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1/호미부 2제
1
[편집]신라 원성왕 때였다.
그때 신라의 풍속으로 팔월 여드렛날부터 보름날까지 <복 회>라 하는 것이 있어서 남녀 노소를 물론하고 흥륜사(興輪 寺)의 전탑을 도는 것이 연중행사로 되어 있었다. 단풍 핀 나무 아래를 무수한 남녀 노소가 복을 빌면서 전탑을 두고 돌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해 팔월 보름날이었다. 낭도 김현(金現)도 이 무리의 한 사람이 되어서 전탑을 돌고 있었다.
밤은 어지간히 깊었다. 중추의 달─ 오월은 머리 위를 넘 어서 벌써 조금 서쪽으로─ 초저녁에는 쏟아져 넘칠 듯이 많던 선남 선녀도, 밤이 깊 음을 따라서 차차 제집으로 돌아갔다. 한 사람, 두 사람, 한 패, 두 패씩, 차차 돌아가서, 마침내는 그 넓은 흥륜사의 경 내도 쓸쓸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를 김현은 혼자서 그냥 요 보를 계속하고 있었다.
다들 돌아간 밤중까지 이렇게 요보를 혼자서 계속한다고 특별히 김현에게는 무슨 기원이 있는 바가 아니었다. 밝은 달빛과 고요한 경내와 젊은 마음과 울창한 수목과 신비스러 운 사위는 그로 하여금 그냥 여기서 저 혼자서라도 돌게 한 것이었다.
「자박 … 자박…」
저 편에서 문득 작은 발소리가 났다.
「나밖에도 아직도 사람이 있었구나.」
이렇게 밤 깊이까지 요보를 계속할 만큼 얼빠진 사람은 자 기 혼자밖에는 없으려니 하고 있던 김현은, 그 발소리에 고 소를 하였다.
─그 사람도 젊고 외로운 혼의 주인인가. 그렇지 않으면 세상 만사를 잊어버린 신선인가. 외로운 가운데도 차차 마 음이 흥그러워 오는 김현은, 그래도 돌아보지는 않고 발장 단을 맞추면서 전탑을 돌고 또 돌았다.
뒤에서 나는 발소리는 그냥 멎지 않고 났다. 자박자박…
몹시 연약한 듯한 그 발소리는 멀리 김현의 뒤를 따라서 전 탑을 두고 돌고 있었다.
반 각이 지났다. 한 각이 지났다. 그러나 그 발소리는 그냥 멎지 않고 났다. 여기서 비로소 김현의 호기심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인데, 밤도 벌써 삼경이 지났는데 돌아가지도 않 고 요보를 하고 있는가─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보자는 호 기심이 젊은 김현의 마음에 무럭무럭 일어났다.
김현은, 전탑을 돌아서 이편 숲 앞까지 와서 발을 멈춰앉 았다. 그리고 대님을 다시 매는 체하고 그 자리에 허리를 굽히고 섰다.
자박 자박… 발소리는 차차 가까와왔다. 김현은 자기의 팔 아래로 발소리 나는 편을 내다보았다.
거기는 십 오야 밝은 달 아래,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정면 으로 내어놓고 한 아리따운 처녀가 입으로는 염불을 외며 역시 요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팔 아래로 몰래 발소리의 주인을 보려던 김현은 자기도 모 르는 틈에 어느덧 일어섰다. 그리고 황홀한 눈으로 그 처녀 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드문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 위에 밝은 달빛이 있 었다. 고요한 밤이었다. 신비스런 전각이 장식되었다. 외로 운 김현의 마음이었었다. 자기도 모르는 틈에 일어선 김현 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눈이 휑하니 서 있었다.
처녀의 그림자는 전각 모퉁이를 돌아섰다. 처녀의 그림자 가 눈 앞에서 사라진 때야 김현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 리고 즉시 처녀의 뒤를 쫓으려 하였다. 그러나 생각을 돌이 킨 김현은 처녀의 간 방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가기로 하였 다. 같은 방향으로 갈진대, 처녀의 뒤를 밟는 데 지나지 못 할 것이다. 처녀 도요보를 하는 선녀(善女)일진대, 처녀의 간 방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가면, 도중 반드시 처녀를 만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김현은 처녀와 반대의 방향으로 떠났다.
도중에서 김현은 처녀를 만났다. 달빛을 측면으로 받은 처 녀의 얼굴─ 그것은 주위의 관계도 있었겠지만 김현에게는 생애에 처음 보는 미녀로 생각되었다.
처녀는 김현을 보고 약간 머리를 숙일 뒤에, 그의 곁으로 빠져서 그냥 요보를 계속하였다. 김현도 그냥 하릴 없이 요 보를 계속치 않을 수가 없었다.
세 번을 만났다. 네 번을 만났다. 처녀는 그냥 모르는 듯이 머리를 숙이고 염불을 외며 지나가고 하였다.
네 번이 다섯 번 되었다. 다섯 번이 여섯 번 되었다. 그러 나 처녀의 태도는 여전하였다.
그러나,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만날 동안, 김현의 마음은 차차 그 처녀에게 기울어졌다. 도는 도수가 늘어갈 수록 그 처녀에게 대한 관심도 늘어갔다.
젊은 김현이었다. 외로운 김현이었다. 김현의 발걸음은 차 차 빨라졌다. 빠르면 빠르니만치 처녀와 만난 시간이 짧아 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섯 번 여섯 번을 만날 동안 마침 내 김현의 마음에는 커다란 음모가 일어났다. 처녀에게 직 접 교섭을 하여 보자 하는 것이었다.
일곱 번째 만났다. 김현은 발을 멈추려하였다. 그러나 멈추 려고 주저할 동안 처녀는 지나가 버렸다. 여덟 번째는 입을 열려 하였다. 그러나 열기 전에 처녀는 지나갔다.
열 번째 만날 때였다. 최후의 커다란 결심으로 김현은 처 녀가 저편 모퉁이에 나타날 때에 벌써 발을 멈추었다. 그러 나 처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처녀가 눈앞 십여 보에 온 때에 김현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겨우 입을 열었다.
미소를 하려 하였으나 얼굴은 오히려 울상이 되었다.
『무슨 기원을 드리십니까?』
처녀는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김현을 바라보았다. 미소가 얼굴에 나타났다. 백옥 같은 이빨이 달빛에 반짝였다.
『수 부 귀를 기원합니다.』
은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한 이런 대답이 처녀의 입에서 나 왔다.
젊은 남녀의 사괴임은 빨랐다.
한 마디의 응답이 있은 뒤에는 뒤이어 두번째의 응답이 생 겼다. 세번째도 나왔다. 이리하여 삽시간에 두 젊은남녀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고요한 밤이었다. 푸르른 달빛 아래였다. 뒤에는 그윽한 솔 밭이 있었다. 앞으로는 죽은 듯한 전탑이 있었다. 한 마디가 두 마디로 되고 두 마디가 세 마디 되는 동안, 이 젊은 두 남녀는 어느덧 서로 마음을 허락하겠다는 묵계까지 생겼다.
둘이 손을 맞잡고 솔밭으로 들어갈 때는 비록 하늘이라도 이 맞잡은 손을 떼이기가 힘들도록, 둘의 손은 굳게 잡혔다.
술잎 사이로 틈틈이 내리비치는 달빛을 우러러보며 한 쌍 남녀는 나란히하여 앉아서 인생을 속삭이고 행복을 속삭이 고 사랑을 속삭였다. 솔밭에서 나올 때는 이 남녀는 벌써 굳게 결합이 되었다.
돌아가기에 임하여 김현은 처녀의 집이라도 알기 겸하여 처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기로 하였다. 처녀는 몇 번을 굳이 사양을 하였다. 그러나 그 사양을 듣지 않고 김현은 처녀를 바래다 주었다.
처녀는 큰길을 벗어났다. 마을도 지나갔다. 그리고, 서산 산길을 더듬어 들어갔다. 김현은 처녀와 같이 그 산길을 더 듬었다.
처녀의 집까지 이르러 보니, 처녀의 집은 뫼 가운데 있는 초라한 오막살이로서, 그 안에는 처녀의 어머니인 듯한 노 파 하나이 있을 뿐이었다.
처녀의 돌아오는 발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던 노파는 처녀 의 뒤에 섰는 김현을 보았다. 그리고 처녀에게 향하여─
『저분은 누구시냐?』
고 물었다.
처녀는 잠시 주저하였다.그러나 그냥 감추지 못할 일인지 라, 김현과 자기와의 사이를 마침내 어머니에게 다 고백하 였다.
노파(어머니)는 한참 뚫어지도록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마땅치 못하다는 듯이 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드 디어 결심을 하였는지, 김현에게 향하여 들어오라고 권하였 다.
『잘 한일이건 못한 일이건,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에 는, 밉든 곱든 내 사위─ 자 들어 오게. 얼마 안 있어서 아 들 셋이 돌아올 터인데, 들키면 재미가 있으니 어서 들어오 게. 그리고 답답하겠지만 잠깐 숨어 있게.』
노파는 김현을 맞아들여서, 방 한편 모퉁이를 치우고 거기 숨을 자리를 만들고, 김현을 숨으라 하였다.
이미 부부의 약속까지 한 아름다운 처녀를 따라서 여기까 지 오기는 왔다. 그러나 그 뒤의 일은 김현에게는 잘 이해 하지 못할 일이었다. 노파의 숨으라는 권고를 들으면서 김 현은 구원을 청하는 듯한 눈을 처녀에게로 향하였다. 그랬 더니 처녀의 눈도 김현에게 어서 숨기를 청하였다.
여기서 무슨 까닭인지 그 영문은 모르지만 김현은 노파의 가리키는 곳에 숨었다. 그리고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김현은 방 모퉁이에 눈이 퀭하니 들어가 숨 어 있었다.
이윽고 무서운 부르짖음이 어디선가 들렸다. 저편 산 위에 서 나는 듯한 그 부르짖음은 마치 산이 무너지는 듯, 사람 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무서운 소리였다. 뿐더러 그 부르짖 음은 점점 더 이 오막살이로 가까이왔다. 가까이 온 뒤에 들으매 그것은 맹호 한 마리도 아니요, 두세 마리의 부르짖 음이었다.
김현은 간이 콩알만하게 되었다. 진정할래야 진정할 수 없 이 몸은 연하여 떨렸다. 맹호의 부르짖음이 오막살이의 앞 에서 멎었다. 그리고 문이 덜컥 얼렸다. 그 열린 문으로 무 엇이 쿵쿵거리며 들어오는 기수가 보였다. 여기서, 거의 정 신을 잃게 된 김현이 겨우 틈으로 내다보매 세사람의 장정 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인제야 돌아왔읍니다. 남산서꼴군 하나를 잡아서 저넉을 하고,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곁누리까지 하고 돌아 왔읍니다. 집에서는 저넉을 어떻게 했읍니까?』
이 말에 가뜩이나 콩알만하게 된 김현의 간은 깨알만하게 가 되었다. 멈출래야 멈출 수 없는 경련이 일어서 떠근떠근 소리까지 내었다.
『야, 이봐라. 너희들은 아무리 타일러도 그냥 산 생명을 해하고 하는구나. 아까도 신령님께서 여기 오셔서 너희들이 생령을 해하는 죄의 벌을 꼭 하시겠다고 그러시더라. 왜 그 만치 일러도 듣지를 않느냐?』
짐승에게도 의리는 있었다. 그리고 짐승도 하늘은 무서워 하였다. 어머니에게 이런 꾸중을 들은 세 아들은 아직껏 뽐 내던 그 호기도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조용하여졌다. 그리 고 숨소리가 점점 높아갔다.
『자, 어떠냐? 그 천벌을 받겠느냐?』
어머니는 이렇게 채근을 하여 보았지만, 세 아들은 거기 대답도 못하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때에 아무 말도 없이 아랫목에 앉아 있던 처녀가 앞으로 다가 앉았다.─
『오빠, 내 말을 들으세요. 나이 어린 계집애가 무슨 소릴 하느냐고 비웃지 마시고 내 말을 들어 보세요. 만약 오빠의 마음에 후회하시는 생각만 있거든, 뒷일은 내가 모두 맡을 게 아무 염려 마세요. 그리고 다만 한 가지의 조건은 오빠 세 분이 어서 이 곳을 떠나서 멀리로 가시란 것이외다. 세 분이 멀리 떠나서 이 뒤에 다시는 생물을 해하지 않겠다는 맹세만 하시면, 제가 그 천벌을 대신 받을게, 자 어떠세 요?』
누이동생의 사리 있는 말을 듣고 있던 세 장정은 제각기 머리를 조으며, 다시는 생물을 해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 다.
『그럼, 자 이 곳을 떠나세요.』
이리하여 세 장정은 도로 세 마리의 맹호로 변하여 꼬리를 저면서 어머니와 누이에게 작별하고 오막살이를 떠났다.
세 오빠를 내어보낸 뒤에, 처녀는 김현의 숨어 있는 앞으 로 와서, 김현을 데려내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끓어 앉았 다. 그때 처녀의 눈에서는 주먹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 제 말을 들으세요. 우연한 연분으로 한 번 모시기는 했지만, 이제야 무엇을 감추겠읍니까. 이미 보신 바와 같이 저는 축생이지 결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악연이랄지, 무엇이랄지, 우연히 한 번 모신 뒤에는 당신의 정애는 또한 도저히 잊을 수가 없읍니다. 아무리 축생이라 할지라도 생 명을 가진 이상에는 또한 정애는 있는 것─ 한 번 든 정애 는 한평생을 모시고 지내고 싶습니다마는, 지금 보신 바와 같이, 저는 제 오빠들의 죄를 대신해서 이 집안에 내리려는 천벌을 받기로 이미 맹세한 몸, 죽기에 임해서 당신께 한 가지의 부탁이 있읍니다. 다른 것이 아니오라, 어차피 저는 사람의 손에 걸려서 죽을 몸─ 사람의 손에 걸린진대 한번 모신 당신의 손에 걸리고 싶습니다. 저는 내일 거리로 뛰어 들어가서 몇 사람을 해할 터인데, 그때에 거리의 사람들은 아무리 힘을 다하고 애를 쓸지라도 도저히 저를 잡지를 못 합니다. 그러면 임금께서는 반드시 중한 녹을 상으로 걸어 서 저를 어떻게든 잡으려 하실 겁니다. 그러면 그때 당신이 저를 따라와서 성북 숲까지 와주세요. 거기서 저는 당신을 기다려서 당신의 칼 아래 죽고 싶습니다. 비록 축생의 말이 오나 몸 한 번이라도 사랑을 부으신제 이 마지막 한 마디는 꼭 들어 주세요.』
아름다운 소녀가 손을 읍하고 꿇어 앉아서 눈을 흘려가며 이 사연을 말하는 동안, 김현은 꿈을 보는 듯한 정신 안 든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처녀의 말이 끝이 난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말 안해도 들었소, 그러나 사람에게는 또한 사람의 도리 라는 것이 있는 것─ 그대가 비록 축생이라 하지만 나는 그 대와 만난 것을 지금도 기뻐하는 중이오. 어찌 한때의 녹봉 을 바라서 아려(娥儷)의 목숨을 팔겠소? 이것은 사람으로는 도저히 못할 노릇─ 그대가 비록 축생이라도 그대에게 향한 내 마음은 변할 길이 없으니 아예 그런 마음은 버리고 일생 을 같이 즐겁게 지냅시다.」
그러나 처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하늘에 매인 목숨, 하 늘께 바치기로 한 목숨, 이미 죽기로 작정된 목숨이니, 모든 정애는 잊어버리고 부탁대로만 해 주셔요. 그리고 죽은 뒤 에 절이나 하나 세워서 제 명복이나 빌어 주세요. 제가 죽 으면 제 일족의 행복이요, 당신께 경사요, 천명 다하는 것이 니, 사면으로 보아도 이 된 점만 있는 일이매 일시의 정애 를 잊으시고 꼭 당신 손으로 저를 죽여 주세요─ 이렇게 빌 고 또 빌었다.
비록 몸이 짐승이라 하나 김현에게 벌써 든 정애는 끊으려 야 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처녀의 결심이 또한 그렇듯 굳으매 그 결심을 돌이킬 재간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눈물 로써 그 밤을 보내고 날이 밝아서 김현은 성안으로 돌아왔 다.
김현은 성안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피곤한 몸을 자기 집 에 편안히 내어던지고, 어제의 일을 생각하매 모든 일이 꿈 과 같았다. 그런 일이 과연 있었더냐는 의심이 자꾸 일어났 다. 그러면서도 어젯밤의 만났던 그 처녀에게 대한 끊을 수 없는 정애는 그의 마음에 일어서는 잦고 일어서는 잦고 하 였다.
그리고 만약 어젯밤의 일이 모두 꿈이 아닐진대 그 끝없이 그리운 처녀를 오늘 제 손으로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괴로운 운명에 한숨지었다.
그 날 낮, 과연 한 마리의 맹호가 성 안에 뛰어 들어왔다.
성안으로 들어온 맹호는 다닥치는 대로 사람을 물었다. 이 상하게도 맹호에게 물린 사람은 한 사람도 목숨까지 잃은 사람은 없었지만, 해를 받은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이 소문이 벼락같이 김현의 가슴을 뜨끔하게 하였다. 실제 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 새삼스러이도 그의 마음에 커다랗 게 울리었다.
성안에서는 궁수며 장정이며가 모두 나섰다. 그리고 호랑 이 몰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호랑이가 가는 곳마다 몇 사 람의 부상자가 생기는 뿐, 활도 몽치도 이 호랑이에게는 아 무 용처도 없었다. 호랑이는 마음대로 성을 횡행하였다.
이 할 수 없는 동물에게 대하여, 왕은 마침내 상을 걸었다.
호랑이를 잡는 자에게는 작(爵) 이급(二級)을 주고 후한 상 까지 준다는 방이 나붙었다.
김현은 드디어 이 현상에 응하였다. 김현이 호랑이를 잡으 려 바야흐로 떠나려 할 때에 왕은 친히 김현을 불러서 특별 히 격려하는 뜻으로 미리 작을 주었다.
김현은 왕께 깊이 사례를 한 뒤에 호랑이 사냥의 길을 떠 났다. 허리에는 단검을 찼다. 등에는 살을 지었다. 그리고 활을 높이 든 뒤에 어전을 물러나왔다.
남 보기에는 용감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김현의 마음 은 여간 아프고 괴롭지 않았다. 지금 이 길은 표면은 호랑 이를 죽이러 떠나는 길이로되, 그 이면을 보자면 또한 하루 한때의 정이나마 깊이 정든 처녀를 자기의 손으로 죽이러 떠나는 길이었다. 비록 눈에는 눈물이 안 보였으나, 마음으 로는 통곡하고 있었다.
복문 안에서 김현은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는 몇 사람을 물어 넘어뜨린 뒤에 한 번 발을 구르고 북문 밖으로 뛰쳐나 갔다. 그 호랑이를 따라서 김현도 북문 밖으로 나갔다. 호랑 이는 한참을 북문밖 큰 길을 달아나다가 번쩍 서서 돌아보 았다. 마치 따라오는 사람의 길을 인도하듯이─ 그리고 김 현이 거의 가까이 온 뒤에 또다시 닫기 시작하였다.
이 자기를 부르는 듯한 호랑이의 태도를 보면서 김현은 칼 로 우벼내는 것 같은 아픈 마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성북 어젯밤 약속하였던 자리까지 가서, 호랑이는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김현의 오는 편으로 향하여 앉았다. 그때는 호랑이 는 변하여 아름다운 처녀로 되었다.
김현은 처녀에게 가까이 갔다.
손을 덥석 잡았다. 김현의 앞에 꿇어 앉은 처녀의 눈에서 는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
『어서 죽여 주세요.』
아아 그러나 김현의 손은 움직이지를 못하였다. 지금 자기 의 앞에 공손히 꿇어 앉은 이 처녀─ 생애에 처음으로 사랑 을 주고 받은 이 처녀─ 자기의 칼을 받으려고 머리를 수그 리고 기다리고 있는 이 처녀─ 목에다가 어찌 칼을 가하랴.
김현은 처녀의 손을 잡은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약속을 어기시지 않고 와 주시니 어찌 반가운지 모르겠 습니다. 오늘 뜻에 없이 몇 사람을 해하기는 했지만, 그 사 람들의 상처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그 뒤에 그 절 나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낫습니다. 그것을 그렇게 전해 주시 고, 자 어서 그 칼을 뽑으세요.』
그러나 김현은 역시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묵묵히 앉아 있는 그의 마음에는 부귀고 녹봉이고 모두 내어던지 고, 이 처녀와 어디론지 달아나서 일생을 즐겁게 보내고 싶 은 생각조차 일어났다.
처녀는 또 채근하였다.
『떠나기 싫은 정이야 전들 당신만 못하겠사오리까만, 하 늘의 배정을 어떻게 하겠읍니까? 남의 눈에 띄면 오히려 재 미없는 일이니, 어서 죽여 주세요.』
그리고 그래도 정신 없이 앉아 있는 김현을 보고 처녀는 마침내 손수 김현의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서 자기의 목을 찌르고 거기 거꾸러졌다. 동시에 아직껏 아름답고 단아하던 처녀의 몸은 홀연히 한 마리의 커다란 맹호로 변하였다.
이 처참하고 애처롭고도 기이한 광경에, 김현은 잠시는 정 신을 수습치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뒤에 겨우 깨달 은 김현은 그 자리에 엎디어서 한참을 통곡하였다. 사랑하 는 아내를 잃은 홀아비로서 한참을 호랑이의 죽음을 조상하 였다. 그리고 가엾고 꿈과 같은 호랑이의 정절과 의를 조상 하였다.
호랑이를 잡은 덕으로 김현은 후히 녹작을 받았다. 그러나 세상 표면으로는 그것은 호랑이를 잡은 공이라 하나, 김현 으로 보자면 또한 사랑하는 아내를 제 손으로 죽인 그 공에 대한 상금에 다름이 없다. 호랑이에게 상한 사람들은 그때 호랑이가 김현에게 남긴 말과 같이 흥륜사의 간장을 발라서 그 상처는 모두 즉시로 나았다.
김현은 호랑이의 유탁을 저버리지 않고 그 뒤 서천의 맑은 시냇가에 절을 하나 세웠다. 그 절의 이름을 호월사(虎願寺) 라 하여 호랑이의 명복을 빌고, 또 그의 자신 희생의 귀한 행동을 축북하는 뜻으로 이름있는 중을 그 절의 주지로 청 하여 들이었다.
2
[편집]정원(貞元) 九년의 일이었다.
그 해 겨울 어떤 눈보라 몹시 치는 날이었다.
진부현(眞符縣)의 가도(街道)를 한 행객이 지나가고 있었 다.
『푸─, 푸─』
눈과 코를 뜰 수가 없는 광포한 눈보라의 가운데를 이 행 객은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길을 채이던 이 행객도, 진부현의 동 쪽 십 리쯤까지 가서는 더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바람과 눈보라도 더욱 심해졌거니와, 온 몸이 추위 때문에 마비되 어 인젠 팔다리조차 마음대로 못 움직이게 되었다.
행객은 여기서 사면을 둘러보았다. 요행히 그 곳에서 얼마 머지 않은 곳에 한 자그마한 집이 보였다. 무연한 벌판─ 집만 없으면 하릴 없이 얼어 죽지나 않을까고 근심하던 행 객은 그 집을 발견하고 곧 그리고 찾아갔다. 그리고 불문곡 지하고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자리에 쓰러지 고 말았다.
『길손, 눈보라에 쫓겨서 들어왔읍니다. 잠깐만 쉬어 갑시 다.』
쓰러지면서 겨우 이 한 마디를 할 뿐 혼혼히 잠이 들었다.
그 집안에는 화로에 불이 이럭이럭 피어 있었다. 그 화로 를 두고(옷은 초라하나마) 생김생김이 그다지 상스러워 보이 지 않는 두 늙은 내외와 이팔이나 이구쯤 되어 보이는 딸이 둘러 앉아서 바깥의 눈보라를 모르는 듯이 즐겁게 이야기들 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갑자기 뛰쳐 들어온 손님을 처 음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 때문에 얼어서 그 자리에 거꾸러지자 손을 친절히 간호하여 주었다.
『무서운 추위─ 오죽이나 고단하시랴. 야, 어서 물 좀 데 워라.』
그리고 한 시간 두 시간을 주무르고 쓸어 주고 하여서 겨 우 이 길손을 피어나게 하였다.
이 길손은, 신도정(申屠澄)에 무슨 구실자리를 하나 얻어 가지고, 그 곳으로 부임을 하는 도중, 여기서 눈보라를 만나 서 괴로움을 받다가 우연히 이 집을 발견하고 뛰어 들어온 것이었다.
과도한 추위 때문에 혼혼히 잠이 들었던 신은 한참 간호를 받은 뒤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겨우 드는 눈으로 처다볼 때에, 그의 눈에는 세상에 드문 한 아리따운 처녀의 얼굴이 보였다. 약간 벌어졌던 신의 눈은 드디어 번쩍 띄었 다. 그리고 몸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나려 하였다.
『지나가던 길손, 너무도 폐를 끼쳤습니다.』
그러나 신을 간호하던 두 늙은 내외와 처녀는 신을 못 일 어나게 하였다.
『마음 놓고 그냥 누워 계세요. 몸이 나 녹도록 그냥 편안 히 누워 계세요. 그리고 이 약주나 한 잔 하세요.』
따끈히 데운 술까지 한 잔 신에게 대접하였다. 신은 감사 히 그것을 받아 마셨다. 얼었던 그의 몸은 차차 훈훈히 녹 았다.
날이 저물었다.
눈보라는 더욱 심하여갔다.
잠시 몸을 녹여서 임지로 떠나려던 신은 저녁때가 되도록 떠나지를 못하였다. 도저히 이 눈보라의 길을 갈 수가 없던 것이다.
그 동안, 신은 몰래 슬금슬금 엿보고 하였다. 비록 초라한 옷을 입었을망정 그 옷의 뒤에서 그 옷의 속에서 빛나는 처 녀의 살결은 옥보다도 더 희었다. 부드러운 가운데도 여정 이 넘치는 두 눈알이 있었다. 웃을 때마다 말할 때마다 뺨 에 들어가는 우물이 있었다. 아름다운 음성이 있었다. 더구 나 초라한 추위에 대조되어 처녀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났 다.
밖의 눈보라도 눈보라려니와 안의 이 아름다운 처녀를 볼 때에 신은 더욱 길을 떠나기가 싫었다. 해가 지고 날이 어 둡게 되도록 신은 길을 안 떠나고 그냥 몰래 간간히 처녀를 보면서 있었다.
『주인, 눈보라가 더 심해 갑니다. 미안한 말씀이지만 하룻 밤만 폐를 끼쳐야 할까보이다.』
신이 마침내 이렇게 말할 때에 늙은 내외도 그것을 거절치 않았다.
『글쎄, 이런 날씨에 어떻게 길을 떠나시겠읍니까? 더구나 인젠 어둡기까지 했읍니다. 더러운 것만 탓하지 않으시면 하루가 아니라 열흘이라도 묵어 가십시오.』
이리하여 신은 그 밥을 거기서 묵기로 되었다.
저녁밥을 얻어 먹었다.
밤─ 어둑한 불 아래 앉은 미녀는, 더욱 신의 마음을 황홀 하게 하였다. 때때로 몰래 바라보면 바라볼 수록 신의 마음 은 더욱 산란하여졌다.
드디어 신은 옷깃을 다시 바로하고 늙은 부부에게 공손히 청을 하여 보았다.
『주인 노인, 한 마디 여쭈어볼 일이 있읍니다.』
『네, 무슨 말씀이오니까?』
『저─』
신은 얼굴을 붉혔다.
『─ 낭자를 어디다 허락하신 대가 있읍니까?』
『미천한 애, 아직껏 아무데서도 달라는 이도 없읍니다.』
『그러면 부족하시겠지만, 내게 주실수가 없읍니까? 마음 껏 호화로운 생활은 못시키나마 마음의 부족은 느끼지 않게 할 생각이니…』
늙은 지아비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대답 없이 있었다.
한참 뒤에 늙은 지아비는 머리를 끄덕이어 승낙하는 뜻을 표하였다.
『아무 철도 모르는 계집애를, 손님께서 달라시니 황공하 기가 짝이 없읍니다만, 이것도 하늘이 정한 연분이겠지요.
그럼 손님께 드릴 테니 잘 가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은 제 딸을 향하여─
『자, 이분이 너의 주인이니 잘 섬겨야 한다.』
하고는 벙긋이 웃었다. 처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은 그 밤으로 그 집 사위가 되었다.
이튿날 신은 새 아내를 데리고 임소를 떠났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오냐, 우리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성심을 다해서 지아 비를 섬겨라. 부모는 임시의 주인, 지아비는 영원한 주인이 니, 부모의 생각은 아예 말고 주인을 섬겨라.』
『이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나 들르게 되겠읍니 다.』
『그럼 그때까지 편안히들 있거라.』
아직껏 길러 준 부모의 앞을 떠나는 길이로되 아내는 그다 지 슬퍼하지 않았다. 비록 하룻밤의 정이나마 새로 만난 주 인에게 이 여인의 온 정열은 부어진 것이었다.
『그럼─ 장인 장모, 안녕히 계십시오. 따님을 잃으셔서 적 적하시겠지만 딸은 언제든 남에게 줄 것이니깐…』
『잘 가오.』
이리하여 신은 자기의 말에 새 아내를 실어가지고 임소로 떠났다.
신의 봉록은 매우 박하였다. 그의 봉록은 한 집안을 지탱 해 나아가기에는 너무도 적었다. 남 보기에는 호화로운 구 실의 집안이로되, 그들의 살림의 부엌은 늘 빈약하였다. 그 러나 이런 가난한 살림을 맡아가지고 그의 젊은 아내는 집 안을 잘 꾸려 나갔다. 비록 부족하고 밭은 살림이로되, 젊고 영리한 그의 아내는 부족함을 부족하다 아니하고, 밭은 것 을 밭다 아니하고 꾸려 나갔다. 그리고 부족한 것을 남편에 게 할 수 있는 대로 알리기까지 않으려 하였다.
신은 이 성심을 보았다. 아직 어린 색시로서 제 살림을 제 가 꾸려 나가는 것만도 기특하거늘, 게다가 이 부족한 살림 을 부족히 알지 않고 어떻게든지 잘 꾸려 나가려는 그 성심 에 탄복하였다.
『여보, 고단하지 않소?』
때때로 남편은 미안한 듯이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러면 뜰 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아내는 남편을 돌아보며 생긋 웃는 것이었다.
『아니, 안 곤해요.』
『그래도 일을 너무 하는구먼.』
『요만 일요? 여기 열 곱이나 하면 좀 곤할까, 난 장사예 요. 당신같이 약하지 않아요.』
한 뒤에는 애교의 웃음을 남편의 얼굴에 퍼붓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록 부족하고 밭은 살림이지만, 그들 부처에게는 또한 행복으로 충일된 살림이었다. 만날 웃음과 낙단의 소 리가 동리까지 요란케 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삼년이라는 날짜가 지나갔다. 그 동안, 그들 부처의 사이에는 두 자식이 생겨났다. 자식들은 또한 어머 니를 닮아서 몹시 영리하고 예뻤다.
자식들이 생기면서 그들의 집안은 더욱 웃음이 잦았다. 어 린애의 아양, 억지, 별, 이런 것까지 모두 이 부부에게는 아 름답게 보였다. 이리하여 삼년이 지나서 신의 임기도 끝이 났다.
그 어떤 날의 일이었다.
임소의 삼년 간─ 돌아보건대 모든 일이 꿈과 같았다. 부임하는 길에 모진 눈보라를 만나서 우연히 어떤 오막살이에 몸을 쉬인 것이 연분이 되어 거기서 아내를 얻었다. 그 손쉽게 얻은 아내가, 또한 재색이 겸비한 현녀로서, 자기의 가난하고 구차한 살 림을 맡아가지고 그 가난함과 구차함은 탓하지 않을 뿐더 러, 초라한 살림을 그래도 빛나게 한 그 현명함─ 그리고 그 삼년 동안 지난 낙원과 같은 아름답고도 즐겁던 살림─ 이런 일을 생각하면 지나간 삼년 간이 꿈과 같았다. 임소를 떠나게 된 지금에 앉아서 지나간 해를 돌아보건대, 빈약은 하나마 꿈보다도 더 달고 꿈보다도 더 농후한 살림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그런 일들을 회상하면 감개 무량하였다. 신 은 지필을 끌어 당겼다. 그리고 거기다가 한 귀절의 시를 썼다.
一官 悔福
三年愧孟光
此情何所喩
川上有 鴦
신은 그 시를 써서 다시 한번 읽어본 뒤에 아내를 불러서 가만히 그 종이를 아내에게 내어주었다. 아내는 종이를 받 았다. 그리고 펴 보았다.
그 날 진일을 아내는 그 시를 입 속으로 읊고 하였다. 그 리고 그 때마다 답시를 읊을 듯 읊을 듯 하였다. 그러나 아 내에게는 종내 답시가 나오지 않았다.
밤에 신이 아내에게 향하여 왜 화하지 않느냐고 물으매, 아내는 한참을 있다가야 답하였다.
『자자 보여 드리지요.』
그리고 고는 다시 그 이야기를 피하였다.
드디어 입소를 떨나 날이 이르렀다. 그날에야 아내는 신에 게 향하여,
『전에 제게 주신 시가 있지요? 그 시에 대답한 시를 보여 드릴께 서툴다고 비웃지 마세요.』
하면서 한 귀절의 시를 읊었다.
琴瑟情 重
山林志自深
常優時節戀
辜負百年心
신은 그 시를 들었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서 아내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시를 읊은 뒤에는 휙 돌아앉아 버려 서, 남편과 얼굴 대하기를 피하였다.
신은 몇 번을 속으로 아내의 시를 다시 읊어 보았다. 그러 나 그 뜻을 똑똑히 알 수가 없었다.
아내는 그 시를 읊은 뒤에는 할 수 있는 대로 남편과 대면 할 기회를 피하였다. 그 시의 뜻을 물어보려고 신은 몇 번 을 아내에게 가까이 갔지만, 그 매번을 아내는 짐꾸리는 데 만 바쁜 듯이 슬쩍 남편을 피하고 하였다. 이리하여 신은 그 시의 연유를 똑똑히 묻지를 못하고 임소를 떠나게 되었 다.
짐을 꾸려서 모두 하인에게 고향으로 먼저 돌려보내고, 두 내외는 말에 나누어 탄 뒤에 삼년 동안을 정들었던 임소를 떠났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의 부처는 삼년 전의 아내의 친 정집에 들러 보았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집은 예대로 있었 으나,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먼지가 벌써 두껍게 쌓인 것으로 보아, 벌써부터 빈 것이 분명하였다.
신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바라본 그의 아 내는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그리고 소리 높여서 통곡하였 다.
사랑하는 남편을 맞아서 삼년 간을 자기는 재미있게 꿈과 같이 보냈는데, 그동안의 집의 늙은 양친은 세상을 떠난 것 이었다. 한 번 울기 시작한 아내의 울음은 그칠 바를 몰랐 다.
처음에는 멍하니 서 있던 신도, 아내의 우는 양을 보고, 그 자리에 앉아서 훌쩍 훌쩍 느끼기 시작하였다. 삼년 전 하룻 저녁밖에는 보지를 못했지만, 그때 그렇듯 친절하던 두 노 인이 별세한 것을 생각하매 그의 마음도 언짢았다. 더구나 사랑하는 아내가 정신 없이 우는 것을 보매 그의 눈에서도 또한 눈물이 솟았다.
진일을 울어서 보낸 아내는 저녁때에야 일어났다.
일어난 아내는 맞은편 담벽에 딱 눈을 멈추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높 아갔다.
신도 아내의 심상하지 않은 숨소리에 아내의 바라보는 곳 을 보았다. 거기는 커다란 호피 한 장이 걸려 있을 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는 호피를 바라보고 흥분된 것이었다.
아내의 얼굴은 문뜩, 검게 되었다 다시 붉게 되었다. 아내 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웃음 소리가 났다. 동시에 아내는 후 덕덕 일어섰다. 그리고 벽에 걸린 호피를 내리어서 몸에 뒤 집어썼다.
아직껏 괴상한 소리로 웃고 있던 아내의 몸이, 한 마리의 커다란 맹호로 변하였다. 맹호는 휙 신을 향하여 돌아섰다.
무서운 포함성이 맹호의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자기의 낳은 두 애에게 일별을 더 던진 뒤에 문을 박차고 길로 뛰 쳐나갔다.
혼비백산한 신은 한 순간은 정신을 못 차렸으나 맹호가 밖 으로 뛰어나간 뒤에 정신을 가다듬고 두 아이를 하나는 업 고 하나는 안은 뒤에 호랑이의 뒤를 따라서 길로 뛰어 나섰 다. 그러나 그때는 호랑이의 그림자는 벌써 한 길에 보이지 않았다.
신은 사면을 살펴보았다. 그때 저편 산에서 뫼가 더릉더을 울리는 맹호의 부르짖는 소리가 났다.
신은 그 산으로 향하여 달려 갔다. 비록 몸은 맹호로 변하 였다 하나, 삼년 간 살던 정애는 깊었다. 자기를 배반하고 달아나는 맹호지만 신에게는 그것은 다만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일 뿐이다.
신은 산으로 따라갔다. 그러나 맹호의 발자취는 발견치를 못하였다. 어디서 포함성이 온 산을 울릴 뿐이었다.
신은 두 아이를 이끌고 며칠 동안을 온 산을 편답하였다.
아내를 부르는 신의 소리, 어미를 찾는 아이의 소리는 잉 산 저 산으로 울리었다. 그러나 그때는 맹호는 벌써 먼 다 른 산으로 가 있던 것이었다.
(一九三年 六月 三日˜一五日 <每日申報> 連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