 기대거나 기울이지 아니 하고 걸음을 걸을 때에도 몸을 기대거나 기울이지 아니하고 걸음을 걸을 때에도 팔다리를 일율 맙춰 놀리고 (一律) 고개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생리학적으로 좋은 뿐더러 심리학적으로도 섭심 정심(攝心正心)의 공효가 있다고 그는 말하였다. 단좌(端坐)를 공부하여 본이는 경험이 있으려니와 단좌와 정보(正步) 가 힘 안 드는 습관이 되기에는 상당한 고행과 세월을 요하는 것이다.

도산의 일거 일동은 모두 이러한 고행 수련의 결과였다. 그의 어음(語音)이 분명한 것, 말하는 속도와 음량의 조절 등 모두 그러하고, 그가 한 잔의 차를 들어 마시는 데도 다 고행 수련의 자취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반성과 수련을 쉬지 아니하므로 도산은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무엇이 더하였다.

그런데도산의 이 끊임 없는 수련의 동기는 무엇이며 목표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우리 민족을 위하여서」라는 것이었다. 도산은 민족의 운명은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였고, 그 「힘」이라는 것은 도산에 의하면 민족 각 개인 의 덕력(德力)과 지력(知力)과 체력(體力)의 총화였다. 정치력이나 병력(兵力) 같은 것은 필경이 개인의 힘의 조직이요 결과였다. 도산은 항상 말하기를 자연계 의 모든 현상이 힘의 인과 관계에 있는 모양으로 인사(人事)의 성쇠 흥망도 힘의 인과니, 우리 나라가 망한 것은 우리 국민에게, 즉 민족 각 개인에게 힘이 부족하였던 까닭이요, 따라서 우리 나라의 독립을 광복하여 이를 빛나게 유지하는 것도 우리의 힘, 즉 민족 각 개인의 힘을 양성하여 이것을 조직하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자연계에 결코 우연이 없는 모양으로 인류의 역사에 도 결코 우연이 없으니 우리가 우연이라고 보는 것을 결국 우리의 무지라고 그는 말하였다. 기회로 말하면 힘있는 자에게는 언제나 오는 것이 어니와 힘없는 자에게는 기회가 소용이 없다는 것이 도산이 늘 역설하는 바였다. 그는「일청 전쟁의 결과로 한국에 독립이 오지 아니하였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지키지 못하지 아니하였는가. 구라파 대전이 또한 좋은 기회가 아님이 아니나 우리는 이 기회를 우리 것을 만들 힘이 없구나」하고 삼일 운동 당시에 한탄하였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원통히 여겨서 이제부터 우리 각자가 저를 교육하고 수련하여 다음에 오는 기회를 놓지지 말도록 예비하여야 한다」하고 청년 동지를 격려하였다. 이것이 일부에서도산을 비전론자(非戰論者)요 점진론자(漸進論者)라고 비난한 이유였다. 도산은 이런 만을 여러 번 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이래로 우리는 언제나 싸우자 싸우자 하였소. 그러나 싸울 힘을 기르는 일을 아니하였소. 그러하기 때문에 언제가지나 싸우자는 소리뿐이요 사우는 일이 있을 수 없었소.』

도산은 이 모양으로 독립은 오직 각 개인의 힘과 그 힘의 조직에서만 올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독립 운동은 각자의 자아 혁신에 있다고 단정하고, 그러므 로 우리 민족 각원의 첫째 가는 의무는 덕·체·지 삼육을 끊임 없이 행하여 자기가 먼저 일개 독립 국민의 자격과 역량을 구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도산의 끊임 없는 자기 수련은 그러므로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 민족과 국가가 도산 안창호의 생활의 동기요 목표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민족을 떠나서 개인을 상상할 수 없었고 민족을 위하는 일을 떠나서 개인 의 의무나 사업이니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관점으로 보면 공자(孔子) 는 한족(漢族)을 위하여, 예수는 유대족을 위하여,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을 위하여, 예수는 유대족을 위하여,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을 위하여 수련하고 설교하고 생활하고 또 죽은 것이었다.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하여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天)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하는 것이 그의 인생관이었다. 한인으로서 할 일은 한인을 위하는 일이었다. 한인의 말을 들을 자도 한인이요, 한인의 도움을 구할 자도 한인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인의 말이나 한인의 도움을 구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제 민족을 두고 세계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게 국토를 잃어버린 유랑 민족(流浪民族) 이나 할 일이다. 내 소리가 들리는 범위를 위하여 말하고, 내 손이 닿는 범위를 위하여 사랑하고 돕고 일하라 이것이 인생의 바른 길이다. 이렇게 도산은 달하였다. 이에 도산은 자아 혁신을 시작혀였고 역행(力行)하였던 것이다.

그가 자아 혁신의 기초를 도덕적 개조에 둔 것은 물론이다. 그는 어떤 모양으로 자아 혁신의 대업을 성취할까 함에 대하여 민족성 분석(分析), 즉 자아 반성 (自我反省)이라는 방법을 취하였다. 역사적을 보아서 우리 민족이 쇠퇴하여 옛 문화와 영광을 잃고 반만년 계승한 국맥(國脈)까지 끊게 한 원인을 우리 민족성의 타락에서 찾아 내려 하였다.

이리하여 그가 첫째로 발견한 것이 우리 민족이 허위의 폐습에 젖었다는 것이었다.

『거짓말』

『거짓 행실』

이 두 가지가 우리 민족을 쇠퇴케 하고 우리로 망국 국민의 수치를 받게 한 근본 원인이라고 그는 황연히 깨달았다.

우리 가정에서는 자녀가 어린 때부터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고 임기 웅변으로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을 가르쳐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 로 우리 사회에는 거짓말이 성풍(成風)이 되어서 서로서로 말을 믿지 아니하였다. 「말로는 그러더라마는 」한다든가, 「사람의 말을 믿을 수가 있나」한다든 가 하여 남의 말은 우선 믿지 아니하는 것이 영리한 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서로 의심하고 서로 억측하여 단결이 되지 못한다. 어떤 민족이 단결이 못될 지경이라면 그 민족은 벌써 국민 될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는 가끔 말하였다.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등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이래로 만민 공동회(萬民共同會)·독립 협회(獨立協會) 등 여러 결사 운동(結社運動)이 있었으나 어느 것이고 三[삼]년의 명맥을 지탱한 것이 없은 것은 다른 이유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그 주요한 것은 「거짓말」이라고, 서로 믿지 못하였음이라고.

중국 국민도 그대에 타락하여 허위가 많지마는 그들은 그래도 상업에만은 신용을 지킨다. 그래서 그들은 저 남양 제도(南洋諸島)와 북아메리카에서까지도 상권을 장악하고 있지마는, 우리 민족은 상계의 신용까지도 잃어 버리고 말았다.

다른 민족에게 대한 신용 없이 어찌 우리의 상공업이 발달되며, 상공업의 발달 없이 어찌 우리가 빈약을 면하고 부강을 획득할 수 있으랴. 그런데 민족 자체내의 상호 신용(相互信用)이 없이 어찌 국제적으로 신용을 넓힐 수 있으며 민족의 자존(自存)인들 보장할 수 있으랴.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君父)의 수(수)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이라 하였으니 내 평생에 죽어도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도산은 맹세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거짓을 박멸함으로써 독립 운동을 삼고 조국에 대한 가장 신성한 의무를 삼았다.

우리 민족은 일상 생활에 거짓과 친하기 때문에 다른 민족도 다 이러하려니, 사람이란 본래 이러한 것이려니,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많다. 도산은 다른 사람 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럴 리가 있소? 영국 사람이 우리 모양으로 거짓이 많을진댄 영국도 우리 나라 모양으로 망하였을 것이요. 거짓 많은 채 부흥한 국민이 어디 있소?』

이렇게 단언하고,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거짓에서 벗어나는 날이 곧 쇠망의 비운에서 벗어나는 날이요, 한인의 말은 믿을 수가 있다 하고 외국인에게 신뢰받게 되는 날이 우리민족이 창성하는 날이라고 확언하였다.

도산이 우리 민족성의 타락에서 찾아 낸 둘째 병통은 「입」이었다. 공담 공론(公談空論)이었다. 남의 비평이었다. 빈 말로만 떠들고 실천 실행이 없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면서 무엇을 하고 있는 남을 비판하기만 일삼는 것이었다.

도산은 극언(極言)하였다, 이조 五[오]백년의 역사는 공담공론의 역사였다고, 그러하기 때문에 이조 五[오]백년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나 위대한 유산이 적고 오직 갑론을박(甲論乙駁)과 그로 하여서 온 참무(讒誣), 탄핵(彈劾), 비방(誹謗), 살륙(殺戮)의 빈축(嚬蹙), 산비(酸鼻)할 기록이 있을 뿐이라고. 심지어 이렇다 할 건축물 하나 토목 공사 하나 크게 자랑할 것이 없지 아니하냐고, 공 담 공론에서 나올 필연한 산물이 쟁론(爭論)과 모해(謀害) 밖에 없을 것이 아니냐고.

공론가의 또 한 특징이 있으니 그것은 남에게 책임을 미는 것이다. 제 잘못은 가리우고 남에게는 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까 책임이 없다. 또 제게는 잘못이 있더라도 꾸미어 버린다. 남은 애써 했더라도 왜 더 잘 못하였느냐고, 그렇게 해서 쓰겠느냐고 초책(誚責)한다. 그러므로 모든 죄과는 다 무슨 일을 한다는 남들에게 있다고 보고 저는 권외에 서서 흠담이나 하는 사람으로 안다.

도산은 경술국치(庚戌國恥)에 대하여서도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李完用)도 아니요. 그러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책임자가 누구요? 그것은 나 자신이요. 내가 왜 일본으로 하여금 내 조국에 조아(爪牙)를 박게 하였으며 내가 왜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국을 팔기를 용허하였소? 그러므로 망국의 책임자는 곧 나 자신이요.』

우리 민족 각자가 한국은 내 것이요, 한국을 망하게 하거나 흥하게 하는 것이 내게 달렸다고 자각하는 때에 비로소 민족의 부흥의 여명이 오는 것이라는 뜻이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진은 선배를 원망하고,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시오. 우리 나라가 독립이 못되는 것이 아아 나 때문이로구나 하고 왜 가슴을 두드리고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놈이 죽일 놈이요 저놈이 죽일 놈이라고만 하고 가만히 앉아 계시오?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도산은 상해에서 기미 당시에 이렇게 열렬하게 부르짖어서 동포가 서로 투쟁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 책임 전가는 분명히 비굴한 자의 일이요, 또 민족의 분열을 초래하는 원인 이라고 도산은 보았다.

이렇게 거짓과 공론을 우리 민족성의 가장 큰 결함이라고 간파한 그는 자기와 및 동포의 마음에서 이 악습을 제거하기를 결심한 것이었다.

『무실역행(務實力行)』

이것이 그 대책이었다. 「참」을 힘쓰자.「행(行)」을 힘쓰자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일상에 반복 실천하는 동안에 습(習)이 성(性)이 되어서 개인적으 로 성실하고 거짓 없는 도덕인의 만족을 얻어 더할 데 없는 범열(法悅)을 느끼게 되고 밖으로는 접하는 사람의 신임과 존경을 받아서 능히 그들의 의지할 바가 될 수 있으니 이 지경이 깊이 들어 가면 이른바 지성이 되는 것이라, 지성의 인격은 곧 성인(聖人)의 지경이다. 지성이 감천이라 하거니와 신(神)과 사람을 감동하는 힘은 결코 언변이나 물질이 아니라 진실로 지성이다. 지성의 사람은 무언중에도 능히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질 것이다.

그르므로 나 한 낱 사람이 성(誠)의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벌써 민족의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진정한 애국자일댄 먼저 저를 수련하여 지성의 사람이 되도록 할 것이다. 제가 지성인이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 다만 구설(口舌)과 교지(狡智)를 농하는 것은 결코 국가 민족을 위하는 소이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제가 의술을 학습하지 아니하고 중생의 병을 고치려는 것과 같다. 세상에는 이러한 애국자가 적지 아니하다. 이에 도산은 애국의 정열이 있는 성급한 내 방자(來訪者)에게 외친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하거든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중생의 질고를 어여삐 여기거든 그대가 먼저 의사가 되라. 의사까지는 못되더라도 그대의 병부터 고쳐서 건전한 사람이 되라.』

이것이 도산의 건전 인격 제일의 주장이다. 이 건전인격이 없고는 개인으로나 민족으로나 「힘」있는 자가 되지 못하고, 이 「힘」이 없이는 결코 목적하는 바 소원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여 쇠퇴하였던 민족의 운세(運勢)를 왕성케 한다는 소원은 모든 소원 중에도 큰 소원이기 때문에 이것을 달성하기에는 모든 「힘」중에 가장 큰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 민족이 가장 큰 「힘」을 발하는 길은 오직 하나, 딴 길 없는 오직 한 길, 즉 민족 각 개인의 인격을 건전케 하는 길이다. 만일 민족 전체가 다 건전한 인격자가 되었다면 그야말로 나아가는 데 당할 자가 없을 것이요, 일 치고는 못할 일이 없을 것이나 이것은 오직 오랫동안의 세월의 쉬지 않는 노력으로만 달할 것이어서 성급한 우리 생각으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을 기다리는 감이 없지 아니하다.

「이래 가지고 언제 독립을 하랴」하는 한탄을 발할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 전체가 모조리, 온통 다 건전 인격이 되는 완성의 날까지에는 수없는 계단이 있다. 민족의 천분지일이, 혹은 백분지일이, 이 모양으로 건전 인격자의 수와 전 인구 수와의 비례 관계가 증진함을 따라서 민족의 역량이 증진하고, 민족 내에 건전 인격자 수가 증가하고 따라서 민족의 역량이 증진함을 따라서 건전 인격 증가율이 가속도적으로 촉진될 것이요, 만일 각 건전 인격주의자가 끊임 없이 하나가 한 사람씩을 동지로 끌어 넣는다면 이 인격 수양 동지의 수는 기하 급수적으로 약진할 것이다.

이러한 추리(推理)로 도산 안창호는 우리 민족을 이상적으로 완전한 민족으로 향상시킬수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가 四[사]십년 전 국내에서 청년 학우회, 四 [사]십여 년 전 미국에서 흥사단을 조직한 것을 실로 이 최고 민족 완성 운동의 출발이었다. 이 운동은 지금토록 계속하여 왔고, 도산의 평생을 마친 것이 곧 동우회 즉흥사단(同友會興士團) 사건으로 입옥중(入獄中)에서였다.

이 의미에서 도산 안창호는 대한 독립 운동의 순국자인 동시에 대한 민족 완성 운동의 최초의 순교자였다. 도산이 一九三五[일구삼오]년 봄에 四[사]년 징역을 한 三[삼]개월쯤 미리 대전 감옥에서 가출옥(假出獄)이 되어서, 수개월 정 양 후에 곧 영남·호남·관서(嶺南湖南關西)등 땅을 순회한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으니, 하나는 二[이]십여 년 떠났던 조국의 강산과 민정을 살피는 것 이요, 둘은 동지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아 혁신, 민족 혁신이라는 두 표어를 내걸고 동포 유지의 뜻을 물었다. 자아 혁신, 민족 혁신,이것은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는 가장(假裝)의 어구가 아니었다. 이 두 마디 속에 도산의 민족 운동 이념의 전체가 포괄되었음은 상술한 바에 의해서 자명(自明)할 것이다. 왜 그런 고 하면 민족 개인의 자아가 허위에서 성실로, 이기(利己)에서 애국 애족으로, 서로 미워하는 것과 서로 배제하는 데서 서로 돕는 것과 서로 사랑하고 사로 공경하는 데로, 고식(故息)에서 원려(遠慮)로, 개인에서 단결로 혁신되지 아니하고는, 민족이 무신용에서 신용으로, 상극에서 화합으로, 무력(無力)에서 유력으로 혁신될 수 없고, 이렇게 민족이 혁신되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번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나 이제나 우리는 우리 나라에 인물이 부족함을 한탄하는 소리를 듣는다. 다 들 「인물이 없어서」하고 한탄한다.

『왜 우리 중에는 인물이 없나?』

도산은 이에 대하여서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하는가.』

집을 지으려도 재목이 없다. 재목은 외국에서 사들일 수도 있다. 나라를 세우려는 데 사람이 없다. 사람은 외국에서 사들일 도리가 없으니 세월이 걸리고 힘이 들더라도 국내서 양성할 도리 밖에 없다. 학교가 국가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 기 위한 묘포(苗圃)지마는 그것은 오직 묘포다. 정말 인물이 되고 안되는 것은 제게 달렸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인물이 많이나는 길은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저마다 인물이 될 결심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저마다 성인을 목적으로 인격을 수양하는 것이다. 최저 한도로 저마다 한 국민 구실할 만한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덕·체·지를 수양하는 것이다. 이 밖에는 길이 없다. 더구나 모든 것이 있어서 열강에 뒤떨어지고 세계적 빈천자인 우리 민족으로서는 남이 하나를 하면 나는 열을 한다는 기개(氣槪)로 속성 급취(速成急就)하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리하여 민족 신용의 한란계(寒暖計)의 영하에 떨어진 수은면(水銀面)을 우리의 성(誠)의 열(熱)로 비등점(沸騰點)에 끌어 올리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평등하고 유력한 일원이 될 수는 없 는 것이다.

도산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하고는 몸소 표면에 나서서 지도자의 칭호를 가지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그근 아메리카에서 . 국민회를 세웠으되 최초의 회장이 되지 아니하였고 합병 전에 본국에 돌아와 신민회와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였으되 자기는 이면에 머물렀고 대성 학교(大成學校)를 세웠으되 교장이 되지 아니하였다. 상해에서도 그는 모든 것에 이 박사를 추존하고 옹호하였다.

一九三七[일구삼칠]년 그가 동우회 사건으로 잡혀서 검사정(檢事廷)에 섰을 때에 검사가,

『너는 민족 운동을 고만둘 생각이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도산은,

『고만둘 수 없다. 나는 평생에 밥을 먹는 것도 민족을 위하여서요, 잠을 자는 것도 민족을 위하여서다. 내가 숨을 쉬는 동안 나는 민족 운동을 하는 사람이 다.』

라고 답변하였다. 도산의 이 답변은 결코 꾸민 것도 아니요 뽐낸 것도 아니다.

도산은 적의 앞에서라도 침묵은 할지언정 거짓말은 말라는 주의자요, 과장(誇張)도 거짓이라는 주의자다. 도산은 이른바 임기 웅변의 권모 술수를 미워하고 능히 행치 못하는 사람이다.

도산이 「밥먹기도 민족 위해, 잠자기도 민족 위해」라는 심경은 육십 평생의 애국자 공부, 애국자 실천 생활에 습성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가 병약한 몸으로 의약(醫藥)의 치료를 받은 것은 그 육체의 생명을 연장하여 조금이라도 더 힘있게, 조금이라도 더 오래게 민족을 위하여서 일하자는 뜻이요, 생명에의 동물적 애착은 아니다. 그가 말 한마디면 면할 수 있던 옥고(獄苦)를 짐짓 받으면서도 자기의 소신을 솔직히 표명한 것을 보아도 그가 일신의 고락 생사(苦樂生 死)를 염두에 두는 사람이 아님을 알 것이다. 도산이 四[사]십 년간 쉬지 않는 수련―애국자 공부―을 생각하면 이러한 심경이 성성(成性)이 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이미 갔다. 一九三八[일구삼팔]년 三[삼]월 십일에 도산은 그렇게도 사랑하던 「대한 나라」를 버리고 가서 동대문 밖 망우리(忘憂里) 묘지에 하나의 분토(墳土)가 되었다. 장사 후 수개월 간은 도산 묘소를 찾아 가는 한국인을 취체하기 위하여 양주(陽州) 경찰서원이 묘지 입구에서 파수를 보며 묘지에 들어 가는 자를 일일이 신문하였다. 일본 세국이 죽은 후에까지 무서워하던 존재였다. 그들은 이 점에서는 실로 바로 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개 안창호의 마음을 본 것이 아니라 안창호의 마음을 통하여 대한 민족의 마음을 본 것이었다.

이제는 도산도 자유로 동포에게 말할 수 있고 동포도 자유로 도산을 애모(愛하고 따를 수 있는 慕) 때다. 그런데 이때에 꼭 있어야 할 도산이 없구나!

이에 우리가 도산에게서 본 바와 들은 바를 이하에 기록하여 위인 도산(偉人島山)의 편린을 동포에게 전하려 하는 바이다.

이때에 꼭 있어야 할 도산이 없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유감이어니와 그러나 우 리는 믿는다―도산이 대한의 국토와 민족 위에 뿌린 그의 피와 성(誠)의 씨는 반드시 울연(蔚然)히 생장하리라고, 반드시 앞으로 우리 나라에는 많은 수없는 도산이 생기리라고, 저를 버리고 거짓을 버린 오직 참되고 오직 나라를 위하는 국사가 저 청소년 남녀 중에서 헤일 수 없이 나타나서 도산의 평생 소원이던 최고 민족 완성(最高民族完成)의 날이 나날이 가까워지리라고.

第二章[제이장] 松山苔莊[송산태장][편집]

도산 안창호가 출생한 곳은 대동강 하류에 있는 여러 섬 중의 하나인 도롱섬이다. 안씨의 세거지는 평양서 동촌(東村)이라고 일컬으는 곳인데 대동강 동안 이른바 낙랑(樂浪) 옛터의 고분들이 있는 데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 가서다. 거기는 안씨만이 십수로 사는 부락이 있어서 부락 후면 남향으로 된 언덕에는 안씨 역대의 분묘가 있고 도산의 부조(父祖)의 산소도 있었다. 도산이 대전 감옥 출옥 후 이 고향을 찾았을 때에는 쓰고 관 쓴 노인들이 도산을 맞았다. 젊은 사람들은 도산이 고국을 떠난 뒤에 났기 때문에 그의 안면을 몰랐다. 노인들은 도 산보다는 윗 항렬이어서 대개 앉은 대로 도산의 절을 받았다. 도산은 양복을 입고 있었지마는 족상(族上)의 앞에서는 일일이 옛날 법대로 절을 하였다. 四[사] 십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六[육]십을 바라보는 중노인 안창호는 이날은 한낱의 「창호」였다. 조카나 족손(族孫)이나 혹은 아저씨였다.

그 노인들이, 또는 청년들이 어떤 정도까지나 도산의 가치를 이해하는지는 의 문이었다. 四[사]십년 전 도산이 三[삼]십세 내외의 청년 지사로, 애국자로, 웅변가로, 교육가로 명성이 높을 때에도 그들은 도산을「한 잘난 사람」이라고나 보았을까 의문이다. 만일 도산이 한문으로 시문(詩文)을 잘하거나 또 대과 급제하여 수령(守令) 방백(方伯)이라도 다녔다면 비로소 도산의 명성을 앙모하지나 아니하였을까.

그런데 노대(老大)하여 돌아 온 도산은 그들의 눈에는 금의환양(錦衣還鄕)이 아니었다. 도산은 죄수였다. 여전히 빈궁한 한 개의 포의(布衣)였다. 그들이 도 산에게 보이는 정은 아마 혈족의 의리인가 싶었다.

도산은 무론 산소에 먼저 절하였다. 차례차례 십여 개 무덤에 절하였다 그의무실 역행벽(務實力行癖)은 여기도 나타났다. 안 하면 몰라도 하면 지성으로 하 는 것이다. 그는 묘 앞에 평복(平伏)하여 떼 위에 계상(稽顙)하였고 그의 눈에는 삼오하는 빛이 있었다. 그는 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 죽은 사람 모시기를 산 사람과 같이 한다―)는 심경에 있음이 분명하였다.

선산 밑에는 문성 안 유(文成安裕)의 영당(影堂)이 있었다. 안씨의 시조로 높이는 것이다. 도산은 여기도 절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적막하였을 것이다. 오래간만에 돌아온 고향 땅에는 일개의 지음(知音)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산은 말없이 귀로를 걸었다. 그의 친우 동지 수인이 이날 그와 동행하였다.

귀로에 도산은 대동강변의 한 낡은 절을 찾았다. 이 낡은 절은 강변의 한 언덕이라고 할 만한 구릉의 송림 속에 터만 남아 있었다. 도산은 이 절에서 묵은 일이 있는 어릴 때를 회구(懷舊)하였고 그 아침 저녁의 종소리를 그리워하였다.

절은 바로 물가에 있어서 배를 타고 대동강을 내려 온다면 바로 절 앞 뜰에 배를 대었을 것이다. 때마침 석양이라 소리 없는 강물에는 저녁 햇빛이 비치이고 물새가 소리하며 날았다.

『여기다가 집을 짓고 동지들이 수양하는 처소를 삼고 싶소.』

도산은 차마 떠나기 어려운 듯이 일행을 향하여서 말하였다. 그후에도 도산은 노 이 땅에 동지 수양처를 건설할 말을 하였다.

바로 여기서 비스듬히 대안(對岸)되는 곳에 만경대(萬景臺)라는 유명한 곳이 있다. 이곳은 봉만(峯巒)이 기묘하고 강에 임하여 절벽이 있으니 절벽의 중턱에는 역시 옛 절의 남은 터와 샘이 있고 그 앞은 물이 깊어서 四[사]십년 전에는 화륜선(火輪船)이 정박하는 항구였었다. 이곳도 도산이 사랑하는 곳이어서 동지 수양처의 건설지로 한다. 하여 어떤 친지가 도산의 아들의 명의로 샀다.

도산이 풍경을 사랑하는 것은 기벽(奇癖)이라 할 만하였다. 그는 경치 좋은 곳에 이르면,

『참으로 대한 강산은 편편금(片片金)이다.』

하고 탄상(瘓賞)하였다. 그의 풍경에 대한 사랑은 곧 국토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 경치가 내 조국 강산의 경치로구나 하는 열정이었다.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발견하고 우리가 보철(補綴)하고 우리가 노래 하여 그것을 십분 발휘하는 때에 우리 민족의 영광이 십분 환발(渙發)되는 것이라고 도산은 생각하였다.

우리 선인(先人)들이 경치 좋은 곳에 사원(寺院)을 짓고 정자를 짓고 누각을 지은 총명을 도산은 이해하고 찬양하였다. 평양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우리 국토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어니와 만일 평양에서 부벽루(浮碧樓)와 을밀대(乙密臺)와 연광정(練光亭)을 떼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의 정신과 예술이 조화(造化)의 공(功)을 발양하고 완성한다고 도산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도산은 풍경이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중요시하여 사람이 웅장한 풍경 속에 있으면 웅장한 기상이 생장하고 우미한 속에 있으면 우미한 취미가 배양된다고 하였다. 그와 반대로 험악이라든가 추잡한 환경은 사람의 정신에 그러한 영양을 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학교의 위치, 기숙사의 위치와 건축 과 정원과 장식이 교육에 미치는 효과를 중요시하였다. 그가 아름다운 풍경을 접할 때마다 동지의 수양처를 삼고 싶어하는 것이 이 때문이었다.

도산은 모란봉(牡丹峯)을 사랑하였다. 그의 노래에,

『금수강산에 뭉친 영기(靈氣) 반공중에 우뚝 솟아 모란봉이 되었구나 활발한 기상이 생기는 듯.』

하는 일절이 있다. 그는 모란봉의 천성의 미를 사랑하는 동시에 인공으로 더럽힌 것을 슬퍼하였다. 그는 모란봉 꼭대기에 지은 최승대(最勝臺)가 가장 큰 파경(破景)이라고 하였고 체소한 모란봉에 키 큰 나무를 심어 봉의 기묘한 윤곽을 감추는 것은 무식한 일이라고 하였다.

최승대는 옛날에 봉의 중복에 있어서 봉을 장식하였다. 그런데 근년에 모 일본인 부윤이 지은 신최승대는 봉 꼭대기에 지 오봉을 압살(壓殺)하고 만 것이다.

도산은 평양의 성중과 중성(中城)·외성(外城)은 순전히 일련(一聯)의 주택 지구로 미화할 것이라고 늘 말하였고 공업 지구는 보통 강 벌에, 상업 지구는 선교리(船橋里)에, 그리하고 모란봉이북, 대성산(大城山) 이남, 옛날 고구려 왕궁, 흥복사(興福寺)기지 등 경승처(景勝處)는 학교 지구로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도산의 평양 시가 구획에 대한 이 의견은 결코 지나가는 말이 아니요 그의 도시 정책, 교육 정책, 환경 교육론적 깊은 사색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도산은 평양을 사랑하였다. 평양에 대한 도산의 사랑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평양이 자기의 고향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정들고 추억 많은 지역이라는 것도 인 정인 도산으로서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에 넉넉하였다. 이 점으로 보면 도산은 어디서나 자기가 몸담아 사는 곳을 사랑하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사랑하고 로스앤젤리스를 사랑하고 상해와 남경을 사랑하였다.그는 잠시 셋집이나 셋방살이를 하더라도 그집 그 방을 곱게 단장하였다. 깨끗이 쓸고 닦고 문장을 치고 그림을 걸고 화분을 놓고 뜰에 화초를 심으고 이 모양으로 자기가 있는 곳을 아름답게 하였다 그래서 상해나. 남경에서도 도산의 거처를 찾으려면 그 동네만 알면 고만이었다. 그중에 가장 정하게 아름답게 꾸민 집이 도산의 거처임에 틀림 없었다. 도산은 「의관 정제(衣冠整濟), 중심 필칙(中心必鉓)」을 고대로 믿었다. 거처 즉 환경은 거기 사는 자의 정신에 영향하는 동시에 그의 정신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누추하고 난잡한 환경은 그 속에 사는 사람에게 그러한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그러한 환경은 또한 그속에 사는 사람의 정신의 표현이 된다고 도산은 보았다. 그러므로 도산은 거처에 대하여(의복 음식에도 그러하였지마는) 무심할 수 없고, 세심한 주의를 하였다. 정결하게 정돈되게 질소한 미감(未感)을 주도록 마음을 썼다.

도산의 마음에는 평양은 단군 왕검이 계시던 곳이요, 고구려 전성 시대의 큰 서울이었다. 단군은 함박(太白[태백],牡丹峯[모단봉])에 올라 대동강을 굽어 보시면서 우리 민족 만세의 기업(基業)을 구상하셨다.

우리 민족 중에 가장 웅장한 역사를 짓고 문화를 이룬 고구려의 선인들도 이 강산에서 수양하고 이 강산에서 기상을 배웠다. 고증학자(考證學者)는 무엇이라고 하든지 평양은 우리 조국의 발상지요 최대 문화의 개화지였다. 고신도(古神道) 의 건전한 국민 정신이 여기서 발하여 여기서 꽃피었다. 유교와 불교가 여기 처음으로 들어왔고 일본의 스승이 된 혜자(惠慈)와 담징(曇徵)이 대동강 물을 마시고 생장하였다. 수(隋)·당(唐)의 대군을 격파한 영웅들이 호기를 기른 곳이 이곳이 아니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국의 최후의 공격에 대제국이 옥쇄(玉碎)한 것도 평양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평양은 우리 민족 국가·민족 정신·민족 문화의 발생지 즉 우리 민족의 고향이라고 도산은 이것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긴 것이었다. 그가 신민회의 교육 사업의 제일보를 평양에서 발족한 것이 실로 이 신념에서였다. 신민회의 양 대사업이 교육과 산업이었다. 교육이나 산업 기관을 전국에 널리 두는 시초로 평양에 대성학교와 마산동 자기 회사(馬山洞磁器會社), 평양·경성·대구에 태극서관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도산은 평양에 총준 자제(聰俊子弟)를 모아서 단군과 고구려의 민족 정신을 함양하자는 것이었다. 반만년 전 민족창업(民族創業)의 대기개(大氣槪)를 조상들이 피와 살로 된 이 강산에서 감득·체득케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서 신대 한(新大韓)의 영웅을 양성하자는 것이었었다.

천二[이]백년 전 고구려 왕성시 평양 호수 二[이]십 三[삼]만, 인구 백만 이 상. 도로느 포장(鋪奘)되었고 대동강에 다리가 놓여 있었고 당(唐)·서역(西域)의 상선이 정박되어 있었다. 이불란사(伊弗蘭寺)·흥복사(興福寺)는 경내까지 운하가 개착(開鑿)되어 있었고 만수대(萬壽臺)·구제궁(九梯宮)은 둥근 누초의 직경이 三[삼]척이나 되었다. 석재 건축은 희랍을 방불하였고, 칼과 활·화살의 공예는 한토의(漢土) 부러워하는 바 되었다. 회화(繪畫)는 아직도 고분에 색채가 선명하게 남아 있지 아니한가. 승호리(勝湖里)의 시멘트는 당시 시가의 포장과 인조석으로 씌웠던 것은 득월루(得月樓)의 주초와 평야역 근방의 옛 거리를 발굴(發掘)한 데서 나온 유적으로 보아도 분명하였다. 마산동의 도토(陶土)와 대동강 하류 일대의 무연탄은 무순(無順)의 그것과 함께 고려 자기의 원료를 만 들었던 것이다.

국력으로 보건댄 옛날 한족(漢族)을 구축하여 소위 한사군(漢四郡)을 회복한 것은 말 말고라도 고구려는 당(唐)의 유일한 숙적(宿敵)이요 경적(勁敵)이어서 태종(太宗)이 안시(安市)에서 대패하였고 고종(高宗)도 신라와 합세하여 사력(死力)을 다하였으나 용이치 않던 것을 고구려 간신(奸臣)의 내통으로 七[칠]백 년 사직(社稷)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지금 만주라고 통칭되는 지역이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 것은 이제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도산은 태백(太白[태백], 牡丹峯[모단봉])에 서서 대동강을 볼 때에 반만년의 역사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옛날의 영광을 미래에 회복하고 못함이오직 교육과 민족이 자기 수양 여하에 달렸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그는 결코 지난날을 회상하고 비분 강개(悲憤慷慨)하는 사람이 아니요 미래를 위하여 발분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현대의 우리 민족은 조국의 사명을 잊은 민족이었다. 선민(先民)이 가졌던 대 기상을 잃어 버리고 고식적인 개인 내지 편당의 이해 고락에만 골몰하는 민족이었다. 민기 소잔(民氣소殘)이란 이것을 가르친 것이었다. 이 증거는 평양 하나를 보아도 알 것이었다. 평양의 지역은 적어도 고구려 사람의 도성이었던 평양의 범위는 북으로는 대성산 동녘 기슭과, 남녘 기슭으로부터 남으로는 평양역 이남 대동·보통 강물이 합하는 곳의 구릉에까지 이르는 연연(延延) 三십리에 뻗은 일대였다. 금수산이 모란봉(牡丹峯)·을밀대(乙密臺)·만경대(萬景臺)·서 기산(瑞氣山) 등등의 나지막하나 묘한 형태의 봉만(峰巒)으로 대동·보통 두 강이 합하는 데까지 연속하여 한 구슬 꿰미를 이루었으니 우리 선민들은 이 지세를 혹은 성곽(城郭) 기타의 토목 공사로, 혹은 궁전(宮殿)사원(寺院)·신당(神堂)·묘사(廟祠)·누각(樓閣)등 건축으로 방위적으로 보강하고 예술적으로는 미화하여 조화(造化)와 인공의 조화(調和)를 얻은 일대 도시미를 이루었던 것이니 평양시 전체가 한 통일된 미술품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당병(唐兵)의 유린, 묘청의 변(妙淸之變) 등의 병화로 파괴되어 버리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유자(儒者) 외 전횡·악정으로 나라의 혼과 백성의 기운이 조잔하여서, 선민의 평양의 의도 조차 잃어 버리고 오늘날의 초라한 평양을 이루었다고도산도 한탄하였다. 오늘날은 평양의 지세를 고려할 만한 정신조차 스러져서 자연의 미관(美觀)은 파괴되고 있으며 더욱이 일본인들은 천연의 지세를 무시하고 단견적(短見的)인 도시 정책을 써서 최후적으로 민족의 고도 평양의 풍모를 파괴하였다고 도산은 분개하였다 도산은 우리 . 민족이 적어도 천 二[이]백년 전 고구려 선민의 정신, 기 백에 복귀하고사 쇠퇴의 구태를 걷어 차고 부흐의 신운에 비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오던 여러 서울 가운데 국혼을 잃지 아니하고 이족(異族) 에게 대하여 칭신(稱臣)의 치욕을 무릅쓰지 아니한 서울이 둘이 있으니, 곧 하나는 평양이요, 또 하나는 부여(扶餘)다. 그러나 다른 민족과 다투면서 국위를 선양하는 적극적 영광을 가진 서울은 오직 평양경(平壤京) 하나뿐이니 슬프기도 하거니와 우리에게 평양 하나 있음이 대견한 일이 아니냐. 도산이 평양을 교육의 중심을 삼으려던 동기가 여기 있는 것이었다. 도산이유설(縲絏)의 몸으로 고국에 끌려와 四[사]년 징역의 형을 마치고 나온 때에는 도산에게는 겨우 여행 하는 자유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도산이 하룻밤을 묵은집, 한끼 밥을 먹은 집은 경찰의 시끄러움을 받기 때문에 도산은 동지나 친구를 찾거나 그 집에 기류하기를 꺼렸다.

그래서 도산은 자기가 몸 담아 둘 곳을 한 가지고 싶었다. 이리하여서 된 것이 평양에서 五[오]십리 되는 강서군대보면 대보산 송태(江西郡大寶面 大寶山松苔)의 산장(山莊)이었다.

도산이 어찌하여 송태에 집을 지었는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도산의 본 고향은 본래 평양 동촌이었으나 그 부친이 농토를 찾아 대동강 하루의 도릉섬에 옮아 살아도산이 거기서 탄생하였고, 그 후 도산의 백씨 치호(致鎬)는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江西郡東津面古逸里)로 옮아 가서 도산의 적이 강서에 있게 되었다는 것도 송태에 집을 마련한 한 이유이겠지마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도산은 환경에 깊이 관심하는 성격이므로 이것이 도산으로 하여금 송태를 택하게 한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도산의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도산이 송태에 있을 곳을 정할 때에는 자신 보다 후일에 「동지의 수양처」라는 것이 안목이었다.

송태는 대보산이라는 평양 부근에서는 유수한 명산이요 겸하여 역사적으로도 인연 있는 산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대보산 남녘 기슭에 큰 불찰(佛刹)이 있고 산중형승지(形勝地)에 암자가 있어 지금에는 이 산 최고봉에 감천암(甘泉菴)이라는 암자가 영장(靈場)으로 남아 있고 도산이 자리잡은 송태는 송태사의 옛터로 四,五[사,오]십 년 전까지도 전우(殿宇)와 고탑(古塔)이 있었으나 전우는 화재로 타버리고 천년 묵은 석탑은 무심한 초동(樵童)들이 장난으로 파괴하여 그 명장(明匠)의 솜씨로 다듬은 석판은 동구에 있는 사삿집에 혹은 우물 돌로, 혹은 구들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강서읍. 근방에 평원왕(平原王) 시대의 이궁(離宮) 터라는 설이 있느니 만큼 대보산은 용문산(龍門山)과 아울러 고구려 불교의 중요한 영장(靈場)이었 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송태가 도산의 흥미와 애착을 끈 것은 송태는 불찰(佛刹)이 되기 전에 송태 선인(仙人)의 은거지였다는 것이다. 을밀대가 을밀 선인의 은거지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라에서 국선(國仙)이라던 것과 같이 고구려에는 홈의 선인(皀衣仙人)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을밀 선인(乙密仙人)이나 송태 선인이 다 이 홈의 선인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흠의 선인은 고구려인의 선생이니 오늘날 박사·교수·목사 같은 직임을 함께 맡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산에 숨어 고신도(古神道)로 심신을 수련하고 천문·지리·정치·문학·의술·복점 등의 학문을 연구하면서 문하에 모여드는 제자들에게 경천(驚天)·숭조(崇祖)·충군(忠君)·효친(孝親)의 인륜과 정치·용병(用兵)·무예 등을 전수할 뿐더러 그중에도 고명한 선인은 왕자(王子)나 대신의 자문에 응하여 정치·군사에 대한 계책을 주었다. 모든 점으로 신라의 국선과 다름이 없으며 아마 그 도통(道統)도 김 인문(金仁問)의 이른바〈비상신사〉(備詳神史)라는 것과 같은 근원일 것이다.

신라의 김 유신(金庾信)이 몰래 대동강을 건너 송태 선인에게도(道)를 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을지 문덕(乙支文德)이나 다 홈의 선인에게서 수학 수도한 것이다.

여담이거니와 을밀 선인이나 송태 선인은 아마 한 사람 뿐이 아니요 의발(衣鉢)을 전한 후계자가 다 같은 명호이었을 것이니 을밀에 처소를 둔 일파, 송태에 근원을 둔 일파, 이 모양으로 구별된 모양이었다. 고구려의 흠의 선인이나 신라의 풍류 국선이 한토(漢土)의 도교(道敎)의 선(仙)이 아님은 물론이다.

송태 선인은 대보산의 지세로 보더라도 유력한 홈의 선인이었던 모양이다.

도산에 있어서는 이 흠의 선인의 수도장이 있었다는 것이 송태를 택한 가장 주요한 이유였다.

송태사의 옛터는 상당히 묘하게 생긴 집터였다. 유감되는 것은 우물에 수량(水量)은 풍부하나 청렬(淸冽)이 부족한 것이었다.

도산은 이 기지의 일단이 되는 곳에 七,八[칠, 팔]간 되는 소옥(小屋)을 지었다. 본 기지에는 힘이 돌아 가는 대로 동지의 수양처로 수십인이 거처할 수 있는 본 건축을 할 계획이었다.

도산 자신이 거처할(도산은 최후로 체포될 때까지 거기 유하였다) 집은 도산의 평생 사업 계획 중에 중요한 한가지인 모범 농촌의 농민주택의 모형이어서 이것은 오산 자신의 연구로 된 설계였다. 그 설계의 안목은 한국 가옥의 특징과 기분을 보존하여 살릴 것 부엌과 , 변소와 거실과의 비 안 맞는 연락, 주부의 노고를 덜도록 된 부엌과 지하실의 구조, 내음새와 바람과 파리 없는 변소, 통풍, 채광(採光) 그리고 우리 민간 보통 건축 재료와 보통 목수, 이장으로도 할 수 있는 것 등이었다. 지어진 집을 보면 퍽 아늑하고 편리하였다. 그중에도 부엌과 뒷간은 독특한 구조여서 아무가 보아도 마음에 들었다. 무론 건축비도 보통 한국 가옥 건축비와 다름이 없었다.

설계만 아니라 공사 감독도 도산이 몸소하였다. 후원 마당이 설계와 정리도 몸소하였다. 조그마한 일도 소홀히 아니하는 지성인(至誠人)의 풍모는 그가 심으 고 가꾸는 일초 일목(一草一木)에도, 벌여 놓은 한 덩어리 돌멩이에도 드러났다. 옆에서 보면 도산은 송태의 역사를 위하여 이 세상에 나오고 이 사명만 완수하면 다시 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도산은 이 역사에 지성이요 열중이었다. 목수나 기타 장색(匠色), 인부가 추호만큼도 설계에 어그러지기를 용허치 아니하였다. 너무 다심하고 너무 잘고 너무 각박하다고 할이만큼 고집하였다.

『한 번 잘못되면 그 잘못이 언제까지나 남은 것이요.』

도산은 이렇게 말하였고,

『얼렁얼렁이 우리 나라를 망하게 하였소. 우리의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최 선이 되기 어렵거든 하물며, 얼렁뚱땅으로 천년 대업을 이룰 수가 있겠소?』

하고 역설하였다.

『대소간 역사에 관용(寬容)한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일군보다 더욱 죄라.』

하는 것이 도산의 의견이었다.

도산은 이집 역사를 건국의 역사와 같이 생각하고 이정원(庭園)을 다스리기를 삼천리 강산을 정화 미화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다. 그 정성을 들이는 품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송태 한 구석을 정화 미화라는 것이 곧 국토의 일부를 정화 미화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삼천만 동포가 저마다 제가 사는 집과 동리를 정화하면 삼천리 강산은 정화되는 것이라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송태 기지에 십수 정보의 송림이 부속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기지와 아울러 도산을 위하여 어떤 친구가 사서 증여한 것이나 물론 도산이 자기의 명의로 소유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도산은 자기 소유의 재산은 하나도 없었고 있으려고 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는 오직 조국을 위하여서 전생애를 바치려는 흠의 선인이었다. 미국에 있는 도산의 가족은 자녀가 어렸을 때에는 도산은「하우스·웍」이라는 노동을 하고 그 부인 이씨는 삵빨래를 하여서 호구하였고 자녀가 장성한 뒤에는 자녀들이 벌어서 생 애를 유지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도산은 대전에서 출옥하여 다시 잡혀 갇히기까지 동지 친우의 도움으로 의식 하였거니와 그것을 퍽 고통으로 (衣食) 생각하여서 자력으로 생활의 밑천을 벌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하였다. 그중에 한 가지는 양록(養鹿)이었다. 도산은 송태 서 얼마 아니가는 대보산 남녘 기슭 옛날 절터도 있는 평지에 양록장과 양어지를 만들어서 생도(生道)를 삼을 계획도 하고, 또 같은 목적으로 어떤 무인도(無人島)를 고르기도 하였다. 자금을 댈 사람에게 이익을 주면서 자기의 생활비를 얻자는 것이었다.

「결코 생활을 남에게 의뢰하지 말고 자작 자활하라」하는 것이 도산의 지론(持論)이었다. 예수의 사도 바울이 장막업으로 자활한 것이나, 철학자 스프노자 가 렌즈 갈이로 생업을 삼은 것이나 다 같은 심회였다. 「일인 일능, 각인 일 업」(一八一能, 名人一業) 이것이 도산이 동포 전체에게 요망하는 것이어서 이 정신을 흥사단 약법(約法)에 「일종 이사의 학술 혹은 기예를 학습」하는 것이 단우(團友)의 의무가 된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도산은 양록(養鹿)으로 여생의 생업을 삼으려고 함북(咸北) 주을(朱乙)의 백로 인(白露人) 양콥스키의 양록장을 일부러 시찰까지하였다. 만일 도산의 수중에 돈이 있었다면 이 사업을 하였을는지 모르지마는 마침내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도산이 대전서 출옥한 후 처음 얼마 동안 일본 관헌은 가만히 도산의 행동을 감시하는 정도로 별로 간섭을 아니하여서 친우들이 마음대로 도산을 초대 방문 할 수도 있고, 혹 금전으로 원조할 수도 있었으나, 도산이 가는 곳마다 민중의 환영이 성대한 것을 보고는, 「흥, 마치 개선 장군이로군」하여 경찰은 간섭 압박하기를 시작하였다. 그래서 도산을 돈으로 도우려는 사람들도 꽁무니를 빼게 되었다.(별항-도산의 사업 계획을 말할 때에 좀 더 자세히 이 문제에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도산은 아무러한 부자유 밑에서도 일이 없어 한가하게 노는 법은 없었다. 그는 어디서나 일을 찾았고 그 일은 모두 다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송태의 역사도 그중에 한 가지다. 도산은 송태에 오는 동지와 일반 동포가 개량된 가옥과 힘만 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결하고 유쾌한 정원을 실지로 보고 가서 그 모양으로 흉내를 내인다 하면 그것도 민족 사업이라고 생각하였다. 거처의 개량을 백 번 말하는 것보다도 한 번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었다. 천하 국가사(天下國家事)나 고담준론(高談峻論)하는 것이 국사(國士)·영웅의 본색으로 아는 우리에게는 도사의 다심(多心)·세심(細心)·열중(熱中)·지성(至誠)한 송태 역사는 실로 의외의 감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침내 작은 일에 충성된 자 큰일에도 충성된다는 것과, 나를 닦는 것이 곧 남을 다스리는 것이라는 귀중한 진리를 절실하게 체득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작은 절차에 구애하지 않는다는 것도 큰 인생 교훈이지마는 이것은 남을 용서하는 데 쓰는 말이지 자신을 검속하는 데 썼다가는 큰 일이 나는 말이다. 일상에 닥뜨리는 모든 일이 목숨을 걸고 거들어야 할 것 아님이 없고, 난 날부터 죽는 날 까지의 찰나 찰나가 집과 몸을 버리는 치명(致命)의 기회가 아님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정당한 인생관일 것이다.

도산은 여흥(餘興)의 우스개도 지성으로 하였다. 그는 중국인의 연설 흉내를 내는 재주가 있었거니와, 자기가 지명을 당하면 결코 머뭇거림 없고(이것은 댄 체 생활의 도덕이다) 전심 전력을 다하여 흉내 내었다. 이것은 일거일동에 지성을 떠나지 말자는 그의 심법이었다.

하물며 송태 선인의 도장에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 수행자(靑年修行者)들이 모여서 저를 잊고 집을 잊고, 오직 나라를 생각하는 송태 선인이 되기를 기한다면 그 얼마나 큰일일까. 도산은 일찍 자기가 선생이니 사람들은 나를 배우라고 입으로 말한 일은 없었고, 아마 그의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애국자의 사표(師表)될 것을 스스로 기약하고 육십 평생에 나 날이 새로운 점진(漸進) 공부를 계속한 것은 사실이요, 또 아무리 도산이 스스로는 자기를 부족하게 생각하였다 하더라도 그가 도달한 경지로도 우리가 앙모 하고 따라가기에 넉넉한 높이와 깊이가 있었다.

「점진공부」(漸進工夫)는 도산의 수학 태도였다. 그가 五[오]십년 전에 그 외 향리 강서군 고일리에 세운 학교는 아마 우리 나라 민간 사립학교의 남상(濫觴)이려니와 그 이름이 점진 학교였다.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마음과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노래로 학과를 전무하되 낙심 말고 하겠다 하세 우리 직무를 다』

하는 것이 그가 지은 점진 학교의 노래인 동시에 그 자신의 점진 공부의 노래였다.

지금 이 송태 집에 도산의 영백(令伯) 치호 일가가 아우님의 손때 묻은 집을 황폐하게 하기 미안하다 하여 지키고 있다. 영백은 금년 七[칠]십 五[오]세라고 기억된다. 노농(老農)이요 기독교회에 장로다. 고집이 세다는 별명을 돋도록 의지가 강하고 근검하고 동리를 사항하여 가난한 농민이면서도 학교와 교회의 건축에 솔선하여 많은 돈을 기부하고 동리 사람에게는 부형과 같은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으며 연전 경찰에서 송태 집을 팔거나 헐거나 하라고, 그것을 두면 민심 이 악화한다고 누차 강압하였고, 한번은 주재소 일인 순사에게 칠십 노인의 몸으로 폭행까지 당하고도,

『내 집을 누가 팔라 헐라 한단 말이야.』

하고 버틴 노인이다(지금 치호씨는 돌아 가고 그 가족은 공산학정을 피하여 남한으로 피난하였다 ―一九五三[일구오삼]년).

도산이 송태에 거처하는 동안 많은 친지와 동지가 찾아 온 것은 물론이어니와, 도산을 직접 알지 못하는 남녀들도 혹은 단독으로, 혹은 떼를 지어 송태를 찾었다. 촌 부인네들도 송태안(安) 아무를 「구경」하러 오고, 혹은 그집과 마당을 구경하러 왔다. 평양서는 학생들이 일요일이나 휴일의 대보산 하이킹을 빙자하고 송태를 찾았다. 도산은 그러한 경우에도 마당의 돌을 으르거나 화초를 옮겨 심거나 경내의 청소를 하거나 하여 묵묵히 여전히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오는 청년들을 붙들고 특별히 훈계를 한다든가, 담화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간혹 무엇을 묻는 청년이 있으면 평범한 태도로 대답하여 주었다. 어떤 청년은 말없이 도산이 하고 있는 일을 몇 시간 같이 하다가 인사를 하고 돌아 갔다.

송태가 소문이 나서 사람이 많이 오는 것을 일본 관헌이 가만 둘 리가 없었다.

송태 입구에 버스가 닿고 사람들이 내려서 송태를 향하는 모양이 보이면 (송태로 향할만한 인물은 얼른 보아도 표가 났었다) 주재소원은 그를 붙들고,

『안창호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너는 누구며, 무슨 일로 안창호를 찾느냐?』

하여 힐문하되 안창호를 찾는 것이 무슨 죄나 되는 것 같이 위협하는 어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길로 돌아서 송태를 찾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신사 참배(神社參拜) 문제로 말썽이 되었을 때에 당시 평남 지사(平南知事 -上內彦策[상내언책])는 한 경부(警部)를 송태로 보내어 도산에게 평남을 떠나기를 권고 하였다. 그 이유로 말하는 바는 도산이 송태에 있기 때문에 평남의 사상이 악화하고 치안이 문란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도산이 산중에 숨어 있어서 아무것도 책동이나 음모함이 없거늘 무슨 연유(緣由)냐 한즉 그 경부는 말하기를,

『당신이 여기 있으므로 교회와 학교 대표자들이 모여서 신사 참배를 의논하다 가도 안 도산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서는 반대의 태도를 취하오. 당신은 음모를 하거나 선동을 하거나 하지 아니할 줄 믿지마는 당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이 선동이 되는 것이오. 지사의 말이 그러니까 당신이 평남을 떠나 주기를 바라고 될 수 있으면 미국으로 가기를 바란다 하오. 당신만 미국으로 갈 의향이 있다면 여행권은 곧 지사가 주선해 드린다 하오.』

이렇게 하였다.

도산은 물끄러미 그 경부를 바라보다가 미소하며, 이렇게 지사께 전하시오 『. 만일 안창호의 존재가 민심을 악화한다 하면 평남에 있거나 미국에 갔거나 마찬가지라고. 아마 감옥에 잡아 넣거나 죽이더라도 마찬가지라고. 二[이]천만 한국인이 다 안창호와 같은 사람인데 일개 안창호를 송태에서 내어 쫓았다는 것이 불명예나 될 뿐이지 무슨 효과가 있는가고. 그리고 미국 가는 여행권 주선에 대한 후의(厚意)에 대하여서는 감사하오. 그러나 아직 송태를 떠날 생각은 없소.』

하여 그 경부를 돌려 보내었다.

第三章[제삼장] 興士團[흥사단][편집]

흥사단은 도산 안창호 필생의 사업이요, 그의 민족운동의 근본 이론이요, 실천이다. 안창호가 이때 이 땅에 태어난 사명은 이 민족에게 흥사단 운동을 주고자 함이었다. 이 민족을 부흥하고 완성하여 영원한 번영을 누리게 하고 아울러 인류 전체에게 영구화평의 공헌을 하는 대사명을 달성하게 하는 길은 하나요, 오직 하나이니, 그것은 곧 흥사단이라는 것이 그의 철석 같은 신념이어니와, 그 신념은 객관타당성(客觀妥當性)을 가진 신념이다. 흥사단 운동의 운명은 곧 한민족의 운명인 줄을 미구에 한족된 자는 다 깨달을 것이다.

진리와 실행과 충의와 용감의 사대 정신(四大精神)으로 민족성을 다시 지어 보는 것이 우리 민족의 부흥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은 도산이 병오년 고국에 돌아 오던 때부터 이미 마음에 품은 신념이었다. 그가 신민회를 조직함에나 대성 학 교를 창립함에나 언제나 일관한 근본 이념은 이것이었다. 더구나 청년학우회는 순전이 이 근본이념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었다.

일찍 대성 학교 생도 하나가 그의 결석이유서에 다른 사람의 도장을 찍고 손가락으로 비벼서 글자의 획을 불분명하게 하여서 제도장인 것같이 속인 사건에 대하여 교직원 전체의 반대도 물리치고,

『대성 학교에는 속이는 학생을 용납할 수 없소. 원컨댄 우리 나라가 속이는 한 국민을 용납하지 아니할 날이 오게 하고 싶소.』

하여 당연히 출학 처분을 한 것이 이 진리주의(眞理主義―務實[무실]이라고 그는 불렀다)의 표현이었다.

도산의 신념에 의하면, 민족의 각원이 서로 믿게 되는 날이 우리 독립의 완성되는 때요, 세계 만국이 우리 민족의 일언 일동(一言一動)을 참이라고 믿게 되는 날이 우리가 세계 개조(世界改造)에 공헌하는 때요, 세계 각국과 각 민족이 서로 속이지 아니하고 서로 믿게 되는 날이 세계에 참되고 오래 갈 화평이 오는 때였다 이 길 밖에는. 우리의 독립도, 창성(昌盛)도, 세계의 평화도 없다는 것 이 도산의 굳고 굳은 믿음이었다.

도산은 경술년에 망명하여 미국에 돌아가 우선 북미에 있는 동포의 낙심 실망한 상태를 희망과 노력의 심경으로 전환시키니 곧 국민회의 통일·확장·강화였다. 이리하기에 三[삼]년의 시일을 써서 회의 업무가 본 궤도에 오름을 보고 흥사단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一九一二[일구일이](壬子[임자])년, 도산은 어느 날 리보사이드로부터 로스앤 젤리스에 와서 송종익(宋鍾翊)을 찾아 흥사단 약법(約法)을 보였다. 송종익은 이리하여서 흥사단의 첫 동지가 되었고, 이것이 우리 민족 중에 「무실」 운동 개시의 제 일보가 되었다.

송종익은 대구(大邱) 사람으로서 경성에도산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 갈 것을 물어본 것이 피차의 첫 인연이었고, 합병되던 해도산이 망명하여 다시 미국으로 가서부터는 사사일에나 공무에나 가장 신임하고 친분 있고 동지로 국민회의와 흥사단의 일뿐 아니라 도산의 가정 생활까지 도맡아도운이였다.

송종익이라는 첫 동지를 얻은 도산은 다시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하여 정원도(鄭源道)·하 상옥(河相玉)·강영소(姜永韶)의 세 사람을 얻어 이 세 사람으로써 발기인을 삼았고, 다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동지를 구하여 약 一[일]개년 만에 팔도에서 각 한 명씩 창립 위원 八[팔]인을 얻으니, 그 성명과 원적(原籍)은 이러하였다.

홍언(洪焉) 경기도(위원장) 조병옥(趙炳玉) 충청도 송종익(宋鍾翊) 경상도 미상(未詳) 강원도 정원도(鄭源道) 전라도 강영소(姜永韶) 평안도 김종림(金鍾林) 함경도 김항주(金恒作) 황해도 이 여덟 사람이 一九一三[일구 일삼]년 五[오]월 십 三[삼]일 샌프란시스코 우 강영소 댁에서 창립 결성을 하였으니, 이것이 흥사단의 기원이었다.

기미년에 국내로부터서는 많은 청년이 상해로 모여 들었다. 여자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어떤 이는 독립 운동을 눈으로 보러 왔고 어떤 이는 구미 유학의 길을 얻으로 온 것이었다. 이때 국내의 만세 운동은 거의 침식(寢息)하고 옥중에 잡혀 갇힌 청년들이 혹은 만세를 부르고 혹은 단식하였다. 三[삼]십 三[삼]인 독립 선언서 서명자를 포함한 四[사]십八[팔]인의 삼일 운동 중심 인물들이 혹은 내란죄가 된다. 혹은 보안법 위반이 된다 하여 그 공판이 주목되었고, 옥에 가지 아니하였거나 갔더라도 놓여 나온 지식층 청년들은 많이 국내를 탈출하여 만주로, 상해로 왔다.

도산은 이러한 청년들을 아무쪼록 많이 만나서 바른 인생관과 민족관을 개발하기를 힘썼다.

도산은 영국 조계모 이명로에 집 한 채를 세를 내어서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 部)의 단소를 삼았다.

도산은 이 집을 깨끗이 꾸미기에 많이 힘을 썼다. 미국서 단우가 된 지 오랜 박 선제(朴璇齊) 목사가 사무를 보기로 하고 사무실·식당·담화실·집회실·오락실·침실, 이 모양으로 극히 정결하게 정돈하게 차려 놓았다. 이 정결과 정돈 이 민족 개조의 중요 과목이요 제 일 과목이었다.

당시 상해에 우거하는 우리 동포의 주택이나 셋방이나는 정결과 정돈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방도 아무렇게나 차려놓고 소제도 전돈도 아니하는 이가 많았다. 우리는 이런 것을 불구소절(不拘小節)이라는 허울 좋은 덕목(德目)으로 스스로 변호한다. 그러나 아무리 변호하더라도 이것은 국민성의 타락이 아니고 무 엇이랴. 도산은 우선 몸가짐과 거처로부터 개조 일신하지 아니하고는 문명한 독립 국민이 되지 못한다고 굳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선 회관에서부터 흥사단식 정결·정돈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 하여서 모이명로의 단소를 꾸민 것이었다.

그는 문짝 한끝, 화분 하나도 몸소 여러 싱점을 돌아서 골라 잡았고, 그것을 걸 곳에 걸고 놓을 곳에 놓는 것도 다 깊이 생각하여서 그중 좋은 길을 취하였다. 「아무렇게나」,「되는 대로」,「어물쩍어물쩍」하는 것을 도산은 「거짓」과 아울러 조국을 망하게 한 원수라고 보았다.

이렇게 모이명로의 단소가 이뤄졌다.

흥사단을 설명하기 위하여서는 그 입단 문답(入團問答)의 일례를 드는 것이 가장 직절 간명(直截簡明)할 것이라고 믿는다.

一九二○[일구이공]년 가을 어느 날 밤, 상해 모이명로의 단소에 수십 명이 모 씨의 입단 문답을 보기 위하여 모였다. 그중에 이미 미국에서 입단한 이도 있었다.

문답 위원은 도산 자신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하는 흥사단 입단인 만큼 흥사단 역사에는 중요한 시기일 뿐더러 이날 문답을 받는 지원자는 상해에서도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어서 매우 흥미가 깊었다.

문답 위원과 문답 받는 자가 조그마한테이블을 새에 두고 마주 앉았다. 위원은 단의 격식에 의하여 어깨에 느른빛과 붉은빛 두 쪽을 합하여서 된 단대(團 를 메었다 누른빛은 帶) . 무실(務實)이니 참됨을, 붉은빛은 역행(力行)이니 힘을 상징하는 색으로서 충의(忠義)의 백(白)과 용감(勇敢)의 청(靑)과 아울러서 四 [사]색이었다. 가르면 四[사]색이요, 더욱 중요한 것을 들면 황·홍 二[이]색이었다. 무실(務實)과 역행力行 ― 참과 힘이다.

위원은 입을 열였다.

『이제 우리는 우리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나라를 구할 이론과 방법을 토론하게 되었으니 묻는 자나 대답하는 자나 다 터럭끝만한 거짓도 없는 참으로 하여야 할 것이요, 이제 우리는 저마다 가진 신앙을 따라서 기도하시오.』

이것은 종파(宗派)를 초월한 단결임을 보임이요 동시에 양심에도 없는 거짓 예(禮)를 행하기를 꺼림이었다. 예수교인이면 주기도문, 불교인이면 심경(心經)을, 무엇이나 제 믿음에 따라서 제가 참된 심경으로 묻고 대답할 힘을 달라고 빌 것이었다.

기도가 끝나매 위원인 도산은 문답을 시작하였다.

문『○군, 그대는 흥사단에 입단하기를 원하시오?』

답『예, 나는 흥사단에 입단하기를 원합니다.』

문 『왜?』

답『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고 민족 영원의 창성을 구하려면 흥사단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문 『왜?』

답『우리는 힘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였으니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힘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문 『힘이란 무엇인데?』

답『한 사람 한 사람의 건전한 인격과 그 건전한 인격들로 된 신성(神聖)한 단결입니다.』

문『나라의 힘이라면 부력(富力)과 병력(兵力)일 텐데. 어찌하여 그대는 부력과 병력은 말하지 아니하고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을 힘이라고 하시오?』

답『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이 없이는 부력도 병력도 생길 수가 없습니 다.』

문『왜?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면 부력은 저절로 있을 것이요. 대포와 군함만 있으면 병력은 저절로 있을 것이 아니오?』

답『국민이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이 없고는 농업이나 상업이나 공업도 발전할 수 없고,또 대포와 군함이 있어도 그것을 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문『국민이 농업·상업·공업의 지식과 기술을 잘 배우고, 또 대포와 군함을 쓰는 재주를 잘 배우면 그것이 힘이 되지 아니하겠소?』

답 『그렇습니다.』

문『그러면 지식과 기술만 배우면 고만이지 인격이니 단결이니 하는 것은 무슨 소용이오?』

답『인격이 건전치 못한 사람의 지식과 기술은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서 쓰여지 지 아니하고 도리어 나라에 해롭게 쓰여지는 일이 많습니다.』

문『그런 실례가 있소?』

답『오적칠적(五賊七賊)은 다 무식한 자가 아니라 유식하고 유능자였습니다.』

문『그러면 지식과 기능과 인격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오?』

답 『지식과 기능은 인격의 三[삼]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문 『인격의 三[삼] 요소는 무엇무엇입니까?』

답 『덕(德)과 체(體)와 지(智)입니다.』

문 『덕이란 무엇이요?』

답 『도덕(道德) 입니다.』

문 『도덕이란 무엇이요?』

문『도(道)란 사람이 마땅히 좇아갈 길이요, 덕(德)이란 그 길을 감으로, 즉 실천함으로 생기는 정의(情意)의 경향·궤도, 다시 말하면 옳은 길을 즐겨하는 버릇과 힘인 것입니다.』

문『그러면 그덕의 중심이 되는 것, 근본이 되고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군은 믿으시오?』

답『참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문 『참이란 무엇이요?』

답『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 『거짓이란 무엇이요?』

답『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입니다.』

문『거짓이 어찌하여 옳지 못한 것이요?』

답 『도(道)에 어그러지므로.』

문『거짓이 어찌해서도에 어그러지오?』

답『거짓이 도에 어그러지는 줄은 누구나 양심에 비추어 보면 알 것입니 다.』

문『그렇소. 누구나 제 양심에 물어 보면 거짓이 옳지 않은 줄을 알지요. 그렇지마는 거짓이 있어서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속이면 남이 나를 믿어 죽지 않지요.』

문『남이 ○군을 안 믿어 주면 어찌해서 안되오?』

답『남이 나를 안 믿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신용이 없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문 『신용이 없고는 할 수 없는 일을 어디 꼽아 보시오?』

답『첫째로 장사도 안 됩니다.』

문『신용 없는 사람은 장사가 안 되어?』

답『신용 없는 장사에게 누가 자본을 대고 물건을 주겠습니까? 또 신용 없는 사람의 가계에 누가 물건을 사러갑니까?』

문 『그러면 신용은 상업에 필요하구료?』

답『절대로 필요합니다. 신용은 상업의 생명이라 하겠지요.』

문『공업은 어떠할까요, 신용 없이 공업은 될까요?』

답『상업과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신용 없는 공장의 제품은 상품 가치(商品價値)가 없을 것입니다.』

문『공장이 있자면 무엇이 요건(要件)이 되겠소?』

답『첫째는 공장 주인, 즉 경영자가 거짓 없는 인격자라야 하겠습니다.』

문『그 다음에는?』

답『기술자가 참된 사람이라야 합니다.』

문『공장 주인과 기술자만 참된 사람이면 그 공장은 신용 있는 공장이 되겠습 니까?』

답 『그렇습니다.』

문『직공은 거짓되어도 상관이 없겠소?』

답『직공이 속이면 안 되지요.』

문『그러면 경영자와 기술자와 직공이 다 참되어야 그 공장이 신용 있는 공장이 되겠소그려?』

답『그렇습니다. 그중에 하나만 거짓되어도 그 공장의 제품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문『○군은 어느 나라 제품을 안심하고 사시오?』

답『독일 것, 미국 것.』

문『우리 나라 제품은 신용 못하시오?』

답(쓴 웃음을 지으며)『신용 못합니다.』

문『어떤 나라의 상공업이 신용을 못 받고서 그 나라가 부(富)할 수 있겠소?』

답『상공업에 신용 없이는 그 나라가 부할 수 없습니다.』

문 『우리나라에도 상공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오?』

답『상공업의 진흥이 없이는 우리나라가 부할 수 없읍니다.』

문『상공업 능력이 없이 우리나라가 독립 국가가 될 수 있을까요?』

답『평생 외국 사람의 시장(市場) 밖에 못 되겠습니다.』

문 그러면 우리 『나라에 상공업을 발전시키는 길은 무엇이요?』

답(웃으며)『무실(務實) 운동이요. 二[이]천만 민족이 참된 사람들이 되는 일입니다.』

문 『우리 나라는 농업국이지요?』

답 『그렇습니다.』

문『농업이야 「무실」을 안 하기로 안 되겠소? 농민은 거짓이 있어도 상관이 없겠지요?』

답『농민은 천지 자연(天地自然)을 상대로 하니 천지 자연이야 거짓은 있으며 사람의 거짓에 속긴들 하겠습니까? 거름 아닌 것은 거름이라 하고 주어도 곡식 이 속지를 않습니다.』

문『옳은 말씀이요. 그뿐 아니라 장차 우리는 농업도 세계 시장을 사대로 하여야 하겠고, 세계 시장에서 한국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곡식이나 과실이나 축산이 나 채소나 계란이나 의심 없이 에누리 없이 안심하고 기쁘게 사주도록 되어야 우리 농촌이 「부」할 것입니다. 마치 영국 사람이 정말(丁抹) 것을 안심하고 환영하는 모양으로 우리 농산품이 환영을 받게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부한 나라 가 될 것입니다.』

답 『동감이요.』

문『그런데 우리 민족은 안으로는 서로 믿고 밖으로는 남의 믿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시오?』

답『안으로 서로도 못 믿고 밖으로 남의 믿음도 못 받고 있습니다.』

문『무엇을 믿고 그렇게 단정하시오?』

답『사실이 그런 걸요.』

문『사실이라니? 무슨 사실을 보고 우리 민족은 안으로 서로 믿지도 못하고 밖으로 남의 믿음도 못 받는다고 생각하시오?』

답 (말이 막힌다. 주위에서 방청하는 사람들도 눈이 둥그레진다.) 문『이것이라고 얼른 내어 놓을 사실의 증거도 없이 어떻게 우리 민족이 안으로 서로도 못 믿고 밖으로 남의 믿음도 못 받는 민족― 다시 말하면 거짓된 민족이라고 단언하시오?』

(하고 위원은 十[십]분 간 휴계를 선언한다.) 이것은 휴계하는 동안에 문답을 받는 이나 방청하는 이나 다 잘 생각하여 볼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다. 문답은 다시 시작하였다.

문『우리 민족이 거짓이 많아 서로도 못 남의 믿음도 못 받는다는 사실은 생각해 보셨소?』

답『단결 안 되는 것이 그 한 실례인가 합니다.』

문 『어찌해서?』

답『민중이 지도자를 안 믿고, 지도자끼리 서로 안 믿고, 민중끼리 서로 안 믿고 단결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우리나라가 망하기 전에 백성이 정부를 믿었소?』

답『안 믿었습니다.』

문『왜 안 믿었을까요?』

답『대신이나 수령 방백(守令方伯)이나 제 욕심만 채우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문 『그것이야 이기심(利己心)이지 왜 거짓이요?』

답『나라 일을 합네 하면서 제 일을 하니 거짓입니다.』

문『그렇게 정부 관리들이 다 거짓을 하였고 그러기 때문에 백성이 믿지 아니 하였다는 것은 무엇으로 아시오?』

답『만일 관리들이 거짓이 없었고 백성들이 나라를 믿었다면 나라가 망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문『나라가 망한 것은 다 거짓 때문이라고 생각하시오?』

답『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였는데 이 「문답」중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참이 큰 덕이요 거짓이 큰 악이겠지마는, 그 때문에 국가의 흥망까지야 달리겠소?』

답『《中庸[중용]》에, 성자(誠者)는 천지도야(天之道也)요, 성지자(誠之者)는 인지도야(人之道也)라 하였고, 또 불성(不誠)이면 무물(無物)이라 하였으니, 성(誠)이란 참이요. 천지가 참으로 유지되어 가니 한번 참이 깨어지면 천지는 즉각에 부서지리라고 생각해요. 모든 벽들이 궤도를 갑네 하고 딴 길을 가고, 시 서(時序)가 어그러져 봄이 되는 척하고 겨울이 된다고 하면 천지는 파괴가 되고 혼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도 그와 같아서 모든 벼슬아치와 모든 백성이 다 참을 지키는 농안 결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와 반대로 그중에 어느 하나가 참을 버리고 거짓의 길로 가면 벌써 그 나라는 어지러워진다고 생각합니 다.』

문『옳소. 옳소! 그러면 우리나라를 참 나라를 만드는 길은 무엇이요?』

답『거짓을 버리는 것입니다.』

문『거짓을 버린다면 실제로는 어떻게 한단 말이요?』

답『거짓말을 뚝 끊고 모든 거짓된 것을 일체 버리는 것입니다.』

문 『누가?』

답『우리 민족이다.』

문 우리 민족이 이 천만이나 『二[ ] 넘는데 어떻게 그들이 거짓을 버릴 수가 있소? 또 누가 그들더러 거짓을 버리라고 명령은 하며, 그 명령을 듣기는 누가 득겠소?』

답『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해야지요』

문『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누가?』

답 (오랜 시간 말이 막힌다.) 문 (말없이 쳐다보고 있다.) 답『인제 깨달았소.』

문 『말씀하시오』

답『내가 해야겠소. 내가 거짓을 버리고 참 사람이 되어야겠소!』

문 『○군이?』

답『네.』

문『○군이 혼자서 오늘부터 거짓을 버리고 참 사람이 된단 말씀이요?』

답『네. 그 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그것은 확실하겠소? 조금도 의심이 없소?』

답『나 하나가 거짓을 버리고 참사람이 되기도 극히 어려운 일이지마는 그래도 내 말을 가장 잘 들을 사람은 자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응. 그러면○군은 이제부터 거짓을 버리고― 모든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오직 참으로, 나갈 것을 결심하시오?』

답『예. 결심합니다.』

문『얼마 동안이나 힘을 쓰면 ○군이 완전한 참사람이 되어 티끌만한 거짓도 없어지리라고 생각하오?』

답『완전히 거짓이 없고 참되게 되면 그것은 성인의 자리니 평생을 힘써도 어 렵겠으나 불가능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문『○군은 우리 민족 二[이]천만이 모두 성인의 자리에 이르기를 바라오?』

답 『그렇습니다.』

문 『그러나 그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소?』

답『최후·최고의 목표가 성인의 자리지, 거기에 이르는 도중에는 여러 계단이 있을 것이요마는 목표에 가까워 가면 갈수록 우리 민족의 힘은 커질 것입니 다.』

문『그러면 우리가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지니고 남만 못하지 아니하게 살아 가려면 최저 얼마나한 계단까지 우리가 참되게 되어야 하겠소? 너무 고원(高遠)한 이상은 일반 백성에게는 망양(望洋)의 느낌을 주오.』

답『쉽게 말하면, 영국 사람만큼 참되게 되면 영국만큼 우리나라를 만들 수 있 다고 믿습니다.』

문『꼭 그렇게 믿으시오?』

답 『그렇게 믿어집니다.』

문『의심 없소?』

답『추호도 의심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자리에서 깨달아진 생각입니 다.』

문 『 이상에 한 ○군의 말씀 다 나와 동감이요. 나는 ○군과 나와 또 우리 흥사단우와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이 같은 것을 대단히 기뻐하오. 그렇지마는 이 모양으로 한 사람 한사람 저를 고쳐 가서 어느 천년에 우리 민족이 거짓이 없고 참만 인 민족이 되겠소? 일은 급한데, 독립은 어서 바삐 해야겠는데, ○군,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고쳐 사는 방법보다 다 빠른 묘한 방법은 없겠소? 만일 그런 묘한 방법이 있다고 하면 흥사단과 같이 완만(緩慢)한 방법을 취할 필요가 없을 것이요. ○군은 흥사단 약법을 다 읽으셨소?』

답『예.』

문『다 외우셨소?』

답『예.』

문『조목마다 다 깊이 생각해 보셨소?』

답『예, 깊이 생각해 보느라고 하였으나, 오늘 문답을 받아 보고야 비로소 흥사단의 뜻이 얼마나 깊은지 알아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처럼 깊은 줄은 몰랐었읍니다. 나는 약법을 외우기까지 하였으니 흥사단을 잘 안다고 믿고 있었는 데, 오늘 문답을 하여 보니 내가 흥사단을 안 것은 피상(皮相)뿐이었다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예를 들면 어떤 것이요?』

답『나라가 망한 근본 원인이 거짓에 있다는것 같은 것.』

문 『또?』

답『나라가 망한 책임자도 나요, 나라를 일으키는 책임자도 나라는 것 같은 것.』

문 『그렇게 생각하시오?』

답『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어찌하여서 나라가 망한 책임자가 ○군이요? ○은 이완용(李完用)도 아니요, 이용구(李容九)도 아니어든.』

답 『이완용·이용구로 하여금 그러한 일을 하게 한 것이나입니다.』

문 『어찌하여서?』

답『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팔게 한 것이 우리 국민이니, 나를 뺀 국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 일본을 원망하고, 이완용을 원망하고, 우리 국민의 무기력함을 원망하고, 심지어 우리 조상을 원망하였으나 일찍 한번도 나 자신을 원망한 일은 없었습니다. 마치 모든 망국(亡國)의 죄는 다 남에게 있고 나 하나 만이 무죄한 피해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것이 책임전가가 아니고 무 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문『책임 전가. 책임 전가. 좋은 말씀이요. 그런데 ○군이 나라를 일으키는 책임자라는 것은?』

답『내가 참사람이 되고, 내가 애국자가 되고, 내가 평생에 광복을 위하여 일 하는 자가 되면 반드시 광복은 오리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이 자리에서 생긴 생각이지마는 이 자리에서 깨달아진 것이지 이 자리에서 얼핏 난 생각은 아닙니다. 진리이니까, 진리를 보았으니까요.』

문『우리 나라의 주인이 누구요?』

답『(잠깐 주저하다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문『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주인은 누구요?』

답 『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문『 대통령 이승만의 주인은 누구요?』

답『대한 국민, 우리 二[이]천만 민족.』

문『대한 국민, 우리 二[이]천만 민족은 누구요?』

답『우리들 모두』

문『우리들 모두란 누구요? 대한 국민이 나서라, 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면 예 하고 나설 자가 누구요?』

답 (말이 막혔다.) 문『나는 나 안창호라고 대답하고.』

답 (놀라서 도산을 바라본다. 그제야 깨달은 듯이 『예나 ○○○요.』

문『그렇소. 우리 대한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저마다 다 대한 국민이요. 저마다 다 대한의 주인이요, 대한 민국임시 정부의 주인이요, 이 승만 대통령은 우리가 뽑아서 우리의 대표로 우리의 지도자로 내세웠소. 우리는 그에게 이러한 법률에 의하여 이러한 일을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는 그리하마고 서약하였소. 그「우리」라는 것은 곧 나요. 우리라는 말이 심히 좋은 말이어니와, 이 말을 책임 전가나 책임 회피에 이용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요. 책임에 대하여서는 내 것이라 하고 영광에 대하여서는 우리 것이라 하는 것이 도덕에 맞는 언행(言行)이요. 그러면 ○군, 대통령이 내게 복종할 것이요, 내가 대통령에게 복종할 것이요? 대통령이 높소 내가 높소?』

답『 대통령은 우리의 법과 우리의 여론에 복종하고, 나는 대통령의 명령과 지도에 복종합니다 우리 . 「 」일 적에 우리는 대통령보다 높고 「나」일 적에 나는 대통령보다 낮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통령으로는 우리가 감시하고 내 대통령으로는 내가 애경(愛敬)하오.』

문『○군이 흥사단에 입단하기를 원하시니, 흥사단의 주인은 누구요?』

답 『나요.』

문『흥사단이 잘되지 아니할 때에 그 책임자가 누구요?』

답 『나요.』

문 『분명히 그렇소?』

답『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 할 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고도 흥사단이 잘 안 된다면 몰라도.』

문『그때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고 책임을 돌리겠소?』

답『제 힘을 다 쓴 이상에야 어찌해요?』

문『○군이 있는 힘을 다하여도 흥사단이 망할 수 있겠소?』

답『나 혼자 어찌해요? 다른 단우들이 다 떨어져 나간다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그렇다면 흥망의 주인이 다른 단우들이지 ○군 자신은 아니란 말이로구료?』

답 (대단히 거분한 모양으로)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읍니까?』

문『○군이 분명히 흥사단의 주인일 것 같으면 할 도리가 있지 아니하겠소?』

답 (그제야) 『예, 내가 있는 동안 흥사단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요.』

문 『어떻게?』

답『나 혼자 흥사단을 맡아 가겠읍니다.』

문『혼자서 무슨 단체요?』

답『가는 동지는 보내고 새 동지를 맞아 들이지요.』

문『새 동지를 못 얻으면?』

답『못 얻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 『어찌해서?』

답『홍사단의 주의가 진리니까. 또 내가 표본이 되니까. 또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이 멸망할 수 없으니까.』

문『진리면 반드시 따를 자가 있을까?』

답『진리를 찾는 자는 언제나 반드시 있다고 믿습니다. 구불도자, 궁겁부진(求佛道者, 窮劫不盡)이라고 하였소.』

문『동감이요.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正義)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고 나는 믿소.』

답『나도 그것을 믿습니다.』

문『우리 나라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번영도 ○군과 나와 하려고만 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날이 있다고 나는 믿는데, ○군은 어떻게 생각하오?』

답『나도 믿습니다.』

문『너도 믿고 나도 믿자.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자. 너도 주인이 되고 나도 주인이 되자. 공(功)은 「우리」에게로 돌리고 책임은 「내」게로 돌리자. 이 길 밖에는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구원할 길이 없다고 믿어서 우리가 흥사단으로 모였는데, ○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답『나도 그러한 사람 하나가 되려고 결심합니다.』

문『수양의 목표를 어디다 두시오?』

답『터럭끝만한 거짓도 없는 인격자가 되는데 목표를 둡니다?』

문『터럭끝만한 거짓도 없는 지경에 도달한다면 성인(聖人)이 아니겠소?』

답『성인지경까지를 목표로 삼고 나가겠습니다.』

문『만일 ○군 자신이나 또는 동지 중에 거짓을 다 떼어 버리지 못한 때에 어찌하겠소?』

답『떼려 떼려 하는 노력만 계속한면 동지로 보겠습니다.』

문『거짓 없는 참 인격이 되면 우리 수양은 끝난 것일까요? 거짓 없는 것 이외에 또 힘쓸 것이 있다고 보시오?』

답 『무실(務實)이 중심이어니와, 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정신도 수양하여야 비로소 완전한 인격이 되겠습니다.』

문『역행이란 무슨 뜻이요?』

답『행을 힘쓴단 뜻입니다.』

문『행은 왜 힘써야 합니까.』

답『아무리 옳은 것을 알더라도 행함이 없으면 아니 아는 것과 다름이 없겠습니다.』

문『무엇을 보고 우리 민족이 역행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오?』

답『역행이 있었으면 무엇이나 이뤄진 것이 있었을 터인데 아무 남은 것이 없 으니 역행이 부족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문 『우리 민족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이치를 알았던가요?』

답 『알았습니다.』

문『우리 민족이 충군. 애국을 하였던가요?』

답『충군. 애국을 알기는 저마다 알았어도 그것을 행한 사람은 극소수라고 생각합니다.』

문『역행의 반대가 무엇인가요?』

답 『공상(空想)과 공론(公論)이요.』

문『우리 민족이 공상과 공론을 많이 하였나요.』

답『이조의 모든 「당쟁」은 공론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군, 그대는 역행가(力行家)요? 공론가요?』

답『나도 역행보다 공론이 많았습니다.』

문『예를 들면?』

답『몸이 약하니 체육을 힘써야 되겠다 하면서도 실행을 못하고, 내 몸과 거처를 정결하게 정제하게 하여야 되겠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못하였습니다.』

문 『이로부터는 어찌할 생각이요?』

답『이로부터 한 가지 한 가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행을 하려고 합니다.』

문『옳은 줄 알면서도 실행 못한 것이 없게 되자면 ○군은 몇 해나 수양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시오?』

답『이미 이뤄진 악습을 떼어 버리고 새로운 좋은 습관, 즉 덕을 쌓는 것은 평생의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평생에 수양만 하고 일은 언제 하려오?』

답『수양한다는 마음을 잃지 아니하면 일상 생활의 모든 행실이 모두 다 수양이요. 수양은 따로 하고 수양이 끝난 뒤에 나라 일을 한다고는 생각지 아니합니다.』

문『수양만은 나라 일이 못 될까?』

답『저 혼자 수양만 한다는 것이야 저 개인의 일이지 무슨 나라 일이 되겠습니까?』

문『우리 민족 중에 잘 수양한 건전한 인격 하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과 우리 민족의 힘에 얼마나 상관이 될까?』

답『우리 민족 중에 참으로 건전한 인격이 하나만 있어도 그만큼 우리 민족의 힘이 늘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어떤 모양으로?』

답『첫째 건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저 맡은 직분을 잘하겠으니 그만큼 힘이요, 둘째로 그러한 건전한 인격자는 여러 사람의 숭앙을 받아서 큰 지도자가 되겠으니 민족의 힘이 늘었고, 셋째는 한 건전한 인격이 본이 되어 여러 사람이 그 감화로 본을 받겠으니 민족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지금 예수교인이 얼마나 되오?』

답『전세계를 다 치면 각 교파를 다 합해서 수억(數億)이 된다고 합니다.』

문『이 수억은 최초에 몇 사람에서 시작되었소?』

답『예수 한 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문『우리 민족은 몇 명이나 되어?』

답 『 대개 二[이]천만이라 합니다.』

문『二[이]천만 우리 민족을 모두 「무실·역행」하는 민족으로 변화할 수 있겠소?』

답『있다고 믿습니다.』

문 『어떠한 방법으로?』

답『내가 한 건전한 인격자가 됨으로.』

문 『확실히 그렇다고 믿으시오?』

답『조금도 의심 없습니다. 꼭 되리라고 믿고, 안될 일은 없다고 믿습니다.』

문『그렇지마는 ○군이 중간에 마음이 변하여 버리면 어찌하오? 그리되면 건전 인격의 본이 끊어지고 말지 않소?』

답『나는 중간에 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군은 변하지 않더라도 만일 ○군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때에는 건전 인격의 본이 없어지고 그 운동이 끊어지지 아니하겠소? 그런 일이 없게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좋겠소?』

답『내가 죽으면 다른 동지가 있지요.』

문『그 동지도 죽으면?』

답『또 다른 동지가 있겠지요.』

문『확실히 동지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답『확실히 동지가 끊어지지 아니할 확실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문『왜 그것이 필요할까요?』

답『흥사단의 이 사상과 방법이 아니고는 우리 민족이 재생 부흥할 길이 없으니까.』

문『그러면 흥사단의 사상과 실천 방법이 결코 끊어지지 아니하도록 그것을 영구화(永久化)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소?』

답『책으로 써놓는 것일까요?』

문『그렇소. 책으로 써놓는 것이 한 방법이요. 모든 책은 인류의 모든 선인들의 좋은 생각을 우리에게 전하지 보물이요. 흥사단의 생각도 책으로 전하여야 하지요. 그러나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답『출판하는 이외에 강연·담화 등이 있겠지요.』

문『그것도 다 어떤 생각을 전하는 방법이요. 그 밖에 또 무엇일까요?』

답 『신문·잡지…….』

문『그 신문·잡지·연극·영화도 다 그 방법에겠지요. 그 밖에는 없을까요.

어떤 사상을 널리 펴고 또 영구하게 하는 방법이?』

답 몸소 실행으로 『, 생활로 하는 선전이 가장 유력할 것 같습니다.』

문 『옳소, 백(百)의 논설(論說)보다 일(一)의 실물(實物)이 더 유호하겠소.

「무실·역행」을 말하는 백 사람보다 더 감화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겠소?』

답『동지가 한데 뭉쳐 단결하는 것일까요?』

문『단결이 왜 좋을까요?』

답『자연인(自然人)은 수명이 짧아도 단결의 수명은 기니까.』

문『○군은 우리 나라에 수명 긴 단결을 보신 일이 있소?』

답『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문『三[삼]년 가는 동사(同事)없다는 것이 우리 나라 속답이요,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三[삼]년이 이상을 계속한 단결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단결을 어떻게 믿겠소?』

답 『그러니까 흥사단에서는 신성 단결(神聖團結)이라고 하였나요?』

문『그렇소. 우리는 변치 않고 깨어지지 않는 단결이란 뜻으로 「신성단결」이라고 이름을 지었소. 단결이 변치 않고 깨어지지 아니하려면 무슨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답『첫째로 단결의 주지가의(義) 나 이(理)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우리 흥사단은 이(利)를 목적으로 하는 단결이요, 의(義)를 목적으로 하는 단결이요?』

답『흥사단은 의를 목적으로 하는 단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의란 무엇이요?』

답『옳은 일이란 뜻이요.』

문『옳은 일이란 무엇이요?』

답『양심에 어그러지지 않는 일이란 뜻입니다.』

문『양심에 어그러지지 않는 일이란 어떤 일이요?』

답『선(善)·정의(正義)란 뜻이요.』

문『선·정의란 무슨 뜻이요?』

답『저 한 몸이 욕심대로 하지 아니하고 남을 위하여서 하는 것을 「선」이요, 「정의」라고 합니다.』

문『왜 저를 위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고 남을 위하는 것이 옳소?』

답 (말이 막힌다.) 문『대관절 ○군이 가장 일생의 소원으로 삼는 것이 무엇이요?』

답『우리 민족의 부흥입니다.』

문『왜 우리민족의 부흥으로 소원을 삼으시오? 개인의 성공과 행복도 있겠고, 또 세계 인류 전체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있겠는데, ○군은 왜 하필 편협하게 조선 민족의 부흥만을 원하시오?』

답『왜 하필 내가 조선 민족만을 사랑하는 지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모양으로 본능으로 조선 민족을 사랑합니다.』

문『○군은 어느 나라 사람이요?』

답『대한 나라 사람이요.』

문『대한은 벌써 망하고 없지 앟소?』

답『그래도 나는 대한 나라 백성이요.』

문『세계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나라가 어느 나라요?』

답『영국·미국, 이러한 나라입니다.』

문『○군은 왜 영국 사람이 안 되시오?』

답『그것은 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운명입니다.』

문『○군은 지금 영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대면 대한 사람을 탈퇴하여서라도 되기를 원하오?』

답『될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원하지도 아니합니다.』

문 『왜?』

답『나는 대한 사람이니까. 내 조상들이 대한 나라에 살았고 대한 사람으로 죽어서 대한 나라 흙에 묻혔으니까요. 내가 대한의 비와 이슬을 받아서 나고, 자라고, 대한에 친척과 친우가 있고, 대한 말을 하고 대한 글을 쓰고― 나는 대한 사람이니까요.』

문『우리 민족이 다 천하거든○군 혼자서 귀(貴)할 수 있겠소?』

답 『없습니다.』

문『○군을 사랑하여서 ○군의 말을 듣고 ○군의 도움을 바라는 이가 누구요?』

답『조선 민족입니다.』

문『 』그러면 ○군의 평생 소원, 평생 사업이 무엇이요?』

답『우리 민족이 잘 살게 되도록 힘쓰는 일이요.』

문『○군이 의인(義人)이라면 어떠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소?』

답『우리 민족이 잘 살게 되도록 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면 나는 의인이 될 것입니다.』

문『○군이 의인이 아니라는 말을 어떠한 경우에 듣겠소?』

답『내가 민족이 잘 살게 할 일이 헐거나 또는 민족이 잘 살게 되는 데 아무 상관 없는 일로 일생을 보낸다면 나는 의인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문 그러면 다시 묻겠소 『 . 흥사단은 의를 목적으로 하는 단결이라 하니, 의란 무엇인가요?』

답『인제야 분명하여졌습니다. 의란 민족을 위하는 일입니다.』

문 『불의(不義)한 무엇이요?』

답『불의란 민족을 해치는 일, 또는 민족을 위하여 아니하는 일입니다.』

문『의와 불의를 그렇게만 생각하면 너무 천박하지 아니하오? 선악이니, 정사(正邪)니, 의니 불의니 하면 좀 더 높고 먼 철학적 의의가 있지 아니하겠소?』

답『나는 아까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였는데 지금 깨닫고 보니 우리 민족을 위하 는 것은 선( 善 )이요, 정(正)이요, 의(義)요, 그와 반대로, 우리 민족을 해하거 나 또는 우리 민족을 위하지 아니하는 일은 악(惡)이요, 사(邪)요 불의(不義)라고 생각합니다.』

문『조금도 의심 없이 분명히 그렇게 믿으시오?』

답『추호도 의심도 없이 확실히 그러하다고 믿습니다.』

문『그러면 다른 민족이나 세계 인류는 무시하는 것이 안 되겠소? 제 민족만 사랑하고 제 민족만 위한다는 것이 너무 민족 이기주의에서 침략주의가 되지 않겠소?』

답『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나 한 몸이 건전인격이 되는 것이 곧 우리 민족 전체의 힘이 되고 복이 되는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의 나라를 선(善) 의 나라, 정의의 나라로 완성하는 것이 곧 세계 인류의 복이라고 생각해요. 어 떤 민족이 그 물욕(物慾)과 권력욕(權力慾)을 내버려 둘 때에만 침략주의(侵略主義)가 되는 것이지 이 사사 욕심이 없으면 그 나라가 부강하게 되면 될수록 인류의 복이 되지 결코 화가 되지 아니 한다고 믿어요. 우리는 우리 민족의 나라를 이러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동감이요. 그렇지마는 우리와 같이 이렇게 독립도 없고 부력도 없고, 또 아까 우리가 토론하여서 서로 공명(共鳴)한 바와 같이 거짓이 많고, 실행이 적고, 또 단결력도 없고 한 약소 민족이 그러한 훌륭한 나라를 건설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 또한 공상·공론이 아닐까요? 우리마저 공상·공론을 하는 무리가 아닐까요?』

답『우리 민족은 현상으로 보면 과연 극약(㥛弱)·극빈(極貧)·극천(極賤) 그리고 아마 극우(極愚)한 민족일 것이요. 그러나 우리 중에 흥사단 사상이 발생하고 또 실행되기 시작하였으니 반드시 우리 목적― 즉 우리 민족을 세계에 가장 무실·역행·충의·용감하고, 가장 덕과 지와 체가 우수하고, 가장 부(富)와 문화가 뛰어난 민족을 만드는 일이 반드시 실현되리라고 믿습니다.』

문『누가 그 일을 하겠소?』

답 『흥사단이.』

문 『흥사단은 누가?』

답『내가, 그리고 우리 동지가.』

문『○군이 흥사단의 중심 인물이 되겠소? 그런 자신이 있겠소?』

답『내가 흥사단의 중심 인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나의 인격 여하와 동지들의 내게 대한 신임 여하에 달렸지마는, 나 혼자만 남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흥사단은 지켜 갈 것이니 내가 흥사단의 주인인 것은 변할 리가 없습니다.』

문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왜 ○군 혼자서 우리 나라를 부흥시키지 아니하고 흥사단에 들어 와서 하려고 하시오? 남의 만들어 놓은 단체에 ○ 군만 한 명사(名士)가 이 모양으로 입단 문답을 하고 들어온다는 것이 체면상 수치가 아니요?』

답『부끄러운 말씀이지마는 미상불 그런 생각도 있었소.』

문『그런데 왜 입단을 하려고 하시오?』

답『이 일은 혼자는 못할 일이요, 여럿이 뭉쳐서야 할 일이므로.』

문 『혼자서는 안될까오?』

답 『안됩니다.』

문『○군이 평생을 몸으로 모범이 되어서 힘쓰면 고만이지 단결은 하여서 무엇 하오?』

답『아까 말씀대로 개인의 생명은 한이 있으므로.』

문『단결을 이뤄서 하면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답『첫째로 수명이 무한히 길 수 있고.』

문『또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답『여럿이 한 목적으로 일을 하니까 큰 힘을 낼 수가 있습니다.』

문『큰 힘? 큰 힘은 무엇에 쓰자는 것이요?』

답『작은 일이면 작은 힘으로 되지마는 큰일은 큰 힘으로만 되니까요.』

문『꼭 그런가요? 꼭 그렇다고 믿으시오?』

답『꼭 그렇다고 믿습니다.』

문『기회만 잘 만나고 계략(計略)과 수단만 좋으면 작은 힘으로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니요?』

답『기회나 수단이 작은 힘을 크게 하는 힘이 있지마는 원체 작은 힘으로는 아무리 기회나 계략이나 수단이 좋더라도 어떤 한도 이상의 힘을 중가할 수는 없습니다.』

문『사람의 힘을 크게 하는 법이 무엇이요?』

답 『지식과 기계를 쓰면 큰 힘을 내일 수가 있습니다.』

문『사람의 힘을 크게 하는 법이 무엇이요?』

답『지식과 기계를 쓰면 큰 힘을 내일 수가 있습니다.』

문『또 무슨 방법이 있소?』

답『여러 사람의 힘을 모으는 것이요.』

문『여러 사람의 힘을 모으는 방법은 무엇이요?』

답 『단결이요.』

문『세상에는 어떠한 단결이 있소?』

답『종교 단체도 있고 정치 단체도 있고 문화 단체도 있고 또 혁명 단체도 있고.』

문『또 무슨 단체가 있나요?』

답『큰 자본의 힘을 내이기 위하여서는 각종 회사도 있고.』

문『또 무슨 단체가 있소?』

답『군대도 한 단체요, 국가도 한 단체겠지요.』

문『기독교회라는 단체가 없이 기독교가 一[일]천 九[구]백여 년이나 내려 오고 또 이만큼 많은 신자를 가지고 이만큼 큰 사업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답 『없었겠읍니다.』

문『중국 인구가 四[사]억이나 되는 데 지금은 비록 쇠(衰)하였지마는 그래도 세계에서 문화 높고 유력한 민족이요. 그런데 국가의 조직 없이 이 민족이 이만 한 문화를 가지고 四[사]천 년간 이만큼 계속하고 번창할 수 있었을까요?』

답『국가라는 조직이 없었더면 문화도 생시지 못하였으려니와 생존도 유지하지 못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우리 민족은 국가 없이 문화와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답『국가 없이는 민족도 멸망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상에 국가 없이 창성하는 민족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그런데 우리는 나라가 없구료?』

답『망국민이 된 지 어언간 십년이나 되었소』

문『언제나 우리에게 다시 나라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오?』

답『우리에게 독립 국민이 될 실력이 생긴 때에야 우리에게 독립한 국가가 있 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문『그러면 이번 독립 운동은 허사(虛事)란 말이요?』

답『허사는 아니지요. 동포가 흘린 한 방울 피도 헛되이 되는 일은 없다고 믿습니다.』

문 그러면 『이번 독립 운동의 소득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답『첫째로 민족 의식(民族意識)을 각성시켰고, 둘째로 독립의 의사(意思)를 내외에 표명하였고, 셋째로 실력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기회가 있더라도 쓸데 없다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문『그러니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실력이 언제나 생기오?』

답『백년, 천년이 걸리더라도 독립 실력이 생기는 날이 독립이 완성되는 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읍니다.』

문『그날이 너무 오래다면 동포들이 낙심하지 안겠소?』

답『확실히 희망과 확실한 방법만 믿으면 낙심이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더욱 이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힘이 늘어가는 것이 눈에 보이면 동포의 희망이 더욱 커지리라고 믿습니다.』

문『우리에게 완전한 독립의 영광의 날이 저절로 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오?』

답『저절로는 올 수 없지요. 우리가 그날이 오게 하도록 힘을 써야만 올 것입니다.』

문『어떻게 힘을 쓰는 것이 우리에게 독립의 영광의 날이 오게 하는 길이 되겠소?』

답『흥사단을 힘있게 하는 일이요.』

문『그까짓 흥사단, 한 개 작은 단체에 국가 흥망의 운명이 달릴 수가 있겠소.

게다가 흥사단은 정치 단체도 아니요, 독립 운동하는 혁명 단체도 아니고 아직 백명 내외의 단우를 가진 수양 단체에 불과하거든, 이 흥사단이 그처럼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수가 있겠소?』

답『글쎄요, 그렇게도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래도 그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 같애요. 역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완전한 국민의 되도록 수양하면서 그 사 람들이 굳게 단결하여서 전 국민을 다 건전한 국민이 되도록 힘쓰는 길 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문『동감이요. 우리들도 그렇게 믿고 이 흥사단을 조직하였소. 지금 그대가 단결이란 말씀을 하였으니 단결이라는 것이 그렇게 필요하겠소?』

답 『필요합니다.』

문 『얼마나?』

답 『절대로 필요합니다.』

문『왜, 그다지 절대로 필요하오?』

답『큰일은 큰 힘으로야만 할 수 있고, 큰 힘은 큰 단결에서만 생기므로.』

문『우리 흥사단이라는 단결이 할 일은 무엇인가요?』

답 우리 민족 『전도 대업(前途大業)의 기초를 준비함이라고 약법에 써 있지요.』

문『전도 대업이란 무엇인가요?』

답『힘있고 영광 있는 독립 국가를 완성하는 일이요.』

문 『기초란 무엇인가요?』

답『기초란 터와 주추란 말입니다.』

문『터와 주추가 무엇에 필요한가요?』

답『집을 짓는 데 필요하지요』

문『기초 없이는 집을 못 짓나요?』

답『기초 없는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나라의 기초는 무엇인가요?』

답『국토와 국민이요.』

문『우리나라에는 국토와 국민이 있소, 없소?』

답『국토는 다른 나라의 영토가 되고 국민은 다른 나라의 노예가 되었습니 다.』

문『무슨 이유로 우리 국토와 우리 국민이 제 나라를 잃고 남의 노예가 되었소?』

답『나라를 지킬 육해군의 병력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읍니다.』

문『왜 병력이 없다나요?』

답『경제력이 없는 까닭이요.』

문『왜 경제력이 없었소?』

답『산업이 발달되지 못하여서.』

문『왜 산업이 발달되지 못하였소.』

답 『자연과학(自然科學)이 발달되지 못하여서』

문『자연 과학은 왜 발달되지 못하였소?』

답『교육이 없어서』

문『왜 교육이 없었소?』

답『국가에서 교육 시설을 아니하고 교육 장려를 아니하여서』

문『왜 교육을 안 힘썼소?』

답『정치가 나빠서.』

문『정치가 왜 나빴소?』

답 『정치가들이 나빠서.』

문『정치가가 나쁘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이름이요?』

답『정치가가 나라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리 사욕을 앞세우므로.』

문정치가가 왜 나라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리사욕을 앞세웠소?』

답『당파 싸움을 하느라고.』

문『당파 싸움은 왜 하였소?』

답『제가 정권을 잡으려고.』

문『정권은 무엇하러 잡으려고 욕심을 내오? 나라를 위하여서? 저를 위하여 서?』

답『나라 일을 위하여서 하는 당파 싸움이면 나라가 망할 수 없겠지마는 저와 제 당파만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라가 망해요. 정권을 탐내는 목적이 적의 당파를 섬멸하고 국가를 자파의 낭중물(囊中物)을 만들려고 하는 데 있었으므로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문『우리 나라에 그런 싸움이 있었던가요?』

답『있었지요. 이조 五[오]백년 역사가 당파 싸움의 역사이니까요.』

문『어디 그 대강을 말해 보시오?』

답『이조 초기에는 불교에 대한 유교의 파쟁이니 이것은 제종(世宗)·세조(世祖)때에 격렬하다가 중종(中宗)·명종(明宗)때에 이르러 유교의 독천(獨擅)으로 끝을 막고, 이 파쟁으로 약해진 국력이 임진 왜란과 병자호란을 이끌어 넣은 바 되었고, 중종 때부터 이른바 사화(士禍)란 것으로 발단한, 같은 유교도(儒敎徒)끼리 동서(東西)·노소(老少)·남북(南北)의 추한 투쟁은 이조 五[오]백년을 끝 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당쟁에만 눈이 뻘개서 교육도, 산업도, 치산·치수(治山治水)도, 군비도 다 돌아 보지 아니하고 오직 적을 죽이고 저를 보존하기에 눈이 뻘갰을 뿐이지요.』

문 『이조 말에는 당쟁이 없었던가요?』

답『있었지요. 갑신(甲申)에는 김옥균(金玉均) 등의 독립당과 민(閔) 일족의 사대당(事大黨)이 싸웠고 또 일청전쟁(日淸戰爭) 당시에는 친일파와 친정파가 있습니다.』

문『망국이 된 뒤에는 당쟁이 없었나요?』

답『불행하게도 있었다고 봅니다.』

문『어떤 당쟁이 있었소?』

답『같은 애국자 중에도 기호파(畿湖派)니, 서북파(西北派)니, 교남파(嶠南派)니 하는 알력이 있고 또 개인 영수(個人領袖)를 중심으로 수야파(誰也派), 모야파(募也派)하는 불화가 있는 것같이 생각됩니다.』

문『○군 어떻게 생각하오? 당파라는 것이 하나도 없기를 바라오?』

답『당파가 하나도 없고 국민 전체가 한 당이 되는 것이 이상이겠지만 주의(主義)와 정견(政見)을 달리하는 당파일진댄 있어도 좋을 뿐더러 또 그러한 당파면 있는 것이 서로 자극하여 이익도 되리라고 믿습니다.』

문『그러면 ○군은 어떠한 당파를 배격하시오?』

답『주의를 중심으로 하지 아니하고 이해(利害)를 중심으로 한 당파는 소인(小人)의 당파요, 혹은 지방 감정 혹은 계급 감정을 이용하여서 민중의 열등감정(劣等憾情)인 편벽(偏僻)과 증오(憎惡)와 질투(嫉妬)의 감정을 도발하여 제 이해와 불합하는 딴 사람, 딴 당을 중상·모해하는 그러한 당파는 다 악당(惡黨)이요, 또 비록 주의를 중심으로 한 당파라 하더라도 그 실현 방법이 목적을 위 하여서는 수단을 아니 가린다 하는 것 같은 것도 옳지 아니한 당파라고 생각합니다.』

문『그렇게도 폐해(弊害) 많은 당파일진댄 차라리 없는 것이 좋지 않겠소? 아 무 당에도 아니들면 그 싸움에 섞이지 아니할 것 아니요? ○군은 그런데 왜 흥사단이라는 당에 가입하려 하시오?』

답『아무당에 아니 들면 내 신세는 편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독선기신(獨善其身)이 아니요?』

문『독선기신은 옳지 아니한가요?』

답『저마다 독선 기신을 하려 들면 광복 사업은 못합니다.』

문 『왜?』

답『광복 사업은 대사업이요, 대사업을 하는데는 큰 힘이 필요하고 큰 힘을 내는 길은 많은 동지를 모아서 큰 단결을 짓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옳은 주의로 옳은 동지를 많이 모아서 속히 큰 단결을 만드는 것이 광복의 대업을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문『옳은 주의의 큰 단결이 없으면 어떠한 결과가 생길까요?』

답『옳지 아니한 주의의 천하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옳은 주의의 단결이 있었더면 우리 나라가 망하지 아니할 수 있었겠소?』

답 『그렇습니다.』

문 『흥사단은 정치 단체가 아니요, 한 개 수양 단체인데, 한 개 수양 단체 따위가 아무리 크기로 어떻게 광복 사업을 성취하고 또 옳은 정치를 할 수가 있겠소?』

답『수양한 건전한 인격자가 많이 생기면 그들이 정치가도 되고 교육가도 되고 실업가도 되어서 건전한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건전한 국민이 많은 나라에서는 부정한 개인이나 당파가 쓰일 일이 없을 것이니, 국민을 건전히 하 는 것이 국가를 건전케 하는 기초라고 믿습니다.』

답『그러하더라도 흥사단을 수양 겸 정치 단체로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할까요.

수양이란 청소년이나 할 것이지 점잖은 신사·숙녀가 수양 단체에 가입한다는 것이 체면상 어떠할까요?』

답 수양이 다 끝난 사람이란 『 있을수 없읍니다. 평생을 수양하더라도 오히려 족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나는 점잖은 사람이니 수양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체면상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고 하면 그는 증상만(增上僈)이요, 그야말로 크게 수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군이 흥사단에 들어오는 것은 ○군 일 개인만의 수양을 위해서요, 또는 ○군도 수양하고 남도 수양하게 하겠다는 뜻이요?』

답『내가 수양 단체인 흥사단에 들려고 하는 것은 첫째로 내가 수양하고, 둘째로 남도 수양케 하려는 뜻입니다.』

문『○군이 흥사단에 들어오는 것이 어찌하여서 남도 수양케 하는 일이 되오?』

답『내가 흥사단우가 되어 흥사단 표를 붙이고 다님으로 나를 아는 사람도 흥사단에 들어 올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문 『그것뿐일까요?』

답『내가 세상에 좋은 사람이 됨으로 흥사단의 이름이 빛나서 많은 사람을 흥사단으로 끌어 들일 수 있으니까.』

문 『그것뿐일까요?』

답『내가 입단함으로 흥사단이 그만큼 커지고 힘있게 되므로.』

문 『그것뿐일까요?』

답『흥사단에서 하는 여덟 가지 사업을 하여서 널리 동포에게 수양의 길을 주므로.』

문『○군이 입단을 아니하면 흥사단이 유지가 못되고 팔대사업(八大事業)이 실현되지 못하겠소?』

답『그야 나 하나 없더라도 흥사단은 유지되고 팔대사업이 실현되겠지요.』

문 『그렇까요?』

답『예.』

문『○군 하나 물러나더라도 우리 나라가 광복이 되겠소?』

답『예. 나 하나가 무엇이길래.』

문『二[이]천만 동포가 저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라가 어찌 되겠소?』

답 (쓴 웃음을 짓는다.) 문『그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군 생각에는 어떻소?』

답『나는 겸손한 뜻으로 그렇게 말을 하였읍니다.』

문『어찌하여서 그것이 겸손이 되오? 무거운 짐을 끄는데 내야 안 끌기로 어떠랴 하고 뒤에 물러서는 것이 겸손이겠소, 회피이겠소?』

답 『회피입니다.』

문『남더러만 무거운 짐을 끌라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죄겠소, 죄가 아니겠소?』

답 『죄입니다.』

문『저는 힘이 없노라 하여서 함께 달려 들어 무거운 집을 끌지 아니하고 도리어 끄는 다른 사람을 잘 끄네 못 끄네 하고 시비하면 어떻겠소?』

답『그것은 더 고약합니다.』

문『나라 일도 마찬가지 아니요?』

답『그렇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문『지금 우리 나라에서 나라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소. 아니하고 남의 시 비만 하는 사람이 많소?』

답『저는 아무것도 아니하면서, 하는 사람의 시비를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 습니다.』

문『그러기로 당국 아니한 사람이야 나라 일을 학 싶은들 어떻게 하겠소? 부재 기위(不在基位)하여 부모기정(不謀基政)이라 하였으니, 제 책임도 아닌 일에 저마다 나서서 참견을 하면 일이 될까요?』

답 『그래도 안되지요.』

문『그러면 어찌한단 말이요? 가만히 있지도 말래, 참견도 말래, 그러면 어찌 하면 좋소?』

답『남이 하는 일에는 참견을 말고 제가 할 일만 하면 되지요.』

문『제가 할 일이라면 무엇이겠소? 무엇이 우리 서민으로 나라를 위하여서 제가 할 일이겠소?』

답『첫째로는 제 직업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겠지요.』

문『제 직업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나라 일이 되겠소?』

답『二[이]천만이 저마다 제 직업에 전력을 다하기만 하면 우리 나라는 부강하여 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문『농사나 장사나 공장(工匠) 같은 일이라도 제 직업만 잘하면 나라가 부강할 까요?』

답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문『그렇다면 애국 운동이니 독립운동이니 정치니 다 필요가 없지 아니하오?

저마다 제 직업만 다하면 나라가 잘된다면야.』

답『국민 각 개인이 다 제 직업을 잘할 만한 개인이 되게 하고 그 개인들이 안 심하고 저마다 제 직업을 잘하도록 하는 것이― 그렇게 지도하고 그렇게 제도를 만들어 놓는 것이 애국 운동이요, 정치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치의 목적이요, 국가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그러면 ○군은 흥사단이 모든 운동의 중심이요, 기초라고 생각하시오?』

답『그렇게 생각합니다. 흥사단 운동이 없이는 다른 모든 운동이 다 되지 아니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흥사단 운동에 성공하는 것이 곧 광복이요, 독립 완성이요, 민족 영원의 복락의 근원이라고 믿습니다.』

문『흥사단 운동이 그처럼 중요할까요?』

답 『그렇다고 믿습니다.』

문『영국이나 미국은 흥사단 없이도 나라다 잘되어 가는데 왜 우리나라에만 흥사단 운동이 필요할까요?』

답『우리 민족이 영국이나 미국 민족보다도 거짓과 공론이 많고 단체 생활의 훈련이 부족하므로 영국이나 미국 사람이 안 하는 한 과정을 더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기초 공부가 없이 아무리 영국·미국을 따르려 하여도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영국·미국 사람과 우리와는 무엇이 다른가요? 피부와 머리털과 모양 말고 도덕적으로 그들이 우리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답『나는 영국과 미국에 가 본일도 없고 영·미인과 많이 교제해 본 일도 없어서 자신 있는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문『그렇더라도 혹은 역사나 문학을 통하여, 혹은 신문을 통하여 상식적으로 영·미인의 장점·단점에 대하여서 생각해 보신 일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말씀 해 보시오. 현재 세계에서 영·미인이 가장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 것이 우연일리가 없소. 반드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우월한 국민성과 우월한 수양과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세상만사, 우주의 모든 현상은 다 정확한 인과 관계(因果關係)의 지배를 받는 것이므로, 영·미인 이 탁월한 지위를 가진 것이나 우리 민족이 빈천한 처지에 있는 것이나 다 인과 관계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사는 남과 못 사는 우리를 비교하면 우리의 진로가 분명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답『나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다 인과요, 우연이 아니라는 말씀을 더욱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우리 동포들이 인과를 믿나요?』

답『자연계의 인과는 안 믿는 사람이 없으면서도 사람일의 인과는 잘 믿지 않 는 것 같습니다.』

문『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하시오?』

답 가령 벼를 심으면 『 , 벼를 거두고, 또 거름을 준 벼는 안 준 벼보다 많이 나고, 김을 세 벌을 맨 논은 두 벌을 맨데보다 소출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알면서도 남은 잘 사는데 저는 못 사는 것 같은 것은 그러한 원인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운수니 요행이니 하여 남이 잘된 것은 요행, 제가 못된 것은 운이 좋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것이 인과를 무시하는 생각입니다.』

문『나도 동감이요. 인과를 안 믿는 사람의 특색이 무엇인가요?』

답『인과를 안 믿는 사람의 특색은 첫째로 제가 당하는 일의 책임이 제게 있다 고 아니하고 혹은 하늘에, 혹은 세상에 원망을 돌리는 것이요.』

문 『인과를 믿는 사람의 특색은 어떠한가요?』

답『제가 받는 것은 다 제가 지은 일의 필연적인 대가요 갚음이라고 알기 때문 에 제게 불행이 있을 때에는 제 마음과 제 행실을 반성하고 검토하여서, 지금 받는 불행의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알아 내어서 그것을 고치거나 제거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문『인과를 믿으면 숙명론자(宿命論者)가 되지 않겠소? 모든 것이 다 팔자요 운명이라 하여서 고만 단념하고 낙심해 버리지 아니할까요? 만일 전국민이 다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큰일인데.』

답『인과를 믿는 사람은 현재에 받는 불행에 대하여서는 제 책임으로 알기 때문에 불원천·불우인(不怨天不尤人)하고 단념하지마는, 장래에 대하여서는 자신 있는 희망을 가지기 때문에 결코 낙심하는 일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장래를 만드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니까, 내가 지금부터 짓는 원인이 장래의 결과를 결정할 것이니까, 인과를 안 믿는 사람이 도리어 자포자기하고 하늘과 사람을 원망하여서 바란다면 요행만을 바라니 자신도 희망도 없다고 생각합니 다.』

문『흥사단은 인과를 믿는다고 보시오, 안 믿는다고 보시오?』

답『흥사단은 인과의 원리 위에 섰다고 봅니다.』

문 『어찌해서?』

답『우리가 사대 정신(四大精神)으로 삼대 수련(三大修鍊)을 하여서 저마다 건전한 인격을 이루고 또 일심 화합하여서 저마다 건전한 인격을 이루고 또 일심 화합하여서 신성한 단결을 이루면 필연적으로 민족 전도의 대업이 실현될 것을 믿으므로.』

문『우리 민족의 전도에 대하여서는 불안이나 의심이 없소?』

답『없읍니다. 우리가 내가 하기만 하면 우리 민족은 반드시 잘 살게 되지, 잘 살게 되지 못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천지간에 인과의 이법(理法)이 있는 동안 우리의 희망과 신념은 변동할 리도 실패할 리도 없다고 믿습니다.』

문『꼭 그렇게 믿으시오?』

답『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문 『인제 아까 문제에 돌아 갑시다. 영·미인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 각하시오?』

답『인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영·미인은 인과를 믿는데 우리는 그것을 안 믿고, 영·미인은 저 스스로가 제 생활과 제 나라의 주인이요, 따라서 책임지로 자처하는데 우리는 제 생활의 행(幸)·불행도, 국가의 흥망도 저는 말고 다른 누가 주인이요 책임자인 것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근본적 차이인 것 같습니다.』

문『옳소. 꼭 그대로요. 민주주의란 것은 백성 저마다가 그 나라의 주인이란 말이요. 가령 어떤 집이 하나 있고 그 집에 주인도 있고 나그네나 고용인이 있 다고 하면 그들에게 주는 차이가 있을까요?』

답『주인은 그 집이 제 집이므로 그것을 사랑하고 아끼고 언제나 그것을 생각 하고 그것을 잘되게 하기 위하여 힘쓸 것이요, 나그네나 고용인은 그것이 제 집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편안할 것만 생각하지 그 집 생각은 안 할 것입니다.』

문『우리 二[이]천만 민족에는 우리 나라의 주인으로 자처하는 이가 많은가요?

나그네나 고용인으로 자처하는 이가 많은가요?』

답『제 집을 아끼고 사랑하듯이 제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고, 제 집을 잘되기 위하여 힘드는 줄 모르고 일하듯이 제 나라를 위하여서 정성과 힘을 다하는 사 람이 주인이라면, 우리 민족 중에는 주인이 극히 적다고 생각합니다.』

문『이 완용은 삼천리 강토를 제 집으로 생각하고 二[이]천만 민족과 그 천만 대 후손을 제 식구로 생각하였을까요? 이완용은 제가 한국의 주인이라고 생각 하였을까요?』

답『제가 주인이라고 생각하였던들 이완용은 결코 합병조약에 도장을 찍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일본 사람이 이완용의 집과 논밭과 자녀를 일본 사람에게 바치는 도장을 찍으라 하였더면 아마 그는 죽어도 안 찍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그의 황제의 나라, 또 二[이]천만 민족의 나라를 팔아서 제 집 하나만을 잘 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였기 때문에 합병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고용인이 주인 집 재산을 팔아서 제 재산을 만드는 심리와 같은 심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우리 나라에는 나라는 팔아 먹을 사람이 이완용 하나뿐일까요?』

답『나라를 제 것으로 알고, 제가 나라의 주인으로 알지 아니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완용 모양으로 나라를 팔아 목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이완용이 한 번 나라를 『팔아먹은 뒤에는 다시 나라를 파는 사람이 없나요, 아직도 있나요?』

답『작은 규모로 나라를 팔아 먹는 일은 날마다 수없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예를 들면 어떤 일이요?』

답『상해 거리에서 중국 사람 인력거군에게 찻값을 적게 주어 우리 나라 사람을 원망케 하는 것도 매국적(賣國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민족 전체를 미워할 것입니다.』

문『홍사단 운동이 필요하다는데 대하여서는 우리들의 의견이 일치되었소. 이 운동은 언제까지나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답 『광복 대업(光復大業)이 이루어지기까지.』

문『독립이 된 뒤에는 흥사단의 필요가 없을까요?』

답『독립이 된 뒤에는 민족의 정도를 더욱더욱 높여서 언제나 국가의 영광을 유지하여 가기 위하여서는 이러한 운동이 영구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흥사단은 정권을 잡기를 목적으로 삼는다고 생각하시오?』

답『흥사단은 정권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나 수양 단체로 있 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흥사단이 정권을 잡으면 더욱 흥사단주의를 행하기가 편하고 유력하지 아 니할까요?』

답『흥사단주의로 수양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는 것은 좋으나 흥사단 자체가 정권을 잡으면 흥사단에 대하여 적(敵)이 생기리라고 생각합니다.』

문『흥사단이 힘이 커지면 모든 적을 다 눌러 버리면 좋지 않을까요?』

답『그렇게 되면 흥사단은 정쟁(政爭)하는 단체가 되어서 수양 단체의 본색을 잃어 버릴 것입니다.』

문『흥사단이 수양 단체의 본색을 잃어버리면 어찌해서 안 될까요?』

답『국민을 수양하는 것이 국민의 생명이요, 정치보다도 수양이 근본이 됩니다.』

문『옳은 말씀이요. 정치에서는 안되겠소. 그러므로 흥사단은 영원히 수양 단체로 갈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데, ○군의 의견은 어떠시오.』

답『나도 동감입니다.』

문 『흥사단의 사업은 무엇이오?』

답『흥사단 자체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이 최대의 사업이요. 그리고는 약법에 있는 대로 강습소·강연회·서적출판부·도서 종람소·간이 박물원·체육장·구락부·학교 등입니다.』

문 『이러한 사업은 왜 필요할까요?』

답 『전 민족에게 덕·체·지 삼육(德·體·智·三育)을 수양할 기회를 주기 위 하여서 필요합니다.』

문『이런 사업은 몇 군데나 시설하였으면 좋겠소?』

답『도서 출판 같은 것은 중아에 한 곳이면 고만이겠지마는 기타의 것은 많아야겠습니다.』

문『많으면 얼마나 많아야 하겠소?』

답『많을수록 좋지요.』

문『한 고을에 하나씩이면 좋겠소?』

답 (놀란다.) 문 『한 면에 하나씩 강습소·강연회장·도사종람소·간이 박물원·체육장·구락부·학교가 있으면 충분할까요?』

답 (더욱 놀라면서) 『나는 그렇게 많게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문『한 동리에 하나씩 이러한 시설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래야 우리 동포 전부가 남자나 여자나 다 문명한 백성이 되지 않겠소?』

답『그렇겠습니다. 그렇지마는 그것은 하도 엄청나서.』

문『동리마다 이러한 시설이 없이 우리 민족이 세계에 일등 가는 문명한 민족이 될 수 있을까요?』

답『말씀을 듣고 보니 그만한 시설은 동리마다 있고서야 최고 문화를 가진 민족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약법을 읽을 때에 이 팔대 사업(八大事業)이란 것이 그처럼 중요하고 대규모인 것인 줄은 몰랐었습니다.』

문『우리 나라에 동리가 몇이나 될까요?』

답『二[이]백 십 九[구]군, 약 二[이]만 五[오]천 부락, 그 밖에 수백의 도시 가 있습니다.』

문(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답(혼잣말 모양으로) 『회관(會館)이 二[이]만 五[오]천, 도서관이 二[이]만 五[오]천, 박물관·체육장이 二[이]만 五[오] 천…….』

문 『이런 사업을 하자면 사람이 얼마나 들까요?』

답『여러 만 명 들겠읍니다.』

문『돈은 얼마나 들겠소?』

답『여러 억만원들겠읍니다.』

문『흥사단이 할 사업도 직지 아니합니다.』

답『한량이 없이 큽니다.』

문『○군은 이런 사업을 다하기로 결심하시오?』

답 『결심합니다.』

문『○군은 이 사업을 위하여 무엇을 바치겠소?』

답『전생명(全生命)과 전 재산(全財産)을 다 바치겠습니다.』

이것으로 흥사단 문답의 목적과 사업에 관한 문답이 끝난 것이다. 그 뒤에 조직·의무·재정 등에 관한 문답이 있다.

흥사단의 조직은 세 사람의 감독이 머리에 있고, 그 밑에 의사부(議事部)·이 사부(理事部)·검사부(檢事部)의 三[삼]부가 있어 삼권 분립(三權分立)의 제도를 썼다. 감독은 도덕적 권위일 뿐이요, 행정의 수뇌는 아니다. 미토권도 규정함이 없고, 다만 이사부나 의사부나 검사부가 약법과 아울러 감독의 의사를 존중하리라는 도덕적 권의의 원천이 될 뿐이다. 감독은 단내의 가장 모범적인 인물 중에서 의사부의 선거로 추천한다. 감독을 三[삼]인으로 한 것은 한 사람의 재단(裁斷)보다 세 사람의 재단이 실수가 없고, 다섯 사람보다 세 사람이 통일 이 쉽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 조직은 민주 입헌(民主立憲)의 정신으로 되어 있다. 삼인 원수(元首)는 정치에도 고려할 만한 일이다.

第四章[제사장] 同志愛[동지애][편집]

도산이 흥사단우를 고르는 표준은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거짓이 없는 사람, 둘째는 조화성(調和性) 있는 사람이었다. 조화성이라 함은 단체 생활을 가능케 하는 성질이다. 너무 자기에 고집하고 규각(圭角)이 심한 사람은 단체 생활에 늘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거짓이 있는 사람, 규각을 세우는 사람이라도 한 가지 기술과 한 가지 능력이 있거든 받아서 수양을 시키면 좋지 아니하냐?』

하는 이론에 대하여서 도산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금주 동맹(禁酒同盟)은 술을 아니 먹는 사람들이 모임으로 성공하는 것이 다.』

고. 이것은 미국의 금주 운동이 카톨릭 신부로부터 시작한 것을 가리킴이었다.

거짓 없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큰 단결을 이루면 그것이 거짓을 박멸하는 큰 힘을 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도산은 흥사단우를 고를 때에 사회의 명서학식·수완 같은 것은 둘째로 여겼다. 「진실한 사람」이것이 첫 조건이었다. 학식이나 수완이 나라를 광복하고 민족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만이 능히 한다고 도산은 믿은 것이었다. 그러나 명성·학식·수완이 있고 진실하면 금상 첨화(錦上添花)지마는 도산이 보기에 우리 나라의 학식가·수완가는 반드시 진실을 존중하는 이가 아니었다. 소위 임기 웅변(臨機雄辯)과 권모 술수(權謀術數)를 진실보다 소중히 여기는 이가 많았다.

도산은 이것을 슬퍼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이 때문에 지도자끼리나 또는 지도자와 민중이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학식은 배울 수도 있고 남에게 빌 수도 있고, 수완도 없으면 부족한 대로 하여 나갈 수가 있었다.

도산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서 영웅 호걸보다도 진실한 사람을 구하였다. 철두철미 거짓을 벗고 오직 참으로만 나가는 사람이야말로 나라를 구원하고 백성을 건지는 민족적 영우이라고 도산은 생각하였다.

도산의 입단 문답은 실로 뜻깊은 것이다. 다른 데서 비슷한 것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앞장에 기록한 문답상항으로도 대개 짐작되려니와 이 입단 문답은 도산의 인생관이요, 민족관이었다. 그것은 한 체계의 철학이었다. 그런데도산은 이러한 자기의 철학을 후배에게 집어 넣는 태도를 취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문답을 통하여서 문답 받는 본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사상을 정리케 하여서 그 잘못을 스스로 없이 하게 하고 바른 견해를 스스로 발견케 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이 옛날 아테네의 소크라테스가 취한 방법이어니와, 도산은 그때까지는 소크라테스에 관한 것을 읽은 일이 없었다. 도산의 다른 지식이 대부분 독창(獨創)인 모양으로 이 문답 방법도 독창이었다.

도산은 입단 문답에 대하여 매양 이러한 말을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회를 한다 하면 그 취지와 규칙도 잘 알아 보지 아니하고서, 혹은 아무가 하는 것이니 들어야 한다 하여 들고, 혹은 남들이 다 드니 아니들 수 없다 해서 든 다. 그리고는 누가 그더러, 「아무 단체의 취지가 무엇인가? 무슨 사업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인가」하고 물으면 그는「나도 잘은 몰라」하고 태연히 대답한다. 이리하여서 우리 나라에는 취지 모르는 회원으로 된 단체가 많다. 취지 모르는 회원이 회원의 의무를 알리도 없고 행할 까닭은 더구나 없다. 이것이 「거짓」이다.

그러므로 흥사단에 입단하는 사람은 흥사단의 약법을 잘 알기 위하여 외우고, 그 해석이 일치하기 위하여 한 조문 한 글자를 따라서 문답하는 것이다. 이리하여야 내 생각만도 아니요, 네 생각만도 아니요, 우리 생각이라 하는 것이 생기니, 이 모양으로 여론이 생기고 민족의 의사가 생기는 것이다.

흥사단의 입단 문답은 이러한 필요에서 온 것이어니와, 이 문답을 통하여서 우 리 민족 철학이 토의되는 것이었다. 한번 이 문답을 받는 사람은 평생에 처음으로 자기를 발견한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에 아노라 하던 것이 어떻게 엉터리였던가, 지금까지 제가 애국을 하였다 하는 것이 어떻게 애국에 반대되었던가. 제가 괜 체하던 것이 어떻게 터무니 없는 착각이었던가, 어떻게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아무 계획이 없고 자기의 일생에 대하여 주견이 서지 못하였던가를 발견하여 일종의 종교적인 참회하는 심경을 체험하고 다시 살아나는 기쁨과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더구나 도산의 문답술은 대단히 발달된 것이어서 받는 자의 심중을 온통 털어 내지 아니하고는 말지 아니하거니와 그러면서도 결코 개인적인 심사에는 조금도 저촉하는 일이 없었다. 가령 신앙(信仰)·연애(戀愛)·가정 사정(家庭事情) 같 은 것에 대하여는 받는 자의 양심의 비밀은 엄중이라고 할 만하게 존중하였다.

. 도산은 평상시에도 남의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에 관하여서는 결코 알려 하지 아니하였고, 혹시 무심코 그런 것이 귀에 들어 왔더라도 안 들은 것으로 여겼다. 도산은 동지에게 대하여서 비밀을 지키는 수양을 하라고 때때로 권하거니와, 이 말의 뜻은 「할 필요 없는 말, 해서 안될 말, 내게 상관 없는 말」을 하지 않는 공부를 하라 하는 뜻이었다. 남의 비밀을 파는 것이 부도덕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어찌어찌 내게 알려진 남의 비밀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알게 된 것을 한하고 그것이 내 입에서 샐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도덕인 동시에 내 품격을 더럽히지 아니하는 자위(自衛)다.

이 비밀에 관한 것도 입단 문답의 재료다. 도산이 흥사단 입단 문답을 할 때에는 흥사단의 약법의 자구와 정신을 가지고 하는 것은 한 모양이지마는 문답하는 말의 재료는 받는 사람을 따라서 천태 만상(千態萬象)이라고 할 만하다. 받는 이의 개성·결력·호상(好尙)을 기초로 하여서 하기 때문에 십여 인의 문답을 매일 듣더라도 모두 새 말이다. 그것은 한 예술이었다.

도산은 비록 십 칠팔세의 소년과 문답을 하는 경우에도 자기가 높은 자리에 있 는 빛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다 평등의 지위에 서 물었고 평등의 지위에서 대답하는 말을 존중하였다. 그는 평시에도 남의 말을 꺾거나 누르는 일이 없었다. 비록 그것은 척 보기에 어리석은 말이라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심경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을 그냥 가지고 돌아 가게는 아니하였다. 가르친다 하는 의식이 없이 그 어리석음을 스스로 깨닫도록 유도하였다. 그것은 도산으로서는 매양 힘드는 일이었으나 그에게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주지 아니하고서 그로 하여금 그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여기 도산의 사람에게 대한 끝없는 애정이 있었다.

어떤 중국 사람 관상사(觀相師)가 도산의 상(相)을 비판하여 그의 눈자위가 자 비상(慈悲相)이 있으니 살생(殺生)을 기탄 없이 행하여야 하는 혁명가나 정치가 가 될 수 없다고 한 것은 확실히 그의 성격을 알아 낸 것이었다.

그는 일면 철석과 같은 의지의 사람이면서 부드러운 인정의 사람이었다. 그가 분노(憤怒)하는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하거니와 이것은 그가 희로애락(喜怒 에 움직이지 아니하는 哀樂) 수양의 결과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또 사람을 미워 할 수 없는 그의 천품도 원인이 되었다.

도산은 생명에 대하여서 깊은 연민(憐憫)과 애착을 가졌었다. 그는 방 안에 둔 화분의 화초에 대하여서 언제나 애무(愛撫)를 보이고 그 화초들이 편하도록 세심하게 돌아보았다. 물이 마르지 아니하도록, 물이 지나치지 아니하도록 마음을 쓰는 것을 옆에서 볼 수가 있었다.

그가 친우와 동지의 불행을 볼 때에는 매양 자기를 잊어 버렸다. 동오 안태국(東吾安泰國)이 병사(病死)한 때에 관한 도산의 헌신적 간병과 후한 장례와 간절한 비통(悲痛)과 같은 예가 많이 있었다. 상해에 일찍 윤현진(尹顯振)이 병으로 죽을 때도산은지기의 주머니를 털어서 이천금(二千金)을 들여서 그의 치료에 전력을 다하였다. 또 여운형(呂運亨)이 러시아에 여행 중 그 처자의 생도(生道)가 곤란하다는 말을 듣고 어떤 이를 통해서 여러 달 동안 그 생활비를 보내었다. 그때에는 여운형과도, 그 가족과도 아무 면식(面識)이 없을 적이었다.

도산은 인류에게 가장 귀한 것이 인정(人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흥사단 입단 문답을 할 때에는 약법 중에「정의 돈수」(情誼敦修)라는 문구를 들어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문답 받는 이의 자각을 환기하기에 노력하였다.

『정의 돈수란 무슨 뜻이요?』

이 모양으로 시작하였다.

정의 돈수란 당시 어떤 단체의 회칙에나 반드시 들어가는 문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은 가볍게 다만 한 유행하는 말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도산에게는 정의 돈수라는 한 문구는 국가의 흥망도, 인류의 흥망도 달린 중대란 문구였다.

정의 돈수는 도산에게 있어서는 자비(慈悲)·인(仁)·애(愛)의 인류의 아상을 실제화한 것이었다. 공상·공론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도산은 아무리 좋은 이상 이나 덕목(德目)이라도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는 생각 그대로 두고는 견디지 못하였다. 그는 무슨 이상이든지 덕(德)이든지 보통 사람이 몸소 얻 어 일상 생활에 실행할 수 있는 경지까지 끌어 내려다가 그 이름까지도 우리가 보통 쓰는 말로 고쳐 놓고야 말았다. 정의 돈수란 이러한 실례 가운데 하나였다.

『정의 돈수란 무슨 뜻이요?』

『서로 사랑한다는 뜻이요.』

『돈수란 무슨 뜻이요?』

『도탑게 닦는단 뜻이요?』

『도탑게 닦는단 무슨 뜻이요?』

『서로 사랑하는 정신을 더욱 기른다는 뜻일까요?』

『그렇소, 우리 흥사단의 해석으로서는 정의 돈수란 사랑하기 공부란 뜻이요.

사랑하기를 공부함으로 우리의 사랑이 더욱 도타와질 수가 있을까요?』

『그렇소, 우리 흥사단의 새것으로서는 정의 돈수란 사랑하기 공부란 뜻이요.

사랑하기를 공부함으로 우리의 사랑이 더욱 도타와질 수가 있을까요?』

『사랑하기를 날마다 힘을 쓰면 그것이 습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습(習)이 성(性)이 되면 그것이 덕(德)인가 합니다.』

『우리 민족은 서로 사랑함이 도타운가요?』

『우리 민족은 서로 사랑함이 부족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문『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시오? 무슨 증거로 우리 민족은 사랑이 박약하다고 말씀하시오?』

『갑자기 증거를 들라시면 어렵습니다마는, 우리 민족은 서로의 사랑이 박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반대가 무엇이요?』

『미움이요.』

『그러면 우리 민족은 서로 미워하는 편이 많은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한 가족이 서로 미워하면 어떨까요?』

『퍽 불행합니다.』

『일은 될까요. 서로 미워하면서?』

『아무 일도 안될 것입니다.』

『한 가족이 서로 사랑하면 어떨까요?』

『퍽 행복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이외에 가정을 행복되게 하는 다른 힘이 무엇일까요?』

『재산·건강·자녀·명예·사업성취.』

『재산·건강, 그런 것이 다 있고도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소?』

『다른 것이 다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불행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군은 사랑하는 공부을 하여 보신 일이 있나요?』

『사랑은 저절로 솟아 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공부한 일은 없읍니다.』

『샘이 저절로 솟는데 우물을 왜 파나요?』

『더 많이 솟으라고요. 더 많이 고이라고요.』

『아니 솟던 샘도 파면 솟는 일이 있지 아니한가요?』

『아니 솟던 샘도 파면 솟는 일이 많습니다. 조금 파면 아니 솟던 것이 깊이 파면 솟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 공부요.』

『인제 알았습니다. 사랑을 공부함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기를 수가 있겠습니 다.』

『사랑 공부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 공부가 되겠소?』

『예수께서 내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위하여서 기도하라 하셨으니, 누구 나 다 사랑하기를 힘쓰는 것이 사랑 공부일 것 같습니다.』

『천하 사람을 다 사랑한단 말이요?』

『그렇습니다.』

『○군 한 몸이 이 자리에 있으면서 어떻게 먼 곳에 있어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사람을 다 사랑할 수가 있겠소?』

『그럼 내민족부터 사랑하란 말씀입니까?』

『내 민족 二[이]천만을 다 사랑하는 법은 무엇이요?』

『네, 깨달았습니다. 내가 접하는 사람을 사람을 사랑한다 하는 뜻이요.』

『그러면 너무나 편협(偏狹)하지 않겠소?』

『결국 내 손이 닿는 사람, 내 목소리가 들리는 사람 밖에는 사랑 할 수가 없겠습니다. 날마다 나를 찾아 오는 사람, 내가 찾아 가는 사람, 나와 만나게 된 사람을 다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요,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 전 인류를 다 사랑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 밖에는 길이 없겠소?』

『그 밖에는 길이 없겠습니다. 그 밖에 사랑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공상과 공론이겠습니다.』

『옳은 말씀이요. 사랑한다는 것이 결국 내가 접하게 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런데 만일 날마다 제가 접하는 사람은 미워하면서 사람을 사랑하노라 하면 어떨까요?』

『l그것은 우스운 거짓말이 됩니다.』

『○군은 그렇게 우스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보신 일이 있나요?』

『많이 보았습니다.』

『그이들이 어디 있나요?』

『여기도 하나 있습니다.』(하고 ○군은 손을 가슴에 대인다.)

『왜 ○군은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였나요?』

『제 비위에 안 맞으니까 미웠던 게지요.』

『○군은 옆의 사람들의 비위에 맞았던가요?』

『안 맞았길래 나도 그들에게 미움을 받았겠지요.』

그러면 서로 비위에 『안 맞는 것을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내 편에서 저편의 비위를 맞추면 될까요?』

『내 옳음을 버리고 이웃의 옳지 못함에 맞추면 의(義)에 어그러지지 아니한가요?』

『서로서로 이웃의 독자(獨自)의 견해를 존경하여서 제척도(尺度)로 남을 재이 지 아니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미워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소. 서로 남의 자유를 존중하면 싸움의 대부분은 없어질 것이요. 내게 한 옳음이 있으면 남에게도 한 옳음이 있는 것을 인정하여서, 남의 의견이 나와 틀린다 하여 그를 미워하는 편협한 일을 아니하면 세상에는 화평이 있을 것이요. 그러데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나와 다른 의견을 용납하는 아랴이 없고 오직 저만 옳다 하므로 그 혹독한 당쟁이 생긴 것이요. 나도 잘못할 수 있는 동시에 남도 옳을 수 있는 것이어든, 내 뜻과 같지 아니하다 하여서 이를 사문 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멸족(滅族)까지 하고야 마는 것이 소위 사화(士禍)요 당쟁이었으니, 이 악습이 지금까지도 흐르고 있소.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비록 의견은 서로 다르더라도 우정되 존경에는 변함이 없음이 문명국인의 본색일 것이요. 이리하여서 우리 나라에서 천만 가지 사상과 의견이 대립하더라도 우정과 민족적 애정만은 하나일 수가 있으니, 그리하면 사상의 대립은 서로 연마·발달하는 자극이 될 수 있고 서로서로의 존경과 애정은 민족 통일의 결뉴(結紐)가 되어서, 안으로는 아무러한 의견의 대립이 있더라도 외모(外侮)나 전 민족의 운명이 달린 일에 대하여서는 흔연(渾然)히 하나가 되어서 감연(敢然)히 막아 낼 수가 있을 것이요. 제 의견의 주장도 민족을 위함이어든 민족을 깨뜨려서까지 제 의견을 살릴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런데 사실은 그만 저라는 것에 눈이 어두워 민족이 아니 보이는 일도 있는 모양이니 가히 한탄할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 돈수 공부를 하자는 것인데, ○군 동감이시오?』

『동감입니다.』

정의 돈수에 대한 도산의 해석은 결코 이것뿐만 아니다. 단결의 생명은 주의(主義)의 일치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 즉. 사랑에 있다고 도산은 말한다.

단결의 각자가 단(團)을 사랑하고 단우를 사랑하고 단의 지도자를 사랑하고 단의집과 기구를 사랑하기를 제 것같이 함으로만 단결이 비로소 최대의 힘을 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이 사랑이 부족하다고 한탄하고, 그러므로 이 사랑을 공부하여야 한다고 도산은 기회 있는 대로 말하였다.

도산에 있어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것도, 세계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론 이었다. 애국자는 그 나라의 국토를 제 집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고, 그 국토의 있는 초목과 금수를 (禽獸) 제 집 가축과 같이 사랑할 것이다. 하물며 동포와 지도자랴. 하물며 역사와 문화랴. 삼천리 강산이 내정든 강산, 사랑하는 국토일진 댄 그 모양이 눈에 보일 때에 반가운 눈물이 아니 흐르지 못할 것이요, 흰 옷 입은 동포의 모양이 눈에 띌 때에, 그의 말소리가 귀에 들릴 때에 껴안고 싶은 감격이 아니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거기 추호라도 미운 감정이 일어날 아위가 없고 시들한 생각인들 날 여지가 없을 것이다. 二[이]천만 민족이다 국토와 동포에게 대하여서 빈 말로만이 아니요 진정으로 이렇게 느끼게 된다면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창성은 벌써 된 것이었다. 민족의 각원에게 이러한 사랑이 있는 이 상 모든 사상과 의견의 대립은 영양(營養)이 될지언정 병근(病根)은 되지 아니 할 것이다.

『너도 사랑을 공부하고 나도 사랑할 공부하자. 남자도 여자도 우리 二[이]천 만이 다 서로 사랑하기를 공부하자. 그래서 二[이]천만 한족은 서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자.』

도산은 시(時)를 낭음(朗吟)하듯이 노래의 후렴을 부르듯이 감격에 넘치는 표정과 어조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적더라도 동포끼리는 무저항주의(無抵抗主義)를 쓰자. 때리면 맞고 욕하면 먹자. 동포끼리만은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자. 오직 사랑하자.』

도산은 이것으로 평생을 일관하였다. 그가 일찍 성난 모양을 본 사람이었다고 하거니와, 그는 일찍 남을 공격하는 말을 한 일이 없었다. 적을 앞에 놓고서 우리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아프게 여기고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지 못하는 책임을 자기의 정성과 힘이 부족한 것으로 돌렸다.

『서로 사랑하면 살고, 서로 싸우면 죽는다.』

하는 것을 도산은 다만 한 민족이 지켜 갈 원리하고만 생각하는 것을 도산은 오직 서로 사랑함만이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하기 때문 에 도산은 전쟁을 옳지 아니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유의 여하를 물론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고 말하였다.

얼른 보기에 이것은 기독교 사상인 것 같고 그중에도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일찍 성경의 어구(語句)를 인용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가끔 예배당에를 갔으나 기독교 신도라고 자처한 일은 없었다. 예수를 고마우시고 크신 선생님이라고 평할 뿐이요 십자가(十字架)의 공로로 속죄한다 하는 신학(神學)을 믿지는 아니하였다. 그는 자기의 이성(理性)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사랑론과 화평론도 그가 스스로 생각해 내고 스스로 믿는 것이지 누구의 설이나 어느 신안에 의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보통 사람이 가진 이서의 힘으로 알아 들을 만하고 생각해 낼 만한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고원(高遠)한 이상, 신비한 경계(境界) 같은 것을 그는 부인도 아 니 하였으나 민족이나 인류를 인도할 사상은 누구나 알 만한 상식화란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심오(深奧)한 교리(敎理)나 천리(哲理)를 그리 즐겨하지 아니 하였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이론을 가장 존중하였다.

가령 추상적으로 인(仁)이라든지, 박애(博愛)라든지 하는 것보다 구체적으로 모 갑(某甲)이 모을(某乙)에게 사랑하는 행위를 하였다 하는 곳에 더욱 높은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천만언(千萬言)의 인(仁)을 말하는 이보다 무거운 짐진 늙은이의 짐을 대신 져 주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다. 인류·동포를 부르짖는 이보다 길에 굶주린 한사람에게 한 끼 밥을 주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다. 도 산으로 보면 실천 없는 이론은 공론에 불과하였다.

도산은 어떤 지식 계급 청년이 도도히 이론을 늘어놓을 때에 가만히 듣는다.

그는 남의 말을 중간에 끊는 일이 없고 또 산란한 마음으로 듣지 아니한다. 한 말 한 마디를 빼어 놓지 아니하고 다 귀를 기울여서 듣는다. 그 지식인의 이론 이 다 끝나기를 기다려서 도산은 그 이론의 요점 요점을 들어서 그에게 질문을 해본다. 「왜?」하고 그 주장의 이유, 그 이유의 이유를 연거푸 물으면 대개는 말이 막혀 버리고 만다. 그것은 그 지식이 근거 박약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얻어 들은 지식이요. 제게서 울어나거나 제게 배어 들어서 살이 되고 피가 된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리해서 도산의 四,五[사,오]차의 질문에 설자는 천창 만공(千滄萬孔)이 되어서 제 지식 체계의 파탄(破綻)을 자각하지 아니치 못하게 된다. 이때에 설ㅈ는 자기의 지식이라고 오늘까지 믿어 왔던 것이 어떻게 맹랑한 것과, 자기보다 무식하리라고 생각하였던 도산의 식견이 어떻게 고매(高邁) 함을 실감(實感)하게 된다.

실천할 수 없는 이론은 먹을 수 없는 양식과 같다. 우리는 五백년 이래로 수신 제가 치국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의 말만 하고 그 일은 하지 아니하였다. 소에게 무엇을 먹어야 가장 좋다는 토론에 세월을 보내다가 소를 굶겨 죽였다. 풀 한 짐을 베어다가 먹이는 것이 백 개의 이론보다 나았을 것이다. 오늘날 독립 운동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다.

도산의 철학은 생(行)의 철학이요, 도산의 인식론(認識論)은 실증적(實證的)이었다. 이론은 어찌 갔든지 소가 맛있게 먹고 살이 찌는 풀이면 좋은 풀이었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필요한 이론은 도산에 의하면 결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 다. 배우면 알게 되니 교육이 필요하였다. 만들면 생기니 산업이 필요하였다.

사랑하면 단결이 되고 단결이 되면 즉겁기도 하고 힘도 나니 사랑 공부는 필요 하였다 거짓말을 아니하면 . 서로 믿으니 참으로 좋은 것이었다. 가나한 것보다는 넉넉한 것이 좋으니 근검저축(勤儉貯蓄)은 좋은 일이었다. 나라이 없이는 민족이 평안히 살 수 없으니 나라는 세워야 하겠고, 나라이 서고 힘있게 되려면 백성들이 참되고 지혜롭고 서로 싸우지 아니하고 잘 뭉치고 부지런하여서 무엇을 많이 만들어야 하겠으니 교육과 산업과 수양이 필요하였다. 이 모양으로 우 리의 진로(進路)에 대한 이론은 자명(自明)하였다.

오직 남은 것은 「너도 행하고 나도 행하고 우리가 다 행하자」하는 것뿐이었다.

게계주의(世界主義)에 대하여서는 도산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민족을 서로 사랑하는 민족, 거짓이, 없는 민족, 화평한 민족을 만드는 것이 곡 세계 인류를 그렇게 만드는 길이라고.

이것은 다만 이론뿐이 아니라 도산은 흥사단 운동으로 우리나라를 이상국(理想國)을 만들어서 인류에게 모법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이유로는, 우리 국토가 아름답고 형승(形勝)한 지위에 있는 것, 민족의 혈통과 문화가 단일한 것, 품질이 우수한 것 등을 들었다. 게다가 동서(東西)·고금(古今)의 문화를 집대성(集大成)하는 지리적·역사적 처지에 있으니 우리 민족이 이 사명에 자각하여 노력만 계속하면 반드시 이상국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시기에 조만(早晩)이 있을지언정 우리 민족 중에 그것을 위하여서 노력하는 단결이 있는 동안 반드시 실현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도산은 믿었다. 도산의 이상국이란 사랑의 나라, 자유와 평등의 나라 여니와 여기 관하여서 다른 장(章)에 말하려 한다.

아무려나 도산의 독립은 남의 힘으로 구차(苟且)하게 얻는 독립이 아니요, 민족의 실력으로 되는 참된 독립이며 도산이 생각하는 새 나라는 구지레하고 성명 없는 미미하고 무의미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 대하여 위대한 발언권(發言權)과 감화력(感化力)을 가진 지도적인 나라였다. 국권을 상실한 우리 동포가 흔히 마음이 위축(萎縮)하여서 불성 모양(不成模樣)인 아무러한 지위와 성가(聲價)의 나라라도 독립한 나라만 있었으면 하는 비굴한 생각을 도산은 매양 경계하였다.

그는 이러한 말로 우리의 새 나라의 모양을 청년들에게 그려 보였다.

『세계 어느 큰 도시에나 태극기를 날리는 우리 민족의 대상관(大상관)이 있을 것이요. 태극기는 그 상품의 우수함과 절대의 신용의 표상(表象)이 될 것이요.

태평양 대서양의 각 항만(港灣)에는 태극기를 날리는 객선(客船)과 화물선이 정박할 것이요, 그 배들은 가장 안전하고 쾌락한 여행을 구하는 각 나라 사람이 다투어서 탈 것이요, 지금은 내가 한인이라고 하기를 부끄러워하는 형편이어니와 그날에 코리안이란 말은 덕(德)과 지혜와 명예를 표상하는 말이 될 것이요, 우리 민족은 이러한 민족이 되기 위하여서 반만년의 역사를 끌어 온 것이니, 이 위대한 영광을 만드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수양과 노력이요.』

도산은 이러한 나라 이하의 아무 나라도 바라지 아니 하였다. 그리하고 이러한 나라는 흥사단으로 말미암아서 반드시 실현될 것으로 믿었다. 왜 그런고 하면 참되고 일 잘하고 서로 사랑하는 二[이]천만이 이루는 나라가 그 이하의 나라일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도산은 이러한 희망과 신념을 가지고 일생을 그 일에 바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도산이 보기에는 이름없는 한 개 흥사단우도 모두 새 나라 건설의 역사적 대가명을 가진 위인(偉人)들이었다. 그들은 평생에 이 고귀한 이상을 품고 살고, 간 데마다 이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이 전해 가고 퍼져 가는 동안에는 수천 수만의 동지가 생길 것이요, 또 그중에는 수없는 민족적 영웅이 출생하겠기 때문이었다.

第五章[제오장] 理想村 計劃[이상촌 계획][편집]

행(行)을 존중하고 범(範)의 위력을 믿는 도산은 흥사단의 정신을 구현한 이상촌을 건설하려 하였다. 도산이 임시 정부의 직임을 사퇴하고 남경(南京)에 와서 동명 학원(東明學院)을 창설하고 다시 교육에 종사하는 몸이 된 것이 一九二五 [일구이오]년 경부터였다.

남경의 동맹 학원은 구미(歐美)와 중국의 각 대학에 유학하려 하는 뜻을 품고 본국으로부터 나오는 청년들을 위하여 어학(語學)·덕육(德育) 기타의 준비 교육을 하기 위한 기관이었으나, 도산은 이에 대하여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기미 만세 운동 이후로 수백 수천의 청년 남녀가 속속 본국을 탈출하여서 상해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대개 불타는 애국심을 품고 혹은 구미에, 혹은 중국내 의 저명한 대학에 학(學)을 구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좋은 사함이 되면 크게 민족력을 보탬이 될 것이요, 그와 반대로 그들이 불행하게 되면 외국에 있는 동 안에도 국내에 들어 가서도 민족력을 감손(減損)하는 큰 해가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청년을 바른 사상으로 지도하고 또 학업의 편의를 돕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도산은 이들 청년의 벗이 되기를 원한 것이었다.

도산은 남경에 약간의 토지를 매수(買收)하였다. 이것은 남경으로서 재외 한족(在外韓族)의 중심지를 만들의사의 표현이었다.

도산은 남경과 소주(蘇州)의 중간에 있는 진강(鎭江)에 주목하였다. 진강은 양자강 연안이 도시로서 기후와 풍토가 다 좋았다. 도산은 진강 부근에 모범 농촌 도시(模範農村都市)를 건설하기를 원했다.

도산은 독립이 회복되기까지는 재외 동포가 한국하는 것이 심히 어렵다고 보았 다 만주의 수백만 러시아령의 . 수십만, 북아메리카와 하와이의 수만 동포가 본국의 문화와 연락되지 아니한 채 여러 행 또는 여로 세대를 간다 하면, 그들은 아주 그들이 거주하는 날의 문화에 화하여서 한족의 정신을 잃어 버리거나 그렇 지 아니하면 야만 몽매(野蠻蒙昧)한 인종으로 퇴화하여 버릴 우려가 있다고 생 각하였다. 북아메리카나 하와이와 같이 우리 모국보다 높은 문명을 가진 나라에 가서 사는 동포는 국혼(國婚)을 상실하기가 쉽고, 만주나 러시아령과 같이 우리 모국 문화보다 낮은 지역에서 빈궁한 생활을 하는 동포는 모국의 문화를 잃어 버릴 뿐만 아니라 토착민보다도 정도가 떨어져서 무산 무지(無産無知)한 유랑민(流浪民)을 이를 근심이 있다고 도산은 보았다. 도산의 이 판단은 정당한 판단이었다.

재외 동포로 하여금 이 두 가지 불행에 빠지지 아니하게 하는 길은 도산이 보기에는 해외에 한 곳, 재외 한족의 정신적 문화적 중심지를 건설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참으로 중심지가 되자 하면 경제적으로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도산은 생각하였다.

「물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도산이 매양 말하였거니와 특수한 성현·지 사층은 몰라도 일반 대중은 제 재물 있는 곳에 항상 마음이 끌리는 것이니, 가령 무슨 회를 조직할 경우에도 거기 거액의 입회금을 내고, 정기적으로 의무금도 내어서 그 회에 제 재물이 들었을 때에 비로소 그 단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그 단체가 망하여서는 안된다 하는 생각이 간절하여져서 이것이 망하 지 아니하고 잘 되기를 힘쓸 생각이 나는 것이라고 도산은 흥사단 입단 문답에서도입단금과 예연금(例涓金)조에서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심리는 재외 한족의 중심 도시 건설에도 당연히 고려될 것이었다. 가령 진 강에 한족의 중심 도시를 건설한다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다수 동포의 출차로 토지를 사고, 가옥을 건축하고, 생산 기관, 금융 기관까지도 만들어야만 비로소 도시가 재외 동포의 정신적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산은 진강이나 남경이나 또는 화북(華北)이나 중국인의 문화와 산업이 상당히 발달된 도시의 근방에 기지를 택하여서, 중국인 도시의 모든 시설과 편의를 이용하면서, 한편으로 한족 자신의 독특한 문화와 산업 기관도 세워서 중국인에게 대하여서는 호조호익(互助互益)의 친선한 관계를 수립하자 하는 것이었다.

북아메리카에 수십 년 교거(僑居)하여 상당한 재산을 만들고 자녀를 가진 동포들 중에는 도산의 이 계획에 공명(共鳴)하여 출자한 이도 있었다. 그들은 고국에는 못 돌아 가더라도 동포가 수만 명 집단적으로 사회를 이뤄서 우리 문화 속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것이었다. 비록 미국이 좋다 하나 우세한 백인 총중에 자자손손(白人叢中) 영주(永住)한다 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첫째로 인종적 압박감이 일상 생활에도 시시 각각으로 필절하고, 또 자녀들은 미국인도 아 니요 한국인도 아닌 사람이 되고 말아서 잘 되어야 유대인, 못되면 잡시나 흑인과 같지 될 걱정이 있었다. 조국이 독립을 회복하여서 금의(錦衣)로 환양(還鄕) 한다 하면 거기서 더한 좋은 일은 없거니와 이것은 일조 일석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다른 민족의 압박감을 받지도 아니하고, 또 제 민족의 전통도 잃지 아 니하면서 생업(生業)의 보장을 가지고 우리끼리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한 구석이 그리운 것도 재외 동포 전체의 욕망이었고 국내에 있는 이도 일본 사람의 등 쌀없는 곳에 마음 편하게 살 길을 구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에 응할 수 있는 국토는 중국을 두려고는 다시 없었다. 중국은 우리와는 수천 년 이래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온 나라요, 중국인과 우리와는 한 번 보아서 문득 서로 친할 수 있는 공감성(共感性)이 있었다. 더구나 우리 경술국치(庚戌國恥) 후에 중국 인사는 가장 큰 우리의 동정자였다. 그래서 중국 내에 우리의 겨류지를 건설하면 피차에 압박감도 차멸감도 상극도 가장 적게 서로 조화 할 수가 있었다.

이것이 도산이 재외 한족 중심지를 중국 내에 구한 까닭이었다.

도산이 이 이상향 기지(理想鄕基地)로 주목한 것은 남경·진강 이외에 북쪽에는 호로도(胡虜島), 금주 경내(金州 境內)요, 만주에는 경박호(鏡迫湖) 연안, 동경성(東京城) 부근 등지였다. 도산이 이 여러 지방을 몸소 답사(踏査)하여서 그 산천·풍토를 보았다. 지미(地味) 풍경·음료수까지 상세히 조사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적 사정에 인하여서 도산의 계획은 마침내 수포로 돌아 가 고 말았다. 만주 사변으로 만주와 장성 부근은 문제도 아니 되고, 일본군의 상해 상륙으로 진강 기타 장강(長江) 연안도 안전 지대가 안되고 말았다.

이 이상향 건설 계획의 좌절은 도산에 있어서는 가장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그가 거의 십년을 두고 생각하고 또 각지로 편력(遍歷)하면서 흙과 물을 맛보면 서 그리던 꿈이 모두 수포로 그리던 꿈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후에 그가 본국으로 잡혀 돌아와서 四[사]년 징역을 치르고 출옥하여서도 이 계획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무론 국내에서의 계획은 해의의 계속하였다. 그러나 무론 국내에서의 계획은 해의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국내의 모범촌 계획은 대강 이러한 것이었다.

산과 강이 있고 지미(地味)가 비옥한 지점을 택하여서 二[이]백호 정도의 집단 부락을 세우는 것이다. 그 부락은 재래의 한국 농촌과는 달라서 도로망(道路網)과 하수도 시설을 현대 도시의 규모로 하고, 가옥 건축 양식도 위생과 경제와 미관(美觀)의 여러 각도로 함리화하되, 반드시 서양식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한국 건축의 특징과 미관을 살리자 하는 것이었다. 도산이 평안 남도 강서군 대 보면 송태에 스스로 설계하고 감독하여 건축하고 그가 최후로 체포될 때까지 거주하던 한 채의 집은 이상촌 주택의 한 모형이었다. 이것은 四,五[사,오]인의 식구를 담을 수 있는 조그마한 자작 농가 정도의 집이었다. 모든 방과 부엌과 광이 한 평면(平面)에 연하였지만 안채. 사랑채, 대문, 안마당, 마루, 퇴, 소슬 마루 등 한국 가옥의 모든 전통을 살린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재목과 기와와 터를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들인 것이었다. 도산의 마음 속에는 몇 가지 종류의 개량 가옥 설계가 있었다. 그가 계획하는 이상촌은 결코 한 가지만의 가옥 건축 양식으로 율(律)하려 하는 것은 무론 아니었다. 도산은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제가 좋아하는 대로 독특한 설계의 주택을 지을 자유가 있을 뿐더러 그렇게 천태 만양(千態萬樣)의 가옥의 집단이야말로 부락 또는 도시의 미(美)를 발할 수 있다 하였다. 다만 아니 지키지 못할 것은 부락 전체의 설계에 배치됭지 아니할 것, 위생적일 것, 사치하지 아니할 것, 미(美) 에 고려할 것 등의 여러 원칙이었다.

도산이 서계한 이상촌에는 공회당(公會堂)·여관·학교·욕장(浴場)·운동장·우편국·금융과 협동 조합의 업무를 하는 기관이 설치될 것이었다. 공회당에는 집회실오락실·담화실·도서실과 부락 사무소가 있을 것이었다. 집단 생활과 사교 생활의 훈련은 도산이 생각하는 민족 훈련(民族訓練)에서는 심히 중요한 과목이었다. 종래로 우리 민족은「제 집구석」의 생활만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것 이 가족적 이기주의(利己主義)의 원인이 되어서 집단 생활, 사회 생활을 방해 한다. 이웃이 한 곳에 모여서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먹고 마시고 즐기고 같이 의논하고 할 처소와 기회를 만드는 것이 민족의 사회적인 습관과 예외와 욕망을 발달시키는 길이라고 도산은 주장하였다. 그중에도 집단적인 회식(會食)과 오락을 도산은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공회당과 그 안에 하는 모든 설비는 부락을 한 가족으로 화하는 힘을 가진 것이어서 서로서로 이곳을 아름답게 하고 재미있게 하기를 힘씀으로 애향 애린(愛鄕愛隣)의 공동 생활의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니 이것이 곧 애국 정신의 기초라고 도산은 보는 것이었다.

여관이라 함은 부락 공동의 객실(客室)을 의미함이었다. 부락을 방문하는 공동 한 손님을 편하게 숙식케 함이 부락의 예의요 자랑일 뿐더러, 개인 또는 한 집을 찾아 온 손님도 제 집에서 불편하게 재울 것이 아니라 이 여관에서 접대하자 하는 것이었다. 이리되면 집집에 객실이나 손님을 위한 이부자리를 설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요, 묵는 손님도 남의 가정에서 폐를 끼치는 것보다는 여관에 자는 것 이 자유롭고 유쾌할 것이다.

이 부락에는 금융 기관과 협동 조합이 있을 것이다. 금융 기관에서는 저금과 융자의 일을 할 것이니 곧 은행이요, 협동 조합은 생산품의 공동 판매와 일상 생활용품이요, 협동조합은 생산품의 공동 판매와 일상 생활용품의 공동 구매·배급 기관이다.

운동장에는 아동 유희장을 부설할 것이요, 부락 전원인 남녀 노소가 다 체육의 이(利)와 낙을 받도록 할 것이다. 체포와 각종 기계 운동도 하려니와 무거운 것 들기, 재주 넘기, 날파람, 태껸, 주먹 싸움(太極拳[태극권], 검술(太極劒[태극 검]), 그네, 널뛰기, 달음박질 등 무릇 체위(體位)를 향상하고, 활발하고 모험적인 정신을 기르며, 몸을 보호하는 것과 군인이 되기에 필요한 재주도 배울 것이다. 이라함으로 스웨덴이나 덴마크와 같이 민족의 체격을 개량하고, 평균 수명을 연장하며, 활동 능률을 증진할 것이니 고산은 항상 덕·체·지 삼육이라 하여 지육(智育)보다도 덕육(德育)과 체육(體育)을 앞세웠다. 덕이 없는 자의 지(知)는 악(惡)의 힘이 되고, 건강 없는 자의 지(知)는 불평 밖에 되지 못한다 하는 것이었다.

과로(過勞)하는 농민이나 노동자에게 무슨 체육의 필요가 있느냐 하는 흔히 있 는 질문에 대하여 도산은 우리 농민과 노동자는 결코 좋은 체격의 소유자가 아 니니 과학적인 체육은 그들의 체력을 증진하고 한편으로 치우치는 과로의 해를 제거한다 하며 덴마아크의 농부가 일하다가 피곤할 때에 체조를 한다 하는 예를 들었다.

이 부락에 세울 학교는 일반 교육의 학교 이외에 직업 학교를 세우자는 것이 도산이 특별히 역점(力點)을 두어서 계획하는 것이었다.

직업학교는 농(農)·잠(蠶)·임(林)·원예(園藝)·목축(牧畜)·공(工) 등의 여러 과목을 두되, 공(工)에는 농가 건축, 농촌, 토목, 요업(窯業), 식료품 가공(食料品加工), 농구 제조(農具製造)의 목·철공(鐵工), 농촌업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학과를 교수하되 실습을 주로 하여 농촌에서는 전(田)답(畓)·채소원(菜蔬圓).

과수원·상원(桑園)·조림(造林)을 실비로 행하고, 토목에서는 도로·치산(治山)·치수(治水)·배수(排水)·관개(灌漑)를 직접 경영하고 고업 부분에 있어서 도 그리하여서 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소자본(小資本)과 약간의 연장으로 독립한 한 직업을 가져서 한 지방의 한 부문을 담당할 수 있게 하지 하는 것인데, 이 학생들은 재학 중에 모범촌 생활을 견습하고 또 실제로 그 생활의 습관을 길러서 자기의 고양에 돌아가면 그것을 모범촌에 의거하여 개조하고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으로 말하면 이러한 모범촌과 직업 학교를 각도(各道)에 설립하여서 적어도 전국 각 면(各面)에 한 사람씩을 선발하여 이 교육을 받게 할 것이다.

이에 모범촌이란 것은 온 나라의 농촌이 다 이만큼만 되면 문명 국민으로 세계 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할 정도의 것이면 족할 것이다. 첫째로는 법치적(法治 的)으로 국법(國法)을 준수하고 민주적 자치의 능력이 있고, 도덕적으로 허위에서 해탈하고 이기심(利己心)을 절복(折伏)하여서 공공 생활의 신뢰할 각원(各 員)이 되고, 경제적으로는 부채 없이 문화 생활을 독립·자영(自營)할 재산을 가지고 자녀는 모두 교육을 받고 성인(成人)은 모두 독서를 하는 그러한 부락을 이름이다.

한국에 이러한 부락 일개소만이 실현된다 하면 그것은 새오운 기원(紀元 그 ) 울 획(劃)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으로 한 번 실물을 보면 모두 그와 같이 하겠다 하는 자극을 받아서 이 운동이 저절로 전국에 보편(普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산의 목표였다.

그러면 그제일촌(第一村)을 어떻게 건설하나. 이것은 동지 조직으로 할 길 밖에 없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서 출자하고 또 그 부락의 주민이 되기를 원하는 동지를 찾아서 할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 살기 좋은 부락이 실현하기만 하면 많은 사람이 이 부락을 찾아서 이주(移住)하여 올 것이요, 또 다른 지방에도 이것을 모방하는 부락이 생길 것이다. 그리하여서 우리 나라의 모든 부락이 이만한 정도에 달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 민족의 나라가 훌륭한 나라가 될 것이다. 농촌 이 이렇게 개량이 아니 되고 민족의 덕과 체와 경제력이 이 모양으로 향상되지 아니하고 국가가 힘있는 국가가 될수는 없는 것이었다 도산의 모범촌의 동기와 목적이 여기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看過)할 수 없는 것은 이모범촌 계획에 포함된 우리의 경제력 발전의 이론이었다. 도산은 한국의 경제력을 높이려면, 1. 각 사람이 교육받고 훈련받은 직업 기능(職業技能)을 가질 것.

2. 그리하여서 농(農)·어( 漁)·임(林)·공(工) 기타든 생산 방법을 과학화하고 합리화할 것.

3. 부락 사업의 계획과 경영과 노력(勞力)을 집단화할 것. 이것을 도산은 분공 합작(分工合作)이라 하였다.

4. 부락의 금융과 공동 매매의 협동 기관을 세울 것.

5. 각 사람의 덕(德) 즉 신용을 향상하고 부락의 일상 생활을 도덕적·위생적·심미적(審美的)으로 개선하여서 생활이 안전하고 유쾌하게 할 것.

등을 들었다.

그중 제일항의 각 사람이 교육받고 훈련받은 직업 기능을 가진다 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이요 중심적인 것이다. 종래 우리 나라에서는 농부나 어부나 공장(工이나 다 아무 학적 교육이 匠) 없고 오직 견습과 눈설미만으로 하여왔다. 이러한 원시적 생산 방법으로는 도저히 국제 경쟁장에서 민족으 경제력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도산이 설계한 직업 학교의 직업 교육은 고등 전문 교육을 받는 자를 제외하고는 민족 전원이 다 받아야 할 것이었다. 도산의 이상은 만민 개업(萬民皆業)으로 우리 민족의 각 사람은 모두 생산에 일기 일능(一技一能)을 가지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으로 인생의 당위(當爲) 어니와 특히 땅은 좁고 인구는 많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빈궁을 면하는 데 절대로 필요한 방책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생산 기능(生産技能)을 멸시하는 폐풍 악습이 있었다. 농부에 대하여서만은 경의(敬意)를 표하는 전통이 약간 남아 있지마는, 모든 장색(匠色) 즉 공업기술자는 이를 천한 직업이라 하여서 사회적으로 차별하고 멸시하였다.

이러고는 나라가 부하기를 바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도산은 우리 민족의 이 크게 그릇되고 해독 많은 사상을 깨뜨리고, 업에는 차별이 없다는 전통 습상(傳統 習尙)을 확립하는 것이 민족의 부침(浮沈)에 유관(攸關)하다고 보았다. 도산 자신은 배를 젓는 것과 가옥 청소를 자기의 장기(長技)라 하여 자기는 이 재주로 언제나 생활을 능력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무리 학자나 정치가나 예술가라도 체력 노동으로 또 생산 기술로 자기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 인격 수양의 중요한 일과(一課)라고 하였다. 그가 말년 그 사업에 대한 연구를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도산의 인생관으로 보면 인생의 제일 의무(第一義務)는 우선 제 힘을 제 의식을 버는 일이었다. 보모나 친우에게도 의뢰 말고 독력으로 제 생계를 영위하는 것이었다. 자활(自活)의 의사로 기능도 없이 사회에 기생충 생활을 하는 이는 도산의 인생관으로는 침 뱉을 비인격자(非人格者)였다.

우리나라에는 전연 밥벌이 능력이 없는 「선비」의 계급이 있다. 이들을 지사(志士)·호걸로 자처하고 때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한탄하는 무리어니와 그러한 속에서 협잡·아첨 등 모든 죄악이 발생하는 것이다. 순(舜)은 역산(歷山)에서 밭을 갈았고, 강태공(姜太公)은 위수(渭水)에서 고기를 낚았다. 진평(陳平)은 고기를 팔았다. 제 힘으로 제밥을 벌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왜 그리 제 밥벌이 못하는 이가 많은가. 열이 벌어서 열이 먹으면 가난할 리가 없건마는 하나 가 일하고 열이 놀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장 가난한 것이었다. 이 누습(陋習)을 깨뜨려라. 민족 각 사람이 농부로나 장색(匠色)으로나 제 밥을 벌 수 있는 기술 과 정신을 가져라 하는 것이 도산의 생각이었다. 그가 직업 학교를 소중히 여기는 것에는 이러한 깊은 뜻이 있었다.

도산은 민족의 각 사람이 저마다 제 밥벌이를 하는 것이 곧 민족 경제력의 원천이요 본채라고. (本體) 보았다. 정치는 국민 각 사람으로 하여금 「저마다 제 밥벌이를 가능케, 유쾌하게 하는 기술」이라고 도산은 보았다. 이 논리(論理)로 볼 때에 이조의 정치는 악정(惡政)이었다. 제 밥벌이하는 기술자를 천히 여기고 일부 놀고 먹는 계급을 우대한 것이 무엇보다도 큰 악정이었다.

도산은 해외에 있어서나 국내에서나 이상촌을 건설하여서 이러한 생활의 본을 보이자는 것이었다.

도산은 대동강 연안, 황해도 해안지방 등 여러 곳을 실지로 답사하여서 후보지를 물색하였고 또 지금을 낼 동지도 수십 명을 구하였으나 一九三七[일구삼칠]년 수양 동우회 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체포되매 이 모든 계획은 도산 일생에 관한 한 수포에 돌아 가고 말았다. 만일 도산이 오늘에 살아있다면 자유로 전국 각지를 순회하여서 모범촌 건설과 농촌 개혁에 분주하였으리라고 믿는다.

第六章[제육장] 相愛의 世界[상애의 세계][편집]

어떤 중국 사람 관상사(觀相師)가 도산의 사진으로 보고 비평하여 가로되, 그 눈이 정적(情的)이어서 능히 적(敵)을 증오(憎惡)하고 살육할 수 있는 영웅이 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도산의 이마가 넓은 것은 그의 이지력(異志力)을 보이 고, 코가 높고 곧고 힘있는 것은 의지력(意志力)을 보였고, 그의 맑으나 부드러 운 눈은 인자(仁慈)를 보였다. 또 그의 손도 심히 부드러웠다.

관상사의 말과 같이 그는 애정이 농후한 사람이었다. 그와 접한 이는 그의 온화한 애정을 느꼈다. 여성 중에도 그를 사모한 이가 적지 아니하였다. 스승으로 큰 어른으로 사모하던 넋이 열렬한 연애로 화하였던 여성도 있었다. 그가 남경에 있을 때에 어떤 여자가 밤에 그의 침실에 들어간 일이 있었다. 그때에도산은 천연한 어성으로 「아무개」하고 그 여자의 이름을 옆방에까지 들릴만한 큰 소리로 불러서,

『무엇을 찾소? 책상 위에 초화 성냥이 있으니 불을 켜고 보오.』

하고 쳔연하게 말하였다.

이말, 이 음성에 그 여자는 정열에서 깨어서 도산의 명(命)대로 초에 불을 댕기고 잠깐 섰다가 나왔다고, 그 여자도 말하고 옆방에서 자던 동지도 말하였다.

『그 음성을 들으니 아버지 같은 마음이 생겨서 부끄럽고 죄송하였다.』

고 그 여자가 술회(述懷)하였다.

도산은 남의 감정을 존중하였다. 남의 마음을 상하지 아니하도록 늘 조심하였다.

『그 정열을 조국에 바쳐라.』

하고 얼마후에 도산은 그 여자에게 넌지시 말하였다. 그 여자는,

『나는 조국을 애인으로 하고 조국을 남편으로 하겠습니다.』

하고 도산의 앞에서 맹세하고 곧 남경을 떠나 구라파로 유학을 갔다.

도산은 애정을 존중하였다. 연애도 존중하였다. 상해에서 일찍 어떤 청년 남자가 청년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한 일이 있었다. 그 여자는 분개하여 서 그 편지를 가지고 도산에게 와서 편지한 남자를 탠핵하였다.

『무엇이 분한가?』

하고 도산은 엄숙하게 그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독립운동 중에 또 동지간에 이런 편지를 하는 것은 저를 모욕하는 거이 아닙니까?』

하고 그 여자는 떨었다.

『미혼한 남자가 미혼한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대는 그의 사랑에 대하여 감사할지언정 분개할 이유는 없다. 하물며 그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이 알 것을 꺼리며 한 비밀의 편지를 자에게 보이 는 것은 실례다. 만일 그대가 그렇게 시집가기를 원치 아니하거든 사랑해 주시는 뜻은 고마우나 당신의 뜻에 응할 수 없습니다 하고 유감하게 여기는 뜻을 표시라는 것이 옳고 이후에 어디서 그를 만나더라고 친절하게 환영하고 존경하는 뜻을 표하는 것이 옳으니라.』

이렇게 충고하고 도산은 그 남자의 편지를 읽기를 거절하였다. 이것은 어떤 이가 목격한 사실이어니와 이 편지 사건 처리 중에도산의 인격과 그의 인생에 대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도산의 평새에 심중(心中)에 이성(異性)에 대한 열정이 일어난 일이 있는지 없 는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행위로 나타난 일은 없다. 남경의 모 여성 사건으로 보아서 그의 여성에 대한 태도를 알려니와, 그는 생활의 다른 방면에서도 그러 하였던 모양으로 남녀 대하여서도 청교도적(淸敎徒的)이었다. 옆에서 보기에 그 는 이성에 대하여서는 혈족관(血族觀)을 하던 것 같다. 늙은 여성은 어머니로, 젊은 여성은 누이로, 어린 여성은 딸로 보라 하는 것이 불교의 혈족관이어니와 도산은 불교를 좋아하지 아니하면서도 아마 우합적(偶合的)으로 이 혈족관을 취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다만 그 부인에 대한 의리라는 관념에서만 나온 거 시 아니요, 인류 동포관(人類同胞觀)에서 나온 도산의 윤리요, 자기 인격의 권 이에 대한 존경에서였다.

도산은 그렇다고 이성과의 교제를 짐짓 피하지도 아니하였다. 오면 받고 만나면 친절하게 유쾌하게 접대하였으며 여성에 대한 특별한 경의(敬意)와 겸양(謙讓)을 보였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아름다운 이서을 보는 『 것은 기쁜 일이다. 만일 그 얼굴이 보고 싶거든 정면으로 당당하게 바라 보라. 곁눈으로 엿보지 말아라. 그리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라.』

도산은 이 원칙대로 실행한 모양이었다. 도산의 명철한 양심은 마음의 밀실(密 室)에서라도 아내 아닌 이서을 범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안심하고 그에게 친근하였고, 한 번 친근하였으면 평생을 두고 그를 사모하였던 것이다. 비록 신(神)과 같이 존경하던 사람이라도 한 번 육적(肉的)으로 맺히면 부부 이외에는 동물적 결함으로 저락되고 말아서 환멸이 되는 것이다. 도산은 동성간(同性間)의 우정에 대하여서는 아낌없이 사랑을 부었다.

추정 이 갑(秋汀李甲)이 전신 불수로 북만주의 망명 여사(亡命旅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에도산은 미국에서 내외가 노역(勞役)하여서 저축한 돈 천불(千 弗)을 추정에게 보내었다.

『도산은 운하 공사 인부(運河工事人夫)가 되어서 벌고 도산 부인은 삯빨래를 하여서 번 돈이래.』

하고 추정은 감격한 눈물을 떨우면서 어떤이에게 말하였다. 이 돈이 이 모양으로 벌어진 돈이라는 것은 그 돈을 가져다가 전한 미국서 온 사람의 말이라고 한다.

상행에서 동오 안태국(東吾安泰國)이 장질부사로 입원하였을 때에도산은 동 오의 병상 옆에 돗자리를 깔고 동오가 운명할 때까지 간호하였다. 오예물(汚穢物) 처리도 도산이 손수 한 것은 물론이었다.

동오의 영구(靈柩)는 도산의 숙소로 옮아 와서 경야(經夜)하고 성대한 장의를 하였다. 도산이 애국 지사로의 동오, 신뢰할 우인으로의 동오, 지성과 온정의 사람으로의 동오를 말할 때에 영결 식장의 수백 동지는 모두 느껴 울었다. 동지요, 벗인 동오에 대한 도산의 지극한 우정이 더욱 우리를 울렸던 것이었다.

역시 상해에서 동지 윤 현진(尹顯振)의 병중에도 도산은 자질(子姪)에 못하지 아니한 애정으로 그를 간호하였고 도산 자신의 생활비뿐 아니라 소지품까지도 잡히거나 팔거나 하여서 윤현진의 치료에 유감이 없기를 힘썼다 한다.

그의 우정은 자기를 잊는 우정이었다. 자기를 희생하는 우정이었다. 보수를 바라는 세간적인 우정이 아니었다. 그가 북경의 하등 여사(旅舍)에 유할 때에도 재류 동포가 와서 돈 걱정을 하면 시계도 내어 주고, 복도 내어 주었다. 그는 마치 우정을 위하여서는 목숨까지도 내어 주려는 것 같았다. 내일 걱정을 아니하려는 사람 같았다. 도산은 자기가 남에게 대하여서 아낌 없는 우정을 가지느니 만큼 남에게서 받은 우정에 대하여서 깊이 명심하고 보답할 길을 생각하였다.

대전 감옥에서 출옥하여 그는 어떤 일본 순사를 찾았다. 그 순사는 도산이 경기도 경찰부에 유치되어 있을 때에 간수 구실을 하던 사람이다. 이 순사는 제가 차례가 되는 날이면 도산을 밤에 불러 내어 산보도 시키고, 별구경도 시켰고, 또 도산에게 냉면을 대접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도산이 四[사]년이나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 순사는 벌써 경찰부를 떠났다. 二,三[이,삼]일이나 두루 찾아서 그의 주소를 알아가지고는 도산은 과자 한 상자를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갔다.

이 순사는 도산이 운명(殞命)하기 바로 四,五[사,오]시간 전에도 대학 병원의 병실을 찾아와서 담화를 하였고 도산의 영구(靈柩) 앞에 와서는 울고 분향(焚香)하였다고 한다.

도산이 대전 입옥 중에 면회한 모씨에게 대하여 도산은 서대문 경찰서 모순사 부장에게 인천(仁川)서 경성으로 합송되던 날 점심 한 그릇을 얻어 먹었으니 그 값을 갚고 그 사의(謝意)를 표하여 달라고 부탁하므로 모씨는 실소(失笑)를 금지 못하였다.

도산은 모씨가 웃는 것이 의외인 듯이,

『그 사람은 내게 호의를 보였는데, 내가 그것을 몰라서 쓰겠소?』

하고 정색하였다. 모씨는 정색하고 그리하기로 약속하였다.

도산의 우정에는 차별이 없었다. 큰 사람에게나 어린 사람에게나 우정은 우정 이요, 호의는 호의였다. 거기 귀천 빈부의 차별이 없었고, 또 개인의 우정이나 호의에 대하여서 민족의 차별도 없었다.

도산의 상해에서 일본 관헌의 손에 체포된 것이 이상하게도 우정 때문의 희생이었다.

四[사]월 二[이]십 九[구]일 윤 봉길 의사(尹奉吉義士)의 의거일이 바로 도산의 어떤 친지의 아들인가 딸의 생일이어서 이날에 생일 선물을 주마고 도산이 그아이에게 약속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경계 엄중한 이날인 줄 알면서도 어린 사람과의 언약을 어길 수 없다 하여 선물을 가지고 그 집에 갔던 것이다 도산은 이집에서 체포된 것이었다.

도산은 이것이 언약을 지키다가 된 일이라고 하여서 조금도 후회하지 아니하였다.

도산의 이 우정을 고대로 배운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劉相奎)였다. 유상규는 상해에서도산을 위하여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 그는 환국하여 경성의학 전문학교 강사로 외과(外科)에 있는 동안 그는 사퇴(仕退) 후의 모든 시간을 남을 돕기에 바쳤다. 의술(醫術)로는 돈 아니 받는 왕진(往診)에 골몰하였고 무엇이나 친구의 일이면 분주하였다. 그는 一 일 개년에 겨유 이 십일 [ ] 二[ ] 휴가를 어떤 병든 친구의 병 간호에 바쳐 버렸다.

그는 의학 박사의 학위를 얻고 큰 병원을 손에 넣어 올 가을이면 개업한다던 해 七[칠]월에 단독(丹毒)환자 치료중에 감염하여 아깝게도 별세하였다. 그때는 도 산이 대전에서 출옥 중이라 몸소 장의 전반(葬儀全般)을 주장하였거니와 경성에서 처음이라고 할 만큼 회장자(會葬者)가 많았다. 그들은 재물이나 세력의 힘에 끌린 회중(會衆)이 아니요, 모두 고인(故人)을 사랑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동지와 친우들이었다. 도산의 비탄(悲嘆)으로 초췌한 용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 인의 은사(恩師)인 대택 교수(大澤敎授)의 조사 낭독도 떨리는 음성이었다. 이 장의가 이렇게 성대한 것을 일본 관헌이 의심하여서 이것도 동우회 사건의 한 죄목이 되어 있었다.

도산은 「화기(和氣) 있고 온기(溫氣)있는 민족」을 그리워하였다.

『왜 우리 사회는 이렇게 차오? 훈훈한 기운이 없소?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소.』

도산은 우리 민족 각 사람이 상호간에 질시·증오가 많고 상애(相愛)·상경(相 敬)하는 화기가 부족함을 맹양한탄하였다. 도산은 영어의 "Smile"이란 말을 즐겨하였다.

도산은 송태산장 입구에 문을 세우고「벙그레」또는 「빙그레」라고 간판을 써 붙일 것을 말하고 있었다. 송태 동구를 들어 설 때에는 「벙그레 웃어라」하는 뜻이었다. 전국 요처 요처(要處要處)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벙그레」,「빙그레」라고 좋은 모양과 좋은 글씨로 써 붙이고 또는 조각(彫刻)으로나 회화(繪 畫)로도 벙그레 웃는 모양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전국에 미소 운동(微笑運動)을 일으키는 것도 좋겠다고 말하였다.

「갓난이의 방그레」,「늙은이 벙그레」,「젊은이네의 빙그레」모두 얼마나 아름다운 행복의 표정인가. 갓난이의 방그레는 갓난이의 청정심(淸淨心)의 나타남 인 모양으로, 사람이란 근심도 없고 설음도 없는, 가책(苛責)혼탁(混濁) 없는 양심에서만화기 있는 미소가 나오는 것이다. 쓴웃음, 빈정대는 웃음, 건방진 웃음, 어이없이 웃는 웃음, 아양떠는 짓는 웃음은 다 부정한 물이 든 웃음이다.

순백(純白)의 미소, 이것이 도산이 요구하는 미소니, 우리 민족 삼천만이 다 미 소를 입 언저리 눈시울에 띠게 되면 나라는 태평하고 창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 사람은 「화기임문(和氣臨門」이라는 문구를 붉은 종이에 써 붙인다. 인도의 복신(福神)의 상모(相貌)는 미소다.

『웃는 집에 울음이 못 온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한 번 웃음에 백년 액(厄)이 스러진다.』

『한 세상 웃고 지내자.』

우리 민족은 빙그레 웃는 민족이라는 별명을 얻도록 하자고 도산은 항상 말하였다.

도산의 가장 큰 낙(樂)은 동지와 상대하여 밥을 먹고차를 마시는 것이었다. 도산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 할 때에는 결코 어려운 일이나 식사로 중대한 것 이니. 식사시에는 평화롭고 유쾌한 정신만으로 할 것이라고 보았고 그렇게 실천하였다. 식사중에 만일 어떤 사람이 식사에 합당치 아니한 말을 하면 도산은 낯에서 웃음을 거두고 침묵함으로써 못마땅하다는 뜻을 암시하였고, 아무리 수하 사람이라고 곧 말로 면박하는 일은 없었고, 또 아무리 서투른 사람에게라고 검 용 침묵(歛容沈黙)의 항의는 반드시 하였다. 저편이 잘못하는 것을 면박하지 아 니하는 동시에 거기 영합(迎合)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는 적당한 기회를 기다려서 새로운 화제를 제공하여 무겁던 기분을 가볍게 전환하되 짐짓 하는 자취가 없고 가장 자연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도 도산의 염원(念願)은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고 아울러 다만 한 가지 잘못이라도 저편에 고통을 줌이 없이 교정하려는 것이었다.

식후에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담화할 때에는 도산은 얼굴 가득 웃음을 담 고 천하사(天下事)를 다 잊어버린 듯하게 모든 긴장을 풀어 버려서 평소에 그를 외경하던 젊은 사람도 마음 놓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농담까지도 할 수 있을 이만한 안심을 준다. 도산은 누구가 하는 말이나 골고루 귀를 기울이고 거기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말이 방종하게 흐르는 경우에는 도산은 검용(歛容)의 경고를 반드시 하였다. 규구(規矩)를 넘게 하지 아니하려는 것이다.

도산은 담소(談笑)의 가치를 중하게 보았다. 오락은 인생의 양식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흥사단과 같은 수양 단체의 대회(大會)의 절차에도 강론회·운동회와 아울러 희락회를 정하였다. 각 사람은 남을 즐겁게 할 오락거리 한두 가지 재주를 닦아 둘 것이라고 도산은 말하였다. 그의 중국 사람 연설 흉내는 진실로 핍진(逼眞)하여 포복절도(抱腹絶倒)할 만하거니와 이것은 집회의 경우에 남을 웃기고 즐겁게 하는 일에 일원으로 공헌을 하려고 혼자 연구·연습한 것이었다.

단체 생활에는 지(知)를 모으고 덕을 모으고 재(財)를 모으고 일을 분담하는 모양으로 웃음과 기쁨도 분담하여 도와서 전체가 다 함께 크게 웃고 즐거워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산은 이러한 우스개를 가볍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일종의 예술로 알아서 그것을 연습하거나 실연하는 태도는 덕을 수련하고 실천하는 것과 같은 성의가 용기로써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도산은 「정의 돈수」라는 것을 인생 수련, 그중에도 단체 생활 수련의 중요 항목으로 치거니와 피차간의「정의」가 「돈수」되는 데는 담소가 중요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 동지라 하더라도 피차에 애정이 없고는 정말 동지가 못된다는 것이다. 떠나면 보고 싶고 만나면 반갑고 그가 이 세상에 있거니 하면 대견한 그러한 애정으로 서로 뭉쳐야만 비로소 평생의 동지로 뭉칠 수도 있고 힘을 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산이 구락부의 필요를 강조하고 음식 연락(飮食宴樂)의 의미를 역설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규약과 서약으로 형식적 단결을 지을 수 있으나 그것을 참으로 단단하게 굳히는 것은 정의를 깊게 함이라고 그는 반복하였다.

도산은 구라파 대전 중에 미국 사람들이 윌슨 대통령에 대한 태도를 예로 들었다. 윌슨 대통령이 시가를 통과하면 군중은 반가운 친구를 접하는 듯이 환호하였고, 어떤 부인은 창으로 머리를 내어 밀고 손수건을 두르면서,

“My boy, my dear boy."(내 아들. 내 귀엽고 귀여운 아들) 이라고 눈물을 머금고 소리치는 것을 목격하였노라고 말하였다. 민주당·공화당으로 갈려서 대통령으로 선거된 뒤에는 그는 모든 미국 사람의 대통령의 사진 이 걸려 있고 그 앞을 지날 때에는 누구나 탈모로 경의를 표하더란 말과, 가정에 국기와 아울러 대통령의 사진을 결고 아이들도 「굳 모오닝」하고 산 사람에게 하는 모양으로 인사하여 존경과 신뢰와 친애의 정을 표하는 것이 무한히 부러웠다고 하며,

『민주주의의 나라, 공화국 백성도 이렇지 않소?』

하고 우리 동포가 상호간이나 지도자에 대한 애정이 박한 것을 슬퍼하였다.

스승께 대한 제자의 애정, 목사에 대한 교인의 애정, 동장(洞長)에 대한 동미의 애정, 학자나 예술가나 기타 민족 중에 빼어난 사람에게 대한 공중의 애정, 그것이 얼마나 되나 하고 저마다 반성해 보자고 도산은 말하였다. 학생들이 학교를 제 집과 같이 사랑하여서 그 뜰에 꽃 한 포기라도 갖다 심으려 하고, 교장 이나 선생을 사랑하여 맛있는 과일 하나라도 대접하고 싶은 생각이 날 때가 우 리 민족이 창성할 때라 하는 것이 도산의 신념이었다.

도산이 상해에 흥사단소를 정하였을 때에 그는 넉넉지 못한 자기의 여비 중에서 커어튼·화분 등을 사고 또 편안한 의자를 사들여서 단소를 아름답게 꾸몄다. 커어튼이나 화분이나 몸소 다니며 골라서 샀다. 두고 두고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사들여서 날이 갈수록 단소의 아름다움과 유쾌함이 증가하였다.

새로 입단한 단우들도 도산을 배워서 혹은 화분, 혹 차구(茶具)이 모양으로 가져 오는 이가 있었다. 도산의 말없는 모범이 효과를 나타낸 것이었다.

단을 사랑하는 사람은 단소를 사랑할 것이요, 단을 위하여서 일하는 사람을 사랑할 것이요. 단을 위하여 일하는 이를 사랑한다 하면 그에게 점실한 때라도 대접할 생각이 날 것이다. 지도자를 사랑하고 동지를 사랑하고 일군을 사랑하고 그 단체의 집과 즙물을 (汁物) 사랑하게 되면 그는 훌륭한 단체 생활을 수업하는 자다. 도산은 이러한 정신이 일조 일석에 생기는 것이 아니요 장시일의 모방과 애호와 실천으로 습성이 됨으로만 얻어지는 민중심리를 잘 알았다. 그는 입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 하고 훈회(訓誨)다운 말을 하는 일이 없고 오직 묵묵히 몸으로 본을 보여서 각자의 마음속에 싹이 트기를 기다렸다. 도산이 보기에는 우정이나 애양심이나 애단심이나 애국심이나가 다 한 애정의 발로였다 학교를 잘 사랑할 줄 아는 학생은 반드시 나라를 잘 사랑할 줄 아는 국민이 된다고 믿었다.

애국자의 애정은 국토와 민족의 전체를 포용한다. 그에게는 국토의 일초일목(日草一木)과 한 덩어리 돌, 한줌 흙이 다 내 집의 것이요, 국민의 남녀 노유가가 내 식구다. 그러므로 그는 어느 산의 한 귀퉁이 사태난 것을 볼때에 재살이 뜯긴 듯이 아프고, 어느 동포 한 사람이 잘못함을 볼 때에 제가 잘못한 듯이 슬프다. 그가 아침에 눈을 떠 처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나라요, 대인접물(待人接物), 모사작업(謀事 作業)에 구경(究竟)으로 고려하는 것이 국리민복(國利民福)이다. 그는 국토의 일편 일편이 모두 애착의 대상이요 수천만 지우 선악(智愚善惡)이 모두 동혈 동육(同血同肉)이요동감동고(同甘同苦)다.

도산이 동우회 산건에 잡혀 장기 우삼 검사(長綺祐三檢事)의 심문을 받을 때에,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민족운동이요, 잠을 자는 것도 민족 운동이다. 나더러 민족 운동을 말라 하는 것은 죽으라 하는 것과 같다. 죽어도 혼이 있으면 나는 여전히 민족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하여 민족 운동을 중지하면 어떤가 하는 권유를 일축하였다고, 장기 검사가 만 나는 사람마다 말하였다.

그의 민족 운동은 민족에 대한 연애요 국토에 대한 연애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개인적 우정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결코 맹목적인 열정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장처를 말할 때에는 제 자랑과 같이 기뻐하였고 단처를 말할 때에는 제 살을 깎는 듯이 슬퍼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처를 숨겨서 민중에게 영합하려 아니하였다. 개인에게 아첨하는 것이 개인을 해하는 것인 이상으로 민중에게 아첨하는 것은 더 무서운 해독을 주는 것이니 진실로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면 차라리 그들의 단처를 척결(剔抉)하여 분노의 돌팔매를 맞을 것이다.

도산은 열렬한 애국자여니와 장고이스트가 되기에는 너무도 이성적이요 예지적 (叡智的)이었고 도산은 우리 민족의 본질이 우수함을 믿으나,. 여러 점에 결함이 많고 또 뒤떨어진 민족임을 속질히 인정하였다. 도산은 우리 민족이 가고면려(刻苦勉勵)하면 장래에 세계 일류의 민족 국가를 가질 수 있다는 신념은 확고 하나 현재의 상태로서는 세계의 가장 빈약하고 덕으로나 지로나 내어 놓을 것 없는 천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도를 잘 못하고 방법을 잘못하면 이 이상 더 천하여질 수도 있고 아주 멸망하여 버릴 수가 있다는 것도 저퍼하였다.

이렇게 민족의 운명을 정시하는 데서도산의 애국심은 더욱 열도를 가하는 것이었다.

그가 대전 출옥 후에 혹은 지방 순회를 하고, 혹은 모범촌 용지를 탐사(探査)하는 양을 보고 어떤 이름 없는 여성이 도산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 선생님은 세상에 나오시지 마시고 가만히 산중에 숨어 계셔서 감자나 파 잡수시고 깨끗이 일생을 마치어 주시옵소서. 선생님의 명성이 더럽혀질까 근심하나이다.』

하고 그의 은둔(隱遁)을 권하였다. 이 여성의 간절한 애정에 대하여 도산은 깊이 감격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은둔하는 것이 내 일신으로 보면 가장 편안한 일이요. 내 쇠약한 건강 상태로 보아서도 그러하지마는 내 심신에 아직 활동할 기력이 남아 있고, 우리 민족의 현상이 우려할 형편에 있는 이때에 제 일신의 편안이나 명성을 위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고 술회하였다. 그의 안중에는 신명(身命)도 없고 명성도 없었다. 오직 나라가 있고 민족이 있었다.

그는 인류를 동포로 사랑하는 점에서 기독교적이었다. 또 그는 세계의 평화를 떠나서 일국의 평화가 없다는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 힘쓰는 길은 제 나라를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있다고 하여 서 그의 민족주의와 세계주의를 조화하였을 뿐더러 세계 민족주의지 타민족의 해의 위에 제 미족의 이를 세우자는 민족주의는 인류의 평화, 결국은 자민족의 평화를 상하는 악이라고 단정하였다.

도산의 사상에 의하면, 각 민족으로 하여금 침략과 외력(外力)의 간섭의 우려 가 없는 환경에서 자유로 최선의 국가와 문화를 창조·발달케 하면 형형 색색으 로 이종(異種)의 꽃이 한 폭의 화단에 조화된 미를 구성하는 모양으로 인류의 진정한 조화와 통일을 가져 오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도산의 판단에 의하면 민족 상호간의 간섭과 무력 투쟁은 이유의 여하를 불문하고 반인류적(反人類的) 이었다.

부부간의 복락을 결정하는 것이 사랑인 것같이, 한 단체나 한 민족의 번창을 초래하는 것이 사랑인 것과 같이, 세계의 평화의 원인이요 유일한 원인은 오직 사랑이다. 공자께서 이(仁)을 가르치시고 석가께서 자비를 설하시고 예수께서 사랑을 이르심이 진실로 우연이 아니니 사람의 바른 길은 오직 사랑이요 그 밖에는 없다 현금 세계에 전쟁이 . 있고 투쟁이 있어 평안한 날이 없거니와 이것은 그 목적이 악하다는 것보다는 그것을 달하려는 수단이 악한 것이니, 곧 사랑으로 점진으로 하러 아니하고 증오와 폭력으로 성급히 해결하려 하는 까닭이다.

사랑으로 이편이 나아가면 저편도 사랑으로 응하는 모양으로, 이편이 저편을 증오와 폭력으로 누루면 그때 한동안 누르기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피일시 차일시 (彼一時 此一時)로 눌린 편이 다시 일어나서 누른 편을 증오와 폭력으로 보복하 되 본전에 이자를 가하여서 할 것이다. 이리하여 폭력은 폭력을 낳고 증오는 증오를 불러 인류는 서로 미워하고 서로 갈려서 보복의 연속의 역사를 꾸미니, 그중에서 도탄(塗炭)의 고를 받는 것은 창생이다. 언제 덕을 닦고 하늘다운 문화를 빚어낼 여가가 있으랴. 보라, 지구의 귀중한 물자는 인명을 살해하고 문화를 파괴하기에 낭비되고 있지 아니하는가. 사랑의 사도(使徒)일 청년들은 증오와 살육의 군사가 되지 아니하는가. 유사 이래로 증오와 투쟁이 평화를 가져 온 실례가 없는 모양으로 미래 영겁(永劫)에도 그러할 것이다. 평화 회의가 패한 적에게 사랑으로 임하지 아니하는 동안 그것은 다음 전쟁의 씨를 심는데 불과할 것이라 하고 도산은 벨사이유 조약이 독일 민족의 적개심을 자격하여 한 세대가 지나 가기 전에 반드시 보복의 거(擧)가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방금 제이차 대전의 처리에 임하여 도산의 이 생각을 송전 연합국의 수뇌자에게 들려 주고 싶다.

도산의 애정은 물건에도 미치었다. 그가 풍경을 사랑하고 특히 고국 산천에 대하여 열정적 애착을 가지는 것은 위에도 말하였거니와 그는 자연물과 인공품을 다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 그는 무슨 물건이나 다 국민의 재보(財寶)요 인류의 재보니 이것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하고 모든 일용품을 애석하였다. 그는 베를린에 체재하는 동안 독일인이 사람도 아끼고 물건도 아끼는 것을 보고 감동되었다는 말을 하였다.

『내가 밭을 갈지도 않고 베를 짜지도 않고 먹고 입는 것이 모두 동포의 노고로 된 것이니 감사하고 큰 빚을 지는 마음으로 감사히 쓸 것이라.』

고 그가 상해에 있을 때에도 노 말하였다.

더구나 무슨 물건이 어떤 친구의 기념일 때에 도산은 그것을 극히 애중하였다.

상해에서 잡혀 와서 경기도 경찰부로부터 경성 지방 법원 검시국으로 송국되어 입감하던 날 도산은 면회하러 간 어떤 동지에게 금시계 하나를 내어주면서,

『이것은 추정(秋汀)이 애용하던 시계인데 뉴욕에서 작별할 때에 내게 준 것이요. 내 사랑하던 친구의 유일한 기념품이요. 그대가 맡아 두었다가 내가 만일 다시 살아 나오거든 내게 도로 주고 그렇지 않거든 추정과 나의 기념으로 그대 가 가지시오.』

하고 추연하였다 그는 (揪然). 해륙 몇 만리 동서로 유랑할 때에 친구의 기념품을 일시도 몸에서 떠내지 아니한 곳에 그의 우정과 물건에 대한 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도산은 애정에 차별이 있어도 좋음을 용허하였다. 부자·부부·형제·붕우·동 지·동포·인류·중생·자연, 이 모양으로 대상을 다라서 애정의 질적 차이도 있는 것이요, 농담(濃淡)의 정도로 차이도 있을 것이 인정의 자연으로 보았다.

어떤 사람이 누구를 누구보다 특별히 사랑한 하여 그것을 허물할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도산의 동지애에 대한 태도였다. 도산에 있어서는 우리 민족의 생명선은 선량한 동지의 단결이었다. 우리 민족을 도덕적으로 지식적으로 향상시켜서 최고의 지경에 달케 하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모범적인 안락 국가가 되게 하려면 모든 사욕과 이욕을 떠난 수양 단결의 구원한 운동이 아니면 아니 된다고 단안(斷案)하고, 이렇게 단결의 생명은 정당한 주의와 합리한 조직과 풍부한 재정의 삼합(三合)이 필요하거니와 이 삼합의 피가 되고 생명력이 되는 것은 동지의 정의라고 하였다. 정의 없는 단격은 피없는 육체와 같고 회없는 벽돌담과 같다고 하였다. 어떤 단결의 그 주의에 대한 사랑, 조직 체에 대한 사랑, 지도자와 간부에 대한 사랑, 각원 상호의 사랑, 이러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주의와 조직이 있고 아무리 풍부한 물력(物力)이 있다 하더라도 그 단체는 분열, 자멸하고 마는 것이니, 우리 나라에서 훌륭한 주의를 가지고 오래 유지될 단결이 없는 것이 이 때문이라고 도산은 명언하였다.

글면 도산의 돈지애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세속에서 이르는 바 네 것이 없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이러한 의형제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 니라고 도산은 경계한다. 이러한 사랑은 소수인이 단기간에 무슨 공동 이해와 열정을 위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다수인인 장구한 시간에 유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 도산에 의하면 이러한 애정은 정당치 못한 경우가 많을 뿐 더러 일시적 흥분으로 굳은 맹세를 하여서 선악을 가리지 않고 자기를 속박하고 타인을 속박하는 것은 죄적(罪的)이다.

동지애란 이런 의형제적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의 신뢰와 존경의 감정을 기조(基調)로 한 담담한 애정이다. 떠나있어도 서로 믿고 든든하고, 만나면 반갑고 마음놓이는 그런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열정이 아니요 정조(情操)다. 언제나 반갑고 언제나 미덥고, 평생에 같은 이상을 향하여 같은 수양을 한다는 이 대견한 생각― 이것이 동지애다. 애경(哀慶)에 서로 물으나 결코 서로 개개지 아니하고, 세상이 무엇이라고 이간하고 중상하더라도 서로 의심함이 없는 정, 이것이 동지의 사랑이다. 이것은 키케로의 우정론(友情論)에 보이는 로마인의 우정에 해당하고, 동양의 군자지교(君子之交)에 해당하며 신라사(新羅史)에 이른자 세속 오교(世俗五敎)의 교우이신(交友以信)의 정신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동지를 믿어서 속으라.』

도산은 이런 말을 하였다. 믿던 동지가 변심할 경우도 상상된다. 그래서 그가 나와의 동지의 정의를 이용하여 나를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나는 그를 믿고 속으라는 뜻이다. 그는 나를 속이더라도 나는 그와의 동지의 의를 지키자는 것이다.

『세상에 마음놓고 믿는 돈지가 있다는 것처럼 큰 행복이 또 어디 있소?』

하고 만족한 표정을 하는 것이었다. 키케로는 평생에 벗이 하나면 족하다고 하였다. 그 한 벗이란 이렇게 「마음 놓고 믿는 벗」이라는 뜻이다.

같은 동지 중에도 혈족 현제도 있을 것이요, 혹은 동향, 혹은 동취미, 혹은 동 창, 이모양으로 자별하게 서로 정다운 몇몇도 있을 수 있다. 다른 동지들은 그들의 행복을 기뻐할지언정 시기하고 의혹할 것이 아니다. 이점도 도산은 가끔 말하였다. 같은 동지 간에 어찌하여 편애(偏愛)가 있나, 하는 것이 매양 문제가 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도산은 우리나라를 사랑의 나라 미소의 나라로 하고 싶어하였다. 그러하기 위 하여서 자신이 사랑과 미소를 공부하고 또 동지들에게 사랑과 미소 공부를 권면하였다.

『훈훈한 마음, 빙그레 웃는 낯』

이것이 도산이 그리는 새 민족의 모습이었다. 백년이 되거나 천년이 되거나 이 모습을 완성하자는 것이 도산의 민족 운동의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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