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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사담집 4/기축 삼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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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에다가 문식(文飾)을 가하여 소설의 체계로 꾸며도, 재미있는 소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내용이 스스로 천기만괴(千寄萬怪)하고 변화무쌍하며, 〈소설적 체제〉를 갖추지 않을지라도 넉넉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으며, 더욱이 문헌적 가치로 보아서도 문식(文飾)을 하지 않는 편이 옳겠기에 사건을 그저 체계(體系)있게 그대로 내리 적어 보려 한다.

上篇

[편집]

고려의 난정을 둘러 엎고, 이씨 조선을 건설하여 일개 국가적 체제며 내용을 충실히 한지도 적지 않은 기간을 지났다.

중국 문명을 수입하여 자국의 문명으로 대용하는 조선에서는, 글에 있어서도 고려 중엽까지는 단지 『문자(文字)』를 수입한 데 지나지 못하였다. 공자(孔子)에서 시작되어 주자(朱子)를 거쳐서 대성한 유학(儒學)은 고려 중엽까지는 단지 작문학의 이입(移入)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 글을 쓰고 짓고 하는데 지나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고려 말엽에 이르러서 포은(圃隱) 등에게서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유학이 조선에도 퍼졌다.

그러나 그들의 힘으로서 〈학문으로서의 유학〉이 이 땅(그때의 고려)에 퍼지려 할 때에 고려의 사직이 둘러 엎어지면서, 학문─성리학(性理學)으로서의 유학(儒學)은 다시 끝이 꺾여져 나갔다.

일개 국가 건설─이 너무도 큰 사업에 급급하기 때문에, 유학은 또다시 작문학(作文學)으로서의 지위로 떨어졌다.

작문학으로 다시 떨어졌던 유학을 다시금 학문 성리학으로서의 유학으로 끌어올린 거유(巨儒)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 등이 있었다.

시정(施政)에 있어서도 유학으로서 근본을 삼던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대가 이황은 그만치 임금께도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선조대왕(宣祖 大王)이었다.

이 이황이 건강이 상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시골로 물러가려 할 때에 임금은 마치 스승을 잃은 것같이 앞길이 아득하여 이황에게

『경이 물러가면 장차 조신(朝臣) 가운데 누구에게 국정(國政)을 의론하랴?』

하고 물어보았다. 그때 이황은 서슴치 않고,

『이준경(李浚慶)은 큰 그릇이올시다. 신임하시고 의심치 마시옵소서.』

하고 복제하였다.

당시(당시뿐 아니라 오백년간 늘 그러하였거니와)의 조정 인물을 대변하여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었다. 하나는 추천(推薦)으로 벼슬에 붙은 사람(대개가 명문의 후손이나 왕족들이었다)이요, 또 하나는 과거에 급제를 하여 벼슬에 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교가 국교가 되고 유교의 세력이 절대적이었더니만치 과거로서 벼슬에 오른 것을 명예로 알고, 딴길로 벼슬에 오른 것을 수치로 알았다. 오백년 이래의 명재상 황희의 아들 황수신(黃守身) 같은 사람은 마지막에 영의정에까지 올랐지만 젊었을 때 과거를 보려다가 시관(試官)과 다투고,

澤民濟世非科第
不必平生作腐儒

라 하고 붓을 꺾어 버리고 그 후 음사(蔭仕)로 벼슬에 올랐으니만치, 평생을 과거에 급제 못한 것을 부끄러이 여겼다. 그런 시대라 사류(士類)의 긍지가 여간한 것이 아니고 사류가 아닌 사람은 속물(俗物)이라 하여 마치 오랑캐나 다름없이 보았다.

이런 시대에 거유 이황의 추천으로 왕의 신임을 얻은 이준경(문과 급제하였다)은, 그 시대 사조를 무시하고 사류거나 아니거나 인재(人才)를 긴히 썼다.

자기네는 좀 특수한 인종이노라는 우월감을 갖고 있던 사류들은, 이 이준경의 사류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괘씸히 보았다. 거유 율곡 이이(栗谷 李珥) 같은 사람도 매우 이준경을 밉게 본 사람으로서, 늘,

『퇴계 선생과 같은 훌륭한 이로도, 이준경을 추천한 것은 큰 치욕이라.』

하고, 이준경이 마지막 임종에 임금(선조대왕)께 올린 유차(遺箚)를 가리켜,

『人之將死에 其言也善이요 浚慶之將死에 其言也惡』

이라 하여 못내 미워하였다.

그러면 이이로서 그렇게 밉게 여긴 이준경의 유차(遺箚)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네 가지의 조목을 임금께 계청한 것으로서 마지막 조건인,

『붕당의 사(朋黨之私)를 깨뜨리옵소서. 지금 사람을 보오매, 붕당을 두어 가지고 그다지 과한 실수가 없을지라도 공연히 서로 배척하오며, 고담대언(高談大言)을 즐겨 하오니, 이 풍습을 깨뜨려야 하겠나이다.』

한 것이 이이에게는 마땅치 않게 보인 것이었다. 즉 이이의 마음으로서는

「이준경이 사류(士類)를 미워하여, 임금께 이런 유차를 올려서 장차 임금으로 하여금 사류를 신임치 않게 하려 한 것이라.」

하여 사류의 영수인 이이는 이를 밉게 본 것이었다.

과연 이준경의 눈은 밝았다. 아직 표면에는 현저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붕당의 싹은 벌써 암암리에 꽤 튼 것이었다. 그러고 이준경의 명안은, 장차 이 붕당의 화가 커져서 국가에 커다란 지장을 주겠고, 그 때문에 사직까지 위태로울 것을 미리 꿰어 보고 이런 차자를 올린 것이었다.

× ×

이보다 먼저 명종조(明宗朝) 중엽에, 그때 사인(舍人)이던 심의겸(沈義謙)이 공무로서 그때의 영의정이요, 겸하여 대비(大妃)의 오라비 되는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주인 대감은 출타하고, 그의 사위 이조민이 사랑에 있었다. 심의겸과 이조민은 본시 서로 알던 새이므로 함께 서실(書室)에 들어갔다. 서실 안에는 문객들의 이부자리가 꽤 많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심의겸은 농삼아 이 이부자리는 뉘 것인가, 저것은 뉘 것인가 물어 내려가는 동안, 김효원(金孝元)의 이부자리가 거기 있었다.

심의겸은 내심 매우 불쾌하게 보았다.

김효원은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문학에 꽤 통한 장래 유망한 청년이라고 사류에서 허락하던 바이었다. 그런데 정당한 길을 밟아서 청환(淸宦)에 올라 이름을 죽백에 새길 것이어늘, 재상가의 문객질을 하단 웬 말인가? 듣던 소문과는 딴판으로 비루한 청년이지, 선비로 사류에 용납될 바 아니라 보았다.

그 후 얼마 뒤에 김효원은 급제를 하여 재명(才名)이 나날이 높아갔다. 육칠 년간을 낭료(郞僚)로 지낸 뒤에 전랑(銓郞)에 올라서는, 후배(後輩)들을 잘 인도하여서, 젊은 선비들의 앞길이 김효원의 덕으로 탁 틔었다. 그런지라 후배 사류들은 모두 김효원을 숭배하였다.

그런데 전일 영의정 윤원형의 집 문객 노릇을 한 줄을 아는 심의겸은, 지금 김효원의 재명이 나날이 높아갈 때에도 역시 김효원을 소인이라 보고, 그렇게 공언(公言)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젊은 선비들이 모두 숭배하는 김효원을 소인이라 하매 젊은 선비 측에서도 또한 심의겸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효원의 장인은 윤원형의 첩의 아비 정윤겸(鄭允謙)의 조카로서,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에 묵은 것은 즉 친척의 집에 묵은 것이지 결코 문객으로 묵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속살을 알아보지도 않고 고사(高士=김효원)를 소인이라 일컫는 심의겸이야말로 소인이라.』

하여 젊은 후배 측은 성세를 합하여 심의겸을 소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당년의 재상들은 또한 모두 심의겸의 청백한 인격을 신임하던 이라, 심의겸을 소인이라고 하는 말을 용납지 않았다.

즉 전배(前輩) 측은 모두 심의겸을 옹호하며

『김효원은 첫째로는 재상가에 문객질을 한 사람이요, 둘째로는 지금 젊은 선비들을 선도(善導)한다 하나, 사실 선도가 아니요 자기의 당파를 만들려는 음흉한 인물이라.』

하여, 심의겸을 옹호하는 전배 측과 김효원을 숭배하는 후배 측이, 아연 대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즉 동인 서인(東西人) 분당의 시초이다. 청송심씨가승(靑松沈氏家乘)에 보자면 그 당시 심의겸의 집은 돈의문 밖 새다리(敦義門外 新橋)에 있었고, 김효원의 집은 낙타산 아래 어의동(於義洞)에 있었다. 즉 심의 집은 서울 서쪽에 있었고, 김의 집은 동쪽에 있었다. 그래서 심의 당파를 서인이라 일컫고 김의 당파를 동인이라 일컬었다. 신진 학도들은 대개 김효원에게 붙어서 동인이 되고, 명문 줄기들은 모조리 심의겸의 당파라 소인이라 비웃고, 더욱이 젊은 혈기에 고담대언을 즐겨 하는지라, 실은 재상 줄기들은 자기도 모르는 틈에 서인이라 지목을 받아 서인이 되어 버렸다.

× ×

이러한 분란에 있어서, 이 일을 짊어지고 큰 역할을 한 사람은 거유 율곡 이이(栗谷 李珥)였다.

이이는 본시 한미한 선비의 집에 태어나서, 일찍이는 잠시 선문(禪門)에 적을 두었다가, 차차 깊이 파고 들어가 보니, 불교에는 황당무계한 말이 너무도 많으므로 싫증이 생겨서 다시 유교로 개종을 하여, 작문(作文)적 학문을 피하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그 도의 극에까지 이른 사람이었다.

재상 이준경을 잃은 뒤에는 임금은 이이를 매우 신임하였다.

이 임금(선조대왕)은 정통의 임금이 아니었다. 덕흥군(德興君)이라는 왕족의 세째 아드님으로, 유년과 소년 시기를 비교적 자유로이 자라난 분이었다. 선왕(명종대왕)이 아드님이 없이 승하하자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서 임금이 된 분이니만큼, 심궁출생(深宮出生)과 달라 성미가 좀 괄괄하고 억센 위에, 정통(正統)이 아니니만치 거족(巨族) 재상들을 대하면, 저 사람이 나를 흉보지나 않는가 하여 더욱 억센 성미를 발휘하는 분이었다.

이이는 또한 재상가 자제가 아니요 시골 선비의 자제로, 호변(好辯)하고 성리학의 대가로 스스로 굳게 믿느니만치, 흔히 임금과 이론으로서 다투기까지 하였다.

괄괄한 성미의 임금과 이론 좋아하는 신하─ 무론 대적마다 언쟁(言爭) 비슷한 일이 있고 하였다. 그러나 또한 임금은 절대로 이이를 신임하여, 언쟁은 언쟁이요 하루라도 이이로 하여금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후일 이이가 서인(西人)이라는 지목을 받을 때에 어떤 날, 또한 임금과 이이는 몹시 언쟁을 하였다. 이 기회를 타서 동인 측에서 이이를 「당파를 모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탄핵을 한 일이 있었다. 어제 그만치 이이와 언쟁을 하였는지라, 오늘 탄핵을 하면 효력이 있으려니 하고 탄핵을 하였더니 임금은

『그런 말은 내게는 하지 말라. 이이는 성인이라, 나도 신분만 허락하면 그의 당파가 되고 싶으니, 이이로 하여금 얼마이고 당파를 모으게 하여라. 성인의 당파가 많으면 많을수록 국가에 기꺼운 일이 아니냐.』

고 도리어 노염을 산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이는 재상가 자제가 아니요 유림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학문이 널리 전파되어 유림의 영수로 자타가 허락하는 사람이었고, 장래는 유림의 대종장(大宗匠)으로 누구나 믿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동당이나 서당 중에, 어느 당파로 간다 하면 물론 사류의 모임인 동당으로 갈 사람이었다.

처음 이 당쟁이 차차 노골화하여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임금은 이준경의 명안을 탄복하며, 당쟁의 근원 되는 사람을 벌주는 뜻으로 심의겸과 김효원을 모두 보외(補外)로 처분할 때에, 김효원을 부령(富寧)으로 보내고 심의겸을 개성 유수로 보냈다. 그때 이이는 임금께 김효원은 신병이 있고 몸이 약하니 부령 같은 새북(塞北)에 보내는 것이 황송하다고 계청하여 삼척(三陟) 부사로 체수한 일까지 있어서 과연 동인 측이라 지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차차 지나보매 젊은 선비들의 행사가 너무나 과격하고, 젊은 선비들이 등제(登第)를 하면 드는 벼슬이 대개 정원(政院)이나 삼사(三司)라, 직권을 과히 악용하고 남용하여 서인으로 지목받는 재상들을 논핵하므로, 이이의 동정은 자연 서인 측으로 기울었다.

또 그때 형편을 보자면, 동인은 신진들이 연하여 생겨나서 조정의 대부분이 동인이요 서인은 전배 몇 사람만 겨우 있는 가운데, 더욱이 떠들지 않는 편이라, 동성서쇠(東盛西衰)의 형세 현저하였고, 전배(前輩) 가운데도 동인 측으로 돌라붙는 사람도 여럿 생겼다. 전배 가운데 분명 자기는 서인(西人)이노라고 태도를 명확히 하는 사람은 겨우 윤두수, 정철(尹斗壽, 鄭澈) 그 밖 수인(數人)뿐이었다.

이러한 때에 윤두수(尹斗壽)의 뇌물 사건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그때 전랑(銓郞)으로 있던 동인 김성일(金誠一)이 어떤 날 경연(經筵)에서 탐오(貪汚)를 강론하고 이어서,

『진도군수 이수(珍島郡守 李銖)가 윤두수, 두수의 아우, 조카 세 사람에게 쌀 백석을 뇌물하였습니다.』

고 상계하고 뒤이어 대간(臺諫)은,

『진도군수 이수를 옥에 내려 국문하고 윤두수 삼부자를 파직을 시키십사.』

고 상계를 하였다.

이리하여 이수를 잡아 가두고, 국문은 하였지만 없는 사실이라 토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동인 측에서는 이번 옥사가 성공 못 하면, 무망(誣罔)으로 몰리게 되겠는지라, 어찌하여서든 토사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쌀장사 장세량(張世良)이라는 사람을 또 잡아 가두고 뇌물 쌀을 장세량이가 맡아 팔았다고 국문을 하기를 이십여 차나 하여서 (법규상은 세 번을 넘기지 못하는 것인데) 장세량은 거의 죽게 되었다. 처음에는 장세량은 상인이라 만만히 몇 대 때리면 거짓 토사라도 하려니 하였던 것이 되지 않으므로, 따로이 불러내어 가지고,

『너는 죄가 중하지 않으니 어서 토사만 하면 볼기 몇 대에 놓여 날것을 왜 이다지 고집하느냐? 이제 한 번 더 국문하면 너는 살지 못한다.』

고 토사 독촉을 하였다. 그러나 장세량은

『소인도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거짓 토사를 하면 무죄한 이 군수며 윤 판서께 죄가 갈 터이므로 못 합니다.』

고 버티었다.

이러는 동안 임금은 이 옥사가 곧 끝나지 않는 것을 보매, 필연코 동인들의 작폐라 짐작하여 노하여 도승지 이산해(李山海) 이하를 모두 갈고 이수와 장세량을 석방케 하였다.

그러나 간, 헌, 금부(諫, 憲, 禁府)며 정원 등 요직들은 모두 동인이라 과연 동인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이이는 이 쓸데없는 당쟁을 깨뜨려 보려고 퍽이나 애를 썼지만 모두 다 허사로 돌아갔다. 소위 서인이라는 축들은 모두 기세를 꺾이어 가만있는 중이며, 그런 가운데서 동인 측에서는, 연하여 서인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탄핵하여 차례로 내쫓는 중이라, 이이는 자연 서인을 돕게 되었다. 뿐더러, 이이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대개 전배요, 후배는 이 장래의 유림의 대종장(大宗匠)을 몰라보고, 서인에 가담하는 서인이라 하여 밉게 보는 가운데서, 오로지 임금의 신임 하나만을 가지고 조정에 서서 무함되는 서인들을 구하기에 급급하여, 때로는 화가 이이의 몸에까지 미치게 될 뻔한 적도 많았다. 그 참소 가운데는 오늘날의 우리의 눈으로는 별 요절할 참소가 다 있었으니,

『이이는 일찍이 석씨(釋氏)의 제자가 되어 머리를 깎은 일이 있었으니 유림에 용납치 못할 위인이라.』

는 폭소할 욕(?)까지 있었다.

× ×

동서당 싸움에 동인이 완전히 이긴 것이 보였다.

이렇게 내려오기를 수년, 선조대왕 기축년에 이르러서 한 가지의 커다란 사변이 튀어 나와서 싸움의 형세는 역전되었다. 이때는 이이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전주(全州) 사람으로 정여립(鄭汝立)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는데, 비상한 재사로서 이이도 매우 감복하여 칭찬하여 마지않고, 유림의 영수 이이가 그렇게 칭찬했으니만치 또한 유림의 명망도 많았다.

이 정여립이 이이를 배반하고 동인 측으로 돌라붙었다가, 얼마 안 지나서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갔다. 그 뒤에는 누차 임금이 불러도 올라오지 않았다.

여립은 전주에서 제자들을 모으고 학설을 강하였다. 그런데 그 학설이 진실로 기괴천만한 것이었다.

『어느 임금은 임금이 아니냐? 아무 임금이고 정성껏 섬기면 충신이 되느니라.』

이러한 학설을 많은 제자 중에 강설을 하였으매 무사할 수가 없다.

선조 기축년 시월 초이튿날 드디어 사변은 일어났다.

(筆者註. 기축년에 생긴 이 한 가지의 사변은 꼬리를 달고 수백 년간을 이리 번복되고 저리 번복되고, 그 기록도 서인의 기록, 북인의 기록, 남인의 기록, 제각기 다른지라 사건의 진면목은 오늘날에 앉아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大東野乘에 편입된 〈기축록〉, 白沙의 〈기축록〉, 〈魯西集〉 〈石室語錄〉 〈定齊集〉 그밖 여러 가지의 기록을 참작해가면서 그중 옳다 생각되는 대로 적을 밖에는 도리가 없다.)

기축 시월 초이튿날 정여립의 반역 사건이 발각이 되었다. 이산해(李山海=좌의정으로 있다가 그 달 이십팔일 영의정 유전이 죽고 후임으로 올라갔다) 정언신(鄭彦信=우의정으로 있었다.) 등이 정승으로 있을 때로서 황해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가 올라와 알게 된 것이었다. 역적 정여립의 공모자가 재령 안악 신천 등지에 있다는 것이었다.

곧 포도대장, 금부도사, 선전관 등을 전라도와 황해도에 파견하여, 정여립이며 그의 가족이며 도당들을 잡게 하였다. 장본인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이와 부하 두 명과 도망하여, 진안 죽도(鎭安 竹島)에 숨었다가 관군에게 포위한 바 되어 스스로 칼을 뽑아 자기는 자살을 하였다. 관군은 여립의 시체와 옥남이를 잡아 왔다.

정여립은 동인이 되었다. 벼슬을 살았다. 조정에도 여립과 가까운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우의정 정언신이며 이조참판 정언지의 형제 같은 사람은 매우 절친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이 형제는 사건 발생 한 달 뒤에 벼슬을 깎이고 서인 정철(鄭澈)이 우의정이 되고 성혼(成渾)이 이조참판이 되었다.

오늘날의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사건이 여기서 더 벌려질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그때는, 조사(朝士)가 모두 동인이 아니면 서인인 시대라, 한 사람이 죄를 입으면 그 개인이 입는다 보지 않고, 그 사람이 속한 당이 죄를 입는 것으로 보던 시대였다. 사건은 차차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이 되었다. 위관이란 것은 임시로 옥사를 감독하는 대신이었다. 정철은 서인이었다.

오늘날 여러 가지의 기록으로 참작하자면, 정철은 관인대도한 아량은 없으나 강직하고 일철한 인물인 모양이었다. 한때 동인에게 몰려서 여러 번 해를 입으려 할 때에 율곡이 매번 애써 면하게 하였고,퇴계가 그를 사랑하였고 박순(朴淳)이며 우계(牛溪 成渾)가 마음을 허락한 친구로 삼았고, 백사 이항복이 선배로 심복한 것을 보면 그 위인은 짐작이 간다.

이번에 벼슬 깎인 정언신은 동인이요 정언신에게 밀려서 벼슬 없이 지내다가 지금 정언신이 역적 정여립과 절친하였다는 죄로 옥에 내리고 그 벼슬자리를 대신 차지한 정철로서는 어떻게든 정언신을 못된 구덩이로 몰아넣으려 했어야 할 것이요 적어도 구원하려고 애써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지금 자기의 취조 하나로서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정언신의 추국(推鞫) 처분에 임금께,

『우리 조정(이조)에서 아직껏 대신을 국문해 보지 않았습니다.』

아뢰어, 정언신은 중도부처(中途付處)하고 정언지며 그 밖 단지 역적과 친했다는 죄목으로 잡힌 죄인들을 정배로 끝막아 버렸다.

그러면 사건은 여기서 끝이 났나? 그렇지 않다. 지금 비로소 사건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위에 기록한 바와 같이 영의정 유전이 세상을 떠나고 좌의정 이산해가 영의정으로 오르고 심수경(沈守慶)이 우의정을 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철만 빼놓고 이산해와 유성룡 기타 고관(전부 동인)들에게 대한 참소가 뛰쳐 들어왔다. 즉 동인 의정이며 고관들을 모조리 탄핵한 것이었다.

임금도 사실 지긋지긋하였다. 한참 동인이니 서인이니 야단이더니, 이번에는 역적 정여립 하나를 두고, 누구도 친했다, 누구도 상종했다, 연방 상소가 들어오는 것이 귀찮았다.

그러한 가운데, 그해 십이월 십사일에는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岩守) 이하 수십 명이 연서를 하여 동인 재상을 영의정 이산해 이하 죄다 죄목을 걸어 넣어 상소를 하니, 과연 지긋지긋하던 끝에 노염이 나서, 상소인 중 소두(疏頭) 열 명을 잡아 올리라 명하였다. 그런데 기괴한 일은 대간이며 대학생들이

『상소하는 무리를 잡아 오시면 이는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오니 중지합소서.』

하여 그냥 놓아주고 말았다.

연달아 이런 일이 생기는 한편으로는 역적 정여립의 부하의 문초 공사가 연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가운데서 가장 수상한 것은 사변 돌발 당시의 우의정이요 위관으로 있던 정언신의 태도였다. 정언신은 처음에는 시치미를 떼고 위관에 앉아서, 죄인보다도 죄인을 알린 사람 십여 명을 엄곤하여 죽인 사실이 있었다. 아마 동인이요 또한 정여립과 친교 관계가 있더니만치 자겁을 하여 한 노릇이겠지만, 중도부처가 되어 있는 동안 이 사실이 드러나서 다시 서울로 끌려 왔다. 더욱이 정여립의 당들을 문초하면 하느니만치 정언신이 평생에 여립과 친하게 지내던 형적이 드러나서, 사사(賜死)의 영이 내렸다. 그때는 유성룡(柳成龍)이 우의정이 되어있던 때인데, 임금의 노염이 너무 크니까 아무도 맥맥히 한 말도 없고, 이런 때에 강직하게 말을 하는 정철의 얼굴만 모두 슬금슬금 보았다.

정철은 또다시 정언신을 위하여 한마디 안 할 수 없는 입장에 섰다.

『전하. 아조(我朝) 이백 년에 아직 한 대신을 죽인 일이 없사와 송조(宋朝)에 지지 않는다 자랑하여 왔습니다.』

임금은 잠잠히 듣고, 언신의 사사령을 걷고 먼 곳에 귀양을 보냈다.

일단 귀양 갔던 이발(李潑) 형제며 백유양 등이 또다시 모두 적초(賊招)에 불리어 서울로 잡혀 오게 되었다.

그때의 문초 방법이 어떠하였는지는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 문초를 당하고 귀양 가는 사람들은 대개가 가는 도중에 죽어 버린다.

두 번째 잡혀 온 그들은 모두 장하에 죽고 말았다.

이러한 가운데 또 한가지의 기괴한 일이 있었다. 즉 이발의 늙은 어머니와 몇 살 난 어린 아들이 정여립과 이발의 교분 관계를 조사하기 위하여 금부에 갇혀 있다가 압슬에 죽었는데, 그 죽은 날짜가 매우 해괴하였다.

후일 삼백 년을 두고 동인의 후예인 남인이며 북인들은, 그 죽은 날짜가 경인(庚寅)년 4월이라 하고, 정철의 후손과 서인들은 신묘년 4월이라 하는 것이었다.

경인 4월이면 정철이 위관 때이고, 신묘 4월이면 유성룡이 위관 때의 일이다. 그런데 정철의 후손들은 임진 난리 때에 정철이 안주 백상루에서 유성룡을 만나서, 어찌 그대는 무죄한 늙은이와 어린애를 구해내지 못하였는가고 힐책하였다 하며 유성룡의 후손은 「그런 일이 없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항복의 「백사집」에 보자면 「정철이 위관으로 치죄를 함에 후일 공론의 죄인됨을 매우 두려워하여, 황황민급한 빛이 늘 있었고, 남벌을 애써 피했다」 하니, 이는 이항복이 당시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직접 이 옥사를 정철의 하관으로 목도한 기록이요, 항복이 정철을 위하여 천년 뒤에까지 남길 거짓 기록을 하였다 볼 수 없으니 백사의 기록을 신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백사는 동인에 속한다.

× ×

이만치 되어서도 이 사건은 결코 단락이 나지 않았다.

경인년 5월에는 정개청(鄭介淸)이라는 전라도 유생이 또한 「역적 정여립의 집터를 보아 주었다」는 죄목으로 잡혀 왔다.

정개청의 인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반대되는 기록이 있다. 개청의 문인들의 기록으로 보자면 동방의 주자라 할 만치 도에 통한 사람이라 하였다. 명유 김장생(金長生)의 기록을 보자면 정개청은 일찍이 정승 박순(朴淳)의 문하 사람으로 어떤 날 내(김장생 자신)가 정의 마음보를 보고자 그에게, 박순을 잘 아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대답이 박순의 집에 책이 많다기로 간간 책을 얻어보려 다녔노라, 즉 안면이나 있노라 하였다. 한 개 소인이다 하였다.

그의 인격은 지금 다시 토론할 필요가 없고 단지, 조사 전말만 알아보자면 정개청을 잡아다가 문초하여 보니, 집터 보아주었다는 것은 전혀 알 길이 없고, 다른 두 가지가 나타났다.

즉 하나는 소위 배절의론(排節義論)이다. 이야말로 문제거리를 삼으면 문제거리가 되고 칭찬하자면 칭찬할 논으로서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그때의 사람들의 심리를 웃을 뿐이다.

〈배절의론〉이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절의라는 것은 여사여사한 것인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절의의 이름만 취하고 실(實)은 잃어버렸다」는 뜻의 내용으로, 후세의 소위 실상 없는 허명의 절의를 욕한 글이었다. 동한(東漢)절의를 배척한 것으로서, 글의 제목은 〈배〉자는 없고 절의론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 동한절의를 배척하였으니 이것은 절의를 배척한 논이라─죄를 만들자는 편에서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후일 그의 후손이며 후생들의 변무(辯誣) 상소에는, 어디 거기 배(排)자가 있습니까? 없는 배 자를 억지로 끼어서 죄목을 지었습니다 하여, 그야말로 본의를 저버린 글자의 말절의 다툼이 되었다.

둘째 죄목은 정개청이 정여립에게 「도의 고명(道之高明)을 본 이는 당대에 단지 존형뿐이외다.」라고 칭송하여 편지한 것이 발각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 임금은 노하여, 사관(詞官)에 명하여 배절의론을 조목조목 들어서 공박하는 논문을 짓게 하여 각 향교에 돌리고,

『자기 말로는 서로 알지도 못한다더니, 두 번째에는 얼굴만 서로 안다 하고, 지금 또 이런 해괴한 편지가 나타나니, 대체 도는 무슨 도를 가리킴이냐?』

하여 엄벌을 명했으나 정철이 여러 번 임금께 아뢰어서 귀양보내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귀양을 보냈다가 한 달 뒤에 죽었다.

이때에 죽은 이 정개청의 서원이 그 후 삼백 년간을 당쟁의 승부를 따라서 헐리었다 다시 서고, 섰다 다시 헐리고 하였다.

× ×

그다음 문제거리의 인물이 또 하나 생겨났다. 그때에 비명에 죽었고 죽은 뒤에도 꽤 오래 들추이었지만, 이 인물이야말로 아무 보잘 것도 없는 인물이 단지 당쟁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다.

일찍이 우계 성혼(成渾)의 집 근처에 한 중노인이 살고 있었다. 어떤 날 우계가 우연히 그 집에 들렀더니 인물 생김이 산림처사(山林處士) 같았다. 그래서 그 뒤 율곡과 함께 또 찾았다. 이리하여 당시의 두 거유에게 알린 바 되어 상계하여 육품직(六品職)으로 지평(持平) 벼슬을 얻고 후에 경상도 진주에 내려가 살았다.

그의 이름은 최영경(崔永慶)이었다. 그는 시(詩)도 못 지으리만치 무식하였다. 그의 아우는 한문(당시의 진서)을 몰라서 편지도 언문으로 쓰는 따위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역적 정여립의 당파의 초사 가운데 대장에 길삼봉(吉三峰)이란 사람이 있었다 하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길삼봉이란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그 뒤 차차 어디서 난 소문인지 삼봉이 아니라 최삼봉(崔三峰)이라 한다. 한데 우연히도 최영경의 호가 삼봉(陪溪記聞에 依함)이라 이 때문에 최영경이 서울로 잡혀 왔다.

이 최영경이란 인물은 효성은 지극하여 그 아버지 장례 지내기에 재산을 기울였고 형제 우애도 잘 하였지만, 그 밖에는 전혀 보잘것없는 인물인 위에 허풍을 잘 떨든지 늘 정철을 공연히 욕하여 목 베일 놈이라고 하곤 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더니만치 최영경이 감옥에 갇힌 날 문사낭청 이항복은 부러 위관 정철을 조용히 만나서 그의 심경을 물었다. 그런즉 정철은 변색을 하면서, 평일에 영경이 나를 욕하였다 하지만, 사혐으로서 역옥을 다스리랴 하고 애써 풀어주어서 일단 백방이 되었다가, 그 뒤 이상한 시 한 구절이 발견되어 영경이 재국(再鞠)을 당한 다음에, 정철은 이제 다시 형추(刑推)의 영이 내릴 것을 근심하며, 옥사가 지긋지긋하여 몸서리쳤다.

이렇듯 정철은 구하고자 하였으나 재국에 몸이 견디지 못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그의 아우는 그보다 먼저 죽었다. 죄목은 늘 언문 편지로 조정의 동태를 자기 형에게 기별하였던 때문이다. 후일 이 최영경 죽인 죄목이 처음 한때는 정철이라 하다가 후에는 성우계(成牛溪)에게 갔다가 마지막에는 정철에게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역옥 사건은 끝이 났다. 그러는 동안 서인의 쟁파전은 아직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의 영의정 이산해는 꾀를 잘 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좌상 정철과 우상 유성룡을 불러 가지고 임금께 세자(世子) 책립하기를 청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약속을 한 날 저녁 그는 임금께 가장 총애받는 인빈(仁嬪)의 오라비 김공량(金公諒)을 불러서 한가지의 꾀를 내려 주었다.

그날 밤 인빈은 임금께 울면서

『소인은 어차피 죽을 바에는 대궐을 더럽히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서 죽겠습니다.』

고 애원하였다.

임금은 깜짝 놀랐다. 그 이유를 물었다. 즉 대답이

『지금 정승 가운데 어느 분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시고 소인과 소인의 일족을 죽이렵니다.』

하였다.

왕은 단지 껄껄 웃었다. 책봉하고 아니하는 것은 내게 달렸지 정승에게 달렸겠느냐 무슨 같지도 않는 풍설을 듣고 근심하느냐고 위로하였다.

이튿날 이산해는 몸이 아프다고 정부에 안 들어왔다. 그러나 이미 작정된 일이라 영의정을 대신하여 좌의정 정철이 그 계청을 하였다. 어젯밤에 인빈에게 듣고는 다만 웃고 말았더니, 오늘 정승의 이런 계청이 있는 것을 보니, 사실 무슨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는 듯싶었다. 그래서 천노가 지극하였다.

이리하여 임금의 미움을 산 기회를 타서 동인 측의 참소가 생겨, 정철은 드디어 극변인 강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죄목은 기축년에 호남 유생들을 꾀어서 명경 대부들을 참소하여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과연 서인 측에게는 커다란 경악인 동시에 다시없는 타격이었다. 지금 서인 중 장로(長老)로 볼 사람은 오로지 정철 한 사람이었거늘, 그마저 원찬을 갔으니 서인의 장래는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과연 정철이 원찬되자 뒤이어 양사, 삼사 혹은 정원이 연방 서인 벼슬아치들을,

『이러이러한 죄가 있아오니 파직합시사.』

『이러이러한 인물이오니 죽음이 마땅합니다.』

하여 매일 몇 명 혹은 몇십 명씩을 벼슬을 깎으며 귀양을 보내며 소란이 컸다. 윤두수, 유근 등이 쫓겨난 것이 이때였다.

임금은 진실로 싫증이 났다. 뻔히 당쟁인 줄을 알지만 정부가 순서를 밟고 그 위에 이론을 세워 가지고 덤벼드는 데는 하릴이 없었다. 부제학 김성일의 제청으로, 죽은 최영경을 복직을 시켰다.

이러한 경인년과 신묘를 지나서 임진년의 난리가 반도 강산을 한번 뒤집어 놓았다.

이 나라의 병력은 종내 서울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까지 북으로 몽진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국난의 때에 임하여, 머리에 오른 인물은 강직일철하고 주검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정철이었다. 사지(赦旨)가 즉각에 내리고 행재소 평양으로 오라는 분부가 내렸다.

정철은 평양으로 달려왔다. 일 년 남아만에 더욱이 상서롭지 못한 환경 아래서 서로 만나니 군신은 마주 붙들고 통곡하였다.

그로부터 내내 정철은 혹은 중임을 띠고 멀리 명나라에 가고, 혹은 의용군을 모집하러 돌아다니고, 늙은 몸을 나라를 위하여 분주하였다.

× ×

이러한 가운데서 기축 역옥에 몰려서 혹은 심문받다가 죽은 사람 혹은 사형에 처하여 죽은 사람, 혹은 귀양 갔다가 죽은 사람─ 모두 수효가 적지 않은데 직접 정여립의 도당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죄 「역적 도모를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역적과 친히 지냈다」 혹은 「편지 거래를 하였다」 「재조를 칭찬하였다」 운운이니 가소로운 일이다.

정여립과 상종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사람을 죽이려면, 그때의 조사(朝士) 가운데 면할 사람이 없었으니, 즉 정여립은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니, 동문수학의 친구도 적지 않을 것이요 한때 벼슬을 살았으니 임금 이하 조정의 당상 당하, 거의 다 알았을 것이요, 비상한 재사라 칭송을 들었으니 유림이 거의 다 상종하였을 것이요, 동인(東人)에 들었으니 동인은 거진 서로 알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왜 어떤 사람은 「정여립과 상종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죽고, 어떤 사람은 걸리지 않았느냐?

과연 편당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었다. 단지 당쟁에 걸려들기 때문에, 꼭 같은 일을 하고도 「죽는 사람」과 「안 죽는 사람」이 갈린 것이었다.

임진년의 커다란 국난─ 이 가운데서 이순신이 옥에 갇혔던 것도 오로지 원인이 당파싸움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국난보다도 당이 더욱 긴하였다. 커다란 국난 중에서도 이 갸륵한 사류들은 그냥 동서당을 갈라 가지고, 뻔히 불리한 줄을 알면서도 자기네 당파 중 일인이 주장하는 의론이면 극구 찬성하고 다른 당파에서 주장하는 의론이면 좋은 줄 알면서도 극구 반대하여 싸움은 그냥 계속되었다.

× ×

난리가 끝난 뒤에는, 어지러워진 국가 수습은 제쳐놓고 당쟁은 더욱 커갈 뿐이었다.

이 당쟁의 시시로의 승패는 기축 사변 후보에 역력히 나타났으니, 삼백년 후 위걸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의 거대한 철퇴가 팔도 삼백 주의 서원(書院)을 죄다 때려 부수기 전까지는, 정개청의 서원이 헐리었다가는 다시 서고, 섰다가는 다시 헐리고 한 것이 모두 한 정개청을 존경커나 수모하는 데서 나온 바가 아니요, 오로지 편당 싸움의 그것은 리트머스(試驗紙)였다.

서인 측에서 승리를 할 때는,

『정철은 강직한 재상으로서 기축 사변 때에는 정개청과 최영경 등을 구해 내려다가 힘이 자라지 못한 허물은 있지만, 애써 구해 내려던 증거는 여사여사 합니다.』

하여, 정철의 벼슬을 다시 줍시사고 하고, 서인 측이 꺾이는 때는 처음에는,

『정철은 간물로서 최영경, 정개청의 옥사를 맡아볼 때에, 겉으로 구하는 체하고 이면으로 얽어 죽였사오니 정철의 벼슬을 깎고 정개청과 최영경에게 도로 벼슬을 줍시사.』

하다가 차차 변하여, 「겉으로 구해내는 체하였다」는 말도 없어지고,

『정철은 비상한 간독물로서, 호남 유림의 종장 정개청이며 산림처사 최영경 등의 옥사를 맡아보면서 무죄한 줄을 뻔히 알면서도 죽였습니다.』

하여, 정철 대 정개청 혹은 최영경으로, 그 삼백년간의 싸움의 대략을 이 아래 소개하고자 한다.


下篇

[편집]

임진년에 시작된 난리는 그 뒤 7년간을 계속되어 무술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막을 닫았다. 이 짧지 않은 기간을 온 국력을 모아서 적을 방비하여야 할 것이어늘, 이 갸륵한 사류(士類)들은 적보다도 편당에 위주하여, 적에게 쫓겨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도 연해 연방 자기네 당파를 세우고 다른 당파를 꺾기에 분주하였다.

× ×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아서 노구(老軀)를 아낌없이 국사에 분주하던 정철(鄭澈)은 갑오년에 드디어 세상을 떠났다. 이때는 난리가 임시로 약간 중단된 때었다.

서인(西人)의 장로(長老)격인 정철이 없어지자 동인(東人)의 기세는 놀랍게 일어났다.

정철 떠난 지 수일 후에 벌써 동인 측의 책동은 시작되어, 수년 전 정여립(鄭汝立) 역옥(逆獄)에 빗걸려들어 죽은 최영경의 신원(伸寃)과 추증(追贈) 문제가 일어났다.

사실 말하자면 최영경 같은 사람 하나가 죽었으나 말았으나 아무 관계가 없는 바였다. 최영경은 학문으로도 아무 보잘것이 없었으며 시(詩)조차 지을 줄도 모르느니만큼 무식하였으니, 사류(士類)들의 존경이나 애모를 받을 아무 근터리도 없는 사람이었다. 최영경을 그렇게 추켜세우자는 이유는 최영경 그 사람을 애모하는 때문이 아니라, 다른 한 사람을 공격하자는 한 복선에 지나지 못하였다.

최영경이 신원이 되고 추증이 되자, 제2단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즉 최영경은 인제 〈훌륭한 인물〉이라 판이 박혔으니 최영경의 원수는 나쁜 인물이라는 이론이 성립되게 되었다.

동인(東人)들은 누구를 최영경의 원수로 만들까고 갈팡질팡하였다. 서인(西人) 중에 어느 두드러진 한 사람을 최영경의 원수라 만들어 놓으면, 서인의 기세를 크게 꺾을 수가 있을 것이었다.

처음에는 「정철이 최영경을 몰아 죽였다」 하여 최영경 죽인 죄를 정철에게로 돌리다가 정철에게는 다른 죄목을 돌릴 수가 없으므로 일단 중지하고 최영경 죽인 죄목을 성우계(成牛溪)에게로 돌려 보았다.

그러나 그 죄목을 성우계에게로 돌려보니 우계는 유림(儒林)에 꽤 명망이 벌써 높은 사람이라 그 악명(惡名)이 잘 붙어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다시 정철에게로 돌렸다.

간, 헌, 금(諫憲禁)의 각 부에서는 연하여, 「정철은 간물로서 이전에 영경이 자기를 욕한 것을 원함하고 기축(己丑) 역옥 사건에 자기가 위관(委官)이 된 것을 다행히 여기어 최영경을 잡아 오게 꾸미고, 겉으로는 구하는 체하면서 뒤로 얽어 넣어서 종내 영경을 죽여버렸습니다. 지금 성총(聖聰)이 최영경의 원통함을 통촉하시고 추증(追贈)까지 하셨은즉, 이 간물에는 또한 추죄(追罪)를 하셔야 하실 것이올시다.」

갑오년 5월에서 시작하여 그해 십일월까지를 하루도 건느지 않고 정부에서는 떼를 지어서 임금께, 말로서 혹은 글월로서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었다.

물론 간간 서인의 후예들도 있어서,

『정철이 그때 법을 맡은 대신으로 앉아서 힘써 최영경을 살려내지 못한 죄는 있을지라도, 구해보려고 애쓴 형적은 현저하오니 「무죄한 사람을 구해내지 못한 죄」로서 정철을 벌하시면 정철의 죽은 혼도 달게 받겠습지만 얽어 죽였다 하면 불복하리다.』

하고 상계를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런 사람이 어떻게 생기면 삼사 정원 금부가 함께 들고 일어서서 공격을 하여 여지가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난리는 조금 뜸하였다 하지만, 전후의 수습이며 정돈은 아직 그냥이었고 또 다시 언제 일본 군사가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시절이언만, 온 정부는 그쪽은 둘째 문제로 삼고 이미 죽은 정철의 관직(官職)─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깎기에 급급하였다.

임금도 너무 지긋지긋하여,

『지금은 군신이 다만 창을 메고 군사를 훈련하여, 적을 칠 일을 생각할 것이요. 그 밖의 다른 일은 도외에 둘 것이니, 이런 소요는 스스로 짐작하여 물론(勿論)함이 옳지 않은가?』

하면 이 야릇한 사류들은 도리어,

『국시(國是)를 붙잡는 일은 하루가 늦으면 하루가 더 나라이 위태로움이요, 1년이 늦으면 1년이 더 위태로운 일이오니 소요하다 하여 어찌 가만있으리까?』

하여 죽은 정철의 관직 깎는 것이 지상 천하의 최대 위엄인 듯이 날뛰었다. 이 무리의 가장 급진론자가 김우옹, 기자헌, 이개(金宇顒, 奇自獻, 李墍) 등이니, 김우옹은 대사헌(大司憲)이요 이개는 대사간(大司諫)이요 기자헌은 장령(掌令)으로 모두 동인(東人)의 쟁쟁한 파들이요 당시의 영의정은 역시 동인 유성룡이었다.

이리하여 드디어 십일월에 가서 죽은 정철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 ×

이리하여 최영경은 죽은 뒤에 복직 추증 등이 모두 동인의 뜻대로 되었고, 서인의 장로 정철은 「최영경을 겉으로는 풀어주는 체하고 속으로는 얽어 죽였다」는 죄목으로 죽은 뒤에 관직이 깎이어 죄를 받았다.

겉으로 푸는 체하고 속으로 얽었다는 점은 그 당시에도 많이 동인, 서인 새에 논란이 된 것으로서 서인 측의 주장은,

『겉으로 풀었다는 것은 형적(形跡)이라 눈에 보이는 일이요, 속으로 얽었다는 것은 심적(心跡)으로 증거가 없는 일이니, 어찌 무형한 심 적을 빚어내어서 선사를 모함하느냐?』

하고 동인 측에서는,

『최영경은 평소에 정철을 간물이라 욕하였으니 정철은 이 원혐으로 최영경을 얽어 죽였다.』

하여 증거의 필요를 인정치 않았고, 당시의 대소 관원이 거진 다 동인이라 이 증거 없는 결론도 성립이 되었다.

그러면 정철이 최영경을 풀어주려고 〈겉으로〉 힘썼다는 형적뿐은 동인 측에서도 부인치 못한 바이니 그 사람의 일단은 위에도 기록한 바니어니와 더욱이 동인 측의 기록으로서 「최영경이 이렇듯 강직한 인물이라.」는 증거를 들기 위하여 이런 것이 남아 있다

『옥중에서 공(최영경)이 병이 중하니 위관(정철)이 자주 의원(醫員)을 보내어 구호하는 체하고 마지막에는 정삼품의 의관까지 보냈는데 그 의관이 공(최영경)을 진맥코저 굳이 청하니 공은 이를 거절하며 내 병은 정철이 고칠 바가 아니라 하였다. 운운』

최후까지 최영경을 구하여 보려 한 형적뿐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사천리의 세로서 서인을 몰락시키려는 동인들에게는, 언제 증거를 구하고 이론을 세울 겨를이 없었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기축년 사변 시에 역적 정여립과 교분이 깊었다는 죄명으로 죽은 이발 백유양(李潑, 白惟讓) 등까지도 모두 정철이 죽였다고 돌려 꾸며 놓았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는 그때는 이산해, 정철, 유성룡(李山海, 鄭澈, 柳成龍) 세 사람이 함께 위관(委官)으로 있었던 때라, 이발, 백유양을 사지(死地)에서 구해내지 못한 허물은 이산해, 유성룡 등도 함께 져야겠거늘 이산해와 유성룡은 동인이라 그 속에서 벗어나고 정철 혼자만이 죄를 쓰게 되었다.

× ×

순서는 거꾸로 되었지만 정철에게 죄안을 돌릴 증거를 얻기 위하여, 동인 측에서는 기축 당시 역당에 걸린 사람들을 고소한 무리들을 모두 잡아서 고문을 하였다.

『정철이 여사여사하라 시키는 대로 우리는 행한 따름이올시다.』

이러한 대답을 얻기 위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율(律)에는 수(首)와 종(從)이 다른데 네가 그냥 버티면 「수」로서 논(論)할 것이고 만약 정철을 끌어 수범으로 삼으면 너는 종범으로 감사(減死)가 될 것이 아니냐?』

하여 양천경, 강현(梁千頃, 姜俔) 등의 토사를 얻어 정철의 죄안의 증거를 삼았다.

이렇게까지 성공이 되니 그 뒤부터는 동인들은 자기네들의 의론과 주장 등을 가르켜 「공론」이라 하고, 서인 측들을 지목해 「당파를 웃는 무리」라 하여 「사론 편의」라 일축하고 하였다. 때는 아직도 임진년에 쳐들어온 일본군사들이 경상도 각지에 그냥 진치고 있어서 언제 다시 전쟁이 시작될지 예측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시절이었다.

× ×

이제는 사건의 시초인 기축년에서 비롯하여 그 뒤 삼백년간을 문제를 지어오던 정개청(鄭介淸)과 정철과의 관계─ 다시 말하자면 동서 당파의 흥쇠에서 생겨난 정개청 대 정철의 씨름을 보기로 하자.

위에도 기록한 바와 같이 정개청은 전라도 나주 유생으로, 처음에는 역적 정여립의 집터를 보아 주었다는 죄목으로 잡혀 왔다. 그러나 조사한 바에 의지하면 집터 보아 주었다는 말은 증거가 없고, 그 대신 다른 죄목이 드러났는데, 그 하나는 동한절의(東漢節義)를 배척한 「절의론(節義論)」이니 국청에서는 이 글의 내용이 절의를 배척한 것이니 「배절의론(排節義論)」이라 하여 임금도 매우 노여워서 엄히 치죄하기를 명하였다.

또 죄목의 하나는 정개청이 역적 정여립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는데, 그 사연 중에

『당대에 도(道)의 고명(高明)을 본 이는 오직 존형(尊兄) 한 분뿐이라.』

지극히 아첨 칭송한 언구가 있는 것이었다.

최영경의 주검에 씌워졌던 죄목을 씻을 때에 동인 측에서는 이 정개청의 죄목까지 아울러 씻어보려고 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도 임금의 기억에 분명히 남아 있을 때로서, 임금은 노염을 내면서,

『동방인이 외람되이 저술을 한다는 것도 과하거니와, 더욱이 절의를 배척하단 웬일이냐? 그 위에 역적에게 대하여 도의 고명을 본 이 존형뿐이라고 아첨 칭송하였으니 도는 대체 무슨 도란 말이냐? 정개청의 죄목은 이것이지 역적에 가담하였다는 것은 아니니 다시 의론치 말라.』

고 엄비가 내렸다.

임금의 뜻이 너무도 엄하였으니만치 한때는 다시 정개청에 대하여 의론을 꺼낼 생각도 못하였지만, 을미년 봄에 정개청의 제자 나덕윤(羅德潤)이 그 운동을 다시 시작하여 처음 상소가 올라갔다. 그 상소문의 대략 뜻은

『정개청은 고결한 선비로서 일찍이 절의론을 지었는데, 정개청을 미워하는 무리가 이전의 논의 위에 「배(排)」자 하나를 더 놓아서 참소를 하였으나, 정개청이 무식한 사람이 아닌 이상에 어찌 글의 제목에 「배(拜)」자를 넣으리까? 원죄올시다.』

하는 뜻이고, 그 이듬해인 병신년 1월에 또다시 나덕윤의 상소가 있었는데 이번 것은 먼젓번 상소에 좀 더 부언을 하여서, 정철을 더욱 욕하고 기축 사변 때에 죽은 이발 형제까지 변명하여,

『이발의 형제가 역적과 깊이 사괴인 죄는 죽어 마땅하오나, 형제의 우애가 지극하오니 충신은 효우의 문에서 생기는 법이라 아울러 용서하여 줍시사.』

하는 것이었다. 정유년에는 이 강역에는 임진 난리의 뒤꼬리인 제2차의 난리가 또 생겨났다. 그리하여 난리는 계속되어 무술년으로까지 넘어섰다. 명장 이순신이 죽은 것도 이 무술년이었다.

온 강역은 지금 난리에 쌓여서 사직조차 위태로운 이 무술년에, 조수홍(曹守弘)이라는 갸륵한 선비는 또 붓을 가다듬어 가지고 정철을 욕하고, 정개청이며 이발 형제 유몽정 등의 신원을 하는 것이 국가 흥망 결정의 최대 요건이라는 듯한 상소를 올렸다.

그다음 해인 기해년에는 나덕윤의 동생 나덕준 등이 또한,

『정개청 같은 성현이 간물 정철의 참소로 빗걸려 원사하였사오니 지금 적(일본 군사)이 물러가고 국체가 안돈되려는 이때에 무엇보다 도 먼저 이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옵니다.』

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상소에 대하여 임금의 꾸준한 비답은,

『정개청이 성현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역적에게 보낸 비굴하고, 아첨하는 그 편지는 무엇이냐. 이것이면 넉넉히 왕법(王法)이 물을 바이며 꼭 역적이라 지목해서 국문한 바가 아니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국문이 혹은 좀 과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넉넉히 후계(後戒)가 되리라.』

하여 못내 미워하였다.

사실 임금은 그때에 소위 원사하였다는 무리들에게 대하여, 일호도 동정하지 않고 도리어 벌이 헐하지나 않은가고 감시가 엄중하였다. 사변 돌발한 기축년의 이듬해인 경인년에 심수경(沈守慶)을 우의정을 시키고 정철은 좌의정으로 승차하고, 정철이 맡아보던 위관(委官)의 직을 심수경에게 돌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심수경이 죄인을 감싸주는 듯한 기색이 보인다고, 임금은 노염이 대단하여 하마터면 심수경도 큰일을 겪을 뻔한 것을, 겨우 애걸하여 벌을 면하고 임금은 다시 위관의 직을 정철에게로 돌렸다.

이 점으로 보자면 임금은 죄인에게 조금이라도 동정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고 겸하여 정철은 죄인 심문에 꽤 엄중하던 것도 알 수 있다. 정철도 관대히 심문하였더면 임금은 다시 정철을 갈고 또 다른 사람으로 위관을 삼았을 것이다. 뿐더러 이발 형제, 백유양, 조대중 등이 죽은 뒤에, 임금은 그들을 미워하는 나머지에 그 집을 적몰(籍沒)할 일을 대신들에게 의도하였다. 그러매 그 의논의 결과는,

『역적 도모를 하였다는 자복이 없사오매 적몰은 과한 듯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상고하고,

『역적이 아니라도 적몰하는 법이 있나니 곧 적몰하라!』

엄명하여 드디어 적몰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정개청이며 조대중, 이발 형제들이 직접 역모에는 관여가 없는 것을 임금은 뻔히 알면서도 극형을 주장하여 굽히지 않은 것이었다.

× ×

정부에서는 서인(西人)은 완전히 몰락을 당하였다. 정승에서 비롯하여 한낱 녹사에 이르기까지 벼슬자리는 죄 동인이 차지하였다.

이렇게 서인이 없어지고 동인의 독무대가 되자 동인 자체 내에서 또한 분해작용이 시작되었다. 동인이라는 당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면서 남인 북인(南北人)으로 갈라졌다.

이것은 동인 중에도 군자의 풍도를 띈 이원익 이덕형 등의 재상과 간교한 성격의 이이첨, 정인홍 등이 자연 분해되어, 전자는 남인이라 하고 후자는 북인이라 하게 된 것이었다. 그 뒤 북인은 다시 갈려서 대북 소북(大北小北) 등으로 갈리고 또다시 골북, 육북(骨北 肉北) 등으로 분파되었다.

그러면 서인은 어떻게 되었나?

서인의 장로며 조금이라도 이름있는 사람들은 모두 몰락을 당하고, 지금 동인으로 가득 찬 정부에는 어디 붙을 구석도 없었다.

그러나 후일 인조대왕조부터 대원군 시대까지 근 삼백년간을 거진 정부를 독차지하여 서인의 세력은 그때에는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암암리에 증장되던 것이었다.

서인의 세력의 근원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가벌이었다. 명경(名卿)의 줄기 또는 종실의 인척(姻戚)이 대개가 서인─즉 전배(前輩)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동인─즉 후배들은 지금 아무리 온 정부를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뿌리가 깊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욱 무서운 근원은 학벌이었다.

당년의 두 거유(巨儒)─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직접 스스로 서인이노라고 표명은 안 하였지만 끝끝내 동인에게 배척을 받았으매 서인이었다.

조선 유교의 대가들은 대개가 이 두 거유의 제자 가운데서 생겨났다. 더욱이 이이의 제자 김장생(金長生), 또 그의 제자 송준길, 송시 (宋浚吉, 宋時烈) 등의 걸출이 생겨나서 조선 유교를 지배하였으매, 지금 아무리 동인의 세력 천지라 하나 장차 서인이 다시 고함 지를 날은 문벌과 학벌의 아래 은연히 감추어 있는 것이었다.

× ×

역옥 사건이 발생한 기축년에서 비롯하여 제십사 년째인 계묘년에 안중묵(安重默)의 상소가 올라왔다. 그 뜻은 역시 정개청은 고결한 학자로서 절의론을 지었지 배절의론을 지은 것이 아닌데, 간신(奸臣)이 농간하여, 색북에서 옥사하였다는 뜻이고, 이 상소문에 좀 유다른 것은 「문자의 농락」이 꽤 섞이어 있다는 점이다. 즉 임금이 정개청을 논함에

『정개청을 역적이라 지목한 바가 아니라, 역적에게 아첨 비굴한 죄상이 죽여도 마땅하다.』

한 비답을 절반 꺾어서,

『전하께서도 역적으로 인정치 않으시다니 감격할 따름이로소이다.』

하고 사례를 하였다. 동시에 금부에서도 의견을 올려서 정개청의 원한을 풀어 줍시사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여전히 머리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뒤따라 최홍우(崔弘宇) 등의 상소가 오르고 병오년, 정미년 연달아 호남 유생들의 소문이 올랐지만 임금은 한결같이 모두 불윤하여 버렸다.

이듬해 무진년에 이 임금은 파란 많은 사십여 년의 생애를 뒤로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리고 왕세자가 새 임금으로 보위에 올랐다.

새 임금은 즉 광해군이었다.

× ×

이 국상 망극 중임에 불구하고 나덕윤의 상소문이 오르고 강봉람(姜鳳覽)의 상소문이 오르고 금부의 상계문이 올랐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새 임금은 직접 그 사건에 당국한 임금이 아니니만치 문자의 농락으로서 국면을 전개하려 한 형적이 현저하여,

『정개청 등이 역모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도 밝히 말씀하셨으니, 즉 대행대왕께서도 정개청 등의 원한을 분명히 통촉을 하셨사오나, 미처 풀어주지만 못하신 바올시다. 지금 사복(祠服)하시는 첫 공사로서 대행대왕이 하시고저 하면서도 미처 하시지 못한 일을 행하시는 것이 효도에 지당하옵니다.』

고 덤비어 들었다.

즉 새 임금이라 좀 만만히 본 것이었다. 그러나 새 임금이라 하되 그때 보수 사십 줄로 만만히 볼 바가 아니었다.

『삼 년을 치르기 전에는 의론치 못하리라.』

새 임금의 꾸준한 비답이 이것이었다.

때는 정부에는 서인이란 그림자도 없고 동인의 분파인 남인과 북인의 대립이 차차 격화하여 가는 때였다.

『삼 년을 치른 뒤!』

이 한 마디를 방패로서 새 임금은 완강히 모든 의논을 물리쳤다.

그러나 삼 년이라는 날짜가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경술년 11월 대행대왕(선조대왕)을 태묘에 제한 뒤에 다시 말썽은 시작되었다.

세월도 적지 않게 흘렀다. 임금도 바뀌었다. 그러니만치 상소문의 말도 훨씬 달라졌다. 즉 선왕의 비답을 두 토막에 꺾어서 웃 토막만 내어 들고,

『선왕께서도 역모가 아니라는 것을 통촉하셨으나 미처 신원하여 주지 못하신 분이오니 선왕의 유업을 전하께서 하셔야 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경술년 이월 초에 양사가 연계하고 그 십칠일에 옥당이 차자(箚字)하고 십구일에 또 옥당이 차자하고, 이리하여 사월 이십오, 육, 칠, 팔, 구에서 오월 십팔일까지, 그야말로 임금과 신하 간의 씨름이었다. 하루도 건느지 않고 씨름하듯이 달려드는 데는 웬만한 임금이면 벌써 꺾여 나갔을 것이었다. 그러나 부왕을 닮아서 억센 성격을 가진 이 임금은 그냥 그 매번을 『불윤(不允)』의 단 두 자로서 대하였다.

이러한 씨름이 계속되어 이 억센 임금도 거진거진 근기가 빠져 갈 때에 소위 또 다른 역변(逆變)이란 것이 또 생겨났다.

이 변란은 별것이 아니었다. 동인의 분파인 북인인 이이첨, 정인홍 등이 남인 이원익의 파며 서인 잔당 김제남 등에게 대한 쿠데타였다. 이 쿠데타로서 남인까지도 모두 정부에서 쫓겨나고 북인 독무대의 시대가 현출하였다.

이보다 조금 전인 신해년에, 나덕현(羅德顯) 등의 상소와 나덕원(羅德元) 등의 상소와 의론과, 병진년에 유광렬(柳光烈) 등의 상소가 역시 뜻은 대동소이하고, 그해의 금부 회계(回啓)에 전날과 약간 다른 것이 있었으니, 즉 전일의 것은 모두 「정철이 겉으로는 푸는 체하고 이면으로 얽어 넣었다」 하였는데, 이 금부 회계에서 비로소 「겉으로 푸는 체하였다」는 말은 없어지고 정철이 자초지종으로 얽어 죽였다 하였다. 짐작컨대 사건 발생시부터 근 삼십 년이 지나고 더욱 임진리에 문적은 모두 없어지고, 목도한 증거인들도 차차 저세상으로 갔는지라, 정철의 죄목이 더 중하여진 모양이었다.

임금도 드디어 근기에 졌다. 의윤(依允)의 두 자는 드디어 내렸다. 이리하여 정개청의 사당이 서고 공식으로는 복관이 된 것이나, 임금은 그 직첩을 이리 밀고 저리 밀면서 좀체 내려 주지 않았다.

병진과 정사년에 연하여 어서 직첩을 줍시사는 상소가 올랐으나 역시 직첩은 좀체 내리지 않았다.

이렇듯 밀리고 밀리는 동안 다른 큰 사변이 돌발하였다.

× ×

정부에서 쫓겨난 서인(西人)의 무리─

그러나 서인의 배경으로는 가벌이라 하는 것과 학벌이라 하는 것이 있었다.

이이와 성혼을 종장으로 하는 두 개의 학벌은, 은연중 널리 퍼져서 인제는 온 조선의 유교를 지배할 만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 유생들이 모두 (동서 분당으로 논지하자면) 서인에 합류되는 사람들이었다.

뿌리가 없이 자란 북인들은 현재 정부를 점령하고 있다 하나 언제 흔들림을 볼지 알 수 없는 무리였다.

현재 권세는 못 잡았으나 학벌과 문벌에 깊이 뿌리를 박은 서인들은 장차 한 번 고함칠 날이 반드시 올 것이었다.

드디어 그 날이 이르렀다.

김류, 이귀 등 서인의 파가 드디어 들고 일어섰다. 현재의 임금을 위에서 내렸다.

그러고 능양군(綾陽君)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여 반도 강산에 군림케 하고 서인의 정부를 조직하였다.

대북, 소복, 골북, 육북─ 북인이라는 지목을 받는 사람은 몰살을 하였다. 한때 온 정부를 잡고 있었더니만치 적지 않은 세력 범위를 갖고 있던 북인들은, 이번의 서인의 쿠데타에 모두 몰살을 당하고 겨우 스물여덟 집만이 이 화를 면하였다. 즉 서인들이 정권을 잡음에 장래 다시 북인이 일어선 기회로 근본적으로 없이하기 위하여 북인이란 것은 종자도 없이 없애버린 것이었다. 스물여덟이 겨우 새어 나왔다.

이렇게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그 세 삼십여 년간을 남인 북인의 세력 아래 숨어 지나던 정철의 아들 종명과 홍명(宗溟 弘溟) 등의 상소가 갑자년 여름에 올라왔다. 그 대략 뜻은,

『아비 정철이 본래 강직하고 남을 용납지를 못하여 미움을 많이 샀는데, 기축 역옥에는 최영경이 빗걸려 들어온 것을 애써 구하려 하였지만 구하지 못한 허물은 있지만 구하려던 증거는 여사여사하오며, 정언신(鄭彦信)의 형제도 여사여사히 구하려고 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얽어 죽였다니 억울하옵고, 이발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이 고문하에 죽게 된 것은 유성룡과 이양원의 위관된 때의 일이온데, 이 죄까지 아비(정철)에게 오는 것은 기괴천만하옵고, 조대중(曹大中)이 죽은 것은 심수경(沈守慶)이 위관 때로서 심수경은 그때 조대중의 문제로서 선조대왕의 노염을 사서 체직이 된 일까지 있었는데, 조대중 죽인 죄목까지 아비에게로 돌아왔으니, 그때 그 사건에 죽은 사람은 (누구가 위관 때에 죽은 사람이건) 모두 죄가 아비에게로 돌아오니 이것이 웬일이오니까? 임진년 변화를 겪어서 그때의 문적이 없어지고 그때의 사람이 또한 없어지니 신의 아비의 죄만은 나날이 더하여 갈 뿐이로소이다. 지금 성명이 새로 등극하신 이 날에 신의 아비의 모든 억울한 죄안을 씻어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새 임금(인조대왕)은 여기 대하여,

『정철이 살았을 때에 치옥(治獄)이 과하였다는 죄목으로 정배를 갔다가 난리에 사를 입고 다시 대신의 줄에 섰었으니, 이미 죄에 대한 벌은 받았는지라, 죽은 뒤에 다시 관직을 깎는다는 것은 심한 듯도 하니 대신들과 잘 논하여 조처하리라.』

하고 그해 오월 이십팔일에 관직을 다시 주고, 그 이듬해에는 정개청 등의 관직도 다시 주었다.

× ×

아무리 당파의 싸움이 심하다 할지라도 이미 삼십여년 전에 죽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모두 관직까지 내려 주었으니, 이만하였으면 사건은 완전히 결말을 지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사건 발생에서 칠십년을 경과한 효종조 팔년 정유년에 말썽은 다시 시작되었다.

율곡 이이의 제자 김장생(金長生)이요 김장생의 제자인 송준길(宋浚吉)이 구월 이십칠일 경연(經筵)에서,

『옛날 선조대왕 때 정개청이라는 사람이 배절의론을 지은 것이 발각되어 선조대왕께서는 놀라서 사신(詞臣)에게 그 반박문을 지어 널리 반포케 하셨고, 또 정개청은 역적 정여립에게 매우 아첨하는 편지를 하였으며 정승 박순에게 교육하는 바가 되었으나 후에 박순을 배척한 위인인데, 지금 무안현(務安縣)에 정개청의 서원이 있사오니 이것은 통분한 일이올시다.』

고 계달하였다.

임금(효종대왕)은 송준길을 절대로 신임했더니만치 즉시로 정개청의 서원을 헐어버리라 엄명하였다. 이리하여 정개청의 서원은 즉시 헐리었다.

이 일이야말로 칠십년 전에 김우옹, 기자헌 동배가, 죽은 정철의 관직을 깎은 일에 대한 순전한 복수이지, 그밖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정개청은 그의 제자들의 말에 의하건대 조선에서 이황(李滉)과 어깨를 겨눌 만한 거유라 하나 여기는 얼마의 에누리가 있다 칠지라도 상당한 조예가 있는 학자이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그만한 학자에게 대하여 그의 후진들이 서원을 세우고 제사를 하는 것은 예의에 당연한 일로서 새로이 무슨 큰 흠절이 드러났으면 어니와, 그렇지 않은 이상은 새삼스럽게 문제를 삼을 것이 아니었다.

과연 이 서인 전성의 정부에, 정개청의 증손자 국헌, 경헌(國憲 敬憲) 등의 상소가 들어왔다. 대략의 뜻은, 개청은 박순과 사제지분은 없었던 것, 개청의 지은 바는 절의를 배척하는 논이 아니었던 것, 등등으로서 이제 새삼스러이 서원을 헐고 위패를 불사르고 그릇을 개천에 던지고 위전이 관가에 몰수되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상소문은 임금께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정원(서인으로 조직된)까지 갔다가 도로 퇴맞았다.

동시에 윤선도(尹善道)의 상소가 연달아 두 장이 들어왔다. 하나는 「정개청의 후손의 상소문을 정원에서 그냥 돌려 내보낸 것은 부당하다」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누구 수천 어로써 정개청의 일을 변명한 것인데 개청을 변명하기에 급급하여 정철에게 죄목을 씌운 것은 나덕윤 등의 상소와 비슷하고, 또한 이 윤선도는 서인 유신(西人 儒臣)인 송준길이며 송시열에게 밀리어 한직(閑職)에 있던 사람이니만치, 서인에게 대한 원한이 사무쳐 송준길 등을 욕하기에 급급한 형적이 역력하다. 이 상소문도 정원이 그냥 억류하여 버렸다.

사실로 서인 전성시대에 있어서 이 신용 잃은 노신의 상소 따위가 아무 효력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세월은 흐르기를 십 년, 이십 년─

효종조도 지나고 현종조도 지나고 숙종조 초 을묘년, 사건 발생의 기축년으로부터 근 구십년을 지난 뒤였다.

역대 왕조 중 당쟁이 가장 어지럽게 되었던 것이 숙종조였다. 동인의 분파인 남북 중 북인은 전멸하고 남인의 잔당만 남아 있던 것이, 한창 서인들은 임금의 신임만 사려고 하고 있는 동안, 남인은 비밀리에 왕자의 신임을 얻어 두었다. 현종대왕 승하하고 숙종대왕 등극하자 임금의 왕자 시대부터 총애를 받아두었던 남인들이 일어서면서, 서인 유신 송시열 이하를 모두 물리치고 이 새 임금 아래서 남인의 세상이 생겨났다.

그러자 그 해로 나적(羅積) 등의 상소가 올랐는데 대략 뜻은 이전의 정개청 변무소와 대동소이한 위에 아울러 송준길을 욕하고 윤선도를 찬송하고, 마지막에는 사당(정개청의) 다시 세우기를 청하였고, 뒤따라 안민유(安敏孺) 형제들의 상소로 또한 뜻은 비슷하였다.

이듬해 병진 사월에 오상옥(吳相玉)의 상소가 있었다. 그 모든 상소에 송준길(宋浚吉)을 걸고 늘어져서 공격한 것이 서로 일치되는 점이었다.

이리하여 송준길의 상주로서 일단 헐리었던 개청의 서원은, 다시 숙종조 초엽에 세우기로 되었다.

× ×

그러나 남인들의 궁극의 목적은 정개청의 서원을 세우는 데 있는 바가 아니었다. 정개청의 서원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이 씨름의 전초전(前哨戰)에 지나지 못하였다. 전초전에 승리를 하자 제2단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생겨났다.

그해 (정사년) 봄으로 양몽거(楊夢擧) 등의 상소가 있었으니 그 뜻은 정철을 극도로 공격한 것으로서 거기는 팔십여년 전에 김우옹 등이 정철을 공격할 때에도 죄목으로 삼지 않았던 별별 죄목을 다 들었다.

그 가운데는 이발이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이 고문에 죽은 사건을 분명히 정철이 한 일이라 밝혀놓았다.

아직껏도 그 사건의 책임을 비슷이 정철에게 걸은 일은 있으되, 분명히 정철의 일이라 명언한 일은 없었다. 그랬는데 이 상소에서는 분명히 정철이 위관 때의 일이라 하였다. 즉 이발의 어머니와 자식이 죽은 것은 경인년 오월이라 하고, 경인년 오월에는 유성룡은 아직 위관이 못 된 때요 정철이 위관 때의 일이니 즉 정철의 소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매 이런 간물은 벼슬을 깎을 것이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이것은 선조(先朝)에서 정하신 일이니 가볍게 변경할 수 없다.』

하여 정철 벼슬 깎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그 이듬해인 무오년에는 서국빈(徐國賓) 등이 상소하여 재건(再建)한 정개청의 서원에 사액(賜額)을 합시사 하여 기미 9월 초삼일에 드디어 사액까지 하였다.

× ×

이 임금(숙종대왕)의 일대에는 남인과 서인의 기복이 너무도 잦았다.

이 임금의 초년으로부터 오륙년간은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그런데 제 육년인 경신년에 이르러서 다시 한번 정국이 뒤집히는데 서인 김석주(金錫胄)의 고변으로

『남인 영의정 허적(許積) 이하 남인 재상들이 종실 복창군(福昌君)을 끼고 사직을 엿본다.』

하여 남인 재상들은 한꺼번에 전멸을 당하고 서인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 되고 민정중(閔鼎重)이 좌의정이 되고 정배 갔던 송시열이 놓여나고 하여, 다시 서인의 세상이 현출되었다.

이 증거는 즉시 또한 정개청의 서원에 미쳤다. 전라감사의 장계가 올라왔는데 그 대략 뜻은

『지금 정개청의 서원이 있는데, 선비들은 모두 더럽게 여겨 피하지만, 불량 잡배들이 모여들어 소굴로 삼고 온갖 못된 일을 하는데 괴수 수삼인만 다스리면 남은 무리들은 저절로 헤어질 것이오니 우선 개청 서원을 헐고 괴수 수삼인만 잡아 다스립소서.』

하는 것이었다. 이 장계와 거진 동시에 유경서(柳景瑞) 등의 상소가 올랐다. 상소의 전반(前半)은 정철을 변명한 것이요 후반은 정개청을 헐어 내리고 그 서원 철훼하기와 양몽거 오상옥 등 정철을 욕한 무리들을 엄벌하기를 청한 것이었다.

그래서 임금은 그 의견을 묘당에 물었던 바 예조에서

『이 서원은 마땅히 철훼할 것이지만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니만치 자의로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여 임금도 승낙하여 정개청의 서원은 다시 헐리었다.

× ×

서인의 세상은 또 십년간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이 임금 제 십오년 기사년에 왕세자 책립의 건으로 임금과 재상(서인들) 새에 의견 차이가 생긴 것을 기회로 남인들이 다시 들고 일어서서 영의정 김수항은 파직 사사하고 송시열이며 김만중 홍치상 등을 모두 정배 보내고 다시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예에 의지하여 정개청 서원은 다시 문젯거리가 되었다. 기사년 사월 하룻날 나두하(羅斗夏) 등의 상소가 들어 왔으니, 거기는 과거 백여 년간을 두고 정개청을 옹호하는 상소문에 있던 사연을 되풀이하고 더욱 과장하여, 정개청은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성현이라 하고 끝으로는 정개청의 서원을 다시 세우고 사액을 합시사 하는 것이었다.

이리 비칠 저리 비칠, 당쟁에 질질 끌려서 줏대를 못 잡던 이 임금은 등극 초에 남인에게 끌려서 개청 서원을 세우게 하였다가, 무오년에는 사액까지 하였다가 경신년에는 서인에게 끌려서 철훼하였다가 기사년에는 또다시 남인들에게 끌리어서 서원을 다시 세우고 사액까지 한 것이었다.

다시 서원이 서고…… 사액까지 되고…… 그 뒤에 생길 일은? 무론 이번은 정철의 벼슬을 깎읍시사, 할 것이었다. 과연 신미 십일월 이십이일에는 정무서(鄭武瑞) 등의 상소가 있었는데, 거기는 그새 백여 년간 정철의 죄목으로 삼아보지 않았던 온갖 새로운 죄목이 나열되고, 최후의 결론은 이런 간물의 벼슬을 깎읍시다 하는 것이었다. 그날 스무엿샛날, 벌써 백 년 전에 죽고 죽은 뒤에 벼슬이 깎였다가 다시 복관이 되었던 정철은 또다시 벼슬이 깎이었다.

× ×

이리하여 개청의 서원이 다시 서고 사액이 되고 정철의 벼슬이 깎여서, 남인의 소원이 모두 성취되어 세월이 흐르기를 수삼년─ 갑술년에 이르러서 정국은 또 뒤집혔다. 임금은 그냥 숙종 대왕이었다.

정국이 뒤집힌 이유에 대하여는 그것만으로도 적지않은 종이가 걸리겠기에 약하거니와, 남인의 세상은 또 부러져 나가고 서인의 세상이 다시 이르렀다.

동시에 이전과 꼭 같은, 꼭 반대의 행진은 다시 시작되었다. 먼저 갑술 유월에 홍최일(洪最一) 등의 장소로서, 정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임을 역설하고 정철이 정개청 최영경 등을 애써 구하려던 행적을 일일이 밝히고, 정철의 관직을 도로 내어주기를 빌었고, 그해 시월에는 박론(朴碖) 등이 또한 동공이곡의 상소를 하여 성공하였다.

여기 성공을 하였으면 인제는 또 제2단의 과정이 있다.

임오 오월 이십육 일에 경연에서 시강관 이만성(侍講官 李晩成)이 상계를 하여 무안현에 있는 정개청의 서원을 철훼할 일을 계청하였다.

이 만만한 임금은 개청의 서원을 세 번 세우기를 허락하고, 또 세 번 철훼하기를 허락한 것이었다.

개청의 서원은 또 헐리었다. 그러매 그해 구월 십칠일에 오정훈(吳鼎勳) 등이 또 상소를 하여, 정개청의 서원 철훼함이 불가함을 극론하고, 다시 세워 주기를 계청한 것이었다.

이 상소를 하기 위하여 칠월 십팔일에 유생 팔십사인이 나주에서 모여 통문을 발하고, 팔월 십구일에는 소회(疏會)를 설치하고 십칠읍 삼백여 명이 모이고, 그 가운데서 열일곱 명을 뽑아서 상경케 하기로 하여, 이십이일에 대회의를 하고 이십사일에 상소문을 받들고 발정하여 구월 십일에 입경하여 십육일에 정원에 교섭하고 십칠일에 바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정부는 전혀 서인의 손아래 들어 있는 때라, 이 상소문이 순탄히 임금의 어전까지 갈 수가 없었다.

정원에서는 이 상소문을 받고 곧 임금께

『지금 전라도 유생들이 정개청 서원 철훼 반대 상소를 하옵는데, 개청 서원이 철훼하여야 할 것임은 선배의 정론일 뿐 아니오라 양조의 설명하심까지 있삽는데, 그래도 이런 사론을 제창하는 무리가 있사와 물리치고자 하였삽더니, 다사(多士)의 소라 하여 물러가지 않사옵니다. 어찌하오리까』

하고 여쭈었다.

그러고 임금에게서,

『받지 말라.』

는 분부를 듣고 기각하여 버렸다.

× ×

가벌과 학벌─ 이 두 가지로 단단히 무장을 한 서인의 진용은 놀라웠다. 명경 거유는 뒤를 이어서 생겨났다. 속종까지에 그래도 남인이 좀 들먹거렸지, 숙종조를 지나서는 다시는 남인의 손 속에 정권이 들어간 날이 없었다. 무론 전라도 방면에서는 유생들이

첫째로는 정개청 서원 부활.
둘째로는 정철 관직 삭탈.

이런 이단의 상소문을 준비하여 가지고, 남인의 세상이 다시 올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종조 중엽에 서인에게 빼앗긴 정권은 속종 재위 근 오십년간과 경종 재위 2년간과, 영조 재위 오십이년간과 정조 이십사년 순조 삼십사년, 헌종 십오년, 철종 십사년간 합계 삼백년간을 다시 남인의 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따라서 정개청의 서원을 다시 세울 기회도 없었다. 더욱이 정철의 벼슬을 깎을 기회도 없었다.

그 적지 않은 기간 동안을 지나는 새에, 서인도 또한 분파가 되어, 노론 소론으로 갈리는 등 여러 가지의 국부적 변동은 있었으나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을 날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상소문을 닦아 가지고 잔뜩 기다리고 있던 전라도 유생들은, 그 상소문을 바칠 곳에 바치지를 못하고 자손들에게 계전(繼傳)할 따름이었다. 이리하여 철종조도 끝난 뒤에 이 삼천리를 한 손에 잡고 일어선 사람은 남인도 아니요 서인도 아닌 대원군 이하응이었다.

대원군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쟁의 폐를 통절히 느껴서, 당쟁을 깨뜨리는 동시에 팔도 삼백주에 널려 있는 서원들까지 모두 철훼하여 버렸다.

인제는 정개청의 서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체 서원의 존재를 허락치 않으니만치 개청이고 정철이고 간에, 서원 설치를 불허하매 이백여 년을 벼르고 벼른 그 상소문들도 한낱 수지에 지나지 못하였다.

× ×

돌아보건대 선조대왕 기축년으로부터 고종 갑자년까지 누계 백년 간, 정개청의 서원이 서기 몇 번이고 헐리기 몇 번이며, 정철의 벼슬이 깎이기 몇 번이고 복관되기 몇 번이었던고? 조선 붕당사(朋黨史)와 병행하여 삼백년 간을 내려온 이 기록은 과연 추잡하고 추악한 반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무덤 속에서 몇 차례를 벼슬이 깎였다가 다시 씌워지고 한 정철은, 이 사건에 눈살을 찌푸렸을까 혹은 고소(苦笑)를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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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놓음에 임하여 한 가지 더 적고자 하는 것은 이발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이 압슬에 죽은 그 날짜이다.

정철을 미워하는 측의 말로는 그 날짜는 경인년 오월이라 한다. 정철을 두호하는 사람의 말로는 신묘년 오월이라 한다. 그때의 금부의 문부의 전부가 임진 난리에 없어저서 상고할 바이 없지만 정철을 미워하는 사람의 말로는,

『그것은 분명 경인 오월이니, 만약 신묘 오월이라 하면 그때의 위관은 유성룡으로서, 유성룡 같은 군자가 무죄한 늙은이와 아이를 죽일 이치도 없거니와, 더욱이 정철이 강계로 정배 가 있다가 임진 난리에 사를 입고 돌아올 때 유성룡과 정철이 안주 백상루에서 만났는데, 그때 유성룡은 정철에게 대하여 기축 년분에 처사 그릇한 것을 책하였다는 것이 유성룡의 일기에 있다.』

하며, 정철을 두호하는 측은 황혁(黃赫) 등 몇 사람의 일기를 증거 삼아 노파와 어린애가 죽은 날짜가 신묘년이 분명하다고 증명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철이 안주 백상루에서 유성룡을 만나서 왜 그대는 무죄한 노파와 어린애가 죽는 것을 구해내지 못 했느냐고 힐책을 하매, 유성룡은 아무 대답도 못 하였다. 그런데 저편 쪽의 말을 듣자면 유성룡이 도리어 정철을 기축년에 처사 잘못하였다고 힐책하였다 하니 기축 경인년이면 정과 유는 조석간에 만나는 새었으니 그 당장에 책망치 않고 수년간을 묵혀 두였다가 안주 백상루에서 힐책할 까닭이 없다. 신묘년에는 정철은 강계에 정배 가 있었고, 그동안에 이발의 노모와 유아가 무죄히 죽었으니, 안주 백상루에서 만나서 힐책하였다 하면 정철이 유성룡을 힐책하였을 것이다.』

하여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어느 편이 사실인지 이것은 죽은 정철과 유성룡의 혼을 불러 대질시키기 전에는 해결이 안 날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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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정여립이라 하는 한 개의 불똥에서 시작된 불은, 정철로 최영경으로 정개청으로 백 년간을 꺼지지 않고 움직였으니 이 불똥이야말로 기괴천만한 불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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