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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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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化役者[도화역자]

[편집]

춤은 또 한 차례 끝났다.

백남수와 헤어진 공작부인은 저편「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이선배 옆으로 걸어갔다. 그때 이선배는 얼른「포켙」에서 커다란 「마스크」를 꺼내어 눈과 이마를 가리우면서 몸을 일으켰다.

『처음뵙겠읍니다. 이선배 ─ 김수일(金秀一)군을 대신하여 이 흥미 있는 가장무도회를 구경할 셈으로……』

독자제군은 이 선배가 오늘밤 이 공작부인의 저택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부터 자기의 본 음성은 감추고 가짜 목소리로 대화(對話)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만 할 것이다.

공작부인은 약간 수심 띈 얼굴로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읍니다. 수일씨와는 전부터 친분이 있었어요?』

『저와 수일군은 막역지우 ─ 수일군의 일신상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알고 있읍니다.』

『네, 그러세요?』

공작부인의 주옥같은 두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공작부인, 이리로 좀 나오시지요.』

이선배는 앞장을 서서 홀 밖 발코니로 나갔다. 명수대 일대에 고요히 흐르는 달빛 ─

『그때 수일씨는 어디 편찮으세요?』

그러나 그 때 자칭 화가 이선배는 엄숙한 목소리로

『공작부인!』

하고 힘있게 불렀다. 순간, 공작부인의 화려한 얼굴빛이 금새 어두워 졌다.

『네?』

『백영호씨와의 결혼식을 끝끝네 거행하실 작정입니까?』

이선배의 물음의 떨어지자 마자 공작 부인의 관을 쓴 머리가 창백한 달빛 속에서 힘없이 숙으러졌다.

『대답을 하십시요! 당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수일군의 일생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

『그 처럼 순진하고 쾌할한 청년으로부터 당신은 영원한 행복을 빼앗으려는 겁니까?』

『…………』

『대답을 하십시요! 그에게 준 사랑의 말 ─ 자기 입으로 한 말에 책임을 못 느끼십니까?』

그러나 공작부인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숙으렸던 머리를 들어 달빛에 곱게 깔린 한강을 물끄러미 바라 볼 뿐이었다.

꿈과 같은 백요 (白妖)의 세계, 멀리 서울 시가의 울긋불긋한 네온이 호화롭게 흐른다.

『수일씨!…………수일씨!』

약간 떨리는 공작부인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긴 한숨과 함께 얽히어 나왔다.

『운명은 김수일씨와 저와 서로 사모하는 마음을 허락했으나 결혼까지는 허락치 않았다고 ─ 돌아 가시면 부디 부디 그떻게 전해 주세요.』

『그러면 당신은 백영호씨의 백만원과 결혼 하시렵니까?』

『말씀을 삼가세요.』

『그러면……』

『백선생은 나의 예술 파트너 ─ 나의 예술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 ─ 나의 세계적 진출을 위하여 노력한 사람이예요.』

『사랑과 의리를 구별하시지요.』

『저는 연애 지상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을 수일씨에게 전해 주셨으면 고맙겠어요.』

『잘 알아 듣겠읍니다. 다시는 수일군의 자취를 찾으려고는 생각지 마시요.』

『……?』

이선배가 던진 최후의 한 마디는 확실히 공작부인의 가슴을 바늘로 찌른 듯, 긴 눈썹 밑에 숨어 있던 두 눈동자가 쏘는 듯이 이선배를 쳐다 보았다.

그때 젊은 안내인이 밖으로 나오면서

『아씨, 삼청동댁에서 오셨읍니다.』

하고 공손히 읍하였다.

『아, 그래?』

하고 공작부인은 잠깐 주저하는 모양을 보이더니

『그럼 잠깐 실례 하겠읍니다.』

한마디를 남겨놓고 약혼자 백영호씨를 맞이하러「홀」안으로 들어갔다.

이선배는 공작부인이 살아진『홀』문쪽을 언제까지나 바라보면서 중얼거린다.

『아아! 절망이다! 암흑이로구나!』

『발코니』에서 이선배와 헤어진 공작부인은 지금「홀」안으로 들어서는 백영호씨와 그이 딸 정란(貞蘭)을 향하여 걸어간다.

『늦었읍니다.』

화려한 러시아 귀족의 복장을 입은 백영호씨는 서양사람 모양으로 젊은 약혼자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아버지는 오늘 밤 자기를 네프류 ─ 도프 공작이라고 부르란답니다. 저카츄 ─ 샤를 위하여 일생을 참회 생할로 보낸 도덕적 연애인!』

서반아의 집시 칼멘으로 분장한 정란이 냉큼 나서면서 공작부인의 손목을 잡았다.

『호호……네프류 ─ 도프 공작!』

공작부인은 반만큼 웃는 낯으로

『그럼 나도 저 천진난만한 카츄 ─ 샤로 분장 했으면 좋았을 걸!』

그러면서 약혼자의 딸 정란의 부드려운 어깨를 정답게 껴안았다.

그 한 마디가 늙은 백영호를 어지간히 만족시킨 모양이다.

『카 ─ 츄샤가 공작의 면류관을 썼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 하하하……』

백영호씨는 눈부신 듯이 젊은 약혼자의 아담한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네프류 ─ 도프 공작이라는 공작(公爵)과 공작 부인이라는 공작(孔雀)의일치에 무척 흥미를 느끼시는 모양이야. 그렇지 않아요? ─ 네프류 ─ 도프 공작부인!』

『호호호……』

『호호호……』

『얘는 너무 입이 빨라서 ─ 』

『그래 그렇지 않으셔요? 아버지.』

『그래 그래, 네 말이 맞았다.』

삼년 전 어머니를 여윈 정란은 홀아버지의 사랑을 혼자 받아 가면서 자랐다. 작년 봄 P 여자 전문학교 음악과를 마치고 혼담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금방석 위에 앉은 정란이었다.

그 수 많은 혼담 가운데서도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서 아까 잠깐 독자제군에게 소개하여 둔「그리샤」조각형(型)의 미남자 오상억 변호사가 있었다.

청년변호사 오상억은 법조계에 마치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일뿐더러 백영호 씨의 고문 변호사란 지위로 따져 보더라도 백정란의 약혼 상대자로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다. 백영호씨는 딸 정란에게 오상억을 택하기를 누구 보다도 주장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란의 가슴속에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한 가지 비밀이 있었으니 그것은 작년 봄 학위논문이 통과된 의학박사 문학수(文와의 사이에 얽히어진 學洙) 「로맨스」였다. 정란은 마침내 아버지를 설복하여 문학수와 약혼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년 늦은 가을의 일이었다.

인물소개는 이만해두고 이제부터 필자는 그리도 호화롭던 가장 무도회가 돌연 공포의 마수가 꾸물거리는 암흑의 세계로 변하지 않으면 안되게된 사실을 기록하여야만 될 때가 왔다.

그것은 유랑한 음악에 마추어 약혼자 백영호씨를 상대로 한차례 춤을 추고 난 공작부인이 저 편 「소파」에 걸터 앉아서 자기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씰크햇트」의 신사 이선배와 시선이 부딪치면 그 청아한 눈동자가 구름 낀 하늘처럼 어두어졌을 때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왜 그리 안색이 좋지 못하시오? 무슨 근심되는 일이라도?』

백영호씨의 음성은 언제나 은근히 그리고 부드럽게 굴러 나오는 것이다.

『아니예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 저 잠깐 화장을 고치고 나오겠읍니다.』

그리고 공작부인이 이선배 앞을 지나 복도로 나가버리지 약 오분 후 돌연

『악』

하고 마치 장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릴까?』

열광적으로 춤추며 돌아가던 여러 손님들은 마치 방바닥에 얼어 붙은 듯이 우뚝 멎었다. 그때 또 한번

『아, 아, 아―ㅅ!』

하고 외치는 공작부인의 공포에 찬 목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찢는다.

『공작부인의 목소리가 아닌가?』

『이게 대체 어디서 나는가?』

방바닥에 얼어붙은 듯이 우뚝 멎었던 손님들은 다음 순간,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예감을 전신에 느끼면서 떠들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쏜살같이 「홀」밖으로 뛰어 나가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나는 「택시 ─ 도오」에 「씰크햇트」를 쓴 이선배의 검은 그림자요 하나는 「네프류 ─ 도프」로 분장한 백영호씨의 흰 그림자다.

『공작부인은 어디 있읍니까?』

이선배의 고함소리다.

『화장실에 있을겁니다.』

백영호씨의 목소리다.

이선배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넓은 복도를 왼편 쪽으로 달음박질 해 간다.

그는 전 부터 공작부인의 화장실을 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서슴치 않고 왼편 복도 맨 나중 방 「도어」를 힘차게 열어제쳤다.

『앗!』

하고 외치는 이선배의 놀란 목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덜컥하고 눌렀다.

사람들은 대체 거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커다란 삼면경(三面鏡)앞에 무참히 쓸어져 있는 공작부인의 몸뚱이! 공작 부인의 왼편 어깨 위에 날카로운 비수가 박혀 있지 않은가! ─

『이게 어찌된 일이요?』

이선배와 백영호씨는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쓸어진 공작부인 옆으로 뛰어 갔다.

『빨리 빨리…… 저 주홍빛 어릿광대를 …… 들창으로 …… 그 들창으로 ……』

공작부인의 숨찬 목소리와 함께 그의 백납(白蠟)처럼 흰 손가락이 활짝 열어 젖힌 달빛 어린 창 밖을 가리키며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순간 그 주책없이 히죽히죽 웃으며 돌아 가던 곡마단의 웃음 단지 도화역자의 간판 같은 얼굴이 번개 같이 눈 앞에 떠 올랐다.

공작부인이 말한「어릿광대」란 한 마디에 누구 보다도 놀란 것은 백영호 씨의 아들 백남수였다. 그는 아까부터 수상한 도화역자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의혹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속히 정원을 뒤져 봅시다!』

백남수는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들창을 넘어 달빛이 희미한 정원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손님들은 감히 그의 뒤를 따라 나갈 용기가 없다는 듯이 돌부처처럼 우뚝 서서 자기네들도 조금 전에 목격한 도화역자의 무서운 환상을 머리에 그려 볼 뿐이다.

한편 이선배는 시뻘건 피가 뚝뚝 흘러 내리는 공작부인의 어깨로부터 그처럼 절박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손수건으로 칼 자루를 쥐고 뽑으면서

『경찰 당국이 올 때까지는 누구든지 이 칼에 손을 대지 마시요.』

하고 사람들에게 주의를 시켰다.

얼른 보기에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으나 정신을 잃어 버린 공작부인의 납상(蠟像)처럼 해말쑥한 얼굴에는 그 어떤 무서운 광경을 아직도 눈 앞에 보는 듯한 공포의 빛이 심각히 그려져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요?』

까닭 모르는 이 무참한 봉변에 백영호씨는 절반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여러분 『 가운데 혹시 의술(醫術)의 경험을 가지신 분은 없읍니까?』

하고 이선배가 물었을 때, 백영호씨의 딸 정란이 제 옆에 서 있는 투우사(鬪牛師)의 등을 살그머니 밀었다.

『변변치는 못하지만……』

투우사로 가장한 청년은 서슴치 않고 앞으로 나섰다.

『오, 문군, 빨리 손 좀 써 주게!』

하는 백영호씨의 말에

『과히 염려하지 마십시요. 경상(輕傷)인 듯 싶읍니다.』

그가 바로 정란의 약혼자인 의학박사 문학수(文學洙) 그 사람이다. 오상억 변호사의 눈초리가 쏘는 듯이 문학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동안 공작부인의 상처를 만져보고 난 문학수는 상처에다 붕대를 대면서

『극히 경상이니까 그리 염려 되는 일은 없읍니다. 다만 극도의 공포로 말미암아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이지요.』

하고 설명하였다.

그 때 이선배는

『하옇든 누구든지 빨리 경찰에 전화를 걸어 주시요. 전화는 이층 서재에 있읍니다.』

하고 외치면서 정신없이 쓸어진 공작부인을 안고 옆 방 침실로 들어가서 하얀 시 ─ 트가 깔린 침대 위에 눕혔다.

오늘밤 처음으로 공작부인의 현관을 들어섰다는 수상한 화가 이선배는 대체 전화기가 이층 서재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리고 한 달 후면 공작부인의 남편이 될 백영호씨가 옆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몸소 공작부인을 안고 침실로 옮긴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그러나 백영호씨 이하 여러 손님들은 그가 오늘밤 처음으로 공작부인을 찾았다는 사실도 몰랐을 뿐더러 공작부인을 칼로 찌르고 들창을 넘어 도망한 저 도화역자의 가장으로 정체를 감춘 무서운 악마의 환영이 그들로부터 정당한 사색의 힘을 모두 빼앗아 버렸던 것이다.

그때 만일 탐정소설가 백남수가 그것을 보았던들 이 모순된 이선배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밖으로 도화역자의 뒤를 따라 나갔던 탐정소설가 백남수가 헐떡거리며 뛰어들어 왔다.

『어떻게 되었소?』

여러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백남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뒤져도 보이질 『 않습니다. 한길 반이나 되는 돌담을 넘어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고 정원을 통해서 정문으로 밖엔 도망할 길이 없는데…… 그래 그때 바로 정문 밖을 순회하던 경찰에게 물어 보았으나 그런 수상한 사람은 본적이 없다구요.』

『그럴리가 있나? 그러면 그 놈은 아직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고 정원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래 그 경찰은 지금 어디 있소?』

『정문을 지키고 있읍니다.』

그래 이번에는 백남수, 오상억 변호사, 의사 문학수 등 여러사람이 한번 더 정원을 이잡듯이 뒤져 보았으나 이상한 도화역자의 그림자는 연기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편 정신을 잃어 버렸던 공작부인이 눈을 반만큼 뜨고 약몽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어릿광대, 어릿광대가 나를……』

하고 아직도 무서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정신을 차리시요 은몽씨!』

백영호씨는 공작부인의 핏기없는 흰 손을 잡고 애처러운 듯 서너번 잡아 흔들었다.

『상처는 극히 가벼우니 염려마시고 속히 그 수상한 도화역자의 이야기를 하여 주시지요.』

하고 묻는 이선배의 말에 공작부인은 이상스러운 표정으로 이선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저를 화장실에서 이 침실로 옮겨 주신이는 어느 분이예요?』

하고 의외의 말을 물었다.

『저올시다. 긴급한 때라 실례를 무릅쓰고 제가 침대로 옮겼읍니다.』

그 말을들은 공작부인은 아무말도 없이 이 두 눈을 스스르 감았다.

공작부인은 실로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비록 정신은 잃었다 할지라도 아까 자기가 화장실로 부터 침실로 안기워 올 때 자기의 코를 찌른 이상한 체취(體臭) ─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듯한 몸냄새를 깨달았던 것이다.

공작부인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 독특한 몸 냄새를 어디서 맡아 보았으며 누구의 것인가를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때

『그런데 빨리 그 도화역자의 이야기를 하여 주십시요.』

하고 재촉하는 이선배의 말에 공작부인은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면서 입을 열었다.

공작 부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가「홀」에서 백영호씨와 춤을 추고 나서 화장을 고칠 셈으로 「홀」 밖으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들어가 삼면경 앞에 서서 얼굴을 고치고 있노라니까 언제 어디로 들어 왔는지 주홍빛 도화복을 입은 어릿광대가 바람처럼 등뒤로 쑥 나타나는 것이 거울에 비치었다.

공작부인은 그만 『악!』하고 뒤로 돌아서려는 순간, 시퍼런 칼날이 왼편 어깨 위로 번쩍 들리었다고 한다.

공작부인은 그 때 무서운 광경을 다시 한번 회상하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면서

『그래 그만 악하고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쳤어요. 그러나 칼 쥔 손이 제 왼편 어깨위로 번쩍 들리는 것과 제가 고함을 치는 바람에 들창 밖으로 달아나던 것만은 기억 하겠어요.』

그때 옆에 있던 오상억 변호사가

『범인은 왼손잡이다!』

하고 중얼거리는 말에

『음 그렇다! 공작부인의 등뒤에 섰던 범인이 만일 왼손잡이가 아니고 보통 사람처럼 바른 손을 쓴다면 정녕코 공작부인의 바른편 어깨를 찔렀을 테니까 ─ ─』

하고 오상억 변호사의 말을 지지한 것은 탐정소설가 백남수였다.

그러나 오늘밤 그 도화복으로 정체를 감춘 범인이 대체 누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현관을 지키고 있던 안내인도 그런 수상한 사람을 들여보낸 기억은 전연 없다고 단언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관할 경찰서로부터 사법주임 임경부가 십 여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도착하자 그 뒤를 이어 검사국으로부터 박검사가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그 이상 더 신통한 발견은 못하였으며 다마 흉기(凶器)인 단도 한자루를 유일한 물적 증거품으로 압수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기 이상한 현상이 하나 일어났다. ─ 경찰 일행이 손님들을 홀 안으로 몰아 넣고 간단한 취조를 시행하려고 하였을 때, 조금 전까지도 보이던 저 수상한 화가 이선배의 그림자가 마치 요술사처럼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선배라니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임경부와 박검사는 남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칭 화가 이선배라는 자가 오늘 밤 이 무도회에 참석 했었읍니다.』

하고 백남수는 이선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였다.

그래서 곧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찰을 불러 들여다 물어 보았더니 무슨 『 긴급한 일이 있다고 하여 밖으로 내 보냈읍니다.』

하고 적지 않은 책임감을 느끼면서 대답하였다.

『에이, 바보 같은 자식!』

임경부는 마악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억지로 참는 얼굴이다.

『지금이라도 곧 뒤를 따라라. 그리 멀리 못 갔을 것이다.』

하고 부하들에게 벼락 같은 명령을 내리고 이번에는 백남수를 향하여

『그 도화역자가 홀에 나타난 것은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요?』

『단 한번입니다.』

『그것은 어느때요?』

『공작부인이 춤을 한차례 추고 안으로 들어간 후입니다.』

여러 손님들도 남수의 증언을 지지하였다. 경부는 다음 공작부인을 향하여

『당신은 그 때 도화역자를 보았읍니까?』

『저는 못 보았어요. 제가 다시 홀로 나왔을 때는 벌써 그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뒤였어요. 지금와서 생각하니 그 때 그 어릿광대는 저와 엇바뀌어 화장실로 숨어 들어 간 것 같아요.』

『음 ─ 그것은 그런데 화가 이선배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저도 그이와는 오늘밤이 처음입니다. 다른 손님의 대신으로……』

공작부인은 말을 끊었다.

『다른 손님의 대신으로?』

『………』

『숨김없이 똑똑히 말씀해 주시요.』

그러나 공작부인은 말이 없다.

공작부인의 저윽이 주저하는 낯빛을 눈치챈 임경부는 조금 엄숙한 목소리로

『어떤 사람의 대신으로 이선배란 작자가 이 가장무도회에 참석하였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공작부인은 그 망설이는 눈동자로 옆에 있는 백영호씨를 한번 쳐다본 후에

『김수일이라는, 역시 화가가 오늘밤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의 친구인 자기가 대신 무도회를 구경할 셈으로 왔었다고요.』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십시요.』

『그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없었어요. 전부 말씀 드렸어요.』

공작부인은 돌연 어깨에 받은 상처에 고통을 느끼는 듯이 양미간을 찌프리고 귀찮다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미안합니다만 자세한 『 심문은 후일로 미루어 주시요. 무척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니까.』

옆에 서 있던 백영호씨가 애처러운 듯이 임경부에게 정중히 말했다.

『─ 그러나 단 한가지, 그 김수일이란 화가의 주소를 가르쳐 주십시요.』

그러나 공작부인은 들은체 만체하고 눈을 뜨지 않는다.

『속히 말씀해 주시요. 일 분이라도 늦으면 늦을수록 ─』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다.

『미안하지만 내일로 ─』

백영호씨가 다시 한번 간절히 부탁 하였다. 임경부도 하는 수 없이 공작 부인에 대한 심문을 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임경부가 발머리를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잠깐 ─』

하고 임경부를 불러 가지고 아까 이선배가 자기를 「발코니」로 끌고 나가서 한 이야기를 숨김 없이 말한 후에

『김수일씨의 주소는 서린정 중앙「아파─트」칠 호실 ─』

하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중앙「아파─트」칠 호실!』

사법주임 임경부의 양눈이 번쩍 빛난다.

경부 임세훈(任世勳)은 근 이십년 동안이나 탐정이란 직무에 몸을 던진 노련한 경찰관이다.

그의 민활한 수완과 초인적인 정력은 사실 놀랄만 하였으며 어떠한 범죄자라도 그가 한번 훑어보는 눈초리 아래 머리를 숙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손에댄 범죄사건은 태반이 무미간조하고 지리하기 짝이 없는 사소한 사건 뿐이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자기의 기념비가 될 만한 사건 ─ 탐정소설 처럼 흥미있고 호화로운 범죄 ─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재주를 가진 범인을 상대로 마음껏 한번 싸워 보고 싶은 충동을 언제나 느끼던 바이다.

그러던차 오늘밤 이 화려한 가장무도회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돌발한 이 살인미수 사건을 눈앞에 볼 때 그의 가슴은 마치 예술가가 느끼는 창작욕 이상의 흥분을 느끼는 것이었다.

더구나 세계적 무희 공작부인에게 칼을 던진 범인이 화려한 애수(哀愁)를

「심볼」로 하는 도화 역자의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거기서 실로 악마시(惡魔詩)와도 같은 공포를 전신에 깨달았던 것이다.

『이 사건만은 내손으로 해결하리라!』

이리하여 임경부는 부하 한명에게 손수건으로 싼 단도를 내주며 도경찰부 감정과로 가지고 가서 감정의 결과를 보고해 오라는 분부를 내린 후에 자기는 부하 두명을 거느리고 명수대 공작부인의 저택을 나서서 바로 시내 서린 정을 향하여 달빛이 낯같이 쏟아져 내리는 한강 인도교를 기운있게 몰아댔다.

『늙은 백영호씨와 젊은 공작부인의 약혼…… 백정란의 약혼자인 의학 박사 문학수는? 그리고 정란을 따르는 오상억 변호사는? 화가 김수일과 공작 부인의 연애사건은? 수상한 화가 이선배라는 작자는…… 도화역자의 정체는……

이러한 의문이 임경부의 머리 속을 질서없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그때 부하 한사람이 임경부를 향하여

『그런데 저 수상한 화가 이선배를 따라간 경찰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무슨 소득이 있는 모양이지요?』

하고 물었으나 임경부는 묵묵히 「쿠숀」에 몸을 파묻고 양눈을 지긋이 감은 채 도대체 대답이 없다.

그것도 그럴법한 것이 임경부는 지금 저 악마의 가장인 주홍색 도화복을 이 사람에게도 입혀 보고 저 사람에게도 입혀 보곤 하면서 가장속에 숨은 범인의 정체를 머리에 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선배란 인물에다 도화복을 입혀 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임경부는 곧 그것을 벗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 선배와 그 도화역자는 결코 동일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하면 도화역자가 벙글거리는 얼굴로「홀」안에 나타났을 때 이 선배는 확실히 탐정소설가 백남수와 함께「소파」에 걸터 앉아서 멀리 그것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화장실에서 부르짖는 공작부인의 날카로운 비명을 듣고 백영호씨와 함께 홀 밖으로 뛰어 나간 것도 이선배였다.

『그렇다. 이선배는 결코 범인이 아니다. 그러면……』

그러면 대체 무슨 이유로 이선배는 경찰들의 눈을 피하여 도망을 했을까?

그리고 오늘 밤 처음으로 공작부인의 현관을 들어 섰다는 그가 이층 서재에 전화기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또 어떻게 아는가?

『하옇든 이선배가 범인은 아닐지라도 중요한 관계 인물이라는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다음에 임경부는 돌아 가면서 전부 한 번씩 이 주홍색 도화복을 모두 입혀 보았다.

탐정은 어떠한 인물이라도 『 의혹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는 탐정학(探偵學)제 일과의 교훈 그대로 탐정소설가 백남수를 의심하고 의학 박사 문학수를 의심하고 변호사 오상억을 의심하고 나중에는 백영호씨와 그의 딸 정란까지를 의혹의 눈으로 훑어 본 다음에 눈을 번쩍 뜨면서

『화가 김수일! 공작부인의 애인 김수일!』

하고 중얼거렸다. 비록 자기를 해하려 하였으나 그것도 결국은 자기를 끝없이 사랑하고 있는 때문이 아니었던가? 김수일의 주소를 숨기려고 애를 쓰던 공작부인의 얼굴이 알알이 나타난다.

어디로 들어 와서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는지는 지금 갑자기 추측하기 어렵거니와 하옇든 그 김수일이라는 인물이 가장 농후한 혐의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을 실은 자동차는 벌써 남대문을 지나 부민관 앞을 지나고 있었다. 김수일이란 화가가 살고 있다는 서린정 「중앙·아파 ─ 트」

는 바로 광화문 우체국 뒷 골목을 조금 들어서면 보이는 이층 양옥이다.

황급히 자동차에서 내린 임경부 일행은 금자로「중앙·아파 ─ 트」라고 씌어있는 유리문을 기운차게 열었다.

『수부(受付)』─ 라고 씌어 있는 조그마한 들창 안에 주인 마누라 비슷한 중년부인이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가 뚜벅뚜벅 들어서는 경찰관 나리를 쳐다보자 이편에서 묻기 전에 먼저 들창을 다르르 열고 인사 대신 반만큼 웃어 보였다.

『잠깐 조사할 일이 생겼는데……숙박부(宿泊簿)를 좀 보여 주시오.』

하는 임경부를 조금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네, 이것입니다.』

하고 옆에 놓인 테이블 위에서 숙박부를 가져다 주었다.

『칠 호실에 김수일이란 사람이 들어 있을 텐데……』

『김수일 김수일?』

하고 두어 번 중얼거리다가

『아, 저 뭔가, 그림 그린다는 사람 말이죠? 아, 참 그의 이름이 김수일이라지. 난 참 잊어먹기도 잘해. 그가 무슨 못할 짓을 했어요?』

魔 術 師[마술사] 임경부가 숙박부에서 발견한 사실을 대강 추려서 기록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성명 ── 김수일.

연령 ── 삼십 삼 세.

본적 ── 평안부 남문동 ××번지.

직업 ── 화가.

투숙일(投宿日) ── 소화 십× 년 정월 팔일.

그리고 옆에다가 빨간 잉크로 『방세 사 개월 분 선납(先納)』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때 마누라가 생긋 웃으며

『참, 그 분과 같은 손님만 들어 주신다면야 「아파 ─ 트」 영업도 괜찮지요.』

하고 묻지도 않는 말을 한다.

『어째서?』

『글쎄 그렇지 않아요. 방 세는 사 개월 분이나 먼저 내주겠다 방은 기껏해야 한 달에 두세 번 밖에 사용하지 않겠다.──』

『한 달에 두세 번?』

귀 밑이 으쓱해지는 임경부였다.

『그럼요. 그것도 잠을 잔다든가 하는 게 아니고 두어 시간씩 어여쁜 아가씨와 같이 와서 조용히 이야기나 하시다가 가신답니다.』

『그럼 그 어여쁜 아가씨란 어떤 사람이요? 이름이 뭔지 모르오?』

『그런 것은 알 수 없어요. 아마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겠지요. 호호…… 낯은 펵 익은 듯 해두 도무지 누군지, 어디서 본 사람인지, 기억이 안 나겠지요.』

『음, 신문이나 잡지 같은 데서 사진으로나 본 사람이 그리 쉽사리 생각날리는 없지. 속눈썹이 길고 살결이 백옥 같이 맑고 얼굴이 갸름한 ── 다시 말하면 무척 총명스러운 아가씨 ──』

『네네, 맞았어요! 아이, 어쩌면 그렇게 눈 앞에 보는 것 같이 맞추실까!

참 신통도 해라!』

주인 마누라는 혀를 찬다.

『그래 김수일이가 지금 집에 있소?』

『없어요. 어제 저녁에 잠깐 들려서 그이에게 온 편지를 달래가지고 또 어딘가 나가 버렸어요. 아마 그 아가씨한테서 온 편지같은데 여자글씨로 봉투엔 단지 「명수대에서」라고 씌어 있었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어여쁜 아가씨란 오늘밤 저 도화역자의 칼에 찔린 공작 부인에 틀림없을 것이며 편지의 발신인도 공작부인이란 것 쯤은 임경부도 미리부터 짐작하고 있었던바다.

『그런데 김수일이란 사람은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이요?』

『얼굴이 기름하고 아주 호남자예요. 키가 늠름한 아주 훌륭한 신사 ── 퍽 점잖아요. 화가 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

『그의 친구 이선배란 사람이 찾아온 적은 없소? 역시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

『그에게는 한사람도 친구가 찾아온 적은 없었어요. 그 어여쁜 아가씨 외에는 ──』

임경부의 걷잡을 수 없던 공상의 실마리는 거기서 그만 딱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선배는 한번도 김수일을 찾아온적이 없다지 않은가. 과연 이 선배는 김수일의 친구였던가? 이선배는 대체 어떠한 인물일까?

임경부는 김수일의 방 칠 호실을 임검하였다. 방안에는 「테이블」과 의자, 그외 간단한 화구(畵具)가 몇개 놓여 있을 뿐이요. 임경부는 이렇다할 물적 증거품 하나 발견하지 못하였다. 지문을 얻어 보았으나 전부가 다 분명하지를 못해서 하나 쓸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김수일이 다시 「아파 ─ 트」로 돌아오거든 곧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 달라는 부탁을 톡톡히 다진 후에 임경부 일행은 「중앙 ‧ 아파 ─ 트」를 나섰다.

『한달에 두 세번 밖에 사용하지 않는 「중앙 ‧ 아파 ─ 트」 칠 호실 손님 김수일이란 어떤 인물일까?』

임경부는 ××경찰서로 돌아 오자마자 경성시민을 직업별(職業別)로 나눈 커다란 장부를 책장에서 꺼내놓고 분주스러이 펴보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화가난(畵家欄)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김수일이란 이름도 보이지 않고 이선배란 이름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가짜 화가로구나!』

임경부는 장부를 접어 놓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선배도 가짜 화가, 김수일도 가짜 화가! 공작부인은 결국 가짜 화가 김수일과 지금까지 교제를 해 왔다?』

거기에 무엇인가 헤아릴 수 없는 무서운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임 경부의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은 ( )없이 허공을 달리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바뀐다.

임경부의 벼락처럼 쏟아지는 명령을 받고 수상한 화가 ──「씰크햇트」에

「외알 안경」을 쓴 이선배를 따라 명수대 공작부인의 저택을 뛰어나온 경찰관 일행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가장 탐정으로서의 장래성이 많다고 동료간의 촉망을 받는 순사부장 박태일(朴泰一)을 선봉으로 「오 ─ 토바이」를 한대씩 잡어타고 질풍과 같이 한강 인도교를 향하여 달려갔다.

바로 그때였다.

『저놈이 아닌가! 저기 저 인도교 입구에서 지금 뒤를 힐끗 힐끗 돌아보면서 달아나는 「씰크햇트」에 「택시 ─ 도오」를 입은 ──』

하고 경찰 한사람이 부르짖었다.

보니, 과연 저 이선배에 틀림이 없는 「씰크햇트」의 괴상한 신사가 한강 다릿목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가로등을 등지고 지나가는 「택시 ─」를 잡을 셈으로 이리왔다 저리갔다 하는 모양은 마치 함정에 빠진 짐승처럼 안타깝게 보이며 초조해 보였다.

「그렇다. 저 놈이 이선배다!』

『자동차가 없어서 애를 태우고 있구나!』

『앗! 「택시 ─」를 멈추었다…… 올라탄다…… 빨리 빨리!」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이선배를 실은 자동차가 높다란 엔진소리와 함께 달빛이 곱게 어린 한강다리를 비조와 같이 시내를 향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경찰들과 이선배 사이에는 우리들이 영화에서 흔히 보는 일대 추격전(追擊戰)이 일어났던 것이다.

경찰들의 「오 ─ 토바이」와 이선배의 자동차와의 거리는 약 삼백 미터 ── 그러나 처음에는 「오 ─ 토바이」의 속력이 무척 빨라서 이대로 가면 적어도 경성역 근방에서 저 수상한 화가 이선배를 완전히 체포하리라 박부장은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이가 백미터까지 좁아졌을 때 운전수는 과분의 보수를 받은 듯 이선배의 자동차는 마치 총소리에 놀란 참새처럼 후닥딱하고 한번 커다란 엉덩이를 들썩 하더니 저릿저릿한 속력을 내어 점점 깊어가는 밤공기를 칼로 베이듯이 날아간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새 경성역을 지나고 남대문을 거쳐서 이번에는 왼편으로 급「커 ─ 브」를 하여 쏜살같이 부청을 향하고 달아나던 자동차는 마침내 태평동 조선일보사 앞에서 『욱!』소리와 함께 황급히 멎어 버리지 않는가.

『앗! 저 놈이 그만 자동차에서 내렸다! 빨리 빨리!』

『앗! 왼편 골목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경찰들이 따라 왔을 때는 벌써 저 이선배를 싣고 온 자동차는 광화문 저쪽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린 후였다.

『빨리 이선배를 따라라!』

박부장이 선봉에서 어둑어둑한 골목으로 밀려 들어 갔을 때

『저기 간다 ! 저기 저기!』

하고 경찰 한사람이 소리를 쳤다.

보니, 약 백미터 앞을 나는듯이 달음박질치는 이선배 ── 「씰크햇트」를 제겨 쓰고 단장을 꺼꾸로 잡은 이선배의 그 늘씬한 뒷모양이 조는 듯한 전등 밑을 힛득힛득 ── 마치 재봉침으로 눕이는 듯이 번쩍거린다.

『저 놈을 놓쳐서는 안된다!』

『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저 놈을 잡아야 한다!』

고적한 밤공기를 울리는 경찰들의 패검 소리가 채칵 채칵 채칵 ── 그때 이선배가 힐끗힐끗 돌아다 보면서 왼편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본 박부장은

『오냐! 이젠 네가 포대에 들은 쥐로다!』

하고 외쳤다.

어째 그러냐하면 지금 이선배가 허덕거리면서 뛰어 들어간 골목이란 높다란 『콩크리 ─ 트』 담장을 디귿(ㄷ)자로 둘러쌓고는 그만 꽉 막혀버린 소위 막다른 골목이란 것을 박부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실로 이상한 일이 하나 일어났다.

필자는 여기서 수상한 화가 이선배가 허덕거리면서 쫓겨 들어간 그 막다른 골목이란 것을 좀 세세히 기록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하면 이 막다른 골목에서 실로 사람의 힘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 그리고 사람의 두뇌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사건이 생긴 때문이다.

그것은 박태일부장 이하 여러 경찰들의 맹렬한 추격을 받고 있던 이선배가 돌연 마술사)魔術使)와도 같이 ── 그리고 연기와 같이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는 실로 이상야릇하고도 초인간(超人間)적 사건이 돌발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막다른 골목의 지리(地理)는 대체 어떻게 되었는가?

필자는 독자의 편의를 도모코저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그림을 가지고 설명하고자 한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갑』 『을』 『병』 『정』은 각기 주인이 다른 외채집이다. 『가』 『나』 『다』 『라』는 양옥을 둘러싼 두길이나 되는 「콩그리 - 트」 담장이다. 그리고 『마』 『바』 『사』는 고등여학교의 역시 두길 이상의 돌담이다.

그러면 그때 경찰들에게 쫓기던 이선배는 어떤 길로 들어 갔는가 하면 그림의 화살표(↑)를 따라서 왼편으로 꺾어져 양옥을 둘러싼 디귿(ㄷ) 모양으로 생긴 골목으로 뛰어 들어 갔던 것이다.

이 골목은 약 한칸 반 쯤 되는 넓이를 가졌는데 『라』에서 꽉 막혀 버리고 말았다.

경찰 일행이 쫓기는 이선배의 뒷모양을 최후로 본 것은 정문을 지나 「콩크리 ─ 트」담 『나』모통이를 돌아서는데 까지였다.

그때 경찰들은 바로 『가』모통이를 돌아섰던 것이다.

이상야릇한 실로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때 였다.

용감한 박태일 부장은 동료들을 격려해 가면서 정문을 지나 『나』 모퉁이를 오른편쪽으로 돌아섰을 때 보니, 골목에는 희미한 달빛만이 비칠 뿐,

「씰크햇트」의 이선배 그림자는 하늘로 올라갔는지 땅 속으로 빠져들어 갔는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지를 않았는가!

『야얏?』

『어디로 갔니?』

그러나 그 순간까지도 박부장은 실망을 안하였다. 자기네들의 『가』에서

『나』까지 따라오는 사이에 이선배는 벌써 『다』모퉁이를 돌아섰나 보구나 하는 하나의 희망을 품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모퉁이를 이편 쪽으로 돌아서서 휘파람을 불면서 한가히 걸어오고 있는 한사람의 산보객을 눈 앞에서 보았을 순간, 박 부장은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 앉음을 깨달았다.

모자도 안쓰고 「칼라」도 없이 흰 「와이샤츠」바람으로 양손을 「바지」

「포켙」에다 쓰러넣고 이리로 걸어오는 한 산보객이 도중에서 만일 허덕거리면서 달아나고 있는 「씰크햇트」의 예복을 입은 수상한 신사를 맞났다고 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눈이 둥그래져서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저렇게 한가스러이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걸어 올리는 만무하리라 ── 이것이 박부장의 번개같은 추리(推理)였다.

그때야 그 산보객도 우두커니 서서 무슨 일인가 하고 바람과 같이 옆을 지나가는 경찰들을 멍하니 쳐다본다.

과연 박부장의 상상대로 『다』모퉁이를 돌아서서 막다른데까지 따라가 보았으나 이선배는 마술사처럼 없어지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다!』

『어디로 도망갔을까? 두 길이나 되는 이 양편 돌담을 넘어 갔을리는 없는데……』

『하옇든 이제 그 산보객더러 물어보자.』

이리하여 박부장은 아직 우두커니 서서 경찰들이 떠들고 있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는 산보객을

『여보!』

하고 불렀다.

『왜 그러시우?』

산보객은 한발자욱 경찰 앞으로 다가 서면서 대답하였다.

『이제 방금 이리로 「씰크햇트」를 쓰고 예복을 입고 단장을 든 수상한 신사가 뛰어 들어가는 것을 못보았소?』

하고 묻는 말에

『「씰크햇트」를 쓰고 예복을 입은 신사?』

하고 산보객은 또 한걸음 다가 선다.

『그리고 외알안경을 쓴 ──』

그때 그 산보객은 달빛에 어렴풋이 비치는 박부장의 창황한 얼굴을 유심히 드려다보면서

『자네 박태일군이 아닌가?』

하고 의외의 말을 건넸다.

이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이 뜻하지 않은 인물과 만난 박태일은 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어떻게 축복하여야 할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 서울 장안뿐만 아니라 전 조선의 범죄자들을 전률시키며 따라서 그들의 미움을 자기 혼자 차지하고 있는 명탐정 유불란(劉不亂)씨 그 사람이었던 때문이다.

경찰서에도 소위 저라고하는 자칭 명탐정이 수두룩한 가운데 박태일은 오직 자기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은 유불란씨 이외는 없다고 믿고 그를 지금까지 사숙해 왔던 터이다.

그러한 유불란씨를 이러한 곳에서 우연히 만난 박태일이었다.

『무슨 공명을 이룰만한 사건이 생겼나보구만, 응?』

하고 묻는 유불란씨의 말에

『「씰크햇트」를 쓰고 예복을 입고 아래 턱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수상한 신사를 못보셨읍니까? 이제 방금 이리로 쫒겨 들어 갔는데 ──.』

『이제 방금?』

『네! 그이가 유령이 아닌 이상, 그리고 세상에 과학(學科)이란 것이 있는 이상 선생과 그이와는 이 좁은 골목에서 필연적으로 만났을 것입니다.』

「하아, 군의 말을 듣고 보니 군은 나를 몽유병자(夢遊病者)로 생각하는 모양이네 그려. 그렇지 않겠나? 내가 졸면서 산보하는 습관을 가지지 않은 이상 사실 그런 사람이 이 골목으로 뛰어 들어 왔다면 내가 못 볼 리가 없을 텐데 ──』

『이상한 일입니다. 이선배란 인물이 겨드랑이에 날개를 붙이지 않은 이상이 수수께끼를 풀 사람은 우리 조선 안에 단 한사람 ── 선생님뿐이겠지요.』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나 군의 말을 들으니 대단히 재미 있는 사건 같은데, 어디 처음부터 한번 이야기를 해보지. 그리고 웬만하면 내 집으로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씩 ──』

그 때야 박태일부장도 오른편 양옥이 유불란씨의 댁인줄 비로소 깨닫고

『고맙습니다. 그러나 곧 서로 돌아가서 보고를 해야겠읍니다.』

『하아, 사법주임 임경부가 또 활약 할 모양이로 구먼.』

『그렇습니다. 오늘밤도 임경부께서 현장을 임검했읍니다.』

그래서 박태일은 행길에 서서 오늘밤 명수대 공작부인의 저택에서 가장 무도회가 열리었고 도화역자가 나타나서 공작부인을 칼로 찌르고 한편 이상한 화가 이선배를 따라오던 도중이란 것을 간단히 말하였다.

『하아, 그랬던가! 글쎄 우리 서울안에는 아직 「씰크햇트」에 「모노클」

을 쓴 「댄디(풍류신사)」는 없을 텐데 하고 이상스러히 생각했더니만 ── 』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은 과학을 믿습니까?』

『나는 무엇보다도 과학을 사랑하지.』

『그러면 이선배가 ── 아니 사람의 힘으로 이와같은 두길이나 되는 돌담을 눈 깜박할 사이에 넘을 수가 있을까요?』

『못넘는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면 이선배라는 인물은 사람이 아니고 귀신……?』

『귀신이 걸어 다니는 것을 군은 보았는가?』

『그러면 이 이상야릇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되겠읍니까?』

『그것이 즉 우리들 탐정으로서의 연구 대상이다. 음 괴상한 일이로군!』

『그러면 이 좁은 골목에서 유령처럼 사라진 이선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아 박군도 어리석은 『 , 질문을 하는구만, 그것을 곧 이 자리에서 대답할 자격을 가진 이는 탐정이 아니고 신인(神人)이거든. 샬록 ‧ 홈즈가 어떤 곤난한 사건에 당면했을 때, 그는 어떻게 했는가 쯤은 군도 잘 알 것이 아닌가?』

『하루 밤에 담배를 스무 갑이나 피우고 커피를 설흔 잔이나 마시고 고슴도치 처럼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렇다. 군도 오늘 밤에 집에 돌아 가서 담배 열 갑만 피워 보게. 그러면 유령 이선배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릴지도 모를 테니까…… 하옇든 이 공작 부인 살해 미수 사건은 대단히 재미있는 사건이다. 대체 동서 고금을 통하여 무척 무섭고 무척 흥미 있는 사건은 거의 전부가 처음에는 신비(神秘)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법이건든.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 다시 말하면 과학으로는 넘겨다 볼 수 없는 유령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것이다. 이 공작부인 살해 미수 사건만 해도 두 가지의 신비로운 점이 있다.── 한 가지는 도하역자의 신비요, 또 한가지는 이선배의 신비다. 하옇든 돌아 가서 임경부에게 보고를 해 보게. 그가 과연 어떠한 의견을 가지는가.』

『그럼 후일 또 다시 뵙겠읍니다.』

이러하여 근방 일대를 이리 저리 수색하고 있던 동료를 불러 가지고 유불란씨의 정문 앞에서 헤어졌다.

××서에 도착하니 서린정 『중앙 ‧ 아파 ─ 트』로 김수일을 찾아 갔던 임 경부 일행이 좋지 못한 안색으로 박태일 부장을 맞이 하였다.

『박군, 어떻게 되었는가?』

임경부는 박태일을 보자마자 성급히 물었다. 임경부는

『실로 상상하지 못할 이상한 일이 하나 생겼읍니다.』

하고 이선배 추격전의 전말을 세세히 보고 하였다.

『음, 이 세상에 그런 일도 있을까?』

임경부는 한층 더 이 사건의 신비성과 정체모를 악마의 촉수(觸手)를 전신에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그래 유불란군의 의견은?』

『하룻 밤에 담배 열 갑만 태우면 이선배에 대한 신비의 껍질이 벗어 지리라고 말합니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이냐?』

『샬록 ‧ 홈즈는 하룻 밤에 담배 스무 갑을 피우고 어려운 사건을 해결했답니다.』

유불란이 어느새 이 사건에 등장하였다는 말을 들은 그 순간부터 임경부는 벌써 기분이 상했던 터이라, 화를 벌컥 내며 고함을 쳤다.

『이 바보야! 샬록 ‧ 홈즈는 소설속의 인물이다! 공작부인 살해 미수 사건은 현실 문제가 아닌가!』

『네, 저는 다만 유불란씨의 말을 전했을 뿐입니다.』

박태일 부장은 일상 임경부가 민가 탐정 유불란씨에게 질투와 시기와 마음을 품고 잘 잘못은 하옇든 그를 항상 힐란하고자 하는 임경부를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는 터이라, 속으로는 픽하고 웃으면서도 태도만은 공손하였다.

그 때 한 사람의 경찰이 또 경찰부 감정과(鑑定課)에 보냈던 단도 ── 공작 부인을 찌른 흉기가 감정되었다는 보고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 보고서에 의하면 단도에는 아무런 지문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문을 인멸(湮滅)시킬 셈으로 범인은 처음부터 무슨 헝겊 같은 것으로 단도를 싸 쥐었다고 한다.

임경부는 보고서를 구겨 쥔 채 한참 동안 지긋이 눈을 감고 잠자코 앉았더니 돌연 의자에게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하옇든 이상한 일이다. 이선배와 김수일이 둘 다 가짜 화가다! 그리고 이선배가 자취를 감춘 태평동 골목과 김수일이 유숙하고 있는 서린정 「중앙 ‧ 아파 ─ 트」는 말하자면 엎드리면 코가 닿으리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것이 과연 우연한 일치일까?』

하고 부르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