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5/가인기연
「평양 명기 진주(眞珠)」
어느 제왕 어느 영웅을 물론하고 어렸을 때는 역시 한낱 코흘리개에 지나지 못 하던 애가 차차 자라남을 따라서 남이 못 하는 일을 하여 놓은 덕에 이런 칭호가 붙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그 위가 재상과 맞잡힐 마치 도저한 명기 진주도, 어렸을 적에는 한낱 보잘것 없는 코흘리개 계집애에 지나지 못하였다.
차차 자라면서 적(籍)을 기생에 두고 글을 배우고 노래를 배우고 거문고를 배우고 춤을 배우는 동안에, 그의 속에 감추어져 있던 명기로서의 소질이 차차 표면으로 나타나서, 기생의 산지 평양에서도 지금은 첫손가락 꼽히는 명기가 되었다.
서울서 평양이 오백 오십 리─ 그러나 매일 오고 가는 선비며 무부들의 입을 통하여 진주의 이름은 서울서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서울까지도 알게 되는 일방, 차차 차차 사면으로 퍼져 나간 그의 명성은 산읍(山邑) 성천에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진주의 명성이 성천에까지 이르게 된 덕으로 여기 한 가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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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성천──
온정(溫井)으로 이름 높고 담배로 이름 높고 또한 강선루(降仙樓)로 이름 높은 이 성천 땅에 노진사(盧進士)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불행히 그의 이름까지는 전하지 못하여 알 수 없으되, 시골서 진사라 하면 상당한 명문이요 세력가요, 당년의 명문 세력가에는 당연히 재산까지 있었는지라 의식의 걱정도 없는 사람이었다. 오십에 상처를 하였다.
오십 상처라 하는 것은 가장 반지빠른 일이다. 홀로 늙기에는 적막을 느낄 나이였다. 재취를 하기에는 좀 지나친 나이였다.
이 반지빠른 나이에 상처를 한 노진사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여 본 끝에 재취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산 아름답고 물 맑은 성천이었다.
이 아름다운 땅에서 한 잔 두잔 마음 날 때는 감홍로나 마시며 흥이 나면 노배나 지으며— 이렇듯 글을 벗하여 여생을 보내리라. 귀찮게 다시 아내는 얻어 무엇하랴? 산수간에 방황하며 지필을 벗삼고 산수를 아내삼아 신선과 같은 여생을 보내자.
이리하며 한 산 신선으로 자처를 하려는 노진사의 귀에 평양 명기 진주의 소문이 들어온 것이었다. 가로되,
「노래 잘하고 춤 잘 추고 과시 당대 풍류랑(風流娘)이라.」
어디 한 번 찾아가서 하룻저녁 풍월이나 같이 읊어 볼까?
노진사는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성천초 몇 잎과 지필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진주를 찾아보려 성천을 떠났다.
성천 물길로 평양을 내려오면 여울(漢)을 넘기 아흔 아홉 곳.
수만사택(水滿四澤)하고 와류생심(臥柳生心)이라는 좋은 봄날, 노진사는 아주 마음으로 내 생애의 노를 고요히 저으면서 하류로 하류로 내려왔다.
- 渴飮月窟水[갈음월굴수]요
- 飢餐天上雪[기찬천상설]이라.
이태백의 시를 소리 높이 읊으면서 흥그러이 흥그러이 흘러 내려와 금수산 첫 번 맺힌 주암(酒岩)을 휘돌아서 수양버들 푸르른 능라도를 왼편으로 끼고 모란봉 청류벽 연광정 앞에까지 다다랐다.
거기서 쳐다보이는 성(城)─ 구성 안에는 단군 이래 사천 년의 고도가 봄날 저녁 연기 아래 고요히 잠겨 있는 것이었다.
『십중팔구는 듣던 바 소문과 실물과 동떨어지는 법— 운도 안 맞는 풍월깨나 짓고 수심가깨나 부르는 얼치기 기생을 보러 여기까지 왔다면 약간 창피한걸.』
연정 아래 매생이를 대고 기다란 담뱃대를 뱃전에 툭툭 털면서 노진사는 닻을 강물에 텀벙 던지고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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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색시가 나루를 타고 대동강을 건네오다가 저고리 고름을 물에 담가 보았다 한다. 너무도 푸르른고로 물이 들지 않나 하여……
봄날 녹벽(綠碧)의 대동강 위에는 능라도를 향하며 고요히 저어 올라가는 매생이가 수없이 많았다.
그 가운데 한 매생이가 한 오십쯤 난 점잖은 선비 한 사람과 이십 미만의 기생 하나 이렇게 단 둘이 탄 매생이가 있었다.
노진사와 진주였다.
평양 명물 감홍로와 안주 몇 가지를 팔각상에 받쳐 매생이 가운데 놓고 진주가 따라 주는 술을 노진사는 차곡차곡 받아 마시고 마시었다.
『네 소문이 성천에까지 높으니 네가 그리 유명하냐?』
『유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잘난 덕에 유명해졌겠지요.』
『잘났다?』
인물도 절묘하였다. 한 무릎을 세우고 조심조심히 술을 따르는 그 태도도 절묘하였다. 말솜씨, 행동, 음성, 이런 점으로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나 노진사가 성천서 평양까지 보따리를 싸가지고 온 까닭은 단지 그 점들을 취함이 아니었다. 성천 기생도 서관(西關)서 이름난 것─ 행동거지, 노래 등으로는 어디를 내놓을지라도 빠지지 않을 만 한 자가 수두룩하다.
노진사가 찾고자 한 것은 진주의 문장이었다. 소문에 들은 명기 부용(芙蓉)이 이래 문장이 높은 기생을 노진사는 아직껏 면대하여 본 적이 없었다.
오십 홀아비— 때때로 폭풍우같이 가슴을 엄습하는 적막감을 느끼고 하는 노진사는 한 개 친구— 글벗(文友)으로서의 이성이 그리웠다. 문장 높은 기생이라 하는 점이 진사로 하여금 성천서부터 평양까지 내려오게 한 것이었다.
아래로 흐르는 대동강 물을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매생이— 그들의 매생이는 반월도를 천천히 지나서 능라도 어느 수양 버드나무 아래 닻을 주었다.
『글도 잘한다지?』
『약간 합지요.』
『약간이란 겸양인가 진정인가?』
『전자(前者)올시다.』
노진사는 내려앉았다. 팔각 소반을 대하여 마주 앉았다.
『한 귀 지어 볼까?』
『처분대로 합지요.』
『참 지필이 없구먼.』
『나리두…… 옛 사람이 대장부 못됨을 한탄하지 돈 없음을 한탄하느냐고 했습지만, 노래 못 짓는 것을 한탄하지 지필 없음을 한탄하리까?』
진주는 앞의 팔각 소반을 한편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고요히 일어서서 열두 폭 치마를 벗어서 매생이 안에 펴 놓았다.
지필묵(紙筆墨)중에 〈지〉에 대신할 자는 생겼다. 그러나 붓은? 먹은? 치마를 퍼 놓은 뒤에 진주는 팔을 들어서 비취잠을 뽑고 석 자 가웃 긴 머리를 앞으로 돌려 그 끝을 잡았다.
『지와 필은 됐습니다. 먹은 없으니 비단에 지는 얼룩을 먹으로 아시고 시제(詩題)를 내세요.』
노진사는 고요히 우러러보았다. 하는 행동, 태도 한 군데도 극적 기분이 없었다. 고요히 우러러볼 동안 노사의 얼굴에는 차차 경탄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응, 제는 평양 명기 진주.』
『운은요?』
『운은 능할 능(能)자, 능할 능자를 운으로 하되 더욱이 능자 여덟 자를 집어넣어서—』
진주는 휘어잡았던 머리채를 푸르른 대동강 물에 찍어 내었다. 듬뿍 이 물을 머금은 머리를 붓 삼아 열두 폭 비단 치마 위에 써내는 한 귀의 노래.
- 浿上眞珠有何能
- 能歌能舞詩亦能
- 能能之中又一能
- 無月三更弄夫能
- 평양의 진주야 너는 무엇이 능하냐
- 노래도 능하고 춤도 능하고 시도 또한 능하다.
- 능하고 능한 가운데 또 한 가지 능한 것이 있으니
- 달 없는 밤중에 지아비 희롱도 제법이다.
『?』
노진사는 망연히 치마폭을 굽어보았다. 감히 무슨 말이 나오지를 못하였다. 그 필법, 그 노래, 그 거지— 육척 남자가 능히 이를 따를 자 몇이나 되리. 대대 선비의 집안으로 그 교우(交友)도 모두 내로라는 학자들이지만, 노진사의 머리로 생각하고 골라 보아야 이 진주에 필적할 자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초라한 노래올시다.』
그러나 여기도 노진사는 인사의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망연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황금빛을 띤 저녁 해는 차차 청류벽 뒤로 넘으려 하는 봄날 황혼……
『그 치마를 나를 줄 수 없겠나?』
노진사가 겨우 입 밖에 말을 꺼낸 것은 그들의 탄 매생이가 다시 회정을 하여 연광정 아래 돌아온 때였다.
진주는 노진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를 말없이 쳐다보다가야 비로소 명랑한 미소를 띄고 대답하였다.
『소청이시라면 이만한 것을 못 드리리까?』
『제발 주게.』
이리하여 노진사는 그 치마를 선사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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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능하다는 소문에 단지 그 문장이나 보고 하루 저녁 풍월이나 함께 희롱하고자 평양까지 내려왔던 노진사였다.
그러나 이 재색이 겸비한 진주에게 노진사의 마음은 단단히 사로잡힌 바 되었다.
오십이 지난 노진사였다. 이제는 여자에게 대한 정열은 다 죽고 단지 호기심만이 남아 있을 나이였다.
그러나 이 진주라는 기생과는 천생 어떻게 된 연분인지, 노진사의 늙은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옛날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 하고 오십이지 사십구년비(五十而 四十九年非)라 하며, 오십이면 이젠 제철이 들었을 만한 나이로 여기나, 오십이 지난 노진사로서 겨우 열 소리하는 어린 기생에게 마음이 완전히 빠져 버렸다.
봄날의 수삼일을 꿈과 같은 대동강에 떠서 풍월 잘 한다는 진주와 노래나 읊조려서 차차 적막하여 오는 심경을 얼마간 위로하고 돌아가려던 노진사는, 그만 탁 제 몸을 평양에 머물고 말았다. 그리고 나날이 눈만 뜨면 진주를 찾아갔다.
진주는 비교적 노진사를 환대하였다.
인물 점잖겠다. 문장 용하겠다. 돈 쓰는 솜씨조차 용렬되지 않겠다, 시조 한 마디 용히 읊겠다, 부족하달 데가 없는 학자였다.
그러나 노진사는 진주를 만나면 늘 함께 즐겁게 놀기는 놀았지만, 차마 입 밖에 자기의 진정은 나타내어 보지를 못하였다.
첫 번에 벌써 그런 의미로 교제를 시작하였으면 모르지만, 처음 교제가 풍월 친구로 시작되었는지라, 이제 새삼스러이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단지 만나서는 마음을 감추고 흥그러이 함께 풍월을 희롱하였다. 어떻게 하여 만나지 못하게 되면 차마 돌이키지 않는 발을 다시 사관으로 돌이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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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서 여름으로 가을로— 노진사는 매일 진주를 찾았다.
찾아 갈 때마다 오늘은 무슨 기회를 타서 글로나마 마음의 한 구석을 알리리라 굳게 맹세하고 하였다. 그러나 급기야 만나기만 하면 오십 홀아비라는 자기의 입장이 강렬히 마음속에 붙이면서 그런 기색도 내일 용기를 잃고 하였다.
시조나 읊고 노래나 짓고 술이나 마시고─이러다가는 다시 쓸쓸한 발길을 사관으로 돌이키는 노진사였다.
진주의 심경이 차차 변하여 오는 것도 분명하였다. 처음에는 늘 노진사를 무심히 대하였다. 기생이 손님에게 대하는 태도로 무심히 대하였다. 그러나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동안, 진주도 노진사를 만나면 고민하는 기색이 차차 명료히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어떤 때는 집에 있으면서도 노진사를 따는 일도 있었다. 함께 답청이라도 나가자면 핑계를 대고 안 나가는 일도 흔히 있었다.
이리하여 오십 남자와 이 기생의 교제는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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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도 절반이나 갔다. 노진사는 드디어 성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다.
일 년, 십 년, 백 년을 있어야 그냥 그 꼴일 것이다. 더욱 마음이 탈 뿐이었다.
가을 추수 때도 추수 때려니와 한적한 산읍 성천에 돌아가서 세상 모든 잡된 번뇌를 삭여버리고, 다시 시조나 읊조리며 구름이나 희롱하며 학이나 놀리며 한가하고 점잖은 여생을 보내자. 이 가슴을 태우는 오뇌에서 벗어나자. 오십 남자가 제 정신으로는 생각도 못 낼 망측한 꿈에서 벗어 나자.
진주? 나의 어린 손주를 무릎에 안고 어르는 재미인들 (거기 재미만 붙이고 보면) 진주와 만나는 재미에 지랴? 동네 늙은 것들을 청하여 놓고 산채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며 읊는 풍월인들 진주와 풍월의 재미에 지랴? 내 고향 내 자손들이 그득한 산읍 성천으로 돌아가자.
이리하여 가을도 얼마만치 무르익은 뒤에 노진사는 다시 보따리를 싸가지고 그 어느 봄날 매생이에서 대동강 물로 얼룩지게 써 던진 진주의 열두 폭 치마를 깊이 간직하고 다시 평양을 떠나서 고향 성 천으로 향하였다.
평양서 성천까지 물질로는 여울이 아흔아홉 개─ 성천서 내려오자면 뱃길로도 하지만, 성천으로 돌아가자면 물길보다 육로가 편하다.
보따리 하나를 간단히 지고 지팡이를 끌면서 노신사는 평양을 하직하고 육로로 다시 성천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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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봉 넘어서서 흥부길 돌아들면 이름 높은 주암(酒岩)— 옛날 신선들이 내려 와서 술을 마시고 놀다가 다시 올라가고 하였다는 명소였다.
위에서 흘러 내려오던 대동강이 주암에서 기역자로 꺾여서 능라도를 두고 두 갈래로 갈라진다. 주암의 직전(直前)은 수십이 되는 깊은 소요, 주암의 곧 상류와 하류는 가슴에 차지 못하는 얕은 여울 이다. 웃 여울에서 소리치며 내려오던 대동강 물이 주암 앞에서 잠시 고요하여졌다가 주암 아래서 다시 능라도를 끼고 명승 평양을 향하여 내려가는 것이다. 평양의 대동강을 끼고 놀러가는 사람이면 주암서 마지막 다시 한 번 평양을 바라보고야 발을 돌이키는 법이다.
주암서 내려다보면 물결치는 여울을 끼고 능라도 아늑히 잠겨 있고 모란봉 청류벽이 운소에 솟아 있는 뒤로는 진연으로 보얀 평양성이 멀리 바라보이는 것이다. 거기서 기역자로 꺾어지면 다시는 평양이 보이지 않는다.
노진사도 옛날 신선을 본떠 주암에 한 상 차려다 놓았다. 한 잔 두 잔, 석 잔, 들이키는 감홍로─ 평양도 이제는 마지막이로다. 다시 무얼 하러 평양에 오랴? 지난 한 여름을 지낸 것을 회상하여 보면 늙은 노진사로도 감회가 무량하였다.
보오얀 연기 아래 잠겨 있는 저 성내에는 진주도 있겠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고이고이 지내다가 좋은 짝을 맞아 영원한 안락을 누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는 또한 진주에게 대한 폭풍우와 같은 뜨거운 감정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계집이란 평생을 혼자 지내지는 못하는 것…… 저것(진주)이 장차 좋은 짝을 만나면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변변치 못한 짝을 만나면 그 아니 가련한가?
인생은 오십이라 내 나이 벌써 오십을 지났으니 몇 해 더 살는지는 모르지만, 그 여생을 저렇듯 뜻 맞고 마음 맞는 계집과 같이 즐겁게 보냈으면 얼마나 좋으랴?
늙은 노진사의 눈가에도 저절로 눈물이 돌았다.
노진사는 그윽히 지필을 끌어당겼다. 가슴에 무득한 감정을 지필로나마 그려 던져야지, 그냥 참고 감추고 돌아갈 수는 도저히 없었다.
그 어느 봄날, 진주가 석자 가웃 머리를 담가낸 대동강 물을 따라서 벼루에 붓을 고요히 먹을 갈 동안, 노진사의 마음은 어떻다 형용하기 어렵도록 무거웠다.
대동강을 굽어보며 고함치는 여울 소리를 귓가로 들으면서 써낸 한 개 장편 언문시(長篇 諺文詩).
- 어젯밤 불던 바람 금성이 완연하다
- 고침 단금에 상사몽 훌쩍 깨어
- 죽창을 반개하고 막막히 앉았으니
- 만리 장공에 하운이 흩어지고
- 천년 강산에 찬 기운 새로와라
- 심사도 창연한데 물색도 유감하다.
- 정수에 부는 바람 이별한을 아뢰는 듯
- 추국에 맺힌 이슬 별루를 머금은 듯
- 잔류 남교에 춘앵이 이귀하고
- 소월 동령에 잔나비 슬피 운다.
- 임 여의고 썩은 간장 하마터면 끊지리라
- 삼춘에 즐기던 일 예런가 꿈이런가
- 세우사창 요적한데 흡흡히 깊은 정과
- 야월삼경 사어시에 백년 사자 굳은 언약
- 모란봉 높고 높고 대동강 깊고 깊어
- 무너지기 의외여든 끊어질 길 짐작하리.
- 양신에 다마함은 예로부터 있건마는
- 지이 인하는 조물의 탓이로다.
- 홀연히 이는 추풍 화총을 요동하니
- 웅봉 자접이 애연히 흩단 말가.
- 전장에 감춘 호구 도둑할 길 바이 없고
- 금롱에 장진 앵무 다시 희롱 어려워라
- 지척동서 천리되어 바라보기 아득하다.
- 은하작교 끊겼으니 건너갈 길 아득하다.
- 은정이 끊겼으면 차라리 잊히거나.
- 아름다운 자태 거동 이목에 매양 있어
- 못 보아 병이 되고 못 잊어 원수로다.
- 천수만한 가득한데 끝끝이 느끼워라.
- 하물며 이는 추풍 별회를 불어내니
- 눈앞에 온갖 것이 전혀 다 수심이라.
- 바람 앞에 지는 잎과 풀 속에 우는 벌레
- 무심히 듣게 되면 관계할 바 없건마는
- 유유별한 간절한데 소리소리 수성이라.
- 구곡에 맺힌 시름 어찌하면 풀쳐낼꼬.
- 아이야 술 부어라 행여나 관회할까?
- 잔 같이 가득 부어 취토록 먹은 후에
- 석양 산로로 을밀대 올라가니
- 풍광은 예와 달라 만물이 소연하다.
- 능라도 쇠한 버들 성긴 가지 소슬하고
- 금수봉 꽃진 나무 상엽이 표불하다.
- 인정이 변화함을 측량하여 이를 것가
- 애연히 눈을 들어 원근을 살펴보니
- 용산의 늦은 경우 창율함이 심사 같고
- 마탄의 너른 물은 탕양함이 회포 같다.
- 보통문 송객정에 이별 아껴 설어 마라.
- 초패왕 장한 뜻도 죽기로 이별 설어
- 옥장 비가에 눈물을 지었으나
- 오강 풍우에 우단 말 못 들었네
- 천지는 몇몇 째며 이별은 누구누구
- 세상 이별 남녀 중에 나 같은 이 또 있는가.
- 수로문에 떴는 배는 향하는 곳 어디메뇨.
- 만단수회 실은 후에 천리약수 건너가서
- 우리 임 계신 곳에 수이수이 풀고지고
- 성 위에 늦은 경을 견대어 못 볼러라.
- 장탄 단우로 곡란을 비겼더니
- 바람결에 오는 종성 묻나니 어느 절고
- 초혜를 떨쳐 신고 섬가히 일어 걸어
- 영명사 찾아가서 중더러 묻는 말이
- 인간 이별 만든 부처 어느 탑상 앉았는고
- 이한 별수도 이 또한 정수로다.
- 죽장을 고쳐 짚고 부벽루 올라가니
- 뜰 밖에 점친 메는 구름 밖에 솟아 있고
- 청강에 맑은 물은 추천과 한빛이라
- 이윽고 듣는 달이 교교히 빛을 퍼니
- 그린 상사 지리한 중 옥면인가 반겼더니
- 어이한 뜬구름이 광명을 가리었네.
- 어화 이 어인 일고 조물의 탓이로다.
- 언제나 구름 걷어 밝은 빛 다시 볼꼬
- 송지문의 명하편을 길이 읊어 배회하니
- 한로 상풍에 취한 술 다 깨었다.
- 낙엽을 깔고 앉아 금준을 다시 열고
- 일배 일배 부일배에 몽롱히 취게 먹고
- 쩌른 탄식 긴 한숨에 발을 밀어 일어 걸어
- 지향 없이 가는 길에 애련당 드단 말가
- 부용을 꺾어 들고 유정히 돌아보니
- 수변에 피는 꽃은 임이 나를 반기는 듯.
- 엽간에 뜯는 비는 내 사정 아뢰는 듯.
- 양량 백구는 홍료에 왕래하고
- 쌍쌍 원앙은 녹수에 부침이라.
- 이 인생 가련함이 미물만 못하도다.
- 홀연히 다 떨치고 백마에 채를 던져
- 산이야 구름이야 정처 없이 가자 하니
- 내 맘이 현황하여 갈 길이 아득하다.
- 허회 탄식하고 초로로 돌아오니
- 간 곳마다 보는 물색 이되도록 심란한가
- 울밑에 피는 국화 담 안에 웃는 단풍
- 임과 함께 볼 양이면 경개롭다 하련마는
- 도도심사 울울하여 도리어 수심이라.
- 무정 세월 여류하여 나날이 깊어간다.
- 가기는 철을 찾아 구추에 늦었어라.
- 상 아래 우는 실솔 너는 무슨 나를 미워
- 지는 달 새는 밤에 잠시 끊지 않고
- 긴 소리 짧은 소리 경경히 슬피 울어
- 다 썩고 남은 간장 어이 마자 썩이는고
- 촌계가 더디 우니 밤도 자못 깊었어라.
- 상풍에 놀란 홍안 운소에 홀로 떠서
- 옹옹한 긴 소리로 짝을 불러 슬피 우니
- 춘풍화월 저문 날에 두경성도 느끼거든
- 오동추야 단장 시에 차마 어디 들을 것가
- 네 아무리 미물이나 사정은 나와 같다.
- 일폭 화전지에 세세 사정 그려내어
- 외우쳐 이르기를 이내 사정 가져다가
- 월명사상 요적한데 임 계신 곳 전하려믄.
- 인비목석이라 임도 응당 반기리라.
- 지리한 이 이별이 생각사록 끝이 없다.
- 인연 없어 못 보는가 유정하여 그리는가
- 인연이 없었으면 유정인들 어이 하리
- 유정함이 없었으면 그리긴들 어이할까
- 인연도 없지 않고 유정도 하건마는
- 일성 중 함께 있어 어이 그리 못 보는가.
- 오호명월 밝은 달에 초산운우 성길 적에
- 설진심중 무한사는 황연한 꿈이로다.
- 무진정회 강잉하여 문을 열고 바라보니
- 무심한 뜬구름은 끊겼다 다시 잇네.
- 우리 임 계신 곳이 저 구름 아래언만
- 오며가며 두 사이에 무슨 약수 막현관대
- 양처가 막막하여 소식조차 끊달 말가
- 둘 데 없는 이내 심사 어디다가 지접할까.
- 벽상에 걸린 오동 강잉하여 내려놓고
- 봉구황 한 곡조를 한숨 섞어 길이 타니
- 여음이 요요하여 원하는 듯 한하는 듯
- 상여의 한 곡조는 의연히 있다마는
- 탁문군의 설은 지음 힘없이 자취 없다.
- 상사곡 한 글귀는 날 위하여 지었는가
- 결연한 이 이별이 느낀 일도 하구 많다.
- 창해월 영두운은 임 계신 곳 비치건만
- 심중소회 안전수는 나 혼자 뿐이로다.
- 가도록 심란한데 해는 어이 쉬이 가노
- 잘새는 깃을 찾아 무리무리 돌아들고
- 야색은 창망하여 먼 나무 희미하다.
- 경경이 흐르는 빛 절기 찾는 형화로다.
- 적막한 빈 방안에 울적히 홀로 앉아
- 지난 일 다 풀치고 오는 시름 생각하니
- 산 밖에 산이 있고 물 밖에 대해로다.
- 구의산 구름같이 바라도록 묘연하다.
- 장장추야 긴긴밤에 이리하여 어이 할꼬.
- 아무쪼록 잠을 들어 꿈에나마 보자 하니
- 원앙침 서리 차고 비취금 냉락하다.
- 효월 잔등에 꿈 이루기 어려워라.
- 일병잔촉 벗을 삼아 전전불매 잠 못 들어
- 금강령 새벽달에 오경인 줄 깨닫것다.
- 앉았다가 누웠다가 다시금 일어앉아
- 이리하고 저리하니 아마도 원수로다.
- 고진감래는 그윽히 있건마는
- 황천이 도우시고 귀신이 유의하여
- 남교의 굳센 물로 월로승 다시 이어
- 소상 어느 날에 고인을 다시 만나
- 봄바람 가을달에 거울같이 마주 앉아
- 이런 일 옛말 삼아 정회 중에 넣어두고
- 백년이 다 진토록 끝없이 즐기다가
- 유자 생녀하여 한없이 지낼 적에
- 인심이 교사하여 어느 누가 시비커든
- 추풍오호 저문 날에 금범을 높이 달고
- 가다가 아무데나 산 좋고 물 좋은 데
- 자좌오향 제법으로 수간초옥 지은 뒤에
- 석전을 깊이 갈아 초식을 먹을망정
- 백년이 다 진토록 떠나 살지 마자터니
- 상사로 곤한 몸이 상 위에 잠깐 누워
- 죽은 듯이 잠을 드니 호접이 나를 몰아
- 그리던 우리 임을 꿈 가운데 잠깐 만나
- 비회가 교집하여 별래사정 다 못하여
- 수가 옥적성이 추풍에 섞어 불어
- 처량한 한소리로 잠든 나를 깨우누나.
- 두어라 이산이 유수하니 다시 볼까 하노라.
정신없는 꿈결과 같은 오뇌의 세월을 보냈는지라, 노진사는 지금이 며칠 날인지는 똑똑히 몰랐으나 팔월 중순에 가까운 때였던 모양이다. 흐르는 강변 주암(酒岩) 위에 안주상을 놓고 침음종야 이 짧지 않은 노래가 다 된 것은 꽤 긴 밤도 다 지나서 문수봉 꼭대기로는 아침 푸른빛이 나기까지 시작한 때였다.
날씨로 보아 밤을 새우기에는 꽤 추울 때였다. 그러나 (술기운도 있었겠지만) 마음에 커다란 오뇌를 품고 있는 노진사는 추운 줄도 몰랐다. 푸르게 비치는 달빛 아래서 밤이 새도록 짧지 않은 상사곡 한 편을 그려내었다. 등불녘 아침빛에 비치어 가면서 자기의 지은 노래를 다시 읽어 볼 때에, 늙은 노진사의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비로소 몸을 엄습하는 시장증을 느꼈다. 인가를 찾아 들어가고자 몸을 일으킬 때는, 그의 사지는 후들후들 떨렸다.
『아아, 소문만 들었던 상사라는 것은 이렇듯 괴롭고 아픈 것이냐?』
문득 보매 한 목동이 소를 몰고 간다. 소의 등에 나무를 한 바리 실은 것으로 보아 팔러 가는 모양이었다.
『아나 이애!』
목동은 힐끗 노진사를 쳐다보았다.
밤새도록 강변 위에 앉아서 강의 습기와 아침 이슬에 함빡 젖어서 후줄근하게 된 노진사의 꼴은, 목동의 눈으로 하여금 뜻하지 않고 동그라지게 하였다.
『저 부르셧소?』
『오냐, 성내(城內=평양)로 가냐?』
『예.』
『나무 팔러 가는구나?』
『예.』
『그 나무 나한테 팔아라.』
목동은 의아한 눈으로 노진사를 쳐다보았다. 그 눈을 받으면서 노진사는 말을 이었다.
『나한테 팔되 나무 값만 줄 테니, 나무는 그냥 네가 가지고 그 대신 심부름 하나 하여 다고.』
『?』
『응, 다른 것이 아니라……』
노사는 품에서 밤새도록 쓴 그 노래를 꺼내었다.
『여기 편지가 하나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성내에 들어가서 진주라는 기생을 찾아서 주고 오너라.』
『주고만 오리까?』
아아, 어찌할까. 진주가 회답을 줄까? 혹은 보기만 하고 집어던질까? 그렇지 않으면 보지도 않고 찢어 버릴까?
『회답을 주거든 받아 가지고 오너라.』
『예, 그런데 회답을 받으면 어디로 갖다 드릴까요?
『그도 그럴 듯하다. 내 저 바위 뒤에서 기다릴 테니 만약 회답을 주거들랑 그리로 갖다다고. 옛다, 석 냥이다. 좀 넉넉히 주는 대신 빨리 갔다 오너라.』
목동의 집은 그 근처였다. 자기 집에 소를 다시 갖다 매고 걸음을 빨리하여 흥부길 썩 넘어서서 모란봉 앞으로 목동의 모양이 사라지기까지, 노진사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그 자리에 그 모양대로 망연 히 서 있었다.
목동의 그림자가 모란봉 너머로 사라진 뒤에야, 노진사는 요기라도 하려고 마을을 찾아 들어갔다.
×
아침 요기를 얼른 하고 아까의 바위로 돌아와서 목동의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한 각경이 노진사에게는 수십 년과 같이 길었다.
가을 늦은 아침볕이 그다지 널리 퍼지기 전에 충실한 목동은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보니 손에 무슨 종이를 들은 양이 회답일시 분명하였다.
그 진주의 회답을 받아서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겨우 펴 볼 때는, 노진사는 긴장으로 거의 기절할 듯하였다.
회답은 간단한 시 한 귀였다.
- 若結君我緣
- 地下郞君哭
- 그대와 내가 인연 맺으면
- 지하의 낭군이 통곡하리라.
그만 종이를 떨어뜨렸다 떨어뜨렸다가 다시 집어 보았다. 늙은 눈에서는 늙은이답지 않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아아, 임이 있었던가 죽은 일이 있었던가?
자유로운 몸과 자유로운 마음이려니 생각하였더니, 골독히 바치고 있는 마음의 주인이 있었던가?
어떤 행복된 사람이 아리따운 여인의 임이 되어 죽어서까지도 그 맘을 독점하고 있나?
가자! 내 고향으로 돌아가자. 흐르는 샘물, 날아드는 두루미 떼, 우짖는 가을 벌레─ 꿈의 나라, 노래의 나라, 풍류의 나라 내 고향으로 돌아가자. 어린 손주에게나 시정을 붙이고 늙은 학자다운 안온 한 여생을 보내자.
지팡이를 다시 짚은 노진사─ 이번은 평양 쪽은 다시 보지도 않고 황황히 성천 길로 강변을 더듬었다.
×
성천 고향 집으로 돌아는 왔다.
초당에서 풍월이나 희롱하며 어린 손주나 데리고 놀며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보니, 머리 곁에 어린 손주가 와서 노는 것이 귀찮기만 하였다.
노후(老後)에 비로소 느낀 연모! 이 불길은 무엇으로든 끌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꺼질 듯이 무겁게 하는 가을철에 노진사의 가슴은 안타깝고 답답할 뿐이었다.
『지하의 낭군이 통곡하리라.』
아아, 지하의 낭군이 통곡할지는 모르지만, 지상의 노진사의 마음은 통곡을 지나쳐서 울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
성천의 담배는 조선의 유명한 것이다. 독하고도 피기 잘하고 향기롭고─ 이것은 단지 토질(土質)이 좋다든가 종자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가꾸기도 잘 가 꾸려니와 가꾼 뒤에 매만지기를 잘 하여야 하는 것이다.
상초— 그 가운데도 진상품으로 가는 것이나 대관 댁으로 가는 것은 특별히 잘 매만져야 한다.
먼저 좋은 잎을 골라서 응달에서 초벌 말리어 가지고 그 뒤에는 한 잎씩 새벽 이슬에 추겨서 하루 진일을 손다듬이하고 매만져서 저녁에 차곡이 접어서 다시 말린 뒤에야 비로소 극상초가 되는 것이다. 그런지라 한 사람이 하루에 한 잎 밖에는 매만지지를 못한다.
노진사는 상엽(上葉) 백 잎을 골라 내었다. 이 백 잎을 손수 매만지자면 꼭 백일 간은 걸려야 하는 것이다.
밤마다 한 잎씩 내다가 정한 곳에 놓아 두었다가 새벽 동트기 전에 거두어서 하루 진일을 손다듬이하고 매만지고─ 노진사는 특상엽을 골라내어 이 조작을 시작하였다. 하루에 한 잎씩 매만지기를 백일 간─ 진상품보다 나은 엽초 백 잎이 되었다. 그 방에 들어서기만 할지라도 담배의 향내는 쿡 코를 찌를 지경이었다.
이 백 잎을 다 매만져서 그것을 노진사는 좋은 장지에 싸고 또 쌌다.
이 일을 시작하기는 팔월 중순이었으나 백 잎을 다 매만지고 나니 벌써 섣달 그믐께가 되었다.
『자, 이것이나마 진주에게 보내서 비록 마음은 못 돌이키나마 내 손수 매만진 담배로서 그의 입에 향취나 더하여 주리라.』
노진사는 좋은 간지에 편지를 한 장씩 썼다. 아니, 편지가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쓴 것이었다.
- 초초하나 초초히 아지 마시오
- 이내 정성을 다한 것이오니
- 내 마음 모르시겠거든
- 타고 남은 재나 보시구려.
세찬을 겸하여 노진사는 하인을 명하여 이 글과 함께 백 잎의 담배를 평양 기생 진주에게 보냈다.
×
평양 갔던 하인은 다음다음날 돌아왔다.
물론 꼭 회답이 있으리라고는 믿은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만치는 기다리고 있는 노진사의 손에 하인에게서 회답이 들어왔다.
황황히 펴 보았다.
『?』
백지였다. 한 자도 쓴 글이 없었다. 뒤를 뒤집어 보았으나 뒤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앞을 보고 다시 뒤를 보고 이러기를 몇 번, 드디어 노진사가 그 종이에서 발견한 것은? 거기서 점점히 흘린 몇 방울의 눈물의 자취가 있었다.
눈물이로구나, 진주도 눈물을 흘렸구나.
그러나 그것은 무슨 눈물일까? 다시 보고 또 다시 보고 또 다시 보고, 이런 뒤에 노진사는 그 진주의 눈물 자리가 묻은 종이를 잘 개켜서 깊이 가슴에 간직하였다.
×
산읍(山邑) 성천에도 겨울이 왔다가 가고 다시 양춘이 이르렀다.
그 어떤 날, 계집하인 하나를 곁에 데리고 웬 한 장보교 한 바리가 성천으로 들어와서 노진사 집 문 앞에 놓였다. 노진사 집 하인이 마주 나오매, 장보교 따라온 계집하인이 무슨 편지 한 장을 내어 주었다. 노진사 집 하인은 그 편지를 곧 상전께 갖다 바쳤다.
편지를 받은 노진사는 펴 보다가 다 읽지도 않았다. 그리고 편지를 쥔 채 맨발로 대문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 때는 장보교 발이 들리고 거기서는 여염집 부녀로 차린 진주가 보교 밖에 내려선 때였다.
마주 뛰어나온 노진사─ 너무도 억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진주의 손만 탁 잡았다. 앞의 진주는 머리를 수그린 채 눈물만 흘렸다.
『진사님!』
『오오!』
『진사님!』
『어떻게 왔느냐?』
『……』
말— 언어로서의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였다.
—지하의 낭군이 통곡하리라
『일 년을 참았습니다. 참고 버티었습니다. 첫 번 뵈올 때부터—』
노진사는 꿈꾸는 듯한 즐거운 마음으로 진주를 맞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갔다.
×
명가(名歌)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
뜻 없이 외고 부르는 사람들로서도 거기 유사(類似)한 모든 다른 노래보다 가슴에 스며드는 깊고 큰 느낌을 이 노래에서 받은 것은, 이러한 깊고 깊은 사연이 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