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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발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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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界全地 及倂東北諸夷 起于唐玄宗癸丑 亡于後唐莊宗丙戌 傳世三十王 以後無攷 歷年二百十四年 요(遼) 땅 전체와 동북의 오랑캐까지 아울렀다. 당 현종 계축년에 일어나 후당 장종 병술년에 망하였다. 13대 왕에 이르렀으나, 그 후는 알 수 없다. 214년간 있었다.
왕계도
왕계도
朴齊家序
余嘗西踰 鴨綠道 靉陽 至遼陽 其間 五六百里 大抵皆大山深谷 出狼子山 始見平原無際 混混茫茫 日月飛鳥升沈于野氣之中 而回視東北 諸山環天塞地 亙若畵一 向所稱大山深谷 皆遼東千里之外障也 乃喟然而歎曰 此天限也 夫遼東天下之一隅也 然而英雄帝王之興 莫盛於此 盖其地接燕齊 易覘中國之勢 故渤海大氏 以區區散亡之餘 劃山外而棄之 猶足以雄視一方 抗衝天下 高麗王氏統合三韓 終其世不敢出鴨綠一步 則山川割據得失之跡 槪可以見矣 夫婦人之見 不逾屋脊 孩提之遊 僅及門閾 則固不足語垣墻之外矣 士生新羅九州之內 錮其目而廢其耳 且不知漢唐宋明興亡戰亡之事 而况於渤海之故哉 吾友柳君惠風 博學工詩 嫺於掌故 旣撰二十一都詩註 以詳域內之觀 又推之爲渤海考一卷 人物郡縣世次沿革 組縷纖悉 錯綜可喜 而其言也 歎王氏之不能復句驪舊疆也 王氏之不復舊疆 而鷄林樂浪之墟 遂貿貿焉自絶於天下矣 吾於是有以知前見之相符 而歎柳君之才能審天下之勢闚王覇之略 又豈特備一國之文獻 與胡恢馬令之書 契其長短而已哉 故序而論之如此 上之九年秋
박제가의 서문
나는 일찍이 서쪽 압록도(鴨綠道)를 건넜다. 애양(靉陽)에서 도양(遼陽)에 이르기까지 5~6백리는 대체로 큰 산과 깊은 골짜기였다.
柳得恭序
高麗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也 昔者高氏居于北 曰高句麗 扶餘氏居于西南 曰百濟 朴昔金氏居于東南 曰新羅 是爲三國 宜其有三國史 而高麗修之是矣 及扶餘氏亡 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 是謂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而高麗不修之非矣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 其所有之地何地也 乃高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其北而大之耳 及夫金氏亡大氏亡 王氏統而有之 曰高麗 其南有金氏之地則全 而其北有大氏之地則不全 或入於女眞 或入於契丹 當是時爲高麗計者 宜急修渤海史 執而責諸女眞曰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乃高句麗之地也 使一將軍往收之 土門以北可有 執而責諸契丹曰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乃高句麗之地也 使一將軍往收之 鴨綠以西可有也 竟不修渤海史 使土門以北鴨綠以西 不知爲誰氏之地 欲責女眞 而無其辭 欲責契丹 而無其辭 高麗遂爲弱國者 未得渤海之地故也 可勝歎哉 或曰 渤海爲遼所滅 高麗何從而修其史乎 此有不然者 渤海憲象中國 必立史官 其忽汗城之破也 世子以下奔高麗者十餘萬人 無其官則必有其書矣 無其官無其書 而問於世子 則其世可知也 問於隱繼宗 則其禮可知也 問於十餘萬人 則無不可知也 張建章唐人也 尙著渤海國記 以高麗之人 而獨不可修渤海之史乎 鳴呼文獻散亡 幾百年之後 雖欲修之 不可得矣 余以內閣屬官 頗讀秘書 撰次渤海事 爲君臣地理職官儀章物産國語國書屬國九考 不曰世家傳志 而曰考者 未成史也 亦不敢以史自居云 甲辰閏三月二十五日
류득공의 서문
고려(高麗)가 발해(渤海)의 역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高氏)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高句麗)라 하였고, 부여씨(扶餘氏)가 서남쪽에 거주하여 백제(百濟)라 하였으며, 박(朴)·석(昔)·김씨(金氏)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新羅)라 하였으니, 이들이 삼국(三國)이 되었다. 마땅히 삼국의 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하였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차지하여 발해(渤海)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南北國)이 된다. 마땅히 남북국의 역사 있어야 했음에도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차지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크게 넓혔던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王氏)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다.(고려는) 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차지하였지만, 그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차지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女眞)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契丹)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때 고려를 위하여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급히 발해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가지고 “왜 우리에게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라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토문강(土門江) 북쪽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를 가지고 “왜 우리에게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거란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압록강(鴨綠江) 서쪽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발해의 역사를 편찬하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여진족을 꾸짖으려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누군가 “발해는 요(遼)나라에 멸망되었으니 고려가 어떻게 그 역사를 편찬할 수 있겠는가?”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발해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史官)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이 격파되었을 때 세지 이하 10여 만명이 고려로 도망해 왔다.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도 없고 역사서도 없다고 하더라도 세자에게 물어 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은계종(隱繼宗)에게 물어 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10여 만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張建章)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할 수 없었단 말인가? 아,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얻을 수 없구나. 내가 내각(內閣)의 관리로 있으면서 궁중 도서를 많이 읽고, 발해의 역사를 편집하여 임금, 신하, 지리, 직관, 의장, 물산, 국어, 국서, 속국 등 9고(考)를 만들었다. 이를 세가(世家)나 전(傳), 지(志)라고 하지 않고 고찰한다는 뜻의 고(考)라 한 것은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는 것이다.
갑진년(1784) 윤3월 25일
引用書目
舊唐書 劉煦
新唐書 宋祁
五代史 歐陽修
宋史 脫脫
遼史 脫脫
資治通鑑 司馬光
三國史 金富軾
高麗史 鄭麟趾
東國通鑑 徐居正
續日本紀 管野朝臣眞道
日本逸史
通典 杜佑
通志 鄭樵
文獻通考 馬端臨
文獻備考
大明一統志
淸一統志
盛京通志
萬姓統譜 凌迪知
永順太氏族譜
輿地勝覽
全唐詩
인용서목
구당서 유후
신당서 송기
오대사 구양수
송사 탈탈
요사 탈탈
자치통감 사마광
삼국사 김부식
고려사 정인지
동국통감 서거정
속일본기 스가노아손노마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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