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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공무한/7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서울도 초가을을 잡아들었다고는 해도 아직도 햇볕이 따끈하고 거리는 전 반적으로 여름빛이 짙다. 북쪽과는 거의 두어 달 장간의 차이가 있었다.

거리에서도 특히 그날 동양무역상회의 회의실같이 무더운 곳은 없을 법했다.

젊은 사장 유만해는 옆자리에 전무취체역 이동렬을 앉히고 탁자 맞은 편에 상무취체역 최성수를 앉히고는 빠지지 돋아나는 이마의 땀을 미처 훔칠 겨 를도 없이 두 사람과 의론이 분분했다. 이마에 돋는 땀쯤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생의 중대한 고비에 부딪쳐 있는 것이다 ── 오르고 떨어지는 참으 로 중대한 운명의 고비였다.

“이 전무, 무 무슨 소리요. 내혼을 뽑잔 말이지 그게 성한 소릴 수야 있수.”

만해는 황당해서 목소리기 떨리나 이동렬은 칼날같이 차고 침착하다.

“놀라시는 건 놀라시는 거구 사실은 사실이죠. 저두 말하긴 참으로 딱합 니다만 사실은 사실대로 보고하는 수밖엔요.”

젊은 사장을 놀래기가 차마 하기 어려운 노릇이었으나 일이 벌써 어쩌는 수 없는 고비에 이른 것이었다.

“사장 일이 누구 일이겠습니까. 다 우리 일인데. 사실 서울 오는 차 속에 서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통곡을 해두 부족할 지경으로 속이 달았습니다.”

“……그래 정말 절망이랍디까. 무슨 좋은 도리래두……”

“기사의 말밖엔 믿을 것이 없는데 벌써 몇 사람의 기사가 몇 차례나 돌보 구 왔습니까. 이번이 세 번째가 아닙니까. 다 말이 똑같으니 그를 믿을 수 밖엔요.”

“기사의 말이 똑같다구 세 사람이 다 절망이라……”

“처음 기사의 오산이었었죠. 오산이 아니라 계책이었었죠. 계책에 넘어간 셈이예요 ── 석 달이 못 가 그렇게 쉽게 광맥이 끊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백만 원에 샀던 홍천금광이 일을 계속한지 석 달이 차지 못해서 실패의 증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사와 함께 현지로 조사 출장을 떠났던 전무취체역 이동렬은 여러 날 동안의 수고를 마치고 오늘 아침에야 돌아왔다. 마음을 죄이면서 궁금해 기다리던 만해의 앞에 가지고 온 보고가 그 자 리의 그 선언이었다 만해는 . 빛을 잃고 간담이 서늘해서 이마의 땀을 훔칠 처지가 아니었다. 땀은 솟아 목덜미를 흘러 가슴속으로 줄줄 새어드는 것이 었다.

운명을 당하는 사람은 퍼렇게 질린 낯에 흐르는 땀을 모르는 지경이요, 남 의 운명을 목도하는 사람은 이 또한 약간 질린 낯에 동하지 않는 엄숙하고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이동렬이나 최성수는 엄숙한 낯에 얼마간 노염을 머 금은 듯도 하다. 큰일 앞에서는 사람은 이유 없이 노염을 머금는 모양이다.

“광맥두 거의 거의 봉창이 날 뿐 아니라 지금까지 조금씩 파내던 돌속에 는 금의 함유량두 극히 적답니다. 대체로 화강암 줄긴데 봄에두 허여스름한 꼬락서니가 금이 묻혀 있을 성싶지는 않더군요. 기사들두 풀이 없어 하구 광부들도 맥이 풀려 는적는적하는 품이 망쪼는 든 지 오래예요.”

이동렬은 까마잡잡한 얼굴에 단단한 눈매로 힘줄 하나 동하지 않는다.

“두메래서 웬 길이나 온전한가. 트럭으로 며칠을 흔들리구 났더니 몸까지 노곤해요. 오면서 생각해두 꼭 원수의 곳만 같아요. 기사들두 그 낙망과 불 평이란……“ 한마다 한마디의 보고가 만해를 더욱 푸르게 질리게 하고 땀을 비 쏟듯 흘리게 할 뿐이었다. 이유가 없지 않다. 홍천금광은 만해의 전 재산을 들이 다시피 한 생명선이었던 것이다.

백만 원에 광산을 샀을 뿐이 아니라 종래의 기계장치와 설비를 더욱 충실 하게 개량함에 또 백만 원이 들었다. 그 이백만 원을 대느라고 그는 가진 재산 외에 여러 군데에서 채무를 끌기까지 했다. 소소하게 아울러 경영하는 무역상회와 대창철공소 같은 것은 광산의 투자에 비기면 벼룩의 간 폭밖에 는 안되었다. 광산의 실패는 생애의 파멸이다. 얼굴이 푸르게 질리지 않고 는 배겨날 수 없었던 것이다.

“광업소장을 곧 불러 올리기로 합시다. 이 자리로 전보를 쳐서.”

낙담하고 설렌 끝에 만해의 지혜라는 것은 과즉 이정도의 것이었다.

어쩔 줄을 몰라서 하는 소용없는 잠꼬대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까.

“소장을 불러 올린대야 제 말과 다를 것이 없겠죠. 제 말이 실상은 그대 로가 소장의 말이니까요. 소장의 부탁을 대신해서 말한 셈이니까요.”

이동렬에게는 그 지하의 젊은 사장이 측은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일이 기 울어진 바에는 여간히 지혜나 수단쯤은 아이의 장난 폭밖에는 되지 않는다.

“곧 전보를 쳐서 올라오게는 하겠습니다.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급사를 불러 전문을 일러주고 나더니, 이동렬은 만해와 최상무를 번갈아 보면서, 더 말할 것두 없이 광구는 “ 폐광과 마찬가지 것인데 애초에 어찌 돼서 그 런 것을 사게 됐는지 그 매매 관계에 한번 착안해 볼 필요가 없을까요.”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사기에 걸린 것이 빤한 걸 정당한 매매 관계라구나 할 수 있겠냐.”

상무 최성수가 대답하니까, 이동렬은 뒤를 받아,

“그러게 말이네, 사기인 것이 뻔하니까 ── 그렇다구 지금 와서 되물러 서는 도리는 없더래두 ── 그 무슨 약간의 도리가 없지 않겠나. 매도자인 브로커 박남구두 지금 이곳에 있구 한 판이니 다시 교섭을 일으켜 보는 수 두 있겠구.”

“이제 와서 무슨 교섭이 되겠나. 고소가 성립될 리두 만무한 것이구 불구 찢구 할 수도 없는 노릇이겠구……”

최성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만해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바람에 두 사람 은 잠잠해졌다.

“사 사기한이 부정매도라니, 그래 배 백만 원의 부정매도라는 것이 세상 에……”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자기 분을 못 이겨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었다.

“박남구에 걸려 파멸인가. 내 생애의 파멸이란 말인가.”

얼굴의 땀이 흡사 눈물방울같이 옷섶 위에 떨어진다.

“할 수 없죠. 이미 일은 당하구야만 걸요. 세상에 흔히 있는 얕은 수에 걸린 것이 생각할수록에 원통해요. 금광이라면 요새 풍속으로 그저 사족을 못쓰고 구미가 지나쳐 돌았구 흥정이 너무 빨랐죠. 광맥의 성질을 좀더 과 학적으로 찬찬히 두구두구 조사해본 연후에 사두 좋았을 것을.”

“이제 와서야 다 쓸데없는 말 ── 박남구를 걸어 고소는 못하더래두 터 놓고 말이나 해 보면서 속을 떠보는 것두 일책인 것 같은데.”

최성수가 말을 내니까 이동렬은 뜻을 얻었다는 듯,

“내 말이 바로 그것이네. 만나서 속두 알아보고 타협의 길이 혹시래두 있 다면 그것두 살펴볼 겸 ──”

“타협의 길이 웬 세상 사람이 다 악당들인데 지금 새삼스럽게 웬 타협의 길이 있겠수. 하루아침에 파멸이라니 이게 꿈인구 생시인구, 일은 정녕코 나고야 말았는데.”

만해는 절망 속에서 차차 침착을 회복해 갔다. 아직도 질린 얼굴빛에 눈알 이 맑아 갔다. 그것이 두 사람에게 솔직한 고백의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터놓고 말씀 드리면, 괜히 사업에 너무 손을 벌이셨죠. 현재 이 무역상 회만으로두 좋구 철공소만 해두 여간 큰 사업이 아닌데다가 또 금광을 하시 다뇨 그러게 애초에 전 . 반대편이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수습을 하나하구 사실 맘이 죄었었어요.”

“황금의 열성이란 것이 언제든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거든. 예나 이제나 황금광 시대이긴 마찬가진데 병 중에서두 큰 병야.”

젊은 사장은 귀에 거슬리는 듯 자리를 일어선다.

“자네들까지 나를 괴롭게 하려나. 어서 박남군지 무엇인지를 부르기로 하 게나.”

그날 밤 만해들은 자리를 달리하고 브로커 박남구를 부르기로 했다.

상록원 으늑한 한 방을 치우고 조촐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 종류의 잔치를 상업적 필요로 허다하게 가져온 만해였다. 그날 그 자 리에 임하는 가슴속은 종래의 어느 때와도 달러 야릇한 감정으로 흥분되었다. 그날 밤의 결과가 성공일까 실패일까 하는 명확한 것이 아니고 죽이 될 지 밥이 될지 도무지 또렷한 성과를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척을 분 간할 수 없는 자옥한 안개 속에 서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와도 같은 초초하고 답답한 심정이었다.

일절 교섭을 이동렬과 최성수에게 맡기고 청매를 부르라고 이른 것이 아직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이웃방 연회 좌석에 불리워 왔다는 것이었다.

거의 이틀도리로 가지는 연회에서 번기지 않고 부르게 되는 사이였만, 그날 공칙하게 그를 다른 자리로 놓치게 된 것이 웬일인지 섭섭했다. 만해와 청 매는 여간한 사이가 아니었다. 청매는 만해에게 깊은 애정의 대상이었고, 만해는 청매에게 고마운 후원자였다. 물질로 든 정이 차차 사랑으로 변해 가서 청매의 마음속에서도 만해는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듯 친하 고 오래된 두 사람의 사이였만 그 하룻밤 자리를 같이하게 못된 것이 그토 록 섭섭했던 것이다. 박남구를 위해 그를 정성으로 대접하려고 청매를 부른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를 위해서 두 사람의 애정을 위해서 부른 것이 그 낭패였다.

“연회라니, 이렇게 일찍부터 무슨 연회란 말요.”

울울한 심사에 쓸데없는 화조차 내니까 보이는 그 살뜰한 단골손님 앞에서 손을 비비면서,

“신문사 손님들인뎁쇼.”

“신문사 연회는 이렇게 이른 법인가.”

“현대일보사에서 무슨 회의가 있었다나요. 사장 영감께서 한턱 쓰시는 모 양이예요.”

현대일보사구 “ 뭐구 끝나거든 이쪽으로 돌려나 주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구 가끔 뽑아두 주구.”

“물론입죠.”

절박한 처지에 놓인 몸이라 그런지 그 조그만 일에도 공연히 마음이 산란 하고 거칠어지면서 보통 때와는 다른 편편치 못한 심사였다. 보이를 대해 그렇게 소리를 높여 본 적이 없던 온순한 만해가 그날 밤만은 화를 내게 되 었다. 따져 보면 문제는 청매가 아니라 그날 그 일신상의 중대한 변화에서 온 심화 때문이었던 것이다. 청천벽력의 광산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줏대를 잃은 마음이 환장이나 할 듯 뒤틀리고 수물거리기 때문이었다.

청매 대신에 낯익은 기생을 두어 사람 불러 자리를 정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 판에 느지막해서 박남구는 나타났다.

대접을 주는 편보다는 받는 편이 아무래도 배짱이 유하고 교만하기가 싶다. 혹 또 일이나 생겨 빼고 틀어지는 것이나 아닐까 해서 만해들은 실상 속을 죄이는 판이었으나 나타난 박남구는 미안해는커녕 태연자약하고 조금 도 동하지 않는 태도였다.

“박석사, 요새 무척 재미를 보시는 모양이군요. 이렇게 유유하실 젠.”

최성수가 아첨을 겸해 한마디 추스르니까, 박남구는 빙그레 웃으면서 비 로소 약간 미안한 듯한 낯색을 지녔다.

“재미랄 것 있습니까. 그저 늘 바쁜 것만이 한 모양이죠.”

“바쁜 것이 재미거든요. 사람이 바쁘지 않고야 일인들 잘되구 재민들 있 겠습니까. 그저 바쁘고야 ──”

“바쁘달 뿐이지 실속은 아무것두 없답니다. 이러다 평생을 맡게 될 것 같 애서.”

“공연한 말씀 ──”

최성수가 웃음을 보는 둥 마는 둥 박남구는 다시 엄숙한 얼굴로 돌아갔다.

까마잡잡하고 엽렵한 품이 이마에서 피 한 방울 안 돋아날 위인이었다. 부 드럽고 햇스름한 만해와는 판이한 대조로서 그 꿋꿋하고 거센 품격이 도저 히 만해의 상대가 아닐 듯싶었다.

술이 두어 잔씩 돌았을 때, 이동렬은 아직도 묵묵히 있는 만해를 대신해서 박남구에게 수작을 붙여 보았다.

풍문에 들으니 최근 “ 여러 차례나 좋은 대목을 보셨다는데, 아직두 보시 는 일이 역시 금광이신가요. 요새 시세는 어떠신지.”

박남구는 충분히 자기를 경계하고 몸 가지기를 주의하면서 한마디 실수가 없었다.

“웬 걸요. 금광두 힘만 들면서 별 잇속이 없기에 요새는 토지에 손을 대 기 시작했는데 그것 역시 뜻대로는 안 되는구먼요. 세상에 쉬운 일 하나나 있겠습니까.”

“잇속이 없다니요. 잇속이 없으면 어중이떠중이 금광에 눈이 벌개서 사족 을 못쓰구 휘돌아치겠습니까. 오늘같이 금이 귀중하기 때문에 모두들 미칠 듯이 날뛰구 있는 때는 없을 텐데 잇속이 없구야 요새 사람들이 그렇게 어 수룩하게 헛수고를 하겠습니까…… 실례의 말씀이지만 석사두 그 중의 한 사람이실 텐데 웬 소리십니까.”

최성수가 껄껄껄껄 마음을 놓고 웃으니까 남구도 입이 벌어지면서 속을 헤 치는 것이었다.

“최선생,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죠. 나두 업이 업이라 그 길에는 남에게 밑지지 않게 빠른 편이데 ── 아무에게나 큰소리로 전할 말이 아니지만 ─ ─ 솔직하게 말하면, 요새 금광의 시세가 엄청나게 내렸을 뿐 아니라 그 흥 성흥성하던 경기가 아주 한산해졌답니다. 무슨 시세든지 다 한때 한때의 것 이지만 금광같이 급작스리 열이 주저앉는 생업은 없어요. 어느결엔지 손들 을 떼어 버렸군요. 큰 것을 잡은 사람만이 그대로들 계속해 나가구 소소하 게 손을 댔던 사람들은 거반들 떨어지구 밀려 나가구 해서 되려 하시는 분 들에겐 훗훗하게 된 셈이예요. 나두 손을 뗀 편으로 빠른 축의 한 사람인데 할 게 있어야죠. 또 토지로 돌아섰죠. 금광같이 굉장하고 찬란하진 못해두 땅이라는 게 좋든 나쁘든 늘 제 값은 있는 것이래서 실수가 적어요. 잇속두 적기는 하지만 건실한 맛에 다른 데 손을 대었다가두 또 돌아오군 하는군요.”

말을 내기 시작하니 제법 수다스러웠다. 나다분하게 지껄이면서 속을 차 릴 대로 차렸다는 만족감에서 오는 은근한 자랑과 기쁨이 말속에 흐르고 있 었다.

“자실 대로 다 자시고 나셨게 그 유유한 배포시지.”

이동렬이 꾸민 웃음을 지으면서,

“아마 이 한 해로두 이것 하나는 좋이 모으셨을걸.”

하고 엄지손가락을 들어서 흔드니까,

“천만에요.”

남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오도깝스럽게 흔들면서, 이선생두 망발이시지 “ 내가 그걸 모았다면 벌써 발을 뺏을 것이지 지금까 지두 이 노릇을 하면서 이렇게 천덕구니같이 돌아다니겠습니까 ── 아니 그 십 분지 일을 얻었대두 팔자 고치구 편안히 누웠겠습니다. 원 망령을 부 리셔도 당치않게 ──”

앓는 시늉을 하기는 해도 능걸치게 데설데설 웃는 품이 역시 만족스런 태 도였다.

엄지손가락은 백만 원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것으로서 피 차에 충분히 통용되는 일종의 부호였다. 호담스런 숫자의 대명사였다. 그 십 분지 일이란 십만 원이란 뜻이다. 아마 엄지손가락 하나는 못되어도 거 의 가까운 치부를 했음직한 남구의 태도였다. 장안에서도 브로커로는 으뜸 가는 수완가였던 것이다.

“원저 위태스런 업이래서 옳게 맞으면 좋으려니와 빗나가는 때가 십중팔 구거든요. 속 죄여서 못해 먹겠어요. 사실 쉬이 발을 빼야 할텐데.”

“당신만 당신이구 ──”

별안간 벽력 같은 호통에 좌중은 뜨끔하면서 말과 귀를 잃어버렸다. 그때 까지 잠자코만 있던 만해가 화를 못 이겨 고래 같은 고함을 친 것이다. 시 뻘겋게 상기된 그의 얼굴을 세 사람은 바라볼 염도 못했다.

“── 내 일은 어떻게 해줄 작정이오.”

만해의 고함소리로 좌중은 침묵하면서 그 침묵 속에서 각각 그날 밤 모임 의 뜻을 깨닫고 반성하는 것이었다.

특히 박남구는 몸이 화끈 달고 신경이 곧추서면서 정신이 들었다.

물론 그때까지 그날 밤의 만해들의 심중을 살피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 별안간의 고함으로 말미암아 한층 긴장되고 정신이 뜨인 것이 사실이다.

일신상의 사정만에 열중되어 있었던 것을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면서 만해의 그 분기에 넘치는 목소리로 마음의 고삐를 잡아 세우고 잔뜩 경계하기 시작 하였다.

“내 내 일은 어떻게 하겠단 말요.”

만해가 흥분을 못 이겨 재차 설레는 것을 보고 이동렬은,

“사장, 그렇게 흥분하실 것이 아니라 찬찬히 서로 이야기나 건너 보십시다. 자리가 요란하다구 될 일이 아니니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하셔서 ──”

“침착하다구 다 판이 난 일이 되돌려 설까. 어 어떻게 한단 말야, 내 일 은 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노여 하시는지 말씀을 들려주시면, 내겐 당한 일이라 면……”

남구가 시침을 떼고 까딱 냄새도 모르는 척 얼굴을 팽팽히 쳐드니,

“무슨 일이라니, 남의 창을 빼놓구두 당신 한 일을 모른단 말요. 세상에 두 무서운 ──”

만해의 입에서 무슨 폭언이 나올지를 몰라 이동렬이 재빠르게 그의 말을 가로채서,

“도모지 요새 일이 뜻대로 안 되는군요. 특히 광산 일이 작금 아주 성적 이 좋지 못해서 걱정되는 판이예요.”

근심의 얼굴을 지으니까 남구는,

“참, 산 일은 요새 어떠신지.”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올똥한 표정을 보인다.

“실패예요, 천만의외죠.”

“실패라뇨, 그럴 리가……”

“광맥이 끊어지구 얼마 안가 폐광이 된답니다.”

“그럴 리가……”

“시침을 떼두 유분수지.”

만해는 견디지 못해 다시 소리를 치면서,

“── 당신의 조짜로 난 지금 파멸이요. 시침을 떼일 때가 아니요. 어서 산을 물러 받든 어쩌든지 하란 말요.”

“아니, 다따가 무슨 소릴 하슈.”

남구도 그제서야 정색하면서 만해를 맞바라보며 소리에 뼈가 섰다.

“── 내게는 금시초문인데 폐광이니 파멸이니 하면서 나더러 어쩌란 말요. 공연히 욕을 주자는 거요, 위협을 하자는 거지. 대체 무어란 말요.”

“산을 도로 물러가지란 말요. 폐광이나 진배없는 걸 갖다가 백만 원에 매 도한 게 그게 사기가 아니구 뭐요. 백만 원에 도로 물러가지란 말요. 그 알 량한 광산을 도로 찾아가란 말요.”

“사기니 뭐니 하구 왜 그렇게 야속하게 말씀하시오. 몇 달 전 매매가 성 립됐을 때의 화목하던 정경은 어디 가구 지금 이 노여운 말씀이오 ── 낸 들 산속 일을 어찌 알겠으며 그게 원래 내 산이었습니까. 중간매매가 내 업 이라 남에게서 사서 다시 사장께 팔았달 뿐이지. 산속의 조화와 결과를 내 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나 물론 만해의 귀에 솔곳이 들릴 리는 없었다.

“어찌 됐든 간에 당신에게서 그걸 샀던 까닭에 난 파멸이란 말요. 이런 억울할 데가 세상에 또……”

파멸인지 무엇인지는 “ 모르겠으나, 만약 금광이 잘돼서 천만금을 얻게 됐 더라면 그땐 내게 뭐랬겠수. 맞히구 못 맞히는 게 다 운이겠는데 이제 형세 가 이롭지 못하다구 내게 이런 욕을 줄 법이야 있수. 내가 산속 일을 어찌 안다 말요. 차라리 내게 팔았던 그 사람을 족치려면 족쳐 볼일이지.”

“그래두 내 뜻을 모르겠수. 남은 지금 파산이요 파멸이라는데, 그런 소리 백번 따져야 무슨 소용 있어. 자, 내게 악운을 홀짝 씌워 놓구 어떻게 하잔 말요. 말을 좀 들어봅시다.”

만해는 펄펄 뛸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자네들은 잠깐 자리를 물려주게.”

만해의 목소리가 손바닥을 번긴 듯이 변한 것을 듣고 이동렬과 최성수는 문득 섬찟한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하실 작정으로 ──”

“내 혼자 따져볼 테니 잠깐들만 방을 나가 줘.”

“아예 흥분은 하지 마십시오. 나가긴 하겠습니다만.”

두 사람은 알 수 없이 걱정되는 바 있어 또 한번 이렇게 눌러 말하면서 자 리를 일어섰다.

하기는 자기들이 그 자리에서 더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벌써 만해와 박남구 단 두 사람만의 대항이 되어서 옆에서의 충고도 후원도 필요하지 않 게 되었다. 두 사람만의 숨은 말 거래도 있을 것이요, 자리를 물러서는 것 이 마땅한 일이기는 하나 일맥의 걱정이 없지 않았다. 이미 흥분된 만해요, 점점 흥분되어 가는 박남구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떻게 빗나갈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오늘밤이 성한 밤은 아니야. 필연코 무에 일어나지.”

이동렬과 최성수는 방을 나와 복도에서 서성거리며 방안의 형세를 살피면 서 수군거리다가 하릴없이 보이에게 분부해 가까운 곳에 비인 방 한간을 치 우게 하고 술을 먹기로 했다.

보이에게서 방을 치웠다는 소리를 듣고 그 방 앞으로 가까이 가다가 우연 히 복도를 돌아오는 청매를 만났다. 맑게 단장한 초초한 저녁의 자태이다.

두 사람을 보고 반기며 삽붓이 치맛자락을 헤친다. 애교를 머금은 인사인 것이다.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모시구 함께 놀아 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방끗 벌어지는 잇줄이 구슬같이 희다. 눈망울이 등불을 받아 물방울같이 빛난다.

“청매가 와 주었더라면 사장의 속이 좀더 누그러졌을 것을 ── 오늘밤 대단히 중요한 자린데 지금 방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거든.”

최성수가 일러주니까 청매는,

“박남구가 왔다죠.”

보이에게서 들었던 대로를 말하면서,

“그럼 홍천금광 일론가요.”

하고 반문해본다.

“금광이라는 게 성한 사람의 할 일은 아니야. 사람을 기쁘게 했다 노엽게 했다 하면서 꼭 미치광이의 짓이거든.”

청매도 광산의 형편을 약간 짐작하고 있는 까닭에 이동렬의 이런 감상은 그의 앞에서 당치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오늘밤 일이 잘 돼야겠는데요. 박남구는 어디 말이나 잘 들을 눈치 같아요.”

“어떤 위인이게 그렇게 나긋나긋 휘어들겠수. 우리들을 잠깐 물러서라는 품이 좀한 일 같지는 않어 ── 어서 들어갔다 나오구려. 둘이서 무엇들을 하고 있나.”

“그럼 잠깐 보고 나올까요.”

청매는 사뿐사뿐 복도를 걸어 만해들의 방으로 가까이 갔다.

이동렬과 최성수는 새로 낸 방에 마주앉아 맥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조그 만 탁자에 요리접시도 아무것도 없이 술병과 유리잔만을 올려 놓고 간단하 고 설핀 자리였다. 경 없는 속에서 말도 없이 두어 잔씩들 기울인 때였다.

급스럽게 장지가 열리며 다시 청매가 나타났다. 만해의 방에 들어간지 불 과 몇 분이 안되어서 기급을 할 듯이 뛰어나온 것이다. 눈망울이 동그란 품 이 적지 아니 놀란 표정이다.

“큰일 났어요, 얼른들 가보세요.”

“왜 이리 설레우. 살인이나 난 것처럼.”

“살인이 날는지두 몰라요.”

그제서야 이동렬은 뜨끔해지면서,

“살인이라니.”

자리를 일어선다.

“문을 열구 들어서니까 으르구 앉은 것이 흡사 두 마리의 짐승 같건나요.

사장 앞에 놓인 번쩍거리는 것을 뭔가 하구 살피니 칼이예요. 한 자루의 단 도예요. 섬찟해지면서 인사두 못하구 뛰어나왔군요.”

“다 단도라니.”

이동렬과 최성수는 화닥 일어서 방을 나가는 것이었다.

이동렬과 최성수가 뛰어나간 후 청매는 더욱 겁을 먹고 다시 만해의 방으 로 갈 염도 못하고 자기의 맡은 좌석인 현대일보사 연회의 방으로 들어갔다.

연회는 벌써 흥성한 고비에 들어 자리는 요란하고 상 위는 어지럽다.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혹은 앉고 혹은 일어서서 설레는 것이 장마당 같이 수선스럽다 . 술을 권하고 받느라고 정신들이 없이 휘뚱거린다.

“청매.”

“웬 전화가 그렇게 잦어.”

“군것질만 댕기긴가.”

말들을 걸면서 손을 내미는 것을 살금살금 피해서 청매는 김종세의 곁으로 갔다.

탁자 모퉁이에서 혼자 돌연히 잔을 들던 종세는 곁에 와 앉는 청매를 보더 니,

“어디 갔다 오는지 내 모를 줄 알구.”

천연스럽게 외이니 청매는,

“만해가 왔어요.”

대답한다느니 보다도 말하려고 준비나 하고 있었던 듯이 선선히 섬긴다.

“브로커 박남구두 왔겠다.”

“큰일이 났어요.”

“금광에서 돈이 너무 많이 쏟아져서 걱정인가, 큰일은 무슨 큰일이야.”

“끔찍한 것을 보고 왔어요.”

“금덩이를 보고 왔나.”

“농만 하지 말구 ──”

청매는 요란한 자리도 피할 겸,

“── 조용한 데루 좀 나오세요.”

일어서면서 종세의 어깨를 건드린다. 이상한 눈치에 종세도 뒤미처 자리를 일어서서 청매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뜰로 향한 창을 열고 창닫이에 올라앉으면서,

“끔찍한 것이라니 대체 무어란 말요.”

“만해와 남구가 싸우는 것을 봤어요.”

“돼지끼리 싸우거나 말거나 무에 그리 신기해서.”

“단도를 내어 놓구 잔뜩 을르구들 있겠나요.”

“무어, 단도를 놓구.”

그제서야 종세는 귀가 뜨이며 반문하는 것이었다.

“남구에게서 산 금광이 망조인 모양인가.”

신문기자로서의 직업의식이 동하며 바짝 구미가 돌았다. 남구의 사정은 물 론 이미 잘 아는 바였으나 남구와의 결사적 대립이라는 점에 새로운 제목이 생기고 흥미가 솟았다.

“만해는 광산을 도로 물르자거니 남구는 싫다거니 하면서 아마두 시비는 오랜 모양 같아요.”

“재미있는 얘기야. 남구가 물려줄 리도 만무하지만 만해두 어지간히 된 모양이지.”

“이 밤으로 꼭 변이 일어날 것만 같군요.”

“만해가 망조가 들었다. 혜성같이 나타나 거리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청년 실업가로선 생명이 너무나 짧은걸. 광산이 그의 전 생명인데 그게 글렀다면 파산하는 수밖엔 없게.”

“어쩌면 좋은가요.”

청매의 조바심에 종세는 더욱 늦조로,

“청매의 후원자 한 사람 없어졌달 뿐이지 내게 아랑곳인가.”

“그러지 말구요.”

“너무 새가 자별하더라니 청매두 이 꼴을 당하려구 그런 셈이지. 만해만 만해라구 나 같은 건 국수의 고명밖엔 더 됐나. 차라리 잘됐지 그 꼴 더 보 지 않게.”

“싫은 소린 그만두시구요.”

“그래 내 말 한 번이나 옳게 들어주구 말인가. 황금에만 눈이 팔려서 ─ ─ 박정한 인심 같으니.”

“투정은 작작 부리세요. 남의 속은 조금두 몰라주구”

“만해와 나와 어느편이 더 무거운지 맘속에 물어 보자 ── 황금이 더 무 겁지 않은가구.”

“그만두시라니깐”

문득 만해들의 방 쪽에서 요란한 고함이 터져 나왔던 까닭에 종세와 청매 는 말을 그치고 뜨끔해서 그편을 향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커니 섰다가 두 사람은 드디어 만해들의 방 있는 편 으로 복도를 달렸다.

장지가 닫힌 방안에서는 한 사람의 고함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복작거리는 소리가 한데 섞여서 요란하게 들렸다. 그 속에서 물론 만해와 남구의 목소 리가 가장 흥분된 것으로 두드러지게 컸다.

종세와 청매는 장지를 버럭 열지 못하고 밖에서 잠시 형세를 살피는 것이 었으나 사람들의 흥분된 목소리는 뒤죽박죽 혼합되어서 옳게 두서를 가릴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누나.”

하는 것은 확실히 남구의 목소리임이 틀림없었고,

“산을 물러가구 백만 원을 도루 내놓아라.”

하고 고집스럽게 되풀이하는 것은 물론 만해였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를 가르노라고 동렬과 성수가 수선거리는 것이요, 그 속에 섞 인 보이들의 목소리도 들려 나왔다.

보이지 않는 파도같이 수물거리는 그 속에서 별안간 와르르 깨트러지는 소 리가 나며 또 한번 불끈하는 힘의 기색이 들렀다.

“그만치만 하시라니깐요.”

“으앗!”

종세는 더 머뭇거리고만 섰을 수 없어서 장지를 열어젖혔다. 청매도 뒤를 따라 들어갔다.

싸움은 벌써 어지간히 자지러져서 방안은 조그만 수라장이었다. 탁자 위가 어지럽고 그릇들이 깨트러지고 만해와 남구는 한편에 한 사람씩 나둥그러져 동렬과 성수가 붙들고 있는 통에 꼼짝달싹 못하고는 있으나 짐승같이 으르 고들 있다.

참혹한 결과라는 것은 결국 피를 보고야마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한바탕 칼 부림을 논 뒤였다. 동렬과 성수들은 대체 무엇들을 하고 있었던지, 혹은 그 들이 달려들기 전에 이미 칼은 피차를 상하게 한 뒤였을까. 어디를 찌르고 어디를 다쳤는지 얼굴과 손과 옷자락이 온통 피투성이라 철모르고 피장난들 을 치고 있던 아귀들 같다. 망간 소리를 친 것도 서로 찌르고 찔리웠던 순 간이었던 것이다. 피 묻은 단도가 자리 위에 처참하게 빛난다.

“무엇들을 하구 섰어. 냉큼 차나 부르지 못하구.”

할 바를 모르고 있는 보이에게 종세는 소리를 치고,

“아니 이렇게들 되도록 무엇들을 하구 있었단 말요.”

동렬들을 야속히 여겼다.

“우리보단 다 장골들인데 당하는 수 있어야죠.”

동렬의 대답이 웬일인지 마음을 찔러서 종세는 간신히 말을 이으면서,

“무슨 꼴이란 말요, 이게.”

“밖에 알리지 않구 방안에서만 얼버무려 넘기련 것이 그만 이 꼴이 되구 말았구료.”

그러나 나갔던 보이가 자동차가 왔음을 고하러 왔을 때에는 그가 얼마나 밖에서 설렜는지 보이의 뒤에는 각 방에서 뛰어나온 사람들이 와르르 모여 드는 것이었다 미처 장지를 . 닫을 겨를이 없이 몰려들 들어 방안은 한결 요 란한 것으로 변했다.

사람들 틈에서 종세와 청매는 조그만 존재로 변해 어느 구석에 숨었는지 모르게 되었다. 싸움터는 장터가 되고 사람들의 주의는 싸우던 두 사람으로 부터 요란한 방안의 분위기로 옮겨 갔다.

“사람들이 원래 싸우러 세상에 태어나긴 했어두 ── 이건 큰 망신인걸.”

종세는 청매에게 수군거리면서 보이의 부축을 받아 만해의 몸을 사람들 틈 으로 빼어냈다. 몰려나오기들 전에 감쪽같이 문밖으로 이끌어 차에 앉히기 에 성공했다.

“내가 동무해서 데려가죠.”

하고 함께 차 속에 앉는 청매에게,

“오늘 저녁만 특별히 용서한다.”

했다가 다시,

“사회면 기사 재료는 톡톡히 되는걸.”

차를 떠내 보내고 종세는 사실 속으로 벌써 기사에 붙일 제목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운 병원으로 돌아 응급수당을 마치고 청매는 만해를 자기 집으로 이끌 었다.

손과 머리에 허옇게 붕대를 감은 만해를 자기 방에 데려다 눕히고 옷을 풀 고 이불을 덮었다.

허옇게 감고 소독냄새를 피우면서 힘없이 자리에 누운 꼴은 흡사 중병이나 앓는 사람같이 보였다.

“종세 녀석이 뭐라더라 ── 사회면 재료는 톡톡히 된다구.”

그렇게 어지럽게 휘돌아친 속이였언만 만해의 주의는 하필 종세에게로 쏠 렸던 것이다. 누워서 첫마디가 종세의 말이었다.

“그런 말이 다 걱정된단 말요. 몸 아픈 줄은 모르구.”

“그리구 또 뭐 ── 오늘 저녁만 특별히 용서한다구.”

“그런 건 더러 잊어버리세요 ── 종세가 무어라구 했든 간에 어쨌단 말 예요.”

“그까짓 신문기사는 어찌 됐는지 종세가 청매에게 범연하지 않은 모양이 란 말야.”

이런 잔 마음씨는 도리어 청매에게 대한 만해 자신의 열정의 증명이었다.

종세의 그런 말을 듣게 된 오늘 저녁 청매에게 대한 마음은 한층 짙은 것이 었고 무엇보다도 지금 ,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청매라는 느낌이 들었다.

응당 차를 집으로 몰았어야 할 것을 모르는 척하고 청매에게 끌려온 것도 그 까닭이었다. 아내 남미려는 만해의 힘으로는 어거하기 어려운 여자였다.

그 위엄에 눌리워 만해는 일찍이 여행을 떠난 때 외에는 밖에서 밤을 새운 때가 없었다. 오늘밤에는 그런 관습도 깨트리고 태연히 청매를 찾은 것이 요, 그의 곁에서 밤을 새울 작정이었다. 청매에게 대한 사랑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간절하게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어서 종세는 종세구 사장은 사장이죠. 아닌 걱정을 다 ─ ─”

“종세는 종세라면 ── 종세에게 대해두 생각이 없지 않단 말이지……아 이쿠우!”

몸 그 어느 구석이 찔리는지 허리를 들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신음하는 것 이다.

“내가 그 녀석을 찌른 줄만 알았더니 되루 주구 말로 받은 셈인가.”

“무슨 소용이 있다구 그렇게 폭력으로들 싸우세요. 소문만 나구 망신만 하게 되면서 잇속이 무어예요.”

“녀석이 종시 내 말을 안 들었겠다. 그 음득한 녀석이.”

“누군데 누구 말을 듣겠어요. 십여 년을 그 노릇으로 돌아먹은 이마에서 피 한 방울 안 날 위인인데 괜히 맞선 것만 불찰이죠.”

“그놈이 날 망쳐 놓았어 ── 난 파산야, 파멸야.”

목소리가 글썽글썽하면서 금시 터져 나올 듯도 한 눈치다.

이불 속에서 고민하는 꼴은 어른이나 아이나 일반이었다. 찡그린 이맛살에 는 검은 그림자가 짙었다.

“사내대장부가 무얼 그러세요. 앞길이 대해 같은데 맘을 굳게 먹으셔야죠. 인생이 그렇게 장난감 배같이 회똥회똥 엎어만 질까요.”

“벌써 엎어진 배야.”

“엎어졌으면 또 일어나죠. ── 그게 사람의 노력이라는 게 아닌가요.”

“…………”

만해는 한참이나 묵묵하다가,

“청매,”

새삼스럽게 얕은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청매는 나를 사랑하렷다 ── 진정으로.”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세요.”

“사랑의 감정같이 야릇한 것은 없어서 하는 소리야 ── 사랑한다구 생각 해두 기실 안 사랑할 때가 있구, 미워하는 것 같애두 실상 사랑하구 있는 수가 있거든. 돈두 말구 인물두 말구 그저 알몸 하나 사랑할 수 있느냐 말야.”

“여부가 있나요. 물으실 필요두 없죠.”

“한 가지 청이 있어서 하는 소리야.”

“…………”

“나하구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나. 모든 것 버리구 알몸으로 단둘이 ── 가령 상해 같은 데로나.”

“상해로.”

청매는 놀라는 듯 놀라지 않은 듯 말을 받으면서 정신이 얼삥삥했다.

“── 글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