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이광수 단편)
유월 중순, 찌는 듯하는 태양이 넘어가고, 안개 같은 수증기가 만물을 잠가 산이며, 천이며, 가옥이며, 모든 물건이 모두 반이나 녹는 듯 어두운 장막이 차차차차 내림에 끓는 듯하던 공기도 얼마큼 식어가고, 서늘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빽빽한 밤나무 잎을 가만가만히 흔들어서, 정적한 맘에 바삭바삭하는 소리가 난다.
처소는 박천(博川) 송림(松林). 몽롱한 월색이 꿈같이 이 촌락에 비치었는데 기와집에 사곽문(舍廊門) 열어놓은 생원님들은, 몽몽(濛濛)한 쑥내로 문군(蚊群)을 방비하며, 어두운 마루에서 긴 대 털며 쓸데없는 수작으로 시간을 보내나, 피땀을 죽죽 흘리면서, 전답에 김매던 가난한 농부와 행랑 사람이며, 풀 뜯기와 잠자리 사냥에 피곤한 아동배(兒童輩)는 벌써 세상을 모르고 혼수(昏睡)하는데, 이 촌 중 중앙에 있는, 사오 채 와옥(瓦屋) 뒷문이 방싯하고 열리더니, 그리로, 한 이십 세나 되었을 만한 젊은 부인이 왼편 손에 자그마한 사기 병을 들고 나온다. 늙은 밤나무 잎 사이로 흐르는 월광(月光)이 그 몸을 수놓더라. 몸에는 새로 지은 듯한 생저(生苧) 적삼과, 가는 베 치마를 입었고, 흰 그 얼굴에는 심통한 비애(悲哀)가 나타났더라. 부인을 따라 나오는 검은 강아지를 "쉬! 쉬!" 하여 들여 쫓고, 다시금 몽롱한 집을 들여다보더니, 소리 아니 나게 문을 닫고, 돌아선다. 그 두 눈으로는 멈춤 없이 눈물이 흐르더라. 부인은 쑥이며 으악이 갓길로 자란 풀을 헤치고, 캄캄한 솔밭을 향하여 올라가면서, 때때로 머리를 둘러 자기의 집을 돌아본다. 밤이 이미 깊었으매, 바람 한 점 없고, 푸른 하늘에 물먹은 무수한 성진(星辰)만 반듯반듯 하계를 감하(瞰下)한다. 부인은 거의 이성을 잃은 듯, 들편들편 하면서 발을 옮겨놓는데 목적은 자못 캄캄한 데로 가는 것이라. 지금 이 부인의 마음에는 희망도 없고, 공포도 없고, 심지어 비애조차 없게 되었도다. 처음에는 집을 떠날 때는 무슨 목적도 있었겠고, 계획도 있었겠다마는, 일보 일보로 점점 소거(消去)하고, 제일 어두운 수풀 속에 이르렀을 때에는 전혀 아무 감상도 아니 나게 되었더라.
아름이나 넘는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서고 총생(叢生)한 가지며 잎이 하늘을 가리어 별도 잘 아니 보이고, 습한 지면에서는 눅눅한 취기(臭氣)가 나며 빽빽한 소나무 잎 사이로 흐르는 월광은 무수한 금침이 지면에 산(散)한 듯하더라. 부인은 미친 듯 오륙 보나 뛰더니 구부러진 소나무에 맞질려 깜짝 놀라서 우뚝 서면서 머리를 들어 우러러보더니, 경련적으로 해쭉 웃고, 앞으로 거꾸러지는 듯 그 나무를 안고 얼굴을 나무에 비빈다. 부인은 이러하고 한참 있더니, 무엇에 놀란 듯 프륵 떨면서 물러서서 손에 든 병을 보고 퍼석 주저앉는다. 한참이나 머리를 숙이고 앉으니 이성이 얼마큼 생긴다. 혼잣말로,
"아아, 그럴 때가 왜 있을꼬? 그럴 때가 왜 있을꼬? 아이고, 분해라! 아이고 절통해라! 그럴 때가 왜 있을꼬?"
부인은 병 든 손으로 땅을 덮고, 몸을 왼편으로 기울이고, 바른 손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머리를 흔든다.
"내가 이 집에 시집오기만 잘못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일생 시집이라고는 아니 가고, 어머님과 함께 있을걸, 흥, 흥."
이마를 치마로 가리고 앞으로 거꾸라진다.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여, 다─쓸 데 있나······ 쓸데없어, 실컷 서방질이나······ 그래 쓸데없어, 쓸데없지!"
"계집아이 하나 믿고 살까? 죽었으면 편안하지, 이놈,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보자!"
하고 부인은 머리 들고 어깨춤을 추면서 곁에 누가 서 있기나 한 것같이, 피 선 눈으로 견주어 보더니,
"네, 이놈, 얼마나 잘 사나 보자!"
하고 병에 넣은 약을 꿀꺽꿀꺽 마시고 입을 접접 다시면서 병을 내던진다. 길게 한숨짓고 누우면서,
"그럴 때가 왜 있을꼬? 그럴 때가 왜 있을꼬? 이놈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보자, 내가 죽어서 귀신만 되었단 보아라, 그제, 칼을 가지고 와서, 그년, 그놈을 이렇게······."
팔로 찌르는 형용을 하면서,
"아이고, 어머니, 난 죽노라!"
하고 뱉는 듯이 운다. 두 합이나 먹은 것을 기우이 동맥, 모세관을 좇아 각 기관과, 세포에 퍼지니, 심장의 기능도 점점 둔하게 되고, 호흡도 곤란하여지며 전신에 허한(虛汗)만 솟는다. 정신도 차차 몽롱하게 되어 작용이 점점 단순하여지면서 원망과 육신의 고통밖에 감응치 아니하더라. 처음에는 "이제 죽겠다" 하고,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웠더니, 바라고 바라는 죽음은 아니 오고, 오는 것은 고통뿐이라. 고통이란 놈은 우리의 일생을 안고 돌다가 그것도 오히려 부족한지 죽을 때 일순시(一瞬時)에 남은 고통 전체가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싸는 것이라. 가련한 이 부인은 지금, 잔혹, 무정, 침통한 고통에 싸워 "아이고 배야, 이놈!" 하는 소리로 이것을 벗어나려 하지도 못하고 부엉이의 입에 물린 토끼와 같이 '고통'의 하라는 대로만 하고 목숨 끊어지기만 기다리도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아이고 어머니, 이놈" 하면서, 꼬불락, 닐락 팔과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더니 약 한 시간이나 지나니, 끙끙대는 소리와, 이따금 흑흑 느끼는 것밖에 없게 되더라. 나무는 의연하셨고, 밤은 의연히 어두우며, 우주는 의연히 묵묵하도다. 자연(천지만물, 단 인류는 제하고)은 무정하고 냉혹하여, 우리야 싫어하든, 즐거워하든 잠잠히 있고, 또 그뿐 아니라 그 법칙은 극히 엄준하여 우리로 하여금 결코 일보도 그 외에 나서게 하지 아니하나니, 즉 우리가 슬퍼한대야 위로하는 법 없고, 우리가 일분일초의 생명을 더 얻으려 하여도 허락지 아니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람이란 동물은 고독을 싫어하는 고로 항상 그 '동무'를 구하며, 구하여 얻으면 기뻐하고 행복되며, 얻지 못하면 슬퍼하며 불행되느니라. 자연히 그 '동무'에는 조건이 있으니 즉 '정다운 자', '사랑스러운 자'라. 만일 이 조건에 불합하는 자면 비록 백만의 '동무'가 있어도. 오히려 무인광야에 홀로 선 것같이 기쁨과 행복이 없으되 만일 일인이라도 이 조건에 합하는 자 있으면 기쁨과 행복이 마음에 충만하여 전 우주 간에 만물이 하나도 미(美) 아님이 없고, 하나도 애(愛) 아님이 없나니 전자는 인류에 가장 불행하며 가련한 자요, 후자는 가장 복되며 운 좋은 자이니라. 제왕, 부귀 그 무엇인고?
전자에 속하는 가련한 저 부인은 고독의 비애가 그 극점에 달하여, 애를 실(失)할 시에 그 행복과, 기쁨을 잃고, 심지어 그 생명까지 버리려 하는도다. 이 부인으로 하여금─용자(容姿) 숙덕(淑德)을 무비(無備)한 이 부인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자, 그 누구? 한 사람의 생명을 파멸한 자가 누구? "아이고 배야, 이놈!" 하던 소리는 공기에 파동을 작하여 어디까지나 퍼졌는지 지지(只至)는 아무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생명 없는 일 물체로다.
촌가에서 닭을 소리 한두 마디 나더니, 젊은 여름밤이 벌써 지나가고 동편 하늘이 희어지며, 별이 조는 듯 차차 없어지는데 촌중이 북적 뛰놓더니 등불이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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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부인이라 하여온 사람은 송림 한 좌수(韓座首)의 자부(子婦)라. 본시 동군(同郡) 모제장(某濟長)의 독녀로서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노조모 하에 그 아우 하나로 더불어 길러낸 사람이라. 가세도 유여(有餘)하여 여비남복(女婢男僕)에 물 길어본 적 없으며, 또 그 모는 오십 넘은 상처(喪妻) 끝에 시집와 이십오에 과부가 되어 다문 두 자식을 바라보고 백발이 되도록 살아왔느니, 별로 교육 있는 이도 아니요, 자못 '무던한 사람'이러라. 그러므로 이 부인도 그 모의 감화를 입어 그저 '무던한 사람'이라. 학교에서 선생의 강의를 들은 바도 없고, 서적에서 물리며, 인정을 연구한 바도 없고, 외계(外界) 즉 사회의 영향이라고는 그 가정과 친척의 상태, 언어, 행동 등의 지나지 못하는 단순한 부인이라. 즉 한국 모형적 부인이라. 별로 특질도 없고, 능력도 없으나 간간히 그 성질을 설명하건대 입이 무겁고, 행실이 단정하고, 아무 일이고 삼가고 삼가며 절대적 부모와 지아비의 명령에 복종함이라.
저가 한명준의 아내가 된 것은 거금(去今) 팔 년 전, 즉 저가 십육, 명준이가 십이 적이라. 부인의 모친은 이 개년이나, 그 딸을 위하여 인근 촌리를 미행하면서 사위 될 재목을 고르던 결과로 한명준을 얻은 것이라. 저가 사위를 고를 때에 무엇을 표준으로 하였는고, 말하기를 일에 문벌, 이에 재산, 삼에 가족, 사에 당자며, 또 자기의 가정이 외롭다 하여 세력 있는 한 좌수와 사돈 되는 것이 한 끗 의지가 된다 함이라. 부인은 그 모만 믿고 어린 마음에 신랑의 얼굴 보기만 고대하고, 남 모르게 기뻐하며, 아무도 없을 때에는 '한명준 한명준' 하고 즐겨 하며, 또 신랑의 화상을 여러 가지로 마음에 그려보고, 그 가운데 제일 풍채 좋고 천재 있는, 정 있는 청년을 선택하여 '한명준'이라는 이름을 짓고는 즐겨하며, 철없는 아우가 "야─, 한명준이 색시" 하면서 어깨를 짚을 때에도 가장 시끄러운 듯 몸은 흔드나 기쁜 웃음이 목젖까지 말려 나오고, 귓결에 신랑의 결점이 들리면, 한끝으로는 노하고, 한끝으로는 무섭기도 하여, 아무쪼록 부인하려 하더니 어언간 십일월 십칠일이 왔더라. 부인은 밤 들기를 고대하여 기쁨과 부끄러움과 의심을 섞어가지고 위황(煒煌)한 촉광(燭光)에 비치어 신랑의 방에 들어가, 장옷 속으로 병풍에 의지하여 서 있는 신랑을 보니 키는 십 세나 난 아해 같고 검은 갓 아래로 겨우 보이는 조그만 얼굴에는 핏빛 하나 없고 멀뚝멀뚝하는 그 두 눈, 조말조말한 그 태도. 얼굴에는 조금도 사랑스럽거나 정다운 표정이 없더라. 부인의 가슴에 있던 아름다운 마음은 다 스러지고, 비애와 절망만 문들문들 솟아나와 울고까지 싶도다.
곤하여서 곁에서 색색, 자는 신랑의 숨소리를 들으매, 지금껏 꽃밭에서 노니다가, 여우한테 홀리어서 여우의 굴에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 재미있는 꿈을 꾸다가 깨친 것 같기도 하고.
'아아. 이것이 내 일생에 같이 살아갈 지아빈가'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어. 어찌하여 어머니가 이런 사람을 골랐던고? 시집가는 데는 어미도 믿지 못할 것이로다. 아아, 이것이 나의 지아빈가? 난생처음 한심이요, 난생처음 슬픔이며, 난생처음 탄식이라.
이후 일 년허(許)나 본가에 있다가 시집이라고 가보니, 모두 낯모르는 사람이요, 자못, 하나, 아는 사람은 지아비나 남보다 더 냉담하고. 구고(舅姑)는 첫 며느리라 하여 심히 종애(鍾愛)하나, 정작 사랑할 지아비는 "옷 내라" "버선 기워라" 하는 소리밖에 아니 하니 부모의 사랑이나 받으려면 본가에 있는 편이 낫지 아니할까.
남모르게 눈물로 지내는 중 흐르는 세월이 일 년이나 지나가는데 명준이는 점점 소원하여져서 부모의 말도 아니 듣고 사랑에서 독거하게 되니 부인의 비애와 적막은 날로 깊어가는지라. 그 화기 있고 아름답던 얼굴은 점점 여위어가고, 활발하던 정신은 점점 침울하게 되어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던 인생 문제까지 생긴다. 한 좌수는 항상 밖에 있는 고로 자세히 가내 사정을 몰라, 안에 있고 이런 방면에 주의하는 모친은 대단히 걱정하여, 이따금 그 아들을 불러서 훈계하나 아들은 마이동풍으로 듣지 않고, 정이 점점 더 소원히 되어 그 처를 보기만 하여도 미운 생각이 나는 고로 조그만 일에도 팔깍팔깍 노하더라. 명준이도 차차 힘이 들어오매 이따금 그 처를 어여삐 여기는 정이 생기나 이는 잠시라, 자기도 왜 미워하는지 그 이유는 모르나 그저 미운 것이라, 뉘라서 능히 이 정을 없이하리오, 자못 발현치 않게 제어할 따름이지.
부인은 처음에는 애정과 육욕의 기갈(飢渴)에 비탄하더니 연령이 이십이 넘음에 자손 걱정까지 생겨서 비탄에 비탄을 더하더라. 설상가상은 이를 이름인지? 그 모친의 일찍 늙은 이유를 비로소 깨닫더라.
명준이도 열일곱이 넘자 역시 고독의 비애를 깨달아 그 처에 대한 애정을 회복하려 힘쓰더니 힘쓰면 힘쓸수록 더욱 소원하여가는지라. 마침내 외박이 번번하며 성중 출입이 잦고, 얼마 아니하여 이웃에게 '외입쟁이'라는 칭호를 얻고, 주상(酒商) 창기의 채인(債人)이 한 좌수의 문에 자주 출입하며, 전답 문건이 날마다 날아나게 되니 부인의 유일 동정자 되는 시어머니도 점점 냉담하게 되어가더라.
이렁저렁 이 년이 되는 후 하루는 한 좌수가 명준을 불러,
"너, 이놈, 왜 그런 못된 짓을 하여서 네 집안을 망하게 한단 말이냐."
하고 그 죄를 꾸짖으매
"그러면 첩을 하나 얻게 해주시오."
명준이는 외입에 단련이 되어,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대답하거늘 좌수도 여러 말로 꾸짖어도 보고, 얼려도 보다가 할 수 없이
"그러면, 네 처에게 물어봐라."
하고 입을 쩍쩍 다시면서 담뱃대를 떠니,
"정말이십니까?"
명준은 희색(喜色)이 만안(滿顔)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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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년 만에 부부 동침이라!
부인은 무슨 일인지를 모르고 꿈같이 생각하나 조금도 기쁜 정은 없더라. 부인의 열렬하던 정은 육칠 년간 애수 비탄에 다 식어 냉회(冷灰)가 되었도다.
무슨 일인데 명준이가 그날은 가장 친절하며 지금껏 소원하던 죄를 성심으로 하는 것같이 사(謝)하며 각색 행동이 명준이는 아는 듯하더라. 어디 알았으리오. 이리가 양의 가죽을 쓰고 양의 무리에 섞이는 것은 양을 해하려 함일 줄을.
"여보게, 나 원할 게 하나 있는데."
부인은 들은 듯 못 들은 듯 잠잠하고 있다.
"여보게, 나, 원할 게 하나 있어."
"아니. 원할 게라니. 내게 무슨 원할 게 있겠소?"
부인이 온순한 음성으로 대하면서 '무슨 소리를 하려는고?' 하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말할 게 아니야."
"······."
"들어주겠나? 이건, 꼭, 자네가 들어주어야 할 게야."
"무엇인지 말씀하시구려."
"아니, 이건 참 들어주겠다야 하겠는데······."
"말씀을 하시구려."
"임자, 켤 내지 말으시. 나 첩 하나 얻으라나?"
부인도 이 말을 듣고는 분이 버썩 나서 '에, 이, 개 같은 자식 같으니' 하고 욕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생기며, 욕이 목젖까지 밀어오나 '무던한 사람'이라, 그도 못 하고,
"나돌아다니면서 부모님 걱정 아니 시키겠으면 얻구려."
이것은 참 억지로 억지로 나오는 말이라. 이 말 속에 얼마나 비애와 원통이 숨었으리오.
"그래도 나를 버리지는 않지요."
부인은 오래오래 생각하다가, 필사의 용(勇)을 다하여 이 말을 하였다.
"그럴 수가 있나 버리다니······."
첩을 데려온 후에는 또 전과 같이 소원하여지더라. 부인은 그 속음을 알고 더욱 분하며, 더욱 절통하며, 더욱 비애하여, 이전에는 자못 명준이만 원망하였더니, 좀 지나서는 전 남자를 원망하게 되며, 심지어는 전 인류를 원망하게 되고, 마침내 자기의 존재를 원망하게 되더라.
부인은 잉태한지라. 이럴 줄을 안 후로는, 자연, 좀 기쁨이 생기며 이것이 아들인가 딸인가 하는 문제로 날마다 궁구하면서 팔구 년 전 명준의 화상 그리던 법을 재용(再用)하며 전혀, 스러졌던 공상이 점점 생겨, 다시 즐거운 시대를 만날 것 같은 희망도 생겨 그 아이 나기만 고대하더니 생부의 제일(祭日)에 본가에 갔다가 어떠한 무녀에게 문점(問占) 한즉 여자라 하는지라. 공중에 지었던 누각(樓閣)이 다 무너지고 실망 낙담하여 시가에 돌아와 본즉 자기 있던 방에는 자기의 기구는 하나도 없고 어떤 눈썹 짙고, 분 바르고, 권연(卷煙) 피우는 계집이 있더라. 이것은 유월 십칠일이러라.
(작자 왈) 이 편(篇)은 사실을 부연(敷衍)한 것이니 마땅히 장편이 될 재료로되 학보에 게재키 위하여 경개(梗槪)만 서(書)한 것이니 독자 제씨는 양찰(諒察)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