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공무한/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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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의 선물로서 하얼빈교향악단의 공연같이 거리에 자자한 파문을 일으킨 것은 없었다 신문의 선전이 . 야단스럽고 골목 골목에는 포스터가 찬란하게 나부꼈다. 사람들은 포스터 앞에 서서 그 가을의 선물에 신선한 구미를 북 돋우고 있었다.

찻집에서들 만나면 공연의 곡목을 앞에 놓고 어중이떠중이 비판과 이야기 에 정신이 없었다.

“일마의 공이 적지 않어. 서울에 교향악단이 다 오게 됐으니.”

“일마의 공두 공이지만, 시민 전반의 교양이 높아졌다는 좌증이 아닌가.”

“아무렴, 서울이 어떤 문화도시게. 동경 다음엔 가리. 이런 때 일마의 맡 은 일이 중요하단 말야.”

“곡목에 이의가 있네. 누가 좋아한다구 베토벤은 이렇게 많이 넣었을까.

사람의 혼을 온통 뽑을 작정이래두 베토벤에 속을 사람은 없거든.”

“오라, 자넨 모차르트를 좋아했겠다. 베토벤 반대일젠.”

“암, 세상에 모차르트 이상 가는 음악가가 있겠나.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그리고 쇼팽 ── 음악가치구야 그들이 제일이지. 베토벤은 미치광이야. 음 악가다운 음악가는 아니야.”

“그건 자네 취미, 그런 경솔한 판단을 내리다간 땅속의 베토벤에게 꾸중 을 당하리. 어서 주제넘은 소리 말구 공연이나 들어보구 말하세 그려.”

남을 비판할 때의 사람은 항상 자기의 교양이 본위요 제일이다. 아무리 위 대한 고전을 가져와도 자기 비위에 비치워 암팡지고 대담한 비판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또한 즐거운 개인의 자유이기도 한다. 하기는 이것도 이 곳 의 음악 교양의 전반적 향상의 증거라면 반가운 일이 아닌 것도 아니다.

공연이 성황을 이룬 것이 반드시 향상의 예증은 아닐는지 몰라도 첫날밤 공연의 성황은 사실 특기할만한 초유의 것이었다. 수천의 음악의 팬들이 회 장 안에 그득히 모여들어 거리의 교양의 정도를 그 외래의 단체에게 보였음 은 통쾌한 일이었다. 원래의 그들의 수고를 위로하는 방법으로 그에 미치는 것이 없었다. 만당의 갈채가 일단을 더없이 기쁘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일마와의 사건이 있고 훈과의 갈등을 가지게 된 단영은 그 후 여러 날동안 이나 겸연한 마음에 두문불출 아파트에만 박혀 있다가 오래간만에 거리로 나온 것이 마침 공연의 첫날밤이었다.

사실은 명도가 여러 날 째 찾아와서 단영의 잠잠한 자태를 보고 영문을 몰 라 궁금히 생각하던 중 그날도 음악회의 초대권을 준비해 가지고 일찍부터 찾아왔던 것이었다. 단영의 심사로는 벌서 명도의 앞에서도 부끄러운 생각 이 나서 그와의 동행을 주저한 것이나 강잉한 청에 마지못해 함께 나온 것 이다.

일마와의 비밀을 가지기 전에는 명도에게 대해서 대담하고 뜻대로 행동하 던 단영도 오늘에는 풀이 없고 기가 죽어서 별반 거역이 없이 그의 말대로 쫓았다.

회장의 화려한 공기는 단영에게는 지나쳐 현옥한 것이었다. 수천의 얼굴들 속에는 물론 자기를 아는 얼굴도 많았던 것이며 그들이 모두 자기한 몸의 비밀을 눈치채고나 있는 듯이 보여서 단영은 저린 제 발에 얼굴도 의젓이 쳐들지 못했다. 많은 시선이 오고가는 속에 명도와 짝지어 않은 것부터가 유쾌한 일은 아닌데다가 자기를 알아보고 찬찬히 살피는 시선 앞에서는 더 욱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미 군중 속에 나타났다는 것이 뭇사람의 눈에 띠자는 뜻이 아니 었던가. 응당 일마를 만나게 되었고 이층 방 한구석에서 훈을 발견하고 또 다른 좌석에서 미려와 혜주의 일행을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마는 그날 밤 공연에 관계되는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아래층 앞 자리에 나아자와 나란히 앉아 무대 위 단원의 연주를 열심히 바라보는 것이 었다.

무대 위에서는 검게 단장한 수십 명의 단원이 밝은 등불을 받고 그 무슨 신령스런 일단 같이도 보인다. 신령스럽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 각각가진 악기들이 조화되어서 영감의 음률로서 참으로 신령스런 감동을 자아내게 했다. 지휘자의 손짓 하나로 영혼의 목소리가 무수한 악기에서 새어나와 조화 되었다. 고전작가의 명곡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서 후대에 다시 살아나 감동 을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무대만을 바라보며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한 장내에 베토벤의 「운명」의 선 율이 우렁차게 고요하게 흘러왔다. 음악은 실생활의 감동을 전달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운명」의 암시에 혼을 뽑히운 듯 조용한 속에서 감동에 사 로잡히고 있었다. 운명의 문은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사람의 뜻대로는 휘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무서운 의지에 농간을 당해 사람들은 다만 웃고 울고 할 뿐이다. 수천의 청중은 「운명」의 곡조에서 자신의 운명을 반성하며 울 고 혹은 웃으러 온 셈이다. 곡조를 따라 웃지 않는 사람, 울지 않는 사람이 누구였으랴, 사람의 운명은 거개가 이 두 가지 요소 위에 섰는 것이다.

제이악장의 고요한 울음이 끝났을 때, 단영도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었다.

삼악장, 사악장까지를 울가망한 심사로 듣고 났을 때 알 수 없는 피곤이 전 신을 엄습하며 현기증을 느꼈다. 아직도 제일부의 연주가 채 끝나지 않았건 만 명도를 그대로 앉힌 채 단영은 잠시 자리를 떴다.

그러나 운명에 우는 사람은 단영만은 아닌 듯 그가 사람 속을 헤치고 휴게 실로 나왔을 때 막 앞에서 나온 것이 미려와 혜주가 아니었던가. 그들 역 피곤한 마음에 잠시 자리를 일어선 모양이었다.

단영은 웬일인지 그들에게 그 자리로 동감을 느끼며 가까이 갔다. 외에 별 로 사람들이 없는 휴게실은 외딴 것같이 고요하다. 단영은 물론 미려와 면 목도 있었으나 같은 음악의 같은 감동 속에 잠기고 있는 그 당장에서는 더 욱 친밀한 동무가 아닐 수 없다. 친밀한 태도로 미려의 앞에 자리를 잡은 것이 극히 자연스럽게 보였다.

“운명의 맛이 지독하죠. 사람의 혼을 제멋대로 뒤흔들어 놓는 것이 무서 운 심술쟁인가 봐요.”

단영의 말에 미려도 그를 주의해 보면서 익숙한 낯을 지었다.

“운명에 쫓겨 나오셨수. 운명에 거리면 대담하고 용감한 사람이 없는 모 양이지. 당신 같은 분이 다 하소연을 할 젠.”

“내가 그렇게두 용감해 보이나요. 내 생각으론 제일 약한 사람만 같은데.”

말하면서도 단영은 사실 자기가 약한지 강한지를 헤아릴 수 없었다. 몰염 치와 만용으로 물과 불을 헤아리지 않고 부딪쳐감이 참으로 강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행동 다음에 오는 실망과 번민은 대체 무엇인가. 단영은 자 신을 도저히 강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용감하잖구 뭐요. 자기 뜻을 세우구, 거기에 휘어 오도록 세상사를 정복 하려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니고 무어요.”

미려의 말을 무슨 뜻인고 하고 단영은 그를 찬찬히 바라보기가 문득,

“무대 앞에 일마를 보셨어요?”

하고 말머리를 돌려보았다.

“나아자와 나란히 앉아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스럽다는 듯 보이지 않아 요?”

왜 하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소리를 꺼내는구 하고 혜주가 단영을 노려 보는 동안에 미려도 들은 척 만 척 수심에 겨운 눈으로 딴전을 보았다.

“세상에 한 사람의 운명의 총아가 있다면 그건 일마에요. 제일 행복스럽 고 굳센 것도 그이죠. 자기의 행복 때문에 몇 사람의 희생이 생겨두 그건 알바 아니거든요.”

“일마 얘긴 왜 자꾸 해요.”

미려는 견딜 수 없어 확실히 싫은 낯으로 단영을 보았다. 무슨 얄궂은 심 술인구 하고 야속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일마를 미워하지두 “ 못하구 멸시 하지두 못하는 처지가 되려 측은한 것이 아닌가 해요.”

단영은 대체 일마에게 대한 자기 자신의 감정을 하소연함인지 미려의 마음 속을 추측해서 말함인지 미려는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미워는 하지만 그가 불행하게 되기를 빌지 목하는 마음 말이죠.”

혜주는 단영의 수다스러움을 찬을 수 없는 듯 자리를 일어섰다.

“일마가 오늘밤 음악회에 무슨 상관이게 자꾸 일마 말만 한단 말요.”

단영을 책망하는 듯 말함은 곧 미려를 동정함이었으나 미려는 혜주를 뒤따 라 일어서지는 않으며.

“전 좀 더 앉아 있겠어요.”

하고 혜주에게 먼저 가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혜주가 한 걸음 먼저 자리로 돌아간 후 미려는 단영과 단둘이 마주앉게 되 었다. 단영에게는 할말이 많이 있을 듯 짐작되며 그것이 미려에게는 은근히 듣고도 싶었다.

단영이 일마에게 마음을 홀짝 기울이고 그의 뒤를 따라 만주까지 쫒아 갔 던 것은 미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단영의 마음은 미려 자신의 마음과 똑같은 처지에 있다. 다만 미려보다 단영이 한층 적극적이 요, 대담하게 뜻을 나타내고 행동할 뿐이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끼리 라면 피차에 회포도 깊을 것이요, 할말도 많을 것이다. 미려는 그날의 단영 을 귀치않기는커녕 전에 없이 긴하게 여겼다.

“차래두 청할까요.”

단영은 좀더 자리를 갈아볼까 해서 휴게실 옆 찻방을 바라보면서 자리를 일어섰다. 미려도 거역 없이 선선히 뒤를 따랐다.

찻잔을 앞에 놓고 조용한 자리에 둘이 앉았으려니 음악회에 온 것이 아니 라 흡사 그렇게 이야기할 기회를 타서 온 것 같은 느낌이 났다. 두 사람에 게는 실없이 비싼 음악회였고 음악회로서 보면 두 사람은 가장 게으른 청중 이었다.

“…… 사람을 사랑하는 법이 사람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어떻게 하면 가장 만족스러울지 ──”

벌써 꺼릴 것이 없이 미려는 단영의 말을 순순히 받았다.

“이편만의 짝사랑이라면 만족하구 안할 게 있수. 만족 이전의 더 큰 문제 두 해결 못했는데.”

두 사람의 대상이 같은 한 사람임은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굳이 일 마의 이름을 집어내 말할 것도 없었다.

생각해선 안될 것을 “ 생각하는 건 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요새 자꾸만.”

“난 생각이 다른데요.”

단영은 즉시 반박하면서 대담하게 의견을 말한다.

“생각해선 안될 것이라면 세상에 그런 것이 얼마나 많게요. 세상은 그렇 게까지 옹색한 곳은 아닐 법해요. 생각하구 안 하는 건 각자의 마음의 자유 일 것이구 맘속으로 생각한댔자 그것이 죄 될 것이야 없죠. 미려씨야 요만 큼두 죄진 것이 없으리라 생각해요.”

그럼 자기 자산은 죄를 지었단 말인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미려는 단영의 입만을 주의했다.

“난 미려씨같이 그렇게 맘속으로 꿈만을 굴 수는 없는 천성이에요. 맘먹 은 것은 꼭 행동으로 옮겨야만 시원하지 신선같이 꿈만 먹군 배가 부르지 않거든요.”

“그래 어 어떻게 꿈을 행동으로 옮겼단 말요?”

단영의 심상치 않은 말투에 미려는 황당하게 반문한다.

“놀라지 말아요 ── 일마를 휘어 버렸죠. 손안에 넣구 맘대로 휘둘러보 았죠.”

“뭐 뭐요. 휘둘르다니.”

청천의 벽력이나 본 듯 미려는 미상불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지내구 보니 다 헛것이에요. 정복을 했다구만 생각한 건 내 불찰. 되려 정복을 당하구 보기 좋게 넘어진 셈이요……역시 행동보다는 꿈이 나은 모양이에요. 꿈만 꾸구 있었던들 이런 환멸을 느끼지 않았을걸.”

단영의 말에 미려는 두 번째 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미려는 단영을 노리나 단영은 대담하고 범연한 태도이다.

“거짓말인가 하시죠. 너무도 놀라운 사실이실 테니까요. 그러나 내겐 아 주 범상한 사실이 됐어요.”

미려는 행여나 실성해 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여 단영이 점점 무서운 존재 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구 싶은 건 결국 뒤에 남은 결과 말인데 ── 절망이 되려 그 것을 가지기 전보다 더 크다는 것이에요. 차라리 그대로 곱게 지냈던들 이 렇게까지 괴롭지 않았을걸. 모든 것을 알아 버린 때의 실망, 그게 얼마나 큰지는 지금 나밖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미려씨는 그렇게 어느때까지 나 곱게 꿈이나 꾸세요. 그 이상 것을 바라지 말구.”

“당신은 내게 무서운 것을 들려주었소.”

미려는 새삼스럽게 몸서리를 치면서 단영에게 시선을 옮겨 버렸다.

“── 사람이 그렇게까지 모든 것을 깨트리고 멋대로 할수 있단 말요.

인생은 아직두 그처럼 관대하단 말이지. 아, 무서워 괜히 쓸데없는 말을 내 게 전했지. 비밀은 비밀대로 묻어 두지 못하구 왜 무슨 요량으로 그걸 내게 말했단 말요. 진저리가 나라.”

“내가 미워졌죠. 무서워졌죠. 그리구 일마가 싫어졌죠.”

단영의 말이 끝나기 전에 미려는 절레절레 흔들며,

“싫어지구 말구. 모두가 싫어졌수. 추잡하구 불결하구 하나두 사람같진 않구료.”

사실 눈앞에 단영은 벌써 사람의 겉가죽을 쓴 짐승같이 밖에는 보이지 않 았다. 물론 질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요, 온전히 결백성에서 오는 느낌이 었다. 일마 또한 전의 꿈의 대상은 어니고 평범한 범부로 어리우는 것이었다. 추잡하고 비루한 사내라는 안타까운 결론이 서글프게 마음을 찔렸다.

“그러게 내가 좋은 일을 한 셈이죠. 일마에게 대한 경멸감을 일으켜 준것 만 해두 내 공이 얼마나 커요. 일마에게 대한 꿈조차 사라졌다면 내가 미려 씨 한 사람을 구한 셈이 아닌가요. 괴롬 속에서 동무 한 사람만 구해낸 양 으로 그런 행동을 하구 지금 그걸 전한 것이라구만 생각하시죠.”

미려는 마음이 아팠다. 일마에게 대해 환멸을 느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 고 참으로 그를 미워할 수 있었던가. 단영의 뜻밖의 말은 겹겹으로 괴롬만 을 가져왔다.

“당신은 꼭 악마만 같구료.”

“어서 일마마저 그렇게 여겨요. 그럼 맘이 한결 시원할 테니요.”

단영의 납신거리는 엇이 불유쾌해서 견딜 수 없을 때 두 사람 앞에 성큼 나타난 것이 명도였다. 단영을 기다리다 못해 자리를 일어나 찾아 나온 것 이었다.

“웬일이요. 음악회가 거진 끝나려는데 딴 곳에서 놀구만 있으니 그렇게 허름한 음악회란 말요.”

명도의 이야기가 더 길게 벌어만 질 것 같아서 단영은 자리를 일어섰다.

“아예 날 원망하진 마세요 오늘 내 말이 참으로 고맙게 여겨질 때가 있을 테니요. 그럼 먼저 실례해요.”

단영이 명도와 함께 나간 후, 미려는 잠시 혼몽한 속에서 혼자 자리에 앉 아 있었다. 누구를 원망했으면 좋았을꼬 ── 그날의 운명을 저주하는 수밖 에는 없었다.

연주회는 마침 제일부가 끝나고 휴게가 시작된 때였다. 잠시 자리를 일어 서서 휴게실로 나오는 사람, 그대로 머뭇거리는 사람으로 장내는 어지러웠다.

종세, 훈, 능보 새 사람의 한패가 막 휴게실로 나올 때 훌쩍 스쳐 들어가 는 여인 보고,

“미려가 아닌가.”

세 사람은 금시에 알아맞혔다.

“남편은 상해로 달아난 후 종무소식, 이혼수속끼지 마치구 인젠 완전한 자유인이긴 하나 몸이 뇌이니 생각하던 일마가 저 꼴이라, 세상은 뜻대로 돼야 말이지. 일마 부부의 꼴이 얼마나 여인의 가슴을 찌를꾸. 즐거운 음악 회를 되려 괴롭게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구. 사람 일 너무도 복잡해.”

제이부로 들어갔을 때 첫 곡목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호도인형」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악장마다 북국의 정서가 가장 짙게 나타난 곡조이다. 단원의 태반에게는 그 자기들 조국의 곡조가 더욱 적절한 정을 일으킬 것은 사실, 연주는 어느 때보다도 즐겁게 시작되었다. 침착하고 혹은 가벼운 선율이 다 른 어느 곡조와도 구별되는 선명한 인상을 주었다.

음악은 말하자면 하나의 발병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의 멜로디와 화음은 현 실 속에 지천으로 흩어져 있는 음성과는 성질이 다르다. 음악은 자연의 음 성이 아니다. 자연의 음성이 아무리 아름답고 묘하다 하더라도 한 토막의 음악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음악은 꾸며진 감동이요, 영감의 발명이다.

아무데서도 들을 수 없는 유쾌한 음성의 배열이 자연이 주는 기쁨이상 몇 곱절의 기쁨을 준다. 장내는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하고 청중은 감동 속에 젖 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혼이 사람들 가슴속에 살아나 있는 셈이었다.

음악 속에 잠겨 있는 일마와 나아자의 마음 역시 모인 수천 사람과 똑같은 순간의 감정 속에 있었다. 같은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한 빛으로 칠해진다. 푸른 물속에 잠기면 다 함께 푸르게 물드는 것과도 흡사 하다. 일마들도 푸른 물에 물든 눈으로 한결같이 무대 위만을 바라보는 것 이었다.

단원들은 모두가 나아자의 고향 사람들이라 중에는 눈익은 사람도 많았다.

피차 하얼빈에 수십 년을 살면서 거리에서 그 어느 곳에서 서로 눈에 띠었 고 바라보았던 사람들이다. 그 면목이 있는 사람들의 연주를 먼 외지에 나 와서 들으려니 나아자에게는 누구보다도 다른 또 한 가지의 감회가 솟았다.

특히 그 속에는 나아자가 친하게 지냈던 동무 이봐놉이 있었던 것이다. 그 에게로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쉴새없이 일마의 귀에 수군덕거리며 남편의 동 감을 구하려던 것이었다.

어때요 제법 잘 “ . 어울리지 않아요? 실수나 하지 않을까 해서 지금 맘 이 조밀조밀해요.”

이봐놉은 첼로 뒤에 숨기다시피 하고 앉아서 긴 활을 느릿느릿 그었다. 사 실 그 주체스런 꼴을 보면 실수나 하지 않을까 해서 걱정하게 되는 것도 무 리는 아니었다. 그 어디인지 부실하고 맥이 없어 보인다.

“첼로는 원래 느린 악기니까.”

말하고, 일마는 침착한 음조와 이봐놉의 늦조인 품성의 일치를 느끼면서 신 기한 발견이나 한 듯 유쾌했다.

“이봐놉군이 첼로를 하는 줄은 꿈에두 몰랐구료.”

“저두 그가 이렇게 일행을 좇아 나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넓은 하얼빈에 는 음악가두 어찌나 많은지 이봐놉쯤은 음악으론 도저히 밥두 먹을 수 없어 쩔쩔매던 판인데 어쩌다 한몫 뛰어들었는지 일행이 도착하는 날 얼마나 놀 랐는지요.”

이봐놉은 별사람 아니라 일마가 하얼빈에 머무르고 있을 때 나아자와 함께 묘지에 갔다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바로 그 이봐놉이었던 것이다. 가을임에 도 얇은 여름 양복의 허줄한 꼴로 일마의 주의를 끌었을 뿐 아니라 한 조각 의 감상조차 일으키게 했던 바로 그였다.

음악가론 밥을 먹기는커녕 낡은 자동차라도 한 대 얻었으면 택시 운전수로 입에 풀칠이나 하련만 그것도 못해서 쩔쩔맨다는 사정을 나아자의 입을 통 해서 들었던 그가 그렇게 단원 속에 한몫 끼어 연주여행을 나오게 될 줄은 일마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아자보다도 되려 놀람이 더 컸던 것이다.

“부디 이번 연주에 성공해서 이봐놉에게두 행복이 돌아가기를 비는 바요.

모처럼 나왔던 길에 생애의 길이나 옳게 잡았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그 부실하고 허절한 꼴을 보고는 사실 충심으로 동정이 갔다.

“성공하겠죠. 이번 길을 나온 그들에게 주위 뜻이 왜 냉정하겠어요.”

나아자는 확실히 고향 생각에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이봐놉들의 성공 을 비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두터운 것이 아니었던가.

연주회가 끝났을 때, 청중의 대부분이 물밀듯 문이 메이기 한바탕 쏟아져 나간 후에 남은 한패는 연주자들의 모양을 보고 돌아가려고 문간에 어릿거 리고들 있었다.

무대 뒷방에서는 주최자측인 현대일보 사장 이하 관계자 여러 사람들아 단 원들의 수고를 치하하러 밀려 있고, 텅 비인 장내에는 아직도 파도같은 갈 채의 반향이 남아 있는 듯도 했다. 무대 뒤에는 무수한 화환과 생화의 꽃다 발이 찬란하게 널려 그것이 뒷방으로까지 연했다. 연주회로서는 전무의 성 황이었고 더없는 성공이었다. 악단과 시민에게 다함께 기쁜 일이었다.

주최자측의 치하에 단원들은 피곤한 속에서도 만면 기쁨으로 대답하면서 누구들보다도 당야의 성과를 반가웠다.

주최자측도 아니요, 그렇다고 단원도 아닌 얼삥삥한 존재가 일마와 나아자 였다. 즉 주최자측에서도 감사의 말을 받고 단원들에게서도 반갑다는 말을 들으면서 일마는 모든 것이 자기의 공으로만 돌려지는 것이 낮이 달고 얼삥 삥했다. 나아자는 솔직히 말을 받을 때마다 웃음의 표정을 지니면서 응대에 바쁠 지경이었다.

수다스럽고 어지러운 그런 한바탕의 절차가 지난 후 일행은 방안에 치울 것을 치워 놓고 문간으로 나갈 때 어릿거리고 섰던 사람들은 가까이 줄레줄 레 모여들었다. 그 속에는 훈과 능보도 섞여 있었고, 멀리 떨어져 단영과 명도의 짝도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려의 자태만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단영에게서 놀라운 소식을 듣고 그는 요란히 수물거리는 마음을 도 무지 걷잡을 수 없어 자리에 잠깐 앉았다가 곧 일어나 횅하니 집으로 돌아 간 것이었다. 단영만이 올차게 끝날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훈과 능보는 일마에게 한마디 연주의 비판이나 들려줄까 한 것이 그렇게 수선스런 속에서는 그에게도 달려가기도 쑥스러워 우두커니 한구석에 서 있 는 동안에 일행은 차례차례로 등대하고 서 있는 자동차에 앉은 것이었다.

일마도 같은 호텔이라 맨 뒤차에 부부가 나란히 하고는 늘어선 군중을 내버 리고 호텔로 내닫는 것이었다. 버림을 받은 군중은 그 일렬의 긴 자동차의 행렬을 멀끔히들 바라보는 것이었으나 중에서도 일마부부의 인상이 가장 신 선하게 눈속에들 남았다. 특히 단영에게는 누구에게보다도 그들의 자태가 유달리 인상적이고 마음을 부질없게 들쑤셨다.

“아니꼽게 나 좀 보라는 듯이.”

꼴사납다는 듯이 단영은 그들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발을 돌리면서 기실 속 으로는 긴 한숨을 뽑았다.

“바람이나 쏘이구 갈까.”

하는 명도의 청도 거절하고 혼자 저벅저벅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눈 안 팔고 곱게 돌아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맥없이 침대에 풀썩 주저앉으니,

“미려에게는 쓸데없는 소릴 괜히 ──”

하는 뉘우침이 솟았다 . 아무리 되풀이해 보아도 그날 밤 일이 경솔하게만 생각되었다.

“결국 효과가 무엇이란 말인가. 내 자랑을 한 셈인가. 그의 길을 바로 잡 자구 한 셈인가. 허나 내 맘은 지금 이렇게 구역질만 나구 미려 또한 괴로 워하게만 되지 않았는가. 괜히 긴한 척 쓸데없는 짓을 하구 쓸데없는 말을 피운 것이다. 나조차 점점 이렇게 괴로워지니……”

같은 때 미려도 자리에 일찌감치 누워서 괴로운 마음에 잠을 못 이루고 있 었다. 남편이 상해로 실종한 후로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식모와 단 둘만의 호젓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려준 단영이 나쁜 것두 아니구 일마가 그른 것두 아니구 내 맘이 원수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달아나는 이 맘을 잡을 수 있을꾸. 무슨 굴레를 가져오면 이 맘을 잡아 씌울 수 있을꾸.”

전등불이 눈에 빤히 비취면서 바시랑바시랑 도무지 잠이 들지 않는다.

호텔로 돌아온 일행들은 각자의 방으로 곧들은 안 올라가고 아래편 객실에 서 잠깐 쉬며 잡담에 잠겼다.

나아자는 서울길이 하루하루 익은지라 그들을 접대한다는 뜻도 있었던지 자연 행동을 같이하게 되었다. 일마의 생각 같아서는 그만큼 그들과 휩쓸린 뒤이라 그만 헤어져 저기들은 먼저 방으로 올라갔으면서도 싶었으나 나아자 는 그 눈치를 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피곤한데 올라가지 않으려우?”

하고 말해도 나아자는,

“좀더 함께들 있다 가면 어때요. 위로 겸 ──”

하면서 좀체 몸을 뜨지 않았다.

여자라고는 나아자 한 사람인 까닭에 남자들만의 단원들 속에서는 한 이채 인 것이 사실이었고 그가 자리에 끼어 있으므로 기분들이 부드럽고 즐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나아자로서는 선뜻 자리를 뜨기가 어려웠던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그 정도의 가쁨을 줌은 조그만 예의였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먼저 올라갔다 오리다.”

굳이 나아자를 잡아 세울 수도 없어서 일마는 혼자 객실을 나와 이층으로 올라갔다.

옷도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그 옷 그대로 침대에 피곤한 몸을 던지고 얼마 동안이나 누워 있었을까. 눈을 감은 채 걷잡을 수 없는 명상에 잠기면서 ─ ─ 확실히 말할 수 없이 피곤한 마음을 느꼈다.

무슨 까닭으로의 피곤인지 적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혼몽한 심사였다.

반시간이나 그 모양그대로 누워 있었을까. 나아자는 종시 올라오는 소식이 없었다. 눈을 뜨니 어찔하면서 방안이 순간 깜깜한 듯하다. 벌떡 일어나서 무의식간에 방을 나가 아래로 내려갔다.

객실에는 사람이 듬성했다. 거의 각기 방으로들 간 뒤요, 나머지 몇 사람 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속에 나아자는 이봐놉과 한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다.

“조금두 곤하진 않은 모양들이지.”

일마도 자리에 가 한몫 앉으니 이봐놉이 빙글빙글 웃으며,

“오래간만에 만나니 아는 처지에 할 얘기가 많구려. 하얼빈은 이젠 아주 추워졌는데 여긴 아직두 이렇게 선선한 게 견디기 좋단 말요. 묘지에서 만 났을 적엔 생면부지 서름서름한 처지더니 알구 보니 이렇게 피차에 관계를 가지게 됐구료.”

인사 겸 던지는 말속에 필요 이사의 아첨하는 태도가 들여다보이는 듯이도 느껴졌다.

“조선의 인상을 서로 말하고 있는 중인데 이봐놉의 인상이 대단히 좋았다 는군요. 모든 것이 이국적이구 독창적이어서 맘을 댕긴대요.”

나아자가 이봐놉의 심경을 대신해 설명해 주는 것을 들으며 일마는 범범하 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 다행이오. 모처럼 온 데가 인상이 좋아야지 나빠서야 쓰겠수.”

“아주 맘에 들어요. 될 수 있으면 나두 이곳에서 살아 보구 싶구료. 하얼 빈은 싫증두 났거니와 우리 같은 사람에겐 너무 박질한 도회구 좀 이런 낯 설은 고장에두 살아 보구 싶구먼.”

그런 이봐놉의 말이 반드시 쓸데없는 인사의 말만은 아닌 듯 ── 진담의 고백으로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오래도록 사시구료. 그렇게 맘에 든다면.”

“첼로나 켜가지구 먹을 곳이 있나요. 있다면 단연 머무르구 말구요.”

“글쎄요.”

그 이상의 질문은 벌써 일마에게는 과중한 부담이었다. 말머리를 흐려트리 면서 딴전을 보니 그제서야 나아자도 피곤하다는 듯이,

“자, 그럼 이만들 헤어질까요. 밤두 늦은 것 같은데.”

제의하며 자리를 일어서는 것이었다.

일마도 이봐놉도 뒤따라 일어서며 일마는 나오는 하품을 금할 수 없었다.

방으로 올라와 옷을 갈아입으면서 일마는 나아자와의 사이에 그 무엇인지 개운하지 못한 것을 느끼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나아자 역시 일마에게 대해 전과 같이 말이 수다스럽지 않은 것은 일마와 같은 감정을 품고 있는 탓이었을까.

일마는 무거운 공기를 못 이겨 말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애썼다.

이봐놉이 이곳에 머물러 “ 살구 싶다구 누차 말하니 그게 진정이란 말요?

공연한 인사말 같이만 여겨져서 ──”

그런 일마의 질문이 그 자리에서 부당한 것이었을까.

도대체 그날 밤 일마의 감정의 개운치 못한 원인이 이봐놉에게 있었고 그 런 줄을 나아자 또한 알고 있는 것이라면 일마의 이봐놉에 관한 질문은 사 실 불필요하고 주책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아자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남편을 보며,

“내가 어찌 안단 말요. 이봐놉을 신사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말을 믿는 것 이 옳겠죠.”

부드러운 말솜씨는 아니었다.

“누가 그를 신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요. 외딴 곳이구 사정이 다르구 하니까 그의 그런 말이 내겐 웬일인지 실없이만 들린단 말이지.”

“외딴 곳이구 사정이 다른 것이 걸린다면 전 왜 이 먼 곳에 나와 있을까요.”

나아자의 그런 대꾸가 실책이었던지도 모른다.

“그럼 나아자와 이봐놉의 경우가 똑같단 말요? 나아자는 대체 무엇 때문 에 이곳까지 나왔수. 사랑 때문이 아니었수. 나를 믿으니까 나와 함께 나온 것이 아니었수. 이봐놉은 무엇 때문에 이곳을 원한단 말요. 역시 사랑 때문 이란 말요? 누굴 사랑해서란 말요.”

일마가 조금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반문했을 때 나아자는 사실 아무 대답 이 없었다. 무죽거리면서 적당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랑 때문이라면 외딴 고장두 두려울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엇 을 구해 하필 이곳으로 나온단 말요.”

여기에서 나아자도 비로소 말의 실마리를 얻은 듯,

“사람이 반드시 사랑 때문에만 사나요 ── 딴 고장에 오는 이유로야 사 랑 외에 직업을 구하는 수두 있겠지. 자유를 구하는 수두 있겠구……”

하며 말문을 연다.

“그럼 이봐놉은 직업과 자유를 구해서란 말요?”

“제게 물을 것이 무어예요. 아까 그에게서 들은 대로가 아니예요?”

“이곳에 무슨 알뜰한 직업이 있다구 그걸 구해서 이곳까지──”

말이 끊어진 채 한참 동안이나 침묵이 흘렀다.

나아자도 그제야 일어서서 잠자리옷을 천천히 갈아입으면서.

말씀하는 속뜻을 누가 “ 모를 까봐요. 오늘 저녁 눈치두 다 알아채구 있었 어요. 그러니까 저두 불쾌했구 우울했어요. 우울하니까 뺃서두보구요.”

의젓이 말한다.

벗은 옷을 침대 밑에 걸고 잠옷의 띠를 졸라매면서,

“다 오해예요. 제게 대한 이 며칠 동안의 추측은 다 오해였어요 ── 말 하기두 추접하나 이봐놉과의 사이에 그 무슨 남모를 사정이 있지나 않은가 생각하셨을 것이나 임의의 추측에 지나지 못하다는 걸 제 입으로 똑바로 말 해 드리는 것예요.”

나아자의 입에서 그렇게 정면으로 명확하게 이봐놉의 말을 듣는 것이 일마 를 어질어질하게 했다. 부끄러운 생각이 나며 얼굴이 화끈 달았다.

먼저 그렇게 터놓고 말하는 나아자의 뜻에 거짓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되려 지나친 표정을 지닌 것이 아닌가 하고 뉘우쳐도 졌다.

“누 누가 나아자를 오 오해한단 말요.”

“오해하지 않았거든 앞으로나 오해하지 말아요.”

일마는 고개를 숙인 채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사실로 나아자에게 대한 공연한 내 의심이었던가.”

일마는 침대 속애서 여전히 생각에 곰실거렸다.

나아자와 이봐놉의 사이를 의심한 것은 불찰인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자 별스럽게 보였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런 때 아내를 범연히만 보는 남편이라 는 것이 세상에 있을까. 한번 고부려 추측해 보는 것도 자연스런 심정이 아 닐까.

“하긴 그게 도덕과 교양의 차이일지는지도 모르긴 하나.”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의 구별일는지도 모른다.

개인주의 도덕의 입당에서 보면 그 정도의 아내의 태도와 풍습은 당연하고 문화적이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을 곡해한 자기의 태도는 부당하고 비 문화적인 셈이 되는가. 일마는 협착한 자기의 도덕률에 비치어 나아자들의 그것이 눈부시고 한편 부끄러운 생각도 났다. 이기적이요, 원시적인 그런 감정의 노출이 한없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무슨 염치로 나아자를 오해할 수 있는가. 사실 부끄럽다면 일마는 나아자 를 오해한 이상으로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다. 남편의 이기주의 ── 남자의 특권인 듯이도 뭇사람이 뉘우칠 줄 모르는 이기주의 ── 그것이 아 내에게 대해서 더없이 부끄러웠다. 단영과의 관계를 가진 일마의 처지로 누 구를 책할 수 있는가 그 . 무서운 허물에 비하면 나아자의 태도쯤은 문제도 안된다. 숨은 비밀을 일마는 평생 가슴속에 감추어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아내를 속이는 마음으로 일신이 어찌 편안할 수 있으랴.

그러나 대체 어떻게 하면 그것을 터놓고 말할 수 있을까. 말하고 그 결과 아무 풍파 없이 무사할 수 있을까. 이런 복잡한 궁리에 잠길 때 일마는 부 끄러울 뿐 아니라 두려워졌다. 금시 파멸이 올 듯 두렵고 황당한 것이었다.

참으로 허물은 자기편에 있고 죄는 내 몸에 숨어 있다. 나아자를 책망함은 천부당만부당이다. 도덕률의 차이가 아니라 그를 오해하고 책할 남편으로서 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쓸데없는 오해로 시작된 것이 결국은 그렇게 자신 의 괴롬과 번민으로 변했다. 침대 속에서 어느 때까지나 앓으면서 그날 밤 은 무한히 괴로운 밤이 될 것 같았다.

“할말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어서 더 하세요.”

그 역 무엇인지 생각에 잠겨서 앉았던 나아자는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그제 야 침대로 왔다.

“할말이라니 내게 무슨 더 할말이 있겠수.”

일마가 미안한 듯 고개를 돌리니 나아자는,

“사람의 맘이란 멀끔하게 씻어 버려야 시원한 것이지 조금이래두 께름한 데가 있으면 잠시나 지낼 수 있나요. 하루 이틀이 아니구 앞으로 장구한 세 월을 살아가야 할 텐데 어금니 새에 께름한 걸 끼고야 편치 못해 어떻게 지 내요.”

일러듣기 듯 말한다.

일마는 더욱 부끄러워지면서 대답할 바를 몰라,

“께름하구 안할 게 있수. 살려면 이런 때두 있구 저런 때두 있지.”

하면서 웃어 보이니 나아자도 웃음으로 대답하면서 덜석 몸을 던진다. 일마 의 얼굴을 거의 문지르듯 늘 하는 야댠스런 애정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만사가 해결된 것이었을까. 나아자와 이봐놉과 일마 세 사람의 관계가 결말을 지은 것이었을까.

한 가지의 뜻하지 않은 돌발사건이 잠시 일마의 정신을 빼앗아 그런데로부 터 주의를 돌리게 했으니 다음날 저녁 연주회 좌석에서 일마는 돌연히 한 장의 전보로 말미암아 그 자리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초저녁인 제일부의 둘째 곡조가 시작된 때였다.

무대 옆 검은 막 앞으로 등불 켜진 현판이 나타나며 청중의 주의를 끈지 오래였다.

일마가 거기에 주의를 보냈을 때는 그 광고의 현판은 벌써 퍽이나 오랫동 안 그곳에 방황하고 있었던 때였다.

일마는 현판의 글지를 발견하고 주춤했다. 자기를 부르는 것이다.

── 천일마씨 휴게실까지 나오시오. 급한 일이 있소 ── 의 글발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등불 앞에서 깜박깜박 반짝이는 것이 아니었 던가.

일마는 두어 번 거듭 읽으면서 뜨끔해졌다. 천일마는 역시 자기에 틀림없 는 것이다. 좌우를 둘러보니 일어서는 사람은 없다. 같은 이름은 없는 모양 이었다.

“무슨 일일까, 나를 부르니.”

나아자에게 알리면서 일어서 나갈까 어쩔까를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 두 사 람 좌석 앞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일마의 앞에 와 머무른 것은 종세였다. 설레는 어성으로,

“호텔에서 보이가 자네에게 전보를 가져왔네. 얼른 휴게실에 나가 받아 보게나. 기다리구 있으니.”

무슨 전보인고 하고 일어나 종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맘대로 펼 수도 없어서 자네를 데리러 왔네만.”

휴게실에 나가니 앉았던 보이가 일어서며,

“지급이기에 가져 왔는데요.”

하고 전보를 내보인다.

부랴부랴 뜯어보면서 일마는 한참은 무슨 소리인지를 분간하지 못했다.

거듭 읽으니 차차 내용의 뜻이 알려졌다.

── 사건돌발 황당불이 급래희망 한벽수 ── 하얼빈의 동무 한벽수에게서 온것이다.

일부인을 보아도 그럼이 틀림없었다.

“사건이라니 무슨 사건인구.”

함께 들여다보던 종세도 동무의 일이 궁금했다.

“낸들 어찌 알겠나.”

일마는 대답하면서도 생각할수록 곡절을 알 수 없어,

“필시 중대한 사건인 모양인데, 무엇이든 간에 급래 희망이랬으니 가는 봐야지.”

하면서 마음의 설렘을 느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러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보이를 먼저 보내고 일마는 급히 휴게실을 나갔다.

“그래 떠날 작정인가.”

“막차로 떠나겠네. 전보를 쳐서 되묻재두 날이 걸릴 테구 눈치가 대단히 급한 모양인데 그대로 있을 수야 있나.”

장내에 들어가 나아자에게 곡절을 말하니 그 역 놀라 당황해 하면서,

“정말 떠나실 작정이예요?”

하고 거듭 반문 한다.

“먼저 호텔로 갈 테니 천천히 듣구 오구려.”

따라 일어서는 나아자를 만류해 앉히고 일마는 호텔로 돌아와서 조그만 트 렁크에 대강 행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차시간까지에는 아직도 두어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짐을 꾸려 놓고 나서 하염없이 앉았을 때 나아자가 쫓아왔다.

“저두 함께 떠나겠어요.”

아내의 제의에 일마는 감격하면서,

“고맙긴 하나 짧은 여행에 그럴 것까지야 있수.”

타이르니 나아자는,

“혼자 가시기 무료하실 테구 하얼빈은 제 고향이니 아무리 자주 다녀두 제겐 괜찮거든요.”

“거추장스럽게 그럴 것이 없구 어서 악단의 손님들 접대두 있구 하니 그 대로 머물러 있구료. 얼른 다녀 올께.”

“사랑하는 사람을 혼자 내놓다뇨.”

아내의 마음씨가 일마에게는 한없이 고마웠으나 사정을 설명하면서 만류하 는 수밖에는 없었다. 야단스럽게 얼싸안고 애무를 받으면서 나아자는 간신 히 터득하고 구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