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41장~6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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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편집]

"병인의 먹음먹이는 뭐를 가져가던."

주만은 털이를 데리고 자기네의 처소로 돌아오며 물었다.

"자세히는 안 봤지만 뭐 별것 있겠습니까."

"자세히 좀 보아 둘 걸 그랬지."

"얼른 보기에 고사리나물, 두부지짐 나부랭이 같더군요."

"그래 국물 같은 것도 없더란 말이냐."

"글녓시오. 뚜껑 덮은 것이 주발 하나일 적엔 아마 밥 한 그릇만 동그랗게 놓인 것 같더군요."

"병인이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주만은 눈썹을 찡긴다.

"바로 엊저녁에 혼절까지 한 어른이 밥 자시기가 어렵겠습지요. 더구나 그 모래알같이 보실보실한 밥을."

"그래 죽이나 미음 같은 것을 좀 쑤어 드렸으면 어떻단 말이냐."

주만은 중들의 몰인정한 것을 분개한다.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 많은 식구에 여간 정성으로 밥 따로 죽 따로 짓겠습니까. 먹든지 말든지 밥 한 상만 올리면 저희들 도리는 다한 줄로 아는 모양이니. 차돌의 말을 들으면, 이번에 까무러치신 것만 해도 연 사흘 밤낮으로 일을 하시는데 어느 뉘 하나 물 한 모금 정성으로 권하는 이가 없는 탓이라니깝시오. 딱한 노릇입지요."

"어쩌면 그렇게 인정 사정들이 없을까."

주만은 탄식하다가,

"원 찬이나 갖추 있는지."

하고 다시금 걱정을 한다.

"찬인들 오죽해요. 사내들 손으로 하는 것이 망측합지요. 자세히 안 봐도 뻔합지요. 왜 아가씨는 못 잡수셔 보셨습니까. 댁에서 해내온 찬합이 아니면 어디 한 술이나 뜨실 법해요. 이손 댁 행차시니 저희들 있는 솜씨를 다 내어 만든 것도 그 꼴인뎁시오."

주만은 과연 네 말이 옳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도 어제 낮에는 처음 먹는 소찬이 해롭지 않아서 별식으로 먹을 수 있었지만, 두 끼니부터 벌써 생목이 꼬이던 것을 생각하였다.

"이런 데서 병이 나면 첫째 음식이 아찔이겠는뎁시오."

털이도 제 아가씨의 속을 알아차리고 걱정하는 얼굴을 들었다.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니."

"글녓시오. 찬합이라도 좀 갖다 드렸으면 좋으련만 마님이 아시면 걱정을 않으실지."

"앓는 사람 갖다 주는 걸 마님인들 왜 걱정을 하시겠니."

"웬걸입시오. 석수장이쯤 앓는데 찬합을 내다 주었다 해보십시오. 벼락이 나리실걸 뭐."

털이는 실로 무심코 이 말이 불쑥 나온 것이다. 제 아가씨가 치를 떠는 석수장이를 언감생심인들 얕잡아볼 엄두도 내지 않은 것이로되 설왕설래에 말이 잠시 잠깐 미끌어진 것이다.

그러나 벼락은 마님보담 아가씨한테로부터 먼저 떨어졌다.

"석수장이, 석수장이! 석수장이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주만의 성난 목소리는 벼락과 같이 털이의 귀에 떨어졌다. 그 얼굴은 꽃불을 담아 부은 듯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대번에 목청이 꺽꺽하게 쉬어진다. 찢어질 듯이 아늘아늘해진 입술이 부들부들 떤다. 제 아가씨가 노발대발하는 것도 여러 번 겪은 털이지만 이렇게 역정이 머리끝까지 오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요 방정맞은 년아, 요 매친 년아, 이년이 왜 입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릴꼬."

털이는 제가 저를 꾸짖고 제 입을 쥐어지르고 싶었다.

"아닙시오, 아가씨. 아닙시오, 아가씨. 저 저어."

하고 털이는 발뺌을 하느라고 곱이 끼었으나 얼른 그럴듯한 말을 돌려 댈 수도 없어 말끝은 더듬더듬한다.

주만은 한번 뇌까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간다.

"아가씨 아가씨 구슬아가씨, 쇤네 좀 봅시오, 쇤네 좀 봅시오."

털이는 주만을 쫓아가느라고 열고가 났다.

"쇤네 좀 봅시오. 조, 좋은 수가 있는걸입시오. 쇠, 쇤네 좀 봅시오."

아무리 털이가 가쁘게 불러도 주만은 좀처럼 돌아보지를 않았다. 마침내 죽여 줍시사 하는 듯이 털이는 주만의 팔뚝을 부여잡고 늘어졌다.

주만은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돌아보며 상긋 웃는다. 그 웃음은 쓰고 차다. 그만 말에 내가 그렇게 화를 내다니 너보다 내가 그르다 하는 듯하였다. 그 붉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서 철색이 돈다.

"저, 아가씨 조, 좋은 수가 있습니다. 찬합도 찬합이지만 앓는 이에게는 좁쌀 미음이 첫짼뎁시오. 쇤네가 지금 당장이라도 댁에를 뛰어들어가서 쥐도 새도 몰래 그 미음을 끓여 가지고 나왔으면 어떨깝시오."

주만은 어느덧 아까의 흥분은 사라졌고, 털이의 장공속죄한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였다.

42[편집]

주만과 털이는 술시가 훨씬 겨워서야 사초부인의 잠든 틈을 타가지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주만의 급한 분수로는 한시가 바빴지만, 털이 혼자만 보내자니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고, 둘이 한꺼번에 몸을 빼자면 이목이 번다한 낮보담 암만해도 밤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털이는 말 한번 실수한 죄로 더 상냥스럽게 더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고 모든 일을 아귀가 맞도록 꾸며 놓았다. 말과 수레 구종들을 쩍말없도록 얼러맞추어 미리 말 안장을 지어 두도록 부탁도 해놓고 초와 초롱까지 준비를 하였다.

불국사에서 상서골까지 가자면 이십 리 길도 넘었다.

주만은 어려서부터 말을 타본 솜씨라 말고삐를 손수 거사려 잡고 털걱털걱 등자를 굴리는 양이 조금도 서툴지 않았다.

으슥한 형제산 기슭을 돌 제 털이는 머리끝이 쭈볏쭈볏하고 찬 소름이 끼치었지만, 주만은 구슬 채찍을 번뜩여 말을 채치며 부랴사랴 닫는다. 초롱을 들고 앞장을 섰던 털이가 순식간에 뒤로 뚝 떨어져서, 펄펄 날리는 주만의 옷자락이 눈앞에 아물아물해진다.

털이가 기를 쓰고 말을 채질하여 따라가느라고 애를 썼으나, 말도 털이쯤은 업신여기는지 제멋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뛸 뿐이요, 도무지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

"아가씨, 아가씨! 제발 좀 천천히 갑시오. 쇤네가 불을 들었으니 쇤네가 앞장을 서야 될 것 아닙시오."

털이는 죽을 상을 하고 소리소리 불렀다.

주만은 털이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제 동행이 있는 것을 깨달은 듯 펄펄 뛰는 말을 멈추었다. 말은 한번 곤두섰다가 걸음을 멈추는데 화화 내뿜는 숨길이 흰 안개처럼 달빛에 서리인다.

"얘 얼핏 좀 오지를 못하니. 굼벵이보담도 더 꿈지럭거리는구나."

주만은 털이를 돌아보고 웃는다.

"애구 죽겠습니다. 애구 죽겠습니다. 빌어먹을 말이 세상 말을 들어얍지요."

털이는 숨이 턱에 닿으면서도 쫑쫑 말대답은 잊지를 않는다.

"제가 탈 줄 모른다고는 않고 그래도 말 탓만 하는구나."

주만은, 말등에서 미끄러져서 말 궁둥이 쪽에 매어달린 듯이 앉아있는 털이의 어색한 모양을 보고 우스워서 못 견디었다.

"파리나 모기 모양으로 차라리 말꼬리에 붙어 가는 것이 나을 것을, 오호호."

"수레채를 잡고 걸어갈지언정 말이란 세상 못 탈 것인뎁시오."

털이는 빡빡이 흐른 땀을 소맷자락으로 문지르며,

"초롱은 괜히 준비를 했는뎁시오. 거추장만 스럽고, 아가씨는 불 든 년을 뒤다 세우고 그냥 살같이 달아나시니."

"딴은 초롱이 아무 소용이 없겠다. 달이 이렇게 밝으니 접어 두는 것도 좋겠다."

주만의 말마따나 과연 달은 밝았다. 이내 자욱한 십팔만 호 위로 달빛은 물 위의 기름처럼 빙빙 도는 듯하였지만, 솟을추녀〔飛畯〕에 아롱새긴 금박이와 은박이가 번쩍번쩍하는 것까지 완연히 보이었다.

길가에 인적은 끊어진 지 오래였지만 어디선지 와글와글하는 소리가 잉잉 귀를 울리고 훈훈한 사람의 훈기가 들 밖 공기를 마시고 오는 신선한 코 안으로 와락 안긴다. 그들은 벌써 서울 한 모서리에 들어선 것이다.

사천왕사의 긴 담을 돌아들자 주만과 털이는 달리던 말을 천천히 몰며 가쁜 숨길을 돌리었다. 인제 햇님다리만 건너서면 집을 다 온 것이다.

주만이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었다. 그러고 털이를 보며,

"얘 우리 어디로 들어갈까. 앞대문으로 들어가면 왁자지껄하지 않겠니."

"글녓시오. 아닌밤중에 달려들면 하인들도 무슨 큰일이나 난 줄 알고 놀랄걸입시오. 더구나 대감께서 아시고 보면 꾸중을 않으실깝시오."

"그야 절에 갔다가 온다고 여쭈면 그만이겠지만, 아무튼 별당 뒷문으로 돌아 볼까."

"글녓시오. 거기도 필경 문이 잠겼을 게고 원체 안과 동안이 뜨니 부르는 소리를 잘 알아들을깝시오. 잠이 들면 다 죽은걸입시오. 원 잠귀들이 어두워서."

"그래도 뒤를 돌아 보았다가 정 안 깨거든 하는 수 없이 앞대문으로 다시 가서 불러 볼밖에."

주종은 이렇게 작정을 하고 뒤꼍으로 돌았다. 이번에는 앞장을 서서 가던 털이가 별안간,

"애구, 저것 봅시오, 저것."

죽는 소리를 하고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을 하였다.

43[편집]

"뭘 보고 그렇게 놀라니."

주만은 털이의 놀라는 소리를 듣고 말을 채쳐 가까이 오며 물었다.

"저, 저걸 봅시오. 저기 저 별당 담 위를. 아이 무서, 아이 무서."

하고 털이는 말고삐 잡은 손을 덜덜 떨며 말등에 착 달라붙은 듯이 엎드리고 머리 위로 손가락을 내어 허공을 가리킨다.

"얘, 뭐냐. 똑바로 가리켜라. 뭘 그렇게 겁을 낸단 말이냐."

"아이 쇤네는 무서, 무서."

하고 말등을 파고들어갈 듯이 더욱 머리를 수그린다.

주만은 담 위를 여기저기 훑어보았다. 환한 달빛 아래, 바로 자기 방에서 거의 맞은편이 될 만한 담 위에 웬 사내가 걸터앉아서 담에다가 배를 깔고 엎드렸고 그 밑에는 웬 헙수룩한 자가 왔다갔다하는 꼴이 보이었다.

처음엔 주만이도 머리끝이 쭈뼛하였지만, 담 위에 걸타고 있는 자의 해가지고 있는 꼴이 어떻게 어색한지 도무지 무서운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아가씨 아가씨 보셔곕시오. 그게 무엡시오."

털이는 이내 고개를 못 쳐들고 떨면서 묻는다.

"아마 도적놈들인가 보다."

하고 주만은 말을 채서 껑청 뛰어 한 걸음 달려들며,

"도적이야, 도적야."

소리를 벽력같이 질렀다.

이 호통을 듣자 담을 걸탄 위인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리를 폈다가 굽혔다가 담머리를 얼싸안았다가 놓았다가 쩔쩔맨다. 담 밖에 처진 한 발을 담 안으로 끌어들이더니 다시 두 다리를 다 담 밖으로 끄집어내었다가 얼핏 뛰어내려오지도 못하고 디룽디룽 발버둥을 친다.

찢어지게 밝은 달빛에 그 허둥거리는 광경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주만의 눈 안에 들어왔다.

주만은 처음 도적이야 외칠 때엔 그래도 가슴이 약간 떨리었지만, 그 광경을 보니 한편으로 우습고 한편으로 장난해 볼 짓궂은 생각이 슬며시 일어났다. 말을 또 한번 채쳐 몰고,

"도적이야, 도적야."

부르짖었다.

디룽디룽 매어달린 다리는 더욱 버둥거린다.

온 동리는 첫잠이 들었는지 죽은 듯이 고요하고, 집 안에서도 아무 인기척이 나지를 않았다.

담 밑에서 왔다갔다하던 자가 마침내 담 위에 있는 자의 버둥거리는 발목을 잡아 주어도 담 위에 올랐던 위인은 좀처럼 내려뛰지를 못하고 담머리를 할퀴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기만 한다.

"세상에 별 우스꽝스러운 도적놈도 다 있구나. 저렇게 제가 겁부터 집어먹고 어째 남의 집을 넘어 들어갈 생각을 하였을꼬."

주만은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와 견딜 수 없었다. 더구나 더 우습기는 그 도적놈의 차림차림이었다. 달빛에도 웃옷이 윤이 질질 흐르는 것을 보면 한다하는 당나라 비단이요, 게다가 복두를 제켜 쓰고 제 딴에는 한창 거드럭거리느라고 공작꼬리까지 뻗쳐 꽂은 것이 정말 가관이었다. 그 버둥버둥하는 가죽목화도 가소로웠다.

'제가 훔친 것은 다 주워 입고 나온 게로구나.'

주만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더욱 허리를 분질렀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도적놈일수록 번드르르하게 꾸며야 할는지 모른다. 그래야 남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아니냐. 그렇지만 담을 안고 저렇게 짓뭉개고 비벼 놓았으니 인제 어디를 달아난들 더욱 유표하지 않을까.

예라, 또 한번 혼뗌을 해주어야지 하고 주만은 더욱 목소리를 가다듬어,

"도적이야!"

또 외쳤다. 이 세 번째 호통이 떨어지자 그 버둥거리던 뚱딴지 다리도 쿵 하고 땅바닥에 떨어진다.

"털아, 털아, 저걸 구경 좀 해라. 저까짓 도적놈이 무에 무섭니."

그제야 털이도 빠끔히 눈을 내놓고, 위에서 떨어진 놈과 밑에서 받는 놈이 서로 얼싸안고 재주를 넘는 것을 보았다.

주만은 한층 소리를 높여 털이에게 일렀다.

"너 냉큼 앞대문으로 돌아가서 하인들을 깨워라. 저놈들을 모두 잡아가게."

이 호령을 듣자, 담 밑에 있던 도적놈이 쏜살같이 이리로 달려온다. 그것을 보더니, 털이는 다시 얼굴을 말등에 비비대며,

"에구머니이, 에구머니이, 도적이야, 도적이야."

하고 악을 악을 쓴다. 그 도적놈은 주만의 말머리 앞 한두 간통 떨어진 데 와서 그대로 넙죽이 엎드린다.

주만도 그 도적놈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몸을 흠칫하였으나 급기야 제 말머리 앞에 엎드리는 것을 보고,

'세상에 이렇게 지순차순한 도적놈도 있을까.'

하고 안심을 하였다. 도적놈은 머리를 조아리며,

"그저 살려만 줍시오. 죽을 죄를 지었사오나 제발 종용히 처분을 해줍시오. 구슬아가씨."

도적놈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주만이지만 도적놈이 제 이름을 부르는 데는 아니 놀랄 수 없었다.

44[편집]

도적놈이 제 이름을 부르는 데 주만은 일변 놀랍고 일변 호기심이 움직였다.

"너는 웬 놈이관데 내 이름을 안단 말이냐."

"녜, 그저 황송하오나 이손 유종 댁 외동따님 구슬아가씨를 아무리 소인 같은 무된 눈인들 몰라 뵈올 리야 있사오리까. 소인은 결단코 도적놈이 아니옵고……."

"도적놈이 아니라께. 아닌밤중에 남의 담장을 넘는 놈들이 도적놈이 아니라니 될 뻔이나 한 수작이냐."

"녜, 그저 지당하신 분부시오나, 대매에 물고가 나는 한이 있사와도 소인은 결단코 도적놈은 아니옵고……."

하고 제 본색을 까바칠까말까 망설이면서 먼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제 동행을 힐끗힐끗 돌아다본다.

주만은 궁금증이 더럭 났다. 그 말씨와 거동으로 보아 딴은 행내기 도적놈은 아닌 듯도 하였다.

"대관절 네가 누구란 말이냐."

"녜, 소인 같은 놈의 성명을 여쭈어도 고귀하신 아가씨께서 알아들으실 리 만무하옵고 그저 살려 주시는 셈치시고 제발 덕분에 털이를 보내시어 댁 하인을랑 깨우지 마시옵소서."

털이 이름까지 아는 것은 더욱 신기하였다. 도적놈이 땅바닥에 엎디어 비대발괄할 때부터 털이는 겨우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제 아가씨 곁으로 바싹 다가들어 진기한 도적놈의 하소연을 듣고 있다가 도적놈이 제 이름을 부르는 데 귀가 번쩍 띄었다. 인제는 아까 콩만하던 간이 주먹만큼 커져서 말을 몰아 주만의 앞을 막아서며,

"이 녀석, 너는 웬 녀석이기에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하고 제법 호령조로 묻는다.

땅바닥에 이마를 비비대고 있던 도적놈은 털이가 앞을 나서니 고개를 번쩍 들어 그 눈딱지를 사납게 굴리면서 그래도 말씨만은 그렇게 거칠지 아니하였다.

"아무리 이 지경이 되었기로 너까지 이 녀석 저 녀석 한단 말이냐. 욕지거리를 못 하면 말을 못 하느냐."

"도적놈에게 누구는 욕을 못 할꼬, 매친 녀석."

"어 그렇게 입을 마구 놀리는 법이 아니래도."

"법! 네까짓 녀석이 법을 다 찾는단 말이냐. 아이 우스워라. 도적놈이 법을 찾으니 참 귓구멍이 막힐 노릇이다. 그래 법을 아는 녀석이 밤중에 남의 담을 뛰어넘어."

"어, 도적놈이 아니래도 또 그러네. 제발 좀 아가리를 닫치고 아가씨나 모시고 들어가게."

"이 녀석이 그래도 말버릇을 못 고치고 하게는 또 누구더러 하게야. 내 그럼 앞대문으로 돌아가서 소리를 지를 테다."

털이는 아주 기고만장이다.

"얘 아서라, 아서. 그건 제발 좀 말아 다오."

"이 녀석이 그래도 반말지거리야. 도적놈이 아니거든 어서 네 명색이나 대라."

도적놈은 털이와 실랑이를 해야 별 소득이 없을 줄 깨달았는지 다시 주만에게 향하여,

"아가씨 구슬아가씨, 소인은 물러갑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 몸을 일으켜 꽁무니를 빼려 하였다.

"가기는 어디를 간단 말이냐. 어디 가게 되는가 두고 보자."

털이는 가로막고 정말 말을 돌려 앞대문으로 돌아갈 기세를 보이었다. 도적놈은 뛰어와서 털이의 말고삐에 매어달렸다.

"아가씨 털이아가씨, 제발 좀 살려 주. 허허, 내가 이 무슨 죽을 수란 말인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웃는다.

"네깐 녀석에게 누가 아가씨 소리를 듣고 싶다더냐. 네 명색이나 일러라."

하고 나서 주만을 돌아다보고,

"암만해도 하인들을 깨울 수밖에 없습지요. 이런 녀석들은 버릇을 가르쳐 놓아얍지요."

동의를 구하였다. 주만이도 하는 양을 보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자 도적놈은 털이를 흘겨보고 뇌까리었다.

"쉬쉬 말이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주둥아리를 조심해라."

하고 제 동행을 눈으로 가리키며 눈껌쩍이를 해보이었다.

"쉬쉬? 이 녀석, 어디 뱀이 지나가느냐. 말이란 도적놈 보고 도적놈이라고 하는 게란다."

털이도 지지 않는다. 도적놈은 곱다랗게 놓여 가기는 이왕 틀린 줄 알고 제 본색을 알리는 것이 도리어 나을 줄 깨달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태도를 고쳐 털이를 꾸짖었다.

"이년, 요망스러운 년. 쉬쉬, 이 행차가 어느 행차시라고. 금지 금시중 댁 서방님 행차시다. 어느 존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한번 뽐내 보이었다.

"금시중 댁 서방님?"

털이는 잠깐 놀라는 눈치였으나,

"오 그렇더냐. 그러면 진작 그런 말을 할 게지, 미련한 녀석."

하고 도리어 나무란다.

주만은 놀라지도 않았다. 아까부터 기연가미연가 생각하던 것이 바로 맞은 줄 알았을 뿐이었다.

45[편집]

"쉬쉬, 금시중 댁 서방님 행차시다."

고두쇠는 털이의 힐난에 견디다 못하여 필경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저도 하도 창피한 일인 줄 알기 때문에 웬만하면 비대발괄로 어름어름해 넘겨서 이번 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감춰 버리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만의 주종의 태도로 보아 호락호락 넘어갈 것도 같지 않고 끝끝내 숨기는 것이 도리어 불리할 줄 알자 그냥 실토를 해버린 것이었다.

"금시중 댁 서방님 행차가 안녕도 하시군요."

털이는 또 주만을 돌아보며 깔깔댄다. 이 틈에 고두쇠는 부리나케 금성에게로 뛰어가서 제 상전의 옷에 묻은 흙을 털고 구김살을 펴고 말이 못된 옷매무새를 바로잡느라고 한동안 부산하더니 제 주인을 옹위하고 떡 버티고 서서 마치 적진이나 노리는 것처럼 이쪽을 향해 마주본다.

주만은 항복한 적장을 보러 가듯 말을 놓아 이 꼴사나운 손들 앞으로 천천히 몰아갔다.

고두쇠의 부축으로 일어서기는 섰으나 다친 데가 많은 듯 끙끙 안간힘을 주고 있던 금성은 천만 뜻밖에 주만이가 저를 향해 오는 것을 보자 몸둘 곳을 모르는 듯 엉덩이를 엉거주춤한 채 눈을 두리번두리번 입을 실룩거렸으나, 그래도 '행여나' 하는 생각에 까닭 없이 마음은 헤벌어졌다.

주만의 말머리가 거의 금성의 코앞에 닿을 만큼이나 되어 딱 걸음을 멈추었다. 털이가 그 뒤를 따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어른이 금시중 댁 공자시냐."

주만은 차마 맞대 놓고 묻지는 않고, 금성을 눈으로 가리키며 털이에게 묻는다.

털이가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고두쇠가 가로채었다.

"녜 그렇습니다. 이 어른이 바로 금시중 댁 공자 한림학사 어른이신 줄로 여쭙니다."

주만은 마치 적장에게 경의를 표하듯 마상에서 보일 둥 말 둥 허리를 굽히고,

"한림학사님, 이 밤중에 어찌한 출입이시던가요."

금성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묻는다.

금성은 주만의 시선이 마치 햇발처럼 눈이 부시었던지 눈을 몇 번 껌벅껌벅하고는 무슨 말인지 입 안에서 웅얼웅얼 대꾸를 한다.

"그 어른이 뭐라고 하시느냐. 네가 대신 일러라."

주만은 고두쇠를 보고 묻는다. 그런 병신성스러운 위인하고는 말도 주고받기 싫다는 듯이.

고두쇠도 제 벙거지 위를 긁적긁적하며,

"소인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사와요."

하고 무참해한다.

"응, 너도 잘 못 알아듣겠느냐. 그러면 고만두어라마는 이후엘랑 서방님을 모시고 다니거든 대문이 어디고 담장이 어디라는 것을 똑똑히 가르쳐 드려라."

주만은 침이라도 튀 배앝는 듯 한마디 말을 남기고 곧 말머리를 돌리었다. 말이 몇 자국 굽을 떼어놓을 때 등뒤에서,

"구슬아기, 구슬아기님."

하고 턱 갈라진 목소리가 들린다.

"한림학사님, 무슨 말씀이시오."

주만은 마상에서 고개만 잠깐 돌이켜 물었다. 금성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이마에 기름땀이 맺힌 것으로 보아 그는 이 한번 부름이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웠던 것을 가리킨다.

"왜 남을 불러 놓고 말이 없으시오. 딱한지고."

주만은 금성이가 어물어물하고만 있는 것을 보고 또 한마디 채쳐 물었다.

"구슬아기, 구슬아기님, 마, 말께서 잠깐만 내리어 주었으면."

금성은 더듬더듬하면서도 이번에는 가까스로 알아들을 만큼 말을 얼버무린다.

"말께서 내려라! 그럴듯도 하신 말씀이오마는 금공자는 내 집 담의 손님인지는 모르나 내 손님은 아니니 하실 말씀이 계시면 마상에서 듣지요."

"나, 나, 구슬아기가 보, 보고 싶어서……."

하고 금성은 쫓겨온 사람 모양으로 숨을 헐레벌떡거린다.

"오호호, 내가 보고 싶으시어. 오, 옳지 그래서 내 집 담 위에 올라앉으셨군, 오호호."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주만은 허리를 분질렀다. 그 웃음 소리는 달 빗긴 으슥한 길 위에 구슬같이 구을며 흩어졌다.

"남의 집 규중처녀를 보시고 싶다는 것부터 모를 말씀. 더구나 아닌밤중에 찾는 법도 없을 것이고, 설령 찾더라도 어엿한 대문이 있고 객실이 있거든 하인소시에 담장을 넘으니 그게 무슨 꼴이란 말씀이오."

주인은 손님을 꾸짖는 듯 타일렀다.

"빨리 댁으로 돌아가시고 이후엘랑 찾아오실 생각은 꿈에도 내지 마시기오."

이만만 하면 발을 돌릴 줄 알았던 금성은 뜻밖에 추근추근하게 덤벼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 객실로 갑시다."

금성은 볼멘소리까지 하고 말낱도 차차 분명해 온다.

46[편집]

"인제 새삼스럽게 객실로 가자, 오호호."

주만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느라고 손등으로 입을 가리었다.

"처음에는 담을 넘고 나중에는 객실로 가는 것이 어느 오랑캐 예법인가요. 그것도 상주국 당나라에 가시어 배워 가지고 나오신 예법인가요, 오호호."

주만은 내 말이 너무 지나치는구나 하면서 슬쩍 금성의 기색을 살피었다. 아무리 얼굴 두께가 쇠가죽보담 두껍다 하더라도 이만만 해두면 코를 싸쥐고 물러나리라 하였었다. 저와 혼인말이 왔다갔다하는 처녀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였으니 사내다운 사내라면 발연변색하고 제 목을 찔러도 시원하지 않으리라 하였었다. 하다못해 혼담이야 끊어지고 말리라 하였었다. 다른 것이야 어디로 갔든지 혼담만 다시 이렁성거리지 못하게 되어도 만번 다행이라 하였었다.

그러나 금성은 일순간 눈에 뜨일락말락 입 가장자리를 몇 번 실룩실룩하였을 뿐이고 물러날 사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까보다도 오히려 말문이 터지는 것 같다.

"객실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야 처음부터 객실로 가다뿐이오. 왜 괴롭고 귀찮은 담을 넘으려 들겠소. 이러한 창피를 보는 것도 지극한 사랑의 탓. 구슬아기, 구슬아기, 살짝 마음을 좀 돌리시구려."

던적맞은 수작까지 뻔뻔스럽게 붙이고 제법 대담하게 주만을 똑바로 본다.

주만은 어마 싶었다. 그 꼴에 어디서 배워 온 억설인고. 더러운 말뿐인고. 아까는 북받치는 웃음을 참을 수 없더니 인제는 오장육부가 뒤틀려 올라왔다. 하등 벌레와 같이 한두 동강쯤 내었다고 꿈지럭거리지 않을 그가 아니다. 아무리 뼈가 저린 말이라도 말만으로는 부끄럼을 알 그가 아니다. 염의를 차릴 그가 아니다. 먼빛으로 한두 번 보아도 그 외양부터 신신치 않더니 그 속은 더더군다나 어이가 없었다. 이런 위인하고 빈말로라도 혼담이 있었던 것만 생각해도 찬 소름이 끼치었다.

"사랑이고 객실이고 인제는 때가 늦었소. 나도 볼일이 급하니 한림학사님도 어서 돌아를 가시구려."

"사랑에 밤낮을 가리리요. 일편명월을 등촉삼아 여기서 새고 간들 어떠리요."

말씨에 멋까지 부리고 그 콧소리로 신이 나서 읊조린다.

주만은 지겨운 뱀이나 본 것처럼 불현듯 말머리를 돌려서 털이를 보고,

"얘, 어서 앞대문으로 가자. 여기는 밤이슬을 맞으며 새고 가는 손님이 계시단다."

"녜, 쇤네가 그럼 얼핏 가서 하인청을 혼동을 시킵지요."

하고 털이가 총총 말을 놓아 가려 할 제 고두쇠는 껑청 뛰어와 말머리에 막아선다.

"이 녀석이 왜 또 이래, 이 녀석이 왜 또 이래."

털이는 악을 버럭버럭 쓰며 말을 뺑뺑 돌리고 있을 제, 금성은 주만의 말고삐를 잡고 늘어진다.

"구슬아기, 구슬아기, 사람의 괄시를 그리 마오. 정다운 부부로 한평생을 지낼 우리가 아니오."

금성은 곤드레만드레하며 말갈기에 이마를 대었다 떼었다 한다.

그는 담을 걸타고 앉을 때 워낙 겁을 집어먹어서 술이 얼마쯤 깨었고, 도둑야 호통에 혼뗌을 하자 주기가 간 곳 없이 사라진 듯하더니,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취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부부란 말에 주만은 몸서리가 쳤다.

"부부? 오호호. 누가 우리가 부부가 된답디까. 주만이 백 번 죽어도 밤이슬 맞는 한림학사의 아내는 안 될 터이니 염려 놓으시오."

하고 주만은 홱 고삐를 잡아치며 힘있게 채찍을 갈기매 말은 깜짝 놀라 곤두서더니 흐르렁흐르렁 콧소리를 치며 뛰어닫는다.

말고삐를 쥐고 있던 금성은 한 두어 간통 땅바닥에 질질 끌리며 따라가다가 고삐를 탁 놓자 그대로 곤두라져서 디굴디굴 굴렀다. 땅바닥을 짚고 가까스로 일어앉아 개개 풀린 눈으로 주만의 주종이 앞 대문으로 닫는 양을 멀거니 바라보며,

"얘, 매정하구나."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나서 무너지는 듯이 그 자리에 다시 쓰러져버렸다.

털이를 잡다가 놓친 고두쇠는 창황히 뛰어와서 금성을 일으키고,

"이게 무슨 꼴입니까. 어서 가십시다, 어서. 만일 이손 댁 하인들이 우 몰려나오면 이런 창피가 어디 있겠습니까."

성화같이 재촉을 하였다.

"그래 가자, 가. 내 아내 노릇은 죽어도 않겠다? 어디 두고 보자."

금성은 주만의 간 곳을 노려보았다.

47[편집]

금성의 주종이 주만과 털이에게 못 당할 망신을 당하고 돌아간 후 사흘 만에 시중 금지는 밤늦게 이손 유종을 찾았다.

"금시중 이 밤에 웬일이시오."

유종은 이 뜻밖의 손님을 맞아들이며 의아해한다.

"우리 둘 사이에 밤늦게 찾으면 어떠하단 말씀이오."

손님은 매우 다정한 듯, 다정한 탓에 매우 노여운 듯 주인의 인사에 티를 뜯는다.

"밤늦게 못 찾을 우리 사이야 아니지만 시중이 이런 어려운 출입을 하실 줄이야 정말 생각 밖이구려, 허허."

유종은 바른 대로 쏘고 껄껄 웃었다.

둘이 한 나이나 젊었을 적에는 다 같이 화랑으로 돌아다니면서 같은 풍월당에서 노래도 읊조리고 활쏘기도 겨루며 술을 나누기도 하였고 그 후 한 조정에 서서 피차에 귀밑 털이 희어졌으니 바이 안 친한 터수도 아니지만 속으로는 맞지 않는 두 사이였다.

금지는 철저한 당학파요, 유종은 어디까지 국선도를 숭상하는 터이니 주의부터 서로 달랐다.

금시중은 얼굴빛이 노리캥캥한데다가 수염도 없어 얼른 보면 고자로 속게 되었는데 이손 유종은 긴 수염이 은사실처럼 늘어지고 너그러운 두 뺨에 혈색도 좋으니 풍신조차 정반대였다. 더구나 하나는 깐깐하고 앙큼스럽고, 하나는 괄괄하고 호방하여 두 성격이 아주 틀렸다.

이마적 해서는 공석 이외엔 서로 만나는 일이 없었거늘 벌써 술시가 지난 밤중에 우정 찾아온 것은 유종으로 괴이쩍게 아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손께 별다른 향념이 늘 있지마는 이손께서야 나 같은 위인을 어디 친구로 아셔야지."

"그게 무슨 말씀이오. 소홀은 내 천성이라 예의범절을 모르는 것을 과히 책망 마시오."

"그렇게 말씀하면 내 말이 지나친 듯 도리어 미안하오. 그것은 다 희담이고 오늘 저녁 밥을 먹고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여간 밝지를 않더구려. 그래 문득 이손 생각이 간절하단 말이지. 소시적에 같이 활쏘기 말달리기 칼겨루기 하던 생각이 불현듯 나는구려. 주사청루에서 술잔을 주고받고 한 계집을 다투던 생각까지 난단 말이오, 허허."

하고 감구지회를 이기지 못하는 눈치로 주인을 바라본다.

"시중의 말씀을 듣고 보니 어릴 적 지낸 일이 꿈결같이 눈앞에 떠오르는구려. 엊그제 소년이러니 어느덧 귀밑에 흰 털이 웬일인지. 몇 번 창상에 옛 친구도 많이 없어지고, 인제 그때 친구로는 과연 시중과 나만 남았나 보오."

손님의 말에 주인은 진정으로 감동된 듯 옛 회포를 자아내는 것 같다.

"그래 주고(酒庫)를 뒤져 보니 마침 당나라에서 내온 소흥주 한 병이 남았기에 그대로 꿰어차고 옛 친구를 찾아온 것이오."

하고 금지는,

"여봐라, 고두쇠야."

하고 부른다.

고두쇠는 제 얼굴 보이기를 매우 꺼리는 듯 거의 땅에 닿도록 고개를 빠뜨리고 두 손으로 술병만 추켜들어 받들어 올린다. 그것은 위가 빨고 아랫배가 볼록한 담회색 바탕에 꽃무늬를 올린 사기화병이었다.

"어, 병부터 진기하군. 밤중에 찾아 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이런 진주(珍酒)까지 선사를 하시니."

휘황한 촛불 아래 그 둥둥 뜨는 듯한 꽃무늬를 바라보며 유종은 감탄한다.

"당나라에서는 술도 술이려니와 그 술을 담는 병도 가지각색, 여간 공을 들이지 않은 모양이니 토광인중에 딴은 대국이 다릅니다. 이까짓 것쯤이야 출 만한 것도 못 되지만."

금지는 만족한 웃음을 띄우며 당나라 예찬의 한마디를 비친다.

"어, 병까지 이렇게 치장을 할 적에야 술맛인들 여간 취택을 하겠소."

"그렇구말구. 술 종류만도 천 가지도 넘는답디다. 단놈 쓴놈 준한 놈에 순한 놈에, 어, 술 이름만 외우자도 몇 달 공부를 해야 된답디다. 정말 진품이야 우리들 손에 들어오지도 않고 이 소흥주란 것도 여러 백 종인데 이것은 그 중에 중길에나 갈는지."

당나라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싫어하는 유종이지만 워낙 술을 좋아하는 그이라, 당주만은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48[편집]

주안상은 벌어졌다.

유종은 소흥주를 따라 먼저 금지에게 권하였다.

"내가 가져온 술을 내가 먼저 들다니 말이 되오. 이손께서 먼저 드시구려."

"주인이 되고 먼저 들 수가 있소."

"어, 우리 사이에 주객을 따질 것도 없지 않소. 이손께서 먼저 맛을 보셔야지."

하고 손님은 한사코 주인에게 먼저 권하였다. 유종은 하릴없이 잔을 받아 들고,

"그 투명한 빛이란 정말 금파와도 같군."

살가운 듯이 이윽히 들여다보다가 훌쩍 마시고 술 묻은 웃수염을 빨며,

"과연 진품이로군. 기름같이 부드러우면서 준하고 향기롭고……."

"정말 술은 이손이 자셔 보셔야 해. 성인이라야 능지성인이라고. 정말 주성이시거든, 헛허."

시중은 그 조그마한 눈을 만족한 듯이 깜박깜박한다.

"미상불 내가 술을 좋아야 하지마는 어디 이런 진품이야 많이 먹어를 보았어야지. 시중 덕에 정말 선주 맛을 보았소."

"무얼 여기서 귀하다뿐이지. 상국엘 가면야 명색도 없는 술이지요. 내야 별로 술을 좋아하지는 않지마는, 들어간 김이라 몇 병 가지고 나왔을 뿐이지."

하고 제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던 것을 자랑삼아 내어비친다.

주객은 주거니 받거니 거나하게 술이 돌았다. 금지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 하면서 그 깜찍하게 먹는 품으로는 오히려 유종을 뺨칠 만한 주량을 가졌다.

"시중께서는 그렇게 절주를 잘 하시지만 나는 술이 과한 편이지."

이손의 불그레한 얼굴에 땀방울이 숭숭 맺히었다.

"대성지성 문선왕 공자님께서도 술을 잡수셨는데 다만 유주무량하시되 불급어란(有酒無量不及於亂)이라 하셨을 적엔 과연 대음은 대음이었던 모양이오."

금지는 제 득의의 당학을 차차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 핏기 없는 얼굴에나마 광대뼈 언저리가 돈짝어란만큼 발그스름해 온다.

"당대 문장 이태백 같은 이는 여북해야 술이 대취해서 채석강에 달을 잡으러 들어갔다가 그대로 빠져서 고래를 타고 그냥 하늘로 올라갔다 하지 않소."

"고래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니, 그게 참말일까."

"참말이구말구. 이백이 기경비상천하니 강남풍월이 한다년이라(李白 騎鯨飛上天江南風月閑多年). 바로 백낙천의 시에 다 있는데……."

금지는 그 시 한 수를 다시 한번 늘어지게 읊조린다.

"대취한 김에 강에 떨어져 죽은 것 아니오, 허허."

"그야 그런지도 모르지요. 허나 그런 유명한 문장이 그렇게 물에 빠진다고 죽을 리야 있겠소. 고래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니 강남의 바람과 달이 한가롭게 되었단 뜻이 아니오. 이백이 같은 문장이 이런 진세에 있으면 애꿎은 강남의 달과 바람이 못 견디게 이렁성거린단 말이오. 이것은 달이 뜨니 어떻고 지니 어떻고, 바람이 부니 좋고 안 불어도 좋고, 하루에도 여러 백 수 여러 천 수 시를 지어 놓으니 바람과 달인들 괴롭지를 않겠소. 그러니 옥황상제께서 불러가신 거라오."

시중은 입에 침이 없이 신이야 넋이야 말끝을 이어나간다.

"우리 신라에야 어디 그런 풍류객인들 있소. 풍월당이니 뭐니 하고 모이기만 하면 그 음탕한 노래들이나 부르고 걸핏하면 칼부림이나 하고, 살풍경이지 살풍경이야. 저네들은 술을 마셔도 조가 있어 불급어란이지만 이것은 술타령 계집타령에 헤어날 줄을 모르니."

금지는 괴탄괴탄을 한다.

"왜 우리나라에도 좋은 풍류와 씩씩한 노래가 많았지만 너무 태평건곤에 겨뤄 놓으니 옛 풍조가 스러지고, 인심이 점점 나약해 가고 풍속이 사치를 일삼으니 그게 한탄할 노릇이란 말이오."

"글쎄 누가 아니라오. 이손의 안목으론 신라 것이면 뭐든지 다 좋아 보이시겠지만 한번 당나라에를 들어가 봐요. 참 기가 막힌단 말이오. 그야말로 옥야천리에 며칠을 가고 또 가도 산 하나 구경할 수 없는 데가 없나. 산이 높으면 어느 것은 태산이라고, 바로 하늘을 찌르는구려.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황하수는 길이도 수천 리, 뭐 바다보담 더 넓은 강이 없나. 경으로 말해도 소상강에 실비가 내리는 거라든지 은하수를 그대로 기울여 놓은 듯한 여산폭포라든지. 이걸 보고 나서 신라 산천을 보면 소위 들판이란 손바닥만하고 산이라고 올망졸망, 큰강이라야 뭐 실개천 폭밖에 아니 되니……."

제가 그 좋은 데를 다 보았다는 듯이 풍을 떨기는 떨었으나 기실 실제로 본 것보담 글에서 본 것까지 떼어 와서 능청스럽게 꾸며 대었다. 그러다가 저도 겸연쩍은 듯이 말을 뚝 끊고 가장 긴한 듯이 유종의 소매를 덥석 잡으며,

"이런 것은 다 취담이고. 우리 터수가 남유달리 친한 터이지만, 이 친한 것을 아주 대대로 비끄러매어 봄이 어떠하오."

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끄집어낸다.

49[편집]

별안간 금지가 유종의 소매를 탁 잡는 바람에 유종의 들었던 술잔이 반나마 엎질러졌다.

"친한 것을 비끄러매다니?"

유종은 얼근한 김에도 이 군이 인제야 제 본색을 나타내는구나 하고, 경계하면서 채쳐 물었다.

"그만하면 알아들으실 법한데. 우리 진진지호를 맺어 봅시다."

"진진지호?"

이손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였다.

"정말 못 알아들으셨소. 왜 열국 적의 진(秦)나라와 진(晋)나라가 있지 않소. 아시는 바와 같이 때는 춘추전국시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싸움이 끊일 날이 없고 생령은 도탄에 들었으되 오직 이 진과 진과는 서로 혼인을 한 까닭에 의좋게 화평을 누렸다 하오. 그래서 서로 사돈 되는 것을 진진지호를 맺는다 하지 않소."

유종은 금지의 이번 방문을 처음부터 수상쩍게 여기고, 혹은 청혼을 하러 오지나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 없지 않았으나, 비장한 술을 가져오고 당학을 늘어놓고 하는 바람에 별다른 목적도 없이 정말 옛 친구를 그리워 심방한 것이거니 하고 믿었다가 이 별안간의 청혼에 놀랐다.

그야 전부터라도 두 집 사이에 혼인말이 있기는 있었다. 금지 집안에서 몇 번 와서 선까지 본 일도 있었고 안으로 청혼을 하자고 설왕설래는 하였지만 색시집에서는 신붓감이 아직 미거하다는 핑계로 이날 이때까지 왈가왈부를 보류해 둔 것이다.

유종은 내심으로 금지를 탐탁하게 알지를 않았고, 더구나 신랑 될 당자가 마음에 싸지를 않았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귀하기도 귀하려니와 그 재질과 기상이 아비의 눈에는 더욱 뛰어나 보이었다. 세상에 으뜸가는 사위를 구하기에 아무 빠질 것이 없을 듯하였다. 천하영웅의 아내가 되어도 아주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신라를 두 어깨에 짊어질 만한 인물,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고리타분한 당학을 한 손으로 막아 내고, 지나치게 흥왕하는 불교를 한 손으로 꺾으며, 기울어져 가는 화랑도를 바로잡을 인물, 이것이 유종의 꿈꾸는 사윗감이었다.

그러니 금성 따위는 그의 반눈에도 차지 않을 건 물론이다. 당나라 유학을 하고, 한림학사란 당나라 벼슬참을 한 것을 가지고 금지의 집안에서는 굉장한 영광으로 아는 모양이었으나, 유종에게는 오히려 눈꼴이 시었다. 더구나 가까이 자세 본 것은 아니로되 키가 달라붙은데다가 얼굴에 병색조차 돌고 장부의 기상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것이 자기의 그리는 사윗감과는 대상부동이었다.

그러면 이 혼담을 대번에 거절해 버렸으면 그만이겠으되, 그렇지도 또 못할 사정이 있었다.

금지는 당당한 참뼈로 왕족으로 임금과도 그리 멀지 않은 종친이었다. 이런 자리를 함부로 거절하였다가 나중에 무슨 화를 입을지 누가 알랴. 아무리 호활한 그이건만 벼슬살이 육십 평생에 피비린내나는 참경도 여러 번 목견한 터라, 늙은 제 한 몸보담도 귀한 딸의 장래를 생각할수록 그의 결단성은 무디어진 것이다.

"진진지호! 어 좋은 말씀이오마는 내 딸이 아직 어리고 미거해서……."

유종은 말끝을 흐리마리한다.

"아니 영애가 방년이 몇이기에 어리고 미거하단 말이오."

금지의 눈엔 날이 서며 새무룩해진다.

"아직도 열여덟 살……."

"열여덟 살이면 꼭 알맞은 나이가 아니오. 외려 과년했다고 볼 수 있지 않소. 어느 것은 이팔청춘이라고 이팔보담 두 살이나 더한데."

"뭐 키만 엄부렁하지. 철이 나야."

이손의 말은 동문서답이다.

"우리 사이에 겸사가 왜 있겠소. 그야 부모의 눈으로 보면 자식이란 골백살을 먹어도 어려 보이는 것이오. 천하 못생긴 것이 제 자식을 자랑하는 버릇이지만 지독지애(소가 귀타고 새끼를 핥는 것)인지 모르나 내 자식놈으로 말해도 제법 재주도 있고 당서는 들어 대면 사서삼경이나 제자백가에 막힐 것이 없고, 이손도 아시다시피 그 나이에 그래도 한림학사란 벼슬까지 했고 신랑감이 그만하면……."

"그야 신랑감이야 두말이 왜 있겠소. 그저 내 자식이 아직 입에 젖내도 가시지를 않아서……."

"여보 이손, 나이 열여덟에 아직 입에 젖내가 나다니. 외동따님이 아무리 귀하기로 합부인께서 설마 입때 젖을 빨리실까, 헛허허."

시중은 장히 우습다는 듯이 한바탕 웃고 나서 다시 얼굴빛을 바루고,

"뭐 기닿게 얘기할 것 없이 우리 오늘 밤으로 아주 정혼을 해버립시다. 이손 어떠하오."

50[편집]

금지는 더욱 긴한 듯이 바싹 다가앉으며 결말을 내고야 말 기세를 보이었다.

"오늘 밤으로? 무에 그리 급하시오. 나는 그런 줄 몰랐더니 시중의 성미도 꽤 겁겁하시군. 속담 상말로 우물에 가시어 숭늉을 달라시겠네, 어허허."

날카로운 칼날을 슬쩍 피하듯 이손은 농쳐 버린다.

"이손께서 속담을 말씀하시니 말이지 어느 것은 쇠뿔도 단결에 빼라고 하지 않았소. 어허허."

금지도 네 수에 넘어갈 내냐 하는 듯이 격에 맞지 않는 너털웃음을 내놓는다.

"그것은 농담이지만, 아직 몇 해를 더 지나 보고 서서히 작정을 하십시다. 나이는 과년이 되었다 하겠으나 응석받이로 자라나서 뭣 하나 옳게 배운 것도 없고, 작인이 다 되자면 아비의 눈에는 아직 까마득하니까……."

"귀한 따님이니 응석도 더러 하겠지만 여자란 시집만 가고 보면 별판으로 딴사람이 되는 법이오. 그러고 또 나도 며느리는 단 하나뿐이니 그 응석쯤이야 내가 이손 대신 받은들 어떠하겠소. 외문으로는 영애가 응석은커녕 숙성하고 얌전하고 재주가 도저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지마는……."

"그야 헛소문이 난 게지. 자식 속이야 제 아비만큼 알 수가 없는 법이오."

"그야 지자는 막여부(知子莫如父)란 말이 없잖아 있지마는 지기일이요(하나만 알고) 미지기이라(둘은 모른다), 등하불명이란 문자도 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으로 어버이 아는 것이 외문만 못한 수도 더 많으니까."

"글쎄 외문이야 수박 겉핥기지, 속속들이 알기야 아비가 더 낫겠지……."

"그까짓 말을 가지고 승강할 거야 있겠소. 인물도 그만하고 재화도 그만하고 나이도 그만하면 그야말로 삼합이 맞은 듯하니 자, 겸사 말씀을 우리 다 그만두기로 하고 정혼을 합시다."

"글쎄 그렇게 급하실 게 없대도 그러시는구려."

그들의 수작은 개미가 쳇바퀴를 돌듯 그 자리에서만 뱅뱅 돌고 다시 더 나아가지를 않는다. 금지는 화증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매게단을 지었다.

"여보 이손, 자 우리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오늘 밤에 정혼만 해놓고 성례만은 서서히 하면 어떠하오. 이손 댁에서도 준비랄지 여러 가지 사정이 계실 터이니 성례만은 일 년이고 이태고 기다리라는 대로 기다리지요."

하고 금지는 유종을 똑바로 본다. 이 말에야 설마 피해 낼 핑계가 없으리라 하는 듯하였다.

과연 유종은 무어라고 피해야 옳을지 몰라 말이 꽉 막히고 말았다. 거절은 물론 작정한 노릇이로되, 어찌하면 금지의 귀에 거슬리지 않도록 듣기 좋게 보기 좋게 거절을 해버릴까. 그러나 유종은 언변 좋게 이리저리 발라맞출 줄을 몰랐다.

한동안 답답한 침묵이 소흥주 향기가 떠도는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얼마 만에 금지는 참기 어렵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손, 왜 말이 없으시오."

"……"

유종은 난처한 듯이 눈을 떴다 감았다 한다.

"이손이 말이 없으신 걸 보면 나 같은 사람과는 연사간이 되기를 꺼리시는 것 아니오." 금지는 단도직입으로 한마디를 푹 찌른다.

"무슨 그럴 리야……."

"안 그러시다면 왜 꽉 작정을 못 하신단 말씀이오, 워낙 내 자식이 병신스러우니까, 에이."

금지는 안간힘을 쓰며 불쾌한 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신랑이야……."

"그러면 어디 다른 데로 정혼을 해두셨는지."

"다른 데 정혼은커녕 아직 혼인말을 해본 데도 없소. 정혼한 데가 있다면야……."

"그렇다면 우리끼리 만난 김에 아퀴를 지어 두는 것이 좋지를 않소."

유종은 마침내 단단한 결심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무슨 화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미룩미룩해 두는 것보담 차라리 단연코 거절을 하는 편이 나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엄연한 태도로,

"시중께서 그 미거한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이 밤중에 이렇게 찾아 주시고 정혼을 바라시나 나도 심중에 생각하는 바가 있어 허락을 못 해드리니 과도히 허물을랑 마시오. 오늘 밤에 허혼은 물론 할 수 없고 앞으로도 이 혼담은 중단을 하는 것이 피차에 좋을 듯하오."

금지의 얼굴은 일순간 파랗게 질리었다. 무릎 위에 얹힌 손이 달달 떨었다.

"이손께서 나를 그렇게 아실 줄은 정말 뜻밖이오. 어 술도 취하고 밤도 늦었으니 나는 고만 가겠소."

하고 금지는 벌에게 쏘인 것처럼 불시에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51[편집]

금지를 보내고 하인을 불러 주안상을 치우고, 유종은 서안에 쓰러지는 듯이 기대었다.

독사를 건드려 놓았으니 어느 때 무슨 화단이 뒷덜미를 짚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장중보옥 같은 외동딸을 탐탁한 자리에 출가를 시키는 것도 섭섭하려든, 하물며 마음에 신신치도 않은 금성 따위에게 내맡긴다는 것은 아름다운 구슬을 돼지우리에 던져 넣는 것보담 더 아깝고 원통하였다. 아무리 제 장래의 부귀와 영화를 위함이라 하더라도 차마 못 할 노릇이었다. 백발이 흩날리는 이 머리가 서리 같은 칼날 아래 사라질지언정 차마 못 할 노릇이었다.

설령 금성이가 출중한 재주와 인물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유종은 이 혼인을 거절할밖에 없었으리라. 첫째로 금지는 당학파의 우두머리가 아니냐. 나라를 좀먹게 하는 그들의 소위만 생각해도 뼈가 저리거든 그런 가문에 내 딸을 들여보내다니 될 뻔이나 한 수작인가.

도대체 당학이 무에 그리 좋은고. 그 나라의 바로 전 임금인 당명황(唐明皇)만 하더라도 양귀비란 계집에게 미쳐서 정사를 다스리지 않은 탓에 필경 안록산(安錄山)의 난을 빚어 내어 오랑캐의 말굽 아래 그네들의 자랑하는 장안이 쑥밭을 이루고 천자란 빈 이름뿐, 촉나라란 두메 속에 오륙 년을 갇히어 있지 않았는가.

금지가 당대 제일 문장이라고 추어올리는 이백이만 하더라도 제 임금이 성색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모르는 것을 죽음으로 간하지는 못할지언정 몇 잔 술에 감지덕지해서 그 요마한 계집을 칭찬하는 글을 지어 도리어 임금을 부추겼다 하니 우리네로는 꿈에라도 생각 밖이 아니냐. 그네들의 한문이란 난신적자를 만들어 내기에 꼭 알맞은 것이거늘 이것을 좋아라고 배우려 들고 퍼뜨리려 드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니냐.

이 당학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우리나라에도 오래지 않아 큰 난이 일어날 것이요, 난이 일어난다면 누가 감당해 낼 자이랴.

"한 나이나 젊었더면!"

유종은 이따금 시들어 가는 제 팔뚝의 살을 어루만지면서 한탄한다.

몇 해 전만 해도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이가 조정에 더러는 있었지만 어느결엔지 하나씩 둘씩 없어지고 인제는 무 밑둥과 같이 동그랗게 자기 혼자만 남았다.

속으로는 그의 주의에 찬동하는 이가 없지도 않으련만 당학파의 세력에 밀리어 감히 발설을 못 하는지 모르리라.

지금이라도 젊은이 축 속으로 뛰어들어가면 동지를 얼마든지 찾아낼는지 모르리라. 아직도 이 나라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은 다음에야 방방곡곡을 뒤져 찾으면 몇천 명 몇만 명의 화랑도를 닦는 이를 모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아들이 없는 그는 젊은이와 접촉할 기회조차 없었다. 이런 점에도 그는 아들 없는 것이 원이 되고 한이 되었다.

이 늙은 향도(香徒)에게 남은 오직 하나의 희망은 자기의 주의주장에 공명하는 사윗감을 구하는 것이었다.

벌써 수년을 두고 그럴 만한 인물을 내심으로 구해 보았지만 그리 쉽사리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고르면 고를수록 사람 구하기란 하늘에 별따기보담 더 어려웠다.

유종은 기대고 있던 서안에서 쭉 미끄러지는 듯이 털요 바닥 위에 누웠다.

금지의 청혼을 그렇게 거절한 다음에는 하루바삐 사윗감을 구해야 된다. 금지로 하여금 다시 개구를 못 하도록 다른 데 정혼을 해놓아야 한다.

그러면 신라를 두 손으로 떠받들고 나아갈 인물이 누가 될 것인가. 삼한 통일 당년의 늠름하고 씩씩한 기풍이 당학에 지질리고 문약에 흐르는 이 나라를 바로잡을 인물이 누가 될 것인가.

유종은 눈을 감고 제 아는 젊은이를 우선 손꼽아 보았다.

첫째로 머리에 떠오르기는 상대등(上大等) 신충(信忠)의 아들이었다. 호남아로 생긴 허위대와 얼굴이 금성이 따위는 발 벗고도 따르지 못할 인물이로되 너무 귀공자답게 윤이 흐르고 허해 보이는 것이 흠절이었다. 그 다음에는 이손 염상(廉相)의 아들을 생각해 보았으나, 기상은 아비를 닮아 돌올하지마는 너무 거칠고 눈자위에 붉은빛이 돌아 어쩐지 화길한 인물이 아닐 듯싶었다.

그 다음으로 누구 누구 꼽아 보았으나 별로 신통한 인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유종은 이손 금량상(金良相)의 아우 경신(敬信)을 생각하자,

"오, 옳지. 내가 어째 이 사람을 잊었던가."

하고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제 알 만한 이들의 아들들만 숭겨 보고, 미처 그 아우들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52[편집]

금량상의 아우 경신!

"그런 인물을 내가 어찌 까맣게 잊었던가."

유종은 스스로 제 기억이 흐려진 것을 책망도 하고 괴탄도 하였다.

"만일 그가 내 사위만 된다면야 그 따위 금지쯤이야."

풀기 하나 없던 그에게 새로운 기운이 넘치는 듯하였다.

그대도록 경신이야말로 유종이 꿈꾸는 사윗감으로 쩍말없이 모든 자격을 갖추었다.

우선 지체로만 보아도 내물왕(奈勿王)의 직계후손이니 금지의 문벌보다 높았으면 높았지 떨어지지 않았다. 경덕왕께서 만득왕자라도 두셨기에 망정이지 만일 무후하시었던들 대통을 이을 이는 금량상 형제밖에 없다는 것이 떳떳한 공론이었다.

더구나 그 형제들은 어디까지나 당학파를 미워하고 국선도를 숭상하는 점으로 자기에게 둘도 없는 동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다만 그들에게 현재는 그리 큰 권력이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흠절이라면 흠절이리라.

그야 금량상이 그대로 조정에서 있기만 하였으면 골품으로나 덕망으로나 벌써 상대등이 되었으련만, 임금께와 당나라에 아첨하기로만 일을 삼는 무리들하고 한 조정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치욕이라 하여 이손의 벼슬을 버리고 향제에 드러눕고 말았다. 몇 번 왕명으로 부르셨지만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만일 웬만한 사람이 이런 짓을 하였더면 그 간악한 당학파들이 그 능란한 붓끝을 휘둘러 무슨 누명이든지 뒤집어씌워 참화를 면하기 어려웠겠지만 왕의 믿으심도 두터우려니와 지체가 높은 탓으로 감히 개구들을 못 한 것이었다.

향제에 돌아가 누운 뒤에는 아무 거리낌없이 자제들의 훈육을 일삼고 국선도를 밝히기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소문은 풍편으로 들어 알았다.

조정의 일이 날로 그르고 국운이 차차 기울어짐을 혼자 한탄하다가도,

"오 옳지 아직도 양상이 남았구나. 그가 있는 다음에야 우리나라는 태산 반석과 같다."

하고 백만의 응원병을 얻은 것처럼 든든히 여긴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아우 경신, 그는 제 형보담 못하지 않은 영웅이다. 옳다, 인제는 되었다."

유종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무릎을 치고 일어서서 방 안을 거닐었다.

그의 눈앞에는 경신의 모양이 완연히 나타났다.

후리후리한 키에 떡벌어진 어깨판, 탁 트인 이맛전과 너그러운 뺨은 언제든지 싱글싱글 웃는 듯하였으나 어딘지 늠름한 위풍을 갖추어 대하는 이의 머리를 저절로 수그리게 한다.

유종이가 그를 눈익혀 보기는 작년 봄 신궁 앞 넓은 마당이었었다.

신궁에서 큰 제향을 마치고 그 앞마당에서 활쏘기와 칼겨룸의 모임이 열리었다. 계림 팔도에서 한다하는 낭도(郎徒)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그 수효는 만으로 헤아렸다.

여러 곳 활터와 칼터에서 첫 겨룸, 둘째 겨룸이 차례로 끝이 나고 맨 나중에 뽑히고 또 뽑힌 낭도는 스무나뭇에 불과하였다.

그 중에서 칼겨룸과 활쏘기 두 가지에 맨 나중까지 뽑힌 사람은 경신 하나뿐이었다.

그때부터 경신은 만장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겨룸은 오히려 싱거웠다. 한 번도 아슬아슬한 고비도 없이 경신이가 두 가지에 너무 쉽사리 장원을 하고 말았다. 그의 궁술과 검술이 지나치게 뛰어난 것이다.

"어, 그 화살이 세기도 하더군."

활줌통이 척 휘어서 거의 부러질 듯하자 잉 소리를 치고 화살은 흐르는 별보담 더 빠르게 날아가서 영락없이 과녁을 들어맞히고 남은 힘이 넘치어 살 위에 꽂힌 새깃이 부르르 떨던 것이 지금도 유종의 눈에 선하였다.

"어 무서운 화살이야, 무서운……."

유종은 혼자 방 안을 왔다갔다하며 정말 무서운 듯이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고 중얼거릴 제 문득 등뒤에서 말소리가 났다.

"아이 아버지께서는 뭘 혼잣말씀만 하고 계셔요."

유종이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결에 들어왔는지 사초부인과 주만이가 서 있었다. 그는 골똘히 경신의 생각을 하고 있느라고 제 아내와 딸이 영창을 열고 들어오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53[편집]

유종은 주만을 보고,

"오 구슬아기냐. 밤이 늦었는데 왜 자지를 않고 나왔느냐."

"그 애가 금시중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입때 조바심을 하고 있었답니다."

사초부인은 딸을 대신하여 대답하였다.

"금시중이 찾아왔기로 네가 조바심을 할 게 뭐냐."

주만은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푹 수그린다.

"금시중이 어째 아닌밤중에 찾아를 오셨소."

"어, 당주를 가지고 옛 친구를 찾아왔다 하오."

"그런데 무슨 말이 그렇게 길어요. 사내어른이 어쩌면 그렇게 수다스러울까."

"그 골치 아픈 당학을 또 늘어놓은 것이오."

"이 애가 하도 사람을 졸라서 몇 번을 나와 엿들어도 말낱은 자세 안 들리나 그 말이 그 말이고…… 나중에는 들어가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 애가 인제 금시중이 돌아가셨다고 깨워서 무슨 말인가 여쭈어 보려고 나온 것이라오."

"네 혼인말이 나온 줄 알고 좀이 쑤신 게로구나."

유종은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 있는 주만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얘 혼인말이 나왔습니까."

"그야 물론이지. 말하자면 청혼을 하러 온 것이야."

"청혼? 그래 허혼을 하셨소."

주만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맥맥히 제 아버지의 입을 바라본다.

유종의 말도 흥분의 가락을 띠어 온다.

"그야 말이 되오. 그 진저리나는 당학파하고 혼인을 하다니 될 뻔이나 한 수작이오."

"그러면 거절을 하셨단 말씀이오. 후환이 무섭지 않을까."

"아무리 후환이 무섭기로, 이 주름살 잡힌 목에 칼이 들어온다기로 못 할 것은 못 한다고 거절을 할 수밖에 있소."

주만은 자기 아버지가 어떻게 든든하고 고마운지 몰랐다.

"아버지!"

한마디 부르짖고 그 자리에 푹 엎어져서 울고 싶었다.

"참 잘하셨소. 미룩미룩 끌어가는 것보담 아주 단정을 내버리는 것이 피차에 시원한 노릇이니까."

"그는 그러하고라도 딴은 저 애 혼인이 급하단 말이지. 벌써 열여덟이니 시집갈 나이도 되었거든."

"그래요. 허나 어디 마땅한 사람이 있어야지. 넘고 처지고."

"합당한 자리에 꽉 정혼을 해버려야 금지 따위가 다시는 이렁성저렁성하지도 못할 텐데……."

"글쎄요, 어디 합당한 자리가 있나요."

"있구말구."

유종은 자신 있게 대답을 한다.

"뉘 집안입니까."

"왜 전에 이손을 지낸 금량상이라고 있지 않소."

"오 옳지, 참 두 분이 절친하셨지. 그분이 아들이 있던가."

"아들이 아니라 그이의 동생이 있단 말이오."

"녜, 동생이 있어요!"

사초부인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금경신이라고 바로 작년 봄에 궁술 검술에 장원을 한 사람 말이오."

"오 옳지, 그런 출중한 인물은 처음 보셨다고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하셨지."

"그러니 신랑감은 다시 더 볼 나위 없고 문벌도 금지옥엽이라 금지쯤은 누를 수 있겠는데 저편에서 허혼을 해줄는지. 또는 그 동안에 다른 데 정혼이나 안 했는지."

"글쎄 그게 걱정이구려. 그러면 내일이라도 사람을 보내어 염탐을 해보지요."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보담 절친하던 친구를 만나 본 지도 오래니 내가 몸소 가볼까 하오."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 그 혼인이 될 말로야 작히나 좋을까."

부부는 매우 기뻐하며 하루바삐 이 혼인을 서둘려 하였다.

주만은 금시중 집안과 혼인이 터진 것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새로운 벼락이 뒷덜미를 내리짚었다.

금성이와의 혼인은 설령 아버지가 허혼을 하셨다 해도 끝내 반대할 이유와 거리가 있었지만 경신과의 혼담은 저쪽에서 거절을 하기 전에는 모면할 핑계조차 없었다.

산은 오를수록 높고 물은 건널수록 깊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할까. 아무리 저를 애지중지하시는 부모님께라도 이 가슴속에 서리는 번민을 털어바칠 수는 없는 일이다.

주만은 그 자리에 고꾸라지며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다.

"이 애가 왜 울까."

부부는 울음 소리에 놀랐다.

"왜, 너무 좋아서 우느냐."

유종은 들먹거리는 딸의 어깨를 바라보며 물었다.

"얘 불길하다. 무슨 방정맞은 울음이냐."

어머니는 질색을 하며 딸을 달래었다.

"저는 싫어요, 전 싫어요. 시집은 안 갈 터예요." 하고 주만은 껄떡거리며 하소연을 하였다.

54[편집]

아사달은 오래간만에 일터로 올라갔다.

몸에 무슨 두드러진 병이 생긴 것이 아니요, 너무 흥분하고 너무 지친 나머지 일시 기절한 것이라 그 회복은 뜻밖에도 빨랐다.

며칠 누워 있는 동안에 몸살을 한번 앓고 나매 워낙 젊은 기운이요, 마음이 긴장한 탓인지 하루 이틀 다르게 원기가 소생이 되었다.

이렇게 회복이 속한 원인엔 주만의 힘이 없지 않아 많기도 했다. 그가 은근히 쑤어 보내는 잣죽과 속미음이 모래알 같은 절밥을 먹던 입에 달고 미끄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한 모금 두 모금에 눈이 번하게 띄어 오는 듯하였다.

차차 밥을 먹게 되자 갖추갖추 반찬을 담은 찬합은 어떻게 맛난지 몰랐다. 서홉 밥 한 바리때가 오히려 나빴다. 어린애 모양으로 세 끼니가 까맣게 기다리었다.

그 사이 틈틈으로 곰과 찜 같은 것도 몰리알리 털이의 손을 거쳐 들어왔다.

한밥에 오르고 한밥에 내린다는 젊은 살은 여윈 자국을 메우듯 차올랐다.

이런 선물을 받을 때마다 아사달은 주만을 아니 생각할 수 없다.

"세상에 그런 아름다운 처녀도 있던가. 그런 마음씨 고운 처녀도 있던가."

외로운 경우일수록 불행한 처지일수록 정에 움직이기가 쉬운 것이 사람이거든 천리타향에 병들어 누운 몸을 이렇게 위로해 줄 이 누구냐. 돌보아 줄 이 누구냐.

아사달은 눈물겨웁도록 고마웠다.

아사달도 처음에는 까닭 없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고마웁게 구는 주만의 행동이 이상스럽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야 그런 대갓집의 귀동딸로 저 같은 시골뜨기 석수장이에게 구할 아무것도 없으리니, 이것은 온전히 아름다운 동정심의 나타남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현신 관세음보살님인지 모른다.

"이것도 필경 전생의 무슨 인연이리라."

아사달은 필경 불가의 이른바 인연으로 돌리고 말았다.

인연이라면 기인한 인연이다. 파일날 밤 다보탑을 도는 데서 만나는 것도 인연이요, 석가탑 위에서 까무러친 자기를 발견한 것도 인연이 아니냐. 하고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 그 집에서 불공을 오게 되고, 하고많은 시각 가운데 그가 석가탑을 올라왔을 제 하필 내가 혼절하였을까.

인연의 실마리가 너무도 얼기설기한 데 아사달은 오히려 겁을 내었다.

그는 그러하거니와 아사달은 주만을 대할 적마다 아내 아사녀의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주만이 아무리 정다워도 아사녀가 아니요 그 처녀의 손이 아무리 부드러워도 아내의 손이 아니다.

인생역로에 지나치는 길손에 지나지 않는 그이로도 대공을 이루려다가 넘어진 것을 보고 한 조각 동정심이 이다지도 곰살궂고 살뜰하거든 만일 내 아내가 이런 줄 알았으면 얼마나 가슴을 태우고 속을 끓일 것인가.

어서 하루바삐 하던 일을 끝을 내고 남의 신세를 과도히 받을 것 없이 빨리 돌아가야 한다.

그는 몸을 추스르게 되자 일에 대한 정열이 다시금 불같이 일어났다.

그는 몇 번 돌 다루는 기구를 들고 일터로 가려 하였건만 아상노장이 절대로 말리어서 오늘날까지 참고 참아 내려온 것이다.

오늘도 더 좀 몸이 완실하기를 기다리라 하였지만, 자기 몸이 이만하면 인제 넉넉히 일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만일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고 그대로 누워 있으면 도리어 병이 덧치겠다고 졸라서 간신히 아상노장의 허락을 맡은 것이다.

저녁을 일찌거니 먹고 나서 탑 위를 올라서매 돌들도 그리던 자기를 반기듯 벙글벙글 웃는 듯하였다.

정과 돌까퀴로 잔손질을 하려다가 자기의 힘도 시험할 겸 큰 군더더기를 우선 후려갈기기로 하였다.

버드나무 가지를 찢어 타레를 만들고 그 속에다가 정을 꼭 끼이도록 박아 놓은 다음에 물동 둥이를 번쩍 들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한번 내리치매 불꽃이 번쩍 일어나자 바위는 쩡 하고 비명을 치며 그대로 쩍 갈라져 털썩 하고 떨어진다.

아사달은 첫 힘부림이 성사를 하자 겨누를 들어 돌부리를 떨고 나서 다시 정질을 시작하였다.

어슬렁어슬렁 어둠이 짙어 오건마는 아사달은 또 옛 버릇이 나와서 밤 가는 줄도 모르고 마치와 정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한참 일을 하다가 잠깐 팔을 쉬고 언뜻 눈을 돌리매 초롱 하나가 이리로 향하고 올라오는 것이 보이었다.

55[편집]

그 초롱의 임자는 묻지 않아도 주만과 털이었다.

털이는 째기발을 디디고 초롱을 높이 쳐들어 탑 위를 비추어 보더니,

"여기 계시군요."

하고 반가운 소리를 친다.

"아이 벌써 일을 또 시작하셨구나."

주만은 거의 짜증을 내다시피 말을 하였다.

"아직 채 소복도 안 되셨는데 또 덧치시면 어떡해요."

털이도 제 아가씨의 뜻을 받아 걱정을 한다.

"엊그제 기절까지 한 이를 일하는 걸 말리지도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다니."

주만은 누구에겐지 모르게 불평만만하다.

아사달은 얼마쯤 무관해진 주만의 주종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탑 가장자리까지 걸어나왔다.

"이 어두운 밤에 어떻게들 오셨습니까."

하고 미안해한다. 주만은 탑 가까이 바싹 들어서며,

"어떡하시자고 어느새 또 일을 시작하셨단 말씀예요."

초롱의 빛과 그늘이 어룽이 져서 자세히 보이지 않으나마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며 매우 아끼고 애달파한다.

아사달은 어둠 속에서 팔뚝에 힘을 주어 보이며,

"인제 이렇게 든든해졌는데요. 성한 사람이 일을 않고 있으니 되려 병이 덧칠 것 같아요, 허허."

오래간만에 웃는 소리를 들으매, 과연 완쾌가 된 듯 한결 마음이 놓이는 듯도 하였다.

"그래도 얼마쯤 더 쉬시는 게 좋을 것 갖다가……."

"더 쉬면 더 기운을 차릴 수가 없게 될는지 모르지요."

아사달은 오늘 밤따라 수작도 잘 하고 매우 쾌활해진 듯하였다.

"워낙 성미가 겁겁도 하시군요."

주만도 난생 처음으로 농담 비슷하게 한마디를 던져 보았다.

"급하기야 오늘 밤으로라도 끝을 내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면 우리도 곧 가야겠군요. 밤새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될 듯하니까요."

"고새야 무슨 큰 방해가 되겠습니까. 나도 지금 막 일손을 쉬는 참입니다."

"그러시다면 잠깐만 놀다가 갈까……."

하고 주만은 망설이었다. 그는 혹시나 아사달이 내려올까 하였으나 저편에서 그런 기색은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면 아가씨가 탑 위로 좀 올라가 보십시오. 오늘 밤에는 까무러치시지는 않으실 테입지요, 오호호."

털이가 난처해하는 주만을 부축하였다.

"그러면 내가 좀 올라가 볼까, 이 캄캄한 가운데 어떻게 일을 하시나 구경을 좀 하게."

제 일자리를 남에게 보이기를 몹시 꺼리는 아사달이지만 주만의 이 청은 물리칠 수 없었다. 제 재생의 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말을 어떻게 거스를 수 있으랴.

그러나 아사달이 허락을 하고 거절을 할 나위도 없었다. 주만은 어느결에 사다리를 부여잡고 발을 올려놓는다. 아사달은 삐둑삐둑하는 사다리 웃머리를 잡았다.

주만은 조금도 서투르지 않게 사다리를 거의 다 올라왔으나 사다리가 너무 곤두서고 위층이 두 간이나 탑 위로 솟아 있기 때문에 긴 치마에 걸리어 얼른 걸타넘기에 조금 벅찼다.

아사달의 손은 저절로 주만의 손길을 잡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맨 처음으로 마주잡는 두 손길!

주만의 비단결 같은 손길이 아사달의 손아귀에 몰씬하게 녹아들었다. 아사달의 훈훈하고 억센 아귓힘이 주만의 손등과 바닥에 얼얼하게 남았다.

주만의 눈앞이 아뜩해진 것은 사다리를 걸타넘고 발 놓인 자리가 캄캄한 탓만이 아니리라.

털이가 초롱을 들고 뒤따라 올라오다가,

"여기 있습니다. 이 초롱을 받으십시오. 쇤네는 차돌에게 가서 놀고 있겠으닙시오."

하고 초롱을 치켜든다.

"조금 있다가 같이 가면 어떠냐."

"쇤네는 차돌에게 부탁할 말도 있굽시오. 아무튼 잠깐 다녀와야겠는뎁시오."

주만도 아까 아사달의 처소로 갔다가 마침 차돌이가 없어서 전복찜을 해가지고 온 것을 어디 두었다고 이르지 못한 것을 생각하였다.

"그럼 다녀오렴. 어두울 텐데 초롱을 네가 들고 가려무나."

"쇤네가 초롱을 가져가면 아가씨가 너무 어두우실 걸입시오."

"내야 가만히 있으니 괜찮지만 길 걷는 네가 어둡지 않겠니."

"그러면 쇤네가 가져갈깝시오. 두 분이 계시면 무섭지는 않으실 테닙시오. 오호호."

털이는 제가 초롱을 들고 종종걸음을 치며 내려간다.

아사달과 주만은 이윽고 초롱이 일렁일렁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둘은 의논이나 하듯이 서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옻빛 같은 어둠에 싸이어 피차에 얼굴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56[편집]

어둠! 무수한 머리올처럼 올올이 가물거리며 단 두 남녀를 겹겹이 에워싼 어둠.

수줍음도 부끄러움도 뒤덮어 주는 어둠. 망설임과 거리낌도 휩싸 버리는 어둠.

그 공능자작 밑에서 무엔지 활개를 친다. 그 수룡이 속에서 무엔지 버르적거린다.

어둠은 속살거린다. 어둠은 꾀인다.

주만은 이 어둠이 지겹고 무서웠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 한들 이렇게도 어두울까요."

그는 보이지도 않는 아사달을 눈어림으로 더듬으며 침묵을 깨뜨렸다.

"얼마쯤 기다리시면 차차 밝아집니다."

아사달은 아무 구애도 없는 듯 태연하였다.

"아무렇기로 어두운 밤이 어떻게 밝아를 져요."

"밝음에 익는 것이나 어둠에 익는 것이나 눈에 익기만 하면 마찬가지지요."

"그러면 아사달님은 내 얼굴이 보입니까."

"똑똑히는 안 보입니다마는 으렷이는 보이지요."

"내 눈엔 아사달님이 보이지를 않는데."

"그러면 눈을 한참 감았다가 다시 떠보십시오."

주만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아 보았다.

어둠 속에 제 눈까지 감아 버린 아름다운 처녀!

한참 만에 주만은 눈을 다시 떴다. 이만큼 저만큼 마주앉은 두 사이가 조금도 좁아들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은 것이 도리어 이상스러웠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어디 보여요."

"인제 차차 보여를 집니다."

아사달의 대답은 너무 의젓하다.

수작의 실마리는 다시금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알고 내가 알 뿐인 단둘의 암흑세계! 은밀한 수작을 실컷 마음껏 주고받는다 한들 어둠에서 어둠으로 사라질 뿐이 아니냐. 깊이깊이 접어 넣은 비밀을 활활 털어 낸다 한들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옮겨질 뿐이 아니냐.

그러하거늘, 그러하거늘 왜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차리고만 있는가, 점잔만 빼고 있는가.

주만은 아사달을 만나기만 하면 할 말이 천겹 만겹 쌓이고 쌓이지 않았던가. 혼자 속을 태우다가 마침내 마음을 결단하고 이 밤에 그를 찾은 것이 아니었던가.

정작 그를 대하고 보매 말 한마디도 시원하게 나오지 않을 줄이야! 가슴만 가득하게 부풀어오르고 서리서리 얽히었던 하소연 한 가닥도 제대로 풀려 나오지 않을 줄이야! 알뜰한 그이를 앞에 두고도 벙어리 냉가슴을 그대로 앓을 줄이야! 이렇게 좋은 자리,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만났거든 피를 끓이는 진정을 쏟아 버리지 못할 줄이야!

설렁 하고 밤바람이 인다. 휘젓한 절 마당을 두루마리를 하다가 와하고 탑 위를 지쳐들어 그린 듯이 앉은 두 남녀를 휘몰아 낼 것같이 불어 제친다.

"웬 바람이 갑자기 이렇게 불어요."

주만은 얼굴을 외우시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는 속으로,

'내가 기껏 한다는 것이 겨우 이 말인가. 바람이 나에게 항상 큰 일인가? 온 서라벌이 다 날려간들 나에게 무슨 계관이 있단 말인고.'

"저 소리를 들어 보셔요. 저 풍경이 우는 소리를."

아사달은 주만의 말을 받으며 풍경 소리에 귀를 기울인 모양이다.

"천연 우리 부여 고란사 풍경 소리 같군요."

"고란사에도 풍경이 있어요?"

주만은 허정대고 대답을 하였다.

"있구말구요. 내 집이 고란사에서 멀지 않은 탓에 이따금 그 풍경 소리를 듣지요."

"……"

풍경 소리에까지 고향을 그리는 나그네의 심정을 몰라줄 주만이가 아니었지만, 제 속은 이렇게 조이는데 고장 회포만 자아내는 아사달의 말에 대꾸할 정황조차 없었다.

아사달은 하늘을 치어다보고,

"저편 솔밭 있는 편을 좀 보셔요. 뿌옇게 하늘에 뻗힌 것이 무엔 줄 아십니까? 그게 바람꽃이랍니다."

"바람꽃?"

주만은 시름없이 간단히 말을 받았다.

"바람꽃이 일면 정말 꽃이 떨어진다지요?"

"……"

"벌써 첫여름이 되었으니 떨어질 꽃도 얼마 남지는 않았겠지요마는……."

하고 아사달은 한숨을 날쉬었다.

그는 멀리 아사녀를 생각하고 타향에서 세 번째 봄이 속절없이 지나간 것을 한탄한 것이었다.

57[편집]

"떨어질 꽃도 얼마 남지를 않았겠지요."

아사달의 한탄은 구슬픈 가락을 띠었다.

"떨어질 꽃!"

주만도 풀기 없이 속살거려 보았다. 제 걱정이 하도 복받치어 아사달의 자아내는 향수에 맞장구를 쳐줄 근력조차 없었다가 이 말 한마디가 야릇하게도 그의 귀를 울리었다.

"떨어질 꽃!"

또 한번 뇌자 조비비듯 하던 그의 가슴이 대번에 찌르르해지며 비감스러운 회포를 걷잡을 수 없었다. 이 난데없는 바람에 무참하게 지는 꽃. 이 어두운 밤에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이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스러지는 꽃 한 떨기야말로 닥쳐오는 제 운명을 그대로 일러주는 듯하였다.

"꽃 신세도 설다 하겠지만 그래도 필 때 피고 질 때 지지만……."

주만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핀다 한들 피어 있을 때가 며칠입니까. 어느덧 봄이 다 갔으니…… 덧없는 세월…… 벌써 세 번째 봄이……."

아사달의 목소리도 눈물에 젖은 것 같다. 아내의 생각이 골똘할수록 그에게는 날 가는 것이 아까웠다. 하루바삐 대공을 이루어야만 아내의 자기 기다리는 날짜가 줄어들 것을.

"필 만큼 피고 지는 것이야 누가 한을 해요……."

주만의 목은 갑자기 메어졌다. 핀 뒤에 지는 것도 덧없다 가엾다 하거든 한번 활짝 피어 보지도 못하고 봉오리째로 사라질 것이 더욱 슬펐다. 알뜰한 사람을 부둥켜안은 채로 올곧게 뜻도 이루기 전에 휘날려 떨어질 것이 더욱 서러웠다.

운명의 악착한 손은 벌써 그의 뒷덜미를 짚었다…….

금지가 다녀간 그 이튿날로 유종은 금량상을 찾아갔다.

혼인말을 꺼내자 저편에서는 두말도 않고 선선히 승낙을 하고 말았다.

"금지 따위가 주제넘게 이손께 청혼이라니 말이 되오."

금량상은 아버지보다 더욱 분개하며 그 범수염을 거스리고 노발대발하였다던가.

평소에 그렇게 대범하던 아버지가 이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뇌고 뇌시며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였다.

아버지 떠나던 날 주만은,

"제발 경신님께 다른 어진 배필이 있어지이다. 달리 정혼한 데가 있어지이다."

하고 검님께와 부처님께 축원을 올리고 또 올렸건만, 이렇게 쉽사리 정혼이 되고 말 줄이야.

"이 애 아가, 구슬아가, 인제 너는 천하영웅의 짝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 아니 기쁘냐."

하고 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듯이 기뻐하는 부모의 뜻을 받들지 못할 것을 생각하매 주만은 뜨거운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저는 싫어요, 저는 싫어요. 저는 시집가기 싫어요."

속절없는 노릇인 줄 번연히 알지마는 앙탈을 하고 몸부림을 쳤다.

"이런 철부지를 어떻게 남의 가문에 보내오."

아버지는 웃고,

"이 애 울음이 무슨 울음이냐. 이런 경사에 불길하게."

어머니는 꾸중을 하였다.

"다 큰 애가 엉엉 울다니 하인들 볼썽사납다. 어서 그쳐라, 그쳐."

그래도 주만은 한번 터진 울음을 좀처럼 그칠 수 없었다. 멈추려 하면 멈추려 할수록 울음 소리는 더욱 커지었다.

어버이들은 그 울음을 온전히 다른 뜻으로 푼 모양이었다.

"아무리 네가 우리 슬하를 떠나기 싫어한들 쓸데가 있느냐. 딸자식으로 태어난 다음에야 아무리 앙탈을 한들 남의 가문에 안 가고 배길 수 있느냐. 남편을 잘 섬기고 잘 돕는 것이 여자의 타고난 천직이거든."

타이르던 아버지도 회심한 생각이 드는 듯 음성이 가라앉았다.

"자식이라야 저것 하나뿐. 저것마저 치워 보내면……."

어머니는 끝끝내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버이의 말씀을 들을수록 주만은 더욱 슬픔과 설움이 복받쳐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매맞은 어린애처럼 홰울음을 내어놓고 말았다.

"이 애 고만 울어라, 고만. 너무 울면 지친다. 고만, 고만."

어머니는 딸의 등을 흔들고 어루만지다가 그대로 등 위에 엎드러지며,

"엊그제 젖먹이가 어느새 시집갈 나이가 되다니. 너마저 가버리면 이 어미는, 이 어미는 어떡하나……."

하고 훌쩍훌쩍 소리를 내어 운다.

아버지는 연경을 꺼내어 쓰고 사랑으로 나가 버리었다.

58[편집]

아버지가 사랑으로 나가 버리자 어머니의 흑흑 느끼는 소리는 더욱 높아 갔다.

"얘, 인제 고만, 응."

달래다가 울고,

"그대로 뚝 그치지를 못하고."

꾸짖다가 울었다.

주만은 어머니의 상심하시는 것이 민망스럽고 죄송스러워서 가까스로 꿀꺽꿀꺽 울음을 삼키고 제 처소로 돌아왔다.

제 방에서 제 홀로 실컷 마음껏 울어 보려 하였더니 웬일인지 그렇게 퍼붓는 듯하던 눈물이 그새 말라붙었는지 다시 나올 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눈은 갈수록 보송보송해졌다.

눈물이 끊어지자 속은 바작바작 타기 시작하였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할까."

머리를 두 손으로 부둥켜쥐고 짜보았건만 암만해도 어찌할 도리가 나서지를 아니하였다.

누워 봐도 시원치 않고 앉아 봐도 시원치 않고 일어서 보아도 시원치 않았다. 애꿎은 몸만 자반뒤적이를 하면 할수록 한 그믐밤 빛 같은 아득한 절망이 그의 가슴을 물어뜯을 뿐이다.

눈물이 흐를 때는 오히려 낫다. 천만 개 바늘로 쑤시고 저미듯 쓰리고 따가운 속을 얼마쯤 눅여 주었던 것이다. 빼빼 마른 슬픔을 찬 이슬처럼 축여 주었던 것이다. 눈물마저 끊어진 지금은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백 갈래 천 갈래로 곰곰이 생각해도 끝머리는 언제든지 허두로 돌아가고 만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할까."

주만이 혼자로는 너무도 벅차고 어려운 문제였다. 그렇다고 이 사정을 호소할 데가 어디냐.

오늘날까지 애지중지 길러 주신 부모님께도 하소연할 수 없는 이 사정. 무슨 응석이라도 받아 주시고 무슨 청이라도 들어주시는 부모님이시지만 이런 동이 닿지 않은 말씀이야 어찌 여쭈랴. 설령 용기를 가다듬어 발설을 한다 한들 그 결과는 뻔한 노릇이 아니냐. 천부당만부당한 이 사정이거니 동해바닷물이 마를지언정 들어주실 리 만무하다. 도리어 역정만 내시고 슬퍼만 하실 것 아닌가.

이 사정을 호소할 데는 오직 아사달뿐이다. 그러하다, 이 안타까운 사정을 알아줄 이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오직 그이 하나뿐이다.

그래서 밤 들기가 무섭게 털이를 데리고 이곳을 찾아온 것이었다.

다시 없을 기회, 다시 없을 자리에 그를 만났건마는 올 때 먹은 마음과 딴판으로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웬일일까.

바람은 더욱 기운차게 더욱 사나웁게 불어 제친다.

와르르르 어디 산이라도 무너지는 듯. 들부수듯이 산기슭으로 휘몰려 들어가매 숲은 휘술레를 돌리듯 몸을 우쭐거리며 아귀성을 친다.

바람이 걸어가는 대로 술렁술렁 물결을 치는 듯한 솔숲이 밤눈에도 으렷이 보이었다.

주만의 가슴도 바람결같이 설레었다.

통사정할 오직 한 사람인 줄로 여기었던 아사달도 어찌 생각하면 헛되고 거짓인 듯하였다. 제 고장만 생각하고 세월의 덧없음만 설워하는 그에게 이 사정을 알린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정혼을 한 게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가 시집을 가고 안 가는 것이 그에게 하상 대사일까.

한 번 탑돌기를 같이 하고 한 번 까무러친 것을 발견하고 몇 번 문병을 하였을 뿐. 그와 나와 무슨 깊은 곡절이 있단 말인가. 그는 부여 땅의 젊은이, 나는 서라벌 처녀, 생각하면 아주 남남끼리가 아니냐.

부모님도 몰라주시는 사정을 그에게 알아달라니 너무도 터무니없는 노릇이 아니냐.

바람에 둥둥 뜨는 듯한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매 주만은 넓은 벌판에 단 홀로 남은 듯한 적막과 슬픔을 느끼었다.

"어유, 바람도 몹시 부는군. 저 별빛이 흐릿한 것이 어쩐지 물을 먹은 듯합니다. 비가 또 오시려나."

혼자 생각에 잦아졌던 주만에게는 아사달의 말소리가 마치 딴세상에서 울려 오는 듯하였다.

59[편집]

물 먹은 별들은 졸립다는 듯이 깜박깜박하다가 하나씩 둘씩 지워졌다.

동쪽 하늘에 둥둥 떠오른 검은 구름장이 서으로 서으로 빨리빨리 달아났다. 대번에 하늘은 빈틈없이 흐려지고 구름 두께는 갈수록 짙어지는 듯하였다.

사나운 바람은 여전히 그칠 줄을 모른다.

주만의 가슴을 지지른 검은 구름장도 더욱 무거워졌다.

그와 맞대해 앉아 있어도 이렇게 괴롭고 외로울진대 차라리 돌아가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그러나 한번 간 털이는 차돌이와 무엇을 노닥거리고 있는지 다시 올 줄을 모르고 아무리 대담한 주만으로도 이 캄캄칠야에 털이도 데리지 않고 촛불도 없이 제 혼자 타닥타닥 돌아가기는 거리끼었다. 그나 그뿐인가, 정작 몸을 일으키려 하매 더욱 서러웠다.

'그와 이렇게 대할 적도 몇 번이나 될 것인가.'

생각하매 그와 떠나는 슬픔이 그와 같이 있는 괴로움보다 백 갑절 천 갑절 더할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었다.

'어둡지나 않았더면 그의 얼굴이나 실컷 보아 둘걸.'

아무리 눈을 닦아 보아도 어둠 속에 덩치만 으렷이 보일 뿐, 그 어글어글한 눈매와 연연한 입술의 나타나지 않는 것이 못 견디리만큼 안타까웠다. 털이에게 초롱까지 돌려보낸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에라 암만해도 보깨이는 내 속을 알릴 데는 그이 하나뿐이다. 기막힌 내 사정을 하소연할 데는 그 아니고 또 누구 있을까.

"나는 자칫하면 인제 자주 와서 못 뵙게 될지 몰라요."

마침내 주만은 입을 열었다.

"녜?"

아사달은 제 귀를 의심하는 모양이었으나 뒤미처,

"길이 그렇게 멀다니 어떻게 자주 오실 수야……."

"길이야 백 리면 어떠하고 천 리면 어떠해요……."

하고 주만은 불 같은 입김을 내쉬었다.

"그러면 무슨 딴 일이 생겼습니까."

아사달의 묻는 말씨도 급하였다.

이 아름다운 동정자, 이 곰살궂은 은인까지 자주 못 보게 된다면 너무도 쓸쓸해질 제 생활이 아니냐. 나그네의 사막에 핀 한 송이 꽃! 그것마저 없어진다면 너무도 보송보송하고 메마른 그날 그날이 아니냐.

"나, 나는 저, 정혼을 했답니다."

주만은 더듬거리면서도 분명히 제 할 말을 하고야 말았다.

"네, 정혼?"

아사달의 대답도 허둥지둥하였다.

"쉬이 시집을 가게 되겠단 말씀예요."

주만은 아사달이 잘 못 알아들은 줄 알고 또 한번 재우치고 어둠 속에서도 얼굴을 떨어뜨리었다.

"그, 그러시다면……."

하고 아사달은 말문이 꽉 막히는 듯하였다.

"그러시다면 인제는 참 또 오시기……."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자기만 찾아 줄 그가 아니요, 자기만 돌보아 줄 그가 아닌 것을 아사달도 번연히 알건마는 어쩐지 마음 한 모서리가 허수하게 비어 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처녀가 왜 이 말을 하는고. 자기가 시집을 가고 안 가는 것을 왜 나에게 알리는고. 거기 깊은 뜻이 있는 듯도 싶었지만, 다시 생각하면 무두무미하게 발길을 뚝 끊어 버리면 궁금해할까 보아 미리 가르쳐 주는 아름다운 마음씨에 지나지 않는 듯도 싶었다.

"또 오기야 또 오지만 몇 번을 더 오게 될지……."

주만의 목소리는 눈물이 거렁거렁 고이었다.

"앞으로 단 한 번이라도 더 오실 수가 있다면야!"

아사달은 반색을 하다가,

"나도 인제는 이만큼 회복이 되었으니 염려를 놓으셔도 괜찮기야 합니다마는!"

서운한 가락을 띠었다.

"나도 몇 달만 애를 더 쓰면 이 탑을 끝을 낼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도 곧 부여로 돌아가게 되겠습니다."

주만의 방문조차 끊어진다면 그는 한시바삐 일을 서둘러야 한다. 사랑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곧 부여로 돌아를 가셔요."

주만의 가슴엔 무엇이 뜨끔하게 맞치는 듯하였다.

"그렇게 쉽사리 일이 끝이 날까요."

"이젠 삼층도 대모한 것은 거진 끝이 났으니 잔손질만 하면 고만입니다. 일만 착실히 하고 보면 오래지 않아 손을 떼게 될 것 같습니다."

'그도 간다. 그도 갈 날이 얼마 남지를 않았구나. 그런데 나는, 나는…….'

주만은 속으로 외우쳤다.

60[편집]

"공사만 끝나면 곧 서라벌을 떠나실 작정이군요."

주만은 아까 아사달의 말이 마음에 키이는 듯 또다시 물었다.

"여러분의 후의와 신세진 것을 생각하면 얼마를 더 있어도 정이 남습니다마는 공사가 끝난 다음에야 한시바삐 그리던 고장으로 돌아가야지요."

아사달은 솔직하게 제 진정을 털어 내었다. 대공을 이룬 다음에야 하루인들 서라벌에 머뭇거릴 필요가 어디 있느냐.

그러나 주만에게는 그 솔직한 대답이 너무도 몰풍스럽고 매정스러웠다. 그는 내가 있는 이 서라벌이 그렇게 지긋지긋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선히 발길을 돌릴 수 있는가.

아아! 그에게는 내란 사람이 아무 상관도 없구나!

"부여가 서라벌보담 그렇게 좋아요."

주만의 이 말 한마디에는 만 가지 한과 원이 품겼으리라.

그러나 그런 줄이야 아사달은 꿈에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렇게 좋을 거야 무엇 있겠습니까. 그야 서라벌에 대면 시골두메지요마는 사람이란 제가 나고 자란 고향이 그리운 것이랍니다."

"거기는 사자수가 흐른다지요. 맑고 깊은 강이."

"강만은 서라벌보담 나은지 모르지요."

"그 강을 에두르고 부여란 큰 서울이 있었더라지요."

"옛날의 번화한 자취가 이제는 쑥밭이 되었지만 그때나 이때나 한결같이 흐르는 사자수는 언제든지 아름답고 구슬픈 꿈을 자아내는 듯하지요."

"그래 우리 서라벌의 남내와 모기내보담 큽니까."

"크기로도 남내와 모기내의 여러 갑절입니다마는 첫째 깊고 맑고."

"나도 그 사자수를 좀 구경을 하였으면, 나도 그 아름다운 물가에 살아 보았으면!"

하고 주만은 한숨을 휘 내어쉬다가 갑자기 소용돌이치는 정열을 걷잡지 못하는 듯이,

"가실 때 나를 데려가 주셔요. 나도 가요, 나도 가요. 아사달님을 쫓아서 나도 갈 터예요. 네 아사달님. 제발 나를 데려가 주셔요. 아사달님의 고향으로 나를 데려가 주셔요."

잠깐 뜸하였던 바람은 다시 세차게 불기 시작한다. 하늘은 먹을 갈아 부은 듯이 캄캄해졌다.

주만은 펄렁거리는 옷자락을 여미지도 않고 이제란 이제야말로 이속에 쌓이고 쌓인 충정을 쏟아 놓기 시작하였다.

"네, 아사달님, 나를 꼭 데리고 가셔야 됩니다. 나를 버리고 가신다 해도 나는 아사달님을 찾아갈 터입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찾아가고야 말 것입니다."

아사달은 이 정열의 회오리바람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이 부여로 가시다니 말이 됩니까. 이 좋은 서울을 버리시고……."

"난 서울도 싫어요. 아사달님이 안 계시는 서울은 무덤 속같이 쓸쓸해요."

"부모님도 버리시고……."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것이야 슬프지만 다른 데 시집을 가는 것보담 낫지 않아요."

아사달은 휘술레를 돌리이는 것처럼 머리가 핑핑 내어둘리었다.

"아무리 멀리 구슬아기님이 부여로 가신다 해도 이손 댁에서 그냥 두실 리 만무한 일……."

"그냥 안 두시고 설마 나를 어떡하실까."

"이런 서울에 사시다가 그런 두메에 어떻게 숨어 사십니까. 그런 생각을랑 아예 마십시오. 그런 말씀을랑 아예 마십시오."

"서울이면 어떠하고 두메면 어떠해요. 아사달님이 가시는 데라면 어디라도 좋아요. 물 속에라도 불 속에라도."

"구슬아기님,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아사달님이 안 된다 하셔도 이제는 틀렸습니다. 아무리 나를 떼치시려 하셔도 인제는 때가 늦었습니다. 이 몸은 아사달님의 그림자. 아사달님이 서나 앉으나 따를 그림자. 아사달님이 오나 가나 붙어다닐 그림자. 이 몸이 죽기 전에는 이 몸이 재가 되기 전에는 아사달님을 놓치지 않을 터예요. 아이지 않을 터예요."

그렇게 몹시 불던 바람도 별안간 무엇에 주눅이 든 듯 뚝 그치며 우르르 우레가 호통을 친다. 문득 먹장 같은 구름을 찢고 번개가 번쩍 하며 줄불을 터뜨리자 그 어마어마한 불칼로 하늘을 동강이를 내는 듯 무서운 음향이 일어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다.

번쩍 하고 눈 속을 스쳐가는 광채 가운데서 두 남녀는 일찰나 마주보았다.

주만의 얼굴도 핏빛이었다. 아사달의 얼굴도 핏빛이었다. 후닥뚝닥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