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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罪惡(죄악)의 실마리[편집]

면장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 ×천읍에는 대대손손이 서로 원수같이 지내오는 두 가문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백준모의 조상 백씨였고 또 하나는 문제에 사진속의 처녀 선조인 엄(嚴)씨였다.

백씨와 엄씨가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사이가 나빴는지, 그것은 면장도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추측컨댄 옛날부터 양가는 문벌 다툼을 무척 세웠던 것만은 사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백준모의 조부 때에 이르러서 백씨와 엄씨 사이에는 실로 입에 담아 이야기할수 없는 그 어떤 무서운 사연(邪戀) 사건으로 말미암아 백 씨가 엄씨를 죽였다던가 엄씨 편에서 백씨 문중의 한 사람을 해쳤다던가 하는 ─ 하옇든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어도 그러한 종류의 사정으로 인하여 백 씨와 엄씨는 마치 개와 원숭이 처럼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지내었다고 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말하면 양가의 젊은이들이 혹시 산골짜기 같은데서 서로 만나는 때가 있게 되면 그들은 입술에 거품을 품어 가면서 제각기 제 조상이 훌륭하다는 것을 다투게 되어 마침내는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다가 결국 이론으로 해결 짓지 못하는 것은 힘과 힘을 다하고 생명과 생명을 내놓아서 승부를 맺곤 하였다고─ 이것은 누구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인지, 그 출처는 명확치 않으나 ×천읍의 노인네들은 대개가 다 그만한 것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씨나 엄씨는 모두 자손이 바른 집안으로서 백씨네만 하더라도 아우인 백창모가 백영호를 낳고 죽어 버렸고 형인 백준모의 외아들 백문호가 역시 이십 사 오 세 때 대동강에 빠져 죽었으니까, 백씨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은 백준모였고 백씨를 길이길이 후세에 이어갈 사람은 단지 백준모의 조카아들 백영호 한사람 뿐이었다.

한편 엄씨 가문에는 더 한층 손이 귀했다.

백준모와 같은 세대의 인물로서 엄도현(嚴道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엄도현으로 말하면 백준모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으로서 엄씨를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엄씨를 이어갈만한 사내자식이 없었다. 청렴한 선비로서 일생을 보낸 엄도현은 비록 자기의 대를 이을만한 손이 없다손 치더라도 소실을 두어 사내손을 보려는 그러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전혀 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대를 이을 사내는 아니었을망정 귀여운 딸자식 하나가 그의 쓸쓸한 여생을 위로 하였던 것이다.

그 딸자식의 이름을 여분(汝粉)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분이가 열 여섯살 되던 해 가을, 아버지 엄도현은 귀여운 딸과 정숙한 아내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 여분이야말로 문제의 사진속 처녀 그 사람이었읍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오상억 변호사는

『후우─』

하고 긴 한숨을 지으며 일동의 긴장한 얼굴을 둘러보았다.

『엣?─』

하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사진속의 처녀가 그 여분이라는 사람이예요?』

『그렇습니다. 엄도현의 무남독녀 엄여분이가 바로 이 사진 속의 인물입니다.』

『그러면 해월이가 어떻게 그 사진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는 주은몽─

『그리고 백영호씨는 또 어떻게 그 사진을……』

하고 연거퍼 묻는 임경부─

『그리고 황세민씨는 또 어떻게 엄도현의 딸 엄여분의 사진을 가졌는가?……』

이것은 유불란 탐정이 마음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묻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유불란의 , 머리에는 황세민이란 사람의 윤곽이 점점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엄도현의 외딸 여분이가 바로 저 문제의 사진 속 처녀라는 오상억 변호사의 말에

『그럼, 엄 여분이란 사람이 현재도 ×천 읍에서 살고 있어요?』

하고 주은몽이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오변호사를 쳐다 보았다.

『네 그것이─』

오상억은 점점 망설이는 모양이더니

『지금으로부터 근 삼십 년 전─ 그가 바로 열 아홉살 때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씨와 견원(犬猿)의 적이던 엄씨네 댁는 거기서 그만 끊어져 버렸다는 말씁입니까?』

하고 묻는 것은 임경부였다.

『그렇지요. 아버지 엄도현도 죽고 딸 여분이도 죽었으니까요.』

『그럼 오선생, 해월이와 여분이란 사람과는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에요?』

하는 은몽의 물음과

『그리고 백영호씨와 여분이와는 또 어떤 관계가 있읍니까?』

하는 임경부의 질문은 거의 동시였다.

오상억은 거기서 다음 말 머리를 찾으려는 듯이 잠깐 동안 주저하다가

『하옇든, 제 이야기를 좀 찬찬히 들어 주시요. 거기에는 실로 무서운 죄악의 실마리가 숨어 있답니다.』

하고 오상억은 그 때 방안을 한번 휘 둘러 보면서 자기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해월의 잔인한 눈초리를 무서워 하였다.

그러나 뚜겅을 덮은 모말과 같은 출입구란 출입구는 모두 잠그어 버린 방안 ─ 그가 기체(氣體)로 변하는 재주를 가졌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못한 이상 해월은 도저히 오상억의 이야기를 조지(阻止)할 수는 통 없었다.

『면장은 대략 이상과 같은 사실을 나에게 이야기 하였지요. 여분이가 어떻게 죽었으며 여분이와 백영호씨의 관계가 어떠했는가?……그런 자세한 사정은 통 모르는 것이었읍니다.

그것도 그럴법한 것이 여분이가 죽은 것은 고향인 ×천읍이 아니고 어딘가 타 곳에 나가서 죽었다는 사망계(死亡屆)를 수리한 기억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면장은 면서기 견습생으로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요. ─ 그래 그 때의 수리한 사망계를 한시간 이상이나 걸려서 찾아보았더니 사망지(死亡地)는 평양 수옥리(水玉里) ××번지로 되어 있었읍니다. ─ 귀여운 딸 여분이가 죽자, 여분이 어머니도 고향에서 살 맛이 없었던지 얼마되지 않는 가재를 정리해 가지고 ×천읍을 떠났다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면 여분이의 사망지인 평양 수옥리를 탐지해 보셨읍니까?』

하는 임경부의 말에

『네, 나도 처음에는 그럴 도리 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았지요. 그러나 일은 무척 순조롭게 진행 되었읍니다. 나는 그 때 그 여분의 집안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만 면장은 저번 백남수씨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엄씨네 집안 사정을 잘 알 사람은 당시 엄씨댁에서 절가(머슴)살이를 하던 홍(洪)서방 내외일 것이라고요.─』

면장의 이야기를 들으면 홍서방은 지금 오십을 조금 넘어선 중늙은이인데 여분이 모친이 ×천읍을 떠난 후, 그도 어디론가 이리저리 방랑하다가 본처가 죽어서, 지금으로부터 삼년전에 젊은 계집을 하나 데리고 ×천읍으로 돌아와서 술장사를 차려 놓았는데, 그가 술만 한잔 얼근하면 항상 하는 말이, 이 세상은 악한 사람이라야 살아 나간다고 ─ 그리고 그는 어디 금광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석달에 한번, 혹은 반 년에 한번씩 금광엘 갔다오면 그의 호주머니에는 시퍼런 백원짜리가 여남은 장, 많을 때는 이 삼십 장씩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부리나케 홍서방네 술집을 찾아 갔읍니다.─』

오상억 변호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리하여 나는 삼십 년 전 엄씨댁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홍서방네 술집을 찾아갔읍니다. 그 즈음부터 나는 나의 신변에 누군지는 똑똑히 알 수 없으나 나를 항상 감시하고 있는, 그 어떤 눈초리를 느꼈읍니다. 나를 따르는 것 같은 인기척에 불현 듯 뒤를 돌아다보곤 하였읍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읍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이 살인귀 해월이었지요. 그래 내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는 느낌을 항상 느끼면서 홍서방을 찾은 것은 그날 오후 다섯시 경이었읍니다.─』

홍서방네 술집은 조그마한 개울을 끼고 바로 다릿목 옆에 있었다. 기와집 이층으로서 「나까이」가 다섯명이나 되는 것을 보니 홍서방의 호주머니가 예상 외로 충실한 모양이었다.

아랫층 온돌방에는 주정뱅이 술꾼들이 「나까이」들을 가지고 희롱이 한창이다.

서울서 왔다는 말을 듣고 그의 젊은 아내는 후다딱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어떻게 찾아왔느냐는 한마디 물음조차 없이 부리나케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호잠뱅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홍서방이 부채질을 연거퍼 하면서 몸이 무겁다는 듯이 좁은 층층대를 내려오는 것이었다.

웬 여석이 또 찾아왔느냐는 『 , 극히 귀찮아하는 표정이었읍니다.─ 이윽고 나와 홍서방은 이층 개울에 면한 시원한 방에 마주 앉았읍니다. 이층에는 그의 젊은 아내와 그의 전처 딸이라는, 보기에 스물 대 여섯 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다가 홍서방의 눈짓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 버렸읍니다.

듣건데 그의 전처 딸은 근 이십년 동안이나 어떤 곡마단(曲馬團)에 따라 다니다가 바로 몇달 전에 돌아왔다는 데, 보기에 상당한 미인이었읍니다. 그러나 불행이도 벙어리였읍니다. 그것은 하옇든─』

하고 오상억은 이제부터가 이야기의 중요한 줄거리라는 어투로 일동을 둘러보면서 다탄 담배 꽁초를 재털이에 던졌다.

『홍서방과 같은 악당도 세상엔 드물겁니다. 아무리 공교로운 말을 써서 달래보아도 글쎄올시다, 글쎄 그런 자세한 사정은 모른대도 그럽네다 그려 ─ 하는 단지 그 몇 마디를 가지고 나의 물음을 끝끝내 회피하고자 하는 능청스러운 자였지요. 그는 단지 내가 면장한테서 들은 정도의 이야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마치 칼로 베듯이 딱 잡아떼는 것이었읍니다. 그러한 홍서방과 약 세시간 동안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계속하다가 나는 마침내 그의 앞에 시퍼런 백원짜리를 한장 꺼내 놓았지요. 그러나 홍서방은 눈끝에도 차지 않는다는 듯이, 원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백원짜리가 제 아무리 신통한 힘을 가졌기로 모르는 사실을 알게 하는 재주야 있겠읍니까?

원 ─ 하고 담배만 퍽퍽 피우지요. 그래 이번에는 두 장을 더 꺼냈읍니다.

그러나 역시 빙글빙글 웃기만 하길래 다시 다섯장을 꺼내서 도합 팔백원을 그의 앞에 쭉 늘어놓았더니만 그때야 비로소 비굴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면서, 마저 채워주시지요, 하는 것이었읍니다. ─』

거기까지 이야기한 오상억은 신이 나는 듯

『이리하여 결국 천원을 받아 쥐고야 비로소 홍서방은 사실 말하자면 열 장도 눅은(싼)셈이지요. 히히 ─ 하고 그 무르익은 대추처럼 시뻘건 코구멍으로 한번 웃어댄 후에 나의 귀를 잡아 당겨서 자기의 입에다 갔다대면서, 부부암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나 나 혼자니까요 히히 ─ 하면서 자기 아내를 불러 술상을 차려다 놓고 다음과 같은 기나 긴, 그리고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 하였읍니다. ─』

일동의 얼굴은 긴장할대로 긴장해 졌고 무더운 여름밤은 밀폐한 방안을 삶드시 깊어간다.

독자제군이여 이제부터 ! 백씨 가문과 엄씨 가문사이에 벌어진 아름다운

「로맨스」인 동시에 무서운 죄악의 실마리를 이야기하고자, 무대는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으로 기어 올라가야만 한다.

그것은 물론 홍서방의 입으로부터 아무런 질서도 없이 잡연(雜然)히 흘러 나온 이야기를 오상억 변호사가 자기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혹은 부언하고 혹은 생략하여 다음과 같은 하나의 질서있는 「로맨스」를 구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오리무중 잠겨 있던 사건의 중요한 인물인 살인귀 해월의 기구한 과거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듯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었다.

제군이여! 제군은 벌써 면장의 이야기를 통하여 백씨와 엄씨의 두 가문이 옛날부터 피치못할 하나의 숙명적 원한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러나 거기 대해서는 이렇다할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었으나, 듣건대 백씨의 조상 한사람이 엄씨의 조상 한 사람에게 실로 극악무도한 모욕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백준모의 조상 한사람이 시집가는 날 ─ 그것은 보슬비가 내리는 어떤 늦은 봄이다. ─ 엄도현의 조상 한사람이 불한당과 작패하여 시집가는 도중에서 신부를 약탈해 가지고 산골짜기로 끌고가서 능욕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양가에서는 실로 저릿저릿한 유혈의 참극이 일어났다.

신부를 능욕한 엄도현의 조상은 백씨문중의 북수의 습격을 받아 무참히 살해를 당하였을뿐만 아니라, 원한에 찬 복수의 칼날은 그의 사지를 오리오리 찢어서 행길가 나무가지에 걸어놓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조소와 증오를 받게 하고 시체는 굶주린 까마귀들의 양식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피의 역사를 가진 백씨와 엄씨가 대대손손이 서로서로를 견원지적으로 삼아온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백준모는 아들 문호와 조카아들 영호를 사람없는 방에 불러다 놓고 그러한 과거를 가진 자기네 조상의 피와 능욕의 역사를 이야기한 후에

『엄도현은 우리의 적이다! 원수다!』

하고 부르짖곤 하였다.

『엄도현을 학자니 뭐니 하면서 사람들은 가장 청렴한 선비로 떠 받고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의 피에는 그와 같은 더러운 수성(獸性)이 섞여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엄도현이가 젠척하고 잘난척하고 나를 가르쳐 인색한 고리대금업자의 아들이라고 멸시하지만 아무리 고리대금업이라도 내 아버지 너의 할아버지 ─ 몸에는 그러한 더러운 핏줄기는 섞여 있지 않아!

엄도현이 제깐놈이 뭐가 잘났다고?……』

그럴 때 백준모의 이야기를 옳다여기고 조상이 받은 모욕을 자기 자신의 모욕처럼 분해하고 쓰라려하는 것은 그의 조카아들 영호였다.

『큰아버지! 큰아버지는 왜 엄가에게 복수를 안하십니까?』

타오르듯 하는 조카아들 영호의 눈동자를 귀엾다는 듯 바라보면서

『시대가 다르다. 옛날과는 달라서 힘과 힘, 몽뚱이와 몽뚱이를 가지고 싸울 수는 없들 때다. 너의 조부께서 고리대금까지 하여가면서 축재(蓄財)에 힘을 쓴 것도 청빈(淸貧)을 유일한 재산으로 뻗히는 엄씨 일가에 대한 ─ 말하자면 시대적 복수에서였다. 그러니까…』

『그러나 큰아버지! 그건 너무 소극적인 복수가 아니예요? 좀 더 적극적으로 ─』

하고 삼촌의 그 시들어가는 복수심을 항상 자극시키는 영호였다.

백준모는 이처럼 타오르기 쉬운 영호를 무척 사랑하였다. 자기와 같은 주견, 같은 감정을 가지고 엄가를 욕설하는 조카아들을 무척 귀여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준모의 아들 문호는 한마디의 동의도 표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자기 아버지 백준모와 자기의 사촌동생 영호가 그 처럼 엄씨 일가를 아무리 미워하고 욕을 하여도 문호는 아직 단 한번도 그들에 가담해본 적이 없었다.

문호는 언제든지 그들의 주고받는 흥분한 대화를 안색을 가다듬고 극히 엄숙한 태도로 잠자코 듣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 백준모는 그 너무나 감동할줄 모르는 자기 아들의 마음속을 헤아릴 바 없어서

『너는 그대 조상이 받은 모욕을 조금도 쓰라리다 생각하지 않느냐?』

고 물을 때가 있어도 문호의 굳게 다문 입술은 통 열릴출을 몰랐다.

『그러면 네 애비의 생각을 그르다 하느냐?』

아버지의 음성은 차차 노기를 품고 높아갔다. 그래도 대답이 없는 문호였다.

『그러면 너는 엄씨 조상의 그 짐승 같은 행동을 옳다하느냐?』

그러나 아무리 준렬한 아버지의 다짐이 있을지라도 문호는 엄숙한 얼굴로 머리를 푹 숙으리고 입술을 꽉 깨물을 뿐이다.

아버지 백준모는 마침내 참다 못해

『에익, 고약한 놈 같으니!』

하고 꿰엑 소리를 치며

『애비의 말이 아무리 그르다해도 ─ 아니 설사 그르면 그르다고 자식으로서의 간언이 있을 법이지, 네 놈처럼 애비의 말을 처음부터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담뱃대로 성급히 놋재털이를 두드리면서

『이놈! 좀 얘길 해보아라. 쓰다달다는 말이 없이 네가 그 처럼 잠자코 있는데는 필경 이 애비의 말이 네 귀에 거슬린다는 뜻일게다. 이놈, 그러면 그렇다고 바른대로 말을 못해? 비겁하기 짝이없는 놈 같으니!』

노기가 중천한 삼촌을 만류하면서 그 때까지 옆에 조용히 앉았던 영호가 문호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문호형님, 형님의 변명을 듣고자하는 아버님의 뜻이 이같이 간절하거늘 형님은 어째서 그렇게 대답이 없으십니까? 형님도 백씨의 혈육을 받으셨다면 아버님의 그 천 만번 당연한 말씀이 형님의 귀에 거슬릴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하고 이번에는 목소리를 좀 낮추어 문호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 듯이 ─ 그러나 삼촌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음성으로

『형님, 이번 기회에 그만 형님의 그 어려운 사정을 부친께 이야기해 보시시지요. ─』

하는 말에 문호는 놀라며

『뭐, 그럼 자네는 벌써…』

하고 숙으렸던 머리를 번쩍 들었다.

『네에 형님의 비밀을 저는 모두─』

하고 「비밀」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삼촌 백준모가 좀 들으라는 영호의 가장 자연스러운 꾀였던 것이다.

『뭐, 비밀? 문호가 무슨 비밀을 가졌어?』

하고 왈칵 달려드는 백준모에게 문호는 정중히 읍하면서

『아버지, 불초 문호를 용서하십시요!』

하는 단지 그것 한마디를 남겨놓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놈! 나가긴 어딜 나가! 이놈!』

하고 아들을 쫓아 나가려는 삼촌을 만류한 영호는 낮으나마 엄숙한 목소리로

『큰아버지, 면목 없소이다. 선조에 대하여 뵈일 낯이 없소이다!』

『뭐? 선조에 뵐 낯이 없다?』

『네에, 벌써부터 여쭙고자 하였으나─』

『아니, 대관절 문호가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하고 성급한 백준모는 조카아들 영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영호는 숨을 가라앉히려는 듯이 잠깐 동안 수심이 만면한 얼굴로 묵묵히 앉아있다가 마침내 머리를 들었다.

『큰 아버지, 문호 형님이 엄여분과─』

하고 말끝도 채 맺기 전에

『뭐, 문호가?』

하고 외치면서 백준모는 눈앞이 아찔해짐을 깨닫고 방바닥에 펄썩 주저 앉았다.

『문호가 엄여분과 대체 어찌 되었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