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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21장~4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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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분해하는 김종렬을 향하여,

“그러나 그런 온당치 못한 일을 해서야 쓰겠나. 참아야지.”

“아니올시다. 벌써 삼 년 동안이나 참았습니다” 하고 기어이 배학감을 배척하고야 말려 한다. 김종렬은 말을 이어,

“이렇게 이백여 명 용감한 청년들이 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이제는 일보도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주께서 허하지 아니하시면 할 수 있소?”

김종렬은 ‘교주’란 말을 듣고 얼마큼 낙심하였다. 한참 고개를 기웃기웃하고 생각하더니,

“그러니까 퇴학합지요. 경성학교가 아니면 학교가 없어요?”

“그러나 아무리 고식한 일이 있어도 동맹 퇴학은 온당치 아니하시. 또 모교를 떠나기가 어렵지 아니한가?”

“모교가 무슨 모교오니까. 이전 박선생님께서 교장으로 계시고, 윤선생님께서 학감으로 계실 때에는 모교였지마는…… 지금은 학교에 대하여 정이란 조곰도 없습니다. 교장이라는 어른은 아무것도 모르시지요…… 학감이라는 자는 기생집에만 다니지요……” 하고 김종렬의 눈에는 분한 기운이 오른다. 이희경은 ‘학감이란 자’라는 말을 듣고 김의 옆을 찌르며,

“여보, 그게 무슨 말이오?”

“어째! 그따위 학감을 무어라고!”

형식은 근심하는 빛으로,

“그러면 지금 교장 댁으로 가려 하오?”

“녜, 교장어른 가 뵈옵고, 열점쯤 해서 교주 댁으로 가렵니다. 교주는 열점이나 되어야 일어난다니까……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저희 일에 동정하십니까?”

“내가 교사의 몸이 되어 동정하고 말고를 말할 수가 없지마는 다시 생각하여서 일이 없도록 하여야지” 하고 두 청년을 돌려보냈다. 형식도 마음으로는 무론 배학감의 배척에 찬성하였다. 교실에서 무슨 말하던 끝에 혹 그 비슷한 말을 한두 번 한 적도 있었다. 사백여 명 학생과 십여 명 교원 중에 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도 없었다. 교원들도 아무쪼록 배학감과 말을 아니하려 하고 학생들도 길가에서 만나면 못 본 체하고 지나간다. 누군지 모르나 익명으로 배학감에게 학감 사직의 권고를 한 자도 있고, 혹 배학감이 맡은 역사나 지리 시간에 칠판에다가 ‘배학감을 교장으로 할사, 배학감은 천하 제일 역사 지리사라’ 하는 등 풍자하는 글을 쓰고, 혹 뒷간에다가 ‘배학감 요리점이라’ 하고 연필로 쓴 어린 글씨는 아마 일이년급 학생이 배학감에게 ‘너도 사람이냐’ 하는 책망을 받고 나와 분김에 쓴 것인 듯. 교사치고 별명 없는 이가 없거니와 배학감은 그 중에도 가장 별명이 많은 사람이라. 다른 교사의 별명은 다만 재미로 짓는 것이로되, 배학감의 별명은 미움과 원망으로 지은 것이라. 얼굴이 빨개지며 ‘너도 사람이냐’ 하는 혹독한 책망을 받은 어린 학생들은 당장은 감히 대답을 못하되, 문 밖에만 나서면 혀를 내어밀고 (제가) 특별히 (짓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남이 지어 놓은 별명을) 새 별명을 이삼 차 부르고야 얼마큼 분이 풀린다. 어린 학생들은 이 별명이라는 방법으로 혹독한 배학감에게 대한 분풀이하는 약을 삼았다. 그러므로 여러 학생이 한꺼번에 배학감에게 ‘너희도 사람이냐’ 하는 책망을 받은 때에는 일동이 한곳에 모여앉아, 마치 큰절에서 아침에 중들이 모여앉아 염불하듯이 배학감의 별명을 있는 대로 부른다. 한참이나 열이 나서 별명을 부르다가 적이 속이 시원하게 되면, “와, 와라, 후레, 라후레” 하고 모든 별명 중에 가장 (그) 경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별명을 부르고는 박장을 한다.

별명 중에 제일 유세력한 것이 셋이니, 즉 암펌, 여우 및 개다. 암펌이라 함은 혹독하다는 뜻이요, 여우라 함은 간특하다는 뜻이어니와, 개라 함은 자못 뜻이 깊다. 첫째, 배학감이 교주 김남작의 발을 핥고 똥을 먹으며 독일식 정탐견 노릇을 한다 함이니, 배학감은 아랫사람에게 대하여 혹독하게 하던 것과 달라, 자기보다 한층 높은 사람을 대하여서는 마치 오래 먹인 개가 그 주인을 보고 꼬리를 두르며 발굽을 핥는 모양으로 국궁돈수(鞠躬頓首)가 무소부지(無所不至)며, 조곰 아랫사람에게 대하여서는 일부러 몸을 뒤로 젖히고 혀가 안으로 가들어(기어)들다가도 한층 윗사람 앞에 나아가면 전신의 근육이 탁 풀어져 고개와 허리가 저절로 굽어지며 혀의 힘줄이 늘어나 말에 ‘하시옵’, ‘하옵시겠삽’ 같은 경어란 경어를 있는 대로 주워다가 바친다. 이리하여 용하게도 교주 김남작의 신용을 얻어 배명식이라면 김남작의 유일한 청년 친구라. 이리하여 배학감은 동료와 학생 간에는 지극히 비평이 나쁘되, 김남작을 머리로 하여 소위 상류계급에는 지극히 신용이 깊다. 이러므로 아무리 동료와 학생들이 배학감을 배척하여도 배학감의 지위는 반석같이 공고한 것이라. 둘째, 동료 중에 자기의 시키는 말을 듣지 아니하거나 또는 자기를 시비하는 자가 있거나, 혹 이유는 없으되 자기의 눈에 밉게 보이는 자가 있으면 곧 교주에게 품하여 이삼 일 내로 축출 명령이 내린다. 이리하여 아까 김종렬이가 사모하던 박교장과 윤교감을 내어쫓고 지금 교장과 같이 숙맥불변하는 노인을 교장으로 삼고 자기가 학감의 중임을 맡아 교내의 모든 사무를 온전히 제 마음대로 하게 된 것이라. 이리하여 학교에 있던 교사 중에 적이 마음 있는 자는 다 달아나고 다른 데 갈 데가 없다든가, 배학감의 절제를 달게 받는 사람만 남게 되어 학교는 점점 말이 못되게 되었다. 그러나 다만 형식은 동경 유학생인 까닭에 배학감도 과히 괄시를 아니하고, 또 형식도 자기까지 떠나면 학교가 말이 아니리라 하여 아직 남아 있는 것이라.

이렇게 배학감은 전교내의 배척을 받아 오던데다가 근래에는 무슨 심화가 생겼는지 다동 구리개 근방으로 부지런히 청루를 방문하는 사실이 발각되어 이번 소동이 일어난 것이라.

형식은 ‘방관할 수 없고나’ 하고 곧 학교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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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될 수만 있으면 이 일을 무사하게 되도록 하리라 하고 학교에 가는 길에 생각하였다. 이 일의 원인은 온전히 배학감에게 있으니 우선 배학감을 보고 이러한 말을 한 후에 이로부터 몸을 삼가도록 권하리라 하였다. 배학감은 무론 이형식이가 자기의 휘하에 들지 아니함을 항상 미워하여 표면으로는 친한 (체 존경하는) 체하건마는 이면으로 어떻게 하든지 핑계를 얻어 눈껍질에 흙(눈 속에 못) 같은 이형식을 경성학교에서 내어쫓으리라 한다. 형식도 아주 이런 줄을 모름이 아니로되 그러나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는 사람은 같고 아니 같고, 사오 년래 친구로 사귀어 온 배명식을 위하여 불가불 자기가 힘을 쓰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하였다.

교문에 들어서니 일이년급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다가 형식을 보고 모여들어,

“선생님, 오늘 놉니까. 저희도 놀아요?” 하고 삼사년급에서도 노는데 자기도 놀기를 바란다고 한다. 형식은 사무실에 들어갔다. 배학감은 매우 성이 났는지, 그렇지 아니해도 뾰족한 얼굴이 더욱 뾰족하게 되어서 형식이가 들어오는 것도 본체만체, 형식도 배학감에게는 인사도 아니하고 곁에 앉았는 다른 교사들에게만 인사를 하였다. 다른 교사들은 각각 앞에다가 분필통과 교과서를 놓고 벌써 아홉시에 십여 분이 지났건마는 교실에 들어갈 생각도 아니한다. 형식은 무슨 풍파가 있던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어째 시간에들 아니 들어가셔요?” 하였다. 한 교사가,

“웬일인지 삼사년급 학생은 하나도 아니 왔구려” 하고 일동은 학감을 본다. 형식은 물끄러미 학감을 보다가 그 곁으로 가까이 가서 선 대로,

“학감? 학교에 큰일이 났구려.”

“나는 모르겠소” 하고 (학감은) 얼굴을 돌이킨다. 형식은 말을 나직이 하여,

“무슨 선후책을 해야 아니하겠소. 이렇게 앉았으면 어떻게 해요?”

“글쎄, 이게 웬일이오. 이 되지 아니한 자식들이―이 삼사년급 놈들이 왜 오지를 아니하오?”

형식은 네가 아직 모르는구나 하였다. 삼사년급 일동이 동맹 퇴학을 한단 말을 할까말까 주저하다가 먼저 알고 잠자코 있음이 도리어 도리가 아니라 하여,

“모르시구려, 아직도.”

“무엇을 말씀이오?”

“삼사년급 학생들이 동맹 퇴학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교장과 교주에게 퇴학 청원서를 제출하였다는데…….”

“무엇이오? 동맹 퇴학?” 배학감도 이 일에는 얼마큼 놀라는 모양이라. 자기의 신학설의 교육도 그만 실패하였다. 곁에 있던 교사들도 모두 놀라서 자리를 떠나 학감의 곁으로 모였다. 학감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알으셨소?”

“아까 어떤 학생들이 퇴학 청원서를 가지고 나한테 왔습데다그려. 교장 댁으로 가는 길이노라고.” 이렇게 말하고 형식은 흠칫하고 저 혼자 놀랐다. 이러한 말을 공연히 하였구나 하였다.

배학감은 독기 있는 눈으로 물끄러미 형식을 보더니 벌떡 일어나며,

“잘하였소. 노형은 철없는 학생들을 충동하여 학교를 망하게 하시구려!” 하고 형식을 흘겨본다. 배학감도 평상시에 학생들이 자기보다 도리어 형식을 존경하여 자기는 방문하는 학생이 없으되 형식을 방문하는 학생이 많은 줄을 알고 늘 시기하는 마음으로 있었다. 그러고 학생들이 형식을 따르는 것은 형식의 인격이 자기보다 높고 따뜻함이라 하지 아니하고, 형식이가 학생을 유혹하는 수단이 있고 학생들이 형식에게 속아서 따름이라 하였다. 학감은 속으로 ‘형식이가 학생들을 버린다’ 하여 자기 보는 데서 학생들이 친절하게 형식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매양 불쾌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학생들이 마땅히 존경하여야 할 사람은 자기어늘, 자기를 존경하지 아니하고 형식을 존경함은 학생들이 미련하여서 그럼이라 하였다. 학생들이 점점 더욱 자기를 배척하게 되는 것을 볼 때에 배학감은 이는 형식이가 철없는 학생들을 유혹하여 고의로 자기를 배척하려 함이라 하였다. 배학감이 한번 어떤 사람을 대하여 ‘형식은 학생을 시켜 자기를 배척하고 제가 교감이 되려는 야심을 두었다’ 한 일이 있었다. 이번에도 형식이가 어떤 학생이 퇴학 청원서를 가지고 자기 집에 왔더란 말을 듣고, 이 일도 형식이가 시킨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형식, 잘하셨소!” 한다.

형식은 자기의 호의를 도리어 곡해하는 것이 분하여 성을 내며,

“노형은 당신의 간교한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판단하시구려. 나는 어디까지든지 호의로 노형과 학교를 위하여 만사가 순하게 되어 가기를 바라고 한 말인데, 노형은 도리어…….”

형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학감은 더욱 얼굴을 붉히고 한 걸음 형식의 곁에 가까이 오며,

“여보, 이형식 씨. 내가 이전부터 노형의 수단을 알았소. 이 알고도 참았소. 여태껏 사오 차나 학생들이 학교에 대하여 반항한 것도 다 노형의 수단인 줄을 내가 아오. 노형은 이 학교를 멸망을 시키고야 말 테란 말이오?” 하고 ‘멸망’이란 말에 힘을 주며 주먹으로 책상을 친다. 형식은 기가 막혀 깔깔 웃으며,

“여보, 배명식 씨. 나는 아직도 노형은 사람인 줄을 알았구려” 하고는 형식도 와락 성을 내어 말소리를 떨며, “노형은 친구의 호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오. 내가 그 동안 학생과 교원 사이에 서서 얼마나 노형을 위하여 힘을 쓴지 아시오? 노형을 변호한지 아시오?”

“흥, 변호! 말은 좋소. 어린 학생들은 좋소. 어린 학생들을 시켜 학교에 대하여 반항이나 일으키게 하고, 어디 노형의 힘이 얼마나 큰가 봅시다” 하고 모자를 벗겨 들고 인사도 없이 문 밖으로 나간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흥, 또 교주 각하께 가는구나” 하고 픽 웃었다. 형식은 분을 참지 못하여 왔다갔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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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들은 “이제는 형식도 경성학교에서 쫓겨나리라” 하면서, 왔다갔다하는 형식을 보고 교원 중의 하나가,

“그런데 이번에는 학생들의 이유가 무엇인가요.”

형식은 대답하기 싫은 듯이 한참이나 들은 체 만 체하고 마당을 내다보다가 펄썩 제자리에 걸터앉아 책상 서랍을 뽑아 그 속에 있는 책과 종잇조각을 집어내며,

“무슨 이유야요, 그 이유지요.”

다른 교원 하나가,

“불문가지지요. 아마 이번 배학감과 월향의 사건이겠지요” 하고 찬성을 구하는 듯이 형식을 보며, “그렇지요?” 한다. 형식은 책상 서랍에서 집어낸 종잇조각을 혹 찢기도 하고 혹 읽어 보다가 접어 놓기도 한다. 셋째 교원이,

“학감과 월향의 사건?”

“모르시오? 학감과 월향의 사건이라고 유명합데다. 근래에 월향이란 기생이 화류계에 썩 유명합니다. 평양서 두어 달 전에 왔다는데 얼굴은 어여쁘지요, 글은 잘하지요, 말을 잘하지요. 게다가 거문고와 수심가가 일수라는구려. 그래서 장안 풍류 남아가 침을 흘리고 들어덤빈다는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어요. 아직 아무도 그를 손에 넣어 본 사람이 없다는구려.”

정직하여 보이는 교원 하나가 말에 취한 듯이,

“손에 넣다께?”

“하하하하, 참 과연 도덕 군자시로구려. 퍽 여러 사람이 월향이를 손에 넣을 양으로 동치서주를 하고 야단들을 하나 봅데다마는, 거의 거의 말을 들을 듯 들을 듯해서 이편의 마음을 못 견디리만큼 자릿자릿하게 하여 놓고는 이편이 이제는 되었다 할 때에 ‘못하겠어요’ 하고 똑 끊는다는구려. 그래서 알 수 없는 계집이라고 소문이 낭자하지요.”

그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가,

“왜 그럴까요?”

“내니 알겠소? 남들이 그럽데다그려!”

카이젤 수염 있는 교사가,

“노형도 한두 번 거절을 당하였나 보구려…… 그래 가슴이 따끔합디까. 하하하하.”

“천만, 나 같은 사람이야 그러한 호화로운 화류계와는 절연이니까…… 참, 나야 깨끗하지요. 하하하.”

“누가 아나” 하고 한 교사가 웃으니 여러 사람이 다 웃는다. 그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도 웃기는 웃으나 더 알고 싶어하는 듯이 마치 학생이 교사에게 질문하는 모양으로,

“그래서? 그래, 어떻게 되었어요?” 할 제 카이저 수염 가진 이가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의 어깨를 툭 치며,

“노형께서는 미인의 일이라면 노상 범연치는 아니하구려” 하고 껄껄 웃으니,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는 얼굴이 빨개진다. 월향의 말을 하던 교사가 담배를 붙이면서,

“그런데, 이 배학감께서 그만 월향 씨의 포로가 되었지요. 아마 십여 차나 졸랐던가 봅데다. 암만 조르니 듣소? ‘아니올시다’ 하고는 거의거의 들을 듯 들을 듯하다가는 그만 발길로 툭 차는구려. 그래서 지금 배학감은 열이 났지요. 오늘 아침에도 뾰족해서 오지 않았습디까” 하고 머리를 훔치며, “그게 어젯저녁에도 월향이한테 발길로 채인 표야요.”

“옳지 옳지? 어째 근래에는 얼굴이 더 뾰족하여졌다 하였더니 옳지 옳지 그런 일이로구려, 응?” 하고 카이저가 웃는다.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는 더 물어 보고 싶으면서도 남들이 웃기를 두려워하여 잠잠하고 앉았다. 지금껏 가만히 듣기만 하고 빙긋빙긋 웃던 이가,

“그런데 그런 줄을 학생들이 알았는가요? 이번 퇴학 청원한 이유가 그것인가요?”

“그것은 모르겠소” 하고 ‘형식이 너는 알겠구나’ 하는 듯이 형식을 본다. 형식은 여전히 종잇조각을 조사하는 체하면서도 다른 교사들의 말을 듣는다. 형식은 그 월향이라는 기생이 혹시 박영채가 아닌가 하였다. 말하던 교사가 형식이가 잠잠한 것을 보고 말을 이어,

“자세히는 모르지요마는, 아마 그것이 이번 퇴학하는 이율 테지요” 하고 형식의 너무 잠잠한 데 말하던 흥이 깨어져 말을 그치고 담배 연기로 공중에 글자만 쓴다.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가 참다 못한 듯,

“학생들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카이저 수염이,

“학생들이, 학생들이 잘 모르오리다. 그 군들이 교사들 정탐을 어떻게 하는데 그러오! 교사들 뒷간에 가는 것까지 다 알지요. 얼른 보기에 아주 온순한 체,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지마는 저희들 중에도 경찰서도 있고 정탐도 있답니다. 이번에도 아마 학감이 월향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어떤 학생이 경찰을 하였던 게지…….”

“하하하, 그만 등시포착이 된 심이로구려.”

이렇게 여러 교원이 말하는 것을 듣더니, 담배 연기로 공중에 글자를 쓰던 교사가 암만하여도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는 듯이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 불을 끄며,

“이러하구려” 하고 말을 낸다. “학감이 암만하여도 견딜 수가 없어서 요새에는 단연히 그 기생을 낙적(落籍)을 시켜서 아주 자기 손에 집어넣으려는 생각이 났나 봅데다. 그런데 거기도 경쟁자가 많지요. 갑이 삼백 원 하면, 을은 사백 원 하고, 또 병은 오백 원 하고 이 모양으로 아마 한 천 원 올라갔나 봅데다. 그러나 학감이야 집까지 온통 팔면 삼백 원이나 될는지…… 도저히 금력으로야 경쟁할 수가 없지 않소? 하니까 명망과 정성으로나 얼러 볼 양으로 매일 밤 월향 아씨게 참배 기도를 하는 모양인데 엊그저께 어떤 장난꾼 학생이 뒤를 따랐던가 봅데다” 하고 웃는다. 일동은 아주 재미있는 듯이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학감과 월향의 장차 되어 갈 관계를 상상한다. 형식은 책상 위에 벌여 놓은 종잇조각을 다 치우지 아니하고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그 종잇조각을 도로 책상 서랍에 부리나케 와락 집어넣고 일동에게 인사하고 나간다. 일동은 형식을 보내고 시계를 쳐다보며 하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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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교문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하였다. 그 월향이란 것이 영채가 아닌가. 원래 평양 기생으로 얼굴이 어여쁘고 아직 아무도 그를 손에 넣은 사람이 없다 하니 그가 과연 영채인가. 영채가 월향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어 이삼 삭 전에 서울에 올라와 지금 화류계에 유명하게 되었는가. 그러나 아무도 일찍 그를 손에 넣어 본 자가 (없다 하니, 그러면 나를 생각하여) 절행을 지킴이 아닌가. 옳다, 그렇다. 그가 나를 위하여 절행을 지킴이로다. 그런데 그가 마음대로 손에 들지 아니하므로 돈 많은 호화객들이 그를 아주 제 소유를 만들려 하여? 저 배학감 같은 자가 다 영채를 제 손에 넣으려 하여? 만일 영채가 잘못되어 배명식 같은 짐승 같은 자의 손에 든다 하면 그의 일생이 어떻게 될까. 배명식 같은 자가 무슨 사람에게 대한 동정이 있을까. 다만 일시 색에 취하여 더러운 욕심을 채울 양으로 영채를 장난감을 삼으려 함이로다. 더구나 배명식은 삼 년 전에 동경으로서 돌아와 칠팔 년간 홀로 자기를 기다리고 늙어 오던 본처에게 애매한 간음이라는 죄명을 씌워 이혼하고 작년에 어떤 여학생과 새로 혼인을 한 자다. 신혼한 일년이 차지 못하여 벌써 다른 계집에게 손을 대려 하는 그런 무정한 놈의 첩이 되어? 내 은인의 딸이! 못 될 일이로다. 못 될 일이로다 하였다. 사오 인의 경쟁자가 있다 하고 배명식도 거의 밤마다 영채를 찾아간다 하니 그 육욕밖에 모르는 짐승 같은 사람들의 새에 끼여 영채는 얼마나 괴로워하는고. 어제 영채가 나를 찾아옴도 이러한 괴로움을 견디다 못하여 마침내 내게 의탁할 양으로 온 것이 아닐까. 와서 내 의복과 거처가 극히 빈한함을 보매, 나에게 구원을 청하여도 무익할 줄을 알고 중도에 말을 그치고 돌아갔음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의 빈한함이 더욱 슬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과연 형식은 영채를 구원할 자격이 없다. 만일 월향이라는 기생이 진실로 영채라 하면 과연 형식은 영채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 ‘천 원 이상에 올라갔나 봅데다’ 하는 아까 어느 교사의 하는 말을 생각하고 형식은 한숨을 쉬었다. ‘천 원!’ 내가 만일 영채를 구원하려 하면―그 짐승 같은 사람들에게서 영채를 구원하여 사람다운 살림을 하게 하려면 ‘천 원’이 있어야 하리로다. 그러나 내게는 천 원이 있는가 하고 형식은 자기의 재산을 생각하여 보았다. 형식의 재산은 지금 형식의 조끼 호주머니에 있는 반이나 닳아진 돈지갑뿐이라. 그 돈지갑은 십 원짜리 지표를 가득하게 넣어도 이삼백 원이 들어갈까말까 한 것이라. 아직 형식의 돈지갑에는 한번에 백 원을 넣어 본 적도 없다. 일찍 동경서 졸업하고 올 때에 어떤 친구의 호의로 양복값, 노비 합하여 팔십 원을 넣어 본 적이 있을 뿐이니, 이것이 형식의 일생 두고 처음으로 많은 돈을 가져 본 경험이라. 동경서 돌아온 지가 사오 년이니, 매삭에 십 원씩만 저금을 하였더라도 오륙백 원의 저축은 있으련마는 형식은 아직도 이 생활을 자기의 진정한 생활로 여기지 아니하고 임시의 생활, 준비의 생활로 여기므로 몇 푼 아니 되는 월급을 저축할 생각은 없이 제가 쓰고 남는 돈은 가난한 학생에게 나눠 주고 말았다. 그러나 형식은 책을 사는 버릇이 있어 매삭 월급을 타는 날에는 반드시 일한서방에 가거나, 동경 마루젠 같은 책사에 사오 원을 없이하여 자기의 책장에 금자 박힌 책이 붇는 것을 유일의 재미로 여겼었다. 남들이 기생집에 가는 동안에, 술을 먹고 바둑을 두는 동안에, 그는 새로 사온 책을 읽기로 유일한 벗을 삼았다. 그래서 그는 붕배간에도 독서가라는 칭찬을 듣고 학생들이 그를 존경하는 또한 이유는 그의 책장에 자기네가 알지 못하는 영문, 덕문의 금자 박힌 책이 있음이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우리 조선 사람의 살아날 유일의 길은 우리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에 가장 문명한 모든 민족, 즉 우리 내지(일본) 민족만한 문명 정도에 달함에 있다 하고, 이리함에는 우리나라에 크게 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야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하기를, 이런 줄을 자각한 자기의 책임은 아무쪼록 책을 많이 공부하여 완전히 세계의 문명을 이해하고 이를 조선 사람에게 선전함에 있다 하였다. 그가 책에 돈을 아끼지 아니하고 재주 있는 학생을 극히 사랑하며 힘있는 대로 그네를 도와 주려 함도 실로 이를 위함이라.

그러나 ‘천 원’을 어찌하는고 하고 형식의 마음은 괴로웠다. 전달에 탄 월급 삼십오 원 중에 오 원은 플라톤 전집 값으로 동경 책사에 부치고 십 원은 학생들에게 갈라 주고, 팔 원은 주인 노파에게 밥값으로 주고, 이제 그 돈지갑에 남은 것이 오 원 지표 한 장과 은전이 좀 있을 뿐이라. 아아, ‘천 원’을 어찌하는가 하고 형식의 마음은 더욱 괴로워 간다. ‘천 원! 천 원!’ ‘천 원’이 어디서 나는가. 형식은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천 원이 어디서 나는가” 하고 소리를 내어 탄식하였다. 이렁저렁 교동 자기 숙소 앞에 다다랐을 때에 어떤 청년 이삼 인이 모두 번쩍하는 양복에 반쯤 취하여 비스듬히 인력거를 타고 기생을 앞세우고 기운차게 방울을 울리며 철물교를 향하여 내어닫는다. 형식은 성큼 뛰어 인력거를 피하여 주고 우뚝 서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여섯 채 인력거를 보고, “천 원이 있기는 있구나!” 하였다. 과연 지금 기생을 앞세우고 인력거를 몰아가는 청년들에게는 ‘천 원’이 아니라 ‘만 원’도 있기는 있다. 형식은 이윽히 그 자리에 섰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바람 한 점 아니 들어오는 자기의 숙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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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가니 노파가 점심을 짓다가 부엌으로서 나오며,

“어째 오늘은 이르셔요? 학교가 없어요?”

형식은 모자와 두루마기를 방에 홱 집어던지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옷고름을 끄르고 부채를 부치며 화나는 듯이,

“흥, 삼사년급 학생들이 동맹 퇴학을 하였답니다.”

“또? 또 배학감인가 한 양반이 어떤 게로구면” 하고 치마로 땀을 씻으며 형식의 얼굴을 보더니,

“왜? 어디가 불편하셔요?”

“아니오.”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구려. 에그, 그 학교에서 나오시오그려. 밤낮 소동만 일어나고. 소동이 일어날 때마다 늘 심로를 하시면서 무엇하러 거기 계세요?” 하고 건넌방 그늘진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형식은 한참이나 화를 못 이기는 듯이 함부로 부채질을 하더니,

“그까짓 학교 일 같은 것은 심상하외다. 걱정도 아니합니다.”

“그러면 또 무슨 일이 있어요? 무슨 다른 일이?”

형식은 벌떡 누워 다리를 버둥버둥하면서 혼자말 모양으로,

“암만해도 돈이 있어야겠어요?”

“호호호, 이제야 아시는가 보구려. 아 이 세상이 돈 세상이랍니다. 나 같은 것도 돈이 있으면 이렇게 고생도 아니하련마는…….”

“그만한 고생은 낙이외다.”

“에그, 남이란 저렇것다. 나도 벌써 육십이 아니어요. 조곰만 무엇을 하면 이렇게 허리가 아픈데, 허리가 아프도록 고생을 하니 누가 위로하여 주는 이가 있을까…… (병신일망정 아들 자식 하나가 있을까……) 목숨 모질어서 그렇지 나 같은 것이 살면 무엇 하겠어요” 하고 담뱃대를 깨어져라 하고 돌에다 톡톡 떨어 또 한 대를 담아 지금 떨어 놓은 담뱃재에 대고 힘껏 두어 모금 빨더니 와락 화를 내며, “담뱃불까지 말을 아니 듣는구나” 하고 담뱃대를 방 안에 내어던지고 짓던 점심이나 지을 양으로 다시 부엌으로 들어간다.

형식은 노파의 하는 말과 하는 모양을 보고 혼자 웃었다. 저마다 제 걱정이 있고 또 제 걱정이 세상에 제일 큰 걱정인 줄로 믿는다 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다 아무라도 그러한 걱정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아들이 없어 걱정, 벼슬을 못 해 걱정, 장가를 못 들어 걱정, 혹 시집을 못 가서 걱정, 여러 가지 걱정이 많으되 현대 사람의 걱정의 대부분은 돈이 없어서 하는 걱정이라 하였다. 돈만 있으면 사람의 몸은커녕 영혼까지라도 사게 된 이 세상에 세상 사람이 돈을 귀히 여김이 그럴듯한 일이라 하였다. ‘아아, 천 원! 천 원이 어디서 나는가’ 하고 벌떡 일어나 방에 들어와 앉았다. 이 집이 천 원짜리가 될까 하였다. 또 책장에 끼인 백여 권 양장책이 천 원짜리가 될까 하였다. 옳지, 저 한 책의 저작권은 각각 천 원 이상이라 하였다. 나도 저만한 책을 써서 책사에 팔면 천 원을 받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 영문으로 글짓기를 공부하여 가지고 그렇게 된 뒤에 얼마 동안 저술에 세월을 허비하고, 그 원고를 미국이나 영국에 보내고, 미국이나 영국 책사 주인이 (그 원고를 한번 읽어 보고) 그 다음에 그 책사에서 그 원고를 출판하기로 작정하고, 그 다음에 그 책사 주인이 우편국에 사람을 보내어 이형식의 이름으로 천 원 환을 놓으면 그것이 배로 태평양을 건너와 경성우편국에 와…… 아이구 너무 늦다…… 그것을 언제…… 하였다.

형식은 또 생각한다. 저 책들을 사지 말고 학생들에게 돈도 주지 말고, 사오 년 동안 매삭 이십 원씩만 저금을 하였더면 오십 삭 치고 천 원은 되었으렷다. 옳다, 그리하였던들 이러한 근심은 없을 것을. 더구나 학생들에게 돈을 대어 준 것은 참 부질없는 일이었었다. 나는 정성껏 넉넉지도 못한 것을 저희에게 주건마는 받는 학생들은 마치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 줄로 여겨 좀 주는 시기가 늦어도 게두덜거리는 모양, 게다가 그것을 은혜로나 아는가. 그것들이 자라서 큰 인물만 되고 보면 자기 도움도 무슨 뜻이 있거니와 지금 같아서는 그놈이 그놈이라 별로 뛰어나는 천재나 위인도 있는 것 같지 아니하고…… 아아, 부질없는 짓을 하였구나. 저금을 하였더면 이런 걱정이나 없을 것을. 응, 이달부터라도 지금까지 주어 오던 학생에게 일체로 돈 주기를 거절할까 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 불쌍한 어린 청년들의 ‘이선생님’ 하고(하는) 모양이 눈에 암암하여 차마 그럴 수도 없고.

아아, 어쩌면 ‘천 원’을 얻는가. 만일 오늘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 원’을 가지고 가서 영채를 손에 넣으면 어찌할까. 혹 어젯저녁에 벌써 누가 ‘천 원’을 가지고 가서 영채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지나 아니하였는가. 그러면 어젯저녁에 벌써 십구 년 동안 지켜 오던 몸을 어떤 짐승 같은 더러운 놈에게 허하지나 아니하였을까. 처음에는 영채가 그 짐승 같은 놈을 떼밀치며, 울며 소리치며 반항하다가 마침내 어찌할 수 없이 몸을 허하지 아니하였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그 짐승 같은 몸이 육욕에 눈이 벌개서 불쌍하고 어여쁜 영채에게 억지로 달려드는 모양과 영채가 울고 떼밀고 죽기로써 저항하다가 마침내 으아 하고 절망하는 듯이 쓰러지는 모양이 형식의 눈앞에 역력히 보인다.) 형식은 분함과 슬픔으로 전신에 힘을 주고 숨을 길게 내어쉬었다. 또 생각하면 영채가 어떤 사람에게 팔린 줄을 알고 밤에 남모르게 도망하지나 아니하였는가. 도망을 한다 하면 장차 어디로나 갈 것인가. 어여쁜 얼굴! 지키는 이 없는 열아홉 된 어여쁜 처녀! 도처에 ‘천 원’ 가진 짐승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 영채는 도망이나 아니할까.

옳지! 영채가 그렇게 절조 굳은 영채가 제 몸이 어떤 사나이에게 팔린 줄을 알면! 그 골독한 마음으로 자살이나 아니하였을까.

‘자살? 자살?’ 하고 형식은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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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천 원’을 얻어 불쌍한 영채―사랑하는 영채―은인의 따님 영채를 구원할까…… 이럴까…… 저럴까 하고 마음을 정치 못하면서 오후 한시에 안동 김장로의 집에 선형과 순애의 영어를 가르치러 갔다. 장로는 어디 출입하여 집에 없고 장로의 부인이 나와서 형식을 맞는다. 부인이 선형과 순애를 데리러 안에 들어간 뒤에 형식은 교실로 정한 모퉁이 방에 혼자 앉아 두 제자의 나오기를 기다린다. 방 한편 구석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화상이 걸리고, 다른 한편에는 주인 김장로의 사진이 걸렸다. 아마 그 두 사진을 꽃으로 장식함은 선형, 순애 양인의 솜씨인 듯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로마 병정의 창으로 찔린 옆구리로서는 피가 흘러내린다. 그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그 눈은 하늘을 향하였다. 십자가 밑에는 치마 앞자락으로 낯을 가리고 우는 자도 있고 무심하게 구경하는 자도 있고 십자가 저편 옆에서는 병정들이 예수의 옷을 가지려고 제비뽑는 양을 그렸다. 형식은 물끄러미 이것을 보고 생각하였다. 십자가에 달린 자도 사람, 가시관을 씌우고 옆구리를 찌른 자도 사람, 그 밑에서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는 자나 무심하게 우두커니 구경하고 섰는 자도 사람, 저편에서 사람을 죽여 놓고 그 죽임받는 자의 옷을 저마다 가질 양으로 제비를 뽑는 자도 사람―모두 다 같은 사람이로다. 날마다 시마다 인생 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희극 비극이 모두 다 같은 사람의 손으로 되는 것이로다. 퇴학 청원을 하는 학생들이나 학생들의 배척을 받는 배학감이나, 또는 내나 다 같은 사람이 아니며, 저 불쌍한 영채나, 영채를 팔아 먹으려 하는 욕심 사나운 노파나 영채를 사려 하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나, 영채를 위하여 슬퍼하는 내나 다 같은 사람이 아니뇨. 필경은 다 같은 사람끼리 조금씩 조금씩 빛과 모양을 다르게 하여 네로다 내로다 하고, 옳다 그르다 함이 아니뇨. 저 예수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병정도 될 수 있고, 그 로마 병정이 예수도 될 수 있을 것이라.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이 어떠한 힘이 마치 광대로, 혹은 춘향을 만들고, 혹은 이도령을 만드는 모양으로, 혹은 예수가 되게 하고, 혹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르는 로마 병정이 되게 하고, 또 혹은 무심히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가 함이라. 이렇게 생각하매 형식은 모든 인류가 다 나와 비슷비슷한 형제인 듯하고, 또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지배되어 날마다 시마다 저희들의 뜻에도 없는 비극 희극을 일으키지 아니치 못하는 인생을 불쌍히 여겼다.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하는 것이 마치 신관 사또 남원 부사 된 광대가 제 뜻에는 없건마는 가련한 춘향의 볼기를 때림과 같다 하면 용서하지 아니하고 어찌하리요. 그럴진대 배학감도 그리 미워하는 것은 아니요,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예수를 죽여 달라 한 간악한 유태인도 그리 미워할 것은 아니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살려야 하겠다. 비록 이것이 연극 중의 일이라 하더라도 영채는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지 불현듯 일어나 형식은 예수의 화상을 보다가 눈을 돌이켜 멀거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장에는 파리 네다섯 놈이 저희도 인생과 같이 무슨 연극을 하노라고, 혹은 따르고 혹은 피하고, 혹은 앉았고 혹은 앞발을 비빈다. 형식은 고개를 숙이며 이 집에는 ‘천 원’이 있으련만 하였다. “선생님!” 하는 소리에 눈을 떠본즉, 선형과 순애가 책과 연필을 들고 문안에 들어와 섰다가 형식의 눈뜨고 고개듦을 기다려 은근하게 경례한다. 형식은 놀란 듯이 얼른 일어나 두 처녀에게 답례하였다. 그러고 웃으면서 쾌활하게,

“오늘은 어제보다도 더웁니다” 하고 선형과 순애에게 앉기를 권하고 자기도 양인과 상대하여 책상을 새에 두고 앉았다. 두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책을 편다. 형식은 두 처녀를 보매 얼마큼 뒤숭숭하던 생각이 없어지고 적이 정신이 쇄락한 듯하다. 형식은 고개 숙인 두 처녀의 까만 머리와 쪽찐 서양 머리에 꽂은 널따란 옥색 리본을 보았다. 그러고 책상에 짚은 두 처녀의 손가락을 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슬쩍 불어 지나갈 때에 두 처녀의 몸과 머리에서 나는 듯 만 듯한 향내가 불려 온다. 선형의 모시 적삼 등에는 땀이 배어 하얀 살에 착 달라붙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 붙은 자리가 넓었다 좁았다 한다. 순애는 치마로 발을 가리느라고 두어 번 몸을 들먹들먹하여 밑에 깔린 치마를 빼인다. 선형은 이마에 소스락소스락하게 구슬땀이 맺히어 이따금 치맛고름으로 가만히 씻고는 손으로 책상 밑에서 부채질을 한다. 형식은 아침부터 괴로움으로 지내 오던 마음속에 일점 향기롭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들어 옴을 깨달았다. 여자란 매우 아름답게 생긴 동물이라 하였다. 어깨의 동그스름한 것과 뺨의 불그레한 것과 머리터럭의 길고 까만 것과 또 앉은 태도와 옷고름 맨 모양과 그 중에도 널찍한 적삼 고름이 차차 좁아 오다가 가운데서 서로 꼭 옭혀 매여 위로 간 고는 비스듬히 왼편 가슴을 향하고 아래로 간 고름의 한끝이 훌쩍 날아 오른팔굽이를 지나간 양이 더욱 풍정이 있다. 이렇게 두 처녀를 보고 앉았으면 말할 수 없는 향기로운 쾌미가 전신에 미만하여 피 돌아가는 것도 극히 순하고 쾌창한 듯하다. 인생은 즐거우려면 즐거울 수가 있는 것이라, 아무 목적과 꾀도 없이 가만히 마주보고 앉았기만 하면 인생은 서로서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라. 여자의 몸이나 남자의 몸이나 내지 천지의 모든 만물이 다 가만히 보기만 하면 그새에 친밀한 교통이 생기고 따뜻한 사랑이 생기고 달콤한 쾌미가 생기는 것이라. 쓸데없이 지혜 놀리고 입을 놀리고 손을 놀림으로 모처럼 일러 놓은 아름다운 쾌락을 말못되게 깨트리는 것이라 하였다. 형식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두 처녀가 단번에 에이, 비, 시를 외워 쓰는 양을 보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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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처녀는 에이, 비, 시를 잘 외워 썼다. 선형은 어서 미국에 갈 생각으로, 순애는 아무에게나 남에게 지지 않게 많이 배울 생각으로 어제 종일과 오늘 오전에 별로 쉬일 틈 없이 에이, 비, 시를 외우고 썼다. 또 그들은 영어를 처음 배우게 된 것이 자기네가 학식이 매우 높아진 표인 듯하여 일종 유쾌한 자랑을 깨달았다. 선형은 자기가 좋은 양복을 입고 새깃 꽂은 서양 모자를 쓰고 미국에 가서 저와 같은 서양 처녀들과 영어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모양을 상상하고 혼자 웃었다. 자기가 영어를 잘하게 되면 자기의 자격도 높아지고 남들도 자기를 지금보다 더 사랑하고 존경하리라 하였다. 자기가 미국에 가서 미국 처녀들과 같이 미국 대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올 때에 그때에는 암만하여도 자기와 동행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러고 그 동행하는 사람은 남자요…… 키 크고 얼굴 번뜻한 남자요…… 미국서 대학교를 졸업한 남자라 하였다. 선형은 무론 일찍 그러한 남자를 본 적도 없고, 그러한 남자가 있단 말도 못 들었거니와, 하여간 자기가 미국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올 때에는 반드시 그러한 남자가 자기의 동행이 되리라 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한복판에서 배 갑판 위에 그 사람과 서로 외면하고 서서 바다 구경을 하다가 배가 흔들려 제 몸이 넘어질새, 그 사람의 가슴에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그것이 인연이 되어 본국에 돌아온 후 그 사람과 따뜻한 가정을 짓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고 벽돌 이층집에 나는 피아노 타고…… 이러한 것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선형의 꿈이었다. 그는 아직 큐피드의 화살을 맞지 아니하였다. 그의 가슴에는 아직 인생이란 생각도 없고, 여자 남자라는 생각도 없다. 그는 전세계는 다 자기의 가정과 같고 천하 사람은 자기와 같거니 한다. 아니, 차라리 전세계가 자기네 가정과 같은지 아니 같은지, 천하 사람이 자기와 같은지 아니 같은지를 생각하여 본 적도 없다 함이 마땅할 것이로다. 그를 봄철, 따뜻한 아침에 핀 꽃에 비길진대, 그는 아직 바람도 모르고 비도 모르고 늙음도 모르고 시들어 떨어짐도 모르는 바로 핀 꽃이라. 아무도 일찍 그에게 바람이란 것이며, 비란 것이 있단 말과 혹 바람이란 것과 비란 것이 함께 오면 지금 핀 꽃도 떨어지는 수가 있고 다 피어 보지 못한 꽃봉오리조차 떨어지는 수가 있다 하는 것을 일러 준 적이 없었다. 그는 성경을 외웠다. 그러나 다만 외웠을 뿐이었다. 그는 하느님이 아담과 에와를 만든 줄을 믿고, 에와가 뱀의 꾀에 넘어 금한 바 지식 열매를 따먹음으로 늙음과 죽음과 온갖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단 말과 천당과 지옥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예수가 어찌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을 성경에 쓴 대로 다 외우고, 또 날마다 보는 신문의 삼면에 보이는 강도, 살인, 사기, 간음, 굶어죽은 자, 목을 매어 자살한 자 등 여러 가지를 알며, 또 그 말을 친구에게 전하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그러할 뿐이다. 그는 그 모든 것―위에 말한 그 모든 것과 자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어니 한다. 아니, 차라리 그는 그 모든 것이 자기와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려고도 아니한다. 그는 아직 난 대로 있다. 화학적으로 화합되고 생리학적으로 조직된 대로 있는, 말하자면 아직도 실지에 한 번도 써보지 아니하고 곡간에 넣어 둔 기계와 같다. 그는 아직 사람이 아니로다. 그는 예수교의 가정에 자라남으로 벌써 천국의 세례는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인생이라는 불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소위 문명한 나라에 만일 선형이가 났다 하면 그는 어려서부터―칠팔 세부터, 혹은 사오 세부터 시와 소설과 음악과 미술과 이야기로 벌써 인생의 세례를 받아 십칠팔 세가 된 금일에는 벌써 참말 인생인 한 여자가 되었을 것이라. 그러하나 선형은 아직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선형의 속에 있는 ‘사람’은 아직 깨지 못하였다. 이 ‘사람’이 깨어 볼까말까는 하느님밖에 아는 이가 없다.

이러한 것이 ‘순결하다’ 하면 ‘순결하다’고도 할지요, ‘청정하다’ 하면 ‘청정하다’고도 할지나, 그러나 이는 결코 ‘사람’은 아니요, 다만 장차 ‘사람’이 되려 하는 재료니, 마치 장차 조각물(彫刻物)이 되려 하는 대리석과 같다. 이 대리석에 정이 맞고 끌이 맞은 뒤에야 비로소 눈 있고 코 있는 조각물이 됨과 같이 선형 같은 자도 인생이란 불세례를 받아 그 속에 있는 ‘사람’이 깨인 뒤에야 비로소 참사람이 될 것이라.

순애는 이와 달리 어려서부터 겪어 오는 자연한 단련에 얼마큼 속에 있는 ‘사람’이 깨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이불 속에서 돌아누운 것이요, 아직 깨인 것은 아니로다.

형식은 저 스스로 깨인 ‘사람’으로 자처하거니와 그 역시 아직 인생의 불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 지금 이 방에 모여앉은 세 사람, 청년 남녀가 장차 어떠한 길을 지내어 ‘사람’이 될는고. 이 세 사람의 가슴은 마치 장차 오려는 폭풍을 기다리는 바다와 같다. 지금은 물결도 없고 거품도 없고 흐름도 없는 편편한 바다라. 이제 하늘로서 큰 바람이 내려와 이 바다의 물을 온통 흔들어 거기 물결을 만들고 (거품을 만들고) 흐름을 만들지니, 그때야말로 비로소 참바다가 되리로다. 모르괘라. 그 바람이 무엇이며 그 바람을 보내는 자가 누구뇨. 지금 형식의 가슴에는 이 바람이 불어오려는 전조로 이상한 구름장이 하늘가에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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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김장로의 집에서 나왔다. 백운대 가로 이상한 구름장이 떠돌고 서늘한 바람이 후끈후끈하는 낯을 스쳐 지나간다. 형식은 시원하다 하였다. 아마 소나기가 지나가려는가 보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좀 서늘하여지리라 하였다. 그러고는 어서 소낙비가 왔으면 하였다.

형식은 아까 김장로의 집으로 들어갈 때와는 무엇이 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천지에는 여태껏 자기가 알지 못하던 무엇이 있는 듯하고, 그것이 구름장 속에서 번개 모양으로 번쩍 눈에 보였는 듯하다. 그러고 그 번개같이 번쩍 보인 것이 매우 자기에게 큰 관계가 있는 듯이 생각된다. 형식은 그 속에 그 번개같이 번쩍 하던 속에 알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쁨이 숨은 듯하다고 생각하였다. 형식은 가슴속에 희미한 새 희망과 새 기쁨이 일어남을 깨달았다. 그러고 그 기쁨이 아까 선형과 순애를 대하였을 때에 그네의 살내와 옷고름과 말소리를 듣고 생기던 기쁨과 근사하다 하였다. 형식의 눈앞에는 지금껏 보지 못하던 인생의 일방면이 벌어졌다. 자기가 오늘날까지, ‘이것이 인생의 전체로구나’ 하던 외에 인생에는 다른 한 부분이 있고 그리하고 그 한 부분이 도리어 지금까지 인생으로 알아 오던 모든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인 듯하다. 명예와 재산과 법률과 도덕과 학문과 성공과 이렇게 지금껏 인생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알아 오던 것 외에 무슨 새로운 내용 하나가 더 생기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형식은 그것에 이름 지을 줄을 모르고 다만 ‘이상하다’ 하고 놀랄 뿐이었다.

그러고 사오 년 동안을 날마다 다니던 교동으로 내려올 때에 형식은 놀랐다. 길과 집과 그 집에 벌여 놓은 것과 그 길로 다니는 사람들과 전신대와 우뚝 선 우편통이 다 여전하건마는, 형식은 그것들 속에서 전에 보지 못한 빛을 보고 내를 맡았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그것들이 새로운 빛과 새로운 뜻을 가진 것 같다. 길 가는 사람은 다만 길 가는 사람이 아니요, 그 속에 무슨 알지 못할 것이 품긴 듯하며, 두부 장수의 ‘두부나 비지드렁 사리아’ 하고 외우는 소리에는 두부와 비지를 사라는 뜻 밖에 더 깊은 무슨 뜻이 있는 듯하였다. 형식은 자기의 눈에서 무슨 껍질 하나가 벗겨졌거니 하였다. 그러나 이는 눈에서 껍질 하나가 벗겨진 것이 아니요, 기실은 지금껏 감고 오던 눈 하나가 새로 뜬 것이로다. 아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화상을 볼 때에 다만 그를 십자가에 달린 예수로 보지 아니하고 그 속에 새로운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이 이 눈이 떠지는 처음이요, 선형과 순애라는 두 젊은 계집을 볼 때에 다만 두 젊은 계집으로만 보지 아니하고 그것이 우주와 인생의 알 수 없는 무슨 힘의 표현으로 본 것이 이 눈이 떠지는 둘째요, 지금 교동 거리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전에 보고 맡지 못하던 새 빛과 새 내를 발견함이 그 셋째라. 그러나 그는 이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름 지을 줄을 모르고 다만 ‘이상하다’ 하는 생각과 희미한 기쁨을 깨달을 뿐이라.

형식은 방에 돌아와 잠시 영채의 일을 잊고 새로 변화하는 마음을 돌아보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았노라면 전에 보던 시와 소설의 기억이 그때 처음 볼 때와 다른 맛을 가지고 마음속에 떠 나온다. 모든 것에 강한 색채가 있고 강한 향기가 있고 깊은 뜻이 있다. 형식은 ‘내가 지금까지 인생과 서적을 뜻을 모르고 보았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모든 기억을 다 끌어내어 지금 새로 뜬 눈에 비치어 보았다. 그리한즉, 모든 기억에 다 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색채가 보인다. 형식은 눈이 부신 듯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하고 책장에 늘어 세운 양장책들을 보았다. 자기는 다 알고 읽었거니 하였던 것이 기실을 알지 못하고 읽은 것임을 깨달았다. 형식은 모든 서적과 인생과 세계를 온통 다시 읽어 볼 생각이 난다. 첫 페이지 첫 줄부터 온통 다시 읽더라도 ‘전에 읽은 적이 없구나’ 하다시피 글귀마다, 글자마다 새로운 뜻을 가지고 내 눈에 비치리라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책장에서 몇 권 책을 내어 전에 보던 데 몇 군데 떠들어 보았다. 그러고 그 결과는 형식의 생각하던 바와 같았다.

형식은 이제야 그 속에 있는 ‘사람’이 눈을 떴다. 그 ‘속눈’으로 만물의 ‘속뜻’을 보게 되었다. 형식의 ‘속 사람’은 이제야 해방되었다. 마치 솔씨 속에 있는 솔의 움이 오랫동안 솔씨 속에 숨어 있다가…… 또는 갇혀 있다가 봄철 따뜻한 기운을 받아 굳센 힘으로 그가 갇혀 있던 솔씨 껍데기를 깨트리고 가이없이 넓은 세상에 쑥 나솟아 장차 줄기가 되고 가지가 나고 잎과 꽃이 피게 됨과 같이 형식이라는 한 ‘사람’의 씨 되는 ‘속 사람’은 이제야 그 껍질을 깨트리고 넓은 세상에 우뚝 벗샤(솟아) 햇빛을 받고 이슬을 받아 한이 없이 생장하게 되었다. 형식의 ‘속 사람’은 여문 지 오래였다. 마치 봄철 곡식의 씨가 땅 속에서 불을 대로 불었다가 안개비만 조곰 와도 하룻밤에 쑥 움이 나오는 모양으로, 형식의 ‘속 사람’도 남보다 풍부한 실사회의 경험과 종교와 문학이라는 수분으로 흠뻑 불었다가 선형이라는 처녀와 영채라는 처녀의 봄바람 봄비에 갑자기 껍질을 깨트리고 뛰어난 것이라.

누가 ‘속 사람이란 무엇이뇨’와 ‘속 사람이 어떻게 깨는가’의 질문을 제출하면 그 대답은 이러하리라.

‘생명이란 무엇이뇨’와 ‘생명이 나다 함은 무엇이뇨’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음과 같이 이도 대답할 수 없다고. 오직 이 ‘속 사람’이란 것을 알고 ‘속 사람이 깬다’는 것을 알 이는 오직 이 ‘속 사람’이 깬 사람뿐이니라.

‘깬’ 형식은 장차 어찌 될는고. 이 이야기가 발전되어 나가는 양을 보아야 알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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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소나기가 지나갔다. 그러고 동대문과 남산 새에 곱다란 무지개의 한 부분이 형식의 방에서 보인다. 형식은 한참이나 무지개를 보고 황홀하여 앉았다 불현듯 영채를 생각하였다. 벌써 밤이 가까웠다. 영채의 위기는 일각일각이 가까워 오는 듯하다. 형식은 두루마기를 뒤쳐 입고 집에서 뛰어나왔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한참 망망하였다. 그러다가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안동을 향하고 부리나케 걸어간다. 형식은 어떤 ‘학생 기숙관’이라 하는 문 앞에 섰다. 이윽고 어떤 소년이 신을 끌고 나오더니 형식을 보고 경례한다. 형식은 소년의 손을 잡아 흔들며 묻기 어려운 듯이,

“엊그저께 학감의 뒤를 따라갔던 학생이 누구요?”

소년은 방긋이 웃으며,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상한 듯이 형식의 얼굴을 본다. 황혼의 형식의 얼굴은 하얗게 보인다.

“아니야! 희경 군. 무슨 일이 있으니 누가 학감의 뒤를 따라갔는지 좀 알려 주게.”

희경은 형식의 태도가 수상함을 보고 웃음을 그치고 이윽고 생각한다. 형식의 말소리는 떨렸더라. 희경은 마침내,

“종렬 군과 제가 갔습니다” 하고 책망을 기다리는 듯이 우향우를 하며 고개를 돌린다. 형식은 기뻐하는 목소리로,

“희경 군이 갔다 왔어요? 참 일이 잘되었소!” 한다. 희경은 더욱 형식의 태도가 이상하다 하였다. 아무리 기생 월향이가 유명하기로 설마 형식이야 월향을 탐내어 할까 함이라. 그래서 희경은 더욱 유심히 형식을 보며,

“왜 그러셔요?”

형식은 이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그러면 그 집 통호를 알겠소? 그 학감께서 가시던 집…….”

“통호수는 모릅니다.”

이 대답에 형식은 한참 낙망하더니 다시 희경의 손을 잡으며, “미안하나 내게 그 집을 좀 가르쳐 주게” 하였다.

희경은 마지못하는 듯이 들어가 모자와 두루마기를 입고 나온다. 희경은 ‘아마 학감의 일에 대하여 조사할 일이 있어 그러는가 보다’ 하고 앞서서 종로로 향하여 간다. 형식은 희경의 뒤를 따라가며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가서 어찌할까. 찾아서 설혹 영채를 만난다 하더라도 손에 ‘천 원’이 없으니 어찌할까. 만일 누가 방금 ‘천 원’을 가지고 와서 영채를 제 손에 넣는 계약을 맺는다 하더라도 ‘천 원’이 없는 나는 다만 그 곁에서 이를 갈 뿐이겠구나 하였다.

밤은 서늘하다. 종료 야시에는 ‘싸구려’ 하는 물건 파는 소리와 길다란 칼을 내어두르며 약 광고하는 소리도 들린다. 여기저기 수십 명 사람이 모여선 것은 아마 무슨 값싸고 쓰기 좋은 물건을 파는 것인 듯, 사람들은 저녁의 서늘한 맛에 취하여 아무 목적 없이 왔다갔다한다. 그 사이로 어린 학생들은 둘씩 셋씩 떼를 지어 무슨 분주한 일이나 있는 듯이 무어라고 지껄이며 사람들 사이로 뛰어다닌다. 아직도 장옷을 쓴 부인이 계집아이에게 등불을 들리고 다니는 이도 있다. 우미관에서는 무슨 소위 ‘대활극’을 하는지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가 들리고 청년회관 이층에서는 알굴리기를 하는지 쾌활하게 왔다갔다하는 청년들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앞서 가는 희경은 사람들이 모여선 곳마다 조곰씩 엿보다가는 형식의 발자취가 들리면 또 가고 가고 한다. 가물다가 비가 왔으므로 이따금 후끈후끈 흙내가 올라온다.

형식과 희경은 종각 모퉁이를 돌아 광충교로 향한다. 신용산행 전차가 커다란 눈을 부르뜨고 두 사람의 앞으로 달아난다. 두 사람은 컴컴한 다방골 천변에 들어섰다. 천변에는 섬거적을 펴고 사나이며 계집들이 섞여 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웃다가 두 사람이 가까이 오면 이야기를 그치고, 컴컴한 속에서 두 사람을 쳐다본다. 두 사람이 아니 보이리만 하면 또 이야기와 웃기를 시작한다. 혹 뒤창으로 기웃기웃 엿보는 행랑 까지의(아씨의) 동백기름 번적번적하는 머리도 보인다. 희경은 가끔 길을 잊은 듯하여 우뚝 서서 사방을 돌아보다가는 그대로 가기도 하고, 혹 ‘잘못 왔습니다’ 하고 웃으며 오륙 보나 뒤로 물러 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집 문 밖에는 호로 씌운 인력거가 놓이고 인력거꾼이 그 인력거의 발등상에 걸앉아 가늘게 무슨 소리를 한다. ‘계옥’이니 ‘설매’니 하는 고운 이름을 쓴 광명등이 보이고, 혹 어디선지 모르나 ‘반나마―’ 하는 시조의 첫 구절이 떨려 나오며 그 뒤를 따라 이삼 인 남자가 함께 웃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화류촌이로구나’ 하였다. 처음 이러한 곳에 오는 형식은 이상하게 가슴이 서늘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행여 누가 보지 않는가 하고 얼른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남치마 입은 기생 두엇이 길 모퉁이에서 양인을 보고 ‘소곤소곤’하며 웃고 지나갈 때에 형식은 남모르게 가슴이 뛰고 얼굴이 후끈하였다. 양인은 아무 말도 없이 간다. 양인의 구두 소리가 벽에 울려 이상하게 ‘뚜벅뚜벅’ 한다. 희경은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가 마침내, “여기올시다” 하고 어떤 광명등 단 집을 가리킨다. 형식은 더욱 가슴이 서늘하며 그 대문 앞에 우뚝 서서 광명등을 보았다. ‘계월향!’

‘계월향!’ 하고 형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월향은 영채가 아니런가. 기생이 되매 이름은 고칠지언정 성조차 고쳤으랴. 그러면 월향은 영채가 아닌가. 그러면 영채는 기생이 아니 되었는가. 내가 일찍 상상하던 모양으로 우리 영채는 어떤 귀한 가정에 거둠이 되어 학교에 다니며 즐겁게 지내는가. 형식은 크게 의심하였다. 희경은 두어 걸음 비켜서서 광명등 빛에 해쓱해 보이는 형식의 얼굴을 보고 ‘무슨 근심이 있구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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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칠 년 만에 형식을 만나 일변 반갑고 일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울며 칠 년 동안에 지내 온 이야기를 하려다가 문득 말을 그치고 일어나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형식이 서울에 있다는 말을 듣고 만나고 싶은 마음은 불같이 일어났으나 자연히 찾아보리라는 결심을 정하지 못하고 한 달이 지났었다. 그러다가 그날 아침에 ‘오늘은 기필코 형식을 찾아보리라’ 하고 오후에 형식을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저녁에 또 찾아왔던 것이라.

세상에 영채에게 제일 가까운 사람은 형식밖에 없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일가도 없고, 오직 남은 것이 어려서 같이 자라나던 형식이란 사람 하나뿐이라. 영채의 부친과 형들이 평양감옥에서 죽기 전까지는 영채는 그네를 위하여 살았었다. 그러나 그네가 죽은 뒤에는 영채는 오직 이형식이라 하는 사람을 위하여 살았었다. 더구나 낫살이 점(점) 많아지고 몸이 기생이 되어 여러 십 명, 여러 백 명, 육욕밖에 모르는 짐승 같은 남자에게 갖은 희롱을 다 받은 영채는 세상에 믿을 만하고 의지할 만한 남자는 형식밖에 없다 하였다. 형식이가 서로 떠난 지 칠팔 년(간)에 어떻게 변화하여 어떠한 사람이 되었는지는 영채에 대하여는 문제가 아니었었다. 영채는 다만 형식이라 하는 사람은 천 년을 가나 만 년을 가나 이전 안주골 자기 집에 있을 때에 그 형식이거니 하였다. 영채는 착하던 사람이 변하여 좋지 못하게 되는 줄을 모른다. 좋은 사람은 천생 좋은 사람이요, 평생 좋은 사람이거니 한다. 그와 같이 악한 사람은 천생 악한 사람이요, 평생 악한 사람이거니 한다. 영채는 어려서는 악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었다. 그의 아버지도 선한 사람이요, 오라버니네도 선한 사람이었고, 그 집 사랑에 와 있던, 또는 다니던 사람들도 선한 사람이었다. 형식도 무론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그가 소학과 열녀전 같은 책을 배울 때에 그 속에 나오는 사람들도 다 선한 사람이었다. 영채는 어린 생각에도 그 책에 있는 인물과 자기의 가정과 주위에 있는 인물과는 같은 인물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영채 자신도 선한 사람이었다. 내칙이나 열녀전에 있는 여자들과 자기와는 같은 여자라 하였었다. 그러고 세상은 다 자기의 가정과 같으려니, 세상 사람은 다 자기와 및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같으려니 하였었다. 저 김선형이나 이 박영채나 이 점에 이르러서는 공통이로다.

그러나 선하던 자기의 아버지며 주위엣사람들이 도리어 죄를 짓고, 세상 사람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게 됨을 보고, 어린 마음에는 한번 놀랐다. 또 외가에 가서 내종형댁의 학대와 조카네의 학대를 당하고, 거기서 도망할 때에 어느 촌중 아이들의 핍박을 당하고, 그날 저녁 죽천 땅 어느 객주에서 그 변을 당하고, 마침내 평양에서 자기의 몸이 기생으로 팔리게 되매, 어린 영채는 세상이 자기의 가정과 다르고 세상 사람들이 자기와 및 자기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과 다름을 깨달았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악이란 것이 있고 세상 사람에 악인이란 것이 있는 줄을 깨달았다. 그러나 영채는 이 악한 세상과 악한 사람들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거니 하였다. 영채는 결코 자기의 선하던 가정과 저 악한 세상과, 또 자기가 일찍 보던 선한 사람들과 자기가 지금 보는 악한 사람들을 혼동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세상에는 악한 세상과 선한 세상이 있고, 사람에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있어, 각각 종류가 다르고 합할 수 없음이 마치 물과 기름과 같다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점점 경험을 쌓아 감을 따라 또 이 진리도 깨달았다…… ‘악한 세상은 선한 세상보다 크고, 악한 사람은 선한 사람보다 많다’ 함을.

영채는 집을 떠난 지 칠팔 년간에 아직 한 번도 선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선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는 칠 년 동안을 자기의 고향인 선한 세상을 떠나서 악한 타향에 객이 되고 자기의 동족인 선한 사람들을 떠나서 자기의 원수인 악한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과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한 세상과 선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아니하였나니, 대개 그가 칠 년 전에 그러한 세상과 그러한 사람들을 목격하였음이라. 그러고 자기는 열녀전, 내칙, 소학 속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니, 결코 악한 세상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라 하였다. 영채의 아버지가 영채의 어렸을 때에 가르친 열녀전과 내칙과 소학은 과연 영채의 일생을 지배한 것이라.

영채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선한 세상도 있기는 있고 선한 사람도 있기는 있건마는, 자기는 무슨 운수로 일시 그 선한 세상을 떠나고 선한 사람을 떠난 것이니, 일생에 반드시 자기는 그러한 세상과 사람을 찾을 날이 있으리라고. 그러므로 그가 남대문 안에서 동대문까지 늘어선 만호 장안을 볼 때에, 이 중에 어느 집이 칠 년 전에 자기가 있던 집과 같은 집이며, 종로 네거리에 왔다갔다하는 여러 만 명 사람을 대할 때에 이 중에 어떠한 사람이 일찍 자기가 보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하였다.

그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시계를 차고 자기에게 가까이하는 사람을 대할 때에 마음에는 항상 ‘너는 나와는 딴세계 사람!’ 하고 일종 경멸하는 모양으로 그네를 대하여 왔다. 영채는 장안에 선한 집과 선한 사람이 있는 줄을 믿는다. 그러고 밤낮으로 그 집과 그 사람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영채의 기억에 있는 선한 사람은 오직 이형식이라. 영채가 칠 년 동안 수십 명, 수백 명의 남자를 대하되, 오히려 몸을 허하지 아니하고 주야 일념에 이형식을 찾으려 함이 실로 이 뜻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형식이 서울에 있는 줄을 알고 이렇게 찾아왔던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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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그 동안 여러 기생을 보았다. 그러고 그네들 중에 어떠한 사람이 있는가 보았다. 영채가 ‘형님’ 하고 정답게 지내던 자도 수십 인이요, ‘야, 네더냐’ 하고 동무로 지내던 자도 수십 인이요, 영채더러 ‘형님!’ 하고 정답게 따르던 자도 몇 사람이 있었다.

영채가 평양서 기생이 되어 맨 처음 ‘형님’ 하고 정들인 기생은 계 월화라 하는 얼굴 곱고 소리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때에 평양 화류계에 풍류 남자들의 눈은 실로 이 월화 한 사람에게 모였었다. 월화는 단율도 잘 짓고 묵화도 남 지지 아니하게 쳤다. 그래서 월화는 매우 자존하는 마음이 있어서 여간한 남자는 가까이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퇴맞은 남자들에게는 ‘교만한 년’ ‘괘씸한 년’이라는 책망도 듣고, 그 소위 어미 되는 노파에게는 ‘손님께 공손하라’는 경계도 들었다. 그러나 월화는 자기의 얼굴과 재주를 높이 믿었다. 그래서 제 눈에 낮게 보이는 손님을 대할 때에는, “솔이 솔이 하니 무슨 솔이로만 여겼던가 / 천인 절벽에 낙락장송 내 기로다 / 길 아래 초동의 낫이야 걸어 볼 줄 있으랴” 하는 솔이〔松伊〕가 지은 시조를 불렀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월화를 ‘솔이’라고 별명을 지었다. 실로 월화의 이상은 ‘솔이’였었다. 영채가 월화를 사랑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라. 영채의 눈에 월화라는 기생은 족히 열녀전에 들어갈 만하다 하였다. 그러고 ‘솔이’라는 기생이 어떠한 기생인지도 모르면서 월화가 솔이를 이상으로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 모양으로 솔이를 이상으로 하였다. 영채가 일찍 월화에게 안기며, “형님! 형님과 저와 솔이와 세 사람이 친구가 됩시다” 한 일이 있었다. 그러고 나도 반드시 월화 형님과 같이 솔이가 되리라 하였다.

월화의 얼굴과 재주를 보고 여러 남자가 침을 흘리며 모여들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부자도 있고 미남자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다투어 옷을 잘 입고 금시계와 금반지를 끼고 아무리 하여서라도 월화의 사랑을 얻으려 하였다. 그러나 월화가 머릿속에 그리는 남자는 그러한 경박자는 아니었다. 월화는 이태백을 생각하고 고적(高適)과 왕창령(王昌齡) 같은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을 생각하고 양창곡(楊昌曲)과 이도령(李道令)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월화의 주위에 모여드는 남자들 중에는 하나도 그러한 사람이 없고 다만 ‘돈’과 ‘육욕’이 있는 사람뿐이었다. 월화는 어느 요리점 같은 데 불려 갔다가 밤이 깊어 돌아오는 길에 영채를 찾아와서는 흔히 눈물을 흘리며,

“영채야, 세상이 왜 이렇게 적막하냐. 평양 천지에 사람 같은 사람을 볼 수가 없구나” 하였다. 영채는 아직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거니와 대체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어니 하였다. 그러고는 영채는 어린 생각에 ‘나는 이형식이가 있는데’ 하였다.

월화는 점점 세상을 비감하게 되었다. 그가 영채에게 당시를 가르치다 흔히 영채를 꼭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영채야, 네나 내나 왜 이러한 조선에 났겠느냐” 하였다. 그때에 영채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러면 어디 났으면 좋겠소?” 하였다. 월화는 영채의 어린 것을 불쌍히 여기는 듯이,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하였다. 월화는 성당시대 강남에 나지 못한 것을 한하였다. 탁문군은 자기언마는 봉황곡으로 자기를 후리는 사마상여의 없음을 한하였다. 월화의 생각에는 하늘이 대동강을 내시매, 모란봉을 또 내셨으니 계월화는 대동강이 되려니와 누가 모란봉이 되어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그 그림자를 부벽루 앞에 비추리요 하였다.

월화는 조선 사람의 무지하고 야속함을 원망하였다. 더구나 평양 남자에 일개 시인이 없고 일개 문사가 없음을 한하였다. 그가 나이 이십이 되도록 한 번도 자기의 뜻에 맞는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슬픈 마음과 세상을 경멸하는 비웃음으로 옛날 시를 읊고 저도 시와 노래를 짓기로 유일의 벗을 삼았었다. 그러고 영채를 사랑하여 친동생같이 귀애하며, 시 읽기와 시 짓기를 가르치고 마음이 슬픈 때에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채에게 자기의 회포를 말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영채는 “형님!” 하고 월화의 가슴에 안겨 울었다.

일찍 어느 연회에 평양 성내 소위 일류 인사들과 일등 명기가 일제히 모였다. 이(른 여름) 바람 잔잔한 모란봉 밑 부벽루가 그 회장이었다. 그때 월화가 영채에게, “야 영채야, 너는 보느냐?” 하고 한편 구석에 끌고 가서 귓속말을 하였다. “무엇이오?” 하고 영채는 좌석을 돌아보았다. 월화는 영채의 귀에 입을 대고, “저기 모인 저 사람들이 평양의 일류 명사란다. 그런데 저 소위 일류 명사란 것이 모두 다 허자비에게 옷 입혀 놓은 것이란다” 하고 다시 기생들을 가리키며, “저것들은 소리와 몸을 팔아먹고 사는 더러운 계집년들이란다” 하였다. 그때에는 영채가 열다섯 살이었다. 그러므로 전보다 분명하게 월화의 말하는 뜻을 알아들었다. 그러고, “참 그렇소” 하고 조고마한 고개를 까닥까닥 흔들었다. 이러한 말을 할 때에 어떤 양복 입은 신사가 웃으며 월화의 곁에 오더니 목에 손을 얹으며, “야 월화야, 어째 여기 섰느냐” 하고 끌고 가려 한다. 이 신사는 그때에 한창 월화에게 미쳤던 평양 일부 김윤수의 맏아들이니, 지금 나이 삼십여 세에 여태껏 하여 온 일이 기생 오입밖에 없었다. 월화는 무론 이 사람을 천히 여겼다. 그래서 이 사람 앞에서도 ‘솔이 솔이 하니’를 불렀다. 이때에 월화는 너무 불쾌하여, “왜 이러시오” 하고 몸을 뿌리쳤다. 뒤에 알아본즉, 이때에 이 좌석에 월화의 마음을 끄는 어떤 신사가 있었더라. 그는 어떠한 사람이며 그와 월화와의 관계는 장차 어찌 될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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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회로서 돌아오는 길에 영채는 월화를 따라 청류벽 밑으로 산보하였다. 그때에 마침 평양 패성중학(대성학교를 모델로 한 것임. 신문연재본과 신문관본에는 모두 ‘패성학교’로 되어 있으며, 삼중당 전집 이후 현재는 대성학교로 고쳐져 있음. 이하 동일―편자 주)이라는 학교의 학생 사오 인이 청류벽 바위 위에 서서 유쾌하게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굽이지는 대동강이

능라도를 싸고도니

둥두렷한 모란봉이

우쭐우쭐 춤을 추네

청류벽에 걸어앉아

가는 물아 말을 들어

청춘의 더운 피를

네게 부쳐 보내고저


월화가 영채의 소매를 당기며,

“얘, 저 노래를 듣느냐.”

“매우 듣기 좋습니다.”

월화는 한숨을 쉬며,

“저 속에 시인이 있기는 있고나” 하고 잠연히 눈물을 흘렸다. 영채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다만 청류벽 위에서 노래 부르던 학생들을 보았다. 학생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데 두루막자락이 바람에 펄펄 날린다. 영채도 어째 자연히 그 학생들이 정다운 듯하고 알 수 없는 설움이 가슴에 떠오르는 듯하여 월화의 어깨에 엎데어 월화와 함께 울었다. 월화는 영채를 안으며,

“영채야, 저 속에 참시인이 있느니라” 하고 아까 하던 말을 또 한다.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다. 그것들은 먹고 입고, 계집 희롱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들이니라. 그러나 저 학생들 속에 참시인이 있느니라.”

이때에 학생이 또 다른 노래를 부른다.


새벽빛이 솟는다

해가 오른다

땅 위에 만물이

기뻐 춤을 추노나

천하 사람 꿈꿀 제

나만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 부르네


월화는 못 견디어하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영채더러,

“이애, 저기 올라가 보자.”

그러자 이 말이 끝나기 전에 학생들은 모자를 벗어 두르고 저편 고개로 넘어가고 말았다. 월화는 길가 돌 위에 펄썩 주저앉아서 아까 학생들이 부르던 노래를 십여 차나 불러 보았다. 영채도 자연히 그 노래가 마음에 드는 듯하여 월화와 함께 십여 차나 불렀다. 그러고 월화는 한참이나 지금 학생들 섰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학생들은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로부터 월화는 더욱 우는 날이 많게 되었다. 영채는 월화와 함께 울고, 틈이 있는 대로는 월화와 같이 있었다. 영채는 더욱더욱 월화에게 정이 들고 월화도 더욱더욱 영채를 사랑하였다. 열다섯 살이나 된 영채는 차차 월화의 뜻을 알게 되었다. 뜻을 알게 될수록 월화의 눈물에 동정하게 되었다. 영채도 점점 미인이라는 이름과 노래 잘하고 단율 잘 짓는다는 이름이 나서, 영채라는 오늘 아침에 핀 꽃을 제가 꺾으리라 하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 월화가 부벽루에서 하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부벽루 연회 이래로 월화의 변하고 괴로워하는 모양을 보매, 어린 영채도 월화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은 짐작하였다. 영채도 이제는 남자가 그리운 생각이 나게 되었다. 못 보던 남자를 대할 때에는 얼굴도 후끈후끈하고, 밤에 혼자 자리에 누워 잘 때에는 품어 줄 누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나게 되었다. 한번은 영채와 월화가 연회에서 늦게 돌아와 한자리에서 잘 때에 영채가 자면서 월화를 꼭 껴안으며, 월화의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 월화는 혼자 웃으며, “아아, 너도 깨었구나― 네 앞에 설움과 고생이 있겠구나” 하고 영채를 깨워,

“영채야, 네가 지금 나를 꼭 껴안고 입을 맞추더구나” 하였다. 영채는 부끄러운 듯이 낯을 월화의 가슴의(가슴에) 비비고 월화의 하얀 젖꼭지를 물며, “형님이니 그렇지” 하였다. 이만큼 영채도 철이 났으므로 월화의 눈물에는 반드시 무슨 뜻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러고 물어 볼까 물어 볼까 하면서도 자연히 제가 부끄러워 물어 보지 못하고, 다만 영채 혼자 생각에 아마 월화가 그때 청류벽에서 노래 부르던 학생을 생각하는 게로다 하였다. 영채의 눈에도 그 청류벽에서 노래 부르던 학생의 모양이 잊히지를 아니한다. 무론 길에서 청류벽을 바라보면, 그 위에 선 사람의 얼굴의 윤곽이 보일 뿐이요 눈과 코도 잘 분별하지는 못하겠으나, 다만 거룩한 듯한 모양과 깨끗한 목소리와 뜻있고 아름다운 노래가 두 여자의 가슴을 서느렇게 한 것이라. 그 청년들은 아마 무심하게 그 노래를 불렀으련마는 아직 ‘진실한 사람’, ‘정성 있는 사람’, ‘희망 있는 사람’,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 보지 못하던 그네에게는 그 학생들의 모양과 노래가 지극히 분명하게 청신하게 인상이 박힌 것이라. 영채는 가만히 그 노래 부르던 학생들과, 지금껏 같이 놀던 소위 신사들을 비교할 때에 아무리 하여도 그 학생이 정이 든다 하였다. 영채는 근래에 더욱 가슴속이 서늘하고 몸이 간질간질하고 자연히 마음이 적막함을 깨닫는다. 월화가 물끄러미 자기의 얼굴을 볼 때에는, 혹 자기의 속을 꿰뚫어보지나 아니하는가 하여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월화도 영채의 마음이 점점 익어 옴을 깨달았다. 그러고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매, 영채의 장래에 설움이 많을 것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월화는 영채가 잘못하여 세상에 섞이기를 두려워하는 모양으로 항상, “영채야, 지금 세상에는 우리의 몸을 의탁할 만한 사람이 없나니라” 하고 옛날 시로 일생의 벗을 삼기를 권하였다.

영채는 월화의 눈물의 뜻을 알려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알 기회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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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저녁에는 월화가 영채를 찾아와서 연설 구경을 가자고 한다. 그때에 평양에는 패성학교라는 새로운 학교가 일어나, 사방으로서 수백 명 청년이 모여들고, 패성학교장 함상모는 그 수백여 명 청년의 진정으로 앙모하는 선각자러라. 함교장은 매주일에 일차씩 패성학교 내에 연설회를 열고, 아무나 와서 방청하기를 청하였다. 평양 사람들은, 혹은 새로운 말을 들으리라는 정성으로, 혹은 다만 구경이나 하리라는 호기심으로 저녁 후면 패성학교 대강당이 터지도록 모여들었다. 함교장은 열성이 있고 웅변이 있었다. 그가 슬픈 말을 하게 되면 청중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그가 기쁜 말을 하게 되면 청중은 모두 손뼉을 치고 쾌하다 부르짖으며, 그가 만일 무슨 악한 일을 꾸짖게 되면 청중은 눈꼬리가 찢어지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의 말하는 제목은, 조선 사람도 남과 같이 옛날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새로운 문명을 실어 들여야 할 일과, 지금 조선 사람은 게으르고 기력이 없나니 새롭고 잘사는 민족이 되려거든 불가불 새 정신을 가지고 새 용기를 내어야 한다는 것과, 이렇게 하려면 교육이 으뜸이니 아들이나 딸이나 반드시 새로운 교육을 받아야 한다 함이라.

영채도 함교장이란 말도 듣고, 함교장이 연설을 잘한다는 말도 들었으므로 월화를 따라 패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아무쪼록) 검소한 의복을 입었으나 얼굴과 태도를 속일 수가 없으며, 또 양인이 다 지금 평양에 이름난 기생이라 모이는 사람들 중에 손가락질하고 소곤소곤하는 것이 보인다. 월화와 영채는 회중을 헤치고 들어가 저편 구석에 가지런히 앉았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등을 밀치기도 하고 발을 밟기도 하고, 혹 제 손으로 두 사람의 손을 스치기도 하고, 혹 어떤 사람은 월화의 겨드랑에 손을 넣는 자도 있다. 월화는, “너희는 기생이란 것만 알고, 사람이란 것은 모르는구나” 하고 영채를 안는 듯이 앞세우고 들어간 것이라. 부인계에는 연설을 들을 자도 없고 들으려 하는 자도 없으매, 별로 부인석이란 것이 있지 아니하므로 남자들 앉은 걸상 한편 옆에 앉았다. 함교장이 이윽고 부인이 있음을 보더니 어떤 학생을 불러 무슨 말을 한다. 그 학생이 의자 둘을 가져다가 맨 앞줄 왼편 끝에 놓더니 두 사람 곁에 와서 은근히 경례하면서,

“저편으로 와 앉으십시오” 하고 두 사람을 인도한다. 두 사람은 기생 된 뒤에 첫번 사람다운 대접을 받는다 하였다. 이윽고 학생들이 들어와 착석한다. 월화는 저 학생들이 자기를 보는가 하고, 가만히 학생들의 동정을 보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모두 정면한 대로 까딱도 아니하고 앉았다. 월화는 영채를 보고 가만히,

“얘, 저 학생들은 우리가 보던 사람과는 딴세상 사람이지?” 하였다. 과연 함교장은 청년을 잘 교육하였다. 설혹 개성을 무시하고 만인을 한 모형에 집어넣으려는 구식 교육가의 때를 아주 다 벗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당시 조선에는 유일한 가장 진보하고 열성 있는 교육가였다. 과연 평양 성내에 월화를 보고 눈에 음란한 웃음을 아니 띄우는 자는 패성학교 학생밖에 없을 것이라. 학생들도 만일 월화를 본다 하면 ‘어여쁘다’ 하는 생각이 날는지도 모르고, ‘한번 더 보자’ 하는 생각이 날는지도 모르거니와, 그네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저것을 하룻밤 데리고 놀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두지 아니한다. 또 설혹 그네가 ‘저것을 내 것을 삼았으면’ 하는 생각이 난다 하더라도 결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무릎에 앉히고) 희롱하려 함이 아니요, ‘나의 아내를 삼아 사랑하고 공경하리라’ 함이라. 다른 사람들은 월화를 다만 한 장난감으로 알되, 그네는 비록 기생을 천히 여긴다 하더라도 그 역시 내 동포여니 내 누이어니 하는 생각은 있다.

이윽고 함교장이 연단에 올라선다. 만장에 박수가 일어나고, 월화도 두어 번 박수한다. 영채는 옳지 부벽루에서 말하던 이로구나 하였다. (함교장은) 위엄 있는 태도로 이윽히 회중을 내려다보더니,

“여러분” 하고 입을 열어, “여러분의 조상은 결코 여러분과 같이 마음이 썩어지지 아니하였고, 여러분과 같이 게으르고 기운 없지 아니하였소. 평양성을 쌓은 우리 조상의 기상은 웅대하였고, 을밀대와 부벽루를 지은 우리 조상의 뜻은 컸소이다” 하고 감개무량한 듯이 한참 고개를 숙이더니, “여러분! 저 대동강에 물은 날로 흘러가느니, 평양성을 쌓고 을밀대를 짓는 우리 조상의 그림자를 비추었던 물은 지금 어디 간 곳을 알지 못하되, 오직 뚜렷한 모란봉은 만고에 한 모양으로 우리 조상의 발자국을 지니고 섰소이다. 아아, 여러분 아, 여러분의 웅장한 조상에게 받은 정신을 흘러가는 대동강에 부쳤는가, 만고에 우뚝 솟은 모란봉에 부쳤는가” 하고 흐르는 눈물로써 말을 잠깐 그치니, 만장이 숙연히 고개를 숙인다. 함교장은 여러 가지로 조선 사람의 타락한 것을 개탄한 뒤에 일단 더 소리를 높여, “여러분! 여러분은 이 무너져 가는 평양성과 을밀대를 다 헐어 내어 흘러가는 대동강수에 부쳐 보내고, 우리의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기운으로 새로운 평양성과 새로운 을밀대를 쌓읍시다” 하고 유연히 단을 내리니 만장이 박수갈채성에 한참이나 흔들리는 듯하다. 월화는 영채의 손을 꼭 쥐고 몸을 바르르 떤다. 영채는 놀라서 월화를 보니, 무릎 위 치맛자락에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

영채도 함교장의 풍채를 보고 연설을 들으매,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각이 나서 울면서 월화를 따라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월화의 눈물은 영채의 눈물과는 달랐다. 월화의 눈물은 어떠한 눈물이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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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월화는 펄썩 주저앉으며 영채더러,

“영채야, 나는 내가 구하던 사람을 찾았다. 나는 부벽루에서 함교장의 풍채를 보고 말을 들으매, 자연히 정신이 황홀하여짐을 깨달았다. 그러고 오늘 저녁 그의 풍채와 말을 또 들으니, 내 마음은 온통 그이게로 가고 말았다. 조선 천지에서 내가 찾던 사람을 이제야 만났구나” 하고 빙긋이 웃는다. 영채는 그제야 월화의 눈물 뜻을 깨달았다. 자기는 함교장을 아버지같이 생각하였는데, 월화는 자기의 정든 님같이 생각하더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월화의 얼굴을 보았다. 월화의 눈썹에는 맑은 눈물이 맺혔다. 월화는 다시,

“영채야, 너는 그때에 부벽루에서 부르던 노래 뜻을 아느냐?


천하 사람 꿈꿀 제

나만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 부르네

이 노래 뜻을 아느냐?”


영채는 아는 듯도 하면서도 말할 수는 없어 잠자코 앉았다. 월화는 영채를 이윽히 보더니,

“온 조선 사람이 다 자고 꿈을 꾸는데 함교장 혼자 깨어 일어났구나. 우리를 찾아오는 소위 일류 신사님네는 다 자는 사람들인데, 그 속에 깨어 일어난 것은 함교장뿐이로구나.”

영채는 과연 그럴듯하다 하고,

“그러면 왜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를 부르나요?”

“깨어 일어나 본즉 천하 사람은 아직도 꿈을 꾸겠지. 암만 깨어라 깨어라 하여도 깰 줄은 모르고 잠꼬대만 하니 왜 외롭고 슬프지를 아니하겠느냐. 그러니까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 하고 영채의 손을 잡아 끌어다가 자기의 무릎 위에 엎디게 하고,

“그런데 나도 역시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를 부른다.”

영채는 얼마큼 알아들으면서도, “왜? 왜 슬픈 노래를 불러?” “평양성내 오륙십 명 기생 중에 나밖에 깨인 사람이 누구냐. 모두 다 사람이 무엇인지, 하늘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중에 나밖에 깨인 사람이 누구냐. 나는 외롭구나, 슬프구나, 내 정회를 들어 줄 사람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하고 영채의 등에 이마를 비비며 영채의 허리를 끊어져라 하고 끌어안는다. 영채는 이제는 월화의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다. 월화는 다시 말을 이어,

“나는 지금 스무 살이다. 나는 이십 년 동안 찾던 친구를 이제는 찾아 만났다. 그러나 만나고 본즉 그는 잠시 만날 친구요, 오래 이야기하지 못할 친군 줄을 알았다. 그러니까 나는 그만 갈란다” 하고 영채를 일으켜 앉히며 더욱 다정한 말소리로,

“야, 너와 나와 삼 년 동안 동기같이 지내었구나. 이것도 무슨 큰 연분이로다. 안주 땅에 난 너와 평양 땅에 난 나와 이렇게 만나서 이렇게 정답게 지낼 줄을 사람이야 누가 뜻하였겠느냐. 이후도 나를 잊지 말고 ‘형님’이라고 불러 다고” 하면서 그만 울며 쓰러진다. 영채는 월화의 말이 이상하게 들려 몸에 오싹 소름이 끼치면서,

“형님! 왜 오늘 저녁에는 그런 말씀을 하셔요?” 하였다. 월화는 일어나 눈물을 씻고(뿌리고 망연히 앉았다가),

“너는 부디 세상 사람에게 속지 말고 일생을 너 혼자 살아라, 옛날 사람으로 벗을 삼아라, 만일 네 마음에 드는 사람 만나지 못하거든” 한다. 이런 말을 하고 그날 밤도 둘이서 한자리에 잤다. 둘은 얼굴을 마주대고 서로 꽉 안았다. 그러나 나 어린 영채는 어느덧 잠이 들었다. 월화는 숨소리 편안하게 잠이 든 영채의 얼굴을 이윽히 보고 있다가 힘껏 영채의 입술을 빨았다. 영채는 잠이 깨지 아니한 채로 고운 팔로 월화의 목을 꼭 쓸어안았다. 월화의 몸은 벌벌 떨린다. 월화는 가만히 일어나 장문을 열고 서랍에서 자기의 옥지환을 내어 자는 영채의 손에 끼우고 또 영채를 꼭 껴안았다.

짧은 여름밤이 새었다. 영채는 어렴풋이 잠을 깨어 팔로 월화를 안으려 하였다. 그러나 월화가 누웠던 자리는 비었다. 영채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형님! 형님!” 하고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영원히 없었다. 영채는 자기 손에 낀 옥가락지를 보고 울었다. 그날 저녁때에 대동강에서 낚시질하던 배가 시체 하나를 얻었다. 그것은 월화더라. 월화는 유언도 없었으며 아무도 그가 죽은 이유를 아는 자가 없고, 오직 옥가락지를 낀 영채가 홀로 월화의 뜻을 알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뿐, 그 소위 어미는 ‘안된년!’ 하고 돈벌이할 밑천이 없어진 것을 원망하고, 평양 일부 김윤수의 아들은 ‘미친년!’ 하고 자기의 희롱거리 없어짐을 한탄하더라. 그의 시체는 굵다란 베에 묶어 물지게꾼 이삼 인이 두루쳐 메어다가 북문 밖 북망산에 묻었다. 묻은 날 저녁때에 옥가락지 끼인 손이 꽃 한줌과, 눈물 한줌을 그 무덤 위에 뿌렸다. 비도 아니 세웠으니 지금이야 어느 것이 일대 명기 계월화의 무덤인 줄을 알리요. 함교장은 이런 줄이야 알았는지 말았는지. 계월화는 과연 영채의 ‘형님’이었다. 벗이었다. 월화는 참 영채를 사랑하였었다. 영채는 월화에게 큰 감화를 받았었다.

영채가 형식을 일생의 짝으로 알고 칠 년 동안 굳은 절을 지켜 온 것도 월화의 힘이 반이나 되었다. 영채도 생각하기를 이형식을 찾다가 못 찾으면 월화의 뒤를 따라 대동강에 몸을 던지리라 하였었다. 하다가 우연히 이형식의 거처를 알고, 이제는 내 소원을 이루었구나 하였다. 그러나 만일 형식이가 이미 혼인을 하였으면 어찌할까, 혼인을 아니했더라도 내 몸이 기생인 줄을 알고 나를 돌아보지 않으면 어찌할까 하였다. 형식의 거처를 안 지가 한 달이 넘도록 형식을 찾지 아니하고, 어젯 형식을 찾아가서 자기의 신세를 이야기하다가 중도에 끊고 돌아옴도 이를 위함이러라. 형식의 집에서 돌아온 영채는 어떻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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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가 형식을 대하여 자기의 신세를 말하다가 문득 생각한즉 자기는 기생의 몸이라 형식이 아직 혼인 아니하였다는 말을 들으며 잠깐 기뻐하였으나, 자기가 기생인 줄을 알면 형식은 반드시 자기를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또 설혹 돌아볼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내 몸은 돈이 있고야 구원할 몸이어늘, 가만히 형식의 살림살이를 보매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자기가 기생인 줄을 알려 일생에 그리워하던 형식에서 마음으로까지 버림이 되기보다, 또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더라도 구원할 힘이 없어 사랑하는 형식으로 하여금 부질없이 마음을 괴롭게 하기보다, 이러하기보다 차라리 대동강수에 풍덩실 몸을 던져 오 년 전에 먼저 간 월화의 뒤를 따라 저세상에서 월화로 더불어 같이 노닐려 하였다. 월화의 얼굴이 영채의 앞에 보이며 ‘영채야 나와 같이 가자’ 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손에 있는 옥지환을 보다가 중도에 말을 끊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라.

영채는 곧 평양으로 내려갈 결심을 하였다. 몸을 던져 세상을 버릴진대 사랑하던 ‘월화 형님’의 몸을 던지던 대동강을 찾아가려 하였다. 평양에 가 우선 북망산에 아버지와 월화의 무덤을 찾아 그 동안 지내 오던 정회나 실컷 말하리라 하였다. 부친은 내가 기생 되었다는 말을 듣고 죽었으니 무덤에나마 가서 내가 기생으로 몸을 판 것은 부친과 두 형제를 구원하려 함임과, 기생이 된 지 육칠 년에 부친의 혈육을 받은 이 몸을 다행히 더럽히지 아니하였음과, 부친께서 이 몸을 허하신 이형식을 위하여 지금껏 아내의 절행을 지켜 온 것을 말하고, 죽은 후에 만일 영혼이 있거든 생전에 섬기지 못하던 한을 사후에나 풀리라 하였다. 만일 부친이 극락에 가셨거든 극락으로 찾아가고, 만일 지옥에 가셨거든 지옥으로 찾아가리라 하였다.

월화의 부탁을 나는 지켰다. 나는 세상에 섞이지 아니하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을 위하여 육칠 년간 고절(苦節)을 지켰다. 나는 월화가 하다가 남겨 둔 생활을 하였다. 나는 이제 네게로 돌아간다 하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니 영채의 몸은 바로 그때에 그 학생들이 ‘천하 사람 꿈꾸는데 나만 깨어서,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 부르도다’ 하는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이 청류벽 위에 선 듯하다. 영채는 박명한 십구 년의 일생을 생각하였다. 더구나 형식을 대하였을 때에 말하던 과거의 기억이 바로 어저께 지난 일 모양으로 역력히 눈앞에 보이고, 그 모든 광경이 제가끔 영채의 가슴을 찌르고 창자를 박박 긁는 듯하다. 사람으로 세상에 생겨나서 즐거운 재미란 하나도 보지 못하고 꽃다운 청춘이 속절없이 대동강 무심한 물결 속에 스러질 것을 생각하니 원망스럽기도 하고 가이없고 원통하기도 하다. 십구 년 일생의 절반을 무정한 세상과 사람에게 부대끼고 희롱감이 되다가 매양에 그리고 바라던 이형식을 만나기는 만났으나 정작 만나고 보니 이형식은 나를 건져 줄 것 같지도 아니하고…… 아아, 이것이 무슨 팔자인고 하고 그날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캄캄한 방에서 혼자 울었다. 이 팔은 어찌하여 생각하던 사람을 안아 보지 못하고, 이 젖은 어찌하여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을 빨려 보지 못하는고, 가슴속에 가득 찬 정과 사랑을 생각하던 이에게 주어 보지 못하고 마는고. 내 몸은 일생에 ‘기생’이란 이름만 듣고, 어찌하여 ‘아내’라든가 ‘부인’이라든가 ‘어머니’라든가 ‘아주머니’라든가 하는 정답고 거룩한 이름을 못 듣고 마는고. ‘기생!’ ‘기생!’ 에그 듣기 싫은 이름이도다. ‘기생!’이라는 말만 하여도 치가 떨린다 하였다. 지금 황금을 가지고 자기의 몸을 사려는 사람이 사오 인이 된다고 한다. 지나간 칠 년 동안에 노래와 춤으로 수만 원 돈을 벌어 주어, 논밭도 사고 큰 집도 사고 비단 옷도 입게 되었으니 그만하면 자유로 놓아 주어도 마땅하건마는 아직도 욕심을 다 채우지 못하여 천 원이니 이천 원이니 하고 이 몸을 팔아먹으려 한다. 파는 놈도 파는 놈이어니와 사는 놈도 사는 놈이라. 지금까지는 이럭저럭 정절을 지켜 왔건마는 이제 몸이 뉘 첩으로 팔린 뒤에야 정절이 다 무슨 정절이뇨. 다만 죽을 뿐이다, 다만 죽을 뿐이다 하였다.

바라던 형식을 만나 본 것은 기쁘건마는 바라던 그 형식조차 나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이 절통하다 하였다.

영채는 그만 절망하였다. 지금까지 자기는 잠시 타향에 길을 잃었다가 선한 세계, 선한 사람 사는 고향으로 돌아가 칠 년 전 자기의 가정에서 누리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하였더니 모두 다 허사로다 하였다. 지금껏 유일한 선인으로 알아 오고 유일한 의지할 사람으로 알아 오던 형식도 정작 얼굴을 대하니 그저 그러한 사람인 듯, 칠 년간 악인들 사이에서 부대껴 오던 영채의 생각에는 형식같이 선한 사람은 얼굴이며 풍채며 말하는 것이 온통 항용 사람과 다르리라 하였다. 그러나 만나고 본즉 그저 그러한 사람이로고나. 옳다 죽는 수밖에 없다. 대동강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구태 더러운 세상에 섞여 구차히 목숨을 늘여 가기는 차마 못 하리니 하루바삐 새맑은 대동강 물결 밑에서 정다운 월화를 만나 서로 안고 이야기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에게는 돈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몇 친구에게 돈 오 원을 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얻지 못하고 점심때가 지나도록 방에 앉아 울었다. 형식이가 김장로의 집에서 선형과 순애를 대하여 즐거운 상상에 취하였을 때는 정히 영채가 자기 방에서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던 때였다. 이날 저녁에 영채를 찾아온 형식은 영채를 만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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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한참이나 ‘계월향’이라고 쓴 광명등을 보고 섰다가 희경을 돌려보내고 결심한 모양으로 문 안에 들어섰다. 객이 없는지 적적히 아무 소리도 아니 들린다. 서슴지 아니하고 마당에 들어서니 여러 방에 불을 켰으되 사람 그림자가 없다. 형식은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어떻게 찾을 줄을 몰라 다만 발소리를 내며 ‘에헴’ 하고 크게 기침을 하였다. 저편 방으로서 뚱뚱한 노파가 나오는 것을 형식은 한 걸음 방 앞으로 (가까이) 갔다. 번적하는 화류자개 함롱이 보이고, 아랫목에는 분홍빛 그물 모기장이 걸리고, 오른편 구석에는 아롱아롱한 자루에 넣은 가얏고가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섰다. 형식은 이것이 ‘영채의 방’인가 하였다. 그러고는 알 수 없는 슬픈 생각과 불쾌한 생각이 난다. 이 방에서 여러 남자로 더불어 저 가얏고를 타고 소리를 하고 춤을 추었는가. 그러다가 저 모기장 속에서 날마다 다른 남자와…… 형식은 차마 더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영채는 어디 갔는가. 벌써 누구에게 ‘천 원’에 팔려 갔는가. 어젯저녁에 내 집에서 돌아오는 길로 팔려 가지나 아니하였는가. 또는 만일 영채가 절개가 굳다 하면 벌써 어디 가서 자살이나 아니하였는가. 이때에 형식의 머릿속에는 수천 가지 생각이 뒤를 대어 나온다. 형식은 저편 방으로서 나오는 뚱뚱한 노파―노파라 하여도 사오십이나 되었을까―를 보고, ‘저것이 소위 어미로구나’ 하였다. 노파는 손에 태극선을 들고 담뱃대를 물었다. 지금까지 웃통을 벗고 앉았었는지 명주항라 적삼 고름을 매면서 나온다. ‘더러운 노파’라는 생각이 형식의 가슴을 불쾌하게 한다. 노파는 형식의 모양이 극히 초라함을 보고 경멸하는 모양으로, “누구를 찾아요?” 한다. 일찍 형식이와 같이 초라하게 차린 자가 월향을 찾아온 적이 없었음이라. 노파의 생각에 아마 형식은 어떤 부자의 아들의 심부름꾼인가 하였다. 그러므로 기생의 집에 온 사람더러 “누구를 찾아요?” 하고 냉대함이라. 형식은 노파가 자기를 멸시하는 줄을 알았다. 그러고 더욱 불쾌한 마음이 생겼다. ‘나도 교육계에는 상당히 이름있는 사람인데’ 하였다. 그러나 노파의 눈에는 부자가 있고 오입쟁이가 있을 따름이요, ‘교육계에 상당한 이름있는 사람’은 없었다. 형식이가 만일 좋은 세비로 양복에 분홍 넥타이를 매고 술이 취하여 단장을 두르며 ‘여보게’ 하고 들어왔던들 노파는 분주히 담뱃대를 놓고 마당에 뛰어내리며 ‘에그, 영감께서 오시는구랴’ 하고 선웃음을 쳤으련마는, 굵은 모시 두루마기에 파리똥 묻은 맥고자를 쓰고, 술도 취하지 아니하고, 단장도 두르지 아니하고, ‘여보게’도 부르지 아니하는 형식과 같은 사람은 노파의 보기에 극히 하등 사람이었다. 형식은 겨우 입을 열어,

“월향 씨 어디 갔소?” 하였다. 그러고는 곧 ‘월향’에게 ‘씨’자를 달아 부른 것을 한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아직 남의 이름에 ‘씨’자를 아니 달고 불러 본 적이 없다. 더구나 남의 여자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씨’라는 존칭을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소위 ‘째운 사람’들은 여학생을 (보고는 ‘씨’를 달고 기생을 보고는 ‘씨’를) 달지 아니할 줄을 알되, 형식은 여학생과 기생을 구별할 줄을 모른다. 형식의 생각에는 여학생이나 기생이나 사람은 마찬가지 사람이라 한다. 그러므로 형식은 ‘월향’에 ‘씨’를 붙이는 것이 옳으리라 하여 한참 생각한 뒤에 있는 용기를 다하여 ‘월향 씨 어디 갔소’ 한 것이언마는 말을 하고 생각한즉 미상불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고 노파의 얼굴을 보았다. 노파는 웃음을 참는 듯이 입을 우물우물하더니,

“월향 씨가 손님 모시고 어디 갔소. 왜 그러시오?”

“어디 갔습니까?”

노파는 ‘이것이 과연 시골뜨기로구나’ 하면서,

“아까 오후에 청량리 나갔소. 여섯점에 들어온다더니 아직 아니 오구려” 하고 성가신 듯이 ‘잘 가오’ 하는 말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고 만다. “누구요?” 하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에 “모르겠소. 웬 거랑방인데 왔구면” 하는 그 노파의 평양 사투리가 들린다. 형식은 일변 실망도 하고, 일변 그 노파에게 멸시받은 것이 부끄럽기도 분하기도 하면서 발을 돌렸다. ‘계월향! 계월향이가 과연 박영채의 변명인가’ 하고 계월향의 내력을 물어 보고도 싶었으나 노파에게 그러한 멸시를 받고는 다시 물어 볼 용기도 아니 나서 그만 대문 밖에 나섰다.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아까 오던 길로 나온다. 아까 올 때에 ‘반나마 늙었으니……’ 하던 목소리로 ‘간다 간다네 나는 간다네’ 하는 소리가 들리고, 아까 모양으로 여럿이 함께 웃는 웃음 소리가 들린다. 어찌할까 하고 형식은 생각하였다. ‘청량리! 오후에 나가서 여섯점엔 온다던 것이 아직 아니 들어와!’ 형식은 이 말에 무슨 깊은 뜻이 있는 듯이 생각하고 몸이 오싹하였다. ‘영채가 혼자 어떤 남자로 더불어 청량리에 가 있어! 더구나 밤이 여덟시나 지났는데!’ 하고 형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형식은 전속력으로 다방골 천변으로 내려온다. ‘옳다! 청량리로 가자’ 하였다. 형식의 귀에 영채가 우는 소리로 ‘형식 씨, 나를 건져 주시오, 나는 지금 위급하외다’ 하는 듯하다. 형식은 지금 광충교로 지나가는 동대문행 전차를 잡아탈 양으로 구보로 종각을 향하여 뛰었다. 그러나 전차는 찌구덩 하고 소리를 내며 종각 모퉁이를 돌아 두어 사람을 내려놓고 달아난다. 형식은 그래도 십여 보를 따라갔으나 전차는 본체만체하고 청년회관 앞으로 달아난다. 야시에는 아까보다도 사람이 많이 모였다. 종각 모퉁이 컴컴한 데로서 ‘에, 아이쓰구림, 아이쓰구림’ 하는 늙은 총각의 목소린 듯한 것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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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다음 번 오는 전차를 탔다. 신호수가 푸른 등을 두르니, 전차는 또 찌국 하는 소리를 내며, 구부러진 데를 돌아간다. 형식은 조민한 생각에 구리개로서 서대문 가는 전차를 잘못 탔다. 형식은 전차에서 뛰어내려서 바로 뒤대어 오는 동대문행을 잡아탔다. 형식은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의 땀을 씻었다. 차장은 형식의 차세를 받고 ‘딸랑’ 하면서 유심히 형식의 얼굴을 본다. 형식의 얼굴은 과연 몹시 붉게 되었더라. 형식은 전차 속을 한번 둘러보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형식은 전차가 일부러 속력을 뜨게 하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과연 야시에 사람이 많이 내왕하여 운전수는 연해 두 발로 종을 딸랑딸랑 울리면서 천천히 진행하더라. 형식의 가슴에는 불이 일어난다. 형식은 활동사진에서 서양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질풍같이 달아나는 양을 생각하고, 이런 때에 나도 자동차를 탔으면 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종로에서 자동차를 타고 철물교를 지나 배오개를 지나 동대문을 지나 친잠하시는 상원 앞 버들 사이를 지나 청량리를 지나 홍릉 솔숲 속으로 달려가는 것을 상상하였다. 그러고 자기가 어느 집에서 영채가 어떤 사람에게 고생을 당하는가 하고 땀을 흘리며 이집 저집으로 찾아다니는 양과, 여승들이 방글방글 웃으며 ‘모르겠습니다’ 할 때에 자기가 더욱 초조하여 하는 양을 상상하였다. 이때에 누가 형식의 어깨를 툭 치며,

“요― 어디 가는가?” 한다. 형식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신문기자 신우선이로다. 신우선은 형식의 곁에 앉아 그 대팻밥 모자로 부채질을 하며,

“그래 어떤가? 김장로의 따님이 자네를 사랑하던가?” 하고 곁에 앉은 사람이 듣는 것도 상관치 아니하는 듯이 큰소리로 말한다. 형식은 잠깐 아까 자기가 김장로 집에서 선형과 순애를 대하였던 생각을 하고 곧 우선이가 자기의 지금 가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을 생각하였다. 형식은 우선의 귀에 입을 대고,

“여보게 큰일이 났네” 하였다. 우선은 껄껄 웃으며,

“아따, 자네는 큰일도 많데, 또 무슨 큰일인가” 한다. 형식은 우선의 팔을 잡아당기어 말소리를 높이지 말라는 뜻을 표하고 다시 말을 이어 자기의 은인의 딸이 지금 기생으로 서울에 와 있는데, 그는 자기를 위하여 정절을 지켜 왔는데, 지금 여러 유력한 사람들이 그를 자기네의 손에 넣으려 하는데, 지금 청량리에서 어떤 사람에게 위협을 당하는 중인데, 지금 자기는 그를 구원하러 가는 길이라 하고 마침내,

“여보게, 자네는(자네가) 좀 도와 주어야 되겠네” 하고 말을 맺었다. 형식은 이러한 말을 할 때에 영채가 방금 어떤 남자에게 위급한 위협을 받는 양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우선은, “응, 응, 그래, 응” 하고 형식의 가늘게 하는 말을 주의하여 듣더니,

“그래, 그 이름은 무엇인가.”

“본명은 박영채인데 계월향이라고 한다네” 하고 ‘계월향’이가 과연 ‘박영채’인가 하고 의심도 하였다. 우선은 ‘계월향’이란 말을 듣고, 또 계월향이가 (형식의 은인의 따님이란 월향이가)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선은 눈이 둥글하여지며,

“여보게, 그게 참말인가?” 하고 형식의 얼굴을 보았다. 형식은 조민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하는 듯 숨소리가 커지며,

“참말일세, 참말이어!” 하고 영채가 어젯저녁에 자기를 찾아왔단 말과 자기를 찾아와서 신세 타령을 하던 말과, 자기가 방금 다방골 월향의 집으로 다녀온다는 말을 하고 다시,

“그런데 나를 좀 도와 주게” 한다. “도오다이몬 슈텐(동대문 종점)! 동대문이올시다” 하는 차장의 소리에, 두 사람은 말을 끊고 전차에서 내렸다. 아직도 청량리 가는 전차가 오지 아니하였다.

우선이가 형식의 말을 듣고 놀란 것은 까닭이 있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우선이도 계월향을 처음 보고 그만 정신을 잃은 여러 사람 중의 하나이라. 우선은 백에 하나도 쉽지 아니한 호남자였다. 풍채는 좋겠다, 구변이 있겠다, 나이는 불과 이십오륙 세로되, 문여시(文與詩)를 깨끗이 하겠다, 원래 서울에 똑똑한 집 자손으로 부귀한 집 자제들과 친분이 있겠다, 게다가 당시 서슬이 푸른 대신문에 기자였다. 이러므로 그는 계집을 후리는 데는 갖은 능력과 자격이 구비하였었다. 그는 여러 기생을 상종하였고, 또 연극장의 차리는 방〔樂屋〕에 출입하여 삼패며 광대도 희롱하였었다. 이렇게 말하면 신우선이란 사람은 계집 궁둥이나 따라다니는 망가자와 같이 들리되, 그에게는 시인의 아량이 있고 신사의 풍채가 있고 정성이 있고 의리가 있었다. 그의 친구는 그의 방탕함을 책망하면서도 오히려 그의 재주와 쾌활한 기상을 사랑하였다. ‘신우선은 지나 소설에 뛰어나오는 풍류 남자라’ 함은 형식의 그를 평한 말이니, 과연 그는 소주, 항주 근방에 당나라 시절 호협한 청년의 풍이 있었다.

신우선이가 계월향에게 마음을 둔 것은 한 달쯤 전이었다. 우선은 자기의 힘을 믿으매 월향도 으레 자기의 손에 들려니 하였다. 월향이가 여러 부호가 자제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일생을 의탁할 만한 영웅 재자를 구함이라 하고, 자기는 족히 그 후보자가 되리라 하였다. 그래서 우선은 남들이 돈과 육욕으로 월향을 달랠 때에, 자기는 인물과 재주와 기상으로 월향을 달래리라 하였다. 무론 우선은 돈으로 경쟁할 만한 힘은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밤마다 시를 지어 혹은 우편으로 혹은 직접 월향에게 주었다. 이러노라면 월향은 자기의 인격과 천재를 알아보고 ‘이제야 내 배필을 만났구나’ 하면서 두 팔을 벌리고 자기에게 안기려니 하였다. 그러하던 즈음에 형식에게서 이러한 말을 들으니 놀라는 것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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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선은 전차 오기를 기다리면서 괴로워하는 형식의 얼굴을 보았다. 발전소에서는 쿵쿵쿵쿵 하는 발동기 소리가 나고 누런 복장 입은 차장과 운전사들이 전등빛 아래 왔다갔다하였다. 우선은 생각하였다. ‘월향이가 나더러 평양 친구를 묻던 것이 그 때문이로구나’ 하였다. 한번 우선이가 월향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월향이가 농담 모양으로 웃으며,

“나리께 평양 친구가 계셔요?” 하고 우선에게 물었다. 우선은 월향이가 평양 사람이니까 평양 친구를 묻는 줄로 생각하고,

“이삼 인 되지” 하였다. 월향은,

“그래, 그 어른들은 다 무엇을 하시는가요?” 하였다. 이때에 월향은 첫째에 이형식의 거처를 알려 함과, 평안도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어떻게 지내는가를 알려 하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월향도 평안도 학생들이 많이 서울에 와 있는 줄은 알건마는 몸이 기생이 되어서는 그 평안도 학생들과 또 평안도 사람 신사들이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월향에게도 평안도 신사가 삼사 인 놀러 왔었다. 그네들은 다 번적하는 양복을 입고 일본말로 회화를 하며 동경에 가서 대학교에 다니던 이야기를 하고 매우 젠체하며 신사인 체하였다. 그러나 월향은 사 년 전 부벽루에서 월화가 ‘저것들은 허자비에 옷을 입힌 것이라’ 하던 말을 생각하고 ‘저들도 역시 허자비에 옷을 입힌 것이라’ 하였다. 그러고는 월향의 생각에 ‘저것들이 평안도 사람으로 서울에 와 있는 일류 신사인가’ 하고 자기의 고향을 위하여 슬퍼하였었다. 그러하던 차에 우선이가 ‘평안도 친구가 이삼 인 있지’ 하는 말을 듣고, 행여나 그 속에 ‘월화의 이상적 인물’이 되임직한 사람이 있는가 하고, 또 그 사람이 자기가 기다리는 이형식이나 아닌가 하였다. 월향의 눈에는 우선은 조선에 드문 남자라 하였다. 옛날 시에 있는 듯한 남자라 하였다. 그러고 그 의식의 호탕함을 더욱 사랑하여 ‘월화 형님에게 보였으면’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우선의 친구라 하면 상당한 사람이려니 하고, “그래 그 어른들은 다 무엇을 하시는가요?” 하고 물음이라. 우선은,

“혹은 교사도 하고, 글짓기도 하고, 실업도 한다” 하였다. 월향은 더욱 더욱 유심하게,

“그 중에 누가 제일 좋은 사람이에요? 누가 제일 이름이 있어요?” 하였다. 우선은 유심히 월향의 얼굴을 보며 ‘옳지, 저 계집이 본고향 사람 중에 배필을 구하는구나’ 하고 얼마큼 시기하는 생각이 나서,

“그 중에 이형식이란 사람이 제일 유망하지마는” 하고 이형식의 가치를 낮추기 위하여 ‘하지마는’에 힘을 주었다. 월향은 가슴이 갑자기 뛰었다. 그러나 그 빛을 감추고 아양을 부리며, “유망하지마는 어때요?” 하였다. 우선은 자기가 친구의 험담을 한 듯하여 적이 부끄러운 생각이 나면서,

“응, 이형식이가 좋은 사람이지…… 매우 유망하지” 하고는 그래도 행여나 이형식에게 월향을 빼앗길까 두려워, “아직 유치하지…… 때를 못 벗어서” 하고 자기보다 훨씬 낮은 사람 모양으로 말하였다. 무론 이것이 거짓말은 아니라. 우선은 결코 형식을 자기보다 인격으로나 학식으로나 문필로나 승하다고는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뿐더러 자기와 평등이라고도 생각지 아니한다.) 그래서 ‘형식은 우선 한문이 부족하니까’ 하고 형식이가 자기보다 일문과 영문이 넉넉한 것은 생각지 아니한다. 그러고 자기는 어디까지든지 형식의 선배로 자처하며, 형식도 구태여 우선과 평등을 다투려 하지 아니하고, 우선이가 선배로 자처하면 형식도 우선을 선배 모양으로 대접하였다. 그리하다가 일전에 우선이가 형식에게 허교하기를 청할 적에도 형식은 윗사람에게서 허락을 받는 모양으로 극히 공손하였다. 그러나 우선은 결코 형식을 미워하거나 멸시하지 아니하였다. 우선은 ‘형식의 유망함’을 진실로 믿었다. 그러므로 월향에게 ‘유망은 하지마는 아직 때를 못 벗었어’ 한 것은 결코 형식을 비방함이 아니요, 자기가 형식에게 대한 진정한 비평을 말한 것이라.

‘아아, 그때에 내가 월향에게 형식을 소개한 것이 이러한 뜻을 가졌던가’ 하고 다시금 전차를 기다리고 섰는 형식을 보았다. 형식은 조민한 듯이 왔다갔다하며 동편만 바라보고,

“어째 전차가 아니 오는가?”

“밤이 깊었으니까 삼십 분에 한 번씩이나 다니는지” 하고 우선은 형식의 괴로워함을 동정하였다. 형식은 애처로워서 우선을 손을 꼭 쥐며,

“참, 오늘 저녁 힘을 써주게” 하였다. 외로운 형식의 지금 경우에는 우선이밖에 믿는 사람이 없었다. 우선이만 자기를 도와 주면, 영채는 건져 낼 수가 있거니 하였다. 우선은 “걱정 말게” 하고 돌아서면서 픽 웃었다. 그 웃음에는 까닭이 있었다.

우선은 경성학교 교주 김남작의 아들 김현수와 배명식 양인이 월향을 청량리로 데리고 갔단 말을 월향의 집에서 듣고, 월향은 오늘 저녁에는 김현수의 손에 들어가는 줄을 짐작하였다. 그래서 우선은 빨리 종로경찰서에 가서 형사에게 말을 하여 (귓속하여) 후원을 청하고, 김현수의 계교를 깨트리려 하였다. 월향을 아주 김현수의 손에서 뽑아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신문에 발표하여 실컷 분풀이나 하고, 혹 될 수 있으면 김현수에게서 맥줏값이나 빼앗으려 하였다. 아까 철물교에서 전차를 탄 것은 바로 종로경찰서로서 나오던 길이었다. 그러한 일이러니 이제 들어 본즉, 월향은 형식에게 마음을 바친 사람이라 한다. 미상불 시기로운 생각도 없지 아니하나 형식의 뜻을 이뤄 줌이 옳은 일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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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청량사에 다다랐다. 두 사람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종로경찰서의 형사였다. 우선은 김현수의 가는 집을 잘 알았다. 그 집은 우물 북쪽에 있는 조고마한 암자라, 여러 암자 중에 제일 깨끗하고 조용한 암자였다. 우선은 형식에게 손짓을 하여 문 밖에 서 있으라 하고 가만히 안에 들어갔다. 형식은 ‘여기 영채가 있는가’ 하고 다리를 떨며 귀를 기울였다. 똑똑지는 아니하나 여자의 괴로워하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형식은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한 걸음 더 들어서서 귀를 기울였다. 과연 여자의 괴로워하는 소리로다. 형식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뛰어들어갔다. 방에는 불이 켜 있고, 문을 닫쳤는데 머리를 깎은 사람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형식의 호흡은 차차 빨라진다. 우선이가 창으로 엿보다가 고양이 모양으로 가만가만히 나오면서 형식의 어깨에 손을 짚고 가늘게 일본말로,

“모 다메다(벌써 틀렸다)” 한다. 형식은 그만 눈에 불이 번뜻 하면서 ‘흑’ 하고 툇마루에 뛰어오르며 구두 신은 발로 영창을 들입다 찼다. 영창은 와지끈 하고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떨어져 들어간다. 형식은 영창을 떠들고 일어나는 사람을 얼굴도 보지 아니하고 발길로 차넘겼다. 어떤 사람이 형식의 팔을 잡는다. 형식은 입에 거품을 물고,

“이놈, 배명식아!” 하고는 기가 막혀 말이 아니 나온다. 형식은 아니 잡힌 팔로 배학감의 면상을 힘껏 때리고, 아까 형식의 발길에 채어 거꾸러진 사람을 힘껏 이삼 차나 발길로 찼다. 그 사람은 저편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형식은,

“이놈, 김현수야!” 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고는 넘어져 깨어진 영창을 들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우고 흑흑 느낀다. 손과 발은 동여매였다. 그러고 치마와 바지는 찢겼다. 머리채는 풀려 등에 깔렸고, 아랫입술에서는 빨간 피가 흐른다. 방 한편 구석에는 맥주병과 얼음 그릇이 넘느른하고 어떤 것은 깨어졌다. 형식은 얼른 치마로 몸을 가리고 손발 동여맨 여자를 안아 일으켰다. 여자는 얽어매인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운 대로 울기만 한다. 우선도 방 안에 들어왔다. 얽어매인 손발을 풀면서 형식더러,

“두 사람은 포박되었네” 하고 웃는다. 형식은 이러한 경우에 웃는 우선을 원망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선은 이러한 사건을 형식의 모양으로 그리 큰 사건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우선은 천하 만사를 웃고 지내려는 사람이었다. 형식은 얼굴에 꼭 대고 있는 여자의 손목을 풀었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손을 낯에서 떼지 아니하고 운다. 형식은 얼마큼 분한 마음이 스러지고 냉정하게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형식은 우뚝 서서 옷고름이 온통 풀어지고 옷이 흘러내려 하얀 허리가 한 뼘이나 내어놓인 것을 보고 새로운 슬픔이 생긴다. 형식은 ‘이것이 과연 박영채인가’ 하고 ‘박영채가 아니면 좋겠다’ 하였다. 그러고 그 옷을 보고 머리를 보았다. 무론 그 여자는 모시 치마도 입지 아니하고, 서양 머리도 쪽찌지 아니하였다. 형식은 그 치마를 만든 감이 다만 무슨 비단이어니 할 따름이요, 무엇인지를 몰랐다. 머리에 핏빛 같은 왜증 댕기를 들이고 손에는 누런 빛 있는 옥지환을 꼈다. 형식은 그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 얼굴을 보고자 아니하였나니, 대개 그 얼굴이 ‘박영채’일까 보아 두려워함이라.

우선은 그가 월향인 줄을 알았다. 그러나 월향이가 그 친구 되는 이형식의 은인의 따님이요, 또 이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킨다는 말을 듣고는 월향더러 ‘얘, 월향아’ 하고 부르기도 미안하고, 또 월향의 곁에 가까이 가기도 미안하였다. 그래서 한 걸음쯤 형식의 뒤에 서서 형식의 하는 양만 보고 섰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낯에 손을 대고 울 뿐이라 형식도 무어라고 부를 줄을 몰라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다가 그 여자더러,

“여보시오! 그 짐승놈들은 포박되었으니 안심하시오” 하였다. ‘안심하시오’ 하는 형식도 그 안심하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그 짐승놈들이 포박되고 아니 되기에 무슨 안심하고 안심 아니함이 있으리요. 아까 우선이가 형식에게 한 말과 같이 ‘모 다메다’가 아니뇨. 우선은 참다못하여,

“여보시오. 박영채 씨!” 하였다. 우선은 그 여자가 월향인 줄을 알며 또 월향은 즉 박영채인 줄을 알았다. 그러므로 한 달 동안이나 ‘얘, 월향아!’ 하던 것을 고쳐 ‘여보시오, 박영채 씨’ 한 것이라. 갑자기 ‘씨’를 달고 ‘얘’를 변하여 ‘여보시오’ 하기가 보통 사람에게는 좀 어려운 일이언마는 우선에게는 그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라 우선은 다시,

“여보시오! 박영채 씨! 여기 이형식 형이 오셨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여자는 몸을 흠칫하며 두 손을 갑자기 떼더니 정신없는 듯한 눈으로 형식을 본다. 형식도 그 얼굴을 보았다. 그는 월향이었다! 박영채였다! 영채도 형식을 보았다. 그는 형식이었다! 이형식이었다! 형식과 영채는 한참이나 나무로 새긴 사람 모양으로 마주보았다. 우선은 말없이 마주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렇게 세 사람은 한참이나 마주보았다. 이윽고 우선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다음에 형식과 영채의 눈에도 눈물이 돌았다. 영채는 피 흐르는 입술을 한번 더 꼭 물었다. 옥으로 깎은 듯한 영채의 앞닛박이 빨갛게 물이 든다. 형식은 두 팔로 가슴을 안으며 고개를 돌린다. 우선은 형식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형식은 소리를 내어 운다. 영채는 다시 앞으로 쓰러지며 운다. 우선도 입술을 물고 옷소매로 눈물을 씻었다. 종소리가 서너 번 똥……똥 울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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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는 김현수, 배명식 양인에게 박승을 지워 마당으로 끌고 들어왔다. 형식은 당장 마주 나가서 그 두 사람의 살을 뜯어 먹고 뼈를 갈아 먹고 싶었다. 두 사람은 그래도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네는 결코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네의 생각에 기생 같은 계집은 시키는 말을 아니 들으면 강간을 하여도 관계치 않다 한다. 그네는 여염집 부인이 남의 남자와 밀통함이 죄인 줄을 알건마는 기생 같은 것은 으레 아무나 희롱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다. 여염집 부녀에게는 정절이 있으되, 기생에게는 정절이 없는 것이라 한다. 과연 그네의 생각하는 바는 옳다. 법률상 기생은 소리와 춤으로 객을 대하는 것이라 하건마는, 기실은 어느 기생치고 밤마다 소위 ‘손을 보’지 아니하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김현수나 배명식의 생각에, 기생이라는 계집사람은 모든 도덕과 모든 인륜을 벗어난 일종 특별한 동물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오늘 저녁에 한 일이 결코 도덕이나 양심에 거슬리는 행위인 줄로는 생각지 아니한다. 다만 귀찮은 법률이라는 것이 있어 ‘부녀의 의사를 거슬리고 육교를 한 것’을 강간죄라 할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네가 만일 이 자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내일 아침부터는 자기네는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인 줄로 알 것이라. 다만 배명식은 소위 교육자라는 명목을 띠고서 이러한 허물로 박승을 지게 되면, 경성학교의 학감의 지위가 위태할 것을 근심하였을 뿐이라.

형식은 분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을 보았다. 김현수로 말하면 마땅히 그러할 사람이라 하더라도, 소위 교육자라 일컫는 배명식이가 이런 대죄악을 범하였음을 보고 더욱 분하여 하였다. 형식은 배의 곁에 서며 조롱하는 목소리로,

“여보, 배형. 이게 무슨 짓이오? 교육가로 강간이란 말이 웬 말이오?” 하였다. 배명식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형식이가 왜 이 일에 참견하는가’ 하고 그것을 이상히 여겼다. 그러고 이형식은 상관없는 일에 참견하는 놈이라 하고 괘씸하게도 여겼다. 자기가 강간죄를 범하였으니, 형사의 포박을 당하는 것은 마땅하거니와 상관없는 이형식에게 책망을 받을 이유야 무엇이랴 하였다. 그러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아마 이형식도 표면으로는 품행이 단정한 체하면서도 속으로 기생집에를 다녀 월향과 친하였다가, 자기가 월향을 손에 넣으려는 것을 시기하여 형사를 데리고 온 것이라 하였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형식이가 상관도 없는 일에 형사를 데리고 오며 저렇게 성낼 까닭이 없으리라 하였다. 배명식은 직접으로 자기의 이해에 상관되는 일이 아니고는 슬퍼할 줄도 모르고 괴로워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 자기의 자식이 칼로 손가락을 조곰 벤 것을 보면 명식은 슬퍼할 줄을 알지마는, 남의 집의 아들이 죽는 것을 보더라도 ‘참 슬프옵니다’ 하고 입으로는 남보다 더 간절한 듯이 말하는 대신에 마음으로 슬퍼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로다. 만일 영채가 자기의 누이동생이거나 딸이었던들, 남이 영채를 강간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형식보다 더욱 분을 내어 칼을 들고 덤비려니와 영채가 누이도 아니요, 딸도 아니므로 그가 강간을 받아도 관계치 않고 죽더라도 관계치 않다 한다.

형식은 김현수를 대하여,

“여보, 당신은 귀족이오! 귀족이란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칭호는 아니지요. 당신도 사오 년간 동경에 유학을 하였소. 당신이 어느 회석에서 말한 것을 기억하시오? 당신은 일생을 교육사업에 바친다고 한 말을” 하고 형식은 발을 굴렀다. 현수는 시골 상놈한테 큰 수모를 당한다 하였다. 암만하여도 나는 남작이요, 수십만 원 부자요, 너는 가난한 일서생이로구나. 지금은 네가 나를 이렇게 모욕하되, 장차 네가 내 발 앞에 꿇어 엎드릴 날이 있으리라 하였다. 나는 이렇게 형사에게 포박을 당하더라도 내일 아침이면 놓여 나올 수도 있건마는, 너는 한번 옥에 들어가기가 바쁘게 일생을 그 속에서 썩으리라 하였다. 네가 아무리 행실이 단정하다 하더라도 일생에는 무슨 허물도 있으리니. 그때에는 내가 오늘 받은 수모를 네게 갚으리라 하였다. 그러고 아까 영채를 안던 쾌미를 생각하매 중도에 방해를 더한 형식의 행위가 괘씸하다 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말할 바가 아니니 외따른 청량리 솔수풀 속에서는 남작의 권위와 황금의 힘도 부릴 수가 없음이라.

우선은 형식이가 두 사람을 크게 책망할 줄 알았더니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행실 잘하기를 가르치는 모양으로 말함을 보고 형식은 아직도 세상을 모르는 도련님이라 하였다. 만일 내가 형식이가 되었으면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실컷 꾸지람이나 톡톡히 하여 분풀이를 하련마는 하였다. 그러나 형식으로는 이보다 이상 더 심한 책망을 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형식이가 마침내 다시 한번 발을 구르며,

“여보! 사람들이 되시오!” 하였다. 형식은 생각에 아마 이만하면 저 두 사람들이 양심에 부끄러움이 생겨 ‘다시는 이러한 일을 아니하리라’ 하고 아프게 후회할 줄을 믿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앉았는 것은 아마 자기의 말에 부끄러움과 후회가 생겨 그러하는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실 부끄럽기는 하였으나 후회하지는 아니하였다.

우선은 참다못하여,

“여보게 자네는 영채 씨 모시고 들어가게. 이 일은 내가 맡음세”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