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161장~16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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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편집]

"이왕지사, 일은 틀린 일, 지금 달아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주만은 길게 탄식하였다.

"뗳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아가씨만 이 자리에 없으시다면 하인배들이 굳이굳이 찾으려 들지도 않을 것 아닙시오."

"내 혼자 달아나서 이 구구한 목숨을 보전하면 무엇 하랴."

"아사달 서방님이 저기 계시지 않습시오."

"그 어른은 또 큰일을 시작하셨단다. 한번 일을 손에만 대시면 침식도 잊으시고 생사도 모르는 이. 몇 번 길 떠나기를 재촉도 해보았지만 들은 척도 않으시니 어쩌는 수가 있느냐."

"어규, 이를 어째, 이를 어째."

털이는 펄쩍 뛰었다.

저편 길 쪽이 떠들썩하는 곳을 바라보매 과연 껌정 벙거지를 둘러쓴 구종들이 벌떼같이 이리를 향하고 달려온다.

"애구 아가씨, 저것들을 보십시오, 보십시오."

하고 털이는 주만의 손목을 이끌며 달아나려 한다.

주만은 손목을 뿌리치며,

"지금 와서 허둥거리면 하인배 소시에 창피만 할 뿐."

하고 주만은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털이를 보고,

"너는 여기 있어 저 사람들이 들어닥치거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일러라. 내 아사달님께 마지막 부탁할 것이 있다."

주만은 아사달의 곁으로 왔다.

아사달은 비 오는 듯하던 땀을 씻으려 하지도 않고 돌을 새기기에 일단 정성을 모으고 있었다.

자기를 그리고 그리다가 자기를 찾아와서 죽은 아내의 모양을 그는 하늘이 무너져도 제 손으로 다시 살리려고 제 재주와 힘을 다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사달님, 아사달님!"

주만은 비통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는 가요, 나는 인제 잡혀 가요.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아사달님과 마지막 작별, 한 번만 그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셔요, 단 한 번만 눈 한 번 깜짝일 짧은 동안이나마……."

아사달의 손길은 와들와들 떠는 듯하였다. 정은 돌 위에서 허청을 치고 미끄러진다.

"네, 아사달님, 얼른 얼굴을 돌리셔요, 다시 한번 자세히 뵈옵게. 이 가슴속 깊이 새겨 두게. 뜨거운 불길이 이 몸에 붙을 제도 그리운 그 얼굴을 눈앞에 그리면서 숨이 잦아지게, 그러고 또 마지막 부탁이 있어요."

아사달은 얼굴을 들었다. 정소리도 끊어졌다.

"아이 고마워라, 아이 고마워라, 아사달님이 나를 보시네."

주만은 감격에 겨운 듯이 속살거리고 물끄러미 아사달 얼굴의 이모저모를 샅샅이 알알이 뜯어보았다.

거의 넋을 잃은 듯이 흥껏 아사달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나서,

"아사달님, 아사달님, 이만하면 아사달님 얼굴은 자세히 뵈었어요. 내 얼굴도 자세히 보아 주셔요. 그러고 내 얼굴을 그 돌 위에 새겨 주셔요.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 네 아사달님, 들어주실 테지요."

"……"

"왜 대답이 없으셔요. 왜 금세로 얼굴빛이 파랗게 질리셔요. 왜 뺨 언저리가 실룩실룩 떠십니까. 마지막 이별에 마지막 부탁, 설마 아니 들어주실 리야 없겠지요. 이 몸, 이 모양이 아사달님의 손으로 그 돌 위에 새겨만 진다면, 다시 살아만 있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이 하잘것없는 몸은 푸른 연기가 된다 해도 이 돌 위에 새겨진 내 얼굴은 몇백 년 몇천 년을 살아남을 것 아녜요. 우리의 비참한 사랑의 기념으로 돌 하나를 남긴다 한들 죄 될 것이 없겠지요. 네, 아사달님, 이 청이야 들어주실 테지요."

주만의 입길에서는 단김이 서려 흘렀다.

못 물결도 출렁거리기를 그치고 일순간 얼어붙은 듯이 고요하다.

"왜 대답이 없으시오. 선선히 그리하마 일러주지 않으시오. 그 돌에 새기는 건 부처님의 상이에요, 보살님의 상이에요. 무슨 원불(願佛)을 새기시느니보담 이 주만을 새겨 주셔요. 네, 아사달님."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온다.

털이가 가로막고 서서 기다리라고 타이르는 모양이었다.

주만은 몸을 일으켰다.

"자, 아사달님, 나는 가요, 마지막으로 가요. 부명이 지엄하시니 오래 머뭇거리고 있을 수 없어요. 제발 내 마지막 소원을 풀어 주세요. 네, 아사달님. 그러면 부디 안녕히."

주만은 조용조용히 걸어나왔다.

162[편집]

햇님다리를 조금 비켜 놓고 모기내 천변 큰길에는 장작과 솔단이 집채같이 재이었다.

황을 덤석 묻힌 긴채 관솔에 불을 붙여 군데군데 꽂아 놓으매, 검은 연기가 구름장 모양으로 뭉게뭉게 떠오르자, 그 밑에서 시뻘건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오늘이 마침 팔월 한가위 신궁 앞 넓은 마당과 서울 거리거리에 구경거리가 덤북 벌어져서 사람들은 많이 빠져나갔건만, 그래도 이 참혹한 광경을 보려고 모여든 군정들은 천변 한길이 비좁도록 개미떼같이 덕시글덕시글하였다.

마른 나뭇가지가 타서 꺾이는 소리가 후닥툭닥 근처의 공기를 뒤흔들며 화르르 하고 타오르는 불길은 무명의 업화인 양 반공을 향하고 그 너불너불하는 어마어마한 혓바닥을 내어두를 제, 주만은 여러 하인들에게 옹위되어 그 장작더미 앞에 와서 섰다.

외동딸이 타죽는 모양을 차마 볼 수 없었음이리라, 유종과 사초부인은 그 자리에 모양을 나타내지 않았다.

유종은 사랑문을 겹겹이 잠그고 혼자서 방 안엘 왔다갔다하며 머리끝까지 치민 격분과 극통을 걷잡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 고이한 년, 에이 고이한 년, 내 딸이, 내 딸이!"

하고 이따금 힘줄이 우글쭈글한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다.

사초부인은 남편을 끝끝내 속일 수 없어 이실직고는 하였으나 설마 딸이 잡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자기 잠든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으니 지금쯤은 멀리 서라벌을 떠나 있을 터이고, 또 잡으러 간 사람들이 제 집에 부리는 하인들이니 기를 쓰고 잡으려 들 것 같지도 않아서 실상은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미심쩍어 털이를 보내기까지 하였으나, 간 곳을 모른다는 털이의 기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천만 뜻밖에 자기 딸이 잡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기색하고 말았다. 얼마 만에야 겨우 깨어는 났으나 자리보전하고 누워서 헛소리만 하고 있었다.

불길이 웬만큼 타오르는 것을 보자, 주만은 천천히 불 앞으로 걸음을 옮기었다.

"애구 아가씨, 애구 아가씨."

털이는 울며불며 질색을 하고 뒤에서 제 아가씨를 부둥켜안았다. 여러 하인들도 고개를 숙이었다.

"놓아라, 놓아라."

주만은 조용히 털이를 타일렀다.

"네 정은 고맙다만 질질 끌수록 나에게는 고통. 한시바삐 저 불 속으로 뛰어들어 모든 슬픔과 원한을 잊어버려야……."

"애구 아가씨! 애구 아가씨!"

털이는 더욱 제 아가씨의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으며 울며 부르짖었다.

주만은 털이에게 안긴 채 한동안 그린 듯이 서 있다가,

"대감님과 마님께 못 뵈옵고 간다고 사뢰어라. 그리고 내 죽은 뒤에 타고 남은 재가 있거든 그림자못 아사달님이 새기신 돌부처 발 아래 묻어 다고."

말을 마치기 전, 여러 사람이 악! 소리도 지를 겨를도 없이 주만은 불 속으로 나는 듯이 뛰어들었다.

"애구구!"

털이는 그대로 땅바닥에 넘어지며 울었다.

그때였다. 쏜살같이 말을 달려 오는 사람의 그림자가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 사람은 말 위에서 그대로 껑충 몸을 날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다음 순간엔 벌써, 불덩이 다 된 주만의 몸을 들이쳐 업고 선뜩 땅에 내려서는 모양이 보이었다.

땅 위에서 번개같이 주만의 옷에 붙은 불을 손으로 비벼 끄는 듯하더니 주만을 업은 채 비호같이 달려가 버렸다.

모였던 군정들은 와글와글하였다.

"그게 누구야, 누구야."

옆사람의 옆구리를 꾹꾹 찌르며 이 별안간 나타난 용사의 근지를 알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의 동작은 너무 빠르고 또 검은 연기가 부근 일대를 뒤덮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람의 정체를 자세히 알아본 이는 없었다.

여럿의 시선이 말 닫는 곳으로 바라볼 때에는 벌써 그 사람의 모양은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이 바람결같이 나타났다가 바람결같이 사라진 인물은 과연 누구이었던가.

"하늘이 구하신 게다, 하늘이 구하신 거야."

"아무리 법이 엄하기로 외동딸을 태워 죽이다니 말이 되나. 신명이 도우신 게지."

"어여쁜 그 얼굴과 의젓한 그 태도만 보아도 비명횡사할 이가 아니거든."

"뭘 제 고운 님이 와서 구해 간 게지."

"어쩌면 그렇게 대담하고 말을 잘 탈까."

"아무튼 예삿사람은 아니야."

모였던 군정들도 악착한 꼴만 구경을 할 줄 알았다가 뜻밖에 좋은 구경 한 가지를 덤으로 더 하게 된 데 매우 만족한 모양으로 제각기 떠들며 헤어졌다.

163[편집]

나는 범보다 더 날래게 불길 속에 뛰어들어 주만을 구해 낸 이는 경신이었다.

오늘도 검술과 궁술 겨룸에 보기 좋게 장원을 하여 만사람의 칭찬을 받았으되, 이 영광에 싸인 자기를 보고 누구보다도 더 기뻐할 이손 유종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 섭섭하고 궁금하였다.

어쩐지 마음에 키이어, 여러 낭도들의 폭풍우 같은 환호와 찬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슬그머니 빠져나와 주만의 집으로 말을 채쳐 오는 길에 햇님다리 가에 사람이 백절치듯 모인 것을 보았다. 무슨 까닭인가를 물어 보니, 이손 유종이 제 실행한 딸을 태워 죽이는 것이란 말을 듣고 쏜살같이 뛰어든 것이었다.

이손의 불 같은 성미에 일이 탄로만 되면 이런 거조가 있으리라고 그는 어렴풋이나마 미리 짐작도 하였다.

그리고 어젯밤에 얼른 본 주만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양이 한량없이 애처로웠다. 그 다소곳한 머리와 수줍은 눈길에 풀기 하나 없는 것이 한량없이 가엾었다. 암만해도 무슨 악착한 사단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가슴이 섬뜩하였다.

한두 번밖에 대해 보지 않았으나 그 뛰어나게 아름다운 용모와 씩씩한 기상과 대담한 태도가 경신에게는 엄청난 경이었다. 눈부신 존재였다. 벌써 마음을 바친 데가 있는 그이거니 제 아내가 되기는 사내답게 단념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번 가슴속 깊이 박힌 그 안타까운 그림자는 좀처럼 가시어지지 않았다. 부모님께도 사뢰지 못한 그 괴로운 속을 처음 만나는 자기를 턱 믿고 숨김없이 하소연한 것이 어떻게 정다운지 몰랐다. 더구나 자기와 청혼된 남자가 낙명이 될까 염려하여 신랑 쪽에서 파혼까지 해달라고 하는 그 마음씨는 곰살궂고도 여무지었다.

세상에도 희귀하고 열렬하고 비장한 주만의 사랑이 올곧게 열매를 맺기를 경신은 진정으로 축수하였건만, 마치 친누이동생과 같은 깨끗하고 애연한 정을 느끼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만이 생목숨을 끊게 되었거늘, 어찌 제 몸의 위험을 살필 수 있느냐. 제 체모를 돌아볼 수 있느냐.

경신은 들숨날숨없이 복잡한 서울거리를 헤어 나와 개운포 한길로 달리었다. 서울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인가가 없는 들판에 나온 뒤에야 경신은 턱에 닿은 숨을 돌리었다.

뒤를 돌아보아도 쫓아오는 사람은 없는 듯.

얼떨떨한 정신을 수습하자 첫째 머리에 떠오르기는 제 등에 업힌 주만이 어찌 되었나 하는 염려였다.

팔과 고개가 제 어깨에 척 늘어져 힘없이 흔들흔들하는 것을 보면 그대로 혼절된 모양이었으나, 촉촉하고 따스한 온기가 주만의 가슴 언저리로부터 제 등에 배어 스며드는 것을 보면 아직 숨기는 남아 있는 듯하였다.

"어디든지 치우고 들어야 할 텐데."

경신은 혼자 속살거리고 또다시 말을 채쳐 자기가 서울 오름내림 길에 드는 주막을 찾아들었다.

조용한 방 하나를 치우고 주만을 들여다 눕히었다.

옷자락이 군데군데 타서 떨어져 너불너불하는 대로 흰 살이 드러난 것도 가엾거니와 뺨 언저리엔 덴 자국이 밀룽밀룽 부풀어오르고 그 좋은 머리도 그슬러져서 오글오글해진 모양이 참혹하였다.

"애구 가엾어라, 불난 집에서 뛰어나오셨군. 저렇게 기색을 하셨으니 냉수나 좀 떠넣어 보시지. 그러고 데인 자리엔 간수나 발라 보시지. 에구 끔찍해라, 많이도 다치셨네. 그래도 숨이 붙으신 게 천행이시군."

혼동된 주인 노파는 방에 따라 들어와 이부자리를 깔고 나서 제 아는 대로 구호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경신은 노파와 같이 주만의 꽈리같이 부르튼 입술을 벌리고 냉수를 몇 숟갈 떠넣어 보았으나, 물은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왔다.

"다치신 것도 다치신 거지만 워낙 놀라셨을 테니 잠깐만 진정을 하시도록 하시지."

하고 노파는 나가 버렸다.

떡 한 시루 쪄낼 동안이나 지냈으리라.

주만은 무엇을 찾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경신은 놀란 듯이 옆으로 다가들며 부르짖었다.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

주만의 입술은 달싹달싹하였다. 분명히 무슨 말을 하는 모양이나 모기 소리보다도 더 가늘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 무슨 말씀이요, 무슨 말."

주만은 얼굴을 찡그리며 짜증을 내었다.

"아이, 아사달님, 아이 아사달님은 그래도 못 알아들으셔요."

경신은 아사달이란 낱말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까운 청춘을 불 속에 장사할 뻔하고, 숨이 붙은 둥 만 둥한 이 생사관두에 헛소리로도 제 사랑의 이름을 찾는 걸 보고, 경신은 그 지긋지긋한 사랑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새삼스럽게 고개가 숙여졌다.

"그, 그 돌에 내, 내 얼굴을 새, 새겨 주셔요. 녜, 아사달님이 이 손에 그 돌을 만져 보여 주셔요. 어디 나, 나를 닮았나, 안 닮았나 더듬어 보게."

164[편집]

아사달은 넋잃은 사람 모양으로 주만의 돌아서 가는 양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손버릇같이 다시 정을 들기는 들었다. 그러나 어느결엔지 아사녀의 환영은 깜박 사라져 버렸다. 아까까지는 어렴풋이라도 짐작되던 그 흔적마저 놓치고 말았다.

아무리 눈을 닦고 돌 얼굴을 들여다보았으나 눈매까지는 그럴싸하게 드러났지마는 그 아래로는 캄캄한 밤빛이 쌓인 듯 아득할 뿐.

돌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골머리만 부질없이 힝힝 내어둘리었다.

그러자 문득 그 돌 얼굴이 굼실 움직이는 듯하며 주만의 얼굴이 부시도록 선명하게 살아났다. 마치 어젯밤의 아사녀의 환영 모양으로.

그 눈동자는 띠룩띠룩 애원하듯 원망하듯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다.

"이 돌에 나를 새겨 주세요. 녜, 아사달님, 녜, 마지막 청을 들어주세요."

그 입술은 달싹달싹 속살거리는 것 같다.

아사달은 정을 쥔 채로 머리를 털고 눈을 감았다.

돌 위에 나타난 주만의 모양은 그의 감은 눈시울 속으로 기어들어오고야 말았다. 이 몇 달 동안 그와 지내던 가지가지 정경이 그림등 모양으로 어른어른 지나간다.

파일 탑돌이할 때 맨 처음으로 마주치던 광경, 기절했다가 정신이 돌아날 제 코에 풍기던 야릇한 향기, 우뢰가 울고 악수가 쏟아질 적 불꽃을 날리는 듯한 그 뜨거운 입김, 들…….

아사달은 고개를 또 한번 흔들었다. 그제야 저 멀리 돈짝만한 아사녀의 초라한 자태가 아른거린다. 주만의 모양을 구름을 헤치고 둥둥 떠오르는 햇발과 같다 하면, 아사녀는 샐 녘의 하늘에 반짝이는 별만한 광채밖에 없었다.

물동이를 이고 치마꼬리에 그 발간 손을 씻으며 바시시 웃는 모양, 이별하던 날 밤 그린 듯이 도사리고 남편을 기다리던 앉음 앉음, 일부러 자는 척하던 그 가늘게 떨던 눈시울, 버드나무 그늘에서 숨기던 눈물, 들…….

아사달의 머리는 점점 어지러워졌다.

아사녀와 주만의 환영도 흔들린다.

휘술레를 돌리듯 핑핑 돌다가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에서 쪼각쪼각 부서지는 달그림자가 이내 한데로 합하듯이, 두 환영은 마침내 하나로 어우러지고 말았다.

아사달의 캄캄하던 머릿속도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하나로 녹아들어 버린 아사녀와 주만의 두 얼굴은 다시금 거룩한 부처님의 모양으로 변하였다.

아사달은 눈을 번쩍 떴다.

설레던 가슴이 가을물같이 맑아지자, 그 돌 얼굴은 세 번째 제 원불(願佛)로 변하였다.

선도산으로 뉘엿뉘엿 기우는 햇발이 그 부드럽고 찬란한 광선을 던질 제 못물은 수멸수멸 금빛 춤을 추는데 흥에 겨운 마치와 정 소리가 자지러지게 일어나 저녁 나절의 고요한 못둑을 울리었다.

새벽만하여 한가위 밝은 달이 홀로 정 자리가 새로운 돌부처를 비칠 제 정 소리가 그치자 은물결이 잠깐 헤쳐지고 풍 하는 소리가 부근의 적막을 한순간 깨트렸다.

출전:동아일보(1938.7.21~193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