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5/명공의 신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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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年前 어느 잡지의 촉탁에 의자하여서 써주었든 것인데 역시 그 잡지에서는 某誌 主幹의 作品인 듯이 發表하엿을 뿐더러 風聞에 의지하건대 單行本으로까지 내었다 하기에 여기 著作權을 밝히고저 再錄하는 바이다.

양(梁)나라 천감(天監) 때의 일이다.

×

천자(天子)께는 한 어여쁜 총희가 있었다.

아름다운 계집을 형용함에 있어서 소위 그린 듯 새긴 듯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그림 이상 조각 이상의 아름다운 계집으로서, 그의 일빈 일소는 능히 나라를 기울일 만하였다.

고금에 다시 볼 수 없는 아름다움—

해당이 이슬을 머금은 듯, 만월(滿月)이 동산 위에 웃는 듯, 백합이 봉오리를 벙을은 듯─ 소위 미인을 형용하는 온갖 찬사를 다 들여서 그 총희를 칭송한다 하여도, 사람이 발명한 말로써는 도저히 그 아름다움을 넉넉히 형용치 못할이만치 총희의 자색은 뛰어났다.

이 아름다운 총희를 바라볼 때마다 천자의 마음은 기뻤다. 궁녀 삼천— 적지 않은 궁녀의 가운데서 천자는 다만 이 한 궁녀만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남은 궁녀들은 그다지 돌보지조차 않았다.

사람의 세상에 아직껏 존재하여 보지 못한 아름다움─ 그리고 또한 사람의 세상이 계속되는 장래 영구히 다시 생겨나지 못할 절세적 아름다움─ 이런 초인간적(超人間的) 아름다움을 당신의 총희에게서 발견한 천자는, 그 기쁨과 긍지 때문에 당신이 다스리는 넓다란 강역까지도 소홀히 하였다. 그리고 만날 총희를 앞에 불러다 놓고는 그 절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빙그레 웃고 하였다.

『폐하, 적국이 강역을 침범하옵니다.』

『응? 그렇거든 도로 물러가라고 조서(詔書)라도 내리려무나……』

『폐하, 창고가 모두 비었습니다.』

『응? 흙이라도 가져다 채워라.』

『폐하, ××장군이 흉거했습니다.』

『그럼 썩기 전에 얼른 묻으라고 그래라.』

『폐하, 가물어서 농사짓기가 힘든다고 백성들이 근심하옵니다.』

『아, 비라도 오라려무나.』

내정과 외교, 온갖 것이 모두 천자께는 귀찮고 우스웠다. 사랑하는 총희의 절세적 아름다움을 바라보노라고 세상의 온갖 일을 잊었다. 총희를 바라보는 즐거움에 방해되는 사물은 모두 시끄럽기만 하였다.

『폐하, 천하를 소신께 주세요.』

『응, 다 주지.』

『해를 좀 가까이 갖다 주세요.』

『군사를 풀어서 끌어 오래지.』

총희의 간청이면 안 들을 것이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 천자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한 가지의 생각이 늘 마음에 걸려서, 때때로 천자로 하여금 한숨을 쉬게 하였다. 그것은 다른 생각이 아니라 사람이란 영구히 젊어 있지 못한다 하는 생각이었다. 절세의 미인이고, 절세의 추부이고 위인이고 졸장부고를 막론하고 차차 나이만 먹으면 반드시 늙는다. 그리고 사람이란 반드시 늙는 것인지라, 지금 아무리 절세의 자색을 자랑하는 총희일지라도 장차는 또한 사람의 같은 길을 밟아서 반드시 주름살 잡힌 노파로 변하리라, 하는 생각이었다.

천자는 이런 일은 생각지 않으려 하였다. 불가능한 일로 믿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지 않으려 하여도 아무리 불가능한 일로 믿으려 하여도 생각지 않을 수 없음을 어찌하랴?

당신의 앞에서 천하에 다시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총희도 장차는 반드시 늙을 것이다. 그 총희의 얼굴을 만족한 듯이 바라보면서도 천자는 이런 생각을 하고 남 몰래 한숨을 쉬고 하였다.

×

천자는 드디어 한 가지의 방책을 안출하였다.

사람은 늙지만 그림은 늙지 않는다. 세월이 가면 인생은 백발로 변하지만, 젊은 시절의 자태를 그대로 따둔 그림은 장래 영구히 늙지 않는다. 총희가 세월의 탓으로 아무리 늙는다 할지라도 그 젊고 아름다웠을 적의 자태를 그림에 남겨 두면, 장래 영구히 젊은 총희를 그냥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후 비록 총희는 늙는 날이 있다 하여도, 그 화상이라도 하나 남겨 두어서 장래 마음의 위안을 거기서나 마 하자, 이리하여 천자는 총희의 화상을 하나 그려 두려 하였다.

차차 늙어 가면서 나날이 마음의 고적함이 더해 가는 천자는, 그 고적함의 유일의 위안자가 되는 총희의 아리따운 자태나마 영구히 남겨 두고 싶었다. 비록 육신의 총희는 장래 늙는 날이 있을지라도, 그림으로나마 남겨서 그것으로라도 마음의 위안을 삼고자 함이었다.

천자는 널리 화공을 구하였다. 능히 총희의 그 아름다운 자태를 넉넉히 그려내는 자에게는 높은 벼슬과 막대한 상금을 주기로 하고 널리 화공을 구하였다.

찬란한 문화를 후세에까지 자랑하는 양 나라에는 이름난 화공이 많았다. 당대에 이름 높은 화공은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천자가 총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아는 대신들은 세상 보통의 이름 있는 화공을 천자께 추천할 수가 없었다. 신필(神筆)─ 그 가운데서도 빼어난 신필을 구하여 추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선택을 소홀히 하였다가 화상이 천자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재미없는 일이 생기는 날에는, 그 화가 자기에게도 및기 쉬운 노릇이라 대신들은 화공을 뽑는 데 땀을 흘렸다.

높은 벼슬과 막대한 상금이라는 바람에 그림쟁이나 그리노라는 화공은 죄다 지원하였다. 나날이 궐하에 모여드는 화공의 무리는 장군과 같았다. 모여든 화공 중에서 어떤 자를 골라내어야 능히 천자의 마음을 흡족케 하고 아울러 자기의 책임을 다할까?

이리하여 골라낸 한 사람의 화공─(이 화공의 이름은 불행히 후세(後世)에 전하지 못했다. 혹은 장승요(張僧繇)나 아닌가 추측하는 뿐이지, 누구라고 분명히 전해지지 않았다.) 구하고 또 구하여 이 사람이면 넉넉히 총희의 아름다운 화상을 그릴 수 있으리라 하여 불리어 오른 사람.─ 당대의 명공이었다.

오천의 비단과 단청을 환관에게 들리고, 화공은 총희를 보기 위하여, 그리고 또 총희의 절세적 자태를 화폭 위에 재현시키기 위하여 대궐 내전으로 들어갔다.

희고 엷은 비단 장막이 방 가운데 드리어 있었다. 장막을 건너 저쪽에는 황금 걸상에 절세의 미인인 총희가 걸터앉아 있는 것이었다.

장막을 격하여 이편까지 이른 화공, 눈을 저으기 들어서 장막 저편을 바라보았다. 장막 뒤에 앉아 있는 총희는 마치 안개를 꿰어서 보는 선녀와 같았다. 부연 장막 뒤로, 떠오르는 달과 같은 아름다운 총희가 눈에 미소를 띄고 앉아 있었다.

화공은 잠시 총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뒤에 다시 돌아와서 손을 들어 환관을 불렀다.

『저 장(帳)을 걷으우.』

의외인 이 명령에 환관은 눈을 크게 하고 화공을 보았다. 장을 사이에 두고라도 서인(庶人)이 능히 바라 못 볼 천자의 총희,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전례에 없는 일이어늘 장까지 걷어치우라는 것은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밖에는 들을 수가 없으므로…….

『자, 빨리 걷으우.』

그러자 이런 말에 환관이 복종을 할 리가 없었다. 환관은 입을 한 번 비쭉한 뒤에 머리를 숙여 버렸다.

환관이 자기의 말을 들음직도 않은 것을 볼 때에, 화공은 잠시 뚫어지도록 환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휙 돌아서서 그냥 천자께는 다시 뵙지도 않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명공에게는 명공으로서의 관록이 있었다. 비록 제왕의 어명일지라도 단청의 붓을 잡을 만한 충분한 준비를 해 주지 않을 때에 그는 이 명예의 붓을 내던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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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공을 잃어버린 환관이 천자께 돌아가서 일러바친 그 보고는 화공에게는 매우 불리한 것이었다.

천자의 총애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자 들어왔던 화공이 붓도 잡아보지 않고 도로 퇴궐하였는지라, 그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는 환관은 자기의 책임을 감추기 위하여 허물을 화공에게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환관이 천자께 아뢴 말에 의하건대, 화공은 총희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직접 제 손으로 총희의 얼굴이며 몸을 쓸고 어루만져 보아야겠다 하므로, 그 너무도 무엄한 청에 환관이 꾸짖으며 그냥 돌아가 버렸다─ 하는 것이었다.

『폐하, 아뢰기조차 항공한 말씀이옵니다. 한 개 화공이 어디라고 감히─』

환관은 자기의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이렇게 화공을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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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천자는 크게 노했다.

서인의 몸으로서 지밀(至密)까지 들여보낸 것만 하여도 특별한 영광이거늘, 외람되이도 총희의 몸을 쓸고 어루만져 보겠단, 하늘을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거만한 자라고, 당장에 처참을 하라고 호령이 추상과 같았다.

그러나 대신들은 천자의 노염을 잠시 멈추기를 탄원하였다.

총희의 모습을 비슷이나 그려내려면 모르지만 일점일획이라도 틀림없이 그려내려면 어루만져 보아야 가능할 것이며, 그것이 안 된다면 적어도 가운데 친 휘장 뿐은 걷어치워야 될 것이라는 점과, 시녀 몇 사람은 모두 비수를 품고 화실을 지키고 있다가 만약 화공이 십 척 이내까지 가까이 가면 그때 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과, 지금 이 나라가 넓고 화공의 수효도 적지 않으나, 이 화공만한 명공은 또 다시는 구할 수 없다는 점을 누누이 설명하였다. 그리고 폐하로서 만약 총희의 모습을 따지 않으시려면 모를 일이지만, 총희의 그 공전이요, 절후인 아름다움을 뉘게 부탁을 하려면, 그 화공 이외에는 도저히 흉내 낼 사람이 없겠음을 간곡히 아뢰고, 다시 불러들여서 붓을 잡게 하십사고 탄원하였다.

이러한 간곡한 탄원에 천자도 또한 다시 마음을 안 돌이킬 수가 없었다. 총희의 초상을 그려서 장래까지 남겨 두고자 하는 변함없는 희망이 있을진대, 신필 중의 신필이라는 이름이 높은 이 화공의 힘을 빌지 않고 다른 화공에게 맡겨서 한 점의 티라도 있는 초상을 남길진대 도리어 그만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리하여 화공은 다시 불려서 대궐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가운데를 막은 막도 없었다. 화려히 꾸민 내전 안에 황금 걸상에 총희가 요염히 걸터앉아서 부채로 얼굴의 먼지를 날리며 있고, 저편 뒤에는 몇 사람의 시녀가 손을 읍하고 서서 있는 것이었다.

왼편에는 비단 폭, 오른손에는 단청의 붓─ 그리고 고요히 머리를 총희에게 돌렸던 화공은 모습을 따려던 눈을 딱 총희의 얼굴 위에 멈추었다.

과학자의 마음이었다. 과학자의 눈이다. 그리고 또한 과학자의 손이었다. 얼굴이 예쁘든 밉든 간에 과학자로서의 냉정한 관찰안으로 눈에 찍고 과학자로서의 냉정한 마음으로 상을 구하고 과학자로서의 냉정한 붓으로 그리려 하던 이 화공이었다.

그러나 그 과학자로서의 차디찬 관찰안을 총희의 위에 부으려던 화공은, 거기서 다시 눈을 떼지 못하고 얼빠진 사람과 같이 멍하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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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세의 명공으로서 많은 귀현(貴顯)의 집에 드나들고 많은 미희들의 얼굴을 이미 그려본 그였지만, 이 총희의 얼굴과 같은 절세의 미인은 아직 본 일이 없었다.

상상으로 혹은 실물로 보고 그린 미희의 수효는 그 얼마였던가? 그러나 이와 같은 초인간적 미녀는 아직 본 일은 커녕 생각하여 본 일도 없었다.

붓을 잡은 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화공은 그 자리에 뻣뻣이 서 있었다.

왼편에 걸린 비단폭은 그의 신필이 어서 와서 뛰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잡힌 붓은 어서 비단폭을 단청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화공은 정신없이 미녀의 요염한 자태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후광이 듣는 듯, 안개가 피는 듯, 부연 기운 속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미녀의,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자태에, 이 화공은 온갖 시점과 관찰을 잊어버리고 먹먹히 있었다. 숨소리조차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저녁때 화공은 돌아갔다. 한 붓도 화폭 위에 가지를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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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화공은 잠을 못 이루었다. 자려면 미녀의 환영이 그의 앞에 어릿거렸다. 거기 정신이 들면서 눈앞에 분명히 미녀의 화상을 그려보려면 미녀의 화상은 조각조각 헤어져 버려서 미녀의 생김생김을 분명히 눈앞에 재연시킬 수가 없었다.

이쁘고 광채 나는 흘기는 듯한 눈이 천장에서 미소하였다. 곧고도 또한 빚어 놓은 듯한 코가 담벽에서 움직였다. 방긋한 입이 공중에서 흐느적거렸다. 뒤로는 후광(後光)이 번하니 비치었다.

이렇게 미녀의 생김생김 가운데, 단편적으로 이목구비는 똑똑히 볼 수가 있고 생각해 낼 수가 있지만, 그것이 모두 합하여 된 놀랄 만한 아름다운 얼굴의 전폭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머리 속에 생겨나지를 않았다.

화공은 왼편으로 뒤채었다, 오른편으로 뒤채었다, 전전히 구을면서 미녀의 그 얼굴의 전면을 다시 한 번 눈앞에 그려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헛된 노력에 지나지 못하였다. 조각조각 헤어진 이목구비만 그의 앞에 어른거릴 따름이었다.

『아아!』

탄식과 신음, 짧지 않은 하룻밤을 화공은 한잠을 못 이루고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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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화공은 다시 궁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날도 그는 진일을 붓을 잡은 채 멀거니 총희를 바라보는 것뿐으로 날을 보냈다. 그리고 저녁때 쓸쓸히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제 집으로 돌아갈 임시에 천자가 몸소 화공을 불러서 왜 아직껏 일 획도 가하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거기 대하여 화공 머리를 수그리고 한참을 생각을 한 뒤,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아직 생각이 안 나 옵니다. 며칠만 참아 주시옵소서.』

하고 황황히 그 자리를 피하였다.

그 밤도 그는 잠을 잘 못 이루었다.

환상의 코와 눈은 겨우 조금 접근되었다. 그러나 미소를 띤, 흘기는 듯한 눈과 입은 역시 공중에서 흐느적거리는 뿐, 함께 모이지를 않았다. 그 따로이 떨어져 있는 눈과 입을 한곳에 모아 보려고 화공은 밤새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눈과 입은 끝끝내 따로 떨어져서 얼굴 전체를 형성치를 못하였다. 역시 밤새도록 헛 애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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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공은 반삭 나마를 대궐에 들어갔다가는 그냥 나오고 또 들어갔다가는 그냥 나오고 하였다. 벽에 걸린 비단폭에는 한 점의 단청도 가하지를 못하였다. 붓은 물에 적어 보지도 못하였다. 비단폭 앞에 우두커니 서서 오른손으로는 화필을 잡고 진일을 미희의 얼굴과 몸집과 피는 듯한 후광만 바라보다가는 날이면 초연히 제 집으로 돌아오고 하였다.

무위(無爲)의 반삭이었다. 그 반삭 동안에 화공의 얼굴은 놀랍게도 초췌하였다.

누차를 천자며 대신들에게 어서 그리라는 채근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화공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쉴 뿐 대답이 없었다.

이렇듯 남이 보자면 무의미한 일을 거듭하는 동안, 명공의 머리에 분은 어느덧 그 미희의 자태의 전폭이 사진 찍혀졌다.

처음 한동안은 조각조각 헤어져서 제각기 제멋대로 놀던 미희의 이목구비가 어느덧 모두 제자리로 모였다. 눈만 감으면 선히 총희의 얼굴 전폭은 그의 머리속에 솟아오르고 하게게 되었다. 엷은 안개와 같은 후광도 어느덧 제 자리에 들어앉아서, 화공은 눈만 감고 미희의 얼굴을 생각하면 거기 나타나는 총희의 아리따운 얼굴을 뻔히 뒤로 장식하여 틀림없는 총희의 전폭을 머리속에 부활시키게 하였다.

명공의 하는 노릇이라 천자는 내심 매우 초조히 보면서도 그다지 채근이 심하지는 않았다. 간간 그래도 채근하던 화공은 여전히 길게 한숨을 쉬는 뿐, 이렇다 저렇다 변명을 하지 않았다. 얼굴만 나날이 더 음울해 가고 더 근엄해 가는 뿐이었다.

이러한 반삭이 지나서 이 화공의 머리에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천자의 총희가 그대로 재현할 만치 공은 머리 속에 총희의 영자가 들어앉은 뒤에 화공은 비로소 붓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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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궐을 피하였다.

『소신의 집에서 그리는 편이 훨씬 마음이 자유로우니만치 붓도 마음대로 들 수가 있겠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제 집에서 그리기로 하였다. 천자도 그것을 허락하였다.

인젠 눈만 감으면 언제든 총희를 볼 수가 있는지라, 모델로서 총희를 볼 필요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명공의 머리 속에 생겨난 총희의 자태는 혹은 실물인 천자의 총희보다도 더욱 아름다웠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 사이 반삭을 보고 또 보아서 총희의 가장 아름다운 표정의 눈이며 가장 아름다운 입이며를 머리 속에 사진 찍은 이 화공에게 있어서는 때때로 불쾌한 표정도 나타내는 실물 총희는 도리어 그림에 방해가 되면 되었지 아무 도움이 못 될 것이다.

『아─ 아─』

탄식과 함께 그 사이의 울음을 한꺼번에 씻어 버리고 화공은 제 집으로 물러나왔다.

×

왼손으로는 단청을 가감(加減)하며 오른손으로는 화필을 잡고 비단폭 앞에 자리를 잡을 때에 그의 가슴은 뛰놀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세상에 아직껏 있어 보지 못한 아름다운 환영을 머리 속에 그려 놓고, 그 환영을 명주 위에 재현시키려고 눈으로 겨냥을 볼 동안, 그는 전력을 다하여 누르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느꼈다.

일세 일대의 신필은 드디어 비단 위에 뛰놀았다. 폭풍에 쏠리는 듯 때때로 달팽이가 기어가는 듯 빠르게 느리게 붓이 비단폭 위에서 움직일 동안, 거기는 피는 듯한 안개의 틈으로 세상에 다시없는 미녀의 화상이 차차 그려지었다. 눈이며 입에 띤 미소, 얼굴 전면에 나타난 매력, 코가 말하는 고혹, 명공의 붓은 거침없이 절세의 총희를 거기 그려 놓았다.

×

사흘 밤 사흘 낮을 화실에 들어박힌 채 화공은 나오지 않았다. 불면 불식 불휴로 사흘 밤낮으로 붓을 움직이었다.

신필이라고 자타가 허하는 영필이 사흘을 쉬지 않고 비단폭 위에서 뛰노는 동안, 총희의 화상─ 아니 오히려 화공의 머리 속에서 생겨난 한 개의 절세적 총희의 화상은 드디어 완성되었다.

동자까지 그려 넣고 저윽이 물러앉아서 자기의 그런 그림을 바라볼 때에 화공의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자기의 필력에 대한 긍지에서 나온 미소였다. 동시에 또한 완성된 미녀의 화상의 동자에서 받는 매력에 대한 대답의 미소에 다름없었다.

『나 아니고 누가 능히 이만할 자 있느냐?』

초췌한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

뒤로 물러앉아서 한참을 빙긋이 웃으면서 자기의 그린 바의 미녀상을 바라보고 있다가 화공은 다시 붉은 붓을 잡았다. 그리고 그림 앞에 좀 다가앉았다. 약간 연지에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좀 더 가필을 위해서였다.

연필로 연지는 정도 알맞게 되었다. 연지에 가필을 한 뒤에 다시 물러앉아서 바라보려던 화공은 뜻 안한 실수를 하였다. 붓을 그림 위에 내려뜨린 것이었다.

붓이 그림 위에 떨어졌다. 붓 떨어진 자리는 그림의 미녀의 배꼽 조금 아래쯤이었다. 붉은 붓이 떨어졌으므로 거기는 붉은 점이 하나 찍히었다. 화공의 얼굴은 문득 창백하여졌다. 황급히 붓을 집어서 다른 데로 던졌다.

그러나 붓을 치웠으나 이미 찍힌 붉은 점까지는 덧붙어 갈 리가 없었다. 일점의 흠도 없는 영화의 아래는 붉은 점 하나가 뚜렷이 찍히었다.

화공은 곧 흰 붓을 잡아 그 붉은 점을 말살하려 하였다.

신의 이름을 듣는 자기라 그만 실수를 감출 만한 자신은 넉넉히 있었다. 흰 붓은 그림 위에서 움직이었다. 그러나 이상하다. 웬 일인지 붉은 점은 조금도 말살이 되지 않았다.

열 번이 스무 번, 스무 번이 설흔 번, 흰 붓은 붉은 점 위에서 애를 썼지만, 붉은 점은 더욱 더욱 뚜렷이 나타날 뿐이었다.

×

한참 애를 쓰는 동안, 그의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맺혀서 떨어지고 하였다. 구슬땀을 벌벌 흘리며 얼굴이 창백하게 되어서 그 붉은 점을 어떻게 지워보려고 화공은 자기의 가진 바 온갖 재간을 다 부려 보았지만 애를 쓰면 쓰느니만치 결과는 더욱 나빠서 붉은 점이 더욱 분명히 나타날 뿐이었다.

마지막에는 붉은 물로써 그 붉은 점의 가장자리를 차차차차 엷게 쳐서 붉은 점이 눈에 얼른 안 뜨이도록이라도 하여 보려고 그 수단도 써 보았다. 그러나 이 점감법도 아무 효력이 없었다. 그 괴상한 붉은 점은 아무런 수단을 쓰든 없어지지를 않고 수단을 쓰면 쓰느니만치 더욱 분명히 나타날 뿐이었다. 그 붉은 점은, 점의 주위에 바르는 붉은 물은 아무리 발라도 없어져 버리고 가운데 붉은 점은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붉은 붓으로, 붓으로, 그 실수의 붉은 점을 없이 하여 보려고 최상의 노력과 최상의 기술을 다하여 보았지만 저주 받을 적점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을 뿐더러 차차 더 분명해 갈 뿐이었다.

구슬땀을 수없이 흘리고 노력을 수없이 한 뒤에 그래도 실패를 하고 화공은 그만 기운이 진하여 붓을 내어 던지고 그 자리에 번듯이 나가 넘어졌다.

『아— 아—』

땅이 꺼질 듯한 기다란 탄식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

다시 그리자니 인젠 그릴 정력도 없었다.

정력의 전부를 그 그림에 부어 넣었으므로, 다시 그릴 용기는 둘째 두고, 인제 다시 그린대야 그림이 될지 안 될지 그것부터가 의문이었다.

시험 삼아 눈을 감고 보면 아까까지도 눈앞에 선히 보이던 총희의 얼굴이 처음과 같이 모두 조각조각 헤어져서 제각기 벽 위에, 천장 위에, 혹은 공중에서 흐느적거렸다.

그것이 다 모인다 하여도 모인 것을 그려서 아까의 그림만치 될지 의문인데, 마음의 모델까지 잃어버렸으니 다시 그릴 수도 없었다.

뿐더러 그는 다시 총희의 화상을 위해서는 도대체 붓까지 잡기가 싫었다. 그 화상에다가 너무 힘을 쓰고 그 쓴 힘이 헛데로 간 낙담 때문에 인제는 총희를 위하여서는 다시 붓을 잡을 맥이 없었다.

『천도가 왜 이다지도 무심하담—』

연하여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대체 그 일은 너무도 기괴한 일이었다.

자기가 붓을 내려뜨렸다는 일부터가 너무도 기괴한 일이었다. 자타가 허하는 신필— 땅에 놓았던 붓이라도 잡을 생각만 내면 붓이 저절로 손까지 뛰쳐 올라올이마치 화한 자기였다. 그러한 자기가 붓을 떨구었다는 것부터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괴한 일이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다 하지만 자기가 붓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하늘까지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기괴한 일이었다.

또 실사 붓을 내려뜨려서 한 점의 실획이 생겼다 할지라도, 그만 것을 감출만한 재간이 없는 자기가 아니었다. 신필이라 하며 명공이라 하여 자타가 허하는 붓으로써, 점 한 개쯤을 감추지 못해서야 그 명색을 어떻게 들을까? 그만한 티는 항용 있는 것이요 또한 항용 감추어 오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번의 이 티는 흰 붓으로 붉은 붓으로 그만치 노력하여도 조금도 감추어지기는커녕 더욱 더 뚜렷하여 가니 과연 그것은 기괴한 일이었다.

그 너무도 기괴한 일 앞에 화공은 어쩔 바를 모르고 고민하고 있었다. 자기의 기능에 대한 의혹까지 무럭무럭 일어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를 이렇게 누워서 뒹굴고 있던 화공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몇 걸음 물러앉아서 그 화폭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폭의 붉은 점 위에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들여다볼 동안 그의 얼굴에서는 고민하던 자취는 차차 사라지고 명공으로서의 긍지와 거기 따르는 미소가 떠올랐다.

『천의(天意)로다. 천의로다. 하늘이 찍으신 점이로다.』

붉은 점이 찍힌 것은 인력이나 실수가 아니요, 하늘의 뜻이로다. 하늘의 뜻이 아닌 이상에는 자기가 붓을 떨어뜨렸다 하되 그를 감출만한 기능이 없는 미숙한 자기도 아니다. 붓이 저절로 떨어지고 거기 붉은 점이 생기고 또한 그 점을 (신필이라는) 자기의 힘으로도 지울 수가 없는 것은 필연코 하늘의 뜻이다. 지금 붉은 점이 찍힌 그 자리는 마땅히 붉은 점이 있어야 할 자리일 것이다.

총희의 배꼽 아래는 붉은 사마귀, 그렇지 않으면 무슨 다른 붉은 흠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붓을 떨어뜨린 것도 기괴한 일이어니와, 자기의 힘으로 그 붉은 점을 감추지 못하였다는 것이 더욱 기괴한 일이다. 그것을 모두 다 종합하여 생각할 때는 총희의 배꼽 아래는 반드시 무슨 붉은 흠이 있다.

자기의 붓에 대하여 절대 자신을 갖고 있는 이 명공은, 마침내 이렇게밖에는 이번 일을 해석할 바 없었다.

그리고 그 화상을 고이고이 싸서 그대로 천자께 바치려 마음먹었다.

×

이튿날 소시를 정히 한 뒤에 화공은 총희의 화상을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천자는 몸소 그 족자를 받아서 담벽에 걸었다.

말았던 그림이 풀려나갈 때에 그림이 걸린 옥좌 뒤 벽은 마치 안개가 피어 이는 듯하였다. 그리고 거기는 명공의 정성을 다하여 그린 절세의 미희의 절세의 명화가 늘어졌다.

맑은 연못에 하반신을 잠그고 그의 아리따운 몸을 멱감는 한 개의 미희와, 그 미희의 사위를 장식하는 연꽃과 연잎으로 이룩한 한 개의 족자. 연꽃 뒤로 솟아오르는 그림의 미희는 사뭇 선녀였다. 인간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초속적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의 화상이었다. 명공 일대의 신필로 된 이 화상은 화상을 걸은 방까지 밝게 하는 듯하였다.

천자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연하여 머리를 끄덕이며 겹지 않고 그림을 올려보고 내려보고 하였다.

그러나 한참을 위 아래로 보던 천자는 문득 눈을 한군데 딱 멈추어 버렸다.

화공은 걸핏 천자를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안정을 화상의 배꼽 아래 붉은 점에 멈춘 것을 보고 머리를 푹 숙여 버렸다.

천자는 한참을 그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숨소리가 차차 커졌다.

마침내 천자가 입을 열었다—

『이게 뭐냐?』

할 수 있는 대로 큰 소리를 아니 내려는 노력은 보였으나, 그의 음성은 노염으로 떨렸다. 화공은 한층 더 머리를 숙였다.

『이게 뭐냐?』

이번은 좀 더 큰 소리였다.

화공은 힐끗 용안을 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더 깊이 묻었다.

이 아무 대답도 없는 화공의 태도에 천자는 마침내 최대의 노염을 나타내었다—

『여기 이런 사마귀가 있는 것을 너는 어떻게 알았느냐? 바른 대로 아뢰지 않았다는…… 않았다는……』

말도 채 마칠 수 없도록 천자의 노염은 컸다. 그때 천자는 지나간 날 반삭을 화공이 그림을 그리지 않고 매일 내전에 들어가서는 진일을 보내고 한 일에 대한 의혹이 무럭무럭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이상하던 화공의 행동과 오늘의 이 그림의 사마귀를 연결시켜서 거기서 한 가지의 결론을 얻은 모양이었다.

붉게 되었던 용안은 검게 되었다. 검게 되었다가 다시 붉게 되었다. 숨소리도 마침내 커졌다. 몸도 노염으로 사시나무와 같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 앞에서 화공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머리를 푹 수그리고 서 있었다. 배꼽 아래 흠은 천의로 된 일로서 변명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그리고 배꼽 아래 흠이 있는 것을 안다는 증거가 여기 있는 이상에는 아무런 의심을 받을지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천의〉로서는 변명이 서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래도 내심 느끼는 바는 명공으로서의 긍지였다. 자기의 붓은 능히 눈으로 보지 못한 것까지 그려낼 만치 화하였다— 하는 긍지를 느꼈다. 의심을 받고 변명할 여지를 발견할 수도 없으나 신필로서의 긍지는 한없이 한없이 느꼈다.

이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머리를 수그리고 묵묵히 서 있는 화공의 태도는 천자의 의혹을 더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자는 무사를 불렀다. 그리고 화공을 묶어서 옥에 내리기를 엄명하였다.

무사에게 결박을 당하여 끌려 나갈 때에 화공은 겨우 간단히 한 마디의 변명을 하였다—

『천의올시다. 소신은 청백하옵니다.』

그리고는 그냥 초연히 무사에게 나갔다.

×

시기와 노염으로 절반 정신을 잃은 천자는 화공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승상이 귓결에 그 말을 들었다.

승상은 이 화공을 천자께 추천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화공의 근엄하고 정직한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불의를 행하지 않을 인물임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화공이 끌려 나갈 때에 한 그 마지막 말을 들었는지라, 그는 곧 사실의 전폭을 통찰하였다.

〈천의〉라 함은 하늘의 지시로서 그곳에 붉은 점을 찍은 것이지, 총희에게 그런 사마귀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노라는 뜻임도 짐작하였다.

그는 노염으로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는 천자의 앞에 꿇어 엎드렸다—

『폐하, 아뢰겠습니다. 저 화공 모는 신이 일찍부터 잘 아옵거니와, 근엄하고 정직한 사나이로서 폐하께서 의심하시는 그런 일은 행하지 않을 인물로 아옵니다. 모는 당대의 명공이요, 신의를 받은 거장으로서, 만약 모의 그림이 참 사실과 합이 된다면 그것은 하늘이 모에게 시켜서 하게 한 바겠삽지, 결코 불경한 짓을 할 사나이가 아니옵니다. 다시 한 번 고려하시면 어떠하오리까?』

승상은 제 늙은 머리를 땅에 조으며 화공을 위하여 천자께 다시 한 번 생각하기를 탄원하였다.

천자의 노염은 쉽사리 삭지 않았다.

그러나 승상은 화공의 인물을 아는지라 몇 번을 천자께 그냥 탄원하고 탄원하였다.

천자도 이 노신의 탄원에 마침내 마음을 조금 돌이켰다. 더구나 흥분이 좀 삭고 냉정함을 회복한 뒤에 다시 관찰할 때에, 당신의 총희가 한 개 화공과 불의를 행하였음직도 않고, 만약 행하였다 하면 매일 파수 보는 많은 시녀들에게까지 모르게 했을 수도 없을 것이요, 더욱이 마지막으로 불의를 행하여 그 덕으로 화공이 총희의 배꼽 아래 사마귀 있는 것을 알았다 한들, 그것을 비밀히 하여야 할 것이지 그림에까지 그려서 자기의 비밀(탄로되는 날에는 목숨이 붙어 있지 못할)을 부러 남에게 비칠 까닭도 없겠음을 생각하매, 사건을 다시 한 번 음미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리지 않아야겠다는 짐작도 났다.

『짐도 모의 정직한 성질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그러나 모가 그 흠을 대체 어떻게 알았겠소?』

이렇게 노신에게 말할 때는 천자의 음성도 저으며 낮아졌다. 노신은 다시 땅에 머리를 조았다—

『그러기에 말씀이옵니다. 모는 당대 뿐 아니오라 절세 명화공, 하늘이 모에게 가르치시어서 한 일이 아닌가 하옵니다.』

『하늘이?』

『네이, 명공에게는 반드시 하늘의 도움이 있다는 말도 소신은 일찍 들은 법하옵니다.』

『하늘이? 만약 모에게 하늘의 도움이 있다 하면 이번만 아니라 이 뒤에도 도움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짐이 모를 어디 한 번 시험을 해 보겠소.』

문제는 차차 바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폐하, 성의에 계신 대로 그러면 모를 다시 한 번 불러서 시험해 봅시고, 그 시험에 떨어지면 그때 벌합셔도 늦지 않을 줄 생각하옵니다.』

『그럼 어디 시험해 봅시다.』

이리하여 천자와 승상의 사이에는 타협이 성립되고, 일단 가두었던 화공을 다시 끌어내다가 어떤 시험을 보기로 하였다.

×

화공은 다시 천자의 앞으로 끌려 나왔다.

어전에 나온 화공은 여전히 머리를 수그리고 묵묵히 서 있었다. 그 화공에게 대하여 천자의 시험은 시작되었다.

×

『네가 그것이 천의라는 것이 과연 사실이냐?』

화공은 그렇다는 뜻으로 황공히 허리를 굽혔다.

『네가 그것이 천의라면 네게는 하늘의 도움이 있겠지?』

『황공하옵니다.』

『그럼 짐이 한 가지의 시험을 받아보겠다. 넉넉히 그 시험을 치르겠느냐?』

『성의대로 봉행하겠습니다.』

『그럼 짐이 어젯밤 꿈에 본 것을 여기다가 그려 보아라.』

천자는 환관에게 명하여 붓을 가져오게 하였다.

화공은 기계적으로 종이와 붓을 잡았다. 그러나 안색이 창백하였다.

이 화공을 변호하던 승상도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무도 기상천외의 문제였다. 그리고 난제(難題) 중의 난제였다.

이 난제에 직면한 화공은 종이와 붓을 잡은 채 얼굴이 창백해져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천자의 꿈에 본 일을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 하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종이와 붓을 잡기는 잡았지 만, 화공은 눈을 감고 그냥 묵묵히 앉아 있었다. 천 가지 만 가지의 생각이 그의 머리에 왕래하였다. 죽음에 직면한 그로서 그 죽음을 피할 유일의 방도는, 천자의 꿈에 본 일을 종이 위에 그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꿈도 잊어버리는 것이 예사이어늘 남의 꿈에 본 일을 어떻게 그리는가?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서 천 가지 만 가지의 생각에 머리를 잠그고 있던 화공은, 이상한 팔의 움직임에 뜻하지 않고 눈을 떴다. 동시에 그는 붓이 혼자 종이 위에 움직이는 것을 감각하였다.

화공이 눈을 그리로 향하며 종이 위에서 움직이는 붓은 자동적으로 거기다가 무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화공의 잡은 붓은 저절로 종이 위에서 뛰놀았다. 화공의 팔은 저 혼자 움직이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그 종이 위에는 묵흔도 임리하게 십일면 관음의 상이 하나 그려졌다.

자기로도 알지 못할 이상한 운동에 기괴한 느낌을 받으면서 그는 자기의 붓끝에 그려진 십일면 관음의 상을 어전에 내어 바쳤다. 그런 뒤에 고즈넉이 붓을 씻어서 도로 필봉에 꽂았다.

천자는 종이를 받아 쥐었다.

그 종이를 굽어보는 동안, 아직껏 찌푸리고 있던 용인이 차차 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종이를 자리에 놓으며 눈을 화공에게로 돌렸다.

『이게 뭐인가?』

화공은 대답을 못하였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알지도 못하였다.

『이게 짐의 몽중 소견인가?』

화공은 자기로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약간 허리를 더 굽혔다. 천자는 승상을 돌아보았다.

『참 장하오. 신필이오! 짐의 꿈까지 알아 맞혔소.』

그리고 좌우를 명하여 화공을 후히 상 주라 하고, 당신의 경솔한 노염을 몸소 화공에게 사죄한 뒤에 총희의 화상을 가지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

다시 목숨이 붙어서 대궐에서 물러나올 때에 화공은 뜻하지 않고 아까 무심히 그린 관음상에 눈을 던졌다. 그 자애(慈愛)의 상, 자기는 무심히 그렸지만 그 상의 덕으로 목숨이 보전되었다— 생각할 때에 화공의 눈에서는 감사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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