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공무한/16장
아파트 청운장의 일마가 옮겨간 뒤의 빈방에는 다음날로 즉시 한 사람의 새로운 생활자가 들게 되었다. 은파였다. 능보의 바로 옆방에 동무 일마 대 신에, 동무라기보다는 좀더 사이가 가까워진 은파가 옮아온 것이다.
능보와 은파의 관계는 겉으로는 서로 험구와 싫은 소리를 건네면서도 남 모르는 사이에 점점 깊게 맺어졌다. 일종 기묘한 사이였다. 만나면 개와 고양이같이 부질없이 응얼거리던 그들이 어느결엔지 그렇게 동거를 약속하 게까지 되었음을 알았을 때 사실 동무들도 놀랐다. 은파의 알지 못할 숨은 매력에 의함이었을까. 피차의 겉으로의 반목은 도리어 참된 사랑의 역표현 이었던가.
능보는 아직 개업은 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생활비를 지탱해 갈만한 능 력은 가졌다. 은파가 〈실락원〉의 초라한 직업을 버리고 능보와 공동생활 을 시작하게 된 것은 연래의 희망이었고 희망의 성공이었다. 결혼이니 무어 니 하는 구식의 귀찮은 생각을 버리고 뜻이 맞는 때까지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자는 것이었지, 그 이상의 엄격하고 주체스런 작정은 없었다. 능보는 독신생활보다는 그 편이 훨씬 편리하고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요, 은파도 물 론 그 정도의 같은 생각으로였다.
은파가 가져온 짐이라고는 트렁크 두 짝밖에는 안되었다. 공동생활이라고 는 해도 역시 은파가 능보 쪽에 합류에게 된 셈이다. 두 개의 트렁크만을 들여놓기에는 빈방은 너무도 넓고 휑휑했다.
“차라리 당신 방에 함께 들여놀까요.”
은파가 방 가운데 서서 그 휑함을 탄식하면 능보는,
“될 말인가. 두 사람은 언제나 두 개의 인격인데 좁은 한 방에서 복작거 리다니 각각 제 방 한 간이야 제가 지배해야지.”
하며 반대하는 것이었다.
“일마의 혼이 그 어느 구석엔지 남아 있는 것 같아서요.”
“육체와 짐과 함께 완전히 나아자에게로 날아가 버린 일마의 혼이 그 냄 새 한 방울이나 여기에 남길 줄 아우.”
결국 은파는 완전한 방 한 간을 차지하게는 되었으나 실상에 있어서는 그 것은 은파만의 방이 아니라 능보의 방이기도 했다. 은파는 두 짝의 트렁크 만을 부치고 기실 능보의 모든 세간―의걸이며 책상이며 의자며를 함께 공 유하게 되었고 그 한 간의 새 방은 두 사람의 침실로 작정했던 까닭이다.
두 방은 결국은 한 방인 것이요, 두 사람은 두 몸이며 한 몸인 것이었다.
벽을 사이에 두었을 뿐인 두 간 방은 그 새로운 인물을 한 사람 더하자 종 래와는 판이한 새로운 성격과 풍속을 띠이게 되었다. 은파는 〈실락원〉시 대보다는 나날의 생활이 말할 수 없이 자유롭고 즐거워져서 다시 낙원을 얻 은 셈이었을까. 뭇사람에게서 천대를 받는 인간이 아닌 것이요, 자기를 옳 게 주장하는 사람이 되었다. 한 가정의 주부처럼 조그만 두 방을 알뜰하게 다스려감이 얼마나 즐거운지 갱생한 자신의 자태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했다. 능보가 출근시간이 되어 연구실로 나간 뒤 혼자 남은 은파의 맡은 일 과라는 것은 두 간 방을 깨끗하게 치우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머리를 수건 으로 가리고 빗자루를 들고 휘파람을 불면서 그는 스스로 즐겨서 점점 의무 에 매인 암탉이 되어갔다.
능보가 소중해 하는 현미경을 닦을 때에는 세심한 주의를 해가며 능보의 비위를 맞추기에 노력했다. 그 노력이 물론 즐거움의 하나였다.
능보가 돌아왔을 때 기뻐하는 양을 보는 것이 하루 동안에 아마도 가장 즐거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의자에서 냉큼 일어서는 은파를 보고 능보는 무 슨 대명사로 그를 불렀으면 좋을지를 몰라 빙긋이 웃으면 은파 역시 능보를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꼬 하면서 망설이다가,
“저녁이나 먹으러 나갑시다.”
귀찮은 대명사는 빼어 버림이 결국 제일 편안함을 느끼는 두 사람이었다.
훈은 성냥통을 사들고 능보들의 새살림을 보러 왔다. 아닌게아니라 그 말 끔하게 정돈된 데 놀랐다.
“공동생활이 독신생활보단 아무래두 나은 모양인데 이렇게 깨끗할 법이 야 있나. 아주 방안 공기가 달라졌으니.”
“어떻게 달라졌단 말인가.”
능보는 반문을 하면서도 자신 그의 말뜻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전에야 자네 같은 보헤미안이 있은 줄 아나. 게으르구 지저분하구 추접 하구―말할 수 없는 뇟보였었지. 지금은 사람이 변한 것 같이도 보이네. 방 안이 깨끗해졌을 뿐 아니라 자네 일신까지가 멀끔해졌어. 양복바지에 언제 나 곧게 줄이 서구 내의가 날마다 깨끗하구 구두가 반짝이구 하는 걸 자네 는 되려 모르리, 오늘의 자네는 어제의 자네가 아니야―여자란 남자를 멀끔 하게 솔질하구 닦아 놓는 마부인 모양이지.”
“마부는 좀 심한데요.”
알코올 풍로로 차를 끓이노라고 설레던 은파는 그 비유에 불만의 표정을 보인다.
“심한 것두 없지. 말을 다스리는 마부의 직책이 얼마나 중하구 크게.”
“그럼 난 별수없이 말이 됐네 그려.”
이번에는 능보가 불만해 한다.
“말두 마부두 다들 싫다니 욕심쟁이들이야. 만약 그런 알뜰한 마부가 생 긴다면 난 즐거이 말 되기를 자진해 나서겠네.”
세 사람은 서로 바라보고 웃으면서 결국 훈이 말한 비유는 굳이 불만으로 여길 것도 없는 한자리의 농으로 변하고 말았다.
은파는 한편 탁자 보에 끓인 홍차를 내놓고 잔에 위스키를 몇 방울씩 떨 어 트렸다.
훈에게는 그 차 맛이 또한 각별하게 여겨졌다. 더운 차에 술 향기가 섞여 전신을 훈훈히 녹이는 듯도 하다. 그 어디서 먹은 차보다도 풍미가 한결 나 은 듯하다.
“이것두 바루 가정의 맛인가 부지. 이 따뜻하구 향기로운 맛두."
“공동생활의 이득이라면 그 외에두 여러 가지가 많다네.”
능보는 한 가지 한 가지 감동만 하는 훈에게 더욱 자기의 입장을 설명하 려는 것이었다.
“홍차 맛이 따뜻하구 내 몸이 깨끗해진 것만이 이득이 아니야―그 외에 첫째 마음이 침착해졌구, 일상생활이 편리해졌구, 경제적으로두 되려 패게 됐다네 . 밤마다 술을 먹으러 다니지 않어두 좋으니 말이야.”
“흠, 듣던 중 걸작이야. 아닌 곳에 생각지 못한 이득이 숨어 있었네 그려.”
“결국 나는 꿈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잡구 말았네. 꿈이라는 게 멀구 높 게 가지면 가질수록에 더욱 한이 없는 것이거든. 눈앞에 꿈이나 만리 밖 꿈 이나 잡아 보면 마찬가지일 것이구 아무 꿈이나 한 가지를 잡아서 그 속에 서 맘을 안정하게 잡는 것두 필요한 일일 것 같아서.”
“만리 밖 꿈이 못돼서 미안합니다.”
은파가 샐룩은 해해도 반드시 능보의 태도에 불만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 피차의 뜻임을 처음부터 알고 결합된 두 사람이 아니었던가.
“자네는 꿈을 잡아서 맘이 안정됐다구 해두 우리는 다시 실락원을 찾을 흥미가 없어졌거든. 은파가 없으니까 가게는 텅 비인 것 같구―인전 은파에 게 대해 전과 같이 농을 걸 수두 없게 됐구.”
“어서 단영이나 놓치지 말게. 자네두 어느 때까지 망설이지만 말구.”
능보에게서 이렇게 말을 듣지 않아도 사실 훈은 요새 단영에게 대해 다시 무심하게 지낼 수 없게 되어갔다. 명도들과도 말끔하게 손을 끊고 새로운 의기에 갱생해 가는 단영의 자태는 지금과는 다른 새사람의 탄생과도 같았다. 새로운 의욕이 불현듯이 솟기 시작함을 느꼈다.
오늘도 훈은 그 길로 단영을 찾아가 볼까 마음먹고 있었다. 능보와 은파 의 자별스런 태도가 그런 마음을 한층 불지른 것도 사실이었다.
나아자에게로 온 에미랴의 편지로 일마는 그 후의 만주의 소식을 대강 알 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궁금해 하던 대륙당 사건의 하회를 알게 된 것이 일마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요 안심이었다. 조만간 벽수에게서도 자세한 편지가 오 련만 일마는 우선 아내를 통해서 에미랴의 입으로 하루바삐 소식을 듣게 된 셈이었다.
결국 예측대로 삼십만 원을 갱단에 보내고 납치되었던 운산의 한 몸이 무 사히 놓여 돌아왔다는 것이다. 소문대로 몸이 국경지방에 구금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요, 한 몸에는 별로 박해와 상처를 입지 아니하고 탈없이 돌아 왔음이 불행 중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경로로 놓여 왔는지는 알 바 없 으나 그 부대한 몸이 겨우 숨을 돌렸을 것과 벽수와 허씨부인과 집안 식구 들이 근심에서 풀려서 비로소 편안한 잠을 이루게 될 것이 반갑게 추측되었다. 거리에서도 큰 이야깃거리가 되어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서 놓여 일종 흥분된 안심에 잠겨 있고 갱의 정체에 대한 비밀은 밝혀지지 못한 채 여전 히 오리무중에 숨겨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에미랴조차가 그 정도로 자세히 소식을 전했을 제는 거리의 소문이 얼마나 자자할까를 미루어 생각하기에 넉넉하다.
외로운 외지에서 적수공권으로 수십 년 고생에 한 몸을 겨운 한운산에게 평생에 한 번이 될 그 끔찍한 경험이 얼마나 위대한 감회를 주었을까를 생 각할 때 일마는 그 자신 남의 일이 아닌 듯한 일종의 회포를 느꼈다. 놀라 고 혼을 떼우기도 했겠지만 필시 한편 그에 값갈 만한 교훈도 받았을 것이 니 앞으로의 생활방침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숙부의 사업에 불만이던 벽 수도 앞으로는 함께 협력해서 참으로 대륙에서 굳건한 발돋음을 닦아 나가 는 것이 아닐까도 느껴졌다. 인간생활의 행복과 불행의 교착을 거기에서도 또 한 가닥 본듯해서 일마는 가지가지로 생각이 복잡했다.
“갱의 정체는 밝히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니 하얼빈이 위험한 도회라는 사실은 그대로 남은 셈이지. 안심하구 여행이나 할 수 있나.”
“우리 같은 사람에게 갱이 두려울 것이 무에 있어요. 남의 눈에 너무 띠 이게 되니 일상 탈이죠. 언제나 보통인 한 사람의 시민으로 지내는 것이 편 한 노릇이지. 뭇사람 위에 솟아난다는 것이 반드시 행복의 길은 아닌 모양 이예요.”
“하긴 복잡한 사회에서 어느 때 그런 암흑면이 곱게 없어질 날이 있겠수만.”
“어떻든 잘 해결되었어요. 이렇게 시원하고 안심될 데는 없어요. 일마가 다시 하얼빈으로 혼자 여행을 떠나지 않어두 좋게 되었으니요.”
하면서 나아자는 웃는 것이다. 전번의 일마의 여행이 그렇게까지 나아자에 게 걱정을 주었다는 것보다도 그 한마디는 차라리 나아자의 재롱으로 듣는 편이 옳을 듯하다.
“갱보다두 한 가지 제게 걱정되는 것이 있어요.”
새삼스런 어조에 일마가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에미랴 말예요. 요새는 몸이 어떻게, 추운데 얼마나 고생을 하구 있을지. 편지로는 그런 말을 안 해두 뻔히 짐작되는 일인데.”
나아지가 에미랴와 얼마나 친한지 아마도 숙모 수우라와 보다도 더 친한 것은 일마도 잘 아는 일이다.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시겠어요?”
기어코 주저하던 말을 집어냈다.
“무엇이오. 못 들어줄 것이 무어 있겠수.”
에미랴를 잠깐 데려다가 “ 함께 지내두 좋아요. 이 겨울 동안이래두 고생 을 덜어줄까 해서요.”
일마에게도 그다지 어려운 청은 아니었다. 도리어 자청해서 해도 좋은 일 이었다.
“에미랴만 승낙한다면야, 이곳에야 무슨 이의가 있겠수. 선뜻 와줄까.”
“승낙해 주시겠어요? 고마워라. 답장에 곧 그 말을 적어 보내겠어요. 얼 마나 기뻐할까요. 곧 떠나오게 할 테예요.”
종세도 능보들의 새살림을 보러 가자고 동무삼아 일마를 끌어냈다.
“자네들 집을 먼저 보러는 가야겠으나 무얼 들구 갔으면 좋을지 몰라서 아직 주저하구 있는 중이네만---성냥 한 통을 들구 갈 수두 없는 노릇이구.”
종세는 아직도 일마의 신가정을 못 찾은 것을 변명해 말한다.
“들구 오긴 무얼 들구 오나. 그저 맨손으로 오게나.”
“살림두 한 사람쪽이 차릴 센 말이지. 이건 동무들이 하나씩 둘씩 개개 들 집을 가지구 나서니 누구부터 찾아가야 옳을지 사실 난처하단 말야. 결 국 그렇게 살림을 차리고 나서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행복의 길인지 원.”
“미안하네, 괜히 아닌 걱정을 끼치게 돼서. 살림 차린 게 모르는 곳에 그런 의외의 걱정을 끼치게 되다니.”
“그래 오늘 우선 능보들을 찾아볼까 해서.”
“나두 마침 생각하던 중인데―”
두 사람이 잠시 들어가 앉은 찻집은 창이 바로 포도를 향해 있는 곳인 까 닭에 흐린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과 다리가 어지럽게 창 앞을 스쳐 지냈다.
겨울 거리의 분주한 모양이 그 어디인지 드러나 보인다.
“하긴 자네들이 새살림들을 차린 것을 내가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것은 아니네만―그러나 자네들의 안식처는 각기 그 따뜻한 가정이라구 하구 남은 우리들은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훈이나 내가 동무에게선 떨어지구 집으 로 돌아가면 싸늘한 방이 있을 뿐이니.”
종세는 사실 일종의 안타까운 고독감을 금할 수 없다는 듯한 어조였다.
“이렇게 말하면 자네들을 시기하는 것두 같으니―자네들의 걷는 길이 역 시 하나의 틀림없는 진리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퍼붓기 시작한다. 함박 같은 눈송이가 사람들의 어 깨를 덮고 다리 사이를 허옇게 스친다. 거리가 보얗게 흐린 것이 큰 눈이 될 듯하다.
어서 독신생활을 좀더 “ 즐기게나. 원대한 꿈을 그렇게 쉽게 깨트려 버릴 법은 없어.”
“아무리 원대한 꿈을 가졌기로 자네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실현하구만 보면 결국 꿈은 다 마찬가지야.”
“한눈 파지 말구 앞만 꼭 바라보고 있어. 이제 큰 호박이 굴러오지 않으리.”
“굴러올 호박보다는 아무리 적어두 굴러온 호박이 낫거든.”
하고는 종세는 창밖 눈송이를 내다보다가,
“올 겨울에는 화풀이로 실컷 스키이나 타겠네. 머리 속을 개운하게 씻어 버리는 건 스포츠밖엔 없거든.”
“스키―좋은 말이지. 나두 한몫 끼워 주게. 몇 해 만에 장쾌한 맛 또 한 번 보게.”
“스키장에서까지 부부의 꼴을 보이려는 심정인가.”
“눈에 거슬린다면 나 혼자래두―”
“안상달이 올에 처음 시작해 보겠노라고 벌써부터 구두니 잠바니 장만해 가지구 법석이라네. 올에는 스키 패가 버쩍 늘 모양이야.”
“일소대를 조직해 가지구 주일마다 삼방으로 원정을 가세나.”
“안상달이 움직이면 혜주는 가만있을 줄 아나. 거기서두 재 없이 부부의 꼴을 보게 될 마련이지.”
“그럼 녹성음악원의 패들이 전부 동원하게 된단 말인가.”
묻다가 일마는 문득 뒤미처,
“자네 요새두 미려를 자주 만나나.”
천연스럽게 떠보는 것이나 종세는 일마의 말투를 민첩하게 짐작하고 물끄 러미 그를 볼뿐 짐짓 대답이 없었다.
미려와의 사이가 행여나 어떨까 하고 일마가 추측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종 세는 면구스러웠으나 그러나 사실 자기 스스로도 자기의 심중을 가장 정직 하게 떠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못 만났네만 만난댔자 미려가 어떤 사람에게―그렇게 홀홀히 남에게 도적맞을 여잔 줄 아나.”
대답하고는, 그럼 만약 마음을 도적맞을 인물이라면 자기가 그 마음을 도 적해 보겠다는 생각인가 하고 종세는 자신의 깊은 마음속을 의심하고 매만 져 보았다. 알 수 없는 전율이 오면서 순간 몸서리가 쳤다. 모두가―엄청나 고 두려운 일만 같으다.
“미려가 만만치 않은 사람인 줄야 내 모르지만.”
“사람의 앞일을 뉘 알겠나. 한 발자욱 앞서 어둠인지 광명인지는 언제나 지내놓구 봐야만 아는 일인걸……인간사를 작정하는 건 세월뿐이야. 세 월……세월의 뜻에다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엔 없어.”
지껄이다가 종세는 정신을 차리고,
“내가 무얼 이렇게 지껄이누. 미려의 일이 내게 무슨 아랑곳이게. 미려 보다두 난 차라리 자네에게 청매의 이 얘기를 해야겠네. 상해로 간 청매에 게서 이제야 겨우 편지가 왔단 말야. 자네두 읽어 보게. 상해 재미가 어떤가.”
주머니 속에서 집어낸 꾸겨진 편지를 일마에게 전한다.
“청매의 편지라……오래간만에 청매의 이름을 듣게 되네 그려.”
“고생을 하는지 단꿈을 꾸는지 사랑의 줄행랑을 놓은 아귀의 팔자를 뉘 알랴만 낯선 곳이라 저두 고향 생각이 더러 나렷다. 편지 준 것만 고마워.”
“사랑의 편지나 아닌가. 남의 편지 읽기가 웬일인지 어색한데.”
일마는 진정 어색한 듯 봉투에서 낸 편지를 펴들었다. 그런 여자치고는 익숙한 글씨요, 유식한 필치였다. 일마는 대강 군데군데 추려서 읽어갔다.
……고향을 떠난 지도 벌써 몇 달이 되었는지 그 동안 시절도 바뀌어졌건 만 분주한 마음에 옳은 정신없이 지내노라고 이제야 겨우 고향의 소식을 묻 게 되었습니다. 몇 천리 거리나 되는지 고향은 먼 바다 건너의 조그만 등불 같이 마음속에 아득하게 깜박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오래간만에 고요 히 생각하면서 붓을 드노라니 아닌게아니라 한가닥 회포가 유연히 솟아옴을 느끼게 됩니다.
꿈결 같은 몇 달이었습니다. 너무도 당돌한 행동을 삽시간에 가져 버리고 나니 이것이 정말 현실 속의 일인가 싶으면서 얼떨떨한 착각을 금할 수 없 어요. 제게는 그러는 수밖에는 없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고도 생각하면서 지금도 결코 그것을 뉘우치지는 않으나 원체 저질러 놓고 보니 엄청난 일이라 제 자신 놀라고 있는 중이예요. 선생이 저를 오해하고 꾸중 이야 하실까만 아무래도 뒤에 남는 생각이 개운치 못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친 걸음을 지금 새삼스럽게 어떻게 하겠 습니까. 이것도 하나의 운명이요, 전세의 인연이 아닐까 하고만 생각합니다. 선생께 대한 미안한 말씀은 적지 않고 그저 제 말만 자꾸 하게 되는 것 을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는 마음을 좀더 다구지게 먹을 작정입니다.
지난 일을 생각하고 되풀이해야 소용없는 것, 차례진 길을 굳세게 걸을 수밖에는 없어요 . 지금보다도 더 강해지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편지는 더욱 계속되었다. 여러 장으로 두툼한 것이 제법 만리장서였다.
군데군데 주워 읽기도 일마에게는 지리한 노릇이었다.
……상해, 상해 하고 말로만 크다는 소리를 들었다가 막상 와 보고 그 넓 음에 놀랐습니다. 가이없는 육지의 한 부분입니다.
바다에서 잠을 자고 기슭이 안 보이는 강을 올라와 무연한 육지의 한구석 에 짐을 내리니, 온 곳이 사람 사는 도회가 아니라 한없는 호지의 한복판 같습니다. 분간할 수 없는 벌판에다 일부러 한 몸을 던지러 온 것 같습니다. 몸을 던지러 왔음에는 틀림없으나―사실 이 넓은 천지 속에서 제 한 몸 쯤은 바다 속에 모래알 하나 맞잡이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몸을 던지러들 숨으러들 모여드는 것이겠지만 사람의 씨는 왜 그리 많은지요.
많고 천하지요. 와글와글 끓는 불개미떼 같아서 한꺼번에 수천 수만쯤 으 깨어 없앤대도 이렇다할 흔적조차 남을 것 같지 않아요. 물론 저도 그 불개 미떼 속의 한 사람이요, 따라서 그 무엇이 으깨주어도 그만 이겠습니다만.
상해에 왔다고는 해도 아파트 방에 박혀 있는 까닭에 어디가 어딘지 몇 달을 지내야 아직도 분별을 못하겠습니다만―언제까지 호텔에만 묵을 수도 없는 까닭에 아파트의 방 두 간을 얻어 오래 살 잡도리를 했습니다―어쩌다 거리에 나가 대로를 거닐어 보면 낯설은 곳에 왔다는 느낌이 불현듯이 들곤 해요.
고향과는 얼마나 모든 풍정과 물정과 인심이 다른 곳이겠습니다. 모든 것 이 다른 까닭에 되려 안심될 때는 있다가 때로는 안타깝고 답답한 심사가 불끈 솟습니다. 외국 조계 근처를 거닐다가 강가로 나섰다가 다리를 바라보 았다가 하노라면 가슴을 파고드는 고향에 대한 근심을 억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고향의 하늘도 개었을까 흐렸을까 하는 걱정조차 솟아요. 다시 고 향의 땅을 밟아볼 수 있을지 하는 조바심이 생기면서 공연한 짓을 한 것이 아닐까 반성되는 것도 반드시 그런 때랍니다.
……제게 대한 소문이 얼마나 자자하고 죽일 것 살릴 것 하고 험구가 많 겠습니까. 세상 사람이야 언제나 욕하길 좋아하지 어디 이해하고 칭찬하기 를 즐겨 하나요. 필연코 제 소행도 고향에서는 벌써 검은 판에 박힌 것일 게구, 제 이름은 개천 속에 버림받은 것이겠죠. 그럴수록에 고향은 제게는 더 어려운 곳이 되고 멀어만 지는 듯해요. 안타까운 생각은 이런 데서도 솟 아요.
사시장천 밤이나 낮이나 쳐다보는 건 만해의 얼굴뿐이죠. 역시 저는 그를 사랑한다고 하는 수밖에는 없어요. 사랑하니까 지금까지의 행동도 취한 것 이고 일이 이렇게 되어 보니까 앞으로는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 었어요. 그를 사랑하지 않고야 지금 제게 남겨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가 저를 생각하는 심정이 또한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 마음은 그에게로 더욱 쏠리는 수밖에는 없어요.
이왕 이곳에서 오래 지내게 될 바에는 언제까지 놀고만 있을 수도 없어서 무슨 일이라도 시작해 보겠다고 요새는 자나깨나 그 계획인 모양인데 사람 일 모르죠. 여기서 또 장차 크게 성공할지 뉘 아나요. 요행 떠나 올 때 앞 에 차려진 것은 몽땅 가져왔던 까닭에 그것만 가지면 못할 일도 없을 듯해요. 아무튼 여기서 마음을 붙여 볼까 하는 중이므로 고향과는 자연 당분간 멀어질 것 같아요. 정말 제 말만 해서 미안합니다만 곡해와 비난을 풀어 주 시고, 그리고 저를 한시바삐 잊어 주세요. 이것만이 피차를 생각하는 소치 일 것예요. 제 말을 귀애하시거든 더러 막아주시고요. 또 소식 드릴 기회 있을까 합니다. 오늘은 첫 편지라 제 이야기만으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내내 안녕하세요.
청 매 올림 청매의 긴 편지를 읽고 났을 때, 일마도 일종의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비록 청매가 자기와는 먼 사이요, 다만 동무 종세의 호의로 그것을 읽게 되었을 뿐인 것이나 한 여자의 솔직한 마음의 고백을 들었음이 가슴속에 한 줄기 감동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여자란 항용 약하다군 해두 기실 강한 것인지, 청매두 어느새 한 사람 의 늠름한 여자가 된 모양이지.”
일마의 감상이나 종세의 그것이나가 일반이었다.
“약하다면야 당초에 그런 길을 취하기나 하겠나. 아무리 사랑의 길이라 군 해두 그곳이 어딘가. 맹랑하구 올찬 여자야, 청매는.”
“고향 생각에 잠기는가 하다간 도로 현재의 입장을 자각하구 꿋꿋이 돌 아서는 모양이 눈에 선히 뵈이는 듯두 하네. 제법 인생에 처해 가는 태도가 잡혔단 말야.”
“하긴 사람이 그런 입장에 서게 되면 제물에 강하게 됐지 별수 있겠나.
개천 앞에 닥쳐 서면 그것을 건너뛰어야지 그밖에는 무슨 재주가 있겠나.
환경이 사람을 맨든다는 것두 사실일 것 같아.”
“어떻든 오늘 편지는 유쾌하게 읽었네. 한 여자의 숭엄한 자태에 접한 것 같아서 맑은 감동을 오래간만에 받았어.”
일마는 거듭 말하면서 사실 유쾌한 심정인 모양이었다.
그의 행동이 바르느니 “ 그르느니 하는 시비는 그 다음 문제야. 그르다면 그를는지두 모르나 세상에 또 그다지 바른 일이 무엇인가. 사랑의 문제만은 생각하기는 따라서 얼마든지 판단이 다를 것이야.”
이 점에 있어서도 종세는 일마와 같은 의견이었다.
“거리의 소문은 대체로 청매에게 불리한 듯하나 그런 때 으레히 허물을 둘러쓰는 것은 언제나 여자편이 아니겠다. 건듯하면 남자가 여자의 유혹에 걸렸다구 여자만을 죽일 것 살릴 것 욕질이지만---불공평하기 짝 없는 노릇 이야. 실상을 따져 보면 언제나 유혹의 첫손을 거는 것은 되려 남자의 편이리. 남자가 꿈쩍하지 않을 때 여자의 뜻 하나로만이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만해가 사업에 실패한 까닭에 상해 행을 생각해서 거기에 청매가 휩쓸 려 맞장구를 친 것이니까 시비의 귀착점은 빤한 것이지만.”
“나타난 행동이 무엇이든지 간에 지난날의 청매와 나와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나는 지금 청매를 비난할 생각은 없네. 편지의 부탁대로 사람들의 부당한 소문을 되려 항의하구 교정해 주구 싶은 생각두 있어. 그 리구 아예 고향 돌아올 생각 말구 오래도록 상해에 머물러 사업에 성공하도 록---회답은 그렇게 할 작정이네.”
“과거의 사랑을 말끔하게 잊어버린다?---자네로선 대단한 용단이야.
청매를 후원하구 만해를 원망치 않구……”
일마의 표정에 종세는 잠자코 먼 전을 보다가,
“생각해 보게나. 청매들이 지금 다시 돌아온다면 미려들의 계획은 어떻 게 되구 녹성음악원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론 만해와 미려의 사 이는 청산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두 장차 지장이 없을지 뉘 알겠나. 비록 내가 청매를 그렇게 쉽게 잊을 수는 없다구 해두 사업의 장래를 생각하면 그렇게 충고하는 수밖엔 없단 말야.”
“알겠네. 자네 뜻을.”
알고 보면 종세의 심중은 복잡한 것이었다. 일마는 한마디 한마디 찬찬히 새겨들으며 동무의 심중을 갈피갈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결국 모두 미려 때문이라는 것을.”
“왜 하필 미려 때문이겠나. 녹성음악원의 전도를 나는 걱정하는 것이네.”
“녹성음악원은 미려의 대명사가 아닌가.”
일마가 빙그레 웃음을 띠이니 종세는 더 길게 지껄이다가는 말이 거북해 질 것 같아서 그만 자리를 일어서려는 것이었다.
남의 살림 보러 “ 간다는 것이 실없이 너무 오래 앉아 있지 않었나---”
찻집을 나와서 눈 오는 거리를 걷다가 일마는 문득 먼 앞쪽을 걸어가는 한 쌍의 남녀를 발견하고 호기의 눈동자를 빛내었다.
“자네 저걸 보나. 눈이 번쩍 뜨이는 한 쌍이네. 저렇게 모던한 남녀는 이 거리에서는 처음인걸.”
종세에게 주의하니 그도 그들을 바라보고 걷던 터이라,
“모던하다느니보다두 유행어로 씩하지 않은가. 훌륭한걸. 눈이 번쩍 뜨 이기는 고사하구 둘러 패일 지경이야.”
여자는 검은 외투에 진홍빛 머플러를 옷섶 위에 비죽이 내민 것이 눈 내 리는 속에서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고 단정하게 보인다. 검은 구두의 뒤꿈 치가 유리조각같이 반짝인다. 남자의 차림도 여자의 모양과 어울려 손색이 없다.
“아니.”
종세는 자기 눈을 의심하는 듯 몸을 앞으로 쏠리는 듯하면서,
“단영이 아닌가.”
놀라니 일마도 덩달아 몸을 으쓱하면서,
“정녕코 단영은 단영이야. 단영이 어느결에 저렇게 몰라보게 됐나. 옳 지, 옆에 선건 훈이구, 틀림없는 훈이야.”
“훈과 단영의 자태를 이렇게들 몰라봤나. 딴은 저렇게 씩하게 차렸으니 눈이 어두워진 것두 무리는 아니렷다.”
종세는 감탄해 마지못하는 듯 정신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훈과 단영의 산보하시는 그림이라---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단짝이 됐단 말인가……쫓아가서 놀래나 줄까, 아웅 하고.”
“글쎄.”
일마도 응하고 함께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덜렁덜렁 재게 걸어가다가 문득 돌려 생각하고 그 장난을 단념하기로 했다.
“오늘은 그만두고 다음날 만날 때나 톡톡히 족쳐 내세. 저 알뜰한 사이 를 휘저어 놓기가 아까워.”
종세는 그 말에 좀 트죽했으나 필경은 동의하는 수밖에는 없어서 요번만 은 신사답게 두 사람의 자태를 도리어 피해서 일마와 함께 옆 골목으로 들 어선 것이었다.
훈과 단영은 자기들의 자태가 그렇게 두 동무에게 발견되었을 줄은 꿈에 도 모르고 무심히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날 그 자기들의 호사스런 모양이 뭇시선을 끌고 있음을 알고서인지 모르고서인지 침착하고 정답게 소군거리 는 것이었다.
그대로가 꼭 “…… 소설이란 말요. 조금두 채색할 것 없이 지낸 대로를 써도 좋은 소설이 될 것이요. 틈을 타는 대로 나는 붓을 대기 시작할 것이요.”
훈의 계획에 단영은 급작스럽게 찬성할 수는 없었다.
“자기도 그 속의 한 사람이면서도 지내온 이야기를 소설로 쓴단 말요.”
“나도 그 속의 한 사람이니까 더 좋은 소설이 되거든. 소설가가 자기를 사정없이 그려냄은 소설가가 된 의무일 것이니.”
“그러니까 소설가가 싫어요. 뭐든지 보고 겪기만 하면 곧 소설을 쓰려는 태도, 아마도 소설가의 본능인 모양이죠.”
“소설을 쓰지 않곤 어떻게 한단 말요. 자기 얘기나 남의 얘기나 소설속 에서는 다 함께 무자비한 재료가 되거든요. 당신두 예술가면서 그렇게 몰이 해하단 말요.”
단영이 뻗서도 하릴없는 노릇---결국은 훈에게 굽고 타협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럼 어서 소설에 쓰려거든 잘이나 써주세요. 아예 무참히 난도질은 말 구---”
“흡사 화가에게 초상을 그려 달라는 여자가 얼굴을 이쁘장하게만 그리라 는 것과 마찬가지구료. 그러면서두 예술간가.”
훈이 껄껄 웃으니까 단영은 무참해서 훈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갸웃이 흘 겨보았다.
“어서 내 음악이 성공인가, 당신 소설이 성공인가---경쟁이나 해봐요.”
단영은 음악수업을 가제 시작한 것이었다. 늦 공부이든 말든 음악원의 책 임자될 의무이기도 했다. 오늘은 훈과 함께 피아노 교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작정된 일과의 날이었다.
“남의 십년 수업의 소설과 지금 막 시작한 음악과 경쟁을 하다니---그것 두 망발이야. 취소, 취소.”
훈과의 관계에서는 단영은 늘 한 수 꿀리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단영에게 불만이 없다면야 다른 사람들의 무슨 참견할 바 되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