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4장
離婚
[편집]1.
[편집]순영이 결혼 생활을 한 지도 어느 사이에 오 년이었다.
"엄마, 과자."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바느질하는 순영의 곁에서 보챈다.
"응 과자 사주지, 이따가 사줄게 응."
"싫어, 나 과자."
"응 과자 주지, 지금은 돈이 없어 이 바느질을 해 가지고 가서 돈을 받아와야 과자를 사주지. 얼른 해 가지고 가서 돈을 받아 가지고 올게 가만히 있어, 응."
순영은 어린아이 머리를 쓸어 준다.
"엄마, 나 때때."
"암, 때때두 해주지, 인제 열한 밤만 자면 설이다. 설 때에 때때 해주지."
"열한 밤?"
"응, 열한 밤만 코 자면 설날이야. 때때 입고 세배하면 절 값 주지."
"하나 둘 셋 열."
하고 손가락을 되는 대로 꼽았다 폈다 하면서 순영의 무릎 을 베고 드러눕는다.
"너 참 성이 뭐야?"
"장가."
"김가지 장가가 뭐야, 이름은?"
"이름?"
"그래, 네 이름말이야."
"수--복(壽福)이."
"이름은 수복이구, 명 길고 복 많으라구 수복이다. 또 몇 살인가?"
"시 살."
"어 착하다. 우리 수복이는 다 아네. 또 엄마 성은 뭔데?"
"몰라."
"모르는 게 뭐야? 장가지 엄마 성이 장가라구 일러 주었지,왜." "장가?"
"그래 베풀 장 자 장가야?
"나는 싫어, 과자."
수복은 몸을 비틀면서 칭얼거린다.
"오냐, 인제 다 되었다. 동정 달고 다리기만 하면 고만이다. 얼른 해 가지고 가서 돈 받아 가지고 올게. 저리 좀 치 어 앉아라. 동정 달고 인두질을 쳐야지." 순영은 안 떨어지 는 수복을 가까스로 떼어놓고, 도정에 인두질을 치려고 인 두를 빼어 보니, 화로불은 벌써 꺼져서 한 재가 되었다.
"숯이 없어서 조금 묻었더니 불이 꺼졌구나. 에구, 이걸 어 떻게 하니?"
순영은 서로 상의하듯이 수복을 돌아본다. 수복은 추위를 못 견디어서 그런지 입술이 새파란 것이 헌 포대기로 허리 를 두르고 앉아서, 돌아보는 어머니를 보고서 괴로운 듯이 웃는다. 드 손을 호호 부는 순영은 수복이 추워하는 양보다 괴로운 듯이 웃는 것이 더욱 애처러왔다. 순영은 추워서보 다 수복이 불쌍하여서 창자가 에는 듯하였다.
북풍에 몰아치는 눈보라는 창문에 뿌려서 모래 끼얹는 소 리가 나고 문풍지는 획획 소리가 난다. 동지섣달 설한풍(雪 寒風)에 조그마한 서창으로 잠깐 동안 비치는 햇볕이 얼마 나 따스하며, 십 전어치 오 전어치 숯을 사다가 며칠씩 쓰 는 인두불이 얼마나 더우랴마는, 그래도 순영은 이따금 수 복을 데리고 서창 앞에서 불을 쐬기도 하고 얼은 손을 인두 불에 녹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햇볕 가까운 데는 수복을 앉 히고 자기는 그 뒤에 앉아서 인두불을 헤치면, 불이 쉬이 삭을까 봐서 다만 화로 전에다 손을 대고 불을 다듬거릴 뿐 이었다. 그러다가 졸지에 풍설이 일어서 우일한 채난 장치 (採暖裝置)인 서창의 햇볕이 없어지고, 실낱 같은 화로불조 차 꺼져 노니 순영의 방에서 더운 것을 찾기는 북빙야에서 열대 지방 식물을 캐기보다 어려워서, 그들의 입김조차 이 는 정도였다. 다만 그들에게 따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 자의 은정뿐이었다.
"..........나는 그대와 가정 생활을 더 계속할 수가 없으니 조금도 나를 믿지 말고 자유로 지내시오......"
이런 구절이 들어 있는 대철의 편지를 순영은 바로 그 대 에 받게 되었다. 순영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실로 복잡한 사 정이 있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아니하다.
2.
[편집]처음에 순영이 결혼한 뒤에 대철은 그렇게 조급하게 굴던 금광에 대한 일도 잊어버린 듯이 가정 생활을 반 년이나 계 속하였다. 순영이 혹시,
"금광을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쓰겠어요, 이따금 가서 보셔 야 하지 않겠어요?"
하고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랑 앞에는 다 굴복을 하는 것이요.
금전이니 지위니 하는 것이 다 무엇이요. 나는 순영이를 사 랑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가 있소. 나는 영원히 영원히 내 아내를 떠나서는 하루라도 살 수가 없소."
하고 대철이 순영을 보고 웃으면 순영은 만족하면서,
"그렇지만 우리는 평생을 살 것이고 돈을 벌어야 하지요.
정 그러시면 같이 가지요. 같이 가서 제가 살림을 해 가면 서 돈을 벌면 좋지 않아요?"
하면,
"금광이야 그대로 두면 어디로 가나. 언제든지 내 것대로 있지. 세상이 두 가지 일은 한꺼번에는 못하는 것이거든, 신 정(新情)이 미흡한데 사랑 때암하랴, 금광하랴, 정신이 휘갈 려서 되나, 사랑도 전문으로 하고 금광도 전문으로 해야 되 는 것이야. 하니까 또 금광을 전문으로 하는 때가 있지."
대철은 말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먼 데는 고사하고 가까 운 이웃에 마을도 잘 다니지 아니하면서 안방에만 파묻혀 있다 시피 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순영은 대철과 같이 월미도 조탕에를 갔다.
순영은 일찍이 가서 그전에 정순과 같이 가서 앉았던 자리 에 다 자리를 잡았다.
순영은 그 아래 푸울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 들은 그전에 보던 사람이 아닐지라도 남녀 노소가 섞여서 헤엄치고 장난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도 젊은 남 녀가 쌍쌍이 몰려서 노는 것도 그 전과 같았다. 그러나 그 전처럼 그것이 부러워 보이지는 아니하였다. 그전에는 자기 로서는 좀처럼 그 사람들처럼 행복스러울까 싶지가 아니하 여서, 내 외끼리 또는 사랑하는 남녀끼리 즐겁게 쌍쌍이 목 욕도 하고 노는 것이 그다지도 부러워서, 나도 어찌하면 저 렇게 하여 볼까하는 생각으로 그런 노릇이 퍽도 그립더니, 지금은 자기도 남 못지 않게 사랑하는 남편과 같이 와서 그 자라에 있는 바에야 그 사람들이 부러울 것이 없을 뿐 아니 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를 부러워하지 않는가 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순영은 대철과 같이 푸울로 들어가서 목욕을 하여 볼까 하였으나, 암만해도 활활 벗고 뛰어들어갈 용기가 나지 아니하였다. 집에서 떠날 때에는 자기도 그전에 보고 부러워하던 그 사람들처럼, 대철과 같 이 목욕을 해볼 작정으로 해수욕복까지 좋은 것으로 사다가 시험으로 가만히 입어 보기까지 하고 그것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하여 보에 싼 그것을 가만히 만지작거려 보면서도 차마 그것을 꺼내지는 못하였다.
"여보, 당신도 저기 내려가서 헤엄 좀 쳐보세요."
순영은 생각다 못하여 먼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대철에게 권하였다.
"누가 베리게 고까짓 데 들어가서 헤엄을 친담, 헤엄을 치 려면 바다에 가 치지."
대철은 코웃음을 친다.
"아니, 나 좀 구경하게 말이에요."
"그럼 나하고 같이 들어갈까?"
"같이? 그럼 같이 들어갈까? 아이 부끄러, 어떻게 해."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그럼 같이 들어가지."
하고 일어난다. 순영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따라 일어섰다.
"왜 해수욕복 사가지고 오지 않았어? 푸울에 가서 목욕이 나 해 보구 그려, 나 쫌 구경하게."
"나 혼자?"
"혼자 하면 어때, 거기 여자들이 쌨는데."
"혼자 어떻게 해, 그러다가 빠지면 어떻하게."
순영은 푸울에 들어가서 전에 보던 애로, 또는 다른 사람 들이 하는 대로하여 보았다. 물에서 일렁거리면서 몸을 씻 다가 둑에 올라가서 벤치에나 조약돌 깔아 놓은 데나 마음 대로 앉아서 일광욕도 하여 보고, 대철과 가까이 다니면서 속삭이기도 하고, 헤엄을 쳐보려고 대철을 붙들고 시험하여 보았으나 그것만은 되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부러워하는가 하고 눈여겨보았다. 순영은 자기를 보 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러워하고 호의를 가질 것이 라 생각하여서 다정한 듯하였고, 자기를 본 체도 않는 사람 은 너무 냉담하여서 아무짝에도 몹쓸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를 너무 쳐다보는 사라도 도리어 면괴하여 서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이층 난간에서 자기들을 내려다 보고 앉았는 사람들이 더 한가하고 좋은 듯 싶었다. 자기도 어린 아이들이 있으면 데리고 와서 같이 목욕도 하고 장난 도 하고 하였으면 좋을 듯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여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자기도 몇 해 뒤에는 귀여운 어린아이를 데리고 올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 할 때에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순영은 작년 여름에 정순과 같이 나와서 바로 그 풀울에서 목욕하는 남녀들을 하늘같이 부러워하던 것을 불과 일 년 만에 자기도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은 여간한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하여서 항상 염불하고 마 음으로 기도하던 부처님이 감사하였다.
"이거 봐요, 저기 저 애 이쁘지?"
순영은 저의 어머니에게 안겨서 물을 두드리고 장난하는 아이를 가리키면서 대철을 본다.
"어떤 아이?"
"저기 저 아이 말이야. 저의 어머니한테 안겨서 물장난하는 아이 말이에요."
"장 생겼으면 무얼 하구 못 생겼으면 무얼 해, 남의 자식소 용이 있나?"
"남의 자식이라도 이쁘지 않소?"
"왜 그런 아이를 낳고 싶어?"
대철은 웃는다.
"아이 참, 그렇다는 말이지."
순영은 고개를 숙인다.
"가만있어, 인제 그보다 더 이쁘게 하나를 낳지."
"어떻게 마음대로 하나요?"
"마음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낳으면 저보다야 낫게 낳겠지."
순영은 말이 없이 만족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듣는가 하여 좌우를 돌아보며 얼굴을 붉힌다.
순영은 몸은 움직이면서도 마음은 침착하게 생각하였다.
대철은 금광을 하여서 부자가 되고, 자기는 이쁘고도 복성 스런 아이를 낳은 두에 그 아이를 데리고 다시 와서 해수욕 을 하는 때에는 지금보다도 얼마나 좋을까. 그때에는 자기 내외만 올 것이 아니라 침모라든지 안잠자기나 심부름하는 계집애들을 데리고 오게 된다면, 그때에는 자기네 패만 하 여도 한판은 넉넉히 치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할 것인가, 진심으로 꿈 같은 일이 었다.
"여보, 이리 좀 어세요."
순영은 한편 가에 서서 대철을 부른다.
"왜?"
"글세, 이리좀 오세요, 물어 볼 말이 있어요."
"물어볼 말이 무슨 말이야?"
하고 오는 대철에게,
"여보, 금광이 좋아서 금이 잘 나면 금이 저 만씩이나 한가요?" 하고 둑에 깔린 조약돌을 가리킨다.
"그렇게 큰 것은 사금광에 나는 것인데, 하기야 그보다 더 큰 것도 있지."
"아유! 그보다 더 크면 얼마나 클까? 그런 것으로 비녀나 반지를 만들면 더 좋겠지?"
순영은 조약돌 하나를 주워서 물에 깨끗이 씻더니, 손바닥 위에 놓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에구, 이쁘기도 해라. 금이 이렇게 생겼으면 여북이나 좋 을까?"
하고 혼잣말로 하더니,
"내가 잠 꿈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딴 소리만 하고 있네.
어젯밤에 굼을 꾸었는데 당신이 금광에 갔다 오신다구 큰 가방을 트렁큰가 그것 말이에요. 그것을 무겁게 들고 들어 오시더니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내 앞에다 주르르 쏟아놓는 단 말씀이에요. 그런데 그게 모두 금덩어리 겠지요. 달걀 같 은 것도 있고, 동그런 눈깔사탕 같은 것도 있고, 사람같이 생긴 것, 송아지처럼 생긴 것, 별스럽게 생긴 것이 다 있어요. 그래 꿈에도 어떻게 좋은지 반색을 해서 이것 만지고 저것 만지고 하는데, 당신이 그것을 팔아서 집도 짓고 논도 사고한다고 하면서, 몇 개는 그대로 화신상회에 부탁하여서 내 반지, 비녀, 시계줄..... 이런 것을 만든다고 하시겠지요.
그래 나는 좋아서 뛰면서 그 중에 제일 좋은 놈으로 몇 개 를 골라서 그대로 가진다고 넣는다는 것이 경대 서랍이니 장안에다 넣었으면 좋을 것을, 하필 어항 속에다 넣었단 말 씀이에요. 유리로 만든 어항에다가 그 무거운 것을 집어 던 졌으니 견디겠어요. 그래 어항 밑이 와싹 하고 깨어지겠지요. 그래 그것 깨어지는 소리에 놀라서 깨었어요. 깨고 생각 하니 어떻게 안됐는지 왜 하필 유리 어항에다 던졌던지 그 것이 안 됐지요? 어항이 깨졌으니 그 금이 밑구멍으로 샐 것이 아니에요?"
순영은 아직도 불쾌한 듯이 얼굴을 찡그린다.
"그래 어항이 깨지는 소리에 꿈을 깨었단 말이지?"
대철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심상하게 말한다.
"네, 그랬어요. 깨지는 소리가 와싹 하니까 그 소리에 깨었 지요."
"그러면 그 꿈이 좋지, 춘향이 타령에도 있지 않아, 경파 (鏡破)하니 기무성(豈無聲)가. 거울이 깨어지니 어찌 소리가 없으랴? 그와 마찬가지로 어항이 깨져서 소리가 났으니 아 주 좋은 꿈이로구나."
대철은 차디차게 웃는다.
"제발 그렇기나 하면 퍽이나 좋을까요. 나는 그것 깨진 것 이 가장 바른 것 같아서 내가 내 손을 집어 뜯었어요. 왜 하필 게다가 넣느냐구요. 그리고 어찌 원통한지 울고 싶었 어요. 했더니 깨진 것이 도리어 잘된 것이로군요. 그럼 인제 가슴이 시원하군요. 나는 하두 안 되어서 꿈 얘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래두 금을 많이 얻은 것이 좋아서 얘기 를 했더니 그렇군요, 에구 좋아라."
순영은 어린애들처럼 강장강장 뛰는 시늉을 하다가, 말이 없이 픽 웃기만 하고 돌아서는 대철을,
"여보."
하고 부르더니,
"꿈도 그렇구 하니 인제 속히 금광에를 가 보세요. 나도 같 이 가겠어요. 그런 재물도 생기는 때가 있다는데, 운이 닿는 시기를 놓치면 쓰겠어요?"
하고 진정으로 말한다.
"같이 가기는 왜?"
대철의 대답은 정답지 못하였다.
"왜라니요? 같이 가서 금광 구경도 하고 당신의 뒷바라지 도 하고 고생을 하더라도 같이 해야지요."
"그럴 것이 없어요. 내가 먼저 가서 형편 되는 대로 기별을 할 터이니, 그때 오든지 하지 같이 가면 되나요."
"금광도 같이 해야 되겠고, 나는 혼자 있기는 싫어요. 어디 를 가든지 당신을 따라갈 테에요. 그리고 내 꿈에 그렇게 보였으니까 내가 같이 가는 것이 좋아요."
순영은 아무래도 따라갈 결심을 보이다가
"그럼 금광을 시작할 때에 여자가 참여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면 가장발라서 못 쓰는 것이야."
하는 한 마디에 순영은 같이 갈 것을 단념하였다.
대철이 금광에 간다고 가서는 몇 달만에 한 번은 오든지, 반년 혹은 일 년 만에 한 번씩 와서 손님처럼 다녀가고서는 집안 살림살이를 도무지 모르는 체할 뿐 아니라, 순영에게 있는 돈을 요리조리 다 발라 가고, 심지어 순영이 바느질품 을 팔아서 잔돈푼 생기는 것까지도 긁어 가는 형편 이였다.
그러나 금광이라는 것이 각목을 칠 때에는 여편네 속곳까지 라도 잡히게 되는 것이 보통이요, 또는 그러한 곤란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큰 금줄을 얻는다는 것이, 대철의 돈을 가져 갈 때마다 순영에게 설법하는 말일 뿐 아니라, 풍문에 들리 는 말도 금광으로 큰 수가 났다는 사람은 대개가 한량없는 곤란을 지내고 최후의 아슬아슬한 판에 <노다지>를 얻기 시 작하여 마침내 몇십만 원이나 몇 백만 원의 보자가 되었다 는 것이 거의 통례처럼 전해지고 있으므로, 순영도 그러한 꿈을 꾸는 때는 자기의 손톱 발톱이 자지러지도록 단돈 한 푼이라도 벌어서, 대철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 도리어 행복인 것 같았다. 지금 돈 일 원을 쓰는 것이 나중에 몇천 배 몇만 배가될는지, 만일 십 원 백 원을 쓴다면 그보다도 몇십 만배 몇 백만 배가될는지, 돈을 많이 쓰는 대로 자기 의 먹고 입고 가용의 씀씀이를 줄여서 한 푼이라도 남는 것 으로 대철을 도와 주리라는 것이 순영의 소원이었다. 그것 이 자기의 희망일 뿐 아니라 당연한 직분이요.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순영은 언제든지 몸은 괴로 웠으나 마음은 즐거웠다.
순영이 아이를 낳기는 경성으로 이사한 뒤의 일인데, 인천 에서 서울로 이사한 것도 남의 바느질이나 빨래 가지를 하 더라도 사람이 많이 살고 번화한 서울이 나을 듯하여서, 계 동(桂洞) 막바지에다 헐어져 가는 초가 삼간을 사글세로 얻 어서 온 것인데 이사한 지가 얼마 되지 않으니 만큼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대철도 물론 없었다.
순영이 아이를 낳기는 초산이니 만큼 경험도 없고 무섭기 도 하였으나, 산과(産科) 의사나 산파를 들여 뵈지 못한 것 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누구 하나 해산 구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산모도 되고 산파도 되며, 첫국밥까지 자기 손으로 해 먹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우선 그 아이가 아들인 데에 기뻤고, 얼굴이 두툼하게 생겨서 금광왕의 아들로 몇 백만 원의 재산을 물려 가질 만하다고 잠도 없는 꿈을 꿀 때에, 백 가지의 괴롭고 쓰라리고 아픈 것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소리 없는 웃음이 흐르는 눈으로 들어가서 사라지고 말았다.
순영은 아이 이름을 명 길고 복 많이 받으라는 뜻으로 수 복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베갯모에 수놓은 수복(壽福) 글자 를 본떠서 서투른 글씨로 붉은 비단에다 정성스레 써서 괴 불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언제든지 들여다보면서,
"수복아 수복아, 네가 수복이지. 명 길고 복 많다고 수복이 지, 우리 이쁜 수복이."
하고는 이마, 볼, 손, 발...... 닥치는 대로 입을 맞추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아이가 자는 때에도 혼자 말하고 입 맞추고 웃고 하였다. 그리고 수복이가 얼른 커서 걸음 걸음 만하면 대철과 같이 데리고 월미도 조탕 푸울에 가서, 목욕도 하고 헤엄도 가르치며 재롱을 보아서 전일에 부러워하고 그리워 하던 원을 풀고 싶었다.
순영의 집에는 밤이나 낮이나 재봉틀 소리가 끊이지 아니 하였다. 재봉틀도 대철이 여러 번 잡히자고 하는 것을 그것 만은 듣지 아니하였다. 재봉틀에서 솔솔 풀리는 가는 실은 곧 순영이 모자의 생명줄이었다.
그날도 하도 배가 고프고 추워서 은근히 대철이 돈이나 벌 어가지고, 왔으면 하고 기다리는 생각이 나던 중에 그러한 편지를 받게 되었다.
3.
[편집]"엄마, 나 과자."
수복은 넋잃은 사람처럼 앉았는 엄마를 본다.
"......"
편지를 보고 난 순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무엇이 보 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았다.
"엄마."
"............"
"엄마."
하고 소리를 꽥 지르며 순영의 무릎을 쥐어 뜯는다.
"와야."
순영은 그제서야 돌아다보고 수복의 손을 잡으면서,
"에구, 손이 다 얼었구나, 추워서 어쩐단 말이냐?"
"엄마 다 했어?"
"오냐, 하기는 다 했지만 인두질도 치고 다려야지."
"다려?"
"응 다려, 다리는 것 모르나, 다리미에다 불 지펴 가지고 다려야지."
"그럼 어서 다려, 과자 사 줘."
"불이 있어야 다리지, 숯도 없구, 다려서 갖다 주어야 돈을 받아다 저녁을 해 먹을 건데."
순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엄마, 그게 뭐야?"
수복은 순영이 손을 떨면서 들고 있는 편지를 본다.
"편지다. '
"편지? 편지가 뭐야?"
"편지야, 아버지가 보낸 편지."
"아버지가?"
"응, 아버지가 보낸 거야."
"아버지 와?"
"모르겠다, 오는지 가는지."
"아버지가 때때하고 사탕 과자 사가지고 오지?"
"후유!"
하고 한숨을 내쉬는 순영은 대답이 없다.
"엄마 엄마, 아버지가 때때하구 과자하구 사가지구 와?"
"응."
순영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하였다.
"엄마 때때두?"
"모르겠다, 때땐지 뭔지."
"엄마, 아버지 오면 인천 가. 목욕하러, 나두 때때 입구, 엄 마두 때때 입구, 뚜우 타구 응?"
"인천?"
"응, 엄마 그랬지. 아버지 오면 인천 간다구. 가, 응?"
"에구, 인천을 갈지 황천을 갈지 모르겠다. "
순영은 순에 맥이 풀리는지 들었던 편지가 스스로 떨어지 면서 한숨을 들이쉬는지, 목구멍에 흑흑 느끼는 듯한 소리 가 난다. "
"엄마, 뭐?"
"아니다, 너 알 일 아니다."
"엄마, 배고파."
"오냐, 배고프지, 점심도 못 먹고 배고프고말고. 아가 춥지?" "나는 안 추워."
"안 추워?"
"응, 나는 안추워."
"그럼 배만 고프냐?"
"응, 배고파, 나 밥 줘."
"안 추운게 뭐냐. 입술이 새파랗고 수족이 차디찬데. 배가 너무 고프니까 추운 줄도 모르는구나."
"엄마, 나 추워."
수복은 엄마의 무릎으로 올라간다.
"오냐, 춥고말고, 이리 오너라. 내 좀 안아 줄께. 어미 몸뚱 이는 얼음 같다. 아가, 어미 손이 차지?"
순영은 수복을 끌어안고서 수복의 뒤통수에다 이마를 대고 흑흑 느껴 운다.
"엄마, 머리가 따듯해."
순영은 몸이나 마음이나 모두가 얼음 같았지만, 수복의 머 리에 떨어지는 눈물만은 더웠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순영은 될 수 만 있으면 자기의 더운 눈물을 한 동이 두 동이라도 자아내어서, 추위를 못 견디는 수복을 목욕이라도 감기고 싶었다. 그러나 마침내 손수건을 입김으 로 녹여 가지고 수복의 머리를 깨끗이 씻어 주었다.
해는 어두워 가고 풍설은 쉬지 않는다. 온 장안의 집집에 는 저녁 연기가 사라졌는데, 오직 순영의 집에만 늦게서야 연기가 나기 시작하였다.
순영은 수복을 재워 놓고 광명이라고는 반딧불만큼도 없는 흑암 지옥같이 캄캄하고 음울한 자기의 세계를 서로 불쌍히 여기는 듯이 고요히 비쳐 주고 있는 찬 정등 아래에서 대철 의 편지를 다시 들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아무리 보 았으나 어느 귀절에든지 따듯한 맛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 나 그 편지의 사연만으로는 확실히 이혼을 한다든지, 자기 를 영원히 버리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편지 사연 이 모두 야무지고 인정이 없으며, <그대와같이 가정 생활을 계속 할 수가 없으니 나를 믿지 말고 마음대로 하라>는 귀 절이 있으나, 그것만 가지고서 이혼하자는 의미라고 볼 수 는 없는 까닭이었다.
순영은 돌려 생각하였다. 그것은 대철이 자기와 같이 살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해를 두고 금광에 종사하였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곤란만 받는 중 에, 처자의 생활을 돌볼 수가 없으므로 자격지심이 들어서 그런것 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니 대철의 정경이 도 리어 딱하고 가엾었다. 그러한 곤란 중에 있는 남편을 넉넉 히 도와 주지 못하는 자기의 능력 없는 것이 한되었다. 자 기를 사랑하는 남편으로서, 수복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여 북이나 곤란하고 마음이 상해서 이러한 말을 하였을까. 이 편지를 쓸때에 여북이나 뼈가 저리도록 마음이 아팠을까.
어떻게 하여 이러한 남편을 도와 줄 수가 있을까. 돈이나 힘으로써 도와 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마음이라도 위로해 주어야 옳을 것이 아닌가.
두 무릎을 안고서 눈만 깜짝이고 앉았던 순영은 아무것도 없는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옷상자와 경대 서랍을 뒤져 보 았다. 그러나 돈푼싸게 잡힐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순영 은 한숨만 쉬고서 다시 앉아서 생각하다가, 잠든 수복을 매 만져 주고서 중대한 결심을 한 듯이 벌떡 일어나서, 벽에 걸린 보를 내려서 재봉틀을 샀다. 두 손으로 들먹거려 보다 가 이를 악물고 머리에 였다. 잔약한 여자로서 혼자 재봉틀 을 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복이 깰까 봐서 문을 가만히 열고 나섰다. 순영은 마치 남의 것을 휴ㅜㅁ쳐 나 가는 듯이 누가 보는가 염려하여서, 사방을 살펴보면서 등골에 땀이 나도록 빨리, 그러나 자취 소리 없도록 걸었다.
"이것 좀 보세요."
순영은 전당국 문턱에서 이고 선 재로 말하였다.
"이것 얼마나 쓰시겠어요?"
전당국 주인은 재봉틀을 받아서 자세히 검사해 본다.
"얼마나 주시겠어요?"
순영은 도로 물었다.
"이것 성하기는 하나 많이 쓴 것이로군요. 다른 것 같으면 몇푼 안되지만 싱거니까 백 원까지는 쓰실 수가 있지요."
"좀더 쓸 수 없어요?"
"더는 안 됩니다. 우리 전당국이니까 백 원까지 쓰시라는 게지, 다른 데는 백 원도 안 됩니다. "
"한 이십 원만 더 주세요. 곧 찾아 갈께요."
"안 됩니다. 정 그러시면 십 원만 더 쓰시지요. 이것은 특 별입니다. "
순영은 일백십 원을 얻어 가지고 돌아온다. 순영이 재봉틀 을 가지고 갈 때에는 결심한 끝이라 어쩐 줄을 몰랐더니, 급기야 그것을 잡히고 빈 몸으로 올 때에는 자기 모자 두 식구의 생명을 내 버리고 오는 것 같아서 앞길이 캄캄하였다. 뒤에서 무엇이 잡아당기는 것만 같고, 다리가 허전거려 서 걸음이 제자리에 놓이지 않는다. 가까스로 집에 와서 방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눈은 부속에게로 가고 한눈은 재봉 틀 놓였던 자리로 간다. 재봉틀 놓였던 자리는 마치 집안 식구가 있다. 죽어서 나간 자리처럼 허전하기도 ㅎ고 휘휘 한 듯도 하였다. 순영은 누워 보지도 못한 채로 어디서 닭 우는 소리가 난다.
4.
[편집]<글월은 받자왔습니다. 몸이 편치 못하시다 하오니 염려이 오며, 모든 일이 뜻같이 되지 아니하여서 곤란 중에 계시다 하오니, 걱정되는 말씀 어찌 다 하오리까. 그런데 왜 편지에 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가정 생활을 계속하느니 마느니, 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처음에 그것을 보고 어떻게 놀라서 가슴이 내려 앉았는지 십 년 감수(減壽)는 한 것 같 습니다. 그리고 혼자 앉아서 어떻게 울었는지 모릅니다. 울 다가 수복이가 대들어서 같이 우는 바람에 그것이 불쌍하여 서 다 울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하니, 당신이 얼마나 곤란하고 속이 상하여서 집안 사람에게 이런 편지를 하셨을까 하는 마음으로 먼저 놀라고 울던 것이 뉘우쳐졌으 나, 자족에게 그러한 편지를 쓰게 되신 당신의 정경이 하도 안타까와서 다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대에는 수복이가 울며불며 반류하여도 쉽사리 그쳐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상하실지라도 그런 편지는 쓰지 마세요. 당신은 잘 모르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은 한 글자 한 귀절이 산보다도 무겁고 바다보다도 깊습니다. 나는 당신의 것이라면 무엇이 든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을 보시는 동안 집안 걱정은 조금도 하시지 마세요. 나는 약한 여자이지만 그릇된 일 이외에는 무슨 짓이든 지 다 하여서, 우리 수복이 하나는 굶기고 벗기자 아니하겠 사오니, 돌봐 주시지 못하는 것을 터럭만큼이라도 미안하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그리고 보시는 일이나 보세요.
이것 보세요, 나는 그렇게 아끼던 재봉틀을 잡혀서 보냅니다. 당신이 곤한한 때에 여러 번 잡히자고 하시는 것을 한 사코 못한다고 앙탈하던 재봉틀을 잡혔습니다. 그것을 앙탈 하고 아니 잡혔던 것은 그것이 아까와서 그런것이 아닌 것 은 당신도 아시지요. 당신의 앞에 무엇이 아까울 리가 있겠 습니까. 그것으로 우리 모자의 생명을 이어 가고, 이따금 당 신에게 잔돈푼이라도 보내게 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나요. 지금 와서는 그것이라도 잡혀 보내지 아니하면 안 되었으므로 그것을 잡혀 보냅니다. 내 몸뚱이라도 팔고 싶 지만 그것인들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목구멍이 무엇인지 또는 수복이로 보더라도 우선 어찌할 수가 없어서, 얻은 돈 일백십 원 중에서 삼십 원은 떼어 놓고 팔십 원을 보내 드 리오니, 아마 이 돈을 가지시고는 성공하시겠지요. 산신님이 돌보시더라도 금을 내어 주시겠지요.
그리고 세가 가까왔으니 세 때에는 잠깐이라도 다녀가세요. 우리 수복이는 언제든지 아버지만 찾는답니다. 시시각각 으로 아버지가 언제 오시냐고 졸라댄답니다. 그러면 어미는 아무조록 그것을 달래느라고 아버지가 인제 네 때때하고 과 자를 사가지고 오신다고 한답니다. 오실 때에 아무리 곤란 하신 중이라도 인조견이나마 울긋불긋한 저고리감하고 과자 를 한 봉지라도 사가지고 오세요. 그러면 우리 수복이가 얼 마나 좋아라고 날뛰면서 아버지께 매달려서 재롱을 부리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이것 보세요, 내가 이 편지를 쓸 때에 는 수복이는 콜콜 자고 있습니다. 만일 수복이가 아버지에 게 편지 쓰는 것을 안다면, 달려들어서 아버지가 언제오시 느냐고 졸라대면서 편지를 못 쓰게 할 것입니다. 내가 이 편지를 다 써갈 때에 수복이는 무슨 꿈을 꾸는지 입을 벙글 벙글하면서 분명한 소리로<아버지>를 세 번이나 불렀습니다. 나는 이 편지에다 수복이 꿈을 싸서 보냅니다. 편지를 보실 때에 수복이 소리가 나는 듯하거든, 그것이 우리 수복 이 꿈인 줄 아세요.>
이것이 순영이 대철에게 답장한 사연이었다.
순영은 그 편지를 부친 뒤에 반드시 위로하는 답장이 있으 리라고 기다렸다. 물론 대철의 편지는 마음이 상하는 중에 화가 나서 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거니와, 가령 대철이 자기 를 버릴 생각이 있어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 편지를 보고 서는 반드시 회심(回心)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대철이 자기에 게 대하는 미흡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수복이로 보아서도 그러하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설사 위로하는 편지까지는 못하더라도, 돈을 받았다는 통지라도 있어야 할 터인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자 셋날이 가까와졌다. 순영은 대철이 세 때에 올 양으로 그 사이에 편지니 무엇이니 할 것이 없어서 않는 것 이라고 생각하였다.
"엄마, 그게 누구 때때야?"
수복이는 옷을 다려서 상자에 넣고 있는 순영이에게 묻는다. "이것은 아버지 때때다. "
"이것은?"
"이것은 네 때때구."
"엄마 몇 밤 자면 설이유?"
"인제 세 밤만 자면 설날이지, 하나, 둘, 셋."
하고 손가락을 꼽아 보인다.
"하나, 둘, 셋."
수복은 하나 둘은 손가락을 옳게 곱고 <셋>할 때는 다섯 손가락을 다 꼽는다.
"아니야, 그렇게 꼽는 것이 아니야. 자, 이것봐요. 하나, 둘, 셋-- 이렇게 하는 거야."
순영은 수복의 손가락을 꼽아준다.
"나는 그렇게 하기 싫어."
수복은 고개를 외어 튼다.
"응, 그럼 고만두어, 네 마음대로 해."
순영은 수복을 달래면서 옷을 개어 넣는다.
"엄마, 설 때 아버지 와?"
"암, 오시겠지."
"내 때때하고 과자하구 가지고 와?"
"그렇지 오시면 네 때때하구 과자하구 사가지고 오시겠지."
<아마 바쁘니까 그런 게지. 오늘은 저물게라도 들어오겠지.>
말은 않고 생각으로 이렇게 하는 순영은 어느 때 올지 모 르는 대철이 들어온다면, 때 묻은 옷을 되는대로 입힌 수복 을 그래도 보이기가 싫고, 또 자기도 구중충한 그 모양을 그대로 보이기가 싫어서 일찌감치 수복을 낯 씻겨서 때때옷 을 입히고, 자기도 소세를 하고 빤 옷이나마 깨끗한 것을 갈아 입었다. 그러나 대철은 고사하고 구구 하나 들여다보 는 사람도 없었다.
밤이 됨에 순영은 명불(命橙)을 켜놓았다. 새 종지에다 참 기름을 가득히 부어서 세 발 심지에다 불을 붙여서 셋을 나 란히 놓았다.
"엄마, 그게 뭐야?"
"이게 명불이다. 명 길라구 명불 켜는 거야. 이것은 아버지 불이구, 이것은 네 불이구, 이것은 엄마 불이구, 그렇다. "
순영은 불을 차례로 가리키며 말하더니,
"우리 수복이 불이 제일 밝은데, 불똥두 잘 앉구 그렇지. "
하고 수복의 불에다 입을 맞춘다.
"수복이 심지가 조금 비뚤어졌네, 정직한 사람의 심지가 비 뚤어져서 쓰나, 바루 세워야지."
순영은 성냥개비로 심지를 바로잡다가 심지가 넘어져서 불 이 꺼졌다.
불 켜는 것을 보고서 웃고 뛰놀던 수복은 제 불이 꺼졌다 고 딩굴어가며 울고 떼를 쓴다. 순영은 수복에게 불길한 징 조라고 생각하여서 가슴이 아프도록 후회하였다. 순영은 다 시 불을 켜서 자기의 등잔과 바꾸어 놓았다.
5.
[편집]대철이 집에 들어고기는 정월 보름날 저녁 때였다. 거나하 게 취해 가지고 들어오는 대철은 문 밖에서 부터 기침을 요 란스럽게 하였다. 대철이 세 때도 아니 오고 기별도 없으므 로, 아니 오려니하고 잊어버리고 있던 순영은 방 안에 앉았 다가 기침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에구, 아버지 오신다. "
하고 방문을 열고 뛰어나온다.
"아버지."
하고 소리를 치는 수복도 엄마의 뒤를 따라서 쫓아 나온다. "지금서 오세요?"
마루 아래서 내려서서 미처 신도 신지 못하고, 한발은 신 을 거꾸로 딛고 한발은 뚤에 걸친 순영은 대철의 기색을 본다. "이거 처시하(妻侍下)에 사는 놈이 늦게 대령(待令)하여서 황송무지하외다. 그저 용서하십니요."
대철은 선 채로 비틀거리면서 허리를 굽혀서 모자가 땅에 떨어진다.
"이것 보세요, 모가가 다 떨어지네.' 순영은 대철을 보고 웃으면서 모자를 줍더니,
"어서 들어가세요.' 하고 대철의 팔을 붙든다.
"놔요. 내대로 들어가지. 넘어질 내가 아니란 말이야."
비틀거리고 들어오는 대철은,
"아버지 자빠지겠네."
하고 소리를 쳐서 웃는 수복을 끌어 안고서,
"이게 내 새낀가, 우리 수복이가 보고 싶어서 왔지. 수복이 가 이면 내가 이까진 놈의 집에를 왜 와."
하고 순영이를 돌아보더니,
"아니야, 내가 말을 잘못 했어, 우리 마누라가 보고 싶어서 왔지, 조선을 다 다니며 보아두 우리 마누라 같은 인물은 없거든."
하더니 다시 수복을 보고서,
"그렇지, 이 세상에는 네 엄마만한 인물이 없지?"
하고 웃는 소리만 낸다.
"에구, 취하셨구료. 이방으로 들어가세요. 추워요. 무슨 인 물이 그리 잘나서 조선에 없어? 웃어 죽겠네."
순영은 대철이 취해서 짐짓하는 말인 줄을 알면서도 듣기 싫지는 않았다. 순영은 대철을 부축하여서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수복은 대철의 앞으로 온다.
"응?"
"때때 사왔어?"
"때때? 이 담에 사주지."
"이 담에?"
"응."
"이 담이 뭐야, 아버지 이 담에 뭐유?"
"이 담이라는 건 내일이구 모레구, 새달이구 훗날이구, 그 게 다 이 담이지. "
"과자는?"
"과자두 이 담에 사주지."
수복은 뿌루퉁하면서 엄마를 쳐다본다.
"그걸 조금 사다 주시지. 그게 뭐요. 아버지가 오시면 때때 하구 과자하고 사다 주신다구 글 읽듯이 하였는데, 그걸 조 금이라도 사다 주셨으면 여북이나 좋아하겠어요."
"술 먹느라고 잊어 버렸지. 그것 살 돈이 없어서 못 산 것 은 아니야."
대철은 두 손을 뒤로 짚으면서 자빠지듯이 앉아서 천장을 쳐다본다. 순영은 입술을 삐죽삐죽하다가 <으아!> 하고 우 는 수복을 걷어앉히면서,
"아가, 엄마가 사 주지, 울지 마라. 때때는 지금 입었잖아?
그리고 과자는 저기 있구, 인제 엄마가 또 사다 줄께."
수복은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대철을 흘금흘금 보고 엄마의 등 뒤로 돌아간다.
"저번에 내가 한 편지를 보고소 어떻게 생각하였소?"
대철은 저녁에 술도 조금 깨고 수복도 잠이 든 뒤에 말을 꺼냈다. 그러나 곧 어디로 갈 사람처럼 매무새도 끄르지 아 니한 채 도사리고 있었다.
"어떻게는 무얼 어떻게 생각해요?"
순영은 이제 본 문제가 나왔구나, 하고 마음을 졸인다.
"그럼 아무 생각두 없었단 밀아야?"
"아무 생각두 없기야 왜 없어요?"
"그럼 ?"
"그전 편지에다 말씀 안 했어요. 왜? 처음에는 잘못 생각하 였다가, 나중에 다시 생각하니 그렇지 않다구 말씀 안 했어요? 그 편지 보셨겠지요?"
"편지는 보았으나 편지만 보고서 자세히 알 수도 없고, 또 그때 본 것을 다 잊어버렸지 입때 있나, 생각대로 말 좀 해 보우 그려."
"그런데 그 말씀은 왜 또 꺼내세요?"
순영은 대철이 그 말을 꺼내는 것과 하는 기색을 보고 가 슴이 울렁거렸다.
"아니, 글쎄 나노 드 편지를 하고서 미안하게 생각하였던 일이라 묻는 말이요. 그때는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지금까지 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말이요. 속에 있는 대로 말 좀 하면 어떻게?"
순영은 대철이 그때에 그 편지를 하고서 미안하게 생각하 였다는 말에 적이 마음이 놓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 다른가요, 뭐?"
"무엇이 마찬가지야?"
"처음에 그 편지를 보고서는 어떻게 놀랐는지, 눈이 캄캄하 고 정신이 없더군요. 그래 자꾸 울기만 했지요. 그러다가 정 신이 조금 돌아와서 다시 생각하니,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 이 하도 곤란하고 화가 나시니까 홧김에 하신 줄을 알겠더 군요. 그래서 마음이 차차 가라앉았지요. 그러나 다시 자꾸 얼었답니다. 당신의 곤란받는 것을 생각하여서 당신이 일은 잘 안되고 여북이나 화가 나셔야 그런 편지를 하셨을까 하 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어떻게 슬픈지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소리를 내가며 울었지요. 여북해야 우리 수복이가 다 같이 울었나요. 그러다가 제 풀에 지쳐서 울음 을 그쳤답니다. 그러고서 아무리 생각하여도 안 되겠기에 할 수 없이 재봉틀을 잡혀서 보냈지요. 그러니 나 같은 바 보 멍텅구리가 어디 있어요. 설마 당신이 진정으로 그런 편 지를 하셨으리라고 놀라서 자꾸만 울었거든요. 지금도 당신 이 그 편지를 하시구 미안하게 생각하였다고 안 그러렸어요. 그런 것을 처음에 모르구서, 어떻게 놀랐는지 가슴이 무 너지는 것 같구 당장에 죽을 것 같아요. 그때 만일 양잿물 이 옆에 있었으면, 덩어리째 집어 먹을 것이에요. 그러니 그 런 천치가 어디 있어요? 글세."
순영은 자기가 대철의 뜻을 오해한 것이 가소롭고 죄스럽 다는 듯이 웃음을 머금고 용서를 바라는 듯이 대철을 쳐다 본다.
"응, 그러렸다. 그런데 내 편지가 진정이 아닌 것은 어떻게 알았단 말이요? 무엇이 어떠니 징정이 아니라는 이유가 있 어야지, 하하하 그렇잖우?"
대철은 순영을 보면서 몸을 끄덕거린다.
"어떻게 알기는 무얼 어떻게 알아요?........"
순영은 당장에 대답할 말이 나올 듯하였으나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순영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에구, 참 별말을 다 물으시네, 화나 가시니깐 그러셨지.
그럼 진정으로 그러셨을까, 뭐."
순영은 괴롭게 소리를 내어 웃는다.
대철은 순영의 말이 어리석은 데에 우습고 순진한 데에 감 실되었다. 대철은 엉거주춤하던 태도를 고쳐 부드러운 말로,
"여보."
하고 불렀다.
"네."
하고 순영은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대철을 본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진정으로 그런 편지를 하고 그런 생 각을 가졌다면 어떻게 할 테요?"
"진정으로 그런 생각을 왜 가지세요. 그런 생각을 가지실 일이 있나요, 뭐."
"아니,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말이요."
"그런 생각을 안 가지고 계신 걸 그런 말을 할 것이 있나요. 나는 그런 말은 하기두 싫어요."
"세상 일을 알 수가 있소? 내가 그런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하니까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어떻게 하겠냐 말이지?"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요. 당신은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더라도 나는 그런 생각이 없으니까 고만이지요."
순영은 기색이 변한다.
"그런데, 내가 순영이를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말이지. 사세가 막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둘이 상의하고 임시로 얼마 동안 이혼하는 형식을 취하면 어떠냐 말이지."
"아, 여보세요, 혼인은 인간 대산데 한 번 하면 고만이지, 임시로 뗐다 붙였다 하는 수가 있나요? 나는 죽어도 그렇게 하기는 싫어요."
순영은 결심 있는 태도를 짓는다.
"말을 못 알아 듣는구료. 아주이혼을 하다는 말이 아니라 부득한 일이 있어서 잠깐 이혼하는 것처럼 했다가, 그 일이 펴거든 도로 살면 고만이 아니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내가 볼 일이 있어서 다른 데 가서 반 년이고 얼마고 있는 동안 은 우리가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 아니요. 하니까 그와 마 찬가지가 아니오. 그대로 오랫동안 못 만나 이혼하는 것처 럼 하고서, 얼마동안 따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냔 말이지. 둘러치나 메치나 마찬가진데, 그 중에 내 일이 잘 되면 고만이 아니야. 그리고 나중에 일이 잘 된 후에 그런 얘기를 해가며 정답게 살면 더 재미있을 일이 아니야. 그렇 단 말이지 뗐다 붙였다 하기는 왜? 사람이 총명하여서 그런 말귀는 대번에 알아들을 것 같은데, 왜 못 알아들을까. 알아 듣고서도 공연히 말 좀 해보느라고 그러지, 아마."
대철은 입이 마를 듯이 웃는 눈으로 순영을 들여다본다.
"잠시는 고만두고 꿈에라도 그러기는 싫어요. 그저 볼 일 이 있어서 나가 계시는 거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나가 는 말이라도 이혼이니 남 되어 사느니 하는 것은 하기도 싫 고 듣기고 싫어요."
대철은 머리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그럼 말이야, 내가 지금 이라도 어디로든지 정처없이 가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살면 어떻게 할 텐구?"
하고 자리를 고쳐 않는다.
"어디든지 찾아가지요."
"어디든지 찾아가다니? 어디 있는 줄을 알아야 찾아오지."
"어디든지 찾으면 되지요. 하늘 꼭대기든지 땅 속이든지 찾 으면 되지요."
"저것은 억지 말이 아닌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고서 어떻 게 찾는담 하늘은 어떻게 올라가고 땅은 어떻게 들어가며, 남이 곧이들을 말을 해야지, 원."
대철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리며 순영을 본다.
"찾다찾다 못 찾으면 고만이지요. 죽은 혼이라도 자꾸 찾으 면 되겠지요."
순영은 돌아누우면서 꾸물거리는 수복을 다듬거리면서 한 숨을 쉰다.
"아! 지독하다. 그렇게 지고한 말이 어디 있어? 찾다찾다 못 찾구 죽으면 죽은 혼이라도 찾는다. 사람이 순한 줄 알 았더니 인제 보니까 여간 지독하지 않은데...그러기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속은 모른다는 것이, 그래 두고 이른 말이야."
대철은 의외로 생각하는듯하면서도 가소로운 듯이 가만히 웃는다.
"그게 지독한 것이 아니에요. 순하고 못 생겨서 그런 것이지. 요새 똑똑한 여자들은 연애도 잘하고결혼도 잘하고, 이 혼도 잘하고 뗐다 붙였다 한답디다만, 나는 못 생겼으니까 연애가 무언지 이혼이 무언지 몰라요. 한번 시집가면, 좋으 나 궂으나 평생을 사는 줄만 알아요. 그리고 죽어도 당신하 고 갈리기는 싫어요. 내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당신이 손톱 만큼이라도 싫은 생각이 있다면 혹 모르지, 당신이 싫다면 못이기는 체하고 고만둘는지.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아니면 목숨을 붙여서 살 것 같지 않거든요. 하니깐, 다른 말은 무 슨 말이든지 다시 들어도 그 말만은 들을 수가 없어요."
순영은 팔짱을 끼고 조금 돌아앉는다.
"글세 이것봐요, 아까두 한 말이지만, 아주 이혼을 하지는 말두 아니고 또는 아주이혼을 하대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애 그러냐 하면, 순영의 사정을 보아서 그렇다는 말 이야. 또 순영이가 싫어서 그렇다는 말로 알아듣지 말고, 순 영이 알다시피 나는 피천 한푼 없는 사람이 아니냔 말이야.
금광인지 무언지 한다고 했자, 순영이 잔돈푼가지 툭툭 긇 어다 없애구, 처자를 먹여 살리기는 고사하고 나 한 몸뚱이 처리를 못하는 형편이니, 나를 바라구 살았자 무슨 여망이 있느냐 말이야. 하니깐 차라리 이혼을 하면 순영이는 어디 로 가든지 나하고 사는 것보다는 낫게 살 것이다 이말이야.
하니까 순영이 편으로는 아주 이혼하는 것이 무방한 일이 아니냔 말이야. 이것은 손톱만큼도 입에 붙은 말이 아니거 든, 순영이를 위해서 하는 말이지. 또 나로도 처자를 먹여 살리지도 못하면서 잔뜩 붙들고만 있는 것도 일이 아니거든. 하니깐 어디로 보든지 갈리는 편이 좋지."
대철의 말은 차차 죄어든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사람이 짐승인가요, 조금 좋으면 붙어 다니고 조금 좋잖으면 떨어지고..... 아닌게 아니라 지 금 여자들은 돈만 보고서 쫓아 다닌답디다만, 나는 그런 사 람이 아니에요. 만일 돈만 알았다면 애당초 당신에게로 시 집을 안 왔어요. 나도 사람은 못났지만 아주 시집갈 데가 없어서 당신에게로 온 것은 아니에요. 내가 이런 말은 아니 하였었지만, 다신이 하도 그러시니 얘기삼아서 말씀하겠어요. 처음 인천 있을 때에 별별 일이 다 있었어요. 그저 이러 니 저러니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한고 결혼하려고 진심으로 애쓴 청년이 둘이나 있었어요. 하나는 부잣집 아 들인데, 하다하다 내가 안 들으니까 논 삼백석지기를 내 명 의로 이전을 해 줄 터이니 결혼하자고 한 일도 있었고, 나 하고 결혼을 못하면 자살하겠다는 편지를 몇 번이나 한 일 이 있었고, 또 하나는 이를테면 시어머니 될 이가 자기 며 느리 삼겠다고 별별 말을 다 한 일도 있었고, 홍 숙자 어머 니는 나를 친딸처럼 데릴사위를 얻어 가지고 같이 살자구도 하는 것을, 다 뿌리치고 당신에게로 온 것은 은혜도 은혜지 만 당신을 사모해서 그렇것이 아니에요? 한데 지금 와서 당 신이 돈이 없다고 히혼을 하고 다른 데로 간다는 것이 무슨 말씀이에요? 그럴 것 같으면 당초에 돈 있는데로 갔을 것이지. 왜 돈도 없는 당신에게로 올 리가 있나요. 그런 말씀은 입밖에 내시지도 마세요."
순영은 얼굴빛을 단정히 갖는다.
"여보."
대철은 말소리를 낮춘다.
"네."
눈으로는 수복의 자는 것을 보면서 대답한다.
"그렇게 까지 할 말이 아니라, 내 말을 들어 보오."
하고 순영의 대답을 기다린다.
"무슨 말씀이세요?"
순영은 조금 돌아앉으며 대철을 본다.
"사람이라는 것은 대관절 먹고 살아야 하지 않우?"
"그렇지요."
"그러니 말이야, 내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다 먹고 살자 는 말이요. 나 혼자만 먹고 산다는 말이 아니라, 나중에 우 리 식구가 다 같이 먹고 잘 살자구 하는 일이라는 말이야."
"무엇이 말씀이에요?"
"우리가 잠시 동안 떨어져 사는 것처럼 하자는 것이 말이야." "떨어져 사는 것이 먹고 사는 도리라는 말씀이에요?"
"아니, 떨어져 사는 것이 먹고 사는 도리라는 말이 아니라.
먹고 사는 도리를 만들기 위하여 잠시 이혼하는 형식을 취 한 다는 말이지. "
"나는 못 알아들어요, 무슨 말씀인지."
"그렇게만 말하면 못 알아듣겠지, 내가 진정을 말할 테니 들어 보우."
대철은 피워 물었던 담배를 빼어서 불을 끄면서,
"담배 연기 때문에 기침을 하는구나. "하고 자다가 기침을 하면서 깨려고 하는 수복을 들여다보고 담배 연기를 손바닥 으로 슬슬 밀어서 다른 데로 보내면서,
"너도 아비를 잘못 만나서 고생을 한다마는, 나중에는 그 말을 일러 가며 잘 살 때가 있지."
하고 순영을 보더니,
"내가 몇 해 동안 금광을 하지 않우?"
"그렇지요."
"그런데, 금광이라는 것은 아무 금광이라도 겉등부터 금이 나는 수는 없고, 겉등부터 금이 나는 수가 있더라도 그것은 좋은 금광이 아니거든, 금광이 좋을수록 줄이 깊이 박히거 든, 한데 내 금광은 무진동(銅) 졸로 아주 훌륭한 금광인데, 줄을 찾기까지가 그리 힘으 든단 말이야. 무진동이라는 것 은 줄만 나오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무진장이니까, 한데 그 동안 비용을 지탱해 낼 수가 없단 말이야. 어북해야 집에 있는 잔돈냥까지 다 긁어다 쓰고, 하다 못해 요전에도 재봉 틀 하나 남은 것을 마저 잡혀 보내 주어서 그것까지 썼단 말이야. 낸들 사람의 자식으로 생겨서 순영이에게 대하여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없을 리가 있나, 하지만 어찌는 수가 없어서 그렇게 까지 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지."
대철은 말을 멈추고 순영의 기색을 본다.
"그거야 일이 그렇게 되니까 그렇지요. 그런 말씀이야 하실 것이 있어요? 내게 대하여 미안하다고 부끄러운 것을 무엇 있어요? 내외간에 네것 내것이 어디 있어요?"
순영은 마음이 조금 풀리는 듯 하였다.
"그래, 그런 말은 고만두고, 그런데 금광으로 말하면 인제 거의거의 다 되어가거든. 해서 요전에 재봉틀 잡혀서 보낸 그 돈만 가지고도 될 듯하여서 다른 데는 한 푼을 아니 쓰 고 금광에만 썼으나 아직 되지를 않거든, 하니 몇 해를 애 쓰다가 거의 다 되는것을 고만들 수도 없고, 하기야 광이 대단치않은 것 같으면 내버려 두고 말 수도 있지마는, 이것 은 좋아도 여간 좋은 광이 아니거든, 기사의 말을 들으면 몇억만 돈이 들어간다고 하니까, 그렇게까지는 모르더라도 몇백만 돈은 들어을 테니 그게 어디냔 말이지. 하니 그것을 내버릴수도 없거든, 한데 손을 대는 수는 있느냔 말이야. 순 영이도 이제 한푼 댈 수가 없겠지?"
대철은 순영을 보고 대답을 기다리다.
"한푼인들 하는 수가 무슨 수에요. 재봉틀까지 없어기조 손 을 매고 들어앉아 있는데, 어디서 날 수가 있어요?"
순영은 눈을 크게 뜨고 근심스럽게 대철을 본다.
"그러기에 말이야, 말을 듣지 않더라도 집안 사정을 모를 리가있나. 나는 재봉틀까지 잡히려는 생각도 안 했었고, 하 는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이상한 계제가 있어서 그렇게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순영이에게 편지를 한다는 것이, 밑 도 끝도 없이 가정 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나는 홧김에 그렇게 한 것이지만, 순영이는 속내를 모르고 그 편지를 볼 때에는 속이 상하지, 안 상할 수가 있나. 그래 도 순영이나 하나니까 그만할 뿐 아니라, 돌려 생각하고 자 기의 생명같이 여기는 재봉틀까지 잡혀서 보낸 것이지, 다 른 여자들 같으면 어림이나 있나. 하지만 나는 다른 속내가 있어서 그런 편지를 한 것이란 말이야."
하고 말을 멈춘다.
순영은 이상한 눈으로 대철을 본다.
"속내가 무슨 속내냐 말이지, 한데 그걸 깊이 알아들어야해." "글세, 말씀해 보세요."
"이 말을 하면 또 거짓말이라고 하기 쉬울걸"
"무슨 말이기에 그렇게 뒤를 다지세요? 얼른 하세요, 남의 가슴만 졸이지 마시고."
"그런데 다른 게 아니라, 내가 금광에 다니느라고 왔다갔다 할 때에 자연히 술잔도 먹고 하는 탓으로 함흥서 어떤 여자 를 하나 알게 되었는데, 술잔을 들고 있을지라도 사람이 괜 찮단 말이야. 그래 차차 친하게 되었는데, 친하게 되었다니 까 무슨 다른 관계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마음으로 친하게 됐다는 말이지. 그 여자도 술잔은 들고 있을망정 몸 이 깨끗하고 지조가 여간 도도하지 않단 말이야. 마치 순영 이가 그전에 술잔을 들고 있으면서도 몸을 깨끗이 가졌듯이 똑 그렇단 말이야. 아닌게아니라, 그 여자를 대할 때마다 순 영이 생각이 난단 말이야, 어찌도 그렇게 같은가 하고. 마음 씨가 말이야, 인물은 순영이만 못하고.
그래 친하게 되자니까 자연히 그 사람의 사정을 내가 알게 되고 내 사정을 그 사람이 알게 되고 그럴 것이 아니야. 그 래서 내가 금광 때문에 애쓰는 줄도 알고, 그 금광이 좋은 줄도 안단 말이야. 그래 그런지 저래 그런지 그것은 모르되, 가만히 보니 내게다 마음을 두는 모양이거든, 내가 처음 우 스개삼아서 아직 장가를 안 들었다고 그랬거든. 그래 눈치 만 그럴 뿐이 아니라 나중에는 말가지 한단 말이야. 나하고 결혼할 생각이 있노라고, 그래 결혼을 하게되면 자기의 돈 이 이삼천 원 있는데, 그것을 금광하는데 쓰겠다 이런단 말 이야. 그 돈으로 말하면 그 여자가 본래 무남독녀로서 부모 가 구몰(俱歿)한뒤에 몰려 가진 돈이란단 말이야. 그래 그제 는 내가 실토 말을 했지 내가 농담으로 장가를 안 들었다고 했지만 실로는 처자가 있는 사람이니까 결혼할 수가 없다 고, 그러니까. 그 여자도 그렇겠다고 다시는 말이 없었단 말 이야. 그러나 가만히 보면 언제든지 내게 뜻을 두는 모양인 데, 그래 내가 이렇게 말을 해 보았지. 처자가 있더라도 같 이 살수가 있느냐구, 그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일은 급하고 하도 궁하니까 돈을 좀 변통해 쓸까하고 그런게지. 그돈을 들어 먹자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금광이 잘 된 뒤에 그 말 한 은혜를 갚으면 고만이 아니냐 이 말이지.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좋은 일이거든, 그랬더니 죽어도 남의 첩 노릇은 않는다고, 만일 이혼을 하면 관계가 없다고 그런단 말이야, 해서 우리가 상의를 해서 잠시 이혼을 하는 체 했었다가 그 돈을 돌려 써서 금광이 잘되면 그여가로 해줄거 해주고 우 리는 그전대로 산단 말이야, 알아들어?"
대철은 큰 경륜의 비밀을 말하는 듯이 자긍하고 친절한 듯 한 기색을 짓는다.
순영이 대철의 설명을 들음에, 앞에 금광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가지고서, 다른 도리 없이 막다른 골목에 이른 대철 이로서는 사세가 그럼직도 하였으나, 자기로서는 빈 말이라 도 대철과 이혼한다고 하기가 싫고, 또는 나중에 일이 어찌 될 는지는 모르는 일이어서, 잠시의 수단으로라도 이혼을 승낙하기가 싫었다.
"그러면 단지 돈을 돌려쓰기 위하여 그러신단 말씀이지요?" 순영은 평탄한 기색으로 말한다.
"물론이지, 그렇지만 않으면 왜 사랑하는 아내요, 은인이라 면 은인인 순영이에게 대하여 죽은 한이 있은들 이혼이니 뭐니 하는 말을 낼 리가 있나. 그렇지 않아? 생각을 해보라구." 대철은 순영을 힘껏 껴안더니 다시 손을 잡으면서,
"사람이 서로 마음을 알아 줘야지. 낸들 여북해야 그런 생 각을 내며 그런 말을 하겠나, 이게 다 우리가나중에 자식들 을 데리고 잘 살자는 계책이거든. 나도 순영이에게 이런 말 을 하는 것이 뼈가 아프지만, 어쩌는 수가 없어서 이런 말 을 하는건데, 우리 아내가 이런 사정을 몰라 주면 어떻게 하나. 다른 도리가 없거든. 하니까 순영이도 마음대로 하라 구, 나도 본의가 아닌 일을 하면서 왜 순영이를 강삭할 리 가있나."
대철은 순영의 손을 놓으면서 한숨을 쉰다. 순영은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는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 참이나 생각하다가,
"그러면 이렇게 하지요."
순영은 순탄한 눈으로 대철을 본다.
"응, 어떻게?"
대철은 자기의 요구를 들어 주는가 하여서 반갑게 말한다.
"당신 말씀과 같이 한다면, 그 동안은 같이 있을 수는 없지요?" "아주 같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왔다갔다하게 되지, 아주 못 만나게 될 수야 있나. "
"그러더라도 같이 살림을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지, 아주 살림을 하고 있을 수는 없게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늘 금광에 가 있게 되니까 같이 살림이야 하게 되나, 그 새인들 내가 얼마나 같이 있었나. 하니까 그 러나저러나 얼마 동안 같이 살림하고 있지 못하기는 마찬가 지지."
"하기야 그렇지만, 그래도 다르지 않아요?"
"다를 게 무엇 있나? 같이 못 있기는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아뭏든 금광 일이 끝나기 전에는 항상 같이 있 을 수는 없지요?"
"그야 그렇지."
"그러니까 말이에요, 기왕에 그럴 것 같으면 다른 도리가 있을 것 같군요."
"응, 무슨 도리요? 말을 해 보우."
"일이 될는지 안 될는지 모르지만, 내 생각엔 될 듯도 하군요." "글세, 무슨 일이란 말이야?"
"내가 그 전에 하던 노릇을 또 해보지요."
"그전에 하던 노릇이라니?"
"내 몸으 판단 말씀이에요."
"몸을 판다는게 무슨 소리야?"
"전에 몸이 팔려가서 색주가 노릇을 안했어요? 하니까 어 차피 얼마 동안 당신이 같이 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내 몸을 팔아서 얼마를 받든지 그 돈으로 금광을 하시고, 그 다름에 다시 살림을 하면 마찬가지가 아니예요? 하니까 생 소한 데는 할 수가 없지만 인천 가서 그전에 있던 집에 사 정을 하면 될 것 같군요. 하니까 그렇게나 하시지요."
순영은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거야 될 말인가, 내가 아무렇기로 아내를 색주가로 팔아 먹는대서야 말이 되나,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고 내 말대로 그렇게 하면 만사가 다 펼 것을, 왜 딴생각을 할 리가 있나." 대철은 결심 있는 빛을 보인다.
"낸들 색주가 노릇하기가 죽기보다 싫지마는, 여북해야 그 런 생각을 내겠어요? 그래도 색주가 노릇하는 것이 당신하 고 이혼하는 것보다는 낫거든요. 하니까 그렇게라도 해보겠 어요. 나는 세상 없어도 이혼하기는 싫어요."
순영은 결정적으로 말한다.
"그러면 내 일은 망치고 말라는 말이지. 내 일을 망치면 나 만 낭하나, 집안 식구가 다 굶어 죽게 될 터인데."
대철은 좋지 못한 눈으로 순영을 흘겨본다.
"글세, 집안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하든지 굶어 죽잖고 살 터이니. 그리고 정 그러시거든 어떤 여자든지 맘 대로 데리고 사세요, 나는 없는 셈치시고. 그러면 나는 나대 로 살 테니요."
순영도 기색이 조금 날카로와진다.
"데리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거든, 민적을 하자니깐 걱정 이지. 친구의 일을 위해서도 집문서도 빌리고 논문서도 빌 리고 하는데, 그가짓 민적을 잠시 가르는 것이 어떻단 말인고.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여자도 있는 것이 야, 한데 잠시 민적을 가르는 것이 어려울 것이 무어람."
대철은 팔을 걷어치고 쪼그려 앉는다.
"나도 당신을 위하여죽으라면 죽기는 하겠어요. 내가 당신 때문에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에요? 하니까 차라리 나를 죽 이시고 마음대로 하세요. 내가 목숨이 붙어 있고서는 당신 도 이혼할 수는 없어요. 나는 나의 목숨은 동아줄만 하더라 도 열이라도 끊을 수가 있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정은 실낱 만할지라도 하나도 끊을 수가 없어요.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순영은 흥분이 되었으나 발악은 아니었다. 순영은 울음을 참는 듯하다가 마침내는 느껴 운다.
말없이 입술만 깨물고 앉아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던 대철 은,
"엑!"
소리를 한 번 지르고 일어나더니 검다 희다 말이 없이 모 자를 쓰고 나간다.
"남이 깊어가는데 어디를 기세요? 저녁도 변변히 못 잡수 시고 나가시려면 술이라도 한잔 따뜻이 해 잡수시고 나가세 요, 날이 찬데요."
순영은 울음을 삼키고 말만을 토하려고 하였지만, 어쩐지 울음이 앞서고 말소리가 뒤쳐서 말소리가 고저를 잃고 분명 치 못하였다. 대철은 말없이 돌아보지도 않고 나간다.
정월 대보름 달이라 그런지 특별히 밝은 듯하였다. 하늘에 는 구름 한 점 없고 뿔 돋친 서릿발이 달빛에 반사되어서 가없는 허공을 수놓은 듯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어지럽게 얽혀진 순영의 근심에 비교한다면 어히려 성기고 적은 듯하 였다. 바람은 한정없이 차서 사람의 살을 에는 듯하였다. 순 영이 뿌리는 눈물은 당장에 서릿발처럼 어려서 달빛에 반짝 인다. 어디서 윷노는 소리가 나면서 떠들고 웃는다.
"제용웅 줍시오, 제용이요."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더니,
"제용웅 줍시오, 제용이요."
여러 아이들이 순영의 집 문간으로 지나간다.
"제용 가져 가거라. "
순영은 수복을 위하여 도액(度厄)하려고 만들어 두었던 제 용을 내어 주었다.
6.
[편집]순영은 갑자기 외로와지는 듯하였다. 빨가벗고 손에 몸을 방비할 막대 하나도 들지 아니한 채로 무인지경에 빠지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은 모두 자기를 해칠 것만 같고 금수 초록까지도 자기를 침노할 것만 같았다. 외로이 비치는 얼굴과도 생각하여서 과거를 모르는 것이 무척 외롭 고 슬펐다.
<내 마음이 왜 이럴까?>
하고 돌이켜 생각하여 보았으나, 그 이유가 또렷이 나서지 를 아니하였다. 여자로 태산같이 믿고 한량없는 희망을 붙 이던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게 되는 까닭으로, 지팡이를 잃 은 소경처럼 몸과 마음이 허전하여서, 정신 상태가 그렇게 되는 것이라는 것까지는 분명히 잡아내지 못하였다.
순영은 이때까지 꿈을 꾸듯이 생각하여 오던 미래의 행복 은, 아침 이슬이나 저녁 연기처럼 사라지고, 뜻하지 아니한 불행이 산처럼 내리 눌리고 조수처럼 밀러 들었다. 순영은 흥숙자가 대철과 결혼하는 데 대하여 몇 마디로 만류하던 말을 생각하였다. 그 중에도<나중에 후회하리라> 하던 말이 금방들리는 듯 하였다.
순영은 대철과 오륙 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에 다 소의 불평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순영이 돌 이켜 생각하는 것은, 언제든지 물에 빠져서 죽게 된 자기를 건져 주었다는 은혜와, 거기 대한 대철의 의협하고 용감한 인격이었다. 그리하여 그런 생각이 날 때에는 그것으로 대 철의 모든 단처를 묻어 버리고, 도리어 잘못을 자기에게로 돌려 버리는 것이 순영에게는 거의 버릇이 되었다. 그것은 순영이 자기의 마음을 진정하고 사단(事端)을 일으키지 아니 하려는 수단으로 짐짓 그렇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감정에서 스스로 감화를 받는 것이었다. 그것을 순영이 이 성(異性)으로서 대철에게 너무 침혹한 것이라든지, 개성이 없이 너무 맹종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하여간 순 영이 진실된 마음으로 대철을 그렇게 믿어 왔던 것은 사실 이었다.
순영은 눈물과 한숨이 저절로 그쳐지고 아프고 쓰리던 마 음이 흥분의 자유를 잃었을 때에, 또다시 대철의 사정을 생 각하여 보았다. 예와 마찬가지로 대철의 은혜와 의협한 인 격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희미하던 것이 차차 분명하여지고, 처음에는 조그마하던 것 들이 점점 커 다랗게 된다. 그러자 다시 대철이 목전에 당하고 있는 경우 가 생각난다. 아무라도 그러한 경우에서 그러한 기회를 얻 게 되면 그러한 처사가 있음직도 하였다. 대철의 말과 같이 진정으로 자기가 싫어서 이혼아자는 것이 아나라, 한때의 권도(權道)고 그리하는 것뿐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은 장 래의 가족을 위하는 것이라는 말이 결단코 거짓말이 아닌 듯 하였다. 그렇게 생각으 할 때에는 대철의 정경이 가엾고 자기의 행동이 뉘어쳐졌다. 그러자 순영은 까무라쳤다가 다 시 회생하는 사람처럼 정신에 생기가 돌고, 눈이 변하여서 무엇이 제대로 보였다.
순영은 대철이가 있는 곳을 알면 곳 쫓아가서 아까 잘못한 사과라도 하고 대철의 말하던 것을 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 나 어디로 간 것을 알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가령 안다고 하더라도 그 밤 중에 찾아가는 것이 대철에게 누가 될는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나 대철이 자기의 행동에 감정이 상하여서 나간 길로 다른 데로 가버리고 들어오지 아니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졸였다. 순영은 지 나치는 흥분과 종잡을수 없는 감정에 지쳐서 팔을 베고 누 운 채로 깜박하였다.
7.
[편집]순영은 벼락 치는 듯한 소리에 놀라 깨었다. 순영이 놀란 눈으로 봤을 때에는 드나드는 미닫이는 부서지고, 모자를 쓰고 구드를 신은 채로 우뚝 선 것이 마치 사람을 잡아먹으 려는 귀신 같이 보였다.
"에구, 웬일이세요?"
그것이 대철인 줄을 알고서 일어나면서 말하는 순영은, 목 소리만 떨리 뿐 아니라 몸까지 떨렸다.
"웬일이라니? 명색이 서방이라구 반 년 동안이나 나가서 고생을 하다가 집안이라구 찾아 들어왔는데, 그 새를 못 참 아서 문을 첩첩이 걸고서 잠만 자면 심평이 펴나, 이 놈의 집이."
지게미가 떨어질 듯한 눈에 독살이 올라서 벌겋게 뜨고 보 는 대철의 꼴은 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문을 잠그긴 누가 잠가요. 대문도 지치기만 하고 방문도 미닫이만 닫았는데요. 그리고 입때 기다리다가 잠깐 누운 것이 깜박했군요."
고양이 앞에 쥐처럼 지기를 못 펴는 순영은 혼잣말처럼
"에구, 잠이 원수야, 그 새를 못 참고서."
하더니 다시,
"잘못했어요. 신 벗고 앉으세요."
순영은 대철의 얼굴을 바다보다가 몸을 구부리고 구드 끈 을 끄르려 한다.
"앉기는 내가 이까짓 놈의 집에서 왜 앉아?"
하는 대철의 발길로 순영의 팔을 걷어 차더니,
"이까짓 놈의 살림살이 때려 부숴야지."
하고 고함을 치면서, 주먹과 발길로 닥치는 대로 부순다.
"으아!"
하고 놀라서 벌떡 일어나며 울던 수복은 너무 놀라서 눈을 홉뜨고 거품을 흘리면서 버리적거린다.
하찮은 세간이라도 부서지는 것이 안타까와서 대철을 될 수 있는 대로 만류하던 순영은,
"에구, 얘가 웬일일까?"
하고 수복을 얼싸 안고서 들여다보면서,
"얘가 이게 웬일이야? 수복아, 이게 웬일이냐? 아가 아가.
"
하고 불러 보았으나 수복은 대답이 없이 눈을 홉뜨고 버리 적거리기만 한다.
"에구. 이게 웬일이냐. 수복아, 수복아, 이거 큰일났구나 수 복아, 수복아,"
순영은 수복을 흔들어도 보고 뺨을 한데 때고 비비기도 하 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진정시키려고 하였으나, 수복은 여 전히 버리적거릴 뿐이었다.
"에구, 이거 어떻게 하나? 큰일났구나, 수복아, 수복아, 정 신 차려라, 이걸 어떻게 하나."
순영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린다.
미친 개처럼 날뛰던 대철도 그 광경을 보고서 난폭한 행동 을 멈추고서 물끄러미 보고만 있다.
"이걸 어떻게 하나, 의사를 청해 와야 할 터인데, 이거 큰 일이 나겠네."
순영은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수복을 안은 채로 발버둥질 을 친다.
"이거 보세요, 의사 좀 청해 오세요. 수족이 차디찬데 이것 을 어떻게 하나."
순영은 대철을 보고 애원한다.
"의사? 의사는 청해서 무얼 하게, 조금 더 커서 굶어 죽느 니 진작 죽어 버리면 신세가 편하지, 그리고 그게 뉘 놈의 자식인지 아나, 나는 밤낮 돌아다니고 실호 모르는 일이거 든, 뉘 자식인지, 색주가 노릇하던 년이 제 버릇 개 주었을까?" 대철은 말을 하고 천장을 쳐다본다.
"여보세요, 그게 무슨 소리요? 얼른 의사 좀 청해 주세요.
이러다가는 이애를 버리겠어요. 눈동자가 점점틀려 가는데."
순영은 수복을 만져 주기에 눈물을 씻을 사이도 없었다.
"죽어도 좋아!"
대철은 소리를 꽥 지른다. 순영은 농 속에서 도장을 내어 대철을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 수복을 둘러 업고서 병원으로 찾아갔다.
"지금 자정이 지났는데, 주무시는 것을 요란스럽게 깨워서 미안합니다. "
순영은, 문을 여러 번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서 비비고 나 오는 의사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관계 없습니다. 병원에는 그런 때가 흔히 있습니다."
의사는 말하고 진찰실을 둘러본다.
"이애를 좀 보아 주세요."
순영이 업은 수복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려 할 때에, 간 호부가 들어와서 받아준다. 자는 듯이 엎드려 있던 수복은,
"으아!"
하고 울었으나 울음 소리가 힘이 없다.
"이애가 어떻게 그럽니가?"
의사는 수복의 얼굴을 보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묻는다.
"이애가 놀라서 경풍이 됐어요."
"언제요?"
"바루 아까 그랬어요."
"왜, 무엇에 놀랐어요?"
"이애 아버지가 술을 자시는데 아까도 술이 취해서 들어와 서 말소리가 조금 높았는데, 자다가 별안간에 놀라서 눈을 뒤집어쓰고 게거품을 흘리고 하더니 이 모양이 되었어요."
하고 기운이 없이 우는 수복을 달랜다.
"청진기를 가져와요."
하는 의사의 말에 간호부는 자기가 진작 할 것을 잊어서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갖다 놓는다. "오냐, 괜찮다, 가만히 있거라. "
의사는 순영과 간호부가 붙들고 달래어도 울고 날뛰는 수 복을 얼러 가면서 여러 곳을 진찰하고서 청진기를 놓더니,
"놀라서 동풍(動風)이 되었군요. 혈압이 높은데요."
하고 체온기를 수복의 겨드랑 밑에 넣고 조금 있다가 내어 보더니,
"열은 그다지 과하지 않군요."
하고 진찰을 마친다.
"그런데 어떻겠어요?"
순영은 걱정스럽게 묻는다.
"놀라기는 대단히 놀랐군요. 그래서 동풍이 되고 혈압이 놓 으나 열은 그다지 과하지 않습니다. "
의사는 아까 하던 말을 되풀이 할 뿐이요, 결과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쉽게 나을까요?"
"약을 먹고 치료를 하면 차차 낫겠지요."
"그렇게 하면 낫기는 낫겠어요? 별일은 없을까요?"
순영은 칠분의 절망과 삼분의 희망을 가지고 묻는다.
"병이라는 것은 고치면 잣는 것이니까요, 별일은 없겠지요." 의사는 열이 없는 웃음을 웃고서 화제(和製)를 써서 간호부 를 주니, 간호부는 그것을 들고서 제약실로 사라진다.
"그런데 병이라는 것은 약도 약이지만 집안에서 치료를 잘 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약도 먹이려니와 아무쪼록 안정하게 하십시오. 조용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입니다. 너무 충 이지도 말고, 말 같은 것도 시키지 말고, 그저 몸이나 마음 을 움직이지 말고 안정하게 하시지요. 무슨 말을 묻는다든 지, 가령 아프냐? 안 아프냐? 배가 고프냐? 무엇이 먹고 싶 으냐? 그 외에도 무슨 말이든지 자꾸 물어서 말을 시킨다든 지, 제 동무들이라도 여럿이 와서 떠들고 장난을 한다든지 그러면 안 될 겁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흥분하게 하면 더 욱 못씁니다. 나무란다든지 제 비위를 거슬려서 골이 나게 한다든지 그런 것이 다 못쓰는 것입니다. 또 너무 즐겁게 하는 것도 재미 없습니다. 하니까 어쩧든지 안정하게 하십 시오"
의사는 의사답게 자세히 설명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간호부는 물약과 가루약을 가지고 나오더니,
"진찰료 합쳐 모두 삼 원 오십 전 입니다. "
하고 순영의 앞에 놓는다.
"에구, 돈을 안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해요?"
순영은 미안에 차서 말한다.
"안 가지고 오셨어요? 그럼 조금만 계세요."
하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나와서,
"그러면 후일에 가져오세요."
하고 수복을 업혀준다.
8.
[편집]순영이 이혼이 되었다는 통지를 받기는 며칠 뒤의 일이었다. 순영은 대철에게 대한 만사를 잊어버리고 다만 수복을 구호하기에 일심정력을 들였다. 순영이 이 세상에 살아 있 는 동안, 오직 하나인 희망은 수복을 기르는 데 있는 까닭 이었다.
"아가, 어디가 아픈가?"
순영은 밤이 되어도 잠도 잘 자지 않고 칭얼거리는 수복의 머리를 짚어 주면서 물으면,
"안 아파."
힘없이 말하는 수복은 멀건 눈으로 엄마를 쳐다본다.
"아가, 무엇 좀 먹을까?"
수복은 대답이 없이 고개만 내두른다.
"아가, 그럼 약이나 좀 먹자."
"싫어."
수복은 우는 소리로 짜증을 낸다.
"약을 먹어야 얼른 낫지, 조금만 먹자, 약맛이 단데, 우리 수복이는 약을 잘 먹지, 다른 애들은 약을 안 먹고 울기만 한다나, 우리 수복이는 착하지 물약 조금만 먹자, 응?"
순영은 경대 서랍에서 약병을 꺼내어서 금을 보고 숟가락 에 따른다.
"나는 싫어."
수복은 울면서 두 손으로 입을 가린다.
"아가, 조금만 먹어라. 이약은 조금인데 먹으면 달아요. 어 서 먹어라. "
순영이 약숟가락을 수복의 입에다 대려고 할 때에,
"싫어, 싫어."
하는 수복은 손으로 숟가락을 채뜨려서 약물을 쏟아놓았다. "에구, 이걸 어쩌니, 약이 인제 한 모금밖에 안 남았는데, 오늘 밤에 먹고 내일 또 먹을 건데, 약을 쏟아 버렸으니 어 떻게 한단 말이냐. 이때까지 약값은 못 주었는데, 또 가서 달라 염의가 있니, 한 금 남은 거나마 먹어야지. 밤에 잘 때 에 먹이는 것이 좋다는데."
순영은 처음에는 수복의 조고리 앞섶에 쏟아진 물약을 숟 가락으로 훑어 담으려고 긁어 보았으나, 약물은 긁어 담으 려는 숟가락에는 담기지 않고, 자주 빨아 주기도 어려운 수 복의 때때 저고리 속으로 새어 들어갔다. 순영은 그것을 입 속으로 빨아서 침이라도 수복의 입에 흘려 놓으려고 하였으 나 수복은 그것조차 받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순영은 이 런 말을 혼잣말처럼 하고서, 이번에는 한 금 남은 약을 숟 가락에 따르지 않고 종지에 따랐다.
"아가, 이거 먹어야 한다. 안 먹으면 못 쓰는 거야. 한 번 만 꿀떡 삼키면 고만인데 뭘."
하고 먹이려 할 때에 수복은 울면서 몸을 흔들고 발버둥질 을 친다.
"에구, 왜 이러냐? 웬 너무도 그래쌓는구나, 웬 이걸 먹어 야지, 어떻게 한단 말이냐, 어서 먹어라. 맞기 전에."
순영은 약간 화를 내면서 억지로 먹였다. 안 먹으려고 하 면서 할 수 없이 받아먹는 수복이 사레가 들려서 기침을 계 속할 때에는, 앓는 것보다 약 먹고 애쓰는 것이 더욱 안타 까와서 억지로 먹인 것을 후회하였다.
순영은 낮과 밤으로 힘과 마음을 있는 대로 짜서 수복을 구호하였으나 수복의 병은 점점 짙어갈 뿐이었다. 나중에는 쇠약할 대로 쇠약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것이, 이따금 이 따금 혼수 상태에 빠져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것을 사람 으로서는 차마 볼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순영은 수복에 대 한 모든 것을 되 수만 있다면 대신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 것도 생각뿐이었다. 수복이 가래를 가랑가랑하면서도 뱉을 힘도 삼킬 힘도 없는 때에는, 사랑하는 어머니인 순영이로 서도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얼굴을 돌리는 때가 있었다.
그해 한식날에 미아리 공동묘지의 한편 조그마한 새 무덤 앞에는,
"수복아, 너는 어디를 갔느냐?"
하고 사설을 하면서 우는 여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