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1/충용 삼형제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驟徒, 沙梁人, 奈麻聚福之子. 史失其姓. 兄弟三人, 長夫果, 仲驟徒, 季逼實」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시대 전후에 부과(夫果) 취도(驟徒) 핍실(逼實) 삼형제의 충용(忠勇) 미담을 이름함에 있어서, 그 삼형제의 근본이며 환경 등에 관해서는 상기(上記)한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이애들아.』

『네…』

『가까이들─ 이 아비를 가운데 두고 둘러 앉어라.』

『……』

세 아들은 아버지의 분부대로, 아버지의 앞에 모였다. 아무 말 없이 몸의 움직임에도 소리도 안 나게 고요히… 고즈너기… 엄숙한 기분 아래서….

세 아들을 앞에 불러 놓고 아버지 나마(奈麻─ 벼슬 이름) 취복(驟福)은 비로소 눈을 조금 떴다. 길게 누운 채로….

『다들 왔으냐? 내가 지금 임종(臨終)이야. 다 장발하고 더우기 남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는 않는 너희들이라 임종에 마음에 걸리는 일도 없고 미흡하거나 근심스런 일도 없이 눈을 감으니 이이상 팔자 어디 있으랴. 나이 육순이니 천록(天祿)도 과인하고 마립간(麻立干─임금) 이하 국인들의 총애 신망 두터우니 인복(人福) 또한 과인하구… 먼저 난 자는 먼저 간다는 하늘의 법칙에 따라서 가는 것이니, 섭섭한 인정이야 어찌 금하랴만 조금도 슬프다든가 원통한 일은 아니니라. 총명하고 슬기로운 너희들에게 무슨 말을 더 남기 랴만 너희들도 이미 잘 알고 준행하는 바, 나라에 충성되고 ─ 부모 다 없으니 효도는 바칠 곳이 없거니와 형제 우애하고─』

눈을 가느다랗게 열고 똑똑한 발음으로 한 마디씩 한 마디씩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의 말과 같이 이미 잘 알고 준행하는 일의 다짐에 지나지 못하는 유언이라 자식들은 고요히 청명할 뿐이었다.

『아아, 피곤하다, 물러들 가거라.』

남길 말을 남긴 뒤에 아버지는 자식들을 내보냈다.

한 각경쯤 뒤에, 맏아들 부과가 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방에 들어와 보니, 아버지는 사지를 곧추 펴고 잠자는 듯이 몸이 식었다.

아버지를 여의었다. 하나 벌써 장발한 자식들이라, 아무 영향하는 바가 없었다.

다만 이제부터는 각각 따로이 살기로 하였다. 각각 자기의 처자며 권솔이 따로이 있는 삼형제라, 아버지의 슬하에서는 함께도 살았거니와 아버지 없고 보니 생활 성격이 각각 다른 삼형제라, 따로따로 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갈리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귀농─ 농사나 지으며 살겠네.』─ 맏형 부과의 의견이었다.

『그러세요. 저는 출가(出家)해서 도나 닦으며 여생을 보내겠읍니다.』

본시부터 불도(佛道)에 귀의해 있던 둘째는 이름도 <도옥(道玉)>이라 고치고, 실제사(實際寺)에서 승려 생활을 시작하였다.

막내 핍실도 두 형과 갈려서 제 권솔과 딴살림을 시작하였다.

때는 신라 태종 무열왕 중엽, 그때 정립(鼎立)해 있던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신라가 약국이었던 때문에 다른 두 나라(더우기 백제)에게 늘 침략을 당하고 그로 말미암아 신라는 두 나라에게 큰 원심을 품고 있던 시절이었다.

두 나라에 꼭 같이 원심은 품었지만 고구려와는 하도 실력이 대상부동하여 어디라 감히 딴 생각 품지 못하고 하다못해 백제에게라도 앙갚음을 하여 보려고 고구려에게 원병을 청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다시 당나라에, 「번국(藩國)이 되어서 당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고 조공(朝貢)하겠노라」는 조건으로 둘째 왕자 김인문(金仁問)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력을 비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취복의 세 아들은 아버지가 세상 떠난 뒤에는 각각 헤어져서 딴살림을 차려 놓은 것이었다.

승이 되려고 법호(法號)를 도옥(道玉)이라 하고 실제사(實際寺)에 거하며 이전 화랑 시절의 낭도(郞徒)들을 문도(門徒)로 승려 생활을 하는 둘째.

이전에 한개 단가(檀家)로서 승려 생활의 윤곽을 엿보고 그 경건하고 소박한 일생활을 볼 때에 몹시 신성해 보이고 엄숙해 보여서 거기 혹하여, 스스로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몸소 자기가 승려가 되고 보니 승려 생활이 건조무미하고 빽빽하고 단조로운 것은 둘째 두고 지금껏 그의 마 음 그의 정신에 박히고 젖은 국가 생활, 국민 생활에 대한 동경과 정열이 불타 오르는 것을 누를 수가 없었다. 무(武)를 닦고 의(義)를 북돋으며 불의와 잔포에 천주를 가하며 약 한 자를 구해 주고 횡포한 자를 억눌러 주는 화랑(花郞)으로서의 호협하고 의기로운 생활에 대한 동경심과 복귀욕이 나날이 더해갔다.

동시에 그의 유년 시기와 소년 시기의 생활 환경이 만들어 준 그의 제二 천성─ 국가 관념, 애국 관념이 그의 마음 한편 구석에서 용솟음쳤다. 내가 적(籍)을 두고 있는 <신라>라는 국가에 대한 관념, 이 국가가 다른 국가보다 약하기 때문에 받는 수모에 대한 반항심, 그가 아버지의 품 아래서 자랄 때에 부어 넣어진 사상이며 또한 화랑으로 수년간 지날 때에 자라고 고정된 이 사상은 승려 생활의 단조롭고 건조무미한 것에 대한 반동잉 듯이, 나날이 더 크게 느껴졌다.

심심하던 신라의 변경을 와서 건드리고 하던 백제가 또 그것을 하였다. 조천성(助川城)을 와서 친 것이었다.

신라의 조야는 또 욱적하였다. 이번 당한 일도 분하거니와, 이제 또 백제기 위해서 흉수가 어떤 방향으로 들지 미지수이기 때문에, 더 두선두선하였다.

그냥 버려두면 끝이 없겠으니 흥망간에 이번은 한번 겨누어 보자고, 꽤 여른도 높았다.

왕도 무론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바 실력 부족을 어찌하랴. 원병을 청한 당나라에서는 보내 줄 듯 보내 줄 듯하면서도 보내 주지 않는다. 이번에도 어떻게 보면 보내 줄 듯하기도 하므로 왕은 그 구원병이 오면 형세하여 백제를 칠 양으로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병이 오기 만 하면 한시라도 합세 거사할 수 있도록 이쪽의 준비는 다 되었다. 오늘이나 오나 내일이나 오나 하다못해 보낸다는 소식이나마 오지 않는가. 왕은 초조히 이를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종내 할 수 없이 또 단념치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분노와 자존심으로 말하면 당장에 주종국이라는 의를 끊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도 또 뒷길을 보아 그럴 수도 없고 속으로 이를 갈며 또다시 청병의 급사를 당 나라로 떠나보냈다. 보낸댔자 효력도 없을 것이로되.

백제의 횡포, 당나라의 무성의, 이런 일들로 신라의 조야가 꽤 두선거릴 때였다.

승려 도옥이 종내 이 무대에 뛰쳐들었다.

「三國史記」가로되,

「王興師出戰, 未決, 於是道玉語其徒曰, 吾聞爲僧者, 上則精術業以復性, 次則起道用以益他, 我形似桑門而己, 無一善可取, 不如從軍殺身以報國, 脫法衣著戎服, 改名曰驟徒, 云云」

승도 못되고 속도 못된이 반 중간의 몸을 바쳐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결의로서 이름도 <취도>라 고치고 진두에 나섰다.

죽기를 결의하고 나선 취도라, 용감하게 싸웠다. 강약이 부동하니 취도가 병부(兵部)에 청해 얻은 삼(三)천 당(幢)으로 사투하여 곱다랗게 전멸되었다.

전멸은 되었다. 전멸은 되었지만, 이 사투는 적군 백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신라에도 이런 용감한 군인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꽤 강렬히 적군의 마음에 부어 넣어 주었다.

이런 의기들이 결정(結晶)되어 그로부터 수 三년 뒤에는 (당 나라와 연합하여) 백제국을 멸하였다.

백제를 멸한 또 八˜九년 뒤에는 고구려까지 멸하였다.

백제는 태종 무열왕 말년(末年 第七年)에 멸하였다.

그러나 七백년 사직이 하루 아침에 뿌리까지 뽑을 수는 없었다. 백제의 임금(의자왕)은 당나라에 잡혀가고 나라는 망하였다 하지만 이곳 저곳에, 백제의 잔족들이 모여서 백제 복벽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백제 의자왕이 당 나라로 잡혀간 지 一一년 뒤였다.

그때는 신라와 당 나라와도 (영토며 전공의 경쟁 등으로) 좀 새가 벌어졌다.

백제의 잔족들이 야마도인이며 당인의 후원으로 웅진(態津) 남방에서 세력을 부식하고 있을 때에 신라에서는 재빨리 이찬(伊湌) 예원(禮元)을 시중(侍中)을 삼아 백제 잔민을 토벌하였다.

이 토벌전이 한창 격렬한 때에 한 당추(幢主)가 싸움 마당에 뛰쳐들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진실로 놀랄 만한 활약을 하여 신라의 승리의 원인을 지었다. 그리고 그 당추는 그만 전사하였다.

너무도 놀랄 만한 활 걍에 그 전사한 시체를 얻어내어 갑옷을 벗기고 보았다. 누구인지 알아보고 왕은 길이 눈물 지어 탄복하였다. 남아 취복의 맏아들이요, 연전에 전사한 취도의 형 부과(夫果)였다.

품에서는 미리 작성하여 간직하였던 유서도 나왔다.

「내 아우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형의로 나라에 대한 보은의 생각, 어찌 아우만 못하리오. 오늘 비로소 기회를 얻어 숙망을 펴노라.」

『그 아비에 그 아들. 그 동생에 그 형. 이런 신닌 있고 어찌 나라가 흥하지 않으리.』

아아, 내 나라 신라 만만세로다. 용안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보였다.

논공(論功)하는데 부과(夫果)로서 이번의 싸움의 제공으로 잡았다

고구려가 멸한 지도 一五˜六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어서 백제를 멸하고 또 고구려를 멸했다. 고구려의 후신으로는 발해국이 생겨났지만 그 영토는 압록강 건너서부터였다.

그러면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백제 두 나라의 영토는 어찌 되었나.

백제의 영토는 신라에서 비교적 가까우니만치 대부분이 신라 관헌의 관할하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지역이 백제 잔족들의 권리 아래 지배 받고 있었다.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의 옛 영토는 그대로 주인 없는 땅으로 남았다. 거리가 멀어서 신라 관헌의 관할권이 미치지 못 할 뿐만 아니라, 그 종족이 하두 표표하여 신라 관헌으로서는 다룰 수가 없었다. 다룰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여 보려는 노력은 늘 끊임없이 하여 왔다.

태종 무열왕 뒤에 그 아드님 문무왕 二O년 간, 그 뒤를 이은 신문왕(神文王)도 제 四년, 고구려의 후인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金馬)에서 모반을 하였다. 나라에서는 재빨리 대문 장군을 잡아 주(誅)하였다.

본시 나라에 심복하지 않던 백성들이라, 왁하니 소란을 일으켜서 관리들을 잡아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나라에서는 이 반란을 진정하고자 토벌군을 보내기로 하였다.

부과와 취도의 막내 아우 핍실은 나라에 벼슬 살어 군직(軍職)으로 있었다.

『여보 부인.』

아침부터 지금(석양녘)까지 입이 붙은 듯이 말 한 마디도 안하고 있던 핍실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

『역장 대문 토벌전에 나도 자원해서 갈까봐요.』

아내는 남편을 우러러보았다. 그 뜻을 알아 보려는 듯이,

『사내 세상에 났다가 죽을 자리를 바로 만나서 죽는 것도 큰 행복이외다. 죽을 자리를 잘못 잡아서 더러운 이름을 남기고 죽는 건 천만대의 치욕, 거저 났다가 거저 죽으면, 치욕은 안 남는다 하지만 보람없는 일생을 보내고 보람없이 죽는 게니 났던 보람이 어디 있겠소? 죽을 자리만 바로 찾아 죽으면 천만에 남는 이름은 선조를 빛나게 하고 후손을 명예롭게 하는 게니, 이게 사내의 취할 길이외다.』

『……』

『당신두 아다시피 내 형님 두 분이 최후를 깨끗이 하셔서 이름이 천추에 남게 되지 않았소? 내 비록 불초하지만 나까지 죽을 자리를 바로 찾으면 우리집 삼형제는 한결같이 최후를 옳게 한 셈이구려. 삼형제 다 그렇다 하면 그 영화는 첫째로 부모님께 올라 갈 게고 아래로는 자손들에게도 미칠 것이오. 알아듣겠소?』

무론 알아는 듣는다. 무인(武人)의 아내로, 더구나 두 시형의 자자한 명예를 듣고 남을 만치 들은 그─니, 그 말의 뜻쯤은 알아듣는다. 다만─ 아직 청춘, 청춘 과수가 스스로 가슴 아팠다.

『그러니까 뒤에 남는 당신도 먼저 간 사람들의 뜻을 저버리지 말고…』

두 형을 본받아서 꼭 죽기까지 용감히 싸우려는 결심을 한 핍실이었다. 그 남편의 심경을 짐작하느니만치 아내의 가슴은 더 쓰리었다. 인정 사삿 정애로는, 가지 말라 하고 싶은 길이나, 기꺼운 낯으로 떠나 보내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라 더 괴로왔다.

이튿날 집을 떠날 때에,

『이것이 생별이요 겸해 사별이외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남편이 이렇게 말할 때에 마땅히 마주 미소하여 보내어야 할 것이요, 또한 그럴 생각으로 있었지만 급기 당하고 보니 미소는커녕 통곡하지 않은 것이 그의 최대 노력이었다.

죽을 결의로 떠난 핍실의 죽었다는 보도가 이른 때는 임금도 암연히 낙루하였다.

매양 진(陣)에 대함에 남을 만류하고 혼자 앞서 나가서 싸우고 표표하고 날쌘 고구려 잔민을 상대 그들을 먼저 기개로 누르고 그 뒤 용기로 눌러서 진살하고 마지막에는 자기도 적창에 맞아 죽었다 하는 보도가 왕께 이른 때에 왕은,

『아아, 중형(仲兄) 취도가 길을 바로잡아 형과 아우를 격동시켜 이런 충용을 낳았구나. 앞장 서서 형과 동생을 인도한 취과, 막내 핍실 누가 더 잘나고 누가 더 못났으랴. 아들 삼형제를 다 이런 훌륭한 자식만 둔 아비 또한 훌륭하구나.』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그 이름은 네 부자가 다 전해졌지만 성(姓)을 잃어버린 것은 아까운 일이다.

왕은 이 형제들의 충용을 표창하기 위하여 사찬(沙湌) 벼슬을 추증(追贈)하였다.

(一九四四年 四月 <朝光> 所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