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2/반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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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 신첨의(辛僉義─辛旽)가 효수(梟首)가 됐답니다.』

저자에 나갔던 시녀가 뛰쳐 들어와서 몸을 벌벌 떨면서 이 보고를 할 때에 반야(般若)는 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감을 덜 컥 내려뜨렸다. 무얼? 그것이 사실이냐? 반문하려던 입은 벌려지지를 않았다. 바느질감을 내려뜨린 뒤에 잠시를 정신 잃은 사람같이 앞만 바라보고 있다가 눈을 푹 내리감고 말 았다.

효수란 웬 말이냐?

때마침 왕과 신돈의 사이가 좀 터져서 아직껏의 왕의 맹신 (盲信)을 잃고 집에 칩거해 있을 동안에, 간사한 유생 이인 (李靭)이 왕께 신돈을 참소를 하였다. 전하께 총애 받는 신 돈은 지금 대역을 도모하옵니다… 고 이러한 일로 신돈은 왕의 친국을 받았다.

여기 만약 대역의 죄악이 탄로되었으면 제아무리 신돈이라 할지라도 당장에 효수가 될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러나 신돈의 죄악이란 하나도 발견되지를 않았다. 겨우 찾아낸 허물이란 것은 승도 출신(僧徒出身)인 신돈이 첩을 많이 두었다는 일쯤이었다.

이리하여 신돈은 수원으로 정배를 갔다. 서울서 겨우 수원 ─ 중한 죄인이면 무론 효수를 당하였을 것이요, 좀 경하이 할지라도 원도 유배(遠島流配)는 될 것다어늘, 서울서 겨우 수원 유배라 하는 것은 신돈 죄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증 명하는 바다.

신돈이 유배되고 뒤따라 신돈의 집이 적몰될 때에 신돈의 집에 우거해 있던 반야는 몸을 피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신 돈이 겨우 수원 유배로 된 점이며, 신돈의 죄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드러난 점이며, 또는 신돈이 양육하던 왕자 무 니도(牟尼奴)가 태후궁에 영입된 점 등으로서 가까운 장래에 신돈이 다시 사(赦)를 받고 환경할 날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 다. 그리고 몸은 피하였다 하나 그냥 서울 근처에 묵면서 신돈의 환경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여기 신돈의 효수란?

『헛 풍문은 아니냐?』

─ 한참 뒤에야 겨우 반야의 입에서 나온 반문.

『아씨, 소인이 이 눈으로…』

보았다 한다. 보았다는 이상에야 더 어찌 의심을 하랴.

『이를 어쩌나?』

혼잣말인 듯 하소연인 듯─ 앞일이 아득하였다.

어쩌나?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지는 마음.

태후궁에 영입된 왕자 무니노, 그것은 반야 자신의 소생이 었다. 탄생 후 육 년 이상을 하루 한때도 멀리 내보내 보지 도 않았던 무니도 아기에게 대한 타오르는 모성애─ 우연한 기회로 몇 번 모신(무니노 아기의 아버님인) 왕께 대한 사모의 정.

위대한 인격자로서의 신돈에게 대한 존경의 염.

그 몇 가지 생각에 섞이어서 또한 자기 일신에 미칠 박해 에 대한 공포의 감.

장래에 대한 절망.

이렇게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지는 어지러운 생각에 반야 는 잠시는 깎아 놓은 사람같이 묵묵히 있었다.

좌우간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이 몸을 어디로든 피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신돈의 집이 적몰될 때에 그 집에서는 종적을 감추었다 하 나, 자기가 그냥 서울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누구든 다 아 는 사실이다. 신돈이 겨우 수원 유배로 그쳤으니 자기도 그 냥 서울 있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도 반야를 탐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신돈 이미 효수된 지금에 있어서는 자기의 안전을 보장해 줄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 다.

북국 천민에 태어난 자기로서 단 얼마 동안이라도 금지옥 엽을 모셔 보았다는 이 사실로 보자면 당장 죽어도 아무 아 까운 일이 없으되, 그래도 자기의 몸에서 탄생한 왕자 무니 노가 그냥 생존해 있고 그 왕자가 태후궁으로 영입까지 된 이상에는, 이대로 버리자면 그래도 아까운 목숨이다. 사랑하 는 왕후 노국공주(魯國公主)승하한 이래로(우연한 일로 반야 한 사람이 왕을 모셔본 밖에는) 여인이라는 것은 절대로 가 까이하지 않는 왕이매 다른 왕자가 탄생할 리가 없다. 반야 자기 몸에서 탄생한 무니노 아기뿐이 왕께는 유일의 혈사가 된 것이다.

왕의 유일의 혈사인 이상에는 장래 이 나라에 군림할 사람 은 또한 이 무니노 아기밖에는 없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한낱 천한 여인에 지나지 못하는 자기라도 그 날은 당연한 왕모일 것이다.─ 이 아드님의 장래를 보지 못하고─ 그 뿐더러 장래 당당한 왕모로서 왕모의 영화를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하고 썩어져 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아까왔다.

「피하자, 피하자」

어디로든 어떻게든 피하자. 피해서 이 모진 목숨이나마 보 전해 두자. 장래 이 몸의 영화도 영화려니와 아드님의 영화 를 보지 않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 그날 밤, 밤도 꽤 깊어서 거리에 인마의 소리도 뚫어진 뒤에, 이 집에서 소리를 감추면서 빠져나온 두 사람의 그림 자가 있었다. 초라한 젊은 선비와 그의 상노인 듯한 역시 젊은 하인─ 반야와 그의 시녀 영주였다.

신전거리 지나서 지전거리 네길 어름─

『와!』

『이 놈들!』

『와!』

첨의(僉義), 첨의. 부르고 부르짖는 수백의 함성과 애호성 ─ 그 거리에는 영도첨의(領都僉義) 신돈의 목이 걸려 있는 것이다.

이 서울을 탈출함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은인 신돈의 참혹 하게 된 면영에나마 하직을 고하려 가던 반야의 주종은 길 이 막혔다.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군중이 겹겹 이 둘러서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서민(庶 民)들이었다.

『참소한 이인 이 놈을 죽여라!』

『와!』

『이러한 첨의를 다시 살려 놓아라!』

『와!』

겹겹이 둘러선 안으로는 기마(騎馬)의 장졸들이 창을 비끼 고 시위를 하고 있고, 도처에서 서민들과 병졸들과의 충돌 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성인 신첨의를 왜 죽였느냐?

참소한 이인을 도륙을 하여라. 신첨의를 다시 살려 놓아라.

서민들의 입으로 부르짖는 이 아우성과 그것을 제지하려는 관헌들의 호령은 마치 전장과 같이 소란하였다.

반야의 주종은 그 무리들의 밖에 서서 마음을 죄며 어떻게 해서든 뚫고 들어가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장 졸들이 둘러서 있는 복판 가운데쯤 촛불을 꽤 밝게 켜 놓았 고 거기는 높직이 <대역 신돈의 머리>라는 커다란 글과 함 께 신돈의 죄를 적은 글이 걸려 있었다. 신돈의 머리는 아 마 그 아래 걸려 있을 것이다.

머리는 안 보이나 머리가 있음직한 반향을 보는 동안 반야 의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솟았다.

자기가 지금 바라보는 그 아래쯤 걸려 있을 한 개의 머리.

그것은 일찌기는 옥천사(玉川寺)의 사비의 몸에서 난 한 개 의 천승이었으나, 한 번 그가 왕의 부름을 받고 이 나라의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은 뒤에는 그의 업적이 얼마나 놀라 왔던가?

위로는 왕이 소생하였다. 왕후 노국공주를 잃었기 때문에 거의 정신 잃은 사람같이 되었던 왕이 이 신돈의 놀라운 기 략 아래 다시 사람다운 감정을 회복하였다.

아래로는 백성들이 기운을 폈다. 누대 이 나라 재상들의 학정 아래 시달리고 시달렸던 고려 백성들은, 이 시민 출신 의 위대한 정치가 아래서 그들의 기운을 다시 회복하였다.

밖으로는 아직껏 대대로 고려 나라를 눌러 오던 대국(大國) 의 세력이 이 평민 재상의 손으로 꺾어져 나갔다.

안으로는 끊임없이 일어나던 내란이 이 위인의 아래서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와!』

『우리 첨의를 살려 놓아라.』

부르짖는 서민들의 함성. 이것은 이 나라의 서민된 자로서 는 당연히 부르짖을 권리를 가졌으며 또한 의무를 가졌을 것이다.

그 면적 넓은 평화로운 얼굴. 온화하고 언제든 웃음을 띠 는 그 표정. 열성과 충성으로 불붙던 눈. 과단성 있는 입.

활달함을 나타내던 이마와 코. 과거 육년간을 신돈의 집에 우거해 있으면서 만날 대하던 그 그런데 면영을 생각하면 지금 저 아래 걸려 있을(몸집 없는) 머리를 상상할 때에 반 야의 마음은 도려 내는 듯하였다.

『아씨─ 서방님.』

『왜야?』

『떡전골로 돌아서 가볼까요?』

반야는 움직이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통곡을 하였다. 추칠월─ 바람이 찬 바가 아니지만 반야의 온몸이 떨렸다.

성(城)이랄 만한 것이 없는 이 서울은 망명자인 반야 주종 에게 있어서는 매우 편리하였다.

지전거리에서 소란한 군중 틈을 부비적거리어 뚫고 들어가 서 멀리서나마 마지막 하직을 고하였다. 몸집 없는 그 머리 에 향하여 속으로 통곡을 하면서 하직을 고하고 인제는 망 명의 길을 서울을 등지고 떠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야말로 발이 내어짚이지를 않았다. 과거 육개년 간을 생활하던 이 서울, 더구나 사랑하는 아드님을 대궐에 남겨두고 떠나는 반야의 발이 가벼울 까닭이 없었다.

아드님 왕자는 지금 비록 태후궁에 영입되기는 하였다 하 나, 장래의 안전을 뉘라서 보장하랴? 왕께 비길 만한 높은 세력을 가졌던 심첨의까지도 간인의 간계(奸計)에 죽은 바 되었거늘, 보호할 자 없는 무니노 아기의 장래를 어떻게 보 장하랴?

자식을 근심하는 어미의 마음─ 한 걸음 한 걸음 발은 서 울을 등지고 떠나지만 마음은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치고 있었다.

『야 영주야.』

『아씨!』

부르는 상전, 응하는 시녀. 어두운 길을 서로 꼭 쓰러안고 소리를 감추어서 통곡하면서 망명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튿날 헌부읭 엄명으로 소위 <신돈의 첩>이라는 누명을 씌워가지고 경중 경외를 물론하고 물샐 틈 없이 포교를 늘 어놓아 반야의 종적을 탐색하였으나, 반야는 하늘로 솟았는 지 땅으로 새었는지 안개와 같이 사라져 버렸다.

… 사 년이라는 날짜는 고요히 흘러갔다.

반야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반야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쉽지 않았다. 반야의 얼굴을 아는 신돈의 집사람밖에 없었는데 신돈의 집 사람들은 모두 미리 잡아 죽였는지라 지금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 가운데 는 반야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있기는 있다. 왕은 몇 번 반야를 가까이하니만치 물 론 알 것이다. 왕자 무니노(강녕댁누이라 부른다.)도 비록 일곱살에 생모와 이별을 하였지만 영특한 소년이니만치 잊 었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헌부에서 반야를 없이하려 하는 것은 왕께는 비밀 히 하는 일이라, 따라서 왕께 반야의 생김생김을 여쭈어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전지전지하는 말에 반야의 얼굴이 옛날 승하한 노국공주와 흡사하다는 말을 듣고 노국공주와 비슷 하게 생긴 여인들을 보이면 모두 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 근본을 알아보지도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

이리하여 사 년 간 <노국공주와 비슷이 생긴 죄>로 잡혀서 죽은 여인의 수효가 벌써 수십 명. 그 가운데 진정한 반야 가 있었는지, 혹은 모두 애매히 죽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 었다.

혹은 그 틈에 끼어서 언제 죽었는지 모르게 죽었는지 모른 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죽었으면 다행이거니와 아직 살아 있다 하면 말썽이다.

지금 대궐에 영입된 강녕대군은 장래 잉 나라에 군림할 분 이다.

현왕의 대가 지나서 강녕대군의 대가 이를 때까지 반야가 살아 있었다가는 적지 않은 말썽이다.

사관(史官)은 모두 동류이니 역사상에 신돈을 대역 무도한 인물로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재상도 모두 동류 이니 장래 신왕께 대하여 신돈의 위대한 인격을 일어바칠 리는 없다.

그러나 장래 신왕의 생모로서 반야가 살아 있으면 반야의 입에서 신돈의 위대한 인격이 감춤 없이 신왕의 귀로 넘어 갈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신왕의 대에 있어서는 자기네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이 반야를 잡아 없이하여 장래의 화근을 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리하여 정부에서는 전력을 다하여 반야라고 짐작되는 여 인은 불문곡직하고 잡아올려서 문초도 않고 죽이고 하였다.

애매히 죽은 수십 명의 여인─ 그 가운데 과연 진정한 반 야도 이 독수에 걸려서 없어져 버렸는가?

이러는 동안에 왕도 드디어 승하하였다.

간사한 무리의 계교에 속아서 당신의 생애의 벗이던 신돈 을 죄 없이 죽여 버린 왕은, 죽인 뒤에 비로소 당신의 과실 을 깨달았다. 그러나 왕이 깨달은 때는 벌써 신돈은 그 형 체조차 이 세상에서 사라져 없어진 뒤였다.

사랑하는 왕후 노국공주를 잃고 또 여기서 신임하던 재상 신돈을 잃은 왕은, 울화 때문에 병이 생기고 병 때문에 정 신이 흐려져서, 음침하고 참담한 여생을 사년간을 보내다가, 환자(宦者) 최만생이며 폐신 홍륜(嬖臣洪倫) 등에게 시한 바 되어 명 아닌 목숨을 끊기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 왕의 뒤를 이어서 위에 오른 소년왕 강녕대군 우(禑).

반야의 소생─ 아명을 무니노라 한 소년 왕이었다.

송악을 멀리 바라보는 근교의 어떤 외따른 촌가.

한길에서 벗어난 외따른 집이라 찾는 사람도 없고 지나다 니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지형(地形)으로 보 아서부터 이 집을 향하여 오려는 사람밖에는 우연히는 지나 기 힘든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세상과 몰교섭하게 지내 는 외따른 집.

초라하고 작은 집이었다. 집 제도는 당시의 보통 본 때로 서 남향한 큰방이 있고 동향한 건넌방의 가운데 부엌이 있 고 뜰을 건너서 하인간이 있는데, 그 집 식구라는 것은 하 인간에 늙은 사내하인 하나가 있어서 바깥 시중은 대소를 물론하고 다 혼자 당해 나가고, 큰방은 언제든 비어 두고 건넌방에 이집 주인인 홀아비 선비가 역시 홀아비 하인 하 나와 같이 거처한다.

큰방은 비어 두었다 하나 버려두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 선비가 매일 깨면 첫번으로 큰방에 건너가 문안 드리고 끼 니때마다 반드시 음향(陰饗)을 바치는 것이었다.

『마마! 마마!』

잉 날도 큰방에 들어앉은 선비. 국상이 났기 때문에 상복 을 입은 것은 괴이하지 않은 일이다. 상복을 입은 선비는 북향하여 엎드리어서 절하고 있었다.

그가 절하는 발치 쪽 담벼락에 걸려 있는 한 개 족자. 서 투른 이 선비의 솜씨로 된 듯한 그 족자는 비록 솜씨는 서 투르나마 이번 승하한 왕의 면영임에 틀림이 없었다. 솜씨 는 서투르나마 열과 정성이 들어 있는 대행왕의 진영이었 다.

족자 앞에 그윽히 대어 놓은 향로 앞에 선비는 엎드려 있 다.

『마마! 마마!』

샘솟는 눈물, 터지려는 통곡성을 삼키는 읍인성.

오시(午時)에서 미시(未時), 신시, 유시, 가을의 짧은 해는 벌써 서편으로 넘어서 꽤 어둡게 되었지만, 선비는 족자 앞 에 진일을 엎드려 있다.

격렬히 떨리는 그의 어깨. 때때로 크게까지 울리는 읍인성.

부엌에서 이 큰방으로 직접 달린 샛문이 가만히 열렸다.

이 선비의 몸하인이 방안을 엿보았다.

한참 동정을 보던 하인은,

『서방님!』

하고 가만히 불러 보았다.

그러나 선비는 대답도 없이 돌아보려고도 않고 그냥 느껴 울고 있었다.

하인은한 번 더 불러 보았다. 그런 뒤에는 방 안으로 들어 서서 족자 쪽으로 외면을 하고 국궁하여 들어가서 선비의 곁에 가 읍한 채 한 손으로 선비의 어깨를 흔들었다.

선비는 비로소 머리를 조금 들었다. 눈과 얼굴 전체가 놀 랍게 부었다.

『서방님 진정합세요. 저녘 진지가 다 됐읍니다.』

『……』

『자, 건너가십시다.』

선비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나는 먹기 싫다.』

『그래도 처음이라도 하셔얍지.』

『나는 싫구나.』 하인은 미안한 듯이 그냥 서 있었다.

세상의 눈을 속이는 반야 주종의 행색이었다.

포리들의 눈이 티끌 하나 거저 넘기지 않을만치 빽빽한데 도 불구하고 반야 주종은 멀리 가지 않았다.

적절히 말하자면 차마 가지 못하였다.

왜?

비록 서울 안에는 못 있으나마 차마 송악이 안 보이는 곳 까지는 갈 수가 없었다. 왕이 계신 곳, 왕자 무니노가 있는 곳─ 이 서울을 차마 멀리는 떠나지 못하였다. 반야가 왕을 모셔 본 것은 겨우 삼사 차에 지나지 못한다. 그것도 반야 라는 명색으로가 아니라(신돈이 꾸민) 노국공주의 혼백이라 는 명색으로 모셨다.

노국공주의 혼백인 줄 알고 반야를 가까이하였던 왕은 반 야의 본색을 안 뒤부터는 다시는 반야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삼사 차 모시는 동안에 북국 처녀인 반야의 순 진한 마음에는 왕을 사모한모든 생각이 깊이 박혀졌다.

그리고 반야도 또한 잘 안다. 왕이 자기의 정체를 안 뒤부 터는 다시는 자기를 보지 않았으되, 이것은 왕이 노국공주 께 충실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반야 자기에게 향하 는 왕의 마음도 또한 범상하지는 않은 것을─ 노국공주를 잊지 전에는 왕은 다시는 반야를 안 볼 것이요, 왕은 또한 승하하기 전에는 공주를 안 잊을 것이로되, 그렇다고 반야 를 특별히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리하여 차마 왕경을 멀리 떠나지 못하고 위험을 무릅쓰 고 그냥 이 근처에 있으면서 반야는 왕의 족자를 모시며 세 월을 보내기 사 년─ 만약 반야로서 장래 광명한 일월을 볼 날을 기약할 수 있 다 하면, 그것은 자기 소생인 왕자가 등극하는 날일 것이다.

그러나 왕자가 등극을 하려면 그보다 먼저 현왕이 승하치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왕이 승하치 않으면 왕자는 언제까지 든 왕자로서 태후궁에서 헛 세월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왕자가 등극치 못하면 반야 자기는 언제까지든 광 명ㅇ한 일월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야의 마음은 또한 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도 취할 수 없고 저도 취할 수 없는 양난의 입장에서 반 야는 그래도 왕의 수명을 빌며 승녀와 같은 엄숙하고 정성 된 날을 보내고 있었다.

만수무강합소서. 장생불로합소서. 비록 이 천생은 외로이 그늘에서 썩으나마 마마뿐은 천만세까지 장수합소서. 서투 른 솜씨나마 정성을 들여서 뜬 족자의 앞에 반야는 나날이 음향(陰饗)을 드리고 나날이 축원을 게을하지 않았다.

이러한 반야의 귀에 뛰쳐들어온 소문─ 그것은 국상이 났 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반야 자기의 소생인 무니노 왕자가 등극하였다는 소문도 뛰쳐들었다.

왕자는 드디어 국왕이 되었다. 이제는 반야는 당당한 왕모 였다.

그러나 이런 경사보다도 반야의 마음을 쑤시는 듯이 아프 게 한 것은 국왕의 승하였다. 비록 자기를 돌보지 않은 왕 이었으나 이 왕의 면영은 반야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들리는 풍문에 의지하자면 왕의 승하는 보통 것이 아니고 시신에게 시를 당하였다 하는 것이다.

노국공주 승하 이래 준 십 년 간을 외로운 생애를 보내던 왕은 그 최후조차 예사롭지 못한 것이다.

사모하던 이의 이 불행에 반야는 제 정신을 수습하지를 못 하였다.

『마마! 마마!』

그래 사년 간의 축원도 헛일이었던가?

걸핏걸핏 머리속에 환몰하는 과거의 면영을 생각하면 울고 또 울었다.

국상을 안 날부터 모든 큰방에 틀여박힌 반야는 이칠일까 지 그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식사도 전폐하였다. 시녀 영 주가 너무 근심되어 때때로 미음을 쑤어 들여 오지만 그것 도 마시지를 않았다. 타는 목과 타는 가슴을 식히기 위하여 냉수만 연하여 마셨다.

남의 이목을 피하기 때문에 소리쳐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만 통곡하는 반야의 마음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이칠일 간을 식음과 휴식을 전폐하고 그 방에 박 혀 있던 반야는, 드디어 너무도 쇠진하여 혼도하였다. 그리 고 혼도하기 때문에 비로소 영주에게 안겨서 그 방에서 건 넌방으로 건너왔다.

이칠일에서 칠칠일이 지나기까지 반야는 정신을 모르고 앓 았다.

영주가 딱 머리맡에 지켜서 간호하였다. 잠시도 곁을 떠나 지를 않았다.

이 정신을 모르는 반야가 그래도 헛소리로 끊임없이 하는 것은 마마! 마마!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곁에 꼭 모시고 있는 영주로 하여금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이 정신을 잠시도 수습치 못하는 반야가 한 칠일 이 넘어갈 때마다는 반드시 잠시나마 정신이 드는 것이었 다. 그리고는 영주에게 명하여 제사 준비를 시키고 몸소 건 너가서 제사를 말짱히 하고 제사를 끝낸 뒤에는 다시 정신 을 잃는 것이었다.

제시를 지냄에는 일호의 착오도 없었다. 그러나 제사만 끝 나면 일호의 정신도 없었다. 너무도 지독한 정성은 병중에 서나마 해야 할 일은 꼭 하게 되는가? 곁에 모시는 영주는 이 천리(天理)까지 정복하는 지독한 정성에 은근히 몸서리까 지 쳤다.

이리하여 칠칠일(반야가 국상이 난 것을 안 때부터 칠칠일 이지, 왕의 승하로부터는 두 달이 넘는 때였다)이 지나기까 지 반야는 정신 없이 앓고 있었다.

이 반야가 겨우 사물을 약간 인식하게 된 것은 대행왕의 인산도 임박한 때였다.

반야는 인산을 보기로 하였다.

궁중의 절차로나 염집 예절로나 어디 지아비를 꺾인 여인 이 출입을 할 수가 없을 것이지만, 반야는 이 법식을 무시 하고 인산을 보기로 하였다.

더구나 관헌의 눈에 띠기만 하면 목숨이 열 개 있어도 붙 어나지 못할 몸이지만, 만난을 제하고 왕의 최후의 길을 먼 발로나마 보려 하였다. 이제 바야흐로 땅속에 들어갈 분의 마지막 길을 놓칠 수 없는 듯이 생각되었다.

쏘는 듯 매운 바람이 혹혹 부는 날이었다. 이 외롭고 가련 한 왕의 마지막 길을 조상하는 듯이 바람은 소나무 가지에 서 처참히 노래부르는 맵쏘는 겨울날, 아직도 몸이 추세지 못한 반야는 협수룩한 선비로 차리고 영주의 부축을 받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감히 연로까지 가까이 갈 처지가 못되는 반야는 멀 리 영구가 지나갈 길이 바라보이는 곳 어떤 은행나무 앞에 영주의 부축을 받고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서방님, 추우시지 않으세요?』

『서방님, 아직 멀었는데 잠깐 걸터 쉬세요.』

주인을 생각하는 영주가 곁에서 연방 여러 가지로 주의를 하지만, 반야는 듣는지 마는지 한 번도 대답도 않고 연로를 향하여 국궁하고 서서 머리조차 한 번도 안 들었다.

영구가 이 앞 연료를 지나간 것은 겨울의 짧은 해가 거의 저물어서였다.

연로에 부복해 있는 백성들의 통곡성이며 만가(輓歌)의 구 슬픈 곡조가 바람결에 끊였다 이었다 날아오는 것으로 영구 가 저편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반야는 머 리를 들기는커녕 그 앞에 꿇어 엎드려 버렸다. 얼음진 땅바 닥에 손을 대고 그 손등에 이마를 붙이고 넙죽 엎드려 있는 반야.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일변 손으로 땅으로 흘러 서 곧 얼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종내 머리를 들지를 못하 였다. 연로 가까이 있는 백성들에게서는 통곡성이 대지까지 움직일이만치 울리었지만, 본색을 감추어야 할 입장에 있는 반야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속으로 체읍하였다.

『서방님, 아기마마껩서─』

이 비통한 노보 가운데서도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서 몸소 가꾸던 무니로 아기가 새 왕으로서 상주로서 영구의 뒤를 따르는 것을 발견하고, 영주가 제 상전에게 이렇게 주의시 킬 때도 반야는 그냥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때 아닌 폭풍우 때문에 사 년 전에 자기 품을 떠난 아드님 이 오늘날 국왕이라는 존귀한 몸으로 눈 앞을 지나가거늘 반야인들 왜 보고싶은 생각이 없었을까? 그러나 반야는 끝 끝내 머리를 들지를 못하였다. 만가의 구슬픈 곡조만 가슴 에 푹푹 들여박히고, 지금 그 만가와 함께 길가는 이에게 대한 추억의 염만 가슴에 사무치어 감히 머리를 들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아직 몸잉 채 추세지 못하였던 반야는 이날부터 다시 병석 에 넘어졌다.

그 아드님 왕이 고려 지존의 위에서 나날이 몸과 마음이 자랄 동안, 이 소년왕의 생모 반야는 이름도 없는 초라한 촌에서 가난과 병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영주야!』

『서방님!』

『영주야, 내가 이제 더 살지 못할 것 같구나.』

『서방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며칠만 지내시면 다시 일어나십지요.』

말을 맺지 못하고는 서로 붙들고 느끼어 우는 주종.

서울을 망명할 때에 준비해 가지고 떠났던 값진 물건도 이 제는 다 없이하고, 가난과 추위와 병에 시달린 반야는 다시 는 광명한 해 달을 볼 날이 없을 것같이 생각되었다.

이러한 자리에서도 다만 바라는 것은 승하한 분의 명복과 아드님의 만수무강뿐이었다.

남에서 돌아오는 기러기의 한 마디 높이 우는 소리로써 고 려 삼천리에도 양춘이 이르렀다.

다시 소생치 못하리라고 믿었던 반야의 병도 양춘 절기에 들면서는 차도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시름시름 첫 여름에는 병은 다 나았다.

병은 비록 나았으나 극도로 쇠약했던 몸은 좀체 추세지 않 았다.

더구나 죄인으로 자처한 그는 대행왕의 승하한 이래 아직 옷을 갈아 입지를 않고 세수를 하지 않고 머리를 빗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지 않았기 때문에 볼썽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대행왕께 대한 인처(人妻)로서의 정성을 바치는 한편, 반야의 마음 한편 구석을 때때로 강렬히 두드리는 것 은 소년 신왕께 대한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애무 욕망이었 다.

소년왕이 자기의 품에서 태후궁으로 들어갈 때는 아직 아 무 철도 모르는 일곱살의 소년이었다.

춘풍추우 오개 성상─ 비록 어머니되는 자기는 그 사이 마 음과 몸으로써 사람이 능히 겪기 어려운 온갖 고생을 다 겪 었지만, 대궐 안에서 기름지게 길러난 아드님은 얼마나 장 성하였을까?

일곱 살에서 열 두 살─ 짧게 보자면 짧을 수도 있는 오개 년이지만 소년에게 있어서는 오개년이란 세월이 결코 짧기 않을 것이다.

그 동안 아드님은 얼마나 장성하셨을까?

어린 시절의 그 영특하던 눈과 불그스레 하던 아담한 빰이 며 기운차 보이던 이마며가 지금은 얼마나 더 훌륭하게 되 셨을까?

그 사이 물론 무척이도 변하였을 것이지만 반야의 눈에는 거금 오년 전의 영특하던 소년의 면영이 그대로 어릿거려서 애통 가운데서도 가슴이 뛰노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리하여 대행왕의 일주기가 지난 다음에는 반야는 산촌의 오막살이를 비어 버리고, 영주를 데리고 다시 송경 안으로 잠입하였다.

한 가지 목적은 좋은 기회를 엿보아 가지고 태후께 사후하 고 자기의 신분을 피력하려 함이요, 또 한 가지의 (그리고 반야의 마음을 더 끈) 다른 목적은 태후께 뵈올 기회를 기 다리는 동안에라도, 소년왕이 거둥하는 때라도 어떻게 있으 면 먼 발로나마 사랑하는 아드님의 용안을 우러러 보고 싶 기 때문이었다.

태후께 뵈어서 자기의 신분을 확인시키기 전에 관헌에 발 각되는 날이면 극형을 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반 야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서울에 잠입치 않을 수가 없었다.

서울에 잠입해 가지고 이전에 부리던 하인 가운데 가장 믿 음성 있는 어떤 집을 찾아가서 반야 수종은 거기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나 남복(男服)은 여전히 벗지 못하였다. 과거 오개년 간을 남복 아래서 그 본색을 감추고 지나니만치 인젠 몸에 도 척 어울리는 한 개 가냘픈 선비였다.

겨울은 또다시 이 땅을 찾아왔다가 갔다.

그러나 그 겨울이 다 가도록 반야는 태후께 뵈올 기회도 못얻고 소년왕의 거둥도 우러를 기회가 없었다.

긴 겨울도 동경과 초조함 가운데서 무위히 보내고 이듬해 춘이월 한식날이었다.

소년왕이 한식제를 드리어 현릉(玄陵─ 선왕의 능)에 거둥 한다는 소문이 반야의 귀에까지 이르렀다.

한식날 이른 새벽에 반야는 주과포를 준비하여 영주에게 지워 가지고 자기도 한식 성묘를 하는 한 선비의 모양으로 주인집을 나섰다.

두 가지의 계획이었다.

하나는 먼발로나마 아드님의 용안을 보자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대궐의 향체가 다 끝나고 환궁한 뒤에 현릉에 참배하여 돌아간 선왕께 지아비로서의 처음의 제사를 드리 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 날 현릉에 제사하는 소년왕은 저 건너편 무주공산의 앞 에 추과포 짐을 내려놓고 이편만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는 한개 초라한 선비와 그 하인이 당신의 어미니 주종인 줄 어 찌 뜻이나 하였으랴?

능에 절을 하고 돌아서다가 우연히 건너편 무주공산에서 이편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가 눈에 띠어서 소년의 호기심으 로 무심히 마주 볼 동안 이편의 반야는 너무도 격동되어 덜 썩 그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눈물이 꽉 가리어져서 보 이지 않는 눈을 소매로 문지르며 마주 건너다 보았다.

거리가 그다지 가깝지 않은지라 세세한 점까지는 볼 수가 없었으나, 반야는 그 막연한 가운데서 아드님의 영특하던 이전의 면영 전부를 발견하고, 너무도 격동되어 몸을 와들 와들 떨며 일변 연하여 소매로 눈물을 씻으며 건너다보았 다.

만약 소년왕으로서 잠시만 더 마주 보아 주었더면 반야는 과도한 흥분 때문에 맞받아 달려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 기절을 하였을 것이다.

소년왕의 일행이 능제를 끝내고 돌아갈 때까지 반야는 그 자리에 엎드린 채 넋잃은 사람 모양으로 건너편 능만 바라 보고 있었다. 샘 솟듯 하는 눈물을 인젠 씻을 생각도 않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그의 뺨에서 일변 흘러서 땅으로 떨어지는 눈물─ 그것은 너무도 복잡한 감정 아래서의 눈물이라도 그 까닭을 지적할 수도 없는 종류의 눈물이었다.

이튿날 능군은 기이한 일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제 왕의 일행이 환궁한 뒤에 능침을 깨끗이 쓸었거늘 아 침에 보매 새 주과포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그 주과포가 놓인 위치가 능의 정면이 아니요, 오른 편 측 면인 점으로 보아서도 대궐 향체(饗 )의 나머지가 아닌 것 이 확실하였거니와, 어제 저녁에 티끌 하나없이 쓴 것은 분 명히 기억에 남아 있으니만치 이것은 대궐의 제사는 아니었 다.

시간으로 보아서 어제 저녁에 없던 것이 오늘 아침에 있는 것을 보매 깊은 밤중에 드린 제사임에 또한 틀림이 없었다.

그 위에 능군으로 하여금 더욱 머리를 기울이게 한 것은 능전에 절한 자리가 밤사이에 약간 온 눈비의 덕에 막연하 게나마 자리가 생겼는데, 그 자리가 보통 사람이 감히 절하 지 못할 자리였다. 왕후 왕비는 참릉치 않으니 만약 그 자 리에서 절할 사람이 있다 치면 그것은 대행왕의 모후(母后) 되는 명덕대후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 낮 태후가 참릉치 않았던 것은 잘 아는 바요, 태후가 밤중에 몰래 참 릉할 까닭은 없다.

능군은 연방 머리를 기울이면서 제사 후에 남은 주과포를 치웠다.

먼발에서나마 오 년만에 아드님의 용안을 우러러 뵈온 반 야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깊이 남의 이목을 피하여 능전에 참배를 하고 이 능의 아내로서의 최초의 절을 드리고 황황히 서울로 돌아온 반야는 마치 열병 들린 사람과 같이 허적이었다.

『영주야, 장발두 합셨더라.』

『야 분명히 나를 알아보신게지.』

『아무리 상감마마라 합셔도 아직 어머니를 찾으실 때로구 나.』

마치 열병들린 사람의 헛소리와 같이 영주를 붙들고 연방 이런 소리를 하였다.

그날 밤 영주가 무슨 일로 잠깐 어디 나갔다가 돌아오매 반야의 그림자가 없어졌다.

잠시는 무심히 지냈지만 잠시를 지내도 그냥 안 들어오므 로 근심되어 의혹의 눈을 던질 때에, 영주는 반야의 일상 입던 선비의 옷이 덜덜 뭉치어 발치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 하였다.

여기 덜컥 가슴이 내려앉은 영주가 행장을 뒤져서 보매─ 영주는 눈만 멀거니 뜨고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이 후의 어떤 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깊이 간직하여 두었던 반야의 옷이 없어졌다. 그 옷이란 왕모의 정장이었다. 이 후 왕모라는 근본이 드러나서 대궐에 영입될 날을 준비하기 위 하여 지어 두었던 그 옷이 없어진 것이었다.

어제 아드님의 용안을 봤고 얼혼이 뜬 반야가 그 옷을 꺼 내어 입고 대궐로 들어갔다는 점을 인젠 의심할 여지가 없 었다.

아무 예비 교섭도 없이, 더구나 정신이 들뜬 제 상전이, 지 금 어두운데 주먹으로 대궐로 뛰쳐 들어갔다가는 열이년 열 그 목숨은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이 너무도 의외의 일에 영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만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집에서는 영주가 어쩔 줄을 모르고 몸만 떨고 있을 동안, 반야는 가마를 하나 잡아타고 잡담 제지하고 태후궁으로 들 어 모셨다. 수문장도 이 너무도 대담하게 들어오는 행차에 게 국궁하고 절하여 맞았다. 혜비(惠妃)나 신비(愼妃)나 어 느 비중의 한 사람 쯤으로 알고 좀 초라한 행차나마 절하여 맞았다.

이리하여 반야는 태후건 뜰 앞까지 무사히 들어갔다.

『신은 외람되오나 주상전하의 생모이옵니다.』

태후께 불리어서 태후전 영외(楹外)에 엎드려 절하는 반야 ─ 궁녀들에게 시위를 받고 앉아 있던 태후는 의아한 듯이 눈 을 들었다.

『누구라?』

『네이, 신은 반야라는 천비옵니다. 외람되오나 선묘의 돌 보심을 받자와 주상전하를 탄생하온 여인이옵니다.』

딱딱 막히는 숨 가운데서 겨우 말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열병에 들뜬 사람 모양으로 정신 없이 이리로 달려온 반야 는 여기서 비로소 자기의 이성을 회복하였다. 동시에 그의 마음의 용기는 탁 꺾어지고 갑자기 떠오르는 공포와 숨막히 는 긴장 때문에 말조차 마음대로 순조롭게 나오지 않았다.

태후가 입을 열었다. 시위한 궁녀를 향하여

『아마 미친 사람인 모양이다. 내 보내라.』

일은 좌우간 저질러 놓았다. 정신 없이 뛰쳐들어온 것은 실책이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은 여기서 버티지 않 을 수가 없는 반야였다.

『아니올시다. 신의 정신은─』

『정감을 불러서 궁 밖에 내쫓아라.』

궁녀 하나이 일어서서 정감을 부르러 나가는 모양이었다.

너무도 흥분되어 눈까지 똑똑히 보이지 않는 반야의 앞으로 기다란 치마자락이 휙하니 지나갔다.

『아니올시다. 신은─』

『네가 주상전하의 생친이란 말이지! 주상전하께는 한씨라 는 생친이 있는데.』

반야는 기가 막혔다. 아비를 모를 자식은 있을지나 어미 모를 자식이 어디 있으랴?

『태후전마마, 신은 어떻게 상계하여야 옳을지 알수 없읍 니다. 신은 영도첨의 신돈의 집에 있던 반야라는 천비로서 우연히─』

그러나 그때 태후의 머리가 반짝 이리로 돌아왔다. 태후의 말이 다시 반야의 말을 끊었다.

『오, 네가 대흉 신돈의 첩 반야였더냐? 나는 누구라고.』

태후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야, 나가서 순군을 궁 밖에 불러라. 그리고 정감은 이리 로 부를 것이 없이 이시중(李侍中=李仁任) 댁으로 달려가서 이시중을 지급히 불러라. 그리고 ─』

『태후마마! 태후전마마!』

반야는 인젠 악 밖에는 쓸 도리가 없었다. 자기의 몸이 재 상의 손으로 넘겨지기만 하면 인젠 끝난 목숨이다.

『태후전마마! 한 마디만 신의 말씀을 들읍세요. 의심이 곕 시거든 상감마마께 배알하게 해 줍세요. 원이옵니다. 원이옵 니다.』

그러나 태후는 인젠 반야에게 대척치 않았다. 명할 일을 다 명한 뒤에는 반야의 존재 따위는 아지도 못한다는 듯이 얼굴을 돌려 버렸다.

『태후전마마!』

『야, 광인의 소리 소란스럽다. 밖으로 끌어내라.』

『태후전마마, 상감마마께 잠깐만─』

『참 소란도 스럽군.』

『태─ 』

울고 부르짖는 반야는 궁녀들의 손으로 전외에 끌려 나갔 다.

전외에 내던진 바 된 반야는 정감의 손으로 궁 밖으로 쫓 겨났다. 궁 밖에 등대해 있던 순국은 반야를 즉시로 옥에 내렸다.

옥에 갇힌 반야.

인제는 울지도 않았다. 부르짖지도 않았다. 다만 속으로 통 곡하고 속으로 외칠 뿐이었다.

경솔한 자기의 행동, 혀를 끊어도 뒷및지 못할 자기의 경 솔한 행동을 통절히 뉘우칠 따름이었다.

인제는 어차피 저지른 일이다. 저지른 이상은 거기서 생기 는 결과를 말 없이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결과라는 것은 명약관화─ 즉 죽음이었다.

아아, 살아서 아드님, 아드님 앞에서 누리려던 영화─ 이미 틀려나간 이상에는 죽어서 선묘께 뵈올 날이나 달갑게 기다 릴까?

『상감마마! 상감마마!』

먼발에서나마 어제 똑똑히 못 보았더니만치 지금 그의 머 리에 떠오르는 왕은 그 옛날 자기의 무릎 위에서 재롱을 부 리던 그 시대의 소년이었다. 그 아드님의 영특한 면영을 회 상하며 반야는 한없이 속으로 통곡하였다.

『상감마마! 마마의 생모 반야는 다시 마마께 뵈올 날이 없이 가옵니다. 만수무강하옵소서. 만수무강하옵소서. 신은 가옵니다.』

차디찬 옥 안에서 반야는 긴 밤을 울어 새웠다.

밝는 날, 반야는 옥에서 끌어내서 이인임에게 국문을 당하 였다.

『불천(佛天)이 함께 증명하십니다. 소인은 그 이상 아뢸 말씀이 없읍니다.』

반야는 이 한 마디로 끝끝내 버티었다.

무수한 악형에 대해서도 다른 말은 일체로 입 밖에 내지를 않았다. 죽음을 이미 각오한 이상은 다른 부질없는 말을 하 려 잘못해서 아드님께 누라도 미치게 되는 일이 생기면 이 것은 죽어도 눈을 감고 죽지 못할 일이려니와, 지하에 가서 라도 무슨 면목으로 선묘께 뵈오며 또한 장래 이 아드님이 라도 다시 어떻게 대할까? 입을 닫아 버리자. 혀를 끊고라 도 결코 입을 얼지 말자.

이리하여 반야는 일체로 국문에 대하여서 대답을 거부하였 다.

사흘 뒤.

임진강(臨津江) 언덕에 매어 있는 조그만 배 한 척에 저녁 부터 서너 사람의 관원이 올라서 밤이 깊기를 기다리고 있 었다. 배 가운데는 꽤 커다란 자루가 하나 가로놓여 있었다.

그 자루 속에는 무슨 산 물건이 들어 있는 모양으로 때때로 꿈틀 꿈틀하였다.

이윽고 밤이 깊은 뒤에 그 배는 강 중심을 향하여 떠났다.

떠났던 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로 출발한 제 자리로 돌아왔다.

관원들은 묵묵히 배에서 내렸다. 그러나 떠날 때에 배에 실었던 자루는 돌아올 때는 없어졌다.

그 이후에는 다시는 신왕의 어머니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 었다.

(一九三五年 三月 <月刊野談> 所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