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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탑/141장~16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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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의 말씨는 갈수록 망상스러웠다. 그는 어떻게 분하고 악이 났던지 제 지체와 체모도 돌아보지 않는 듯하였다. 평일에 억지로 지어서나마 빼던 점잖은 가락조차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었다.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독한 칼날이 쟁그렁쟁그렁 소리를 내는 듯하였다.

불국사에서 경신에게 혼뗌을 한 금성은 분풀이를 할 궁리를 생각다가 못한 끝에 앞뒤 사연을 제 아비에게 꼬아바치고 말았다. 제 쪽에서 수십 명이 떼를 지어 지쳐 들어갔다가 경신과 용돌 단 두 사람에게 혼비백산하였거늘 제 아비 앞이라도 창피하였던지 그 사실만은 슬쩍 뒤집어 꾸미어 제가 수많은 경신의 패에 붙들리어 죽을 변을 당하였다고 호소하였다.

유종에게 혼인 거절당한 것만 해도 치가 떨릴 노릇이거늘 그 소위 사윗감으로 작정한 위인에게 제 자식이 봉변까지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보매 금지는 온몸에 독이 올라서 어젯밤은 잠 한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밝히었던 것이다.

유종 부녀와 경신 형제를 갈아 마시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갖은 흉계를 궁리궁리하며 손톱 여물을 썰다가 조회가 거의 끝날 때쯤 되어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필경 그런 상주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께서 이내 파조해 버리신 탓으로 그 한독한 상주도 아무 보람이 없게 되었다. 도리어 제게 적지 않은 망신이 되고 말았다.

사람을 해치려다가 도리어 맞은 독사처럼 치밀리는 독기를 걷잡을 수 없어 유종을 노상에서 붙들고 직접 독설을 놀려 본 것이었다.

"등하불명이라니 그건 또 어떻게 하는 말이오."

유종의 불쾌한 얼굴에도 살기가 등등해졌다.

"그렇게 자자한 소문을 이손만 못 듣다니 될 말이오. 이손 댁에서 난 일을 이손이 모르니 등하불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내 집에서 생긴 일? 그건 또 무슨 괴이한 말인고."

하고 유종은 소매를 떨치고 수레에 오르고 말았다. 만일 금지의 말을 더 듣고 있다가는 한길가에서 무슨 거조가 날지 자기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하마하마 칼집으로 손이 가는 것을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았던 것이다.

"이손도 잘 생각하였소. 어서 댁에나 가서 물어 보구려, 허허."

금지는 싸늘하게 웃으며 제 수레로 가려다가 다시 돌아서서,

"참 이손, 사윗감은 썩 잘 고르셨더군. 무뢰배들과 몰려다니며 아닌밤중에 문문한 절간이나 엄습해서 토식이나 하고 제 장래 계집의 서방을 알뜰살뜰히 두둔을 하니. 원 세상에 할 게 없는 놈, 어허허."

금지의 꼴같지 않은 큰 웃음 소리가 마치 독 묻은 살촉과 같이 유종의 귀에 와서 들이박히었다.

수레에 오른 뒤에도 유종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었다. 금지에 대한 미운 생각으로 그 늙은 살도 떨리는 것이었다.

"될 말인가, 될 말인가."

유종은 혼자 중얼거리었다.

제가 아무리 우리 부녀를 모함하려 한들 터무니도 없는 소리가 성사가 될 까닭이 있느냐. 내 딸과 집안을 빗대 놓고 상없는 상주까지 하였지만 아무리 한들 그런 어림없는 수작으로 성명을 가리울 수 있느냐.

우리 집안이 비록 고단하다 한들 인제 경신 형제가 있지 않으냐.

한번 경신을 생각하자 잔뜩 찌푸렸던 유종의 얼굴은 저절로 풀어졌다.

먼빛으로 보아도 천하영웅인 줄 알아보았지마는 정작 겪어 보니 얼마를 더 씩씩하고 더 의젓하고 인정스러운지 몰랐다. 이렇듯 사내다운 사내를 사위로 맞게 된 것은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사위가 있는 다음에야 금지 따위야 열명 백명이 적이 된다 해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경신에게 대면 금지의 아들 금성이쯤은 발 아래 꿈지럭거리는 벌레만도 못하였다.

한두 번 상면밖에 시키지 않았지만 저희끼리도 그리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주만이 같은 기상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못마땅할 것 같으면 그대로 낯빛에 드러낼 것 아니냐.

경신이 떠날 때에도 저희끼리도 인사를 주고받으며 얼마 아닌 그 동안이나마 못내 이별을 아끼는 듯도 하였다.

이 혼인이 올곧게 못 된다면 동햇물이 거꾸로 흐르는 날이리라. 유종은 미쁘고 든든한 생각에 금지의 칼날 같은 빈정거림도 잠깐 잊어버리었다.

그의 늙은 눈앞에는 대화어아금(大花魚牙錦)의 활옷에 큰 낭자를 하고 아름다운 신부 모양을 차린 주만과, 공작의 꼬리를 꽂고 복두와 관대의 신랑의 위의를 갖춘 경신이 금실 좋게 나란히 서 있는 모양이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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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은 물론 금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불국사 사단이니, 석수장이니, 장래 아내의 서방이니, 실행한 처녀는 불에 태워 죽이는 법이니, 하는 것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요, 괴이한 수수께끼 같았으나, 그 모질고 독한 말씨가 납덩이처럼 그의 귀 밑바닥에 꺼림칙하게 처지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로 아무튼 주만을 불러 물어는 보려 하였으나 마침 손들도 있고 해서 저녁밥을 먹은 다음에야 안으로 들어왔다.

사초부인은 남편의 불쾌한 안색을 보고 놀라는 빛으로,

"신관이 갑자기 틀리셨으니 어디 편치나 않으시온지."

"아니오, 뭐 불편한 데는 없지마는 좀 상심되는 일이 있어서 그러한가 보오."

"무슨 상심되는 일이 있사온지."

유종은 조정에서 일어난 일은 한마디라도 집안에 와서 이렁성거리는 성미가 아니었으나 오늘 일은 딸에 관한 일이라 간단하게 금지의 아뢰던 말과, 길거리에서 자기를 잡고 이러쿵저러쿵 변죽을 울리던 이야기를 일러 듣기었다.

"망측도 해라. 그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리예요. 거혼당한 앙심으로 지어낸 것이겠지만 어쩌면 남의 천금 같은 귀한 딸에게 그런 음해를 뒤집어씌운단 말씀예요. 어규 분해라."

사초부인은 대번에 소름이 끼치고 위아랫니빨이 딱딱 마주치었다.

"제가 아무리 악독한 마음을 품고 우리를 해치려 하지마는 내 딸에게 그런 일이 없는 다음에야 무슨 계관이 있겠소마는……."

"없고말고, 원, 세상에 그런, 그런 고약한 소리가……."

하고 사초부인은 흉격이 막히는 듯이 말끝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 마누라도 그럴싸한 소문도 듣지 못했단 말이오."

"소문이 무슨 소문입니까. 그런 입길에도 못 올릴 소리를……."

"불국사 사단이라 하니 불국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왜 마누라는 아들 발원한다고 이따금 불국사엘 가지 않소."

하고 유종은 조롱하는 듯이 자기보다 훨씬 젊은 아내를 바라보았다.

"전에는 더러 갔지마는 요새는 그 애 혼사 때문에 어디 몸 뺄 틈이나 있어야지요."

"그럼 그게 다 무슨 종작없는 소리일까!"

사초부인은 이윽히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다가,

"참 얼마 전에 불국사에서 이런 일은 있었대요. 그때 내가 대감께 그런 얘기를 안 했던가."

"무슨 일이오? 나는 얘기를 들은 법도 않은데."

"다른 게 아니라 왜 불국사에 석가탑을 모시는 석수장이가 있지 않아요."

"옳지, 석수장이!"

하고 유종은 무엇이 마음에 마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무릎을 일으켜세운다.

"참 대감께서도 보셨겠구먼. 왜 사월 파일날 불국사 거둥을 하셨을 때 상감께서 불러 보시기까지 하셨지."

"그래 그 석수장이가 어떻게 되었단 말이오."

유종의 묻는 말씨는 매우 급하였다.

"하루 밤에 그 석수가 골똘히 일을 하고 있노라니 웬 사람들인지 수십 명이 들이쳐서 그 사람을 탑 위에서 끌어내려 가지고 못 당할 욕을 보이려 할 제 난데없는 신장 두 분이 나타나서 서리 같은 칼을 휘둘러 여러 군정들을 쫓아 버리고 그 중에 우두머리 가는 사람을 개 꾸짖듯 하고 그 석수 앞에 꿇어앉히고 백배사례를 시킨 일이 있었는데요, 말인즉은 그 탑이 영검이 무서워서 그 짓는 이를 부처님께서 두호를 해주신 것이라고들 합디다."

"신장이 나타나다니 어디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야 모르지요. 하인들이 종작없이 지껄이는 소리를 나도 들은 것이니까요."

"신장이 나타나고 아니 나타난 거야 우리의 알 바가 아니지만 그 불국사 사단이 우리 구슬아기에게 무슨 계관이 있단 말인고."

"아기한테야 무슨 계관이 있겠어요."

"대관절 그 여러 사람들은 무슨 원혐으로 그 석수장이를 들이쳤을까."

"글쎄요, 그 까닭은 자세히 알 수 없지요."

"아무튼 구슬아기를 좀 불러다가 물어 볼까."

"물어 보시기는 무엇을 물어 보셔요. 그런 해괴한 소리를 어떻게 점잖은 딸에게……."

"좌우간 좀 불러 오구려. 보고도 싶으니."

사초부인은 계집애 종 하나를 시켜 딸을 부르러 보내었다.

얼마 만에 그 계집애 종이 돌아와서 밖에서, "마님, 마님" 하고 사초부인을 불러 내었다.

"아가씨가 계시지 않는뎁시오."

"털이년도 없느냐."

"털이년도 어디를 갔는지 없는뎁시오."

"응!"

하고 유종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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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만은 아사달의 무사한 얼굴만 보면 선 걸음에라도 돌아선다는 것이 미룩미룩 밤이 이슥한 연후에야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동안이라도 하루가 열흘 맞잡이로 그립던 알뜰한 임을 만나 보고야 차마 발길이 선뜩 돌아서지도 않았거니와 오늘 밤이란 오늘 밤이야말로 그 탑이 끝나지 않았느냐. 하루하루 목숨이 잦아질 듯이 애가 키이고 가슴이 졸이던 그 탑이 이제야 일손이 떨어지지 않았느냐.

이 기쁨! 이 감격! 이 앞에는 모든 불안과 모든 위험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수선한 소문도 겁낼 것이 없다. 불의의 변도 두려울 것이 없다. 그의 앞길에는 한 조각 검은 구름도 얼찐거리지 않았다. 찢어지게 밝은 저 달과 같이 행복의 길은 환하게 열리었다.

"언제쯤 길을 떠나실지."

주만은 마지막으로 또 한번 다져 보았다.

"글쎄올시다. 내일 아니면 모레는 떠나 볼까 합니다."

아사달의 돌아갈 마음도 살과 같구나.

불국사를 나와 주만은 더욱 신이야 넋이야 말을 달렸다. 귓결에 지나치는 맑은 가을바람은 어떻게 이렇게 시원할까. 죽을 판 살 판 따라오는 털이의 꼴도 오늘 밤같이 우스운 적은 없었다.

집 가까이 다다르자 말은 털이에게 맡겨 보내고 별당 뒷문으로 돌았다. 미리 밖에서 열 수 있도록 만들어 둔 문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서니 제 침방에 촛불이 그저 켜 있었다.

'웬일일까.'

주만은 적이 의아하였다. 그는 나갈 적에 흔히 촛불을 켜버려 둔 채로 나갔지마는 언제든지 제가 돌아올 무렵에는 그 촛불이 다 타서 꺼지고 마는 터이었다. 오늘 밤도 그럭저럭 꽤 늦었을 텐데 불이 그대로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마루에 가만히 올라서서 살그머니 영창을 열고 보매 자기 어머니 사초부인이 벽에 그린 듯이 기대앉아서 잠깐 졸다가 인기척에 놀란 듯이 눈을 번쩍 뜬다.

"너 어디 갔다 오느냐."

어머니는 첫마디에 묻는다.

주만은 어머니가 홀로 있는 것을 그리 큰일은 아닐 성싶어서 방 안에까지 들어는 섰으나 무어라고 얼른 대답할 말은 없었다.

"너 이 밤중에 어디를 갔다 온단 말이냐."

채쳐 묻는 어머니의 말소리는 전에 없이 쨍쨍한 울림을 띠었다.

"저어, 어디 좀 다녀와요."

응석 피듯 대답 안 되는 대답을 한마디하고 주만은 어머니와 동안이 뜨게 주저앉았다.

"다녀오는 데가 어디란 말이냐. 너 아버지께서 너를 찾으시다가 역정까지 내셨단다. 나는 여길 와서 세상 너를 기다리니 어디 와야지."

아버지도 찾으셨단 말에 주만의 가슴은 덜컹하였다.

"너 나이 한두 살이냐. 설령 동무 집에 놀러를 간다 해도 부모의 말을 듣고 다녀야 될 것 아니냐. 다 큰 계집애가 내일 모레로 시집갈 색시애가 밤나들이란 될 뻔이나 한 일이냐."

사초부인의 언성은 점점 높아 간다.

"……"

주만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바른 대로 사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주워 댈 수도 없었다. 거짓말을 한다 한들 곧이들을 어머니도 아니었다. 자애는 깊지만 차근차근하고 밝은 어머니였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주만은 어릴 때 말버릇이 그대로 나왔다.

"어디를 갔다 왔기에 덮어놓고 잘못을 했단 말이냐."

어머니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게 맑아진다. 화가 되게 날수록 조리가 정연한 사초부인이었다.

"그래 털이년은 또 어디를 갔느냐."

"데리고 갔다가 같이 왔어요."

"같이 왔다면 그년은 어디 있느냐."

사초부인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창 밖에서 벌벌 떠는 털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쇠, 쇤네는 여, 여기 이, 있는뎁시오."

사초부인은 영창을 홱 열어젖뜨렸다.

털이는 벌써 초죽음이나 된 듯이 뜰 아래 저만큼 고개를 빠뜨리고 땅을 보고 서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이 마루 앞까지 올라서라."

사초부인은 될 수만 있으면 왁자지껄하게 큰소리를 내기 싫은 눈치였다.

"너 이년, 아가씨를 모시고 어디를 갔다 왔니."

말소리는 조용하나마 서릿발같이 냉랭하였다.

"저어, 저어, 달구경을 모시고……."

"달구경을? 그래 달구경을 어디로 모시고 갔다 왔느냐. 바른 대로 말을 해야 망정이지 만일 추호라도 기이면……."

"녜, 녜, 바른 대로 아뢰고 말곱시오. 녜, 녜, 저 불국사엘 모시고……."

"으응 불국사?"

하고 사초부인은 안간힘을 한번 쓰고 거의 기절이나 한 사람 모양으로 뒤로 넘어질 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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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간 큰일을 당해도 냉정한 어머니가 이렇게 기급절사를 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주만도 엉겁결에 몸을 소스라치며 외마디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사초부인은 이내 몸을 바로잡았으나 그 머리는 힘없이 벽에 떨어뜨리었다.

"그러면 그 종작없는 말에도 무슨 터무니가 있었던가."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하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기쁨에 달떴던 주만의 가슴에도 '예사가 아니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섬뜩 지나갔다.

"그래 불국사에는 왜 갔더냐."

영창 밖을 노려보며 사초부인은 다시 털이에게 채쳐 물었다.

"저어……."

털이는 벌써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대답을 이루지 못하고 힐끔힐끔 방 안의 제 아가씨의 기색만 살피었다.

"이년이 왜 말을 못 할꼬."

무슨 거조라도 당장에 낼 듯이 사초부인의 호령은 떨어졌다.

"제가 데리고 갔다 뿐이지 털이는 아무 죄도 없어요."

주만은 털이를 두둔해서 어머니를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 같은 년을 사람년이라고 믿고 아가씨를 모시고 있으라고 했더니 이년 아가씨를 모시고 갈 데 안 갈 데…… 이년 보기 싫다. 썩 물러나라. 이년 어디 두고 보자."

으름장을 남기고 사초부인은 열었던 영창을 닫아 버렸다. 털이에게도 모녀 단둘이 주고받을 수작을 듣기기 꺼리는 까닭이리라.

"그래도 이년이 머뭇머뭇하고 서 있어."

소리를 질러서 털이가 뜰에 내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려 사초부인은 제 무남독녀 외동딸에게 눈을 돌리었다.

그 눈길은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자애와 슬픔에 가득 찬 눈길이었다.

명민한 사초부인은 딸의 태도와 털이의 말을 들어 보아 홑으로 단속과 꾸중으로 끝날 일이 아니고 커다란 비극이 자기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마음 어딘지 느끼었음이리라.

주만은 그 부드러운 눈길이 성난 회초리보다 더 송구스러웠다. 그는 몸둘 곳을 모르고 숙인 고개는 거의거의 방바닥에 닿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주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가, 구슬아가, 불국사에는 왜 갔더냐. 그 자세한 내력을 이 어미에게 알려 다오."

그 목소리는 어느결엔지 눈물에 젖었다.

주만은 가슴이 찌르르해지며 대번에 눈물이 쏟아질 듯하였다.

차라리 역정이나 내시고 펄펄 뛰기나 하셨더면! 이 불효한 딸자식을 불채찍으로 바수어 내기나 하셨으면!

이런 어머니를 어이 속이랴, 기이랴. 그러나 이 말씀을 어떻게 여쭐 것인가. 일점 혈육이란 오직 나 하나뿐이거늘 어떻게 어버이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겠다는 말씀을 아뢸 것인가…….

"끝끝내 이 어미를 기일 테냐."

주만은 그대로 푹 엎어져서 어린애 모양으로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아가, 아가, 갑갑하구나. 울지만 말고 말을 하려무나."

"저는, 저는 죽을 죄를 졌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자식으로 아시지 말아 주십시오……."

"무슨 죄란 말이냐. 말을 해야 알지 않느냐."

어렴풋이 무슨 탈이 난 줄은 짐작이 갔으나마 자기의 불길한 짐작이 정작 들어맞고 보니 더욱 흉격이 막히었다.

주만은 마침내 사월 파일 밤에 탑돌기를 하다가 아사달을 만난 데서부터 시작하여 자초지종의 일체를 대강 이야기하고 말았다.

사초부인은 들을수록 철없는 애들의 불놀이에 가슴만 뜨끔뜨끔하였다. 세상에는 괴상한 변도 있고는 볼 일이다.

그 석수장이가 총각도 아니요, 어엿한 아내가 있다는 데 더욱 아니 놀랄 수 없었다.

"그이에게 부인이 열이 있고 스물이 있으면 어떠해요. 저는 그이의 아내가 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이가 없고는 저는 이 세상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이의 곁이 아니고는 하루라도 안절부절을 못 할 지경입니다. 저는 그이의 여제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이의 시종을 들고 그이의 재주를 배울 뿐입니다."

딸의 열에 뜬 잠꼬대 같은 넋두리를 어이없이 듣고 있던 사초부인은 얼마를 주저하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물어 보았다.

"그러면 몸은 더럽히지 않았단 말이냐."

"몸이야 왜 더럽혀요."

주만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사초부인은 이 한마디에 한 그믐밤빛 같은 어둠 속에서 실낱 같으나마 한 가닥 희망의 줄을 발견한 듯이 반색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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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처녀의 순결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말에 사초부인은 새 기운을 얻었다.

"아가, 구슬아가, 이 어미 말을 듣거라. 듣자하니 그 사람은 아내 있는 사람, 네 아무리 철부지라 한들 남의 첩 노릇이야 못 할 것은 적이 생각만 해도 알 것이 아니냐. 네 생각에 그 사람의 여제자가 되면 고만이라 하지마는 남 보기에야 어디 그러냐. 그러니 그것은 얼토당토 않은 말, 누가 들어도 웃을 말, 몸도 허락지 않은 그 사람 탓으로 네 신세를 망칠 까닭이 무에냐……."

"몸은 허락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은 허락한 것을……."

주만은 울어서 부은 눈을 비비었다.

"그 마음이란 잠시 잠깐 빗들어간 마음, 다시 바로잡기만 하면 고만 아니냐, 응 아가."

사초부인은 자상스럽게 딸을 달래기에 곱이 끼었다.

"마음을 바로잡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아직도 근 열흘 남았으니 그런 일을랑 쥐도 새도 모르게 숨겨 버리고 시집만 가고 보면 백 허물 천 흉이 다 묻힐 것 아니냐. 경신은 너도 보다시피 훌륭한 신랑감. 그의 어엿한 아내가 될작시면 네 장래도 좋으려니와 고단한 우리 집안도 든든해질 것 아니냐, 응 아가. 그래도 마음을 돌리지 못하겠느냐."

"그러면 저도 좋을 줄 알아요. 그렇지마는……."

"그렇지마는 다 무에냐. 의당히 그렇게 해야 내 딸이지."

어머니는 딸이 자기의 말에 솔깃한 줄로만 알고 더욱 반색을 하며 다시 두말이 없도록 누르고 어루만지었다.

주만은 부숭부숭 부은 눈을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그건 안 돼요. 몸은 비록 더럽히지 않았지만 마음은 벌써 그이에게 바친 것. 한번 바친 마음을 어떻게 돌릴 수야. 동에서 뜨는 해가 서에서 뜬다 해도 그것은 안 될 말씀. 딴사람에게 바친 마음을 부둥켜안고 어찌 남의 어엿한 아내가 된단 말씀입니까. 그것은 버러지만도 못한 인생."

"그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그러면 경신이가 네 마음에는 들지 않는단 말이냐."

"경신님이야 이 세상에 드물게 뵙는 훌륭한 남자. 저에게는 오히려 과분한 남편감인 줄 모르는 바 아니지마는 저는 이미 작정된 몸. 가득 찬 이 마음에는 다시 다른 남자의 그림자를 들일래야 들일 수 없습니다. 녜, 어머니, 이 불효의 딸년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구구한 뜻을 이뤄 주십시오."

"그러면 금시중의 꾀에 떨어져 우리 집안은 아주 망하고 만단 말이냐."

"금시중의 꾀라니요."

금시중이라는 말에 주만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참 내가 너에게 그 말을 안 했구나."

하고 사초부인은 금지가 상주까지 한 것과 길거리에서 유종을 붙들고 실랑이하던 이야기를 저저이 옮기었다.

'경신님의 말이 옳구나. 고 악독한 금지가 필경은 그 독한 혓바닥을 놀리고야 말았구나.'

주만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하였다.

"그러니 말이다, 네가 끝끝내 고집을 세우고 보면 그 못된 금시중의 술중에 떨어지는 것 아니냐. 세상에 이런 절통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 이 원수를 갚는 데는 오직 한 가지 길. 예봐란 듯이 네가 경신에게 시집만 가면 제아무리 악독한들 다시 우리를 해치려도 해칠 수 없을 것 아니냐."

사초부인은 딸이 분해서 부들부들 치를 떠는 것을 보고 다시 달래어 보았다.

"이 밤이 밝으면 아버지는 다시 너를 찾으실 것. 여전히 네가 고집을 세운다면 금시중의 소원대로 너는 불에 타 죽는 목숨이 아니냐. 너의 아버지 성미에 외동자식 아니라 반쪽자식이라도 고법을 아니 굽히실 것 아니냐."

주만은 흡뜬 눈으로 한동안 허공을 노리고 있었다. 금지의 부자가 제 눈앞에 서 있기나 한 것처럼.

"너는 생목숨이 끊어지고 우리 집안은 아주 쑥밭이 될 것. 그래도 너는 생각을 못 돌리겠단 말이냐. 그래도 고집을 세우겠단 말이냐."

주만은 헐헐 느끼는 소리를 떨었다.

"지원극통한 일이긴 합니다마는 인제 와서는 다시 어찌할 도리도 없는 노릇. 이 몸이 연기로 사라져도 이 뜻은 변할래야 변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경신님과는 혼인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이는 저와 아사달의 관계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시니……."

"응, 경신이도 그 일을 알다니."

사초부인은 얼굴빛을 변하였다.

"저번 올라오셨을 적에 제가 저저이 일러드렸습니다. 그이는 저의 은인, 어떻게 은인을 속이고 불순한 마음으로 시집을 갈 수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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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에게까지 알렸다는 말에 사초부인은 더욱 아니 놀랄 수 없었다. 정작 장래 사윗감이 이 사연을 안 다음에야 다시 어찌할 도리가 나서지 않았다.

"원 방정맞기도 해라. 그런 소리를 무슨 짝으로 그 사람에게 한단 말이냐, 후."

사초부인은 절망의 한숨을 내쉬고,

"그 사람이 네 은인이 된다는 건 또 어찌 된 까닭이냐."

"그 못된 금지의 아들 금성이가 무뢰지배 수십 명을 끌고 아사달님을 들이쳤을 때 마침 경신님이 불국사에 계시다가 그 여러 군정을 한 칼로 쫓아 버리고 아사달님을 구해 내었으니 저의 은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석수장이를 구해 내었다는 신장이 바로 경신이었구나."

"그래요, 그러니 어찌 그런 이를 속일 수 있습니까. 초행을 왔다가 신부가 없으면 장가온 신랑에게 그런 망신이 또 있겠습니까. 그래 그이에게 파혼을 해달라고 청을 했지요."

"파혼을 해달라고."

사초부인의 말낱은 물에 빠지는 사람 모양으로 허전거리었다.

"그분의 말씀이 지금 와서 파혼을 한다면 두 집안이 창피만 할 테고 더구나 아버지께서 슬퍼하실 테니 자기 혼자만 알고 있겠노라고 하셔요."

"그것 봐라, 좀 점잖은 말이냐. 그런 훌륭한 남자는 이 세상에 둘도 쉽지 않을 것 아니냐.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 것도 너의 복이거늘 어찌해서 제 앞에 오는 복을 차버리고 천야만야한 구렁텅이에 떨어지려 든단 말이냐."

"저는 그런 복을 누릴 자격이 못 되는 걸 어떡합니까."

주만의 대답도 구슬픈 가락을 띠었다.

"그렇듯 바다같이 넓은 요량을 가진 그 사람이니 사정을 자세히만 얘기한다면 못 알아들을 리도 없지 않으냐. 한때 마음이 잘못 들어간 것을 그 사람이 굳이 책하지도 않을 것 아니냐. 웬만한 사내가 그런 소리를 들었으면 펄펄 뛰고 그 자리에서 파혼을 해버릴 것이로되 그 사람은 끝끝내 너를 두호하려 드니 그것만 보아도 너희 둘이야말로 하늘이 내신 배필. 전생의 연분도 지중한 탓이니 두말 말고 그 사람에게 시집을 가다오. 늙으신 아버지와 이 어미를 보더라도 어연듯이 그 사람과 부부가 되어 다오."

사초부인은 비대발괄하다시피 또다시 딸을 달래기 시작하였다.

"그야 그런 말까지 벌써 하였으니 부끄럽기야 하겠지, 겸연쩍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하루 이틀 지나고 보면 그런 흉허물은 곧 잊어버리게 되느니라."

"그렇게 너그러우시고 의젓하시니 경신님이야 저를 용서해 주실지 모르지요. 눈 딱 감으시고 초행을 오실는지 모르지요. 그렇지만 마음은 단 하나뿐. 한번 마음의 남편을 모신 다음에야 다시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그 애는 또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내일이라도 아버지께서 아시기만 하면!"

하고 사초부인은 차마 말끝을 맺지 못한다.

"어머니, 어머니, 무서운 운명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줄 저도 모르지 않아요. 그렇지만 닥쳐오는 운명을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맞닥뜨려 부서지면 부서졌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마는, 어머니, 이틀만 참아 주실 수 없으실까……."

"이틀만 참아 달라는 것은 또 무슨 뜻이냐."

"이틀 지난 뒤에 아버지께 이 사연을 알려 드리시지 못하실까."

"어젯밤에도 그렇게 역정을 내시고 너를 찾으셨는데 오늘 날 새기가 무섭게 곧 너를 찾으실걸. 어떻게 아니 알리고 배길 수 있느냐."

"그래도 어머니, 이틀만 미뤄 주시지 못할까요."

"그 이틀 동안에 어떻게 할 작정이냐."

주만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오늘이고 내일 안으로 저희들은 서라벌을 떠나게 되어요. 그 안에 이 일만 탄로가 아니 되면……."

"안 된다, 안 된다, 너희가 어디로 달아난다 해도 곧 잡혀 올 것 아니냐."

사초부인은 무서운 듯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탑 공사가 어젯밤에야 끝이 났답니다. 그러면 오늘이나 내일은 발정을 할 수 있겠습니다. 이틀만 참아 주시면 저희 둘의 목숨은 살아날 것 아닙니까."

"정 네 뜻을 굽힐 수 없다면!"

사초부인은 다시금 눈물을 떨구었다.

147

[편집]

아사녀가 그림자못에 몸을 던진 그 이튿날 식전꼭두에 독이 새파랗게 오른 콩콩이가 불국사로 들이닥치었다.

다짜고짜로 문안에 들어서자 그 말썽꾼이 문지기와 마주치게 되었다.

"웬 여인이관대 첫새벽에 남의 절 안엘 뛰어든단 말이오. 요사스럽게. 그 부정한 몸으로."

하며 문지기는 콩콩이의 앞을 막아선다.

"뭣이 어쩌고 어째, 킁 킁. 요사스럽다, 이건 누구한테 하는 말버르장머리여!"

콩콩이는 잔뜩 화가 났던 판이라 대번에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는 게거품이 괴어 흘렀다.

"부정하기는 뭣이 부정하단 말이냐. 한 진갑 다 지낸 늙은 내다, 킁 킁. 젊은 년 뽄으로 서방을 끼고 자다가 왔단 말이냐. 부정하기는 뭣이 부정하단 말이냐. 다 나만큼 깨끗이나 하래라."

콩콩이가 마구 집어세우는 바람에 문지기는 하도 어이가 없었다.

"허 별꼴을 다 보는군. 식전 대뜸에 이건 무슨 봉변인고. 원 어젯밤에 꿈자리가 사나웁더니만."

"봉변이란 또 무슨 같잖은 소리냐. 육두문자도 쓰는 데가 다 다르다. 제 어미뻘이나 되는 늙은이에게 말마디나 들은 것을 봉변이라 하는 줄 아느냐, 킁 킁. 네 신수 불길한 걸 어찌 내 탓을 한단 말이냐. 심청이 그렇게 못 되었으니 꿈자린들 안 사납겠느냐."

하고 콩콩이는 뺨이라도 칠 듯이 들이덤비었다.

"허, 이건 원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누구더러 떨어지게 해라야."

문지기는 눈을 굴리며 콩콩이를 흘겨보았다.

"아무리 낫살이나 먹었다면 벌써 눈이 어두운 줄 아느냐. 네 꼴을 볼작시면 안장코, 메기 주둥아리에 얼굴은 설뜬 메줏덩이 같구나, 킁 킁. 이래도 내 눈에 보이는 게 없느냐. 해라는 너 따위 땡땡이중에게 하지 누구더러 하란 말이냐."

콩콩이가 기가 나서 대어드는 바람에 문지기는 한풀이 꺾이어 혼자말같이 중얼거렸다.

"원 늙은것을 손을 댈 수도 없고……."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콩콩이는 와락 문지기에게 달려들어 몸부림을 치고 소리소리 질렀다.

"어디 이놈 사람 좀 쳐봐라, 킁 킁. 어서 쳐라, 어서 쳐."

하고 콩콩이는 앞가슴을 헤치고 우글쭈글 주름잡힌 살을 내어놓았다.

"자 쳐라, 쳐. 왜 치지를 못해."

온 절 안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서슬에 문지기는 아주 기가 눌려 버렸다.

"원 이런 질색은 난생 처음이로군. 대관절 무슨 일로 오셨소."

"진작 그렇게 말을 할 것이지."

그래도 콩콩이는 분이 덜 풀린 듯이 한동안 씨근씨근 가쁜 숨을 쉬고 있다가,

"이 절에 부여에서 온 석수장이가 있다지. 뭐 이름은 아사달이라던가."

"있기는 있지만 그 사람은 왜 또 찾으시오."

하고 나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원 아사달에게는 찾아오는 사람도 많의. 며칠 전에는 웬 젊은 계집이 찾아와서 성화를 바치더니만."

"응, 며칠 전에는 젊은 계집이 찾아왔더라……."

적이 성이 풀어지려던 콩콩이는 또다시 눈에 쌍심지가 섰다.

"오, 옳지! 그러면 그 애를 죽게 한 것도 네놈의 소위로구나. 여기서 그림자못이 어디라고 석가탑인가 뭔가 탑 그림자가 비친다고 멀쩡한 거짓말을 해서 그 방정맞은 년을 속인 것도 네놈의 한 짓이구나. 이 생사람을 잡아먹은 놈아."

"아니 그러면 그 젊은 여자는 죽었단 말씀이오."

문지기도 눈이 호동그래졌다.

"네놈이, 없는 그림자를 있다고 해서 깜방같이 속아 가지고 못물만 들여다보다가 필경 매쳐서 빠져 죽고 말았단다. 이놈, 이 몹쓸 놈아, 남의 생목숨을 끊고 네 목숨은 성할 줄 아느냐."

문지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섬쩍한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뒤끝이 이렇게 벌어질 줄은 몰랐다.

"죽은 년은 죽었지만 내 손해는 누구더러 물려받는단 말이냐. 며칠을 두고 끼니마다 고량진미를 해대느라고 몇백 냥 돈이 자빠지고 중값든 옷까지 다 휘질러 낸 다음에 그대로 입고 빠져 죽었으니, 그것을 건져 낸다 한들 어디 쓸데가 있느냐 말이야, 킁 킁. 재수가 옴이 붙어도 별 빌어먹을 일이 다 많지그려."

콩콩이는 하도 앵하고 분해서 그날 밤이 새자 곤두박질로 불국사에 뛰어온 것이다. 먹을 콩을 놓친 것도 원통한데 제가 알토란같이 손해만 본 것을 생각하매 잠 한잠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148

[편집]

아사달은 그날 밤 주만을 작별한 뒤에도 차마 떼치기 어려운 듯이 달빛을 밟으며 다보탑과 석가탑의 둘레를 거닐었다.

삼 년이란 길고 긴 세월을 두고 제 있는 재주와 정력을 다 기울여 지어 낸 두 탑! 제 살과 피를 묻혀서 빚어 낸 두 탑! 넘실거리는 은물결에 둥 떠서 반공에 헤어오르는 듯한 그 두 거룩한 모양을 번갈아 바라보며 아사달은 무량한 감개에 싸이었다.

솟아나는 흥에 겨워서 이 세상 것 아닌 신품을 지어 낸 때에 오직 참된 예술가라야만 맛볼 수 있는 감흥과 만족도 거기 있었다. 고심참담한 자취를 더듬어 볼 제 애 졸이던 지긋지긋한 기억도 거기 있었다. '인제는 아주 손이 떨어졌구나' 하매 다 큰 자식이 어버이의 품을 떠난 것처럼 허수한 적막도 거기 있었다. 막중 대공을 이룩하였으니 번쩍이는 영광이 자기를 기다리는 기쁨도 거기 있었다.

그러나 아사달에게는 이 모든 것보담 오늘 밤따라 고장의 소식이 새삼스럽게 그리웠다.

주만이 제 흉중을 꼭 찍어 낸 것과 같이 이 자리에 아사녀가 있었던들 제 남편의 대공을 마친 것을 얼마나 즐겨할 것인가. 그는 멀리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이 공사 끝내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리라. 아침으로 저녁으로 축수축수하였으리라.

늙으신 스승은 과연 이날까지 부지를 하셨을까. 만일 어느 때 불길한 예감처럼 무슨 일이나 있었다면 홀로 남은 아사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만일 그런 불행이 있었다면 설마 나에게 기별이 없을 수 없으리라. 무소식이 호소식이라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아사달은 자기의 불길한 생각을 곧 물리쳐 버렸으나 삼 년 동안에 자기도 가신 한 장 붙이지 못한 것을 생각하였다.

'아사녀가 좀 궁금해하였을까, 야속해 여기지나 않았을까?'

이따금 집안 생각을 않은 것도 아니지만, 절 안에 꼭 들어박혀 있고 보니 부여 간다는 사람을 좀처럼 만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 형세로 우정 전인도 못 할 형편도 형편이었다. 물론 자기가 등한한 탓도 탓이었다. 기어코 인편을 얻으려고만 하였을 것 같으면 삼 년 동안에 한두 번이야 기회가 없지도 않았겠지만 탑 짓기에 몸과 마음이 온통 쏠리고 지친 까닭에 다른 일이란 손끝 까딱하기 싫었고 게다가 그는 편지를 잘 쓸 줄 몰랐던 것이다.

아사달은 팔짱을 낀 채 아내의 모양을 눈앞에 그리어 보았다.

삼 년을 그린 탓인가 그 안타까운 모양이 상막하게 얼른 나타나지 않는다. 상긋이 웃는 입술은 또렷하건만 코와 뺨 언저리가 어쩐지 아사녀 같지 않고, 맑고 상냥한 눈동자는 천연한데 이마와 귀밑이 흐리마리해서 알아볼 길이 없었다.

어찌하면 얼굴 전체가 분명히 나타나다가도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변형이 되고 만다. 마치 손으로 물을 움키는 것처럼 조각보 모은 듯한 그 윤곽이 이내 뿔뿔이 흘러내리고 만다.

아리숭아리숭한 얼굴을 그리다가 말고 아사달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새 내가 아사녀의 얼굴을 잊어버렸는가, 허, 참."

그러나 이것은 가벼운 뜻에서 나온 말이었다. 자기가 자기에게 거는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삼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이 되기로 잊혀질 것이냐. 평생을 그리기로 잊어서 될 말인가. 몇 달 전까지도 영절스럽게 눈에 밟히던 그 얼굴이 아니냐.

"내일이라도 발정을 해야."

아사달은 저를 다지듯 또 한번 뇌었다.

실상 지금 와서 그는 아사녀의 환영을 그려 보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릴 날이 많이나 남았어야 하다못해 안타까운 환영이라도 그려 볼 것이지, 인제야 참사람 참얼굴을 대할 날도 며칠이 남지 않았거늘 애써 환영을 그려 볼 것이 무엇이랴.

별안간 아사달의 눈앞에는 주만의 얼굴이 떠나왔다. 눈이 부시도록 뚜렷하게 떠나왔다. 방장 그려 본 아사녀의 환영과는 대상부동으로 주만의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크고도 생생하였다.

삼 년 전에 이별한 아사녀와 조금 아까 헤어진 주만과는, 마치 갈린 동안이 오래고 가까운 데 따라 기억에 되살아나는 정도를 비교나 하는 것 같았다.

문득 떠오른 주만의 환영에 눌리어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아까는 그려 보려도 잘 나타나지 않던 아사녀의 환영도 비록 작으나마 굳이굳이 나타났다.

"주만을 어떻게 할까."

아사달은 두 환영에 가위나 눌리는 것처럼 멍하니 눈을 뜬 채 거의 신음하는 소리를 내었다.

149

[편집]

"구슬아기님을 어떻게 할까."

아사달은 이 문제에 부닥뜨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어찌할 줄을 몰랐다.

자기는 어엿이 아내 있는 사람이라고 차마 하기 어려운 말까지 떡먹듯이 타일렀건만 회오리바람 같은 그의 정열 앞에는 아내가 있고 없는 것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걸맞는 자리로 시집을 가라고 그렇듯 권하고 달래었건만 종시 들은 체도 아니하고, 여제자라도 되어지이다 하는 간절한 청을 물리치려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딱하기만 하였다.

주만의 신변에 위험이 각각으로 절박해지는 것은 그 눈치만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하루바삐 서라벌을 떠나려고 발버둥을 치는 모양이었다. 금성이 사단만 생각해도 아슬아슬했다. 만일 그 자리에 주만이가 있기만 하였더라면 일은 더 크게 벌어졌을 것 아니냐.

내일로라도 길을 떠나야 되겠는데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주만의 사정이 그러할 줄 번연히 알면서 떼치고 갈 수야 있느냐. 그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발정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야멸차고 몰인정한 것이었다.

'인정은 고만두더라도 이제 너는 주만이 없이 살 줄 아느냐.'

마음속 어디선지 소리소리 외치는 듯도 하였다.

데리고 간다면 아내를 어떻게 대할까. 삼 년이나 두고 그리고 그리던 그에게 선물로 '계집'을 갖다 준다는 것은 너무도 무참한 짓이 아니냐. 그 곡하고 부드러운 창자가 고대로 찢어지지 않을까.

남편이 대공을 이루라고 그 차마 못 할 애끊는 이별의 슬픔도 지긋이 견디고 지금쯤은 밤으로 낮으로 남편 돌아오기만 고대고대할 것이 아닌가. 벌써부터 조석으로 내 밥까지 떠놓는지 모르리라. 밤중에 사립문 소리만 삐걱하여도 그 참새 같은 조그마한 가슴을 두근거리는지 모르리라.

이런 아내에게 '시앗'을 보이다니 그것은 너무 악착한 노릇이었다.

'주만이가 어디 너의 첩이냐. 어디까지 순결한 두 사이가 아니냐. 그는 참다운 너의 여제자가 아니냐.'

그는 그러하지마는 이런 줄을 누가 곧이들을 것이냐. 설령 아사녀는 남편의 말이라 그대로 믿어 준다 하더라도 늙으신 스승부터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말썽꾼이 여러 제자들과 동네 사람들이 뒷손가락질을 할 것 아니냐.

그렇게 되면 아사녀의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주만의 처지도 비참해질 것 아니냐.

쓸쓸한 나그네의 사막에 주만은 오직 한 송이 꽃이었다. 병들어 누운 몸에 내민 그의 구호의 손은 따뜻하고 곰살궂었다. 지리하고 어려운 공사도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흥을 자아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동정자, 연연한 두호인! 이 공을 생각한들 그의 원을 아니 들어줄 수가 있느냐. 그는 그 좋은 지체도 버리고, 호강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이 나를 따르려 하지 않느냐.

이러기도 어렵고 저러기도 어려운 노릇.

생각에 잦아진 아사달의 발길은 다보탑 가까이 다다랐다.

운명적인 사월 파일 밤 일이 선뜻 머리에 떠올랐다.

주만의 모양을 어림없이 아내의 환영으로 속던 기억이 뚜렷이 살아났다. 흑 하고 그의 앞으로 넘어질 듯하던 열에 뜨인 제 자신을 생각하고 아사달은 어이없이 웃었다.

스승과 아내를 위해 발원을 올린 것이 주만과 만나게 되는 첫 기회가 될 줄이야. 그 밤에 만일 탑돌기를 않았던들 주만과 그는 영원히 만날 까닭이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 와서 이런 고민의 씨를 장만하지 않았을 것을.

달이 기울고 밤이 이슥한 연후에야 생각에 지친 아사달은 제 처소로 돌아왔다.

자리에 누운 뒤에도 흥분된 신경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샐녘에야 눈을 붙였다가 동창이 훤한 것을 보자 곧 이불을 걷어치고 일어났다.

그는 정과 마치만 들고 다시 일자리로 올라갔다. 세상없어도 오늘로 길을 떠나야겠는데 어젯밤에 마지막 손은 떼기는 하였지마는 그래도 미진한 데가 없지 않은가 하여 밝은 날 다시 한번 둘러보려는 것이었다.

탑은 이슬에 촉촉히 젖어서 새로운 정 자리가 더욱 깨끗해 보이었다.

아사달은 이모저모를 뜯어보고 훑어보았으나 손댈 데가 다시는 없는 듯하였다.

그는 어젯밤에 맛본 감격과 만족을 또 한번 느끼었다.

이만하면 오늘 길을 떠난대도 공사에 관해서는 마음에 남는 것이 없었다.

행장이라도 꾸려 두려고 막 제 처소로 돌아가려 할 제 왁자지껄하는 인기척이 이리로 향해 올라온다.

그것은 콩콩이가 문지기를 끌고 아사달을 찾아 올라오는 것이었다.

150

[편집]

"이녁이 부여에서 온 석수요."

콩콩이는 어리둥절한 아사달을 보자 대뜸 물었다.

아사달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지금 처소에까지 갔더니 없기에 또 예까지 찾아온 것이오. 원 망신살이 뻗치려니 꼭두식전에 별꼴을 다 당하거든."

문지기는 퉁퉁 부어서 매우 못마땅한 듯이 설명을 해 들리고 아사달에게 눈을 부라리었다. 내가 무슨 짝으로 네놈 때문에 이 망신을 당하느냐 하는 것처럼.

"그러면 그렇다든지 안 그러면 안 그렇다든지, 왜 말이 없소, 킁 킁. 여보 젊은이, 이녁이 정녕 아사달이란 석수요."

콩콩이는 벌써 목에 핏대를 올린다.

아사달은 웬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첫새벽부터 이게 웬일인가. 오늘은 꼭 길을 떠나야겠는데 또 무슨 헤살이 앞길을 막는 것인가.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킁 킁. 사람 겁겁해서 어디 살겠나. 그렇소, 안 그렇소, 이 멀쩡한 문지기가 또 엉뚱한 딴사람을 갖다 대었단 말인가."

콩콩이는 또다시 문지기에게로 대어든다.

"이런 주책 망나니 같은 늙은이가, 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나. 제 원대로 뜻대로 만나자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대면을 시켜 주어도 그래도 못 먹겠다는 건 무어야, 낫살이나 처먹었다고 대접을 해주니까 나중에는 못 할 소리가 없군. 내가 뭐 생기는 게 있다고 엉뚱한 사람을 대준단 말인가."

문지기도 노발대발한다.

"이놈, 너는 아비도 어미도 없단 말이냐, 킁 킁. 하늘에서 떨어졌니, 땅에서 솟아났니. 늙은 사람 보고 반말지거리를 하고. 이놈 생사람을 죽여 놓고도 뭣을 잘했다고 큰소리가 무슨 큰소리냐."

생사람을 죽여 놓았단 말에 문지기는 찔끔하였다.

"제가 죽고 싶어 죽었지, 왜 내가 사람을 죽인단 말이오. 그런 얼토당토 않은 말씀은 그만두고, 만날 사람을 만났으니 나도 내 볼일을 좀 봐야겠소. 자 두 분이 잘 이야기를 해보구려."

하고 문지기는 콩콩이를 아사달에게 떠다맡기듯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얼중얼하며 내려가 버렸다.

생사람을 죽였느니 어쨌느니 아무튼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듯해서 아사달의 가슴은 섬뜩하였다.

혹은 주만의 신변에 무슨 불길한 일이 생기지 않았는가.

그는 꿈에도 아사녀 생각은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원, 사람 답답해 못 견디겠네, 킁 킁. 그래 이녁이 아사달이오."

콩콩이는 또 한번 따지었다.

"그렇습니다. 내가 분명 아사달입니다."

"옳지, 옳아, 그렇게 말을 선선히 해주어야지, 킁 킁. 그러면 아사녀가 이녁과 어떻게 되오."

"아사녀!"

아사달은 외마디 소리를 치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놀라기부터 해서야 어디 말을 하겠소, 킁 킁. 대관절 아사녀가 이녁에게 뭣 되는 사람이오."

"내 아내입니다. 어떻게 아사녀를 아십니까."

아사달은 허둥지둥 채쳐 물었다.

"휘유―---"

콩콩이는 기막히다는 듯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요 며칠 전에 아사녀가 이 불국사를 찾아왔더라오."

"녜? 그러면 아사녀가 서라벌에 왔단 말씀이오."

"서라벌에 왔기에 예까지 찾아온 것 아니오. 그렇게 당황히 굴지 말고 차근차근히 내 말을 듣구려, 킁 킁. 아사녀라는 이가 이 절에를 찾아왔는데 그 몹쓸 문지기란 놈이 대공을 마치기 전이요, 뭐 또 여자의 몸은 부정하니 어쩌니―---오늘 내게도 그런 어리더듬한 수작을 하다가 혼뗌을 했지만―---되지도 않은 소리로 떼거리를 시켰단 말이거든……."

"그래 지금 아사녀는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어요."

"가만히 남의 말을 좀 들어요. 그렇게 급하게 서둘지를 말고. 그 문지기 말에 그림자못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이녁이 짓는 탑 그림자가 비친다고 멀쩡하게 속였더란 말이오. 철부지 젊은이라 그 말을 고대로 곧이듣고 여기서 십 리나 되는 그 못가에 가서 우두커니 물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었더란 말이오……."

"그래 지금도 그 못가에 있습니까."

"가만히 좀 있구려. 그런데 못가에 옷이 있소, 밥이 있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천 리 길을 걸었으니 노독인들 좀 나겠고 그 옷꼴이란 거지 중에도 상거지가 되었을 것 아니오. 어디 가서 밥 한술인들 옳게 얻어먹었겠소, 킁 킁. 그러니 나중에는 그 못가에 기진맥진해서 늘어졌더라오……."

"그렇겠습니다, 그렇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자기를 찾아나선 아사녀의 애닯은 심곡을 생각만 해도 아사달의 목은 아니 메일 수 없었다.

151

[편집]

콩콩이는 장히 가쁜 듯이 숨결을 돌리고 나서 또다시 말끝을 이었다.

"내 집이 바로 그림자못 근처에 있소. 아침에 못가엘 나갔다가 풀밭에 되는 대로 쓰러진 이녁 댁네를 보았단 말이오. 나도 늙은이 혼잣손에 벌이하는 장남한 자식도 없고 근근이 간구한 살림을 해가는 터이니까 한 입이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 꼴을 보고야 차마 인정간에 그냥 둘 수야 있소, 킁 킁. 더구나 그 정지를 들어 보니 어떻게 가엾고 딱하였던지!"

하고 콩콩이는 정말 눈에 눈물을 걸씬걸씬 띠어 보이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 아사녀가 지금도 댁에 있단 말씀이지요. 그럼 긴 얘기는 댁에 가서 하고 우리 지금 당장 댁으로 가십시다, 가십시다."

아사달은 아사녀를 한시바삐 만나 보고 싶었다.

콩콩이는 손을 저어 서두는 아사달을 말리었다.

"내 말을 좀더 듣구려. 그래 집에 데려다 놓고 보니 어떻게 몸이 지쳤던지 그대로 두다가는 큰 병이 날 것 같아서 넉넉지 못한 돈이나마 동취서대를 해가지고 끼니마다 고량진미를 해 먹인단 말이오. 명천 하느님이 굽어살피시지만 참말 진정 한 끼니라도 반찬 없는 밥은 아니 먹였다오. 빚양간 지더라도 인명을 구해야 될 것 아니오. 목욕물까지 데워다가 말짱하게 씻기고 여러 백 냥 든 옷까지 입혀 놓으니 상지 상거지가 금시로 한다한 아씨가 되었단 말이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제 속으로 낳은 자식인들 이렇게 위하고 가꾸기는 어려웠을 게란 말이오, 킁 킁. 워낙 잘 먹어 놓으니 얼굴과 몸에 몰라볼 만큼 포동포동 살이 오르고 화색이 돌고 제 입으로도 이 은혜는 못 잊겠다고 열 번 스무 번 치사를 하였다오……."

"그 은혜야 어떻게 잊겠습니까. 어떡하더라도 갚아 드려야……."

"내가 무슨 은혜를 받자고 한 노릇은 아니지만 빚양간 진 것은 갚아야, 킁 킁."

"다 이를 말씀입니까. 내가 무슨 수를 어떻게 하더라도 갚아 드리고말고, 자 이제 아사녀에게 가십시다, 가십시다."

"여보 젊은 양반."

콩콩이는 송두리째 잃어버린 줄 알았던 제 밑천을 얼마쯤이라도 건지게 될 싹을 보자 아까와는 딴판으로 아사달을 나긋나긋이 위해 올리었다.

"탑을 둘이나 혼자 맡아서 지으셨다지요."

"녜, 그렇습니다."

"아규 장해라, 어쩌면 재주가 그렇게도 놀라우실꼬. 하나 짓기도 여간 공이 들지 않으실 텐데 둘 템이나 혼잣손으로 모셨으니 그 공이야 이만저만이 아니실 테지, 킁킁. 탑일은 다 끝이 나셨소."

"녜, 어젯밤으로 끝이 났답니다."

"그래요, 그 동안에 오죽이나 애를 쓰셨을까. 그러면 상금이 많으시겠지."

콩콩이는 눈을 가늘게 떠서 아사달을 바라보았다. 그 상금을 통으로 움키려는 것처럼.

"글쎄 모르겠습니다마는 줄 만큼 주겠지요."

"인제 일이 다 끝났으니, 킁 킁, 오늘이라도 받으실 수 있겠지."

"글쎄요."

"킁 킁, 이런 크나큰 절에서야 쌀이 없어 못 드리겠소, 피륙이 없어 못 드리겠소."

아사달은 상금 받는 셈을 따지는 것엔 아무 흥미가 없었다.

"자, 아사녀에게로 가십시다, 어서 가십시다."

남이 받을 상금을 제 것이 다 된 듯이 널름거리며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으려는 늙은이를 또 한번 재촉하였다.

"사람이란 늙으면 죽어야, 킁 킁. 하던 얘기는 끝도 안 내고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을까. 그러나 차마 이 소리를 어떻게 할까. 그래 하루는, 하루가 아니라 바로 어젯밤 일인데 아사녀가 또 젊으신 양반을 찾아가신다고 이 불국사엘 왔더라오. 왔다가 또 아마 저 몰풍스러운 문지기에게 문전축객을 당했나 보오. 내가 하도 궁금해서 찾아를 나왔더니 절문 앞에서 만나 가지고 울고불고 몸부림을 하는 것을 가까스로 말리고 달래고 해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콩콩이는 흉격이 막힌다는 듯이 말을 뚝 끊었다.

"가는 길에 어떻게 되었단 말씀이오."

아사달은 말 허두에 벌써 불안을 느끼며 급하게 물었다.

"왜, 그, 그림자못 있지 않소, 킁 킁. 탑 그림자가 나타난다는 그 못가엘 또 갔더라오. 달은 낮같이 밝은데 역시 그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더라오. 별안간 무엇에 홀린 듯이 몸을 날려서 물 속으로 뛰, 뛰어들었다오."

콩콩이는 제가 붙들고 간 사실은 쑥 빼어 버리고 아사녀의 죽은 원인을 어디까지나 문지기에게 뒤집어씌우려 하였다.

"물, 물 속에, 뛰, 뛰어들다니요."

아사달의 목소리는 황황하였다.

152

[편집]

"불쌍하지 불쌍해. 그 원수엣놈의 문지기 때문에 생목숨을 끊게 되었으니 불쌍하고말고, 킁 킁. 에구 가엾어라 가엾어라. 세상에 그렇게도 얌전하고 예쁘고 아름다운 아씨를 갖다가……."

콩콩이는 제법 훌쩍훌쩍 우는 소리를 내었다.

아사달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서운 눈으로 잔뜩 앞을 노리며 그 자리에 화석이 되어 버린 듯 한동안은 얼굴의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슬픈 일이 있을까, 절통할 일이 있을까, 킁 킁. 기막히지그려, 기막혀. 두 분이 그리시다가 예까지 온 것을 서로 만나 보지도 못하시고 에구 원통해라. 에구 애닯아라."

콩콩이는 돌변한 아사달의 태도에 겁을 집어먹고 귀신 쫓을 때 주문 외우듯 슬픈 넋두리를 되풀이한 것이었다. 대번에 백지장 모양으로 새하얗게 된 얼굴빛과 금세금세로 눈청이 튀어나오는 양이 암만해도 바람이 나서 꺼뿍 숨이 넘어갈 듯한 것이 무서웠다.

더구나 무섭기는, 그 손아귀에 움켜쥔 새파랗게 날이 선 정과 무지스러운 마치가 움질움질 제 가슴에 날아와 박히고 머리를 후려갈길 것 같은 것이었다.

"명천 하느님 굽어살피소서. 이 늙은것이야 그 젊으신네의 보고만 죽도록 해드리고 시중만 해드리고 고운 옷만 입혀 드렸다뿐이지, 킁 킁, 아무 다른 뜻은 없었소. 꼭 원수엣놈의 문지기 때문에……."

콩콩이는 아사달의 사나운 형상을 보고 제 지은 간이 있어서 등골에 찬 땀이 쭉쭉 끼치며 연방 제 발뺌을 하기에 곱이 끼이었다.

"갑시다, 그 그림자못이란 어디오."

이윽고 아사달은 콩콩이를 꾸짖는 듯 명령하듯 불쑥 한마디하고 진둥한둥 앞장을 서서 거의 줄달음을 치다시피 하였다.

"가다뿐이오, 모시고 가다뿐이오, 후유."

콩콩이는 아사달이 몸을 움직이자 다시 살아난 것처럼 안심의 숨길을 돌리었다.

한참 뒤를 따라가다가 콩콩이의 머리에는 또 딴생각이 떠올랐다.

"여보 젊으신 양반, 천천히 좀 가십시다요, 킁 킁. 이 늙은것이 어디 따라를 가겠단 말이오. 후, 후, 숨차. 아무리 속히 간들 인제야 소용이 무엇이란 말이오. 암 가보시기야 가보셔야 하겠지만, 가보셨자 상심만 되지 무슨 별수가 있단 말이오. 여보 젊으신 양반, 내 말을 좀 들어요."

아사달은 어느 개가 짖느냐 하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콩콩이는 종종걸음을 쳐서 아사달의 팔에 매어달리다시피 하며,

"여보 젊으신 양반, 이런 기막힌 일을 당할수록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큰일 칠 생각을 해야 된답니다. 지금 빈손을 들고 가보시기만 하면 어쩌자는 말이오, 킁 킁. 절에서 찾을 것을 찾아 가지고 가야 역군을 풀어 건져라도 보고 장사도 어엿이 지낼 것 아니오."

콩콩이의 이런 말은 아사달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는 듯하였다.

그는 마치 주정뱅이의 걸음걸이처럼 질팡갈팡하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내닫는다.

'쇠뿔도 단결에 빼랬다고.'

콩콩이는 마지못해 뒤를 쫓아가면서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왕 온 김에 받을 것을 받아 가지고 가야 될 텐데, 저렇게 벌에게 쏘인 듯이 달아를 나니 내 근력으로 휘어잡을 수도 없고, 만일 덧드렸다가는 정말 받을 것도 못 받지 않을까.'

콩콩이는 마침내 지금 당장 든 밑천을 뽑아 내기는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계집이 좀 죽었기로 저렇듯 미쳐 날뛰는 것을 보면 놈팽이가 인정머리는 있는 모양이로군. 마음이 그만큼 헙헙한 다음에야 고생하는 제 죽은 댁내를 끔찍이 두호를 해주었다면 흑 하고 떨어지렷다. 그러면 옷값과 밥값은 얼마를 따질까.'

콩콩이는 인제 기를 쓰고 쫓아갈 필요도 없이 느렁느렁 걸으며 속으로 구구까지 따져 보았다.

'그야 어디 든 것만 꼭 칠 수가 있다고. 성사만 되었으면 수천금이 생겼을 텐데.'

욕심꾸러기 콩콩이는 밑천을 찾게 되매 또 딴 욕심이 일어났다.

'놈도 계집을 잃고 심화가 나는 판이니 홧김에 그 상금을 송두리째 나를 줄는지 아나. 지금은 거의 환장이 된 판이니 며칠은 가만히 내버려두고 차차 일을 꾸며야…….'

153

[편집]

아사달은 그림자못에 다다랐다.

한참 만에야 뒤쫓아온 콩콩이가 행길에서 몇 발자국 들어가지 않은 곳, 가을풀이 우거질 대로 우거진 곳을 가리키며,

"여기요, 바로 이 어림이오. 잡고 가던 내 손을 홱 뿌리치고 몸을 던지기는, 킁킁. 그래 내가 기급절사를 하며 허방지방 뛰어들어 그 치마 뒷자락을 움켜잡으려 했으나 내가 손이 미처 닿기 전에 그의 몸은 벌써 떨어져 풍덩 하는 물소리가 들리었소. 하마터면 이 늙은것까지 휩쓸려 들어가 수중고혼을 지을 뻔하였다오. 에구 원통해라. 에구 불쌍해라. 나는 못둑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가로 뛰며 모로 뛰며 사람 살리오, 소리소리 질렀지만, 이 호젓한 산골에 어느 뉘 하나 대꾸나 해주어야지, 킁 킁."

콩콩이는 그때 광경을 수다 늘어놓다가 흉격이 막힌다는 듯이 잠깐 말을 끊었다.

"미친년 본으로 날뛰다가 집으로 올라가서 그 없는 돈을 있는 대로 툭툭 털어 내어 군정을 사가지고 횃불에 관솔불에 초롱불에 저마다 들리고 밤새도록 시체나마 찾아보았으나 킁 킁, 어디 떠오르기나 해야지. 일찍이만 건져 내었으면 그래도 살려 볼까 하고 그 애를 썼지마는 하늘도 무심하고 귀신도 야속하지."

하고 콩콩이는 못둑에 펄쩍 주저앉아 두 다리를 뻗치고 엉엉 목을 놓아 운다.

기실 콩콩이는 아사녀가 물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 제 집을 향해 소리를 쳐서 그 '대감'의 구종들을 불러 가지고 건져 보려고 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제 손아귀에 쥐었던 큰돈 생길 보옥을 놓친 것이라 그도 애절복통을 하며 서둘렀으나 휘넓고 깊은 못 속에 한번 떨어진 아사녀를 찾아내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골이 머리끝까지 오른 판에 또 그 '대감'에게는 톡톡히 꾸중을 모시었다.

"그것 보아, 어디 사람이 없어서 하필 사내 있는 계집을 거천을 한단 말이야. 어, 악착한 일이로군. 이훌랑은 내 집에 발그림자도 말어."

'대감'은 매우 역정이 나신 모양이었다. 그렇게 천하절색이라고 입에 침이 없이 칭찬받던 계집을 한번 보지도 못한 것이 앵하기도 하려니와, 점잖은 체모에 하인 소시에 오입을 왔다가 이런 망신이 또다시 없었던 것이리라.

콩콩이야말로 꿩 잃고 매 잃은 격이 되었다. 크게 먹을 줄 알았던 것이 틀린 것도 원통하거든, 제 단골 '대감'의 노여움까지 사게 되었으니 장래의 밥자리조차 하나를 잃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색골 대감이 퉁퉁 부어서 장히 못마땅한 듯이 술잔이나 얼근해진 구종들을 호령호령하여 부랴부랴 수레를 타고 돌아간 뒤에, 홀로 남은 콩콩이는 분이 턱밑까지 치밀어올랐다.

"방정맞은 년, 배라먹을 년."

수없이 아사녀에게 욕을 퍼부었다.

"어쩌면 남을 요렇게 망쳐 주어, 망할 년, 매친 년."

제 먹을 반찬도 안 먹고, 배를 따고라도 넣다시피 한 것이 치가 떨리었다. 더구나 말짱한 비단옷 한 벌을 결딴낸 것을 생각하니 정말이지 하늘이 아득하였다.

"계집년이 고렇게 얌치가 없어. 인정머리가 없어."

콩콩이는 뇌고 또 뇌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을 아무리 욕지거리를 한들 쓸데가 무엇이랴.

내일 훤하기만 하면 세상없어도 그 시체를 건져 내어 뺨이라도 한번 치고 그 값진 옷을 벗기리라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미 다 휘질러 놓고 게다가 송장에게 감겼던 옷을 벗겨 낸다 한들 그리 신통할 것이 없었다.

생각할수록 오장육부가 있는 대로 썩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날밤을 고스란히 밝히다가, 생각 생각 끝에 아사녀에게 남편이 있다던 것이 언뜻 머리에 떠올랐다.

"옳지, 옳거니, 참 그년에게 사내가 있구나."

누웠던 콩콩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석수장이라도 우습게 알 것이 아니다. 부여라는 그 먼 두메에서 뽑혀 오고, 탑을 둘씩이나 혼자 맡아 지을 적엔, 상당한 석수일 것이고 그 상금도 적지 아니할 것이다.

"옳다, 그놈에게 물러 받자."

그놈이 무슨 까닭으로 멀리 찾아온 제 계집을 따고 안 만났는지 모르지만, 제 계집이 진 밥값, 옷값을 안 내고는 못 배길 것이다.

"어디, 이놈 안 내었단 봐라."

콩콩이는 마치 아사달을 대한 듯이 벼르고 뽐내었다.

그래서 날 밝기가 무섭게 콩콩이는 마치 성난 뱀이 지나가듯 쐐 하고 길을 쓸며 불국사로 뛰어온 것이었다.

154

[편집]

구름 한 점 없는 새말간 하늘에 갓 솟은 불그스름한 햇발이, 그 어마어마한 광선의 부챗살을 차차 펴기 시작한다.

밤내 풀 끝에 깃들인 이슬들은 장차 사라질 제 운명도 모르는 양, 소리 없이 굴고 아울리며 더욱 영롱하게 더욱 투명하게 그 좁쌀낱만한 몸뚱어리를 번쩍인다.

저 건너 언덕에 우뚝 선 소나무들의 그 촘촘한 잎새로도 가느다란 빛발이 줄줄이 새어 흐르다가 어느결에 그 밑둥이 환해지자, 그 기름한 몸이 넓죽이 엎드려 그림자못 이쪽 저쪽을 거의 가로질렀다. 물결은 이 난데없는 검은 그림자에 놀라 떠다밀듯이 일렁일렁 모여들자 소나무는 물 속에서 우쭐거린다.

별안간! 침침하던 물 얼굴에 눈이 부신 금줄이 섰다. 처음에는 조붓하던 그 폭이 넓게넓게 어란을 잡아 나가는 대로 금실 은실이 겹겹으로 얽히고 설키고 휘돌고 감돌고, 수없는 별들이 뭉치뭉치 덩이덩이 뛰는 양, 넘노는 양, 춤추는 양 바그르르 헤어지는가 하면 출렁출렁 모여든다. 갈매기 몇 마리가 그 흰 날개를 더욱 희게 번득이며 너울너울 물 얼굴을 스쳐 나는 것은 금빛으로 춤추는 물꽃을 고기만 여겨 쪼아 먹으려는 탓이리라.

이웃 동네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몇 가닥 떠올라 수멸수멸하는 물 속에서 토막토막 끊어져서 안개처럼 서리었다가 사라진다.

못가의 아침.

아사달은 넋 잃은 사람 모양으로 섰던 그 자리에 한동안 그린 듯이 서 있다가 지척지척 발길을 옮기었다.

그는 암만해도 아사녀가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콩콩이가 아무리 죽었다고 슬퍼하고 푸념을 하여도 종시 곧이들리지를 않았다.

아사녀가 서라벌 와서 죽다니 말이 되느냐. 내 있는 지척에 와서 죽다니 말이 되느냐. 그 고생한 원정도 들려주지 않고 그 안타까운 하소연도 일러주지 않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 그 얼마나 더 장성해지고 더 아름답게 된 모양을 보여 주지 않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 그 먼 길에 나를 찾아오느라고 그 파리해진 얼굴을, 그 저는 다리를 보여 주지 않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 그렇게 의젓한 그였거늘, 그렇게 차근차근한 그였거늘, 그렇게 나이보다 숙성한 그였거늘, 얌전한 그였거늘, 사랑 많은 그였거늘 나를 버리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

설령 어쩔 수 없이 죽는다 하더라도 하필 대공에 마지막 손을 뗀 어젯밤에 죽다니 말이 되느냐. 그리움도 끝이 나고 기다림도 막음한 하필 어젯밤에 죽음의 길로 나아갈 까닭이 있느냐.

거짓말이다. 멀쩡한 거짓말이다. 아사녀는 살아 있다. 분명히 살아 있다. 이 휘넓은 못둑 어디에서 어릿거리고 있다. 나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 찾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발이 자무는 풀을 봐라, 어디 아사녀가 죽었다고 속살거리느냐.

저 넘노는 금물결 은물결을 봐라, 어디 아사녀가 죽었다는 흔적이 있느냐.

저 하늘을 봐라, 어제와 꼭 같이 푸르지 않으냐.

저 햇발을 봐라, 어제와 꼭 같이 밝지 않으냐.

그런데 아사녀만 죽어! 안 될 말! 안 될 말!

아사달의 미친 듯한, 꿈꾸는 듯한 발길은 못둑을 걷고 또 걸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기어코 아사녀를 찾아내고야 말려는 것처럼.

"허, 저것 봐, 큰일났네, 큰일나."

다리를 뻗고 앉아서 넋두리를 넣어 가며 아주 법짜로 울고 있던 콩콩이는 울음을 그치고 중얼거렸다. 아직도 우느라고 핏발만 선 그 눈에는 무서움의 그림자가 떠돌았다.

"킁 킁, 어쩌면 그 걸음걸이까지 부부끼리 저렇듯이 닮았을까. 고개를 옆으로 기우뚱하게 타라메어 연방 못과 둑을 번갈아 보고 가는 꼴이란 어쩌면 천연 제 계집 같을까. 암만해도 제 계집 혼령이 뒤집어씌인 것 같은데…… 저러다가 아주 미치지나 않을까."

콩콩이는 무서운 중에도 제 찾을 것을 못 찾을 것이 걱정이었다.

"설마 사람이 간 대로 미치기야 할라고, 킁 킁. 아무튼 년놈이 다 불쌍은 하군."

하고 동안이 떠서 눈앞에 아물아물하게 보이는 아사달의 지척거리는 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몸을 털고 일어났다.

"저렇게 미친 증이 날 적엔 하루 이틀 가만히 내버려두어야 돼. 미친 증이 가라앉기 전엔 막무가내야."

곁에 사람이나 있는 듯이 제가 저를 타이르고 시장기가 나서 제 집으로 올라가 버렸다.

155

[편집]

해 돋을 녘부터 시작된 아사달의 헤매는 발길은 해가 떨어져도 멈출 줄 몰랐다.

거의 십 리나 되는 못 둘레를 쉬임없이 끊임없이 돌고 또 돌았다. 노정으로 따져 보면 칠팔십 리도 넘으련만 그는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온종일 고스란히 굶었으되 시장한 줄도 몰랐다. 뽀얀 입에 물 한 모금 들어가지 않았지만 목마른 줄도 몰랐다.

이편 둑에 와보면 저편 둑 우거진 풀잎들이 흔들흔들 흔들리는 것이 궁금하였다. 앞변죽으로 돌아 보면 뒷변죽의 어름어름하는 소나무 그림자가 수상하였다.

이쪽 못 기슭에서 물결이 출렁 하고 보라를 날리며 무엇이 솟구쳐 오른 듯하여 줄달음을 치면 저 멀리 희떡버떡 옷자락 같은 것이 떠내려간 것만 같았다.

밤이 되었다.

한가위 무렵의 밝은 달이 어젯밤과 같이 떠올랐다.

아무리 밝아도 달빛은 꿈결 같다.

한 바퀴, 두 바퀴! 아사달의 소매에 촉촉히 이슬이 내렸다.

그의 발길은 휘청거린다.

그의 눈길도 휘청거린다.

사르락사르락 치마 끄는 소리가 분명 등뒤에서 났다.

그가 고개를 돌릴 겨를도 없이 게 있을 아사녀가 안개 자락 모양으로 사라지기는 사라졌으되 그 사라진 자취가 아리숭아리숭 남은 듯하다.

"아사녀!"

아사달은 소리를 내어 가만히 불러 보았다.

"내 예 있어요, 이게 보이지 않아요, 이게."

하면서 아사녀는 자기 가까운 그 어디서 손을 내저어 보일 것만 같다. 숨소리를 죽이고 풀 속에 숨었을 것만 같다. 나무 뒤에 붙어섰는지도 모른다.

"아사녀, 아사녀!"

아사달은 또 한번 불러 보았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물꽃 사이로 아사녀가 상그레 웃는 얼굴을 나타낸 듯싶었다.

"아사녀, 아사녀."

허둥지둥 물 속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한 줄기 투명체 같은 아사녀는 쭈르르 물 위를 얼음 지치듯 하여 저 건너 능수버들의 늘어진 가지 속으로 사라진 것 같았다.

완연히 물 위에 아사녀의 발자국이 남은 양, 물결은 그 자국대로 패인 자리를 메우려는 것처럼 찰랑찰랑 굽이를 치는데, 그 늘어진 버들가지는 사람을 숨기느라고 휘영휘영한다.

"아사녀, 아사녀!"

아사달은 열 번도 스무 번도 더 가본 거기를 쫓아가기에는 지친 듯이 건너다보고만 불렀다.

아니나다를까!

"나 예 있어요."

나직한 목소리가 실바람을 타고 건너온 순간, 아사녀는 그 버드나무 밑둥을 기대고 뚜렷이 안타까운 모양을 나타내었다.

그, 고개를 다소곳하고 있는 양이 마치 그들이 마지막으로 작별할 적, 슬쩍 눈길만 오고 간 그때 그 모양과 꼭 같았다. 그러고 저 수양버들도 갈 데 없이 자기네 집 들어가는 모퉁이 개울가에 서 있는 그 수양버들과 같았다.

아사달은 지금까지 들고 다니던 마치와 정을 허리춤에 꽂고 그 수양버들을 향해 줄달음질을 쳤다.

막상 그 늘어진 가지를 휘어잡았을 제엔 누렁누렁해진 그 좁다란 잎사귀를 뚫고 달빛만 유난스럽게 아사달의 눈시울 속으로 기어든다.

"난 예 있는데, 왜 거길 가셔요."

눈을 돌리자, 아사녀는 바로 물가에 외로이 서서 아사달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 얼굴찌는 자기가 아사녀의 얼굴을 보던 가운데 가장 의젓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깨끗하고 가장 거룩하였다.

이번에야말로 영절스럽게 나타난 이 얼굴을 또 놓칠까 두려워하며 가만가만히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다가들어갔다.

이번이란 이번이야말로 아사녀도 그린 듯이 서 있을 뿐,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두 간! 한 간! 그들의 동안은 좁아들었다.

'인제야!'

하고 아사달은 아사녀를 덥석 부둥켜안았다.

그 순간! 아사달의 불같이 뜨거운 뺨에는 차고 단단한 무엇이 선뜻하고 부딪쳤다.

그것은 돌이었다! 몸집과 키가 천연 아사녀만한 돌이었다.

한때의 환각(幻覺)은 깨어졌지만 한번 머릿속 깊이 새겨진 아사녀의 환영은 지워질 까닭이 없었다.

아사달의 눈에는 그 돌에 아사녀의 모습이 그리기나 한 듯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아사달은 허리춤에 꽂았던 마치와 정을 빼어 들었다.

그는 방장 나타난 제 아내의 환영을 그대로 그 돌에 새기기 시작하였다.

156

[편집]

주만은 눈앞이 캄캄하였다.

내일 모레면 아사달과 두 손길을 마주잡고 곱다랗게 자취를 감출 수 있었거늘, 하필 오늘 밤으로 그 일이 탄로가 날 줄이야.

내일로라도 아버지가 아시기만 하면 제 목숨은 연기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틀 말미를 어머니에게 청하였던 것이다.

사초부인도 아무리 달래도 타일러도 도무지 딸의 뜻을 빼앗지 못할 줄 깨닫자, 흉격이 메어지나마 딸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눈앞에 참혹한 꼴을 보느니보다는 얼마나 나은지 몰랐다. 이왕지사 틀린 일이라면 그 지긋지긋한 비극을 하루라도 연기를 하는 것이 그도 원하는 바였다. 하루 이틀 끄는 동안에 혹은 무사타첩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는 암만해도 이런 비참한 사단이 벌어지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금이야 옥이야 귀히귀히 길러 낸 딸이 설마 불길에 생목숨을 태우게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요, 그렇게 귀히 될 줄 알았던 주만이 석수장이의 첩이 되어 남의 뒷손가락질을 받을 것 같지를 않았다.

제가 아무리 고집을 세워도 경신에게 시집을 가고는 말려니 하는 터무니없는 희망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내일 아침 아버지가 다시 물으시는 한이 있더라도, 달도 밝고 해서 제 동무의 집에 놀러 갔다가 바람을 쏘이고 감기가 몹시 들어 몸져 누워 있다고 꾸며 대기로 모녀간에 작정이 되었다.

이튿날이 되었다.

주만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송구한 마음으로 오마조마 무서운 제 운명을 기다려 보았으나 그날은 무사히 넘어갔다.

기실 유종은 한가위 명절 차비 까닭에 그날은 일찌거니 조회에 들어가게 되고, 파조해 나오자 경신 형제가 또 찾아왔던 것이다.

금량상은 제 아우를 필두로 여러 낭도를 데리고 이번 명절의 큰 모임에 궁술과 검술을 빛내기 위하여 상경한 것이었다.

큰 손님을 맞이하여 집안은 다시 벅쩍 괴었으나 그래도 사초부인은 틈틈이 별당에 와서 주만에게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있으라고 부탁부탁하였다.

금량상 형제에게 보이려고 아버지께서 언제 주만을 부를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경신은 다시 유종의 문에 발을 들여놓아 주만을 괴롭게 할 것을 꺼리었지만 제 형이 끄는 바람에 아니 올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주만도 이런 판에 몸을 빼나갈 수도 없었다. 이번 찾는 데 자기가 또 없었다가는 참으로 무서운 사태는 벌어지고 말 것이다.

얼른 부르기나 해서 제 할 구실을 치르기나 해버렸으면 그래도 마음이 놓이겠는데 해가 떨어져도 부르러 오지를 않았다.

주만은 안절부절못하였다.

아사달이 오늘이라도 길을 떠난다고 하였는데 암만 기다려도 내가 오지를 않으니 혼자서 발정을 하지나 않을까. 일일이 삼추같이 제 고장 가기를 원하고 바라는 그가 아닌가.

'그가 설마 그럴 리야 있을까. 그렇게 떡먹듯이 언약을 해놓았는데 나를 버리고 혼자 가실 리야.'

생각하고 스스로 안심을 해보려 하였건만 애가 키이고 마음이 졸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밤이 되었다.

암만해도 조맛증이 나서 참을 수 없었다. 여태까지 부르시지 않으니 오늘 밤 안으로는 찾을 것 같지 않아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을 때 별안간 손님께 나와 보이라는 전갈이 왔다.

초저녁까지 양상이 데리고 온 낭도들을 대접해 보내고 형제만 남게 되자 유종은 딸을 부르러 보낸 것이었다.

주만은 사랑에 나가 먼저 양상을 보고 절을 하매 양상은 일어나 맞절을 하였다.

"여보게, 어린것 절을 그냥 받으실 게지 맞절이 무엇인가, 허허."

유종은 오래간만에 막역의 친구를 만나 매우 유쾌한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장래 제수씨의 절을 어떻게 앉아서 받는단 말인가, 허허."

양상도 크게 웃었다. 그 웃음 소리와 음성도 천연 아우와 같았다. 그 '장래 제수씨'란 말에 주만의 귀는 따가웠다.

"경신이 너는 벌써 이 아가씨가 초면이 아니겠구나."

하고 양상은 경신을 돌아보고 웃었다.

주만이 들어오자 한옆에 비켜섰던 경신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었다.

주만은 차마 눈을 들어 경신을 볼 수가 없었건만 얼른 보기에도 그의 자기를 보는 눈엔 애연한 빛이 가득히 차 있었다. 단 며칠 안 되는 사이에 몹시 파리해진 주만의 얼굴을 보고 그는 매우 놀란 까닭이다.

주만은 이내 몸을 일으켜 내빼 나왔지만 그 짧은 동안에도 그의 등은 흠뻑 젖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괴롭고 어색한 순간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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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 형제 앞을 물러나온 주만은 무서운 고역이나 치르고 난 것처럼 한동안은 몸과 마음이 얼얼하였다.

한번 불리어 갔다 왔으니 이 밤으로 또 찾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들자 그는 부랴부랴 간단한 행장을 수습하였다. 행장이래야 옷 한 벌은 입고 가면 고만이요, 노리개 보물 같은 것은 제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만 골라서 몸에 지니었다.

인제는 영 이별이구나 하매 새삼스럽게 방 안이 휘둘러 보이었다.

막 방문을 열고 나오려 할 제 뜰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주만은 깜짝 놀랐으나 그것은 다른 사람 아닌,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초부인이었다.

주만은 한옆으로 이런 경우에 나타난 어머니가 한없이 민망하였으나, 한옆으로는 이제 한번 떠나면 다시 못 뵈올 자정 깊으신 어머니를 뵈옵고 마음속으로나마 작별을 여쭙게 되는 것이 한결 섭섭한 정을 풀어 주는 듯도 하였다.

사초부인은 나들이옷을 입은 딸을 보고 질색을 하고 말리었다.

이 아슬아슬한 고비에 경신 형제가 찾아온 것은 하늘이 도우신 게라는 둥, 네가 경신을 보고 아무리 아사달과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하더라도 경신이가 다시 올 적에는 네 말을 믿지 않은 것이라는 둥,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는 끝끝내 너를 아내로 삼을 작정이니 너만 고집을 세우지 않으면 일이 올곧게 되지 않겠느냐, 두말도 말고 시집을 가게 하여라, 그 아사달이란 사람도 너만 가지 않으면 기다리다 못하여 제 아내를 찾아갈 것 아니냐, 제발 이 늙은 부모를 버리지 말아 다고…….

사초부인은 암만해도 단념을 못 한 듯 또 아까 말을 되풀이하였다.

주만은 굳이 어머니의 말씀을 반대하지도 않았다. 지금 와서 반대를 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영구히 잃게 되는 어머니의 심정!

중언부언하는 어머니의 정곡을 생각하매 주만의 가슴은 쓰라리었다. 늙은 부모를 버리지 말라는 마지막 부탁엔 여무지게 마음을 먹은 주만에게도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을 걷잡기 어려웠다.

밤이 이슥하여 자시가 지나고 축시가 지나도 사초부인의 긴 푸념 잔 사설은 그치지 않았다.

듣기만 하고 있는 딸을 보고 사초부인은 적이 안심이 된 듯 새벽녘에는 그대로 쓰러져서 고단한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저는 가요.'

가늘게 코까지 고는 어머니의 뺨에 살그머니 제 뺨을 대어 보고 주만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자국을 가까스로 떼어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왁자지껄하게 털이도 깨울 수 없고, 또 털이를 데리고 갈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말도 끌어 내올 수 없어, 그는 혼자 걸어서 불국사를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새벽달은 밝아서 길은 어둡지 않았으나, 어쩌면 걸음이 이렇게 더딜까. 마음이 급할수록 길은 더욱 늘어나는 듯, 말을 탔으면 벌써 들어갔을 텐데 반에 반절도 못 온 듯하였다.

길가에 행인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주만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줄달음을 쳤다.

하하 내어뿜는 그의 숨길은 유리 같은 맑은 공기에 안개처럼 서리었다.

'이 밤이 새기 전에.'

주만은 달음박질을 하면서도 속으로 뇌고 또 뇌었다.

이 밤이 새기 전에 이 서라벌을 떠나야 한다. 어머니 잠 깨시기 전에, 아버지 아시기 전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주만이 불국사 대문을 두드릴 때에는 밝은 달빛도 희미하게 스러지며 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문지기가 먹은 간이 있어서 잠결에도 주만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얼른 대문을 열자 주만은 쏜살같이 달려들어갔다. 등뒤에서 문지기가 자기를 부르는 듯도 하였지만, 주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사달의 처소로 달리었다. 닫혀진 덧문을 두드리며,

"아사달님, 아사달님!"

미리 불러서 선통을 하였건만, 방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아직 주무시나."

주만은 혼자 속살거리고 문을 덜컥 열었다.

아사달이 누워 있을 자리에 아사달은 없고 비어 있었다.

'웬일일까!'

주만의 가슴은 까닭 없이 내려앉는다.

웃목에서 자던 차돌이가 인기척에 놀라 일어났다.

"아사달님이 어디 가셨느냐."

주만은 급하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어제 나가신 뒤로 들어오시지를 않아요."

차돌은 졸리운 눈을 비비며 대답하였다.

"응, 어제 나가 안 들어오셨어!"

주만의 눈은 호동그래졌다. 그러면 나를 버리고 혼자 발정을 하였는가.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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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이 어제 나가 아니 들어왔다는 차돌의 대답에, 주만의 서 있는 자리는 지동이나 일어난 듯 술렁술렁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래, 너도 어디 가신지를 모른단 말이냐."

주만은 핑핑 내어둘리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채쳐 물었다.

"글녓시오. 가실 데는 별로 없으신 어른이라 일이 끝났으니 어디 서울 구경이나 나가신 줄 알고 고대 돌아오실까 하고 왼종일 기다려도 오시지를 안해요."

차돌의 대답도 모호하였다.

"그러면 부여로 가신 것 아니냐."

주만은 제 마음에 먹은 대로 쏘아보았다.

"연장과 행리도 안 챙기시고 길을 떠나실 수야 있겠습니까. 소승은 혹시 구슬아가씨 댁에나 들르셨나 하였지요."

제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하다 해도 아이는 아이다. 이런 어림없는 수작이 또 어디 있을까. 그가 우리집을 찾을 수 있는 형편이라면 작히나 좋을까. 암만해도 혼자 발정을 한 게로구나. 내가 굳이굳이 따라가겠다고 하니까, 행장도 꾸리지 않고 아무도 몰래 슬그머니 길을 떠나 버린 게로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어제 올 것을. 당장 일이 탄로가 나서 곧 잡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얼굴이나마 한번 더 보았을 것을! 주만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였다. 방문 밖에서 문지기의 소리가 났다.

"구슬아가씨 여기 계십니까. 아사달님이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지요."

주만은 귀가 번쩍 뜨였다. 펄쩍 방문을 열고,

"그럼 대사는 아사달님의 간 곳을 아시오."

"녜, 대강 짐작은 합니다마는 아까 들어오실 때에도 그 말씀을 여쭈려니까, 하도 빨리 가셔서 소승의 부르는 소리도 못 들으시는 듯합니다. 그렇게 급하십시오, 허허."

남은 속이 졸여서 죽겠는데, 문지기는 능글능글하게 웃는다.

"아사달님이 어디로 가셨소. 빨리 말을 하오."

주만은 초조한 듯이 서둘렀다.

"그 어른 간 데는 소승밖에 아는 이가 없지요."

문지기는 주만의 앞에서는 아사달을 깍듯이 위해 올렸다.

"불국사에 승려가 수백 명이 들끓지만 사람 들고 나는 거야 아는 놈이 누가 있단 말입니까. 첫째 그 어른을 모시고 있다는 이 차돌이란 놈도 그 어른의 가신 곳을 모르니……."

문지기는 쓸데없는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 어디를 가셨소. 얼른 일러주오."

"글쎄올시다. 그것 일러드리기야 어렵지 않지만, 소승은 그 어른 때문에 까닭 없는 말까지 듣고…… 또 이번에 그 어른 간 곳을 일러드렸다가……."

하고 매우 난처한 듯이 주저주저하며 그 뻔뻔한 머리를 긁적긁적한다.

주만은 문지기의 뜻을 알아차렸다. 재빠르게 황금 가락지를 빼어 넌지시 손에 쥐어 주었다.

"녜, 녜, 이건 너무 황감합니다. 일러드리고말곱시오. 저 그 어른은 그림자못으로 가셨습니다."

"그림자못? 그림자못엔 왜 가셨을까."

"그 까닭은 소승도 잘 모릅니다."

문지기는 아사달의 아내가 찾아왔다가 그 못에 빠져 죽었단 말은 차마 하기 어려웠다.

"어제 아침, 새벽같이 웬 늙은 여편네가 들어닥치더니 다짜고짜로 그 어른을 모시고 갔는데, 곁에서 듣자 하니 그림자못으로 가는 듯합디다."

"그러면 대사가 그 못을 잘 아시겠구려. 같이 좀 가주실 수 없을까."

"소승이 모시고 가도 좋지만 저 차돌이란 놈도 길을 잘 압니다. 저 애를 데리고 가시지요."

문지기는 딱장대 콩콩이를 또 만날까 겁이 나서 꽁무니를 빼었다.

주만은 차돌을 재촉하여 부랴부랴 그림자못으로 달리었다.

못가가 워낙 휘넓어서 한눈 안에 거둘 수도 없거니와, 샐녘과 아침의 어림을 뒤덮는 젖빛 안개가 뽀얗게 끼어 얼른 아사달의 모양이 띄지 않았다.

"어디 여기 계신가."

주만은 차돌을 돌아보았다.

차돌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더니,

"저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천연 아사달님이 돌을 쪼으시던 소리 같군요."

주만은 걸음을 멈추자, 고요한 공기를 흔드는 귀에 익은 그 소리를 몰라들을 리 없었다. 소리나는 곳으로 쫓아 들어가매, 저만큼 못둑 아래 헤실헤실한 안개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릿거리는 것이 보이었다.

주만은 죽었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보다 더 반가웠다. 그는 진둥한둥 뛰어갔다. 몇 걸음 남겨 놓지 않고 소리를 쳤다.

"아사달님! 아사달님!"

꽤 크게 지른 소리었건만, 아사달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주만도 나는 듯이 못둑 밑까지 내려와서 아사달의 곁으로 바싹 다가서며 거의 귀에 대다시피 하고,

"아사달님, 아사달님!"

또 한번 불렀건만, 아사달은 들은 척도 않고 정과 마치만 번개같이 놀리었다.

차돌은 아사달과 주만의 만나는 양을 먼빛으로 바라보자 살그머니 제 갈 데로 가버렸다.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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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님, 나 좀 보셔요. 아사달님!"

주만은 마침내 짜증을 내며 부르짖었다. 그래도 아사달은 정 놀리기를 쉬지 않았다.

정과 마치의 자지러진 가락과 그 황홀한 얼굴빛으로 보아 아사달은 다시금 신흥에 겨운 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똑바로 씹어 들어가듯 돌에 박힌 그 눈길은 벼락이 떨어져도 옆으로 쏠릴 것 같지 않았다.

'이 일을 어찌하나.'

주만의 가슴은 미어졌다.

"여보세요, 아사달님, 아사달님, 한시가 급합니다. 우리가 여기 이러고 있을 형편이 못 됩니다. 모든 일은 탄로가 나고 말았습니다. 아사달님, 아사달님, 우리는 어서 달아나야 합니다. 어서 서라벌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집에서는 내가 없어진 줄을 알고 벌써 야단법석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하인들은 나를 잡으러 나섰는지 모릅니다. 아사달님, 아사달님!"

주만의 하소연은 애가 끊이는 듯하였건만, 아사달의 귓가에는 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글쎄 이게 웬일일까. 그런 엄청난 대공을 마치셨거든 그 돌을 왜 또 새기세요. 참, 기막히는 일도 있고는 볼 일. 아슬아슬한 고비에 그 돌을 붙잡고 계시면 어떡하자는 말씀예요. 어서 일어나요. 녜, 아사달님, 녜, 아사달님!"

쇠와 돌이 맞부딪는 여무지고 단단한 울림에 주만의 불이 붙는 듯한 간청도 가뭇없이 스러졌다.

물 얼굴에 자욱하던 안개가 차츰차츰 걷히었다. 잿빛으로 조으던 물결은 파름파름하게 눈을 떴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흐늘흐늘 춤을 추는 것은, 돋아 오는 햇발이 미처 물 얼굴에까지는 닿지 않고 공중을 쏘아 그 광선이 반사를 일으키는 까닭이리라.

"아이 날이 아주 밝았네. 아이 해가 떠오르네. 이를 어쩌나, 이를 어쩌나."

주만은 길길이 뛰고 싶었다.

"아사달님, 아사달님!"

또 한번 부르짖어 보았으나 또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구슬 같은 땀이 그 번듯한 이마와 콧마루에 주렁주렁 맺힌 걸로 보아 일에 얼마나 골똘한 것을 가리켜 줄 뿐.

"아사달님, 아사달님, 아사달님은 이 목숨이 끊어지는 줄을 모르시는군. 한 시각, 한 시각이 이 명을 재촉하는 줄 모르시는군. 그 정 자리가 한금 두금 나는 것이 이 몸과 피를 방울방울 마르게 하는 줄 모르시는군. 잡히기만 하면 이 몸이 연기로 사라지는 줄 모르시는군."

주만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정질이 잠깐 늦추어지는 순간 아사달의 시선은 힐끗 주만을 보았다.

그 눈길은,

'제발 나를 괴롭게 말아 주시오.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 주시오.'

하고 애원하는 듯하였다.

주만은 이토록 애절한 눈매는 처음 보았다.

일순간 아사달은 다시 눈길을 돌로 옮기었으나, 그 손에는 힘이 빠져나간 듯 정질과 마치질이 허전허전하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 나타난 아내의 모양은 영절스럽게 또렷또렷하였다. 비록 환영일망정 피가 돌고 맥이 뛰듯 생생하게 살아왔다. 한번 마치와 정을 들고 대하자, 마치 아내의 모습이 미리 새겨져 있는 것처럼, 정 지나간 자리를 따라 대번에 동글 갸름한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고 그 야들야들한 뺨의 보드라운 선이 그리어졌다. 눈썹 언저리를 도두룩하게 솟게 하여 그 가늘고도 진하고 초승달처럼 고부장하게 휘어들어 약간 꼬리를 처뜨리게 하고는 은행꺼풀 같은 눈시울을 아렴풋이 쪼아 내었다.

그는 어느결에 달이 기운 줄도 몰랐다. 어느결에 새벽안개가 열 겹 스무 겹 저를 에워싼 줄도 몰랐다. 어느결에 동이 훤하게 밝아 온 줄도 몰랐다.

안청이 그 중에서 띠룩띠룩하는 듯이 눈시울을 다듬어 내기에도 잔손질이 수없이 들었다.

눈시울을 가까스로 끝내어 이번에는 더 어려운 눈. 아사달은 처음엔 상글상글 웃는 눈매를 찍어 내려 하였건만, 암만해도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그 눈물 괸 눈매만 눈에 밟히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눈매를 새겨 내기에 열고가 났다.

정은 돌 위에서 떤다. 암만해도 그 눈매가 뜻대로 새겨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아니다, 그때에야 그는 제 옆에 인기척을 느끼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 아닌 주만인 줄도 온몸으로 느끼었다. 기실 주만은 그보다 훨씬 먼저 와서 부르고 외치었건만, 그 애끊이는 하소연도 도무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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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아기가 내 옆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분명히 들자, 아사달의 정질은 갈수록 제자리에 놓이지 않고, 눈앞에 그리는 아사녀의 눈매조차 아리숭아리숭 여불없이 붙들리지 않았다.

그의 열에 뜬 머리조차, 주만의 뼈에 사무치는 원정으로, 찬물을 끼얹는 듯 식어 갔다.

그는 이 쨍쨍한 현실에 한순간 손길이 빗나가고 말았다.

아뿔싸! 그는 다시 돌 위로 눈을 돌렸건만, 그렇게도 생생하던 아내의 환영은 하잘것없이 흐려진다. 봄볕에 눈처럼 스러지고, 저녁놀 사라지듯 흐지부지 가무러지려 한다. 그 대신 초죽음 다 된 해쓱한 주만의 얼굴과 그 파랗게 질린 입술이 실룩실룩 떨고 있다.

아사달은 아물아물해 가는 아사녀의 모습을 불러일으키려고 바작바작 애를 켜며 질팡갈팡 정과 마치를 휘둘렀다.

아사녀가 죽은 줄이야 꿈에도 모르는 주만이로되, 아사달의 침통한 얼굴과 애절한 눈초리와 서두는 태도로 보아, 이 공사도 아사달에게는 다보탑과 석가탑보다 못하지 않은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조른다 해도 자리를 뜰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리 기막힌 제 처지를 호소한다 해도 이미 도취의 경지에 들어간 아사달의 마음을 돌릴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의 일만 더 늦어지게 할 뿐이 아닌가.

주만의 속은 조비비는 듯하였지만 아사달의 손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멀거니 정질의 자취를 더듬어 보매, 아사달은 사람의 얼굴을 새기느라고 애를 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침때가 겨웠다.

한낮이 되었다.

아사달의 손은 좀처럼 쉬어지지 않았다.

주만이가 제 등뒤에 멀지 않게 말굽 소리를 들은 듯싶은 순간,

"아가씨, 아가씨, 구슬아가씨."

가쁘게 부르는 털이의 소리가 들려 왔다.

주만이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털이가 죽을 상을 하고 말을 채쳐 오는 꼴이 보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고 주만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주만이 마주 나오자 털이는 말에서 내려 종종걸음을 쳤다.

"아가씨, 아가씨, 큰일났는뎁시오. 왜 여기 이러고 곕시오. 쇤네는 벌써벌써 멀리멀리 가신 줄 알고 허허실수로 불국사엘 들렀더니, 차돌의 말이 여기 계시다기로 이리로 오는 길입지요."

털이는 이마에 괸 진땀을 손으로 씻으며 그 동그란 눈을 더욱 호동그랗게 뜬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

주만은 오히려 태연히 물었다.

"이거, 이거, 참 큰일났는뎁시오. 여기 이러고 계시다니, 쇤네 뒤에는 곧 하인배들이 쫓아올 텐뎁시오. 왜 달아나지를 않으십시오. 녜, 녜, 아가씨 지금이라도 어서어서 달아를 나십시오."

"다 틀렸다. 어찌 된 곡절이나 들려 다오."

주만은 이미 단념하고 절망한 지 오래였다. 하필 이 아슬아슬한 판에 아사달이 그 돌을 새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저의 악착한 운명이 작정된 줄 알았던 것이다.

"오늘이 한가위, 신궁 앞에 검술과 궁술의 큰 모임이 열리고, 경신 서방님이 활쏘기와 칼겨룸을 하시는데 거기 구경을 가시자고 대감께서 아가씨를 찾으신 모양입시오. 마님께서 숨기다가 못해서 마침내 바른 대로 여쭈신 모양입시오. 대감께서 발을 구르시고 역정을 하늘같이 내시어, 그런 년은 당장 잡아서 불에 태워 국법을 바루신다고 야단야단을 치시는 걸 쇤네도 밖에서 들었는뎁시오. 마님께서 밖으로 나오시더니 저를 넌지시 부르시어 너 빨리 불국사엘 가서 아가씨가 계신가 안 계신가만 보고 만일 계시거든 빨리 달아나게 하라고 이르셨는데, 아가씨는 여기 이러고 계시니 이 일을 장차 어떡해요, 어떡해요."

하고 털이는 입을 삐죽삐죽하며 눈물이 듣거니 맺거니 한다.

주만은 어머니의 자정에 가슴이 찌르르해지도록 새삼스럽게 감동하였다. 버린 딸이요 못쓸 딸이건만 그 목숨을 구하도록 애를 졸이는 모양이 환하게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쇤네는 말을 타고 왔으니 얼마쯤은 빠르긴 빨랐지만 곧 뒤미처 하인배들이 달려올걸입시오. 아가씨, 어서 달아나십시오. 네,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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