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공무한/14장
교수 안상달의 가정같이 한적한 집안도 드물다. 아내 혜주와 단 두 사람의 식구인 까닭이다. 아직도 아이 없는 것이 혜주의 편으로 보면 적적한 때도 있었으나 한편 그 벌적으로 몸이 단정하고 깨끗하고 집안이 호젓해서 언제 까지나 신혼의 기분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편한 노릇으로 생각도 되 었다. 둥우리 안의 자웅의 새같이 단둘이만 서로 쳐다보며 사는 것이 지쳐 서 무미할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세상의 근심 걱정을 모르는 사람의 배부른 흥정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안상달은 교무에 그다지 매일 것도 없어서 평일도 한가한 편이기는 했으나 역시 일요일이 가장 고마운 날이어서 이날을 즐겁게 보내자는 것이 가정의 법도로 되어 있었다. 천편일률인 생활의 단조를 깨트려 보자는 것이 부부의 일상의 원이어서 생활의 계획도 갈아보고 연구도 하고 발명도 해보는 것이 었으나 신기한 계획이란 무한정하고는 없는 것이다. 보통사람이 하는 정도 의 오락이나 얼마간의 사치 ── 그런 것이 역시 생활의 흥미를 연명시켜 가는 수단이 되는 수밖에는 없었다.
날이 추워지면서부터 늦잠의 버릇도 더해져서 더욱이 일요일이라 부부가 식사를 마치고 대청에 나앉은 것은 아침 해가 훨씬 퍼졌을 때였다.
모차르트의 실내악이 조용한 대청 안을 화려하고 조금 슬프게 장식했으나 늘 듣는 음악고 단조한 것의 하나, 곡조가 끝났을 때는 방안은 한층 적막을 더한 듯하다.
혜주는 어느결엔지 털실의 뭉치를 가져다가 의자에 앉은 채 편물을 시작하 고 있었다. 남편이 올 겨울에는 스키를 해보겠다고 법석을 쳤던 까닭에 몸 단속에 필요한 옷가지를 뜨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그런 털실뭉치가 아내의 발목 아래에 구르며 창으로 쪼여드는 햇살을 받아 폭신한 감촉을 준다. 그 따뜻한 한 폭의 시절의 풍경에 마음을 녹이면 녹일수록 신변의 적막 을 느끼는 상달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아쉽구야 ── 고양이 새끼래두 한 마리 기르는 게 옳지.”
“논문이니 원고니 허구한날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모처럼의 일요일이 뭐 그리 무료하단 말요.”
혜주도 남편과 같은 마음이기는 하나 이렇게 한마디 거슬려 보는 것은 역 시 단조에 싫증이 난 까닭이다.
무료하다면 내야말로 “ 무료해 못 견딜 지경인데, 밤낮으로 집에만 갇혀 있었으면서 할 일은 없구 손두 놀구 맘두 놀구 시간이 무진장이구 ── 꼭 어떤 땐 지옥살이만 같구료.”
“벽 밖엔 꽃이 있고 벽 안엔 책이 있고, 집은 작으나 넓은 뜰엔 나무 그 림자도 있고 어김없이 들어오는 얼마간의 수입과 사랑스런 아내, 나 이외엔 아무도 잘났다는 사람 없으나 거기에 만족하는 아내, 스스로 즐겨 집안의 죄수되어 밖에서 부르는 새와 함께 노래하는 아내 ── 이 작은 집과 넓은 뜰과 얼마간의 수입과 사랑스런 배필과 건강한 몸과 평화로운 마음과 ── 나보다 더 위대한 사람을 보여다우 ── 하던 누구던가 시인의 시를 읽은 건 벌써 까만 옛일만 같지. 시인이 노래하는 진리두 시간 앞에서는 어쩌는 수 없는 것인가.”
“지금 웬 뜰에 꽃이 있구 나무그림자가 있단 말요. 꽃이 있을 때의 시가 꽃이 진 다음에까지 남아 있겠수. 뜰을 좀 내려다봐요.”
혜주도 덩달아 지껄이다가 문득 그 무엇을 깨닫고 당황해서,
“아니 시를 잊은 것이 대체 누구란 말요. 내란 말요? 당신이란 말요?”
“왜 난들 시 좀 못 잊어버리나. 당신 잊어버리는 시를 내가 왜 못 잊어 버리겠수.”
“무어요. 그게 남자의 버릇예요? 가정을 소홀히 여기구 자기 맘만을 주장 하는 것을 특권 같이만 여기면서.”
혜주의 생각 같아서는 자기는 가정을 무시하더라도 남편만은 절대로 아내 를 숭배하고 가정을 천국같이 여겼으면 하는 것일까. 남편의 눈으로 보면 그런 아내의 버릇이야말로 가장 꼴불견이요 되지 않은 것이었다.
“피차 마찬가진데 그렇게 얼굴 붉힐 것이 없구 ── 영화구경이나 떠납시다.”
일요일의 운명이란 결국 그 지경이 가장 무난한 것이었다.
대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그 길로 영화관에 들어가 반날을 지우고 하는 판에 박은 듯한 일요일의 과정을 그날도 그대로 밟는 것이었으나 신기한 자 극은 없으면서도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그 행사가 역시 일요일의 기분을 느 끼게는 했다.
가정생활의 권태라는 것에 대해서 부부의 책임과 권리가 어느편이 더하니 덜하니 하고들 집에서 한바탕 따지고들 나온 판이라 혜주의 가슴속에는 아 직도 그 논의의 여파가 서리어 있으면서 개운한 심사는 아니었으나 거리에 나와서는 역시 부창부화로 남편의 하는 대로 쫓는 것이 예의인 것을 분별하 지 못하는 그는 아니었다.
영화의 도중에서 상달은 잠깐 일어서 아내와 함께 휴게실로 나오면서 즐거 운 기색이었다 노래와 . 춤의 유쾌한 음악영화가 막 끝난 것이었다. 학문의 세상에서 이미 피곤해 버린 상달은 공연히 심각한 체하는 영화보다도 차라 리 경음악의 가벼운 영화를 즐겼다. 피곤한 정신을 해방시키고 잠시 영화와 함께 웃고 어깨춤을 추면서 천치같이 지낼 수 있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오늘 영화가「남방비행」이 아니기 잘했지 가정을 가진 여자가 아예「남 방비행」을 볼 것이 아니야.”
껄껄껄 웃으면서 남편은 무심히 지껄인 것이나 말속에 미려의 일건을 가리 키는 암시가 지나쳐 노골적으로 나타났던지 따라 나오던 혜주는 정색하면서 남편을 똑바로 노렸다.
“아니「남방비행」이 어쨌단 말요. 쓸데없는 영화평은 좀 삼가는 것이 어 때요. 세상에 영화비평가두 많을 텐데 괜히.”
“생각해 보구료.「남방비행」을 모방하는 아내가 자꾸만 생기면 세상의 가정이 무슨 꼴이 되겠나를. 미려의 행동을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다 찬성 할 줄만 아우.”
“찬성 안하군 어떻게 해요. 사랑 없는 가정에 어느 때까지 박혀 있어선 무엇하자는 것예요? 미려의 행동엔 손톱만큼두 파잡을 데가 없어요. 괜히 왜 남을 헌단 말요.”
“미려의 말이라면 펄펄 뛰구 야단이니 그렇게두 죽자 사자 하는 사이였었나.”
“친한 동무래서만이 아니라 같은 여자의 입장으로서 미려를 변호하는 것 예요. 사내만이 자기 뜻대로 해두 좋구 아내는 언제나 얽매어서만 지내라는 말인가요.”
“결국 아내에겐 누구에게나 다「남방비행」적인 성격이 있단 말이지. 무 서운 세상인걸. 남방비행의 선조가 노라였겠다. 위험천만이야.”
“사내는, 사내는 대체 어떻구요. 미려의 가정이 어떻구 남편이 어떤 위인 인지 알구나 말요.”
휴게실 소파에 앉아서까지 부부는 시비를 그치지 않았다.
“글쎄, 미려의 경우는 특별하다구 하더라두 전반적으로 세상의 가정이 그 렇게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면, 첫째 불안해서 어떻게 산단 말요.”
상달은 가정의 남편으로서는 온건파의 한 사람이었다. 개혁을 즐겨하지 아 니하고 길만 있으면 타협해서 평화를 보존함이 옳다는 것이 그의 평소부터 의 의견이었다.
그런 의견이 아내 혜주의 입장으로서 보아도 반갑지 않은 바가 아니되, 아 내를 중심으로 했을 때 반가운 것이지 남편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면 반가울 것이 없었다.
“필경은 남편이 더 아내를 존중히 여김으로써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구 생 각해요.”
“문제를 캐려면야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겠지. 당초에 사랑 없는 그 릇된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할 것 ── 일단 사랑의 결혼을 한 것이라면 권태 가 오더래두 피차에 양보해서 안전한 타협의 길을 찾아야 할 것 ── 부부 의 생활이라는 것은 역시 한 가지의 노력이어야 하잖겠수. 권태와 고집만이 있다면 필경 파탄의 길이 있을 뿐이 아니겠수.”
“누가 아니라나요. 뻔한 이치지.”
혜주도 동의하면서 대체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시비를 했던 것인지 결국은 같은 결론에 끝나는 두 사람이었다. 부부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일마는 하얼빈을 떠날 때 덜덜 떨었으나 서울로 돌아와도 추위는 마찬가지 였다. 겨울은 그곳이나 이곳이 일반이어서 벌써 같은 빛 같은 추위였다. 나 오는 길로 겨울옷과 겨울외투를 두둑하게 입을 생각만을 차 속에서 한 것이 생각대로 고향으로 돌아와 가장 반가운 것은 그 겨울옷이었던 것이다.
겨울옷과 아내 나아자와 전대로의 생활과 ── 그것이 가장 반갑고 그리운 소원의 것이었다. 짧은 여행에 전에 없는 피곤을 느끼며 아내와 그와의 분 위기를 새삼스럽게 갈망하게 되었다. 돌아올 곳은 그곳밖에는 없는 것이라 는 생각이 들면서 일종의 초려까지 느꼈던 것이다.
짧은 여행 동안에 퍽이나 많은 일을 치른 것 같으면서 복잡한 심서를 이루 가릴 수 없다. 왜 그런 여행을 떠났던고 하고 뉘우치기도 했다. 원래 사건 이 돌발한 까닭에 그것을 처리하려고 떠났던 것이 동무를 돕기는커녕 도리 어 자기 자신의 사건을 얻어 가지고 갈팡질팡하다가 돌아오고만 셈이다. 가 슴속에는 주름만 잡히고 그 주름 갈피갈피에 그림자만을 더 간직하게 된 것 이다.
대륙당 주인 운산의 납치사건은 거의 해결의 고패에까지는 이르렀으나 아 직도 놓여 돌아온 운산의 자태라는 것을 보지 못한 채로 일마는 떠났다. 대 륙의 갱은 뿌리 깊은 대규모의 것이어서 위협쯤으로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타협의 방법이 가장 무난한 것이어서 그 방침대로 교섭이 진행되어 청구의 액수가 겹겹의 손을 거쳐 깽단에 수교되어 이제는 그 대상으로 끌려간 운산 의 몸만이 놓여 돌아올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갱의 협기와 도덕에 비취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것으로서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어떤 경로와 방법 으로 돌려보낼 것인가가 의문이었다. 집안 사람들과 주위 사람들은 그 점에 흥미조차 느끼면서 운산의 나타날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사건의 해결이라 는 것은 아직 그 정도의 것이었다. 이제는 벌써 마음을 놓은 벽수의 권고도 있고 해서 일마는 떠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물론 미려가 하얼빈을 떠난 것은 일마보다는 훨씬 이전이었다. 미려는 감 정이 더욱 들까불게 될 것을 경계해서 호텔에서 일마와 마지막 만찬을 나눈 그날 밤으로 떠났던 것이었다. 미려를 떠내 보낸 후 일마는 얼크러진 심서 에 며칠 동안은 미려의 생각으로 가슴이 죄어졌다. 미려의 앞에서 냉정하게 하고 마지막까지 의젓이 군 것은 일마로서는 커다란 노력이었다.
건듯하면 피어오르려는 열정을 죽이고 마음의 고삐를 돌려 잡고 돌려 잡고 하면서 만신의 남모르는 싸움을 한 결과였다. 탔던 자리에 불이 붙으면 얼 마나 위험하고 맹렬한가를 잘 아는 까닭이다. 일마의 그때의 심정으로는 그 런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그것을 떨쳐버리고 냉정한 심사로 돌아가려고 참으로 몸에서 땀이 날 지경의 분투를 했던 것은 일마만이 아는 그의 가슴 속에만 숨어 있는 사실이었다. 현재 나아자를 사랑할 뿐이 아니라 열정에만 사로잡혀 질서라는 것을 모조리 깨트려 버림은 사회생활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런 배덕의 길이 인류의 바른길이 아닐 것이라는 ── 상식적이기 는 하나 역시 가장 옳은 도덕률을 가슴속에 되풀이하면서 그것으로 열정의 고삐를 다구지게 채쳐 쥐었다.
미려를 보내고도 혼자 일주일 남짓이나 호텔에 묵은 것은 미려에게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속히 개운한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으로였다. 병 은 항상 두 사람의 서 있는 거리에서 생기는 것이다. 미려를 그렇게 만나지 않았던들 새삼스런 번민이 솟았을 리는 없었다. 만난 까닭에 감동이 생기고 회포가 소생되어서 괴롭히는 것이다.
억지로 가라앉힌 마음에 불현듯이 생각나는 것이 나아자와 그와의 생활이 었다. 전에 없이 설레면서 서울로 돌아와 반기는 아내의 자태를 발견했을 때, 새로운 감동이 솟았다. 아내와 외투는 최적의 선물과도 같이 여기면서 거기서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얻은 듯도 했다.
사정도 사정이었지만 신혼의 부부가 잠시라도 그렇게 갈라져 있은 것이 일 마에게 보다도 나아자에게는 더욱 큰일이었고 괴변 같이도 여겨졌다. 교향 악단의 접대를 남아서 해야 했고, 일마는 별안간 동무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길을 떠나야 했고 한 것이 그 당장에서는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당연한 일 같이만 여겨졌으나 일단 그런 신변의 잡사가 지나가 버린 후 혼자 곰곰 이 남편과 갈라져 있는 입장을 생각할 때 나아자는 견딜 수 없는 적막을 느 끼며 남편에게 대한 회포가 불현듯이 솟군 했다.
그런 심회로 남편을 맞이하게 된 까닭에 반가운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유 별히 솟아 나아자는 신혼의 감격을 새삼스럽게 회복해 맛보게 되었다.
아마도 일마의 반가운 마음 이상으로 격동했던 것이요, 민첩한 여자의 감 각으로 눈물까지 어리어 보였다. 굴속에서 쓸쓸해 하던 외로운 동물과도 같 았다. 부둥켜안고 혀로 핥고 물어뜯고 하는 동물적인 애정의 표현이 사람에 게도 그런 때 가장 바르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나아자의 야단스런 태 도는 그대로가 거짓 없는 자연의 발로였던 것이다.
“떠내 보내구 나서 얼마나 뉘우쳤는지 몰라요. 내가 혼자만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짓인가를 느끼면서 제 불찰을 깨달았어요 왜 남 았던지 몰라요. 한때의 악몽이었던가요.”
아내는 야단스럽게 그때와 지금과를 비교해 심경의 변화를 말하면서 모든 것을 자기의 허물로 돌렸다.
“교향악단의 시중이라구 지내 놓구 보니 결국 별일이 없었던 것을 괜히 흥분하구 설레구……다 버리구 함께 뚝 떠나야 될 것을 ──”
악단의 일건에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쓰는 것이 일마에게는 딱하게까지 여 겨졌다.
“별일이 없긴 왜, 책임자인 내가 없는 때 나아자가 아니면 누가 친히 그 들을 접대하구 돌보아 준단 말요. 그런 공이라는 것이 모르는 곳에 숨어 있 는 것인데 그렇게 소홀히 한마디로 말해 버릴 수야 있수. 다 제각기 제자리 에서 필요한 일을 한 것인데.”
“동경으로 악단을 보내구 벌써 며칠인데요. 근 일주일 동안을 얼마나 쓸 쓸히 지냈지요. 그들이 가버리니 그저 그뿐예요. 맥두 빠지구 흥두 빠지구 뮛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구 설렜던가 해요. 차라리 여행이나 했던들 얼마나 마음이 신선해지구 보람두 있었을 것을.”
“하얼빈은 추워서 그다지 재미있는 여행두 못했으나 나두 그간 쓸데없는 일 때문에 번잡하게만 지낸 듯하오. 악단이니 동무의 사건이니 하구 휘돌아 치면서 중요한 생활을 잊어버리구 이제는 신변두 안정됐으니 앞으로는 두 사람의 생활이 있을 뿐이오.”
일마가 말머리를 돌리려 해도 나아자는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걸렸는지 고 집스럽게 한 곳에서 여전히 답보하는 것이었다.
“단원들의 모두가 일마 일마 하면서 당신께 치사하는 것을 들었어요. 더 욱이 이봐놉은 안부를 전해 달라구 신신당부를 하면서.”
결국 이봐놉의 말을 꺼내자는 것이었을까. 이봐놉과의 사이를 아직도 일마 가 오해하고 있지나 않은가 해서 걱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을까. 그런 아 내의 태도가 애처로워지면서 그 순결한 표정 속에 지금 새삼스럽게 오해를 해야 할 건더기는 들어 보이지 않았다.
부부의 순결성을 따진다면 일마는 아내의 앞에서 고개조차 쳐들 처지가 못 되었다. 이번 여행만 하더라도 의외의 일이기는 하나 미려를 만났던 것을 나아자가 들으면 그 또한 놀라고 오해하지 않을 것인가. 부부의 평화를 위 해서 차라리 그 일을 이야기하지 말까도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부부 사 이의 오해에는 한이 없는 것이며 결국에 필요한 것은 피차의 달관과 신뢰인 것이다. 일마는 어느 틈엔지 그런 철학을 터득하고 있었다. 짧으면서도 복 잡한 몇 달이었다.
“필경은 다 지난 것이요. 이제 더 서로 맘을 죄여 지낼 것은 없어. 벌써 우리들의 사랑만이 남은 것이 아니오?”
언덕 위 병원 조그만 병실에 단영은 누워 있었다. 벽도 희고 침대도 희고 단영의 얼굴도 희다. 희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곱다. 단영같이 핏기 많은 여자는 도리어 그렇게 쇠잔하고 약해 보일 때가 한층 아름다운 듯하다.
입원한지 여러 날에 병세도 점점 쾌해져서 이제는 완전한 회복의 날을 기 다리게 되었다. 그 동안의 경과를 생각하면 단영은 신기한 생각이 나면서 침대에 지금 누워 있는 것이 짜장 내 몸인가. 벌써 진했어야 할 내 몸이 왜 이때까지 이 자리에 누워 있는구 하는 느낌이 들었다.
촌 의사의 수완을 치하해야 옳을는지 원망해야 옳을는지 치료의 공이 있어 단영은 그 불서로운 온천 방에서 한 목숨만은 당겨 세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루 동안 혼몽한 속에서 신음하다가 저녁때가 되어 서울서 친한 의사 가 달려왔을 때에는 의식을 회복하고 사선은 넘어선 것이었다. 생명에 지장 이 없게 된 것을 명도는 자기 일만큼이나 기뻐했다.
그 꼴을 볼 때 단영은 다시 불쾌한 생각이 나면서 소생된 생명의 값을 무 의미한 것으로 여기고 되로 질긴 한 목숨을 저주도 해보았으나 벌써 인생의 방향은 작정된 것이다. 다시 목숨을 꺾어 버릴 용기는 없었다. 며칠을 온천 에 그대로 누웠다가 기맥이 약간 회복됐을 때 서울로 올라와 좀더 병실에 누워 있게 된 것이었다. 무슨 꼴이라고 할까. 빼었던 칼을 다시 칼집에 꽂 아둔 보람없는 자기의 꼴이 말할 수 없이 비굴하고 어리석게 여겨지면서 스 스로 부끄럽다. 자기 염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숙명이거니 인생과의 연분이 그렇거니 하고 체관한다 하더라도 주위 사람에게 주게 된 자기의 인 상을 생각할 때 얼굴이 화끈화끈 달 지경이었다. 무슨 낯으로 접질려진 인 생을 또다시 걸어갈꾸 생각하면 생명의 불행을 가슴 갈피갈피에 느끼게 되 었다. 같은 인생의 연장일진대 어떤 기적을 바라며 살아가야 옳을 것인가.
실패된 결의라는 것이 조금도 여생에 가치나 자랑을 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더 곪기게 된 상처를 가지고 평생을 앓으면서 지내게 될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릴 뿐이다. 저주된 생명을 바라보면서 침대 위에서 쇠약한 육 신을 주체스럽게 뒤치닥거렸다.
명도의 꼴은 볼수록 불유쾌한 기억을 일으키며 견딜 수 없었던 까닭에 당 분간 그의 자태를 눈앞에서 물리치기로 했다. 그렇게 고분고분하고 알뜰히 시중을 들어주던 사나이가 눈앞에 감돌지 않게 된 것이 섭섭하면서도 시원 한 노릇이었다.
“그 착하구 진짬인 사내를 왜 사랑할 수 없는구. 마음 한번 노엽혀 줄까.
그와만 지낸다면 평생이 안락할 것을.”
명도의 정성을 생각할수록에 이것도 숙명인가 하고 야속해졌다.
종세가 찾아오고 훈이 위문을 오고 하는 번잡한 방문 속에서 미려의 자태 가 가장 반가운 것은 웬일이었을까.
꽃을 가지고 와서는 방에 꽂아 주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려주는 그가 누 구보다도 친밀히 여겨졌다. 여자는 여자끼리만 참으로 마음이 통하고 합하 는 것일까. 하기는 단영은 이미 자기의 모든 속을 미려에게 터놓고 헤쳐 보 인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충심으로 마음의 괴롬을 전해도 좋은 사람은 사 실 미려를 내놓고는 외에 없었던 것이다.
“단영은 언제나 나보단 더 용감했겠다. 만주에 갈 때가 그랬구, 돌아와서 두 그랬구, 이번에도 또 용감한 행동을 보였으니.”
“용감하려다가 이 모양이 되었구료. 불쌍한 어릿광대가 되었구료.”
“난 단영의 뒤만 따라다니는 사람이니 나두 언제나 또 그 모양이 되지 않 을까.”
일마의 뒤를 따라 하얼빈까지 갔다 왔음은 이미 단영에게 말해 듣긴 일이 었다.
“사랑의 말 한마디를 들으러 그 먼 곳까지 갔다가 내가 단영을 이겼느니 어쨌느니 생각했더니 벌써 이기구 지구 하는 문제가 아닌 것을 내가 단영을 이긴 것이 무슨 소용일꾸. 이렇게 용감한 단영을.”
피차의 신세를 말하는 패잔병같이 속에 숨김이 없는 두 사람은 지금 가장 친밀한 한 짝이었다.
남몰래 단영에게 마음을 기울였던 훈이였만 단영이 일마에게 미친 나머지 의 사랑을 보이고 몸을 맡겼을 때에는 도리어 이를 거절하고 욕준 훈이었 다 그러나 단영이 비참한 . 지금의 경지에 이르게 된 때까지도 냉정하게 할 것이 없어서 훈은 병석에도 자주 찾아오고 그를 측은히도 여기게 되었다.
단영의 편으로 보면 훈은 가령 명도 같은 사람과는 유가 다르게 비취었다.
아마도 일마 마음에는 사랑할 수 있는 남자 ── 만약 세상에 일마가 없었 던들 단영은 두말없이 훈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일마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렸던 까닭에 훈의 존재는 그의 눈앞에서 스스로 광채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중매의 대상으로 몸을 바치려고 할 때도 가령 명도 때와 같이 아주 싫은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 그 어느 구석으로 승낙을 받은 연후의 제의였다. 일마를 놓치고 완전히 그를 단념하게 된 지금에 가장 신변에 가깝게 느 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훈이었다. 훈의 내방은 미려의 경우와는 또 다 른 의미로 단영에게는 반가웠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단영 혼자의 심중이었고 훈 역시 반드시 단영과 같은 생각은 아니었다. 한때 그에게 남모르는 열정을 기울이고 무한히 괴롭게 지 낸 때가 있기는 있었으나 지금에는 벌써 모든 것이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하 고 있는 훈이었다. 상하고 이지러지고 곯을 대로 곯아 버린 단영이다. 육체 와 마음이 그토록 피폐한 그를 이제 전과 같은 신선한 생각으로 보고 바라 게 되지는 않았다. 측은한 생각으로 동정하고 가엾게는 여길 수 있어도 이 는 사랑의 대상됨과는 스스로 다른 문제이다. 사랑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가 엾은 동무로서 대하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훈의 심중을 알고서인지 모르고서인지 단영은 알뜰히 찾아와 주는 그 를 대할 때 마음이 반가운 한편 겸연쩍었다. 그렇게 대할 면목이 없을 뿐더 러 그의 친절을 받기에 값가지 못함을 부끄러워했다.
“모처럼의 결의가 관철되었어야 단영의 생애가 더욱 빛났을 것을 중간에 서 꺾이우고야 죽두 안되구 밥도 안됐으니 무슨 꼴이란 말요.”
이만 정도의 농은 지난날에도 피차에 하고 지낸 터였다. 훈의 웃음의 말이 악담이 아님을 단영도 잘 안다. 알수록에 부끄러움이 더욱 솟으며 자기의 모양이 돌보였다.
“누가 이 모양 될 줄 알았나요. 옳게 성공할 줄만 알았죠 ── 허나 다시 또 한번 맘먹을 용기두 없구 이젠 별수없이 세상의 조롱을 받으면서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수밖엔 없게 됐어요. 살다 살기 싫으면 또 그때의 일이 구……”
세상일 심술궂다는 “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렷다. 생사가 다 뜻같이 안되 니 용감한지 비굴한지 무서운 여자야, 단영은.”
“작작 놀려요 ── 화나는데 수틀리면 또……”
단영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푹 가리면서 돌아누웠다.
“괜히 일마만 더 행운아 맨들어 줄려구 ── 세상에 일마보다 행복스런 사람이 있을까. 정신을 바치겠다는 여자가 없나, 목숨을 바치겠다는 여자가 없나, 한 사람의 알뜰한 사랑두 구하기 어려운데 두 사람 세 사람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사족을 못쓰구 법석이니 옛날의 솔로몬인들 그보다 더 행복 스러웠을까. 사내가 한번 나려면 그렇게 나보구 마렷다. 잘나서 그런지 여 자의 눈들이 메서 그런지 ── 생각하면 가관이구 그런 불공평할 데는 없어. 큐피트의 망령이지 원, 한 사람 사내에게 그렇게까지 염복을 쏟아버릴 법이야 있을까.”
말이 수다스러웠던지 단영은 다시 돌아누우면서,
“사내끼리두 질투를 하나 못나게. 게염은 무어요.”
“미상불 질투두 하고 싶은걸. 세상의 뭇 남성을 위해서 친구 한 사람 미 워해두 내 허물은 아닐 것이야……어때, 그래두 일마가 만나구 싶지? 한번 데려다 줄까.”
“…………”
“데려오구 말구. 그 행운아의 멱살을 바싹 끌어다가 단영의 눈앞에 진상 바칠 테니 원수의 낯을 싫도록 봐두렷다.”
훈에게서 단영의 일건을 듣고 일마는 미상불 놀랐다. 그런 격렬한 행동을 단행하는 용기에 보다도 그것이 모두 자기를 위한 것임에 더욱 놀란 것이었다.
단영의 성격이라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결이 세고 핏기가 넘치는 그로서 그만한 일을 단행 못할 배는 아니었으나 조금 어지럽던 그의 생활이 그렇게까지 한 가지를 위해서 맑고 순수하게 개어 있었던가 하는 것이 일마 에게는 의외였다. 자기를 사랑하노라고 정신없이 휘돌아쳤던 것도 알기는 아나 마지막 것을 생각하게 되리만치 강렬하고 순결했던 것임은 추측하기 어려웠다. 죽음으로 사랑을 대신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큰일인가에 놀라며 그런 갸륵한 마음의 표현이 자기에게는 분에 넘쳐 눈부시게 여겨졌다. 이 놀람은 차차 일종의 책임감으로 변하면서 마음이 무거워지고 사건 그것이 주체스럽게까지 여겨졌으나 단영의 한 몸이 소생된 것만 불행 중 다 행으로 그것으로서 자기의 책임감도 얼마간 완화된 성싶었다. 만약 단영의 한 목숨이 완전히 진해 버렸던들 얼마나 자기는 괴롭고 죄 많은 사나이가 되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자네 같은 행운아는 “ 없는 줄이나 알게. 남의 소중한 목숨을 한손 에 쥐고 있으니.”
훈은 일마를 면대해서도 같은 말을 안하고는 못 배긴다. 그 정도의 싫은 소리라면 백 번 들어도 괜찮은 신세라는 듯도 한 훈의 태도였다.
“자네 생각에 행운같이 보일 뿐이지, 내가 반드시 그런걸 행운이라구 생 각하는 줄 아나. 되려 불행일지두 모르지 않나.”
“건 욕심이란 것야, 행운은 행운, 불행은 불행 ── 보아서 생각으로 작 정되는 것이지 행복을 불행으로 본다는 건 배부른 수작이야.”
“그렇게 행복을 주는 단영을 자네가 왜 못 차지하구 그 야단인가.”
“내가 못 차지하니 자네가 행복스럽단 말이네. 아무에게나 매인 여자라면 자네게 행복될 것두 없어 ── 어서 위문이나 가 주게. 여자의 정성에 대해 서 남자로서두 대답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세상 남자가 그렇게 쌀쌀만 하 다면야 여잔들 무얼 믿구 살겠나.”
“자네 하루아침에 여성 숭배자가 되구 말았네 그려.”
“자네 같은 남자만이 세상 남자의 전부가 아님을 세상에 알려주구 싶네.
이번만은 난 절대로 단영의 편이야. 자네의 그 냉정한 태도에 반대야.”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영에 대해 그만한 정도의 호의를 보임은 지 금까지의 심정을 생각해도 훈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단영의 숨은 원이 라면 또 한번 일마를 데려다 줌이 그를 조금이라도 위해주는 소치라고 생각 했다.
일마는 좀 어색하다고는 생각하면서도 꽃묶음을 사들고 단영의 병실을 찾 았다.
단영은 얼굴빛 까딱 동하지 않고 침착한 표정대로 눈도 깜짝 안하고 누워 있는 것이었으나, 일마 외에 방에 아무도 없었기가 다행이지 만약 그 누가 있었던들 단영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대체 무엇으로 들었을 것인가. 사랑하 는 사람끼리의 꾸지람으로 들었을 것인가. 하소연으로 들었을 것인가.
“지옥에서나 만날 줄 알았더니 이 속세에서 또 만나게 되는구료.”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던질 수 있는 그런 말투였다.
“지옥에선 왜, 천당에서나 만나면 만났지.”
일마도 하는 수 없이 농으로 받기는 하면서도 확실히 얼마간 응석을 부리 고 있는 단영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같이 죄 많은 여자가 천당에 비집구 들어갈 수 있나요. 지옥에서 만나 는 게 분에도 맞구 상팔자기두 하지.”
어떻든 지옥두 아니구 “ 천당두 아니구 다시 땅 위에서 만나기를 잘했지 정말 단영이 세상을 떠났던들 내가 세상의 비난을 어찌 다 받었을꾸.”
단영은 눈을 흘기는 것이었으나 하기는 그 정도의 응석은 여자로서의 본능 인지도 모른다.
“단영은 대체 현명한 짓이라구 생각하구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것이요. 그 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줄 알면서 부러한 것이란 말요.”
일마의 질문을 단영은 도리어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한마디 쏘고도 싶었다.
“현명하구 어리석은 것이 무슨 상관이예요. 현명하다구만 생각해야 하구 어리석다구 생각하면 못하나요.”
일마의 공리주의를 배척한다는 듯이 핀잔을 주면 일마는 일마로서의 생각 이 있었다.
“열정만이 가장 바른 판단자인 줄 아우. 사람들이 다 열정의 명령대로만 행동한다면 세상 꼴 잘 되겠다. 열정같이 개인주의적인 것은 없는 줄이나 아시오. 무엇 하자는 열정이오. 제 열정을 못 이겨 괜히 어리석게.”
“그러게 내 열정 나 혼자 가만히 불살라 버리려구 한 것이죠.”
“그래 불살르려 한 결과가 대체 무엇인구.”
“지금 실패한 결과와 원래의 뜻과는 다른 것이죠. 실패한 것은 하나의 우 연의 결과이구 실패했든 성공했든 뜻은 뜻이거든요.”
“결과로 보아서 ── 복받치는 열정을 못 이겨 설레다가 지금 이렇게 패 한 꼴을 침대 위에 뉘이구 있으니 이게 무어란 말요. 어쨌단 말요.”
“그렇게 싫은 소리를 하려구 마지막으로 병원에까지 쫓아왔단 말인가요.
세상에서 당신같이 잔인한 사람은 다시 둘두 없어요. 시원하게 죽어 버렸으 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소생해 나니 또 당신의 신변이 귀찮아질까해서 하는 소리죠.”
확실히 지나친, 일부러 들으라는 듯도 한 소리였다. 일마는 픽 웃으면서 목소리를 부드럽혔다.
“단영은 한다하는 신여성이 아니오? 신여성이면서두 맘은 아주 구여성이 란 말야. 내 말은 그게 어리석단 말요. 왜 하치않은 내 한 사람을 위해 소 중한 목숨을 그렇게 멸시한단 말요. 이도령에게 바친 춘향의 절개라는 것이 몇 세기 전 이야기이지, 지금 이 복잡하구 야박한 현대에 있어서 무엇 하자 는 것이오. 쓸데없는 꿈속에서 살자는 것이지 현실을 똑바루 보구 한 짓은 아니야. 남에게 웃기우기가 십상이지 사람이 갸륵하게나 여길 텐가. 열녀비 가 설 텐가.”
자기 자신을 욕주고 학대하려고 한 소리였만 단영에게는 비난의 소리로밖 에는 들리지 않았다.
춘향이든 아니든 “ 왜 이 조롱이란 말일꾸. 내 한 일은 내 한 일이지 당신 께 조금두 누끼치지 않았으니 걱정 말아요.”
“내겐 지금 단영의 모양이 배우로밖엔 안 보이는데. 무대 위에 선 배우로. 이 방두 침대두 모두가 무대장치구, 그 장치 속에 등장한 가엾은 여배 우가 단영이야. 비극배우가 아니구 희극배우야.”
이 역 일마로서는 자기 조롱의 말이었으나 도가 지난 모양이었다.
단영은 화를 버럭 내며 침대 위에 상반신을 일으켰다. 얼굴이 금시에 상기 되어 벌겋게 물들었다.
“뭐요, 배우라구요? 희극배우라구요? 그래 이번 일두 연극을 했단 말이죠. 어느 입으로 그런 말이 나와요. 또 한번 말해 봐요 어디.”
분하다는 듯 팔에 얼굴을 묻고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그 격동적인 거동에 일마는 비로소 자기가 던진 말의 방자가 심했던 것을 깨달으며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문득 쳐든 단영의 얼굴에는 눈물이 어리어 있지 않은가. 눈썹이 젖고 입술 이 빙긋빙긋 휘인 것이 흡사 서러워하는 아이의 모양이다.
“그렇죠. 당신의 말이 옳구 말구요. 난 배우예요. 언제나 배우예요. 거짓 연극을 해서 관객을 속이는 배우 중에도 천한 배우예요.”
하고는 목소리를 높여 손으로 방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가요. 어서 나가요. 천한 배우의 방은 당신 같은 도도한 사람이 올데 가 아니예요. 냉큼 나가라니까요.”
사태가 그렇게 빗나갈 줄은 예측도 못했던 일마는 단영의 그 별안간의 노염에 간담을 차게 하면서 잠시 어쩔 줄을 몰랐다. 앓는 몸에 흥분을 주게 된 불찰을 뉘우쳤다.
“오해 마시오. 단영을 위해서 한 소리지 멸시해서 한 소리겠수. 멸시를 한다면 내가 이렇게 찾아나 왔겠수. 너무나한 괴변에 나두 놀라구 어이가 없어서 한 말이지 그 외에 무슨 별 뜻이 있단 말요.”
빌 듯이나 하고 겸양해도 단영은 좀체 노기가 풀리지 않았다.
“나는 일개의 배우라는 관념이 당신 맘속에 처음부터 있었기 때문에 당신 의 그런 태도가 생겼구 이런 결과가 된 것인 줄이나 아세요.”
“내가 왜 배우를 멸시하나. 난 되려 단영이 그렇게 고집스러운 것이 화라 구 생각하는 것이지 단영의 품성을 조금이나 의심할 리 있나. 되려 내 자신 이 부끄러워서 견디기 어려운 판인데, 단영을 조금이라도 헐다니.”
어떻든 난 이번에 배우로서의 “ 행동밖엔 못되는 짓을 했어요. 그러게 이 렇게 제값에도 못가는 대접을 받게 됐지요. 어서 더 조롱두 말구 추스르지 두 말구 내 앞을 물러나요. 무슨 인과로 이렇게 두구 두구 괴롭힐까. 이 목 숨이 붙어 있는 한 한시두 괴롬이 떠날 날이 없으니.”
하면서 단영은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쓸쓸해졌다. 일마를 잊어버리자다가도 ──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가도 일단 그를 눈앞에 보고 말을 걸면 꼭 그런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지없이 쓸쓸하고 안타깝다. 그 안타까움을 영원히 잊어버리려고 마음먹은 것이 이번 행동이었으나 그같이 실패를 하고 보면 모든 것이 도리어 제 턱, 그 원수의 괴롬을 어떻게 해탈해 나갈꼬 하고 마 음은 다시금 죄여지기 시작했다. 일마와의 거리를 멀리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멀면 가까워지기를 원하고, 가까우면 즐거우면서도 안타까워서 다시 멀 어지기를 원하는 모순된 마음은 흡사 고집스런 심술쟁이와도 같이 얄궂은 것이었다.
괴롬을 무릅쓰고 쌀쌀한 마음으로 문을 가리키며 소리를 치는 것이 진정으 로의 본의인지 본의가 아닌지 스스로도 분간하기 어려운 심경이었다.
“얼른 나가라니까요.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기를 약속하구.”
팔을 들어 뻗치면서 기를 쓰다가 기어코 단영은 침대 기슭으로 반신이 밀 리면서 아래로 떨어질 듯 몸이 휘어졌다. 격동이 과했던 모양이다. 얼굴이 달아서 붉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흥분은 왜 할꾸.”
일마가 달려가서 몸을 붙들어준 까닭에 침대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흥 분에 몸이 떨리고 눈초리가 휘었다.
일마의 손을 굳이 뿌리치려고도 하지 않으며 바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고요한 표정으로 먼 한 곳을 노린다. 그대로 몸이 다시 사라졌으면 원했다.
일순 전에 노여워했던 그였만 이제는 일마의 팔에 의지해서 얼마간 응석을 부리고 있는 듯도 한 태도였다. 자기의 한 몸을 참으로 위해 주고 끔찍이 여겨주는 마음 ──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이 참된 사랑이었으나 단영은 반생 동안 그런 사랑에 주려온 것이다. 원하는 것은 그것이나 숙명이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 잠시 일마의 위무를 받는 것은 생애의 마지막 선물인 듯 꿈속 일같이 전신을 기쁨으로 채워 주는 것이었다.
“단영의 생애는 아직두 긴 것이오. 행여나 다시 주책없는 생각을 하지 말 것이 사람의 평생은 몇 번이나 변하는 줄 아우. 침착한 속에서 변해 나가는 운명을 고요히 바라보는 마음 ── 그것이 사람에겐 무엇보다두 귀중한 것 이 아닐까.”
그렇게 아는 척하구 “ 남을 타이르지 말아요. 내 앞길이 어떻게 되든지 이 것이 정말 하직이예요. 차례진 길이라면 차례진 대로 나두 내 맘 잡아보죠.”
단영도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마의 몸을 고요히 밀치는 것이었다.
대체 일마는 천재일까, 그렇지 않으면 일마뿐이 아니라 남자의 근성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대하는 여자의 세계를 각각 경우를 따라 명확하게 구별 하는 것이다. 마음의 세계가 그렇게 넓고 풍족하면서도 겉으로는 늠실하고 평온한 표정을 지닌다.
단영을 찾아갔던 그 낯으로 아내를 대하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단영의 일건을 나아자에게 말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를 망설이기도 했 으나 말하는 것이 부부의 행복을 상하는 것이라면 침묵도 하나의 방편이 아 닐까.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아내를 욕주는 것이 아니라고도 생각했던 것이 요, 무엇보다도 단영과의 사이는 그 마지막의 방문으로 완전히 결말이 난 것이니 그것이 새삼스럽게 부부 사이에 현안이 되고 문제가 될 것은 아니라 고 생각했다. 단영의 병석에서의 마지막 애끊는 표정이 일마 가슴을 어지럽 히는 것이기는 했으나 원래 그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고 그 순간의 감정을 청산하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부터야 말로 모든 협잡물을 물리쳐 버 리고 부부 사이에 순수한 기풍을 회복할 것이라고 마음먹는 것이었다.
하기는 일마는 나아자에게 대해서 충심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은 표면 의 변동이 복잡했다고는 해도 심중의 일념에는 조금도 변동이 없었던 까닭 이다. 단영에게 대한 마음은 시종이 여일했던 것이요, 미려에게 대한 먼 날 의 회포도 나아자를 만난 때부터는 아득한 옛일로 돌아갔던 것이다. 결국 한 줄기 나아자에게 대한 사랑만이 모든 것과 구별되어 줄기차게 솟는 것이 었으니 그에게 대해 부끄러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부부 도덕에 대한 회의가 없지는 않았다. 완전한 부부의 사이라는 것이 어 느 정도의 것일꼬. 물과 물같이 합치되는 것이라고 한 대도 그 사이에는 과 연 티끌만큼의 흐림과 협잡물도 없을 것인가. 남자라는 것이 대체 평생에 아내 이외의 여자를 몇 사람이나 만나는 것이며 그런 때에 각자의 감명의 방향은 어떤 것일까. 그 감정의 분석이 어느 정도로 맑고 어느 정도로 흐릴 것인지는 온전히 조물주나 악마만이 아는 일일 것이다. 악마의 척도로 일일 이 인간의 감정을 헤아림은 필요한 일도 아니요, 도리어 혼란과 불안을 낳 을 뿐이다. 완전한 부부라는 것은 다만 그것을 생각하고 원함이 옳을 것이 요, 굳이 엄밀하게 분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나아자의 눈 밖에서 단영을 만났고 미려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 중 에는 나아자의 모르는 고비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 사실만으로 나 아자와의 사이의 거리를 측량함은 반드시 지당한 일은 아닌 것이다. 나아자 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 이상의 더 완전한 합치라는 것이 또 있을 것 인가. 적어도 지금의 나를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필요한 것은 감정의 분석이 아니요, 목표를 위한 피차에 달관이요, 노력인 것이다. 원래 결혼부터가 말하자면 인간생활의 한 가지 정리다. 꿈의 정리다. 짧은 생애의 허다한 꿈을 일일이 쫓기는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피곤을 줄 뿐이다. 허다한 꿈속에서 한 가지만을 선택하고 나머지 모든 것을 단념 해 버리고 그 한정된 꿈속에 낙착하는 것이 결혼의 뜻이다. 최상의 꿈을 고 르든 최하의 꿈이 차례지든 ── 가장 이상적인 결혼을 하든 설핀 결혼을 하든 그것은 기회의 행불행인 것이나 어느편이든지 간에 조만간 피곤의 결 과는 마찬가지이다. 필요한 것은 그것의 극복이요 체관의 노력인 것이다.
부부 도덕의 뜻을 이렇게 생각하는 일마는 나아자와의 사이를 조금도 부족 한 것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일마는 방에서 나아자와 단둘만의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으나 그 늘 가지는 습관이 무료한 것이 아니고 특히 그날 그런 마음의 준비를 가진 일 마로서는 한층 즐거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날 호텔 안은 간밤에 별안간 내린 기온 때문에 냉랭한 기운이 떠돌며 으 슬으슬 추웠던 까닭에 나아자는 목덜미를 움츠리고 방안에만 들어 박히게 되었다.
차를 마시러 아래로 내려가기도 성가시어 보이에게 분부해 방으로 몇 번씩 날라다가는 일마와의 게으른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방안에서 한가할 때 나아자에게는 맡은 일과가 있었다. 벌써 언제 부터인가 시작한 조선어의 공부가 그것이었다. 일마는 온순한 교사였다. 나 아자의 갸륵한 뜻과 정성에 감동하면서 교사로서의 능력을 다하는 것이나 어학의 공부라는 것이 원래 한이 없는 것이다. 나아자의 진보는 빠른 듯도 하고 더딘 듯이도 보였다. 받침을 배우고 단어를 기억하다가도 다시 교과서 첫 장으로 돌아가서는 심심파적으로,
“가갸 거겨 고교 구규……”
도 해보고,
“아야 어여 오요 우유……”
를 되풀이도 해보았다.
“야니 유니 글자 하나로 음 하나를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꼭 로서아어와 두 같아요.”
신기한 발견이나 한 듯 기뻐하는 것을 보면 일마도 덩달아 기뻐하면서 말 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자기가 외국어를 지껄일 때에는 느끼지 않는 것이나 외국 사람이 외국어를 지껄이는 것이란 야릇하기 짝없게 들리는 것이다. 나아자가 자국어를 지껄 이는 것은 극히 범연하게 들리지만 그 푸른 눈과 누런 머리카락의 자태로 조선어의 발음을 어색하게 하는 것이 더없이 신기하게 들렸다. 사랑하는 사 람의 고장의 말을 배우고자 하는 정성이 갸륵한데다가 서투른 발음을 내섬 기는 것이 귀엽게 보이면서 일마에게는 미소를 자아내게 하고 만족감을 주 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풍습을 존중히 여기고 배우고 그와 동화되려는 뜻 ── 사랑의 정성 그보다 더 큼이 있을 것인가.
“외국 사람은 누구나 조선어를 어려운 말이라고들 하는데 나아자의 감상 은 어떻소. 대개들 중도에서 집어치우구들 하면서.”
일마가 선량한 교사의 태도로 웃어 보이면 나아자는 자신 있는 어조로,
“두구 보세요. 몇 달 안 해서 옳게 깨치게 될 테니. 어려울수록에 배우는 보람도 있죠.”
아내의 재주와 열성을 믿으며 일마는 더욱 아내의 뜻을 믿음직한 것으로 여겼다.
“얼마 안가, 미려와 함께 이야기하게 되지 않나 보세요. 미려들과 함께 여기 말로 사귀구, 놀게 되는 것이 지금의 제 원이에요.”
솔직한 고백이다. 미려의 이름을 말했다고 해서 일마가 개의할 필요는 없다. 조선의 여성으로 나아자가 처음 만나고 그 아름다움에 경탄한 것은 미 려였다. 그와 사귀고 싶은 것이 나아자의 원이었다.
저녁때가 되었을 때, 방안이 별안간 훈훈해짐을 느끼면서 살피니 벽옆 수 난로에 스팀이 통해 오는 것이었다. 시절의 첫 시험이다. 쇠 다는 냄새가 나면서 모르는 결에 방안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나아자는 독본을 가지고 책상 앞을 떠나 난로 위에 가 배를 대이면서 아이 같이 기쁜 낯이다.
“첫추위의 난로같이 반가운 것이 없어요. 방안이 금시 봄 같지 않아요?”
하다가 문득 책을 놓고 걱정하는 듯이,
“집을 얼른 구해야지, 닥쳐오는 겨울을 어떻게 하겠어요. 호텔에서 날 수 두 없구.”
주택의 일건은 일마도 걱정해 오는 바이요, 몇 군데 수배해서 구해 오는 중이기도 했다.
“내년 봄이면 교외에 집을 짓게 될 테니 겨울 동안만 들어있으면 좋으련 만 ── 부탁해논 것이 차차 결말을 가져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