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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假裝舞蹈會[가장무도회][편집]

세계범죄사(世界犯罪史)는 일천구백 삼십 ×년 삼월 십 오일을 꿈에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실로 야수(野獸)와 같이 잔인하고도 한편 신기루(蜃氣樓)처럼 신비롭고 마도(魔都)의 일루미네 ─ 숀 처럼 호화로운 이 죄악의 실마리는 그 날밤 ─ 저 세계적 무용가 공작부인(孔雀夫人)의 생일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공작부인이 세계적으로 진출하여 구미 각국에서 자기의 예술과 더불어 조선이라는 이름을 선양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은 바로 작년 늦은 가을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주은몽(朱恩夢)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그를 공작부인이라고 불렀고 그 역시 그렇게 불리우는 것을 그리 불명예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공작부인은 벌써 삼십 고개를 넘었다고도 하고 아직 이십 이삼세 밖에 안되었다고도 하여 가히 추측할 길이 없었으나 그의 파트너인 백영호(白英豪)씨와 약혼한채로 아직 결혼식을 거행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그가 아직 미혼의 처녀라는 것 만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리고 공작부인이라는 명칭은 그의 출세작 『공작 부인(孔雀夫人)』으로부터 불리워지는 일종의 애칭이었다.

그 처럼 주은몽을 세계적 인물로 만들어 준 그의 출세작 『공작부인』이 상연된 것은 지금으로 부터 사년 전 동경『히비야 음악당』의 호화로운 스테 ─ 지에서 였다.

퍼붓는 듯한 찬양의 소리 ─ 앵콜에 앵콜을 거듭한 주은몽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싶었다. 도하의 각 신문기사는 반도의 무희 주은몽을 세계적으로 선전하기를 아까워 하지 않았다. 주은몽이란 이름은 어느덧 공작 부인이란 애칭으로 변했던 것이다.

그때 마침 미술연구자 「파리」에 가 있던 백만장자 백영호씨가 요꼬하마 부두에 내리자 마자 조선이 낳은 세계적 무희 주은몽의 인기에 놀라는 한편 그를 은연히 사모하는 정을 남달리 두텁게 품고 수차 주은몽과 만나는 사이에 두사람 사이에는 어느덧 화려한 미래를 굳게굳게 맹세하는 속삭임이 오고 가고 하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로 주은몽은 약혼자 백영호씨의 후원을 얻어 구미로 무용행각을 떠났던 것이라고 ─ 이것이 소위 믿을만한 소식통이 전하는 「뉴우스」로 되어 있다.

그것은 하옇든 필자는 이만한 예비 지식을 독자제군에게 던져주고 이제부터 세계범죄 사상에 잊을 수 없는 일천구백 삼십×년 삼월 십 오일 명수대 주은몽의 저택에서 열린 가장무도회(假裝舞蹈會)로 인도하고자 한다.

주은몽 ─ 아니, 공작부인은 자기의 축복받은 탄생을 가장 흥미있고 가장 호화롭게 기념하기 위하여 삼월 보름날 한강 건너편 명수대 자기 저택에서 조선서는 보기드문 가장 무도회를 열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날 밤 ─ 남국으로부터 화신(花信)을 싣고 찾아오는 바람 조차 훈훈한 밤, 손님들을 태운 자동차가 달빛에 무르녹은 한강을 황홀히 내려다보며 명수대를 향하여 마치 그림처럼 미끄러져 간다.

오늘밤 공작부인의 초대를 받은 손님들은 가장무도회에 적지 않은 흥분과 호기심을 느낄뿐만 아니라 절세의 미인이요 세계적 무희인 공작부인과 손목을 마주잡고 춤출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고 그 황홀찬란한 일순간을 전 생애의 금자탑 처럼 고히 고히 가슴속 깊이 모시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작부인의 초대장을 받은 그 날부터 동경이나 혹은 해외에서 배워 가지고 온 서투른 「스텝」을「레코 ─ 드」에 맞추어 가면서 연습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대를 받은 손님들 가운데는 유명한 실업가라든가 명성높은 변호사도 섞여 있었으나 대체로 보아서 문학가, 미술가, 음악가, 연극인, 같은 예술가가 대부분이었다.

도하의 각 신문은 공작부인의 가장무도회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 중에는 공작부인의 이 너무나 광적(狂的)인 이국적(異國的)취미를 비웃는 기사도 없지 않았으나 하옇든 조선서는 처음 보는 거사인만큼「저 ─ 널리스트 」들에게 있어서는 한개의 좋은 미끼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하옇든 공작부인으로 부터 영예스러운 초대를 받은 손님들은 지금 공작부인의 화려한 자태를 눈앞에 그려보면서 명수대를 향하여 달렸다.

더구나 그것이 힘만 있으면 누구든지 딸 수 있는 야생화(野生花)가 아니고 장래의 남편 백영호라는 을파주안에 찬연히 피어있는 「다리야」인지라 사람들은 더 한층 흥분과 호기심을 안 느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제일미술전람회(第一美術展會)조각부(彫刻部)심사원인 백영호 씨는 제아무리 백만장자지만 벌써 오십 고개를 넘어선 중늙은이다.

하기는 비록 오십이 넘었다 할지라도 그의 단정한 용모와 교양있는 예술가적 「타입」은 그로 하여금 적어도 십년은 젊게 하였다. 더구나 미술연구차 다녀간 세련된 파리생활을 겪어온 영향도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러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공작부인과 백영호씨의 약혼을 남달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한사람 있으니 그것은 지금 한강인도교를 호기있게 달리고 있는 한대의 「세단」속의 인물이었다.

그 「세단」속의 인물─「씰크햇트」에 「택시 ─ 도오」를 입고 흰 장갑을 낀 손에 흑칠의 단장을 들고 귀밑에서부터 턱 아래까지 시커먼 수염을 곱게 기르고 게다가 검은 「모노클(외알안경)」까지 낀 양은 마치 파리나 런던의 사교계에서 흔히 보는 교양있는 신사다.

아니 독자제군이 만일 탐정소설의 팬이라면 이 세단속의 인물이 저 「모리스 ․ 루불랑」의 탐정소설 주인공 ─ 파리 경시청을 마치 어린애처럼 농락하기를 즐겨하는 무서운 도적 「아르세느 ․ 루팡」으로 가장하였다는 것을 곧 간파할 것이다.

그리고 제군이 만일 가장술(假裝術)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면 그의 수염이 결코 임시로 붙인 가짜 수염같이 보이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의 가장술이 얼마나 훌륭하다는 사실을 가히 짐작할 것이다.

그는 지금 자기의 변장을 자기 이외에는 한사람도 간파할 수 없으리라는 자부심을 한아름 품고 눈앞에 닥쳐오는 공작부인의 저택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공작부인이 진심으로 저 늙은 백영호씨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공작부인이 과연 백영호씨와 결혼을 한다면 그는 자기의 청춘을 제물로 바치려는 정략결혼일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와 돈 많은「파트너」사이에 생기기 쉬운 의무결혼! 공작 부인은 현재 저 쾌활한 청년화가 김수일(金秀一)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자동차는 벌써 공작부인의 정문 앞까지 다달았다. 그는 갑자기 얼굴을 가다듬고 배우가 마치 무대위에서 하는 것처럼 상반신을 약간 숙이면서

『공작부인! 처음 뵙겠읍니다.』

하고 이번에는 음성을 좀 높이어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독자제군이여! 제군이 만일 의성학(擬聲學)에 대한 조예가 있다면 이 수상한 인물의 목소리가 어떻게 홀륭하게 변해 버렸는지 제군은 자못 경탄할 것이다.

운전수도 수상하다는 듯이「백미러」를 통하여 등뒤의 신사를 쳐다본다.

자동차는 마침내 유랑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 현관 앞에서 조약돌을 깨물며 멎었다.

운전수는 뛰어내려 문을 열면서 또 한번 이상한 눈으로 손님을 쳐다보았다.

신사는 포켙 에서 거울을 「 」 꺼내어 자기 얼굴을 한번 유심히 드려다 본 후에 자동차에서 내렸다.

자동차에서 내려 현관을 들어서니 거기 안내인 한사람 서 있다가 이 훌륭한 신사의 늠름한 풍채를 아래 위로 살피면서

『실례의 말씀을 여쭈겠읍니다. 가장을 어떻게나 살 하셨는지 도무지 누구이신지 알아 볼 수가 없어서 ─』

하고 속히 명함을 꺼내라는 눈치를 보였다.

신사는 그 순간 득의만만한 얼굴로 이 충실한 젊은 안내인을 잠깐 흘겨보고 나서

『수상히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소. 나는 오늘밤 처음으로 공작 부인의 현관을 들어서는 사람이니까 ─』

그리고 한장의 명함을 꺼내며 안내인의 손에다 쥐어 주면서 가장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요. 청년화가 김수일군을 대신하여 찾아온 사람이라고 공작부인께 여쭈어 주면 잘 알겠지요.』

명함에는 단지 『화가 이선배(李宣培)』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 그렇습니까. 잠깐 기다려 주십시요.』

안내인은 명함을 들고 분주하게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더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아씨께서 여쭈시라는 분부가 있었읍니다. 자아 이리로 들어 오십시요.』

머리를 곱게 가른 젊은 안내인은 넓고도 긴 복도를 한참 앞서서 걸어 가다가 음악소리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넓은「홀」로 신사를 인도하였다.

『허어 훌륭한 이국풍경『異國風景』이로군!』

입으로는 감탄사를 던지면서도 그는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서슴치않고

「산데리아」가 찬연히 빛나는 넓은「홀」안을 한번 휘 둘러보았다.

가장무도회는 지금이 한창이다. 저편 상단에는 그리 빈약하지 않은 「밴드」가 자리를 잡고 있고 백인백양 가지 각색으로 가장을 한 신사 숙녀들이 열정적인 음악에 맞추어 가며 짝짝이 쌍을 지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춤추는 양은 마치 「파리」의「캬바레」를 서울에 옮겨온 것과 같은 광경이다.

중세기의 「나이트」로 변장한 사람, 「빅토리야」왕조의 궁녀로 가장한 사람, 인도의 귀족을 흉내낸 사람,「집시」풍의 여자 ─ 그들의 가장을 한 사람 한사람씩 따져볼 때 가장술이 극히 유치하고 빈약함을 면치 못했으나 이렇게 멀찌기 서서 바라보면 그리 추한 광경도 아니라고 신사는 생각했다.

그는 아니 화가 이선배는 ─ 「홀」안을 이리저리 살펴 보았으나 이 가장 무도회의 주인공인 공작 부인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한편 모퉁이 종려수(棕梠樹) 그늘 밑에 놓여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아까부터 파초나무 그늘아래 외로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한 사람의 청년을 발견한 때문이다.

청년은 별로 가장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눈에다 시커먼 「마스크」를 썼을 뿐이다. 사람들의 춤추는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있는 그의 입술과 눈동자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이 가장무도회를 비웃는 듯한 표정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공작부인은 아직 홀에 나오지 않았읍니까?』

화가 이선배는 청년 앞으로 한발자욱 다가 서면서 은근히 물었다.

청년은 그 어떤 명상에서 깨어나듯이 머리를 돌려 이 선배의 차림차림을 유심히 살피더니 한번 빙그레 웃으면서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아르세 ─ 느 ․ 루팡」은 아랫 턱에 수염이 없읍니다. 그리고 「아돌프․ 맨쥬」도 역시 아랫턱엔 수염이 없지요.』

하고 의외의 말을 건넨다.

『그러나 때로는「루팡」도 아랫 턱에 수염을 기르지요. 필요를 느낄 때는 ─ ─』

하고 대답하는 이 선배는 불문곡절하고 내쏘는 이 청년의 어투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다.

청년은 역시 빙글빙글 웃으면서

『필요를 느낄 때는 그렇지요.「루팡」은 그 어떤 굉장한 범죄를 실행할 때는 백발 노인으로도 변장할 테니까요.─ 하하하……하옇든 훌륭한 가 장술을 가지셨읍니다. 오늘밤 여기 모인 손님 중에서 당신의 가장 술이 가장 우뜸일 것입니다. 자아 여기 앉으시지요. 저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하고 청년은 명함을 꺼냈다.

이 선배는 잠깐 명함을 들여다 보더니

『아 당신이 그 유명한 탐정소설가 백남수(白南樹)씨?』

이선배는 적지않게 흥미를 느끼는 모양으로 상대방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유명하다는 말씀을 빼놓으시지요.』

『글쎄, 나의 가장을 「루팡」으로 보시는 것을 보니…… 저는 이선배 ─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이선배도 명함을 꺼냈다.

『이선배씨?』

『네 이선배 ─』

『이선배……』

그림에도 남달리 많은 취미를 가진 탐정소설가 백남수는 여태껏 이 선배라는 성명을 가진 화가를 모르는 모양이다.

그런 눈치를 알아차린 이선배는

『아직 백남수씨 처럼 유명한 이름을 가지지 못하여 대단히 미안합니다.』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천만에요. 그런데 그림 그리시는 지는 벌써 오래셨읍니까?』

『한 이삼일 되었지요.』

『이 삼일?』

탐정소설가 백남수는「유모러스」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기 보다도 오히려 유쾌하였다.

『잘 알겠읍니다. 그래 이 삼일 동안에 어떤 그림을 그리셨읍니까?』

『고양일 그릴 셈으로 붓대를 들었었는데 그만 호랑이가 되고 말아서 ─ 하하하……』

『하하하하……』

두 사람은 십년 친구를 만난 듯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백남수는 웃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끝끝내 자기의 본명과 직업을 감추어 두는 자칭 화가 이선배의 정체가 무척 마음에 걸렸던 때문이다.

『공작부인은 아직「홀」에 나오지 않았읍니까?』

이선배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까 잠깐 나와서 한차례 춤을 추고 도로 들어 갔읍니다. 아직 그의

「피앙세」백영호씨께서 등장을 안하셔서……』

『백영호씨! 허어 자기 부친의 성명 삼자를 함부로 입에 담는 습관을 우리는 아직 갖지 못한 줄 알았더니……』

이선배는 약간 놀란 모양이다. 그러나 백남수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만 있다.

빙글빙글 웃고만 있다가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오늘밤 이 가장무도회에 출석한 손님들을 대개는 다 알아보겠는데 도무지 그의 정체를 알아 볼수 없는 손님이 꼭 두사람 있읍니다.』

하고 그는 손을 들어 저편 한 모퉁이를 가리켰다.

아 『 , 저기 서 있는「써 ─ 커스」의 파리앗치(道化役者)[도화역자] 말씀입니까?』

『네, 얼굴을 저렇게 그림 그리듯이 그려 놓았으니 저게 대체 누군지 ……』

『하하, 가장도 저렇게 대담하게 하고 나서면 증오를 느낀다는 것 보다도 도리어 애교가 있는 걸!』

저편 「밴드」옆 한구석에 우두켜니 서서 사람들의 춤추는양을 히죽히죽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는 이상한 인물 ─ 저 곡마단의 웃음단지, 어릿광대의 복장을 한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이다.

목에 커다란 깃이 달린 주홍색 도화복을 입고 역시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맸을 뿐만아니라 흰떡같이 분을 칠한 얼굴에다 붉은빛, 파랑빛, 노랑빛, 이렇게 여러가지 빛으로 눈, 코 입술 같은 것을 간판처럼 그려 놓았으니 탐정소설가 백남수의 호기심을 어지간히 끈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백남수만 아니라 수 많은 손님들 중에 그가 대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 수상한 어릿광대에게 쏠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춤을 추면서 속삭이는 것이다.

『하필 저런 어릿광대로 가장을 한담?』

『흥, 사람이란 다 저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니까요.』

『대체 누굴까, 저이가……』

『글쎄 누굴까?』

그때 어릿광대는 그 우수운 얼굴로 백남수와 이선배가 서 있는 이편 쪽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 반월(半月)처럼 커다랗게 찢어진 입술에 이상한 웃음을 띄우면서 훌쩍 홀 밖으로 빠져 나가고 말았다.

이선배는 어릿광대가 우쭐우쭐 하면서 걸어 나가는 뒷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백남수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그런데 또 한사람 도무지 정체를 알아 보지 못할 사람은 누굽니까?』

백남수는 잠깐 이선배를 쳐다보면서

『또 한사람은 고양이를 그리다가 그만 호랑이를 그린 화가 이선배씨!』

『하하……화가 이선배의 정체가 암만해도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입니다그려. 하하하……』

이선배가 그렇게 호기있는 웃음을 연발할 즈음에 박수소리가「홀」안을 요란히 울리었다. 한 차례의 춤이 또 끝난 때문이다.

그때 번쩍거리는 금테안경을 쓰고 검은 모보단으로 만든 중국복을 입은 한 사람의 청년신사가 사람들을 헤치며 이편으로 걸어온다.

그는 「소파」에 앉은 백남수를 발견하고

『여어, 백군 아닌가!』

하고 소리를 치며 다가선다.

『어째 그리 쓸쓸히 앉아 있는거야? 남들은 이처럼 흥이나서 춤들을 추는데 응? 공작부인이 꾸며 놓은 이 가장무도회에 대한 군의 감상은 어때?』

중국복의 신사는 그 조각(彫刻)처럼 단정한 용모에 반만큼 미소를 띄우면서 은으로 만든 「시가렛케이스」를「포켙」에서 꺼내어 담배를 붙인다.

그러나 백남수는 한번 빙그레 웃고 나서

『하옇든 군의 감상부터 먼저 들어나보세. 보건대 무척 유쾌한 모양인데, 요즈음 도무지 웃을 줄을 모르던 군이 그 처럼 즐거워 하는 것을 보니 ……』

하고 의미있는 눈으로 상대방을 쳐다보며

『국제도시 상해에서 수입해 온 춤인만큼 훌륭한 걸. 공작부인을 제법 리-드 하는 걸 보니.』

『하하 그걸 보았나? 그러나 백선생(백영호씨)의 춤이야말로 본격적일 걸.

『홈바』파리의 사교장에서 가져온 만큼…… 그런데 왜 백선생이 아직 안 보이지? 정란(남수의 누이동생)씨도 아직 안보이고……』

이선배는 그 순간 이 중국복을 입은 청년신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살아지고 그 어떤 오뇌의 빛이 알알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웃음이 살아진 청년의 얼굴 ─ 그것은 마치 단아한 『그리샤』조각 처럼 어여쁜 얼굴이다. 이 선배는 아직까지 그 처럼 어여쁜 용모를 보지 못했다.

청년은 홀 안을 한번 휘 둘러 보고나서 자기의 오뇌를 떨쳐 버리려는 듯이

『하하하……하옇든 백선생이야말로 조선의 행운아 ─ 아니 세계의 행운아인걸! 오십 오세의 늙으신 몸으로서 공작부인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니까…… 백군 그렇지 않은가?』

그는 억지로 작기가 유쾌하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이려는 듯이 웃어 보이며 옆에 앉은 신사「모노클」에다「씰크햇트」를 쓴 이선배의 차림차림을 흥미있는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백남수는 그때 얼른「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두 분을 소개 하겠읍니다. 이 분은 이선배 화백, 그리고 이 분은 저희 집의 고문변호사, 다년간 만주개발에 많은 힘을 쓰는 오상억(吳相億)군입니다.』

아아 그런가! 청년변호사로서 가장 수완이 능란하다는 오상억 변호사였던가!

그 때 이 가장무도회의 여주인공 공작부인이「홀」에 나타났다.

「홀」안이 터져 나갈 듯한 박수 소리 ─ 머리에다 꼬리를 활짝 펼친 공작의 관을 쓰고 흰바탕에 금실로 수 놓은 화려한 야회복을 입은 공작부인은 손님들에게 가벼운 답례를 하며 돌아간다.

음악소리는 다시「홀」안을 울렸다. 「왈츠」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으로 상대방를 고르면서 「홀」중앙으로 몰려든다.

백남수는 이선배를 혼자「소파」에 남겨놓고 군중을 해치면서 공작부인 앞으로 걸어가서

『오늘 밤만은 저도 서양사람이된 셈이니─ 공작부인, 부인과 함께 춤추는 영광을 가질 수 있겠읍니까?』

하고 그는 약간 허리를 굽히고 공작부인의 손등에 입을 대는 흉내를 낸다.

공작부인은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 대신 왼손을 백남수의 어깨에 올려 놓았다.

이리하여 춤은 다시 시작되었다. 무르녹는 듯한 음악소리와 아울러「홀」

안은 흐느적거리는「왈츠」의 물결이다.

『그런데 백선생께서는 왜 아직 안보이셔? 같이 떠나오시지 않았어요?』

『저, 백영호씨 말씀입니까?』

『아이 어쩌면!』

『공작부인의 바깥어른 ─ 아니 한달 후면 바깥어른이 되실 양반! 허어, 백영호씨야 말로 세계에서 둘도 없는 행운아죠.』

『그만 두세요. 누가 자기 아버지를 그렇게 부른담?』

『아니 올시다. 그건 저 오상억 변호사가 아까 나에게 한 인사였죠. 세계에 둘도 없는 행운아라고 ─ 오군은 공작부인에게 많은 흥미를 가진 모양인데.』

『흥.』

공작부인은 입맛이 쓰다는 모양이다.

『그런데 은몽씨! 은몽씨는 나의 아버지의 무엇과 결혼하시렵니까? 백만 원의 재산?』

『노오.』

『그의 인격?』

『노오.』

『그이에 대한 의리?』

『예스! 그리고 그의 성의!』

두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서 잠깐 그쳤다가

『한달 후에는 남수씨의 젊은 어머니 ─』

『젊은 어머니!』

감개무량하다는 남수의 어투였다.

『그런데 은몽씨는 지금까지 참으로 사랑을 바쳐 본 사나이가 있읍니까?』

『한 사람 쯤이야 ─』

『누구?』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세요. 칼이라도 들고 덤벼 들겠어요?』

『칼? 농담은 그만하고 ─』

『참 농담은 그만합시다.』

남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지금 저기「소파」에 앉아 있는「씰크햇트」에「모노클」을 쓴 신사 ─ 그가 대체 누굽니까?』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글쎄 누굴까? 아, 이선배라는 화가가 아니예요?』

『전부터 친분이 있었읍니까?』

『아뇨. 오늘밤이 처음 ─ 아직 인사도 못했어요.』

공작 부인은 그리고 남수의 어깨 위로 묵묵히 앉아 있는「씰크햇트」의 신사를 뚫어질 듯이 넘겨다 본다.

남수는 다시 말을 이어

『그리고는 조금 전 곡마단의 어릿광대로 가장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대체 누굽니까?』

『곡마단의 어릿광대?』

『얼굴에다 흰떡같은 분칠을 하고 우수워서 죽겠다는 듯 초생달 같은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사람, 머리에는 주홍빛 수건을 쓰고……』

공작부인은 이상하다는 듯이「홀」안을 이리저리 휘 둘러 보았다.

『어디 있어요?』

『없을리가 있나? 조금 아까도 있었는데 ─』

『누굴까?……』

남수와 공작부인이 「홀」안을 아무리 살펴보았으나 주홍빛 도화복으로 전신을 감추고 히죽히죽 웃고 서 있던 수상한 그림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