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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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次[제일차]의 慘劇[참극][편집]

무대는 다시 삼청동 백영호씨의 저택으로 옮아간다.

때는 오후 여덟시 전후…… 삼청동공원 일대에는 짙은 어둠의 장막이 흐르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시가지에는 오색의 「일류미네―숀」이 굶주린 요부의 눈동자처럼 「윙크」를 한다.

천태만상의 죄악을 한아름 품고 지금 마도(魔都) 대경성의 밤은 점점 깊어 가고 있다.

백영호씨는 지금 자기 「아뜨리에」서 「여인군상(人群像女)」이란 등신대의 석고상을 이모저모로 바라보면서

『이만 했으면!』

하고 가장 자신있는 어조로 중얼거려 보았다.

지금 거의 완성에 가까운 「여인군상」은 오는 유월 초순에 열릴 제일 미술전람회에 출품할 셈으로 작년 초가을부터 손을댄 대작이다.

각각 「포 ― 즈」를 달리한 세사람의 벌거벗은 여인이 그 어떤 진리의 광망을 발견한 듯 멀 ― 리 천공을 바라보면서 서 있는, 말하자면 백영호씨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가장 정성을 들인 대작이었다.

백영호씨는 지금 이만했으면 제일 미술전람회 심사원으로서의 면목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지간히 만족한 얼굴로 「소파」에 걸터앉아 「담배·케이스」에서 담배를 한대 꺼내 붙였다.

그때 옆방 침실로 통하는 중문이 슬그머니 열리며 분홍빛 「나이트·까운」입은 주은몽이 들어오면서

『다들 어디 갔어요? 혼자 있을라니까 무서워서……』

하고 남편 백영호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무섭긴 뭐가 무섭소. 이처럼 내가 옆방에서 당신을 지키고 있는데 ── 남수는 조금 아까 산보를 나가고 정란은……아 정란은 삼층에 있지 않소?

「피아노」소리가 들리는군 ——』

백영호씨와 은몽은 귀를 기우렸다. 멀리서 「피아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옇든 집안이 너무 음침해서 못 쓰겠소. 이젠 몸도 어지간히 회복 되었으니 우리 신혼 여행겸 어디 산수 좋은데로 여행이나 떠납시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기분을 전환시켜야지. ── 우리 내일이라도 떠납시다. 금강산은 어때요?』

백영호씨는 그리고 아내의 어깨에다 손을 올려 놓으면서 꼭 껴안아 본다.

그런데 은몽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안돼요. 금강산은 안돼요.』

『왜요?』

『금강산은 그 놈의 고향 ── 그 놈이 소년시절을 보낸 백도사가 거기 있지 않아요? 그 놈은 필경 우리를 따라올 것입니다. ……아니 어디를 가든지 그 놈은 우리들의 신변을 헤매고 있을 거에요.』

은몽은 그리고 남편 품안에 머리를 부비며 파고 들었다. 백영호씨는 애처러운 듯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즈음 백남수는 컴컴한 삼청동 「풀」옆을 걷고 있었다. 그는 저녁마다 한번씩 꼭 자기집 주위를 휘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저께 밤, 임경부가 담장 밑에서 보았다고 하는 수상한 그림자의 정체를 붙잡을 의향이다.

그러나 가다가다 하나씩 서 있는 전등불을 통하여 아무리 살펴보아도 수상한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삼층에서 치는 정란의 「피아노」 소리만이 한적한 공원일대의 적막을 고요히 깨뜨릴 뿐이었다.

거기는 투쟁도 없고 공포도 없었다. 죄악의 실마리라고는 바늘 끝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정란의 「피아노」소리가 무한의 평화를 싣고 어둑어둑한

「풀」위를 스치고 날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 아아 그것은 평화를 그리워하는 백남수의 순간적 감상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가 희미한 전등불이 내리는 정문을 향하여 걷고 있던 그 찰라,

『아 앗!』

하고 부르짖는 여자의 목소리가 안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것은 틀림없는 주은몽의 공포에 찬 목소리가 아닌가!

백남수는 그 순간, 우두커니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우렸다. 온몸이 으쓱함을 깨달았다.

『해월이다!』

『그렇게 외치면서 부리나케 정문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러나 한 발자욱 정문안으로 드려놓은 순간, 이번에는 남수가

『악!』

하고 고함을 치면서 우둑커니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그것은 너무나 무서운 광경이었다. 몸서리쳐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지금 백남수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보라! 지금 「아뜨리에」의 「커텐」에 비친 두개의 그림자를 보라!

하나는 전신에 치렁치렁한 기나긴 「만또」같은 것을 두른 괴한(怪滿)……

두말도 할것 없이 백도사의 도승 복수귀 해월이의 단도를 번쩍 든 손그림자요 또 하나는 그 단도 밑에서 ,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아닌가!

『해월이다! 해월이다! 이놈』

하고 고함치는 백영호씨

『아 앗……사람 살려요!』

하고 부르짖는 은몽의 목소리 그러나 백남수가 멈추었던 발자욱을 다시 떼어 넒은 정원을 나는듯이 달음박질 하여서 정원 한복판까지 다달았을 때는 벌써

『으 음……』

하고 신음하면서 마치 짚으로 만든 인형처럼 쓸어지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 순간 남수는 온몸의 피가 일시에 머리로 기어올라옴을 감각하면서 무아 몽중으로

『이놈 해월이 잡아라!』

하고 외쳤다. 만일 남수가 정문을 들어서자 마자 그렇게 고함을 쳤던들 해월은 자기 아버지를 찌를 사이도없이 도망했을런지도 몰랐을 것이다.

과연 남수의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자 마자 해월의 그림자는 옆방 주은몽의 침실로 따라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돌리어 저편 낭하로 빠져나가 버렸다.

『아, 앗……』

은몽의 찢는 듯한 목소리가 복도로부터 들리어온다. 낭하로 쫓겨 나갔던 은몽이 거기서 해월을 만난 모양이다.

남수는 또 한번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그 순간 온 집안이 돌연 캄캄한 암흑 세계로 변하지 않는가! 해월이가 「스윗치」를 껏구나!

『은몽씨! 은몽씨!』

남수는 화살같이 현관으로 뛰어 들어가며 그렇게 불렀다.

『아, 남수씨! 빨리……빨리……아, 저 놈이 들창문으로……』

하고 부르짖는 은몽의 숨찬 목소리가 암흑을 뚫고 찢어져 나왔다.

『은몽씨 빨리 전등을 켜요! 「스윗치」를 눌러요!』

그것은 남수가 현관을 들어서서 「아뜨리에」와 침실로 통하는 복도를 오른편으로 「커 ― 브」하면서 고함친 소리였다.

『남수씨! 빨리 빨리……아버지가, 아버지, 아버지께서……』

『「스윗치」를 눌러요! ─』

그때 번쩍하고 전등이 켜졌다. 거의 쓰러지듯이 「스윗치」에 매어달린 은 몽의 몸뚱이를 남수는 달려가서 쓰러안으며

『아버지는, 아버지는?』

하고 외쳤다.

『아버지를, 그 놈이 아버지를……』

납인형 처럼 창백한 은몽의 얼굴 ── 그의 여윈 손가락이 「아뜨리에」안을 가르쳤다.

글로쓰면 이처럼 길어지지만 그것은 실로 찰라적 일이었다. 남수가 정문 밖에서 은몽의 고함소리를 듣고서부터 단 일 분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삼층에서 「피아노」를 치던 정란이가 새파랗게 얼굴을 변해 가지고 뛰어 내려왔다.

『정란이! 아버지가……』

은몽은 힘없이 정란의 목을 껴안는다.

『어머니, 무슨 일이 생겼어요? 아버지가 어쨌어요?』

정란은 끌어안는 은몽의 팔목에 반항하면서 놀라 물었다.

『그 놈이 아버지를 ──』

은몽이 그렇게 외치며 정란과 더불어 「아뜨리에」로 뛰어 들어갔다.

『아, 앗! 아버지……』

자기 눈앞에 벌어진 참혹한 광경이 혹시 꿈이 아닌가를 마음 한구석으로 의심하며 정란은 아버지의 옆으로 달려갔다.

석고상 「여인군상」앞에 백영호씨의 몸뚱이는 기다랗게 쓸어져 있었다.

예리한 비수로 심장 한복판을 찔린 백영호씨의 가슴으로부터 저릿저릿하게 새빨간 피줄기가 샘솟듯이 쿨렁쿨렁솟아나온다. 극도의 공포로 말미암아 눈과 입을 벌린 얼굴 ── 그러나 아직 절명까지 이르지 않은것 만은 다행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정신을……』

남수는 아버지의 상반신을 붙들고 뭉클뭉클 솟아나오는 선혈을 손으로 막으며

『정란, 빨리 서재로 올라가서 문군(정란의 약혼자 문학수)에게 전화를 걸어! 그리고 경찰에도!』

정란은 갈팡질팡 허덕거리는 발걸음에 채쭉질을 하여 가며 이층으로 뛰어 올라 간다.

그 때 백영호씨는 한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번쩍 떴던 눈을 힘없이 감았다. 눈이 감기자 그는 입술을 들썩거리며 무엇을 말하려는 듯이 최후의 노력을 다 하였으나 공기는 그만 입안에서 말을 이루지 못하고 푸시시하고 입 밖으로 새어나곤 하였다.

아버지 말씀이 있으시거든 『 ! 빨리 하세요!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 말씀을 하세요! 말씀을 해 보세요?』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남수의 초조한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의 상반신을 힘껏 흔들었다.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 접니다! 은몽이예요! 은몽을 몰라 보세요?』

은몽이 그렇게 백영호씨의 팔을 잡고 흔들었을 때 은몽의 목소리가 낯익음인지 그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면서 은몽의 눈물어린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다.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는 팔을 은몽에게 내밀며 돌연

『은몽, 은몽! 너, 너는……』

하고 최후의 기력을 다하여 외친다는 것이 겨우 알아들을만한 가는 목소리었다.

『네? 저는, 저는,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어요. 그 놈은 복도 들창문으로 도망했어요. 여보,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은몽은 미친듯이 부르짖으며 자기를 그 처럼 사랑하여 주던 늙은 신랑에게 최후의 선물을 바치려는 듯이 자기 입술을 백영호씨의 입에 가져다대며 머리를 부비었다. 백영호씨 그 때 힘없는 팔에다 최후의 기력을 다하여 은몽을 꽉 부여잡고

『이 음 ……으 음 …… 은몽이 너는……』

하고 괴로운 듯이 신음하던 그 순간 은몽은 그만

『아얏! ──』

하고 소리치며 얼굴을 번쩍 들고 양손으로 자기 입술을 가리우면서

『고맙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저를 그 처럼…… 사랑하여 주시는 줄은……』

하고 벌써 숨이 끊어져 버린 남편의 얼굴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하였다. ── 아아, 늙은 신랑 백영호씨가 젊은 아내 주은몽의 입술에 남겨놓고 간 사랑의 선물 ── 은몽의 입술로부터 새빨간 핏줄기가 주르르하고 흘러내린다. 입술 위에 남은 남편의 입빨 자리!

그 때 이층으로 전화를 걸러 올라갔던 정란이가 굴러질 듯이 뛰어들어 왔으나 아버지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 아버지!』

하고 정란은 시체를 쓰다듬으며 은몽과 함께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요?』

하고 은몽을 바라보았다.

백영호씨의 이 무참한 죽음에 관하여 은몽은 적지않게 책임감을 느끼면서 모두가 저하나 『 때문에 일어난 봉변 ── 저는 남수씨와 정란을 대할 면목이 없어요. 정란, 나를 용서해 줘요. 나를……』

하며 오늘밤 그 사갈같은 악마가 「아뜨리에」나타나기 까지의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오후 여덟시 전후였다.

어멈은 저녁을 치르고나서 다방골 자기 아들네 집에 갔다온다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남수는 그 때 삼청동 「풀」옆을 걷고 있었고 정란은 삼층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 다음에 백영호씨와 은몽은 아랫층 「아뜨리에」 「소파」에 걸터앉아 기분 전환책으로 그리고 신혼 여행도 겸하여 금강산 같은데로 여행을 떠났으면 어떠냐고 ──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던 바로 그 때였다고 한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였다. 똑딱똑딱하는 소리다.

『여보 ── 』

은몽은 가만히 남편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삼층에서 정란의 「피아노」

소리가 멀리 들려 오고 그 보다도 좀 더 가까운데서 똑 ─ 딱 ─ 똑 ─ 딱 ─ 하는 결코 금속성(金屬性)이 아닌, 목성(木性)의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녹이는 듯 들려왔다고 한다.

『가만있자 ── 이게 목탁소리가 아닌가?』

백영호씨는 문득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파에서 몸을 이르켰다.

『목탁치는 소리?』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는 목탁소리였다. 그 순간, 은몽은 몸이 으스스하니 오그라지는 것이었다. 자기자신의 발자욱 소리가 으쓱하고 두려움을 싣고 기어올라옴을 깨달았다.

『목탁소리가 왜 날까? ──』

은몽은 백영호씨의 귀에다 입을 가까이 대며 속삭이었다.

『글쎄 ── 대체 어디서 나는 거야?』

백영호씨의 목소리도 극히 낮았다. 목탁소리는 처음엔 침실에서 나는 것 같았다. 침실로 가보았다. 그러나 침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목탁소리는 한층 더 가까이 들려온다. 은몽과 백영호씨는 그 때 문득 침실 천정을 쳐다보았다.

『악!』

하고 두사람은 낮으나마 놀라움에 찬 목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목탁소리는 틀림없이 천정으로부터 들려왔다. 아니, 자세히 말하면 침실 윗층 미술품 수집실로 부터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들려오던 , 목탁소리가 돌연 끊기었다. 사방은 고요해졌다.

미술실에 숨어있는 해월이도 은몽과 백영호씨가 자기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을 짐작했던 모양이다.

도승의 목탁치는 소리! 복수귀 해월의 목탁소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던가?……「웨딩·마 ─ 치」대신 장송곡을 친 해월이가 아니었던가!

불길의 징조 ── 죽음을 의미하는 목탁소리였다. 주위의 적막은 자즈러질 듯이 가슴을 파고든다. 누구냐!……고 고함이라도 쳐볼까 하였으나 고함을 치는 그 순간 시퍼런 비수가 자기네 심장을 향하여 날아올 것만 같았다.

그 때 늙은 백영호씨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은몽의 손목을 잡고 옆방 「아뜨리에」로 와서 역시 숨소리도 낮추고 귀를 기우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 기척도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목탁소리가 들리었는데 ──』

백영호씨와 은몽은 혹시 자기네의 환청(幻聽)이 아니었던가를 의심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바로 등뒤 ── 뒤통수에서 청천벽력처럼 떨어지는 목탁소리!

『에엣! ── 』

하고 두사람이 획하고 돌아서는 순간, 은몽은 그만 질겁을 하여

『아, 악!』

하고 고함을 치면서 침실로 딩굴듯이 뛰어갔다고 한다.

아아! 홍의(紅衣)의 악마여!

붉은 「만또」를 기다랗게 두르고 얼굴에는 울긋 불긋한 도화역자의 틸을 쓴 복수귀가 한손에 목탁을 들고 한손에 비수를 들고 백영호씨를 노려보는 전신 주홍색의 악마여!

『악!』

소리를 치며 침실로 쫓겨 들어간 은몽은 다시 복도로 뛰어 나갔다. 남수가 정문 밖에서 은몽의 찢는 듯한 부르짖음을 듣고 놀란 것은 바로 그 때였던 것이다.

은몽은 복도로 뛰어 나가면서 뒤를 한번 힐끗 돌아보았다. 전신 주홍색의 악마 해월이와 남편 백영호씨가 서로 붙잡고 하나는 찌르려고 하나는 찔리지 않으려고 ── 두개의 몸뚱이가 불이 나듯이 부딪치며 돌아가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해월이, 해월이! 이놈!』

늙은 백영호씨의 숨찬 고함이었고 남수가 정문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아뜨리에」의 「커 ─ 텐」에 비친 두개의 격투하는 그림자를 본 것은 그 때였다.

다음 순간, 은몽은 남편 백영호씨의 가슴을 파고드는 시퍼런 칼날을 꿈결처럼 바라보며 역시 꿈속사람 처럼 감각을 잃어버린 부르짖음을 쳤던 것이다. 남수의 고함치는 목소리가 정원으로 부터 들린것은 그때였다고 한다.

석고상 앞에 쓸어진 남편 ── 복수귀 해월은 침실로 은몽을 따라 들어가려던 발머리를 돌려 그대로 낭하로 달아나면서 「도어」옆에 달린 「스위치」

를 눌렀던 것이다.

캄캄한 사방 ── 복도 들창을 넘어 밖으로 달아나는 해월이 ── 그 때 남수가 현관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정란,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정란, 모두가 내 탓이야! 내탓! ──』

이야기를 마친 은몽은 정란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이윽고 정란의 약혼자 문학수가 달려왔다. 그러나 벌써 절명해버린 백영호 씨를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그는 그저 가족들과 같이 미래의 장인의 영혼에 머리를 숙이고 함께 애도의 정을 표할 따름이었다.

뒤를 이어 경찰관 일행이 도착하였다. 임경부는 아까 정란으로부터 백영호 씨의 비보를 받은 순간, 무엇 보다도 먼저 머리에 떠 오른 관념은, 그는 종시 사람을 죽였구나! 하는 생각과 거기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유불란!』

그는 문득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마를 찌프렸던 것이다.

경찰의(警察醫)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기계처럼 백영호씨의 피묻은 시체를 검시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 다만 예리한 비수가 심장을 깊이 찔렀다는 것 이 외에는 ── 은몽은 임경부 앞에서 다시 한번 사건의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경부는 우수의 얼굴을 들면서

『그러면 목탁 소리는 분명히 침실 윗층 미술품 수집실로 부터 들렸읍니까?』

『네, 분명히……』

이리하여 임경부는 박부장으로 하여금 정원과 삼청동 부근 일대를 수색케 하고 자기는 백남수와 문학수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 갔다.

『미술품 수집실은 항상 자물쇠를 잠가 두십니까?』

임경부는 층계를 올라 가면서 남수에게 물었다.

『네, 늘 잠가두지요. 저번에 그런 일이 일어난 후 부터는 아버지는 자신이 꼭 열쇠를 가지고 다니십니다. ── 아, 참, 열쇠를 잊었군. 아버지 주머니에 있을 겁니다.』

남수는 다시 아랫층으로 내려가서 아버지의 「포켙」에서 열쇠를 꺼내 가지고 올라왔다.

『그러면 미술품 수집실 문은 지금 잠겨있읍니까?』

『그렇지요. 잠겨 있어야지요.』

『열쇠는 단 한개입니까.』

『그렇습니다. 단 한개입니다. 미술품 수집실에 출입하는 사람은 우리집에선 아버지 혼자뿐이었으니까요 ── 』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그들은 전등불이 희미하게 비치는 넓은 복도를 미술실로 향하고 걷고 있었던 그때

『아, ── 저 문이……』

하고 앞서서 걸어가던 문학수의 낮으막한 외침! 미술품 수집실의 「도어」

가 마굴의 돌문처럼 벙긋하니 열려있다!

시커먼 아가리를 벙싯하니 벌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미술품 수집실은 조금 아까 까지도 주홍색의 복수귀 해월의 소굴이 아니었던가!

방안은 캄캄하다. 죽은 듯이 고요하다. 그 순간 목탁을 든 주홍마(朱紅魔)의 히쭉거리는 얼굴이 문밖으로 쑥 기어나올 듯 싶었다.

남수는 「도어」를 힘있게 열어젖히고 「스윗치」를 눌렀다. 넓다란 방안에 무수히 놓여 있는 조각품 ── 하얀 석고상과 싯누런 불상 ── 그 순간

『앗! 붉은 봉투!』

하고 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던 것이다. 아아, 무서운 저 빨간 봉투!

철석같은 악마의 명령서가 다섯개의 불상 가운데서도 그 중 가장 큰 신라 중엽에 주조되었다는 좌상(坐像)관음보살의 손바닥 위에 놓여있지 않은가.

불길의 징조! 저 핏빛처럼 새빨간 봉투속에는 또 어떠한 공포가 들어 있을 것인가? 임경부는 달려 가자마자 봉투를 떼었다.

은몽! 나는 너의 남편 백영호씨를 죽였노라. 그것은 물론 나의 본의는 아니었으나 그는 나의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한 벌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나의 하고자하는 일을 막는자는 내 칼에 죽으리라. 누구든지 죽으리라. 그러나 나는 백영호씨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의외의 일을 하나 발견하 였다. 그것은 무엇인가? 남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은몽, 네가 느끼는 비탄(悲歎), 너의 쓰라린 가슴이다. 그렇다! 나는 아직까지는 어리석은 복수자였었다. 너만을 죽임으로서 나의 복수가 완전히 성공하리라고 믿고온 것이 얼마나 단순한 복수이뇨. 나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십 삼년 동안이나 원망과 저주와 눈물로 보내온 이 너무나 기나긴 역사를 가진 나의 복수심은 이제 정말 잔인할대로 잔인해진 것 같다. 너의 목숨이 단 한칼에 이슬처럼 살아지는 것으로만은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은 나의 심경이다. 은몽! 나는 복수의 방법을 달리하려고 결심했다. 공포와 비애로 말미암아 각일각으로 시들어가는 너의 생명을 얼마 동안 혀끝으로 대굴대굴 굴리면서 맛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렇다! 너를 귀여워하는 존재, 그리고 네가 믿고 사랑하는 존재를 지금부터 한사람 한사람씩 죽여 버림으로써 네게 재빛과 같은 비탄과 공포를 던져 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맨 나중에 시들다 남은 너의 목숨을 빼았으므로서 나의 완전한 복수를 수행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너를 귀여워하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누구냐? 먼저 너의 가족들이다. 백남수, 백정란, 그리고 너의 애인 김수일……또 없는가? 또 없는가?…………

해 월세 사람은 편지에서 눈을 들었다. 임경부와 문학수는 남수의 얼굴을 이상한 표정으로 묵묵히 쳐다 보았다.

아아, 짐승 같은 악마! 귀신 같은 복수귀! 복도 들창을 넘어 달아났던 해월은 어느새 어떻게 미술품 수집실로 숨어 들었던가?

세 사람은 이런 의문을 한 아름씩 안고 방안을 낱낱이 뒤져 보았으나 해월의 그림자는 역시 무슨 기체(氣體)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이것이 뭘까?』

하고 중얼거리면서 문학수가 저편 불상 뒤에서 호박(琥珀)으로 만든 조그만

「로켓트」를 하나 발견하였다.

『「로켓트」가 아닌가?』

남수는 「로켓트」를 받아 들고 뚜껑을 열었다. 사진이 들어 있었다.

『여자의 사진?』

그러나 그것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세사람은 긴급히 아랫층 「아뜨리에」로 내려와 그것을 은몽과 정란에게 보였다.

『글쎄 누굴까?』

은몽과 정란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스물이 될락말락한 갸름한 얼굴을 가진 처녀의 사진이었다. 물론 해월의 것일 께다. 머리를 길게 따아 늘인 처녀 ── 아아, 사람의 죽음을 기원하면서도 한편 그것을 애도하는 듯 싶은 저 저릿저릿한 목탁소리여! 전신을 치렁치렁한 주홍빛 「만또」로 몸을 감추고 조는 듯한 가는 눈과 귀밑까지 찢어진 가는 입을 가진 그 도화역자의 가면을 쓴 무시무시한 악마여!

홍의(紅衣)의 악마는 마침내 사람의 피비린내를 맡았다. 복수와 질투에 불타오르는 그의 칼날은 드디어 늙은 신랑 백영호씨의 행복에 찬 심장을 찌르지 않았던가!

거리거리에 휘날리는 호외조각! 서울 장안을 들볶는 각 신문사의 호외의 방울소리를 들으라!

── 호외다 호외다! 홍의의 복수귀는 드디어 백영호씨를 죽였다.

── 복수귀의 눈초리! 난무(亂舞)하는 복수귀의 칼날!……귀신인가 짐승인가?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 바람과 같이 사라진 도승 해월이!

── 악마의 명령서, 붉은 봉투는 또 무엇을 말하는가?……

── 미술품 수집실에서 얻은 이상한 「로켓트」! 「로켓트」속에 들은 미인 사진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일까?……

장안의 인심은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흥분과 엽기와 공포에 몸부림쳤다.

그들은 한 곳에 모이기만하면 복수귀의 이야기요 주홍마의 이야기로 날을 보냈다. 그들은 백영호씨의 영혼을 애도하기보다 먼저 복수귀 해월의 기상천외한 재주를 찬양하였다. 콩알만한 가슴을 움켜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은몽의 신세를 가련하다고 생각 하기보다 먼저 순정을 짓밟히운 소년 승려 해월의 애끓는 심정에 한숨짓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백영호씨 살해사건은 공포와 기적과 신비를 남겨놓고 또 다시 미궁(迷宮)으로 부터 미궁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이 처럼 사건이 다시 미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도하의 각 신문지는 명탐정 유불란씨의 출마를 대서특필하여 부르짖게 된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 ×× 일보사의 민완기자 정대호(鄭大浩)가 공작부인 은몽과 「인터 ─ 뷰」한 기사 중의 한대목을 소개해 볼 필요가 있다.

……삼청동 「풀」위에 거대한 암록색 도영(倒影)을 그리며 높다랗게 솟아 있는 이 삼층양옥은 마치 탐정소설에 나오는 중세기의 고성과도 같고 무슨 유령의 집과도 같았다. 그래도 백영호씨의 장례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서 그렇지도 않았으나 사람들의 발자취가 끊어져버린 요즈음에는 마치 산 송장과 같은 창백한 얼굴을 가진 공작부인이다.

『밤이나 낮이나 그 놈은 항상 저를 감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변소 출입도 마음대로 못하지요. 어디서 불쑥 나타날런지……저를 구할 사람은 한사람도 없어요. 저는 그저 뱀 앞에 개구리처럼 시들시들 말라빠져 죽을 것 같아요 ──』

부인께서 유불란씨에게 『 친히 한번 청탁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유불란씨가 유명한 탐정이란 말은 들었읍니다마는 그 인들, 그 인들 어쩔 수가 없을 겁니다. 그 놈의 재주와 유불란씨의 재주와는 도저히 비교가 안되지요. 유씨가 아직껏 이 사건에 출마하지 않는 것도 제 생각엔 그 놈을 두려워 하는게 아닐까요?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는 해결짓지 못할 줄을 깨닫고……』

『그런 말씀을 유불란씨가 들으면 적지않게 분개할 겁니다.』

『글쎄요, 그럴까요? 그렇다면 제 말을 취소하겠읍니다. 아직 뵈옵지도 못하신 분에게 그런 경솔한 말을해서……그러나 유불란씬들, 유불란씬들 ……』

『덮어 누르는 듯한 공포에 오그라들 것 같은 부인의 애처러운 자태를, 만일 유불란씨가 눈앞에 본다면 그는 결코 이 외로운 공작부인을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자는 문득 생각했다……유불란씨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것은 기자인 나 혼자만의 부르짖음이 아니고 서울장안 칠십만 시민의 외침일 것이다. 유불란씨여, 한시바삐 저 악마의 손으로부터 부인을 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