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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공무한/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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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평생에 몇 번이고 간에 재생하고 부활할 수 있는 숨 질긴 물건이다. 불행이란 그것을 당할 때는 절대적인 것이나 그것이 필경은 반드시 지 나가 버리는 것도 절대적이다. 운명적인 영원한 시간의 밧줄 위에 원숭이같 이 매달려 사람은 잠시 피었다가 막혔다가 하면서 일생의 싸움을 계속해 가 는 것인 듯도 하다. 변천하는 밧줄을 따라 경력이 각각으로 변하는 것은 필 연의 형세이다. 안타깝기도 하나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그 변화 때문에 막 혔던 숨을 돌릴 수도 있는 까닭이다.

미려가 마음속에 아직도 그 어떤 괴롬을 감추었든 간에 표면으로 평화로 운 표정을 회복하고 침착한 태도로 돌아온 것은 역시 마음의 변천의 결과임 에 틀림없었다. 그 표정의 변화를 처음부터 살펴 오는 혜주에게는 마음 놓 이는 반가운 일이었다.

“……흡사 미려 속에 두 사람의 미려가 들어 앉었던 것 같구료.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또 한 사람의 미려가 그렇게 이야기하구 계획하구 하는 것 같어 꼭.”

“그러지 않구는 할 일이 또 무엇이겠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움직이구 경영하구 하는 것이 사람된 운명인 듯 분주하게 손발을 움직이노라면 지난 일두 차차 잊어버리게 될 것 같어…….”

“이번 공연에 웬만큼 이름이 널려지구 했으니 일반의 인식을 잡아끌기에 는 좋은 기회라구 생각은 되는구먼.”

“그까짓 선전이야 됐든지 말든지 이왕 맘을 냈든 김에 내게는 지금 그일 밖엔 할 일이 없는 것이구 적으나마 문화사업이니 문화인으로서의 자랑을 맛보는 것두 괜찮은 일이구---여러 가지 의미로 내 맘은 희망에 넘쳐요.”

오늘의 두 사람의 화제는 녹성음악원에 대한 계획의 일건이었다. 오랫동 안 현안중에 있었고 미려는 일단 단념도 해 보았던 음악원의 실현을 이번에 새로 구체적으로 계획해 보게 되었던 것이라 일마와의 사이가 어이가 없이 해결되어 버린 것이 그 결의를 재촉하게 된 동기라면 동기였으나 원래 음악 예술에 대한 이해가 남달리 깊었던 것이요, 교향악단의 후원을 자청했던 것 도 그 때문이었다. 녹성음악원의 발설은 반드시 종세들이 뙤어준 것만도 아 니었고 미려 자신의 희망의 표현이기도 했다. 지금의 심경의 변화는 그 계 획을 절실하게 촉진시키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사업의 계획과 경영의 의 욕이 미려의 낡은 마음을 닦아내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넣어 주는 것이 사실이었다.

혜주는 친우의 정의로 미려에게는 좋은 후원자였고 누구보다도 먼저 그와 의뢰하게 된 것이 마땅하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원장실에 앉은 아름답구 “ 젊은 미려의 자태를 상상만 해두 통쾌한걸. 그 아름답구 젊은 원장의 조건만을 가지구두 녹성음악원은 사회적으로 주목되 구 문제될 것이 사실이야. 침체된 문회사회에 한 줄기의 청신한 공기를 인 도해 넣을 수 있는 것만으로두 의미심장해.”

혜주는 확실히 벌써 일종의 유쾌한 환상에 잠겨 있는 것이었다.

“내 원장될 일보다두 혜주가 학감될 일이 더 중요하구 어려울걸. 누구보 다두 명학감 될 것을 나는 믿는 터인데.”

“음악에 학감이 무슨 필욘구. 원장과 교수들만 있으면 그만이지 학감 보 다도 먼저 미용사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음악하는 여자가 추접하게 채리구 나선다는 건 뜻이 없는 일이야. 교내의 기풍은 사치하구 고급하게, 학생들 은 아름답고 단정하게---반드시 종래의 고투를 밟을 것이 없구 그런 새로운 독창적인 기풍을 맨들 필요가 있다구 생각하는데 예술의 세계를 속세의 것 과 혼동할 것은 조금두 없으니까.”

“기발한 좋은 의견이야. 어디 혜주의 맘에 맞도록 경영안을 세워 봐요.”

“원생 선발시험의 표준은 학력보다두 용모에 두어 가지구 될 수 있는대 로 미모의 여성만을 모아서 교육시킬 것---이것이 녹성음악원의 무엇보다두 첫째의 방침이래야 해. 아무리 교육의 기회균등이니 무엇이니 해두 예술에 뜻을 둔다는 것부터가 선발된 특권이구 기회가 달러진 증좌가 아니겠수. 용 모를 본다는 것은 예술적 재능에다 또 한 가지의 조건을 더 붙여서 완전한 최상의 예술가를 맨들자는 뜻인데 같은 예술이래두 그림이나 문학은 작가가 스튜디오나 서재에서 혼자 숨어서 제작한 결과를 사람에게 보이거나 읽히면 그만이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특히 그 연주의 경우에는 반드시 음악가 자신 이 무대 위에 나서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과 용모 두 가지의 매력으로 사람에게 감동을 줌이 한층 값두 높구 뜻두 깊구 인생의 기쁨을 더해 주는 것이거든. 용모 제일을 주장하는 내 뜻이 곡해되구 비난을 받기가 첩경 쉬 운 노릇이지만 그 진의를 곰곰이 음미하면 반드시 내 주장을 따를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돼요.”

혜주의 이상주의는 더 말할 것 없이 미려의 마음을 그 자리로 혹하게 했다. 무릎을 칠 듯이 몸을 쏠리면서 동무의 이론에 찬성하는 것이었다.

“동감이야, 나두 동감이야. 귀족적이구 고압적이긴 하나 독창적인 좋은 생각이야 원래 음악예술의 . 창조란 특별한 종목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니까. 그 특별한 종족의 조건이 더욱 특별해졌다구 시비할 사람은 없을 테 구 그렇게 해서 선출된 예술가들이 한층 인간생활에 공헌되는 바 있다면 더 욱 좋은 일이 아니겠수. 일반 학문의 교육기관도 아닌 것이니 나두 본디 아 름다운 동산을 맨들어 보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던 것요. 언덕 위에 백아의 깨끗한 교사를 세우고 주위에는 잔디를 깔고 장미를 심으구 수목을 빽빽이 우거지게 해서 보기만 해두 꿈속의 전당같이 눈에 띠이게 맨들어 보구 싶었 던 것이라우. 아름다운 집 속에 학생까지 아름답다면 그야말로 지상의 천국 을 이룰 것이 확실하렷다. 미용사까지를 두어 아침 저녁으로 가꾸어 준다면 얼마나 이상적인 학원이 될까. 단연 그 방침을 딸 테야. 이 땅에서 제일가 는 곳을 맨들 테야.”

미려는 푸득이는 공상의 날개를 걷잡지 못하는 것이었다.

“학생만 미인이래서야 되겠수. 교수두 전부 여자로 미인만을 추려서 세 계 제일의 미의 전당을 맨들구려. 그 덕실덕실 끓을 미인들 속에서 나같은 것이야 애초에 빠져 나왔지. 할 일두 없겠거니와 그 속에 끼어 있을 턱두 없는 것이니까.”

혜주가 겸양해 하면 미려는 그게 말이냐는 듯이 펄쩍 뛀 듯이 하면서,

“천만에 혜주가 미인이 아니면 세상의 누가 미인이란 말요. 딴소리 말구 한몫 맡어 줘요.”

“미인 원장이 제법 사람을 놀리는 모양이지.”

두 사람은 유쾌하게 깔깔깔 웃는 것이었다.

“……성악과, 기악과, 작곡과의 세 과를 두구, 따로 전부를 통틀어서 합 창단, 실내악단, 교향악단을 조직한다나. 학생은 삼년 동안의 과정을 마치 구는 음악원을 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눌러앉아 그대로 실내악단, 교향악 단의 일원으로서 일을 보게 되거든. 즉 음악원은 교육과 활동 두 가지 방법 을 겸해 교육을 받은 후에는 즉시 그대로 원에 소속해서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그런 조직으로 할 생각이야. 한 가족같이 단란하게 지내면 서…….”

“바로 조그만 이상국이게. 생활과 예술의 합치---얼마나 그리운 경치일꾸.”

두 사람의 공상은 한없이 즐겁다.

연희장 그 호젓한 주택에도 그날 수난로가 통하기 시작해 두 사람으로 하 여금 밖 추위를 잊게 했다. 휑휑한 집안에서 고독을 금치 못하던 미려였만 따뜻한 방에서 동무와의 즐거운 계획은 마음을 제물에 훈훈하게 녹여 주는 것이었다.

이윽고 미려는 책상에서 도면지와 연필을 꺼내 오더니 음악원의 설계도를 대략 보이는 것이었다 . 연필을 놀리는 손 맵시도 익숙하고 슬픔을 잊은 기 사도같이 용감하고 희망에 넘치는 그였다. 얼마도 혼자 여러 차례나 설계의 궁리를 해보았던 것인 듯 휑하게 익은 도면에 혜주는 놀랐다. 집과 뜰과 화 단이 순식간에 제 들어설 곳에 들어서면서 도면지 안에 차는 것이었다. 집 안은 다시 각각 세밀한 방과 부분으로 나누어지면서 미려의 머리 속에 배어 있던 이상의 전당이 금시에 종이 위에 재현되었다.

“어느새 그렇게 능숙한 건축설계가가 되었던구. 섣부른 기사쯤 왔다가 코 떼구 가겠는데.”

“내 집이니까 내가 설계를 해야 맘에 맞지 않겠수. 얼마를 두구 궁리하 구 연구했게 그러우.”

건축은 설계만으로도 훌륭한 하나의 창작이라는 듯 자기의 독창에 대한 자랑과 기쁨이 은연중 나타나 보인다.

“화단과 후원과 휴게실이 이렇게 넓으니---공부하는 데가 아니구 바로 휴양집인 셈이지.”

혜주가 도면을 들여다보며 이곳저곳을 손가락질하니까 미려는 의견을 설 명한다.

“물론 휴양의 집이어야지. 공부와 휴양의 두 가지 다 근로가 완전히 합 치되어서 날마다의 가정인 기쁨과 흥미와 감격 속에서 진행되도록 하자는 것이 내 생각이니까 다들 말하는 생활의 예술화라구 해두 좋지. 예술과 생 활이 일치되어서 그 어느 한쪽도 뜯어내기 어렵게 화해버린 생활---그것이 인간생활의 최고 이상이 아닐까. 녹성음악원이 그 이상에 맞도록 설립되어 야 할 것은 물론 그 때문에 나는 본관에는 교실만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은 다 둘 작정이요.”

연필자루로 그려진 도면의 군데군데를 가리키면서,

“휴게실두 필요한 것이요 홀두 있어야 하구, 식당두 있어야 하구, 이건 도서실이요, 이건 연습실이요---.”

고개를 들어 연필로 볼을 고일 제, 눈이 빛난다.

“---연습실에는 열 대의 피아노를 들여놀 작정이요. 방과 후에는 자유로 언제까지든지 연습을 할 수 있도록---저물어가는 저녁 어둠 속에, 혹은 달 밝은 초저녁에 나무 우거진 정원의 수풀 사이로 연습곡의 요란한 합주가 가 을 벌레소리같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멎어졌다 하는 정경이 그대로 음악원의 아름다운 한 폭의 풍속이 되게.”

“옳아, 그것이 이상적인 건설이라는 것이렷다.”

“휴게실에는 폭신한 소파를 얼마든지 설비해 놓아 누구나 자유로 들어가 쉬도록 하구, 식당에서는 좋은 음식을 먹이게 하구, 홀은 가끔가다 음악회 두 열구 연극두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것이어야 하구. 도서실에는 음악 문학에 관한 서적과 미술품을 서고에 넣어 두구 임의로 열람하도록 할 것이 구……”

“그만하면 본관의 설계는 됐을 테구.”

“본관으로 들어가는 포치에는 진홍빛 줄기장미를 뻗쳐 올려 기다란 홍예 문을 틀어 놓을 것이요, 앞뜰에는 전면 잔디 깔구 그 속 군데군데에 여러 가지 모양의 화단을 꾸밀 것---”

“잔디는 영국종의 박래품이어야 하렷다.”

“아무렴, 한 가지 특색은 뜰 전부를 왼통 초록 속에 묻어 맨땅은 조금두 안보이게 할 것이야. 포치로 통하는 지름길에다 흰 모래나 조약돌을 깔 뿐 이요, 외는 전부가 초록과 화단의 각색 화초의 빛뿐이 있게. 화단에는 키 높은 화초를 피하고 땅에 깔리는 얕은 화초로 푸른 잔디의 바탕에다‘녹성 음악원’의 글씨를 새길 테구.”

“후원에는 나무를 심는단 말이지.”

“그렇지, 후원과 옆 뜰에는 으슥한 그늘이 지게 나무를 수북히 심는데 ---백양나무, 자작나무, 단풍나무, 느릅나무에다가 향나무, 노가지나무 같 은 상록수두 간간이 심을 테야.”

의자에도 지쳐 미려는 혜주를 끌고 객실을 나와 자기 방으로 갔다.

불을 지핀 온돌의 따뜻한 맛은 의자의 세계와는 달라 으슬으슬한 시절에 는 한층 각별한 것이다.

훈훈한 방바닥에 몸을 대이고 두 사람은 유쾌한 공상을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 갔다.

“그뿐인 줄 아나. 굉장한 계획이 또 있거든.”

미려는 새로운 재료로 혜주를 놀라게 하는 것이 지금 와서는 한 가지의 기쁨이 되었다.

“그러지 말구 숫제 왜 낙원의 한 귀퉁이를 떼다 놓지.”

“---본관 옆에 별관을 짓구 거기다 체육실과 온실을 둔단 말야. 체육실 에서는 팬티 하나만으로들 뛰구 솟구 하면서 공 장난과 유희를 시키커든.

늠름한 처녀들이 길이길이 뛰면서 댓순같이 꼿꼿하게 자라게. 온실에는 각 색 화초와 열대식물들을 심어 놓구 그 따뜻하구 후끈한 양지쪽에 학생들이 산보하는 터두 되게 하구.”

“또 무얼로 나를 놀래려누.”

“후원 한복판 나무그늘로 가려진 속에 기막힌 것이 생기거든.”

“아담과 이브가 섰던 지혜나무나 심는단 말인가.”

“아담은 왜. 이브들만의 세상인데 이브들만에게 필요한 것을 맨들어 놓 아야지.”

“어서 사람을 작작 놀리구.”

“푸울이라나, 푸울을 파 놓을 생각이야. 대리석으로 테두리를 한 깊은 못 속에는 아침 저녁으로 새물을 갈아대어 길이 넘는 푸른 물이 철철 넘쳐 있어서 여름에는 우거진 녹음이 비취어 물빛이 일면 파랗게 물들구 가을에 는 붉구 누른 낙엽이 한 잎 두 잎 날아와서는 물 위에 둥둥 뜨렷다. 간들 바람에 주름잡힌 잔 물결 위에---”

“그 속에서 이브들이 벌거벗구들 헤엄을 친단 말이지.”

“헤엄두 치구, 가댁질두 하구, 물싸움두 하구, 유희두 하면서 공부에 지 친 몸을 완전히 씻구 회복한단 말야. 그들이 기쁠 뿐이 아니라 그것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워 보는 사람에게두 건강한 기쁨을 주게 되거든.”

“자, 이젠 그만둬요. 그것만으로 배가 부르니.”

혜주는 듣기에도 지쳐 되려 그편에서 자원하는 것이었다.

“그 모두가 결국 휴양에 속하는 일이니까 휴양부라는 것을 두어서 그 부 의 의견과 재단으로 일절을 경영해 나가게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는데 여 기에 혜주와 상의해야 할 한 가지 의론이 있어.”

하고 혜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단영을 이용해 볼까 맘먹구 있는데 혜주는 어떻게 생각하우.”

“단영을?”

혜주에게는 의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말뚱하게 뜨고 미려를 똑바로 본다.

“휴양부장으로 단영을 데려온단 말이야. 혜주는 학감이 아니겠수. 결국 그렇게 되면 나까지 세 사람이 음악원을 운전해 나가게 되거든. 세 사람이 단결해 나가면 무언들 못하겠수.”

“단영 한 사람을 구해내는 셈은 되지만 문제는 미려 자신의 맘에 있을 것이요. 지금까지의 피차의 기괴한 사이를 멀끔히 잊어버리구 새 맘으로들 대할 수만 있다면야 그만이지 더 물을 것이 있겠수.”

“나야 단영을 맘에 둔 지 오래였었다우. 과거의 관계쯤 아무것두 아닌 것이구 이제 피차에 실패한 여자가 알몸으로 세상에 부딪쳐 다시 살아가려 구 할 때 단영에게두 따뜻한 재생의 길을 잡아주는 것이 피차 여자된 몸으 로의 정이구 의무가 아니겠수 . 무엇보다두 나는 단영을 실상으로 좋아해 왔 구 앞으로두 정을 주구 지낼 수 있을 것 같으니 문제는 되려 단영이 내 청 을 받을까 어쩔까 하는 것인데.”

“단영인들 왜 그런 호의를 거절하겠수. 영화계니 무어니 그런 불건강한 사회는 하루바삐 벗어 나오는 것이 이로운 일인데 단영을 끌어들이도록 하 구 그럼 벌써 만사가 해결이구료.”

실현을 앞둔 것이므로 그 모든 공상은 한없이 즐거운 것이었다.

병원에서 아파트로 옮아온 단영은 완전히 회복이 되어 오랜 침대 생활과 도 하직이었다.

이 며칠 일어나 앉아 뜻없이 방안을 거닐다가 복도로 나가서는 아파트 구 석구석을 기웃거렸다가 하는 것이 흡사 소생된 생명력을 시험해 보려는 것 과도 같았다. 재기를 디디고 불끈 기지개도 써보았다. 사지를 죽죽 뻗치면 서 체조도 해보았다 하는 것이 마치 기사가 사랑하는 기계의 능력을 살피듯 사랑하는 육체의 생활력을 조사하고 시험하자는 것인 듯도 했다.

“왜 그 짓을 했든구. 한자리의 악몽이었던가.”

지난 과오를 뉘우치기까지 하지 않았으나 지금 새삼스럽게 거기에 마음을 쓰고 그것을 다시 원하지는 않았다. 소생된 육체를 굽어볼 때 그것을 아끼 는 마음조차 솟으면서 지난날의 행동이 참으로 한 자리의 꿈으로 돌려지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보다 얼굴이 햇술하게 씻겨진 것이 도리어 아름다워도 보 이며 채경에 비취어진 상반신의 구석구석을 제 손으로 어루만질 때 내 육체 의 신비로움에 새삼스럽게 마음을 쏠렸다. 온실에서 자라난 것같이 전신이 맑고 희다. 귀불이며 콧등이며 손가락이 밀같이 기름지고 부드럽다. 내 육 체가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하면서 시름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남쪽 창 기슭에 놓은 국화의 화분이 추위에도 시드는 법 없이 언제까지나 생생하고 기운차게 향기를 품고 있는 것도 전에 모르던 생명의 기쁨과 기운 을 주는 것이었다. 시절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그 자태가 말할 수 없이 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국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제 찾아왔던 미려의 자태가 다시 떠오르며 그가 남기고 간 말이 귓속에 쟁쟁하게 울려왔다.

“그럼 함께 손을 잡고 일해 봅시다. 여자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 기 위해서래두.”

미려의 깨끗한 심정과 간곡한 말에 단영은 드디어 그의 청을 승낙해 버렸 던 것이다. 피차에 원망을 품으려면 품을 수도 있는 처지에 그런 것을 넘어 서 동성끼리의 따뜻한 정을 보여 주는 아량이 첫째 마음을 쳤고 음악문화의 발전을 위한 그 사업 자체의 성질에도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일 속에 정신을 바친다면 지나간 사랑의 꿈쯤은 쉽게 잊어버릴 뿐 이 아니라 차차 그것을 멸시해 버릴 수도 있을 듯 느껴졌다. 미려의 말을 고맙게 받고 함께 나가기를 맹서했던 것이다.

“사람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은 멸망의 길이 아니라 재생의 길이요, 부활 의 길이 아니겠수. 용감해집시다. 언제든지.”

하던 말도 마음속에 배어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오늘 저녁은 녹성음악원 설립기성회의 연회가 있다는 것이다. 새 출발의 첫 장부터 충실하기 위해 단영도 출석을 약속해 두었다. 벌써 오후부터 채 경 앞에 걸어앉아 몸을 차리기에 골몰해 있는 중이다. 여자의 일상생활의 일부분인 화장이라는 것이 오늘에 있어서는 단영의 재생의 첫 표석이 되었다. 내어 디딘 첫걸음이요, 첫 경영이었다. 밀같이 맑은 얼굴에 크림과 분 이 보얗게 조화되었다.

어제 미려는 검은 외투에 몸을 툽툽하게 싸고 왔었다. 그 자태가 전에 없 이 탐탁해 보이면서 단영에게 일종의 무언의 충동을 주었다. 툽툽한 외투 ---그대로가 생활의 의욕의 강렬한 표정임에 틀림없다. 단영은 오늘 벼락같 이 의걸이 속의 외투와 털목도리를 찾아냈다. 그것을 입고 오늘 첫걸음을 내놓을 생각이었다.

또 한 가지 미려가 신었던 새까만 구두도 마음속에 배어 생각났다. 은은 히 빛나는 새까만 구두는 흡사 맹렬히 솟는 식욕과도 같이 생활욕을 불질러 주는 것이었다. 단영도 오늘 새까만 구두를 내서 신을 때 빛나는 구두 끝에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비취어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한없이 유쾌해졌다.

혜주는 남편 안상달에게,

“녹성음악원의 탄생두 앞으로 시일을 다투게 쯤 됐는데 여자들만의 손으 로 아쉬운 일두 있구 하니 당신두 한몫 거들어 주어야 할 텐데.”

“남방비행이 음악원의 탄생으로 변했다. 낟 대체로 취지에 찬성이긴 하 나 남자의 개입은 절대 엄금이라면서?”

“여자들만의 일이긴 하나 앞잡이로 나서서 말마디나 하는 사람이 필요하 지 않겠수.”

“역시 남자와 타협하지는 것이지. 여자의 독립은 불가능한 모양이야.”

“압다, 큰 체는 말아요. 싫으면 그만이지.”

“누가 싫기야 하다나. 결과가 어떻게나 될까 해서 하는 소리지.”

그러나 어떻든 안상달은 아내도 한몫 끼어서 서두르는 그 일을 조력하기 에 인색하지는 않았다 아내의 하는 일을 책임상 버려둘 수만도 없어서 후원 의 한몫을 맡아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녹성음악원의 계획은 교향악단 후원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교향악단 의 초빙은 현대일보 주최의 사업이었으므로 음악원의 계획을 생각하게 한 것은 말하자면 현대일보였던 것이다. 그 책임으로 사는 녹성음악원의 설립 을 촉진시키자는 후원회를 조직했다. 그 후원의 소리 아래에서 미려는 음악 원의 탄생을 더 원활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후원회에 직접 관계된 것은 사 장을 비롯해서 주로 종세였다. 그 후원회에 안상달도 한몫 이름을 걸고 사 랑하는 아내를 위해 한줌의 힘을 아끼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밤의 설립기성회의 연회라는 데는 그 후원회의 한패---신문사로서는 사장을 대신한 주필과 종세, 거기에 안상달을 넣은 세 사람이 출석하게 되 었고 그들을 맞이해 함께 상의하고 말을 듣게 된 것이 주인측인 미려와 혜 주와 단영의 세 사람이었던 것이다.

여섯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앉으니 제법 방안이 차는 것이 회로서 결코 작고 소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단정하게 차리고 모여든 한패가 앞으로 탄 생될 음악원의 전도를 축복하는 듯 더없이 의젓하고도 청아하게 보인다. 더 욱이 세 사람 여자의 각각 마음껏 아담하게 차린 단정하면서도 조금 화려한 모양들이 자리를 훤히 빛나게 하고 공기를 부드럽게 해서 아무데서도 볼 수 없는 명랑한 분위기를 이루었다.

그 청아한 속에서 단영이 유독 누구만도 못하고 빠질 것도 없었다. 그의 과거의 경력이나 어지럽던 생활이 무엇이랴. 주위가 그를 빛나게 해주면 그 는 자연 빛나는 것이다. 지금 그 자리에서 아무도 단영에게 지난날의 판단 으로 편견을 가지는 사람이 없을 뿐이 아니라 도리어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경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단영 자신 과거를 어느결엔지 멀끔하게 씻어버 린 맑은 자태로 총중에서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목욕재계하고 새로운 희망 앞에 단정하게 앉은 여자의 자태란 일종 성스럽게도 보이는 것이다. 그날 밤의 단영의 모양이란 그 어느 때에도 볼 수 없었던---몇 번이고 다시 바라 보이는 고결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새로운 인물의 탄생이요, 새로운 인격의 창조였다. 그날의 단영은 결코 지난날의 단영이 아니었다.

그런 단영을 옆에 놓고 친우 혜주를 또한 옆에 앉히고 맞은편에 세 사람 의 사회의 중견 인물인 남자를 거느리고 복판 자리에 앉은 미려의 심중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활개를 편 공작같이 자랑스러운 것은 그 외모뿐이 아 니었다. 마음속은 외모 이상으로 화려하고 자랑에 넘쳤던 것이다.

“경력이 새로 시작되려는 것이다. 나두 기어쿠 가두로 진출하게까지 되 었던 것인가.”

생각할수록에 감개가 무량하다. 인생은 길고도 즐겁다. 이렇게 자랑스럽 고 새로운 길이 있을 줄을 몇 달 전에 어찌 알았으랴. 넘치는 감격에 눈물 조차 흐를 듯 가슴이 벅차다.

“녹성음악원의 탄생에 세상이 놀랄 것이 사실인 것은 지금까지 이 땅에 는 그런 문화기관이 하나도 없었던 것과 경영의 포부와 규모가 범속하지 않 고 처음 보는 독창적인 까닭이라구 생각합니다. 그런 기관의 필요를 얼마나 우리들은 느껴 왔으며 그 출현을 고대해 왔겠습니까. 이제 그 오래된 갈망 을 채워 주려구 녹성음악원이 생기려는 것입니다. 우리 몇몇 사람들만의 기 쁨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뜻있는 사람의 충심으로의 기쁨이어야 할 것입니다.”

후원회로서의 축사도 지나고 거기에 대한 미려들의 인사말도 끝난 후 연 회가 시작되고 자리는 차차 간담으로 들어갔다. 주필이 꺼내는 말은 축사를 할 때에 한 말과 다름이 없는---그날 밤은 결국 축사만이 필요하고 그것만 으로 족하다는 것이었을까.

주필의 뒤를 이은 것이 안상달이었다. 그의 말도 필경은 칭찬의 말밖에는 되지 않았다.

“세상을 놀랜다면 무엇보다두 여자들끼리만의 기관이라는 점일 것이요.

그런 것이 아직 없는 곳에서 얼마나 사람들의 이목을 신선하게 끌게 될는지 내게는 큰 흥미의 하나요. 이 사람들에게 주는 흥미와 인상을 언제까지나 깨끗하구 굳게 지속시켜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할 것이 남겨진 단 하나의 임무일 것이요.”

“특히 음악사업이라는 점에 중대한 뜻이 있는 것인데 우리같이 일상에 음악을 모르구 지내는 백성이 또 있겠수. 문화가 높은 사회일수록에 음악을 사랑하구 그것을 생활화하는 것이니 음악원의 뜻이 큰 것이요. 음악의 일반 화 민중화 생활화를 목표삼구 장구한 노력을 해 가는 동안에는 모르는 결에 우리 문화두 높아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요.”

종세는 늘 하는 음악필요론의 변설을 또 한 자리 늘어놓는 것이었다.

“사람의 사회가 아무리 변천한다구 해두 음악에 대한 사랑만은 변할 날 이 없을 것요. 문학이나 그림이 다 예술의 부분으로 큰 것이지만 음악같이 직접 마음을 울리구 흔드는데는 한 걸음 뒤설 것요. 즐거울 때나 노여울 때 나 슬플 때나 음악을 들으면 모든 감정이 완화되구 부드러워지니 사람이 참 으로 화합할 수 있는 마지막 조건은 음악이 아닐까. 음악 속에 잠겨 있는 뭇사람의 감정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면 고래의 허다한 정치가와 사상가 가 이루지 못했던 인류의 이상적인 사랑의 나라를 가장 수월하게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음악에서 받는 . 순간의 영감은 사상가의 백가지의 이론보다도 더 즐겁고 효과적이요, 강렬한 것이니까---음악은 생활의 밥이요, 아니 밥 이상의 것일는지두 모르지. 사실 나는 세상 것을 통틀어서 무턱대구 무엇이 제일 좋으냐고 묻는다면 음악이라구 단마디에 대답할 것요. 즉 밥보다두 옷 보다두 사랑보다두 야심보다두 무엇보다두 음악이 좋은 것이구 그것이 있으 면 적어두 일정한 순간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겠단 말요. 세상 사람이 나 를 음악광이라구 하거나 말거나 이 생각은 변할 날이 없을 테니.”

종세의 의외의 열정을 좌중은 웃음과 박수로 대하게 되었다.

“더구나 아까 들은 주최측의 계획과 포부가 장하구두 특색 있는 것이어 서 그 점에두 우리는 두 손을 들어 찬성하는 것이어니와 앞으로 참으로 사 회에 공헌함이 큰 것을 믿는 터이며 아울러 우리는 후원의 손을 조금두 아 끼지 않을 것요.”

대답할 순서인 듯한 자기의 차례를 살피고 미려는 감사의 말로 대신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말씀 고맙습니다. 선생님들의 응원의 덕으로 반드시 좋은 결 과를 맺게 될 것을 믿으며 경험 없는 우리 세 사람일망정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면서 혜주와 단영에게로 고개를 돌리니 두 사람은 의젓이 긴장되어있다.

“이런 좌석에 응당 사장도 나왔어야 할 것을 공칙히 되지 못할 자리가 있어서 내가 대신한 것인데---오늘밤 축배는 맛두 각별한 듯합니다.”

주필은 잡담을 섞어 가면서 잔을 거듭했다.

사장을 불러간 피치 못할 자리라는 것은 별것 아니라 그날 밤 바로 그 같 은 집에서 열린 일마 부부를 대접하는 조그만 회합이었다. 때늦은 감이 있 기는 있었으나 사장은 알맞은 기회를 못 잡아 늘여오던 피로연을 마침 그날 밤에 열기로 했던 것이다. 신문사 주최의 교향악 연주회를 크게 성공하게 한 일마의 수고를 위로하자는 것이었다. 순전히 사장 자신의 뜻에서 나왔던 것이었으므로 그는 그날 밤 일마 부부를 상대로 한 주인이었다. 음악원 기 성회의 자리에는 그러므로 주필을 대신 출석시켰던 것이다.

미려의 연회와 일마의 연회가 하룻밤 같은 집에서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 그다지 신기한 우연도 아닌 것은 사장이 열게 된 그 두 가지 잔치를 그 자 신의 뜻으로 편의상 하룻밤으로 밀었던 까닭임으로다. 물론 한 집에서 여는 것이 편했기 때문에 한 방에는 주필을 보내고 한 방은 자기가 맡았을 뿐이 지 그 외에 별다른 이유나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우연 아닌 우연 은 그러기 때문에 그날 밤의 두 방의 운명에 이렇다 할 변화를 끼친 것도 아니요 따라서 이 이야기에 , 지금 이상의 발전을 준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 면 무의미한‘우연’이다. 그런‘우연’도 있는 것이다.

하기는 미려는 그런 곡절을 알았을 때, 공연히 뜨끔해지면서 마음이 설레 기는 했다.

“다른 방에 일마들이 왔다구요. 반가운 일이군요. 하룻밤에 경사스런 잔 치가 두 군데씩이나 되면서.”

태연히는 말했으나 가슴속은 반드시 태연하지도 않았다. 그때까지의 침착 이 잃어지면서 알 수 없이 설레는 것이었다.

단영 역시 그러했고 그런 두 사람의 모양을 혜주는 민첩하게 잘 알 수 있 었다.

“그쪽은 피로연, 이곳은 축복의 잔치---두 곳 다 경사스럽구 말구요.”

“웬만하면 한자리에서 같이해두 좋았을 걸요. 굳이 가르지 말구.”

혜주는 늠실하고 웃으며 미려의 옆구리를 찌르니 종세가 도리어 그 말을 가로채어서,

“글쎄요, 그러지 못할 법두 없을 것을.”

미려는 더욱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게 되었다.

“부부는 부부, 저희는 저희죠. 굳이 합류할 필요야 있나요. 저희들은 여 자끼리의 여자들만의 사업인데 쓸데없이 남자를 개입시킬 필요는 없어요.

오늘밤 후원회의 뜻은 고맙게 받습니다만 음악원에는 일절 남자는 금지거든요.”

“오라, 참 금남(禁男)의 집이었겠다요. 황공합니다.”

종세는 빙그레 웃음을 띠면서 곧잘 장단을 맞춘다.

“어떻든 두 편에 다 행복이 넘쳐 흐르고 앞길이 광명에 차지기를 축수합 니다.”

하고는 잠시 자리를 떴다. 일마들의 방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오늘밤 종세 는 두 방을 함께 맡은 양서(兩棲)동물인 셈이었다.

미처 일마들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복도에 나왔던 일마를 모퉁이에서 만나게 되었다.

종세의 입에서 미려들의 이야기를 처음 듣고 일마도 사실 뜨끔해졌다.

“그런 줄은 깜짝 몰랐네 그려. 음악원 소리는 자주 들었으나 벌써 후원 회까지 생겼다. 반가운 일이야.”

“단영이며 혜주며 미려가 의젓하게 앉아서 포부와 계획을 이야기하는 광 경이란 제법 그럴 듯하데. 사람이 계획을 세우면 자연 거기에 맞는 품격과 위풍이 생기는 모양이야 . 오늘밤의 미려를 보구야 누가 원장가음이 못된다 구 하겠던가.”

“지금 세상에 여자끼리만으로두 무슨 일인들 못하겠나. 그런 색다른 단 체가 생긴다는 것이 문화 향상의 한 좌증도 되는 것야.”

“단영두 아주 새침하게 앉은 것이 부장가음 이상이지. 어제까지의 단영 은 어디로 갔는지 아주 사람이 달라졌어.”

“흐음.”

종세와 함께 방문을 열면서 일마는 깊은 감회 속에 잠겼다.

사장과 과장과 연예부 주임에 일마들 부처를 넣어서 한집안 같은 단란한 모임이었다. 그 단란한 공기는 무엇보다도 일마 부처의 조화된 태도에서 오 는 것이었고, 더욱이 나아자의 스스러워하지 않는 유쾌한 거동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부부의 그런 태도는 늙은 사장의 원하는 바여서 그를 기쁘게 하 고 좌석에 평화로운 기색을 떠돌게 했다.

미려들의 모임이 엄숙하고 의젓한데 비겨 한 쌍의 좋은 대조였다. 세 사 람 여자의 엄숙한 자태가 새로운 계획과 사업에 확실성의 인상을 준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모임의 분위기는 그것으로서 사업의 전도를 축복하고 예상하기에 족한 것이라면 일마들의 모임의 평화롭고 단란 한 것은 또 그 모임의 성질로서 적당하게 어울리는 것이다. 앞으로는 안온 하고 단란한 생활의 경영만이 남은 일마 부부이다. 격동과 흥분은 두 사람 에게는 벌써 지나가 버린 경력이다. 미려와 일마의 두 생활의 설계가 각각 감격과 기쁨을 품으면서도 그 모임에 나타난 인상이 다른 것은 그런 점에 원인된 것이었다.

종세가 들어갔을 때 나아자는 방바닥에 뻗은 두 다리를 처치하기 어려워 거북하게 가두고 앉아 식탁을 진귀한 것으로 대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조선 음식이 아직두 서툴죠?”

“서툴긴요. 아주 이렇게 익숙해졌답니다.”

말을 듣고 보니 그런지 젓가락을 쥐는 솜씨가 확실히 전보다는 익숙한 것 이다.

“온돌의 맛은요?”

종세가 뒤미처 물으니까,

“이 따뜻하고 정다운 맛은 무엇보다두 나아요. 페치카보다두 낫구 스팀 보다두 낫구 난로보다두 낫구요.”

그 훈훈한 맛에도 어느결엔지 익은 모양이었다.

“나아자는 온돌주의자랍니다.”

일마의 설명의 뒤를 받아 나아자는 선언하는 듯이, 그렇답니다 온돌은 “ . 세계적이예요. 그 이상 가는 난방장치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봄에 집을 지을 때 온돌방 한 간을 꼭 늘이도록 지금부터 일 마를 조르고 있는 중이예요.”

하며 남편을 보고 웃는다. 사실 나아자에게는 온돌과 조선 음식이 그날 밤 이 처음이 아니었고 몇 번 거듭 대하는 동안에 점점 그 찬미자로 변한 것이 었다. 그날 밤도 말하자면 그에게는 또 하룻밤 조선식 찬미의 밤이었다. 신 선한 식욕으로 차근차근 식탁의 것을 모조리 맛보아 갔다.

약식이며 약과며 식혜며 정과며---모두 그의 즐기는 음식이다. 한입에 맞 는 음식이 다른 입엔들 그다지 어그러질 배는 아니었으나 나아자의 즐기는 정도는 또한 각별한 것이었다.

“수정과는 흡사 찬 커피 맛이예요.”

하고 계피가루의 향기를 커피의 향기에다 비겼다가,

“약식은 달게 끓인 스튜의 맛 같구요.”

하고 감상을 말하던 나아자가 오늘밤에는 벌써 그런 비평의 말은 불필요한 듯 식사에만 열중했다.

방바닥에 앉아 얕은 식탁에서 조선 음식을 먹는 나아자의 자태가---문득 종세들의 눈에는 극히 자연스런 것으로 비취어 오면서 한때 거북스럽게 보 았던 인상도 오늘밤에는 종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검든 붉든 말소리가 다르든 같든 차례진 생활의 잔치 앞에서는 피차가 같은 것이며 부 자연할 것은 없는 것이다---이것은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생활양식의 차이쯤이 근본적인 난관은 아니다. 밀을 먹든 쌀을 먹든 그 근본의 차이라는 것은 극히 사소한 것이다. 굳은 사랑이 있을 때 인류의 동 화는 손바닥을 번기는 것보다도 쉬운 노릇일지 모른다.

요란하게 들볶아치는 유흥의 모임이 아닌지라 한 시간 남짓 지나니 대접 도 거의 끝나고 조용한 자리는 더욱 적적해 갔다. 과장과 주임들의 재담으 로 좌석의 활기가 지속되어 나가는 형편이었다.

종세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노라고 나간 후 일마도 그만 그날 밤 모임은 그것으로 끝마칠까 하고 마지막으로 잠시 숨을 돌릴 생각으로 방을 나갔다.

요정으로서는 아직 초저녁인 셈이다. 복도는 사람의 그림자로 어지럽고 방방에서는 유흥의 소리가 바야흐로 높아가고 어울려 가는 중이었다.

일마는 그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마음속을 훑어보 고 또 훑어보아도 이렇다 할 생각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머리 속 에 떠오르지 않는 숨은 의식이 모르는 결에 마음을 휘어잡고 있었다는 것인 가 그 무엇에 마음이 팔려 .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 오던 길로 방을 찾는 것이 엉뚱한 옆 복도로 걸어간 것이요, 걸어가다 문득 문이 열린 비인 방을 흘끗 들여다보고 그 안에 앉은 한 사람의 여인의 자태 에 어쩔 줄 모르고 꽉 막혀 버렸던 것이다.

“누구든가, 저기 누구든가.”

바위 앞에서나 막혀 선 듯이 순간 정신이 깜빡 죽으면서 옳은 분별이 없 는 것이다. 반드시 술을 몇 잔 했던 까닭도 아닌 듯싶다.

장승같이 버티고 섰다가 다음 순간 깜빡하고 바위가 물러가고 정신이 깨 이면서 방안의 인물의 정체를 옳게 인식했던 것이다.

“미려가 아닌가.”

극히 짧은 찰나의 일이었으나 일마는 얼떨떨한 머리를 흔들면서 부끄러운 생각조차 들었다.

무슨 까닭에 그런 순간의 몰의식 상태에 빠졌던 것일까. 그의 마음을 아 까부터 사로잡고 있던 정체 모를 숨은 의식이라는 것이 미려에게 대한 것이 었단 말인가. 마음먹었던 것이 별안간 앞에 놓인 까닭에 도리어 의식을 잃 었던 것일까. 몸이 허전허전하면서 겸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연회라면서 왜 여기는 혼자 나와 계신가요.”

방문을 들어서면서 물으니 미려는 정면으로 뚫어져라는 듯이 일마의 얼굴 을 노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숨을 좀 돌리러 나왔어요---자리는 점점 요란하구 수다스러워져서요.”

대답한다.

미려와 만남이 웬일인지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불현 듯이 치밀어 올라오면서 그 순간의 충동으로 일마는 분별을 잃고---방문을 닫고 미려의 앞에 앉아 버렸다. 마지막 작별의 말을 해야 할 것같이 느껴졌던 것 이다.

“녹성음악원 설립의 소식은 종세군에게서 자세히 들었습니다만---뜻대로 되어나가 좋은 결과를 맺게 되기를 빕니다.”

미려 역시 일마와 같은 생각에 잠겼던 것일까. 일마의 얼굴을 다시 대담 하게 노려보면서 그 타는 눈동자 속에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천 가지 회포 가 묻혀 있음이 보인다.

“축복의 말은 되려 제가 먼저 드려야 할 것 같아요---앞으로 가정생활에 만복을 누리소서 고.”

충심으로서의 말일는지는 몰라도 일마가 비꼬아 듣는다고 안될 법도 없을 듯하다.

앞으로두 함께 이 서울에 “ 살아가게 되련만 웬일인지 더 만나게 되지 못 할 것 같으면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좋지요. 자꾸 만나서 어떻게 하게요.”

빗나가기만 하던 미려도 참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만나지는 않는다구 해두 서로 서울에 있다는 것이 웬일인지 듣 든은 해요.”

이 말이야말로 속임 없는 진실이 아니었을까.

“인생은 짧다구 해두 긴 것이니까. 또 앞길이 어떻게들 될는지 뉘 알겠수.”

“편안하시구 일 잘하시구 안녕히들 계세요. 이 비는 맘에 거짓은 없어요.”

목소리가 흐려지는 것을 경계하며 미려는 이 자리에서 또 울어서는 안 된 다고 입술을 꼭 물고 마음을 다구지게 먹는 것이었다.

신문사 사람들의 덕으로 주택도 의외에 수월하게 알맞은 것을 구하게 되 었다.

외국 영사관이 바라보이는 언덕 위의 조그만 한 채는 첫눈에 나아자의 마 음에 들었다. 일마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집을 돌아보는 날 나아자에게 밑 지지 않을 정도로 기뻐했다.

외국 선교사가 들었었다는 그 집은 조그만 벽돌 외채에 넗은 뜰이 달려 있었다. 뜰이 넓은 까닭에 집이 한결 작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펑퍼짐하게 열린 언덕 일대가 그 집에 붙은 것이었다. 누렇게 시들은 잔디 위에 장미나 무 가시덤불이 군데군데 퍼져 있고 단풍나무가 사이사이에 들어서서 그 도 회의 한 폭 위에 전원의 맛이 넘쳐 있었다. 낡은 벽돌 벽에는 담장이 넝쿨 이 일면으로 시들어 붙은 속에 머루 같은 조그만 열매가 지천으로 달려 있다. 여름이면 담장이 속에 온통 싸이게 될 그 푸른 집이 얼마나 아름다우려 니 짐작되었으나 넝쿨만 남은 겨울풍경도 그다지 스산하고 살풍경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잠시 동안 내 집이거니 하고 바라보니 부부에게는 달갑고 정다운 생각이 들었다. 새봄에 새집을 짓기 시작해서 들게 될 때까지 한 반 년 동안 들어 있을 집이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귀중하고 즐거울 때 반년 동 안의 생활이란 길고 오랜 것이다. 부부생활의 첫 집임을 생각할 때 한층 정 회가 깊다.

포치를 들어선 바로 옆방 남쪽 창에 의지하면 시가의 거의 반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남쪽 시가지의 굵은 집들과 은성한 인상이 손에 쥐일 듯이 굽 어 보이며 더구나 불켜진 , 밤 경치는 신선하고도 아름다운 것이어서 그런 조망이 행복감을 한층 더 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집을 살펴본 그날로 우선 석탄을 들여 벽로에 불을 피우고 침대를 들여놓 고는---호텔에서 벼락이사를 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집안의 정리와 잔손질 은 들어서 살면서 조금씩 해갈 작정이었다. 호텔에서 나르는 이삿짐이라고 는 몇 짝의 트렁크뿐이었고 일마는 한편 능보의 아파트에 묻어 두었던 세 간, 책과 책상과 의걸이 등속을 나르게 했다.

원체 새살림의 시작이라 새집이 된 후에 쓰게 될 모든 세간 그릇을 미리 사들이게 되었다.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즐거우면서도 힘드는 일이었다. 찬찬한 계획과 세밀한 주의와 명민한 거래와---그 위에 끈기와 노동이 필요했다. 살림에 드는 것은 의자나 의걸이뿐이 아닌 것이요, 한 바람의 실 과 한 개의 못조차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과 바늘과 못과 장도리 걱정 까지를 하다 나면 머리 속은 실오리같이 허끄러져서 이루두서를 가릴 수가 없게 되었다.

“생활의 경영이란 쉬운 노릇이 아니구료.”

“그럼은요. 인간사의 근원인데 쉬울 리가 있어요. 설계 중에서두 제일 중요한 것이 새살림의 설계가 아니겠어요. 괴롭구두 즐겁죠.”

나아자는 잠만 깨면 또 신성한 정신과 새로운 용기로 그날 일을 맞는 것 이었다.

수많은 의자와 탁자와 책상과 의걸이와 침대와---대강 굵직한 것을 차례 차례로 들여놓으니 방은 한 간 한 간 모양을 갖추어 갔다. 그러나 나야자에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엌일에 관한 일절의 도구였다. 어느 결에 그 렇게 살뜰한 주부가 되었는지 그는 찻잔 한 개의 선택에도 자기의 취미를 주장했고 접시 한 개를 골라도 세밀한 주의를 아끼지 않았다.

조리장의 설비가 대강 갖추어졌을 때 첫솜씨의 음식을 만들어 보면서 한 편 수많은 창을 가리울 커튼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아자의 의견에 의하면 커튼은 한 집의 가장 중요한 인상을 주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교양과 취미 를 외부에 보이는 마음의 표정이라는 것이다. 손수 끊어 온 여러 가지 색깔 의 헝겊에 독창적인 의장을 베풀면서 재봉기 앞에서 소리에 맞춰 휘파람을 부는 나아자였다.

며칠 동안의 부부의 노력으로 빈집은 살뜰한 새 손님의 보금자리로 변했다. 색채가 귀한 때이라 뜰이 단조하고 집 외모가 헌출하기는 하나, 그러나 또 겨울인 까닭에 집안의 공기는 도리어 옥신하고 따뜻한 것이었다. 나아자 가 공들여 만든 커튼의 짙은 빛이 창을 가리워 밖에서 보면 그것이 집 전체 를 치장하는 한 점의 화려한 터치였다. 단조한 벽돌 벽이 그 안에 풍부한 것을 간직한 듯 연상시키며 사치하게 보였다. 굵은 네모의 굴뚝에서는 종일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그것이 흡사 찻그릇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 같이도 달갑게 보인다.

젊은 여주인 나아자는 겨울옷 위에 짧은 행주치마를 입고 제법 일가의 주 부다운 풍격을 보이고 있다. 선량한 아내라는 것은 언제나 동시에 알뜰한 주부여야 한다. 식모를 두자는 의론이 있어서 구하고 있는 중으로 그가 올 때까지 주부의 노역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비록 온 후이라도 나아자는 주부 의 특권을 알뜰히 행사할 것이다.

“한 가지 무에 빠진 것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글쎄 무엇일까---이것만으론 좀 적적한 듯하면서.”

“옳지, 음악이예요. 음악이 빠졌어요.”

며칠 동안 바쁜 통에 두 사람은 음악을 잊었던 모양이었다. 한시도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하던 그들이 이제서야 그 필요를 느낀 것은 일에 얼마나 골 몰했던가를 말함이다.

조그만 피아노 한 대를 객실에 날라다 놓고 나아자는 적지 아니 만족한 모양이었다.

행주치마를 벗고 하루 한 때씩은 그 앞에 앉았다. 그런 때 나아자는 반드 시 몸을 가다듬고 새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자태와 경건한 마음으로 그 즐 거운 시간을 시작했다. 생활의 잔을 한 방울 한 방울 침착하게 맛보는 것이다. 즐거운 생활일수록에 경건한 마음이 상반되는 것이며 경건하게 할 수 있어야만 참으로 즐거운 생활인 것이다.

다뉴브강을 노래한 왈츠의 곡조가 흐를 때에는 일마는 나아자의 옆에 의 지해서 그의 경쾌한 손가락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멀리 생각을 하얼빈으로 달렸다. 지난 하얼빈의 나날의 회상은 언제나 왈츠의 곡조와 얼크러져 떠올 랐다. 나아자의 마음과 부딪친 것은 왈츠의 밤이 아니었던가.

다뉴브강의 향수가 나아자에게는 바로 송화강에 대한 향수인 듯 건반을 스치는 손가락이 그대로 하나의 표정을 가진 듯도 하다.

맑게 개인 날이면 피아노의 선율은 한층 또렷하게 흘러나와 그 언덕 위의 집에다 생명과 성격을 주었다. 그때까지 그 집에 들었던 식구들과 또 나아 자들 이후에 그 집에 들어 살 식구들 중 그 어느 식구들과도 다른 성격을 지금의 그 집은 가지고 있는 듯하다.

겨울날로서는 드물게 푸른 하늘을 내다보면서 부부는 창에 의지해서 행복 의 포화상태에 있었다. 지금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또 무엇일 것인가.

“가이없는 푸른 하늘---”

행복도 무한하고 불행도 무한한---무한한 인생 같이도 가이없는 창공을 바라보며 나아자는 자기 한 몸이 푸르게 물드는 듯도 한 착각을 느꼈다.

“---저기서 무엇이 떨어질까요.”

“무엇이 떨어질꾸. 정녕코 떨어질 것은 같구먼.”

반문하는 일마를 바라보며 나아자는,

“어디 눈을 감아 보세요. 무엇이 떨어지나.”

“자.”

눈을 감으니 또 한 가지 분부.

“입을 벌리구요.”

“아.”

눈을 꾹 감고 입을 아 벌리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 향하고 있는 일마의 얼 굴에 떨어진 것은 부드러운 촉감과 따뜻한 체온이었다---푸른 하늘에서 떨 어진 것은 나아자의 몸과 사랑이었던 것이다.

창공의 선물로 그에 지남이 어디 있으랴. 일마는 내 몸의 행복을 새삼스 럽게 느끼며 아내의 힘에 응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