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제11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객사[편집]

참새들은 마당으로 오르락 내리락 지저귀되, 장군 마을에서는 오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궁예는 장군 마을에 앉아서 왕의 사신들이 괴로와할 것을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그리고는 한번 이를 갈았다.———

『오냐, 내 원수 갚을 날이 왔다. 신라 왕! 신라 왕! 너는 내 손에 든 토끼다!』

하고 껄껄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오늘 정사(政事)도 다 끝나고 심심하니, 어디 그 토끼 새끼들이나 불러들여 볼까?』

하고 사신 일행을 불러 들이라고 영을 내리고, 그 사신들하고 사신들에게 욕을 보일 것을 생각하고 혹은 픽 웃고 혹은 이를 갈았다.

장군 마을에서 사람이 나와 사신을 부른다는 말을 들은 때에 허담 국사는,

『저놈이 안 나와 보고 나를 불러?』

하고 소리를 지르며,

『선종이놈을 이리로 불러라.』

하고 야료을 하였다.

치원이가 가까스로 허담을 달래어 수레에 태워 앞세우고 장군 마을로 들어 갔다.

왕의 사신이 들어 온다고 백성들은 길가에 나와 구경하였다. 사신들은 각각 벼슬 계제를 따라 혹은 자주 옷을 입고 혹은 분홍 옷을 입고 혹은 푸른 옷을 비고 금과 옥이 찬란한 품대에 난과 학이 날아 오는 듯한 흉배를 붙이고 수레 위에 엄연히 앉았다.

그중에도 허담 국사는 금실 섞어서 짠 자주 비단 장삼에 불 타오르는 듯한 가사를 메고 한 팔목에는 수정 염주를 넌짓 걸고 한손에는 육환석장(六環錫杖)을 들고 비스듬히 몸을 수레 나간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입을 우물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수척하였을망정 붉은 얼굴에 은빛 털이 희끗희끗 보이는 것이 심히 위풍이 있고, 바로 그 뒤에는 달마존자(達磨尊者)와 같이 뚱뚱한 대구 화상(大矩和尙)이 가느란 눈을 뜰락감으락하고, 그 뒤에는 치원(致遠)이 반백이나 된 긴 수염을 드리고 어엿히 앉은 것이 신선과 같았다.

사신의 일행은 천천히 몰아 고루(鼓樓)를 지나 원문(轅門)을 지나 박석길에 수레 바퀴 소리와 당(璫) 소리와 패옥(佩玉) 소리를 당그랑당그랑 울리며 삼문(三門) 밖에 다다라 수레를 멈추었다.

삼문에도 궁예가 마중 나오지 아니한 것을 보고 치원은 심히 맘이 괴로왔다 그렇다고 . 체면에 그대로 들어 갈 수도 없어 한참이나 거기서 머물러 어찌할까 하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때에 대구 화상이 한번 낯을 찌푸리더니 수레에서 내려 창검이 별 걸 듯한 사이를 대답보로 걸어 삼문을 들어 가 계상에 올라 궁예의 앞에 나아가,

『태백산 세달사 허담 스님 행차시오.』

하고 마을이 떠나가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물러나왔다. 범패(梵唄)로 닦은 대구 화상의 목소리는 큰 종소리와 같이 뜨르르 울렸다. 그 소리에 모든 사람들은 놀라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궁예도 놀랐다. 그러면 허담 국사는 자기의 스님인 허담 화상인가 그 병든 허담 화상이 국사는 어인 국사인가 하고 곧 일어나 삼문으로 나와 본즉, 수레 난간에 기대어 앉은 이는 과연 삼년 전에 떠난 허담 스님이었다.

『소자 선종이 아뢰오.』

하였다.

허담 화상은 눈을 번쩍 떠서 수레 앞에 무릎을 꾼 선종을 이윽히 보더니,

『이놈, 토끼 사냥을 간 줄만 알았더니 여기 와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어? 고이한 놈 같으니, 소허(少虛) 놈은 어디 갔단 말이냐? 두 놈이 다 똑 같은 놈이어니.』

궁예는 고개를 들어 허담을 보며,

『소허는 진헌이라 일컫고, 후백제 왕이 되었읍니다.』

『후백제 왕?』

하고 허담 화상은 웃으며,

『그래 너도 왕이 될 생각이냐? 부처럼 되어 볼 맘은 생심도 못하고 겨우 왕이야? 허허, 좀된 놈 같으니, 어서 민간에 나와 작폐 맏고 날 따라 절로 들어 가자!』

하고 석장을 들어 찬란한 장군의 복장을 입은 궁예의 등을 후려 갈긴다.

궁예는 허담 화상이 이렇게 무서운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저 맘 좋고 못난 중이라고만 생각하였고 스님의 정의를 생각하고 삼문 밖에 나와 맞을 때에도 자기의 위풍만 보면, 스님도 두려워하는 맘을 가지리라고 속으로 믿었었다. 그러나 허담 화상이 자기를 세달사에 잇을 때와 같은 어린 상좌로 여기는 것을 당할 때에 궁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김에 칼을 빼어 화상을 베어 버릴 생각도 났으나, 궁예는 꾹 참고 손수 허담 스님을 이끌어 안으로 인도하였다. 허담은 비씰 비씰 궁예에게 부액을 받아 안으로 가면서도, 이놈 날 따라 가련 『 ? 왜 중놈이 세상에 내려 와서 작폐를 하여? 고이한 놈 같으니, 네가 없으면 내 죽을 누가 쑨단 말이냐? 고이한 놈 같으니, 소허놈이 왕이 되었어? 좀된 놈 같으니.』

하고 중얼거리는 마지 아니한다.

궁예는 허담 화상을 모시어다가 내아(內衙)에 자리를 깔고 눕혔다.

화상은 따뜻한 아랫목 부드러운 금침에 몸이 편안하여 순식간에 드렁드렁 코를 골기를 시작하였다.

궁예는 그제야 마을에 나와 좌정하고 치원 이하 여러 사신을 대하였다.

치원은 길이 두 자나 넘는 붉은 비단보로 쌀 상자들과 오동 칼집에 자금(資金)으로 용을 아로새긴 칼 하나와 맨 나중에 남산자옥으로 새신인(印)하나와 기들과 도끼 하나와 병부(兵符) 하나를 내어 놓았다.

궁예는 보기를 다하고 그 첩지와 인과 병부를 손으로 밀어 치원에게 주며,

『원로에 이 무거운 것을 오노라고 수소하였소. 그러나 이곡에는 신라 왕에게 봉작(封爵)을 받을 사람은 없더라도 당신네 여왕께 아뢰오. 궁예가 원하는 것은 두 늙은 여우의 머리라고 전하고 자세한 말은 삼월 삼질날 서울서 만날 때에 청련각(靑蓮閣) 위에서 하자고 말전하오.』

하였다.

치원이나 다른 사신들이나 궁예의 말에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두 늙은 여우의 머리」란 무엇이며 「청련각에서」가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치원은 일이 다 틀린 줄을 알았으나 봉명 사신으로서 이만하고 말 수는 없어서 이윽히 생각하던 끝에 위엄을 갖추어 지금 각처에 도둑이 봉기하여 창생이 도탄 중에 괴로와하니, 이때는 정히 충신 열사가 나라를 위하여 큰 뜻을 펼 때라. 왕이 어지러운 천하를 진정할 인재를 얻으려고 소의 한식으로 신념을 믿지 아니하여 궁예가 재주와 덕망이 높음을 알고 이에 특히 사자를 보내어 높은 벼슬로 부르시는 것인 즉, 궁예는 응당 충의 지사일 것이니 옛날의 제갈 무후의 본을 받아 왕사를 위하여 국궁 진췌함이 마땅하다는 것과, 나중에는 지금 영동과 관북 지방에 인심이 이반하여 북으로 오랑캐와 통한다는 소문까지 있으되 이것을 진정할 이는 오직 궁예뿐이니, 시각을 지체 말고 군사를 돌려 북을 향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도도 수천 언으로 말하였다. 멀리 당나라 장안에서 닦여난 치원의 구변은 참으로 현하(懸河)와 같았다. 더구나 치원의 일언 일구에는 근심과 정성과 힘이 한데 엉키어 마디마디 사람의 폐간을 찌르고 장군 마을의 기둥과 주춧돌까지도 피땀을 흘릴 듯하였다. 마침내 치원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나도 십수년 세상 일에 맘을 끊고 운수 종정으로 산수간에 방랑하였으나, 이때를 당하여 안연히 있을 수가 없어 대왕마마의 부르심으로 일어났으니 장군도 돌이켜 생각하시기를 바라오.』

하고 말을 끊었다.

그후에도 치원은 두어 번 궁예를 만났다. 만날 때마다 궁예더러 함께 기울어지는 나라를 붙들기를 권하였다. 치원은 궁예가 의리 있는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의리로 궁예를 움직이려 하였다.

궁예도 치원의 정성과 충의에 감동하지 아니함이 아니었다. 더우기 치원의 덕에 감복되어 치원을 자기 사람을 만들기를 원하였다. 그러하나치원의 충의를 볼 때에 궁예는 감히 치원더러 왕을 배반하고 자기의 사람이 되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아니하였다.

치원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 와서는 모든 것을 당나라와 같이 하려고 힘을 쓰고 본디 우리 나라 것은 다 이적(夷狄)의 것으로 더럽게만 보았다.

그러나 점점 내 나라 것을 알아 보고, 낫살을 먹을수록 내 나라는 내 나라요, 당나라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되고 더구나 산중에 들어 방랑한 지 십 년 동안에 여러 국선(國仙)을 만나 도(道)로 토론할 때에 우리 나라에 예로부터 전하는 도가 우리 나라 사람의 골수에 깊이 박혔을뿐더러, 결코 남에게 지지 아니함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치원은 오랫 동안 뒤집어 쓰고 있던 당나라 사람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참된 신라 사람이 되어 기울어지는 신라 나라를 바로 잡기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라는 상소(上疏)를 품고 표연히 서울에 나타났다.

때에 마침 진헌의 무진주(武珍州)에 일나 서남 여러 고을을 엄습하고 북에 양길과 기헌이 있으며 각지에도 도둑은 봉기하고 국고는 경갈한 때라, 왕도 그윽히 앞일을 근심할 때이었으므로 치원의 상소를 들어 그 말대로 정사를 개혁하기로 하였다. 그러할 때에 궁예가 마른 벌판에 붙는 불의 형세로 몰아 들어 온 것이다. 치원이 비록 벼슬이 아손에 지나지 못하나 내외 대소의 정사는 치원의 말대로 되는 때이었다. 치원을 진헌을 손에 넣어 보려고 여러 번 사람을 보내었으나, 사람이 간교하고 의리가 없으며 어찌할 수 없고, 궁예는 이르는 곳마다 백성을 안위하고 비록 대적이라고 죽은 후에는 그 신채를 후히 장사하고 그 유족을 후히 보호한단 말을 들을 때에, 그는 뛰어난 큰 뜻을 품은 사람인 줄을 짐작하고 왕께 누누이 여쭈어 궁예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 국가 대사를 맡기기를 아뢴 것이다. 그러나 왕은 치원의 뜻을 바로 알아 듣지 못하고 또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큰 판국을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궁예를 멀리 변방으로 내쫓아 일시 편안함을 얻을 양으로 관북 대도 둑이라는 벼슬을 새로 마련하여 궁예를 속여 쫓는 수단을 삼은 것이다.

치원은 궁예를 대하매, 위인이 왕자의 풍이 있고 위의와 언사의 비범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궁예와 의를 맺어 손을 맞잡고 자기는 문정(文政)을 맡고 궁예는 병마(兵馬)를 맡아, 나라를 바로 잡는 큰일을 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진정을 떨어 놓고, 천언만어로 궁예를 달래었다.

그럴 때마다 궁예는,

『썩은 기둥이 다시 서오? 새 기둥을 세우는 것이 옳지 않겠소?』

하고 은근히 새로 나라를 세울 뜻을 보였다.

궁예의 이 말을 듣고는 치원은 한숨을 쉴 뿐이었다.

치원은 궁예더러 같이 나라를 바로 잠자고 달래고 허담 화상은 궁예를 대할 때마다,

『선종아, 절로 들어 가자.』

하고 다시 중이 되리라고 졸랐다.

마침내 치원의 원하는 뜻은 이르지 못하고 다만 치원에게서 다시 무슨 기별이 있기까지 궁예가 서울을 엄습하지 않기를 약속하고 치원은 아슬라성을 떠났다. 그날에 궁예는 큰 잔치를 베풀어 허담과 치원과 기타 사신 일행을 대접하고 남문 밖까지 궁예 몸소 사신들을 전송하였다.

마지막으로 작별할 때에도 궁예와 치원은 서로 작별을 아끼고 허담은 어서 민간 작폐를 그치고 산으로 돌어 오라고 궁예에게 호령을 하였다.

사신 일행이 아슬라성에서 무사히 돌아 옴을 보고 장안에서는 적이 안심되었다. 그러나,

『두 늙은 여우의 머리를 보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청련각에서 만나자.』

하는 궁예의 말을 들을 때에 왕은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하여 좌우에게 물었으나 역시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왕은 생각다 못하여 오래 잊어 버리고 만나지 못하던 어머니를 찾았다. 육십이 넘은 두 분 태후는 뒷대궐에 함께 살며 어렸을 때 형제로 의 좋게 자라던 모양으로 중년의 모든 미움과 시기도 다 잊어 버리고 슬프나마 의좋게 함께 늙었다.

인제는 두 분 태후에게는 아무 세력도 없으니 찾아 올 사람도 없고, 또 이 세상에 아무 욕심도 없으니 누구를 특별히 찾아 만날 필요도 없었다.

오직 예로부터 모시던 늙은 궁녀들과 벗을 삼아 이따금 늙은 여승이나 청하여 다가 진언 이나 (眞言) 외고 염불이나 하며 대자 대비한 관세음보살과 아미 타불이세 매어 달려 왕생 극락하는 길이나 닦을 뿐이었다. 왕의 따님으로 왕의 아내로 왕의 어머니로 일국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두 분 태후도 앞으로 죽을 날을 바라볼 때에는 오직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아주 하잘 것 없는 죄인이었다. 일생에 지난 일을 생각하며 현세세서도 깨어서 생각으로나 잠들어서 꿈으로나 수없이 지은 죄가 무섭지 아니하고 이롭지 아니한 것이 없으려든, 하물며 염라대왕의 앞에서 저울에 죄를 달을 ㄸ깨에 아귀도(餓鬼道)나 축생도(畜生道)나 지옥도(地獄道)를 벗어날 길이 없을 듯하였다.

『대자 대비하신 관세보살님께만 매달리시고 아미타부처님만 부르시면 모든 죄를 용서함을 받습니다. 왕생 극락하십니다.』

하는 여승의 말에 위로를 받아 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불렀다. 혹 경문왕이 승하하신 날이나 기타 두 분의 맘에 찔리는 기억이 있는 날에는 특별히 두 분을 원망할 듯한 여러 사람의 위패를 써 놓고 승을 불러다가 정성으로 재를 올려 그 사람들의 원혼이 원망을 풀고 왕생 극락하기를 빌고, 밤을 새워 갖은 진언을 외우며 염불을 하였다. 두 분을 본받아서 뒷대궐에 모시는 궁녀들도 수없이 합창을 하고 수없이 염불을 하였다.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고 기왓골에도 쑥대가 길로 자란 속에서 십여 명 늙은 부인들은 세상과는 모든 인연은 끊고 염주를 세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불렀다.

오랫 동안 이러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두 분 태후와 늙은 궁녀들은 얼굴과 태도조차 변하여 이 세상 사람인 기색이 없고, 눈이 멍하여 마치 등 신 같으며 한번 앉으면 무슨 일이 있기 전에는 일어날 생각도 아니하고 피차에 이야기도 아니하고 마주 바라보지도 아니하고 저마다 제 생각과 제 염불에만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 딴 세상의 뒷대궐에도 봄이 오면 마당의 썩은 풀 뿌리에서 움도 나오고, 몇 십년 전 누가 심었는지 모르는 뿌리에서 꽃도 피고 제비 소리도 나고, 가을이면 처량한 달빛에 지나가는 기러기의 소리도 울려 왔다. 그러할 때에는 이 늙은이들은 또 봄이 왔나 가을이 되었나하고 말없이 한숨을 짓고 옷을 갈아 입었다.

이러한 뒷대궐에 왕은 한번도 와 본 일이 없었다. 왕이 어머니의 얼굴을 대한 지가 오륙년이 지났다. 그래서 뒷대궐에 있는 이들은 일생에 왕의 낯을 다시 대할 생각도 아니하고 다만 습관적으로 아침마다 왕의 복을 빌고 왕을 위하여 임부를 하였다.

그러하던 차에 천만 뜻밖에 하루는 왕의 행차가 듭신다는 기별이 와서 두 분 태후마마 이하로 여러 늙은 궁녀들은 갑저기 오래 들었던 잠을 놀래어 깨어나는 듯하여 눈들이 둥그레져 사로 바라보았다. 서로 바라보니 서로 평생에 만나 보지 못한 사람 같아서,

『다들 늙었구나 ————변하였구나!』

하고 속으로 한탄하였다.

뒷대궐에서는 왕의 거동을 맞을 준비를 하노라고 바빴다. 궁녀들이 손수 마당에 황토를 ㅕ고 문 위에 남거미줄을 쓸고 마루에 먼지를 쓸고 마루에 먼지를 쓸고, 여러 해 동안 입어 보지 못하고 장 속에 박아 두었던 물 다 빠진 옷들도 내어 입었다. 그리고 왕이 들어 와 앉으실 대청 정면에는 낡은 비단 보료와 방석을 깔았다. 모든 준비가 다 된 뒤에야,

<상감마마께서 어찌하여 오시는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나, 아무도 입 밖에 내아 말은 아니하였다.

왕은 극히 간단한 궁녀 두 사람의 부액을 받아 들어 오시었다.

쓸쓸하게도 된 집과 이 세상 사람 같지 아니한 궁녀들을 보고 왕도 감개무량한 모양으로 얼굴에 검은 구름이 끼었다.

두 분 태후도 끝까지 나와 맞았다. 왕은 맨 처음 자기를 낳아 준 친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음에는 이모요, 또 어머니 되는 정화마마의 손을 잡았다.

『어마마마!』

하는 왕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두 태후마마의 주름 잡힌 뺨에도 눈물이 번쩍거렸다.

『상감마마!』

하고, 영화마마는 목이 메어 다시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자식에게 대한 어머니의 정은 지난 날의 더러운 질투와 미움에 대한 후회의 정이 함께 복받쳐 올라 와 떨리는 몸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지나 놓고 보면, 한바탕 부끄럽고 신물되는 꿈인 것을 내 어찌 그리하였던고 할 때에 두 분마마나 상감마나나 모두 비창함을 금하지 못하였다.

『한번만 더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런 짓을 말았을껄.』

하고 두 분 마마는 잘 돌아 가지 않는 목소리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고 불렀다.

왕도 자리에 앉고 늙은 궁녀들도 왕의 명으로 둘러 앉았다. 늙은 궁녀들 중에는 참다 못하여 문밖으로 나아가 느껴 우는 이도 있었고 누구나 눈에 손을 대지 아니한 이는 없었다. 한참 동안은 혹혹 느낀 소리 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고, 그 큰 집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서로 울음을 그치려고 코를 들여마시나, 눈을 떠서 피파의 얼굴울 바라보면 새삼스러운 설움이 복받치어 새로 눈물이 흘러 내렷다.

왕도 오래간만에 어머니를 대할 생각을 할 때에는 다소 감격할 것을 기대하였으나 이처럼 피차에 비상할 줄은 뜻하지 못하였다. 일생의 모든 죄와는 슬픔이 다한데 모여 나오는 듯하고 이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의 불행이 다 자기로 말미암아 생긴 듯할 때에 왕은 가슴이 저리도록 슬펐다.

그러나 왕은 이러고만 잇을 수가 없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한가하게 슬퍼할 처지가 아니다. 왕은 입을 열어,

『어마마마 지금 나라에 큰일이 생겨 아무리 생각하여도 좋은 도리가 없고 만조 제신도 꾀를 내는 자가 없어서 어마마마께 아뢰어 보려고 왔읍니다. 늙은이는 젊은 이에게 없는 지혜가 있다고 하옵니다.』

하였다.

『나라의 큰일이라니 무슨 큰일이요?』

두 분 마마는 놀래는 듯이 근심스럽게 묻는다.

왕은 진헌의 이야기와 궁예의 이야기를 대강 말한 뒤에,

『궁예의 말이 늙은 두 여우의 머리를 보내면 화친도 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삼월 삼진날 청련각에서 만나자 하니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없읍니다.』

하였다.

『청련각?』

하고 영화마마는 파랗게 질리며,

『그러면 그 궁예라는 것이 용덕아기가 아닌가.』

한다.

『용덕아기?』

하고 정화마마도 펄쩍 뛴다. 늙은 궁녀들도 모두 놀라고 왕도 그제야 어려서 듣던 이야기가 생각 난다.

용덕아기란 말에 왕도 놀라며,

『어떻게 궁예가 용덕왕자인 줄 아시오?』

하고 영화마마께 물었다. 왕은 용덕아기라는 왕자가 있었다는 말과, 아버지 경문대왕께서 죽이라 하시어서 우모가 안고 도망하였다는 말과, 경문대왕 승하하신 때에 어떤 애꾸 아이놈이 용덕왕자의 쏜 살이 대궐 기둥에 박히어 꼬리를 흔들고 아무리 하여도 빠지지를 아니하였고 가까스로 뺄 때에도 자리에서 피가 흘렀다 하여 그 자국까지 본 것과, 이만큼은 알았으나 그 이상 자세한 말은 듣지도 못하고 또 알아 보려고도 아니하였다. 대개 대궐 안에서는 뒷 대궐마마나 용덕왕자 이야기를 하지 아니한 까닭이다.

영화태후는 길게 한숨을 쉬며,

『청련각에서 만나자는 말은 분명 용덕왕자요.』

하고 말하기 괴로운 듯이 용덕아기이 어머니 되는 뒷대궐마마가 청련각에서 연못을 향하고 내어 던진 것을 유모가 받아 가지고 갔단 말을 하고, 맘이 괴로와 차마 더 말을 못하는 듯이 말을 끊고 염주를 만지면서 들릴락말락하게 염불을 한 후에,

『그 뒷대궐마마가 바로 여기 있었소. 여기 있기 때문에 뒷대궐마마라고 불렀소.』

하고, 방안의 무엇을 보는 듯이 눈을 들어 사방을 돌아 본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방을 눌러 보고 몸에 소름이 끼치었다. 왕도 여자의 본능으로 무서움이 생겨 몸을 한번 소스라치며,

『그래 뒷대궐마마는 왜 죽었소?』

하고 물었다.

이 말에 사람들은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여기 있는 늙은 궁녀들은 다 그때부터 두 분 마마를 모시어 모든 일을 다 아는 까닭이다.

두 분 태후는 입술이 벌벌 떨린 뿐이요, 혀가 돌아 가지 아니하였다.

삼십년 잊어 버렸던 죄악이 이처럼 다시 드러나서 나라에 큰 화단이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아이 끊어질 줄 모르는 인과의 줄이어!>

하고 영화마마는 안 보이는 칼로 가슴을 어이는 듯이 괴로왔다.

이 눈치를 보고 잇던 궁녀 하나가 왕의 앞에 나앉으며,

『뒷대궐마마가 이손 유흥(伊飡允興)과 간통한 줄을 아옵시고 또 용덕아기께서 얼굴이 이손 윤흥과 같다 하오시어, 경문대왕 마마께서 모자를 다 죽이라 하시었읍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면 용덕아기는 우리와 동기가 아니요, 운흥의 씨던가.』

하고 왕이 고개를 끄덕끄덕할 때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영화마마는 가위 눌린 듯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몸을 떨며,

『아니요, 아니요. 뒷대궐마마는 아무 죄도 없소. 모든 것이 다 내 죄요.

다 내가 뒷대궐마마를 시기해서 지어낸 소리요. 어찌하면 상감마마의 총애를 받는 저것을 없이할까, 어찌하면 항상 내 말을 아니 듣는 윤흥의 삼 형제를 없애 버릴까 하여, 내가 그런 소리를 지어 낸 것이요. 요망하고 음탕한 계집이 말한 뒤로 세 충신과 한 열녀를 죽게 하고 이처럼 나라에 큰 화단을 블렀으나, 모두 내 죄요. 죄 없이 흐른 열녀의 피와 충신의 피가 삼십년을 지나도록 스러지지 아니하고 있다가 지금 원수 갚기를 원할 것이요……내가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부르기로 이 못한 원혼들이 나를 지옥으로 끌어 넣고야 말 것이요.』

하고 왕을 향하여,

『모두 내 죄요, 모두 내 죄요. 오늘날이 있기를 기다리고 죄 많은 내 목숨이 살아 온 것이요, 상감마마는 아무 염려 마오. 내머리를 드릴 것이니 용덕 아기에게 보내어 주어. 마땅히 하올 일이 오늘에야 왔소.』

영화마마의 말이 그치자 정화마마도,

『나도 같이 갑시다. 두 늙은 여우의 머리라 하였으니 내 머리도 같이 줍시다. 백제·고구려의 이백년 묵은 원혼도 여태껏 돌아 갈 줄을 모르고 피 묻은 원한이 뭉치고 뭉치어 원수의 피를 마시고야 쉬거든 칼 물고 죽은 원혼이 삼십년에 스러질 리가 있겠소? 밤마다 꿈에 보이는 것도 원수의 피를 먹으려는 뜻이요, 원한이란 갈수록 커지고 들수록 깊어지는 것이요.

한 여자의 원한이 삼십년을 자라고 자라서 나라에 큰 화단이 되었으니, 이제는 우리의 피를 주어 돌아 가지 못하는 원혼을 돌려 보냅시다.』

하고 일어나 곁방으로 들어 가려 하였다. 영화마마도 뒤를 따른다. 곧 칼을 들어 자결하려 한 것이다.

늙은 궁녀들은 울며 일어나는 두 분 마마를 붙들었다.

『붙들지 말라! 붙들지 말라! 이 원한을 두고 삼생을 두루 돌며 뉘우침의 괴로움을 당하게 말라, 칼만 한번 번 찍하면 이몸을 가지고 금생에 지은 모든 죄를 소멸지는 못하여도 죄의 뿌리는 끊을 수도 있을 것을———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죽거든 머리는 용덕아기에게 보내고 몸은 들에 버려 까막까치의 밥이 되게 하라.』

하고, 두 분 마마는 미친 듯이 여러 늙은 궁녀들의 붙드는 손을 뿌리치려 하나, 여러 손에 끌려 펄썩 주저앉으며,

『아아, 어찌하잔 말인고? 죽어서 만일 혼백이 잇다 하면 삼도천(三途川)을 건널 때에 내 손으로 죽인 수없는 원혼들을 어떻게 헤어나며 황천(黃泉)에 들어 가서 먼저 가신 대왕마마를 무슨 면옥으로 보이랴? 이몸의 목숨을 끊을 칼은 없던가? 만일 몸은 죽어도 혼은 살아 있다 하면, 저 원혼의 원망을 내 어찌 받으리. 십년 이십년도 어렵거든 영겁(永劫)의 괴로움을 내 어이 받으리. 아아, 혼까지 태워 버리는 불은 없을까?』

영화마마가 목을 놓아 울면 정화마마도 따라서, 일생에 『 찼던 영화가 지나고 보니 회한(悔恨)뿐이로구나! 한 찰나(刹那) 쾌락과 미움이 영겁의 지옥이 될 줄을 몰랐구나!』

하고 운다.

두 분 마마가 울고 하소연하는 것을 볼 때에 왕도 지나간 일생의 모든 불의의 쾌락이 일시에 시커먼 불길이 되어 자기를 살려 놓고 태우는 듯하였다. 천년 종사를 이 꼴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도 땅에도 설 곳이 없는 몸이 된 것이 분명히 눈앞에 보일 때에 왕은 견딜 수 없이 슬펐다. 그러나 모모이 일국의 왕이 되었으니 죽기도 맘대로 할 수가 없다. 왕은 복받치어 오르는 뉘우침과 괴로움을 꾹 참고 태연한 두 분 마마를 위로하렸다 ———

『과도히 슬퍼 마시오. 궁예가 진실로 용덕아기라 하면 두 분 어마마마께서는 원수라 하더라도 나와는 동기 형제니 설마 무슨 도리가 없으리까. 들으니 궁예는 진헌과 달라 인정이 있고 덕이 잇다 하니 피를 나눈 누이의 말을 설마 아니 들으리까. 자연 도리 있을 것이니, 부디 과도히 설어 마시오.』

하고, 차마 그 자리에 더 있지 못하여 두 분 마마께 하직하고 왕은 침전으로 돌아 오시었다.

침전에 돌아 와 왕은 좌우를 물리고 혼자 목을 놓아 울었다. 지금까지 체면에 참았던 슬픔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라 온 것이다. 더구나 저렇게도 애통하는 어머니를 볼 때에 자식의 슬픈 정이 나고 자기의 친어머니와 그동안에 말할 수 없이 더러운 관계로 지낸 것을 생각할 때에 억제할 수 없이 뉘우침이 칼날이 가슴 속에 돌았다.

왕은 그날 종일을 눈물로 보내고 온 밤을 옷도 안 끄르고 근심으로 새웠다. 오랫 동안 졸다가 깜짝 놀라 일어난 왕의 양심은 새로 갈아 놓은 칼날 모양으로 사정 없이 왕의 몸과 맘을 찌르고 비웃었다.

이튿날 평명에 뒷 대궐 궁녀는 왕에게 무서운 소식을 전하였다. 그 소식은 이러하였다 ———— 그날 종일 궁녀들은 잠시도 두 분 마마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꼭 따랐다. 여러 궁녀의 권으로 저녁 진지도 물에 말아서 조금 뜨시고 불을 켜 놓은 뒤에는 별로 괴로와 하는 빛도 없이 궁녀들과 이야기도 하고 분황사(芬皇寺)의 늙은 승 청조(淸照)를 불러 들여 법화(法話)를 들었다.

그러다가 청조도 나가고 두 분 마마는 평시에 모시고 자던 궁녀더러는,

『오늘 밤에는 우리 형제 같이 갈 터이니 들지 말라.』

하고 두 분이 관세음보살의 , 금상(金像)을 모신 영화마마의 첩방으로 들어갔다. 전에도 가끔 두 분이 관세음보살님 바에서 주무신 일이 있으므로 궁녀들도 하릴없이 뒤에 떨어지어 곁방에 모여 손근소근 이야기도 하고 가끔 벽에 귀를 대고 엿듣기도 하였다. 밤이 깊어 삼경 북이 울릴 때까지도 두 분이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서 안심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늙은 궁녀들은 하나씩 둘씩 감이 들어 버리고 사경 북이 올 때에는 영화마마를 모시던 궁녀 하나만이 깨어 있었다. 여전히 염불 소리가 울려 왔다. 밤이 깊어 고요한 넓은 대궐 속에 구슬픈 염불 소리가끊이락이으락하였다.

그렇게 잠이 들지 아니하고 엿듣다가 늙은 궁녀는 잠깐 잠이 들었다.

그랬다가 오경북을 치는 소리에 놀래어 깨어 엿들으니, 그때에는 염불 소리가 없었다. 맘에 웬일인가 하는 생각도 났으나 무엄하게 문을 열어 볼 수도 없어 아마 잠이 드셨나보다 하면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잠이 들었던 궁녀들은 모두 일어나서 서로 바라보았다. 여럿이 의논한 끝에 아무리 하여도 수상하다 하여, 두 분마마께서 주무시는 문밖에 가서,

『태후마마, 태후마마.』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때에 문밖에 있던 궁녀들은 몸에 냉수를 끼얹으는 듯하였다.

마침내 영화마마를 모시던 늙은 궁녀가 황황하게 문을 열었다. 문고리는 걸리지 아니하였다. 문밖에 섰던 여러 궁녀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서며 소리를 질렀다.

관세음보살 불단(佛壇) 앞에는 거의 다 타버린 촛불을 둘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펄렁거리고 불단을 향하여 두 분 마마는 끓어 엎디어 예불하는 사람 모양으로 가만히 있다. 정화마마는 몸이 한편으로 좀 쓰러졌으나 영화마마는 금시에 일어날 듯이 두 분의 입은 하얀 옷자락은 방에 깔려 피에 젖었고 방안에서 피비린 내가 코를 받치며 아직 채 굳지 아니한 피가 촛불에 번쩍번쩍한다.

궁녀들은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방에 들어 가 두 분 마마에게 매어 달렸다. 그러나 벌써 두 분의 몸은 식고 굳었다.

늙은 궁녀는 향로에 새로 향을 피워 놓고 곧 왕께로 이 말을 전하러 간 것이다.

왕은 궁녀의 눈물 섞어 아뢰는 말을 다 듣더니,

『칼로 돌아 가시었더냐?』

하고 물었다.

『예, 두 분 마마께옵서 다 칼을 입에 무시옵고, 그림에 그린 듯이 곱게 돌아 가시었읍니다.』

왕은 다시 여러 가지로 자세한 말을 물은 뒤에,

『마마께서는 왕생 극락을 하시었을까?』

하고 물었다.

늙은 궁녀는 새로 솟는 설움을 못 이가 한참 동안 목이 메어 말을 못하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눈물에 젖은 늙은 얼굴로 왕을 바라보며,

『분명 두 분 마마께서옵서는 왕생 극락하시었읍니다. 십년을 하루같이 금생 모든 죄를 뉘우치고 염불 공덕을 세우시었사오니 왕생 극락은 의심 없읍니다.』

하고 더욱 느껴 운다.

북원에서는 양길이 궁예의 이름이 갑자기 높아 가는 것을 심히 맘에 불평하였다. 그래서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궁예더러 급히 돌아 오기를 명하였으나, 듣지 아니할뿐더러, 아슬라성에 들어 간 후에는 대장군이라고 자칭하였다는 말을 들을 때에 양길은 이를 갈았다.

『이놈이, 이놈이 은혜를 모르고.』

하고 펄펄 뛰었다.

그리하던 차에 왕의 사신이 아슬라성에 와서 궁예를 찾아 보았고 궁예는 왕에게서 높은 벼슬을 받아 왕의 사신이 돌아 갈 때에는 큰 잔치를 베풀고 성문 밖에 나와 전송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속이 끓어 오를 듯이 미운 생각과 시기지심이 났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제는 궁예는 자기의 대적이아니다. 북원 성내에서도 아동 주졸까지도 애꾸눈 신장군이라 하여 자기보다도 궁예를 더 높게 보고 더 어려워하였다.

『그놈을 왜 그때에 아니 죽여 버렸던가. 왜 잡혔던 호랑이를 들에 놓아 후환을 끼쳤는가.』

하고 양길은 배꼽을 물어 뜯었다.

이때까지는 서울서 혹 상을 준다는 말도 오고, 벼슬을 준다는 말도 왔다.

그러할 때마다 양길은 큰 소리를 하고 뻗대었다. 그러나 궁예가 나선 뒤에는 서울서나 세상에 서니 양길의 이름을 잊어 버리게 되었다.

궁예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애타는 것은 양길뿐이 아니었다.

진헌도 무엇인지경을 횡해와듯이 서남 여러 고을을 휩쓸고 이대로만 가면, 불원에 서울까지도 엄습하려는 뜻을 두었던 차에, 궁예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차차 들으매, 그가 선종인 것을 알고 더욱 놀래었다.

궁예가 선조일진댄, 그는 반드시 자기에게 대하여 좋지 아니한 생각을 가지었으리라고 진헌은 생각하였다. 자기가 허담 스님 밑에 있을 때에도 선종과 자연히 사이가 좋지 못하였거니와, 백의 국선에게 재주를 배울 때에도 선종을 속였고 떠날 때에도 아무 말도 아니하였던 것이다. 선종의 원험을 샀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궁예의 세력이나 저다지 훌륭하니 미웁기 그지없었다. 자기는 궁예의 밑으로 들어 갈 수 없고, 궁예도 자기의 밑에 들어 올 리는 만무하였다. 그러할진댄 세불 양립이니, 둘 중에 하나는 없어질 밖에 수가 없다고, 군사를 들어 대빈에 궁예를 무찔러 버릴까 싶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궁예의 세력은 점점 커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진헌의 맘은 괴로왔다.

그러할 즈음에도 왕의 사신이 아슬라성에 궁예를 찾았단 말과 궁예가 큰 잔치를 베풀고 성문 밖에까지 사신을 전송하였다는 말과, 또 일설에는 궁예에게 병마(兵馬)의 대권을 맡겨 진헌을 치게 한다기도 하였다.

이에 진헌은 사자를 양길에게 보내어 양길로 비장(裨將)일삼고 궁예가 양길에게 대하여 반심을 품었단 말로 이간을 붙이었다.

진헌의 꾀는 맞았다. 양길은 마침내 궁예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진헌은 원하는 바다. 일찍 같은 스님 밑에서 사형으로 섬기던 궁예를 자기의 손으로 죽였다 하면 후세에도 말썽이 될 것이요, 또 당장 민심에도 좋지 못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양길의 산을 긁어 궁예에게 대한 미움을 돋우면, 반드시 양길이 스스로 궁예를 죽일 꾀를 낼 것을 믿을 것이 그 죄가 꼭 들어 맞은 것이다.

『나와 그대와 두 사람이 합함이 아니면 천하를 어찌 진정하랴 아무쪼록 속히 우리들이 만나 피를 마시고 맹세하여 옛날 유관장의 본을 바라노라.』

진헌이 친필로 양길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이러한 구절도 있었고 또 양길의 공과 덕을 찬양하여 궁예가 양길의 은혜를 저버린 것이 통분하다는 뜻도 있었다.

『궁예놈은 과연 배은 망덕하는 놈이다!』

하고 양길은 이를 갈았다.

양길은 궁예 죽일 일을 생각하노라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일은 극비밀히 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일이 먼저 탄로되면 도리어 무슨 변을 당할는지 알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밀한 일을 하려고 본즉, 그 많은 사람에게도 믿을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면 도리어 모든 사람들이 다 궁예와 통하고 자기를 속이는 것 같이 보엿다.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양길은 원회(元會)를 생각하였다. 원회는 자기의 부하가 된 뒤로 극히 충성되었다. 그뿐더러, 원회는 이미 한번 자기의 주인 되는 기헌(箕萱)을 배반한 일이 있는 사람이니, 이로써 꼬이면 반드시 그 친구되는 궁예를 배반할 수도 있으리라고 믿었다. 또 원회만 가면 우직한 궁예도 반드시 그를 믿을 것이요, 믿어야만 목적을 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신훤(申煊)도 좋으나 신훤은 너무 우직하여 이러한 일을 맡길 수 없고, 또 궁예를 믿는 뜻을 숨기지 아니하고 언사에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신훤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요ㅡ 이 일을 할 자는 꼭 원회라 하였다.

마치 좋은 것은, 원회가 양길의 딸이요, 궁예를 사모하는 난영에 맘을 두는 눈치가 있는 것이다. 양길은 두서너 번이나 난영이가 원회가 마주 서서 길게 무슨 이야기 하는 양을 보았다. 그리고 원회가 양길을 대할 때마다 일종 수치의 정을 가지는 것을 보았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양길은 혼자 웃었다. 딸로 원회를 낚는 미끼를 삼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마침내 밤이 이슥한 때에 원회를 불러 들였다. 난영에게 맘을 다 빼앗긴 원회는 바스락 소리만 나도 난영의 일로만 알게 될 때라, 아닌 밤중에 자기를 부르는 것이 역시 난영에게 관한 이로만 여겼다. 풍운에 뜻을 두고 십여 년 간 시석지관(矢石之間)에 달리던 원화로운 생각을 하게 되니, 번개같이 지나가는 청춘의 행락이 아까운 생각이 나는 동시에 익을 대로 익은 난영의 아름다움을 볼 때에는 천하를 얻느니보다, 난영은 얻는 것이 나을 들하였다. 그러나 난영은 궁예를 사랑한다. 궁예가 전장으로 떠날 때에 단신으로 남복을 하고 석남사(石南寺)까지 따라 가지 아니하였더냐?

지금도 자기를 만나면 하는 말이 모두 궁예의 말뿐이 아니랴!

『이번 싸움에는 어찌되있소?』

하고 난영이가 그 아름다운 얼굴에 수삽한 빛을 띄우고 궁예의 길을 물을 때에 자기가,

『이겼소! 궁예 가는 곳에 대적이 어디 있겠소?』

하고 대답할 때에 난영이가 어떻게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가 앞에 있는 것도 잊어 버린 듯이 합장하고 서편 하늘을 우러러 보며,

『아아, 고마우신 미륵존불(彌勒尊佛)!』

하고 눈물을 흘렸던가! 이것은 궁예가 어진주(御珍州)를 항복받은 때 일이다. 그때에 원회는 어떻게 궁예에게 대하여 질투를 가지었던가. 궁예가 싸움에 이긴 것을 기뻐하는 난여의 모양으로 볼 때에는 마치 눈에 아니 보이는 궁예의 발이 자기의 가슴과 얼굴을 함부로 밟는 듯하였다.

궁예가 처음 전장으로 떠날 때에도 원회의 말의 한편 구석에서는,

<오, 네가 가면 내게도 기회가 있다.>

하는 기쁨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원회의 궁예에게 대한 친구의 의리는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궁예가 울오(鬱烏)를 향한다는 기별을 들을 때에 원회는 처음으로,

<이번에야 그 애꾸눈이 죽을 테지.>

하고 스스로 자기의 맘에 놀랐다.

그러다가 궁예가 어진주를 친다는 기별을 들을 때에,

<이번에는 꼭 죽어라!>

하고 원회는 이를 갈고 동남을 바라보며 저주하였고 적어도 싸움에 패하여서 지금까지에 얻은 이름을 여지없이 잃어 버리기를 맘으로 빌었다.

그러나 궁예는 원회의 저주도 듣지 아니하고 어진주를 손에 넣고 다시 질풍같이 아슬라성을 들이친다는 기별이 왔을 때에 원회는 맘을 진정할 수가 없이 괴로와서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영문 마당에서 거닐었다.

『이 사람 우리 궁예가 과연 신장군이로세.』

하고 자기의 어깨를 치며 기뻐하는 신훤까지도 미웠다. 그러나 그때에 신훤과 같이 웃으며,

『아무렴 나도 지금 궁예가 아슬라 싸움에 어찌되었는가 그것이 궁금하여 잠도 못 이루고 나와서 말굽 소리를 기다리는 것일세.』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러나 신헌은 수상한 듯이 어둠 속에서 자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 하다 고개를 돌렸다.

원회는 양길의 밑에 온 후에 난영의 말을 끌 만한 일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활 쏘기와 칼 쓰기로 시험해 볼 기회가 없었고, 게다가 한번 말 달리기를 할 때에 원회는 개천을 건너 뛰다가 말에서 떨어져 망신을 한뒤로 더욱 난영의 눈에 낮추 보였으리라고 생각하고 심히 부끄러웠다.

모략으로 남에게 지지 않는 줄 믿으나 궁예의 이른바 늙은 쥐라는 군사(軍師)가 양길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자기의 모략을 시험할 기회도 없었다.

그러하던 터에 양길에세서 밤에 부른다는 말을 듣고 이번에야 무슨 좋은 일이 생기는가 하고 가슴을 두군거리며 투구 갑옷을 갖추고 장군 마을 양길의 침방으로 들어 갔다.

양길은 마침 서안에 기대 앉아 무심히 고서를 읽다가 원회가 들어 오는 것을 보고 책을 접어 놓고 원회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원회는 장군에게 대한 예로 팔을 들어 인사한 후에 양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원회는 . 이렇게 양길과 단둘이 밀실에 마주 앉아 본 일은 없었으므로 맘에 매우 흡족하였다.

『마치 좋은 술이 있기로 한잔 나누고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소. 갑옷 투구는 다 벗어 놓고 편히 앉으시오. 오늘 밤에 한 친구로 술을 나누고 놉시다.』

하고, 양길은 설령줄을 쳐서 시비(侍婢)를 불러 원회의 투구와 갑옷을 받아 걸게 하고 준비한 주안을 내오라고 명하였다.

꽃 같은 시비는 사뿐사뿐 발을 놓을 때마다 패옥 소리에 아울러 가슴에 찬 울금향의 향기를 피웠다.

주안 상이 나와 두어 순배가 들도록 양길은 술 이야기며 여러 가지 잡담으로 원회의 맘이 탁 풀리도록 꾀하렸다.

먹은 술이 기름이 되어 피차에 말이 미끄러져 나오게 된 때에 양길은 시비를 물리고 원회와 단둘이만 마주 앉았다. 양길은 사람을 대할 때에 사람으로 하여금 정다운 생각이 나게 하는 용모를 가지었고 그의 언어와 태도가 마주 대한 사람을 턱 믿게 하는 힘을 가지었다. 양길이 민간에 명성이 높은 것이 이 때문이다.

오늘은 양길은 더욱 원회에게 대하여 믿고 친한 빛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항상 무슨 중대한 일을 엄두에 놓치 아니하는 자의 위엄을 갖추었다. 다만 그의 유순한 듯하면서도 빛나는 눈이 웃고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사람의 폐간을 꿰뚫어 보려고 잠시도 쉬지 않는 듯하였다. 원회는 그 눈을 안다.

그러나 원회는 양길의 눈을 당할 수가 없었다. 양길은 농담 삼아,

『아슬라에 안 가보시려오.』

하고 웃었다.

원회는 어인 셈을 몰라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 말에는 무슨 무서운 것이 품겨 있는 듯한 까닭이다.

그러나 원회도 그만한 말에 들을 듯한 사람은 아니다. 원회는 가장 엄숙한 태도로,

『장군께서 가라고만 하시면 이밤에라도 가옵지 무슨 말씀이 있겠읍니까?』

하였다.

양길은 그 온순한 듯하고도 사람의 폐간을 꿰뚫는 눈으로 원회를 이윽히 보더니,

『아니 그런게 아니라, 대사(大舍)는 본래부터 궁예 장군과는 친한 사리니 궁예장군이 전장에 나간 후로 연전 연승하여 아슬라성까지 항복받고와의 사신을 맞아 큰 벼슬까지 받았다 하니 대담히 기쁘지 아니하겠소?

나는 인제는 이름과 세력이 다 궁예 장군의 뒤에 떨어지니 궁한 나를 따르는 것보다 궁예 장군을 따라 가는 것이 이롭지 아니하겠소? 그러니까 아슬라성으로 갈 뜻이 없느냐 말이요?』

하고 일부러 원회의 눈을 피하여 다른 데를 본다.

원회는 양길이 궁예를 어떻게 의심하고 시기하는 줄을 안다. 그래서 첨에는 궁예의 위인이 결코 의리를 저버릴 사람이 아닌 것을 변명도 하였으나, 근래에는 도리어 궁예가 양길에게 의심받는 것이 자기에게 이로울 것을 생각하고 변명할 만한 일에도 변명을 아니하고 도리어 더욱 의심이 깊어질 만한 말을 한 마디 두 마디 무심코 하는 듯이 말하여 왔다.

원회는 편안히 앉았던 무릎을 모아 엄연히 꿇어 앉으며,

『치악산이 평지가 되고 한물이 오대산으로 거슬러 흐르더라도 원회가 장군께 바친 듯은 변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궁예와 원회가 비록 친구오나 친구의 정리로써 군신지의(君臣之義)를 변할 수 없사오며 또 만일 궁예가 아무리 원회의 친구라 하더라도 불의를 할 때면 원회의 칼은 궁예의 목을 벨 것이옵니다. 원회의 충성을 굽어 살펴 주옵소서.』

하고 원회는 두 손을 짚고 이마를 땅에 대었다. 그 말에는 충서이 사무친 듯하였다. 원회는 이리한 기회에 자기의 충성을 양길에게 보인,ㄴ 것이 편리한 줄을 잘안다.

양길도 원회의 말이 맘에 흡족하였다. 더구나 자기를 임금으로 보아

「군신지의」라고 하는 말이 더욱 맘에 흡족하였다. 그러나 양길은 짐짓 낯을 찌푸리며,

『대사도 한번 의리를 배반한 일이 있지 아니하오?』

하고 한번 원회를 찔렀다.

원회도 이 말에는 등과 이마에서 비지땀이 흘렀다. 십년 감고를 같이 한 기헌을 배반한 것이 가끔가끔 맘에 찔렸던 것이다. 원회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책망하시는 불의를 배반하고 의리를 좇은 것이라 하옵니다.』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양길은 웃으며,

『그러면 나도 불의를 하는 알이면 배반하시겠소?』

하고 원회를 바라보았다.

『그렇기도 하오나 소관(小官)은 이미 이몸을 장군께 바치었사오니 죽으나 사나 장군을 따르겠읍니다. 물에 들라 하시면 물에 드옵고 불에 들라 하시면 불에 들겠읍니다.』

하고, 다시 양길의 앞에 엎드려 이마를 조아렸다.

양길은 손수 술을 따라 원회에게 주며,

『자, 술이나 한잔 자시오, 내가 대사의 뜻을 믿으니 술이나 한잔 자시오.』

하고 권하였다.

원회는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 이번엔, 원회가 손수 술을 따라 양길에게 드렸다. 양길도 시양 아니하고 받아 먹었다. 원회는 하늘에 오른 듯이 기뻤다. 원회가 술이 얼근하여 즐거움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양길은 돌연히 손을 내밀어 원회의 손을 꽉 쥐고,

『내가 청하는 일을 들을 테요?』

하였다.

불의에 양길이 자기의 손을 잡고 내 청을 듣겠느냐 할 때에 원회는 놀랐다. 그러나 이것은 주저할 처지가 아니라 하여,

『예, 장군의 명이시면 물불을 가리겠읍니까?』

하였다. 그러나 무슨 일을 부탁하려나 하고 맘에는 의심이 있었다. 대개 원회는 인제는 공명을 위하여 위험한 싸움을 하는 것은 지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피 흘리는 일을 버리고 난영과 같이 안온한 생활을 하고 싶었다.

양길은 잡았던 원회의 손을 놓으며,

『곧 가서 궁예의 목을 가지고 오오. 궁예가 나의 은혜와 내게 대한 의리를 잊고 신라 왕과 통하여 도리어 나를 대적하려 하니 살려 둘 수 없는 놈이요. 내일로 떠나서 궁예의 머리를 가지고 오오.』

하고 명랑하는 태도로 말하였다. 그리고는 불길이 나는 듯한 성난 눈으로 놀라는 원회를 바라보았다.

원회는 이 말에 앞이 깜깜해짐을 깨달았다. 궁예의 목을 자기 손으로 벤다는 것도 차마 못할 일이어니와, 또 눈을 꽉 감고 그러나 하더라도 자기의 힘이 족히 궁예를 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궁예의 목을 베다가 못 베면 자기의 목이 달아날 것이 아닌가. 높은 벼슬과 아름다운 계집도 목숨이 산 뒤에 쓸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회는 이 자리에서 못한다고 할 계제는 못된다. 물불을 아니 가린다고 장담하던 혀끝이 마르기도 전에 무슨 혀끝을 가지고 못한다고 하랴. 이왕 할 말이면 기운 있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고 원회는 고개를 번쩍 들며,

『명대로 하리이다. 재주 부족하와, 궁예를 못 베면 소관의 목숨을 장군께 바칠 것이오니, 또한 소관이 평소에 원하는 바이옵니다.』

하였다.

양길은 일어나 벽에 걸린 오동집 한 비수(匕首)를 내어 원회에게 주며,

『이것은 날에 독을 바른 비수니 칼끝만 조금 살에 들이 가저라도 그 사람은 생명(生命)이 없을 것이요, 지금까지의 우정(友情)으로 올가미를 삼아 궁예를 끌고 우직한 궁예놈이 그 우정의 올가미에 걸리거든 이 독한 칼날로 궁예의 목숨 뿌리를 뚝 끊으오……내일 평명에 아무도 모르게 떠나되 만일 중로에서 묻는 이가 있거든 양길을 배반하고 달아나노라 하고 어디로 가느냐고 묻거든 옛 친구 궁예를 찾아 간다 하오. 그러고 그 말이 먼저 굴러 궁예의 귀에 들어 가도록 하루 이틀 중로에 지체하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 궁예를 죽이거든 궁예의 죄상을 들어 군중에 포고하고 대사는 그날부터 동남도(東南道) 대장군이라고 일컬으오!』

하였다.

원회는 비수를 받아 품에 품고 양길이 손수 따라 주는 굴을 한잔 받아 마신 뒤에,

『장군의 명대로 소관은 가거니와 소관이 평생에 소원이 있사오니, 소관의 충성의 값으로 들어 주시리이까?』

하였다.

『무슨 소원인지 모르거니와 이번 일에 성공을 할진댄, 내 힘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나 대사의 뜻대로 믿으오. 대관절 소원이란 무엇이요?』

하고 양길은 원회는 말하기 어려웠으나 이러한 때에 말을 아니하면 언제나 하랴 하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난여아가씨를 소관의 아내로 허하여 주시겠읍니까?』

하였다.

『내 딸이 동남도 대장군의 부인이라면 부끄러울 것이 없지요. 철없는 것이 궁예를 생각하는 모양이나 궁예가 죽은 것을 보면 제 뜻인들 죽지 아니하겠소? 글랑 염려마오.』

하고 양길은 웃어 버린다. 원회는 양길에게 하직하고 물러 나왔다. 밝은 날에는 무서운 갈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다시 살아 돌아 올지도 모르는 길이니 떠나기 전에 난영을 한번만 만나고 싶었다.

원회는 난영이 새벽마다 시비 운영을 데리고 장군 마을 뒤 미륵당에 가는 줄을 안다. 원회는 그전에도 가끔 길가 늙은 소나무 뒤에 숨어서 난영이가 자기를 본 체 만 체하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사푼사푼 자기의 앞을 걸어 지나갔다 그러나 난영이가 . 기도를 다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혹시 원회를 알아 보는 체하고 전장 소식을 묻는 일이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새벽마다 비옵니까?』

하고 혹시 원회가 물으면 난영은 말없이 한번 생끗 웃거나 어떤 때에는,

『아버님 운수 창성하소사 비오.』

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의인은 창성하고 악인은 멸망하소서 비오.』

난영의 이러한 간단한 대답이 가끔 원회의 가슴을 찌르도록 힘이 있었다.

원회는 양길의 명을 받아 가지고 자기 방으로 돌아 와서 이 생각 저 근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하는 동안에 고루에 북이 울고 미륵당에 시북이 울고 또 닭이 울었다.

원회는 남들이 아직 곤한 잠을 잘 때부터 일어나 길 떠날 차비를 하였다.

투구·갑옷에 환도 하나, 활 하나 등에 전통을 지고 양길에게서 받은 독을 바른 비수를 깊이 품에 품고 손수 말에 안장을 지었다.

주인을 알아 보고 코로 푸룩푸룩 소리를 내는 말에 안장을 직고 북두를 바싹 조를 때에, 누군지 원회의 어깨를 치는 이가 있었다 ——— 그것은 신훤이었다.

『자네 어딜 가려나 왜 날이 새기도 전에 갑옷을 입고 말 안정을 짓나?』

하고 신훤은 정답게 물었다.

원회는 깜짝 놀랐다. 속으로 「이 원수놈이」하는 생각이 나도록 신훤이 미웠다. 그러나 원회는 한손으로 말갈기를 쓸어 주며,

『심심하길래 새벽 사냥을 가는 길일쎄.』

하고 아무 일 없는 듯이 대답하였다.

『새벽 사냥? 사냥을 갈 양이면 이렇게 죄 짓고 도망하는 사람 모양으로 소리도 없이 갈 것이 있단 말인가? 지금 양길이가 궁예로 하여 우리들을 잔뜩 의심하는 모양이니 이런 짓을 하다가는 더욱 의심 살 것일쎄…… 대관절 어젯밤 자네가 양길한테 불려 갔던 모양인데 무슨 말을 하던가?』

하고 신훤은 원회의 말 안정에 북두 접힌 것을 바로 잡아 준다.

원회는 맘에 초조하는 것을 억제하면서, 응. 엊저녁 불려 갔었네마는 무슨 별말 있겠나 ———그저 그 말이지.』

하고 원회는 양길에게 받은 비수가 옳게 제자리에 있는가 하고 살짝 가슴을 만져 보았다. 가슴에는 딴딴하고 기름한 것이 만지어 보인다.

『그 말이라니? 궁예가 반심을 품는단 말이지? 그래 무에라고 했나?

양길이 따위가 궁예의 충성을 알 리가 있는가. 꼭 바꾸어 되어서 양길이가 궁예의 밑에서 모사노릇이나 하었으면 알맞을 것을 궁예는 양길에게는 너무터, 안 그런가 ……그래 자네는 무에라고 했나?』

『대답할 말이 한 마디 밖에 있나 ————치악산이 평지가 되고 한물이 오대산으로 거슬러 흐르더라도 궁예의 의리는 안 변하다고 그랬지.』

하는 원회의 맘은 꽤 거북하였다.

신훤은 원회의 어깨를 또 한번 치며,

『잘했네! 대단 잘했네! 하지마는 좀된 것이 그 말을 알아 듣겠나.

처음에는 인물이 어지간한 줄만 알았더니 아주 요것이란 말이야.』

하고 신훤은 새끼 손가락을 들어 원회의 코앞에 갖다 대고 흔들며,

『겉으로는 덕 있는 체 겸손한 체하지마는 좀되고 간사걸. 그래서 아무려나 자네도 조심하소. 까딱하면 큰일 나리. 그리고 풍세 보아서 궁예한테로 가세. 여기 있어야, 신통한 일은 생전 없을 모양이야…… 이왕 떠났으니 사냥이나 잘하고 오소.』

하고 신훤은 원회를 작별하고 들어 가 버린다.

신훤의 모양이 어두 에 사라지고 먼 발자취 소리만 들리게 된 때에 원회는 등에 찬 땀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나기는 비록 딴 날에 났어도 죽기는 한 날에 죽자고 일생을 맹세한 벗을 속인 것이 맷돌과 같이 원회의 맘을 눌렀다.

『신훤은 맘은 변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불의의 짓을 하였다 하더라도 신훤은 나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하고 순직한 신훤의 우정과 의리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맘을 꽉 누른 맷돌은 더욱더욱 무거워지는 듯하였다.

원회가 고개를 숙이고 서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때에 원회의 말이원회의 갑옷 자락을 입으로 물어 끌었다. 원회는 성을 내어 손바닥으로 말의 뺨을 갈겼다. 말은 갑옷 자락을 놓고 아무 소리 없이 고개를 덜려 버렸다. 이런 것이 다 원회를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 원회는 안 나오려는 말을 끌어내어 섬쩍 올라 장군 마을 긴 담을 돌아 북문 안 미륵당 곁 늙은 소나무 아래 미처 말에서 내리지도 아니한 채로 이리 저리 거닐면서 난영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솔밭 속에 청결하게 지은 미륵당에는 촛불이 켜 있고 당을 지키는 늙은 마누라가 요령을 흔들며 아침 예불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 마누라는 승도 아니요 무당도 아니언마는, 몸에 미륵불이 실렸다 하여 고깔 장삼을 입고 요령을 흔들고 이 미륵당을 지키는 보살이다. 이윽고 가볍게 디디는 발자취가 고요한 새벽 공기를 울려 오고 그 소리에 놀램인지 솔가지에서 자던 새 한마리가 포드득 날아 수풀 속으로 들어 가 버린다.

원회는 말 혁을 바로 잡아 길에서 잘 보이지 아니하도록 큰 소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울려 오는 발자취 소리를 엿들었다. 짜작짜작 느리고도 힘있게 걷는 걸음은 분명 난영의 걸음이다.

짜작짜작하고 가물가물하는 새벽 어스름 속에 하얀 두 모양이 점점 분명히 나타난다. 난영은 새로 빨아 다린 하얀 장삼에 세모가 똑 찍은 듯한 고깔로 머리와 낯을 가리고 왼편 어깨서 오른편 옆구리로 붉은 띠를 늘이 고장심보다고 고깔로 머리와 낯을 가리고 왼편 어깨서 오른편 옆구리로 붉은 띠를 느리고 자삼보다도 고깔보다도 더 하얀 두 손을 합창하여 젖가슴 가로 쳐들었다. 그러고는 짜작짜작하고 미륵당을 향하여 가벼고도 힘있게 걸음을 옮겨 놓는다.

원회도 몸이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난영이 층층대를 올라 석등롱 앞을 지나 미륵당 계전에 다다랐을 때에 미륵당 마누라가 활활히 뛰어 내려 와 안영에게 합창하고 여러 번 허리를 굽힌다. 난영은 합창한 손을 잠깐 들었다 놓아서 답례하는 뜻을 표하고는 곧 층계를 올라 당으로 들어 가 버린다.

난영이 들어 간 뒤에 다시 쇳소리가 나고 요령 소리가 나고 염불 서리가 나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난영의 붉은 띠가 눈에 뜨인다.

동편에는 점점 훤한 기운이 뻗고 그럴수록 풀 속은 더욱 침침하여진다.

그때에 다시 짜작짜작하고 흰 장삼 흰고깔에 북은 띠 맨 난영은 시비 운영을 데리고 나온다. 이번에는 합창하였던 두 손을 늘었다.

원회는 얼른 말에서 내려 말 고삐를 내어 던지고 기침을 한번 하면서 난영의 곁으로 와서,

『난영아기! 대사 원외요.』

하고 허리를 굽혔다.

난영은 깜짝 놀라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며,

『대사 운회가 누구요?』

하고 원회를 노려 본다. 하얀 고깔 밑에는 복숭아꽃 같은 얼굴이 잠깐 보이고 별 같은 두 눈이 찬 빛을 토하며 반짝 거린다.

원회는 난영의 날카로운 눈매를 감히 마주 보지 못하고 한덜음 더 가까이 가며,

『나를 몰라 보십니까? 대사지(大舍知) 양길 장군의 충성된 신하원회옵니다.』

하고 소리를 높여서 이름을 아뢰었다. 난영은 원회를 돌아 보지고 아니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여,

『춘신 원회일진댄 길을 잘못 들었소. 여기는 장군 마을로 가는 길이 아니요.』

하고 쌀쌀하게 말끝을 맺었다. 워낙 쌀쌀한 난영이기로 이처럼 싸늘한 적도 없었다, 그래도 한번 생끗 웃어는 보였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는 그 눈매와 입술에서 얼음가루가 펄펄 날렸다. 원회는 쇠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이 두 귀가 윙윙하고 잠 못 잔 눈앞에 불똥이 으글쏘글 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원회는 빠른 걸음으로 난영을 따라 가 길 앞을 막아 서며,

『난영아기! 원회는 장군의 명으로 먼 길을 떠납니다. 살아 돌아 올는지 죽어 돌아 울는지 알 수도 없는 길을 떠납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은밀히 떠나는 길이오매, 여기서 잠깐 하직을 하여고 아직 자던 닭이 울기도 전부터 여기서 아기씨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하고 허리를 굽혔다.

난영은 길을 가로 막혀 한걸음 디로 물러서며,

『춘신의 목숨은 못 믿을 목숨, 살아 돌아 오는 것보다 죽어 못 돌아오는 것이 공이 높다 하오. 쥐도 새도 모르게 은밀히 떠나는 길을 나 같은 아녀자에게 말하는 갓도 속절없는 일이요. 내 길을 막아 서느니보다 충성된 주인을 바리고 달아나는 말의 앞길이나 막으오.』

하고 난영은 퍽 웃는다. 운영도 웃는다. 원회도 놀라 난영이 바라보는 데를 바라보니 자기가 타고 왔던 말이 무엇이 놀랐는지 아직도 캄캄한 숲속으로 내 굽을 모아 뛰어 들어간다.

원회는 황망히 허리를 굽히며,

『그러면 다녀 오리이다. 비록 얼음같이 차고 칼날이 날카로운 말씀을 주시더라도 떠나기 전 한번 뵈운 것만 기쁘게 알고 다녀 오리다. 충성된 원회를 잊어 주시지 마옵소서.』

하고 돌아 설 때에 난영은 아까보다 맑고 유쾌한 목소리로,

『무슨 일로 가시는지 모르거니와, 부디 부디 잘 다녀오시오. 충신이 되어지라고 부처님께 비오리다.』

원회는 의외에 난영에게서 기쁜 말을 듣고 말 따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그때에는 벌써 난영은 자기도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짜작짜작 걸어 갔다. 그 흰 장삼에 붉은 띠만이 분명히 원회 에게 보이고 몇 걸음 아니 가서 난여의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원회는 등에 진 전통을 털럭거리며,

『이놈아, 이놈아.』

하고 말을 따라 갔다. 등뒤에서는 또 은방을 소리같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난영은 원회가 전통을 들먹거리며 뛰어 가는 양을 돌아 보고,

『운영아, 저것 봐라! 전통의 살들이 점옹의 산같이 흔들리득하는구나, 무슨 패가 나오려노.』

하고 웃고 나서,

『얘, 그 말이 어찌해 그렇게 뛰느냐?』

하고 운영을 본다.

운영은 손으로 입을 막고 웃으면서,

『내가 아주 끝이 뾰족한 돌멩이로 그놈의 말의 이마빼기 센점을 때렸지요. 그랬더니 말도 주인같이 의리를 잊고 저렇게 달아납니다그려, 호호.』

난영은 장삼 손매를 펄렁거려 손뼉을 치고 웃으며,

『그건 왜?』

하고 묻는다.

『아가씨 길을 막아 서서 귀찮게 굴 길래 한번 속일 양으로 그랬지요. 그 작자가 아가씨에게만 정신이 가서 내가 돌팔매를 치는 것도 모르겠지요.』

하고 두 사람은 또 웃었다.

난영이 운영으로 더불어 실컷 웃고 집으로 돌아 오니, 아버지를 모시는 시비 작은솔이 난영의 방 앞에 섰다가 귀엣말로,

『아가씨 큰일 났읍니다.』

한다.

난영은 아까 웃던 것이 아직 가시지 아니하여 여전히 웃으며,

『너도 큰일난 줄을 하느냐? 정말 큰일이 났단다. 전통이 덜거덕 덜거덕거려서…… 그놈의 말이……호호…… 이애 운영아, 그놈의 말이 십리는 갔을레라…… 내처음보아.』

『십리만 가요? 이십리는 갔을 껄 종일 따라 다니면 전통은 다 부서지고 말껄.』

하고 운영도 새로 웃는다.

작은솔은 영문도 모르고,

『아가씨 전통이요 말도 말이어니와, 그보다 더 큰일이 났읍니다.』

하는 동안에 셋사람은 난영의 방으로 들어 왔다.

난영은 고깔과 장심을 벗어 운영을 주며,

『그래 무슨 큰일이 났단 말이냐?』

하고 팔목에 걸었던 수정 여주를 벗겨 서안 위에 놓고 앉는다.

작은솔은 난영의 앞에 꿇어 앉으며,

『아가씨 장군마마께서 궁예 장군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사람을 보내었읍니다.』

하고 작은솔은 하려는 말이 미처 나오지 아니하여 눈만 뒤룩뒤룩한다.

난영은 놀라며,

『궁예 장군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왜 궁예 장군의 머리가 언제 몸에서 떨어졌더냐?』

하고 몸을 바로 앉힌다.

『장군마마께서 독 바른 비수를 주시며, 그것으로 궁예 장군의 머리를 베어 오라고 그러시겠지요. 내가 수상하길래 가만히 장지 밖에서 모두 엿들었죠. 삼경은 친 담에 저, 저, 원회 대사를 불러 들이시더니, 주안을 가져오라 하시고 날더러는 나가라고 하시더니 장군마마께서 원회 대사를 사뭇 치켜 세시더니 그런 말씀을 하시겠지요. 그래서……』

하고 작은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영은 두 눈썹을 짱긋 거슬려 올리며,

『그래 원회가 비수를 받던?』

하고 작은솔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럼요. 받고는 장군의 명이시면 물에 들라면 물에 들고 불에 들라면 불에 들겠노라고. 재주가 어찌 많은 지 궁예 장군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겠노라고 그리고……』

하고, 작은솔은 갑자기 우스운 듯이 손으로 입을 막고 웃으며,

『그리고 말이 우습겠지요. 궁예장군의 머리를 베어 올것이니 아가씨를 주사겠느냐고요———. 글쎄 원회가 그러는 구먼.』

하고는 웃은 것이 죄송한 듯이 살짝 난영을 본다. 운영도 장삼을 개키다 맏고 난영의 등뒤에 꿇어 앉아서 가만히 듣고 있다.

난영은 태연히,

『그래 나를 달란 말이지?』

『그럼요.』

『그래 장군마마는 뭐라시던?』

『무어 동남도 장군이라나, 원회가 공만 이루면 동남도 장군을 봉하신다고…… 동남도 장군위 부인이라면 내 딸에게 부끄럽지 않지, 그러시고 웃으시어요……오, 또 장군마마께서 이러시겠지요———— 그것이 궁예 놈을 생각하는 모야이지마는, 궁예놈이 죽으면 그것의 생각도 죽을 것이라고…… 어쩌시면 그러시어요?』

하고 작은솔은 웃던 얼굴을 얼른 근심하는 얼굴로 변하며,

『그래 사경이니 치도록 엿듣다가 원회 대사가 나가신 뒤에야 들어 와보니 아기씨는 주무시고 그래서 아까아까 일찌감치 왔더니 미륵당에 가시고…….』

하고 지금이야 그 말을 전하는 변명을 한다.

난영은 웃던 빛도 다 없어져 멍하니 앉았다. 운영과 작은솔은 상전의 눈매만 엿보고 앉았다. 창은 환하게 밝았다.

난영은 이윽히 먹먹히 앉았더니,

『내 그저 그런 줄 알았어.』

하고 눈물을 뚝뚝 흘린다,

『에그 어찌하시나.』

하고 운영도 낯을 찌푸린다.

『설마 어떨라고요. 궁예 장군마마가 이기시지 고까진 바람개비가 이길라고요.』

하고 작은솔이도 위로한다.

난영은 눈물을 씻으며,

『힘이나 재주로 싸우면 원회가 열 스물 덤빈들 어떠랴마는, 믿는 체친한 체하고 가까이 하면 그것이 근심이지 이 일을 어찌하나, 그런 줄만 알았던들 아까 내 앞에 고개를 수그리고 뱅충 맞은 소리를 할 때 그놈의 산멱이라고 물어 뜯어 주었을 것을……벌써 그놈은 말을 잡아 타고 아슬라성을 향하고 달리겠구나. 내 몸이 남자로만 태어났으면 당장에 말을 달려 따라 가서 그놈을 대가리서부터 말 아울러 두 쪽에 내어 줄 것을……그놈이 맘 놓고 말을 타고 까딱거릴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구나.』

하고 뽀드득 이를 간다.

『글쎄 말씀이요. 그놈이 그런 줄만 알았더면 그 돌멩이로말 이마를 때리지 말고 고 빤질빤질하게 거짓으로 발라 놓은 골을 갈라 주었을 것을……글쎄 요것아 왜 지금이랴 그 말을 해!』

하고 운명은 작은솔을 노려 본다.

『그럼 주무시니깐 어떡하오?』

하고 작은솔도 애타는 듯이 뺨을 만지며,

『그러나 염려 없소. 지금이라도 따라 가서 없애 버리면 그만이지.』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내흔든다.

그놈은 벌써 몇 리를 『 갔겠으니 인제 따라 간들 어떻게 따라 잡느냐.

길에서 고것을 없애 버리지는 못하여도 원회가 아슬라성에 도달하기 전에 내가 한걸음 먼저 갈수 있었으면 좋은련마는……나같이 약한 것이 어떻게 대장부를 따라 말을 달리랴 닷셋길은 된다던데——』

하고, 난영은 참다 못하여 두 손으로 두 뺨을 움키고 방바닥에 쓰러진다.

운영은 난영의 허리를 껴안고 안아 일으키려고도 아니하고,

『아기씨, 아기씨』

하고 느낄뿐이다. 나는 새에게나 편지를 달아 보내기 전에는 원회보다 앞서서 아슬라성에 들어 갈 길은 만무하다.

작은솔은 가만히 생각하는 모양이더니 무릎을 탁 치며.

『아기씨 아기씨 염려 없읍니다.』

하고 난영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쳐든다.

『응, 무슨 수 있니?』

하고 운영이 고개를 들고 난영도 행여 무슨 꾀가 있을까 하여 절망한 듯한 얼굴을 들어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작은솔을 본다. 작은솔은 또 무릎을 치며,

『수가 있읍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어젯밤에 듣노라니깐, 장군마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셔요————길에서 누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거던 나를 배반을 하고 궁예를 따라 간다 그러라고. 그리고 그 말이 먼저 굴러 궁예의 귀에 들아 가게 하는 것이 좋으니, 중로에서 하루 이틀 지제해도 좋다고 그러시는 것을 들었어요. 그러니까 원회도 죽을지살지 모르는 길에 젠들 빨리 가겠어요. 쉬엄 쉬엄 소문만 내고 갈껄. 내가 분명히 둘었어요.』

하는 말에 난영은 살아 난 듯이,

『분명 그러시더냐?』

하고 작은솔의 팔을 잡는다.

『그럼요. 분명 그러시고말고.』

『그래 원회는 무어라던? 그런다고 그러던?』

작은솔은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해 보더니,

『원회는 무에라고 하던가 ———암말도 아니한 것 같애요. 아마 예 에, 그러기만 했나봐.』

하고,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더욱 생각을 한다.

작은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영은 손바닥을 딱 치고 합장하고,

『나무미륵존불!』

하고 벌떡 일어나며, 작은솔아 고맙다 『 , . 네 신세는 꼭 갚으마. 옳지 내가 가면 이런 것은 다 무엇하니.』

하고, 장문을 활활 열어 젖히고 알뜰한 의복 몇 가지와 패물 몇 가지를 싸서 작은솔의 앞에 던지며,

『옛다 너를 안 주고 누구를 주랴. 날 본 듯이 가지어라.』

하고는 다시 자기의 머리에 꽂았던 푸른 옥비녀를 매어 운영에게 꽂아 주며,

『옛다, 이걸랑 네가 꽂아라. 그리고 내방에 있는 것 다 네가 가지어라.

섭섭하다마는 다시 마날 때도 있겠지.』

하는 것을 운영이 고개를 흔들며,

『나는 아기씨 따라 가오. 이 비녀 다 작은솔이나 주시오.』

하고, 머리에 꽂힌 비녀를 빼어 작은솔의 머리에 꽂아 준다.

『그러면? 너도 나를 따라 가련?』

하고 난영은 감격한 듯이 운영의 목을 껴안고 울었다.

『나도 원회 같은 줄 아시오?』

한다.

『오, 인제부터는 너와 나와 단들이 먼 길을 떠난다. 죽든지 살든지 너와 나와 단들이 가야만 된다.』

하고 난영은 어린 동생을 귀애하는 모양으로 운영의 등을 만지고 수없이 목을 껴안아 준다, 운영도 두 손으로 상전의 손을 잡는다. 그날 저녁에 난영과 운영 두 처녀는 여전히 고깔 장삼에 붉은 띠를 띠고 미륵당으로 올라 갔다. 미륵당에서는 여전히 쇳소리가 나고 염불 소리가 들리고 두북은 띠가 수없이 절하는 양이 보였다. 그러는 동안 북원의 기나긴 이른 봄날도 저물어 희멀끔한 달이 동편 하늘에서 조금씩 푸른 빛을 던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난영과 운영이 미륵당에서 나오는 것을 본 이는 없었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어떤 구 소년이 말을 달려 동문으로 나갔다는 소문이 들렷다. 그 두 소년이 난영과 운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은 말을 다려 가는 곳마다 원회의 자취를 물었다. 그의 모습을 말하고 그의 탄 말의 모습을 말하면 주막에서는,

『예, 그런 양반이 그저께 여기서 자고 지났지요.』

하고 어디로 가더냐고 물으면,

『아슬라성으로 애꾸 신장군을 찾아 가노라고 그럽디다.』

하였다.

그러나 주막마다 들어서 물어 볼 수 없으므로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빨리 몰아 원회보다 먼저 아슬라성에 들어 갈 생각만 하였다. 그래서 새벽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주막에 들었다. 그러나 혹은 봄철 물이 넘치는 개천을 만나 길이 더디고, 혹은 비를 만나 촌가에 들어 가비를 긋노라고 지체하였다.

주막에서는 가끔 같이 든 사람들이 두 사람의 행색을 수상히 여겨 수군거리기도 하고 뻔뻔한 사내들은 말도 붙이어 보았으나 두 사람이 심히 당돌히 대답하기 때문에 별로 어려운 일은 없었다.

사흘 길을 가도록 원회는 만나지 못하고 행인 에게 물으면 혹은 어저께 그런 사람을 보았다 하고, 혹은 아침만절에 너는 고개에서 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생각컨댄, 원회도 어서 공을 이루고 북원으로 돌아 와 난영을 손에 넣을 양으로 하루도 지체하지 아니하고 아슬라로 가는 모양이다, 그러할진댄 이는 큰일이다. 만일 원회가 중로에서 지체를 아니하면 두 사람은 도저히 아슬라성에 앞서서 들어 갈 도리가 없고 그렇다 하고 궁예의 목숨은 위태한 것이다. 그런데 난영‧운연도 몸이 피로하고 말도 잘 탈 줄 모르는 주인들을 실어 동이 닿고 다리를 절었다. 두 사람의 맘은 부쩍부쩍 조였다.

해는 저물었다. 난영과 운영 두 사람은 피곤한 몸을 말에 싣고 원회와 자취를 따라 십리 가다가 어떤 고개 턱 술막거리에 다다랐다. 흐르는 듯 마는 듯한 검은 냇물 위에는 새로 놓인 흙다리가 있고 냇가에는 아직 드문드문 아주 봄빛도 없는 버두나무가 서 있고 수십 집이나 되는 술막거리는 초어스름의 가물가물한 안개 속에 잠겼다. 버드나무 밑 안개 속에서는 말들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이 말을 몰아 다리를 건너려 할 때에 다릿목에 지키고 있던 군사가 붉은 상모 단 창을 들어 길을 가로 막고,

『거 누구? 어디로 가는 사람이야?』

하고 묻는다.

운영이 얼른 말에서 내려 군사를 향하여 한번 읍하니 군사는 운영은 기가 막혀, 난영과 운영은 기가 막혀,

『무슨 일로 죄없는 행인을 뒷짐을 지어 끌어 가오?』

하고 물으니, 군사들은 다만 혁편(革鞭)으로 후려 갈기며,

『웬 잔소리냐? 네 죄를 네가 몰라?』

할 뿐이다.

난영과 운영 두 사람은 어떤 군막(軍幕)으로 끌려 들어 갔다. 군막 안에는 사오인 높은 군사가 걸터앉았다. 두 사람이 끌려 들어 오는 것을 보고 모두 일어난다. 그중의 높은 자리에 앉았던 사상(舍上)인 듯한 군사 앞으로 두 사람을 끌어다가 무릎을 꿇리고 난영을 붙들어 온 군사가,

『아까 원회 대사가 말한 자객이 아마 이놈들인가보오. 북원서 온다 하옵고 세달사에서 대장군마마를 모신 일이 있다는 것이 모두 수상하기로 다릿목에서 붙들어 왔소.』

하고 아뢴다.

『우리는 북원서 오는 사람이오. 일찍 태백산 세달사에서 공부할제 궁예 장군을 모신 일이 있기로 불원 천리하고 찾아 오는 길이요.』

하였다.

군사는 말하고 섰는 운영과 말 타고 앉았는 난영을 번갈아 보더니,

『북원서 온다? 북원서 오면 원회라는 사람을 아오?』

하고 묻는다.

『아오. 원회가 우리보다 하루 앞서 북원을 떠났기로 우리도 그를 따라 잡으려 하였으나 못 미쳤거니와, 원회 대사가 언제 이곳을 지났소?』

하고 운영은 가장 태연하게 물었다. 말 위에서 듣고 있는 난영의 맘은 더 조였다.

『원회 대사는 바로 저녁때 전에 이곳을 지냈으니 빨리 갔으면 인제 삼십리 아슬라성에 거의 다 들어 갔겠소.』

하고 그 군사가 댓 걸음 뒤에 섰는 어떤 늙은 군사의 곁으로 가서 무슨 말을 소근거리더니 그 곁에 있던 여러 군사가 함께 내달아 난영의 말고삐를 빼앗아 쥐고,

『내려라, 좀 물어 볼 말이 있다.』

하고 난영을 끌어 내린다.

그런 후에 한 군사는 난영과 운영이 타고 오던 말을 끌고 두 군사는 난영과 운영을 뒷짐을 지워서 버드나무 그늘 말소리 많이 나는 곳으로 끌고 들어 갔다.

수염 난 사상은 두 사람을 이윽히 보더니,

『너희들은 여기서 오늘 밤을 내일 대군마을에 보하여 희보를 기다려서 떠나게 하겠다.』

하고 부드럽게 이른 뒤에 곁에 선 군사를 불러,

『이 두 사수를 결박을랑 끄르고 내려 가두되 밤새도록 잘 파수하여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원로에 시장할 터이니 분부한다.』

난영은 사상 앞에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우리 길이 심히 급한 길이오니 『 우리를 곧 아슬라성으로 보내어 주시되, 만일 우리를 믿지 못하거든 군사 안동하여서라도 곧 아슬라성으로 가게 하여 주오.』

하였다.

그러나 난영의 말은 듣지 아니하고 수염 난 사상은 다른 방으로 들어 가 버렸다. 여러 군사를 보고 무수히 애걸하여 쓸 데 없이 두 사람은 창든 군사를 보고 무수히 애걸하여 쓸 데 없이 두 사람은 창든 군사에게 끌려 옥으로 왔다. 옥이라야 민가의 곳간을 임시로 쓰는 것이라 문안에 들어가니 얼었다 녹은 흙 냄새만 코를 받치고 달빛 하나 바람 한점 들어 오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 가 보니, 여기 저기 거칫거칫하는 것이 아마 먼저 붙들려 온 죄인들인 모양이다.

갖다 주는 밥도 목에 넘어가지 아니하나 억지로 억지로 몇 숟가락을 먹고 상을 물리니 군사가 섬걱적 하나와 때묻은 이불 하나를 갖다가 집어 던지며,

『이것은 너희들만 덮어! 다른 놈은 건드리지 말아!』

하고, 소리를 지르고 판장문을 닫쳐 버린다. 그리고는 문밖으로 뚜벅뚜벅하고 파숫군이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어두워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아니하고 숨소리로 보든지, 이따금 기침하는 소리로 보든지 육질인은 되는 모양이다. 모두 섬거적을 깔고 앉았기 때문에 조금만 몸이 움직여도 부석부석 소리가 나고 소리가 나면 문밖에서 판장문을 쾅쾅 두드리며,

『가만히 있어! 꿈지럭거리지 말어!』

하고 파수 보는 군사가 소리를 지르고 그래도 부시럭거리면 판장문 틈으로 창을 들여 보내어 홀근홀근하면서,

『더 꿈지럭거릴 테야? 모조리 창으로 쥐 잡듯할 테다.』

하고 소리를 지른다.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난영과 운영 두 사람은 말도 못하고 서로 손만 마주 쥐고 틀었다. 밤은 깊어 간다.

원회가 만일 아슬라성에 들어 갔다 하면, 벌써 궁예를 만났을 것이다.

궁예를 만났으면 혹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혹은 술을 같이 먹다가 원회의 독한 칼날에 궁예의 목숨은 벌써 끊어졌을지도 모를 것이다. 비록 아직은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궁예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을 것이다.

난영은 차라리 사상에게 모든 일을 실토하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하였다.

만일 사상이 궁예에게 충성이 있다하면 반드시 자기를 놓아 보낼 것이다 난영은 이 뜻을 운영에게 통하였다. 운영도 그 뜻에 찬성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일제히 판장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파수하던 군사들이 깜짝 놀라,

『이놈 누구냐 우네일이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까 붙들려 온 두 사람들이요, 사상께 급히 할 말이 있으니 나를 좀 내놓아 주시오.』

하고 악을 썼다.

그래도 군사들은 듣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판장문을 발길로 차고 여자의 목소리로 목을 놓아 울었다. 옥중에 있던 사람들도 놀라고 파수하는 군사들도 놀래어 사상에게 그 연유를 아뢰었다. 사상도 이상히 여겨 두 사람을 불러 오라 하였다.

난영과 운영은 다시 사상의 앞에 끌려 갔다.

난영은 사상이 묻기도 전에,

『나는 남자가 아여자요. 나는 북원 양길 장군의 딸 난영이요. 아까 이 앞을 지나간 원회는 아버지 양길 장군의 명으로 독을 바른 칼을 품고 궁예 장군을 죽이려고 온 것이요. 나는 궁예의 목숨을 구하려고 규중 처녀의 몸으로 남복을 하고 불원 천리하고 원회를 따라 오던 기리요.

원회가 이미 아슬라성에 들어 갔으면 궁예 장군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으니 사상께서도 궁예 장군께 충성이 있거든 곧 나를 놓아 아슬라성으로 가게 하시오!』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사상도 난영의 말을 듣고는 놀랐다. 원회가 칼을 품고 갔다 하면 그것도 놀라운 일이어니와, 양길의 딸이 궁예를 사리려고 온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난영‧운영의 행색이 수상하기도 하거니와, 이런 놀라운 소리를 듣고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난영과 운영의 단아하고도 충성된 태도를 볼 때에는 그 말을 믿고도 싶었다.

『북원서 자객이 온다는 소문이 있더니, 그러면 원회가 그 자객인가.

제가 자객이니까 뒤를 따르는 사람을 꺼린 것인가.』

하고 사상은 곧 건장한 군사들을 불러 잘 달리는 말 네필에 안정을 지으라 하고, 진실로 그러할진댄 『 , 군사들을 안동해 보내는 터이니 이 길로 떠나오.

원회가 둥구내원에서 저녁을 먹었으면 거기서 약간 지체가 되었을 것이요.

 원회는 큰길로만 갔을 것이니, 작은 길로 가면 십리는 넘어 지를 것이라, 군사에게 병부(兵符)를 주어 보내니 이것을 가지면 아무러한 밤중에라도 장군 마을에 들어 갈 수가 있으니 빨리가오.』

하였다.

난영과 운영은 고맙다는 치사도 할 새 없이 두 군사와 함께 말을 달렸다.

이월 보름 봄안개 끼인 달빛 길로 네말은 축축한 흙을 차면서 질풍같이 아슬라성을 향하고 달렸다. 숙신간에 망우리 고개를 넘어 둥구내원에 다다르니 말 탄 사람 하나가 거기 들어 저녁을 시켜 먹고 해지게 아슬라를 향하여 떠났다고 한다.

난영과 운영은 피곤한 것도 잊어 버리고 군사를 따라 둥구내원에서부터는 오불꼬불한 작은 길로 고개 넘어 벌을 건너 개 짖는 초락 앞을 지나, 나는 듯이 달려 갔다. 이십리, 시오리, 십리 하고 아슬라성은 점점 가까와지고 말들은 몸에서 피땀을 흘렸다. 아슬라성에 가까이 갈수록 길가에 통나무 불을 피워 놓고 창 든 군사와 말 탄 군사가,

『거 누구?』

하고 묻는 데가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앞선 군사가 조그마한 기를 내어 두르며,

『병부(兵符)야!』

하고 호기 있게 소리를 치면 군사들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마주 기를 두를 뿐이엇다. 이것을 보고 난영은 조금 안심하였다 —————원회는 병부가 없으므로 이 파수막을 지날 때마다 조금씩 지체하였을 것이다.

마침내 네 사람은 뒷고개라는 아슬라성 마지막 고개에 올라 섰다. 성굽이 낮은 데로 불이 조롱한, 아슬라성이 들여다 보인다. 네 말은 굳게 닫힌 성문 밖에 섰다. 시커먼 성은 꿈틀꿈틀 끝이 없는 듯하였다. 성문 밖에는 역시 말 탄 군사와 창 든 군사가 지키고 있다가,

『거 누구?』

하고 외친다.

『병부야! 문 열어라!』

하고 앞선 군사가 기를 두르며 호기 있게 외쳤다.

『어딧 병부?』

하고 지키던 군사가 또 한번 외쳤다.

『흙다릿 병부!』

하고 앞선 군사가 대답한다.

삐걱삐걱 요란한 소리가 나며 쇠투겁을 한 무서운 큰 성문이 열린다. 네 말은 다시 굽을 들어 돌 깔아 놓은 길로 투드럭투드럭 소리를 내며 달려들어 갔다. 이윽고 잠든 거리를 지나 아슬라 대장군 마을에 다다랐다.

『병부야 병부야!』

소리를 치며 말 탄 채로 네 사람은 삼문 앞에 이르러 말을 내렸다. 삼문 안에서는 한가로이 거문고 소리와 노랫 소리가 울려 나온다. 아직 아무 일도 없나 하고 난영은 피곤한 몸을 사문 기둥에 기대고 합창하며,

『나무미륵존불.』

하고 감사한 기도를 올렸다.

운영은 몸을 거두치지 못하고 난영이 기댄 기둥에 기대었다. 닷새 동안을 거의 밤낮으로 원로의 풍우에 시달린 두 처녀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피곤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눈 깜짝할 동안이 무서운 동안이다. 난영이 온 줄만 알면 원회는 곧 그 독약 바른 비수를 쓸 것이다.

그것을 생각할 때에 난영은 삼문을 여는 동안이 십년과 같이 길게 애를 태웠다.

이때에 궁예는 오래간만에 옛벗 원회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원회는 북원을 떠날 때에 미륵당 앞에서 난영을 보고 은밀한 먼길을 떠난다는 말을 한 것이 반드시 난영이 눈치를 채었을 것을 생각하고 만일 그렇다 하면, 반드시 하면 누구를 따라 보낼 것을 생각하였고 따라 보낸다 하면 그것은 신훤이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중로에서 지체하지도 못하고 연해 신훤이가 따르지나 아니하는가 하여 뒤를 돌아 보며 주야로 달려 오다가 그래도 미심하여 흙 다리 사상에게 자기 뒤에 오는 수상한 사람이 있거든 붙들어 두라는 부탁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는 아슬라성에 들어 오는 길로 곧 궁예를 찾았다.

궁예는 원회라 말을 듣고 삼문까지 나와 원회의 두 손을 붙들어 들였다.

원회의 말 못되게 피곤한 기색을 보고 궁예는,

『웬일인가?』

하고 원회가 이처럼 급작스럽게 온 뜻을 물었다.

원회는 맘의 간지러움을 참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

『친구를 위하는 의리가 아니고는 이 길은 오지 못할 길일쎄. 내가 목숨을 보전하여 여기까지 온 것만 다행일쎄.』

하고 양길이 궁예를 미워하여 죽일 뜻을 품은 것과, 자기가 떠나던 다음 날에 궁예를 죽일 자객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을 자기가 어찌하여 알았다는 말과 자기도 궁예 때문에 , 양길의 의심을 받아 생명이 위태하였다는 말과, 많은 군사와 자객이 자기의 뒤를 따라 나섰다는 말을 한 뒤에, 원회는 가장 감개 무량한 듯이,

『사람을 어찌 믿나? 친구를 어찌 믿나? 내가 이만큼 알려 주었으니 내일부터는 조심하되 친구를 조심하소.』

하고 유심하게 말끝을 맺는다.

궁예도 양길이 자기를 시기한다는 말과 또 하필 진헌에게서 비장(裨將)이라는 벼슬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고, 또 양길이 힘이 궁예를 당하지 못할 줄 알므로 자객을 보내리라는 소문도 전지 문지 들었던 터이라 옛 친구 원회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회의 말에

「친구를 조심하소」하는 것이 이상하여,

『친구를 조심하라니 무슨 말인가?』

하고 물었다.

원회는 말하기를 원치 안하는 듯이 눈을 감고 개를 기웃거리더니,

『그만하면 알아 듣겠네그려.』

하고 괴로운 빛을 보인다.

『북원에 남아 있는 내 친구래야 자네가 떠나면 신훤 밖에, 설마 신훤이야 나를 해하러 들겠다. 그런데 어째 오려면 신훤도 함께 오지를 아니하였나?』

하고 궁예는 의심 나는 듯이 묻는다.

원회는 속으로 웃으나 겉으로 찡그리며,

『그 사람더러는 내가 떠난단 말도 못하였는걸……어찌하나 사람을 믿지 마소. 그만큼 말하면 알아 듣소.』

하고 입을ㄹ 다문다.

궁예는 얼굴에 근심 빛을 띄우며,

『그러면 신훤이가 나를 죽이러 온단 말이야? 나도 못 믿겠네. 만일 자네가 신훤이가 칼을 들고 나를 해하려 한다면 나는 가슴을 벌리고 주는 칼을 받으려네.』

하고 원회를 바라보았다. 원회는 낯이 간지럽고 눈이 부시어 얼굴 들 곳을 찾지 못하고 손으로 허리춤에 찌른 비수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계집 일에야 친구가 다 무엇이요, 나라는 다 무엇인가. 친구인 대장부의 맘도 못 믿으려든 하물며 예쁜 젊고 정많은 계집의 맘을 어찌 믿나?』

하고 은연히 신훤과 난영을 꼭 씹었다. 궁예는 더욱 맘이 괴로왔다.

궁예가 괴로와하는 양을 보고 원회는 다시 허리춤에 꽂은 비숫자루를 만지며,

『그러나 자객이 온다기로 하늘이 아는 자네를 감히 어찌하겠나? 또 북쪽으로 오는 사람은 모조리 붙들어 놓으라고 했으니까 아무 염려 없을 것일쎄.』

하고 자기 앞에 놓은 굴을 들어 마시며,

『자 —— 술이나 먹소. 나는 비록 초조한 이 꼴이 되었네마는, 자네는 명성이 천하에 융륭하니 낸들 아니 기쁘겠나, 자 마시게.』

하고 원회는 손수 궁예의 잔에 술을 따른다. 궁예도 마지 못하여 술을 드니 모시고 앉은 사네 영인(伶人)과 계집 영인(伶人)이 새로운 곡조를 아뢴다.

주객이 바뀌어 원회가 도리어 궁예에게 술을 권하여 궁예가 술 취하기를 재촉하니 궁예도 한잔 두 잔 마시는 술에 적이 맘이 풀려 영인이 곡조를 아뢰는 대로 혹은 칭찬하고 혹은 무릎을 친다.

이때에 통인이 들어 와,

『대장군마마께 아뢰오. 시방 흙다리 사상에게서 병부 들어 왔소.』

하고 아뢴다. 아뢰던 곡조는 뚝 끊었다. 궁예는 손에 들었던 잔을 내려 놓으며,

『들라 하여라.』

하고 분부를 내린다.

원회는 무슨 일이 생겨서 마침 좋은 기회를 놓치지나 아니하는가 하고 맘에 근심되었으나 그런 빛을 낯색에 내지고 아니하고 태연히 취한 모양을 하고 앉았다.

얼마 아니하여 통인이 몸을 여매, 군사 두 사람이 문밖에서 허리를 굽히고 가죽에 싼 병부를 받들어 드린다.

궁예는 통인의 손에서 그 병부를 받아 안상에 놓고,

『무슨 사고 있느냐 아뢰라.』

하고 분부하였다.

두 군사는 다시 허리를 굽히며,

『여기 젊은 선비 두 사람이 왔사온대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사옵고, 대장군마마께 현신으로 아뢴다 하옵니다.』

하고 두 군사가 좌우로 갈라 서서 길을 여니 청포(靑袍)에 오각건(五角巾)을 쓴 난영과 운영이 들어 와 궁예 앞에 합장하고 허리를 굽힌다.

궁예는 고개를 끄떡였다 . 사람의 인사를 받은 후에 두 사람을 바라보며,

『보아하니, 젊은신 두 분 선비신데 무슨 일로 이 깊은 밤에 나를 보시려오?』

하고 공손히 물었다.

난영은 아직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볼 때에 기쁨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곁에 원회가 가장 슬이 대취한 듯이 눈을 감고 앉았는 것을 볼 때에 억제할 수 없는 미움을 깨달을뿐더러 아직도 원회가 마지막 기운으로 궁예를 해하지나 아니할까 하여 염려가 놓이지 아니하였다.

궁예는 원회의 품에 독이 묻은 칼이 품어 있는 줄도 모르고 손에는 옛 친구를 대하는 반가운 정 밖에 가진 것이 없어 맘을 턱 놓고 앉았다.

그러나 옛 벗에게 대한 두터운 정이 배반하는 벗의 독한 칼날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난영은 궁예의 앞으로 한걸음 가까이 나가며 넌짓 팔을 들어 노랫가락으로,

『석남사 깊은 밤에는 헤쳐 찾던 사람 아슬라 머나먼 길어이하여 오다던 고독한 탈 품은 옛 벗을 삼가소서 함이라.』

하고 머리에 쓴 오각건을 벗어 버렸다. 그것은 난영이었다.

궁예는 깜짝 놀라 벽에 걸린 칼을 벗기기가 바쁘게 칼집을 빼어 던지었다. 삼척이나 되는 칼날은 촛불에 번쩍하였다.

지금까지 취한 체하고 있던 원회는 금시에 술이 다 깬 듯이 벌떡 일어나며 허리에 꽂았던 한 뼘 넘는 비수를 때어 들었다. 비수에서는 독한 자주빛이 났다.

원회는 궁예를 향하여,

『장군! 그 칼로 난영을 쳐라. 난영이야말로 장군을 죽이러 온 양갈의 자객이다.』

하였다.

궁예는 칼을 빼어 들었으나 누구를 칠지를 몰랐다. 옛 벗인 원회를 베랴, 사랑하는 아름다운 난영을 베랴.

이때에 운영이 두 팔을 버리고 원회의 앞을 막아 서며, 원회의 『 칼은 독이 발린 칼, 장군마마의 목숨을 겨누는 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원회는 한 팔로 운영을 떼밀고 비수를 궁예에게 던지었다. 칼날이 궁예의 가슴을 향하고 날아가는 길에 운영의 몸이 번뜻하더니 원회의 던진 칼이 운영의 가슴에 꽂히었다.

원회는 자기가 던진 칼이 운영을 찌르고 만 것을 보고 허리에 찼던 환도를 빼어 들었다. 그러나 원회는 다리는 벌벌 떨리고 몸은 좌우로 흔들렸다.

궁예는 눈을 부릅떠 원회를 노려 보며,

『이놈 원회야! 또 무슨 면목이 있어 칼을 빼어 나를 겨누느니? 이 사람의 껍데기를 쓴 짐승놈아, 조금이라도 사람의 맘이 잇거든 네 손에 빼어 든 칼로 개만도 못한 네 모가지를 찍어라!』

하였다.

원회는 물 먹는 고기 모양으로 입만 넙쩍넙쩍하고 아무 말이 없더니 전신의 맥이 풀리는 듯이 칼 든 팔을 툭 떨어뜨린다. 칼이 싸르릉하는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원회는 고개를 숙이고 두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궁예야, 네 맘대로 해라.』

하고는 털썩 주저앉는다.

궁예의 코에서는 불길이 확확 뿜고 눈에서는 한 줄기 번개가 번쩍거렸다.

그 가슴은 폭풍을 받는 듯한 모양으로 불룩거리고 숨소리에 창이 떨리는 듯하고 그의 너슬너슬한 머리터럭은 오리오리 불길이 되어 마치 부동명왕(不動明王) 같았다.

궁예는 참을 대로 참을 수 없는 듯이 원회의 곁으로 달려 가서 칼을 높이원회의 머리 위에 들었다. 원회는 들은 칼을 보고 칼을 막으려는 듯이 두 팔을 머리 위에 들며,

『죽여라.』

하고 떨리는 소리로 부른다.

궁예는 원회를 내려다보다가 한번 픽 웃고 들었던 칼을 내리더니 곁에 쓰러진 운영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 원회의 눈앞에 바싹 대며,

『받아라, 한번 더 이 칼로 나를 죽여 보아라.』

하고 칼을 원회의 앞에 던지고 태연히 돌아 서서 제자리로 와 앉는다.

원회는 자기의 무릎 앞에 떨어진 피 묻은 칼을 본다. 그 자루는 자기가 궁예를 대하여 술을 마시며 만작만작하던 자루다. 그런데 그 칼이 인제는 날카로운 끝을 자기에게 향하고 방바닥에 떨어져서 아직도 피에 배부르지 못한 듯이 번쩍번쩍하고 있다.

원회가 칼을 들여다보고 앉았는 양을 보고 얼른 원회의 앞으로 달려 가 그 칼을 집어 들며,

『살아서 돌아 가느니보다 죽어서 못 돌아 가는 것이 더욱 충신이라고 내가 미륵당 앞에서 말하였소. 당신도 소원대로 충신이 되는 것이 좋고 나도 남편과 운영의 원수를 갚는 것이 좋으니 운영의 피는 원회 대사의 피로 씻어야만 하겠소.』

하고 비수를 넌짓 들어 끝을 원회의 가슴을 향하고 내려 박았다. 원회는 흠칫 몸을 피하려 하였으나 칼은 보기 좋게 원회의 젖가슴에 박혔다.

원회는 물에 빠진 사람 모양으로 두 손으로 허공을 잡아 당기다가 난영을 노려 보며 모로 쓰러졌다.

제10장

맨 위로

제1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