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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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路[편집]

1.[편집]

"아우님이 계신가, 원."

봉림(鳳琳)은 문간에서 부터 인기척을 내고 들어온다.

"언니, 이게 웬 일이요?"

봄날의 따듯한 볕을 받고 앉아서 바느질을 하던 순영은 반 색을 하여 일어나 맞는다.

"언제든지 바느질이야. 바느질 나자 아우님 났군."

"그럼 어떻게 하우? 굶어죽을 수는 없구."

순영은 웃는 입으로 한숨을 짓는다.

"늘 와서 놀다라도 가고 싶은 생각이 있지마는 무얼 하는 지 나올 사이는 없구면, 먹구 사는 게 다 무엇인지. "

"에구, 그렇지요. 나는 혼자 살림이라도 나갈 틈이 없는데 언니야 그렇고, 어서 앉으세요."

순영은 손으로 마룻바닥을 쓸더니,

"방으로 들어갈까?"

하고 봉림을 쳐다본다.

"방에는 무얼, 예가 따듯하고 좋지."

봉림은 치맛자락을 덕어치고 앉으려고 한다.

"날이 따듯하니까 오히려 마루가 나아요, 방이라구 구랑신 같구."

순영은 손으로 쓴 자리를 다시 입으로 불더니,

"방석이 있나 돗자리가 있나, 그대로 앉으세요. 날마다 걸 레질을 치니까 그렇게 더럽지는 않아요."

하고 바느질하던 것을 치워 놓는다.

"신색은 그전보다 나아졌어."

봉림은 앉으면서 순영을 본다.

"나아지다니, 나아질 수가 있나요."

"아니야, 나아졌어."

"모르지, 나아졌는지 어쨌는디, 나는 거울도 안 보니까."

순영은 앞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걷어 올린다.

"거울을 안보니까 이뻐지나 봐, 거울을 보고 화장을 하고 좀 이쁘게 만들려면 어째 그렇게 점점 미워지는지 모르겠어. 나도 인제 거울도 보지 말고 화장도 하지 말고 그럴까 봐, 좀 이뻐지게, 호호호."

"언니는 본 바탕이 원체 이쁘니까 화장을 하면 오히려 덜 이뻐질는지 모르지. 언니 같은 인물은 드물꺼야."

순영은 눈으로 웃는다.

"에구 이런, 한참 못 봤더니 말재주가 늘었어. 언니를 놀려 먹으면 죄로 간다나. 그런데 참 어떻게 지내요?"

봉림은 웃다가 얼굴빛을 고친다.

"어떻게라니? 그렁저렁 지내지, 죽지 않으니까 살지."

"아니, 먹고 사는 것도 먹고 사는 것이지만, 마음은 다 안 정이 되었겠지, 애절도 해쌓더니."

"그전보다는 많이 잊어버린 셈이지마는 그래도 아주 잊어 버려지지를 아니해요."

"처음에 이혼을 당하고 수복이 죽고 나서는 애절도 하더니 그게 벌써 삼 년 인가?"

"햇수로는 사 년이지."

"아우님 울고 야단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 년이 되었구료. 세월은 참 무정한 것이거든. 그렇지. 사 년 아니 라 백 년이 되더라도 아주 잊어버릴 수가 있나."

"아주 잊어버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자꾸만 생 각이 나요, 마음이 약해서 그렇지, 언니?"

"약한 게 아니라, 마음이 인자해서 그렇지. 모자간 은정이 라는 것이 그런 것이거든."

"아니야, 수복이 생각도 생각이지마는 그것은 죽은 것이니 하릴없으나, 그이 생각이 그렇게 나요."

순영은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여도 이상하다는 듯이 의심하 는 듯한 눈으로 봉림을 본다.

"그이라니? 수복이 아버지 생각이 난단 말이야?"

"그래, 언니."

"나는 수복이 생각을 그렇게 한다구, 그이야 생각할 턱이 무엇 있나."

하는 말을 화두(話頭)로 조금 멈추다가 말을 계속한다.

"어떻다구 그이를 생각하는 거야? 날 마다고 버리고 간 사 람을......"

봉림은 조소하듯이 말한다.

"싫어서 버리고 간 것은 아니거든."

"싫어서 버리고 간 것이 아니면 좋아서 두고 간 것인가?

그런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야. 다른 여자하고 살기 위하 여 민적까지 갈라 가지고 갔으면 고만이지. 그것을 생각해 서 무얼 하는 거야. 아니, 나중에 와서 도루 산다는 말을 곧 이듣는 거야?"

"꼭 곧이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두 자꾸 잊혀지지 앉는 것을 어떻게 하우?"

"그래 대관절 사 년 동안에 몇 번이나 왔었나?"

"한 번도 안 왔지."

"그래, 그 풍파를 내서 수복이까지 죽게 만들어 놓고서 한 번도 안 왔다?"

"금광 하느라고 바빠서 올 새가 없는 게지.'

"그럼 편지 왕래는 있었는가?"

"편지도 없었지, 편지를 하려야 주소를 알아야 하지. "

"이런 부처님 반 토막 보았나, 아우님이 편지를 했느냐 말 이 아니라, 저편에서 편지 한 번도 안 했더냔 말이요."

"글세 없었어요."

"그래, 그럼 수복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구면?"

"모르겠지요, 알 수가 있나요."

"이를테면 수복이도 제 아버지가 죽인 것이 아닌가?"

"그거야 제 명이 짧아서 죽었지, 그랬다구 죽었겠어요."

"제 명이 짧아서 죽다니? 제 아버지가 술을 먹고 들어와서 야단을 치니까 놀라서 경풍이 되어서 죽은 것이지, 그랬다 구 죽었겠느냐는 소리가 무슨 소리야, 원."

"그래두 제 명이고, 저래두 제 명이지, 어쩌겠소."

순영은 눈물을 씻는다.

"그래, 그러구 가서 사 년이 되도록 한 번도 오지도 아니하 고, 편지 한 장도 없는 그 사람을 믿고 기다린다?"

봉림은 눈물을 흘리고 앉았는 순영이 안타깝기도 하였지만 너무도 속이 없는 것 같아서 멸시하는 듯한 생각도 났다.

"나는 암만 해도 그이가 거짓말로 나를 속이고 말 것 같지 는 않아요. 그전에도 더러 이얘기 하였지만, 그이는 나를 살 려 준 은인이기도 하고 또 어쩐지 자꾸만 생각이 나요. 그 게 사람이 못나고 마음이 약해서 그렇지, 언니? 언니 같으 면 그런 사람은 생각도 않겠지?"

순영은 자기가 대철을 잊지 아니하고 생각하는 것이 허물 이나 되는 듯이 말한다.

"나 같으면 생각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자가 와서 비지 발하고 한 번 보자구 한대도 보지도 않을 테야. 편지가 온 대도 포지도 않고 불에 넣어 버릴 테야. 그런 것을 사람이 라고, 생각이 다 뭐야."

봉림은 입을 삐죽하면서 고개를 조금 돌린다.

"그렇지, 언니 성미 같으면 그렇고 말고,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마음이 약한지 모르겠어. 그래두 그이가 자꾸 불쌍 하기만 해요, 그리구 그이가 자꾸 믿어지고 사람이 설마 그 러랴 싶거든요. 지금이라도 돈만 있고 그이 있는 곳을 알면 돈을 보내주고 싶어요. 어째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이뿐 아 니라 누구든지 사람이 그렇게 잘못하랴 싶고, 또 불쌍한 사 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고 그래요. 그게 사람이 못나서 그 렇지, 언니?"

순영은 길 잃은 사람이 길을 묻듯이 진정으로 자기의 생각 이 옳은지 그른지를 스스로 비판하지 못하여서 묻는다.

"못나기야 왜 못나, 그게 좋은 마음이고 착한 생각이지. 남 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싶은 마음이 여북이나 좋은 생각 인가? 하지만 믿어서 서용이 없는 사람을 믿기만 하는 것은 도리어 어리석은 일이거든, 하니까 말이지 못나기야 왜 못나?" 봉림은 순영의 말에 느낀 바가 있는 듯이 태도를 고치더 니,

"그런데 참,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딴소리만 하고 있 었네."

하고 순영을 본다.

"무슨 말이에요? 인제 참 그런 말은 고만두고 다른 말이나 해요."

순영은 봉림이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새로운 기대를 가진다. "그런데 그런 일도 있을까?"

봉림은 순영의 편으로 다가 앉는다.

"무슨 일?"

"사람이 그렇게 되는 수는 없겠지?"

"무슨 말이요?"

순영은 더욱 듣고 싶어한다.

"내가 아마 잘못 보았나 봐."

"아 , 글세 무슨 말이야?"

"사람의 일이 밤새 문안이라고 하지만, 사 년 동안에 아무 렇기로 그렇게 될 리야 있다구."

"아이 참 언니두, 말은 아니구 사람의 간장만 녹이려 드네." 순영은 논을 흘기는 듯이 웃는다.

"하두 이상해서 내가 잘못 보았나 어쨌나, 말하기가 어려워 서 이러구 있어요, 글세."

"아이, 하늘에 가 별이나 따는 소리가 나올라나 부다. 이렇 게 허두가 긴 것을 보니."

순영은 도리어 긴장한 빛을 잃은 듯하다.

"그런데 사람이 사 년 동안에 부자가 거지도 되고, 거지가 부자도 되고 그러는 수가 있겠지, 아우님?"

" 사 년은 그만두고 일 년 동안이라도 그렇게 될 수가 있 겠지."

"그는 그래. 그래도 하도 이상하고 의심나서 말하기가 어려워. 하지만 기왕 말을 내었으니 본 대로 말을 하지. 하지만 암만해도 내가 잘못 보았을 거야. 잘못 보는 수도 있고, 또 같은 사람도 많이 있거든."

봉림은 눈을 순영의 눈과 마주쳤다 돌렸다 몇 번을 하더 니,

"아우님, 저 해태 앞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사직공원 쪽으로 가는 길이 안 있소 왜?"

"내 자동 쪽으로 가는 길 말인가?"

"그래, 그 길 말이야."

"그래, 그런데?"

"그길로 들어서려면 첫머리에 양옥집처럼 지은 집이 있지 않우?"

"그런 집이 있던가, 아마 있나 봐."

"그래, 그런 집이 있는데, 그 집이 바루 아편장이들에게 아 편을 파는 집이거든. "

"아편을 팔아? 아편은 팔면 잡아 간다는데."

"그런데 이것은 가만히 파는 데가 아니라 인가를 맡아 가 지고 파는 데레. 그리고 거기 가서 아편을 사는 데도 인가 를 맡아야 한다나. 하여간 그 속내는 자세히 몰라도 아편을 파는 데라야."

"모르지, 나는 멍텅구리라 그런 것을 아나."

"그런데 내가 큰동서네 집에를 다니느라고 그 길로 차주 다니거든."

"그런데, 다니는데?"

"그런데, 언젠가 저번에 바루 비 오고 들던 그날이야. 그 집 앞을 지나는데 말이야."

"에구, 대답하기도 귀찮아, 어서 말을 해요."

순영은 웃으면서 화를 내는 체한다.

"암만 해도 내가 잘못 보았나 봐."

"에구, 그만 두어, 듣기 싫어. 나는 듣지도 않을 테야."

순영은 기지개를 켜면서 뒤로 드러눕는 자세를 취한다.

"아니야, 이것은 내게는 손톱만큼도 상관 없는 말이야. 아 우님에게 관계가 있는 말이지, 관계라도 여간 큰 관계가 아 니거든. "

봉림은 말을 아니하여도 관계가 없다는 듯이 두손을 뒤로 짚고 버듬하게 앉는다.

"무슨 말이기에 내게 큰 관계가 있어, 어서 말을 해요."

순영은 다시정신을 차린다.

"우리 같으면 들어야 고만, 안 들어야 고만이지만, 아우님 은 아마 그렇지 않을 거야."

2.[편집]

봉님은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그런데, 나는 거기를 지날 때에는 눈을 감고 싶어하고 다 녀요, 왜 그러냐 하면, 거기는 언제든지 아편장이들이 들썩 거리거든. 아편인지 모르핀인지 사가느라고 그래. 그것들이 보기 싫어서, 우리는 어째 그런지 아편장이가 그리 보기 싫 어 아우님은 그렇지 안아?"

"왜 안 보기 싫어?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볼 때에도 불쌍한 생각이 먼저 나요."

"인제 보니 아우님은 정말 부처님이 다 되었구료. 이 다음 에 극락이나 천당은 떼어놓은 당상이요. 우리는 다른 거지 보다 아편장이 거지가 제일 미워. 그래서 동냥아치가 와도 아편장인 줄만 알면 밥 한술 돈 한푼 안 주지. 멀쩡한 것들 이 아편을 처먹다가 그 묘양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 까닭이 없는 사람이라도 곧 죽이고 싶어요. 글세, 아편장이 가 인에 몰리면 계집도 팔아먹는다는데,"

봉림은 눈을 치뜨고 순영을 본다.

"참 그런데, 하지만 그것도 인명이 아니요? 그 지경이 되면 불쌍하기야 하지, 그런데 말씀이나 하세요."

"그래도 나는 그것들이 보기 싫어서 거기를 지나려면 눈을 감다시피 하고 다녀오우. 한데 그날은 막 그 앞을 지날 때 에 문여는 소리가 삐드득하고 나기에 엉겁결에 흘깃 보니 까, 그 안에 아편장이들이 쭈욱 늘어 앉았단 말이야, 나는 아편 장이가 둘락날락하기에 누군지 들어가서 이내 아편을 사가지고 가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아편장이들 모이면 호명을 하여 가지고 차례로 늘어 앉았지. 그런데 흘 깃 보니까 아이구 사람이 기가 차혀서."

봉림은 말을 멈추고 순영을 본다.

"무엇이 기가 막혀?"

순영은 어리둥절하여 아무 표정이 없는 눈으로 봉림을 본다. "글세, 이것 봐요, 기가 막히겠나 안 막히겠나, 흘깃 보니 까 그 중에 수복 아버지가 앉았겠지."

"수복 아버지가?' 순영은 황급하게 놀란다.

"그래."

봉림은 입을 벌리고 혀 끝을 조금 내민 채로 순영의 기색 을 살핀다.

"아니, 아편장이 속에 있어? 거기서 사무 보는 사람으로 있어?" "사무 보는 사람이 뭐야, 아편장이 속에 끼여 있더라니까."

"주제라든지 모양은 어떻게 되었어?"

"주제나 모양은 말해서 뭘하게, 헌 누더기를 용문산(龍問 山)의 안개 두르듯 하고, 얼굴은 바짝 말라 황달들린 저처럼 누룽퉁퉁한 것이 콧물을 찌르르 흘리고 형편 없지. 말해 서 뭘해. 왜 얻어 먹으러 다니는 아편장이를 못 봤어?"

"..........."

"똑 그렇지 다를까."

봉림은 신이 나는 듯이 말하는데, 순영은 가슴이 놀라여 얼굴빛이 흐려진다.

"그래, 어쨌어요?"

순영의 말소리는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품이 나다난다.

"어쩌기는 무얼 어째. 그래 나도 처음에는 잘 못 알아 보았 어요. 볼 때에 낯이 익은 듯하기에 가면서 곰곰 생각하니 그이란 말이야.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일부러 눈여겨 보지 않았겠나 봐. 별꼴을 다 보았어. 아편장이라면 눈을 감고 다 니던 사람이 그이 때문에 아편장이 설피했어. 그래 그 다음 부터 눈여겨 보자 하니까 가끔 그이가 눈에 띈단 말이야.

그래 아무리 보아도 수복이 아버지거든. 더욱 확실한 것은 한 번은 그이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꽉 수그리고 도망질을 하겠지, 그러면 무얼 하는지."

봉림은 말을 멈추다가,

"그렇지만 세상에는 같은 사람도 많으니까 모르지. 하지만 그이가 그새에 그렇게 되었을라구. 그렇잖아 아우님?"

하고 기운을 낮춘다.

순영은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어서 한 참 있다가,

"같은 사람도 있기야 하겠어요. 하지만 언니가 여북이나 똑 똑히 보았을라구."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하는 듯이 한 손을 가슴에 대고 힘없이 말한다.

"아무리 똑똑히 보아서 잘못 보는 수가 있거든. 내가 공연 히 그런소리를 했나 봐. 아우님 속만 상하게."

봉림은 자리를 고쳐 앉는다.

"에구, 사람이 어찌면 그렇게 되었을까?"

하고 새로 근심을 간직하는 순영의 눈은 눈물이 엉긴다.

"아니야, 자세히 모르는 일을 가지고 걱정할 것이 아니야.

그리고 아주 남이 되었으니까 그런 말을 해두 관계찮을 줄 알았지, 누가 저렇게 생각할 줄이야 알았나. 고만둬, 내가 잘못 보았나 봐."

봉림은 순영을 위로한다.

"아니야 그이가 그렇게 되었는지도 몰라요."

"어째서! 짐작하는 일이 있어."

"언니가 그런 말씀을 하니 나도 생각나는 일이 있어요."

"응, 무슨 일?"

봉림은 흥미를 가지고 다가 앉는다.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누가 그렇게 되었으리라고야 꿈이나 꾸었겠어요. 그랬더니 아마 그렇게 된 거로군요."

"응,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이야.""

순영은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는 듯이,

"날도 안 잊어버려요. 바루 지난달 보름날이야. 그때도 바 느질을 하고 앉았는데, 밖에서 누가 동냥을 달라고 하는데 첫 마디는 못 알아듣고 두 마디째 들으니.<돈 한푼 주시오>

하는 소기가 수복이 아버지 목소리 비슷하단 밀이에요. 목 소리가 조금 쉰 듯하기는해두 천연 그이 목소리 같단 밀이 에요. 그대로 심상히 알고서 동냥은 못 주었지요. 동냥 줄 것이 있나요 어디. 그랬는데 이웃집에 가서 동냥을 달라고 하는데 목소리가 또 그렇단 말이지. 그래 이상하게는 여겼 으나 그러고 말았지."

"그래, 그래서 어쩌면 그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

봉림은 순영의 말 줄동을 질러 가지고 나선다.

"그랬는데 일 주일인가 지나서 바로 삼월 스무이튿날이야.

또 와서 동냥을 달라는데 또 그 목소리겠지. 그래 돈이 없 다고 그대로 보내고서 하도 미심스럽기에 가만히 나가서 가 는 것을 보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얼굴은 자세히 알수가 없 으나 뒷모습은 천연하단 밀이에요. 방에 들어와서 곰곰이 생각하니 그 이가 그렇게 되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이 안 나나, 그래도 의심이 나서 이 다음에 또 오거든 동냥을 주 면서 보리라 하고 별러서 오기를 기다렸지요. 그랬더니 그 러니까 삼월 그믐앟리수면, 또 왔겠지요. 그래 돈 일 전을 가지고 나갔지요. 일부러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그랬더니 대문간에 거의 나가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이 나갈수가 있어야지요."

"아니, 왜 그렇게 떨려? 공연히 그래?"

봉림은 바쁜 듯이 묻는다.

"모르지. 왜 그런지 공연히 그래진단 말이에요. 똑 무슨 호 랑이나 만난 것 같아요. 그래 그이가 나를 몰라 봐서 가만 히 돌아서서 들어와서는 동냥이 없다는 소리도 못하고 가만 히 있었지요. 자꾸 떨기만하고. 그랬더니 동냥을 달라구 소 리를 지르다 못해서 저절로 가겠지요."

순영은 한숨을 내쉰다.

"그래, 얼굴은 서로 봤어?"

"얼굴을 볼 수가 있었나요. 대문턱에 나가려다가 떨려서 두 루 들어 왔다니깐요."

"그러면 그이가 아우님 집인 줄 모르고서 왔을까?"

"알기를 어떻게 알아요. 그전에 살던 집 같으면 모르지만, 이사를 세 번이나 하고 문패가 있나 뭐 있나, 어떻게 알수 가 있나요?"

"그러니 그렇게 거지가 되어서 동냥을 달라고 하다가 동냥 을 가지고 나가서 둘이 딱 마주치면 어떻구, 아마 기가 막 히렸다. "

"에구, 그러기에 말이야. 딱 마주치면 그이보다 내가 더할 것 같아요. 그러기에 처음에는 보았으면 하고 돈을 가지고 나가다가, 딱 마주치게 될 만하니까 가슴이 내려앉고 몸이 떨려지는 게지. 그러니 딱 마주쳤으면 어떻게 될 뻔 하였어요?" 순영은 아직도 아슬아슬한 듯이 담을 쥐고 말았다.

"그러면 그게 분명한 수복이 아버진 게지. 나두 그렇게 보 고 아우님도 그렇게 보았으니, 둘이 다 잘못 보았을 리야 있다구?"

"글세요? 그렇지만 그이가 그렇게 되었었을 리야 있다구요? 나는 목소리만 듣고 뒷모습만 보았으니까 얼굴은 똑똑 히 모르지요. 그런데 만일 그이가 그렇게 되었으면 어떻게 하우."

순영의 얼굴빛은 다시 흐린다.

"어떻게 하긴 무얼 어떻게 해. 인제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 래, 딴 남이 되었는데, 그전에 살던 정리(情鯉)로 조금 안됐 기는 하였을까, 하지만 우리 같으면 그렇게 된 것이 도리어 고소할 것 같아. 자기에게 원혜를 끼친 아내를 아무 연고 없이 생나무 꺾듯이 잡아 떼고서 다른 계집하고 사는 그런 인종은 앙화를 받아야 싸지, 천도가 무심치 않아서 그렇게 된거에요. 그까짓 것을 불쌍히 생각하면 무얼 하우. 이 다음 에 오거든 나가서 날 버리고 가더니 요 모양이 되었느냐구 얼굴에다 침이나 뱉구 마우."

봉림은 신이 나는 듯이 말한다.

"에구, 언니두, 사람이 차마 어떻게 그렇게 하우?"

순영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할 테야? 도로 데리고 살 테야?"

"데리고 살지는 않더라도......"

"데리고 살지는 않더라고 어떻게 한단 말이야? 아랫목에 모셔 놓고 신주 위하듯 위할 테야?"

"에구 언니두."

"그런 소리는 말아요. 당장에 디리고 사는 남편이라도 그 지경이 되면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데, 벌써 이혼한 사내를 어떻다는 말이야. 아편 중독이라는 것은 막 가는 일이에요.

그것은 고치지도 못하고 사형 선고를 등에다 붙이고 다니는 것이라, 어느 때에 죽을는지 모르는 것이요. 목숨이 붙어 있 다니 오죽한다. 그야 말로 산 송장이지. 만일 그 사람을 아 는 체 했다가는 큰일 나지. 그 사람과 같이 되고 말 것인데, 아예 그 사람을 아는 체할 생각은 말아요. 다른 사람 같으 면 이러니 저러니 할 것이 없지만, 아우님이니까 친동생과 다름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에요. 아우님의 인자한 마 음으로 이런 것 저런 것 생각지 아니하고 또 그 사람을 아 는 체할는 지도 모르는 일이나, 그러면 둘의 신세를 다 망 치고 마는 것이에요. 그리고 보통 사람같이 죽이면 죽, 밥이 면 밥, 가만히 먹고만 있으면 오히려 모르지만, 이건 밤낮 먹을 것만 찾고 인에 몰려서 제때가 되면 곧 죽는대요. 그 래 무슨 짓이라도 하여서 아편을 먹든지 침이라도 맞아야 한다니, 그 노릇을 어떻게 하느냐 말이요. 생각만 해도 소름 이 끼치는 일이지 안 그러우?"

봉림은 친절한 태도로 말한다.

"아편에 인이 박이면 그렇대요. 어쩌면 사람이 그 모양이 될까."

순영은 간단히 말을 하고 한숨을 쉰다.

"아우님이 한숨을 치쉬고 내리쉬고 하는 것을 보니, 그래도 구 사람에게 대한 생각이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지?"

봉림은 반만 웃으면서 순영을 들여다 본다.

"그럼 어떻게 하우, 자꾸 불쌍한 생각만 나는데."

순영은 눈물이 글썽거린다.

"아우님, 그러지 말고 생각을 돌려요. 그러면 내가 할 말이 있으니, 깨어진 시루를 생각하면 무얼 한담. "

"할 말이 무슨 말씀이에요?"

순영은 새로운 정신으로 묻는다.

"할 말이 있지마는 아우님이 생각을 돌리지 아니하면 소용 이 없는 말이거든. "

"글세 무슨 말씀이에요?"

"말을 해야 아우님에게 이(利) 되는 말이지 해 되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듣지 않을 테면 말을 않는 것이 옳지. "

"말을 해봐야 알지, 들을지 안 들을지 어떻게 아우?"

"이건 그렇게 할 말은 아니야. 듣는다면 하구 안 듣는다면 입밖에 낼 소리가 아니거든. "

"글세, 말을 해 봐요."

"말을 하면 들을 테야?"

봉림은 의심스런 눈으로 웃는다.

"내가 이 되는 말이면 듣지."

순영도 웃는 모양을 짓는다.

"그럼 이로운 말이지 해로운 말일까?"

"글세 해봐요."

"정말 들을 테야?"

"정말 들을 테야, 이 되는 소리를 안 들을까 뭐."

"정말 듣는다고 그랬것다?"

"글세 들어요."

"그런데......"

하고 봉림은 얼굴빛을 고치고 진정한 표정으로.

"아까 그 사람은 그렇게 되었은즉 여망이 없는 사람이거든.

그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고 금광을 잘하고 있다면 또 몰 라, 그 사람 말마따나 돈이 많이 생기면 도루 와서 같이 살 는지. 하지만 그런대도 확실히 와서 같이 살는지도 모르는 일인데 사람이 저 지경이 된 바에야 터럭 끝만큼이나 다른 여망이 있을 수가 있나, 안 그러우?"

"사람이 그렇게 되었으면 무슨 여망이 있어?"

순영은 한숨을 쉬려다가 멈춘다.

"그러니 말이야, 그러면 아우님은 무엇을 바라고 사느냐 말 이야. 남편이 있나 자식이 있나, 무얼 바라고 사느냔 말이지." "바라기야 무얼 바라, 죽을 때나 바라지.'

"그러니 말이야. 그럴 필요가 없거든, 공연히 일생을 고생 으로 지낼 필요가 무엇이냐 말이야. 그것도 사람이 이만저 만하여서 잡힐 손이나 없는 것 같으면 모르지. 고생을 면하 려야 면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우님 같은 이야 백모로 보아도 고생할 자격이 아니거든 하니까 여러 말 할 것이 팔 자를 고치면 어떻까?"

봉림은 용기를 내는 듯이 힘있게 말한다.

"팔자를 고치다니요?"

순영은 누을 조금 크게 뜨고 봉림을 본다.

"팔자를 고친다는 말을 못 알아들어? 그렇게 고생하지 말 고 마땅한 데 가라는 말이지."

"다른 데로 시집을 가란 말이야?"

"그래, 시집을 가면 어때. 지금 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 사 람이 상당한 서방을 두고 다시 시집을 가는 것은 못쓰지만, 이혼한 바에야 시집을 열 번인들 못 가랴. 내가 띄어놓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마땅한 곳에 지수(指手)할 데가 있어서 말을 하는 게지. 생각해서 하라구, 그런일은 강원할 수 는 없으니까."

봉림은 기운을 눅인다.

"차차 생각을 해봐서."

순영도 간단한 말로 그 자리는 가리었다.

3.[편집]

순영은 마음이 어지러우며 여간 궁금하지 아니하였다. 동 냥 다니는 사람이 대철이 같은 것을 본 뒤로는 의심을 풀지 못하여 그 정체를 알아보려고 하던 중에, 봉림의 말을 들으 매 그 사람이 그 사람인 듯도 하나,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 도 대철이 그 사이에 그렇게 까지 되었을 리는 만무하고, 봉림의 말을 꼭 곧이듣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순영은 그 사람이 다시 오기를 기다려서 자세히 알아보려 하였으나 이삼 일이 지나도 오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조급 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봉림이 말하던 아편을 판다는 곳 을 가보기로 하였다. 순영은 그 사람을 만나보러 가면서도 자기만이 그 사람을 보고 자기는 그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 려고 주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얼싸 가려서 누가 보든지 자기인 줄을 모르도록 하고서도 오히려 고개를 숙이었다. 그러나 헐벗은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가 슴이 두근거리고, 거지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예사로 보이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바로 아편을 판다는 그 집 문앞 으로 가지 못하고 그 반대 방면인 중학동(中學洞) 어귀의 한 편에 가 서서 거의 눈만 내놓고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내왕은 많았으나 아편장이라고 볼 만한 사람 은 볼 수가 없었고, 거지 같은 사람도 있기는 있었으나 그 집으로 드나드는 것은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순영은 봉 림이 말하던 곳이 그곳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으나, 한편 으로는 봉림의 말이 것짓말이나 아닌가 하고도 생각되었다.

순영은 한 군데에 너무 오래 섰는 것이 남보기에 이상스러 울 듯하여서, 조금 씩 자리를 비켜 가면서 거의 한 시간 동 안이나 기다리다가, 저녁 때가 되어 감에 공연히 화를 내면 서 돌아서서 오다가, 물어나 보고 갈 양으로 도로 섰던 데 로 나갔다. 그러나 물어 볼 곳이 만만치 아니하였다. 의관한 사람이 나 순사를 보고 물을 용기는 없었다. 또 여러 사람 이 있는 곳에서 물을 용기도 없었다 그러자 큰 길 한 편에 구르마를 의지하여서 졸고 있는 늙수그레한 영감이 있어었다. 그 근방은 다른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여보세요?"

순영은 그 소리조차 떨리는듯 하였다.

"......"

졸고 있는 그는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말씀 좀 묻겠어요."

순영의 말소리는 조금 컸다.

"응."

하고 눈을 뜨는 그 손등으로 수염에 흘러내린 침을 씻으면 서 순영을 보더니,

"에이 피곤하기두,"

하면서 바로 앉는다.

"이거 보세요, 말씀 좀 묻겠어요."

"무슨 말씀이요?"

그 사람은 곤한 잠을 깨운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대답하 는 말이 무뚝뚝하다.

"저기 저게 무슨 집이에요?"

순영은 아편 판다는 집을 가리친다.

"어떤 집이요?"

"저기 저 집 말이요. 저기는 내자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 지요. 그 질 들어가는 첫 버리 남쪽으로 양옥집처럼 지은 저 집 말이에요."

"예 그 집이요? 그 집은 왜 묻소?"

하고 순영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아니 글세요."

순영은 얼굴이 화끈하여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집이 아편 파는 집이라우, 왜 아편 사실라우?"

"아니오, 그 집에 아편장이들이 많이 드나든다고 하기에 말 이애요."

"아편장이가 많이 드나들고말고요, 그게 아편장이 도회청이 라우. 왜 아편장이를 만날 사람이있소?"

"아니요, 글세 말이에요, 그럼 아편장이들이 저 속에 있나요?" "아니오, 아침 나절이 되면 보두 와서 아편을 사가지고 가 지요, 거기 있기는 왜?"

"그럼 아침 나절에만 오는 구요?"

순영은 아편장이를 볼 수 없는 이유가 저녁 때가 되어서 그러한 줄을 알아았다.

"그렇소, 그건 왜 그렇게 자세히 묻소 보아하니 침 받는 이 는 아닌데."

순영은 위로 안 좋아 보고 쌩하느라 돌아왔다.

이튿날은 순영이 일찌기 가서 어제 셨던 데에서 섰다가 다 른 사람들이 보는 데에 너무도 점직해서 저쪽의 경관 연습 소(警官縯習所) 모퉁이로 가서 수건으로 얼굴을 반이나 가리 고 섰다.

여덟시가 되면서부터 아편장이가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형 형색색이었다. 의 관을 그대로 하고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거지 행색이요, 얼굴은 모두가 파리하고 누른 빛 이 돌며, 혹은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형편이며 거기에 도 특색이 있는 것은 젊은 여자들이었다.

"저런 망할 것들이 왜 아편을 처먹기 시작하여서 저 모양 이 되었담."

"저것들이 지금은 저래도 처음에 아편 먹기 시작할 때에는 돈푼이나 있고 형편도 좋았었겠다. "

"저것들은 저러다가 며칠 안 있으면 다 죽지, 할 수 있나.

"

지나가는 사람들은 흘금흘금 보면서 서로 지껄이는 사람들 도 있는 중에

"저 지경이 되었어도 결심만 있으면 고치는 수가 있지마는 결심들이 있어야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순영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이라도 아편장이에 관한 말이 면 귀넘어 듣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대철이 아편장이가 되 어서 거기를 오지 아니하엿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하여 간 한 번 보았으면 하고 기다려지는 마음이 앞을 섰다. 순 영의 눈은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 못하였다. 내자동 쪽에서 오는 길을 보랴, 중학동 쪽이나 광화문동 쪽을 보랴, 때로는 고개를 돌려서 동심자인나 서심자각 쪽을 보랴 순영의 눈이 여간 피로하지 않았다. 순영이 중학동 쪽을 보다가 마침 마 차를 끌고 가다가, 노하여서 뛰어가는 말을 구경하느라고 조금 있다가, 눈을 돌려서 사직동 쪽을 보더니 어느 사이에 자기 앞에 바짝 가까이 와서 기침을 하면서 자기를 보는 사 나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사람이 곧 전일에 자기 집에 동냥 왔던 그 사람이었다. 순영은 이때까지 기다리던 그 사 람이었지만,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서 몸을 움찍하면서 거의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그 광경을 조금 유심히 보던 그 사람은 획 돌아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끼어서 그 집 문으 로 들어간다.

순영은 거기에 섰다가 그 사람이 나오는 것을 다시 볼 생 각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더 있을 용기가 없어서 조금 주저하다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돌아왔다. 순영은 이번에는 그 사람의 얼굴과 몸과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그 사람의 얼굴은 파리하고 누른 빛이 돌았으나, 모든 것으로 보라서 틀림없이 대철이었다. 의복 범절은 봉림이 말하던 것과 같이 참혹하지는 않았으나, 보통 사람의 차림이라고 볼 수는 없었고, 자기 집에 동냥 다닐 적에 입는 의복보다 는 나은 듯하였다 .그리하여 그냥 다닐 적에 입는 의복이 따로 있은 듯하였다. 그리하여 동냥 다닐 적에 입는 의복이 따로 있나보다고 까지 생각하였다. 순영은 아직도 대철이 그렇게까지 되었을 리가 있나 하는 의심과, 같은 사람도 있 는 것이거니 하는 좋은 편으로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그러 한 억지로 하는 생각을 빼어놓는다면 그 사람이 대철인 것 이 분명하였다. 수영은 공연히 그 사람이 자기인 줄을 알았 으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자기가 워낙 수건으로 얼굴을 많이 가려서 다른 사람이 좀처럼 알아볼 수가 없으 리라고 생각하면서 도, 그 사람이 자기를 보다가 갑자기 돌 아서서 가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자기인 줄을 안 듯도 하였다. 순영은 수건으로 아까 그만한 정도로 얼굴을 가리고서 거울을 보았으나, 자기로서도 용이하게 알아볼 수가 없어서, 다소 안심을 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면 그렇게 까지 다심스럽 게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우습기도 하였다.

4.[편집]

"편지 받으십쇼."

하고 들어오는 우체부는,

"장 순영이라는 사람 있습니까?"

하고 편지를 내민다.

"네."

하고 편지를 받는 순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순영은 편지 를 받아서 누구의 편진가 하고 봉투의 뒤쪽을 보았으나 거 기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혹은 대철이 아닌가 하고 도 생각하였으나, 대철이 자기 주소를 알 수가 없을 것으로 보아서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피봉의 글씨를 살펴보았으 나 수전증 있는 사람의 글씨처럼 꼬불꼬불 하여서 대철의 글씨 같지를 않았다. 순영은 피봉을 뜯어서 편지 사연을 보 기 전에 끝의 성명이 쓰인 것을 보았다. 순영은 갑자기 손 이 떨려서 편지까지 떨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대철의 편지로서 자기가 순영에게 대하여 잘못하였 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 허물은 다른 데로 돌려서 벌뺌을 한 뒤에, 자기는 이 년 전부터 병이 들어서 치료를 하는 중 인데, 고생이 자심하다는 말을 하고, 어쩌면 가서 볼는지도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순영은 그 편지를 보고서야 자기가 보던 아편장이가 대철인 것을 확실히 알아서, 억지로 하던 의심까지도 없어지게 되었다. 순영은 편지를 다시 보고서 대철에 대한 일들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철이 와서 볼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언제 올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따라도 온다든지 내일이라 모레나 언제 라도 쑥 들어온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혼을 하였 으니 관계가 없은즉 당장에 나가라고 냉과리령을 놓아서 내 어쫓을것인가, 좋은 낯으로 말해서 보낼 것인가, 그래도 부 득부득 대든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대로 받아들 여서 뒤치다꺼리를 하여 줄 것인가, 순영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것을 이지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이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일이라면 자연히 감정을 따르는 수밖에 없 는 것이었다.

그러자니 순영은 자연히 대철에 대한 과거를 생각하게 되 었다. 물론 대철이 바다에 빠진 자기를 건져 주던 일부터서, 자기를 지사위원(至死爲願)하여서 대철을 사랑하고 을 청하 던 일과, 대철이 자기의 을 좇아서 결혼을 한 뒤에 중대하 다면 중대하다고 할 수 있는 금광을 중지하고 반 년 동안이 나 자기를 포근하게 안아 주던 일을 생각하였다. 한때에 이 혼을 하자고술주정을 한 일이 있으나, 그것도 사세가 그럼 직하다고 생각하던 것이요, 차차 금광이 잘 되면 빚을 갚고 돌아와서 다시 살림을 하겠다는 말도 이때까지 잊지 아니하 고 있던 끝이라, 대철에게 대하여 그다지 악감을 가지지 아 니하였다. 다시 말하면, 순영이 대철에게 대한 사랑이라고 할까, 은혜를 갚는 마음이라고 할까, 어쩧든 대철에게 대한 은정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었다.

순영은 다시 생각하였다. 자기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원을 받은 뒤로 그 은혜 갚기를 언제든지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있었던 것인데, 대철과 결혼한 것으로는 은혜를 갚은 것이 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대철이 자기 아니면 장가갈 수가 없는 것을 자기로 해서 결혼 생활을 하게 된 것이 아니오, 자기뿐 아니라, 사랑으로 말하면 은혜를 갚는다는의미도 포 함이 되었으나, 하여간 대철이 자기를 사랑한 것보다 자기 가 대철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인즉, 그것 으로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볼 수가 없는 일이요, 돈냥을 보조한 것이 있으나 그것도 내외간이 된 이상 당연한 일이 요, 특별히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칠 수가 없는 일이어서 은혜를 갚은 시기는 단연 이때라고 생각하였고, 대철을 사 랑하는 것도 또한 이때라고 단정하였다.

5.[편집]

"여보세요?"

하고 찾는 소리가 문 밖에서 난다. 전등 밑에 바느질을 하 고 앉았던 순영은 듣고도 대답이 없이 바늘만 멈추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크다. 순영은 가슴이 덜컥하였다. 그 소리는 요전에 동냥 달라던 소리 같은 까닭이었다.

순영은 대답이 없어 마루에 나와 앉았다.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대문 안에 들어선 모양이다

"누구를 찾으세요?"

순영은 그게 대철인 줄을 칠분이나 알면서도 이렇게 말하 였다. 순영의 목소리는 떨렸다.

"여기 장 순영씨라고 계십니까?"

"어째 찾으시오, 누구세요?"

순영은 마루 아래에 내려섰다.

"나는 김 대철이라는 사람인데, 좀 뵐려고 그럽니다.

순영은 그 소리를 듣고 안 나갈 수가 없었다.

"누구세요?"

어두컴컴한 문간에서 거무스름하게 우뚝 선 대철을 보는 순영은 무섭기도 하고 불쌍도 하였다.

"나는 대철이요, 좀 들어가도 관계없소."

대철은 발을 옮기려 한다.

"아이 이게 웬일이세요? 들어오세요."

순영은 앞에서 인도한다.

"이런 거지가 이렇게 들어와서 미안합니다. "

대철은 방에 들어와서도 선뜻 앉지 않는다.

"아! 그런데 저게 웬 일이세요?"

순영은 선 채로 머뭇거리다가 말한다.

"죄가 많은 놈이 이렇게 되는 거지요."

대철은 두 손을 허리에 깍지 끼고 방안을 둘러본다.

"이리 앉으세요."

순영은 아랫목으로 인도한다. 대철은 앉는데도 신고(辛苦) 하고 앉는다. 순영은 왼편으로 앉았다.

"그런데 어떻게 저 모양이 되셨어요?"

순영은 얼굴을 찡그리고 대철을 본다.

"일전에 편지 보았지요?"

대철은 묻는 말에 대답지 않고 편지를 묻는다.

"보았어요."

순영은 가엾은 기색으로 말한다.

"편지에도 말했지만 병이 들어서 이 모양이 되었소."

"무슨 병이기에 그렇게까지 되셨어요?"

"처음에는 울화로 난 병이 차츰 도져서 이 모양이 되었소.

그리고 병을 고치려다 더 병을 얻어서 이제는 죽게 되었소."

대철은 기운이 없는 한숨을 쉬면서 다리를 뻗는다.

"무슨 병이기에 그렇게 기운차고 씩씩하던 몸이 저 모양이 되었을까? 술 자시고 몸을 너무 헤피 가져서 그런 게지요."

순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기 시작하더니 수건으로 눈을 가 리고 느껴가며 운다. 대철도 코를 훌쩍거려 가며 운다. 두 사람의 울음은 한참 동안 계속 되었다.

"그런데 수복이는 어디 갔소?"

먼저 울음을 그친 대철은 거의 울음을 그쳐 가는 순영에게 묻는다.

"수복이요?"

순영은 말을 이루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울다가,

"죽었어요."

하는 순영의 소리는 말보다 울음이 많다.

"죽다니?"

대철은 다시 울기 시작한다.

"그때 바루 죽었어요."

순영은 울음을 그치려고 하면서 말을 하고서 우는 대철을 만류한다. 대철이 다소 진정한 뒤에 순영은 수복이 죽던 이 야기를 대강 하였다.

"그럼 그것도 내가 죽인 셈이지."

대철은 한숨을 길게 쉬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두팔 을 짚고 일어나려는 자세를 취한다.

"그거야 제 명이 짧아서 죽었지, 그렇다구 죽었겠어요?"

하고 순영이 위로하는 말에 대철은 제풀에 다시 울다가,

"에구 가야지."

하고 두 팔을 짚고 일어나려는 자세를 취한다.

"어디로 가세요?"

"어디로든지 가야지."

"지금 어디 계세요?"

"이 모양이 된 놈이 있는데가 있을 수가 있나, 가는 데가 내 집이지."

대철은 도로 주저 앉는다.

"그런데 병은 무슨 병이에요?"

순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묻는다.

"처음에는 하치도 않던 병이 병을 고치려다가 약이 병이 되어서 좀처럼 고치는 수가 없소."

조금 주저하다가 대답하는 대철은 어름어름하고 병을 분명 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자 대철은 졸연히 눈이 거슴츠레해 지고 콧물이 흐르면서 정신 잃은 사람처럼 멀거니 앉았더 니, 갑작스레 조끼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 자기 손으로 자 기의 왼팔에 주사를 놓는다. 대철의 팔은 마마하는 사람처 럼 빈 틈이 없다.

"그게 뭐에요?"

순영은 대강 알면서도 얼굴을 찡그리고 묻는다.

"이게 약이요."

"무슨 약이 그래요?"

"이게 약은 좋은 약인데 아편과 같은 약이요."

"아편과 같은 약이에요?"

순영은 새삼스럽게 놀란다.

"그렇소."

대철은 천연스럽게 대답한다.

"아편은 사람이 먹기 시작하면 큰일난다는데........."

"큰일은 무슨 큰일, 우리같이 돈이 없는 사람이 어렵지 돈 있는 사람들이야 어려울 것 있나, 약이야 휼륭한 약이지. 이 것 봐요, 아까는 콧물이 흐르고 기운이 없더니, 주사 한 대 를 놓으니까 당장에 운권천청(雲倦天請)이 아니오? 약이야 선약(仙藥)이지."

대철은 팔을 내밀고 얼굴을 든다.

"딴은그런데요."

순영은 아까보다 생기가 도는대철을 보고 신기한 듯이 얼 굴을 펴더니,

"그래도 그게 인이 박이면 떼기가 어렵다는데요?"

순영은 다시 걱정스럽게 대철의 말을 곧이 듣지 않는다.

"땔 수가 업는 것도 아니지. 결심만 있으면 떼기도 쉬운 건 데 결심이 부족하여서 고생들을 하는 거지, 나는 이 모양으 로 돌아다니니까 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어디든지자리만 잡아 앉으면 얼마 안 돼서 뗄 수가 있지만......"

대철은 자기도 모르게 아편에 인이 박인것을 자백하고, 그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편안히 자리를 잡아 있지 못하는 핑계를 말하였다.

"그럼 어디든지 자리를 잡고 계시면 고칠 수가 있다는 말 씀이에요?' 순영은 수수께끼를 개치는 듯이 묻는다.

"암 그렇지요."

"그럼 지금은 정처가 없어요?"

"정처가 무슨 정처요?"

"그럼 어디서 주무세요?"

"온 천지가 다 내 집이지요. 그야말로 하늘로 이불삼고 땅 으로 자리삼고 그렇게 삽니다. 그러기에 병을 고치치 못하 고 이러고 다니지요."

대철은 정처가없어서병을 고치지 못한다는 말을 거듭하였다. "에구, 저를 어쩌나, 그럼 한데서 주무세요?"

순영은 불쌍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태도를 보인다.

"......."

대철은 한숨을 길게 쉴 따름이다.

"그럼 저녁은 어떻게 하셨어요? 잡수셨어요?"

순영은 잊었던 것을 생각난 듯이 묻는다.

"아침이니 저녁이니 때를 찾아서 먹는 것은 잊어버린 지가 오래요, 그저 닥치면 먹고 없으면 못 먹고 그렇지요."

대철은 손으로 배를 만진다.

"잡수시기는 아무 거라도 관계 없어요?"

"먹기는 뭐든지 없어서 못 먹지요."

"에구, 그럼 아직 저녁을 못 잡수신 게로군요. 아무거나 조 금 잡수셔야지요."

순영은 일어나서나간다. 대철은 아무 말도 없이 앉았다. 조 금 있다가 순영은 음식을 차려가지고 들어오더니,

"우선 시장하신데 아무거나 좀 잡수세요."

하고 공손히 권한다.

"이게 웬 좋은 음식이 이렇게 있어요."

침을 삼켜 가면 고깃국과 전유화(煎油花) 나무생 등을 들러 보고 대철은 의외인듯이 눈을 크게 뜨고 순영을 바라본다.

"오늘 마침 생일집에서 가져온 것이에요. 밥도 찬밥이고 하 지마는 그대로 잡수세요."

순영은 어느 새 받아온 술을 따라서 권한다.

"아닙니다. 나는 병이 난 뒤로 술을 못 먹습니다. "

대철은 손을 내젓는다 .

"조금만 잡수시지요.' 순영은 술잔을 더욱 높이 든다.

"아닙니다. 입에도 못 댑니다. 밥이나 먹지요."

대철은 모조리 먹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상을 비운다. 걸 차게먹는 대철을 보고 앉았던 순영은 전날에 기운차고 씩씩 하던 대철의 풍모를 방불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잘 먹던 술을 한 잔도 못 먹게 된 것은 병세가 얼마나 깊게 된것 이라든지, 본래도 먹성은 좋았지만 그렇게 며칠을 굶 은 사람처럼 먹는 것은 얼마나 굶주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 어서, 여러 가지고 감상이 잉러나면서, 그렇도록 씩씩하여서 수영을 할 때에는 서해 바다라도 단 숨에 건너갈 듯하던 그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되었으며, 억센 팔과뜨거운 마음으로 밤새도록이라도 자기를 안아 주던 그 사람이 어쩌면 저 지 경이 되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매, 세상이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고 사람이란 하잘것이 없다는 무상한 생각도나며, 홀연히 측은한 마음이 움직여서 돌아앉으면서 눈물을 씻게 되었다.

"어! 참 잘 먹었다 어디 몸 담아 있을 데나 있고 먹을 도리 나 있으면, 이놈의 병을 고칠 수가있겠지만 그럴 수가 있어 야지. 저런 아내를 박대한 놈이 이런 앙화를 받아야옳지."

대철은 혼잣말처럼 하고서 한숨을 짓는다 그러지 않아도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이 나더 ㄴ순영은 그런 소리를 들음에 될수 있는 대로 그 사람을 구원하여서병을 고쳐 주고 싶었다. 전일의 은혜도 은혜려니와 당장에 보는 바에 마음이 그 렇게 움직였다. 그것은 무슨 목적을 바라는 공리심으로서 가 아니라, 자연히 그렇기 생각이 되었다.

"그러면 지름 이라도 계실테만 있으면 병을 고치시겠어요."

순영은 정답게 묻는다.

"아! 고칠 수가 있고 말고요. 한데서 풍한서습(風寒署濕)에 고생이나 아니하고, 죽술간이라도머을 수만 있으면 고치고 말고요."

대철은 반갑게 대답한다.

"그런데 병을 고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얼마가 될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쉽게 고칠 수가 있겠 지요. 고친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한달에 고친 사람도 있고, 두 달 석 달 만에 고친 사람도 있고, 대중이 없더군요. 하지 만 결심할 탓이니까, 결심만 굳게 하면 얼마 안 되어도 고 칠 수가 있겠지요."

대철은 결심 있는 테도를 보인다 그 말을 듣는 순영은 다 시 염려가 된다. 한 달이나 두 달 같으면 무슨 짓을 하더라 도 애철의 뒤치다꺼리를 해 주겠지만, 만일 오래 간다면 어 떻게 뒤를 대나 하는 것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었다.

6.[편집]

밤은 차차 깊어간다. 순영은 대철에 대한 일으 ㄴ결정한 바가 있어서, 더 말할 것이 없다는 듯이 다른 마을 묻기 시 작하였다.

"그런데 이 집을 어떻게 아셨어요?"

이것은 이때까지 궁금하던 일이었다. 며칠 전까지 대철이 그 집으로 동냥을 왔을 때에는 그 집이 뉘집 인지 몰랐던 것인데, 불과 수일 동안에 어떻게 알고서편지도 하고 찾아 왔는가 하는 것이 처음부터 의심이 되었으나, 그 사이에는 물을 틈이 없었다.

"아는 수가 있지요."

순영의 모든 태도를 보고서 만족하게 생각하는 대철은 빙 긋이웃는다.

"누구한테 물으셨어요?"

"아니."

"그럼 어떻게 아셨어요? 그전부터 아셨을 수는 없구."

"그전부터야 어떻게 알 수가 있나."

"그러기에 말이에요, 어떻게 아셨어요?"

"며칠 전에 해태 앞에서 사직골 쪽으로 가는 길 모퉁이에 오신 일이 있었지요?"

"거기를 갔던가? 거긴 간 것을 어떻게 아세요?"

순영의 얼굴은 붉어진다.

"그때의 거기는 무엇하러 가서 그렇게 서 있었어요?

대철은 자기의 의심나던 것을 묻는다.

"아니, 어째 갔던지, 그것을 어떻게 보셨어요?"

"그때 나를 못 보셨지요?"

"어떻게 볼 수가 있어요?"

어름어름 하다가 대답하는 순영은 기색이 자연스럽게 못해 진다.

"나는 그때에 당신인 줄을 알았어요. 그때 당신이 수건으로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었지?"

"그랬던가 모르지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으면 어떻게 아 셨어요?"

"순영씨가 얼굴을 반은 고사하고 온통 가렸더라도, 몸뚱이 만 보인다면 몸뚱이 전부는 고만두고 어느 한 부분만 보인 대도 모를 리가 있나요. 순영씨는 나의 전체를 보고서도 몰 랐지만 나는 순영씨 발꿈치만 보아도 알 수가 있지요."

대철은 감개 무량한 듯이 얼굴빛을 고친다.

"그때 보셨더라도 어떻게 집을 아셨어요?"

"그대 곧 뒤를 따라왔지요."

대철은 다시금 부끄러운 빛을 보인다.

"네. 그러세요."

순영은 그 말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아니하고 조금 있다 가,

"그런데, 참 그것은 어찌 되었어요?"

하고 요령없이 묻는다.

"무엇 말이요?"

"지금 사시는 집은 어디에요?"

"집이 무슨 집이요, 집이 있으면 이렇게 다닐리가 있나요."

"그럼 살림은 어떻게 하세요?"

"살림이 무슨 살림이요?"

"그럼 그 여자는 어디 있어요?"

"그 여자라니, 그 전에 말썽 많던 여자 말이요?"

"자, 그 말은 우리 그만 둡시다. 그 말은 한다면 당신도 듣 기 에 안 됐을 거구, 나도 병이 더할 모양이니까, 그 말은 입밖에 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

하고 한숨을 쉰다. 순영은 더 묻지 않고 있다가,

"그럼 그 금광은 어찌 되었나요?"

하고 생각나던 일은 다 물었다.

"금광이요?"

하고 한참 앉았던 대철은,

"금광은 그대로 있지요."

하고 더 말하기를 즐기지 않는다. 순영도 거기에 무슨 기 대를 가지고 물은 것이 아니요, 다만 궁금하여서 물었던 것 이라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오늘은 먹기는 잘 먹었거니와 가지는 또 어디 가서 자나."

하고 일어나려는 차세를 취하면서도 선뜻 일어나지 못하는 대철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던 순영은,

"여보세요."

하고 기침을 가볍게 한다.

"네."

대철은 무슨 기대를 가지는 듯이 고개를 든다.

"가시면 어디로 가시겠어요?"

"갈 곳은 없지만 안 갈 수도 없는 것이 아니요?"

"얼마만 치료하면 병을 고칠 수가 있다믄요?"

"치료만 하면 고칠 수가 있지마는, 치료를 하는 수가 있나요?" "다른 데 가서 더 잘 치료하실 데가 있으면 모르지만, 정히 가실 데가 없으면 치료하시는 동안 내게 계시지요."

순영의 얼굴엔 크게 결심한 빛을 나타낸다.

"고마운 말이오만 그렇게 할 수가 있나요. 무슨 염치로 치 료까지 하고 있을 수가 있소?"

대철은 다행히 여기는 듯하면서도 부끄러운 빛을 띤다.

"얼마만 치료하면 병을 고칠 수가 있다는데, 치료를 못하고 서 병이 점점 더치면 되겠어요? 내게 계시면 의복이나 음식 이나 치료하는 범절이 여벌할 수는 없지만, 정성대로는 하 여 드릴 테니 조금도 미안히 생각하지 마시고 치료나 잘하 셔서 아무쪼록 병이 속히 낫도록 하세요. 아편에 인 박힌 것은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뺄 수가 있다는 것을 다 들었어요. 하니까 속히 병을 떼도록 하세요. 그런데 내게 계시는 동안에 힘대로 공궤(供饋)는 하여 드리지만 그전처럼 내외관 계로는 생각지 마세요. 나는 조금이라도 남편이 그리워서 당신을 남편으로 대접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목숨은 당신의 은혜로 오늘날까지 부지하는 것이니까, 당신이 저 모양이 되신 바에야 내가 모르는 체 할수가 없으니까, 당신 때문에 살아난 목숨이 당신을 위하여 죽기로니 무엇이 한 되겠어요. 나는 지금이 당신의 은혜를 갚을 때가 되었어요.

나는 나의 있는 힘을 다하여서 도와 드릴 테니 치료나 잘 하세요. 그리고 내외 관계로는 조금도 생각하지 마세요. 오 늘 저녁부터도 각방에 거처를 할 터이니 그리 아세요."

순영은 마치 어른이 어린 아이를 훈계하듯이 친절하게 말 한다.

"나 같은 놈은 죽어도 좋지요. 치료가 무슨 치료요. 그만 두세요."

대철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화를 낸다.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병이라는 것은 고치 면 고만이 아니요. 하니까 내게 계시는 것은 조금도 관계하 지 마세요."

순영은 조금 있다가,

"우선 옷을 갈아 입으셔야지요."

하고 일어나서 웃목에 나란히 놓여 있는 석유 궤짝으로 만 든 옷상자의 하나를 열고서 찾아보더니,

"이것은 여름옷뿐이로군."

하고 다른 상자를 열고서 뒤적거려서 겉옷 한 벌을 꺼내다 가 대천의 앞에 놓으면서,

"이것을 갈아 입으세요. 그전에 입으시던 것을 빨아서 두었 던 것이에요. 그대로 두었더니 임자를 찾아가는 때가 있군요. 어서 갈아 입으세요."

하고 밖으로 나가더니 건넌방에 쓰레질을 하고 안방 문 밖 에 솨서,

"옷을 갈아 입으셨어요?"

하고 문을 열지 않다가, 갈아입었다는 대철의 대답을 듣고 서야 문을 열고 들어와서, 벗어놓은 대철의 옷을 개어서 문 밖에 내놓고 이부자리를 깔아주고,

"안녕히 주무세요, 주무시다가 무슨 일이 있거든 조금도 어 려워 마시고 부르세요. 물도 웃목에다 떠다 놓았어요."

순영은 조그마한 이부자리를 가지고 불도 없는 건넌방으로 건너간다. 시계는 자정을 치는데 일기가 사나와서 비가 오 기 시작한다.

7.[편집]

대철이 순영에게 있은 지도 달포가 되었다. 순영은 대철의 별을 고치기 전에 우선 다소간이라도 원기를 회복시키기에 힘을 썼다.

"곰국을 후련하게 좀 먹었으면...."

"연한 살코기나 염통 같은 것을 구워 놓고서 실컷 먹었으면....."

"좋은 과자나 실과를 사다 두고 장복하였으면 좋겠는데.' 그외에도 무엇이든지 먹는 타령을 하는 것이 대철의 입버 릇처럼 되었다. 순영이 모르핀을 대는 것은 물론이지만 대 철이 먹을 것을 찾을 때에는 그 사리에 얼마나 굶주렸으면 저럴까 하는 가엾은 생각으로 디ㅗㄹ 수 있는 대로 수응을 하였다. 그러나 대철의 요구는 갈수록 더할 뿌닝요, 조금도 감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하여 순영오 대철이 먹을 것을 찾 는 것은, 그 사이에 굶주린 까닭이 아니라 아편장이의 버릇 인 줄을 알았다. 그러나 먹을 것을 한 번 찾고 두 번 찾고 세 번 네 번..... 자꾸자꾸 말하는 때에는 안타깝고 성이 가 시나 안 사다 줄수가 없었다.

"인제 원기 회복도 어지간히 되고 하였으니, 차차 병을 고 칠 도리를 하여 보시지요."

순영이 이따금 말을 하면,

"원기가 확실히 회복이 된 뒤에 차차 고쳐야지, 단번에 마 른 나무 꺾듯 하다가는 병을 고치지도 못하고 사람만 결딴 나는 것이요. 하니까 차차 봅시다. "

대철은 어떻근 천연하기를 일삼는다.

"의사의 말도 그러하고 다른 사람들 말도 그러는데, 소복도 해야 되고 약도 먹어야 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 일이니까 주사 맞는 도수를 줄이라고요. 하루에 다섯 번을 맞던 것이면 처음에 한 대를 줄여서 네 대씩 맞고, 얼마 있 다가 또 한대를 줄여서 세 대씩 맞고, 또 얼마 있다가는 두 대씩만 맞고, 그 다음에 한 대씩 맞다가는 아주 안맞게 되 면 완전히 고쳐지는 것이라고 그러더군요. 주사 맞는 도수 를 줄이지 않으면 약을 암만 먹어도 소용이 없다구요. 그러 니까 오늘부터라도 주사 맞는 도수를 줄이세요. 그 사이에 는 주사 맞는 도수가 줄기는 커녕 늘지 않았어요? 요전에는 보다시피 신체가 너무 쇠약하여 원기를 회복시키기로 주장 을 하여서 그런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원기도 그 전보다는 회복이 되었은즉 차차 병을 고쳐 보실 도리를 하 시지요."

순영이 진정으로 권하면,

"가만히 계시오, 얼마간 더 지내 봅시다. 낸들 생각이 없겠소? 내가 병든 사람이니까 마음이 더욱 졸이고 고치는 묘리 도 더 잘 알겠지요. 이 병은 다른 병과 달라서 그렇게 갑자 기는 고치지 못하는 병이니까요."

대철은 말을 하다가 말하기가 귀찮으면 팔로 얼굴을 가리 고 드러눕기가 일쑤였다.

"이것 보세요, 처음에 말씀할 때에 속히 고치면 한 달이면 될 수가 있고, 그렇잖으면 두 달이나, 아무리 늦더라도 석 달이면 넉넉히 고칠 수가 있다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한데 지금 벌써 두달이나 지났으되 고치기 시작도 아니하였으니 될 수가 있어요? 하루 바삐 고쳐서 완인(完人)이 되셔야지요. 오늘부터는 한 대씩 줄이세요."

순영이 이렇게 하기를 몇번이나 하여도 대철은 무슨 핑계 를 하든지 잘 듣지 아니하다가 하루는,

"여보, 순영씨."

하고 정답게 부른다.

"네?"

순영은 또 주사약을 달라든지 무슨 음식을 달라는 것이 아 닌가 하고 가까이 갔다.

"인제 내가 여기 와 있는 지도 벌써 석달이 되지 않았소?"

대철은 수슨 문제를 꺼내듯이 말한다.

"그렇지요."

순영은 무슨 소리를 하려나 하고 대답을 하면서 말을 기다 린다.

"그러니 무한정으로 이렇게만 있을 수 있나요. 나도 병을 고쳐 보아야 할 터인데, 병을 고치려면 물론 먼저 소복을 해야 되는 것인데, 여기 와서 당신의 덕으로 그전에다 대면 소복은 맣이 된 셈이나, 그렇게 음식만 가지고는 충분한 소 복이 되지 못하는데."

하고말을 맺는다.

"음식뿐이에요, 약도 잡수시지 않았어요?"

"응, 약도 먹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단 말이요."

"그럼 어떻게 하여야 소복이 되나요?"

"글세, 쉽게 소복되는 수가 있지마는 말하기가 어렵소."

"어려울 것이 무엇 있어요? 말씀하세요."

"말하기야 쉽지만 돈이 드는 일이라 어렵거든요."

"뭐에요? 말씀하세요, 돈이 아주 많이 드는 일이라면 모르 지만, 웬만하면 무슨 짓을 하든지 해 보지요."

"그렇게 수월히 맣이 드는 일 같으면 말할 리고 없지만, 그 다지 많이 드는 것도 아니지요. 그저 주사값보다는 많이 들 지요."

"그럼 말씀하세요, 쉽게 된 테면 해 보지요."

"소복을 쉽게 하려면 검은 약을 먹어야 되지요"

"검은 약이 무엇이요?"

순영은 이상한 듯이 묻는다.

"검은 약이라고 있어요. 그것이 정말 아편인데 요새 주사맞 는 것은 그게 정말 아편아 아니오. 주사약은 아편을 조금 섞어서 만들 것인데, 그것은 할 수 없어서 맞는 것이지 될 수만 있으면 정말 아편을 먹어야 되는 것이요, 나도 처음에 는 검은 약을 먹다가 나중에 할 수가 없이 되니까 주사를 맞기 시작한 것이요."

"그러면 검은 약이라는 것은 더 독할 것이 아니에요."

"더 독하기에 약이 되는 것이지."

"더 독한 것을 먹으면 인이 더 박일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고도 하겠지만, 이것은 길래 먹자는 것이 아니라 잠 시 소복하기 위하여 먹자는 것이니까 관계가 없지요."

대철은 말을 더듬다가 군색하게 대답한다.

"그럼 그 약은 어디 있나요?"

순영은 쉽게 병을 고칠수 있다는 데에 귀가 솔깃한다.

"그것은 있는 데가 있지요. 드러내놓고 파는 것이 아니니 까, 아는 사람이라야 알지요."

"그러면 그 약은 얼마치나 사면 돼요?"

"그것은 한꺼번에 돈이 많이있어도 좋지마는 그렇지 못하 면 하루에 이 원 가량이라도 될 수가 있지요."

"하루에 이 원이요?"

"그렇지, 이 원이 좀 안 들어서라도 될 수가 있겠지요. 그 것은 한정이 없는 것이니까 많이 들일수도 있고 적게 들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대붕이 없지요."

대철은 순영이 어려운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서 말을 돌린다. "그러면 일 원이라도 될 수가 있을까요?"

"일 원은 안 됩니다. 최소 한도로 일원 오십 전 이상이라야 되겠지요."

대철은 애원하듯이 빌붙는다.

"일 원 오십 전 이상이요?"

순영은 머리를 숙이고 자기의 시재(時在)를 한참 생각하여 보다가,

"그럼 그렇게라도 해 보세요. 하여간 병은 고쳐야 되겠으니 까요. 그러면 오늘부터라도 다녀 보세요."

순영은 쾌히 허락하였다.

십여 일 후의 일이었다.

"여보 주인 계시우?"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순영의 집 안마당으로 들어서더니 안 방 문 앞까지 바짝 대어서는 사람이 있다. 건너방에서 바느 질하기에 잠착하고 있던 순영은 별안간 놀라서 잡았던 자 (尺)를 놓치면서 내다보았으나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굴 찾으세요?"

순영이 거의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집 주인 찾소."

"왜 그러세요?"

"당신이 주인이요?"

"네, 네가 이 집에 사는 사람이에요."

"나는 다방골서 왔소."

"다방골서요?"

"네."

"어디서 오셨던지 주인을 찾으려면 문 밖에서 찾을 일이지, 아무 말도 없이 남의 집 안방 문까지 들어오세요? "

"네 그럴 듯도 한 말이요. 하지만 나는 이렇게 들어올 만하 여서 들어왔소."

"어째서 그래요?"

"다방골서 왔다면 알겠지요?"

"나는 모르겠는데요."

"몰라요?"

"네."

순영의 기색은 불쾌하였다.

"모르다니?"

그사람은 험상궂게 생긴데다가 눈을 부리댄다.

"모르기에 모른다지요. 그러면 당신이 나를 한 번이나 보셨소?" "대관절 이 집이 뉘 집이요."

그 사람은 건넌방 문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왜 그러세요?"

순영은 그제야 그 사람이 어째서 온 사람인 것을 알아차리 고서 기운이 숙어진다.

"왜 그러다니? 이 집이 당신이 돈을 주고 사서 사는 집이요? 셋집이요?"

"셋집인데요."

"셋집이야, 셋집이라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전세집이요 삭 월세집이요?"

"삭월세 집이에요."

"삭월세집이면 셋돈을 다달이 내기로 했소 그렇잖으면 일 년 이나 이태 만에 한 번씩 내기로 했소? 삭월세는 삭월세 라도 돈은 안 내고 거저 살기로 했소? 대관절 어떻게 된 심 판이요?"

그 사람의 기색은 더욱 흉악하여진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셋돈은 다달이 내기로 했지요."

"다달이 내기로 했으면 다달이 냈소?"

"그 사이는 늘 잘 내다가 몇 달 동안은 무슨 연고가 있어 서 못 냈어요."

"몇 달을 못 냈단 말이요?"

"아마 석달 치를 못 냈나봐요."

"석달 치는 왜 안 냈단 말이요?"

"안 낼래서 안 낸 것이 아니라 공칙한 사정이 있어서 못 냈어요."

"공칙한 사정이 있어두 당신의 사정이지, 집 임자의 사정은 아니지요. 지금 세상에 삭월세 돈을 한 달도 들일 수가 없 는데 석 달씩이나 안 내고도 뻔뻔스럽게 안마당에 좀 들어 왔다고 말을 한다. 그렇게 경우가 바른 이가 왜 삭월세 돈 은 것 달씩이나 안 내나?"

"그렇게 말씀할 것이 아니에요. 그전에 삭월세 받으러 다니 시던 분이 아니고 낯모르는 양반이 오셨으니까 누가 아나요? 그래서 그런 것이지요. 어찌 생각하지 마세요."

순영은 미안한 태도로 사과하듯이 한다.

"그전에 다니던 김 선달 말이지요.""

"모르지요, 김 선달인지 누군지, 그저 얼굴만 알 뿐이지 누 군지 아나요."

"그 사람은 당신네 집에 자주 다녀서 당신하고 매우 친한 겝니다. 그려. 그 사람은 당신의 사장만 보지 집세는 받아오 지 않는 고로 내가 대신 왔소. 왜 똑 그사람이라야 소용이 되오?'

"아이 망측해라.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그이가 나하고 친 하긴 무엇이 친하며 사정은 무슨 사정을 본단 말이요? 돈을 받으러 왔으면 돈 말이나 하지 왜 그런 말씀을 하신단 말이 에요. 없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업신 여기지 마세요."

순영의 기색은 조금 날카로왔다.

"당신 헛 갓장이 모양으로 남의 말을 트집만 잡기로 작정 히요그려. 당신이 여러 말을 하니까 나도 여러 말이지. 당신 말마따나 돈 받으러 온 사람이 돈만 받아 가면 고만이지 여 러 말할 것이 있소? 돈이나 내 놓으시오. 나도 바쁜 사람이 니까 얼른 가야 되겠소."

그 사람은 먼지도 안 묻은 손을 털면서 먼 하늘을 본다.

"그렇게 말씀할 것이 아니에요? 하니까 고만 두세요. 집세 는 속히 해서 드릴 터이니 며칠만 참아 주세요."

순영은 당장에 돈을 내라는 말에는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 사람에게 빌붙는 수밖에 없이 되었다.

"아니오, 당신같이 이런 경우 잘 따지는 이가 왜 남의 집세 를 석 달 넉 달씩 안낸단 말이요? 나는 더 참을 수 없으니 당장에 내시오."

그 사람은 밭은기침을 하면서 한 다리를 버티고 선다.

"없는 돈을 당장에 어떻게 내놔요? 세상 없어도 며칠 후에 는 변통해서 드릴 테니 염려 마세요. 나도 구차는 해도 남 의 집세를 떼먹을 사람은 아니에요. 그전에는 한 달도 걸른 일이 없어요. 그믐날이면 똑똑 드리지요. 요새는 공직한 일 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어요. 날마다 집세를 해 드려야 할 테인데 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미안하지만 며칠 만 더 참아 주세요."

순영은 애원하는 태도를 보인다.

"네, 우리도 대강 그런 줄을 아우. 한데 당신 그전에는 혼 자 살았지요?"

"네."

"지금은 혼자가 아니지요."

"지금도 혼자지요."

순영은 이상한 눈으로 그 사람을 본다.

"혼자가 다 뭐요? 세상이 다 아는데. 그리고 그걸 숨길 것 이 뭐요? 과부가 남편 얻어 가지고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인 데, 한데 남의 말을 할 것은 없소마는, 허다한 남자에 왜 하 필 그런 하이칼라 양반을 골라 잡았단 말이요?"

그 사람은 웃는 듯한 기색으로 순영을 본다.

"그게 다 무슨 말씀이세요?"

순영은 그 사람의 말본새에 여간 창피하지 않아서 당장에 책망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하고 속만 끊었다.

"그럼 그 이상 더한 하이칼라가 어디있소? 모르면 모르되 그런 하이칼라는 매일 적어도 몇 원씩은 삭여야 될터이니, 그런 하이칼라가 어디가 있담. 당신도 그 뒤치다꺼리하기에 집세도 못 내는 것이 아니요?"

그 사람은 순영이 새로 아편장이남편을 얻은 줄로 알고서 하는 말이다.

순영도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처음 보는 남자로서 남의 여자에게 그런 ㅁ라을 하는 것이 대단히 무례한 일인 줄을 알면서도, 그 사람이 당장에 돈을 내라고 조르는 판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로 보아 족히 탓해서 말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마음은 여간 괴탄하지 아니하였다. 순 영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하여야 옳을지 몰라서 얼굴을 붉히 고 주저하는 중에 마침 아편을 먹으러 갔던 대철이 들어온다. 대철가 그 사람은 서로 쳐다보다가,

"댁이 주인이요?"

하고 그 사람은 퉁명스럽게 묻는다.

"왜 그러우?"

대철은 마루로 올라가면서 대답한다.

"물을 말이 있으니까 묻는 거요."

"주인이라면 주인이고 아니라면 아니오."

"이게 무슨 말이요? 주인이라면 주인이고 아니면 아니지, 주인이라면 주인이고 아니라면 아니라면 아니라는 소리가 무슨 소리요?"

그 사람은 시비나 걸듯이 말해온다.

"아니 여보, 내가 주인이든 아니든 댁에서 무슨 관계가 있 으며, 물으면 곱게 묻지 못하고 당장에 시비나 할 듯이 달 겨드니 무슨 행위요?"

대철도 상기가 되면서 눈을 부라린다.

"아니 고만두세요. 마음이 불안하여서 상기가 되면 병에 해 롭다는데요. 고만두세요."

순영은 마루로 나가면서 대철을 만류하면서 방으로 들여보 내고 나서,

"나보고 말을 하면 나보고 말을 하지 왜 다른 어른을 보고 말을 하세요? 그 어른은 집세에 대해서 아무 관계가 없는 어른인데, 그 어른이 병환이 계셔서 지금 치료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화를 내시면 병환이 더치기가 쉬워요. 그 어른보 고는 아무 말씀도 마세요."

하고 그 사람에게 사정을 한다.

"그럼 어서 돈이나 내오."

그 사람은 못마땅한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 는 듯하더니 인심이나 쓰는 듯이 말한다.

"지금은 없어요. 속히 변통해서 드릴 테니 그리 아시고 가 세요."

순영은 대철의 마음을 불안케 할까 염려하여서 말 소리를 부드럽게 한다.

"안돼요, 지금 내시오. 가서 변통해 가지고 오시오. 나는 예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몇 날 몇일이라도 받아 가지고야 가겠소."

그 사람은 걱정 말소리를 피우면서 그대로는 좀처럼 가지 않을 기셀르 보이다가, 가까스로 사정하는 순영을 어쩌지 못하는 듯이,

"그럼 언제쯤 낼 테요? 꼭 장정을 하시오."

하고 얼굴빛을 조금 순탄하게 갖는 듯 하더니,

"한 달 후에는 그 사이에 밀린 것을 다 드릴테니 그리아세요." 하는 순영의 말을 듣더니,

"한 달? 한 달이 다 뭐요. 안 돼요, 남의 집세를 아주 떼어 먹자는 작정이로구면."

하고 얼굴빛은 다시 사나와진다.

"그럼 스무 날만 참아 주세요."

"안 돼요, 스무 날이 다 뭐요?"

"그럼 어떻게 해요, 지금 없는 걸."

"한 달 후에 된다고 하던 것이 스무 날 후에 된다는 것을 보면 그 안에라도 될 수가 있겠지."

"그럼 일 주일 안에는 무슨 짓을 하든지 장만해서 드릴테 니 그렇게 아세요. 없는 사람의 사정을 그렇게도 몰라 주신 단 말이에요, 원."

"일 주일이요?"

그 사람은 한참 있다가 말한다.

"네."

순영은 적이 마음을 놓는 듯이 대답을 한다.

"그때는 꼭 해 드리지요."

"일 주일이면 며칠날인가? 오늘이 열이레니까 하루, 이틀......"

하고 손가락을 꼽더니,

"스무 나흗날이로구면."

하고 조금 있다가,

"그러면 스무 나흗날은 꼭 내시겠소?"

하고 다시 다진다.

"네, 그날은 내지요."

"양력으로 스무 나흗이지요. 또 그때 가서 음력이라고 떼 쓰지 말고."

"양력이고 음력이고 오늘부터 일 주일이면 마찬가지가 아 니에요?"

"그럼 그날도 내가 올 터이니 그리 아시오."

"아무가 오시든지 돈만 드리면 고만이 아니에요."

"그야 그렇지요. 한데 그 사리 밀린 것을 다 낸다는 말이지요?" "그렇지요."

"이달까지 하면 넉 달 치요."

"네"

순영은 너무도 귀찮아서 그 사람의 말대로 대답한다.

"그러면 그 날 만납시다. 그날도 못 내면 이 집은 내놔야 돼요."

"네."

"대답했겠다요."

"네."

"그럼 가우."

하고 나가는 그 사람의 뒷모양을 바라보는 순영은, 마치 마귀를 보내는 것처럼 끔찍스럽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였다. "그래 어떠세요. 그 사이 검은 약을 잡수시니까 원기가 회 복되세요?"

순영은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대철의 기색을 본다.

"암 낫고말고요, 훨씬 낫지요."

대철은 기운 있게 대답한다.

"그러면 차차 병을 고쳐 보시지요."

"그런데, 아까 웬 놈이 그런 놈이 있소?"

대철은 묻는 말엔 대답하지 않고 딴소리를 한다.

"집세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

"글세, 그런 줄은 아겠는데 아무리 집세를 받으러 왔기로 그렇게 무리한 놈이 어디 있단 말이요?"

대철은 스스로 흥분한다.

"집세를 석 달씩이나 안 났으니 좋은 소리를 하겠어요? 큰 일났어요. 그 사이에 약시세하느라고 집세를 낼 수가 있어 야지요. 말은 일 주일 후에 낸다고 하였지만, 무슨 도리가 있나요. 집을 내놓는 수밖에 없는데 큰 일이 아니에요? 인 제 약시세할 돈도 없어요. 그새에는 사 년 동안 바느질 품 을 팔아서 푼푼이 주워 모았던 것으로 이때까지 지탱하였지 만, 그것이 떨어지고 보니 하는 수가 있나요? 하니까 오늘 부터라도 검은 약이라는 것은 구만두시고, 주사도 도수를 줄여서 며칠 내에 고쳐야지 큰일났어요."

순영은 근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면 이달부터는 검은 약을 먹을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검은 약뿐 아니라 주사 맞기도 어렵지요. 당장에 길라로 나앉게 되고 끓여 먹을 수가 없게 되는데 여부가 있어요.

있으면야 아끼느라고 그러겠어요?

"형편이 그렇기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당장에야 끊을 수가 있다고?"

"그러기에 전일에도 말씀하지 않았어요. 차차 도수를 죽여 서 끊자구요. 지금 와서는 하는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해요?"

순영은 약간 화를 낸다.

"그러면 오늘부터라도 끊어 보지요."

대철은 마지못하여 허락한다.

"그러면 오늘은 약을 잡수시고 오셨으니 저녁까지 참으세요. 그리고 밤에 주사나 한 번 맞으시고."

"그럼 그렇게 해 보지요. 하지만 첫날부터 그렇게 될까?"

"그럼 주사약은 날 주세요."

"왜요?"

"왜라니요? 선생님이 가지고 계시면 되겠어요? 내가 가지 고 있어야지 제때에 주지요."

"그도 그렇소, 그럼 가지고 계시요"

대철은 생명수처럼 지니고 있는 주사약을 할 수 없이 순영 에게 주었다.

"여보, 여보."

대철은 부엌에서 저녁 채비를 하고 있는 순영을 부른다.

"네?"

순영은 쌀을 씻는 중이라 곧 들어가지는 못하고 대답만 하 였다.

"이리 좀 들어오세요."

"왜 그러세요?"

"왜든지 잠깐만 들어오세요."

"쌀을 씻어요, 씻어 놓고 들어가지요."

"아니오, 잠깐만 들어와요"

대철의 말소리는 급하다.

"네."

하고 쌀 씻던 것을 그대로 놓고 손을 툳툭 털고 들어가는 순영은, 무슨 병증이나 났다고 하고 염려하여 바쁜 걸음으 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왜 그러세요?"

하고 대철의 기색을 본다.

"에구, 죽겠다. "

하는 대철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콧물을 흘리면서 죽는 시늉을 하고 앉아서 말도 할 수가 없는지, '에구."

소리만 지르고 늘어지는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순영은 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방바닥을 깊고 앉으면서 대철을 들여다 본다.

"에구, 이거 죽겠소."

"글세 왜 그러세요?"

"주사 좀 놔주세요."

"주사는 도수를 줄여서 저녁에 놓기로 않았어요?"

"그렇지만 못 견디겠소. 오늘은 그대로 놓고 내일부터 도수 를 줄입니다. "

"그래선 못 써요. 첫날 잘 참아야 한다는데요. 잠지 못하면 언제라도 마찬가지지요. 내일은 또 그렇잖은 가요, 조금 어 려워도 참으세요."

"에구 안 되겠소. 지금 당장 죽는 걸 어떻게 하우. 에구 죽 겠다. "

대철은 몸을 뒤튼다. 순영도 보건대 금방에 죽을 것 같아 서 황황하게 생각되었다. 순영도 말없이 건너방으로 가서 경대 서랍에 단단히 싸서 묶어 놓았던 수건을 꺼내면서 손 님, 손이 바쁘게 끌러 가지고 대철의 앞에 갖다 놓으면서

"자, 여기 가져왔으니 마음대로 놓으세요."

하고 얼굴을 찡그린다. 대철은 허겁지겁 자기 손으로 주사 를 놀흐려고 하였으나, 손이 흔들리고 기운이 없어서 체 자 리에 놓을 수가 없었다.

"여보, 이것 안되겠소, 조금 좋아 주세요."

하고 팔을 내민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놓아요? 놀 줄을 아시나요."

"아무렇게 놓아도 관계 없어요. 그 전에 내가 놓은 것을 보 았지요? 그렇게 놓으시오. 에구 죽겠다. "

대철은 상을 찡그리고 몸을 뒤튼다.

"그럼 가만히 계세요."

순영은 하도 다급하여서 주사힘을 들고 대철의 팔에 찌르 려고 하였으나 손이 떨려서 진정할 수가 없었다.

"에구 이것 안되겠어요. 아무렇게나 찌르고 약만 넣으시오.

이러다가는 내가 죽겠소. 에구 나 죽네 에구 나 죽겠다. "

소리를 지르는 대철은 사지가 비비 꾀는 것 같았다.

"에구 이걸 어쩌나? 이것 큰일났네."

순영은 땀을 흘리면서 떨리는 순을 가까스로 진정하여 가 며 주사를 놓았다. 혼수 상태에 빠진 것처럼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던 대철은 조금 있다가,

"후유!"

하고 몸을 돌아누우면서 눈을 떠서 순영을 보더니,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아주 죽을뻔 하였소, 이 병은 그렇 게 속히 고치려면 안 되는 것이요. 오늘 저녁까지는 그대로 맞고 내일부터는 세상 없어도 도수를 줄일 터이니 그렇게 하도록 하시요."

하고 애원하듯 한다.

"그러니, 내일 일은 어떻게 아나요. 벌써 몇 달을 두고 벼 르다가 오늘부터는 세상 없어도 도수를 줄인다고 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불과 세 시간이 못 되어서 그렇게 참지 를 못하니 어떻게 하오. 큰일났어요. 인제는 도수를 줄이기 는 고사하고 주사약을 사는 수도 없게 되었으니, 어떻게 한 단 말이에요. 집도 쫒겨나게 되고 먹을 것도 없고 약을 살 수도 없게 되니 딱한 일이 아니오? 나중에 얻어 먹더라도 병이나 고쳐야 하지 않아요. 그렇게 참지를 못하시면 어떻 게 해요. 글세 생각을 해보세요, 딱한 일이 아니오? 나는 나 중에 굶어죽더라도 선생님의 병이나 고쳐 드리려고 애절을 하고 있었는데, 인제 이것도 저것도 하는 수가 없게 되었으 니, 어찌 해야 좋단 말씀이에요?"

순영은 돌아앉아서 눈물을 씻는다.

8.[편집]

"언니 계세요?"

순영이 봉림을 찾아간 것은 며칠 후의 일인데, 집세를 낸 다고 한 기한도 박두하고 대철은 주사 맞는 도수를 줄인다 고 하면서도 날마다 제턱이어서 병을 고칠 가망이 없으므 로, 그러한 의논 한 마디 할 데도 없고, 또는 집에 있고서는 대철이 제때 되면 주사를 주어 달라고 야단을 치는 통에 어 찌할 수가 없은 즉, 자기가 집에 없으면 대철이 어쩌는 수 없이 주사 맞는 도수를 줄이게 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 로, 오직 하나인 통정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인 봉림 을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게 누구요?"

봉림은 방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말만 하고 좀처럼 문을 열어 보지 않는다.

"나에요?"

순영은 마루 앞으로 들어가면서 안방 쪽을 보면서 혼자 웃 는다.

"내가 누구야?"

문을 반만 열고 머리만 내밀고 내다보는 봉림은,

"아이구, 아우님이요? 하도 만난 지가 오래니까 목소리도 잊어버렸어. 나는 누구라구, 어서 들어와요."

봉림은 우르르 나와서 순영의 손을 잡아서 끌어올린다.

"진작이라도 한 번 온다는 것이 못 왔어요."

순영은 봉림이 끌어서 넘어뜨리다시피 앉히는 아랫목 자리 에 앉았다.

"에구, 내 말이야. 한 번 가서 본다면서..... 그런데 들으니 까 수복 아버지가 집에 와 있다며?"

"그래요."

순영의 얼굴은 조금 붉어지려 한다.

"그럼 아우님이 수소문해서 데리고 온 게요?"

"아니,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왔어요."

"그럼 다시 같이 사는 모양인가?"

"아니, 같이 살기는, 딴 방을 거처하고 있어요."

"그거야 밤낮 한방에서 뒹굴어야만 같이 사는것인가?"

봉림의 말에는 멸시하는 듯한 의미가 있는 듯하였다.

"아니오, 나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 몸을 깨끗이 가지기 로 결심했어요. 나는 그이를 한 은인으로, 또한 불쌍한 사람 으로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에요. 부부의 관계만 없을 뿐아 니라 그러한 생각도 없어요."

"그래요?' 봉림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조금 주저하다 가,

"그런데, 우리가 그전에 만나서 말하던 것처럼 정말 아편장 이가 되었읍디까?"

"그러면요,"

"어째서 그 모양 되었을까?'

"병이 들어서 병을 고치다가 그렇게 되었다는데, 자세히 물 어 보지두 않았어요."

"같이 살던 여편네는 어찌 되구?"

"그것두 모르지, 있기는 그대로 있다고 하더군요."

"그럼 병이 차차 나아가는 모양인가, 어쩐가?"

"낫기는 무얼 나아요? 말은 두서너 달이면 고칠 수가 있다 고 하여서, 고칠 동안이나 뒤를 보아 줄까 하였더니, 점점 더해가는 편이에요."

"그럼 어떻게 하나?"

"그러기에 큰일났어요, 그 사이에 바느질 품 팔아서 돈푼이 나 모았던 것 다 없어지고, 집까지 쫓겨나게 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요."

그 병이 좀처럼 고쳐지나요. 그런데 집은 왜 또 쫓겨나게돼?" "남의 집을 세를 내야 되지요. 이 달까지 넉 달째나 못 냈 으니 되겠어요. 모레로 한(限)을 하고 그때에 못 내며는 집 을 내놓기로 하였는데, 한푼도 구처하는 수는 없고 쫓겨나 지 별수가 있어요?"

순영은 근심스런 빛을 띤다.

"그러면 안 됐소그려. 그 집이 한 달에 칠 원씩이라고 하였지?" 봉림은 걱정스럽게 묻는다.

"네."

순영은, 봉림이 집세를 묻고 걱정스런 빛을 띠는 데 다소 기대를 가진다.

"그러면 집세가 좀 싸우, 지금은 사간 집에 칠 원은 어림두 없소, 그런 집을 놓치게 되면 큰일인데."

봉림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한다.

"그러기에 말이에요. 그집에서 쫓겨나게 되면 싸나 비싸나 방 한 간이라도 얻을 수가 있나요. 우선 석 달 치만 변동을 하였으면 무슨 짓을 하든지 차차 변통을 해서 갚아 가면서 살아볼 터인데, 이십여 원 돈을 변통하는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하도 갑갑하기에 그런 이야기나 할까 하고 언니를 찾아왔지요."

순영은 봉림의 기색을 살핀다.

"에구, 그렇지, 갑갑한 때는 누구라도 만나서 말이라도 하 면 속이 시원한 듯하거든. 그럼 그걸 어떻게 하나. 내라도 돈이 있으면 돌려 드리지만 그렇지도 못하고."

봉림은 눈을 깜작거리고 있더니,

"여보, 아우님."

하고 순영을 본다.

"네?"

순영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는 줄을 짐작하면서도 새로 기 대를 가진다.

"지금 석 달 치나 넉 달 치를 변통하는 수가 있더라도 장 차는 어떻게 할 작정이요? 아우님이 그전처럼 혼자 사는 것 같으면 그렇게 될리가 없지만 어쩌다가 그렇게 응색하게 되 더라도 잠시만 들리면 차차 될 수가 있겠지만, 그렇다면 내 라도 아무리 돈이 없더라도 하나 모해 무엇을 잡혀서라도 돌려 드릴 수가 있겠지. 하지만 아편 먹는 이 뒤를 대려면 안 돼요, 십 년을 가도 마찬가지지. 시루에 물 긷기거든. 한 정이 있어야지. 하니까 그전에도 한 번 말하였지만, 그러지 말고 생각을 돌리세요. 생각만 돌리면 삭월세집이 다 뭐야.

고대광실에 떵떵거리고 살 터인데...."

붕림은 흥분이 되는 듯이 순영의 눈치를 보면서도 안 보는 체한다.

"생각을 어떻게 돌려요?"

"어떻게 돌리다니? 그전에도 말을 않았어, 왜? 제(際)잡담 하고 시집을 가요. 무슨 천주악으로 아편장이 뒤를 대고 있담. 그러다가는 안할 말로 나중에 거적을 쓰게 될는지도 모 르는 거요. 아우님이 마음만 있으면 오늘이라도 마땅한 데 를 지수할 수가 있어요. 하니까 두말 말로 그렇게 하우. 그 리고 그렇지 않고 끝끝내 아편장이 뒤를 대려거든 나하고 의절(義絶)합시다. 나는 아편장이라면 말도 하기 싫은 사람 이요."

봉림은 공연히 기를 낸다. 순영도 이에 이르러서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초에 대철을 고호 가기 시작할 때에는 불과 두세 달이면 병을 고칠 수가 있다 고 하니까, 우선 병을 고칠 동안이나 구호를 해보려 하였던 것인데, 그 사이의 경험으로 보면 좀처럼 고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점점 심해 가는 모양인데, 그것을 구호할 여망이 없고, 그러노라면 자기의신세도 어찌 될는지 모른다고 하느 니보가 봉림의 말마따나 거적을 쓰게 될 것인즉 자기의 장 래를 도아보지 아니할 수도 없는 일이요, 또는 며칠 안 되 어 거리로 나앉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은즉, 봉림의 말을 되씹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 여도 다른 데로 다시 시집을 간다든지, 자기가 아니면 당장 이라도 물 한 모금 얻어 먹을 수가 없이 된 대철을 내쫓는 다든지, 모르는 제하고자기만 빠져서 다른 데로 갈 수는 없 는 일이었다.

순영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앉았다가 새로 다섯 시를 치는 시계소리에 놀라는 듯이,

"에구, 참 가봐야겠군."

하고 그 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순영은 대철이 어찌 되었나 하는 생각에 조마조마하였다. 대철의 주사 맞는 시간이 평상시보다 세시 간이나 늦었다. 세 시간은 고사하고 한 시간도 견디지 못하 여 죽는시늉을 하면서 주사를 놓아 달라고 졸라대던 대철이 그 사이에 어찌 되었나 하는 염려로 발보다 머리가 앞서게 빨리 왔다. 순영이 앞마당에 들어설 때에는 발자취를 죽이 고 방 안의 동정을 살폈다. 방 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순영은 가슴이 선뜻하였다. 기침을 가볍게 하면서 마루에 올라섰다. 그러나 발자취소리는 나지도 않도록 주의하였다.

그래도 방안에서는 그렇게 그렁거리던 숨소리조차 없었다.

순영은 문고리를 잡고 숨을 족이고 들으면서 활딱 열지를 못하였다 그래도 방안은 여전이 잠잠하다. 순영은 다시 기 침을 하고 문을 조용히 열면서 들여다보았다. 대철은 팔을 이마에 얹고 반드시 누웠는데, 입아귀는 거품을 흘린 흔적 이 낭자하다.

"주무세요?"

하면서 들어서는 순영은 대철을 들여다보면서 우선 숨기척 이 있고 없는 것을 살폈다. 대철은 아무 대답도 없고 터럭 하나 움직이지 아니하였으나, 윗수염이 흔들리는 것으로 보 아서 숨을 쉬는것은 확실하였다.

"주무세요?"

순영은 비로소 마음을 놓으면서 가까이 갔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주무세요?"

순영은 소리를 높이면서 손을 대철의 코밑에 대어본즉 콧 김은 더웠다.

"누구요?"

대철은 다 죽어가는 소리로 혀를 분명히 채지 못하면서 눈 은 그대로 감고 있는것이, 채 숨이 떨어지지 아니한 숭장같 이 보였다. 순영은 빨리 건넌방에 가서 주사약을 가져다가 한 방을 주었다. 조금 있다가 기운을 돌리면서 눈을 떠보는 대철은, 순영이를 보고서 못마땅한 듯이 돌아누울 뿐이다.

"그새 시간이 너무 늦었지요?"

순영은 미안하듯이 말을 하였으나 대철은 대답이 없었다.

"시장하시지 않아요?"

"저녁하기 전에 뭘 좀 가져 올까요?"

"어차피 죽을 놈이 무엇을 먹어선 뭘하게."

대철의 말은 평탄치 못하였다.

"잠깐 다녀온다는 것이 조금 늦었어요. 왜, 화나셨어요?"

"후유!"

하고 일어나 앉는 대철은 머리를 짚고 눈을 감은 채로 앉 았다가,

"내가 여기 있다가는 지레 죽을 테니, 나가다 죽더라도 다 른 데로 가야겠소."

하고 일어나서 두루마기를 입고 모자를 쓰더니, 엎어놓고 비틀거리며 나간다. 순영도 대철이 자기의 없는 사이에 주 사맞을 시간이 조금 오래 되어서 얼마나 애를 쓰다가, 마침 내 열정이 나서 하는 행동인 줄을 알면서도 자기도 너무나 괴롭고 대철이 하는 짓이 얄밉기도 하여서, 나가는 대로 가 만히 내버려 둘까 하고도 생각을 하였으나, 대철의 비틀거 리고 나가는 품이 몇 발자국을 떼놓지 못하여서스러질 것 같고, 어떻게든지 어디로 간다 할 지라도고 수련하는 사람 이 없이는 며칠이 못 되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런다면 대 철이 죽는 것은 곧 자기가 죽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차마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물론 아내로서 남ㅁ편을 섬 기는 것은 아니고, 또 무슨 손톱만큼이라도 장래를 바라는 것이 있어서 그러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것 보세요, 이래 가지고 어디를 가세요, 들어갑시다. "

대철을 부축해 가지고 들어가는 순영은 남 보지 못하는 사 리에 홀연히 눈물을 흘린다."

9.[편집]

깨끗하지 못한 공기와 흐리터분한 티끌과 매연(煤煙) 사이 에서 복잡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도회지 사람들은 언제든 지 신선한 공기와 맑은 바람을 그리워하는 것이지만, 만일 더운 때를 당하면 더욱 그러한 것이 그리웠다. 그리하여 서 울 사람들은 여름만 되면 될 수 있는 대로 나무 밑이나 물 가에를 찾아다니며, 땀을 개이고 정신을 맑히려고 하는것이다. 그리하여 경성 안의 작고 큰 공원에는 더위를 피하는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는 여름을 거 기서 나다시피 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경성 의 공원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설비에 있어서 아직 공원다 운 공원이 없지만, 그 중에서 그늘도 있고 물도 있고 발세 가 좋아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데는 사직공원이었다. 거기서는 피서하기 위하여 임시로 드나드는 사람은 물 론이고, 운동이나 유희를 위하여 오는 학생층의 사람들도 많으며, 혹은 셋집에서 쫓겨난 사람이라든지 오다가다 머무 르게 되는 사람들이 나무밑에 거적대기로 의지하고 단지 밥 을 해 먹어 가며 임시로 살림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다른 데서 보기 드문 특별한 현상이라고 할 것은 아편장이들의 도회청이 되다시피 한 길이었다. 그것은 아펴낭이 중에도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이 갈 데가 없어서 그런 데로 모여드 는 것이겠지만, 허다한 빈 땅을 두고서 사직공원ㅇ로 모이 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형편으로 자기네의 생활에 편리한 점이 있는 까닭이니, 그들의 생활에 편리한 것이라는 것은 첫째로 마약(痲藥)을 파는 곳이 가까운 것과, 그 주위의 집 들이 많이 있어서 밥을 얻어 먹기가 편리한 것과, 나무 밑 에서 한둔하기가 좋은 중에, 만일 날이 궂은 때에는 사직 문간이 있어서 풍우를 피할 수가 있는 까닭인데, 그 중에 가장 여러 사람의 화제거리가 되어 있는 것은 순영이었다.

순영은 힘을 다하여 대철의 병을 고쳐 보려 하였으나 가망 이 없었고, 마침내 집을 쫓겨나게 되어서 행랑방이나마 얻 어본 적도 이었으나, 대철이 아편장이라는 이유로 주인이 싫어하여서 몇 번이나 쫓겨났었고, 되는 대로 토막을 의지 하여 본 일도 있었으나 그것을 땅 임자의 혹독한 처치로 헐 려 버린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서 맛 보기 어려운 세상의 쓴맛을 골고루 맛보아서, 모든 일에 괴 롭고 싫증이 난 적이 적은 바 아니었으나, 어쩐지 천지간에 의지할 곳이 없이 죽어가는 대철을 자기의 목숨이 떨어지는 날까지 구원하여 주겠다는 한 줄기의 동정은 돌보다도 굳고 동아줄보다도 길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둥지고 기식(氣息)이 엄엄하여 오늘 죽을는지 내일 죽 을는지 모르고는 대철이, 게다가 차차 쇠약하여 눈까지 어 두워서 자유로 다니지 못하는 대철이,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얻어다 주는 대로 먹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것 이 많다고 자꾸만 찾고 있으며, 주사 맞을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별별 야단을 치고 있는 대철, 보통 사람에게 손가락 질을 받고 타매를 받는 대철, 그 사람을 데리고 사직공원의 한편 자리를 점령하게 되었다.

순영이 처음에 사직공원으로 올 때만 하여도 순영은 순영 대로 대철은 대철대로 다니면서, 밥도 얻고 돈푼도 얻었으 므로 그 생활에도 다소 도움이 되었으나, 대철이 점점 눈이 어두워 혼자 다닐 수가 없게 되며부터는 순영이 대철을 끌 고 다니면서 밥이나 돈을 번 일도 있었으나, 대철이 걸음조 차 변변히 걷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대철은 한편 나무 밑에 서 자리 보존을 하여 두고서, 순영만이 두 인생의 생활에 대한 전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순영은 한 어깨에는 자리를 메고 한손에는 바가 지를 들고 람호 장안에 닥치는 대로 다시면서, 밥이나 쌀이 나 돈이나 되는 대로 얻어다가 두 입에 풀칠도 하고 옷가지 도 해 입고, 대철의 주사약을 대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대 철의 군것질까지도 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대철이 곁에 누워 가면서 만사가 자유롭지 못한 대철의 시 중을 하나에서 열까지 받아 주는 것이다. 순영은 날마다 날 마다 그러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 인생 일대의 큰 경륜이 요 큰 사업이었다. 순영은 그러는 동안에 닥치는 일이 하나 도 쓰라리고 아프지 않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언제든지 만 족한 듯하여서 이맛살을 찌푸린다든지 한숨을 짓고 눈물을 흘린 때가 별로 없었다.

순영이 그러한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자연히 한 입 두입 건너서 순영의 사정을 알게 되는 것이 사직공원에 다니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울 바닥에서는 대개 알게 되었다. 그리 하여 순영이 밥을 얻으러 다닌다든지 동냥을 하러 다닐때 에,

"저게 아편장이 계집애래, 밤낮 얻으러 다니는 거지야. 없 어, 어서 가."

볼품없이 말을 하고 미처 들어서지도 못하게 쫓아 보내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경우를 당하면 너무도 부끄럽고 괴로와서 자기 자신을 이 세상과 함께 파멸이라도 할 생각이 있었지만, 마침내는 두어 줄기의 뜨거운 눈물로 박정한 세태와 다정한 자기의 슬픔을 아울러 씻어 버릴 뿐 이었다.

"아이구, 저 댁네가 왔군. 병든 남편을 위하여 저렇게 고생 을 하니 가엾은 일이지."

이러한 따뜻한 말을 하면서 밥이나 반찬 같은 것이라도 남 달리 주는 집이 많았으므로, 그러한 때에는 순영의 마음도 너무도 고마워서 이 세상은 적이 따뜻한 것 같기도 하였다.

순영이 그렇게 빌러 다니는 동안에 가지각색 인정 세태를 볼 때에는, 한 하늘 아래의 같은 세상이요 똑같이 이목구비 를 타고난 사라이건마는, 그 마음을 쓰는 데에 있어서는 어 찌 그렇게 같지 아니한가 하는 생각이 새롭고 새로와서 그 것을 알아보고도 싶었으나, 그것은 너무도 막연하여서 용이 하게 더위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순영을 박대하는 집보 다 동정하는 집이 많았으므로, 손영이 그만한 생활을 계속 하기에는 다른 거지들들에게 비교하여서 고통이 되지 않는 다는 것보다 차라리 넉넉한 편이었다. 순영은 그러는 동안 에는 언제든지 염불을 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 기가 그만한 생활이라도 다른 거지들보다 낫게 되는 것이 부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여서,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위안 하였다.

순영이 처음에 얼마 동안은 대철의 병을 고쳐 볼 모양으로 모든 수단을 다하여 보았다. 주사의 도수를 줄이려고도 하 여 보았고 아편 중독이 풀린다는 약도 써보고, 그 외에도 고칠 수가 있다는 것은 다하여 보았으나 되지 아니할 뿐 아 니라, 첫째에 경험해 본 결과 대철의 결심으로는 도저히 될 수가 없는 일이어서, 병이 점점 더해 가는 한길을 밟고 있 으므로 병을 고쳐 보려는 생각은 단념하고, 대철의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자기의 힘대로 공뤠나 하다가 마지막의 운명 은 자연에 맡기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굶어죽지 아니하고 주사약을 끊이지 아니할 만한 것을 한도로, 동냥이라도 많 이 할 생각을 하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대철의 옆을 떠나 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보살펴 주며, 하다못해 이(風)라도 잡아 주는 것이 순영의 직무였다. 그러자니 남의 말을 좋아 하는 세상이라 순영에 대한 평판이 적지 아니하였다.

"영감, 저기 있는 저 여자를 보시오?"

"어떤 여자 말씀이요?"

"아따, 저기 추자나무 밑에 아편장이하고 같이 앉은 여자 말이에요."

"그게 그 아편장이 마누라랍니다그려."

"그런데 그 여자의 역사를 들으셨소?"

"듣고말고, 그 여자의일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소? 여기 다니는 사람이야 다 알지."

"그런데 저런 게 정말 연애지."

"연애고말고, 그런 사람이 어디가 흖소?"

"우리는 연애가 뭔지 모르고 늙었지만, 요새 젊은 애들은 밤낮 연애를 찾습니다그려. 하지만 연앤지 뭔지 하루하다말 기도 하고 이틀 하다 말기도 하고, 시집가고 장가 갔다가도 이혼하기를 우리네 담배 한 대 먹는 것보다 더 쉽게 합디다 그려. 연애를 하려면 저만큼이나 해야 방가위지(方可謂之)연 애가 아니요?

"저런 일은 연애에다 비할 일이 아니지요. 내왼들 저런 내 외가 어디있소? 우리네가 어려서 어른들에게 들으니, 남편 을 위해서 죽는 아내도 있기는 합다더만 그런 여자가 쉬우 며, 가령 그런 여자가 있다 하더라도 잠시 남편을 위하여 죽기는 오히려 쉽지만 말이야, 저렇게 병든 사람을 따라 다 니며 오랫동안 고생하기는 더 어려운 노릇이지. "

늙은이들 한 축이 의관을 벗어서 나뭇가지에 걸고 서성거 리면서 순영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지금은 내외간도 아니랍디다그려."

"그거야 누가 아우? 내외간이건 이니건 그거야 알 것 있소? 내외간은 고만두고 친부모라도 저렇게 할 사람이 누가 있소? 그리고 내외간이라 하더라도 놈팡이가 저 지경이된바 에 남녀간 정리야 있을수가 있소? 어쨌든 저 여자의 천품에 서 우러나는 마음이 아니면 저렇게 할 수가 없지요."

입에서 침이 없이 찬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데 그 여자가 얼굴이라든지 외양이 그다지 볼품없는 여자도 아니야, 저 모양이 되었으니까 그렇지. 화장이나 하 구 꾸며 놓았으면 상당히 관계찮을 모양이야."

하고 딴 문제를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기에 더 어려운 일이란 말이요. 여자가 아주 못 생겨 서 돌아도 나무에도 댈 데가 없다면 혹 몰라. 아무 데도 잡 힐 손이 없으니까. 하지만 여자가 저만하면 아무데 가 잡힐 손이 있단 말이요. 들으니까 아니찮아 꾀 주는 사람도 있었 답니다. 저렇게 고생할 것이 아니라 마땅한 데 가서 잘 살 라고 했지만 기어이 안 듣고 저 사람을 위해서 저러고 다닌 다니, 그 속내는 자세히 모르지만 하여간 어려운 일이지요."

"저 여자가 우리 집에도 자주 오지요. 밥을 얻으러도 오고 동냥도 오고 하는데, 우리는 다른 거지는 못 주어도 저 여 자는 꼭 주라고 하여서,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는 않는걸요."

"나도 역시 그렇지요."

"나도 그러는데요."

그들은 의관 범절이나 차림차림으로 보아서 모양 없이 무 무한 사람들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학문이 있다든지 형세 가 넉넉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순영을 찬탄하기 위 해서 뿐 아니라 자기네의 심심풀이를 하기 겸해서 이 말 저 마을 하다가,

"저 우리, 말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십시일반으로 돈푼씩 이나 거둬서 저 여자에게 보조를 하는 것이 어떻소?"

하고 발의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 그것 참 좋은 말씀이요."

여러 사람은 다른 입에 같은 말로써 얼마씩 거둬서 곰살궂 게 순영을 갖다 주어서 여러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10,

"언니"

그 옆에서 그러한 광경을 보고 있던 신여성들 한 축이 있 었는데, 삽상한 양장에 깨끗한 운동화를 시은 여자가 조금 덜 익은 듯한, 포도알처럼 검고 윤기가 돌면서도 푸른 기가 있는 듯하여 누가 보든지 영리하면서도 성깔이 있어 보이는 눈을 힘있게 돌리면서 부른다.

"응?"

중키에 팔파짐하고 머리는 깎았다가 기르는 중에 있는 여 자가, 심회색의 파라솔을 옆으로 짚고서 의지하 듯이 몸을 십여 각도쯤 기울이고 섰다가, 눈으로는 다른 데를 보면서 별로 무관심한 듯이 대답한다.

"이것 좀 보아요."

"응? 무얼?"

그 여자도 시선을 돌리고 다른 여자들도 고개를 돌린다.

"우리 조선의 여성 운동이 될 수가 있을가?"

"닫다가 무슨 소리야?"

"우리 운동선상에 나선 여자는 자나깨나 투쟁에 대한 관심 이지, 딴 게 있어?"

"아니 또 변증법적 이론이야? 우리 운동이 시간은 문제지 만 언제든지 되지 않을까."

"우리가 그러한 자신과 낙관은 가지지만 말이야. 사실은 좀 처럼 될 것 같지를 않아요."

"왜?"

"우리가 경험한 바로 보아서 모든 현상이 그렇지만, 우선 여기서 당장에 목고하는 바로도 그렇지 않아요?"

"글세, 무엇 때문에 말이야? 말을 구체적으로 해야 알지?"

그들 일동은 흥미를 가지고 귀를 기울인다.

"우리는 저런 것을 보면 곧 죽이고 싶은 생각이 나요."

말하는 여자는 흥분이 된다.

"뭘 죽여?"

듣는 사람들은 다소 공포를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따, 저기 있는 열녀 말이야."

"열녀가 누구야?"

"아따, 저기 앉은 아편장이 계집말이야. 그게 장안에 소문 난 열녀가 아닌가 봐. 그러기에 저기에 주기 잇는 썩은 궐 자(厥者)들이 칭찬을 하고 돈까지 거둬 주는 것이 아니야."

"그런데 열녀를 하고 왜 죽여? 열녀라는 것이 아닌 것인데? 파라솔 짚은 여자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지음(知音)을 하 는 듯이 빙긋이 웃으나, 다른 여자들은 미처 알아듣지 못하 는 모양이다.

"저런 것들 때문에 여권확장(女權擴張)이 안 되거든,"

양장한 여자는 입을 실룩하면서 혀를 낄낄한다 찬다.

"아니, 그 여자가 왜 여권 확장을 하지 말라나."

사십이 넘어 뵈는 여자로, 희뜩희뜩한 머리와 괴롭게 잡히 는 주름살에 만나 풍상을 다 격은 듯한 형적이 드러나는 얼 굴에, 그러나 갸름하고 무뚝한 듯한 애교 있는 눈에 웃음을 머금고 말한다.

"왜 아무것도 모르는 구식 여자들 말하듯 하시오. 여권 확 장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개성(個性)을 발휘하는 것이거든. 개성이 없어야 무엇이 되겠어요. 구도독으로는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만 하는 것이요, 손톱만한 권리도 없거든, 개 성을 말살하고 남편만을 위하는 것은 현모양처라 하고, 남 편을 위하여 수절(守節)을 한다든지 죽기라도 하는 것을 열 녀라고 하는 것이 아니요? 그렇게 되면 여자라는 것은 남자 를 위해서 생긴 한 물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요, 인격을 가지는 것은 아니거든. 그러한 구도덕을 파괴하고 정당한 신도덕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가 여성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지. 그런데, 저러한 썩은 물건들이 구도덕의 노 예가 되어 가지고서의 개성은 한푼어치도 없이 다 죽어 가 는 아편장이를 쫓아 다니면서 가장 열녀인 체하고 저 지경 을 하니, 조선의 여성 운동이 될 수 있겠느냐 말이요. 그런 데, 썩은 사내녀석들은 그것이 좋다고 찬성을 하면서 돈까 지 거둬서 도와주니 기가 막힐 일이 아니오? 우리는 성미가 편벽되다고 할까 철저하다고 할까, 우리 운동에 방해물이 되는 저 따위 인간을 보면 곧 죽이고 싶어서 못 견디겠어."

양장 여자는 주먹을 쥐고 순영이 있는 데로 쫓아 가려는 듯이 자세를 취한다.

다른 여자들은 그제야 알아들은 듯이

"에구 참 그래. 사실 저런 것들 때문에 여성 운동의 촉진이 안 되는 것이야."

"나는 또 무슨 소린가 하였더니, 하여간 관찰이 빠르거든, 머리가 좋아서."

" 하여간 우리 운동을 지도할 자격이 있어. 저만큼이나 관 찰이 빠르고 철저해야지."

무두가 양장 여자의 말에 찬동하는 중에,

"그렇지만 저런 여자라고 덮어놓고 배척할 수는 없지."

파라솔 짚은 여자가 다른 이론을 전개한다.

"어째?"

양장 여자는 불쾌한 듯이 반문한다.

"저런 일이라도 구도덕이나 소위 사외 이목에 고속을 받지 아니하고 자유 의사에 의하여서 하는 일이라면, 저보다 더 한 일을 한대도 관계가 없겠지. 그 역 개성을 발휘하는 것 이니까 그렇다면 남편을 위하여 일평생을 희생하는 것도 좋 고 남편이 죽으면 따라서 죽는 것도 좋지. 이것은 구도덕에 서 보는 정조 관념이라든지, 남자들이 주장하는 절대복종의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유 의사로 하는 일이 라면 무엇이든지 좋다, 이런 말이야. 남편을 위하여 희생하 는 것도 개성의 자유로만 한다면, 우리 운동을 위하여 희생 하는 것이나 정신에 있어서는 마찬가지거든, 하니까 저런 여자의 행동도 덮어놓고 무시할 것은 아니라 이런 말이야."

조금 융통성이 있는 이론을 주장한다.

"그야 그렇지, 그렇고말고. 시간적으로 역사의 구속을 받지 않고, 공간적으로 소위 사회 여론의 구속을 받지 않고, 단순 히 개성의 자유로 한다면 저러한 일도 무방하다고 보느니보 다 차라리 아름답다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따위야 개성이니 쇠성이니 무슨 이익이 있나요. 그저 들은 풍월로 인습에 끌려서 노예적으로 하는 일이지. 그렇다고 할 수 없 는 일이니까 아편장이나마 내세워 가지고 그 핑계를 대고 얻어먹으려는 수단인지도 모즈지. 들으니까 저 여편네는 가 갸 뒷다리도 모르고 무저항적으로 되어서 아무것도 모를 뿐 아니라 못난이랍니다. 순전한 노예적개성의 자유가 다 무엇 인야. 그러니까하는 말이지. 언니는 당치도 않은 이론을 전 개하시는 구료. 개발의 편자지, 저 따위에게 개성의 자유가 다뭐람 저런 것은 다 우리 운동에 대한 좀이요 장애물이에요. 언니는 용서성이 너무 많아요. 적어도 혁명가에게는 용 서는 금물이에요. 용서라는 것은 인도주의자나 타협주의자 가 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거든. 이러한 이론도 변증법적 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거든."

양장 여자는 변증법 박사라는 별명을 듣느니만큼, 득의의 열변을 토하면서 변증법적이라고 내세운다.

"나도 저 여자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이를테면 저런 행 동을 하더라도 개성의 발로로 한다면 그 행동 자체에는 가 부가 있겠지만, 우리 운동에 방해될 성질은 아니란 말이지, 그러니까 저 여자도 그런 여자로구면, 그렇지. 저런 여자야 학문이 없으니까 뭐가 먼지 모르겠지. "

말하는 눈치가 이론으로 졌다는 것보다 대항하기가 성가신 편이었다.

"그런데, 저런 인간도 아무것도 몰라서 저런 노예적 행동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소위 정조 관념이라는 것이 있겠지?"

"그야 모르지. 정조 관념이 있고 없는 것이 있겠지."

"아니야, 그래도 인습적으로 그런 관념이 있을 것이야. 저 따위 인간이 콜론타이의 <적련(赤戀)>이나 입센의 <인형의 집 > 같은 것을 보았으면 어떻까?"

"그런 거야 이해할 수가 있나, 쇠귀에 경 읽기지, 그런 말 은 비변중법적이야."

그들은 차디찬 웃을을 웃는다.

11.[편집]

순영은 그러한 처지에 있느니만큼 앞으로 달려드는 뭉텅이 비방을 목에 마치도록 꿀꺽꿀꺽 삼키는 일도 매일 같이 있 었지만, 뒤에서 들어오는 허튼 비평은 순영의 귀에까지 이 르지 못하고 중간에서 사라지는 것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 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평은 순영의 형편과 정곡을 사실대 로 이해하고서 정당하게 하는 비평이었고 또는 열하산 평판 이 있어서 그것이 낱낱이 순영의 귀에 들어온다 할지라도 그러한 것쯤은 일찌기 각오하고 자기 스스로도 어쩌려야 어 떨수가 없이 해앟여지는 그 행동을 방해할 수는 없는 일이 었다.

순영은 그 여자들이 나무 그늘 밑에서 서늘한 바람을 쐬어 가며 무슨 말들을 재미있게 하고 있는 것이 부럽기도 해서, 알지 못하는 사라에 한숨을 짓기도 하였으나,

"아이구 죽겠다. "

하고 한없이 지르는 대철의 앓는 소리를 들을 때에는, 새 삼스럽게 꿈을 깬 것처럼 가씀이 섬뜩하면서,

"왜 그러세여?"

하고 돌아보았다.

"아이구 죽겠다."

하는 소리가 더욱 힘이 없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가 편찮으세요?"

"아픈데도 없고 기운이 점점 까라지는 것이 아마 죽을라나 보우"

"죽기는 왜 죽어요? 주사를 한 번 맞으실까요?"

"주사는 맞은 지가 얼마 되오? 훌훌한 설렁탕이나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소만, 설렁탕도 건데기는 말고 국물만."

"그럼 설렁탕을 한 그릇 사올까요?"

순영은 돈주머니를 만져 본다.

"그걸 또 어떻게 사오겠소, 이 더운데. 어차피 죽을 놈이 그것은 먹어서 무얼 하겠소?

고만두지, 공연히 순영씨 수고만 더 시키지."

대철은 언제든지 먹을 것을 찾든지 주사를 놓아 달랠 때는 순영을 조기리만 하고 짜증만 내어서, 순영을 귀찮게 할 뿐 이요 조금도 고맙다든지 미안히 여기는 일이 없었는데, 그 날은 어쩐지 뜻밖에 순영이에게 대하여 미안한 말을 하고 그 표정으로도 그러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요. 잡수시고 싶으시면 사 오지요. 돈도 있어요."

하고 일어나는 순영은 전에 없는 대철의 말과 태도에 대하 여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정말 어쩌면 좋을는지 모르겠소. 순영씨가 고생하는 일을 생각하면 한시 바삐 죽어야 하겠고, 또 순영씨가 나중에 복 을 받아서 잘 사는 것을 보려면 아무쪼록 병이 나아서 오래 살아야 할 터인데, 이 세상에서야 순영씨 신세를 갚을 수가 없겠지."

대철은 혼잣말처럼 하면서 한숨을 쉬고 돌아눕는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마음을 진정하세요."

순영은 양재기를 가지고 가면서 대철의 행동을 더욱 이상 하게 생각하였다. 아무리 고약한 사람도 죽을 때는 마음이 착해진다더니, 대철이 죽으려고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하였다. 순영은 대철이 멀지 아나하여 죽으리라 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오, 죽는대야 조금이라 도 애절될 것이 없지마는, 어쨌든 산 사람이 죽는다는 커다 란 사실이 자기 담착(擔着) 앞에 닥쳐오는 것을 생각할 때어 는, 가슴이 내려 앉고 정신이 휘어지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순영은 심히 괴로운 때라든지 대철이 진정으로 못 견디어 하는 데에는, 병을 고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일찌기 죽는 편이 어느 편이 어느 편으로나 좋겠다는 생각을 하여 보지 아니한 것도 아니었지만, 다시금 죽는 사실이 앞으로 기어 드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나산 너머로 돌려오는 무거운 검은 구름은 건들건들 부는 바람을 따라서 삽시간에 북안산을 덮더니, 금방에 악수가 질듯이 굵은 빗방울이 드문드문 듣기 시작하여 거리에 나선 사람들은 누구나 없이 달음질을 친다. 순영이 설렁탕을 사 가지고 사직공원에 들어설 때에는 빗방울이 제법 자주 떨어 지면서 바람은 더욱 강하여서 심상치 않은 사나운 일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많이 모였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하 나도 볼수가 없었고, 오직 여러 사람들이 웃고 노래하고 이 야기하고 떠들어서, 왁자지껄하고 웅성웅성하던 소리가 아 직 다 사라지지 아니한 재초 비바람에 몰려서 어디론지 가 는 듯하였고, 어지러운 발자취와 질펀하게 흩어져 있는 내 버린 물건들이 되는대로 궁글어 다녀서, 마치 번화하던 도 회가 전쟁을 겪은 뒤에 빈 터가 된 것처럼 유달리 어수산하 면서도 적막한 것이 지나쳐서 처량한 듯하였다.

그 중에서 가려고 해야 가지도 못하고 일어나려도 해야 일 어나지도 못하고, 다만 누가 꾸물러기면서 신음하는 대철은 사바세계의 생존 경쟁에서 실패하고 중상을 당하여서, 동작 의 자유를 잃었으나 아직 이 세상에는 그러한 전상병(戰像 兵)을 구호하는 적십자 병원은 나지를 아니하였으므로, 비가 와서 생명이 붙은 채로 떠내려간다 할지라도 누구 하나 구 원하여 주기를 고사하고 가엾이 여길 사람도 없었다.

"에구 가엾어라. 일어나지도 못하시는구료."

근심스럽게 따뜻한 말을 하면서,

"어서 일어나서 이것을 잡수세요, 설렁탕 사 왔어요."

하여 남들은 보기만 하여도 얼굴을 찡그리고 외면하는 더 러운 몸뚱이를 알심잇께 끌어안아서 가볍게 일으키는 천사 가 있었다.

보이지 않은 눈을 간신히 떠서 힘없이 순영을 보려고 하는 대철은 ,

"아이구 죽겠다. "

하고 도로 퍽 쓰러진다.

"정신 차려서 일어나세요. 어서 잡수시고 문간으로 가야지요. 비가 와요, 큰비가 오겠어요."

순영은 다시 대철을 일으켜서 부축하고 한 손으로 설렁탕 그릇을 들어서 입 앞에 대어 준다.

대철은 떨리는 두 손으로 설렁탕 그릇을 받들고 한 모금 마시더니,

"써서 못 먹겠소."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내두르면서 손으로 설렁탕 그릇을 내밀고 도로 드러누우려고 한다.

"에구, 갑자기 어찌 이러세요? 더 마시세요. 무엇을 잡수셔 야 기운을 차리지요. 어서 좀 잡수세요. 그리고 어서 저리로 가 서세요. 비가 점점 더 오는데요."

순영은 쓰러지려는 대철을 부퉁켜 안고서 설렁탕 그릇을 입에 댄다. 두어 모금을 억지로 마시던 대철은,

"암만해도 못 먹겠소. 맛이 소태같고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 는 것을 어떻게 먹겠수."

고개를 젖히고 순영에게 안긴다. 빗방울은 자꾸 떨어져 나 무 밑으로 물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에구, 일어나세요, 문간으로 가야지요. 비가 많이 오는데요." 순영은 설렁탕을 미처 처치할 수가 없어서 자기의 살림이 있는 거적 밑에다 넣고서 대철을 일으켰으나 대철은 일어 나려다가 도로 쓰러지고, 억지로 일으켜서 부축하고 가면 두어 걸음 걷다가 주저앉아서 도저히 제 발로 걸어 갈 수는 없었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비가 자꾸 오는데. 그럼 업히세요, 내가 업고 가볼께."

대철은 업히지 아니하려고 하다가 할 수 없이 업혔다. 연 약한 순영은 자기보다 키 큰 장정을 업고서 용이하게 갈수 가 없었다. 게다가 힘없는 다리를 기다랗게 늘어뜨려서 질 질 끌리는 송장 같은 사람을 업고 가기는 더욱 어려웠다.

비는 자꾸 오고 바람은 지둥치듯 하엿다.

송영은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은 대철을 데리고 이같이 하 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셨다. 대철은 점점 쇠약해져서 눕 고 일어나는 것도 순영의 힘을 빌지 아니하면 할 수가 없었 고, 똥 오줌까지도 제 힘으로 할 수가 없게 되었으로, 순영 은 여러 사람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비교적 시원도 하고 의지도 되는 추자나무 및 에 자기를 옮겨서 , 남쪽 언덕 밑 개울 가로 가게 되었다. 그러구 약약하고 심산하게 지우는 것이 어느덧 성실함 여름이 지나가고 아침 저녁으로 생각한 기운이 있어 제법 선선하기 시작하였다. 영리한 사람들의 발자취는 차차 물이 찼다. 한눈을 하려면 법저녁에는 선선 한 때가 많고, 몸이 성치 못한 사람으로는 더욱 그러한 것 인데, 생량한 기운이 있으면부터 몸과 정신에 아무런 저항 력이 끊어진 대철은 한낮의 더위에도 헐떡거렸지만, 밤저녁 의 서늘한 기운에도 벌벌 떨었다. 대철의 더위를 견디지 못 해서

"아이구, 더워 죽겠니."

소리를 지르던 진땀을 흘리고<푸--푸> 하는 가쁜 숨을 모 두 거리고, 내쉴 때는 순영은 고애울물을 떠다 놓고 수건을 갈마들여 가서 이마에 얹어도 주고 몸도 씻어도 주었다.

"에구 추워 죽겠네."

소리를 신음하는 소리와 아울러 지르면서 힘없는 사지를 오그리는 때에는, 순영은 자기가 덮었던 거적대기까지 대철 을 덮어주고 벗어 두었던 옷가지까지도 풀어서 덮어 주었다. 그래도 부족하면, 자기의 몸으로 대철의 몸에 바람을 가 려주고 혹은 몸을 눌러 주기고 하였다.

어느날 식전부터 대철의 병세는 바짝 채우치기 시작하였다. 가랑가랑 끓어오르는 가래를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였다. 눈망울이 꺼진 눈을 이따금 홉뜨고 혹은 이맛살 을 찌푸리고 입을 실룩거렸다. 수족은 차디찬 것이 맥이 걷 어가는 모양이었다. 대철은 가끔 억지로 눈을 떠서 멀거나 순영쪽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이 무슨 눈물인지 는 알수가 없었다. 죽기가 슬퍼서 우는 눈물인지, 순영에게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인지. 혹은 자기의 과거를 참회하는 눈물인지. 그 외에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면 안 될 만한 다른 소회가 있을는지 알수가 없었으나 다른 사람으로 볼 때에는 그다지 값있는 눈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마 주 보고 있는 순영은 따라서 눈물을 흘리지 아니할 수가 없 었다.

"주사를 맞으실까요?"

순영은 대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입을 귀에다 가까이 대고 나직이 말하였다.

"........."

"과자를 드려요?"

"........."

"무슨 더운 국물을 사올까요?"

대철은 고개도 흔들지 못하고 손을 조금씩 내둘러서 싫다 는 뜻을 표시할 뿐이었다.

"까욱, 까욱."

하는 까마귀 소리는 언제든지 있는 것이어서 심상히 들을 것이지만, 그날만은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순영은,

"휘여!"

하고 소리를 질러서 까마귀를 쫒기도 하고, 팔매를 쳐서 쫒기도 하였으나, 까마귀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저 나무 에서 이 나무로 옮겨갈 뿐이요. 듣기 싫은 우는 소리는 그 치지 아니하였다.

순영의 생각에는 예없는 까마귀가 대철의 죽음을 알음장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도 듣기가 싫었다. 해는 뉘엿뉘엿 넘 어가는데, 일기는 갑자기 무더워 져서 비가 올 것 같았다.

순영의 마음은 심히 우줄충하였다.

12.[편집]

개울의 섲고에서 신음하는 소리가 나며 인기척이 나는 듯 하였다. 순영은 무심코 돌아보았다. 어떤 여자인지 머리는 풀에 흐트러진 채로 땅에다 대고 비벼서 흙과 검불투성이가 되어서, 사람의 머리인지 짐승의 머리인지 분간하기가 어려 울 만큼 되어 있고, 의복이라고 걸치기는 하엿으나 갈가리 떨어져서 울근불근 나오는 때묻은 살을 가리지 못한 채로 금방에 숨 넘어가는 소리를 하면서 순영이 있는 쪽으로 기 어오는 모양이었다. 그 여자는 두 팔과 두 무릎으로 짐승처 럼 기어오는데, 한번 기고 쓰러지고 한번 기고 꼬꾸라지며, 그럴때마다 숨을 모두 거리로 쉬면서 앓는 소리를 하는 것 이었다.

그러면서 이따금 간신히 머리를 들고 순영이 있는 곳을 바 라보아서 얼마나 남은 것을 헤아리는 것이었다. 순영은 그 여자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그의 신 세가 너무도 가엾어서 그의 사정을 물어 보고 다소 도와주 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금방에 숨이 넘어갈 듯한 대철이 있으므로 잠시라도 떠날 수가 없을 분 아니라, 생각도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줄 여가가 없었다. 그리하여 대철의 동정을 살피는 동시에 그 여자를 종종 돌아보았다.

그 여자는 몇 번이나 쓰러지고 몇 번이나 쉬었으며, 그래도 기고 또 기고 하여 마침내 순영의 앞에 와서 그람 쓰러지고 말았다.

순영은 엎친 데 덮친 대로 다 죽어가는 대철이로 하여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앉았는데, 생기라고는 실낱만큼도 없는 여자가 와서 자기 앞에 쓰러지고 본즉, 그 여자에게 대한 가엾은 생각보다 거기 와서 죽지나 않는가 하여서 무섭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대로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후유!"

한참 있다가 숨을 내쉬는 그 여자는 간신히 눈을 떠서 순 영을 보더니, 말을 하려고 입을 달막 거리다가 말할 기운이 없는 듯이 그대로 눈을 스르르 감는다. 얼마를 신고하다가 다시 눈을 뜨면서

"물 좀."

하고 끝을 마무르지 못하는 소리를 겨우 알아들을이 만큼 하고서 도로 눈을 감지 못한다. 순영은 대철이 찾으면 줄 양으로 떠다 둔 물도 있지만, 다른 그릇을 가지고 가서 새 로 물을 떠가지고 와서

"여보세요, 물 잡수세요."

하면서 그 여자를 가볍게 흔들었다.

"응."

소리를 하면서 눈을 떠서 보는 그 여자는 옆으로 누우면서 한팔을 짚고 일어나려 하였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도로 썰지 며 콧살을 찡그린다.

순영은 조금 들여다보다가 물그릇을 놓고 두 돈으로 그 자 를 일으켰다.

"자, 여기 물이 있으니 잡수세요,"

하고 물그릇을 들어서 주었더니 그 여자는 손으로 받으려 고 좋다가 손이 떨려서 받지를 못한다. 그러나 힘없는 눈으 로 순영을 본다.

"에구 가엾어라. 어째 이렇게 되었어요."

순영은 물그릇을 그 여자의 입에 되어 주었다. 그 여자는 몰을 서너 모금 마시더니,

"에구, 참 고마와라. "

하고순영의 손을 잡으려다가 말고 조금 바로 앉더니

"휴우!"

하고 한숨을 길게 쉰다. 순영은 그의 얼굴과 몸을 갈마들 이 보면서 이상하게 참혹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거 기 오래 앉을 수가 없어서 도로 대철의 곁으로 와서 대철의 동정을 살폈다. 그 여자는 순영을 보더니 다시 대철을 보면 서 입을 실룩하여서 무슨 표정을 하더니 것 같았다.

"여보세요?"

그 여자는 기운을 낮춰서 순영을 부른다.

"네?"

순영은 다시금 의심스런 눈으로 그 여자를 본다.

"미안하지만 나 주사 한 방만 주세요."

"주사가 어디 있어요? 우리도 사기가 모자라는데요."

순영은 너무도 뜻밖의 청고에 놀랐다.

"그러시겠어요. 쓰고 남은 주사약에 있을 수가 없겠지요?

남으면 두었다 쓰는 것이니까 남을 줄 것까지는 없지요. 또 남의 주사약을 달라는 염의 도 없겠지요. 하지만 나는 주사 약을 맞고 서 더 살려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오늘 밤을 더 넘기지 못하고 죽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 에게 꼭 할말이 몇 마디 있는데, 이 모양이상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은즉 주사를 한 대 맞아야 말을 하게 되겠습니다. 휴."

그여자는 더 말할 기운이 없는 듯이 머리를 숙인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지만, 하실 말씀이 있거든 그대로 하세 요, 주사는 드릴 것이 없어요.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순영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한다.

"아니에요, 나는 당신에게 대해서 평생에 철천지한이 되는 일이 있는데, 그대로 죽으면 죽은 혼이라도 원혼이 되겠으 므로, 속에 있는 말이나 하고 죽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 우시더라도 한 대만 주십시오. 말을 못하고 죽으면 죽어서 도 지옥으로 가겠어요. "

그 여자는 진정으로 애걸하는 태도가 얼굴에 드러났다.

"평생에 모르는 이가 나에게 철천지한이 되는 일이 무엇이 에요?"

순영은 그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미친 사람이 아닌 가 하고 꺼림칙하다.

"아닙니다. 당신은 모르시겠지요. 속는 셈 치고 도적 맞은 꼴을 보십시오. 아이구 죽겠네. 내가 이 말을 못하고 죽으면 어쩌나, 에구 에구."

그 여자는 입에 거품을 흘리고 쓰러지려 한다.

"아이 참 이게 웬 일일까?"

순영은 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을 보다 거기서 죽으면 어쩌 나 하는 생각으로 정신을 돌리면, 어디로든지 보내고자 하 여서 간직하여 두었던 주사약을 꺼내어서 부랴부랴 한 대를 주었다.

"후유"

하고 한참 있다가 정신을 차리는 그 여자는,

"에구 고마와라, 죽는 때까지 또......"

하고 조금 진정하더니,

"여보세요?"

그 여자는 다시 순영을 부른다.

"네"

순영은 새로운 기색으로 마주 본다.

"나를 모르시겠소?"

"알다니? 어떻게 아나요?"

"그리시겠지요, 이 모양이 되었으니 더구나 몰라 보시겠지 요, 조금도 모르시겠소?

"당초에 모르겠는데여."

순영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

"음성도 모르시겠소?

"음성도 모르겠는데요."

"음성인들 제대로 있을 수가 있나요."

하고 다시 진정하더니,

"당신이 순정씨지요?"

그 여자는 힘없는 입술을 괴롭게 웃으려 한다.

"어떻게 아세요?"

눈을 크게 뜨는 순영은 대답을 기다린다.

"네, 알지요. 그런데 나를 조금도 몰라 보시겠소?"

"조금도 모르겠어요, 누구세요?"

"후유!"

하고 눈물을 그렁그렁하는 그 여자는 침을 삼키더니,

"운옥이라면 아시겠소?"

"운옥이라니요?"

순영은 놀라면서도 다시 의심한다. 무덥던 일기는 다시 선 들선들하여진다.

"운옥이를 모르세요? 하도 오래 되니까 이름도 잊어버렸군요. 당신을 꾀어 가지고 송씨의 집으로 오던 김 운옥이를 모르세요."

그 여자는 순영이 운옥을 모른다는 것을 야속하다는 듯이 말한다.

"네, 그 운옥이야 알고말고요, 그런데 운옥이가 어떻단 말 이요?"

"운옥이가 어떻다니요? 내가 당신을 꾀어 가지고 오던 김 운옥이라는 몹쓸 년입니다."

그 여자는 눈물을 흘리다가 느껴 운다.

"당신이 운옥이라니요?"

순영은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곧이듣지를 않는다.

"나를 보고서는 모르실 겁니다. 신병으로 변형이 된데다가 지금은 귀신이 다 되었으니, 알아보실 수가 있나요. 나는 당 신을 알아봅니다. 이쁘장스럽고 착해 보이는 얼굴 모습이 그대로 있군요. 나는 당신인 줄을 안 지가 오랩니다. 나도 초여름부터 이 위에 있었어요. 당신은 난 줄을 몰랐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당신인 줄을 알았어요. 그전부터 당신을 아 는 체하고서 나의 죄지은 마을 하려고 하였으나 차마 못하 고 있다가, 인제 곧 죽게 되니까 후회하는 마음도 점점 더 하고 말조차 아니하면 후생에 더욱 죄를 받을까 봐서 죽기 전에 말씀을 하려는 것입니다. "

하고 가쁜 숨을 돌린다.

"아! 그런데 다신이 정말 운옥씨에요?"

순영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네, 운옥이기에 운옥이라지요. 내가 운옥이가 아니면 어떻 게 당신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러면 운옥씨가 어떻게 저 지경이 되었소? 가엾기도 하 여라. "

순영은 얼굴을 찡그린다.

"당신에게 적원(積寃)한 죄로 앙화를 받아서 이렇게 되었소. 당신은 그 사이에 나를 얼마나 원망하였겠소."

그 여자는 다시 눈물을 흘린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당신이 내게 무슨 죄를 지었으며, 내가 왜 당신을 원망한단 말이에요?"

순영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운옥이 자기를 인도하여서 송씨에게로 오게 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네, 차차 말하지요. 나의 죄악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말 하지요."

그 여자는 다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가 당싱은 꾀어서 송씨에게로 온 것은 아시겠지여?"

"그거야 꾀어 가지고 왔다고 할 것이 있나요. 내가 오고 싶 어서 온 것이지요."

"그렇게도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내가 꾀지 아니하였으면 그런 데로 오게 되었을 리가 있나요. 그때 일은 전부가 내 가 한 일이요, 송씨가 당신에게 가게 된 것도 내가 한 일이요. 당신이 오게 된 것도 내가 꾀어서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말은 피차에 다 아는 일이니까 더 말할 것이 없 고, 내가 어째서 당신을 꾀어 가지고 오게 되었는지를 모르 시지요?"

"모르지요, 그거야 알 수가 있나요?"

"모르시겠지요, 아실 수가 있나요? 에구, 몹쓸 년이 있을 까, 벌써 죽을 것이 입때 살았지요."

하고 조금 진정하더니

"그전에 우리가 처음 이사 갔을 때에 당신이 한 번 우리 집에 온 일이 있지요? 생각하시겠소?"

"네, 그런 일이 있지요."

"그때 나하고 싸운 일이 있지요?"

"그런 일이 있지요."

"그때 어째 싸웠는지 자세히 아시겠소?

"어째서 싸웠는지 자세히 모르지요. 그저 싸웠던 것은 생각 이 나는군요."

순영은 옛 일을 추억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일을 조금도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그때 당신이 놀러 와서 있을 때에,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나 무라고 때려 주셨어요. 학교 공부를 하다 말고 소리를 배운 다고. 그때에 나는 서울에서 와서 학교 공부를 하다 말고 바람이 나서 가무를 배웠거든요. 그런데 집에서 그것을 알 고서 내가 다니러 간 것을 어머니가 야단을 하고 때려 줬는 데, 그때 당신이 창남이하고 같이 놀다가 내 흉을 보았어요.

그때 우리 동네에 창남이라고 같이 놀던 애가 있었지요. 왜, 그 아이하고 내 흉을 보니까 어머니가 사설을 하여 가며 나 를 더 때렸어요. 저 순영이 같이 얌전한 애의 본을 보라구 하여 가면서 자꾸 때렸어요. 그래 나는 부끄럽고 아파서 자 꾸 우는데 당신은 창남이와 같이 픽픽 웃어 가면서 흉을 보 았지요. 그래서 그때 나는 당신이 어떻게 미운지 몰랐어요.

아무도 없었으면 죽이고 싶었어요. 그래 나중에 당신이 집 으로가는 때에 우리 동리 앞 고개까지 쫓아가서 싸웠지요.

그때 나는 조금 크니까 내가 당신을 때려 주었지요. 그러니 까 당신은 옷을 찢기고 얻어 맞고서 울고 가지 않았어요?

그 뒤에도 앙심 먹은 것이 풀리지 아니하여서 언제든지 당 신을 꾀어다가 나와같이 만들려고 하였어요. 에구, 가빠 죽 겠네. 그러다가 송씨에게 여러 번 말을 하여서 당신을 데리 러 갔던 것이에요. 내가 내가 처음에 당신을 꾀러 갔을 때 가 그래서 왔던 때에요. 그래서 서울로 와서도 송씨가 당신 을 기생에 넣으려고 하는 것을 내가 못 넣게 하였어요. 기 생은 색주가보다 낫거든요. 하니까 아무쪼록 나학 똑같은 색주가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기생에 못 넣도록 난 말 을 하고 시구문안 술집 마님이라고 다니지 않았어요, 그이 한테도 청을 보고 시궁골 김 선달이라고 자주 다녔지요. 그 이한테 청을 넣고 하여서 기생으로 못 넣게 하였어요. 그래 당신이 사숙으로 가무를 배우러 다니게 되어거든요. 그래서 되는 것을 보고서 그러나 배는 모표로 출장을 갔지요..... 에 구, 차차 말을 해야겠다. 그러니 그런 몹쓸 년이 어디 있어요? 아마 당신이 그렇게 된 줄은 모르시겠지요?"

하고 가쁜 숨을 돌린다.

"나는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지요. 그저 당신하고 서울로 같이 온 줄만 아지요. 그런 속내야 알겠어요? 그렇지만 그 때에 당신이 암만 꾀었더라고 내 마음에 없으면 왔겠어요?

내가 즐겨서 온 것이니까, 그 역 내 팔자지요. 누구를 원망 하고 탓하고 하겠어요. 그러나 저러나 그때 일이야 생각해 서 무얼 하겠어요?"

순영은 도리어 운옥을 위로였다.

"당신은 말씀하는 것이 착하기도 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대 한 일이 철천지한이 됩니다 당신은 나 때문에 저런 고생을 하고 나는 당신에게 잘못한 죄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

하고 기침을 쿨룩 거린다.

"그런데 어쩌면 몸이 저렇게 까지 되었어요?"

순영은 얼굴을 찡그린다.

"네, 차차 말씀하지요. 내가 당신에게 지은 죄가 그뿐이 아 닙니다. 정말 더 큰 죄를 지었어요. 다 말씀을 하지요 아이, 그주사 힘이 다하기 전에 말을 해야 할 터인데, 말을 다 못 하고 죽으면 어쩌나, 하지만 숨을 돌려 가면서 해야겠습니다. "

하더니 순영을 보고서,

"미안하지만 나 물 한 모금만 더 주세요?

하고 미안한 뜻을 표한다. 순영은 그릇을 씻고 씻어서 맑 은 물을 한 그릇 가득히 떠다 주었다.

"저이가 바깥양반이지요?"

그 여자는 물을 마시고 나서 말을 계속하며, 턱으로 세상 모르고 누워있는 대철을 가리킨다.

"네, 지금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

"지금은 남편이 아니세요? 그전에는 내외간이었지요?"

"네, 그전에는 내외간이었지요."

"지금은 아무 관계도 없어요?"

"얼마 전 부터 딴남이지요."

"그러시겠지요, 말하자면 저이가 내 남편이지요."

"당신의 남편이요?"

순영은 놀라면서 어쩐 영문인지 모르고 묻는다.

"네 법률상으로 말하면 나의 남편이지요. 나하고 민적이 같 으니까요."

"아!그래요? 어제 그렇게 되었어요?

순영이 말하자 대철은 간신히 머리를 들어서 말하는 사람 을 보려 하였으나 어두운 지가 오랜 눈이라 볼 수는 없었다. "그게 누구요?"

대철은 목 안의 목소리로 물었다.

"네, 나는 난향(蘭香)이요, 당신의 마누라요. 무엇이든지 가 만 있수, 난 당신과 말하기가 싫소."

하더니 다시 순영을 보면서

"내가 전후 사연을 자세히 말씀하리다. 아까 당신을 꾀어낸 것도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보다도 저이에게 대 한 일은 당신에게 말할 수는 없는 죄악입니다. ...... 내가 목 포에 있다가 얼마 안 되어서 함흥으로 가서있게 되었는데, 우연히 저이를 알게 된 바에 차차 가까이 되어서 사세한 이 야기를 들으니까 당신의 남편인 것을 알게 됐지요. 그리고 저이가 원산 바다에서 당신이 빠졌을 때에 건져 주던 사람 이 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자세히 보니 그 사람 은 분명하거든요. 그때에 당신은 물에 빠져서 죽게 되었으 니까 저이의 얼굴을 잘 기억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 보 다 자세히 보았을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처음에 그 사람인 지 저 사람인지 몰랐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사람인 줄 을 알수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딴 문제고, 그때 저이 는 보니까 외양도 괜찮고 금광을 한다고 하는데 어디로 보 든지 그만하면 수수하게 보인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러한 사내가 당신의 남편이 되어서 재미있게 산다는 데는 어쩐지 시기가 나서 견딜수가 없었어요. 나는 당신이 색주가 노릇 을 하다가 타락이 되어 아주 어렵고 고생스럽게 되기를 바 라고 있는 중인데, 색주가를 그만두고 상당한 남편을 얻어 서 깨끗한 살림을 행복스럽게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공연히 가슴에서 불덩이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에구"

하고 물을 또 마시더니 옆으로 대철을 힐끗보고서

"에구, 그래서 당신의 행복을 깨뜨리려고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우선 당신의 남편을 뺏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였 어요, 그러나 나는 당초에 모르는 제하였지요. 당신을 아는 체한다든지 원산서 당신 건져 냈던 일을 아는 체하지는 않 고, 미주알고주알 캐어 물어서 모든 사정 자세히 알았지요.

그리고 저이를 꾀기 시작하엿지요. 꾀나마나 자기가 먼저 나에게 미쳐서 죽으려고 하였으니까, 꾀고 어쩌고 할 것도 없지요, 그래서 나의 소원은 순풍에 돛단 것처럼 성취가 된 것이 아니에요. 나한테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위인을 달 콤하게 꾀이노니 여북이나 잘 될 것이에요. 그래서 필경은 당신하고 이혼까지 하게 한 것 입니다. 그런데 에구.......숨 이 차서 조금 쉬었다가 말을 해야 되겠어요. 주사기 기운이 줄어져 가니까 어디서 말을 해야지."

그 여자는 말을 계속한다.

"그래서 당신하고 이혼을 시켜 놓았으니 나하고 민적을 해 야 할 것이 아니에요 나는 그때까지 정식 결혼을 해 본 일 은 없거든요. 속으로는 화냥년이지만 형식으로는 훌륭한 처 녀였지요. 그래서 저이하고 민적을 하지 않았겠어요. 기가 막혀, 처음에 사귈 대에는 사람이 그럴 듯하게 보이더니, 딱 민적을 해놓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허구헌날 술만 먹고 금광인지 무언지 합네 하고 돌아다녀야 금싸라기 하나 구경도 못하고, 내가 그야말로 고기를 팔아서 모아 두었던 돈 천여원만 요리조리 다 발라먹고 나중에는 아편까지 먹기 시작하였는데, 나보고 아편을 먹으라고 뵈기도 하고 달래기 도 해서 나도 그것을 먹기 시작했지요 나도 병이 없었으면 꾀 잖아 별일이 있더라도 먹지를 아니하였겠지만 여러 해 를 두고 몸을 몹시 가지자 몹슬 병이 들었지요. 그래 그것 을 하고 이 모양이 되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의 더 러운 욕심을 채우려고 그런 모양인데 누가 알았어요. 그것 을 먹을 때 얼마 동안은 내외간에 한 이불 속에 누었으면 밤이 가는 지 해가 가는지 세상이 무너지는지 모르겠더군요. 그런 더러운 행동을 하려고 그런 것을 누가 알았어요.

그러나 차차 인이 박이고 돈이 떨어지니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다가 어찌어찌하여서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서울에 와 서 얼마동안은 잘 있었지요. 하다가 할 수가 있나요. 그래 갈려서 다니는 것이 피차 이 모양이 되었습니디ㅏ. 나는 벌 써부터 여기 와 있었어요. 이 위 골짜기에서 늘 있었지요.

그리하여 당신은 나를 몰랐지만 나는 당신을 알았지요. 저 이도 있는 줄을 알구요. 그랬으나 모르는 체하고서 이때까 지 있었으나 속 마음이야 없겠어요? 언제든지 당신에게 이 런 사죄나 하리라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가, 인제 죽게 되니 까 마지막으로 말씀하는 것이요. 아뭏든 당신은 착하고 어 진 입니다. 저 위인을 끌고 다니다가 이 고생을 하고있으니.

당신은 이생에서는 나 때문에 고생을 하지만 후생에는 극락 으로 가실 거요 나는 이따라도 죽으면 쏜살같이 지옥으로 갑니다. 나도 이렇게 고생을 하다가 죽어야 마땅하고, 저이 도 저렇게 고생하다가 죽어야 마땅하지요. 저이도 곧 죽을 것입니다. 저 모양이 되고서 살 수가 있나요. 저이가 죽은 위 당신은 아무쪼록 복을 받고 사시다가 극락으로 가십니요. 제 더 할말도 없고 주사 기운이 다 되어서말할 수도 없 군요. 순영씨. 부디 부디 복을 받고 오래도래 잘 사세요."

그 여자는 순영을 보고 어디서 나오는지 더운 눈물을 흘리 면서 느껴 울다가 대철을 돌아보면서,

"여보세요, 나는 난향이요, 당신은 난향이라고 해야 알것에요. 나는 당신의 애인이에요, 당신의 아내에요. 당신은 내가 아니면 못 살겠다고 했지요. 나도 당신이 아니면 못 살겠다 고 했지요. 그러던 것이 이 모양이 외었소 그려. 하여간 죽 음을 죽어도 한군데서 죽게 되니 어지간한 내외의 정분이 에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하여도 죽을 땐 착한 생각이 난 답니다. 나도 죽게 되니까 후회가 나오. 다신도 아마 그러리다. 하여간 인생이라고 생겼다가 피차 에 불쌍한 일이요. 우 리가 이 세상에선 영원한 작별이요"

그 여자는 다시 눈물을 흘리고 순영을 보더니

"부디 안녕히 , 우리가 어려서 장난하던 말 한 마디가 이마 한 일을 빚어 냈군요. 부디 복을 받으세요."

그 여자는 도로 오던 데로 기어간다. 순영은 그 여자를 붙 들었다 주었다. 순영은 꿈을 구는 것 같았다.

13.[편집]

순영은 대철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운옥의 말을듣던 동안 에는 한숨만 쉬고있던 대철이 눈물을 흘려서 땅을 적시었다 순영은 운옥에게 대한 말을 물어 보려고도 아니하고 숨기척 을 살혔다. 숨은 점점 가빠지고 이마에는 진땀이 흐른다.

"왜 그러세요? 마음을 진정하세요."

순영은 대철을 위로하였다. 그 말은 듣는 대철은 느끼는 소리를 낸다.

"지금 어니 때나 되었소?"

대철은 조금 진정하어서 혀꼬부라진 소리로 묻는다.

"어둑어둑해요, 아마 여덟시나 되었을 거요."

"주사기가 남았어요?"

"예, 있어요."

"아니, 아까 그 여편네 주었지요."

"그래도 두대 가량은 남았어요. 선생님 쓰실 것도 없이 주 었을 리가 있어요?"

"그럼 한대 맞아 볼까요. 금방 죽을 놈이 주사는 맞아서 무 얼 하겠소만, 나도 좀 할 말이 있으니까."

대철은 덕으로 팔을 가리킨다.

"그리지 마시고 마음을 진정하세요,."

순영은 주사를 주었다.

"나를 좀 일으켜 주시요. 누워서는 가빠서 말을 할 수가 없 겠소."

대철은 고개를 들려고 한다.

"쯧쯧, 이래서 어째요."

순영은 두 팔로 얼싸안아서 조심스럽게 일으켰으나, 대철 은 몸을 가누지 못하므로 순영은 대철을 붙들고 앉았다

"에구,죽겠다. "

대철은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순영에게만 의지하여 있더니

"삼거웃 같이 엉클어진 말을 무슨 말을 먼저 해야 옳은가?" 대철은 몸을 조금 움직이더니,

"여보."

하고 고래를 순영이 쪽으로 돌이키려 하였다.

"예?"

" 나는 오늘 저녁을 못 넘기고 죽소."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죽기는 왜 죽어요?'

"아니요,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내가 알지요. 몇 시간을 지 탱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가 할 말이 있소."

"말을 해야 좋은 말이 아니요. 나는 평생에 죄악을 많이 지 은 놓인데, 당신에게 대하여 더욱 죄악을 맣이 지었소, 그러 한 말이나 하고 죽어야지요..."

침을 삼키고 조금 진정하더니

"여보세요?"

"예?"

"당신이 나보고 내외간도 외어 보고 보고 그렁저렁 같이 지낸지가 십여년이 아니오?"

"그렇지요."

순영은 대철의 말이 옳든 그르든지 듣기로만 작정하였다.

"그런데 나를 어떤 사람인지 아시오?"

"아, 그럼 알지 몰라요."

"아니오, 모르지요. 내가 어디서났으며 어떤 행동은 하던 사람인 줄을 모를 뿐 아니라. 나의 성명까지도 모르지요."

순영은 성명까지도 모른다는 말에 하도 기가 막혀서 말이 없이 대철의 얼굴을 쳐다본다.

"나는 본래 성이 김가가 아니요."

"그럼 뭐에요, 김가가 아니고"

순영은 더욱 놀랐다.

"내 성은 강(姜)가요. 한데 강가 행세를 하는 데도 있지마 는 보통으로는 김가 행세를 하였소 당신하고도 결혼 신고를 하는데는 강가로 하여서 민적에는 강가로 있지마는, 그 외 에는 김가 행세를 하니까 다신도 이때까지 내 성도 몰랐지요." 하고 한숨을 짓는다.

순영은 대철의 말을 들을 뿐이다.

"그런데 성명을 숨긴 까닭은 죄를 많이 짓고 다녀서 피신 하여다니던 까닭이지요. 죄를 지은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대강 말한다면 사기도 하고 횡령도 하고 간통죄도 짓 고 그밖에도 못된 짓을 많이 하여서 늘 피신하여 다니는 까 닭이었지요. 후유..... 내가 죽게된 바에야 무슨 소리를 못하 겠소? 또 당신에게는 평생에 지은 죄를 다 말하고 죽어야 하지요. 에구.... 그리고 나는 본래 함경남도 정평(定平) 사람 이요. 그러나 누구든지 나를 원산 사람으로 알지 정평 사람 인줄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소. 그리고 당신은 나를 은인이 라고 하지만 하여간 당신이 물속에 빠져서 죽게 된 것을 건 져 주었으니까 은인하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당 신은 나를 의협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여서 나를 결혼도 하고 이때까지 히 고생을 하여 가면서 이 모양이 된 나를 끝끝내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요? 그러나 내가 당신을 건져 주던 이야기를 자세히 하리다. 후유...."

하고 숨을 돌리는 동안 순영은 정신을 차려 들으려고 한다. "내가 본래 헤엄을 잘하는 사람요. 그때 그 배에서도 마침 내가 헤엄을 잘 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더러 있었소 그런데 마침 당신이 빠지자 건져낼 만한 사람이 없게 되니까 나를 권하여서 건져내기로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으나 나는 듣 지를 않았소. 까닭없이 내가 애 쓸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건져내라거니 싫다거니 승강이를 할때에 마침 정평 환희사 (歡喜寺)에 있는 여승(女僧) 하나가 거기 있었는데, 나한고 풋낯이나 있는 이였소, 그 여승이 와서 나보고 당신을 건져 주라고 권하는 것을 내가 안 드렀습니까 , 그 여승이 당장 에 돈 삼 십 원을 내놓으면서 누구든지 당신을 건져주면 그 돈을 주겠다고 그러면서 자꾸 나를 권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돈 삼십 원 이 욕심 이 나서 다신을 건져 준 것이요. 당 신을 건져 가지고 나오니까 그 여승이 그 돈 삼십 원을 주 고 수고하였으니 술 사먹으라고 돈 오 원을 또 줍니다. 그 러니 내 가 당신을 건져 주었더라도 은인 될 것도 없고, 의 협이니 홀륭하니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을 분 아니라, 내가 당신을 건져 준 동기로 말하면 비루하여도 못생긴 놈이지요. 그 여승이 아니였으면 다신은 물귀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은인이요, 의협하고 훌륭한 사람은 실로 그 여승 이요. 아이죽겠다.....'

"또 당신에게 장가 들은 이야기를 하지요. 당신이 나에게 은헤를 갚는다고 나하고 결혼할 결심을 가졌으니까 내가 생 각만 있으면 으례 결혼을 하였겠지마는, 내가 당신과결혼한 의사는 실로 당신에게 장가 가고 싶어서 한것은 안니었소 당신이 그때에 돈이 얼마간 저금한 것이 있다고 하기에 그 것을 깎아 먹으려고 한 것이요. 그때도 그러하고, 지금 까지 도 당신은 내가 금광을 한 줄로 알지마는 금광이 무슨 금광 이요. 나는 이때까지 금광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위인이요.

그때도 금광출원을 한다고 하여서 당신의 돈을 있는데로 가 져가고 그후에도 금광을 합네하고 당신의 바느질 품 한돈까 지 긇어 가지 아니하였소? 내가 그러한 놈이요.

그리고 당신과 이혼하게 되던 일은, 아까 난향이라는 여편 네가 와서 다 이야기하였으니까 더 말할 것 없소 그여편내 도 정신이 없으니까 나의행동을 다 말히지 못하였소 나는 모든 죄악을 짓는 중에 당신에게 그러한 죄악을 짓고서도 이때까지 말하지 않고 도리어 당신을 이 고생을 시키고 있 었소, 나는 열 번 죽어도 싸지요 내가 다시 살아난다면 착 한 마음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 보고 싶소마는 만사는 다 내 렸소. 조금 말을 더했으면 좋겠는데......"

대철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거품을 플리면서 쓰러지던 힘없 는 손으로 순영의 손목을 쥐려다 저절로 스르르 놓친다.

순영은 대철이 순이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세히 보 았으나 언제든지 금방에 죽을 것같은 형세를 가지고 있으므 로 그다지 놀랄 것도 없었고 당장에 죽는 다 할지라도 순영 이로서는 다른 도리를 취할 수가 없으므로 그대로 지키고 있을 수밖에는 없는 일이다.

바람에 산들거리고 이룰어진 달이 나무 사이를 통하여 다 리 살아날 기색이 없는 대철의 해쓱한 얼굴을 비춰주는 것 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 처럼 처량하고도 무서웠다.

그 곁에 우두커니 앉아서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이기지 못 하는 순영은 다시금 아까 운옥이의 하던 말과 대철의 하던 말을 되씹어 생각하여 보았다. 세상이라는 것은 무엇이 몇 사람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은 모두 가 그러하고 사람은 누구든지 그러한 것인가? 그러하 면 이 세상사람들은 서로서로 그렇게만 사는 것인가? 자기 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남들이 타고 는 무엇을 다 타고나 지 못하여서 그러한 마음이 없는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세 상 사람이 다 착하고 정직하게 타고나는데, 오직 대철과 운 옥 두사람만이 그렇게 짐승같이 타고났을 리는 없을 것 같 았다. 순영은 대철이 사람같이 생기기는 하였으나 실로는 무슨 짐승이나 아닌가 하고 다시금 그의 시치를 두루 살펴 보았으나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운옥이로 말하면 어 려서 장난으로 한 말 한 마디를 가지고 끝끝내 자기에게 대 하여 불공대천지수를 갚듯이 심사를 놀리고, 대철은 아무런 혐의도리 만한 일도 없건마는 소위 부부가 되어 있으면서도 하나에서 열까지 만사를 속여 온 것을 생각하매, 순영의 지 식으로는 세상 사람이 어떠한 것인지를 도저히 추측할 수도 없었다.

순영은 골똘하게 그 일을 생각하다가 귀착점을 얻지 못하 고 다시 자기를 돌아보았다. 대철과 운옥이 원체가 글러서 그렇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잘못이 있으므로 다만 자기에게 대해서만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하 고 돌이켜 살피기도 하였다. 자기가 운옥과 대철이로 더불 어서 그러한 관계가 생기게 된 근원을 거슬러 본다면, 본래 자기가 운옥을 따라 온 것이 원인이 된 것이요 운옥이 아무 리 꾀더라도 자기의 마음이 없으면 따라 왔을 리가 없고, 따라 오지 않았으면 그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대하여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못된 짓을 하게 한 것이 곧 자기의 허물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하였다. 순영은 이러저리 생각하는 등장 에 자기가 계모 슬하에서 고생하는 것이 싫어서 꿈 같은 허 영을 바라고 믿을 수없는 다른 사람을 따라 온 것이 가슴 아프도록 후회가 되었다. 자기의 본집과 부모를 생각할 때 에 뜨거운 눈물이 샘솟듯 하였다. 순영은 이때까지 가슴에 품고 다니는 어머니의 사진을 내어 보았다. 하도 오래 지니 고 다니어서 피는 줄모르게 피어서 흐려진 얼굴에 달빛이 비쳐서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희미하였다. 순영은 그 사진 을 든 채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대철은 점 숨결이 차고 눈자위가 틀렸다. 수족의 맥은 걷 은 지가 오래지만, 가슴조차 다꺼저가는 거품처럼 잦아가는 모양이다. 순영은 남아 있는 주사 한대를 맞혀 주어 보았으 나, 반딧불처럼 밤짝할 뿐이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나 어디서인지 닭의 소리가 들려왔다. 만호장안은 고요하였다. 사직공원은 죽은 듯하였 다 .다만 한 여자의 느껴우는 소리는 오직 우는 그 사람스 스로 들을 뿐이었다. 쇠잔한 달은 넘어가고 별들은 성기어 지기 시작한다.

14.[편집]

언제든지 여러 사람의 낙원(樂園)이 되어서 웃음과 즐거움 으로만 채워져 있던 사직공장은 그 이튿날 에는 전에 불수 없는 살풍경이었다. 경관들이 경찰의를 대동하고 나와서 검 시를 한다. 경성부의에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수선댄다 하 여서 그들 이외에는 그 근처에도 부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여러가지로 조사한 결과 대철과 운옥의 시 체는 병사한 행려 사망자로 인정이 되어서 부청에서 처치하 였다.

순영은, 대철은 물론 운옥이까지 라도 자기의 힘으로 장사 를 지내 주었으면 좋을 줄로 생각이 있었지마는 워낙 잔약 한 몸이요 장비를 변통할 수가 없는 고로 행려시로 처치하 는대로 맡겨 두는 수밖에 없다.

순영은 대철이 죽고 난 뒤로는 자기의 힘으로 이길 수 없 는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것 같아서 몸과 마음이 없는 것같 이 가벼웠고 한편으로는 항상 대철을 치료하여 주는 것으로 하옴이 긴장되어서, 고생이라면 고생이고 직분이라면 직분 이어서 하여간 의지하는 곳이 있는 것과 같이 지내다가, 마 침내 대철이 없고 보매 친지간에 터럭 끝만큼이라도 아무런 관련되는 것이 없어서 몸이 허전거리고 마음이 텅 비어서 바람이 없이 도는 날아갈 것 같았다. 그리하여 순영은 평지 에서도 비틀거려지면서 풀뿌리나 나뭇가지라도 붙들고 싶었다. 그러나 다만 사람에게만은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순영은 장차 어찌하여야 옮을까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였다. 대철이 없는 바에는 사직공원에 하루라도 머무를 필요 가 없는 일이요, 어디로든지 가자니 넓으나 넓은 천지에 갈 곳이 없었다. 순영은 그전에 있던 자리에서 몇 번이나 앉았 다 일어섰다 하였으나 어디로 향할는지 발이 떨어지지 아니 하였다. 대철을 위하여 시중을 들을 때 는 천병만마가 뒤끓 어 온대도 무서울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어서 공원에 놀러 오는 사람이 모두 한집안 식구들 같이 생각이 되던 것 이 별안간 사람마다 부끄러워서 낯을 들 수가 없고 지나가 는 개별 수풀있는 새들까지 라도 자기에게 덮쳐서 해롭게 만 할 것 같아서 공연히 무시무시하였다.

순영은 입버릇처럼,

"나무아미타불"

을 부르다가 홀연히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건들 어떻게 하여야 좋을지 엄두가 나지를 아 니하였다. 아무 절이나 돌아다니면서 귀의 하기를 원하리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디 알음알음 있어서 그것을 소개한다든 지 길을 가르쳐 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앞길이 캄캄하여서 어두운 밤중에 알지 못하는 사막 가운데에 버림 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하여 홀연히 생각이 돌아서서 대철 과 운옥이 최후에 하던 말을 되씹어보다가 , 대철이 원산 바다에서 자기를 건져 주던 것이 정녕 환희사의 어느 여승 이 돈을 주었던 까닭이라는 일을 생각하다가 그때에 어느 여승이 자기에게 치료하라고 돈 십 원을 주던 일까지 깨닫 게 되었다. 그 생각이 나자 순영은 어두운 길에서 헤매다가 등불을 얻은 것처럼 앞길이 환하게 틔어지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순영은 다른 것을 물을 것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이 환희사를 찾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순영이 하치않은 부등가리나 옷가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안 될 만큼 처치를 하고서 마지막으로 사직 공원을 떠날 때에는 여간 섭섭하지 아니하였고 지긋지긋하게 고생 을 하던 곳이라 일각이라도 속히 떠나고 싶던 그곳이건마는 어찌 그렇게 서운한지. 한 발자국에 돌아보고 두 발자국에 돌아보며 돌아볼 때 마다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순영의 치마저고리는 나무도 없는 가지에 걸리는 것이 같았고 순영 의 발김은 돌도 없는 땅에 채는 듯 하였다.

15.[편집]

순영이 환희사에 이르기는 얼마 뒤에 일이었다. 거기만 하 여도 북쪽이라 그런지 제법 가을 기운이 완연하였다. 일기 도 서늘하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순영이가 환희사 동구에 다다르니 어디서 나는 물인지 티끌 한 점 없 이 흘려내리는 맑은 시내라든지. 아무 걸림 없이 스스로가 고 스스로 오는 뜬구름이라든지, 그러한 것들은 티끌 세상 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서 도무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한다든지, 어느 것을 슬퍼하며, 어느 것을 미워하고 어 느 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세상에서 시시각각으로 볼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당할 수는 있는 그러한 인정 물태는 언제부터 씻어냈는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수풀 사이에서 마음 대로 지저귀로 오락가락 하는 이름모를 새들이나 물결을 좇 아서 거슬러 오르기도 하고 다시 내리기도 하는 보지 못하 던 고기들은 모두가 즐겁고 평화로울 뿐이오. 아무런 다툰 다든지 시기하는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순영은 그러한 새 와 고기들이 자기를 보고 놀라는 것 같을 보는 때에는 더러 운 사람으로 깨끗하고 평화스런 짐승을 놀라게 하는 것은 곧 죄가 되는 것 같아서 숨소리를 죽이고 발자취를 멈추어 보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댕 댕!> 구름과 나무 사이로 울려나오는 종소리를 듣고 바람에 풍겨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향 연기를 맡은 때 에는 절이 가까와 옴을 알면서 순영은 멀지 아니하여 신선 이 되고 부처가 될 것 같았다.

점점 들어가며 절 집의 한편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높이 걸어모신 괘불의 거룩한 상고가 정면으로 보이고 방오깃발 이 풀풀 날리며 장엄한 도량에 가사를수한 중들이 오락가락 하는 것이 사원(寺院)의 풍속을 잘 알지못하는 순영이로도 심상한 때가 아니어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 순간 인간 만사를 저버리고 오직 한줄기 바라는 마 음으로 오던 순영이 홀련히 마음이 움찍하면서 발을 멈추었다. 어디로든지 몸을 감추고 도 싶었다. 도로 돌아서 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주저하다가 이내 장 삼을 입고 근심스런 기색으로 누구를 기다리는 듯이 둥구 길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순영과 눈이 마주쳤다.

"이거 환희사에요?"

순영은 읍을 하면서 공손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 여승은 일어나서 합장을 하고 답례를 하더니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순영을 본다.

"서울서 옵니다. "

"먼 데서 오셨군요. 무슨 일로 그렇게 멀리 오셨어요?"

"별로 볼 일도 없이 오느라고 오는 것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

"좀 앉으시지요."

여승도 앉았던 자리를 조금 비키면서 앉기를 권한다.

"이절에 무슨 일이 있어요?"

두사람이 앉은 뒤에 순영이 말을 꺼낸다.

"네, 이절에 계시던 노장 스님이 한 분 돌아가셨는데. 내일 이 사십구일입니다. 어제부터 삼일재를 지내는 중입니다.

"그럼 부자 스님이 돌아가신 계로군요?"

순영은 공연히 마음을 선뜻하면서 잡히는 것이 없는 듯하 였다.

"아니오, 부자는 아닙니다. 생전에 거룩한 일을 많이 하시 던 스님이라 사십구일재(齎)도 여러 사람이 추렴을 하여 가 지고 사중(寺中)에서 지내 드리는 것입니다. "

여승은 슬픈 기색을 띤다.

"무슨 좋은 일을 그렇게 많이 하셨어요?"

순영은 자기가 찾아오는 그 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마 음이 더욱 선뜻하면서 가슴이 흔들린다.

"좋은 일이요? 여러가지로 많이 하셨어요. 구차한 사람을 건져 주기, 병든 사람들 구원해주기 죽게 된 사람을 살피기 도 많이 하셨지요. 그래서 그 어른을 보살이라고도 하고 생 불(生佛)이라고도 하였지요 그런데 스님이 열반을 하시니까 우리 중들뿐 아니라 속인들도 애통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 스님이 우리 사숙입니다.

여승은 눈물을 씻는다. 순영은 동구에 들어올 때에 생각으 로는 그러한 산골에 있는 절간은 인간 세상과 달라서 그 안 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걱정이니 근심이니 하는 것은 없을뿐더러 눈물같은 것은 이름도 모를 소리라고 생각 하였는데 홀연히 그 여승의 걱정스럽 기색으로 앉았던 것과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서 기이한 생각이 떠들었다. 순영은 자기가 찾아온 여승을 묻고자 하나 어떻게 물어 볼 수가 없다.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형용조차 기억이 분명히 못 하므로 무엇 말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참말문이 막혀 있다가 부득이 자기의 찾아온 일을 처음부터 대강 이야기고 서 그러한 스님을 알겠냐고 물었다.

순영의 말을 자세히 듣고 있던 여승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러면 그것은 물을 것 없이 우리 사숙님 의 일입니다. 우 리 사숙인의 이름은 정공스님이신데 마음이 착하시고 좋은 일을 많이 공(空)보살이라고 합니다. 이 절에 잇는 수좌들로 는 다시 사람 그러한 일을 하실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스님이 금강산에 가셨 다가 오시는 길에 원산 바다에서 열댓살 먹은 계집애가 빠 져서 죽게 되는 것을 헤엄치는 사람에게 돈을 주어서 건져 주고 빠졌던 아이에게 돈을 십원 이나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실 때에는 소승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들었습니다. 두어 달만 앞서 오셨더라도 만나뵈올 것 그랬 습니다. 만나 뵈었으면 피차에 여북이나 반가웠을까요?

여승도 순영을 유심히 보면서 아타깝게 여긴다. 순영은 내 친 거음이라 공보살이 죽었다고 도로 다른데로 갈 수는 없 는 일이요 절에 있자니 의지할 곳이 없어서 적번민하가 조 용안 틈에 여러 사람이 모인 중에서 자기의 전후 사정을 조 금도 숨기지 않고서 자세히 말을 하세요 듣는 이들은 이상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여서 소리를 내어 찬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구나 공수나 공수좌의 권속들은 마치 형제숙질이 나 만난 것처럼 순영을 반기고 붕싸히 생각하였다. 순영은 여러 중들과 서로 상의 하고 공수좌의 상좌가 되기로 하였다. 순영이 중이 되기 전에 약간의 향촉을 판비하여 대철의 망 령을 위하여 불공을 하였다. 축원에는 김대철과 김난향이 를 양주(兩主)라고 써 주었다. 그리고 수복도 축원을 하여주 었다.

이튿날은 공수좌(空首座)사십구일재의 회향(回向)날이었다 꽃과 향등, 모든 것으로 청정하고 엄숙하게 장엄한 도량에 서 종이 울자 모든 의식은 시작되었다. 향을 불사르고 차를 드리는 가운데서 맑고도 한가하게 우러나오는 범패(梵唄)소 리는 유주 무주 애혼 불자(有主無主哀魂佛子)등 열명영가(列 名靈駕)들까지 상품연대(上品蓮臺)로 인도하였다.

그러한 중에서 순영은 머리를 깎고 먹물 들인 옷을 갈아입 었다. 그리고 우선 오계(五戒)를 받았는데 중의 이름은 선행 (善行)이라고 지었다.

16.[편집]

밤에는 설법이 시작되었다. 안변 석왕사(安邊釋王寺)에 가 신 유명한 덕암(德庵)스님이 거룩한 위의로 사자좌(獅子座) 에 올라서 주장자를 한 번 꽝하고 내린 뒤에, 동수좌의 영 가를 위하여 사자후( 獅子吼)를 하신 뒤에

"지금부터는 새로 득도(得度)한 선행수좌를 위하여 말을 하 겠다."

고 전제하고 설법을 계속하였다.

"선행수좌는 과거부터 불연(佛緣)이 깊은 사람으로 이 세상 에서 위대한 일을 행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선행수좌의 한 일이 어째서 위대한 줄을 모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선행 수 좌가 사람 같지 않은 남편을 위하였다든지, 못난이아편 장이를 위하여 일생을 희생하였다고 도리어 선행수좌를 웃 고 비평할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단코 그 렇지 아니하다. 선행수좌가 김 대철에게 행한 일은 순전히 아내로서 남편을 위한 것이라든지 판단이 부족하고 못 생겨 서 무의식적으로 복종을 하였다든지 그러한 것은 아니다.

선행수좌는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순진한 보은(報恩)의 간 념과 불행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아름다운 덕으로써 자기 도 모르게 행한 것이다. 선행수좌는 무슨 종교적 수양이 있 다는지 학문적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교양적(敎瀁的) 으로 행한 것도 아니오 또는 명예를 위한다든지 무슨 보응 (報鷹)을 바라고서 한 것도 아니다. 다만 타고난 천품으로 행한 것이다. 육체로나 정신으로나 도처히 참을수 없는 어 려운 일을 능히 행한 것이 얼마나 굳센 일인가? 하물며 연 약한 여자로서 참을성이 있는 일인가. 사람이 일개인을 위 하여 것이 나 사회를 위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것이나 소 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행하는 사람으로서 백절불굴 난행 고행의 정신을 가져야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국 가나 사회를 위하여 희생한 것이라고 더 크고, 개인을 위하 여 희행한 것이라고 더 작은 것은 아니다. 그 결과만이 달 라지는 것이요, 행하는 원인 곧 행하는 사람의 희생적 정신 이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근일의 인정세대를 보면 가련한 일이 많지 아니한가. 당당한 대장부로서 무슨 주의니 무슨 사상이니 하고 천 하 만사를 자기 혼자서 지도할 듯이 큰 소리를 치다가도, 어느 겨를에 찬 재처럼 죽어져서 아침의 지사(志士)가 저녁 의 천(賤)장부로 어제의 주의자가 오늘의 반대주의자로 변하 여서, 자기의 일신의 이해와 고락만을 따라서 변하는 도수 가 고양이 눈보다도 더 심하지 아니한가. 그런데 선행수좌 는 <약한자야, 너의이름은 여자니라> 하는 별명을 듣는 여 자로서 아무런 교양도 없이 다만 아름다운 천품으로 세상 사람들이 참을수 없는 모든 고통을 참아가면서 은혜를 갚기 위하여 순진한 자비심으로 많은 성상(星霜)을 희생한 것이 어찌 위대하지 아니하리요. 세상 사람은 은혜를 입을 때에 는 감사히 생각하지만, 지내고 나면 그 은혜를 기억하는 사 람조차 드문 것이다. 은혜를 잊지만 아니하여도 무던한 일 이거늘, 그것을 갚기위하여 모은 유혹과 모든 굴욕을 다 피 하여 감녀서 행복의 전부를 보은의 제물로 바친 것이 위하 여 모든 유혹과 모든 제물로 바친 것이 위대하지 아니하면 어떤 것이 위해하리요. 만일 자리를 바꾸어서 선행수좌로 하여금 국가를 위하게 되었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만한 희생 을 하여 가며 끝까지 나아갔을 것이고, 무슨 주의자나 사상 가가 되었다면 시종일관 생명을 내기하더라도 변함이 없어 서 원숭이 같은 신사들을 부끄러워 죽게하였을 것이다. 선 행수좌와 같은 이는 실로 위대한 인물이다."

법사는 차를 마시고 엄숙하게 듣고 있는 대중을 돌아보고 서 말을 계속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할는지 모른다. 선행수 좌의정신은 아름답다 할지라도 그러한 희생적 정식을 바친 대상, 곧 김 대철이라는 사람, 그러한 부도덕 무의리한 중에 아편 중독 까지 되어서 사회에까지 해독을 끼치는 그러한 위인을 위하여 공연히 일생을 희생하는 것은 그다지 칭찬할 일이 못될 뿐 아니라, 도리어 사회에 대한 악영향을 조장한 것이 아니냐고 도리어 비방을 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러나 은혜를 갚는 데와 자비를 베푸는 데는, 그 사람의 인 격과 경우를 저울질하여서 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김 대철이로 하여금 인격이 훌륭하고 처지가 유여하였다면 선 행좌수로서 은혜를 갚을 만한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희생 적으로 갚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김 대철 이가 아무리 인격이 부족하였다 할지라도 물에 빠져서 죽게 된 선행수좌 를 건져 준 것만은 사실인즉 선행수좌의 은인이 된 것은 확 실하고 또 불행히 아편중독자가 되어서 스스로 살아나갈 수 가 없이 되었은즉, 그야말로 선행수좌로서는 은혜를 갚고 자비를 베풀 만할 기회가 된 것이다. 그러한 기회에 진정으 로 힘을 다하여 도와 주는 것이 아름답고 위대하다면 위대 한 일이 아닌가. 세상 사람은 순경(順境)에 처한 사람을 위 해서는 그러한 마음이 없을뿐더러, 도리어 세상 사람으로서 함부로 의 넌할 바라 아니다.

우리 불교는 이타(利他)를 주장하는 고로, 부처님의 대자대 비는 사람뿐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다같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이것은<대장엄경론(大 莊儼經論)>에 있는 말인데 옛적에 한 비구(比丘)가 밥을 빌 러 다니다가 구슬 만드는 집에 가서 밥을 빈즉, 구슬 만드 는 사람이 마침 그 나라 임금의 부탁으로 마니주(摩尼珠)를 갈다가 밥을 가지러 들어간 사이에 마당에 있던 거위가 그 구슬을 먹을 멋으로 알고 삼킨지라 주인이 나와서 구슬이 없음을 보고 비구를 의심하고 책망하는지라, 비구는 거의를 죽일까 염려하여서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주인이 비구를 몹시 때려서 입과 귀에서 피가 흐른즉 거위가 그 피를 먹는 지라 주인이 노염을 옮겨서 거위를 때려죽이거늘, 비구가 게송(揭頌)으로 자기가 거의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으려다가 도리어 거의를 죽인 것을 판단한즉 주인이 거위의 배를 갈 라 구슬을 얻고 뒤에 비구에게 참회하였는데 그 비구를 아 주(餓珠) 비구라 일컬었다.

이것은 생명이 있고 의식이 있는 거위를 위하여 한 일이거 니와, 부처님 당시에 초계(草契) 비구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일찌기 도적을 만나서 풀로 묶인 바 되었으나, 풀이 상하까 두려워하여서 풀을 끊고 일어나지 못하게 그대로 있 더니 마침수레에 내려서 손수 묶은 것을 끌러 준 일이 있는 데 이것은 다 세상 사람의작은 소견으로 측량할 만할 수 없 는 일이거니와, 거위나 풀을 살리기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 는 불교의 대자대비도 였거든, 하물며 사람이며 게다가 자 기를 살려낸 은인에게리요, 선행수좌는 불연이 깊은 사람인즉 불교로 들어는 것이 마 땅하고 지금 오서 보면 진정한 은인이 김 대철이보다 공수 좌님이라, 글의 상좌가 되는 것이 또한 마땅한 일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