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공무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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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에 하얼빈행은 제물에 결정되고 말았다. 결정을 하지 않고야 견디어날 단영이 아니었고, 속심으로는 어쨌든지 간에 단영의 비위를 맞춰 주지 않고는 배겨날 명도가 아니었다. 단영이 반드시 이긴 것도 아니요, 명도가 반드시 진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와 처지로서는 당연한 결말 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게 언제나 내가 당신을 존경하는 배 아니오.”

단영은 만족된 마음에 명도를 후려본다. 사실 속으로는 감사의 뜻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존경 ― 그게 그래 존경하는 거야. 알량한 존경두 다 봤다.”

명도는 아이같이 찌뿌득해서 대단히 못마땅하다.

“그야 항상 내게 아쉬운 때가 많으니까 당신을 이용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 당신이 만약 진저리가 나게 싫다면야 내가 이용인들 하겠수. 수많은 사 내 속에서 왜 하필 당신을 추려낸단 말요. 그렇지 않겠수. 생각해 봐요.”

“요 능청맞은 것 봐라. 혼자만 제 속을 채리면서두 납신납신 입으로만 발 러맞추려구.”

“아니, 그래 내가 당신을 존경 안한 게 뭐구 못마땅한 게 뭐란 말요.”

“어서 존경이구 뭐구 다 그만두구, 어느 때가지나 내 맘을 조롱은 말아.

나두 사내자식이지 죽을 때까지 돌부처로만 지낼 순 없으니.”

이 명도의 은근한 마음의 요구는 이제 새삼스럽게 시작된 것이 아니다. 단 영을 만난 당초부터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 언제까지나 꾸준히 마음속을 차 지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굴욕을 참으면서도 단영 앞에서 넋 을 잃고 있는 그의 꼴이 아니던가.

그러나 단영은 이 말을 들을 때 언제나 몸에 소름이 치며 구역이 났다. 화 를 내며 짜증으로 쏘아붙이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조롱은 누가 했단 말요. 내가 뭘 조롱했단말요…… 하얼빈이구 뭐구 싫 으면 그만이지 싫은 소린 왜 자꾸 한단 말요.”

“아 아니, 누 누가 싫은 소릴 했게.”

이번에는 명도가 한수 꿀리게 되어 뜨끔하면서 어쩔줄을 모른다.

“ ― 하얼빈을 누가 싫다구 그랬게. 가구 말구 여부가 있나. 밤차로 떠나 자니깐 그래.”

빌 듯이나 내섬기면서 단영의 속을 풀기에 쩔쩔매는 것이다.

찻집을 나와서 걸으면서도 명도는 이 수 저 수를 써가며 그 어여쁜 투정꾼 의 마음을 누그리기에 무한한 애를 쓴다.

“겨울이 되기 전에 또 하나 작품을 사작해 보려는데 ― 이번두 물론 단영 이 주연이 돼 줘야겠어. 여배우라고 이름 붙는 건 많어두 어디 하나 쓸만한 게 있어야지. 역시 단영이 총중에서는 제일 빛난단 말야.”

“그런 비행기 이젠 안타요. 영화에 출연은 한다구 하더래두 비행기는 작 작 태워요.”

“출연을 해주겠나. 고마워라 그럼 이번에 나가면 곧 배역을 작정하기로 할 테니 함께 나가 주렷다.”

“역시 맘에 들면 하구 그렇지 않으면 싫어요. 그까짓 달갑지 않은 영화에 자꾸 출연을 해선 뭣하게요. 영화니 뭐니 다 시들해요.”

“그렇게 영화계를 얕잡아 볼 게 아니야. 지금은 이 꼴이래두 좀 있어보지. 얼마나 웅성웅성하구 넉넉해질까.”

밤이 되기까지에 명도에게는 한 가지 일과가 있었다. 댄스교습소를 찾아 속성으로 사교댄스를 익히는 일이었다, 육중한 체대에 스텝을 밞을 줄 모르 는 그다. 만주에 들어올 때마다 필요를 느껴 뒷골목 교습소를 가만히 찾는 것이었으나 아직도 온전히 터득하지 못했다. 정성이 대단해서 하루를 묵든 이틀을 묵든 간에 반드시 교습소를 찾는다.

이날도 물론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하루의 과정이다. 단영을 앞세우고 단골인 교습소를 찾아 거의 반날 동안 체조나 하는 듯이 터벅터벅 방을 돌 면서 젊은 교사를 괴롭히게 되었다.

창밖이 어슬어슬할 때, 하얼빈행 차시간을 생각하고 단영과 함께 역을 향 하는 것이었다.

지단가 에 있는 (地段街) 대륙당은 근처에서는 으뜸가는 약방이었다. 큰 빌 딩의 한몫을 차지해서 바로 거리로 향했고, 약방 외에 안으로는 몇 간의 살 림방까지 차려놓고 큰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벽수는 숙부 한운산의 방 옆 에 조그만 한 간을 차지하고 내 집같이 흉허물없이 기거하고 있다. 신문사 에 나가는 이외의 시간은 대개 그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일마는 걸음이 잦았던 까닭에 자연 운산과도 면목이 있었다. 하얼빈 온 지 여러 날에 아직도 그를 찾지 못했던 것을 미안히 여기며 인사 겸 그날 낮쯤 해서 대륙당을 들렀다. 벽수도 그런 줄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외근을 맡 아보는 까닭에 사에서의 일이 불규칙해서 건 듯 보면 대단히 한가한 듯도 한다.

그러나 정말 한가한 것은 일마였다. 맡은 일을 며칠 동안에 부랴부랴 끝내 버렸던 것이다. 철도국 복지과장을 또 한번 만났었고, 음악학원 원장을 찾 았고, 모데른 호텔의 지배인과 의론했고 ― 악단의 교섭은 그것으로 끝났다. 이제는 벌써 악단의 출발 날짜만을 가다리면 그만으로 되었다. 오는 날 시월이면 그들도 틈을 타 연주를 떠나게 된다는 대답이다. 그들을 서울서 맞이하게 될 날까지의 시간은 일마에게는 완전히 자유롭다. 서울로 속히 돌 아가든 하얼빈에 어느 때까지나 더 머무르든 임의이다. 그런 마음의 한가에 서 오는 안심이 그를 한층 즐겁게 했다, 요새의 하루하루가 말할 수 없이 편하다. 그런 유유한 여행은 처음인 듯싶었다.

한운산은 잘름하고 오돌진 풍격이 그 어디인지 벽수와 비슷하면서 그 보다 는 한층 윗길이다. 말하자면 벽수를 한 테두리 더 크게 해놓은 것이 운산이다. 뚱뚱하면서도 탄탄하고 눈에 빛이 흐른 것이라든지, 살결이 팽팽하게 거스른 것이라든지가 벌판을 굴면서 어느 모를 비집든지 간에 제 마련은 하 고야 말 위인이다. 수십 년을 두고 모진 풍상에 겨른 탓일까. 흰 머리카락 이 반백으로 머리를 물들였고, 깊은 주름살에는 고난의 반생이 역력히 적혀 있으나 지금에는 벌써 모든 것이 족한 이 대륙의 ‘성공자’ 는 그리울 것 이 없는 유유한 자태이다. 대륙과 함께 살고 대륙과 함께 볶이우고 대륙과 함께 일어난 그의 배포에는 호락호락 범하기 어렵고 그 무엇에나 수월하게 넘어감 직하지 않은 호담스럽고 벅찬 데가 있었다.

“우리 아저씨가 대체 뭘 해서 오늘의 성공을 얻은 줄 아나.”

언제인가 벽수가 일마에게 숙부의 과거를 귀띔해준 적이 있었다.

“성공이라는 게 돈을 모았다는 말일 텐데 ― 무엇으로 모았단 말인가. 설 마 약탈이야 했겠나.”

알구 보면 약탈이나 “ 다름없다네 ― 남의 것을 뺏지는 않았을 뿐이지 바 르지 않은 수단임은 일반이야.”

“바르거나 바르지 않거나 약을 팔아 모았겠지 다른 별것을 했겠나.”

“옳지, 그 약이야 ― 약은 약이래두 여기 늘어논 이런 약들은 아니야. 숨 어서 거래하는 약이라네. 중국이나 만주 백성들을 등골부터 녹여내는 약이 라네. 그 거래가 크단 말야.”

“음.”

일마도 벽수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위험하진 않은가.”

“왜 위험하지 않겠나. 필사적이지. 그러니까 하는 보람도 있구 수두 크 단 말이야. 만주에 들어와 소위 성공했다는 조선 사람의 대부분은 아마도 다 그 같은 위험한 길을 걸은 사람들 일이라, 하긴 열린 길이라군 그것밖엔 없지만.”

“명예롭단 말인가, 불명예란 말인가.”

“명예롭다니 ― 지금 만주서는 조선 사람만 보면 그 약을 연상하게 됐다네. 조선 사람과 약과 ― 이런 불명예로울 데가 또 있을 줄 아나. 무얼하든 간에 그런 인상밖엔 안 준단 말야 …… 지금은 주제가 바르지만 알구 보면 우리 숙부두 과거가 어둡다네.”

숙부의 과거에 대해 확실히 불만인 벽수의 어조였다. 곯아 죽는 한이 있더 라도 ‘바른 것’ 에 대한 원 ― 이것이 벽수의 일상의 지향이었다.

이런 예비지식이 있었던 까닭에 일마에게는 한운산의 자태가 심상하게 보이 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대단한 행운을 얻었다니 듣기에 반갑소이다.”

운산은 일마를 찬찬히 바라본다. 그런 행운이 심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만주가 원래 만만치 않은 곳인데 외지에서 온 사람에게 행운이 떨어진다 는 건 거짓말 같어. 앞으로 큰 수가 트이려나부우.”

“행운이 눈이 멀어 제게 떨어진 거죠. 성한 정신으로야 저 같은 걸 골러 내겠습니까.”

“요새 사람에게 요새 돈으로 만 원이 대단치 않은 것일지 몰라두 수로는 큰 수야 …… 내가 만주 들어온 지두 어언 이십년이 넘는데, 처음에야 수중 에 단돈 십 원이 있었겠소. 요행 오늘의 이 결과를 보기는 했으나 그간 적 수공권으로 고생이라니 그런 고생은 없었소. 굶주리다시피 한 때두 있었구, 사선두 여러 번을 넘었었구, 그저 모두 천명이거니만 생각하죠.”

“아무렴요. 오죽하셨겠습니까.”

“요새는 시대가 좋아서 가만히 앉았어두 행운이 제발로 걸어 들어오지만 지난 반생을 생각하면 소름이 치구 등골에 땀이 난단 말야.”

“아저씨 같은 생업을 하시면야 그걸 각오하세야죠.”

조카 벽수가 뒤를 채서 말을 넣으니까,

“만주서야 아무걸 하든 편한 노릇이 있다드냐. 다 모험이구 다 고생이지.”

변명하는 듯도 하고 항의하는 듯도 하다.

“어수룩한 곳이긴 해. 뭘 하든 살아갈 순 있으니.”

“요새 사람은 편하단다. 아무 고생을 한들 옛사람을 당하겠니.”

다시 일마를 상대로 하면서,

“만 원을 가지면 나 같으면 아무거나 장사를 시작하련만 요새 사람이야 웬 그런 생각을 하겠나.”

“장사보다두 먼저 살아야 한답니다.”

또 벽수가 일마를 대신해서 말하다가,

“그런 요량이니까 넌 아직두 그 나이에 그 꼴이지 ― 현대청년은 뜻이 박 약해.”

하고 핀잔을 맞는다.

“뜻이 박약하지 않아 길이 다르답니다. 옛날과 지금과는 할 일이 다르거 든요.”

“일은 달러두 뜻은 예나 지금이나 같거든. 아무때래두 이상은 있는 게구 이상이 크면 뜻두 굳거든 ― 내게야 무슨 이상이 있었겠니만, 요새 청년에 겐 그게 대체로 희박하단 말야.”

약장사로서 성공한 운산에게서 이상론을 듣게 된 것이 일마에게는 낯간지 러운 일이기는 했으나 이상이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듣고 보니 가슴이 오래 간만에 쯔릿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현대인에게는 이상이 희박하다 ― 는 것이 그 유의 독단이나 헛소리만 같 지는 않았다. 가령 일마 자신의 마음속을 지금 당장 물어본대도 무엇이 이 상이며 그것이 얼마나 굳은지를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을 성싶지는 않았다.

만 원으로 말미암아 아닌 때 격에 없는 이상을 그 자리에서 반성하게 된 것 을 뼈저리게 생각하며 시선을 창밖 행길로 보냈다.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그 어지러운 거리에 대체 무슨 이상이 있는고 ― 하고 일마의 시선의 초점 은 흐리멍덩했다.

“그럼 현대인의 이상은 무엇이어야겠습니까.”

“그야 내가 아나. 현대청년이 제일 잘 알 일이지.”

숙질의 문답을 옆 귀로 들으면서 일마가 여전히 창밖을 내다볼 때였다.

아까부터 밖에서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또 한번 문 앞으로 나타나면서 가게 안을 흘금흘금 살피는 것이다.

공교롭게 일마의 시선과 마주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가게 앞으로 선뜻 나 서면서 문을 열었다. 유리문이 안으로 밀리면서 그가 들어와 섰을 때에야 비로소 가게 안 사람들도 그에게 주의가 쏠렸다.

그 오전의 손님은 외국인 소녀였다. 십칠팔 세를 잡아들었을까. 비교적 조 그만 체격에 얼굴빛도 창백하다.

시선이 한 몸으로 쏠란 까닭에 소녀는 적지 아니 겸연한 모양이었다.

무죽거리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더니 카운터 쪽으로 쑤욱 들어가 점원 앞에 이른다. 그 뒷모습을 찬찬히 보면서 일마는 그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 듯이 느낀다.

점원과 귓속말로 한참이나 수군거리더니 점원은 자기 혼자로는 처단하기 어려운 듯 주인 운산에게로 와서 눈짓하며 무엇인지 귀띔한다. 운산은 천연 스런 표정으로 승낙의 뜻을 표하는 모양이다. 점원은 소녀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조심스럽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디서 본듯한 여잔데.”

벽수는 일마에게 가는 목소리로 지껄이다가,

“― 옳지, 댄서구나. 알구 보니 카바레<승가리>의 댄서야. 낮에 보니까 밤에 보는 얼굴과는 소양지판인데.”

“댄서치군 몹시 어리구나.”

“가엾다. 밤 등불 밑에서는 그런 줄 몰랐더니 신색이 말 아닌데. 중독이 폭 들었어. 아까운 청춘이야.”

자탄하는 듯이 중얼거리면서 일마의 귀에 입을 댄다.

“뭘 사러 온 줄 아나.”

“약 사러 왔겠지 뭘 사러 왔겠나.”

“그래 약이야 ― 바로 약을 사러 왔어.”

범연히 들었다가 일마는 문득 반성하면서,

“음, 그것 말인가.”

비로소 뜻을 알아맞혔다.

“모양을 보게나. 여간 중독자는 아니야.”

“저런 어린 소녀가 ― 별세상을 다 봤다.”

“내 언젠가두 말하지 않든가. 만주서는 누구나 조선사람을 보면 그걸 연 상한다구 조선 사람이면 . 다 그걸 감춰 가지구 있는 줄 생각한다네. 여긴 약방이니까 물론이지만 약방 아닌 다른 곳에서두 ― 아마 거리에서 우리를 봐두 다 그런 줄 알리. 조선사람의 약방이라면 재 없이 이렇게 은근히 찾아 든단 말야.”

“그러다가……”

“물론 금물이지. 약방이라구 간판을 크게 걸구 너점부레하게 늘어논게 많 아두 ― 실상은 아직두 그 거래가 크다네. 위험한 짓이지.”

“저 어린 소녀가 그렇다니 ― 저 몸이 점점 멸망해 간단 말인가, 그래.”

“만주는 복잡한 구렁이야. 넓기도 하지만 속속들이루 무슨 세상이 숨어 있는지 헤아릴 수 있어야지.”

“복잡한 구렁 ― 그러니까 또 재미있지 않은가.”

소중한 문제를 그런 자리에서 토의할 바도 아니어서 일마는 농으로 결론을 지어버리고는 궁금한 듯 다시 소녀를 바라본다.

안으로 들어갔던 점원이 푸른 종이에 싼 것을 들고 나와 소녀 앞에 내놓는다.

소녀가 말없이 돈을 내서 카운터에서 회계하는 동안에 운산은 그 비밀의 매매의 한 장면을 보이게 된 것을 떳떳이는 생각하지 못하면서 그 무슨 한 마디로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일마의 편을 본다. 그런 운산의 괴로운 심중 을 알아챈 일마는, 도리어 외면하면서 벽수와 함께 자리를 일어설 듯이 했다.

그렇게 엉거주춤하고 섰는 일마의 앞을 가로채면서 먼저 지난 것이 소녀였 다 약 싸개를 들고 고개를 숙인 채 휙 스치는 소녀의 자태를 일마는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단지 창백하다고 보았던 얼굴은 가까이 보니 누르꾸무레했다. 탄력이 없고 멀건 것이 흡사 밀덩이 같다. 귓불이며 목덜미며 손이며 모두가 누르다. 여 윈 몸이 약간 떨리면서 앞을 스치는 것이 가여운 나뭇잎의 인상밖에는 주지 않는다 ― 소녀의 육체는 파멸의 문을 들어선지 이미 오랜 모양이었다.

벽수와 함께 뒤를 따라 가게를 나가니 소녀는 비틀걸음을 쳐서 저편 포도 위에 기다리고 섰는 동무에게로 간다. 소녀를 맞으려고 이쪽을 돌아선 여자 ― 그는 틀림없는 나아자가 아니던가.


“웬일이요. 나아자가 아니오?”

일마가 가까이 가서 소리를 치니까 나아자도 의외라는 듯이 눈을 뜨면서 겸연해 하는 기색을 보인다.

의외의 곳에서 만나 “ 뵙겠습니다. 오늘은 에미랴의 동무를 해서 나섰죠.”

에미랴라는 이름을 듣고 소녀를 다시 보니 소녀도 일마를 그제서야 주의한다.

“에미랴를 나두 지금 망간 봤습니다만.”

나아자가 의아해하는 까닭에,

“바로 한군의 약방이니까요.”

일마가 설명해 들린다.

“그런가요.”

나아자는 더욱 겸연해 하는 눈치다.

“에미랴는 제 친한 동문데 병이 쇠해서 걱정이예요.”

가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걷기 시작한다.

“나두 지금 속으로 걱정해 봤습니다만.”

같은 방향으로들 걸음이 향하게 된 까닭에 벽수는 신문사 일을 걱정해서 그 자리로 작별을 하고 일마만이 나아자들과 한 길이 되었다.

일마의 앞에서 나아자는 마음이 저윽이 편편해진 듯 간단히 에미랴를 소개 하고 아까보다는 한결 스스럽지 않은 태도이다. 동무를 얻어 기쁜 듯도 한 눈치다. 나아자가 일마와 짝이 되니 에미랴는 한 옆으로 떨어지기가 일쑤였다.

“에미랴의 아파트로 가는 길인데, 동행해 주시겠어요.”

“무관하다면 나야 얼마든지 동행하죠. 일두 없이 번둥번둥하는 판인데.”

“잘됐어요. 단둘이 걸으려니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기가 거북해 못 견댔는데.”

물론 에미랴의 온전치 못한 모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견 병색에 폭 씌 인 가엾은 그의 자태는 사실 밤 등불 아래에서나 볼 것이지 한낮의 거리에 서 뭇시선 속에 내놓기는 참혹한 것이었다. 나아자의 건강한 낯빛과는 비길 바가 아니었다.

“나두 그렇지만 에미랴두 고아랍니다. 내겐 그래두 아주머니 집이나 있 지, 에미랴는 의지가지없이 혼자 아파트에서 지내요. 부모를 어디서 잃어버 렸는지두 모르구 해삼위에서 어릴 때 이리로 들어와선 외롭게 자라났어요.”

괴로운 처지에서는 꺼릴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는 모양이다. 실오리라도 있으면 잡으려고 할 판인 바다 속에서 나아자에게는 일마가 지금 큰 동무 맞잡이는 되었다.

카바레 주인에게 특청을 “ 해서 밤에 몇 시간씩 홀에서 벌기로 하구 낮에 는 대개 아파트에 누워서 날을 보내구 있어요. 동무나 웬 있나요. 내가 손 자라는 데까지는 돌보아주나 정성이 못 미치는 때가 많아요. 고생 속에서 배운 것이 왜 하필 그것인지 지금은 벌써 약 독에 젖어 그 힘을 빌지 않구 는 한시두 견디지 못하는 형편이예요. 저주의 인생이죠. 딱해서 못 보겠어요.”

“가여운 일이외다 ― 나두 오늘 처음으로 저런 모양을 보구 그런 속을 알 았는데 ― 만주의 속은 겹겹으로 깊구 무서운 곳이라는 생각이 불현듯이 드 는구료.”

“무서운 곳이죠. 불행과 죄악의 구렁이죠. 더구나 이 하얼빈에는 얼마나 어두운 곳이 많은지 헤아리기 어려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만주의 인상이 어제와는 판이하게 달라졌소. 즐거운 곳만이 아니란 말요. 맘이 이렇게 울적하구료.”

지껄이다가 일마는 문득 말이 끊어지고 발이 멈추어졌다. 나아자는 어느결 엔지 옆을 돌아서 쓰러지려는 에미랴를 붙드는 것이었다. 일마가 나아자와 만 정신없이 지껄이는 동안에 허전허전 몸을 떨던 에미랴는 기어코 그 자리 에서 기맥을 잃은 모양이었다.

일마는 황급히 자동차를 불러 세우고 에미랴를 부축해 앉혔다. 나아자가 아파트의 이름을 대니 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뒷골목 조그만 아파트의 이층 한구석 ― 거기에 에미랴의 방이 있었다.

일마와 나아자는 소녀를 거의 맞들다시피 해서 침대에 올려 눕히고는 무엇 보다도 먼저 사가지고 온 약을 풀었다.

그 자리에서 에미랴에게 베풀 응급치료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약의 효과를 일각이라도 속히 그의 육체 속에 시험하는 것 ― 그 일뿐이었다. 그 것을 갈망해서 그는 쓰러진 것이다. 한 모금의 물 대신 몇 그램의 약즙을 피부속에 넣으면 족한 것이다.

효과는 빨랐다. 서랍 속에서 주사기를 찾아내서 일정한 분량을 넣고 피부 속에 부으니 몇 분이 안가 에미랴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면서 눈이 벙긋이 뜨였다. 쓰러지고 지지고 한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같이 멀끔하게 정신을 차 리고 일마들을 바라보고는 부끄러운 듯이 다시 눈을 감으면서 요를 뒤집어 썼다. 나아자는 자주 그 변을 당하고 시중을 들어난 솜씨라 그런지 모든 절 차가 대단히 익숙했다. 약의 분량을 나누는 것이라든지, 주사기를 쓰는 격 식이라든지, 그 후에 모든 것을 치우는 솜씨라든지가 금시 그 자리에서 터 득한 것이 아니고 오래 해낸 익은 것이었다. 솜씨가 익을 뿐 아니라 그 알 뜰한 마음씨에는 어머니나 누나로서의 자애가 넘쳤다. 동무로서의 우정만으 로는 바라기 어려울 정도의 친절한 시중이었다. 나아자가 없으면 에미랴는 얼마나 더욱 외롭고 쓸쓸할까.

한참 들볶은 후이라 일마는 비로소 나아자의 마음씨의 감동하며 방안을 살 펴보았다. 좁은 단칸방에 의롱그릇과 살림그릇이 어수선하게 구석구석 포개 져 있고, 침대 아래와 옆에는 트렁크짝이 여럿이다. 그 트렁크짝들이 웬일 인지 안정하지 못한 달뜬 생활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탁자 위에는 찻그릇 이 널려졌고, 태우던 담배 끄트머리가 무수히 흩어져 있다. 모든 것이 그 불결한 속에서 외로운 소녀의 생활을 얼마나 거친 것이었을까.

창밖은 또 바로 이웃 빌딩이 막아서서 어둡고 빌딩 모퉁이로 한 조각의 하 늘이 ― 마치 무지개의 한 조각같이 진귀한 그 한 조각이 빠끔히 방안을 엿 볼 뿐이다. 그 하늘과 맞선 벽 위에 한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아직도 젋 은 여자의 사진이다. 온화한 웃음을 띠인 그 한 장만이 침침한 방안의 공기 를 얼마간 부드럽혀 주고 밝혀주는 듯하다.

“에미랴의 어머니랍니다.”

물끄러미 처다보노라니 나아자가 이렇게 설명한다.

“어쩌다 가지구 온 봇속에 그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어서 언제나 둘 없는 동무가 돼주죠. 어머니가 저기서 저렇게 내려다보는 까닭에 에미랴는 파곤 하면 제집같이 이 알량한 아파트를 찾아든답니다.”

어머니라면 나아자에게도 어머니가 없음을 일마는 안다. 남의 어머니를 말 함이 곧 자기의 어머니를 말함인 듯 나아자는 외면하고서 얕은 목소리로 지 껄이다가 일마에게 대답이 없음을 깨닫고 문득 돌아서더니 미소를 띠이려고 애쓴다.

“별소리를 다하고 별것을 다 뵈였네요.”

하면서 주섬주섬 정돈하던 손을 멈춘다.

“별것은 왜 별것예요. 오늘 난 뜻밖에 이렇게 남의 방에 와서 여러 가지 를 본 것을 결코 불행하다군 생각지 않는데요. 어떻게 생각하면 나아자의 덕으로 오늘 에미랴를 알게 된 것이 다행인지두 모르죠. 사람은 행복보다두 불행 속에서 느끼구 얻는 것이 더 많으니까 말요.”

“그만 나가시죠. 잠이 곤히 든 모양인데 깨난 때 또 만나기로 하구.”

나아자는 에미랴의 잠든 양을 보고 안심한 듯이 저 한 몸을 수습한다.

일마는 자리를 일어서 에미랴의 잠든 얼굴에 인사를 보내고 방문을 열었다.

“호텔로 갈까요.”

따라나온 나아자에게 말하고 층계를 나란히 서서 내려갈 때 두 사람의 시 선은 새삼스럽게 마주치는 것이었다.

의외의 에미랴의 일건으로 말미암아 일마와 나아자의 사이는 그날 한층 가 까워진 듯도 했다. 에미랴의 불행을 목격하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두 사람 의 마음은 가까이 교통했고 한데 합쳤다. 불행은 참으로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사랑을 낳아 주는 결과가 되었다.

두 사람의 하는 일은 말없는 속에서 찬성되고 합의되어서 자연스럽게 행동 이 합치되었다. 거리를 걷는 것도 쉬는 것도 식사를 하는 것도 조금도 거역 없이 일치되었다.

나아자의 밤 출근까지의 반날도 물론 의외 없이 두 사람의 것이었다. 호텔 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그날은 마침 낮 흥행이 있었던 까닭에 같은 호텔 안의 극장으로 들어갔다. 영화 주간이었다. 「파리의 뒷골목」이라는 제목 이 눈을 끌었던 까닭에 일마는 마음이 댕겼고 나아자도 동의한 것이었다.

소규모의 조그만 홀 안에는 어느덧 사람이 꽉 찼고 영화도 퍽이나 진전되 어 있었다. 어둠 속을 더듬고 맨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점점 눈이 밝아짐 을 따라 자리의 사람들이 대강 짐작되었다. 대부분이 외국 사람인데다가 거 개가 남녀의 쌍이었다. 그 무수한 쌍 속에서 일마와 나아자도 하나의 쌍임 에는 틀림없다. 부부이든 애인끼리이든 다른 쌍들의 사이를 각각 헤아릴 수 없듯이 일마와 나아자의 쌍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역시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부부인지 애인인지 ― 사실 일마 자신에게도 자기들의 사이가 대체 무엇이며 무엇이라고 했으면 좋을는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영화 속에는 어수선한 파리의 뒷골목이 나와 그 한 폭 그림 속에서 일마는 또 한번 이국정서를 맛보게 되었다. 야트막한 지붕들이 나오고, 아파트가 나오고, 술집이 나오고, 장거리가 나오고, 음악과 춤이 나오면서 ― 지나쳐 화려하지 않은 조촐한 그 모든 생활의 규모가 그대로 바로 하얼빈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이었다. 그만큼 일마에게는 한층 친밀한 감동이 솟으면서 화면 에 흠뻑 정신을 뺏기게 되었다.

가난한 파리의 소녀는 유학 온 외국 청년을 어느결엔지 마음에 두게 되었다. 빨랫집 소녀라 하숙에 빨래를 나르는 동안에 피차에 서로 심중에 배게 된 것이다. 청년은 아라비아 사람이었다. 그림을 배우러 파리로 온 것이 아 직 말도 서투른 참으로 서먹서먹한 사람의 에트랑제였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까닭에 처음에는 소녀와의 사이에 표정의 거래밖에는 없었다. 소녀가 웃으면 청년도 따라 웃는 정도의 표현이 있을 뿐이었다. 청 년은 그림을 공부하는 한편 어학에 무척 힘을 쓴다. 웬만큼 토막말을 지껄 이게 되었을 때 소녀에게, ― 나를 정말 생각하우?

더듬어 물으니까 소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럼으로.

― 말두 통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 이 눈으로 보구, 이 맘으로 생각하면 그만이거든요. 말이 반드시 그렇 게 필요한가요, 뭐.

― 나라두 다르구 피두 다른데 어떻게 생각한단 말요.

― 나라는 달러두 이 눈은 같거든요. 검은자위와 흰자위와 다를 게 뭐 있 나요.

― 그래두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것만큼은 나를 못 생각하리다.

― 어디 누가 더 많이 사랑하나 볼까요.

소녀는 뛰어와 청년의 팔에 몸을 맡기면서 사랑을 확적히 고백했다.

청년은 소녀의 집을 찾게 되고 함께 거리를 걷게도 되었다. 차를 마시러도 가고 무도회에도 동행하고 소녀의 얼굴을 캔버스 위에 그리기도 했다. 소녀 의 집안이 가난한 것을 알고 돈을 가져다 주나 소녀는 그것을 굳게 사절한다.

굳은 언약을 맺었을 때 공교롭게도 청년은 아버지의 불행의 소식을 듣고 고국으로 뛰어간다, 재산을 상속받고 집안일을 정리해 놓고 다시 파리로 나 오기로 약속한 것이나 해가 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고국에 약혼자가 있었 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무슨 변이 생긴 것일까, 편지조차 끊어졌다. 그 러나 소녀는 어느 때까지나 그를 기다린다.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사람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 편의 동화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비현실적인 듯이 보이면서도 기실 현실적인 색채가 장면 장면에 배어서 자연스런 감동 속에 잠기게 했다. 더 욱이 일마의 마음을 댕긴 것은 아라비아 청년과 파리 소녀와의 사랑이 조금 도 어색하지 않게 순순히 전개되는 것이었다. 소녀의 상대자가 파리의 청년 이 아니고 아라비아의 청년인 까닭에 일마의 흥미를 곱절붙든 것이 사실이 었다.

― 이 눈으로 보고 이 맘으로 생각하면 그만이 아니예요.

소녀의 범연한 사랑의 말이 귀한 것으로 귓속에 살아났다. 말과 피를 넘은 사랑 ― 아무데나 흔하게 있을 성싶지 않게 여겨졌다.

고국으로 간 아라비아 청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은 채 영화는 끝났다. 슬픔 에 잠긴 소녀의 얼굴을 가슴속에 새겨 놓고 불이 켜졌다.

나아자도 일마와 같은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긴장이 풀리며 애틋해하는 어조였다.

“소녀가 가엾지 않아요.”

“얘기가 너무 일찍 끝났구료 .좀더 진전이 있었더면.”

“남자가 돌아왔으면 좋았을걸요.”

“하긴 서로 사랑을 얻었으니까 작자가 할말은 다한 셈이지만.”

나아자는 그래도 부족을 느끼듯이,

“청년이 가혹해요. 고국에 무슨일이 있든지 돌아올 것이지 기다리는 소녀 를 버려둘 법이 있나요.”

일마를 돌아보면서,

“동양 사람들은 대체로 저렇게 매정하다죠. 책임감이 엷구. 잘못됐으면 용서하셔요.”

“그야 사람 나름이겠죠. 동양 사람이라구 다 그럴 리야 있나요.”

“청년이 유산을 가지구 파리루 나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고국으로 애인을 부르든지 해서 행복스런 일생을 보내게 돼야 뜻있는 게지. 그렇지 않구야 싱겁지 않아요.”

나아자의 의견을 일마는 외국사람다운 생각이라고 느끼면서,

“그러나 가즉해야 한 편의 영화밖엔 더 되우. 영화와 현실은 또 다를테니깐.”

“글쎄요. 현실은 영화와 달러야지 이 영화 같다면야 무슨 재미예요.”

나아자의 그런 의견과 희망이 일마에게는 반가운 것이었다. 영화에 대한 항의가 곧 현실에 대한 희망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다음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 두 사람은 영화실을 나오면서 같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날은 우연한 영화가 두 사람에게 뜻밖에 마음의 제목을 준 셈 이 되었다. 에미랴의 일건으로 말미암아 단시간에 결속이 된 두마음을 다시 그 영화가 같은 방향으로 인도한 것이었다.

“……국경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각이오. 야박스런 세상에서.”

“그래요. 나두 그렇게 생각해요.”

“사랑으로밖엔 국경을 물리칠 수가 있소? ― 아라비아 청년이 파리 소녀 보다 못할 것두 없구 파리 소녀가 아라비아 청년보다 날 것두 없구 두 사람 에겐 피차가 똑같은 구별 없는 사람이 아니겠소.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 또 있겠소.”

제 눈에두 사람은 “ 다 같이 일반으로 뵈여요. 구라파 사람이나, 동양 사 람이나, 개인개인 다 제나름이지 전체로 낫구 못한 게 없는 것 같아요.”

“각 사람이 편견을 버리구 그렇게 너그러운 생각을 가진다면 세상은 얼마 나 아름다워지겠수.”

꿈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일마였으나 즐거운 감동에 아이같이 마음이 단순 해지는 것이었다.

나아자 역시 일마와 같은 감동으로 마음과 생각이 맞으면서 보조까지 일치 된다. 아라비아 청년이 파리 소녀에게 느끼듯 일마는 오늘 나아자와의 거리 를 극히 가까운 것으로 느꼈다.

거리의 밤이 열렸을 때, 일마는<모스크바>에 있었다. 마수거리자 가장 단 골손님이 되었다.

호텔로 영화관으로 다시 거리로 해서 저녁때까지를 같이 보내다가 밤 준비 로 잠깐 집에 들리게 된 나아자와 헤어지자 일찌거니 카바레를 찾았다.

옆에는 그림자같이 벽수가 붙어 있다. 그 역 사를 나오자 집에 들렀던 길 로 즉시 일마의 뒤를 좇은 것이었다.

“오늘 어디 어디를 갔었나. 죄다 대게나.”

반날 동안 갈라져 있었던 것이 대단히 궁금한 듯이 벽수는 일마를 족쳐 댄다.

“호텔로 영환관으로 찻집으로 ― 그저 평범한 순례지 별다른 신통한수야 있겠나.”

“발의 순례는 평범해두 맘의 순례는 그렇지 않으렷다. 필시 파란곡절이 많었을 테지.”

“다른 날보다 좀 다른 감격을 느끼긴 했네만.”

“나아자의 정미가 마음속에 흠뻑 배든가.”

어조를 갈아가면서 혼자 설렌다.

“사랑에는 역시 일종의 숙명적인 동기라는 것이 있는 모양인데, 아무리 장구한 세월을 끌어두 안될 사랑은 안되구, 반대로 짧은 시간에두 성립될 사랑은 성립되구야 만단 말야. 피차에 순간적으로 결정되는 그 무엇이 있는 모양이야 ― 자네들의 경우를 난 그것이라구 생각하는데 그렇게 빠르게 맘 이 화할 데는 없어.”

“사랑이구 뭐구 벌써 그런 경지까지 간 줄 아나. 사랑은 역시 좀체 수월 하게 작정되는 것이 아니야.”

“건 괜히 구라파적 풍습에 지내지 않는 거구 ― 사랑은 첫 순간부터 결정 되는 것이네 그 . 순간적 결정이 없이는 바른 사랑이라군 할 수 없어.”

“파리의 뒷골목이란 영화를 봤는데, 아라비아 청년과 파리 여자와의 사랑 을 그린 것으로 근래에 없는 감흥을 받았어.”

“실감에서 오는 감흥이란 말이지.”

“암시를 받은 건 사실이네. 내가 나아자나 그 속에서 제멋대로 제 요량의 뜻을 발견한 셈이야 ― 지금까지 이렇게 유쾌한 건 그 때문인지두 모르네.”

“나아자를 놓치 말구 꽉 붙들게나. 그리구 책임을 가져야 해 ― 그만한 여자가 아마두 드무리. 내 눈에 어김이 없어. 나아자를 붙들므로 말미암아 자넨 채표의 행운 이상의 행복을 잡았는지 모르네. 지내 보면 알리만.“ 벽수는 얼마간 제 장단에 취하면서 변설스러워졌다.

“만주에는 두 가지 종류의 여자가 있다네. 둘 다 대륙의 꽃은 꽃이래두 품질이 아주 다르단 말야. 자네 기차로 오면서 벌판에 지천으로 핀 해바라 기를 보지 않았나. 그 해바라기 같은 여자와 또 하나는 그늘에 핀 양귀비라 고 할까. 그 두 가지 여자가 있어. 해바라기는 해를 보구 힘차게 솟으려구 하구 그늘의 양귀비는 버둥거릴수록에 솟아오르긴커녕 제물에 썩어만 간단 말이네. 아침에 약국에서 에미랴를 보지 않았나. 에미랴가 바로 그 양귀비 라네. 불쌍하지만 하는 수 없단 말야. 그리구 나아자 ― 이건 해바라기야.

에미랴와 오십보백보인 듯하나 실상은 대단히 차이야. 햇빛만 보면 얼마든 지 솟아날 여자야. 자네가 그 해바라기의 나아자의 햇빛이 되란 말이네.”

“에미랴라면 오늘 에미랴의 아파트까지 갔었네만 ─ 여러가지 우울한걸 알 았네.”

“우울할 뿐이겠나. 에미랴 같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 줄 아나. 다 대륙의 죄야. 내가 가끔가다 만주에 싫증이 나는 건 그런 양귀비를 허다하게 보게 되는 까닭이야 ― 제발 자넨 해바라기만을 보게나. 나아자에게 햇빛이 되게나.”

두 사람이 지껄이고 있는 동안에 나아자가 나타났다.

망간 집에서 와서 옷을 바꾸어 입은 모양이었다. 낮과는 또 달라 우렷이 빛나는 얼굴이었다. 벽수가 말한 해바라기란 말이 자꾸만 떠오르면서 일마 는 벌써 해바라기를 보는 마음으로 나아자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손님들이 모여들어 홀 안이 차지고 음악도 시작되었다.

그다지 큰 카바레가 아니건만 수십 명이 모여드니 홀 안의 분위기가 웅성 웅성하고 수선스러 보인다. 일마들의 한패쯤은 그 수선스런 속에서는 어느 구석에 끼었는지 헤아릴 수 조차 없다. 반이 외국 사람이면 나머지 반이 이 곳 사람이다 외국 사람도 . 얼굴이 검붉은 사람으로부터 허여 멀쑥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각각 국적을 달리들 하고 있으나 이곳 사람들도 단순하지는 않다. 모두가 반드시 만주 사람이 아님은 가운데 일마 같은 축이 끼어 있음으 로도 넉넉히 추측할 수 있다. 수다한 국적의 수다한 사람들이 한데 휩쓸려 설레는 것이 반드시 피차에 친밀하게 만은 보이지 않는 것이며 그 어디인지 서먹서먹하고 어울리지 않는 기색이 떠돈다.

음악에 따라 한 패 두 패씩 슬금슬금 겯고들 일어선다. 그렇게 해서 춤 속 에 휩쓸려들기 들은 하나 각 사람들의 얼굴이며 체격이며는 흡사 물과 기름 을 혼합한 듯이 결코 한데 화하는 법 없이 따로들 빙빙 나도는 것이다.

음악과 춤에 술이 섞인다. 술을 어느 정도로들 마신 후에 비로소 도연해져 서 솟는 흥취에 춤도 어울리는 것이었으나, 그 음악과 춤과 술이 한데 합쳐 서 밤의 흥을 북돋는 속에서도 역시 잡동사니의 분위기에서 오는 일종의 부 조화를 일마는 한결같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나아자와 나와.

부조화의 느낌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 제목이었다.

― 나아자와 나는 대체 잘 어울리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 눈에 멋쩍게 보 이지는 않을까 하는 반성이 날카롭게 가슴을 치밀었다. 지금까지 주의도 안 하고 완전히 잊었던 이런 문제가 다른 사람들의 설레고 있는 것을 보노라니 유연히 치밀어 오는 것이었다.

“자네와는 진종일을 보냈으니까 내게 춤 한번쯤은 사양하게나.”

벽수가 재빠르게 나아자의 손을 잡고 일어섰고 나아자 역시 거역할 수 없 어 일마를 빙그레 보면서 춤을 시작했던 까닭에 일마는 하는 수없이 한참이 나 의자에 그대로 앉았다가 마침 옆을 지나던 낯설은 댄서 한 사람을 보고 따라 일어섰다. 쾌히 승낙하는 바람에 맞잡고 춤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노라 니 딴서도 차차 일마를 여겨보는 눈치였다.

“이름이 무어요?”

물으니까,

“안나”

시원스럽게 대답하고는 뒤미쳐서 빙글빙글 웃으면서,

“나아자하구 그렇죠?”

엉뚱한 말을 묻는다.

“어떻게 아우.”

“그와만 자꾸 춤추구 ― ”

“그러구.”

낮에 “ 거리에서 동행해 다니는걸 봤어요. 정답드구먼요.”

의외의 여자에게서 의외의 말을 듣게 된 것이 얼마간 자랑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일마는,

“그래 어울리기나 합디까. 두 사람의 꼴이 어설프지나 않습디까.”

하면서 겸연쩍어하니까,

“어설프긴 왜요. 아주 어울려요. 이상적인 한 쌍이예요.”

마침 나아자와 벽수의 짝이 눈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안나는,

“저 짝보다는 훨씬 웃질예요.잘 어울려요.”

일마도 벽수의 모양을 눈앞에 보면서,

“그럴까.”

의심스런 어조이면서도 한편 만족의 뜻이기도 했다.

“그까짓 외양만 어울리면 뭣해요. 맘이 맞아야 첫째죠.”

“글쎄.”

일마는 안나의 말을 맹랑하다고 여기면서 멀어진 나아자의 자태를 찾 으려고 두리번거렸다.

일마의 두리번거리는 양을 보고,

“잘 고르셨죠.”

안나는 소근거린다.

“…………”

“나아자 말예요.”

“잘 고르다니.”

은근한 안나의 말 눈치에 사실 일마는 점점 귀가 띄었다.

“나아자를 잘 고르시구 말구요.”

“어떻게 하는 소리요.”

“잘 고르셨단 말이죠.”

“못 고르면 어떻게 하구.”

“못 고르는 사람이 많으니 하는 소리예요.”

“생선인가, 고르게.”

일마의 농에 안나는 웃으면서,

“첫째, 잘 생겼으니까 잘 고른 거구.”

“그리구.”

“둘째, 맘이 착하구.”

“셋째.”

“당신하구 잘 어울리구.”

“또.”

“나아자의 형편에 당신 같은 이가 필요하게 됐구.”

“형편이라니.”

“지금 아주머니 집에 붙어 있는데 여러 가지로 불편한 모양인지 집을 나 왔으면 하구 있는 판이거든요.”

“아주머니 얘기는 나두 조금 알긴 하는데 그렇게 절박하단 말요?”

“다 전엔 훌륭하던 집안들이래서 집 규모가 지금두 여간 까다롭지 않은 모양예요. 백부는 제정시대엔 육군 소장이었었다나요. 아주머니 수우라는 나아자의 돌아간 어머니의 형인데, 어머니 편 존속의 집안이니깐 아버지의 편과는 달라 나아자에겐 더 어렵거든요. 수우라보다두 백부의 앞이 어려워 서 있기 싫다구 입버릇같이 말해 오는 중이에요 ― 그 판에 당신이 나타났 단 말이죠.”

“급할 때 나타난 나룻배란 말이지.”

“그 나룻배가 대단히 소중하거든요. 당신 같은 나룻배라면야 누가 원하지 않겠어요.”

“내가 뭘……”

“나아자는 행복스러워요. 누구보다두 다행해요.”

“충충대면 누가 좋아한다든가.”

“충충대긴 누가요. 바른말이죠.”

안나의 말에 일마는 기쁜지 겸연한지 스스로도 분간하지 못하면서 마음속 이 그 무엇으로 가득 차 갔다.

“나아자와만 추시지 말구, 저하구두 이렇게 더러 추어 주세요.”

음악이 끝났을 때, 안나는 일마에게서 손을 떼면서 자리로 갔다.

일마가 눈으로 나아자를 찾으면서 미처 자기들 자리에 와 앉기도 전에 계 속해 음악이 울렸다. 탱고였다. 부드러운 리듬에 몸의 흥을 돋우고 있을 때 이도 일마를 찾던 나아자가 앞에 나타났다. 말없는 속에서 두 사람은 자연 스럽게 맞잡고 나섰다. 두 몸의 율동이 무한한 흥을 자아낸다. 음악이 몸 구석구석을 간지르는 것도 같다.

“지금 안나에게서 별소릴 다 들었는데.”

일마가 꺼내는 것을 나아자는 곧 받아서,

“좀 수다스런 아이니까요.”

“나아자를 아주 추어 올리던데.”

“친한 편이랍니다. 다른 아이들보다는.”

“우리들이 어울린다든가, 오늘 거리에서두 보았다구.”

어울리지 “ 않으면 어떻게 하게요. 저두 그렇게 생각해요.”

“나아자가 잘 생기구 착하다구 하면서 피차에 선택을 잘했다구 나다분히 늘어놓는단 말요.”

그대로를 그렇게 전하는 일마도 바른 정신은 아니었다. 춤과 자랑에 은연 중 취한 모양이었다.

“아이두 별소릴 다했네. 원 선택을 잘했든 못했든 무슨 아랑곳이게. 샘을 놀자는 셈인가.”

“불쾌할 것이야 있겠수 …… 선택을 잘한 건 잘한 것이지, 그 누가 온들 지금 우리의 사이를 비집을 수 있겠수……”

지껄이다 일마는 문득 말을 멈추고 몸이 움츳해졌다. 나아자의 어깨너머로 의외의 것을 본 까닭이다. 바로 두 사람 곁에서 휘뚱거리고 서툴게 춤추는 남녀 ― 확실히 단영들이 아니었던가. 단영과 또 누구인고 하고 일마는 그 들을 노리는 것이었다.

단영의 앞에서 휘뚤거리는 것은 틀림없는 명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흉 내내는 원숭이의 서투른 꼴들이 요절할 것으로 보였다.

“저것들이 웬일이야.”

아닌 때 아닌 곳에서 그 두 사람을 만난 것이 의외였다. 물론 반갑다느니 보다는 성가신 생각이 불현듯이 들었다.

“귀찮은 것들.”

피하려고 나아자를 이끌고 춤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나 고집스럽게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린다. 단영의 짓인 모양이었다. 휘뚱거리고 웃으면서 명도의 어께너머로 쉴새없이 일마를 겨누는 것이다.

“놀랐지, 용 용 ― ”

말뚱거리는 눈이 이렇게 지껄이는 것 같다.

“암만 그래두 놀라지 않는다.”

하는 표정을 일마가 해보이면,

“그 태도가 그게 놀란 게 아니구 무어야.”

하고 단영은 대답하는 눈치다.

“왜 초라니같이 앞에서 간들거리니.”

“아무렇든 내 뜻이지 무슨 계관이게.”

“귀찮으니까 말이지.”

“당신 귀찮은걸 내가 알게 있수.”

“꼴불견이다. 녀석하구 짝이 되니 아주 맞춤인데.”

“맞춤이든 아니든 무슨 아랑곳이게.”

“그래두 냉큼 내 앞을 못 물러선다 ― 이것 봐라. 또 눈앞을 어른거린다.”

“그렇게 만만히 숙어들 줄 알구. 어느 때까지나 괴롭혀 보구야 말걸 좀.”

“어디 생각대로 해보려무나, 실컷.”

“그렇게 살금살금 피하면 또 이러거든.”

눈과 눈이 회화를 건네면서 단영은 끝까지 고집스럽게 일마를 쫓는다.

일마가 바른편으로 돌면 왼편으로 나타나고, 왼편으로 돌면 바른편으로 나 타나서 쉴새없이 아른거리면서 그의 시선을 가로채기에 급급해 하는 것이었다. 일마는 곁눈으로 그의 자태를 무시해 버리려고 애쓰는 것이나 무시로 신경을 건드려 오는데는 배겨나는 재주 없었다.

“저걸 어떻게 하누. 저 귀찮은 걸 밟아 버리지두 못하구.”

하필 그 시간의 음악은 유별스럽게 지리하기도 하다. 웬만큼 끝내 버렸으 면 하건만 좀체 끝나지 않는다. 춤이고 무엇이고 일마는 정신없이 몸이 휘 둘릴 뿐이었다.

단영을 무시하려면 나아자를 보는 수밖에는 없어서 시선을 나아자의 등으 로 옮기면서 그를 더욱 다정하게 품안에 안았다.

나아자의 목덜미에 바로 그 얼굴이 닿고 그의 머리카락이 특유한 향기를 가져온다. 그 향기 속에 일마는 흠뻑 잠기면서 눈앞에 모든 것은 나아자요 세상에는 나아자밖에는 없다고 느끼려고 애썼다. 품에 꽃묶음이나 안은 듯 그 살뜰한 자세를 지니고 춤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사람들의 가으로만 빙빙 돌았다.

그런 일마들의 태도가 단영을 한층 자극했음이 사실이었다. 단영의 표정이 새침해지면서 명도를 소같이 잡아끄는 눈치였다.

일마가 여전히 나아자의 향기에 잠기면서 눈을 반쯤 감은 채 밴드의 곁을 돌 때였다. 별안간 와 부딪치는 힘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왈컥 밀리면서 몸이 쓰러질 지경이었다. 자세가 풀리면서 춤은 이지러져 버렸다.

“이게 무어야.”

나아자는 질색하면서 노염이 컸다.

단영들이 달려와서 몸을 던진 것이었다. 나아자의 노염에 단영은 샐쭉해 하면서 대답도 없이 다시 명도의 손을 잡았다.

“괜히들 오금이 근질근질하나부다.”

일마가 소리를 지를 때 두 사람은 벌써 춤을 시작한 것이었다.

“근질근질하면 어쩔 테야, 뭐.”

단영이 종알거리는 것을 보고 나아자는,

“대체 무어예요.”

아니꼬운 듯이 묻는다.

“여배우라나. 사내는 영화회사 사장이구. 저래 뵈여두 조선서는 다 명물 들이라구 뽐들을 내는 판이지.”

“알량한 여배우 다 봤다. 사장 꼴 하구.”

긴 시간이요, 긴 춤이었다.

음악이 멈추었을 때, 일마들은 춤에 진저리가 난 듯 급스럽게 좌석에 가 앉았다.

벽수가 앉을 자리에 명도와 단영이 재빠르게 와서 앉았다.

긴치 않은 그들을 지릅떠보지도 않고 있을 때 면도는 제 발이 저려서,

“실례였다면 용서하시오.”

춤출 때 부딪쳐 온 일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원체 춤이 서툴러서 옆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구료.”

단영이 뒤를 받아서 납신거린다.

“춤추는 사람끼리야 좀 부딪쳐 왔다구 그게 그렇게 큰 허물인가요 뭐. 서 로 부딪치구 웃구 하는 것이 춤의 도덕이 아니예요?”

“그런 도덕 어디서 배웠소.”

일마가 핀잔을 주니까,

“압다, 아직두 노여 하세요.”

무안한 김에 얼굴을 붉히면서.

“어서 소개나 해주세요.”

하고 딴소리를 꺼낸다.

나아자를 자기들에게 소개하라는 말이었다.

“아주 정다운 모양이죠.”

비꼬는 그 어조가 귀에 거슬려서 일마는,

“웬 또 참견이요.”

소리를 지른다.

“항구마다 여자라더니 가는 곳마다 여자인 모양이군요. 그래서 만주길이 잦은 것을 깜짝 모르구 있었죠. 봐하니 벌써 여간 자별한 사이가 아닌 모양 인데 샌님같이 새침데기면서두 그 길에 들어선 이만저만한 선수는 아닌 모 양이죠. 나 같은 건 말할 것두 없겠지만 어디 지금 머리 속에 남 미려의 이 름이 있기나 할까요.”

“걱정두 팔자다.”

“걱정되구 말구요. 왜 걱정이 안되겠어요.”

“시끄럽다니깐.”

일마의 목소리가 컸던 까닭에 무슨 말들을 주고받는지 영문을 모르고 있던 나아자가 궁금해서 비로소 일마와만 통하는 말로 불유쾌하다는 듯이,

“남에게 실례를 해놓구두 무슨 긴 말들예요.”

“서푼어치 여배우가 해뚱해뚱하는 거지.”

“결국 어쩌잔 것에요.”

“일들이 없으니까 조선서 놀러들 들어와선 괜히 야단들이야.”

마침 벽수가 와서 자기 자리가 점령된 것을 보고,

“웬 손님들인가.”

하고 얼삥삥해서 서니까 명도는 구면인 것처럼 자기소개를 늘어놓는다.

“반도영화사 김명도 ― 이 편은 전속여배우 최단영 ― 무료하길래 서울 서 멀리 놀러 왔습니다. 외지에서 이렇게 동포를 만나니 더욱 반갑소이다.

재미가 어떠시오들……”

하면서 손까지 내미는 것을 벽수는 웬일인지 ‘동포’ 란 말이 불현듯이 불 쾌하게 여겨져서 악수는커녕 다시 그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탁자를 물러섰다.

“덜된 것.”

‘동포’라는 말이 왜 그다지도 서먹서먹한지 아무 진정도 내용도 없는 간 사스런 잡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반드시 벽수의 심경이 틀어진 까닭 도 아닌 듯 ― 확실히 그 자리에서 그 한마디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말이 었던 듯하다.

음악이 울려 벽수가 자리를 떠나려 할 때 나아자도 그 자리의 공기를 못 이겨 일어서면서 자연 벽수와 춤을 시작하게 되었다.

혼자 남게 된 일마는 불끈하는 심경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쩌자구 남을 이렇게 귀찮게만 군단 말요.”

“어쩌자군 뭘 어쩌자구요. 내 발로 내 걸어 오구 내 눈으로 내 보는데 무 슨 걱정예요. 그런 자유까지 꺾잔 말예요.”

명도가 미안한 듯 한마디 설명한다.

“나는 영문두 모르고 전보를 받구 신경까지 왔더니 또 예까지 끌려오게 돼 이 야단이구료.”

“내 뒤를 자꾸만 쫓는 목적이 대체 무어란 말요.”

“글쎄 내 발과 내 눈으로 내 임의대로 한다니까요. 목적은 무슨 목적이예요.”

단영은 어디까지나 새침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