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121장~14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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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편집]

아사녀는 그 노파에게 끌려 일어나다가 말고 다시금 물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침 햇발을 받은 물결 위엔 무수한 금별, 은별이 수멸수멸 춤을 추는데, 동쪽 언덕에 우뚝우뚝 서 있는 수양버들 몇 주가 그 축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퍼더버리고 제 본형체보다 어마어마하게 길게 가로누웠고, 건넛마을 초가지붕 몇 채가 거꾸로 떠보이었다.

아무리 눈을 닦고 또 닦아 보아도 탑 비스름한 그림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무엇을 이렇게 골똘히 들여다보시오, 킁킁. 그 못 속에, 원, 무엇이 있단 말이오."

노파도 덩달아 못 속을 들여다보다가 아사녀에게 물었다.

아사녀는 대꾸도 않고 휘넓은 물 얼굴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었다.

"무엇을 빠뜨렸소, 킁 킁. 저렇게 밑바닥이 환히 보이는 듯해도 그 못물이 어떻게 깊은데, 킁 킁. 무엇을 빠뜨렸다면 건져 내기는 가망 밖이오, 킁 킁."

"아녜요, 아무것도 빠뜨린 것은 없어요."

"그러면 무엇을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단 말이오. 시장은 하다며, 킁 킁."

"그림자를 찾아요."

"그림자를 찾아? 킁 킁."

하고 노파는 얼굴을 번쩍 들어 아사녀를 다시금 훑어보았다. 암만해도 이 계집이 약간 가기는 갔구나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곡한 얼굴과 샛별 같은 눈매가 암만해도 미친 사람 같지는 않은데.

"그림자란 대체 무슨 그림자요. 아까 눈을 막 비비면서도…… 킁 킁. 그림자라길래 나는 잠꼬댄 줄로만 알았더니, 그러면 그 그림자가 무슨 곡절이 있구려. 도대체 어떤 그림자를 찾으시오."

"저어…… 저어……."

아사녀는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이렇게 정답게 굴고 마음 좋은 늙은이를 속이기도 무엇하였다.

"저어, 석가탑 그림자 말씀예요."

"석가탑 그림자?"

하고 노파는 더욱 수상하다는 듯이 아사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석가탑이라면 지금 불국사에서 이룩하는 큰 탑 말이구려, 킁 킁."

"녜, 그래요."

노파는 누구에게 눈짓이나 하는 듯이 눈을 껌벅껌벅한다.

이것은 제 비위에 틀리거나 또는 제 생각 밖의 일을 당할 때 그의 하는 버릇이었다.

"석가탑 그림자는 왜 찾으시오."

"그 탑이 다 되었나 덜 되었나 그림자를 보아야 알 것 아녜요."

아사녀는 노파와 수작을 주고받으면서도 그의 눈길은 못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제 생각만 하고 성가신 듯이 불쑥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노파의 눈은 더 유난스럽게 껌벅거렸다. 아사녀의 말은 갈수록 그에게 수수께끼요, 또 약간 비위에도 거슬린 탓이리라.

"여보 젊으신네, 그 탑이 다 되고 덜 된 것은 알아서 또 무엇 하오, 킁 킁."

그 노파는 제 비위를 누르고 다시 한번 아사녀의 속을 떠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잡고 있던 아사녀의 손목을 슬며시 놓아 버렸다.

"그럴 일이 있어요. 그 탑 다 된 것을 꼭 알아야 될 일이 있어요."

아사녀는 그래도 물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하였다.

"킁 킁, 그래, 그 탑 그림자가 여기 비칠 줄 어떻게 꼭 아시오."

그제야 아사녀는 놀란 듯이 노파를 돌아보았다.

"그럼 비치지 않고요?"

"여보 젊으신네, 아니 여기가 어딘 줄 아오. 불국사에서 예까지 오자면 몇 리나 되는지 알기나 하오, 킁 킁. 말인즉은 십 리라 해도 거의 시오 리나 될 것이오. 설령 십 리만 된다 해도 십 리 밖에 있는 석가탑 그림자가 이 못에 비치다니 될 뻔이나 한 말이오, 킁 킁."

"그러면 비치지 않는단 말씀예요?"

아사녀는 열이 나서 노파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리고 속으로 이 늙은이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였다.

"어림도 없는 말이오. 십 리 밖 그림자가 비치다께, 킁 킁. 바로 그 탑이 천 층 만 층 구만 층이나 된다면 혹시 모르지만……."

"이 못 이름이 그림자못이 아녜요."

"못 이름이야 그렇지만."

아사녀는 이 늙은이가 사람은 좋아도 그림자못 내력은 잘 모르는구나 하였다. 세상의 모든 그림자가 다 비친다고 그림자못이라 하였거늘, 십 리 안팎 그림자가 아니 비칠 리가 있으랴.

아사녀는 이 말을 하고 싶었으나 시장기가 너무 져서 말할 기력도 없었다. 말없이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으려 할 때 그 노파는 놓았던 손을 다시 잡으며 애연한 듯이,

"여보 젊으신네, 그림자를 찾는다 해도 우리집에 가서 요기나 하고 찾으시오, 킁 킁. 허기가 너무 지면 눈에 헛것이 보여 정말 찾을 것도 못 찾는 법이라오."

아사녀도 그 말은 옳게 여기었다.

너무 허기가 진 탓에 눈이 핑핑 내어둘리어 정작 보일 그림자가 안 보이거니 생각하고 그 노파를 따라갔다.

122[편집]

그 노파의 집은 비록 초가집일망정 겉보기도 아담스러웠거니와, 안치장이 으리으리한 데 아사녀는 놀랐다.

아랫목과 드나드는 문만 남겨 놓고 벽이 보이지 않도록 가지각색 장롱과 세간이 그득 들어 쌓이어 크나큰 방이 좁다랗게 보이었다. 더구나 그 비싼 당경(唐鏡)이 여기저기 아무 데나 걸려 있어 이편을 보아도 허술한 제 모양이 엿보이고, 저리로 돌아보아도 제 거지꼴이 나타나는데 아사녀는 눈이 어리둥절하였다. 꽃무늬 놓은 돗자리도 어떻게 곱고 정결한지 흙과 때가 덕지덕지 묻은 옷과 걸레가 다된 버선으로 차마 앉기가 황송하였다.

"이렇게 털썩 앉아요, 킁 킁."

노파는 어쩔 줄 모르는 아사녀의 손목을 끌어 거의 잡아 낚아채는 듯이 앉히고 말았다.

"잠깐만 기디리오, 킁 킁. 내가 나가서 밥상을 가져올게."

노파는 힝하니 나가 버린다.

집은 호화롭게 꾸며 놓았지만 인기척은 없고, 과연 그 노파 말마따나 사내의 그림자란 얼씬도 않는 것이 아사녀에게 얼마쯤 안심을 주었다.

아사녀는 홀로 앉아서 무료한 김에 맑고 바르게 잘 비치는 거울을 보고 또 보았다.

거울을 본 지도 달포가 넘었다.

제 꼴이 이렇게 될 줄이야, 이 꼴을 하고 갔으니 문지기가 문전축객을 한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얹은 머리가 빠져 뒤로 떨어지고, 귀밑머리조차 풀리어 푸스스 일어선 모양이 제가 보아도 정말 사나웠다. 때에 절다가 못해 헤져서 너불너불하는 옷자락. 더군다나 어젯밤에 얼굴을 씻노라고 씻었건만 목덜미와 귀밑 언저리에 물기 간 데는 지렁이 지나간 자국 같고, 그 양 가는 땟국이 지르르 흐르다가 그대로 말라붙은 꼴이란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얼굴도 환형이었다. 여윈들 이토록 여위랴. 볼이 쪽 빨아든 탓인가, 입은 새 부리처럼 내민 것 같다. 관자놀이맥이 어떻게 저렇듯 드러났으며 콧마루까지 뼈가 앙상하게 솟은 듯하다.

그러나 파리한 것은 오히려 두 번째였다. 눈살어림에 가는 금이 여러 가닥 긁히고 이마에도 잔금이 긁혀서 찌푸리지 않아도 눈에 띄게 되었다. 한 달 동안에 나이 몇 살을 더 먹은 듯. 아무리 친숙한 이라도 지나치면 몰라보게 되었다.

한 달 만에 내가 보는 내 얼굴도 이렇게 서툴거든 삼 년이나 못 보신 이 얼굴을 알아보실까. 어리고 앳된 아사녀는 간 곳 없고 슬픔과 고생에 파김치가 되어 바스러진 이 얼굴을 알아보실까. 서라벌 여자를 보시던 안목으로 이 꼴을 보면 반눈에나 차시랴. 더러운 벌레로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아사녀가 끝없는 회심한 생각을 자아내고 있노라니 그 노파는 어느결에 밥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킁 킁, 원 찬이 있어야지. 시장은 하실 테고 부리나케 하느라고 뭐 차릴 수 있어야지. 늙은이 솜씨는 다 이렇다오."

노파는 연해 너스레를 떠는데, 아사녀는 진 반찬 마른 반찬을 갖추갖추 담은 숱한 그릇만 보고도 어마 싶었다. 접시와 주발 뚜껑을 벗기는 대로 구수하고 맛난 냄새가 주린 창자를 거의 뒤틀리게 하였다.

"자, 이 국물부터 훌훌 자시구려. 마른 속에 단단한 것은 나중 자시고, 킁 킁."

"노인께서는 진지를 어떡하셨어요."

아사녀는 뱃속에서 들이라고 발버둥을 치건만, 가까스로 인사를 차리었다.

"킁 킁, 내 걱정을랑 마시고 얼른 자시구려."

아사녀는 무엇을 먹어 보아도 진미였다. 개중에는 이름도 모를 반찬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사녀는 밥을 먹는 사이에 노파는 상머리에 앉아서, 이걸 자셔 보오, 이것은 여기 찍어 먹는 거라오, 하면서 자상스럽게 먹는 법까지 일러주었다.

아사녀가 함포고복을 하고 물러앉자 노파는 또다시 늘어놓았다.

"인제 조금 쉬어 가지고 목욕을 좀 하시구려, 킁 킁. 젊으신네가 아무리 객지에 나왔기로 땟국이 줄줄이 흘러 가지고 어디 되었소. 내 물을 좀 데워 드릴까? 우리집에 왕만한 대야가 있다오. 그 대야는 사람 둘이라도 넉넉히 들어앉을 수 있다오, 킁 킁. 우리집이야 어디 올 사람이 있나. 아무리 발가숭이가 된대도 볼 사람은 나 하나뿐인걸 뭐, 킁 킁. 정 미심다우면 사립문이라도 걸어주께, 응."

그 노파는 마치 제 딸이나 된 듯이 아사녀의 등을 뚝뚝 두드리다가 별안간 코를 싸쥐고,

"에이 냄새도 흉하군, 킁 킁. 그 헌털뱅이 옷을랑 벗어 버리오. 내 옷 한 벌 주께, 응."

말씨도 벌써 무관해져서 가끔 존대와 하대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리고 선뜩 일어나 장 속을 뒤적뒤적하더니 옷 한 벌을 내어다가 대수롭지 않게 아사녀에게 안기고는 상을 들고 나가며,

"내 물 데워 놓으리다."

한다.

그 옷은 진짜 당나라 비단 웃옷과 속속들이 능라주단으로 쏙 빼낸 것이다.

아사녀는 옛이야기에 듣던 용궁에나 들어온 듯싶었다.

123[편집]

그 노파가 자랑한 것만큼 청동대야는 과연 어떻게 크고 넓은지 거의 물두멍만하였다.

미리 방문을 지쳐 주며,

"활활 벗고 어서 씻으시오."

아사녀 혼자만 남겨 놓고 자기는 슬쩍 나가 버린다.

알맞게 뜨듯한 물은 때너겁을 빼기에 넉넉하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그렇지 않아서 웃통만 벗고 씻다가 나중에는 필경 온몸을 그 큰 대야 안에 잠그고 말았다.

거의 다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을 때쯤 하여 노파는 다시 문을 빠끔히 열고 들여다보면서,

"어유, 인제 다 씻었구려. 저렇게 곱고 어여쁘고 옥 같은 살을 땟국에 파묻어 두다께, 킁 킁. 어유 저렇게 잘난 얼굴을, 어유 손길도 곱기도 해라. 발꿈치가 달걀 같다고 흉이나 볼까, 킁 킁. 이 늙은이도 홀딱 반하겠구려."

노파가 입에 침이 없이 추어올리는 바람에 아사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었다.

"왜 내어준 옷은 가져오지를 안했소, 킁 킁. 저 얼굴에 저 몸꼴에 그 옷을 입으면 얼마나 더 어울릴까, 킁 킁. 그럼 내가 가서 옷을 갖다 드리께. 불안스럽게 알지 말고 입어 두구려. 그까짓 옷 한 벌을 뭐 그렇게 어렵게 안단 말이오."

하고 노파는 부리나케 나가더니 한옆에 옷을 끼고 한 손에는 걸레를 들고 들어와서 마룻바닥 위에 떨어진 물방울을 훔치고 옷을 내려놓는다.

그 아늘아늘한 무늬와 혼란한 빛깔에 아사녀의 눈은 어리었다. 몸도 목욕까지 하였으니 그 새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야 불 같았건만, 하도 시장하던 판이라 요기나 할까 하고 들어왔을 뿐인데, 얼토당토 않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옷까지 얻어 입을 염의는 없었다. 옷이라도 어디 이만저만한 좋은 옷이 아니다.

아사녀는 헌털뱅이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으려 하니 노파는 질색을 하며,

"여보 젊으신네, 젊은이 고집이 어떻게 그렇게 세단 말이오. 그래 기껏 씻은 고운 살에 염치에 또 그 누더기를 꿸 생각을 한단 말이오, 킁 킁. 이리 주오. 그 헌옷을랑 빨아서 걸레나 하게시리."

하고 노파는 재빠르게도 헌옷을 뺏어 가지고 그대로 나가 버린다. 아사녀는 어쩔 줄을 모르고 한동안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발가벗은 몸으로 뛰어나가 제 옷을 찾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요, 그렇다고 남의 중값진 옷을 마구 입자는 수도 없었다.

"왜 이러고 앉아 있소. 원 아직 춥지는 않지만 오래 벗고 있다가 지친 몸에 또 감기나 들면 어떡하자고, 킁 킁."

노파는 다시 들어와서 또 푸념을 하고 대어들어 손수 아사녀에게 굳이굳이 새옷을 입히고 말았다.

"자 인제 안방으로 가서 거울이나 좀 보구려. 아까보다 아주 딴사람이 되지를 않았나. 그야 말짝으로 꽃도 같고 달도 같구려, 킁 킁. 저런 인물은 서라벌이 넓다 해도 없겠구려, 으흐흐."

노파는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세상에 제 것을 주고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사녀는 그 노파의 선심이 눈물을 흘릴 만큼 고마웠다.

"이젠 그만하면 참뼈〔眞骨〕귀인 아가씨라도 뺨치게 더 어여쁘게 되었소, 킁 킁."

노파는 아사녀를 당경 앞에 데리고 와서 모로도 세워 보고 바로도 세워 보고 이모저모를 뜯어보며 매우 만족해하였다.

"여보 젊으신네, 그 먼 길을 왔다니 노독인들 좀 나셨겠소, 킁 킁. 보다시피 우리집에야 누가 있소. 나는 자식도 없는 불쌍한 늙은이라오. 어미같이 알고 우리집에 있구려. 나도 딸같이 며느리같이 젊으신네를 여길 테니. 그래 다리를 쉬어 가지고 어디 갈 데가 있으면 다시 가도 좋을 것 아니오."

"고맙습니다만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원 나중에는 별소리를 다 하는구려, 킁 킁. 폐가 무슨 폐란 말이오, 킁 킁. 늙은 것이 혼자 있자니 고적할 때도 많고, 심심할 때도 많고. 피차에 의지삼아 지내 봅시다그려……."

"이렇듯 고마우신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잘 갚을는지……."

아사녀는 진정으로 사례사례하였다.

"은혜 갚을 것을 어떻게 생각한단 말이오, 킁 킁. 내가 어디 받을 것을 생각하오. 그저 조그마한 사피를 보아 주는 게지. 우리 신라는 인정의 나라, 곤란한 형편에 있는 이를 구해 주는 게 떳떳한 일. 그걸 무슨 은혜니 뭐니 애당초에 염두에도 두지 말란 말이오, 킁 킁."

아사녀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석가탑이 이룩될 때까지 몸담아 있을 데를 얻은 것이 어떻게 다행한지 몰랐다.

그 노파는 서라벌에 유명한 뚜쟁이 '콩콩'이었다.


124[편집]

차돌이가 다녀간 이튿날 저녁때, 털이는 안에 갔다가 또 종종걸음을 치고 들어오며,

"아가씨, 아가씨!"

하고 물에 빠진 사람 같은 소리를 내었다.

"왜 또 방정을 떠느냐. 차돌이가 또 왔단 말이냐."

여러 번 털이의 경풍에 속은 주만은 시들하여 놀라지도 않았다.

"오늘은 참 정말 큰 손님이 드셨다납시오. 온 집안이 벅쩍 괴고 야단법석인뎁시오."

털이의 눈은 더욱 호동그래진다.

"또 무슨 허풍이냐. 늘 드는 손님인데 번번이 놀랄 거야 뭐 있단 말이냐."

"아닙시오, 이번 손님은 아가씨께 큰 계관이 계실 손님이라납시오."

"내게 계관 있는 손님. 그 애는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오늘 오신 손님이 바로 경신 서방님이라납시오."

"너보다 먼저 나는 짐작을 하고 있었단다."

"어규, 아가씨는 참 이인이시어. 미리 다 알고 계시니."

"벌써부터 오신다 오신다 소문이 난 터이고, 또 저번 밤에 불국사에 나타나셨으니 으레 집에 들르실 것 아니냐."

주만은 겉으로 태연하나마 두 뺨이 불같이 붉어지는 것을 보면 속으로는 흥분에 떠는 탓이리라. 언제라도 한번 만나야 할 그이. 제 속에 숨은 비밀을 쏟아 버리려고 작정한 그이. 하루바삐 찾아오기를 마음 그윽이 기다린 그이건마는 정작 오고 보니 가슴은 까닭 없이 두방망이질을 한 것이다.

어젯밤에 차돌이를 만나서 자세한 경과는 들었지만, 경과를 듣고 보니 더욱 궁금증이 나서 오늘 밤에는 기어코 아사달을 찾아볼까 하였더니 경신이가 정말 왔다고 하면 자리를 뜰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리 괴롭고 부끄러운 어색한 노릇이라도 이왕 작정한 일은 귀정을 내어야 한다.

주만은 벌써 경신과 만나는 장면을 생각하고 마음이 찢어지도록 긴장해짐을 느끼었다.

"오실 줄 번연히 아셨다면서 왜 신색이 붉으십시오, 오호호."

털이는 벌써 제 아가씨의 기색을 살피고 또다시 버릇없는 소리를 내놓았다. 그러나 주만이가 대척도 않는 것을 보고 제 말이 빗나간 것을 깨닫고 다시 근심스러운 얼굴로,

"아가씨, 어떻게 하실 작정입시오. 정말 이 혼인이 된다면 어떻게 하시겝시오. 마당과 뜰에 황토까지 깔고 정말 초행 손님이 드신 듯이 야단이던뎁시오."

"듣기 싫다. 작작 떠들어라."

하고 주만은 성가신 듯이 쥐어지르듯 한마디하고 허공을 노려보며 덤덤히 입을 닫아 버린다.

"오늘 밤 불국사 행차는 또 틀리셨고……."

털이는 혼자말같이 중얼거리고 목을 움츠린다. 꿈에 본 것같이 다녀간 차돌이를 생각하고 오늘 밤에 또 못 만나게 되는 것이 섭섭함이리라.

"얘, 안에나 들어가 봐라. 손님이 드셨다면 좀 바쁘겠느냐. 무슨 일이라도 거들어야 될 것 아니냐."

주만은 조용히 털이에게 일렀다. 그는 제 홀로 끝없는 생각에 잦아지고 싶었다. 바늘끝같이 날카로워진 신경은 털이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어도, 그 얼굴이 눈에 뜨이는 것도 까닭 없이 제 생각을 흔들리게 하였던 것이다.

"쇤네 없으면 사람이 없는갑시오. 사람이 발길에 채일 지경인뎁시오."

털이는 종알종알하면서도 몸을 일으켜 나갔다. 저는 저대로 차돌이 생각을 하고 있는 판에 쫓아나 내는 듯해서 골이 잔뜩 난 것이었다.

얼마 안 되어 털이는 구는 듯 또 돌아왔다.

"어규, 그때 아가씨께서 쇤네를 안 보내셨더면 더 큰 꾸중을 모실 뻔했는뎁시오. 일이 이렇게 바쁜데 털이년은 뭘 한다고 별당 구석에 자빠져 있느냐고 마님께서 야단야단을 치시겠습지요."

"그러기에 봐라, 일은 바쁜데 잘캉하게 들어박혀 있어야 될 노릇이냐."

"어규, 마님께서 그렇게 역정을 내실 줄은 정말 몰랐는뎁시오."

"그런데 왜 또 왔느냐. 일은 거들지 않고……."

"아무튼 이년 오기는 잘 왔다. 너 아가씨께 냉큼 가서 다시 세수를 하고 새옷 갈아입고 기다리라고 여쭈어라 하시던뎁시오."

"그건 또 무슨 까닭일까."

"대감님께서 사랑에서 진둥한둥 들어오시더니 마님께 무슨 분부를 내리신 모양이던뎁시오. 처음에 마님께서 무에 그리 급하냐고 하신 눈치였는데, 대감께서 펄펄 뛰시며 그 사람이 며칠 묵어 갈 줄 알았더니 내일로 당장 떠나겠다 하니 오늘 저녁에라도 저희 둘을 만나 보게 해야 될 것 아니냐고 역정을 내시던뎁시오. 그러니 아마 아가씨 선을 보이실 모양이던뎁시오. 아가씨도 경신 서방님 선을 보시고……."

주만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조만간 상면을 해야 될 줄 알았지만, 그 기회가 이렇게 속히 닥칠 줄은 몰랐다.

125[편집]

장래 사위라도 유만부동, 외동딸에 외동사위, 웬만해도 살갑고 귀여운 정을 금하지 못하려든, 세상에 다시 없는 배필을 구했거니 생각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얼마나 즐겁고 기쁘고 전지도지할 것이랴. 아무리 융숭하게, 아무리 중난하게 대접을 하고 또 하여도 그래도 미진한 듯 필경에는 안방에까지 맞아들이기로 하였다.

혼인은 이미 다 된 혼인이니 장래 장모님도 뵙고 장래 아내까지 상면을 시키는 것도 무방할 듯한 것이요, 그보다도 딸의 평일의 기상을 잘 아는 유종은 비록 자기 마음에 열 번 스무 번 든다 하더라도 주만에게 미혼전 신랑감을 한번 보여 두자는 생각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설령 혼인말이 없는 터수라 하더라도 친구의 아우, 동지의 아우에게 연상약한 그들을 내외시킬 까닭은 조금도 없었다. 당나라 풍속, 당나라 예법이 물밀듯 밀려 들어오는 오늘날이지마는, 아직도 꽃각시〔花娘〕, 꽃서방〔花郞〕의 유풍을 버리지 않고 명절때로나 풍월당에서나 젊은 남녀끼리의 같이 노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음에랴.

주만은 결심을 한 바이지만 그래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며 별당에서 불려왔다.

어머니를 따라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 얼굴은 화끈 하고 달았으나 뜻밖에 가슴은 가을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여보게, 저 애가 미거한 내 딸이라네, 어허."

아버지는 긴 수염을 한번 쓰다듬고 너그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어머니의 등뒤에 반쯤 숨은 주만을 눈으로 가리켰다.

"네, 네."

경신도 유종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고 벌써 좌정했던 몸을 기거를 하는데 그 눈길이 번개같이 주만의 뺨을 스쳐가는 듯하였다.

주만은 그 안광에 눌리면서도 슬쩍 보아도 그 너글너글한 뺨과 번듯한 이맛전과 쭉 일어선 콧대가 야무지고 뚜렷하게 눈 속에 꽉차는 듯하였다.

'과연 아버지 말씀과 같구나. 저분 한 분이면 금성이따위 백 명은 넉넉히 대적하시겠구나.'

주만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다들 앉아, 앉아."

유종은 장래 사위와 딸을 번갈아 보며 앉기를 명하였다. 앉기를 기다려 정중한 목소리로,

"아까도 말했거니와 자네 댁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세의가 두터운 터, 더구나 나랏일에는 언제든지 한마음 한뜻으로 오늘날까지 힘을 아울러 왔지만, 자네 백씨는 벼슬을 버리고 나 혼자는 고장난명. 인제 조정에 간특한 무리가 차고 들에 유현이 없으니, 나날이 기울어 가는 이 국운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벌써 늙고 병든 몸, 자식이라고는 저것 하나뿐. 후사를 부탁할래야 우리 집안에는 부탁할 사람이 없네그려. 오직 믿는 것은 자네 형제분뿐. 백씨도 벌써 늙으셨으니 이 막중대사를 맡을 이는 오직 연부역강한 자네뿐이란 말일세……."

유종은 예까지 말하고 숨이 가쁜 듯이 말을 잠깐 끊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경신은 자리를 피하여 절하며,

"저같이 나이 어리고 아는 것이 없사오니 어찌 그런 막중대사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넓으온즉 저절로 그 사람이 있을까 합니다."

그 말소리는 지극히 공손하나마 마치 큰 종 모양으로 주만의 귀를 잉잉 울리는 듯하였다.

"그 사람이야 많을수록 좋지마는 어디 사람 얻기가 쉬운가. 어서 일어나게, 일어나. 자네가 그렇게 겸양하면 이 늙은 내가 도리어 부끄럽네."

유종은 한탄하고 다시 주만을 돌아보며,

"아가, 구슬아가, 너도 잘 알아듣느냐."

주만은 몸을 흠칫하며,

"네."

하고 모기 소리만큼 들릴락말락 대답하였다.

"왜 대답이 시원치 않으냐. 너는 장래에 이분을 홑으로 남편으로 알고 섬길 뿐만 아니라 우리 신라를 바로잡을 영웅으로도 섬겨야 하느니라."

주만은 그 자리에 엎드리고 말았다. 하도 억색하여 엉엉 목을 놓고 울고 싶은 것을 참고 떨리는 소리로,

"저, 저는 저는 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응, 감당할 수 없어, 허허."

아버지는 딸의 말이 어리광 비슷하나마 이런 경우에 썩 잘된 대답인 줄 알아들었다.

"오늘 밤 얘기로는 내가 너무 지나쳤나 보다. 내가 있으면 도리어 불편하겠구나. 여보 부인, 뭐 밤참이나 좀 내시구려."

유종은 나가 버렸다.

사초부인은 음식 준비 하느라고 들락날락하게 되고, 주만과 경신이 단둘만 남아 있을 때가 많게 되었다.

주만은 아까부터 벼르고 벼르다가 필경 죽을 힘을 다 들여 입을 열었다.

"좀 청짜올 말씀이 있사온데……."

경신은 장래 아내가 먼저 말을 보내는 데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일은 정녕 떠나셔야 되실는지."

"뭐 꼭 갈 일은 없습니다마는……."

"그러시다면 내일 하루만 더 묵어 가시면 어떠하실지……."

"……"

"그렇게 하실 수 있다면, 내일 밤 술시 초쯤 되어 임해전 궁장 뒷길로 좀 뵈옵고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만……."


126[편집]

팔월 초승달은 은고리 모양으로 임해전 꼭대기에 비스듬히 걸리었다. 궁 안 언저리 하늘에 뿌연 무지개 같은 기운이 훤하게 떠오르는 것은 횃불, 화톳불, 초롱불이 휘황한 탓이리라. 그러나 드높은 궁장 밑은 으슥하게 어두웠다.

아까부터 경신과 주만은 아무 말 없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길을 겨우 발로 찾으며 나란히 걸었다.

만일 누가 보았다면 정겨운 남녀 단둘이 애달픈 사랑이나 속살거리는 줄 알련마는, 서울 한복판에도 후미진 골이라 인적도 드물었다.

그렇게 도지게 먹고 또 먹은 마음이건만, 주만은 어안이 벙벙하여 어디서부터 말을 끄집어내어야 옳을지 갈래를 잡을 수 없었다.

출렁출렁 안압지(雁鴨池)의 물결치는 소리만 새어들려도 까닭 없이 마음이 울렁울렁하였다.

경신은 경신대로 웬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정해 놓은 아내이지만 초대면하던 말에 가만히 만나자는 것부터 이상스러웠다. 그 얼굴찌와 말씨와 몸가짐으로 보아 털끝만치라도 딴 의심을 품을 수 없는 것이 더욱 수수께끼였다. 그렇다고 그 간절하고 조그마한 청을 물리칠 수도 없었다. 저렇듯 뛰어나게 아름다운 장래 아내와 거닐어 보는 것도 그리 싫지 않은 구실이었다.

물론 선선히 승낙하였다. 첫눈에도 주만이가 그의 꿈꾸는 아냇감으로 모든 자격을 갖춘 것 같았다. 행복의 꽃구름 속에 쌓인 듯한 그는 승낙을 한 뒤에도 적이 호기심이 움직이기는 하였지만 조금도 불길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만이가 한결 더 정다워지는 듯하였다. 이 꽃다운 약속이 그에게 더 자지러진 기쁨을 갖다 줄지언정 손톱만한 슬픔인들 실어 올 리가 있느냐.

언약대로 만나기는 만났는데 그 '여쭐 말씀'이란 과연 무엇일까. 벌써 활 반바탕 거리는 더 걸었겠거늘 종시 말이 없으니 웬 까닭일까. 그렇게도 하기 어려운 말일까…….

경신은 차차 갑갑증이 났다. 더구나 고개를 다소곳하고 자기 옆을 따르는 주만의 뺨 언저리가 은은한 달의 원광에도 옥으로나 새긴 듯이 빳빳하게 움직이지 않는 양이 단단한 결심이나 깊은 수심에 잦아진 듯하여 그의 햇발같이 밝은 가슴에도 흐릿한 구름 흔적을 던져 주었다.

침묵은 갈수록 답답해졌다.

경신은 주만의 말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자기가 먼저 이 답답한 침묵을 깨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호방한 그도 어쩐지 목이 닫혀진 듯 얼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발길은 안압지를 에두른 궁장 옆으로 왔다.

어느결에 달은 그 까마득한 담을 넘었는지 선들선들 이는 맑은 바람을 따라 눈보라처럼 그 은가루를 휘날린다.

못가라 그러한지 축축한 기운이 한결 더 옷깃으로 선뜩선뜩 스며드는 듯.

"날이 제법 선선해졌군요, 이제!"

경신은 마침내 말허두를 잡았다.

"네, 그래요. 벌써 팔월……."

주만은 경신이가 먼저 말을 끄집어낸 것을 매우 반기는 듯하다가 이내 목소리를 떨어뜨리며,

"그러면 팔월 한가위도 인제 며칠 남지를 않았지요."

하며 달빛을 덤썩 안은 경신의 얼굴을 우러러본다.

"뭘요, 아직도 초승인데 열흘은 더……."

하다가 경신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언뜻 자기네들 혼인 날짜가 팔월 스무날로 작정된 것을 생각함이리라.

주만은 불쑥 나오는 말에,

"고까짓 열흘……."

하고 무참한 듯이 말을 끊어 버렸다.

'내가 왜 악정 비슷하게 이분께 이런 말을 할까. 이분께는 아직 우리의 비밀을 알려 드리지도 않고…….'

"그러면 그 열흘이 멀단 말씀입니까, 가깝단 말씀입니까, 어허허."

경신은 기탄없이 크게 웃으며 주만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그의 가슴에 얼진하였던 구름 그림자는 벌써 가뭇없이 사라졌다. 아름다운 장래 아내의 까닭 붙은 한마디도 그의 귀에는 거슬리지 않을 뿐인가, 기름같이 미끈하게 지나가고 만 것이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망설이는 아냇감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이때다, 이때다.'

주만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때야말로 이분께 모든 사정을 얘기해야 한다. 모든 비밀을 알려 드려야 한다.'

주만은 용기를 가다듬어 숙였던 얼굴을 번쩍 들었다.

담 밖에 인기척에 놀람인가, 달빛을 샐녘으로 속음인가, 무슨 새인지 푸드득 날아오르는 소리가 바로 임해전 석가산 어림에서 그윽이 들리었다.

127[편집]

경신은 자기의 우스갯말에 부끄러워서 땅으로 기어들어가는 줄 알았던 제 장래 아내가, 무망중에 당돌하게 얼굴을 쳐드는 것을 보고 마음 그윽이 놀랐으나 그 별같이 번쩍이는 눈과 꽃봉오리처럼 쪼무린 입술이 씩씩하고도 어여뻤다.

"경신님, 제 청을 꼭 들어주시올지."

주만은 새삼스럽게 또 한번 따지고는 호 하고 입김을 내쉬었다. 가느다란 뜨거운 숨줄기가 거울 같은 달빛에 어리다가 스러졌다.

이렇듯 아름답고 안타까운 장래 아내의 청이거니 천하를 달라 한들 아낄 줄이 있으랴.

경신은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었다.

"저번 날 밤에 불국사엘 가셨더라지요."

"불국사?"

하고 경신으로도 몸을 흠칫하며 서먹서먹하였다. 이 말을 물을 줄이야 참말 꿈 밖에도 꿈 밖이었다.

"가기는 갔습니다만!"

하고 뚫어지게 아냇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국사엘 가셨다가 금지 금시중 아들 금성 일파를 한 칼에 몰아내시고 아사달님……."

하다가 주만은 다시 말을 고쳐,

"그 절에 탑을 짓고 있는 석수 하나를 구해 내셨다는데 정녕 그런 일이 계신지?"

하고 고마움과 슬픔이 뒤섞인 눈초리로 살짝 경신의 얼굴을 더듬는 듯하다가 다시 눈길을 돌려 버리었다.

경신은 들을수록 놀랐다. 쥐도 새도 모르는 그 일이거늘 어찌 깊은 별당에 들어앉은 처녀의 귀에까지 들어갔을까. 그 수선쟁이 용돌이가 누구를 보고 얼마나 떠들었기에 그 소문이 이토록 왁자지껄하게 퍼지었을까. 그렇다고 큰 자랑거리는 못 될망정 어리고 살가운 장래 아내를 기일 것까지도 없는 일이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아셨나요."

일 자체보다도 주만이가 안다는 것이 궁금하고도 신기하였다.

"그저 들어 알았지요. 그런데 그 금성이란 이가 무엇 때문에 그런 나쁜 짓을 했대요."

이제 수작은 한마루터기에 올랐다. 만일 경신이가 계집 까닭이라는 말을 내기만 하면 주만은 그 계집이란 곧 나라고 실토를 할 작정이었다.

경신은 어느새 뉘엿뉘엿 사라져 가는 으스레한 달빛 가운데 해당화 송이처럼 새빨갛게 떠오른 장래 아내의 얼굴을 이윽히 바라보았으나, 저이가 대번에 이렇게 상기가 된 것은 전부 이 의문 때문이거니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앳되고 깨끗한 장래 아내에게 그런 상스러운 사실을 가르치기가 싫었다.

"그건 자세히 모르지요. 이러쿵저러쿵들 하니까……."

"모르실 리야……."

"몰라요, 몰라요."

하고 경신은 손까지 내저어 보이었다.

주만은 대번에 경신의 속을 살피었다.

'이분은 그런 소리를 입에 담기도 싫어하는구나.'

저편이 의젓하고 점잖을수록 말하기는 더욱 거북살스러웠다.

"여보세요, 그날 그 금성이란 이가 어떻게 달아났어요. 그렇게 수많은 군정을 데리고 왔더라는데……."

주만은 다시 말을 다른 데로 돌렸다. 암만해도 제 흉중에 품은 말이 쉽사리 나올 것 같지도 않은 까닭이리라.

"군정이 많다 한들 오합지졸이라 뭐 그렇게 대단할 것은 없었지요. 왜 그 말은 뇌고 또 뇌십니까."

경신은 그까짓 일쯤 우습다는 듯이 신신치 않게 대답하였다.

"그래도 그 여러 사람을 한 칼에……."

주만은 경신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허허, 저런 말 보았나. 칼이란 언제든지 한 칼이지요. 쌍검을 쓰는 이도 있지마는, 허허."

경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꾸 웃기만 하였다. 장래 아내가 그만 일에 이토록 흥미를 가지는 것이 귀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칼은 한 칼이라 하시지만, 어떻게 혼자서 여러 사람을……."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칼로 여러 칼을 막는 것이 아니라 한 칼의 대적은 언제든지 한 칼이지요. 이 한 칼이 저 한 칼을 이기는가 지는가를 겨눌 뿐입니다. 천 칼 만 칼이 들어온들 어디 낱낱이 대적하는 건 아니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이거나 결국 대적은 한 사람뿐이지요. 한 사람을 이기고 또 한 사람을 이기는 것을 곁에서 보면 혼자서 여럿을 이기는 듯이 생각되지요."

경신은 검술의 한 가닥을 타이르듯 알리었다.

"그러시다면 천만 사람이라도 결국 대적은 한 사람이란 말씀예요."

하고 주만은 경신의 검술논란에 잠깐 흥미를 느끼었다.

"그렇지요. 언제든지 적은 꼭 하나뿐이지요."

하고 경신은 또다시 빙그레 웃었다. 장래 아내에게 제 득의의 검술 얘기를 하는 것도 바이 성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느덧 달은 지려는지 사면은 컴컴해 온다.

128[편집]

저 눈썹만한 달마저 아주 지고 나면 이 어스레하게 보이는 길조차 어두워지리라. 어서 할 말을 훨훨 해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만은 한 걸음 바싹 경신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저어, 마, 말씀 여쭙기는 어렵지만……."

하고 주만은 더듬거렸다. 경신은 제 장래 아내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게 긴장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어, 파, 파혼을 해주실 수 없으실지……."

주만은 마침내 벼르고 벼르던 한마디를 뱉고 말았다.

"파, 파혼!"

하고 태연한 경신으로도 이 뜻밖의 불길한 말에 제 귀를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저, 저는, 경신님을 모실 사람이 못 됩니다. 서방님과 백년을 같이할 아냇감이 못 됩니다……."

"그것은 무, 무슨 말씀이신지."

경신의 씩씩한 얼굴빛도 변하였다.

"저는, 저는 누구의 아내 노릇도 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제 마음의 구슬은 벌써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만의 말낱은 가느나마 여무지었다. 그의 숨길은 훌훌 불길을 날리는 듯하였다.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 무슨 까닭인지 자세히 일러주시오."

경신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이렇듯 아름답고 깨끗해 보이는 장래 아내의 입으로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행복의 꿈이 나련하게 막 온몸에 퍼지려 할 제 무참한 파탄이 뒷덜미를 짚을 줄이야.

"저번 때 서방님이 불국사에서 구해 주신 부여 석수, 곧 아사달이야말로 저의 마음을 바친 사람입니다. 서방님과 혼인말이 있기 전에, 서방님이 오시기 전에 저는 벌써 그이에게 백년을 맹세하고 말았습니다. 정혼이 되기 전에 아버지께 이 사정을 알리려고 여러 번 생각도 해보았으나, 완고한 아버지께서 제 말씀을 들어주시기는 천만 꿈 밖. 이 안타까운 비밀을 가슴속 깊이 간직해 놓고 서방님 뵈올 때만 고대고대하였습니다. 이 비밀을 알릴 데는 오직 서방님 한 분뿐……."

하고 호 하며 주만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다시 말끝을 이었다.

"서방님께서 이런 줄을 아시고 저희들의 비밀을 어여삐 여겨 주셔도 좋고, 또 분노에 넘치시어 저를 한 칼에 베어 버리셔도 여한이 없으리라 결단하였습니다. 지금 아사달이 짓는 그 탑만 다 되는 날이면 저희들은 서라벌을 버리고 멀리 그의 고장인 부여로 달아날 작정입니다. 혼인날 전으로 세상없어도 그 탑을 끝내 버리고 저희들은 몸을 숨겨 버릴 작정을 한 것입니다."

하고 주만은 가쁜 숨길을 돌리었다.

경신은 입을 쭉 다문 채 제 장래 아내의 불 같은 하소연을 들으며 새록새록이 놀랐다.

달은 아주 넘어가 버리고 캄캄한 어둠이 그들의 둘레를 진하게 진하게 휩싸 버리었다.

경신의 눈앞에 번쩍이던 행복의 광채도 사라졌다. 야릇한 검은 운명의 구름장이 겹겹이 앞길을 막는 듯하였다.

"그날 밤만 하여도 만일 서방님이 아니시더면 아사달의 목숨은 벌써 없어진 것. 설령 목숨은 붙어 있다 하더라도 그 못된 금성의 일파에게 붙들리어 갖은 망신을 다 당하고 어느 지경에 갔을는지. 태산 같은 그 은혜를 생각한들 저는 서방님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기일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시고 초행을 오셨다가 소위 신부가 도망을 하고 없으면 서방님 모양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금성이가 왜 아사달인가 하는 그 석수를 미워합니까. 무슨 그런 곡절이 있습니까."

경신은 어색한 제 처지도 잊어버리고 사건 자체의 흥미에 차차 끌리는 모양이었다.

"사실인즉 아무 까닭도 없습니다. 다만 그 금성이가 저한테 청혼한 것을 거절했을 따름입니다. 어찌 알았던지 저와 아사달의 관계를 눈치채고 그날 밤에도 들이친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가 거기 있는 줄 알고 망신을 주자고 한 노릇 같습니다."

경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런 못된 자가……."

하고 자기 일같이 분해한다.

"그런 줄 알았던들 그날 밤에 그대로 돌려보내지를 않았을 것을."

"그만큼만 해두셔도 적이 사람 같으면 인제는 그 못된 버릇을 고쳤겠지요."

"글쎄올시다, 워낙 그 부자란 못된 자들이라, 무슨 앙심을 어떻게 먹고 또 우리 두 집에 해를 끼칠지 모르지요."

"서방님께서 저희들 때문에 괜히 그런 자들과 척이 지시고!"

주만은 미안해하였다.

"그까짓 군이야 백 명과 척이 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마는, 늙으신 이손과 구슬아기님을 무슨 못된 꾀로 또 모함을 할는지."

"그는 그러하거니와 서방님, 제 청을 들어주실는지……."

하고 주만은 어둠 속에도 경신의 얼굴을 눈으로 더듬었다.

129[편집]

경신은 덤덤히 무엇을 이윽히 생각하다가,

"그러면 기예 파혼을 해달란 말씀입니다그려."

하고 다시 한번 다지었다. 그 말소리는 어딘지 구슬픈 가락을 띠었다. 걸걸한 장부의 심장에도 손아귀에 들었던 보옥을 놓치는 듯한 애틋하고 아까운 정이 없지 않은 탓이리라.

"서방님이 초행을 오셨다가 창피를 보시느니……."

주만도 목이 메이었다. 이렇듯 의젓하고 훤칠한 약혼한 이를 만나자마자 갈리는 것이 슬펐다. 은인은 될 값에 척진 일이 없는 그이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이 서러웠다.

"사정이 정 그러하시다면……."

경신의 목소리는 침통하였다.

"우리가 부부는 될 수 없는 노릇. 그것만은 나도 단념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파혼을 해주신단 말씀인지."

"파혼이야 그렇게 급할 것 있겠습니까."

"날짜는 부둥부둥 닥쳐오는데 파혼을 하신다면 하루바삐 하시는 것이……."

주만은 빠득빠득 조르는 듯한 것이 미안스러워서 말끝을 흐리마리하였다.

경신은 황소의 울음 같은 큰 한숨을 화 내뿜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잦아진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자상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탑은 언제쯤 완성이 된답디까. 분명히는 모르겠지만 어림치고."

"아마 팔월 한가위 안팎으로 될 법하대요."

"그러면 아직도 날짜가 많이 남았습니다그려. 그 안에 또 무슨 일이나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경신은 두 애인의 장래를 위하여 걱정까지 해주었다. 주만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무던한 남자란 말은 미리 소문을 들어 알았지마는 이토록 점잖고 자상할 줄은 몰랐다. 웬만한 사내 같으면 그 말을 들었으면 펄펄 뛰고 빼쭉샐쭉하며 돌아서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되잖게 빈정거리고 놀려먹으려 들 것이거늘, 이렇게 정중하게 진국으로 동정까지 해줄 줄은 참말 뜻밖이었다.

"그런 염려까지 해주시니 저는, 저는……."

주만은 너무 억색하여 말을 잘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암만해도 그 간특한 금지가 무슨 일을 또 저지를까 싶어서 종시 마음이 놓이지를 않습니다. 하루바삐 탑이 끝이 나서 두 분이 서라벌을 떠나 버리셔야 될 터인데."

"저도 마음이 조비비는 듯합니다만, 어디 탑이 그렇게 뜻대로 속히 끝이 나야지요."

"저번 날 밤에는 그 아사달이란 이가 많이 다쳤을 테니, 또 며칠 동안은 일을 잘 못 했을 것이고……."

"서방님께서 곧 구해 내신 탓에 그리 많이 다치지는 않았던 모양이야요."

"그렇다면 만행입니다만, 그러고 아까 말씀하신 파혼은 고만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네?"

주만은 경신의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자기네의 사랑에 동정을 해주신다면서 파혼을 거절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첫째 내가 파혼을 한다면 늙으신 이손께서 적지 않게 언짢아하시고 기예 파혼하려는 까닭을 아시려 들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그 좋으신 어른을 상심을 시키는 것이 마음에 불안 막심한 일이고, 둘째는 파혼이고 뭐고 해서 소문이 왁자지껄하게 나게 되면 두 분이 몸을 빼어 달아나시는 데도 적지 않은 방해가 될는지 모르지요."

"그러면 서방님만 창피하실 것 아녜요."

"내야 뭐 관계없을 것 같습니다. 정혼한 아내가 달아났다기로 얘깃거리가 될는지는 모르나 큰 탈이야 날 것이 없지마는, 파혼으로 말미암아 두 분의 일이 혹시 탄로라도 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경신의 말은 차근차근하고도 어디까지나 정중하였다.

주만은 감격의 회오리바람 속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기를 마다하고 다른 남자를 따라가겠다는 장래 아내를 이렇듯 곰살궂고 알뜰하게 두호하고 위해 줄 줄이야.

주만은 땅바닥에 그대로 꿇어 엎드렸다.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 넓으신 은혜를 어떻게 갚사올지."

경신은 깜짝 놀라는 듯 주만을 붙들어 일으키며,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그 눅눅한 찬 땅바닥에. 고마울 게 무엇 됩니까. 사람이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애달픈 사정을 듣고도 모르는 체할 수가 있습니까."

주만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괴었다.

"아, 알 수 없는 건 사람의 운명!"

경신은 홀로 한탄하다가 주만을 돌아보며,

"자 이제 돌아가십시다. 밤바람이 너무 찹니다. 혹은 집에서 찾으실는지도 모르니."

둘은 또 아까 모양으로 사랑하는 부부처럼 어두운 밤길을 나란히 더듬더듬 걸었다.

130[편집]

아사녀가 그 노파의 집에 묵은 지도 어느덧 사나흘이 지나갔건만, 주인 노파의 친절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끼니마다 고량진미와 포근포근한 비단 이부자리는 노독을 흠씬 풀어 내고 지친 몸을 소복시키기에 넉넉하였다.

그 해쓱하게 여윈 뺨에도 발그스름하게 화색이 돌았다. 분결 같은 손등에는 포동포동하게 부어오른 것이 그대로 살이 되고 말았다. 거울 속에 나타내는 제 얼굴은 제가 보아도 며칠 전과는 아주 딴판으로 고와 보이었다.

노파는 이따금 홀린 듯이 물끄러미 아사녀를 바라보다가,

"킁 킁, 예쁘기도 하올시고, 의젓도 하올시고, 으흐흐. 천상선녀는 마치 몰라도 지상에는 저런 인물은 다시 없겠구려."

무슨 노래나 읊조리는 가락으로 칭찬칭찬을 하였다.

"옥으로 새겼는가, 꽃으로 그렸는가, 킁 킁. 귀빗감도 훌륭한 좋은 얼굴, 쇠뿔한 마마님이 되어도 귀염받기는 혼자 할 이가 그 고생을 하다니, 그 거지 중에도 상거지 꼴을 하다니, 으흐흐."

노파는 연방 콧소리, 웃음 소리를 뒤섞어 내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여보, 젊으신네, 한다하는 재상가의 마마가 되시려오, 어엿한 귀공자의 알뜰한 사랑 노릇을 하시려오, 킁 킁. 열두 대문에 남종, 여종 수백 명을 거느리고 능라주단을 휘감고 치감고 옥주발, 은탕기에 진수성찬이 썩어나고 눈이 부신 황금 팔찌, 가락지, 구슬 목걸이, 귀걸이를 끼고 달고 걸고, 나가면 침향목 수레에 수없는 구종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에라 치워라, 벽제성도 호기롭고, 들면 호피방석에, 당나라 비단금침에, 원앙몽을 달게 꿀 자리를 내 한 군데 지시해 드릴까, 으흐흐."

노파는 신들린 사람이 넋두리하듯 한바탕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사녀는 그 푸념 가운데 뼈가 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음 좋은 노파가 자기를 놀려먹느라고 농담을 지껄이는 줄로만 알고 흘려들었다.

이따금 너무 불안스러워서 설거지라도 거들러 나갈라치면 그 노파는 질색을 하였다.

"킁 킁, 그 고운 손에 왜 물을 묻힌단 말이오. 그 옥 같은 손등이 거칠어지면 어쩌자고. 젊은이란 열 손 재배하고 가만히 있어야 되는 거라오, 킁 킁. 가꾸고 꾸며도 가는 청춘이야 잡을 수 없지마는 왜 일새로 겉늙힌단 말이오. 젊으신네 같은 이는 분세수 단장이나 하고 고이고이 그 어여쁜 얼굴을 아끼셔야 됩네다. 일을 거든다께, 원 천만에 될 뻔이나 한 말인가, 킁 킁. 그저 일은 늙은것이 해먹어야지. 알아볼 눈퉁이 없고 쥐어 볼 젖통이 없으니 어느 나비가 다시 찾아들겠소. 그저 마른일 진일로나 세월을 보낼 것 아니오, 킁 킁. 더군다나 내 눈두덩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야 왜 내 집에 온 손님의 손끝인들 까딱을 하게 한단 말이오. 킁 킁."

"어떻게 노인네를 일을 시켜요. 일은 젊은 사람이 해야지요."

하고 아사녀가 웃으며 반박을 할 것 같으면 노파는 천길 만길 더 뛴다.

"킁 킁, 원 이런 말 보았나. 그렇게 떡먹듯이 일러 듣겨도 못 알아듣는단 말이오, 킁 킁. 그건 시골 무지렁이나 그런 소리를 하는 거라오. 그 서방이란 게 서방이요, 건방이지. 여편네한테 건방이나 부리고 부려먹기나 하고 걸핏하면 난장이나 치고 그래서 여편네의 아까운 청춘을 다 늙힌단 말이오, 킁 킁. 젊으신네도 이왕 서울 왔으니 그 서방이란 게 있거든 하루바삐 떼어 버리시구려. 그 무지막지한 것들이 어디 인간이오. 우리 서라벌 사내야 다들 제 계집 귀애할 줄 안다오. 어디 일을 시킬까, 손찌검을 할까, 킁 킁. 또 그 늙은 시부모라는 것들은 젊었을 때 고생한 건 잊어버리고 며느리만 보면 들볶기나 하고 일만 시켜 먹으려 들지 않소. 그래서 젊으신네도 그런 말을 하는가 보오마는, 사람이란 나이가 젊었을 때 흥청도 거리고 고이 가꾸어야지 다 늙은 내야 아무리 꾸민들 주름살이 펴질 거요, 악센 뼈마디가 몰씬몰씬해질 거요. 그러니 일을 암만 해도 상관이 없단 말이거든. 그런데 젊은이를 왜 일을 시킨단 말이오."

아사녀는 빵긋이 웃고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 노파가 시골뜨기는 사람이 아닌 듯이 휘몰아세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이 적이 마음에 불쾌는 하였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끝끝내 고집을 세워서 그의 비위를 거스를 수도 없었다.

이렇게 자기를 얻들고 받들고 위해 주는 그의 고마움을 생각한들 어떻게 조금이라도 그의 뜻을 받지 않고 불쾌하게 할 것이랴. 그러나 그 노파가 그렇게 시골 시부모를 미워하는 것이 다른 까닭이 붙은 줄이야 아사녀는 멍충이같이 몰라들었다. 시집살이를 못 해본 아사녀이매 시부모가 아무리 그악스럽다 한들 자기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요, 더구나 그 노파가 아무리 시골 사내를 욕을 해도 아사달을 빗대 놓고 하는 말이거니 생각할 까닭이 없지 않으냐.

131[편집]

아사녀는 물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림자못을 찾았다. 그 노파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것도 얼마나 다행한지 몰랐다.

한낮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닌밤중에나 꼭두아침이라도 남편 그리운 생각이 간절할 때마다 불현듯 뛰어나오기에 가까운 것이 무엇보다도 좋고 편하였다.

여러 번 돌아보고 들여다본 탓으로 인제 물 속에 일렁거리는 그림자란 그림자는 낯이 익다시피 되었다.

해가 어디만큼 떠오르면 어느 그림자가 어떻게 가로눕고, 또 그 길이가 얼만큼 된다는 것까지 짐작하게 되었다.

수멸수멸하는 물 얼굴도 정이 들었다.

그러나 탑 같은 그림자는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따금 눈에 서툰 그림자가 얼찐하면,

"옳지 인제야."

하고 가슴을 두근거렸으나 흘러가는 구름 조각이 그를 속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도 그 탑이 덜 되었구나."

발길을 돌릴 적마다 아사녀는 실망한 듯이 혼자 속살거렸으나, 그러나 그 탑이 완성만 되면 그림자가 비칠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오늘 밤은 제법 달이 밝았다.

아사녀는 꿈꾸는 듯한 걸음걸이로 휘넓은 못가를 돌고 또 돌며 탑 그림자를 눈여겨 찾아보았지만, 새파란 하늘이 가로눕고 별들이 한들한들 춤추며 지나갈 뿐.

지친 듯이 풀밭에 주저앉아 은사실을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달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는 또 어디를 가셨나 하고 찾았더니, 킁 킁, 또 여길 나왔구려."

등뒤에서 콩콩이 소리가 났다. 오늘은 또 무슨 볼일이 있다고 다 저녁때나 되어 잔뜩 꾸미고 나가더니 어느결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킁 킁, 오늘은 달이 꽤 있구려. 젊으신네 같은 이는 심회도 날 만하구려."

하고 아사녀 곁에 와서 나란히 앉으며 어깨를 툭 친다.

"볼일은 다 잘 보셨어요."

"잘 보고말고, 참 잘 보았다오, 으흐흐."

콩콩이는 연방 웃어 보이며 기뻐서 못 견디는 눈치였다.

"이번 볼일이 쩍말없이 들어맞기만 하면, 킁 킁, 나한테도 좋지만 젊으신네한테 더 좋은 일이라오, 으흐흐."

아사녀는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이 수상스러웠다.

"저한테 좋을 일이 무슨 일일까요."

"글쎄 가만 있구려. 이 늙은것한테 만사를 맡기구려, 킁 킁. 내가 젊으신네를 이롭게 했으면 했지 설마 해야 붙이겠소. 그런데 그 그림자는 인제 찾았소."

"아녜요, 아직 그 탑이 덜 되었는지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요."

"여기서 거기가 어디라고……."

하다가 콩콩이는 아사녀에게 실망을 줄까 보아 슬쩍 말허두를 돌리었다.

"도대체 그 탑이 완성되기를 왜 그렇게 바라시오. 필경 곡절이 있겠구려, 킁 킁."

아사녀는 벌써 며칠을 콩콩이 집에 있었지만 자기 속사정은 아직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그 노파 또한 굳이 알려 들지도 않았다.

"입때까지 참 말씀을 못 여쭈었습니다마는 그 탑을 짓는 이가 제 남편이랍니다. 그 탑이 완성이 되어야 그이를 만나게 해준대요. 여자의 부정한 몸으로 절 안에 발을 못 들여놓게 한답니다."

"아니 그러면 그 탑 쌓는 석수장이가 젊으신네의 남편이 된단 말이오. 이름이 무어라 하오."

"아사달이랍니다."

"오 그래요. 그래서 이 못에 그림자를 찾는 게로구려. 오, 옳지, 옳아, 킁 킁."

콩콩이는 몇 번 고개를 끄떡끄떡하였다.

"그러면 진작 그런 말을 할 게지, 킁 킁."

하고 매우 못마땅해하다가 다시 생각을 돌리는 듯 혼자말같이 중얼거렸다.

"그 어른 마음에 든 다음에야 남편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단 말인고."

"그건 무슨 말씀이야요."

아사녀는 차차 콩콩의 말씨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 좋은 늙은이도 무슨 꿍꿍이속이 있구나 생각하매 마음이 섬뜩해짐을 느끼었다.

"아니오, 젊으신네 알 것은 아니오, 킁 킁. 혼자 무슨 딴생각을 한 거라오. 주책머리없는 늙은이란 이럴 때 알아본단 말이거든. 무두무미하게 그게 무슨 소리람. 아무튼 아깝소, 아까워……."

"뭣이 아깝단 말씀이에요."

아사녀는 더럭 의증을 내며 채쳐 물었다.

"그러면 아깝지 않고, 그 옥 같은 얼굴로 석수장이 계집 노릇은 아깝지, 아까워, 으흐흐."

하며 콩콩이는 능갈지게 또 웃어 댔다.

132[편집]

"석수장이 계집 노릇은 너무 아까웁다."

아사녀는 다른 말은 다 흘려들었지마는, 이 말만은 뼈가 저리도록 새겨들리었다.

그렇듯 좋고 착하고 보살님의 현신인 듯하던 이 늙은이가 그 언사와 거동이 오늘 밤따라 어떻게 천착스럽고, 수상한 생각이 와락 일어나는 것을 걷잡을 수 없었다. 주름살이 메이도록 분을 덕지덕지 올린 것도, 시들어진 뺨에 발그스름하게 연지를 칠한 것도 망측스럽고 제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건 어, 어떻게 하시는 말씀이야요."

아사녀의 두 뺨도 뾰로통해지고 절로 말소리도 날카로워졌다.

노파는 말끄러미 아사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제 말이 너무 지나친 것을 깨달았음이리라.

"어규 젊으신네, 잘못 되었구려. 늙은것 말이 어디 종작이 있소. 원 지껄이기만 하면 말이 되는 줄 알고, 킁 킁. 원 망할 년의 입주둥아리가……."

제가 저를 여지없이 나무라다가,

"여보 젊으신네, 늙은것이 그저 입버릇이 사나워서 그렇지 무슨 다른 뜻이야 있었겠소? 킁 킁. 젊으신네가 하도 아름답고 의젓하기에 웃느라고 한 소리가 아니오. 그만 일에 그렇게 화를 낼 거야 무엇 있소. 내가 젊으신네 영감을 보기나 하였기에 헐뜯어 말할 거요. 하도 젊으신네가 잘나서 이 늙은것이 반은 미치다시피 되어 말이 함부로 나왔구려."

너스레를 놓는 바람에 아사녀는 이렇듯 신세 많이 진 늙은이에게 괜히 촉바른 소리를 하였구나 후회하였다.

노파는 눈을 두리번두리번하며 한동안 무엇을 생각하다가,

"여보, 젊으신네, 일인즉은 매우 수상하구려. 젊은 아내가 천리 원정을 멀다 않고 찾아왔는데 안 만나는 까닭이 무슨 까닭이란 말이오, 킁 킁. 사람이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듯 매정할 수가 있소. 그야 말짝으로 필유곡절이지."

"제 남편이야 제 온 것을 어디 알기나 해요. 문지기가 가로막고 들이지를 않으니 그렇지."

"그럴상도 싶지마는 그렇지 않은 까닭도 또 있다오. 젊으신네 영감이 미리 문지기에게 일러두지 않은 다음에야 그 문지기가 억하심정으로 들이지를 않는단 말이오, 킁 킁."

"어떻게 저 올 것을 알고 미리 부탁을 해둔단 말씀이야요."

노파는 매우 딱한 듯이,

"어규 딱해라, 저렇게 고지식하게 생각을 하니까 나타나지도 않을 그림자를 찾아보라고 어리더덤한 수작으로 돌려세웠구려, 킁 킁. 말하기는 안되었지만 만일 젊으신네 영감이 젊으신네같이 잘났다면."

"저보다 여러 갑절 잘나셨답니다."

"그러면, 그러면, 킁 킁, 큰일이로구려. 그래 여기 온 지는 얼마나 되었소."

"삼 년이나 되었어요."

"삼 년! 어규, 삼 년 동안에 그래 새파란 젊은이가 독수공방을 할 것 같소, 킁 킁. 벌써 탈이 난 거요. 더구나 불국사 같은 대찰에는 대갓집 마마들의 불공이 잦고, 그렇게 잘난 젊은이가 그들의 눈에 띄었다면 그대로 둘 것 같소. 여불없지, 여불없어."

"설마……."

"여보, 설마가 다 뭐요. 설마가 사람을 죽인다오, 킁 킁. 큰일났구먼. 어규 가엾어라. 저렇게 예쁜 댁네를……."

아사녀의 가슴엔 무엇이 탁 맞치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 팽개와 싹불의 말이 과연 참말이었던가. 딴은 그 문지기가 처음에는 그렇게 물풍스럽게 굴지를 않더니 아사달을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노발대발 천길 만길 뛰지를 않았던가.

노파는 아사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는 것을 보고,

"어규 가엾어라, 어규 딱해라. 그야 젊으신네 남편이야 문지기를 보고 그런 부탁을 안 했는지 모르지, 킁 킁. 보아하니 두 분의 금실이 여간 좋지 않았던 모양이니, 킁 킁. 어느 년인지는 모르지만 그 계집년이 죽일 년이지. 필경은 그년이 그 문지기를 돈푼이나 주고 본여편네가 오거든 절문 안에 들어서지도 못하도록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지도 모르지. 원 세상에 원수엣년도 있지그려. 몹쓸 년도 있지그려."

아사녀는 흑 하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여보 젊으신네, 너무 상심을랑 마시오. 꼭 그런 줄야 낸들 알 수 있소, 킁 킁. 세상에 못 믿을 건 사내의 마음입네다. 계집한테 미치기만 하면 그대로 환장이 되는 게니, 킁 킁. 그걸 다 속을 썩여서야 어디 사람이 배겨날 수가 있소. 어디 저 아니면 세상에 사내 씨가 말랐답디까. 유들유들하게 생각을 해야 된단 말이거든, 킁 킁. 자아 일어나오. 우리집으로 들어가서 잠이나 잡시다. 이것저것 생각하면 무얼 한단 말이오. 살이나 내렸지. 내일이라도 또 좋은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아오, 킁 킁."

133[편집]

그 이튿날 저녁 나절 아사녀는 못가를 또 한 바퀴 휘돌아오니까 콩콩이 집 문 앞에 으리으리한 좋은 수레가 한 채 놓이고 홍달모 달린 벙거지를 젖혀쓴 구종 몇몇이 두런두런 지껄이고 있었다.

콩콩이 집에 손님이 들기도 처음이요, 손님이 든대도 이런 굉장한 손님이 들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아사녀는 어쩐지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어서 곧 발길을 돌려서려다가 그래도 자기가 신세지고 있는 집에 별안간 손님이 들어 그 노파가 혼잣손에 쩔쩔맬 것을 생각하고 조심조심 걸어들어와 보니 바깥에 들리는 것과는 딴판으로 안에는 조용한 게 인기척도 없는 듯하였다.

아사녀가 가만히 마루에 올라서매 안방에서 영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은밀한 수작이 새어흘렀다.

"그래 자네 말마따나 그 천하절색은 어디로 갔나, 허허."

점잖으나마 꺽세디꺽센 목소리는 아마 노파를 찾아온 사내 손님의 음성이리라.

"이제 고대 들어오겠지요. 어규 대감께서도 그렇게 급하십니까, 으흐흐."

갈 데 없는 주인 노파의 흐무러진 수작이 분명하다.

"그래, 오기는 어디서 왔다던가. 자네가 근지를 분명히 아는가."

"벌써 몇째 마나님이 되실 텐데 근지를 캐시면 무얼 하십니까. 인물만 무던하면 고만입지요."

"원 자네는 인물 인물 하고 인물만 추지마는, 내 집사람을 만들자면 첫째 근지를 알아야 될 것 아닌가."

"뭐― 성골, 진골의 정실부인을 구하시는 것 아니겠고, 대감의 눈에 드시면 고만이지 근지는 알아 무엇 하십니까, 킁 킁. 아무튼 한번 보시기만 하십시오. 당명황의 양귀비도 저만큼 물러앉으라 하실 테니, 으흐흐."

"아따, 추어올리기는. 양태진만할 말로야 황금 만 냥도 아깝지 않지마는."

엿듣던 아사녀는 아까부터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과연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인지 또는 다른 수작인지 분명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온몸이 귀가 되어 한 걸음 두 걸음 안방 옆으로 다가들어섰다.

"그런데 여봅시오 대감, 한 가지 난처한 일이 있답니다. 그 사람이 서, 서방이 있대요."

콩콩이는 어떻게 목소리를 낮추는지 하마터면 몰라들을 뻔하였다.

"응, 서, 서방이 있어. 그러면 유부녀란 말이지. 그러면 안 되지 안 돼, 될 말인가."

사내 손님의 성난 듯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안 될 것이 뭐입시오. 그까짓 시골뜨기 서방이 백 명이 있은들 무슨 상관입니까. 한번 서슬 푸른 대감 댁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제가 하늘 위에 별 쳐다보기지, 무슨 별수가 있겠습니까, 킁 킁. 그래서 저도 근지도 알아보지를 않았답니다. 엊저녁에야 말말끝에 서방 있는 계집이란 소리를 들어 알았지요."

아사녀는 머리 위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갈 데 없는 제 이야기다.

'어서 달아나야, 어서 달아나야.'

속으로 외치면서도 웬일인지 발을 동여매 놓은 듯 움직일 수 없는데, 회오리바람이 설레는 듯한 귓속으로는 방 안의 가만가만한 말낱이 마치 화살촉 모양으로 들어박히었다.

"서방 있는 계집을, 안 될 말, 안 될 말."

사내는 종시 으레를 한다.

"원 대감도 딱도 하십니다. 그까짓 서방은 생각하실 것도 없대도 그러시네. 그까짓 돌이나 쪼아 먹고 사는 위인을 정 말썽을 부리거든 돈냥간이나 두둑히 주면 저도 새장가들고 좋아할 것 아닙니까."

아사녀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하여 살이 부들부들 떨리었다.

"오 그러면 그 서방이란 자가 석수장이란 말인가."

"그렇대요. 바로 저 불국사에서 탑을 짓는 석수래요, 킁 킁. 그 석수의 짓는 탑그림자가 비친다고 해서 하루에도 몇 번을 그림자못으로 간답니다. 지금도 아마 거길 간 듯합니다. 여기서 거기가 어디라고 우두머니 못가에 앉아서 그림자 나타나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꼴은 아닌게아니라 불쌍도 해요."

"그러면 숫배긴 아주 숫배긴 모양이나 석수장이 계집이 오죽할까."

"아닙시오. 천만에 그렇지 않습니다……."

아사녀는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살그머니 마루를 내려서서 나는 듯이 뒤꼍으로 돌았다. 앞문으로 나가다가는 그 감때사나운 구종들에게 잡힐 듯한 염려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집에는 뒤꼍에도 조그마한 중문이 하나도 아니요 둘씩이나 있었다. 남의 눈에 뜨이지 않고 드나들기에는 막상이었다.

아사녀는 그 중문 하나를 열고 진둥한둥 뛰어나왔다.

134[편집]

콩콩이 집 뒷문을 빠져나온 아사녀는 사나운 짐승에게 쫓기는 사람 모양으로 한동안 허방지방 줄달음질을 쳤다. 뒤에서 누가 씨근벌떡거리고 잡으러 오는 듯 오는 듯하여 발길 닿는 대로 들숨날숨없이 달아나기만 하였다. 물론 어디로 간다는 지향조차 없었다.

얼마를 뛰어왔는지 숨은 턱에 닿고 댓 자국을 옮길 수 없어, 마침 길 옆에 우거진 갈밭을 발견하고 그 속에 뛰어들어 은신을 하고 눈을 내어 바라보매, 벌써 어슬어슬한 저녁 안개에 싸이어 콩콩이 집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 있는 지척에서 또 이런 변을 당할 줄이야. 오는 도중에는 뜨내기 못된 젊은 것들의 성화를 받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모면하기가 쉬웠던 셈이다. 어엿한 구종을 늘어세우고 버젓한 수레에 높이 앉은 명색 '대감'이 이런 불측한 출입을 할 줄이야. 애숭이 이리떼보다 이 늙은 이리가 여러 백 갑절 더 무섭고 더 치가 떨리었다. 더구나 그 소중한 남편을 개새끼보다 더 우습게 아는 것이 절통절통하였다.

'이것도 내 탓이다. 나 때문에 공연히 남편까지 욕을 보이는구나.'

하매 아사녀는 몸둘 곳을 몰랐다. 그때 죽어 버렸을 것을. 그 사자수 푸른 물결에 몸을 던져 버렸던들 그 몹쓸 고생도 아니하였을 것을. 몸은 비록 어복중에 장사를 지냈을망정 혼이라도 고장의 하늘에 남아 있다가 아사달님이 돌아오시는 것을 보았을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두가 제 잘못이었다. 한번 죽음을 결단한 다음에야 무서울 것이 무엇이며 어려울 것이 무엇이랴 하고 길을 떠난 것부터 잘못이었다. 죽음보다 몇 갑절 더 무섭고 더 어려운 고비를 얼마나 겪었는가.

그 흉물스러운 콩콩이를 태산같이 믿은 것은 잘못 중에도 큰 잘못이었다. 아무리 의지가지가 없는 형편이라 하기로 아무리 하루 이틀만 지나면 탑그림자가 나타나고 곧 남편을 만날 수 있다기로 턱없이 남의 신세를 진 것이 불찰이다.

그러면 어찌하랴. 지금 새삼스럽게 또 어디로 달아날 것이랴. 전자에는 이런 변을 당할 적마다 서라벌로 서라벌로! 이를 악물고 내달았거니와 이제는 갈 길조차 없지 않으냐.

그렇다고 한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만일 붙들리기만 하면 이번이란 이번이야말로 빼쳐날 길이 없다. 어디든지 좀더 멀리라도 피신을 해야 한다.

아사녀는 깜틀 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언뜩 불국사 생각이 떠올랐다.

'옳다, 좌우간 또 불국사로나 가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는 벌써 떨어지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여 길을 찾기가 아득하였으나, 아무튼 불국사 방향을 어림잡고 질팡갈팡 걷기 시작하였다.

어디로 어떻게 돌았는지 아사녀 제 자신도 알 수는 없었으되 으스레한 가운데에도 훤하게 트인 큰길이 보이었다. 아사녀가 문지기에게 쫓기어 그림자못을 찾아가던 좁은 길과는 딴판으로 크고 넓은 것을 보면 서라벌에서 불국사로 바로 뚫린 대로가 분명하다.

아사녀가 그 길로 휘잡아들어 얼마 걷지 않아서 과연 불국사 대문의 붉은 기둥이 그리 멀지 않게 뚜렷이 바라보이었다.

아사녀는 딴 길로 나온 것이 오히려 다행하였다.

불국사 문을 바라만 보고 허둥지둥 발길을 옮기고 있을 제 문득 등뒤에서 말굽 소리가 들리었다.

아사녀는 몸을 흠칫하며 길 한옆으로 비켜서는데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하였다.

'나를 잡으러 오는가 부다.'

길가라 으슥한 숲도 없으니 은신할 도리도 없고, 그렇다고 달아나자 하니 저편에서 말을 달려오는 다음에야 몇 걸음을 안 옮겨 놓아 잡힐 것은 정한 이치였다.

아사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에 옹송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뚜벅뚜벅하는 말굽 소리는 과연 아사녀 있는 곳으로 가까워 왔다.

아사녀의 등에서는 찬 소름이 쭉쭉 끼치었다.

별안간 동이 좀 뜨게 난데없는 숨찬 여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애구, 애구, 아가씨, 구슬아가씨, 좀 같이 가요. 쇤네는 죽겠는뎁시오."

"어서 오너라, 어서 와! 왜 네 말은 절룸절룸 저느냐."

하고 앞장을 섰던 말굽 소리가 바로 아사녀의 등뒤에서 멈춰지는 듯하였다.

아사녀는 여자의 말소리에 적이 마음을 놓고 제 뒤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두 간통도 안 떨어진 곳에 웬 젊은 여자가 마상에 높이 앉은 뒷모양이 보이었다.

135[편집]

어둠이 짙어지자 솟은 때 모르는 달빛이 백금과 같이 번쩍인다.

'세상에 출중한 여자도 있구나.'

아사녀는 그 여자의 훨신 편 날씬한 허리와 동그스름한 어깨판과 달빛에 아롱거리는 비단 옷자락의 무늬를 바라보며 일순간 제 비참한 경우도 잊어버리고 속으로 속살거리었다.

한 손으로 느슨하게 말고삐를 거사거리고 또 한 손으로 손잡이에 옥을 물린 채찍을 비껴 든 모양은 옛이야기 속에서나 빠져나오는 여장부를 생각나게 하였다. 옥충 등자는 새파란 불길이 이는 듯한데 맵시 있는 말이 하붓이 놓이어 가만히 멈춰 있는데도 항청항청 그네질을 하는 것 같다.

저만큼 말등에 거의 달라붙은 듯한 방구리 같은 여자가 쌔근쌔근하며 말을 채쳐 달려온다.

아까 같이 가자고 소리를 쳐서 앞선 이의 말을 멈추게 한 여자이리라.

거의거의 따라서게 되자 뒤떨어졌던 이는 할딱할딱 숨이 넘어가는 듯하다가 그래도 연방 종알거리었다.

"애구, 아가씨도 아무리 급하시기로, 애구 아가씨도 아무리 아사달 서방님을 만나시기가 급하시기로 그렇게 그렇게 급하게 가신단 말입시오. 이 털이년을 죽으라면 그냥 죽으라시지."

아사녀는 저도 모를 사이에 소스라쳤다. '아사달 서방님'이란 말이 그의 귀를 칼로 에어 내는 듯한 까닭이었다.

"아사달님 말은 왜 또 이렁성거리느냐."

앞선 여자가 꾸짖는 듯이 한마디하고 말머리를 돌이켜 두 여자가 나란히 아사녀를 마주보며 말을 놓아 지나간다.

아사녀의 핑핑 내어둘리는 시선 가운데 달빛을 안은 그 여자의 앞모양이 뚜렷이 나타났다.

뒷모양보다 앞모양은 약간 파리한 듯하였으나 그 얼굴은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이 여자!'

아사녀의 가슴속에서 무엇이 피를 뿜으며 부르짖었다.

'이 여자다! 아사달님의 사랑이 바로 이 여자다.'

아사녀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온몸은 설한풍에 휘몰리는 것처럼 와들와들 떨리었다.

그 여자도 지나치면서 유심히 아사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제가 데리고 가는 시비인 듯한 뒤따라온 여자에게 가만히 속살거리었다.

"세상에 어여쁜 여자도 있구나."

"글녓시오. 이만저만한 인물이 아닌뎁시오."

"저렇게 어여쁜 여자는 난생 처음 보겠구나."

하고, 그 여자는 또 한번 힐끗 돌아보았다.

두 눈길이 찡 하고 소리라도 낼 듯이 마주 부딪쳤다.

"웬 여자일깝시오. 이 어두울 녘에 길가에 혼자 섰으니."

"그야 누가 알겠니."

그러고 두 여자는 뚜벅뚜벅 말을 채쳐 지나갔다.

아사녀는 돌아서서 그들의 가는 곳을 안청이 튕겨 나오도록 바라보았다.

그들의 그림자는 불국사 절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아사녀는 뿔이나 난 것처럼 제 선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치 열에 뜬 사람 모양으로 불국사를 향하여 줄달음질을 하였다.

거의 불국사 문전에 다다르자마자 아사녀는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문은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이나 하는 듯이 훨씬 열리었고 그 말썽꾼이 문지기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뛰어들어가도 아무도 막을 이는 없을 것 같다.

아사녀는 몇 걸음 걷다가 주춤 서곤 하였다. 절문을 등지고 몇 발자국 떼어놓다가 다시 돌아서곤 하였다.

뛰어들까말까!

남편 보고 싶은 마음과 분한 생각과 남편의 얼굴을 깎이우고 망신을 주게 될 걱정이 그의 조그마한 가슴속에서 세 갈래 네 갈래로 갈리어 대판 싸움을 일으킨 것이다.

얼마 동안 아사녀는 어쩔 줄을 모르고 망설이고 있는 판에 문득 등뒤에서 팔을 잡아 비틀도록 단단히 부여잡는 사람이 있었다.

아사녀는 돌아보고 질겁을 하였다.

거기는 콩콩이가 무서운 형상을 하고 서 있지 않은가.

언제든지 싱글싱글 웃는 듯하던 눈이 미친 개 눈처럼 번들번들 번쩍이고, 앙다문 입술은 발발 떠는데 게거품이 지르르 흐르는데다가 앞니빨이 반쯤 튕겨 나온 것이 갈 데 없는 아귀와 같았다.

이윽히 아사녀를 뜯어나 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몇 번 안간힘을 쓰고 나서 제풀에 제 성을 풀며,

"킁 킁, 난 어디를 갔다고. 그림자못에 열 번은 더 나가 보고, 후유, 어쩌면 이 늙은것을 그렇게 애간장을 졸이게 한단 말이오. 난 물에나 빠져 죽은 줄 알고 어떻게 애를 켰던지. 여기를 올작시면 온단 말이라도 해야 될 것 아니오, 킁 킁. 어떻게 화가 나던지……."

콩콩이는 다시 너스레를 피우기 시작하였다.

136[편집]

아사녀와 마주친 말 탄 여자 둘은 물론 주만과 털이였다.

주만은 임해전 궁장 기슭 후미진 길에서 경신과 만나서 마지막 귀정을 지은 이튿날, 경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래 장인 장모와 주만에게까지 깍듯이 작별인사를 하고 제 고장으로 떠나가 버렸다.

주만은 경신에게 한량없는 존경과 감사를 올리며 위태위태하던 제 사랑에 한 가닥 성공의 광명이 비친 듯하여 마음 그윽이 든든하고 기뻐하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오직 하루바삐 탑이 완성되어 아사달과 두 손길을 마주잡고 멀리 사랑의 보금자리를 찾아 종적을 감추면 고만이다.

탑이 얼마쯤 되었는가. 못된 자들의 엄습을 당한 아사달이 어떻게 되었는가. 차돌의 말을 들어 대강은 알았지마는 새삼스럽게 궁금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불국사이기로 아니 오고는 배길 수 없었다. 겁을 집어먹고 머뭇거리는 털이를 재촉하여 살같이 달려온 것이다.

그들은 늘 하는 대로 절문 안에 들어와서 마굿간에 말을 매고 주만은 걸어서 석가탑을 찾아 올라갔다.

"아까 그 여자가 웬 여자일까. 그 어여쁜 얼굴에 수색이 가득하였으니."

주만은 종시 그 여자가 마음에 키이는 모양이었다.

"글녓시오. 그 맨드리 하며 얼굴 판국 하며 어쩐지 서라벌 여자 같지는 않던뎁시오."

"얼굴 판국이야 서라벌 여자나 외처 여자나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딴은 그 머리 쪽찐 것하고 어딘지 시골 티가 나기는 나더라. 그는 그렇다 해도 세상에 그렇게 결곡하고 고운 얼굴이 또 있을까."

"원 아가씨는 한 번 본 그 여자에게 아주 홀리셨군요. 아가씨가 사내 같으시면 여간이 아니실 뻔하셨군요, 호호."

털이는 또 버릇없는 소리를 하고 낄낄대었다.

"내가 만일 남자가 되었던들 그런 여자를 아내로 삼았겠지. 어여쁘고 안존하고 보드랍고…… 호호."

주만은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하면서도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참 아가씨가 남자로 태어나셨더면 동동 뜨는 서방님이 되셨을걸. 지금 본 그 여자가 아무리 아름답기로 아가씨께야 발밑에나 따라올깝시오."

"얘가 또 종작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나 보기에는 여자답기에는 나보다 그 여자가 몇 곱절 나을 것 같더라."

"원 아가씨도, 아가씨를 어떻게 그런 여자와 댄단 말입시오."

이런 수작을 주고받을 제 그들의 걸음은 꽤 석가탑에 가까워 왔는지 자그락자르락 고이고이 돌을 미는 소리가 들리었다.

"오늘 밤에도 여상스럽게 일을 하시고 계시는구나."

주만은 하던 수작을 그치고 귀를 기울이다가 가만히 소곤거렸다. 마치 미묘한 풍악이 들려 오는데 그 털끝만한 가락이라도 귀 너머로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아가씨는 귀도 밝으시어. 참 쥐가 밤톨이나 갉아 먹는 듯한 소리가 가느닿게 들려 오는뎁시오."

털이도 손으로 귀 뒤를 잡아 쫑긋 세우고 종알거리었다.

주만은 손을 저어 아무 소리도 말라는 뜻을 보이고 잠깐 걸음을 멈춘 채 이윽히 엿듣고 있었다. 달 그림자 어린 그 얼굴은 황홀하게 빛났다.

"너 저 자지러지는 가락 소리를 들어 봐라. 저절로 신이 나는구나."

"쇤네 귀에는 자그럽기만 한뎁시오."

"네까짓 귀가 귀냐. 저 소리는 가슴정질 하는 소리란다."

"녜, 그럽시오."

털이는 그럴싸하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정에도 가슴정, 다리정이 있는갑시오, 오호호."

"무슨 방정맞은 웃음이냐. 그 흐무러진 가락을 고만 놓쳐 버렸구나."

"어서 가기나 하십시오. 그 탑 밑에 가시면 귀에 신물이 나도록 들으실걸."

하고 털이는 제가 앞장을 서서 종종걸음을 치려 들었다. 털이는 돌 쪼는 소리보다 제 아가씨를 한시바삐 모셔다 놓을 데 모셔다 놓고 차돌이 만나러 가기가 급하였던 것이다.

주만은 털이를 따라 멈추었던 발을 떼어는 놓았으나 땅이나 꺼질 듯이 가만가만히 걸었다. 제 귓속에 스며드는 아름다운 가락을 깨칠까 두리는 듯. 털이는 달음박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고 앙바틈한 다리를 아기작아기작 놀리어 제 아가씨의 본을 떠서 발소리를 죽이느라고 조심조심하였다.

"가슴정이란 어떻게 생긴 것입시오."

털이에게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는 것처럼 거북한 노릇은 없었다.

"원 그 애는 가슴정이란 말이 그렇게 이상스러우냐. 가슴정이란 아주 돌을 곱게 다듬는 데 쓰는 게란다."

주만은 성가시나마 아사달에게 들은 풍월을 설명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석가탑은 다 된 탑이었다.

찢어지게 밝은 달빛 아래 그 의젓하고 거룩한 모양은 환하게 솟아오르는 듯하였다.

137[편집]

아사달은 이제 탑 속에서 일을 하지 않고 탑 밖에서 사다리를 놓고 한창 흥에 겨워서 다듬질에 골몰하였다. 번개같이 번드치는 그의 손아귀에는 가느다란 가슴정이 신이 나서 넘노는데 그 엷고 납작한 입부리로 나불나불 돌부리를 씹어 내었다. 은물에 적시어 놓은 듯한 돌몸에서는 반짝반짝 흩어지는 불꽃도 희었다.

주만과 털이가 사다리 밑까지 돌아왔건만 아사달은 인기척도 못 알아듣는 듯하였다.

털이가 소리를 치려는 것을 주만은 눈짓해 말리고 마치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귀와 눈을 아사달의 손끝에 모으고 있었다…….

털이는 몸부림이 날 지경이었다.

차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사달님 처소 툇마루에 다리를 디룽디룽하며 걸터앉아서 달을 보고 있으리라.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그 늙은 회나무 그늘에 슬쩍 몸을 숨기고 뒤를 돌아 등뒤에서 두 손으로 눈을 꼭 감겨 주었으면! 그러면 누구야 누구야 하고 고개를 도래도래 흔들렷다. 한 나절이나 눈 감긴 손을 떼어 주지 않으면 약이 올라서 나중에는 뿔쭉 하고 성을 내렷다. 실컷 애를 먹이다가,

"아옹, 나를 몰라."

하고 깔깔대면 저도 돌아다보고 싱글벙글 나를 두리쳐 안으리라.

그러나 어쩐지 엄숙한 공기에 싸여 감히 발을 떼어 놓지 못하고 주만의 하는 대로 조용히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정소리는 뚝 그치었다. 그러자 아사달은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높고 험한 산에 오르는 이가 아슬아슬한 고비를 다 겪고 마침내 절정에 득달하였을 때 내뿜는 한숨과 같았다. 가슴이 툭 트이는 듯한 시원함과 창자 밑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기쁨과 지치고 지친 피로가 한꺼번에 뒤섞인 한숨이었다.

정소리는 끊겼건만 제 귀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여운을 즐기며 주만은 또 한동안 그린 듯이 서 있었다.

"아야야, 아야야."

털이는 온몸이 비꼬이는 듯 이제 더 참으려야 참을 수 없어 필경 이 조용한 공기를 깨치고 말았다.

"쇤네는 다리가 저려서 죽겠는뎁시오, 아야야, 아야야."

아사달은 그제야 제 발밑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는지 놀란 듯이 힐끗 내려다보았다.

"오오,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이 오셨습니까."

아사달이 이때처럼 반겨 부르짖기는 처음이었다. 그러고 주만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우둥우둥 사다리를 내려온다.

털이는 옳다 인제 되었다는 듯이 그 틈을 타서 종종걸음을 치며 제 갈 데로 가버리었다.

아사달은 사다리를 내려오는 길로 다짜고짜 주만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었다. 그 목소리는 전에 없이 내리지르는 폭포와 같이 급하였다.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 기뻐해 주십시오. 인제, 인제야 끝이 났습니다."

대공을 이룩한 절대의 감격에 그의 몸과 넋은 소용돌이를 쳤던 것이다. 이 기쁨을 나눌 이를 만난 것이 어떻게 반가운지 몰랐던 것이다.

"녜, 녜! 탑이 완성이 되었단 말씀예요. 대공을 마치셨단 말씀예요."

주만도 제 귀를 의심하는 것처럼 흥분된 말씨로 채쳐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마지막 손을 떼었습니다. 햇수로 삼 년, 달수로 서른 달 만에."

"……"

주만은 대번에 목이 꽉 메이는 듯 말도 나오지 않았다. 쉬이쉬이 준공은 된다고 하였지만 이렇게 속히 끝이 날 줄이야. 그렇게도 지리하고 그렇게도 어렵더니만 마치려 드니 이토록 빠를 줄이야, 쉬울 줄이야. 더구나 제가 보는 눈앞에서 일손이 떨어질 줄이야.

주만의 긴 속눈썹에는 눈물이 서릿발같이 번쩍였다. 마침내 그는 감격과 정열의 회오리바람에 싸이어 단 한마디,

"아사달님!"

부르짖고 제 얼굴을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던지며 소리를 내어 울었다.

"구슬아기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기뻐해 주시니."

하고 아사달도 주먹으로 제 눈물을 씻었다.

"만일 이 자리에 스승이 계셨던들 얼마나 기뻐하실까……."

아사달의 생각은 벌써 멀리 고장으로 달리었던 것이다. 스승도 스승이려니와 제 아내 아사녀인들 이 자리에 있었더면 얼마나 좋아하였으랴. 그러나 아사녀 말만은 선선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주만은 벌써 아사달의 흉중을 꿰뚫어본 듯 선뜩 얼굴을 떼며,

"부인께서 보셨더면 더욱 기뻐하셨을 것을."

하고 중얼거리었다. 그 말가락엔 조금도 시새는 울림이 없고 가장 자연스럽게 동정에 넘치는 듯하였다.

뚜렷한 석가탑의 그림자는 하나로 녹아드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뒤덮는 듯이 지워 버렸다.

138[편집]

아사달과 주만이 석가탑 그림자 속에서 낙성의 감격에 겨웠을 제 아사녀는 콩콩이에게 붙들리어 푸줏간으로 끌려가는 양 모양으로 꾸벅꾸벅 따라갔다.

지금 와서 앙탈을 한다 한들 왁자지껄만 할 뿐이지 놓아 줄 것 같지도 않고, 설령 뿌리치고 달아날 수 있다 하더라도 또다시 펄떡거리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풀밭과 산기슭에 이리저리 몸을 숨기는 그 지긋지긋한 고생의 길로 들어설 뿐. 생각만 해도 이에 쓴물이 돌았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모든 걸 단념해 버렸다.

대공을 이루고 찬란한 영광에 싸인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는 기쁨도, 두 손길을 마주잡고 고장으로 회정하는 아기자기한 꿈도, 그 몹쓸 가지가지 경난을 정담 속에 넣어 두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 어여삐 여기는 꿀 같은 사랑생활도 무참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그이에게는 저보다 더 높고 더 아름다운 여자의 사랑이 있지 않으냐. 찌들고 여위고 볼품 없는 이 시골뜨기 아내보담 호화롭고 씩씩한 서울 아가씨가 따르지 않았느냐.

인제 와서는 내란 이 몸은 그이에게 도리어 폐가 되고 누가 될 따름이 아니냐.

이런 때 저승의 차사 같은 콩콩이를 만난 것이 도리어 무딘 결심을 재촉해 주었다.

콩콩이는 아사녀가 저를 보기만 하면 몸부림을 하고 뺑소닐 칠 줄 알았더니 이렇게 고분고분히 따라오매 얼마쯤 마음이 누그러졌다. 막상 '대감'이 불러오라 하여 찾으러 나갔다가 아사녀가 가뭇없이 사라져서 발을 동동 구르던 생각을 할 것 같으면 아사녀를 잡기만 하면 바수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듯하였다. 그렇게 꿀을 담아 붓는 듯해서 그 '대감'이 제 집에 행차까지 하셨는데 정작 당자가 없어 놓으니 이런 꼴이 어디 있느냐. 더구나 끼니마다 고량진미에 중값든 옷까지 입혔으니 밑천도 이만저만 들지 않았는데 만일 줄행랑을 쳤다면 이런 손해가 또 어디 있느냐. 그림자못을 열 바퀴나 더 돌다가 허허실수로 불국사엘 와본 것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은 만행도 만행이려니와 당자가 앙탈도 않는 것은 여간 다행이 아니다. 만일 그 '대감'이 조맛증이나 내시지 않고 눈을 껌벅껌벅하며 기다리고 있다면야 일은 되었다. 오래간만에 얻어걸린 이 큰 콩을 놓쳐서 될 말인가.

"여보 젊으신네, 하필 오늘 저녁따라 불국사엘 오셨소. 그래 그 석가탑인가 뭔가 탑 그림자가 비칩디까."

"아녜요."

아사녀는 고개를 다소곳한 채 성가신 듯이 간단히 대답하였다.

"그것 보구려. 먼 곳에서 어떻게 거기 그림자가 비친단 말이오, 킁 킁. 백주에 거짓말이지."

하고 콩콩이는 속으로 이 계집애가 아직도 모르는구나 생각하고 슬슬 마음을 돌려 보려 들었다. 정작 '대감'과 상면을 시킬 때 발버둥을 치면 가뜩이나 남편 있는 계집이라고 꺼리는데 일이 순편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남편을 만나 보셨소."

번연히 못 만난 것을 알면서도 짐짓 물어 보았다.

"아녜요."

"원 그런! 세상에 매정한 사내도 있구려, 킁 킁. 천리 원정에 찾아온 아내를 어떡하면 만나 주지도 않는단 말이오."

하고 콩콩이는 바로 흉격이나 막히는 것처럼 칵 하고 침을 뱉고 나서,

"여보 젊으신네, 그런 사내를 어떻게 바라고 산단 말이오. 내 참 좋은 자리에 중매해 주께, 으흐흐. 바로 상대등 되시는 어른, 말하자면 임금님 다음가는 어른이야. 그 어른이 자식이 없어서 마마님을 구하시는데 젊으신네가 들어가 보시려오. 쇠뿔한 마마님이면 귀비 부럽지 않게 호강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젊으신네가 들어가서 아들만 하나 쑥 낳아 보시구려. 귀염과 굄을 독차지할 게고 아드님이 대까지 잇게 된단 말이거든."

수다 늘어놓는 콩콩이의 말낱은 마치 아사녀의 명을 재촉하는 주문과 같았다.

아사녀는 콩콩이보다도 더 빨리 걸었다. 한 걸음이라도 속히 걸어야 모든 슬픔과 모든 괴로움을 한시바삐 벗어날 것처럼.

저만큼 그림자못이 보인다.

달빛어린 그림자못은 거울같이 맑았다. 찰랑찰랑 뛰노는 은물결은 아사녀에게 어서 오라고 부르는 듯하였다. 그 물결을 바라보는 순간 아사녀의 설레던 가슴도 맑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인제 다 왔구나.'

아사녀는 속으로 속살거리고 호 하고 가쁜 숨길을 내쉬었다.

그들의 발길은 그림자못가를 스쳐가게 되었다.

아사녀는 불국사 쪽을 돌아보았다. 그 눈에는 털끝만한 원망하는 빛도 없었다. 맑고 부드럽게 약한 슬픔을 머금은 양이 마치 보살님의 자비에 가득 찬 눈동자와 같았다.

'나는 가요, 저 물 속으로. 내 시신 위에나마 당신의 이룩한 석가탑의 그림자를 비쳐 주어요.'

이것이 마음으로 속살거리는 남편에게 대한 마지막 부탁이었다.

콩콩이가 악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이 아사녀는 나는 듯이 몸을 빼쳐 그림자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139[편집]

이 나라의 큰 명절 팔월 한가위도 글피로 박두하였다. 오늘의 조회에서는 신궁에 큰 제향을 올릴 절차와 제향을 마친 다음에는 신궁 넓은 마당에서 궁술과 검술의 모임을 열 것과, 밤에는 육부의 처녀들을 모아 길쌈내기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처녀들을 두 패로 나누는데, 그 우두머리가 될 두 처녀는 연례에 따라 시중 금지의 딸 아옥과 이손 유종의 딸 주만으로 작정이 되었다.

시중 금지는 문득 반열에서 나와 옥좌 앞에 부복하였다.

"소신이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 조신들은 내심으로 '저 독사 같은 자가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고' 하면서 긴장한 얼굴로 그 깐깐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궁술과 검술을 권장함은 우리나라의 오래 내려오는 관습이오라 지금 졸연히 폐지하기는 어렵다 하겠사오나 오늘날 같은 태평성대에 살벌의 기운을 일삼는 것은 결코 화길한 일이 아니옵고 개중에는 지체와 재주를 믿사옵고 성군작대하와 양민을 괴롭게 하오며 심지어 인명을 해하는 일도 없지 않다 하온즉 유사에 명하시와 이런 무뢰지배를 사실케 하시와 국법을 바로세우고 상무지풍을 누르시어 혈기방장한 젊은 무리의 예기를 꺾으시고 성경현전에 잠심케 하시와 국가 백년대계의 귀취를 밝히심이 좋을까 하옵니다……."

시중 금지의 말이 채 마치기 전에 이손 유종은 매우 흥분된 걸음걸이로 반열에서 나왔다.

"지금 아뢰온 시중 금지의 말씀은 천만부당한 줄로 아뢰옵니다. 문무를 병행시킴이 치국의 대경대법이거늘 이제 시중은 무를 버리고 문만 취하려 하오니 국사를 그르침이 이에 심한 자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우리나라가 최이한 소국으로 삼한 통일의 위업을 이루옴은 위로 열성조의 천위와 성덕의 소치이옵고 아래로는 우리나라 고유의 국선도가 사기를 진작한 까닭인 줄로 아옵니다. 대개 무는 국민의 원기이오라 원기를 꺾어 버리고 흥하는 나라가 어찌 있사오리까. 고금흥망의 자취를 살펴보오면 문약에 흐르고 망하지 않은 자 없사오니 태평성대라 하여 문만 숭상하옴은 멀지 않은 장래에 큰 화를 빚어 내올 줄 아옵니다. 치에서 난을 잊지 않고 난에서 치를 잊지 않사와야 나라를 태산반석의 튼튼한 자리에 올려놓는 소이인 줄로 아뢰옵니다. 개중에 불량배가 있사오면 저절로 국법이 있사오니 그런 무리로 말미암아 상무지풍을 누른다는 것은 본말을 전도하와 성명을 가리움인가 하옵니다."

유종의 우렁찬 목소리는 쩌렁쩌렁 전각을 흔드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 은사실 같은 긴 수염이 매우 분개한 듯이 푸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금지는 매우 못마땅한 듯이 칵 한번 기침을 하고 나서 목소리를 가다듬어,

"이손 유종은 소신의 아뢰온 본뜻을 잘 모르는 듯하옵니다. 소신도 결코 무를 아주 버리고 문만 취하자는 것이 아니옵니다. 문무병행이야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것이온즉 하필 이손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는 줄 아뢰옵니다. 이손은 문약이 나라를 그르친다 하오나 한무제가 문으로 백성을 피폐케 하였사오며 수양제가 문으로 나라를 잃었사오리까. 성쇠의 자취가 소소히 역사에 남았거늘 이런 사실에는 일부러 눈을 감아 버리려는 이손의 뜻이 어디 있는 줄 소신은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궁술, 검술의 모임을 연다 하셔도 될 수 있는 대로 그 규모를 줄이시고 등용의 길을 좁히심이 지당하온 줄로 아뢰옵니다."

하고 금지는 제 옆에 나란히 부복한 유종을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늙으신 왕은 성가신 듯이 고개만 좌우로 흔드시고 아무런 처분이 없으시었다. 만득하신 왕자께서 워낙 나약하시어 첫가을 바람이 불자 또 감기에 걸리어 몸져 누운 것을 생각하시고 어서 조회가 끝나서 들어가 보시고 싶으셨다.

금지는 더한층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는 그러하옵거니와 또 한마디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도 상무지풍에서 오는 폐단인 줄 아옵거니와 근래 남녀의 강기가 어지러워진 것은 참으로 통탄하올 일로 아뢰옵니다. 남녀는 국민의 기초이오라 한번 그 관계가 어지러우면 곧 골품이 불순해지는 것이온즉 어찌 작은 일이라 하오리까. 칠세에 남녀부동석이라는 뚜렷한 성훈이 있사옵거늘 심규의 처녀가 예사로 외간 남자를 대하옵고 상민천한의 자녀야 거론할 것이 못 되옵지만 한 나라의 사표가 되올 집안의 딸이 제 지체도 돌아보지 않사옵고 하향천한을 따른다는 해괴한 소문이 항간에 파다하온즉 이런 괴변이 어디 있사오리까……."

금지가 채 말을 마치기 전에 왕은 듣기 싫으시다는 듯이 파조해 버리시고 내전으로 듭시었다.

140[편집]

파조해 나오면서 여러 조관들은 힐끗힐끗 금지의 기색을 살피었다. 약삭빠르고 슬기롭기 늙은 여우와 같은 그도 오늘따라 왜 그런 주책없는 말씀을 아뢰어 필경 왕의 미타하심까지 입었을까. 행세하는 집 딸로 하향천한을 따른다는 것은 무슨 던적맞은 수작일까. 대관절 누구의 딸이 그런 짓을 저질렀던가.

딸 없는 이는 번쩍이는 호기심을 걷잡지 못하였고 딸 있는 이는 '혹시 내 딸이……' 하고 송구스러운 생각을 일으키고 집에 돌아가면 제 딸을 단단히 잡두리를 하리라고 벼르는 사람까지 있었다.

금지는 여럿의 시선을 느끼었던지 그 노리캥캥한 얼굴을 더욱 찡그려 붙이고 그 톡 불거진 눈을 해번득해번득 아래로 깔며 일부러 아칠랑아칠랑 느리게 걸어나왔다.

궁문을 다 나와서 수레에 오르려다가 말고 역시 수레에 오르려는 유종의 곁으로 왔다.

"여보 이손, 오늘은 신신치도 않은 일로 서로 다투게 되어 어심에 미안하구려. 내가 무슨 이손과 혐의가 있는 게 아니고……."

저는 푸느라고 하는 말인지 모르지마는 실룩실룩 떠는 그 입술은 감추지를 못하였다.

"금시중,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우리가 국사를 가지고 서로 다툰 것이지 사삿혐의야 왜 있겠단 말이오. 공과 사를 구별을 못 한다면 신자 된 도리에 어그러질 것 아니오."

유종은 독사나 옆에 온 듯 지겨운 듯이 한 걸음 물러서며 아까 머리끝까지 치받치었던 분노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양 그 범눈썹이 거슬러 일어섰다.

"우리가 한 조정에 같이 선 지 어느덧 사십 년, 공사고 사사 간에 의좋게 지내면 더욱 좋을 것 아니오, 허허."

하고 금지는 가장 너그러운 척을 하며 지어서 웃어 보이었다.

"그야 다 이를 말이오. 그러나 사람이란 소견이 다 각각이라 비록 이 흰 머리가 베어질지언정 어찌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어이 임금을 속일 수야 있단 말이오."

유종의 말씨는 종시 풀리지 않았다.

"조정에서 하던 의논을 이 길거리에서 다시 되풀이할 거야 있소. 우리 사삿얘기나 합시다. 참 영애의 혼사는 작정이 되셨다니 고맙소이다."

"시중이 고마울 거야 무엇 있겠소. 금량상의 집안으로 보내게 되었다오."

유종은 더욱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눈을 부릅떠 금지를 노려보았다.

이자가 어전에서 그런 무엄한 소리를 꺼낸 것이 반은 제 딸을 빈정거림인 줄 몰라들을 유종이가 아니었다. 규중 처녀가 외간 남자를 예사로 대한다고 꼬집었지만 벌써 혼인이 다 된 장래 신랑과 신부가 제 부모 보는 앞에서 만나 보는 것이 무엇이 예절에 어그러진단 말인가. 그런 것은 천번 만번을 이렁성거린들 무슨 흉이 될 것이냐.

'네가 아무리 그 독사 같은 주둥아리를 놀려 보아야 도리어 왕의 찡그심을 받을 뿐 아니냐.'

"어 그 참 잘된 일이오. 그 혼사가 올곧게 된다면야……."

금지의 입술에는 찬웃음이 흘렀다.

"날짜까지 다 정해 놓은 혼사가 올곧게 안 된다는 것은 또 어떻게 하시는 말인지."

유종은 나이가 젊었으면 허리에 찬 보도를 빼어 들 뻔하였다. 이런 놈을 한 칼에 두 동강이를 내지 못하고 또 누구를 벨 것이냐.

"그러하시겠지. 정해 놓은 혼인이야 안 될 리가 왜 있겠소. 대관절 영애의 허락이나 맡으셨소."

금지의 말은 갈수록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허락을 맡다니 어찌 하는 소리요."

유종의 화는 더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손은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려. 온 세상이 다 아는 불국사 사단도 모르는구려."

"불국사 사단?"

유종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듣고 채쳐 물었다.

"여보 이손, 우리나라 법에 행실 잃은 계집애 처치를 어떻게 하는지 이손도 아시겠지."

"불에 태워 죽이는 거야 누가 모른단 말이오."

"아시기는 잘 아오마는 행하기는 어려우실걸."

"안 다음에야 왜 행하지를 못한단 말이오. 거혼한 혐의로 시중이 끝끝내 우리 부녀를 뜯는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소이다."

"어, 거혼한 혐의라니? 그런 신부는 가져갑시사고 절을 해도 내 쪽에서 거혼을 할 테요. 세상에 어디 사내가 없어서 하필 석수장이를……."

유종은 금지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점점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웬일인지 차차 분함만 치받쳐올랐다.

"석수장이란 또 웬말인고."

"아따 그렇게 못 알아들으시겠거든 영애에게 좀 자세 물어 보구려. 등하불명이란 이손 같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