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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공무한/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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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마가 그날 밤 단독으로 하얼빈을 떠난 것은 주위 동무들에게 즉시로 알 려졌다.

그의 일거일동은 근변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주의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괴롭다고는 하면서도 둘째 날 밤도 여전히 연주를 들으러 나왔던 단영은 그날 밤으로 그 일마에게 일어난 변동을 알게 되었다.

일마의 황당해서 어릿거리는 양을 보고 종세에게 물으니 그런 사연이었다.

일마가 또 하얼빈으로 간다 ── 고 생각하니 단영은 자기도 한 번 밟았던 땅이라 알 수 없는 그리운 감회가 솟으며 가슴이 설렘을 느꼈다.

일마에게 대한 감정이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탓이다. 하얼빈은 깊은 마음 의 상처를 받은 곳이었만 그 상처가 아직도 스러지지 않은 오늘 그곳이 여 전히 그립다 일마의 몸을 . 그곳에 두고 생각함이로다. 일마의 가는 곳이므 로 변함없이 그리운 곳이다.

“무슨 일루 또 하얼빈에 가누. 생각만 해두 지긋지긋한 곳.”

명도도 지난 일이 진저리가 나서 이렇게 말하면 단영은,

“카바레의 밤을 생각하세요. 욕을 주었던지 욕을 받았던지 분간할 수없는 그날 밤 일을.”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원수의 곳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일로 일마가 가게 된 것인구, 그렇게 급작히.”

의아해하면서 여행의 유혹을 느끼는 단영이었다 이튿날 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히 혜주를 만나 말결에 일마의 이야기를 전한 것은 자기도 모르는 결에 역시 일마의 일에 열중해 있었던 까닭이다.

혜주도 일마의 말이라면 범연히는 듣지 않았다. 미려와의 관련을 생각 함 으로였다.

그 말을 듣기가 바쁘게 그날 오후로 혜주는 미려를 찾아가 그에게 전했다.

미려가 적은 식구에 적적해 하는 까닭에 혜주는 이틀도리로 그를 찾았던 것 이다. 일마의 소식은 살같이 빠르게 미려의 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일마가 어젯밤 별안간 하얼빈으로 떠났다는구료.”

혜주의 전하는 말을 미려는 심상하게 들으려고는 하면서도,

“무슨 까닭에 떠났을까요.”

하고 어성이 변해졌다.

“친한 동무에게서 전보가 왔는데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던가.”

“무슨 사건일까……”

“급해서 사연두 알려 오지 못한 모양인데 ── 일마가 돌아올 때에나 알 수 있을까.”

“혼자 떠났을까.”

“같이 나서는 나아자를 떼놓구 혼자 떠났다던가.”

“오래 묵을 작정으로.”

“지내봐야 알 일이지. 일 처리되는 대로 올 테니까.”

미려는 여러 가지 궁금했다. 무의식간에 황당한 목소리로 묻게 된 것이 겸 연쩍어서 침묵하니 그 눈치를 아는 혜주는 동무의 속을 뽑아 잡았다는 듯도 한 노련한 표정을 보이며,

“신변이 그렇게두 수다수럽던 일마가 잠시래두 혼자 있게 된다는 것이 바 라기 어려운 하나의 가회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수수께끼나 걸듯 말하니 미려는 무슨 뜻인고 하고, `

“일마가 혼자 있다는 것이.”

하며 말을 받아 중얼거리다가 문득 혜주가 던진 암시를 홀연히 깨달으며 뜻 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기회라면 ── 사실 바라기 어려운 기회일 것이다.”

“기회란 것은 놓치지 말구 잡아야 하거든.”

“……일마를 쫓아갔댔자 ──”

“가서 모든 것을 확적히 하구 오구려.”

“그런다구 시원한 게 무에 있수.”

“어서 주저하지 말구 ── 눈앞에 차례진 일을 하라니까.”

혜주는 거의 명령이나 하듯 미려를 재촉한다. 미려는 현혹한 생각에 사실 어쨌으면 좋을까하고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었다.

며칠이 자난 후 일마에게서 종세에게로 사건의 내용을 알리는 간단한 편지 가 왔다. 종세는 궁금한 판에 전보로까지 문의해도 회답이 없어 한층 당황 해 하던 터이라 그 편지는 두렵고도 반가운 것이었다. 자기도 한몫 그 사건 속에 끼어나 든 듯이 흥분하면서 동무들 사이로 편지를 가지고 다니며 설레 는 것이었다.

나아자에게도 편지가 온 것은 물론이요, 같은 내용의 것임에도 틀림은 없 었다. 따라서 종세는 사건의 내용을 나아자에게까지 전하러 다닐 필요는 없 었으나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흥분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사건이란 순전히 한벽수 개인에 관한 것이었으나 원체 엄청난 일이었던 까 닭에 일마의 조력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내용의 한 토막 한 토막이 읽는 사람에게는 신기했다.

── 두 번 밟는 하얼빈이 달포 전과는 아주 달라져서 날도 차거니와 인상 도 판이해졌네. 이곳에 오는 중 이번같이 마음이 어수선하고 산란한 때는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라 수선거리고 설레나 즉시로 해결이 솟지 않는 난처 한 상태에 놓여서 근심과 걱정으로 지내는 판이네. 하얼빈이란 곳이 지금까 지와는 달라 또 하나의 생각지도 못했던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처음으로 깨 닫게 되었고 이 새로운 요소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도시의 인상이 지금까지 와는 달라진 것을 신기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네.

하기는 그 어디인지 넓고 깊고, 그 깊은 속에 헤아리지 못할 그 무엇이 숨 어 있으려니는 생각되었었으나 그런 것이 실상으로 표면에 솟아나 사람을 놀랠 줄이야 누가 알었겠나. 깊고 어두운 구렁 속에 악의 꽃이 붉게 피어 있음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 악과 죄 이외 에 공포가 숨어 있을 줄은 아마도 헤아리지 못했으리. 하얼빈은 향수의 도 시만이 아니라 공포의 도시임을 처음으로 깨달았네. 무시무시한 전율의 도 시라네. 안심하고 즐거운 날만을 보낼 수 없는 위험하고 무서운 도시 임을 서로 깨달은 것이네.

하얼빈의 이 새로운 인상과 성질을 이렇게 야단스럽게 늘어놓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이번 사건의 성질을 이해함에 도움이 되는 까닭이네. 한없이 복잡한 이 깊이를 모르고는 이번 일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네. 자네들까지 놀라게 해서 미안하나 사건이란 것은 온전히 한벽수군 ── 보다도 그의 숙 부 한운산의 일신에 걸린 것이네. 한마디로 내용을 말하면 운산이 대규모의 갱 일단의 손에 걸린 것이네. 그의 몸이 사라진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는 데도 날마다 협박장만이 들어오고 소식은 아득하단 말야.

한운산은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에 들어온 지 수십 년의 적수공권으로 백만 대의 재산을 쌓은 사람. <대륙당>의 큰 약포를 가지고 상계에서도 손을 곱 는 터인데 하필 그가 갱의 손에 걸렸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사람들의 주목 을 끌었던 까닭이요 ── 갱은 주로 외국인들로 된 대규모의 일단인 듯한데 그런 것의 존재가 이 도회에 있다는 것이 아까도 말했지만 의외요, 놀랍단 말이네. 흡사 영화의 수법이야. 그 영화의 한 토막이 바로 이곳에 일어났단 말이야.

나거된 몸은 아마도 국경지방이나 그렇지 않으면 바로 이 도회의 어느 구 석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운산의 한 몸을 전당으로 삼십만원을 강요하 고 있네. 현금 삼십만 원을 갖추어 가지고 국경지방의 모지로 몸을 찾으러 오라는 협박인데. 처음 당하는 큰일이라 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설레고 있을 뿐 경찰 쪽과 협력해서 대책을 생각은 하고 있으나 지체되면 당자의 목숨이 위험할 것도 같아서 역시 돈을 마련해 가지고 몸을 찾아오는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거기에 따르는 위험도 있어서 지금 진퇴유곡의 어 려운 지경에 빠져 있다네. 일이 되어가는 대로 또 편지는 하지만 벽수군의 걱정과 그를 위로해야할 내 입장을 생각해 보개. 아득해 어쩔 줄을 모르는 형편들이라네. 그럼 동무들에게도 소식이나 전해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