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공무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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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마가 훈에게 ‘만 원 당선’의 전보를 쳤을 때까지의 경위는 이러하다

신경역에서 간신히 단영을 떼어놓고 오후차를 탄 일마는 다섯 시가 가까워 서야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폼에는 망간 전보를 받고 뛰어나온 벽수가 맞이해 주었다.

“삼등찬 줄 알았더니.”

이등차가 의외라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달려와서는 트렁크를 받아 든다.

“오늘부터 해가 서쪽으로 떴다네.”

“전번보다 신수두 나졌어.”

“문화사절이 빈약해서야 쓰겠나.”

“자네 편지두 읽구 신문으로두 보았네만.”

벽수도 신문에 종사하는 몸이라 소식도 빠르거니와 눈치도 빠르다.

“문화사절이니 뭐니 하니 함께 걷기두 엄엄한데.”

“어서 지금 함께 걸어야지, 좀 있다 내가 더 좀 장하게 되면 내 곁에두 못 오게 되리.”

“만주길이 잦더니 자네두 이젠 허풍을 다 떨게 됐나. 작작 위협해 두게나.”

잘름하고 오돌진 몸집에다가 마도로스파이프를 문 벽수의 자태는 한층 다 구져 보인다 얼굴 빛깔조차 . 검츠레 거스른 것이 만주에 와 군 지 십년, 확 실히 용모조차 변한 듯하다. 숙부 한운산(韓雲山)이 근 백만 대자본으로 일 찍부터 약방 대륙당(大陸堂)을 경영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의 인줄로 벽수도 하얼빈에 들어와 각가지 직업을 거쳐 오면서 청춘기를 거의 소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주에까지 굴러온 무엇인지 ─ 돈인지 뜻인지 그것도 분간할 겨 를이 없이 엄벙해서 나날을 지내오는 것이다.

“곧 대륙당으로 가려나.”

늘 하던 습관으로 벽수가 함께 유숙하기를 권해 볼 때, 오늘의 일마는 대 답이 다르다.

“자네 신세두 그만 져야겠네. 너무 지면 갚을 도리가 없어.”

“그럼 호텔로 가겠단 말인가.”

“호텔두 이만저만한 호텔인 줄 아나. ‘모데른’에 전보로 방을 예약해 놓았네.”

“모데른 호텔 ─ 굉장은 하군.”

“음악가가 대게 모이는 데라서 여러 가지 교섭에 편리할 것두 같아서.”

서성거리고 있을때 포터 한 사람이 달려와서 늦었다고 미안해 하면서 전보 의 손님이냐고 묻는다. 호텔에서 맞으러 나온 것이었다. 트렁크를 들리고 뒤를 따라 폼을 나가자 역 앞에 자동차까지 등대하고 있다. 벽수와 함께 올 라앉았을 때 차는 마당을 굼돌아 닫기 시작한다. 전찻길과 맞서 제홍교(霽 虹橋)에 올라서니 북쪽으로 무연한 넓은 시가지가 석양에 비치어 찬란하게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송화강의 흐름이 부옇게 짐작된다. 언덕길을 내려 서서 차는 쏜살같이 프리스탄구(區)로 내닫는다.

가로수는 군데군데 물들었고 느릅나무 잎새가 우수수 흩어져 깔린 곳도 있다. 시절이 서울보다는 몇 달이나 빠른지 서울은 아직 늦여름의 무더위로 견디기 어렵던 것이 북쪽의 그 도회에서는 어느새 무릎 아래가 신선하게 느 껴진다. 전번 한여름에 왔을 때와는 또 다른 감회이다.

키타이스카야가(街)에 들어서니 감회는 한층 더하다. 좌우편에 즐비한 퇴 물이며 그 속에 왕래하는 사람들이며 ─ 거기는 완전히 구라파의 한 귀퉁이다. 외국에 온 듯한 느낌에 일마는 번번이 마음이 뛰노는 것이었다. 여름보 다 남녀의 복색들이 달라진 것이 또한 새로운 흥을 돋아준다.

“이곳에 들어서면 웬일인지 올 곳에 왔다는 느낌이 난단 말야.”

“자네의 구라파 취미야 벌써 언제 적부터 시작된 것이게.”

호텔에 이르러 가장 익숙하게 카운터에서 장부에 서명을 하고 작정된 방에 올라가 짐을 풀고 목욕을 하고 몸을 가다듬고 났을 때, 일마는 벽수에게 분 부나 하는 듯이,

“오늘부터는 내가 주인이네. 나 하는 대로 나와 함께 행동을 같이해야돼. 자, 곧 저녁을 같이 하세.”

말하면서 어깨를 떠밀듯이 함께 식당으로 들어간다.


일마는 조선 이야기를, 벽수는 만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 호텔의 저 녁식사를 즐거운 사간이었다. 그 동안의 하얼빈 음악계의 소식과 동향을 들 으면서 식사를 마쳤을 때에는 이미 밤이다. 일마에게는 한시라도 속히 목적 의 일을 시작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밤에 사람을 방문할 수도 없 는 터였고, 실상인즉 사무보다는 대륙의 첫 밤을 더 긴하게 보내고 싶은 욕 망이 컸던 것이다.

그 욕망을 벽수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로비에 나와 담배를 붙여 물 었을 때, 벽수는 동무의 마음속을 영락없이 맞춰낸다.

“그다지 이르지두 않은 것 같은데 스적스적 출장해 보려나.”

“어딜 말인가.”

“하얼빈까지 여행 온 사람이 새삼스레 어딘 무언가. 뻔한 노릇이지.”

“벌써부터 유혹인가.”

“여행에는 여행의 도덕이 있느니.”

“나두 살상은 생각하고 있는 중이네만.”

그것 보라는 듯이 벽수는 일마를 다구지게 노리면서 자리를 일어설 차비를 한다.

“번번이 자네 소식을 묻고 하는 폼이 범연한 심정은 아닌 모양이야.”

“누구 말인가.”

“누군 뭘 누군가 ── 나아자 말이지.”

“나아자가 내 소식을 묻더라.”

일마는 마음이 번쩍 뜨면서 입이 벌어진다.

“사실 하얼빈에 와서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르는 게 나아잔데 나아자가 내 말을 하더라.”

“자넨 무서운 사람이야. 남은 만주 와서 십년을 굴어두 차례지지 않는 것 을 몇 번 걸음에 잡아 버린단 말야. 그 길의 천재가 아닌가.”

“나아자는 보통 여자와는 경우가 다르다구 생각하네. 카바레에서 춤은 추 구 지낼지언정 나는 그를 누구나와 같이 생각하지는 않어.”

“그 맘이 심상치 않거든.”

“아까운 여자야.”

“외국 여자는 맘의 애정을 첫째로 쳐서 아무런 수단에도 좀해 굴하는 법 이 없는데 ─ 그렇게 수월하게 맘을 잡았을 젠 자넨 이만저만한 난군이 아 닌 모양야.”

두 사람은 호텔을 나와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낮과 달라 밤거리란 한층 찬란하게 보인다. 아스팔트 대신에 돌을 깐 포도가 발아래 도툴거리면서 이 역의 밤 정서가 그런 데서도 흘러 온다. 송화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 면서 북쪽으로 큰 거리를 내려가 바른편으로 구부러진 곳에 카바레<모스코 바>가 있다. 층층대를 내려가면 지하실 바로 홀이다.

어두컴컴한 긴 방안에 아직도 모여든 손님이 듬성하고 춤이 시작될라 말라 한 시간이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을 때 한편 식탁에서 막 식 사를 마친 나아자가 뛰어왔다. 그의 자태가 문득 눈앞에 나타난 것이 거짓 말 같으면서 일마에게는 꿈속같이 반갑다.

“웬일이세요. 언제 오셨어요.”

외국 여자치고는 그다지 야단스런 품성이 아닌 나아자에게는 어디인지 동 양사람다운 침착한 데가 보인다.

“까스파딘 한에게서 소식은 자주 들었습니다만.”

“차에서 내려서 호텔에 들었다가 나오자 여기가 첫길이요.”

“여러 날 묵으세요.”

“볼일이 있구 해서 그 일이 끝날 때까지 ─ 빠르면 빠르구 늦으면 늦구.”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묵으세요.”

“스파시이보.”

사실 일마에게는 그 간단한 한마디가 더없이 반가웠다.

나아자와 말할 때 일마는 물론 영어나 혹은 로서아어의 토막말로서 말과 감정이 지금과는 판연히 달라지는 것이었으나 그런 국제인의 자격으로 조금 도 서투른 법 없이 나아자와는 이상하게도 조화가 되었다. 몇 번 밖에는 만 나지 않는 사이연만 친밀한 구면인 듯한 느낌이 난다.

음악에 맞추어 스텝을 밟아도 익숙하다. 그날 밤 마지막 시간까지 일마는 나아자와만 겯고 일어섰다.


자정이 넘어 춤이 끝난 후 일마들은 나아자를 데리고 카바레를 나와 늦은 밤참을 먹고 ─ 지껄이고 ─ 차로 나아자를 집까지 돌려보내고 나니 밤이 깊었다. 벽수와도 헤어져 호텔로 돌아와 침대 속에 들었을 때에는 두 시를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륙의 첫날 밤은 아렇게 해서 새어 갔다.

이튿날 일마가 늦잠을 이루게 되어 의외에도 늦게 호텔을 나서게 된것은 순전히 전날 밤의 유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나아자와의 즐거운 시간을 생각할 때 물론 뉘우침이 있을 리 없었다.

사무의 첫길로 우선 철도총국을 찾았다. 하얼빈교향악단은 그곳의 소속인 까닭이다. 복지과장(福祉課長)을 만나 사연을 설명하고 승낙을 빌었을 때, 그도 이미 신문사에서의 교섭을 받은 뒤였던 까닭에 선선하게 대답한다.

“사장의 편지와 몇 군데서의 격려의 말까지를 들었습니다만 좋은 계획이 시죠. 우리도 두 손을 들어 찬성합니다. 그곳의 문화사회를 위해서도 필요 한 사업이어니와 본 교향악단 자체의 명예와 발전을 위해서도 뜻깊은 일입 니다. 외부에서의 교섭을 받지 않더래두 본 과로서두 자진해서 하고 싶던 사업입니다. 아무쪼록 이번 계획이 크게 성공되기를 빌며 곧 알선해서 뜻에 맞도록 하겠습니다.”

과장의 부드러운 태도에 일마도 만족되어서 두 사람은 문화교환의 필요에 대해서 피차의 의견을 장황하게 피력하면서 ─ 의외에도 수월하게 해결된 즐거운 회담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서 웬일인지 이번 여행이 다행하게 되어 나가는 것을 반가워하면서 과장과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고 총국을 나왔을 때 오정이 가 까웠다.

신문사 벽수에게 전화를 걸어 호텔 밖에서 오찬을 같이 하기로 작정하고 약속한 판관스(鈑舘子) 로 마차를 몰았다. 마차가 느렸던 모양이라 가게 앞 에는 벌써 벽수가 기다리고 있다. 식당과 호텔을 겸한 큰집으로 바로 아래 층은 백화점이었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벽수는 일마를 보자 뛰어 왔다.

마차에서 붙들어 내리다시피 하면서 급스러운 언조로,

“자네 놀라지 말게.”

“뭣 말인가.”

“반갑지가 않구 되려 무슨 흉보만 같어.”

“자네 채표 몇 번이더라.”

“채표가 어쨌단 말인가.”

백화점 문턱을 넘어가면서 수첩을 뒤적거릴 때 벽수는 동무의 손을 끌어 카운터 편을 향하면서,

“三七五二五[삼칠오이오]가 아닌가. 저걸 좀 보게.”

가리킨 곳의 현판에 굵게 써서 내건 속에 같은 숫자가 눈을 뺏는다.

“三七五二五[삼칠오이오]─ 저 저게 무슨 뜻인가.”

“당선이네. 자네 당선이야. 일등 당선이야.”

일마는 어안이 벙벙해서 무어가 무엇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다.

“내가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게.”

“꿈이 아니야, 생시야. 오늘이 보름 ─ 채표 당선 발표의 날이구 자네가 일등이야 ─ 만 원이야.”

“만 원!”

공교롭게도 이채 삼채 사채까지의 당선이 그달 그 집에서 나게 되어서 모 여든 사람으로 카운터 앞은 웅성웅성하다. 일마가 얼삥삥한 속에서 채표를 내들고 사무원 앞에까지 갔을 때 그도 빙그레 웃으면서 기뻐해 준다.

“반갑소이다. 웬일인지 몇 달째 일등이 번번이 우리 집에서 난단 말예요.

그 덕에 가게도 이렇게 번창해져서 이런 기쁠 데는 없습니다.”

줄레줄레 모여든 사람들도 일등을 맞추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 지 하는 듯이 일마를 이모저모 뜯어본다.

“오는 이십삼일 날 중앙은행 가서 현금 만 원을 몽탕 찾으시오. 삼부만은 수수료로 본점의 차지가 되겠습니다.

사무원의 말소리도 귀에 들리는 둥 만 둥 어지러운 눈앞에 세상도 옳게 보 이지 않는다.

오찬이고 말고 벽수와 함께 백화점을 나와 가까운 우편국을 찾았다. 누구 보다도 소설가 훈이 떠오른다. 이번 여행의 행운은 그가 선사한 꽃묶음의 덕으로만 생각되었던 것이다.

─ 만 원 당선 놀라지 말라, 하얼빈. 천일마는 전보를 치고 국을 나왔을 때 여전히 몸이 달며 눈앞이 휘둘리는 것이었다.


일마는 다는 몸이 좀체 식지 않아서 벽수와 잠시 거리를 거닐기로 했다.

“수십만 사람 중에서 뽑혀진 꼭 한 사람이 왜 하필 나였던구 ─ 왜 내게 만 원이 차례졌는구.”

아무리 생각해도 꿈속 일만 같아서 정신이 혼몽하다. 거리를 오고가는 뭇 사람이 딴 세상 속을 헤매이는 고기떼와도 같다. 뭇사람 중에서 내가 왜 한 사람으로 뽑혔단 말인구. 그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행운 은 장님이 제비뽑듯 그저 무턱대고 자기 한 사람을 집어낸 것일까.

“행운과 불행은 그럼 아무 뜻도 없는 것인가.”

일상에 무심히 지내오던 행불행의 뜻이 곰곰이 생각되면서 우주의 뜻을 고 비고비 의심해 볼 때 마음은 더욱 혼란해질 뿐이다.

“자네 만주길이 잦더니 기어코 이 일을 칠랴구 그런 모양이야.”

“뭐가 뭔질 모르겠네. 바른 정신이 없어.”

“행운이란 밖에서 보기가 찬란한 것이지 실상 그 속에 들어서면 아무치두 않은 것일까.”

벽수도 혼란한 일마의 심중을 추측할 수 있었다.

“꽉 차니까 되려 빈 것 같어. 찼는지 비었는지 분간을 못하겠어.”

“비이면 빈 줄을 알어두 차면 찬 줄을 모른단 말인가.”

“찬 건 비인 것과 일반인 모양이네.”

옆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하나하나가 다 각각 행운과 불행 속에 사무쳐 있으련만 그들이 본질적으로 그다지 구별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행길 양편 으로 즐비한 집들이나 그 사이로 빈번하게 내왕하는 마차나 흔들리는 가로 수의 나뭇잎이나 ─ 그 모두가 오늘 일마가 행운을 얻었다고 해서 어제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가령 여기 오는 이 거지와 나와 무에 다를 게 있겠나. 내가 장할 것두 없구 그가 천할 것두 없구 ─ 내 맘과 그의 맘의 구별이 대체 얼굴 어느 구 석에 나타나 있단 말인가.”

스치는 거지에게 돈 한푼을 쥐어 주고 지내 놓으니 그를 보낸 뒤는 감감하 면서 세상은 도로 그 턱, 아무 변화도 없다. 세상일의 조화는 이상하고 신 비로운 뜻이 있는 뜻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다. 같으면서 ─ 굼성 거리는 일마의 마음속에는 아무 해결도 터득도 없는 것이었다.

“생각할 것 없네. 행운은 역시 행운이요, 만 원은 만 원이야. 그저 그뿐 이지. 그밖에 무슨 뜻이 있겠나.”

벽수는 다시 현실주의로 돌아오면서 생각하는 일마를 꿈속에서 깨워 내려 는 듯이 목소리를 높인다.

“너무 생각하다 되려 화보리. 좋은 일이 있을 땐 천연스럽게 해야지, 변 색했다간 화를 부르는 때가 있어. 실상인즉 채표 당선에 따르는 여러 가지 희비극이 있다네.”

하면서 동무의 주의를 일깨울 겸 몇 가지의 실례를 든다.

“─ 일등 당선이란 소식에 이층에서 기뻐하다가 창밖으로 떨어진 사람이 있었구.”

“─ 드난으로 벌이하던 사람인데 맞췄다는 말에 그 자리로 맘이 실성해져 서 일터에두 하숙에두 들리지 않구 그 길로 차를 타고 고향엘 간다구 정신 없이 내뺐다는 얘기.”

“─ 한 집에서는 남편이 출타한 새 당선이 되니까 아내가 만 원을 채가지 구 도망을 쳤다든가, 남편이 돌아와 수색원을 내구 소송을 걸어서 이겼다든 지 졌다든지....”

“그만두게나. 불길한 소리 자꾸 할 게 있나.”

일마가 막으니까 벽수는 뜻을 얻은 듯이,

“그러게 말이네. 자네 괜히 곰상스레 궁리할 게 없어. 생각하든 간에 행 운은 행운이구 만 원은 만 원이야.”

“궁리야 누가 궁린가. 엄청나서 뭐가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어서 만 원은 내 이름으로 고스란히 찾아주리. 자넨 외지 사람이라구 말 썽되기 쉬워. 내 이름이 안전해.”

큰 고패나 경험하고 난 뒤같이 두 사람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면서 비로 소 점심 생각도 났다.


식사를 하고 났을 때, 일마에게는 바른 정신이 들면서 만 원의 뜻과 값이 알려진다.

몸이 뿌듯이 차고 마음이 대견한 것은 식사를 하고 난 탓이 아니라 역시 만 원의 탓이었다. 만 원이 주는 만족감이었다.

식탁에 널려진 음식 접시가 하찮으면서도 귀해 보이고 한 잔 차가 속을 흐 볏이 눅여 준다.

─ 나는 지금 누구보다도 배부르다 외에 별로 소원이 없다.

세상을 차지한 왕이라도 지금 일마 이상으로 만족스럽지는 못할 법하다.

어느 누구를 데려와도 일마가 그 앞에 굽힐 사람은 없을 법하다. 세상에는 나 혼자노라 ─ 하는 생각조차 든다.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 마련되어 있 는 듯싶다. 식탁도 음식도 거리도 사람도 ─ 하늘과 땅까지도 ─자기 한 사 람을 위해 장만되어 있는 듯싶다 ─ 바른 정신이 아니다. 아직도 꿈속을 헤 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 원으로 대체 무얼 하려나.”

다음에 오는 문제였다. 일마가 감동에 잠겨서 그것만으로 더 생각이 없을 때, 벽수가 이것을 뙤어주었다. 일마보다는 벽수가 역시 현실에는 눈이 한 결 밝은 셈이었다.

“글쎄, 뭘 할꾸.”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 뭘 하구 뭘 하느니 보다두 당분간 거저 막연한 만족감에 잠겨 있어 보려네.”

“생각만으로 만족한단 말인가. 자넨 낭만주의자야. 수전노는 금덩어리를 가진 것만으로 기뻐한다데만 금은 역시 쓰자는 것이거든. 소비의 즐거운 예 상이 없이는 만 원두 뜻없는 거야.”

어디 용도를 좀 생각해 “ 보게나. 내 주제에 그까짓 만 원을 가지구 사회 사업을 할 텐가, 뭘 할 텐가. 어떻게 쓰면 적당할지 생각해 보게나.”

“쓸 도리가 없어 걱정이겠나.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현대인에게 쥐어진 만 원 ─ 이라는 게 한없이 즐거운 제목이 아닌가.”

하면서 벽수는 제 스스로 즐거운 공상에 잠기는 듯 눈을 가슴츠레 뜨면서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르는 자줏빛 담배 연기를 바라본다.

“…… 가난한 시민에게 만 원으로 할 일이 많어.”

“첫째 무엇을 하겠나.”

“…… 자그마한 문화주택을 지어야 하잖겠나.”

“집 한 채 지으면 뒤에 무에 남게. 집만 덩그렇게 해놓으면 먹을 것이 제 물에 생긴다든가.”

“집이 거북하면 자동차 한 대두 좋구.”

“개 발에 편자지, 차는 해 뭣하게.”

“여행을 해두 호화판으로 할 수 있을 터.”

“그건 첨부터 소원이네만.”

“사랑인들 만 원으로 못살 줄 아나.”

“사랑을 돈으로 ─ 돈으로 사랑을 산다. 자네다운 말이야.”

“마음으로 사랑을 얻는 줄 아나. 어수룩한 현대인두.”

“그야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면 돈 아니라 무언 못 바치겠나만, 더구나 가 난하구 외로운 사람에게라면......”

하다가 일마는 문득 나아자를 생각했다. 가난하고 외로운 나아자가 머리위 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가령 나아자가 원한다면 만원을 몽탕 그에게 바쳐두 좋겠네.”

“……흠, 나아자 ─ 그가 그렇게까지 자네 맘을 잡았던가.”

만주리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몇 해 전에 하얼빈에다가 어머니마저 묻어 버 린 외로운 나아자였다. 백모의 집에 한 몸을 부치고, 카바레에서 일급 일 원에도 못 차는 고용살이를 하는 신세였다. 가난하고 외롭다면 일마의 신변 에서 나아자만큼 가여운 여자는 없다. 그러므로 더욱 그 애처로운 자태가 일마의 마음을 끄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나아자에게다 모든 것을 바치게나. 그두 자네에겐 범연한 심정이 아닌 모양인데.”

“글쎄 말이네.”

일마는 새로운 뜻에 얼굴을 빛내면서 먼 산을 바라본다.

다음 일마가 하얼빈서 ─ 채표에 당선된 다음날 ─ 신경의 거리에서도 구 석구석에 채표의 화제가 삐지 않았다.

역에서 일마에게 굴욕의 작별을 당하고 분연히 거리로 들어갔던 단영은 오 늘도 한가하게 행길을 거닐고 있다. 화려한 치장은 뭇사람 중에서도 눈에 띠었고 가게 창에 비치는 초초한 모양이 자신에게도 만족을 주었다.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옆에는 한 사람의 기사가 동반해 있다, 비록 일마 에게는 괄세를 받았을망정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걱정되는 단영은 아니었다.

“이렇게 데리고 나와 보니 당신 모양이 꼴불견이구료. 서울서 십여 년을 지내면서 그렇게두 떼를 못 벗었어요? 그 맵시며, 걷는 모양이며가 흡사 시 골뜨기니.”

핀잔을 받는 명예의 기사는 시골뜨기는커녕 서울서도 한다하는 인물, 반도 영화사 사장 김명도(金明道)였다. 영화사 업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그였만 단영에게 걸리면 손안의 노리개다. 단영의 전보를 받고 어제 차로 서울서 뛰어온 것이었다. 단영은 일마에게 욕을 당한 화풀이로 그를 부른 것이었 고, 명도 편으로 보면 항상 심중에 단영이 없지 않던 터에 좋아라 하고 뛰 어온 것이다.

자기에게는 원래부터 영화에 몇 번이나 출연을 시켜 주면서 그 무엇을 은 근히 바라는 것이나 헛물을 켤 뿐 아직도 뜻을 못 얻은 채 그의 신변을 뱅 뱅 도는 놈팽이의 한 사람이었다. 만나면 보기 좋게 휘둘리우고 항상 엄청 난 낭비를 할 뿐이나 그래도 잊지 못하는 마음에 그의 분부라면 한마디 거 역 없이 쫓게 된다.

그렇게 차리고 나선 두 사람이 흡사 공작과 삽살개같이 밖에는 안 보이는 것은 명도의 모양이 지나치게 검박해서 보다도 단영의 맵시가 뛰어나게 사 치한 까닭이었다. 명도의 모양은 아무리 보아도 ─ 여배우와 사장의 대조가 아니라 귀부인의 뒤를 따르는 머슴의 꼴로밖에는 어리우지 않았다.

“단영과 같이만 있으면야 시골뜨기구, 무어구 내가 계관하는 줄 아나. 내 뜻만 받아준다면 난 노예라두 될 테니.”

“당신은 계관하지 않는대두 내가 창피하니 말이죠 …… 아이구 그 꼴 못 보겠네. 괜히 불렀나부다.”

“그럼 어떡허란 말인구. 이렇게 오므리구 안종다리 걸음을 걸으란 말인구.”

“안종다리구 뭐구 간에 허리를 좀 펴구 유쾌하게 걸어요. 만주 걸음이 처 음이란 말요. 그렇게 잔뜩 주럽이 들었게.”

“허리를 펴구 유쾌하게 ─ 자, 이렇게 말이지.”

“어서 아무렇게나 걸어도 속상해.”

교사 앞에 생도같이 더욱 주럽이 들어 어기죽거리는 꼴은 단영이 아니래도 사실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횡하니 앞서 내빼는 단영을 따르려고 가제나 어기죽거리는 선비의 걸음이 풀무같이 휘뚱거리던 판에 행길을 옆으로 구불려다가 문득 가가 앞에 게시 판이 눈에 띠인 까닭에 그것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섰는 동안에 단영의 그림 자는 훨씬 앞으로 멀어졌다.

게시는 채표 발표의 광고였다. 채표는 명도에게도 관심사의 하나였다. 주 머니 수첩 속에서 뒤적뒤적 찾아낸 쪽지가 역시 한 장의 채표였다. 지난달 만주 오는 동무에게 부탁해 사둔 것이다. 채표의 번호와 게시의 숫자와를 눈이 뚫어져라 하고 곰곰이 대조해 보는 그의 모양을 멀리서 발을 돌리고 바라보는 단영의 눈에는 잘름한 절구통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생원이 또 무엇에 한눈을 팔구 섰누.”

하는 수 없이 되돌아와서 어께너머로 채표를 바라보면서,

“아니 그래 등에나 들었단 말요?”

물으니까, 명도는 빙그레 웃으며,

“들긴 뭐가 들겠수. 몇 십만 속에서 내게 왜 하필 차려질려구.”

“그러믄 그렇지, 아무나 되는 줄 아우. 행운이란 드무니까 행운인 것이지 그렇게 흔하다면야 행운될 것 있수.”

“올 법두 하건만 안 온단 말야.”

“잔소리 말구 어서 가요.”

단영은 이번에는 명도를 앞세우고 집오리나 몰듯 혀를 차는 것이었다.

삽살개의 실망하는 양이란 보기 딱한 것이었다.

“끝의 숫자만 맞았더라면 일등이 되는 것을 꼭 셋이 부족해서 떨러지다니.”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면서도 명도는 그 잘름한 체대에 잔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참봉만 아니더라면 천하일색일 것을 ─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자꾸해 뭘 해요.”

“아깝단 말야, 아무리 생각해두.”

“팔자에 없다구 생각하면 그만 아니오. 욕심도 작작 피워요. 그런 행운 더러 남 주는 것두 좋지 뭘 그러우.”

“팔자에 없다는 게 섭섭하거든.”

한편으로는 가 령 단영 ─ 같은 축에 걸리면 물쓰듯 낭비를 하면서도 기실 물욕에 들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인색하고 추잡한 명도였다. 거의 그 의 근성이었다. 그 근성이 오늘의 그의 지위를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단영의 앞이었으니 망정이지 그 혼자 숨어서 오늘의 낙자의 결과를 알았더 라면 얼마나 더 실망하고 애석해 했을 것인가.

“내가 못 가지는 행운을 대체 어느 녀석이 차지했을까. 그 녀석은 나보다 는 운수가 웃질이란 말인가. 녀석 낯짝이 보구 싶어.”

“어떤 녀석인지는 알게 있수. 다 제 팔자지 남의 험구는 왜 한단 말요.”

“녀석두 눈이 둘이구 코가 하나구 입이 하나겠지.”

바로 일마가 그들이 지금 말하는 행운자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근줄을 안다면 얼마나 놀람이 컸을까. 그러나 모르고 말하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한 노릇이다. 일마인 줄을 모르는 까닭에 명도의 공상은 자유롭고 즐거웠다.

바로 몇 시간 후에 그것을 알게 될 것도 물론 모른다. 미래라는 것은 짧고 길든 간에 그것을 모름으로써 값있고 행복스런 것이다.

“채표 얘긴 그만두구 어서 하얼빈 들어갈 생각이나 해요.”

이렇게 제의하는 단영의 심중에는 일마의 그림자가 뚜렷이 솟아 있었으나 그것은 물론 채표와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었다. 채표로 인해서 일마를 생 각해 낸 것도 아니요, 그가 채표와 관련이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다만 우연히 떠오른 것이 일마였고 일마를 생각하면 하얼빈행이 한시가 바쁘게 마음을 달뜨게 했다.

“그래 기어이 하얼빈으로 가잔 말인가. 어제 들어온 사람을 하루도 못 묵 게 하구 또 들어가잔 말야.”

“이까짓 신경에 무슨 재미로 오래 있어요. 놀기로야 하얼빈 만한 데가 있 는 줄 아우.”

“그야 단영이 생각이지. 내게두 그런 줄 아나.”

“또 한 가지 실토를 하면요.”

단영은 여기서 일마의 일건을 귀띔해 놓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당장에서 문득 만나 사이가 거북해지는 것보다는 예비지식을 주어 마음의 준비를 하 게 함이 명도를 얼마간이라도 생각하는 도리일 듯싶었던 것이다.

“─ 하얼빈에는 지금 일마가 와 있다나요.”

“뭐, 일마가.”

명도는 확실히 주춤하는 표정이었다.

“신경에는 내리지 않구 며칠 전 바로 하얼빈으로 들어갔어요. 왜 아시겠 지만 그 교향악단 일로 말예요.”

그러니까 일마에게 “ 총을 맞구 나를 불러들였단 말이지. 흠, 내 꼴이 뭐 란 말인구.”

단영이 일마에게 혼을 뽑히우고 있다는 것과 그런 까닭에 일마와 자기 사 이가 어색한 것을 명도는 평소부터 느껴 오던 중이다. 이제 돌연히 소식을 듣고 불만의 낯빛이었으나, 그러나 일마와의 사이가 어떤 것이든지간에 단 영에게 대한 자기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도 강했다. 어색한 공기쯤은 그다지 탓할 것이 못되었다.

“꼴이 뭐긴 뭐예요. 서로 원순가요 뭐. 사내양반들이 의젓이 만나면 그만 아니예요.”

“사람을 잘은 이용한다. 허수아비같이 질질 끌구 다니면서 실속은 딴 데 로 채린단 말이지.”

반드시 항의가 아닌 것이요, 어리석은 지아비의 측은한 하소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