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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제4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1

우등불이 밤을 태운다-
무쇠같이 장백을 내려누르는
캄캄한 밀림의 밤을!
끝없이 몰아 죄여드는 모진 어둠
머리 속에도 흑막이 드리운 듯-
허나 불길은 솟고
불꽃은 튀고
속아서는 태우고 죽고
죽고는 또 솟거니
이름모를 결사의 싸움이
이 밀림 속에 벌어진 듯.
빨찌산 우등불-
어느 때 한 번 사람이
그 불길에 두 손을 쬐였다면
어찌 줄달음치는 피 속에서
생을 읊조르는
그 기쁨이 식어질 수 있으라!
어느 때 한 번 사람이
그 불꽃튀는 소리 들었다면
어찌 그 소리소리
마음의 줄을 울리며
희망과 신념을 길이 일으키지 않으랴!
빨찌산 우등불-
그것은 집이였고 밥이였다
그것은 달콤한 잠자리였고
그것은 래일의 투쟁-
하물며 ≪토벌≫의 철망을 헤치고
사지를 육박으로 지났으니
그것은 승리의 상징,
야반의 노도 속
반작이는 구원의 등대!

2

초병들도 긴 하품에
눈시울이 아파질 무렵
빨찌산부대 깊은 잠 들다
이슬 속 고달픈 이 잠자리
몇날 만에 발 펴게 되었느고?
어제날의 상처 아직도 저리지만
나흘째나 굶주렸지만
또 앞날의 길 즐펀하지만
이 밤엔 우등불이 붙거니
깊은 잠 안식의 잠-
그런데 한 분만이 잠 못들고
우등불 옆에 비스듬히 앉아
밤가는 줄 모르네-
이런 밤엔 그이는 책을 보았다-
봄날의 아지랑인 양
희망이 멀리서 한끝 부필 때도
그이는 책을 보았다.
불안의 구름장이 가슴가에 낮게 떠돌고
어느 구석에선가 절망이 머리 들 때도
그이는 책을 보았다-
그러면 새 힘을 얻고 목적을 보았다.
혁대를 남비에 끓이는 냄새
주린 창자를 놀라게 할 때도
이 책을 보았고
먼 옛날 그이의 어린 시절이 흘러간
어느 때나 그리운 고향의 옛집-
다복솔에 덮인 뒤산 밑
그 쓰러져가던 옛집이
세월과 망각을 헤치고 또렷이 떠오를 때도,
또 어느 봄날 부엌에서
미음드레 가리며 함숨짓던
수심에 어린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의 쪽문을 열고 들어설 때도
그이는 책을 보았다-
그러면 새 힘을 얻고 목적을 보았다.
이 밤에도 글줄을 밟으며
훨-훨- 걸어가는 생각-
≪우리 비록 적지만
우리 비록 굶으며 피 흘리지만
인민이 우리를 받들거던,
신세의 성벽을 영원에 뻗치며
부르이와 침략을 우리 물리치거던,
백일하에 빛나 빛나는
창조의 휘황한 성진이
백두에 퍼지여 누리에 비치노니
우리의 신념은 크나큰 화염이 되어
캄캄한 조국의 땅 밝히리라!
내 이렇게 마음조려 기다리는
식량부대도 돌아오리!
철호의 소식도 내 들으리!≫
밤새도록 어둠과 싸우던 우등불도
휴전인 양 수그러졌는데
오로지 그 옆에 앉았던 한 분만이
가볍게 일어서며
≪어! 날이 밝는구나!≫
동편 하늘은
새벽을 이룩이룩 걷어 이고
쉽사리도 일어선다, 일어선다!

3

그렇게 기다리던 식량부대
아침에야 돌아왔다-
얻은 것이란 소 두 마리뿐,
나물죽 생각만도
두 가슴을 재는 듯 파내리거니
대장도 알기 전에 소잡을 차림 서둘렀다-
씩-씩- 칼도 갈고
모닥불도 푸- 푸 피우고.
대장이 왔을 때는
모여든 빨찌산들 눈살에
소 두 마리도 어둥지둥
정신부터 잃은 듯-
목재소 일본소로는 살도 푸둥 굴레도 호함졌다.
≪소는 어디서 가져왔소?≫
대장의 묻는 말.
≪삼밭골 목재소 어구에서…≫
소대장 순선의 대답.
대장은 굴레를 보았다-
동전을 단 굴레.
수놓은 굴레… 아낙네의 솜씨
독특한 코뚜레- 민족의 이색-
어김없이 일본소는 아니다
≪동무들!
우리 빨찌산들이
어느 때부터 마적이 되었는가?
어느 때부터
평민의 재산을 로략했는가?
이 굴레를 보라-
이 소는 조선농민의 소다
저 소는 중국농민의 소다≫
이렇게 김대장이 말했다.
이것은 소를 돌려보내라는 명령
이것은 산채를 캐여
아침 하라는 명령.
빨찌산들이 산채를 듯보며
산조하듯 퍼졌을 때
살진 소 두 마리
가담가담 풀을 뜯으며
산등 타고 마을로 내려간다,
어떤 화를 지날지도 모르며
또 어떤 불행 있을지도 모르며…

4

빙- 둘러선 빨찌산들…
그 앞에 말없이 선 김대장…
머리 우에 휘도는 싸늘한 기운
가을서리 내리듯.
아침해발도 내리듯.
아침해발도 눈치채고
밀림으로 삼가 기여드는 듯-
≪뉘가 소를 죽였는가?≫
대장이 낮게 묻는다.
≪… … …≫- 군중은 잠잠
≪뉘가 소를 죽였는가?≫
낮고도 얼구는 목소리.
그래도 대답은 없었다
높다란 침묵이 잉-
빨찌산들 고막을 친다
≪사령관동지!
제가 죽였습니다…≫
한걸음 나서며 말하는
청년빨찌산 최석준.
≪네가?≫
빨찌산들이 놀란다
싸움에서도 대담한,
척후로도 이름있는 석준이…
더없는 전우라던 석준이…
≪네가 어찌?≫
빨찌산들이 더 분해한다.
새파랗게 고민에 질린
땅에 수그러진 그의 낯-
≪사령관동지도 우리도
나흘째나 굶게 되니…≫
그러나 군중 속에서 누군지-
≪응, 변명을 하는구나!≫
또 누구지-
≪너는 명령을 거역했다!≫
소대장 순선이 주먹을 들며-
≪너는 일제를 도와준다!≫
석준이 번쩍 머리 들며-
≪일제를 도와준다고?≫
석준이 번쩍 머리 들며-
≪일제를 도와준다고?≫
≪그렇다!≫
≪내가?≫
≪그렇다, 네가!≫
≪아니 내가≫
일제를 도와 준다고≫
≪그렇다 네가! 네가!≫
≪그렇다면…≫
잘칵- 총 재우는 소리
≪자, 나는 죽어 마땅하니…≫
석준이 총박죽을 내민다,
≪기척!≫- 대장의 호령소리
철판으로 밀림을 들부시는 듯
빨찌산들은 선 자리에 붙은 듯
오로지 무거운 침묵만
꽈악 뚜껑인 듯 내려누르고

5

≪가마 속의 물은 끓다가도 없어진다-
원천이 없거니-
허나 내물은 대하를 이룬다.
동무들!
우리는 대하가 되련다 바다가 되련다
우리의 근간도 민중 속에,
우리의 힘도 민중 속에 있다!
민중과 혈연을 한가지 한
빨찌산임을 우리 잊었는가?
우리 이것을 잊고
어찌 대사를 이루랴!
민중과의 분리-
이것은 우리의 멸망,
이것은 일제들이 꾀한다
우리 이것을 모르고
어찌 대사를 이루랴≫
기척해 선 빨찌산들
쩌엉- 가슴을 가르고
치밀어솟는 의분!
≪이제도 죄책을 모르겠는가?≫
석준에게 대장이 하는 말.
≪압니다!≫ 석준의 대답.
첫서리 맞은 풀-
그것도 이것보다는 생생하리…
≪나는 죄책을 잘 압니다≫
석준의 떨리는 목소리…
재가 내여돋은 입술…
허나 이제도 처벌의 고개
어떻게 석준이 그 고개 넘으려나!
빨찌산들은 잘 안다
오직 한 가지뿐-
≪총살≫
폭풍우 전 짧은 순간…
침묵…침묵…침묵…
≪임자를 찾아 소값을 주라!≫
이렇게 명령하고
대장이 돌아선다.
새파랗던 석준의 낯에
몇 줄기 붉은 빛,
빨찌산들의 낯에도
해발이 비친다.
어떠한 커다란 충직과 신념이
빨찌산들의 가슴에 드러누워
툭-툭 어리광치듯
심장을 쥐여박는다.

6

빨찌산부대 열흘 만에
동남으로 길 떠났다,
산촌사람들도 승벽내여
식량도 걸메올리고
부상된 전사도 치료하고
소대장을 몇십 리 보내여
≪토벌대≫도 홀려가고-
허지만 밤마다 밤마다
대장은 잠 못들더니
어느날인가 약재 짊어진
로동복 입은 중로인이 왔을 때
작은 지도 대장의 손에 쥐었더니
그 이튿날 아침
동남으로 길 떠났다.
동남의 길-
앞에는 고개 뒤에 또 고개
골짜기도 많고 멀기도 하련만
어느 뉘가 괴롭다 하랴!
어느 뉘가 뒤서자 하랴!
앞으로! 앞으로!
승냥이도 추위에 얼어죽는 때
빨찌산들이 이 길을 그리였다-
그러면 새 움이 마음속에 자라났다.
나날이 주림이 모지름할 때도
빨찌산들이 이길을 그리였다-
그러면 큰 낟가리 가슴속에 자라났다,
돌아갈 길이 잡초에 막히고
마음 한바닥에 재만 무질 때도
빨찌산들이 이 길을 그리였다-
그리면 희망의 모닥불이
앞길을 가리켰다.
동남의 길-
자나깨나 그리던 이 길,
죽어도 한 번은 가겠다던
살아서 살아서 못간다면
죽어서라도 기어코 가겠다던
조국으로 가는 길, 싸움의 길-
빨찌산들이 길 떠났다
동남으로 길 떠났다.
앞으로! 앞으로! 오오! 앞에는
압록강! 압록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