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11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새로운 展望[전망][편집]

신문을 읽고 난 임경부는 극도로 흥분된 얼굴로 전화기를 힘있게 잡았다.

『── 오상억씨 입니까? 임세훈이 올시다. 지금 좀 만나 뵈러 가려는데……혹시 바쁘시지 않으시면 이리로 좀 와주시든지……뭐 손님?…… 공작 부인 ── 주은몽씨가 오셨다고요? 아 그럼 제가 그리로 가겠읍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

임경부는 △△일보를 구겨쥐고 창황한 발걸음으로 ××서를 나섰다.

오후 아홉시 ── 거리에는 짙은 밤안개가 흐를듯이 내리고 오색의 「네온 ‧ 라이트」가 마도(魔都)의 「님프」처럼 오고가는 사람에게 「윙크」를 한다. 이리하여 흥분된 임경부를 태운 서용 자동차가 일로 밤안개를 뚫고 관철동을 향하여 질풍처럼 치닫고 있을 그 즈음 ── 아니 그 보다 얼마 전부터 오상억과 주은 몽이 마주 앉아 있는 관철동 오변호사의 응접실 들창 밖에 이상한 사나이의 그림자가 하나 유령처럼 쑥 나타났다.

안개의 담을 뚫고 쏜살같이 달리고 있는 임경부의 자동차 ── 오변호사의 응접실 들창 밖에서 「커 ─ 텐」을 슬쩍 헤치고 방안을 넘겨다 보는 수상한 사나이의 그림자 ── 짙은 안개로 말미암아 똑똑이는 보이지 않으나 중절모를 눌러 쓰고 검은 안경을 쓴 키가 늠름한 사나이다.

그는 아까부터 무엇을 엿보고 있는지 응접실 안에서 벌어진 그 어떤 광경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 때 응접실 안에는 주은몽과 오상억 변호사, 이 두 사람 밖에 없었다.

『── 저를 구할 사람은…… 저를 이 무서운 처지에서 구해 낼 사람은 오직 오선생뿐예요.』

은몽은 절반 울음섞인 목소리로 애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그만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오상억의 그 「그리샤」형의 조각처럼 단정한 어여쁜 얼굴에는 대리석처럼 싸늘한 공기 이외에는 이렇다 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웃음 과 등진 「 」 오상억의 얼굴 ── 슬프나 기쁘나 아무런 표정도 지을 줄 모르는 그 너무나 차디찬 오변호사의 얼굴을 쳐다 볼 때마다 희망의 절정에서 절망의 밑바닥으로 툭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은몽의 눈동자였다.

『── 제가 이처럼 오선생의 구호와 동정을 얻고자 하는 것은 미리부터 오 선생과 친분을 가진 주은몽이 아니고 마인 해월의 칼날을 막아낼 아무런 방비수단도 갖지 못한 한개의 불쌍한 여성으로 생각해 주세요. ── 그야 물론 오선생께서 저를 구해줄 이렇다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아니예요. 서울 장안을 뒤집어 봐도, 아니 전 조선을 꺼구로 털어보아도 해월의 칼날을 막아낼 사람은 오직 오선생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일인 삼역 ── 이선배, 김수일, 유불란이 모두 같은 인물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여지없이 지적한 오선생이 아니십니까? 저를, 저를 하루바삐 악마 해월의 마수로부터 구해 주세요!──』

『글쎄올시다 ──』

부처처럼 표정없이 앉아있던 오상억은 그 때 비로서 흥미없는 얼굴을 들었다.

『──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나는 원체 그런 무시무시한 범죄사건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읍니다. 아니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보다도 나에게는 도저히 해월의 칼날을 막아낼 아무런 능력도 없을뿐더러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도리어 내자신의 목숨이 위태하니까 나는 아직 은몽씨의 목숨을 아끼기 보다도 내자신의 생명을 더 사랑하고 있지요. 해월은 도저히 나 같은 자에 패할자는 아닙니다. 그는 실로 무서운……』

어름덩이와도 같이 차디찬 오상억의 대답 ── 단 한마디 동정의 말조차 할 줄 모르는 오상억 ── 은몽은 그가 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너는 죽어라! 너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해월의 칼날에 죽을 것이다!』

하는 무서운 사형선고와도 같이 들리었다.

은몽은 마침내 「테의블」위에 엎디며

『아아!』

하고 한번 긴 한숨을 쉬고는 그만 공포와 절망의 연못 속으로 끝없이 끝없이 빠져 들어가는 듯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그리도 냉정하시담! 태산같이 믿고 자기를 찾아 온 사람에게 어쩌면 한마디 위로의 말조차 없이……』

은몽은 그리고 눈물어린 두 눈을 반짝 쳐들며 쏘는 듯이 오상억의 표정 없는 얼굴을 바라 보았다.

오상억도 은몽을 바라본다. 일초, 오초, 십초, 이십 초 ──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의지와 의지의 투쟁이다.

순간 시선과 시선이 부딪치는 그 첨단(尖端)에서 불꽃처럼 일어나는 정열과 정열! 여인(麗人)의 눈물은 마침내 오상억으로 하여금 공작부인 주은 몽의 탄력있는 손목을 잡게 하였다.

『은몽씨! 나는 이제 방금 은몽씨의 목숨이 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비오듯이 흐르는 창밖의 밤 안개 ──

「커 ─ 텐」 사이로 쏘는 듯이 드려다 보는 수상한 사나의 눈초리 ── 먼듯 하면서도 가까운 것은 젊은 남녀의 마음과 마음이라고, 이것은 연애소설독본(戀愛小說讀本) 제일과에 씌어 있는 말일 것이다.

그처럼 냉정한 오상억 변호사가 이 처럼 열정가로 돌변할 줄 누가 가히 예측 하였으랴.

은몽은 그 순간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듯 싶던 그 어떤 커다란 존재가 다정스러히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는것 같았을 것이다.

『오선생!』

감격에 넘치는 가늘픈 목소리와 함께 쥐면 오그라질 듯한 은몽의 연약한 몸뚱이가 오상억의 품안으로 파고 드는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은몽씨!』

『고마워요! 고마워요!』

여자란 항상 은혜와 애정을 혼동하는 습관을 가진 동물이라고 ── 이것은 또 어느 대중소설가의 전매특허가 되어 있는 문구라던가.

은몽도 바로 그런가보다. 오상억 자신의 목숨보다도 은몽의 생명을 더 한층 아끼겠다는 마치 염시(炎詩)와도 같이 타오르는 오상억의 말을 듣는 순간, 공포와 절망의 바다속으로 떨어졌던 은몽으로서는 기쁘고 고맙고 황송하다기보다도 그는 저도 모르게 이 어여쁜 부처님에게 끝없이 깊고 한없이 높은 애정의 느낌을 느꼈을 것이다.

『은몽씨! 나는 앞으로 은몽씨를 위해서는 어떠한 위험도 깨닫지 못하는 맹목자(盲目者)가 될것 같읍니다. 아아, 요 눈! 용 코! 요 입!……』

그러나 그 처럼 열정적인 오상억의 말과는 정반대로 그의 싸늘한 얼굴에는 하등 이렇다할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은몽은 머리를 오상억의 가슴에 파묻으면서 이젠 저도 저도 아무런 『 , 두려움도 느끼지 않아요! 오선생이 저를 이 처럼…… 저는 영원히 이 품안에서 저 저릿저릿한 해월의 칼날을 피할테야요.

피난소(避難所), 피난소, 이 품안은 나의 피난소!』

어린애 처럼 아양을 일수 잘 부리는 주은몽을 오상억은 비로서 발견했다는 얼굴로 절반은 비웃는 듯이

『은몽씨의 애인 김수일씨 ── 아니 유불란씨가 이 광경을 엿본다면 저윽이 걱정하리라, 분개하리라.』

그러면서 은몽의 몽글몽글한 양어깨를 두손으로 슬그머니 떠밀어 의자에 앉히었다.

은몽은 아무 대답도 없이 눈물 어린 얼굴에 원망의 빛을 띈 눈동자로 오상억의 어여쁜 얼굴을 뚫어질 듯이 쏘아보는 것이다.

김수일과 자기의 사이를 비웃는 것도 같고 질투하는 것도 같은 오상억의 어투를 은몽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다.

은몽은 그 때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리며

『그런데, 오선생의 견해대로 김수일씨와 유불란씨가 정말 같은 인물일까요?』

『글쎄올시다. 그것은 다만 나의 탐정소설적 공상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유불란씨 자신에게 물어 볼 수 밖에 없지요.』

『저 역시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하옇든 은몽씨가 나의 상상을 긍정하신다면 은몽씨는 틀림없이 김수일씨와 교재해 온 것이 아니고 유불란씨와 교제를 해온 것입니다.』

은몽은 오상억의 앞에서 한 번 더 자기자신의 이상야릇한 과거를 뉘우쳐 보이는 것이다.

『하옇든 제 일신을 오선생께 맡겼으니까 저를 이 무서운 처지에서 구해주세요. 저를 구해줄 사람은 오직 오선생뿐이예요.』

『그런 말씀을 유불란씨가 또 들으면 분개하리라. 말씀을 삼가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은몽은 다시 한번 오상억을 빤히 쳐다 보았다.

그 때까지 응접실 들창 밖에서 방안의 광경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엿보고서 있던 수상한 사나이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주은몽과 유불란의 사이를 질투하는 오상억 변호사 ── 그 오상억의 질투를 달갑게 받아 드리는 공작부인 주은몽 ── 뭇 남자는 여인(麗人)의 명모(明眸)를 적시는 이슬과 같은 한방울의 눈물을 끝없이 사랑할 것이며 뭇 여자는 자기의 외로운 일신을 모든 위험으로 부터 탐탁하게 간직해 줄 수 있는 굳센 남성의 품이 무엇보다도 그리울 것이다.

무척 이지적인 듯 하면서도 화화(火花)처럼 타기쉬운 오상억의, 그때 까지 가슴속 깊이 고요히 간직해 두었던 숨은 열정을 눈앞에 발견한 주은몽이다.

상노아이가 한장의 명함을 들고 「도어」를 「노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들어 와.』

오상억은 주은몽의 곁을 떠나 상노아이가 가지고 들어온 명함을 받아 들었다.

『유불란!……』

오상억의 목소리가 저윽이 당황해 한다.

『유불란?』

주은몽의 입술이 바르르 경련한다.

두 사람의 네줄기 시선이 불꽃처럼 허공에서 부딪친다.

두사람은 말이 없다. ── 이윽고 오상억은 자기를 가다듬고 상노아이를 향하였다.

『모셔 드려라.』

『네에 ──』

상노아이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유불란?』

주은몽의 낮으막 하고도 힘있는 중얼거림이었다. 그리고

『김수일?』

하고 의아스런 눈으로 오상억을 쳐다 보았으나 오상억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이선배?』

그래도 함구불언인 오상억이다.

그 때였다.

『도어』가 슬그머니 열리면서 안으로 들어서는 사나이 ── 검은 안경을 쓴 늠름한 체격을 가진 신사 ──

『앗, 수일씨!……』

총소리에 놀란 참새처럼 의자에서 발딱 일어나는 은몽이었다.

사나이는 입을 굳게 다문채 은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손으로 「테이블」 귀를 잡고 간신히 몸을 의지하는 은몽이었다.

세사람은 돌부처 처럼 움직일줄을 모른다. ── 그것은 마치 낡은 필림이 끊기기 바로 직전 그 순간까지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던 「스크린」 위의 인물들이 일순간 발바닥이 얼어붙은 듯 모든 활동을 중지해버리는 그와같은 광경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나이는 한걸음 선뜻 은몽의 앞으로 다가 서면서 은몽씨 무엇보다도 『 , 먼저 이번 부군께서 당하신 무참한 봉변에 대하여 뭐라고 조사조차 여쭐말씀이 없읍니다. 은몽씨의 비탄은 지상으로 여러번 읽었읍니다. ──』

정중한 조사였다.

『수일씨!──』

은몽은 자력에 끌리는 쇠부스러기와도 같이 앞으로 쓰러지려는 상반신을 간신히 뒤로 잡아 당기며

『수일씨는 왜……』

하고 다음말을 잇지 못한 채 그 어떤 격정에 휩쓸려 버리려는 자신을 간신히 붙들면서

『저를 미워하세요?……수일씨는 저를 원망하시겠지요.』

자기가 뱉은 이 한마디는 새로운 감격을 가지고 자기의 고막을 흔드는 것 같았다.

눈물이 포윽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사는 아무 대답도 없다. 은몽은 숙였던 머리를 반짝 들며

『그리고 수일씨가 저 유불란씬줄은……그리고 이선배 ── 모든 것이 꿈 같아요. ……수일씨는 왜 저를 속이시고 ──』

은몽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모든 것이 꿈 ── 악몽 같읍니다! 깊고 깊은 의혹의 「래빈스(迷宮[미궁])」를 걷고 있는 것 같아요. 아아, 수일씨!──』

은몽은 옆에 오상억이 서 있는 것도 잊어버린 듯 돌연

『아아!』

하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외치면서 사나이의 몸뚱이에 매어 달렸다.

『저를 구해 주세요! 저를 이 무서움으로부터 구해 주세요!』

은몽은 사나이의 두팔을 잡아 흔들면서 조금 아까 오상억에게 한말과 똑같은 말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나이는 그 때 은몽의 달삭거리는 양어깨를 한번 다사롭게 쓰다듬었다 놓으면서 이 집 주인 오상억을 향하여 몸을 돌리며

『인사가 늦었읍니다. 유불란이 올시다.』

『오상억입니다.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읍니다. ……앉으시지요.』

권하는대로 유불란은 의자에 걸터 앉으며 은몽씨를 위하여 많은 『 힘을 써 주신다는 말씀, 외람스럽습니다마는 일개 우인으로서 경하하여 마지않습니다.』

『황송한 말씀 듣기에 대단히 거북스럽습니다.』

『── 더구나 △△일보에 발표하신 글을 읽고나서 오형을 존경하는 마음 은근히 깊어 졌읍니다.』

『황송스러운 말씀 거듭 듣기에 죄송스럽습니다.』

두사람의 대화는 지극히 겸손하였다. 그러나 서로서로 상대자의 가슴 속을 꿰뚫어 보고저 하는 눈초리 ── 그 명석한 두뇌로 말미암아 일조일석에 민중의 영웅이 되어 버린 청년 변호사 오상억과 명탐정이란 이름을 세상에 날려오는 노련한 유불란 ── 그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을 궁리하고 있을까?

더구나 천하의 미인 공작부인을 싸고도는 두 사람의 상극된 감정 ── 두 사람 사이에는 금시라도 불꽃과 같은 감정의 부딪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실상 오형의 그 놀라운 상상력에는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읍니다. 따라서 지금 무서운 위험에 빠져있는 은몽씨를 구할 사람은 오직 오형 밖에 없으리라고 ── 이것은 △△일보에 게제된 오형의 글을 읽는 순간 느낀 거짓 없는 나의 질투심의 부르짖음이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단지 나 혼자의 과찬이 아니라, 민중의 부르짖음입니다. 더구나 은 몽씨 자신까지 오형을 믿고 위험을 무릎쓰고 이와같은 심야에 단신 오형을 찾아온 그 외로운 심정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형의 굳센 품안은 은몽씨에게 있어서 가장 탐탁한 피난소일 것입니다. ──』

독자 제군이여. 제군은 아까 안개 내리는 들창 밖에서 이 응접실 안에서 오상억과 주은몽 사이에 벌어졌던 광경을 엿보고 섰던 사나이가 바로 이 유불란이란 것 쯤은 필자의 설명 없이도 가이 짐작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제군은 아직도 기억하리라. 아까 공작부인이 오상억의 품안에 매어 달려서

『이 품안은 나의 피난소, 피난소!』

하고 부르짖던 말을 기억하리라.

유불란은 지금 은몽의 앞에서 그와 똑같은 말을 오상억에게 던졌다.

그러나 제군은 유불란을 야비한 사나이라고 단정하지는 말지어다. 어째 그러냐고? 독자여! 너무 조급하지 말라! 다만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은 하옇든 유불란이 뱉은 이 한마디는 확실히 오상억과 주은몽을 극도로 당황하게 하였다.

유불란씨를 지금까지 『 신사라고 믿었던 나자신을 후회할 뿐입니다.』

하고 오상억은 그때 어디선가 자기들을 엿보고 있었던 유씨를 은근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직업을 오형께서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데서부터 나온 불평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잘 알겠읍니다. 유불란씨는 세상이 인정하는 명탐정이시니까. ──』

점점 격해가는 두사람의 감정이다. 사나이 둘에 계집 하나 ── 그것은 세계에서 나 평화를 멀리하는 한개의 비극의 요소일 것이다.

그 때 상노아이가 한장의 명함을 들고 들어왔다. 임경부였다.

보이지않는 손 임경부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뜻하지 않은 진객을 눈앞에 발견하고

『허허 유불란씨가…… 이게 웬일입니까?』

하고 오상억과 주은몽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래간만입니다 임경부 ──』

정중한 태도로 임경부에게 앉기를 권하는 유불란의 말에

『이거 참 뜻밖입니다…… 이처럼 훌륭하신 명탐정 두 분이 사이좋게 앉아 있을 줄은 참.』

『명탐정 한 분은 또 빼놓으셨군요.』

『하하, 나야 어디……』

『임경부께서는 너무 겸손하셔서 ──』

임경부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그런데 유불란씨는 이번 사건에 관해서 무슨 단서를 잡으셨읍니까?』

『임경부께서 잡지 못한 단서를 제가 어떻게……』

입맛이 쓰다는 임경부의 얼굴이었다.

『그러면 △△일보에 게재된 오상억씨의 글을 읽었읍니까?』

긴장하는 일동 ── 더구나 은몽의 두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난다.

『읽었읍니다.』

『오상억씨의 풍부한 상상력과 치밀한 과학적 두뇌를 선망할 따름입니다.』

『그러면 오상억씨의 글 전체를 인정하신다는 말입니까?』

『네 ── 한점도 사실과 어그러짐이 없었읍니다. 』

『그러면 유불란씨는 대체 무슨 이유……』

그러면서 임경부는 상반신을 바싹 유불란에게로 내밀었다.

대체 어떠한 이유로 『 일인 삼역이라는 ── 마치 탐정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역활을 했는지?…… 직접 유불란씨 자신의 입으로 설명해 보시요.』

그러나 유불란은 묵묵히 앉아있을 뿐이다.

『변명을 하시요. 오상억씨의 글이 지금 어떻게 유불란씨를 불리한 입장에 세웠는가 쯤은 유불란씨 자신이 잘 알 것이라고 믿는바이요.』

그래도 유씨는 은몽의 얼굴만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어째서 화가 김수일이란 가명으로 은몽씨와 교제해 왔으며 어째서 이 선배는 끝끝내 자기의 정체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이 모든 의문에 대하여 유불란씨는 어디까지든 변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

『그렇습니다. 어디까지든지 나자신을 변명하지 않으면 안될 지극히 불리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통절히 느끼고 있는 것 만은 사실입니다. ── 그러나 나의 변명이 얼마나 임경부를 만족시킬런지, 다만 그것만이 마음에 걸려서……. 오늘밤 임경부를 먼저 찾아뵙지 않고 오상억씨를 찾아온 것도 실상은 나의 변명을 오상억씨라면 혹시 이해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였읍니다.』

임경부는 입가에 가벼운 조소의 빛을 띄우며

『하옇든 이야길 하여 보시지요. 이해를 하던 못하던 ──』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임경부의 표정이다.

『── 무엇보다 먼저 내가 왜 김수일이란 가명으로 은몽씨와 교제를 했는가? 이 점을 설명하려면 탐정 유불란이란 사람의 취미, 일상생활 기타 모든 점을 종합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입니다. 오상억씨도 이미 그 글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나의 일상생활 ── 더구나 나의 탐정적 취미 ── 나는 나 자신이면서도 때때로 나 이외의 인물을 모방하는데 무한한 흥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다만 인물의 외관뿐만 아니라 그 인물의 내적 생활(內的 生活) ── 성격이라든가, 취미라든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뭐 사람이 지니고 있는 분위기까지도 모방하지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자연 발생적 이중 인격자라면 나는 인위적인 이중 인격자입니다. ── 그렇습니다.

내가 미모의 무희, 공작부인과 ××개인전람회에서 서로 알게 된 것은 바로 내가 화가로서의 생활을 얼마 동안 계속하고서 결심한 그 즈음이었읍니다.

누구한테도 그러하듯 나는 완전한 한개의 화가 김수일로서 나자신을 공작 부인께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

유불란은 잠깐 말을 멈추고 어떻게 설명하면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 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계속하였다.

『── 물론 처음엔 그저 가벼운 의미에서 잠깐 만났다 곧 헤어지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서 공작부인을 대하였읍니다마는 ──」

하고 얼굴을 주은몽에게로 돌리며 임경부야 듣건말건, 은몽씨 당신 좀 내 말을 똑똑히 들어주시오, 하는 투로

『── 그러나 나는 얼마지나 실로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 세상의 애인( ) 공작부인 주은몽씨가 나를 따르고 나를 사모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읍니다. 은몽씨!』

유불란은 한층 어조를 높여서

『당시의 나로서 이 얼마나 영광이었겠읍니까! 그러나 한가지 슬픈 사실 ── 그것은 그리 고상하지 못한 직업을 가진 탐정 유불란에게 바치는 애정이 아니고 화가 김수일 ── 예술가적 아름다운 공상과 예술가적 사색과 정열과 분위기를 가진 순진하고도 쾌활한 청년화가 김수일이에게 바치는 애정인 줄을 깨달은 나의 슬픔과 낙망을 은몽씨, 당신은 감히 짐작할 수 있겠읍니까? 바늘 끝처럼 예민한 은몽씨의 예술가적 기질은 화가 김수일과 맞을지언정 탐정 유불란과는 결코 맞을리 없으리라고 이것은 단지 나자신의 추측이 아니라 어떤날 우리들의 화제가 우연히도 탐정소설에 언급하였을 때 은 몽씨, 당신은 무엇이라 말씀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 나는 탐정소설을 즐겨 읽지마는 그것은 소설에 나오는 탐정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탐정에게 쫓겨다니는 범죄자의 말못할 사정, 호소할 곳 없는 신세 ── 온 세상을 적으로 삼고 싸우는 그 저릿저릿한 공포와 쓸쓸한 심정을 생각할 때 치밀한 두뇌와 민활한 수완을 가진 소위 명탐정이란 존재를 은몽씨는 그 예술가적 사색을 가지고 얼마나 경멸했으며 얼마나 비웃었읍니까? 나는 그때처럼 자기의 직업에 대해서 슬퍼해 본 적은 없었지요. 이것이 즉 나로 하여금 끝끝내 화가 김수일로서의 행동을 취하는 한 중대한 원인일 것입니다.

──』

사람들은 말이 없다.

『── 그래서 나는 태평동 나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린정 「중앙 ‧ 아파 ─ 트」에다 김수일의 숙소를 정했던 것입니다. 은몽씨가 나의 사진을 한 장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임경부께서는 적지않게 수상히 생각 하였겠읍니다마는 그것도 역시 어디까지든지 나 자신을 감추려는 데서 한장의 사진도 은몽씨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

하고 그 때까지 묵묵히 귀를 기우리고 앉았던 임경부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유불란씨는 또 이선배란 이름을 가지고 가장무도회에 나타났는지 그 점을 정확히 설명해 보시요.』

그것도 역시 같은 동기에서 『 부터였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나보다도 오상억씨의 글이 더 정확히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파트너」

백영호씨에 대한 의리 때문에 모든 것을 저바리고 그리로 시집가려는 공작 부인에게 최후의 의향을 물어볼 생각이었지요.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김수일이란 얼굴을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무도회에는 유불란과 김수일의 얼굴이 같다는 것을 공작부인 앞에서 증명할 사람이 있을 것을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로는 예의 이중인격 취미 ── 더구나 그것이 한국에서는 처음보는 가장 무도회라는데 자극을 받아 그런 장소에 어울릴 만한 가장을 시켜서 이번에는 놀라운 이 선배란 인물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다른 사람은 혹시 몰랐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지만, 은몽씨가 이선배의 가장을 몰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은몽씨는 이 선배를 유불란씨인줄은 몰랐을 망정 그것이 김수일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읍니다. 은몽씨 어떻습니까?』

하고 은몽의 얼굴을 쏘는 듯이 쳐다본 것은 오상억 변호사였다.

은몽은 잠자코 오상억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은몽씨? 김수일과 이선배가 동일한 인물이란 것을 은 몽씨만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으리라고 믿는데……』

하고 재차 묻는 오상억의 말에 은몽은 또 다시 머리를 숙이며

『저도 처음엔 몰랐어요. 그러나 화장실에서 침실까지 그이에게 안기워 올 때 저의 코를 찌른 이상한 몸냄새가 수일씨의 것인줄은 얼마 지나서야 생각이 났어요. 그러나 도저히 제입으로 이선배와 김수일씨가 같은 인물이란 말은 어떻게……』

『그러면 김수일씨를 위해서 아직까지 잠자코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려?』

임경부의 불만이었다.

그러나 은몽이 아무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임경부는 유불란을 향하여

『그러면 유불란씨가 ── 아니 이선배가 무도회장을 탈출하여 끝끝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도 오상억씨의 추측과 같이 유불란과 이선배,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유불란과 김수일 이가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한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오상억씨의 상상과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읍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두겠읍니다. 내가 그 처럼 경찰의 맹렬한 추격을 받아 가면서 까지 끝끝내 자취를 감추었나는 것에는, 그리고 지금까지 일인삼역이라는 사실을 숨겨두고 자한 이면에는 대단히 외람스러운 수작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설명해 드리지 못하는 무레를 용서해 주십시요.』

『음 ──』

하고 임경부는 한번 신음한 후에

『그러면 거기에는 무슨 중대한 이유가 숨어 있다는 말씀이지요?』

『아니올시다. 숨어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그럼 무슨 단서를 잡았다는 말입니까.』

『아니올시다. 잡을 것 같아서 하는 말씀입니다.』

『음 ── 하옇든 사건이 이만큼이라도 진전을 본 것은 오상억 변호사의 공로라는 사실과 사건을 이처럼 복잡하게 하고 경찰당국과 일반 민중을 이처럼 속여온 책임은 유불란씨에게 있다는 것만은 기억해 두셔야 겠읍니다.』

『네 잘 알아 들었읍니다. 거기 대한 책임은 이 사건을 하루바삐 해결하므로써 당국과 아울러 전 한국 민중에게 사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

유불란은 그 때 오상억과 은몽을 한번씩 쳐다본 후에

『그러나 오상억이라는 호적수(好敵手)가 본격적으로 사건에 손을 댄다면…… 임경부, 정신을 똑똑히 차려야 합니다. 이러다가는 결국 사건의 공로자라는 지위는 임세훈 경부나 유불란 탐정을 무시하고 오변호사께로 옮아갈 것입니다. ── 더구나 공작부인 주은몽을 위해서는 전 생명을 바쳐서라도 발을 벗고 나서겠다는 것이 오상억씨의 의향인 듯 싶은 지금에……』

동서고금을 통하여 명작에 나오는 명탐정들은 거의 다 연애를 모르는 글자 그대로의 목석같고 기계같은 초인적(超人的)인물이다.

그러나 유불란 탐정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보통 사람과 같이 연애할 줄 알고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질투할 줄 아는 말하자면 피가 도는 인간이다.

허나 이처럼 노골적으로 은몽과 오상억 사이에 관심을 두는 것은 처음이다.

『유불란씨는 아까부터 나와 은몽씨의 사이를 너무 과도히 신경을 쓰시는 모양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 교양없는 사람들의 취할 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을 좀 삼가시는게 어떻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유불란씨의 답변만을 듣고 있을 여유를 갖지 못했다.

바로 들창을 등지고 앉았던 은몽이 무엇에 놀랐는지 「흑!」하고 숨을 드려 마시며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휙하고 뒤를 돌아다본 때문이다.

흐느적 흐느적 움직이는 「커 ─ 텐」!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커 ─ 텐」이 물결처럼 흐느적거리지를 않는가?

사람들은 불현 듯 그 어떤 불길한 예감에 온몸이 으스스함을 느꼈다.

『바람도 없는데 「커 ─ 텐」이 왜 움직일까?』

그런 의혹이 일시에 사람들의 가슴을 꽉 부여잡는다.

그 순간,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유불란 탐정이

『누구냐?』

하고 고함을 치면서 비조처럼 재빠른 솜씨로 「커 ─ 텐」을 헤치고 들창을 휙하니 넘어 나갔다.

들창 밖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의 담벽이다.

오상억과 임경부도 들창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냐?』

정원을 헤매는 유탐정의 거치른 목소리가 안개를 뚫고 들어온다.

그 때였다.

『앗!』

하고 외치는 은몽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오상억과 임경부의 등뒤에서 떨려졌다.

『왜 그러시우?』

오상억과 임경부가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일시에 뒤를 돌아다 보았을 때

『붉은 봉투가 ── 그 놈의 붉은 봉투가 ──』

하고 은몽은 그 때까지 자기가 걸터 앉았던 의자의 등을 가리켰다.

『붉은 봉투?』

오상억과 임경부는 그렇게 반문하면서 은몽이 가르치는 곳을 바라 보았다.

『아, 봉투다! 빨간 봉투로구나!』

『해월이다! 해월의 것이다!』

한장의 주홍색 봉투가 조그마한 단도와 함께 의자의 등 ── 심노색 「비로 ─ 드」에 박혀 있지 않는가!

해월의 경고문(警告文)! 복수귀 해월의 무서운 경고문이다!

오상억은 곧 칼과 함께 주홍색 봉투를 뽑았다.

고슴도치 처럼 몸을 오그리고 바들바들 떠는 주은몽 ──

『아아 무서워!…… 무언가 등뒤에서 사람의 숨결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다 보니 「커 ─ 텐」이 그처럼 흐느적 흐느적……』

새파랗게 변색한 은몽의 입술이었다.

오상억은 부리나케 봉투를 떼었다.

은몽!

내가 가장 미워하고 내가 가장 귀애하는 은몽! 가장 미워하기 때문에 너를 죽이려고 결심한 나요, 가장 귀애하기 때문에 아직도 죽이지 못하고 있는 나로다. 그러나 은몽!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방금 오상억의 품안에서 뭐라고 아양을 부렸는가? 『이 품안이 나의 피난소, 피난소! 』하고 너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너의 남편 백영호가 죽은지 오늘까지 몇일인고?…… 요부!

요부! 은몽, 너는 어렸을 때부터 요부였다. 그러나 결국 너는 나를 두려워 하지 않고는 못견딜 것이다. 네가 그 처럼 영원한 보금자리로 믿고 있는 오상억의 품안이 그 얼마나 힘없는 것인가를 알 때가 오리라.

그러면 제 이차의 참극의 주인공은 누구냐? 누구냐?…… 복수귀 해월

『음!』

오상억은 편지에서 눈을 떼었다. 무서운 얼굴이다.

『나를 죽이겠다고?……』

반항심에 타오르는 듯한 오상억의 얼굴을 은몽은 미안한 듯이 바라다본다.

두사람의 시선과 시선이 그 어떤 굳은 맹세를 짓는 것 같았다.

그 때 정원으로 해월을 따라 나갔던 유불란이 돌아왔으나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짙은 안개속 ── 해월이가 어느 구석에 숨었는지 알 길이 만무하다.

유불란도 편지를 읽었다. 아까 자기가 들창 밖에서 방안을 엿보고 있을 때 해월이도 어느 구석에서 자기와 같이 방안을 드려다 보고 있었던가? ──

『대담한 놈이다! 무서운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유씨의 이 한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그것은 유씨 자신만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