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공무한/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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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지당가 <대륙당>에서는 가게를 하고 휘장을 내리고 근심에 넘치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주인을 잃은 집안은 수심에 겨워 장사 여부 가 아니었다. 번화한 거리에서 그 한 곳만이 좌우와 구별되어 어두운 구름 속에 싸여 있는 것이 지나는 사람들의 눈에도 역력히 알렸다.

가게 안에서는 한 간 방에 집안 사람들과 점원들이 밤낮으로 모여들 앉아 경황없는 속에서 두런두런 설레고들 있었다.

집안 사람들이라고 해도 운산이 없는 후에는 허씨부인과 어린아이들과 벽 수의 불과 몇 사람이 ── 안되는 단출한 식구 외에는 한 식구같이 친하게 기숙하고 있는 몇 사람들의 점원들 뿐이다. 큰일을 당한 집으로서는 너무도 적적하고 쓸쓸한 지경이었으나 그러므로 벽수가 일마를 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흡사 상사집같이 경황없는 속에서 커다란 절망에 내려눌린 채로 맥들을 못추고 있었다.

가장 슬퍼하는 것이 허씨 부인이어서 남편과 함께 수십 년 동안의 조강의 협력을 해온 그로서 오늘의 뜻하지 않은 조난은 자기 한 몸의 일과 진배없 이 마음을 쳤다. 일을 당한 첫날은 정신없이 울고만 있었던 것이 날을 지낼 수록 남편의 일신의 위험에 대한 걱정은 더욱 솟아서 절망과 낙담이 더해 갔다. 한집안의 기둥을 잃게나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몸부림을 쳐도 시 원치 않으리만큼 속이 달았다.

아침에 경찰에서 서원이 소식을 물으러 왔다가 간 후로는 더욱 괴괴한 속 에서 반날을 지내기가 무한히 괴로웠다. 일이 있은 첫날은 서원들이 나와 가게 안을 진을 치고 밤을 새워 가면서 삼엄한 경계를 했었으나, 다음날부 터는 서원이 번갈아로 나와 출장경계를 하는 한편 나날의 소식을 묻는 것이 었다. 가게로서는 별도리없이 경찰의 노력에 의지할 뿐으로서 수색의 결과 가 어떨까 해서 시시각각의 정보를 고대하는 것이나 아득하기 짝이 없다.

고대하는 마음이란 괴로운 것이어서 하루 동안을 멍하니 기다리고 나면 말 할 수 없는 피곤이 엄습하는 것이었다.

저녁때가 되니 벽수는 나른한 정신의 피곤을 느끼면서 감출 수 없는 절망 의 빛이 더해 갈 뿐이었다.

“결국 협박장의 요구하는 대로 하는 수밖에는 없는 일인데 어떤 방법으로 하면 좋은가 하는 문제가 남았을 뿐이죠.”

마지막 결론같이 말하는 소리가 집안 사람들 에게는 별로 신기할 것이 없 었다. 현금 삼십만 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벽수는 신문사의 직무까지를 버 리고 이 며칠 동안 서두른 결과 수월하게 필요한 액수를 갖추어 놓게 되었다. 경찰의 말 한마디로 그것을 갱단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나 어떤 방법으 로 하는 것이 안전할까 하는 것과 또 한 가지 그것을 옳게 전달한다고 그들 이 나거한 몸을 어김없이 아무 박해도 가하지 않고 물려줄까 하는 것이 다 음 문제요 걱정이었다.

원래 갱의 성질로 희생된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법이 드물다. 자기들 의 정체의 탄로를 겁내서 희생된 사람은 대게 목숨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상례이다.

소굴을 알리지 않기 위해 당자의 눈을 가리워 둔댔자 안전한 책이 못될 그 들로서 목숨을 천대함은 그들의 도덕일는지도 모른다면 ── 지금에는 벌써 그 목숨에 대한 의심과 걱정이 가장 큰 것이었다.

“현금의 전달을 경찰의 손에 위탁하지 않을 수두 없지만 경찰의 손으로 괜히 설굳혔다간 희생이 클는지두 모르구 어떻게 함이 좋을는지.”

허씨부인도 적당한 방책을 몰라 난처했다.

“말이 국경지방이지 단의 정체가 거리의 그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 것아 사실인데 어수룩하게 변지까지 갔다가 또 무슨 봉변이 있을지두 모르는 일 이구……”

해결 없는 하루가 또 그렇게 해서 무의미하게 저물려는 것이었다.

일마도 외에 별로 하는 일 없이 <대륙당>진영 속에 한몫 끼워 날을 지우는 것이었으나 결국은 벽수의 동무를 해주는 셈밖에는 되지 못했고 그로서의 신통한 지혜나 방법의 연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기는 그것으로서 족한 것이었으나 하루를 그렇게 앉아 지내노라면 ── 그것만으로 피곤해지고 나 중에는 답답해졌다.

그날도 벌써 그 이상 더 새로운 변화도 진전도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저녁 때 일마는 잠깐 숨을 돌리려 가까운 찻집으로 벽수를 끌고 나갔다.

여러 날 햇빛을 못 본 박쥐 같아서 대낮이 아닌 저녁의 등불이언만 벽수에 게는 오히려 눈부시게 보이며 어질어질했다.

“어떻게나 돼 나갈는지 도무지 추측을 할 수 있어야지. 아무리 생각해봐 두 그렇게 수월하고 안전하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거든.”

오래간만에 밝고 깨끗한 공기 속에 놓이니 정신이 드는 듯하면서도 한편 그만큼 걱정도 커지면서 한시도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한 담에야 천명에 맡기는 수밖엔 더 있나. 무난히 돼 나가겠지. 걱정만 한들 무엇하나.”

성의 없는 소리가 아니라 일마로서는 마음껏의 대답이었다. 그 이상의 다 른 대답은 없었던 것이다.

“경찰에 의탁한 것이 실책일는지두 모르구 ── 그렇다구 숨겨만 둘 수두 없는 노릇이었으나 ── 갱이라는 게 원래 험악한 성질의 것인데 화가나면 감히 무슨 짓인들 못하겠나.”

“자네에겐 미안하나 난 지금 흡사 미국의 갱 영화나 보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나서 못 견디겠네 . 하회가 어떻게 될까 해서 맘이 조릿조릿하단 말 이야. 하얼빈의 한복판에 백주에 영화의 한 토막이 그대로 일어나다니.”

“하얼빈이 얼마나 큰 도회라구. 그러나 넓기로야 세계에서 뉴욕 담에 간 다네. 구석구석에 무엇이 숨었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단 말야. 나두 사실 이번 일을 당하구 나니 이곳이 무섭다는 생각이 자꾸만 치밀어 오르네.”

벽수는 수십 년을 도회에서 다스려난 사람이나 이제는 벌써 자신이 없다는 듯 온순한 눈동자에 겁까지 머금어 보인다.

“── 그날 밤 일을 생각하면 지금두 몸서리가 쳐. 아침에 볼일이 있다구 나간 아저씨가 종일 돌아오지 않네 그려. 은행에 예금을 하러가는 눈치였기 에 시적시적 나서서 은행과 호텔과 감직한 곳을 모조리 들려봐두 안 보이길 래 그 길로 돌아와 보니 다짜고짜로 그 협박장이네. 삼십만 원 두 놀라운 숫자지만 사람을 대체 어디루 끌구 갔을까에 정신들을 잃구 볶아들 쳐야 소 용이 있어야지 ── 그날부터 무서운 도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생각 할수록 맹랑한 곳이야.”

“보기에 따라선 재미있기두 하구 우리 같은 백년날탕이야 간들 그런 음모 속에 걸릴 리가 있겠나 ── 백만장자라는 점이 편안한 생업은 못돼.”

일마가 굳이 껄껄껄 웃는 것은 벽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자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벽수는 아무리 해도 현재 웃을 형편이 못되었다.

“경찰에 의탁한 것이 실책이라는 데는 내로선 여러 가지 뜻이 있네.”

알고보면 가지가지의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벽수였다.

“── 자네두 알다시피 숙부의 반생이라는 것이 가시덤불의 길이었구 오 늘의 지위를 쌓아 올리는 데는 말할 수 없이 위험하구 비합법적인 수단과 방법을 써온 것인데, 일단 경찰에 모든 것을 맡기구 결탁하게되면 자칫하다 간 그런 반생 동안의 경력이 탄로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네. 현재두 여전 히 그 종류의 생업을 숨어서 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더욱 위태하단 말 야 ── 내가 항상 지적하구 충고하구 나무래 오던 일인데 그게 이번에 더 큰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것이네.”

“지금 이 자리에서 자네의 그 정의파적 반성과 비판이 무슨 소용이란 말 인가. 괜히 사태를 복잡하게만 하구 생각이 혼란해질 뿐이지.”

일마는 벽수의 ‘양심’이라는 것을 되려 핀잔주며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 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날 저녁 일마는 여러 날만에 무료한 의무에서 해방되어 혼자만의 자유로 운 하룻밤을 가지고 싶었다.

찻집에서 벽수와 헤어진 후 호텔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났을 때 비로소 놓이는 마음을 느끼며 아무에게도 메이지 않은 개인의 자유를 회복한 듯했다.

그러나 그 자유로운 하룻밤을 어떻게 지냈으면 좋을까 생각하다 문득 떠오 른 것이,

“에미랴나 찾아볼까.”

하는 계획이었다. 이 생각이 마음을 얼마간 즐겁게 해준 것이 사실이었다.

하얼빈에 도착하던 길로 호텔과 <대륙당>과의 사이를 왕래했을 뿐이지 아 직 한 번도 거리의 탐험을 나서지 못했던 일마였다. 넓은 거리에 아는 사람 이라고는 벽수를 제하고는 나아자가 없는 이제 사실 에미랴쯤밖에는 없었다. 나아자와 가장 친했고 일마와도 알게 된 에미랴다. 나아자로부터의 문 안의 말도 전해야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건강하지 못하던 그가 요새는 어떻 게 지낼까가 궁금도 해서 무엇보다도 그가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카바레<승가리>를 찾아가니 벌써 밤 시간이 시작될 무렵이라 댄서들은 모 여들어 한편 구석에서 식사들을 한다 하며 설레는 것이나 그 속에 에미랴의 자태는 보이지 않았다.

낯익은 한 여자에게 물으니,

“몸이 아파서 여러 날째 나오자 않는 중예요.”

라는 대답이다.

“또 앓는단 말요?”

“앓으면 ── 늘 그 모양이죠. 애두 일 났어요.”

정말 걱정해 하는 말인 듯도 하고 이제는 벌써 그의 신세에 심드렁해졌다 는 듯도 한 여자의 어투이다.

또 앓는다니 정말 일은 났구먼 ── 중얼거리면서 일마는 그렇다고 일부러 나선 길을 단념하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서 에미랴가 아직도 전과 같 은 아파트에 있다는 것을 물어 가지고 카바레를 나왔다.

골목길을 더듬어 간신히 한 번 다녀 본 일이 있던 그곳을 찾아냈을 때에는 밤도 어두어진 후이라 초라한 아파트의 꼴이 어둠속에서 한층 우중충해 보 였다. 그러나 외모보다도 더 스산한 것이 에미랴의 방이다. 쓸쓸할 뿐이 아 니라 시절의 탓으로 추운 방안이 여름보다도 을씨년스럽다. 냉랭한 침대 위 에 누운 에미랴의 자태도 여름 때보다는 한곱 더 축나 모인다. 일마가 들어 섰을 때 한참이나 있다가 그임을 알고 벌떡 뛰어 일어나며 놀라는 표정이었다.

“웨 웬일이세요. 언제 오셨어요. 나아자는 ──”

목이 메이게 한꺼번에 물어댄다.

“지금 카바레로 갔다가 앓는다기에 찾아왔는데.”

하고 일마는 벽수에 관한 일건으로 급작히 혼자 왔다는 것과 오늘 처음으로 거리에 나서 보았다는 것을 간단히 일러 들렸다.

“갱의 일건은 저두 신문으로 알구 있었는데 ── 그래두 혼자 오시다뇨.

나아자가 섭섭해 하잖아요.”

“잠깐 길인데 괜히 야단스러울 것 같아서, 그리구 교향악단 일행이 머무 르구 있는 까닭에 그 접대두 있구 해서.”

“그래 나아자는 잘 있어요. 행복스럽구요. 언젠가 한번 편지는 받았지만.”

친우의 소식이 궁금한 듯 급하게 묻는 것이나 일마의 편으로 보면 에미랴 의 몸이 더 급하고 염려되었다.

“그렇게두 병이 잦고 몸이 고달퍼서 어떻게 한단 말요.”

“얼른 죽었으면 해두 목숨이 왜 그리두 질긴죠.”

실감에 넘치는 목소리가 일마의 가슴속에 뭉클하는 것을 던지는 듯도했다.

병든 소녀의 허술한 자태가 뼈 속에 새겨지면서 그의 불행에 대한동정이 애 틋하게 솟아올랐다.

“정신을 채리구 용기를 좀 내야지 ── 에미랴의 일생은 꼭 하나밖엔 없 는 절대적인 귀중한 것이 아니오?”

이런 말은 그러나 일마의 입으로 보다도 벽 위에 걸린 에미랴의 어머니의 초상이 더욱 충심으로 일러 들리는 것이 아닐까. 여름에 본 그 초상이 여전 히 변함없이 침대 위에서 에미랴의 불행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몸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에미랴는 또 한가지 불여의 때문에 그렇게 실망 속에만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일마는 조금이라도 그에게 용기를 주고 즐겁게 해줄 생각으로 강잉히 그를 일으키고 거리에의 소요를 권했다.

몸을 가다듬고 옷을 갈아입은 에미랴는 침대에 누웠을 때보다는 판이하게 신선해 보였다. 에미랴의 강적은 병과 또 한 가지 가난이다. 가난만 없대도 그의 인생은 얼마나 더 유쾌한 것이었을까. 오늘 하룻밤의 외출이 그에게 그렇게도 기쁨을 주는 것이다.

에미랴는 거의 앞장을 서다시피 하고 충대를 내려서더니 횡하니 먼저 문을 나간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한 사람이라는 듯도 하다. 일마도 걸음을 맞 추어 막 층계를 내려선 때였다.

층계 옆방 문을 열고 급작스럽게 나선 것은 주인 노파인 모양이었다.

문밖으로 사라진 에미랴를 내다보면서 손을 들고 저주하는 듯이,

“뻔질뻔질하게. 앓는다더니 놀러만 나가면서 ──”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 말투로 일마는 날쌔게 그 무엇을 직각할 수 있었다.

“내가 대신해 드릴 테니 무엇이든지 말씀해 보시오.”

급하게 물어대니 노파는 손가락을 곱으면서,

“석 달치가 밀렸어요.”

빈정대는 것이었다. 일마는 자기가 직각했던 대로의 그 대답에 그다지 놀 라지 않았다. 노파의 자태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필연코 그런 뜻이려니 느 꼈던 것이다.

“석 달치가 얼마요.”

지갑을 내서 노파의 말하는 액수를 그 자리로 세음해 치러주고 나서 더 말 을 남길 필요도 없이 쏜살같이 문을 나갔다. 에미랴가 몇 걸음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뛰어가 미안하다는 듯 옆에 서서 걸으니,

“무얼 하셨어요. 한참이나.”

에미랴가 묻는다.

“잠깐 머뭇거리다 그렇게 됐구료.”

천연스럽게 대답하면서 골목을 벗어져 나갔다.

노파와의 거래는 극히 짧은 시간의 일이었다. 일마가 그런 줄 눈치채고 급 하게 서두른 덕으로 에미랴에게 감쪽같이 그 눈치를 안 보이게 된 것이 일 마로서는 행복스런 일이었다. 만약 에미랴의 앞에서 그 변을 당했던들 그가 얼마나 무안해 했을 것이며 일마의 그런 호의를 받았을 리도 만무했을 것이다. 에미랴의 모르는 뒤편에서 순식간에 하나의 그 조그만 결말을 짓게 된 것이 일마로서는 기쁘고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쁜 한편 에미랴의 신세를 생각하고 마음이 아파도 졌다. 에미랴 는 그렇게까지 가난하고 불행한 것이다. 그를 돌보아주고 도와주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외로운 어머니의 초상이 그를 보호해 주고 있 을 뿐이다. 에미랴같이 측은한 여자가 어디인들 없으련만 그를 알게 된 이 상 가엷은 생각이 가슴을 쳤다.

“나아자의 편지에 여러 가지 그쪽의 즐거운 인상과 재미있는 얘기가 그뜩 적혀 있었는데 대단히 행복스런 모양이죠. 아무쪼록 변함없이 유쾌하구 행 복스럽게 지내기를 맘속으로 빌어 왔어요. 지금두 빌구요. 나아자를 생각하 는 사람은 많겠지만 저두 누구에게나 밑질 것 없는 그 중의 한 사람이예 요…… 언제인가 노상에서 수우라를 만났더니 ── 나아자의 아주머니를 말 예요 ── 나아자의 소식을 묻겠나요. 세상에서 아마 제일 행복스런 사람일 지두 모른다구 대답해 주었더니 콧잔등을 찌푸리면서 안심했는지 비웃는지 더 말없이 지나가던가요.”

나아자의 행복에 대한 기다란 설화는 곧 에미랴의 행복에 대한 갈망의 소 리와도 같이 들렸다 나아자의 . 행복은 자기 자신의 행복이나 되는 듯 흥분 되어 말하는 것이 더욱 그의 불행의 인상을 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일마에게는 언제나 불행한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 자 신이 지금까지 그닷한 행복된 편이 아니었던 까닭일는지도 모른다. 오늘밤 의 에미랴는 벌써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장 친한 동족 같이도 여 겨지고 혈육 같이도 느껴졌다. 그런 까닭에 마음이 기쁘면서도 한편 아팠던 것이다.

변화한 밤거리를 걸으며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일마와 에미랴는 결국 카 바레 <승가리>를 찾기로 했다.

오래 나가지 않은 직장에 대한 에미랴의 걱정도 있었고 그로서는 오래간만 에 낯을 내놓아야 할 의무도 있었다. 같은 값이면 에미랴의 걱정도 덜어줄 겸 일마는 낯익은 그곳으로 발을 돌린 것이었다.

직장이라고는 해도 오래간만이래서 그런지 에미랴는 서먹서먹해 하는 것이 한 사람의 낮선 손님과도 다르다. 아직 몸이 허전한 탓도 있는지 모른다.

동료들 간에도 그 어디인지 어름어름해 하는 기색이 보였다. 일마는 그 외 로운 에미랴를 보호나 하는 듯 자리를 같이하고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음이 의무라는 듯 그만을 위해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했다.

일마와 같이 앉았다고 해도 에미랴는 아무나 손님의 상대를 하는 직업인이다.

그러나 그에게 춤을 청하는 사람은 없었다. 에미랴의 우울은 그런 곳에서 도 오는 것 같았다. 그의 육체와 인기는 벌써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는단 말일까. 그 때문인지 그 쇠잔한 건강에 대중없이 술이 과했다. 발그레 물든 얼굴에 눈을 가슴츠레 뜨고 자기 손으로 얼마든지 따라서는 들이키곤 했다.

그것을 보는 일마의 마음도 편안하지는 않았다.

일껏 유쾌하게 하려고 한 밤이 차차 우울해 가기 시작했다.

“쭉정이의 비애는 삘 날이 없구나.”

전번에 왔을 때 거리에서 느꼈던 ‘쭉정이’ 의 사상이 지금 또다시 일마 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거리의 장남 음악가와 꽃장수와 거지를 보고 느낀 비애가 오늘밤 에미랴의 신세를 봄으로써 또 한번 새삼스럽게 솟 는 것이었다. 에미랴도 별수없이 음악가나 꽃장수와 고를 바 없는 하나의 쭉정이다 사회의 최하층에 . 묻혀서 광명도 희망도 가지지 못하는 고달픈 인 생인 것이다. 혈족의 차이도 피의 빛깔도 쭉정이라는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혈족의 단결이 쭉정이를 구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요, 쭉정이는 쭉정 이끼리만 피와 피부를 넘어 피차를 생각하고 구원하고 합할 수 있는 것이다. 일마가 오늘밤에 에미랴를 누구보다도 몸 가까이 여기고 동정하고 측은 해함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까닭이었다.

에미랴의 모양을 보고 있으려니 일마는 점점 자신이 우울해 가고 슬퍼갔다. 어느 세상이 되면 쭉정이라는 것이 땅 위에서 사라질 것인가. 사라질 날이 있을 것인가 ── 하는 감상이 솟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에미랴의 우울은 일마보다 몇 곱절 더 하다는 듯,

“── 이 잔의 것이 술이 아니구 독약이었으면 해요. 한 모금에 켜게요.”

암팡진 말에 일마는 몸서리를 치면서,

“술이 좀 과했나부오.”

하고 홀 밖으로 잠깐 에미랴를 이끌고 나갔다.

홀에 붙은 긴 복도에는 등불이 침침한 속에 군데군데 소파가 놓여 있었다.

홀에서 제일 먼 자리에 에미랴를 붙들고 앉으면서,

“에미랴는 오늘밤의 내 말을 들어야 하우. 꼭 한 가지 내 청이니까.”

에미랴가 정색하며 자세를 바로잡는 것을 보고,

“에미랴에게 지금 필요한 게 꼭 한 가지 있어. 건강이야. 건강을 회복하 기 위해서의 내 청을 아예 거절하지 마시오. 내가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단 지 보기 딱해서 그러는 것이니까.”

에미랴는 겨우 일마의 뜻을 알아채고,

“나를 구원하잔 말씀이죠. 벌써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여자예요. 잠시 구 하게 된댔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한 반년이나 일년 동안 휴양해 보구료. 그 정도의 힘은 내게 있으니.”

“말씀은 고마워두. 그리구 그것이 얼마간 좋을 것은 사실이래두 내가 무 슨 낯으로 그 호의를 받는단 말예요. 나아자와의 친분을 생각한들 내가 어 찌……”

에미랴를 주저하게 하는 것은 나아자에게 대한 도덕인 모양이었다. 무관하 다는 것을 적절한 말로 일려주려 할 때 문득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뜻하지 않은 벽수였다.

“웬일인가.”

벽수가 그렇게 한가할 리가 만무한 까닭에 일마는 적지 아니 당황한 표정 이었다.

“자네를 찾으러 왔네.”

벽수의 대답에 일마는 더욱 당황해 하며,

“나를 찾다니.”

“진작 여기로 올 것을 괜히 몇 군데 들치노라구 지체만 한걸.”

“무슨 일인데.”

“자네와 헤어져서 가게엘 갔더니 별안간 웬 손님이 찾아왔데나. 서울서 일부러 자네를 찾아왔다는데 ── 누구인지 자네 생각나는 사람 없나. 옴직 한 사람으로 ── 여자 손님이데.”

“여자?”

“단영은 아니구.”

“단영이 아니구 웬 여자 손님이 날 찾아온단 말인가. 꿈같은 소리지.”

중얼거리면서 일마는 사실 웬 소린고 하고 돌연한 소식에 얼삥삥했다. 아 무리 고개를 흔들어보고 머리 속을 들척거려 보아야 다따가 자기를 그곳까 지 찾아올 여자의 이름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내가 그를 모르는 것이 큰 불행으로 생각되리만치 아름다운 여인인데 단 영쯤은 비가 아니야. 자네가 알고 있는 여자 중에서 제일가는 인물을 골라 낸다면 그가 바로 그 여인이리.”

“제일가는 인물이라니, 내가 웬 여자를 그렇게 많이 안다구.”

“많든지 적든지 제일가는 인물이야 ── 하는 수 없이 자네 든 호텔을 가 르쳐 주었으니 만나거든 내게 한마디 전해나 주게. 수천 리 길을 찾아 온 여자니 필시 곡절이 있을 텐데 괜히 먼길 왔다가 사건이나 일으키지 말게.”

“사건이란 자네에게나 일어나는 것이지 내게야 당한 것인가?”

대답은 했으나 일마는 어안이 벙벙해서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곰시락 거리 면서 그 수수께끼의 여성을 찾아내기에 애쓰는 것이었다.

“전할 말 전했으니 난 되로 가게로 가겠네만 아닌 곳에서 작작 놀구 어서 호텔로나 돌아가 보게나. 그런 줄 알았더면 이리로나 데리구 올걸.”

타이르고 벽수가 나간 후까지도 일마는 잠시 옆에 앉은 에미랴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궁리에 잠겼다.

“무슨 큰일이게 그렇게들 설레구 야단들이세요?”

에미랴의 목소리로 겨우 제정신을 차리고 그를 새삼스럽게 알아보면서,

“오라, 에미랴를 구원해 보겠다구 그에게 휴양을 권해 보던 중이었지.

에미랴는 나아자에게 대한 체면으로 모처럼의 호의를 거절했겠다……”

하고 몇 분 전의 자기로 돌아가면서 오늘밤은 이왕 에미랴와 함께 시작된 밤이니 그와 마지막까지 동무해 줄 것, 에미랴가 아무리 사양한대도 일단 꺼낸 말은 끝까지 세원 그의 물질적 원조의 제의를 고집해 볼 것 ── 을 마음속으로 작정하는 것이었다. 미인이 찾아왔든 무엇이 찾아왔든 지금 내 게 무슨 아랑곳인가. 중얼거리면서 ‘쭉정이’의 사상으로부터 시작된 그날 밤의 감상을 도로 일으켜 내면서 에미랴에게로만 주의를 보내려고 애썼 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일마는 호텔에서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뒤미처 들어온 보 이가 의외의 손님을 안내해 온 것이다.

보이가 나가자 좀 있다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남미려가 아니었던가.

순간 일마는 입이 꽉 막히면서 선뜻 말을 내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입과 함께 가슴도 막혔던 것이다.

“놀라셨지요?”

손님이 도리어 먼저 인사의 말을 던졌을 때 일마는 겨우,

“그러구 보니……”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간밤에 왔더니 안 계시길래 오늘은 아침부터 왔죠. <대륙당>에서 물어서 이곳을 알았어요.”

벽수를 놀라게 해서 그가 일부러 카바레까지 뙤어 주러 왔던 서울서온 여 자 손님이라는 것은 바로 미려였던 것이다. 간밤에는 심드렁해서 냉큼 자리 를 안 뜨던 일마도 지금 그를 눈앞에 맞이하고서는 사실 그 의외의 방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밤새도록 생각했어두 날 찾아온 것이 미려씨일 줄은 종시 터득하지 못한걸요.

일마의 솔직한 고백이 결국 반갑다는 뜻인지 귀찮다는 뜻인지 헤아리기 어 려운 어조를 띠인 것이었다.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련만 반면에 귀찮다는 느낌도 없었을 것인가. 귀찮다느니보다도 위험하다는 기색이 얼굴에 떠돎을 어쩌는 수 없었다. 그런 기색을 또 미려가 알아채지 못할 리도 만무했다.

“당돌한 거동에 퍽이나 놀라셨겠지만 저로선 이러는 수밖에는 없었어요.

혜주에게서 이리로 떠나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둘이서 생각하다 못해 눈 꾹 감구 저두 따라왔어요. 거추장스럽더래두 용서해 주세요.”

“거추장스러울 것이야 무엇 있겠습니까. 미려씨의 자유행동인데.”

일마의 당연한 말일 것이나 미려로서는 그 냉정하고 범연한 어조 속에 한 줄기 섭섭한 기맥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 무슨 다른 말이 있을 법도 하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

“뒤를 따라왔다면 선생께 책임을 씌우는 것 같아서 미안하나 ── 어떻게 됐든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아무데두 매일 곳 없는 자유로운 입장으로 왔 다는 것예요. 남의 아내된 몸으로도 아니요, 가정에 매어 있는 몸으로도 아 닌 ── 그 이전의 일개 자유인의 자격으로서 온 것예요. 너무 귀찮아하실 것두 없구 엄청나 하실 것두 없으세요..”

하고 미려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동안의 자기 일신의 사정 ── 남편 만해 와의 절연과 법적 수속의 완성과 구속 없는 자유인의 생활의 시작 등의 사 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흡사 일마에게 안심을 주고 그의 경계의 기색을 누그려 주자는 뜻인 듯도 했다.

“무슨 자격으로 오셨든지 간에 이런 반지빠른 때 하얼빈 구경은 불찰이죠. 가을두 아니요 겨울두 아닌 이때, 거리는 엉성하구 볼 것이라구 변변한 게 어디 있어야죠.”

비유의 말로 비꼬아 말하면서 일마는 차차 내용의 실토로 들어가려는 것이 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해결될 대로 해결된 뒤가 아닙니까. 미 려씨에겐 최근 그런 가정적인 변동이 있어서 일신상에 큰 변화가 일어 나긴 했지만 그건 일종 우연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구 한가지의 목적을 위해서 의 지적으로 가져온 것은 아니거든요. 결과가 뜻과 맞게 됐다구 하더래두 벌써 때는 늦었구 주의는 이렇게 침착하게들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알아요. 저두 그런 줄 알아요. 아니까 괴롭구 어쩔 줄 몰라 갈팡질팡 하 는거죠.”

“가령 내가 지금 이 호텔 한 방에서 미려씨와 만나고 있는 것을 ── 물 론 그 속에 아무 뜻이 없다구 하더래두 ── 가령 나아자가 안다면 그의 맘 이 어떻구 우리를 뭐라구 생각하겠습니까. 더구나 난 지금 아내 나아자를 바꿀 것 없이 사랑하구 있는 터이기두 하구……”

흡사 책망하는 것과도 같다. 미려는 낯이 화끈 달면서 뼈 속까지 아프다.

그러나 무안한 마음대로 화를 내고 울고 할 격도 못됨이 미려의 슬픔인 것 이다. 더욱 목소리를 부드럽히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게 결코 선생께 이 이상 더 폐를 끼치거나 누를 입히거나 하지는 않 을 생각 이예요. 다만 여기까지 온 목적이 꼭 한가지 있어요. 낸들 지금 무 슨 힘으로 한번 결정된 모든 것을 뒤엎어 놓구 바로잡구 하겠습니까. 힘도 없거니와 그럴 면목인들 있겠습니까. 다만 꼭 한 가지 선생께 물으러 ── 선생의 입으로 한마디를 들으러 이렇게 떠나온 것예요. 말 한마디 들으러 수천 리 길을 온 것이 지나쳐 비싼 대가인지는 몰라두 서울서는 그런 기회 를 얻을 수두 없었구 먼 곳에서만 속임 없는 선생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침착한 미려의 말이 한마디 한마디 가슴속에 배어 들면서 일마에게도 비로 소 경건한 마음이 솟기 시작했다.

“그래 그 한마디 말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그 말을 꺼내기엔 제게 지금 큰 용기가 필요해요.”

일마의 지금의 입장이 아무리 곤란하다고는 하더라도 미려는 그에게는 한 사람의 손님인 것이다. 손님 중에서도 강장 반가운 손님 이어야 한다.

냉정하고 쌀쌀하게 하면서도 깊은 마음속은 속일 수 없었다. 경계하는 마 음으로 그의 앞에서 얼굴을 찌푸려는 보았어도 그에게 대한 지난날의 회포 를 어찌 순식간에 떨쳐 버릴 수야 있었을 것인가. 차차 놀랐던 마음도 풀리 면서 일마는 부드러운 태도로 미려를 대하게 되었다. 그의 의젓한 자태 앞 에서 저절로 마음이 부드러워 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호텔식당에서 이른 오찬을 나누면서 이제는 벌써 원래의 진객을 접대하는 태도였다. 한마디의 말만을 하면 좋다는 수월한 책임의 배당이 마음을 얼마 간 가볍게 해준 탓이었는지 모른다.

“얼른 그 한마디 말이라는 것을 들을까요.”

반드시 성급히 재촉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궁금증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조르시면 더욱 말하기 어려워져요. 천연스럽게 모르는 결에 말하 게 돼야 할텐데 ── 이러다간 주럽만 들면서 옳게 말하게 될 것 같지두 않 아요.”

음식을 먹는 솜씨까지 서툴러지면서 미려는 사실 점점 몸과 마음이 굳어져 가는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의 시간을 온통 제게 못 주시겠어요.”

“벽수군에게두 잠깐 들려봐야 하겠구 그렇게 한가하진 못한데요.”

“오늘 하루만요. 더 원하지 않을께요.”

“벽수 말마따나 이러다간 짜장 남의 사건 보러 왔다가 되려 제 사건 일으 키게나 되지 않을까.”

이것은 물론 일마 속으로의 생각이었으나 사실로도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 지 몰라 얼삥삥했다.

그리구 거리에서 제일 “ 조용한 데가 어딘지 그리로 반날 동안만 저를 안 내해 주실 수 없으실까요.”

“조용한 데라니요.”

“그런 곳만이 제게 용기를 줄 것 같아요. 그런 곳에서만 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두 중대한 말인가요.”

“선생의 소중한 대답을 들으려니까 말예요.”

“어디가 제일 조용할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야 조용한 곳이라면 교외밖엔 없을 것 같고 교외라면 그가 아는 범위로는 묘지같이 고요한 데가 없을 법했다. 번잡한 공원보다도 강변보다도 어디보다도 한적한 곳이 묘지이다. 여자의 가슴 속속 들이로 감 추고 있는 그윽한 한마디를 들으러 묘지로 가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일마는 하는 수 없이 그날 하루는 미려에게 바치는 수밖에 없게 되어 <대 륙당>에도 들리지 못한 채 호텔을 나온 길로 미려와 함께 자동차로 묘지를 향했다.

도중에서 문득 생각하고 꽃가게에서 한 묶음의 꽃을 사들었다.

나아자의 어머니의 무덤에 바치자는 뜻이었다. 차는 휑휑한 거리를 한달음 에 달렸다.

여름과는 얼마나 달라진 풍경이었던가. 조금 흐린 날이라 묘지의 오후는 괴괴하고 쌀쌀했다. 휘추리만 남은 수목이긴 하나 원체 빽빽이 들어선 까닭 에 깊은 수풀 바다가 일목에 내다보였다.

나무 그림자밖에 드러난 사당의 벽화도 앙상하게 보이고 지름길과 나무 아 래 쌓이고 쌓인 낙엽도 이제는 벌써 색채도 형적도 없어져서 소슬한 기색이 구내에 그득히 넘쳐 있다. 백양나무의 흰 살결이 더욱 희게 눈을 끌고 느릅 나무의 가는 회초리가 연필 글씨같이 자자분한 획을 허공에 그었다. 사람 없는 벤치도 차고 쓸쓸하다.

미려에게는 그런 풍경이 처음이라 한층 소슬한 느낌을 금하지 못하여 자기 의 쓸쓸한 말을 전하기에는 참으로 맞춤의 곳이 아닌가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일마는 나아자의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비석 앞에 꽃을 꽂아 놓고는 안으 로 멀리 곧게 뻗은 지름길을 더듬으며 미려를 돌아보았다.

“조용한 곳이라면 이렇게 조용한 곳은 없을 텐데 ── 어서 그 말씀이라 는 걸 해보시죠.”

“선생의 현재의 안온한 가정생활에 행여나 금이 나게 할 외람한 생각을 제가 어찌 먹구 있겠습니까 . 그런 뜻이 아닌 까닭에 이렇게 선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지 딴 맘이 있다면 무슨 멋으로 뵈러 왔겠습니까. 선생의 행 복을 비는 정성으로야 누구에나 뒤질 것 없다구 생각해요.”

미려가 이렇게 현재의 사정을 새삼스럽게 뙤어주는 것이 일마에게는 되려 괴로운 노릇이었다. 바로 나아자와 그렇게 나란히 서서 걷던 묘지이다. 등 뒤에는 나아자의 어머니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이 지금 이 두사람의 자태 를 감시나 하는 듯, 슬퍼나 하는 듯,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괴 로운 처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 일마의 가슴을 겹겹으로 죄어 주는 폭밖에는 안되었다.

“제 행복을 빌어 주신다는 건 고마운 말씀이나, 진정으로 제 행복을 생각 해 주시는 도리는 저를 다치지 말구 그대로 가만히 버려 두는 것입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전 제 맘을 억제하구 정복하려구 얼마나 오랫동안 남 모르게 싸워 왔는지 몰라요. 피투성이가 된 맘을 간신히 달래놓구 나서 저 두 제 길을 찾을려구 애쓰는 중이예요. 한눈을 판댔자 말씀마따나 시기가 늦은 이제 어쩌는 도리가 있어야죠. 다만 한가지 가슴속에 밝혀둘 것이 있 어요. 그 한가지의 정리가 아마두 제게는 영원의 평화를 가져올는지두 몰라요.”

미려는 한참이나 사이를 떼면서 한숨이나 짓는 듯 고개를 드리우며 말을 이었다.

“그건 지난날에 관한 것예요. 벌써 칠년이 되는지 팔년이 되는지 제 맘두 몸두 순결하던 그때 ── 제가 발을 빗디디어서 불행한 오늘의 길을 밟은 건 허영이었든지 운명이었든지 모르겠으나 모든 것이 삐뚤어진 오늘 제가 가장 즐거운 것은 지난 그때를 생각함 이예요. 지난날을 맘속에 되풀이 하 면서 아마도 앞으로는 그 추억 속에서만 살게 될것 같아요. 추억에 잠길 때 그때의 일마씨의 맘이라는 것을 생각 하게 돼요. 열정의 깊이라고 할까 ─ ─ 지금 가장알고 싶은 게 그것예요.”

“전 그때 노여워 했죠. 횟불을 가지구 오던 곳을 살러 버릴 수 있다면 그 렇게래두 하구 싶으리만치 분해하구 괴로워했죠. 어떻게 그런 격분이 지금 까지 평온하게 사라졌나 생각하면 흡사 기적의 일만 같아요.”

“괴로워하구 분해 하셨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요.”

미려는 귀중한 실마리나 잡은 듯 조금 격해지면서 일마의 말꼬리를 조급하 게 받치는 것이었다.

“괴로워 하셨다면 저를……”

“…………”

“저를 사랑하셨던가요.”

천근 같은 무게를 가지고 그 한마디가 떨어졌던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용 기가 미려의 얼굴에 나타나 보였다. 그 한마디야 말로 미려의 듣고 싶어하 고 알고 싶어하던 꼭 한 가지의 과제였다. 수천 리 길을 준비해 가지고 온 한마디라는 것이 바로 그 말이었던 것이다.

“저를 사랑하셨던가요.”

재차 떠받치면서 어세가 급한 게 거의 재촉하는 듯도 하다. 용기라느니 보 다도 일종 열정에 가까운 광채가 그의 눈동자에 빛났다.

“사랑하니까 괴로워한 것이겠죠.”

일마가 겨우 무거운 입을 떼어 한마디 대답을 던졌을 때 미려는 거의 날뛰 는 듯이,

“사랑 ── 아! 듣구 싶던 말이 바로 그 말예요. 지금은 어찌 됐든 한때 저를 사랑해 주었단 말이군요, 그 말을 들으러 이 먼길을 떠났던 것예요.

오랫동안 듣구 싶던 말을 오늘에야 처음으로 들었어요. 이 이상의 만족은 없어요.”

흡사 소녀 같은 가벼운 걸음으로 땅을 구르면서 손을 뻗쳐 길가의 나뭇가 지를 무의미하게 휘어잡곤 하는 것이었다. 일마는 그 미려의 양을 바라보면 서 할말을 했는지 못할 말을 했는지 자기가 던진 한마디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긴 지름길을 깊은 속까지 걸어 들어가니 수풀은 더욱 빽빽하고 느릅나무와 백양나무의 어울린 가지가 허공을 덮어 버릴 지경이다. 겹겹으로 쌓이고 쌓 인 낙엽이 발아래에 푹신푹신 밟히고 찬 공기와 나무와 하늘만이 보이는 것 이 흡사 깊은 산속에나 들어온 듯하다.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새소리조차 침 묵해서 괴괴한 그 속이 두 사람에게는 무인지경의 별천지인 느낌이 들었다.

그 고요하고 쓸쓸한 수풀 속이 두 사람의 체온을 한줌 한줌 식혀주는 것도 같다. 가슴속에 솟는 것은 피차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아니고 도리어 침착 과 안정이었다. 더욱이 일마는 옛 생각과 미려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달아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침착해 가고 차졌다. 날이 몹시 추웠던 까닭 일까. 사실 그는 옷을 얇게 입었던 탓인지 거의 몸이 덜덜 떨릴 지경으로 추워짐을 느끼며 미려의 말도 감동하는 자태도 가슴속에 그대로 얼어붙는 듯하다. 발에 힘을 주고 어깨를 활짝 펴면서 고개를 쳐들었을때 나뭇가지 사이에 희끗 날리는 것이 있었다. 새털일까 하고 보고 있는 동안에 굵은 떡 가루같이 어느결엔지 부실부실 내려서 지름길과 어깨 위에도 떨어지기 시작 한다 눈이었다 거리의 . . 첫눈이었다. 일마는 그 첫눈을 신기한 것으로 바라 보면서 추위는 이 눈의 탓이려니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려는 그 시절의 선물에 새삼스럽게 주의를 보내지는 않았다. 추 위보다도 첫눈보다도 마음속 일로 가슴이 그득 차서 여전히 말을 이었다.

“제게는 경쟁자가 한 사람 있어요.”

다따가의 발설에 일마는 의아하면서,

“경쟁자라니요.”

“일마씨를 두구 말예요. 누군지 아시겠어요 ── 단영이예요.”

“단영”

“다 알구 있어요 ── 단영이 제게 그 동안 일을 말해 주었다나요. 청하 지두 않았는데 제 스스로 제 비밀을 죄다 털어놓았다나요.”

“비 비밀이라니, 무 무슨 비밀을.”

“그날 밤 단영의 아파트에서의 일 말예요.”

거기까지 말하는 미려는 조금 잔인한 것이었을까. 그 한마디에 일마는 금 시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입술이 떨렸다.

놀라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저두 사실 그것을 들은 당장에는 놀라구 구역질이 나서 불쾌한 느낌을 참지 못했어요. 그러나 모든 것이 성급하고 초조한 단영의 실책으로 말 매 은 것이거니 생각하니 조금 노염두 풀렸어요. 지금은 벌써 남의 옛날 얘기 만 같으면서 아무렇지두 않아요. 이렇게 심드렁하잖아요.”

“…………”

“그리구 오늘 이상한 걸 발견했어요 ── 저와 경쟁자인 단영과의 어느 편으로 승부가 기울었나를 명확하게 발견한 것이예요. 어느편이 이겼겠어요. 지금 이렇게 제 맘이 기쁜 것은 제가 이긴 탓예요. 단영이 자기의 비밀 을 숨김없이 말했을 때 전 속으로 오늘 이 결론을 알아내구야 말 것을 맹세 했었어요.”

“…………”

“오늘 그것을 알았어도 제가 이긴 것예요. 일마씨가 사랑한건 단영이 아 니라 저였어요. 아파트의 비밀쯤이 제겐 부러운 게 아니예요. 마음의 사랑 ── 비록 과거 한때의 것이었다구 해두 나를 영원히 기쁘게 해주는 건 그 것에.”

부끄럽기만 하던 일마에게는 이제는 차차 미려의 그 감동과 열정이 두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불덩어리 옆에나 서 있는 듯 위험한 생각이 들면서 미려 의 존재에 겁조차 났다.

지금 제게 한마디의 “ 말이 있다면 그건 감사의 말예요. 일마씨에게 드릴 말은 감사의 말뿐예요. 사랑의 말이라는 것이 여자에게 얼마나 고마운 것인 지를 제가 똑바로 알려 드리는 것예요.”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날두 추운데.”

미려의 과도의 흥분이 심상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아서 일마는 사실 진심 으로 그의 몸을 걱정했다. 눈은 점점 내려서 이제는 벌써 나뭇가지 사이로 도 보얗게 내려지는 것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미려는 묘지에서와는 달라 사람이 변한 듯 냉정하고 침착해 졌다. 눈 내리는 수풀 속에서의 감동과 흥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고요한 표정에 말조차 적었다.

행장이라고도 별로 없는 가벼운 몸에 잠시 동안의 여행이라 아무데서나 하 룻밤을 지낼 생각으로 일마와 같은 호텔 한 간 방에 트렁크만을 맡겨 놓았 던 것이다.

일마에게는 그 하루는 벌써 그것으로 허비되고 채워진 셈이었다. 미려와의 반날로 말미암아 정신이 그 뜻하지 않은 충동으로 가득 차져서 남은 짧은 반날 마음의 고삐를 다른 곳으로 쉽사리 돌릴 수는 없었다. 미려의 던진 말 과 그가 보인 표정과 태도가 마음속을 고집스럽게 지배하면서 다른 정신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그 분주하고 벅찬 마음으로는 그날 더 에미랴를 찾을 수도 없는 것이요, 벽수의 일을 돌보아 주러 갈 여유도 없었다. 마지막 시 간까지 미려와 동무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거리에도 눈이 보얗게 내리면서 행길을 어느덧 희끄무레 덮었다.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 첫눈을 기뻐하는 듯 조금도 발들이 삠하지 않으며 눈속을 번잡 하게들 걸어간다. 일마는 몸이 으슬으슬해지고 추위를 느끼면서 우선 거리 로 향한 객실에서 더운 차를 분부했다. 목을 녹이며 행길을 내다보노라니 차차 몸이 녹아갔다. 포도를 스쳐 지나는 남녀의 옆얼굴들을 내다보면서 찻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 위에 얼굴을 대고 있는 미려도 추위가 풀려옴을 느끼 는 것이었으나 ── 눈 오는 날 커피의 향기는 왜 그리도 슬픈 것인가. 묘 지에서의 수다스럽던 미려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차를 마시는 지금의 미려는 한결같이 슬프고 고달픈 자태이다. 더운 김이 얼굴을 녹이고 막힐 듯이 코 를 찌르면서 눈썹을 적시고 긴 속눈썹 끝에 맺힌다.

일마에게서 듣고 싶던 마지막 말을 들었고 그에게 감사의 말을 보내고 난 이제 미려에게는 더 남은 일이 없고 여행의 목적은 그것으로서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수풀 속에서 기뻐했듯 그렇게 참으로 지금의 마음이 만족 스러울 수 있었던가. 사랑의 말 한마디를 들었다고 그것으로서 만사가 해결 되고 마지막 만족에 도달한 것이었던가. 슬픔은 끝날 날이 없고 그러므로 인생은 영원히 서글픈 것이다.

“제게 남은 일은 이젠 떠나는 것밖엔 없어요. 더 드릴 말두 없구 더 받을 말두 없구 ── 여행의 목적은 완전히 끝났어요. 오늘밤으로래두 떠나겠어요.”

하는 말은 만족에서 온 것이 아니요, 슬픔에서 오는 말이다. 서글픈 체관에 서 던진 마지막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더 붙들어 둘 체면두 못됩니다만 ──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라구 생 각하시는 수밖엔요. 사람이 현재의 만족을 영원히 지탱해 가는 수야 있습니까. 불필요한 것은 잊어버림이 인생에 있어서는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를 미 려씨가 몸소 밟아 뵈이셔야지 그렇지 않구야 무슨 도리가 있습니까.”

일마의 처지로 미려를 더 만류해 둘 수도 그에게 더 진지하게 이야기 할 말도 없는 것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피차에 한시라도 속히 작별하는 것뿐이다

“어서 옷이나 갈아입고 내려오시죠. 만찬이나 같이하시게.”

미려를 방으로 올려보내고 식당 보이에게 최후의 만찬의 식탁을 준비 시켜 놓은후 일마는 거의 한 시간이나 기다렸을까. 시간이 훨씬 지나 식당에서는 번잡한 식사들이 시작되었건만 미려는 내려오지 않는다. 오 분 십분 더 기 다리다가 일마는 하는 수 없이 층계를 올라가 미려의 방문을 두드려 보았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밀치고 들어가니 미려는 침대에 쓰러져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눈물만을 흘리는 것이 아니고 어깨를 떨며 얼굴을 펀 지르르 반죽하고 있는 것이다. 손을 대고 말을 걸 재주가 없다.

“……잊어버리라니 어떻게 잊으란 말씀예요. 과거와 현재는 왜 그리 엄격 한 것인가요. 그리구 미래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까 묘지에서 보이신 이상의 큰 용기요.

그 용기로 모든 것을 잊고 분별을 가져야 합니다.”

일마의 말이 대체 미려의 귀에 들어나 갈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