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
1
[편집]삼층 이십이호실에 들어 있던 젊은 회사원이 오늘 방을 내어놓았다. 얼마 전에 결혼을 하였는데 그 동안 마땅한 집이 없어서 아내는 친정에, 그리고 남편인 자기는 그전에 들어 있던 이 아파트에 그대로 갈라져서 신혼생활답지 않게 지내 오다가 이번에 돈암정 어디다 집을 사고 신접살림을 차려 놓기로 되었다 한다. 오후 여섯시가 가까운 시각, 아마도 회사의 퇴근시간을 이용하여 양주가 어디서 만난 것인지 해가 그믈그믈해서야 회사원은 색시 티가 나는 아내와 함께 짐을 가지러 트럭과 인부를 데리고 왔다. 인부가 한 사람 있다고는 하지만 삼층에서 밑바닥까지 세간을 나르고 그것을 다시 트럭에 싣고 하기에는 이럭저럭 한 시간이 걸렸다. 최무경(崔武卿)이는 아파트의 사무원일 뿐 아니라 회사원이 있던 방이 바로 제가 들어 있는 옆방이어서 여자의 몸으로 별로 손을 걷고 거들어 줄 것은 없다고 하여도 짐이 다 실리는 동안 아래층 사무실에 남아 있어서 그들의 이사하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일을 보는 늙은 강영감이 제법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짐을 챙겨도 주고 양복장이며 책장이며 탁자며 하는 육중한 것은 한 귀를 맞들어서 인부와 회사원과 함께 운반에 힘을 돕기도 하였다.
짐을 대충 실어 놓고 회사원은 아내와 같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부금(敷金) 일백오 원 중에서 이번 달 치가 오늘까지 이십팔 원, 그것을 제하고 칠십칠 원이올시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지폐를 손금고에서 꺼내서 최무경이는 그것을 회사원에게로 건네었다. 회사원은 한 손으로 받아서 약간 치켜들듯 하여 사의를 표하고 그것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으려고 한다.
"세어 보세요."
그러한 말에 회사원은, 무어 세어 보나마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았으나 다시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넣으려던 지폐를 꺼내서 불빛에다 대고 손가락에 침도 묻히지 않으면서 한장 두장 세어 보고 있다.
"꼭 맞습니다."
하고 낯을 들었을 때 무경이는 펜과 영수증을 놓으면서,
"영수증이올시다. 사인하시고 도장 쳐주십시오. 수입인지는 아파트 쪽에서 한턱내었습니다."
하고는 회사원의 아내를 바라보며 웃었다. 젊은 아내는 무경이의 웃음에 따라서 흰 이를 내놓고 웃었다.
"고맙습니다."
영수증을 받아서 서류와 함께 금고에 챙긴 뒤에 무경이는 두 신혼부부의 낯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행복에 넘친 듯한 얼굴들이다. 진부한 형용이지만 역시 행복에 넘쳐 있는 표정이라는 말이 제일 적절할 것처럼 무경이는 생각하는 것이다.
"저어 돈암정 바로 삼선평이올시다. 거기서 바른쪽으로 향해서 들어가면 새로 분할한 주택지가 있습니다. 큰 골목으로 접어들어서 다시 셋째 번 골목 둘째 집이 저희들 집이올시다. 사백오십번지의 십칠호. 한번 교외에 산보 나오시는 일이 계시건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총명한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지도의 설명을 잊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건만 사람들은 노상에서 만난 친구들께 곧잘 이러한 방식으로 저의 집의 주소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듣는 사람도 또 지금 말하는 설명을 모두 머릿속에 챙겨 넣기나 한 듯이,
"네 네, 한번 나가면 꼭 들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무경이가 들르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는 것인지 아마 그들 자신도 딱히 그러한 모든 것을 의식하면서 건네는 인사는 아닐 것이나 두 부부는,
"고맙습니다."
하고 가지런히 인사를 하였고 다시 회사원은 문 밖으로 아내가 나가 버린 뒤에도 문턱 안에 남아서,
"덕택에 참 내 집이나 진배없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사례를 말하였다. 두 사람은 어둠의 장막이 내려 드리우려는 길위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겨 놓으며 무어라 나직이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최무경이는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강영감은 빈방의 뒷설거지를 마치고 비와 쓰레기통과 바께쓰를 들고 위층에서 내려왔다. 물을 담았던 바께쓰에는 버리고 간 찻그릇 곱뿌 등속 낡은 모자 같은 것이 그득히 들어 있었다. 신접살림이라 무어든 간 새로 준비했을 것이니 홀아비살림 때에 쓰던 것으로 소용이 없을 것은 공연히 짐이나 된다고 이렇게 내버려두고 가는 것이리라, 강영감은 그것을 모아다가 넝마장수에게 팔기도 하고 저의 집에 가져다 쓰기도 하는 것이었다. 장부를 정리하고 저녁이 늦어서 손수 지을 수도 없으므로 무경이는 식당으로 갔다. 돔부리(덮밥)를 거의 다 먹었는데 전화가 왔다고 강영감이 부른다.
"방이 있냐구 물어서 한 방 비었다구 했는데……."
하고 식탁에까지 와서 강영감은 여사무원에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랍니까?"
차를 마시면서 무경이는 묻는다.
"글쎄, 그건 물어 보지 못했는데 하여간 나가서 전화 받아 보시지. 여자 목소리던데."
"여자요? 또 여급이나 그런 사람이 아닌가요? 그런 사람들이건 애초에 방이 없다구 거절허실 걸 갖다."
무경이는 앞서서 식당을 나왔다. 사무실로 와서 책상 위에 내려놓은 수화기를 들면서,
"여보세요, 오래 기다리게 하여서 미안합니다. 네 야마도 아파틉니다. 거기 어디신지요? 네? 명치정 청의 양장점이오? 네에 네, 그럼 방을 쓰실 분은 바로 양장점에 계신 선생님이신가요?"
잠시 저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대학의 강사 선생님이시라구요? 네 그럼 친히 오셔서 방을 보시지요. 방세는 삼십오 원, 정지가격이올시다. 부금을 석 달 치 전불하기로 되었습니다. 그럼 들러 주십시오, 네에 네, 고맙습니다."
대학 강사로 논문 쓸 것이 있어서 임시로 몇 달 동안 방을 구한다고 한다. 전화를 건 분은 대학 강사의 무엇이 되는 여자인가. 그러나 그런 것을 오래 생각하지는 않고,
"지금 찾아오마 했는데 방 구경 시키구 마음에 든다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전 그럼 방에 올라가 있겠습니다."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강영감은 지금서야 벤또를 먹고 있었다.
무경이는 제가 쓰고 있는 삼층 이십삼호실로 올라왔다. 대학 선생이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있으면 뒤숭숭하지 않아서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서 그는 회사원이 조금 전에 나가 버린 옆방의 앞을 지났다. 잠갔던 문을 열고 스위치를 넣어서 제 방에 불을 켰다.
방 안에 들어와서는 언제나 하는 버릇으로 손을 씻었다. 슈트의 웃저고리를 벗고 얄따란 스웨터로 바꾸고는 가볍게 화장을 고친다. 오래지 않아 삼월이라지만 밤은 역시 추웠다. 스팀의 마개를 조절해서 방 안에 온도를 맞추고는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본다. 아까 아파트를 나간 회사원의 두 부부가 생각되었다. 그들은 행복에 취하여 있는 듯이 보이었다. 남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 아니라 당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트럭을 먼저 앞세워 놓고 나란히 서서 문 밖으로 나가던 두 사람의 뒷그림자…… 그러나 그는 문득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들은 끝끝내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젊은 회사원은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끝끝내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사랑과 신뢰는 언제나 무슨 일을 당하여서나 변함이 없이 굳건한 것으로 지니어 나가고 지탱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인가?'
쓸데없는 군걱정이었으나 최무경이는 역시 그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누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으랴! 저 회사원이 앳되고 어린 꽃 같은 색시를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하리라고 누가 감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랴!
이렇게 해서 최무경이는 조금 아까 행복된 낯으로 아파트를 하직하고 돈암정의 새 집으로 총총히 마음을 달리던 젊은 부부의 앞날에 불길한 예언을 던져 보고 앉았는 것이다.
'안온한 일생을 평정하게 보내는 부부가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누가 아내의 마음을 보증할 수 있으랴! 누가 남편의 사랑을 보증할 수 있으랴! 아니 누가 감히 저 자신의 마음을 보증할 수 있을 것이랴!'
그는 떠오르는 흥분을 고즈넉이 맛보면서 머리를 털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혼자서 산다.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
바람벽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쳐다본다. 무경이와 함께, 어머니가 시집가던 작년 가을에 박은 사진이었다. 둘이 다 뭉틀 하고 서서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어머니는 흰 옷으로 몸을 단장하였다. 무경이도 금박이 자주고름에 치렁치렁하는 남치마를 입고 나들이옷으로 몸을 가꾸었다. 스물에서 마흔두 살까지의 이십여 년을 혼자서 딸 하나만을 데리고 살아오던 어머니도 정일수(鄭一洙) 씨에게 시집을 갔다. 생각해 보면 혼자서 살겠다는 자기의 마음도 또한 보증할 수는 없으리라고 되새겨진다. 그러나 인제 다시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와 함께 그는 새로운 생활을 설계해 볼 수 있을 것인가. 상처가 너무도 컸다. 아직도 완전히 끝이 났다고는 보아지지 않는만큼 보증할 수 없는 저의 마음을 채찍질하면서라도 그는 지금 '혼자서 사는' 것을 다시금 또 다시금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지난 여름의 일이다. 2년 가까이 입감해 있던 오시형(吳時亨)이를 그는 백방으로 서둘러서 보석을 시켰다. 오시형이와 무경이의 관계는 양쪽 편 집이 모두 반대하였었다. 어머니는 오래인 장로교인으로서 오시형이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꺼려하다가 그가 사건에 걸려서 입감한 뒤에는 더욱더 완강히 그와의 결혼에 반대하였다. 한편 오시형이네 집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극력으로 반대하였다. 물론 평양서 부회의원을 지내면서 상업회의소에도 얕지 않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그의 부친이 반대하는 것은 아들이 선택한 최 무엇이라는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서 증권회사 조사부 같은 데 취직해 있는 아들의 태도에 반대였고 사상이나 생활태도 전체에 대해서 그는 아들의 생각과 뜻이 맞지 않았다. 그는 우선 아들이 평양으로 내려와서 자기 앞에서 친히 일을 보기를 희망하였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도지사를 지냈다는 저명인사의 총명한 규수와 약혼을 할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하는 길이 아들을 출세시키는 최단거리라고 믿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자가 서로 옥신각신하던 통에 뜻밖에 아들이 그만 온당하지 못한 사건에 걸려서 입감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들의 장래를 자기의 연장으로서 설계해 오던 아버지에게 있어 놀라운 일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명예와 지위를 위해서는 치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향해서 당황하였다. 그는 노하였다. 그는 드디어 아들과의 관계를 통히 끊어 버리듯 하였다. 나이라도 많으면 늙은 마음이 자식을 생각하는 정의에 이겨 나가질 못할 것이나 그는 오십 전후의 정정한 장년이어서 아들의 고생 같은 것은 보고 못 본 척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 년이 흘렀는데 이 이 년 동안 무경이는 오시형이를 위하여 직업에 나섰고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서 오시형이와의 관계를 인정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보석운동이 주효해서 그에게 다시금 태양의 빛을 쐬게 만들었다. 지금 무경이가 쓰고 있는 야마도 아파트의 삼층 이십삼호실은 보석으로 출감하는 오시형이를 위하여 무경이가 준비해 두었던 방이었다.
그러나 오시형이가 출감하면서 동시에 연달아서 뜻하지 않았던 사건이 튀어나왔다. 우선 오시형이는 그전에 포회했던 사상으로부터 전향을 하였었다. 그의 전향의 이론을 그 자신의 설명으로 들어 보면 경제학으로부터 철학에의 전향이요, 일원사관(一元史觀)으로부터 다원사관(多元史觀)에의 그것이라 한다. 이러한 결과로 하여 학문상으로 도달한 것이 동양학(東洋學)의 건설이었고 사상적으로도 세계사의 전환에 처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국제 정국에 대처해서 하나의 동양인으로서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나 학문태도가 변하였다든가 전향하였다고 하여서 그들의 사이에 어떠한 틈이 생길 리는 없는 것이었다. 본시 최무경이는 오시형이가 어떠한 사상을 품게 되든 그런 것에는 깊이 개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어 왔고 또 그러한 것에 대해서 깊이 천착(穿鑿)하고 추궁할 만한 준비나 여유가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므로 오시형이의 이러한 전향이란 것이 어떠한 정신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또 그러한 내면적인 정신상의 문제가 자기와의 관계나 혹은 생활태도 같은 것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러한 생각도 가지지도 못하였다. 그는 변함없는 애정이면 그만이었고 자기가 그 동안 실천한 불요불굴한 행동에서 오는 자긍과 도취로 해서 통히 그런 것에 생각이 미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오시형이의 내면생활은 무경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더 복잡한 과정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 년 동안 독방 안에서 경험하는 내면생활에 대해서 밖의 사람은 단순한 해석밖에는 가지지 못한다. 아버지, 여태껏 무슨 큰 원수나 되듯이 생각하여 오던 오시형이의 아버지가 아들의 출감을 듣고 상경하여 아파트를 찾아왔을 때에 시형이의 내부생활의 복잡한 면모는 하나의 표현을 보였다. 그는 당장에 아버지와 타협한 것이다. 인정과 격리되어서 애정에 주린 생활을 영위하던 사람이 죽일 놈 살릴 놈 하던 아버지의 돌변한 태도에 부딪쳐서 감격과 흥분을 맞이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란 하나의 혈통이니까 커다란 불화가 있었다 해도 칼로 물을 벤 것과 진배없어서 그들은 언제나 다시 화합해야 할 핏줄을 가졌다고만 해석하는 데도 다소간의 불충분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과 관련을 가지면서도 결정적인 원인을 지은 것은 오시형이의 가슴에 아버지까지를 포함시켜 그가 여태껏 상대해 오던 일체의 '대립물(對立物)'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여하튼 그는 아버지를 따라서 평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오시형이의 출감과 전후해서 무경이는 또 하나의 돌발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결혼이었다. 어머니가 어떤 남자와 교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무경이는 커다란 실망과 함께 여자다운 질투와 어머니의 육체적인 체취에 대해서 늑찌한 구역을 느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잃어버리는 데 대해서 누를 수 없는 서러움을 경험하였다.
단 하나의 어머니도 잃어버리고 단 하나의 애인도 잃어버리었다. 직업에는 오시형이의 차입을 위하여 나섰던 것이요, 아파트의 방은 보석으로 나오는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얻었던 것이었다. 의지하였던 것도 믿었던 것도 사랑하던 것도 희망하는 것도 일시에 없어져 버린 것이다. 산다는 것의 의미와 생존의 목표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하여 그는 잠시 동안 멍청하니 공허해진 저의 가슴을 처치해 볼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 나아가겠다는 하나의 높은 생활력 같은 것을 천품으로서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생활력은 제 앞에 부딪쳐 오는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꿰뚫고 나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력으로 나타날 때가 있었다. 사람은 제 앞에 부딪쳐 오는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맞받아서 해결하고 꿰뚫고 전진하는 가운데서 힘을 얻고 굳세지고 위대해진다고 생각해 본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히고 함정에 빠져서 그가 생각해 본 것은 모든 운명의 쓴 술잔을 피하지 않고 마셔 버리자 하는 일종의 '능동적인 체관(諦觀)'이었다. 그는 우선 어머니와 오시형이를 공연히 비난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으리라 명심해 본다. 자기 자신을 그들의 입장 위에 세워 보리라 생각했다.
오시형이는 이 년 동안 옥중에서 충분한 사색과 반성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생각은 섬세해지기도 하였고 치밀해지기도 하였고 풍부해지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정신상 갱생을 사상과 학문상의 전향에서 찾으려 하였고 그의 육체와 생명은 다시금 빛 없는 생활에 얽매이지 않기를 본능적으로 갈망하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좀더 원만하고 원숙해지리라 명심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가정이 있는 평양으로 내려가는 것이 건강에나 또는 당국 관계에 있어서도 편리할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시형이가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가는 것 그것은 그의 금후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도 생각되어진다. 그렇다면 이까짓 방 같은 것이 합체 무엇이며 무경이의 마음이 다소 섭섭해지는 것 같은 것이 하상 무엇이냐고도 생각되어진다.
어머니의 입장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이십 전에 홀몸이 되어서 자기 하나만을 믿고 살아왔다. 자기가 어떤 사내와 결혼하면 어머니는 누가 모시며 어머니가 마음을 의지할 사람은 장차 누구일 것이냐? 어머니의 신뢰와 애정을 거역하고 나선 것은 딸이었다. 딸의 문제를 허락하였을 때 어머니가 그를 믿고 팽팽하게 당길 수 있었던 닻줄을 팽개쳐 버리면서 갑자기 독신생활에 대해서 신념을 잃어버렸다는 것도 넉넉히 이해할 수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딸의 마음이 서운해질 것을 염려치 않고 어머니가 장래의 생애에서 행복된 설계를 가지려 하였다고 그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시형이는 그의 앞날을 위하여 영위함이 있어 마땅한 일이며 어머니는 어머니의 남은 생애를 위하여 설계함이 있어 마땅한 일이 아니냐. 그러면 뒤에 남아 있는 최무경이 자기 자신은? 그는 생각해 본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생활을 가져 보자!'―---이것이 그를 구렁텅이에서 구하여 낸 결론이었다.
시형이를 위하여 얻었던 방에는 제가 들기로 하였다. 어머니가 결혼하여 정일수 씨와 동거하게 되었을 때 어머니와 무경이가 살던 집은 팔아 버렸다. 마침 가옥 시세가 가장 대금이던 때라 그리 새 집은 아닌 것인데 한 칸에 칠백 원씩 받아서 일만 오천 원의 거액이 무경이의 저금통장에 기입되었다. 살림도 간단히 추려서 대부분은 어머니한테 맡겨 두고 신변에 필요한 몇 가지와 취사도구의 간단한 것만 아파트로 옮겨 왔다. 아직도 아버지의 명의대로 남아 있는 칠십 석 남짓한 땅은 으레 무경이에게 상속이 되었으나 정일수 씨한테 관리시키고 일 년에 이천 원씩을 받아다가 저금통장에 기입시키기로 작정하였다. 한집안에 살기를 권하다가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한 정일수 씨와 어머니는 될수록 무경이에게 편의를 도와 주려 힘썼고 딸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극진히 표시하려고 애썼다. 무경이는 전과 다름없는 여사무원의 직업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를 대어 놓고도 오시형이와의 애정에 대한 신뢰만은 덜지 않으려고 생각하였다. 하기는 시형이가 아버지와 타협하고 평양으로 내려간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에 이 사건을 통해서 맨 먼저 느낀 것은 여자다운 직관력만이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는 애정의 동요이었다. 평양에는 진척시켜 오던 약혼설이 있다. 도지사를 지낸 저명인사의 영양이 있다. 무경이는 고백 뒤에 어물거리는 그림자로서 그것을 눈앞에 그려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 가지로 그 문제에 대하여는 아무러한 이야기도 나누려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시형이의 마음만은 변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또는 아무리 따져 놓고 약속을 굳게 하여 두어도 흐르는 수세는 당해 낼 재주가 없는 것이라고 단념해 버렸던 것일까. 어떤 날 어머니는 딸에게 이런 말을 물었다.
"시형이 아버지가 그 무슨 도지사의 딸이라든가 허구 약혼하라던 건 그 뒤 무슨 이야기가 없다든?"
이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 무경이는 잠시 당황했으나,
"무슨 별이야기 없던데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는 듯이 또 다시 무어라고 입을 나불거리다가 여러 번 주저하던 끝에,
"글쎄, 그렇다면 좋거니와. 손수 올라와서 데리구 가는 바엔 그런 이야기두 있었을 법헌데. 그럼 무어 너허구의 결혼에 대해서두 아직 이렇다할 의사표시는 없은 셈이로구나."
하고 나직이 말하였다. 무경이의 가슴속에서는 꿍 하고 물러앉는 것이 있었다. 당황해지는 저의 마음을 부둥켜 세우며,
"마음대루 허라지요. 도지사 딸한테 장갈 들려건 들구 귀족의 딸한테 장갈 들려건 들구……."
어머니는 이러한 딸의 언행에서 적지 않은 경악을 맛보았으나 그 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가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서울을 떠난 오시형이한테서는 내려간 지 일주일이 지나서 한 장의 편지가 왔다. 윤택이 있는 다정스런 문구는 하나도 없고 적지 않이 고민이 섞인 생경한 문구로 적히어 있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나의 장래에 대한 것이오. 내가 어떻게 하면 정신적으로 재생하여 자기를 강하게 하고 자기를 신장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일찍이 나는 비판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만 되풀이하고 있으면 그것은 곧 자학이 되기 쉽겠습니다. 나는 자학에 빠져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부세계에 대한 준열한 비판만 있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요즘의 지식인들의 통폐에 대해서는 나는 벌써부터 좌단(左袒)을 표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판해 버리기만 하는 가운데서는 창조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그러한 결과 도달하는 것이 하나의 자애(自愛)에 그치고 외부환경에 대한 순응에 떨어지는 한이 있다고 하여도 나는 지금 나의 가슴속에 자라나고 있는 새로운 맹아에 대해서 극진한 사랑을 갖지 않을 수는 없겠습니다. 새로운 정세 속에 나의 미래를 세워 놓기 위해서 지금까지 도달하였던 일체의 과거와 그것에 부수되었던 모든 사물이 희생을 당하고 유린을 당하여도 그것은 또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일까 합니다.
물론 결혼에 대한 문구는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경이는 애정에 대한 것만은 변치 않았고 또 앞으로도 변치 않으리라고 생각 하여 보았다. 그러나 무경이는 어떤 급처를 마치 보자기로 송곳을 싸 들고 있는 것 같은 위태로운 심리로 가만히 덮어 놓고 있는 것도 희미하게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보자기를 조금만 힘을 주어서 잡아당기면 날카로운 송곳이 보자기를 뚫고 벌처럼 폐부를 찌르기를 사양치 않을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보자기를 어름어름 가만히 덮어 놓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고 또 무경이의 성격이 그러한 상태에 어물어물 배겨 있도록 철부지도 아니었다. 드디어 오시형이의 편지 내용이 결코 추상적인 문구만이 아니고 실상은 생생한 구체적 사실의 진행을 그러한 추상적인 문구로 표현하여 놓은 데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질 시기가 왔다.
그 뒤 무경이의 몇 장의 편지에 대해서 오시형이에게선 도무지 회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떤 날 짤막한 편지가 한 장 왔는데 그것은 정양하러 어느 온천으로 간다, 통신관계가 빈번한 것은 여러 가지로 재미롭지 않아서 아무에게나 여행한 곳은 알리지 않기로 되었으니 양해하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오시형이가 자기의 사상을 정비하고 정신을 통일시키는 데 방해가 되고 장애가 될 만한 이야기는 될수록 삼가서 편지를 쓰던 무경이었다. 그의 문제를 그 자신이 처리하고 있는 데에 다른 사람의 수작이 하상 무슨 관계냐고 무경이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그로 하여금 그의 문제를 처리케 하라! 새로운 사상의 체계를 세워서 생명의 구원을 받게 하라! 그것이 무경이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 편지가 내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최무경이라는 석 자의 이름과 그 이름으로부터 오는 기억 속에서 해방되겠다고 하는 하나의 전혀 별개의 사실이 아닌가.
무경이는 보자기를 뚫고 올라온 송곳 끝이 제 심장을 쓰라리게 찌르고 있는 것을 느끼며 얼마를 보내었다. 가을이 왔다. 겨울이 왔다. 새해가 왔다. 봄이 닥쳐왔다. 물론 오시형이의 소식은 그대로 끊어진 채로.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 그가 가진 것은 '혼자서 산다'는 억지에 가까운 결심과 자기도 누구에게나 지지 않을 정신적인 발전을 가져 보겠다는 앙심이었다. 나도 나의 생활을 갖자! 나의 생각을 나의 입으로 표현할 만한 자립성을 가져 보자! 오시형이의 영향으로 경제학을 배우던 무경이는 또 그의 가는 방향을 따라 '철학을 배우리라' 방침을 정하는 것이다. '너를 따르고 너를 넘는다!'―---이러한 표어 속에 질투와 울분과 실망과 슬픔과 쓸쓸함과 미움의 일체의 복잡한 감정을 묻어 버리려 애쓰는 것이었다.
무경이는 어머니의 사진 앞에서 머리를 털어 버리고 이내 테이블로 왔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이와나미(岩波)의『철학강좌』를 읽어내려 오고 있었다. 알 듯한 곳도 모르는 대목도 많은 것을 이를 악물고 시험공부하듯이 대들었으나 날이 거듭될수록 어쩐지 제가 점점 어른처럼 되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이 무한히 반가웠다. 책을 접고 침대에 누우면서 또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서 책을 들면서 그는 언제나 '나는 어른이 되어 간다'는 생각을 되풀이하면서 빙그레 웃고 하였다.
아홉시를 친 지 한참을 지나서 강영감의 발자취 소리와 하이힐이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옆의 방문을 열고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방을 보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경이는 그대로 책상 앞에 걸터앉아 있었다.
논문을 쓰는 동안이라면 무슨 논문인지는 모르나 길대야 삼사 개월의 기간이 아닐까. 삼사 개월밖에 들어 있지 않을 사람에게 순순히 방이 비었다고 말한 것은 저의 입으로 한 말이었으나 되새겨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택난이 우심한 요즘에 일이 년의 장기간 동안 떠나지 않고 눌러 있을 손님을 골라서 두기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터인데…… 하고 역시 제가 한 대답이 경솔하였던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거절하여도 결코 늦지는 않다고 생각해 보면서도 사람을 오래 놓고서 어떻게 점잖은 사이에 무책임하게 신의 없는 소리를 뱉어 놓을 수 있을까고 망설여 보는 무경이었다. 실인즉 그는 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은근히 대학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마음이 움직이었고 읽은 책 가운데 모를 대문이 많으면 많을수록 학자라는 존재에 대해서 어떤 흠모의 마음이 은근히 동하게 되어 있던 것이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주판알처럼 사무에 밝은 그가 특별한 천착도 없이 방을 허락한 데는 이러한 요즘의 그의 심경이 은연히 움직인 데 까닭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경이의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난다. 뜨즉뜨즉이 두 번씩 두들기는 건 강영감의 노크다. 그는 책상 앞에서 떠나서 문께로 갔다.
"방 보시구 마음에 든다는데……."
하고 나직이 귀띔하듯이 말하였다. 무경이가 신을 신고 복도로 나가니까 양장한 여자는 앞서서 층계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강영감과 무경이도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리로 들어오시지요."
하고 무경이는 복도로부터 사무실 안으로 안내하였다. 삼십이 넘었을 짙은 화장을 한 아름다운 중년 부인이었다. 양장점을 경영하는 여자이니만큼 옷도 기품이 있게 몸에 붙도록 지어 입었다. 화장이 좀 지나치게 야단스러워서 무경이와 같은 여자의 눈에는 마치 여배우나 여급과 같은 직업의 여자와 얼른 분간을 세우기 힘든 인상을 주었다.
"아파트에서 일보는 사람입니다. 최무경이라고 여쭙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니까,
"문란주(文蘭珠)올시다. 밤늦게 소란스레 굴어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열시 전이니까 그다지 늦은 밤도 아니란 듯이 맞은 바람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보고는,
"방이 마음에 듭니다. 오늘 밤으루 이사해두 괜찮겠지요?"
한다.
"그러시지요. 원체는 한두 달 계실 손님에겐 방을 거절하라는 것이 아파트의 정칙인데……."
하고 열적은 소리기는 하지만 한마디 끼어 보지 않고는 태평할 수가 없었다.
"논문 쓰는 동안이라군 하지만 또 오랫동안 빌려 놓구 이용하실는지두 모르지 않어요. 동경 같은 데선 소설 쓰는 사람들이 자기 주택 외에 모두 아파트 한 칸씩을 빌려 갖구 있다든데요."
그리고는 익숙한 매무시로 호호호 하고 웃어 넘겼다. 웃음을 알맞게 끊고는,
"그럼 곧 이사하겠습니다. 시키킨(전세 보증금) 같은 건 내일 아침에 치르기루 헐까요?"
"그렇게 하시지요. 아침은 될수록 이른 편이 좋겠어요. 그럼."
하고 강영감을 향하여선,
"영감님 좀 늦으셔두 이사하시는 것 보아 드리구 방문 잠그십시오. 그리구……."
다시 문란주 편을 향하여 낯을 돌리고는,
"특별히 규칙이랄 건 없지만 여러 사람이 단체생활을 한다구 무어 이런 걸 만들어 둔 게 있습니다. 참고삼아 틈 있거든 보아 주십시오. 또 그리군 오시는 선생님의 성함자도……."
하고 인쇄물과 카드 조각을 내어놓았다. 문란주는 연필을 들어 종이에 이관형(李觀亨)의 석 자를 써주고 인쇄물을 받아서 들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그럼 또 뵈옵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한 여자는 밖으로 나가고 또 한 여자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때에 연회에서 늦게야 돌아오는 회사원의 한 패가 밖으로부터 몰려 들어오며 강영감에게,
"곰방와(안녕하세요)."
"아아 늦어서 미안합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으나 이내 또 아파트 안은 조용해졌다. 무경이는 다시 제 방에 들어와서 문을 잠그고 책상 앞으로 갔다.
2
[편집]테이블과 양복장 같은 것은 방에 붙은 것이 있으니까 새로이 끌어들일 턱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참고서적도 많을 것이요 침구라든가 신변도구 같은 것의 운반으로 하여 적지 않이 시간을 잡아먹을 이사일 줄 예상하였고 어련히들 주의야 하겠지만 동숙인들이 잠든 시간에 혹시 안면방해가 되는 일이나 없을까고도 생각해 보았던만큼 자정도 되기 전에 발자국 소리 외엔 별반 요란스러운 음향도 없이 아주 쉽사리 간단하니 반이나 끝난 듯싶어졌을 때엔 무경이는 일변 안도하면서도 다소 실망을 느꼈다.
하기는 집이 서울 안에 있으니까 간단히 가방깨나 날라 오고 뒷날 차차 소용되는 대로 짐을 날라 들일는지도 모를 것이므로 무경이는 그런 것을 오래 생각지는 않았다. 이관형이와 문란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상상할 수가 없어서 다소 궁금하다면 궁금하였으나 이사 오는 사람이나 동숙인의 가정관계를 소상히 알고 싶다는 필요하지 않은 악취미에서 벗어난 지도 이미 오래인 그이므로 이사가 끝나고 한참 있다가 하이힐이 복도를 지나 층계를 내려가 버리는 것을 듣고는 그런 것에도 별반 오래 머리를 쓰지는 않았다.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도 물론 새로운 일이 생겨날 리 만무였고 여느 때보다 출근하는 사람이 많은 이 집안은 아침이 가장 뒤숭숭한 시간이라 문소리 발자국 소리 말소리 같은 것이 어느 방 어느 사람의 것인지를 분간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무경이는 어느 날이나 진배없이 일찌감치 일어나서 물을 끓여 세수를 하고 간단히 아침을 지어 먹었다. 아홉시가 출근시간이므로 그때가 되기까지는 방 안에서 책을 읽었다. 아홉시 치는 것을 듣고야 사무실로 나갔다. 무경이가 나가는 것과 교대해서 사무실을 치워 놓고 스팀에 석탄을 지피는 일을 끝막은 강영감이 일단 집으로 돌아간다. 열시가 되어 점심 벤또를 끼고 강영감이 나타나고 조금 있다가 주인이 나타났다. 무경이에게 이 년 동안이나 일을 맡겨 둔 주인은 오전중에 아무 때나 잠시 얼굴을 내놓고 장부나 검사해 보고는 다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무경이는 그가 들어올 때를 기다려서 장부를 정비해 두었다가 하루 동안의 일을 소상히 보고하였다.
"어제 삼층 이십이호에 있던 회사원이 나가고 밤 안으로 이관형이라고 하는 대학 강사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나간 사람의 보증금 중에서 이번 달 치를 제하고 지출한 것이 이게고……."
하면서 그는 전표를 가리킨다.
"새로 들어온 사람의 회계는 아직 보지 않았으나 오전중에 계약이 끝날 것입니다. 오늘 들어온 걸루 헐라구요. 그리구 이건 각각 이번달 치 방세들하구 또 이 지출은 전등료."
주인은 가느다란 도장을 들고 하나하나 장부와 전표 위에 인장을 눌러 치우고는 아무 말 없이 입금 중에서 얼마를 남겨 놓고 사무실을 나갔다. 식당을 한번 돌고 복도를 삥 시찰하듯 하고는,
"그럼 난 나가우."
하고 뚱뚱한 몸을 길 위로 옮겨 놓았다. 주인이 나간 뒤 얼마가 지나서 보일러를 돌아보고 온 강영감이,
"어젯밤 새루 들어온 양반 회계 끝났었나?"
하고 물었다.
"글쎄 여태 아무 소식두 없구먼요."
강영감은 숙직실 앞으로 가다가 멈칫 하고 서면서,
"그 양반의 직업이 무엇이라구 허셨지?"
하고 돌아본다.
"대학 강사랍디다. 왜요?"
"대학 강사."
그렇게 다시 나직이 뇌기만 하고는 그 이상 이야기를 잇지 않았으나,
"그 한번 채근해 보시지."
하고 무경이 앞으로 걸어왔다.
"글쎄, 오늘 일찍이 회계를 보기루 일러두었는데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학자님이시라 그런 건 통히 잊어버린 게로구먼요. 그럼 영감님 수고스럽더래두 한번 올라가 보시구려."
강영감은 잠시 눈을 꿈뻑꿈뻑하고 서 있었다. 오래지 않아 봄이라는데 그는 여태 털 떨어진 방한모를 귀밑에까지 푹 눌러쓰고 보일러 칸으로 드나든다. 바지 위에 작업복이 낡아서 푸르등등한 놈을 껴입고 웃저고리 위에도 털 떨어진 체부 옷을 단추가 두 개나 떨어진 대로 껴입고 있었다. 신발만은 아파트의 손님이 신다가 내버린 틀어진 깃도 단화였다.
"그럼 내 올라가 보지."
모자를 벗어서 놓고 맹숭맹숭하게 갓 깎은 머리를 갈구리 같은 손으로 한번 써억 젖혔다. 그리고는 슬근슬근 복도를 걸어나갔다.
무경이는 강영감의 태도에서 마땅치 않아하는 눈치를 느낄 수 있었으나 제 비위에 맞지 않을 때엔 가끔 있는 일이므로 공연한 오해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연세가 연세인지라 자기가 못마땅히 생각하여도 남의 앞에서 그런 것을 경솔히 지껄이지는 않는 성미였다. 그저 꿈뻑꿈뻑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것이 그러할 때의 표정이었다. 어젯밤 찾아왔던 양장한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도 강영감은 그런 표정을 지어 보였었다. 역시 그런 것이 원인이 되어서 일종의 오해까지도 품어 보게 된 것일 게라고 생각은 해보는 것이나 아침 일찍이 회계를 보자고 언약해 놓고서 일언반구의 이렇다할 말이 없는 것도 심상치 않은 일이거니와 열한시가 되어 오는데 식당에도 내려오는 기척이 없으니 어느새 취사도구를 정비해 놓고 아침을 손수 지어 먹은 것인가 도무지 어인 일인지 감감 동정을 알 수가 없었다. 양장한 여자가 그런 사연을 통히 전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또 그랬었다면 그 양장한 여자라도 이르게 얼굴을 보이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도 노상히 생각되어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고 있는데 한참 만에 강영감이 적이 뚜우한 낯짝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위층으로부터 내려왔다. 하회가 궁금한데도 이내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단 불유쾌한 표정이었다. 잠시 책상 언저리를 빙빙 돌다가 혼자말로,
"고오연 친구여 젊은 사람이!"
하고 한마디 툭 뱉었다. 무경이는 종시 말썽이 생기나 보다고 내심 걱정이 되면서도,
"왜요?"
하고 입술 위엔 웃음을 그려 본다.
"흥, 그 사람이 대학교 선생이라구? 온 참!"
또 한번 그렇게 뇌더니 무경이의 앞으로 와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당최 어떻게 된 사람인 걸 알 도리가 있어야지. 자아 이거 보겠나. 늘 하는 본새로 떵떵떵떵 그 노크라는 걸 허지 않었나. 대여섯 번 겹쳐 해두 도무지 하회가 없겠다. 그래서 또 한번 커다랗게 두드렸더니 그제야 누구인지 들어오시오, 점잖다면 점잖고 또 거만하다면 거만하달 대답이 들리길래 문을 비틀어 보았더니 참말 문을 잠그지는 않었어. 그래서 낯을 문틈으로 들여보내려구 허는데 방 안에 자옥한 연기 그대루 곰을 잡을 작정인지 그냥 담배연기가 눈을 뜰 수 없게시리 가득히 찼더란 말이여. 그러나 나야 또 무어 글이래두 쓰면서 딴정신이 없어서 담뱃내 찬 것두 모르는 줄 알었지. 침대에 번듯이 자빠 누웠는 줄이야 알었을 도리가 있나. 그 입은 것 허며 그 머리라 낯짝이라……."
차마 입에다 옮길 수 없다는 듯이 주름살진 표정을 잠시 쭈그러뜨려 보이고 말을 끊었다가,
"내 벌써 어젯밤부터 꼬락서니를 보고서 콧집이 찌그러진 줄 알었었지만, 자아 어젯밤 최선생 올라간 뒤에 그 양반들 이사 오던 꼬락서니 좀 보았나. 그저 가방 하나만을 들고 차에서 내려서 껑충껑충 들어오는데 그 야단스런 부인네는 조꼬만 보꾸레미를 하나 들고서 앞서서 뛰어들어가고 이 대학 선생이란 양반은 모자를 썼겠다. 무어 벤벤한 양복깨미나 허긴 낡아빠진 외투는 꺼칠허게 뒤집어썼으면서두…… 어쨌던 벌써 콧집이 틀려먹은걸…… 그런데 이 사람이 오늘은 번뜻이 침대에 누워설랑은 그저 담배만 죽여 대인 모양이지. 그래서…… 저 여기 규칙대루다 보증금 석 달 치허구 한 달 치 선금일랑을 치르셔야 허겠는뎁쇼 하고 말했을 것 아니여. 그랬더니 그저 암말 않고 나가 있어 한마디뿐이라. ……아니올세다, 규칙대루 헌다면 보증금과 선금 치른 뒤에야 이사하는 건뎁쇼. 선생님껜 특별히 규칙 위반으루다 대접해 드린 것이올세다. 이렇게 또 한번 공순히 설명해 드렸는데두 그러게 잔말 말구 내려가 있으라는군그래. 부애가 나서 견뎌 배길 도리가 있나. 아니올세다. 규칙대루 이행허시기 싫은 분은 부득불 방을 내기루 되어 있는뎁쇼. 허구서 한번 을러 놓았드니 허 허어 거 참! 영감은 소용 없으니 주인을 보내래눈! 돈은 사무실에 내려오서서 치르게 되었는뎁쇼. 허구서 또 한번 빈정거렸더니 벌떡 일어나면서 잔말 말고 나가서 주인을 보내! 허구 호령이겠지. 난 당최 그 입은 것 허며 낯바대기가 무서워 수작을 걸기두 싫여서 엥이 문을 찌끈 닫고 내려와 버렸지. 거 참! 그 무슨 오라질 대학교 선생이람! 대체 어저께 왔던 그 여펜네가 잡년야, 그게 바루 여급 아냐, 술집에서 술 따르는 그러잖으면 활동사진 박히는 광대년이든지……."
"양장점 경영하는 부인네랍니다."
별로 변호해 준다는 의식은 없었으나 좀 과장하는 버릇이 있는 강영감인지라 무경이는 나직이 그렇게 설명해 주었다.
"양장점?"
"네 부인네들 양복 짓는."
그랬더니 강영감은 기가 좀 사그라지는지,
"양장점을 허는지 무얼 허는지 모르지만……."
하고 숙직하는 방으로 갔다.
"수고하셨습니다. 내 그럼 올라가 만나 보지요. 허긴 나두 주인은 아닌데."
무경이는 농말을 지껄여서 가볍게 취급해 버리며 사무실을 나왔으나 물론 강영감의 보고는 그를 적지 않게 불쾌하게 만들었다. 이십이 호실 앞에 서니까 제법 마음이 긴장되었다. 노크를 하니까 강영감의 이야기처럼 참말 '누구신지 들어오시오' 하는 느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남자가 혼자 들어 있는 방이라 주저도 되었지만 가만히 핸들을 비틀고 얼굴보다 스커트 자락과 구두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찾아온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추라는 예고로서 하는 것이다. 잠시 동안을 두고 밖에서 기다리는데 연기에 찬 방 안의 공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이윽고 그는 얼굴을 나타내고 열어 젖힌 문으로 몸을 완전히 방 안에 들여세웠다. 그러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내는 그대로 번뜻이 천장을 바라보며 담배만 피우고 있을 뿐 이편 쪽으론 눈길도 보내지 않았었고 그러니 무경이가 구두나 스커트를 먼저 들여놓았다든가 하는 세밀한 기교도 알아줄 턱이 만무하여 통히 들어온 사람이 젊은 여자라는 것에도 생각이 미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얄따란 차렵이불을 배퉁이께로부터 발치 위에 덮었고 상반신은 여자의 것이기 확실한 화려하고 화사한 가운을 두르고 있었다.
"아이 연기."
나직이 그렇게 말하면서 사내의 귀에 들리도록 인기척을 만들었다. 사내는 뻐끔히 머리를 들어 보았다. 여태껏 여자인 줄은 몰랐었던지 이윽고 벌떡 자리에서 상반신을 일으킨다. 머리가 뒤설켜서 구숭숭한데 면도를 넣은 지 오래되는 얼굴 전체에는 지저분한 반찬 가시 같은 수염이 쭉 깔렸다. 얼굴은 해사했으나 몹시 창백한 것 같았다. 옆구리에 놓았던 것인지 빵조각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다.
사내는 자기의 모양 하며 옷 주제 하며가 여자의 앞이라 다소 부끄러웠었던지 잠시 당황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았으나,
"아파트의 주인은 안 계시고 제가 그 대리를 맡아보는 사람입니다."
하는 침착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는 다시 무뚝뚝한 낯색으로 표정을 고치고,
"당신네 집이선 어째 손님에 대한 예의가 그렇습니까."
하고 외면을 한 채 항의 비슷한 트집을 쏟아 놓기 시작하였다.
"글쎄올시다, 여러 분을 대하게 되는 관계상 소홀하게 되는 수도 많으리라고 믿습니다마는 지금 올라왔던 영감님께서 어떤 실수를 하셨던가요?"
무경이도 지지 않고 따질 것은 따져 놓자는 뱃심이었다. 사내는 잠시 말을 끊었으나,
"집세고 보증금이고 치르면 될 거 아닙니까. 손님에게 무례한 짓을 하지 않고도 받을 돈은 받을 수 있지 않어요?"
"그야 그렇겠습지요. 그러나 말씀하섰던 언약이 잘 지켜지지 않고 또 어젯밤에 하신 말씀과는 잘 부합되지 않는 곳도 있으니까 아마 영감님의 욱된 생각에 그만 실수가 된 것 같습니다."
"언약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든가 어젯밤에 하던 말과 부합되지 않는 곳도 있다니 대체 내가 당신네들과 무슨 굳은 맹서를 하였단 말이오?"
무경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 사내는 침대에 다리를 뻗고 앉은 채 자기는 문지방에 선 채 이런 다툼을 서로 건네고 있는 것이 우습기도 하였지만 아파트를 대표해서 이야기하는 이상 따질 대로는 따져 본다고 다시 생각한다.
"선생님과는 지금이 초면이니까 그런 약속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만 어저께 오섰던 부인네의 말씀을 신용하고 방을 빌려 준 것이지 본시부터 선생님을 친히 뵈옵고 언약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내의 자부심을 다소 건드려 주는 말투였다. 사내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양복 위에 여자의 가운을 입은 품이 어쩐지 우스웠다.
"대체 어떤 내용의 언약입니까. 손님에게 아무런 무례한 짓을 하여도 움찍달싹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했었던가요?"
사내는 면바로 무경이를 쳐다보았다.
"어제 부인네의 말씀에는 손님의 직업은 제국대학의 강사요, 방을 빌리는 목적은 논문을 쓰시는 데 있다 하였고 방세와 보증금은 오늘 새벽에 치르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내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말문이 막혀 버렸을 뿐 아니라 몸 자세에서도 기운이 쑥 빠져 버리는 것이 옆의 사람의 눈에도 현저하게 보이었다.
그는 가만히 외면하고 침대 옆으로 가 섰다.
"대학 강사."
하고 나직하니 외우듯 하는 것이 들려 왔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몸을 돌리어 이편 쪽을 보면서,
"내 직업이 대학 강사라든가 내가 이 방 안에서 논문을 쓴다고 말했다면 그건 거짓이었으니까 내 입으로 취소하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건 결국 보증금과 방세 문제 아냐요. 남에게 방해되는 일이 아닌 이상 논문을 쓰든 글을 읽든 그런 것에 관계할 필요는 없을 테구 또 직업 같은 것두 대학 강사라야 된다는 규정이 있을 턱은 없을 거구……."
"글쎄, 그렇게두 말씀하실 수 있겠지요."
"그럼."
하고 사내는 양복 주머니에다 손을 넣었다.
"돈은 오늘 안으루 해드릴 터이구 또 그때까지 믿으시기 힘들다면 나를 인질루 잡아 두는 겸 내가 몸에 지니구 있는 소지품이라군 이 금시계가 하나 있을 뿐이니까 이걸 그럼 그때까지 맡어 두십시오."
시계를 꺼내서 보이었다.
"온 별말씀을! 여기가 무어 전당폰 줄 아십니까?"
"그럼 어떡하라는 겁니까? 몇 시간의 여유도 헐 수 없으니 당장에 나가라는 말입니까?"
이렇게 적이 난처한 장면이 벌어지려 할 때에 마침 층계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고 어저께 왔던 양장한 여자가 커다란 물건 꾸러미를 들고 또 한 사람 운전사에게 이불 보퉁이 같은 짐을 들려 갖고 올라오고 있는 것이 무경이의 곁눈에 띄었다.
"아이 안녕하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문란주는 문지방에 서 있는 최무경이에게 인사하였으나 그들의 소 닭 보듯 하고 서 있는 엉거주춤한 몰골을 보고는,
"어째 이러십니까. 무어 말썽이 생겼습니까?"
무경이를 향해서는 유쾌한 웃음을 보내면서 일변 운전사의 손에서 보꾸러미를,
"영치기."
소리를 내어서 옮겨 놓고 눈살을 찌푸리고 뚜우해서 서 있는 사내에겐,
"왜 이렇게 장승처럼 서 있수."
그러나 곧 무경이 쪽을 보면서,
"내 인제 곧 내려갈게요."
하고 말하였다.
무경이는 어떻게 또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갈 멋도 없고 부인네에게 지금 지낸 사연을 옮겨 들려주고 따져 볼 맛도 없어서 그대로 멍청하니 서 있었고 또 이관형이라고 하는 방 안의 사내도 어떡하라는 것이냐고 따지는 것도 한낱 실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 것처럼 시무룩해서 침대에 가서 벌떡 누워 버린다. 어이가 없어서 무경이는 그대로 문을 닫아 주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사무실에 돌아오니까 강영감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불쾌하고 노엽다느니보다도 우스꽝스런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판국인지 저도 한몫 끼긴 하였으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 같다.
이관형이라는 사내는 어떠한 부류의 사람일까, 모양이나 차림차림은 그 지경이지만 물론 강영감이 보는 바와 같은 인상만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학 강사가 아닌 것도 확실하고, 그러면 문란주는 어째서 거짓 직업을 주워 부르면서 하필 대학 강사를 골라 대게 되었던 것일까. 회사원이래도 그만이요, 광산가래도 그만이요, 그 밖에 어떠한 직업으로 손쉽게 불러 댈 것이 많은 중에서 하필 대학 강사이었던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문란주가 내려왔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대강한 사연은 들었는지,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하고만 말하고는 상냥스레 웃어 보였다. 오늘도 역시 화장은 짙게 이쁘장스럽게 하였다. 눈과 입술과 턱밑으로 자세히 보면 퍽 솜씨 있고 능숙한 화장이었다. 그는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핸드백을 열어서 지갑을 꺼냈다. 가느다란 흰 손가락 끝이 빨간 에나멜이어서 이상스레 연약하고 화사스런 인상을 주었다.
"보증금이 석 달 치니까 일백오 원이시죠! 그리군 일 개월분 방세가 삼십오 원, 일백사십 원이면 되겠지요?"
무경이는 별로 대꾸도 하지 않고 펜을 들어 서류를 꾸미고 돈을 세어서 금고에 넣었다. 그러고도 숙박기를 꺼내서 정식으로 이관형이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직업은요?"
하고 새삼스럽게 물어 놓고는 직업란 위에 펜대를 세운 채 가만히 기다려 본다.
"글쎄, 직업이 생각해 보니 우습게 되었군요."
하고 머리 위에서 문란주가 말하였다. 시방 위층에서 그것 때문에 말썽이 있었던 것인지,
"실상인즉요, 얼마 전꺼정 대학에 강사루 있었는데 그만 그 방면에서 실패를 하셨답니다. 그래서 어저께는 그냥 대학 강사라구 했었는데 그러니 지금이야 따져 말하자면 무직이지요. 당자두 무직이 좋다니까 그대루 무직이라구 적어 두세요. 연령은 스물일곱 아니 작년에 스물일곱이었으니까 지금은 이십팔……."
3
[편집]독신용의 방이 서른여섯에 가족용의 두 칸씩 맞붙은 방이 스물다섯이나 되어서 백 명이 훨씬 넘는 식솔이 살고 있는 집이고 보니 들고나는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따져서 기억해 둘 수도 없고 또 그 이상 그 사람들의 성품이나 생활습속 같은 것에 대해서 눈여겨볼 겨를이나 흥미도 없으므로 일단 사람을 들여놓은 뒤에는 특별한 일이나 없으면 그다지 밀접한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기야 무경이가 한집안에서 자고 먹고 하였고 또 출입구가 있는 옆에 사무실이 있어서 손님들측으로 보면 눈에 익은 존재였으나 무경이 편으로 보자면 한 달에 한 번씩 방세나 받고 난방비나 전등료나 급수료 같은 것이나 받아 치우면 규칙을 문란하게 하지 않는 이상 아무러한 교섭이나 간섭 같은 것을 가지게 될 리 만무하였다. 사무실 밖에서 상서롭지 못한 일로 무경이가 그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은 거의 없어 그런 때마다 강영감이나 주인 자신이 나서서 처리해 왔으므로 무경이는 복도에서 만나도 오래된 사람이 아니고는 그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이관형이도 응당히 그러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며칠 동안 한집 옆방에 같이 지내면서 그의 낯을 다시 대해 본 적도 없었으나 어쩐지 그의 생각만은 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들어오는 날부터 교섭이 이상해졌고 또 사람 된 품이 보통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하루 한두 번씩 그를 찾아오는 문란주를 주목해 보는 때마다 역시 이관형의 존재는 언제나 머리에 떠올랐다. 그래서 자기 방으로 돌아갈 때엔 대체 이 사람은 나의 옆방에서 하루 종일 무엇으로 소일을 하는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곤 하였다.
대학 강사에서 실패한 사람. 그대로 대학 강사래도 모르겠는데 그것에서 실패하고 그리고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르고 여자의 가운을 걸치고 번듯이 침대에 누워서 담배만 피우고 빵조각이나 씹다가는 머리맡에 팽개쳐 두고…… 이런 것이 가끔 이상하고도 우스꽝스러워서 무료할 때마다 때때로 머리에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강영감은 강영감대로 문란주가 나타나는 것만 보면 으레,
"양복점 주인 아씨가 또 오셨군, 대학교 선생 심방하러."
하고 말하곤 하여서 무경이는 책상에 머리를 묻고 사무에 열중하다가도 그들의 관계로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영감님은 그 여자완 기쓰구 해봅니다그려."
하고 웃는 말로 하면,
"흥."
하고 코방귀를 뀐 뒤엔,
"무어 그럴 일도 없지만 난 그 부인네와 사내의 관계가 이상스러워서 그러지 않나. 친척이라든가 그런 관계는 아니여, 내 눈은 속이지 못하지. 대학교 선생이라구 뻐기먼서두 내 눈이야 어디 속였나."
무경이의 대답이 없어도 입 안으로,
"심상하잖어! 내 눈이야 속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보일러칸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서는 무경이도 영감의 이끄는 대로 문란주와 이관형이의 관계로 생각을 달리게 되는 수가 있었는데 남들의 남녀관계에 젊은 여자가 무슨 참견이냐고 낯을 붉히면서도 가끔 그러한 것을 천착해 보고 앉았는 저 자신을 발견해 보게 되는 것이었다.
이관형이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 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출근시간에 사무실로 내려가니까 그와 교대해서 저희 집으로 가는 강영감이,
"거 이상허지. 하루에 한두 번씩은 꼭 오군 허는 그 양복점 아씨께서 어제는 결근을 허셨어. 밤에나 올련가 했더니 거 웬셈일까."
하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무경이는 그저,
"그래요."
하고만 대답하고 그러한 이야기에 깊이 생각을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정이 넘고 한시가 되었을 때였다. 사무실 안에서 별로 할 것도 없고 하여 잡지를 들고 앉았는데 이 집에 이사 온 지 처음으로 이관형이라는 그 사내가 휘우청휘우청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다. 머리와 낯바닥은 그대로였으나 옷은 양복뿐으로 물론 여자의 가운 같은 것은 둘렀을 리 만무하였다. 무경이는 잡지를 든 채 그의 거동을 눈여겨보았다. 그는 층계를 내려오더니 우선 복도를 한번 쭉 살펴본다. 아래층은 절반 이상이 식당과 당구장과 목욕탕이 되어 있으므로 그런 것을 패쪽을 따라서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흥미가 있는지 느린 다리를 이끌며 패쪽 밑으로 가서 기웃기웃 방 안의 설비 같은 것을 엿보듯 하더니 다시 제 방으로 올라갔다. 한참 만에 그는 편지 봉투를 하나 들고 내려와서 이번에는 곧바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문 안에서 껀뜩 머리를 수그리었다. 무경이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받았다.
"전화 좀 빌려 주십시오."
무경이는 아무 말 않고 전화통을 옮겨 주었다. 그는 다시 전화번호 책을 찾아서 뒤적거리더니,
"여기서 가까이 대 두구 쓰는 용달사가 없습니까?"
하고 묻는다.
"있습니다."
그리고는 번호를 가르쳐 준 대로 번호를 부르고 메신저 하나만 보내 달라고 말하였다. 전화를 끊고는 메신저가 오는 동안 제 방에 올라가 있을 것인가 여기서 기다릴 것인가를 망설이는 듯이 잠깐 주춤 하고 서 있다.
"여기 앉으시오, 곧 올 겁니다. 그리구 전화는 삼층에두 하나 설비해 놓았으니까 스위치를 돌리시구 인제부터 거기서 이용하시지요."
"아, 네에, 그렇습니까. 미처 몰랐습니다."
이관형이는 의자에 앉았다. 무경이는 사내와 낯을 마주 대하고 앉았기가 면구스러워서 잡지에 눈을 묻었으나,
"거 어째 이발소가 없습니까?"
하고 사내가 물어서 그는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는 사내의 시선과 부딪쳐서 이상스럽게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았다. 인제 이발할 생각이 나는 게로군 하고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이발소는 처음에 시작했으나 요 바루 맞은편에 오래된 이발소가 있어서 도무지 영업이 되질 않었답니다. 이 집 사람들만 가지구야 영업이 성립되겠어요. 일백이삼십 명 된다구 허지만 그 중엔 부인네두 많구 한 사람이 두 번씩 깎는다 쳐두 한 달에 오륙십 원 수입밖에 더 되겠어요. 이발사 한 사람을 채용해두 수지가 맞들 않습니다. 그래 가까운 데 이발소두 있고 해서 폐지를 했답니다."
"하하아 그렇겠군요."
이관형이는 감탄하는 듯이 목을 주억거렸다.
"그 이발소 자리는 오락장이 되었지요, 바로 목욕탕 옆방."
"예에."
그리고 있는데 메신저가 들어와서 이관형이는 편지를 그에게 맡겼다.
"이 윤선생이 안 계시다면 아무한테두 보이지 말구 그대루 갖구 돌아와."
하고 타일렀다.
"돌아오건 좀 제 방으루 보내 주십시오."
부탁하고 이관형이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 사십 분 걸려서 메신저가 돌아왔다. 윤아무개한테 편지는 전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또다시 한 삼십 분 지난 뒤에 둥실둥실하게 생긴 멀끔하고 정력적인 젊은 신사가 아파트를 찾아와서 이관형이를 물었다. 무경이는 그에게 방을 가르쳐 주면서 이 사람이 아까 용달을 보냈던 윤아무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인제 오래인 잠을 깨어나서 차차 움직이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생각해 보면 어쩐지 이관형이의 거동이 탈피작용(脫皮作用)을 하고 있는 동물처럼 생각되어 웃음이 났다. 그러나저러나 대학 강사가 되었다가 실패하곤 저런 판국을 경험하게 되는 것인가고 생각하면 어떤 엄숙한 인생의 문제에 부딪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적지 않이 침울해졌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오시형이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내들이란 어떤 커다란 문제 앞에 서면 저렇게 평상되지 않은 행동을 가지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아주 그러한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져 버리면 타락자가 되고 낙오자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일까. 이관형이의 오늘 행동이 그러한 구렁텅이로부터 정상된 생활상태로 복귀하려는 사람의 몸부림 같아서 그는 지금 아까와 같이 웃음이 떠오르지도 않는 것이다.
얼마 해서 윤아무개는 나갔다. 한참 뒤에 이관형이가 다시금 층계 위에 나타난 것은 그때에 마침 강영감이 사무실에 있어서,
"어유 저 사람이 어떻게 된 셈판인가, 목욕할 생각을 다 내구."
참말 밖을 내다보니까 이관형이는 수건을 들고 복도에 내려서고 있었다. 잠시 목욕간을 넘겨다보고는 이편 쪽으로 낯을 돌리고 사무실로 들어온다.
"이거 자주 들러서 사무 보시는 데 죄송합니다. 미안하지만 은행 시간이 넘었구 해서 말씀 여쭙는데 소절수 한 장 바꾸어 주실 수 없을까요?"
시계는 세시 반이 넘었었다.
"글쎄, 얼마나 쓰시려는지요. 돈이 많지는 못한데."
"천 원짜리지만 우선 있는 대루 돌려 주시지요. 적어두 좋습니다."
"한 이백 원."
"네, 그게믄 충분합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소절수 한 장을 꺼내서 무경이에게 넘겼다. 윤갑수라는 사람의 소절수였다. 무경이가 금고를 여는 동안 이관형이는 무료히 서 있다가, 문득 강영감을 발견하고,
"일전 일루 영감께선 여태 노하셨습니까?"
하고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껄껄 웃었다. 강영감은 관형이가 웃는 바람에 적지 않이 겸연쩍어져서,
"온 천만에 말씀을, 고만 일에 노헐 나입니까."
하고 제법 여태까지의 일은 잊어버린 듯이 대답하였으나 그래도 그다지 마땅하지는 못한 것인지 슬며시 문을 열고 복도로 빠져나갔다.
그것을 보고는 무경이도 함께 미소를 입술가에 그려 보았다.
"이백 원이올시다. 세어 보십시오. 그럼 이 소절수는 맡아 두었다가 내일 찾아다 드리지요. 식산은행이시죠?"
관형이는 돈을 받아서 넣으며,
"고맙습니다."
그리곤 휙 낯을 돌리다가 시계 밑에 붙여 놓은 길쯤한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에 놀란 듯이 여자가 옆에 있는 것도 불구하고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터거리를 한번 쓱 쓸어 본다. 그리고는 무경이를 곁눈질하고 씨익하니 웃었다.
"면도를 빌려 드릴까요?"
그러니까 사내는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에이 뭐 면도는요."
하고 데석을 썰레썰레 털었다. 그러나 잠시 더 멍청하니 서서 거울을 바라보다가,
"제 면도가 아마 여기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힐끗 무경이를 본다. 남의 남자에게 면도를 빌려 준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수상쩍은 일이어서 나직이 변명하듯이 서랍에서 면도를 찾으며 중얼거린다.
"이사 올 때 잊었다가 핸드백에 넣었더니 배가 불러서 꺼내 두었었는데…… 여기 있습니다. 잘 들는지 모르지만 써보시지요. 전 통히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관형이는 면도를 얻어 들고 비눗곽을 타월로 잘라 맨 것을 디룽궁디룽궁 휘저으며, 욕탕 있는 데로 갔다. 그 뒷모양이 우스워서 무경이는 욕탕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시가 가까워서 사무실은 강영감에게 맡겨 놓고 무경이는 다녀온 지도 얼마 되고 하여 어머니한테로 갔다. 어머니와 정일수 씨는 장충단 이편 앵구장이라는 주택지에 살고 있었다. 가면 언제나 반가워하고 쓰다듬어 줄 듯이 고맙게 친절히 해주었으나 한 시간쯤 앉았노라면 으레 인제 아파트의 사무원은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권면(勸勉)이 퉁겨 나오곤 하였다. 먹을 것이 없니 입을 것이 없니 방 한 칸을 빌려 갖고 사는 건 살림이 간편해서 네 말마따나 좋을는지 모른다 쳐도 무엇 때문에 남에게 구속받는 생활을 하면서 뭇사람의 시중을 드느냐 하는 것이 언제나 판에 박은 듯이 나오는 어머니의 말이었다. 어머니나 정일수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고 무경이 자신조차도 그러한 생각을 먹어 볼 때가 있으므로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그는 그저 좋은 말로 어루만져 두는 것이었으나 오늘은 기어이 속시원히 동경 같은 데루 학교나 가보는 것이 어떠냐는 말까지 나오고야 말았다.
무경이는 저녁도 얻어먹지 않고 붙잡는 어머니를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서 뿌리쳐 버리고 앵구장을 나섰다. 교외에 나가 보면 봄이 한 걸음 한 걸음 닥쳐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해질 무렵의 거리를 걸으면서 생각에 잠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시형이와 자기와의 관계가 이미 파탄이 나버린 지 오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으나 속시원히 공부나 더 해보라는 권면 뒤에는 벌써 그러한 눈치가 숨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오시형이와 나와의 관계는 남들이 생각하듯이 완전히 끝이 나버린 것일까, 시형이가 들었던 방과 시형이를 위하여 얻었던 직업을 이렇게 놓아 주지 않고 있는 것은 남들이 보듯이 쓸데없는 고집에 불과한 것은 아닌 것일까.
맥이 풀려서 그는 지나가는 자동차를 잡아타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빈방 안에 앉아 보아도 마음은 그대로 침울하였다.
시형이의 애정을 인제는 믿지 않는다고 제 마음에 타일러 온 것은 벌써부터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 타이르고 뇌보고 하는 것을 지금 새삼스럽게 인정하려 들면 역시 마음은 어느 귀퉁이에선가 도리질을 계속하는 것이다.
사람의 일이 설마 그럴 수야 있을까. 설마 그럴 수야―---이 설마에 매달려서 그것을 생활의 유일한 기둥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는 머리를 털고 일어나서 전등을 켰다. 열심히 방을 정돈하였다. 문을 열어 젖히고 활짝 먼지를 털고 걸레를 치고…… 그러면 가슴이 좀 후련해졌다. 그는 식당으로 가서 오래간만에 정식을 먹었다. 거의 다 먹었는데 이관형이가 아주 딴판인 모습으로 식당엘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님이 더러 있어서 그는 이내 무경이를 발견하지는 못하였으나 식당 안에 들어와 본 것이 처음인지 방 안을 한번 휘둘러 살피다가 무경이가 밥을 먹고 앉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옷은 별것이 아니었으나 면도를 하고 안 하는 데 사내의 얼굴이란 저렇게 달라지는 것인지 불빛 밑이라 낯빛은 의연히 창백했으나 그럴수록 부드럽게 감아서 말린 머리카락 밑에 백석(白晳)이란 형용이 들어맞을 온후하면서도 날카로운 얼굴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다. 면도를 빌려 주기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밥 먹던 손을 놓고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맞아 주듯 하였다.
"진지 잡수러 오십니까?"
"네, 처음으로 식당을 좀 이용해 보려고요. 참 면도는 선생님이 안계셔서 제 방에 가져다 두었는데 선생님께선 오늘 늦게까지 사무 보십니까?"
이관형이는 옆의 테이블에 앉으며 말을 건네었다.
"저두 이 집에서 기거합니다. 바로 선생님 옆방인걸요."
그걸 여태 몰랐다는 듯이 사내는 '네에' 하고 놀라면서,
"그런 걸 모르구 일주일 가까이 지냈으니……."
따라온 보이에겐,
"나도 저 선생님 잡숫는 걸루 갖다 주게."
하고 일러 놓곤 무경이의 시선과 마주쳐서 허허어 하고 웃었다.
"그러시면 이십삼호든가 사호든가!"
"네, 이십삼호요."
"그래서 면도가 다 있으셨군그래."
그리고는 또 웃어 보였다. 식사 끝이 화려한 것 같아서 무경이는 유쾌하였다.
"전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관형이의 시킨 것이 오기 전에 그는 자리를 떴다. 방으로 돌아와서 찻잔을 부시고 가스에 물을 끓였다. 불을 밝히고 마음을 가라앉히어 책이나 읽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한참 만에 주전자의 물이 끓어서 그는 잔을 내어 놓고 홍차를 만들었다. 그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여니까 이관형이었다.
"면도 가져왔습니다. 난 또 남의 방에 잘못 들어오진 않나 하구서……."
"그대루 두시구 쓰실 걸 그랬지요. 그러나저러나 좀 들어오세요. 지금 막 홍차를 만들던 중입니다. 들어오셔서 한잔 잡수세요. 립톤이 좀 남은 게 있어서, 자아 방은 누추하고 좁지만."
관형이는 문지방에서 잠시 머뭇머뭇하였으나,
"방을 아주 깨끗이 정돈하셨군요. 이렇게 청결해야만 되는 건데 우리 같은 사람은 도시 이런 아파트 생활에 부적당합니다."
침대가 있는 데와 취사상이 있는 데는 모두 두터운 커튼을 쳐서 여자의 방 같은 화사한 색채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럼 한잔 얻어먹을까. 오래간만에…… 이거 너무 실례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응접 의자로 안내하고는 조그만 앞치마를 스웨터 위에다 두르고 무경이는 홍차를 만들었다.
"선생님 공부하십니다그려."
하고 놀란 듯이 뒤에 놓은 서가와 그 옆으로 쌓아 놓은 많은 서적을 굽어본다. 무경이의 것 외에 오시형이가 미결감에서 보던 것이 대부분 그대로 있어서 서적은 의외로 많았었다.
"그저 허는 시늉이나 합니다."
"아니 거 대부분이 철학이 아닙니까."
그는 참말로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차를 가져다 앞에 놓아도 무경이의 얼굴만 감탄하는 낯으로 뻐언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그러시지 마세요.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한다는 칭찬을 받는 것은 그다지 불쾌한 일은 아니었다.
"어서 식기 전에 차 드세요."
관형이는 깊이 감동된 듯한 얼굴로 가만히 앉았었으나 이윽고 차를 들어서 맛보듯이 입술로 가져갔다. 무경이도 마주앉아서 차를 들었다.
"선생님은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치셨에요?"
"나요?"
그러고는 찻종을 놓았다.
"일전에 대학 강사라구 사칭했던 건 취소하지 않었습니까."
그러나 입술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렇게 놀리시지 마십시오. 그때엔 사정이 그렇게 되어서 실례를 했었지만."
무경이도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가르쳤달 것까진 없지만 영어를 좀 강의했습니다."
"그럼 영문학이 전공이세요?"
"네, 선생님의 철학으루 보면 아주 옅은 학문이올시다."
"온 천만에, 제가 또 철학이니 무어 벤벤히 공부헌 줄 아시구 그러세요. 저 책두 대부분이 제 것이 아니랍니다. 어찌어찌 그렇게 될 사정이 있어서 요즘 좀 뒤적거려 보지만."
관형이는 다시 서가 있는 쪽을 돌아다본다.
"니체,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송, 뒤르케임, 딜타이, 하이데거, 세렐, 페기, 올테가, 짐멜, 슈미트, 로젠베르크, 트레루치, 듀이……."
그렇게 책 이름의 밑을 따라가며 입 속으로 중얼중얼하다가,
"어유우 이거 머 굉장한 거물들이 아주 뭇별처럼 찬연히 빛나고 있습니다그려. 모두 세계정신을 저저끔 떠받들고 구라파를 구해 보겠다는……."
그러고는 낯을 돌려 찻잔을 다시 들면서,
"나두 인제 저 사람들을 좀 공부해야지……."
저의 여태껏의 생활이 엉망이었던 것을 부끄러워하는 낯으로 가만히 그렇게 뇌었다. 그러나 무경이는 어쩐지 낯이 간지러웠다. 책은 쪼르르니 꽂아 놓았지만 저는 아직 그 뭇별처럼 빛나는 구라파의 사상가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 것도 알고 있달 자신이 없었다. 자기를 무슨 큰 공부꾼이나 되듯이 착각하고 있는 젊은 학자를 눈앞에 앉혀 놓고 그는 난데없는 부끄러움을 맛보고 있다. 그럴수록 오시형이의 생각이 난다. 그이에게 구원을 준 사람은 그의 말에 의하면 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라 한다. 하긴 저 사람들은 오시형이의 애정까지도 무경이에게서 빼앗아 갔지만.
그런 것을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다가 무경이는 낯을 들었다.
"선생님, 제가 하나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무어 말입니까? 저는 그런 방면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무경이는 그러한 사내의 겸사의 말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열심스러운 태도로 물어 본다.
"동양학이라는 학문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동양학은 어떻게 해서 오시형이를 저토록 고민 속에 파묻히게 만드는 것일까, 동양학으로 가는 길이 무엇이건대 그것은 오시형이와 최무경이의 관계를 이토록 유린하고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것일까. 그의 질문에는 학문과 애정의 문제가 함께 얽혀져서 마치 그의 생활의 전체를 통솔하고 지배하는 열쇠 같은 것이 간축되어 있는 것이다. 사내들 세계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라 한다. 사실 그는 오시형이가 평양으로 내려간 뒤부터 그를 이해하고 있달 자신이 없어졌다.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이관형이라는 사내 역시 정체를 붙들 수 없는 사람은 아닌가. 이렇게 마주앉아 있는 것을 보면 교양 있고 얌전한 지식인 같다. 그러나 한편으론 문란주와 같은 나이먹은 여자와 강영감의 말은 아니지만 심상하지 않은 관계를 맺어 놓고 질서 없는 비위생적인 생활도 버젓하게 벌여 놓을 수 있는 사람.
무경이의 묻는 말에 처음은 농말조로 받아넘기려다가 그의 태도가 지나치게 진지한 데 눌리어서 이관형이도 잠시 제 머리를 정리해 보듯 한다.
"전문 부분이 아니어서 상식적인 것밖에는 대답할 수 없겠습니다. 그리구 그런 정도로도 잘못된 해석이나 또 엉터리 없는 추상이 많을 줄 압니다마는…… 내 생각 같애선 서양 사람이 자기네들의 학문적 방법을 가지고 동양을 연구하는 것과 동양인이 구라파의 학문세계에서 동양을 분리할 생각으로 동양을 새롭게 구성해 보려는 노력과 이렇게 두 가지루다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 어느 것이나 독자적인 학문을 이룬다든가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줄 생각합니다. 서양학자가 구라파 학문의 방법을 가지고 동양을 연구한다고 그것을 동양학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역적인 의미밖에 되는 게 없으니까 별로 신통한 의미가 붙는 것이 아니고 그저 편의적인 명칭에 불과할 것이요, 또 동양인인 우리들이 동양을 서양 학문의 세계에서 분리해서 세운다는 일에도 정작 깊은 생각을 가져 보면 여러 가지 곤란이 있을 줄 압니다. 가령 동양학을 건설한다지만 우리들의 대부분은 구라파의 근대를 수입한 이래 학문방법이 구라파적으로 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의 거의가 구라파적 학문의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니 그 방법을 버리고서 동양을 연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동양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학문방법으로 동양을 연구하여야 할 터인데 내가 영국 문학을 한 사람이라 그런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이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구라파적 학문방법을 떠나서는 지금 한 발자국도 옴짝달싹 못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시다 같은 철학자도 서양 철학의 방법을 가지고 일본 고유의 철학사상을 창조한다고 애쓴다지 않습니까. 한동안 조선학이라는 것을 말하는 분들도 우리네 중에 있었지만 그 심리는 이해할 만하지만 별로 깊은 내용이 없는 명칭에 그칠 것입니다. 요즘에 율곡 같은 분의 유교사상을 서양 철학의 방법을 가지고 연구해 보려는 분들이 생기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양학의 성립이란 애매하고 또 내용 없는 일거리가 되기 쉽겠습니다."
"그러나 서양 학자들이 동양을 연구하는 데는 좀더 다른 의미도 들어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서양의 몰락과 동양의 발견이라든가 하는."
"네 잘 알겠습니다. 요즘 그렇게들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겠지요. 구라파 정신의 몰락이라던가 구라파 문화의 위기라던가 하는 소리는 이 쭈루루니 책장에 꽂혀 있는 뭇별 같은 사상가들이 오래전부터 떠들어 오는 말이고, 구라파 정신의 재생이나 갱생책을 생각해 보는 과정에서 동양을 발견하는 일이 많다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그들은 결코 구라파 정신을 건질 물건이 동양의 정신이라고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 가지로 세계를 건질 정신은 역시 구라파 정신이라고 깊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양 사람으로서는 물론 당연한 일이고 우리 동양 사람은 감정적으로래도 항거하구야 견뎌 배길 일이지만 그러나 구라파 학자의 동양 발견이라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서양 학자가 동양에 오면 도시의 근대 건축이나 그런 것에는 조금도 감탄하지 않고 고적이나 유물 앞에서는 아주 무릎을 친답니다. 그를 안내한 동양 학자는 이것을 설명해서 서양 사람들은 위안으로밖엔 감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유물이나 고적에서 서양을 건져 낸다던가 세계 정신을 갱생시킬 요소를 발견하고 감탄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점은 우리 동양 사람이 깊이 명심할 일입니다."
무경이는 가만히 듣고 앉아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오시형이의 이론을 그대로 옮겨서 또 한번 질문을 던져 본다.
"앞으로의 현대의 세계사를 구상해 보는 데 있어서 서양사학에서 떠나 다원사관에 입각하여 여러 개의 세계사를 꾸며 놓는 것은 어떨까요?"
학문적인 술어가 마음대로 입에 오르지 않아서 그는 더듬더듬 자기의 의사를 표현해 놓는다.
"동양에는 동양으로서 완결되는 세계사가 있다, 인도는 인도의, 지나는 지나의, 일본은 일본의, 그러니까 구라파학에서 생각해 낸 고대니 중세니 근세니 하는 범주를 버리고 동양을 동양대로 바라보자는 역사관 말이지요. 또 문화의 개념두 마찬가지 구라파적인 것에서 떠나서 우리들 고유의 것을 가지자는 것. 한번 동양인으로 앉아 생각해 볼 만한 일이긴 하지요마는 꼭 한 가지 동양이라는 개념은 서양이나 구라파라는 말이 가지는 통일성을 아직껏은 가져 보지 못했다는 건 명심해 둘 필요가 있겠지요. 허기는 구라파 정신의 위기니 몰락이니 하는 것은 이 통일된 개념이 무너지는 데서 생긴 일이긴 하지만. 다시 말하면 그들은 중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중세가 가졌던 통일된 구라파 정신이 자주 깨어져 버리는 데 구라파의 몰락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정신의 갱생을 믿는 것은 통일을 가졌던 정신의 전통을 신뢰하기 때문이겠습니다. 불교나 유교는 이러한 정신적 가치로 보면 훨씬 손색이 있겠지요. 조선에도 유교도 성했고 불교도 성했지만 그것이 인도나 지나를 거쳐 조선에 들어와서 하나도 고유의 사상이나 문화의 전통을 이룰 만한 정신적인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지 않었습니까. 허기는 그건 불교나 유교의 탓이라기보다는 우리 조상들의 불찰이기도 하지만."
어느 한귀퉁이를 비비고 들어가 볼 틈새기도 없을 것 같았다. 이관형이의 이러한 생각을 듣고 있으면 그가 비위생적인 생활태도를 가지는 데도 어딘가 이해가 가는 듯이 느껴졌다. 동양인으로서 동양을 저토록 폄하(貶下)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하나의 비극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하였다. 그는 잠시 오시형이의 편지를 생각해 보았다. 비판만 하면 자연히 생겨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의 지식인들의 하나의 통폐라고 말하면서 비판보다도 창조가 바쁘다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말하였던 것일까.
잠시 말을 끊고 앉아 있던 이관형이는 주머니를 뒤져서 담배를 꺼냈다.
"미안하지만 담배 한 가치만 피웁시다."
그러고는 성냥을 그어서 담배를 붙였다. 한 모금 깊숙이 빨고는,
"요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반 고호라는 화가의 말인데."
다시 한 모금을 빨아 마신 뒤에,
"인간의 역사란 저 보리와 같은 물건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 흙 속에 묻히지 못하였던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갈려서 빵으로 되지 않는가. 갈리지 못한 놈이야말로 불쌍하기 그지없다 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그러고는 또 한번 뜨즉뜨즉이 그것을 외우고 있었다. 무경이도 그의 하는 말을 외어 가지고 다소곳하니 생각해 본다. 그러나 한참 만에,
"그게 어떻단 말씀이에요. 흙 속에 묻히는 것보다 갈려서 빵이 되는 게 낫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잖으면 흙 속에 묻혀서 많은 보리를 만들어도 그 보리 역시 빵이 되지 않는가 하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이관형이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여러 가지루 해석할 수 있을수록 더욱더 명구가 되는 겁니다, 해석은 자유니까요."
"그럼 전 이렇게 해석할 테에요. 마찬가지 갈려서 빵가루가 되는 바엔 일찍이 갈려서 가루가 되기보담 흙에 묻히어 꽃을 피워 보자."
이관형이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었다.
"구라파 정신이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적에 그들이 니힐리스틱하게 던져 본 말입니다. 이렇게 구라파가 몰락해 버리는 데 정신을 신장해 보는 사업에 종사해 본들 무엇 하랴, 이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의 해석이랍니다. 선생님의 해석은 건강하고 낙천적이고 미래가 있어서 좋습니다."
"선생께선 그런 사상을 가졌으니께 대학에서두 실패를 보신 거예요."
"대학에서 실패를 보구 그런 사상을 가졌다는 편이 진상에 가깝겠지요."
"영국 문학을 하셨구 그런데 바로 그 정신의 고향인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영국이 지금 망하게 되었으니께 선생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시죠."
관형이는 담배를 껐다.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대학에서 실패한 건 되려 자유주의적이 못 되기 때문이었구, 또 내 정신의 고향이 결코 영국인 것도 아닙니다. 우린 동양 사람이 아니여요. 대학에서 몇 년 배웠다구 그대루 영국 정신이 터득된다면 큰일이게요. 오히려 병집은 그 반대인 데 있습니다. 구라파 문화를 겉껍질루만 배운 데. 그럼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나저러나 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고 하면서도 여태 서루 통성두 없었군요. 저는 이관형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무경이도 제 이름을 가르쳐 주고 인사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주보며 웃었다.
"그러면 내 정신의 비밀을 들어 보십시오…… 아까 동양을 여행하는 외국 사람들이 우리 서양식 건축과 문명을 구경하고는 감탄은 샘스러 그저 누추한 모방품을 본 듯이 유쾌하지 못한 낯짝을 한다는 의미의 말씀을 드렸지요. 바로 그 서양식 건축 같은 가정이 우리집이라구 해두 과언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는 서울서두 손꼽이에 들 수 있는 무역상입니다. 말하자면 부르주아올시다. 아버지의 세 자식은 모두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보시는 바 영문학을 하였고 내 누이동생은 음악학교를 나왔고 내 끝동생은 금년 봄에 삼고(三高) 독문과를 나옵니다. 모두 문화의 가장 찬연한 정수를 전공했습니다. 우리 가정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현란하고 난숙한 부르주아의 가정이올시다. 그런 의미에선 티피컬한 가정이라구 해두 과언은 아니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잠시 숨을 돌리듯 하며 말을 끊었으나 다소 침울한 빛이 눈 가상에 떠올랐다.
"그런데 우리 조선이 근대를 받아들인 상태를 이것과 대조해 보면 우리집 가정의 타입이 더 뚜렷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개화가 있은 지 가령 칠십 년이라고 합시다. 이때부터 구라파의 근대를 수입해 왔다고 쳐도 실상은 구라파의 정신은 그때에 벌써 노쇠해서 위기를 부르짖고 있던 때입니다. 우리들은 새롭고 청신하다고 받아들여 온 것이 본토에서는 이미 낡아서 자기네들의 정신에 의심을 품고 진보라는 개념 자체에 회의를 품어 오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의 고장의 노후하고 낡아빠진 문명과 문화를 새롭고 청신하게 맞어들인 것입니다. 구라파가 결딴이 났다고 우리들이 눈을 부실 때엔 벌써 이미 시일이 늦었습니다. 받아들인 문명과 문화는 소화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벌써 구라파 정신은 갈 턱까지 가서 두 차례나 커다란 전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영국 문학을 하였으나 조금씩 조금씩 깊은 이해를 가져 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나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그들의 답답한 정신세계에 자꾸만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란 그러한 아들을 가지고 있는 상인입니다. 무역상이라고 하니까 앞으로 자유주의 경제가 완전히 통제를 당하고 보면 당연히 결딴이 나겠지요. 지금은 상업적 수단이 있어서 되려 시국을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들은 이층에서는 양식을 잡숫고 아래층에 와서는 깍두기를 집어 먹는 그런 사람들이요, 또 그 정도로 아주 될 대로 되어 버려서 모두 권태와 피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노인네들 말대로 하면 우리집도 장차 쇠운에 빠지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누이동생은 음악이 전공이지만 그것에 몰두할 수 없은 지 오래고,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은 벌써 학문이나 학업에 권태를 느껴 온 지 오랩니다. 내 매부는 비행가였었는데 이 용기 있고 참신한 청년은 얼마 전에 향토 비행을 하다가 울산 부근에서 안개를 만나 불시 착륙하였으나 바위와 충돌해서 비행기와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났던?"
"네 아마 그것이겠지요. 그러한 가운데 나는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건 작년부터 약 일 년 가까이 내 주위에는 참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 욱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가령 문란주 같은 여자가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약 일 년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인데 처음부터 나는 이 여자를 데카당스의 상징처럼 느껴 왔습니다. 그 사람이 들으면 노할는지 모르고 또 그 자신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도 모르나 나는 그를 볼 때마다 퇴폐적이고 불건강한 것의 대표자처럼 자꾸 느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자꾸 그를 피하고 물리쳐 왔지요. 또 오늘 나를 찾아와서 소절수를 주고 간 양반, 이분은 내 아저씨뻘 되는 분인데 몸도 건장하고 정력도 좋고 돈도 먹을 만치는 있고 한 청년 신삽니다. 그는 하나의 정복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복욕은 여자를 정복하는 데만 쓰였습니다. 그는 그 방면에 레코드 홀더가 된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 백인영이라는 은행가가 있었는데 이 양반은 잔재주를 너무 부리다가 그것 때문에 은행에서 실패했습니다. 그의 첩은 바로 저 문란주의 지기지우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일 년 동안 싸워 왔습니다. 그러나 그렇던 내가 교내의 파벌과 학벌 다툼에 희생이 되어서 아주 실패를 보게쯤 되었습니다. 요 얼마 전입니다. 나는 그날 술에 취하였습니다. 술에서 깨어 보니까 문란주네 이층에 가 누웠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까 명치정에서 문란주가 오뎅 해서 한잔 먹고 나오는데 내가 비틀거리고 오더라나요. 나는 사오 일 동안 이층에서 번듯이 누웠었습니다. 아주 기력이 없고 수족을 놀리기도 싫어진 겁니다. 무슨 정신에 집에는 여행 가노라는 엽서는 띄워 놓았지요. 나는 집에 들어가기도 싫어졌습니다. 또 문란주 씨네 집에 그대로 묵고 있는 데도 싫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옮아 온 것이 이 아파트올시다. 이사하자 막 늙은 영감과 또 최선생과 말다툼을 하였고……."
"잘 알겠습니다."
하고 무거운 머리를 들어 관형이에게 인사를 하듯 하고 무경이는 일어나서 다시 가스 불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비위생적인 데도 철저히 빠져 있을 수 없는 사람인 모양입니다. 빵가루가 되기보담 어느 흙 속에 묻혀 있기를 본능적으로 희망하는 인물인지도 모르지요. 그것이 더 비극이지만."
물이 사르르 하고 더워 오는 소리가 들려 온다.
"실상은 저도 그것과는 다르지만 그 비슷한 정신적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의 신변의 비밀을 듣고 나니 어쩐지 제 비밀도 털어놓아야 할 것처럼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이관형이는,
"그러시겠지요. 요즘 청년치고 그런 것 가지고 있지 않은 분이 쉬웁겠습니까."
할 뿐 그 이상 이야기를 듣고 싶은 표정은 없었다. 무경이는 일어나서 홍차를 한 잔씩 더 만들었다. 차를 쭉 마시고는,
"이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공연히 방해되셨지요?"
관형이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 인사하였을 때 방을 나가려는 사내는 작은 약병을 꺼내 잘랑잘랑 흔들면서,
"잠이 안 오면 이걸 먹고 잡니다."
그러고는 시니컬하게 웃어 보였다. 이관형이를 보내고 난 뒤 책을 펴놓았으나 물론 읽혀지진 않았다. 침대에 들어가 누워도 잠도 이내 오지 않았다.
늦게야 잠이 들었으나 아침은 또 이르게 눈이 뜨였다.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기가 싫다. 어젯밤에 들은 이관형이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란 보리와 같다고! 비밀을 털어놓고 샅샅이 들어 보면 그러한 생각에 찬성을 하건 안 하건 이해는 가질 수가 있다. 오시형이도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정신세계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 이관형이보다 복잡하면 복잡하였지 단순할 것 같진 않아 보인다. 그럴수록 그를 만나고 싶다. 만나서 모든 것을 들어 보고 싶다. 그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그러나 오시형이를 만나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곧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오시형이는 지금 무경이가 사는 이 서울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
아침도 먹기 전이었다. 어디서 전화가 왔다고 하여서 그는 전화통 있는 데로 갔다. 오시형이를 보석시켜 준 변호사한테서 온 것이었다. 오시형이가 공판에 올라왔을 텐데 어디서 유하는지 모르느냐는 전화 내용이다. 무경이는 당황하였다. 차마 모른다고 말하기는 창피하였으나 역시 그렇게 대답할밖에 도리가 없었다.
오늘이 공판인데 좀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변호사는 전화를 끊는다. 오늘이 공판? 그러면서 어째서 오시형이는 나에게 그런 것 조차도 알려 주지 않는 것일까. 서울에 올라왔으면서 어째 여관도 알리지 않고 한번 찾아도 오지 않는 것일까.
아침을 먹을 수 없었다. 사무실에는 잠시 나갔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들어와 버렸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공판정으로 찾아가 볼밖에 도리가 없었다. 시간은 퍽 지났을 것이지만 그는 이내 아파트를 나와서 재판소로 달려갔다. 정정(廷丁)에게 물어서 공판정에 들어가니까 재판은 퍽 진행이 되어 있었다. 방청객이 더러 있었으나 그런 것엔 눈이 가지도 않았다. 공범 여섯이 앉아 있는 앞에 머리를 청결하게 깎은 국민복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그것이 오시형이었다. 심리는 얼추 끝이 날 모양이었다.
"피고가 학문상으로 도달하였다는 새로운 관념에 대해서 간명히 대답해 보라."
재판장은 온후한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서류 위에 법복 입은 두 손을 올려놓고 그는 오시형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구라파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역사란 마치 흐르는 물이나 혹은 계단이 진 사다리와 같은 물건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맨 앞에서 전진하고 있는 것은 구라파의 민족들이요, 그 중턱에서 구라파 민족들이 지나간 과정을 뒤쫓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시아의 모든 민족들이요, 맨 뒤에서 쫓아 오고 있는 것은 미개인의 민족들이라는 사상이 그것입니다. 고대에서 중세로 근대로 현대로 한 줄기의 물처럼 역사는 흐르고 있다 합니다. 그러니까 설령 그들이 가졌던 구라파 정신이 통일성을 잃고 붕괴하여도 새로운 현대의 세계사를 구상할 수 있고 또 구상하는 민족들은 자기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에 있어서의 말하자면 일원사관일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서 떠나서 우리의 손으로 다원 사관의 세계사가 이루어지는 날 역사에 대한 이 같은 미망은 깨어지리라고 봅니다. 역사적 현실은 이러한 것을 눈앞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피고의 그러한 생각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과 세계사적 동향은 어떻게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피고는 말을 끊고 숨을 돌리듯 하고는 다시 이야기의 머리를 잠깐 돌려 보듯 하였다.
"저의 사상적인 경로를 보면 딜타이의 인간주의에서 하이데거로 옮아 갔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이데거가 일종의 인간의 검토로부터 히틀러리즘의 예찬에 이른 것은 퍽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철학이 놓여진 현재의 주위의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문제를 집어 올린다는 것은 최근의 우리 철학계의 하나의 동향이라고 봅니다. 와츠지(和 ) 박사의 풍토사관적 관찰이나 다나베(田邊) 박사의 저술이 역시 국가, 민족, 국민의 문제를 토구하여 이에 많은 시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과거의 사상을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 건설에 의기를 느낀 것은 대충 이상과 같은 학문상 경로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재판장은 만족한 미소를 입술에 띠었다. 무경이도 숨을 포 내쉬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피고석 뒤에 놓인 방청석으로부터 젊은 여자가 약간 허리를 드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이윽고 재판장은 오후에 심리를 계속하고 일단 휴식에 들어간다는 선언을 하였다. 젊은 여자는 완전히 일어섰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키가 날씬한 여자였다. 무경이는 가슴이 뚱 하고 물러앉는 것을 느꼈다. 그 여자의 옆자리엔 오시형이의 아버지, 그리고 또 옆자리엔 어떤 늙은 신사, 피고석으로부터 돌아온 오시형이는 긴장한 얼굴을 흐트러 놓으며 그 여자가 서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무경이는 뒤숭숭해진 공판정의 소음에 앞서 복도로 나왔다. '그 여자이다! 도지사의 딸!'―--- 그리고 이것으로 모든 문제는 끝이 나는 것이 아닌가. 복도 가운데 서보았으나 몸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그는 허턱대고 걸어 본다. 뜰로 나왔다. 날이 쨍쨍하다. 몹시 현기증이 난다.
어떻게 그래도 용하게 아파트는 찾아왔다. 문 밖에서 지금 막 아파트를 나오는 문란주와 만났다. 그는 겨우 인사를 하였다.
"사무실에서 들으니까 몸이 편하지 않으시다드니……."
하고 말하는 문란주의 얼굴도 핏기가 없어 보인다.
"네, 그래서 병원에 다녀옵니다."
문란주는 잠깐 동안 가만히 서 있었으나,
"그럼 잘 조리하세요."
하고 걸어나갔다. 데카당스의 상징 같다고 하는 문란주와 그는 차라도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껴 보았으나 그대로 제 방으로 올라왔다.
'인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침대에 누우니까 처음으로 눈물이 나서 그는 실컷 울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서 노크 소리가 났다. 두들기는 품으로 보아 어젯밤에 찾아 왔던 이관형이의 것이 분명하다.
"네에."
하고 대답해 놓고는 낯을 고치고야 문을 열었다.
"어젯밤은 실례했습니다. 어데 편하지 않으시다고요."
"아뇨, 괜찮습니다."
"글쎄, 그러시면 다행이지만……."
잠시 말을 끊었다가,
"지난 생활을 청산해 보려고 어데 훨훨 여행이나 떠나 보렵니다. 방은 그대루 두고 다녀와서 정리하기루 하겠어요. 우리집엔 실상은 아저씨한테 돈 취해 갖고 지금 경주 방면에 여행하는 중이라고 알려 두었는데 헛소리를 참말로 만들어 볼까 합니다."
"그럼 경주로 가십니까?"
"뭐 작정은 없습니다. 휘 한바퀴 돌아보면 마음이 좀 거뜬해질까 해서 보리알을 또 한번 땅 속에 묻어 볼까 허구서."
그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아까 다녀 나가던 문란주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으나,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어저께 소절수를 마저 찾아 드리지요."
"죄송합니다."
소절수를 찾으러 강영감을 은행으로 보내고 무경이는 사무실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두 어데 여행이나 갈까?'
'아예 어머니 말마따나 동경으루 공부나 갈까?'
그런 것을 생각해 보았으나 원기도 곧 솟아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