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하면 망하리라
원문
[편집]猶太人의孤兒, 그叔을따라定處없이 放浪하든一個少女 에스더가, 千萬意外에 當時의大國바사王의王后로選定된後 얼마안된때의일이다. 하만의姦計에依하야 二百餘萬이스라엘百姓이 一朝에殘滅當할運命이 첨아끝에急迫하였을때에, 軟手로能히 한民族의悲運을 轉換하게한 것은 果然에스더의’亡하면 亡하리라’는一言의힘이었다. 에스더가 무릅쓴冒險이 얼마나 危險한일이었든것은 바사宮室典範을보아야안다. 에스더는 적어도’死’를冒險한것이다. 米洲를發見한 컬럼버스,외름스會議에臨한 루터, 南北戰爭을宣言한 링컨, 暗黑大陸을探險한 리빙스톤等은 다 에스더와같이 ‘亡하면 亡하리라’는 標識으로生活한者들이었다. 그것外에 남보다 別다른것이없었으나 그것이貴한것이었다.
現代人들—信者不信者의別이없이—의 가장願하는 것은 ‘땅집고 헤염치는일’이다. 恩給制度, 保險制度는勿論하고 子姪의敎育, 實業의經營, 宗敎에歸依等等의 結局은, 個人的으로나 團體的으로나 ‘땅집고 헤염치자’는 目的을達하랴는 過程일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實際로遊泳할진대, 땅집고할동안은 遊泳의참맛은 永久히알수없다. 빠지면溺死할危險있는滄波에라야 비로소 遊泳의快味가난다. 生物이 그生命을發育하며 種族을保持함에는 ‘땅집고 헤염치는’主義가 安全하기는 安全하나, 거긔에는 機械輪轉의磨擦소리는 들릴망정, 生命躍動의기쁨의노래는 發할수없다, 鮭魚가淸溪를좆아 溯泳함과, 鯉魚가瀑布를거슬려 뛰어오르는일들은 危險하다면 實로危險한일이나, 이는 어쩔수없는生命의本質이다. 生命이强盛할수록 저는 瀑布를맞났을때에 湧躍하지않고는 참지못한다.
基督敎의信仰生活을要約하면 其實은 ‘亡하면 亡하리라’는生活이 그全部이다. 아브라함이 그獨子이삭을祭壇에받힐 때, 모세가이스라엘의 어리석은群衆을거느리고 出埃及할 때, 저들은 後世에 우리가읽는바와 같은 神奇한異蹟이 依例히있을것을 미리알고 行한것이아니다. 다만알기는, 亡하면亡하드라도 絶對命令에順從할것뿐이었다. 다니엘과하난야와미사엘과 아살야等의 猶太少年들이 當代의 바벨론王 느부갇네살의威風에도 不服한 것은, 저들이 무슨術法이나 꿈으로나 或은聖神으로써, 獅子窟에서도 安全히生還하며, 鐵熔爐에서도 無事히救出될것을 미리保障받은後에 敢行한것이아니었다. 다만亡하면亡할지라도 義에當할 것, 神意에合한일이면 敢行하고, 땅집고 헤염치듯이 安全한일이라도 不義한것은拒絶한것뿐이다. 그렇게行한結果에 하나님편에서 特別한能力으로 저의를救出하였다. 信仰生活이라하야 卜術者처럼 吉凶禍福을豫測하거나 特別한請託으로써 하나님의寵愛를偏取하는 것을 能事로아는 것은 大端한誤解이다. 信仰生活은奇術이아니라 天下의大道公義를 闊步하는生活이다. ‘亡하면 亡하리라’는 覺悟로써.
번역문
[편집]유대인의 고아, 그 숙(叔)을 따라 정처없이 방랑하던 일개 소녀 에스더가 천만의외에 당시의 대국 페르시아 왕의 왕후로 선정된 후 얼마 안된 때의 일이다. 하만의 간계(姦計)에 의하여 2백여만 이스라엘 백성이 일조에 진멸당할 운명이 처마끝에 급박하였을 때에, 연수(軟手)로 능히 한 민족의 비운을 전환시킨 것은 과연 에스더의 “망하면 망하리라”는 일언의 힘이었다. 에스더가 무릅쓴 모험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던 것은 바사 궁실 전범(典範)을 보아야 안다. 에스더는 적어도 ‘죽음’을 모험한 것이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롬부스, 보름스 회의에 임한 루터, 남북전쟁을 선언한 링컨, 암흑대륙을 탐험한 리빙스턴 등은 다 에스더와 같이 “망하면 망하리라”는 표지로 생활한 자들이었다. 그것 외에 남보다 별다른 것이 없었으나 그것이 귀한 것이었다.
현대인들 — 신자 · 불신자의 구별없이 — 의 가장 원하는 것은 “땅짚고 해엄치는 일”이다. 은급제도 · 보험제도는 물론하고 자질(子姪)의 교육, 실업의 경영, 종교에의 귀의 등등이, 결국은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땅 짚고 헤엄치자’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수영할진대, 땅짚고 할 동안은 수여의 참맛은 영구히 알 수 없다. 빠지면 익사할 위험 있는 창파에서라야 비로서 수영의 쾌미가 난다. 생물이 그 생명을 발육하며 종족을 보지(保持)함에는 ‘땅 짚고 헤엄치는’주의가 안전하기는 안전하나, 거기에서는 기계 윤전의 마찰소리는 들릴망정, 생명 약동의 기쁨의 노래는 발할 수 없다. 해어(鮭魚)가 청계(淸溪)를 쫓아 소영(遡永)함과, 잉어가 폭포를 거슬러 뛰어오르는 일들은 위험하다면 실로 위험한 일이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이 강성할수록 저는 폭포를 만났을 때에 비약하지 않고는 참지 못한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을 요약하면 그 실은 ‘망하면 망하리라’는 생활이 그 전부다. 아브라함이 그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저들은 후세에 우리가 읽는 바와 같은 신기한 이적(異蹟)이 으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행한 것이 아니다. 다만 알기는, 망하면 망하더라도 절대 명령에 순종할 것뿐이었다. 다니엘과 하난야와 미사엘과 아살야 등의 유대소년들이 당대의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의 위풍에도 불복한 것은 저들이 무슨 술법이나 꿈으로나 혹은 성신으로써 사자굴에서도 안전히 생환(生還)하며, 철용로에서도 무사히 구출될 것을 미리 보장받은 후에 감행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망하면 망할지라도 의에 당한 것, 신의에 합한 일이면 감행하고, 따짚고 해엄치듯이 안전한 일이라도 불의한 것은 거절한 것뿐이다. 그렇게 행한 결과에 하나님 편에서 특별한 능력으로 저희를 구출하였다. 신앙생활이라 하여 복술자(卜術者)처럼 길흉화복을 예측하거나 특별한 청탁으로써 하나님의 총애를 편취(偏取)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것은 대단한 오해이다. 신앙생활은 기술이 아니라 천하의 대도공의(大道公義)를 활보하는 생활이다. ‘망하면 망하리라’는 각오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