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공무한/6장
일마는 자동차로 거리로 돌아와 호텔에 닿자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벽수를 끌어냈다.
나아자와 에미랴와 합 네 사람이 만찬을 같이하기로 했다.
벽수는 뛰어들자 그날 경마의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 ─ 얼굴빛이 변한 것 이 사실이었다.
“일전의 채표며 오늘의 경마며 거저 일이 아닌 것 같애 ─ 난 되려 겁만 나네.”
“요만큼의 행운이 왔다구 왜 하필 불행을 연상할 필요가 있나.”
“요만큼의 행운이 아니야. 아무에게나 쉽게 있을 행운이 아니야.”
“불행이 오면 불행대로 받지, 행운은 행운대로 받구. 걱정할 게 없어. 행 운이 왔다구 까지 걱정하구야 그럼 대체 무엇 하자구 산단 말인가.”
“평범이 좋거든.”
평범이 좋다면 자네 “ 뭣 하러 만주까지 들어왔나. 평범을 구해서 이 외지 에 들어와 고생이란 말인가.”
“만주의 행운은 자네가 다 쓸어갔다네. 우리에겐 차례질 것이 없거든.”
“자, 유쾌하게! 이것두 일생, 저것두 일생 ─ 차례진 일생을 차례진 대로 보낼 수밖에 다른 수가 더 있나.”
식당 한구석에 특별히 분부한 만찬의 식탁은 어느 때보다도 호화로웠다.
일마는 특히 나아자의 뜻을 존중히 여겨 그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그날 밤 작정된 요리 외에 더 부탁했다. 그날의 승리를 축복하는 조그만 잔치가 일 마의 뜻으로는 온전히 나아자를 위한 마음의 대접이었던 것이다.
흰 식탁 위에 꽃바구니가 놓이고 조그만 양동이 얼음 속에 샴페인 병이 비 스듬히 솟았다. 진미를 다했다는 요리접시를 보이가 차례차례로 날러 오는 것이나 일마에게는 오히려 부족한 생각이 들어서,
“사람의 사치라는 것이 요 정도의 것뿐인가. 더 굉장한 잔치라는 건 가질 수 없는 것일까.”
“힘이 넘치면 모든 것이 하치않어 보이는 법이지만 ─ 사치라는 것이 일 단 가져 보면 신기할 것두 없구 그저 그뿐이야. 다른 더 진귀한 것을 그리 워하나 실상에 있어서 그런 것은 없거든. 왕이 먹는 음식이나 우리가 먹는 음식이나 그다지 다를 것이 없어. 실속에 있어선 똑같은 것야.”
벽수가 아무리 아는 소리를 해도 일마로 보면 부족한 심사를 금할 수 없었다. 그만큼 속이 넉넉하고 찼던 것이다.
나아자에게는 그러나 그날의 만찬은 더없이 호화롭고 고맙게 여겨졌다. 잔 치도 잔치려니와 일마의 친절에 마음이 흡족했다.
“지난 반생 동안에 이렇게 훌륭한 만찬을 받아 본 적이 없었어요.”
솔직한 고백이었다. 곧은 마음씨가 눈물겹게 여겨졌다.
“ ─ 생일 때와 크리스마스 때에두 이렇게 놀라운 잔치는 못 받아 봤어요. 몇 살 때이든가, 물론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생일날 이웃 사람들을 청해 놓구 빵을 잔뜩 썰구 오리고기를 통 채로 삶아 놓구 했을 때의 생각이 평생을 두구 안 잊혀져요. 제일 즐거운 때였어요 ─ 오늘까지 반생 동안 이 렇게 유쾌한 시간을 종시 가져보지 못하구 자랐어요.”
“그럼 오늘 흠뻑 즐겨 하구려.”
에미랴는 자기 역시 비슷한 사정임에 나아자의 말이 뼈 속에 사무쳐와서,
“ ─ 두 번째 생일잔치로 여기구 ─ 나두 오늘을 크리스마스쯤으로나 여 길께.”
“자, 그럼 오늘 특히 두 분을 위해서 잔들을 냅시다.”
일마는 보이에게 손짓해서 나아자와 에미랴의 유리잔에 술을 이어 따르게 했다 샴페인 마개를 뽑는 . 소리가 팡 팡 유쾌하게 울림을 따라 달고 쯔릿한 술맛에 네 사람은 거나해 갔다.
나아자도 잔을 사양하지 않아서 어느덧 얼굴이 꽃빛으로 변했다.
에미랴는 그 길로 바로 밤일을 보러 홀로 나갔으나 나아자는 그날 밤 홀을 쉬기로 했다.
취기가 돌아 약간 건들건들하는 그 모양으로는 나갈래야 나갈 수도 없기는 했다.
식후 로비에 나들 앉아 붉은 카펫을 밟고 음악을 듣고 있을 때 일마는 가 장 행복스런 순간에 잠겨 있는 셈이었다. 거기에서 더할 행복이 없었다. 고 무풍선같이 둥그렇게 차서 허공에 둥실 떠 있는 듯한 심경이었다.
한 가지 부족이 있다면 아직도 나아자의 마음의 마지막 고비를 잡지 못한 것일까. 연일 그와의 사귐에서 그의 감정의 지향을 어느 정도까지 포착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단순하지 않은 것은 여자의 마음이라 마지막 고비를 잡을 때까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더욱이 오늘의 일마에게는 벌써 나아 자가 없어서는 안되게 되었다. 어느결엔지 그만이 가장 뜻있는 것이 되어 버렸고 그 없는 일상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트렁크 속에 돌연 히 일만 오천 원이 기어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그것만으로는 별반 값이 없는 것이요, 자기 한 몸의 인물이나 재주나 모든 것이 그것만으로는 뜻없는 것 이다. 한 가지의 귀중한 대상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만 비로소 뜻을 가지게 되고 빛을 내게 된다. 일마의 그 귀중한 대상은 지금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나아자였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그 자리로 버려도 좋은 것 이다. 문제는 나아자의 마지막 심정이었다. 거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것 이었다.
만족 속에서의 한 줄기의 근심 ─ 그러나 그것은 만월을 아련히 가리운 실 오리 만한 한 줄기의 구름 폭밖에는 안되었다. 나아자의 심중이 그다지 복 잡한 것이 아니었고 감정의 표현이란 비교적 단순하고 솔직한 것이다. 며칠 동안의 일마에게 대한 전폭적 호의 ─ 그 속에 나아자의 뜻은 가장 선명하 고 정직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그 만족의 자태가 그것을 한층 웅변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일마의 근심은 만족에서 오늘 귀여운 투정이었다(그 줄을 일마는 불과 몇 시간 후에 알게 되는 것이지만).
“어떻게 하면 나아자를 최대한도로 대접할 수 있을까를 지금 생각하구 있 는 중이요.”
일마가 말할 때 나아자는 더없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이 이상 더 대접한다면 “ 무엇으로 그걸 다 받으란 말예요 ─ 지금 한껏 흡족한데.”
결국 사치라는 것은 샴페인을 실컷 마시는 일이요, 즐거움이란 음악과 춤 의 기쁜 시간을 가짐이다. 아무런 인간생활에 있어서도 그 이상의 즐거운 행사는 없는 것이다. 일마가 아무리 그보다 더한 것을 발견하려고 해도 헛 일이었고 고래로 작정된 인간의 기쁨의 길을 좇을 수밖에는 없었다.
나아자가 잘 안다는 그 번잡하지 않은 골목의 <왈츠의 집>을 세 사람은 찾 게 되었고 그 조촐한 홀에서 샴페인을 여러 병이나 터치게 되어 흠뻑 취하 게들 되었고 흥에 겨운 춤으로 음악에 쏠려 왈츠를 몇 번이고 추게 되었던 것이다.
왈츠만을 추는 집이었다.‘비엔나’의 왈츠니‘파리’왈츠니 ─ 각기 조금 씩 다른 우아하고, 혹은 현대적인 왈츠의 곡조를 따라 춤도 약간씩 달라졌다. 왈츠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추자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휘두를 대로 휘둘러 피곤하게 하자는 것인 듯했다.
나아자는 일마와 서너 곡조나 연거푸 추고 났을 때, 그 쉴새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격렬한 운동에 현기증이 나고 숨이 차졌다. 쓰러질 듯이 휘뚱거리 는 것을 일마는 이끌어다가 소파에 앉혔다. 따라 앉으니 나아자는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춤과 취기에 피곤하고 혼몽한 것이었다. 고개를 기댄 채 잠꼬대같이 하는 소리가,
“어디든지 먼데로 가구 싶어요⋯…멀리⋯⋯조선이나 따라 나갈까요.”
마지막 한마디가 일마의 정신을 번쩍 뜨이게 했다.
“나두 이젠 조선을 잘 알게 됐어요.”
나아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일마에게는 놀람이었다.
“어떻게 해서 안단 말요.”
하고 되묻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르며 그를 멀끔히 바라만 볼 때,
“일마씨를 통해서 안단 말예요. 일마씨의 인품을 고대로 조선이라구 생각 한단 말예요.”
반드시 취중의 말이 아닌 듯싶다. 일마를 바라보는 눈이 빛나고 말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이다.
“⋯⋯⋯⋯”
“그리구 그 조선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취중인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 일마로서도 전에 없는 용기가 솟으면서 팔 안에 나아자를 이끌 듯이나 가까이 그를 굽어보았다.
“조선의 무 무엇을 사랑한단 말요.”
“무엇이든지 모두 ─ 인물이며 품성이며 모두.”
“조선옷을 입은 나아자의 자태를 나두 상상해본지 오래였었소. ─ 치마저 고리를 입은 모양이 얼마나 아름다울까를 생각해 보군 하우.”
“흰옷들을 입는다죠. 늘 야회복을 입은 것 같아서 얼마나 깨끗하구 좋을 까요.”
“그리구 꽃신들을 신는다나 ─ 푸른 전에 붉은 실, 노랑 실로 수놓은 꽃 신, 흰 버선에 꽃신을 신구 흰 저고리 검은 치마로 말끔하게 채리구 나선 모양은 아무데서두 볼 수 없는 조선의 가장 아름다운 것의 하나일 것요.”
“옛날부터 내려오는 질그릇으로 맨든 꽃병두 놀랍다죠.”
“먼 옛날 우리 할아버지들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문화인이었었다우 ─ 질 그릇두 잘 굽구, 그림두 잘 그리구, 음악두 잘 하구.”
“그 자랑 속에 살구 싶어요 ─ 흰옷을 입구 질그릇과 그림을 보구 옛 음 악을 듣구⋯⋯”
“나아자에게서 그런 말을 듣게 되는 것이 꼭 거짓말 같으면서 같은 말을 열 번 백 번 들어두 싫지 않을 것 같구료.”
“열 번이든지 백 번이든지 하죠 ─ 얼른 그 조선의 자랑 속에 살구 싶어 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마는 벌떡 일어서면서 다짜고짜로 나아자의 손을 끌 고 춤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는 그런 수선스럽고 돌갑스런 거동으로밖에는 심중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제일 어려운 노릇이 제일 쉽게 되는 수두 있나부 ─ 나아자의 그 말이 내게는 제일 듣구 싶던 말요. 이제 그걸 이렇게두 수월하게 들은 것요.”
왈츠의 스텝이 야단스럽게 파도치면서 두 몸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운동 의 권내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날 밤 그 수많은 패들 속에 일마들같이 행복 스런 짝은 없을 듯했다.
물결 위에 뜬 한 쌍의 물새같이 날아 날듯이 가볍게 휘도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사정을 짐작하고서인지 벽수의 자태는 어느 때부터인지 홀에서 사라져 있었다. 일마는 춤 속에서도 두리번거리면서 찾는 것이나 끝끝내 보 이지 않는다. 그가 사라진 반면에 춤추는 패가 부쩍 는 것을 보고 밤이 이 미 늦은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아자는 피곤할 대로 피곤해 이제는 벌써 일마의 손에 무겁게 끌리게 되었다.
“오늘밤엔 내 몸이 아닌 것 같애요. 정신이 휘황하면서 ─ 아 무데루나 얼른 편안한 곳으로 가세요.”
두 사람은 차를 불러 무거운 몸을 싣고 극히 자연스럽게 일마의 호텔로 향 한 것이었다.
호텔에 이르러 일마는 사무원에게 방 열쇠를 청했을 때 대답에 놀랐다.
“아까 드렸죠.”
“드리다니, 누구에게.”
놀라며 반문하니 사무원도 당황한 태도였다.
“조금 아까 여자 한 분이 와서 방 열쇠를 달라길래 동행되는 분인 줄 알 구 내드렸는데요.”
“여자라니, 내게 웬 동행의 여자가 있단 말요.”
사무원보다는 물론 일마의 편이 더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그분이 동행이라구만 하면서 조르길래 ─ ”
“천만에. 여자 동행이라군 없소.”
일마가 소리를 높이니 사무원도 자기의 그릇이었음을 깨달으며 적지 아니 황당했다.
“그럼 이거 실책이었던가요.”
“실책이죠. 어서 열쇠를 되찾어다 주시오.”
사무원이 더렁더렁 층계를 올라가는 뒤를 따라 일마들도 이층으로 올라갔다.
방 앞에 이르러 노크를 했을 때,
“누구요.”
간드러진 목소리가 안에서 나면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그 날뚱 같은 침입자가 단영일 것쯤을 일마가 모를 바는 아니었다. 새침스런 목소리를 들을 때 노염이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밤중에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누구예요. 잠자는 사람을 깨우는 사람이 누구예요.”
“냉큼 열지 않어.”
일마의 목소리에 단영은 더욱 늦조를 부리며,
“옳지, 방 주인이로군. 주인이면 누가 겁을 내나. 혼자면 들여 놓구, 그 아니꼬운 꼴들이라면 안 들여놀 테야.”
“벼락이 내릴 줄 모르구 그래두 는적거린다.”
고함소리에 방문이 열리며 단영의 염염한 자태가 문턱에 나타났다.
“짝을 지어 가지구 댕기면서 그 호령이군. 경마에 이기구 계집을 얻구 아 주 의기가 도도한데.”
자 내 동행인가 “ , 아닌가를 저 입으로 다시 한번 외이게 해보구료.”
일마는 사무원을 향해 추상 같은 엄명이었다.
“당신이 실책이었다는 것을 이 자리로 증명해 노시오.”
사무원은 허리를 굽히고 황공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두 얼른 쫓아내지 못하겠소. ── 당신 책임을 다하지 못하겠소.”
“압다, 큰소리두 한다.”
단영의 소리를 들은 체 만 체 일마가 발을 돌렸을 때 나아자는 벌써 층계 를 내려가고 있었다.
일마는 급히 뒤를 따라가서 옆에 섰다. 단영의 소행보다도 무엇보다도 지 금에는 나아자의 뜻 하나가 일마의 마음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나아자가 오해하지 않을 줄을 나는 잘 아오.”
나아자는 확실히 불쾌한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듯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저런 여자를 사랑하러 나는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오. 아마 내가 세상 에서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여자일 것요.”
층계를 중간까지 내려갔을 때 별안간 울음이 터져 나오면서 단영의 발버둥 소리가 들렸다. 싸우다 싸우다 지쳐서 악김에 우는 아이의 모양이었다. 소 리가 점점 높아졌다.
“대단한 정성이군요 ── 여기까지 따라와서 울구불구할 젠.”
“사랑의 정성같이 피차에 맥 나는 건 없을 것요. 정성을 가지구 어쩐잔 말요. 괜히 소용없는 낭비일 뿐이지.”
그런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나아자는 반드시 일마를 오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몇 번 만나게 된 단영의 인상으로 그의 짝사랑의 수고를 관찰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고 일마의 시종이 여일한 냉정한 태도도 물론 충분히 살필 수 있었다.
단영의 그런 수고를 알면 알수록에 그의 심사는 더욱 불붙는 것이었고 오 늘의 일마의 태도도 내심으로는 얼마나 통쾌한 것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아래층 로비에 들어갔을 때 나아자는 맥없이 풀썩 주저앉으면서,
“정말 피곤하군요 ── 갈 데가 없다니요.”
“없긴 왜, 좀 있다 방으로 들어갑시다. 침입자나 처치해 놓거든.”
일마도 덩달아 옆자리에 주저앉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나아자는 일마의 방에서 나왔다.
일마에게 대한 사랑도 사랑이려니와 가정과 백모 수우라에게 대한 반역이 었다. 백모 부부가 나아자에게 그다지 극진한 편은 못되었다. 나아자에게는 한없이 섭섭한 일이었다 . 수우라에게 대해서 가령 어머니에게 대하듯 응석 을 할 수 없었고 깊은 속 사정을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사이에 그 무엇이 끼인 듯이 서먹서먹하고 찬 기운이 흘렀다. 고아의 설움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면서 백모의 가정에 잠시 몸을 부치고 있는 게 껍질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으며 그곳을 벗어날 날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나아자로서 상도를 벗어난 그날 밤 일은 가정을 벗어나기로 이미 결정한 증거였다. 일마를 마음속에 작정한 때부터 그것이 올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낡은 집을 벗어나서 새날의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청이 있어요. 무덤 속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그날 오후 일마는 나아자의 청을 들어 함께 묘지를 찾기로 했다.
나아자는 꽃묶음과 가느다란 양초를 사들었다. 무덤 앞에 바치자는 것이었다.
교외로 향한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탄탄대로를 마차로 근 이십분 동안이나 달렸다. 나아자는 꽃묶음을 들고 마차 위에서 침묵에 잠겼다. 마부의 채찍 이 허공에 날리고 붉은 꽃송이가 바람에 떨렸다. 어느덧 냉랭한 기운이 대 기 속에 차 있음을 알고 일마는 가슴속에 스며드는 싸늘한 새로운 절기의 애감을 금할 수 없었다. 대체 어느새 나아자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오 늘 이 고패에 이르렀던가. 나아자는 틀림없이 꽃묶음을 들고 지금 옆에 앉 아 있다. 꿈결 같고 거짓말 같다. 절기의 변천과 같이 신기하고 이상스러운 일이다. 행복스러우면서도 그 무엇인지 한마디 슬픈 듯하다. 생각할수록에 인간사가 신비롭기만 하다. 나아자가 침묵하고 앞만 내다보면서 긴 속눈썹 에 그림자를 띠이고 있는 것도 같은 감정에 잠겨 있는 까닭일까. 싸늘한 바 람에 두 사람의 표정은 생각을 머금고 한결같이 고요하다.
단청이 화려한 극락사를 지나서니 묘지의 문이 눈앞에 다다르며 넓은 구내 가 짐작된다. 문 앞에는 꽃장사가 양편에 들어서 각색 꽃을 진열하고 조객 을 기다리고 있다.
문을 들어서니 정면에 우스펜스카야 사원이 있고, 그 뒤편에 여러 만평으 로 짐작되는 나무가 수뿍 들어선 묘지가 연했다. 사원도 묘지도 텅 비어서 흡사 주인 없는 집에 주인 없는 뜰과도 같다. 수십만의 무덤이 각각 그 넓 은 뜰의 주인인 것이다. 주인들은 묵묵히 나무그늘 속에 누워 말없는 속에 서 뜰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묘지라고는 해도 전면 그윽한 수풀이다. 가느다란 백양나무와 애잔한 느티 나무가 빈틈없이 들어서서 각각 나무그늘 아래에 모나게 다듬은 기다란 돌 을 누이고 그 위에 비석을 세우고 양편에 등을 달고 꽃을 꽃은 ── 그 운 치 있는 조그만 정자가 무덤인 것이다. 으늑한 구석마다 그런 무덤이 무수 히 숨어 있어서 그 온통의 구내가 일종 공원인 듯한 느낌을 준다. 무시무시 한 법도 없고 께름하지도 않고 고요하고 한적한 속이 제물에 자연의 공연이다. 수풀 새새로 가느다란 지름길이 멀리 구석까지 뻗쳤고 그 잡풀 우거진 길 양편에 백양나무의 애목이 늘어서고 군데군데에 벤치가 놓였다. 벤치에 앉아 다리를 쉬고 추억에 잠기라는 휴식과 명상의 곳인 것이다.
나무마다 초가을 빛이어서 물든 잎새들이 가지 끝에 곱고 지름길에는 우수 수 흩어진 조그만 낙엽들이 지천으로 발에 밟힌다. 새소리조차 끊어진 아름 다운 가을 수풀 속에 오후의 햇볕이 줄기줄기 새어들어 으늑한 속에서 환한 천지를 이루었다.
일마와 나아자는 산보다 하는 듯 어슬어슬 지름길을 어모저모 더듬었다.
지름길을 몇 고비나 돌아 한구석 그늘 아래에 나아자는 섰다.
“여기에 어머니가 쉬세요.”
가늘게 말하고 무덤 앞에 나가는 것이다.
흰 말뚝 테두리 앞에 조그만 문이 달렸다.
나아자는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일마는 밖에 서서 무덤의 모양을 살폈다.
무덤의 규모와 치장도 천차만별이었으나 그 많은 무덤 속에서 결코 크고 사치한 무덤은 아니었다. 비석도 얕고, 비석가로 잡풀이 우거졌고, 유리등 에 불은 꺼졌고, 언제 꽂았던 꽃인지 병의 꽃도 시들고 말라 버렸다. 비석 에는 나아자의 어머니의 이름과 작고한 시일과 간단한 생애의 역사가 로서 아 국문으로 적혀 있고 아래편에 고인의 사진이 돌 속에 장치되어 있다. 나 아자와 흡사한 모습이다.
일마는 사진 앞에서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남의 무덤이라 서먹거리기는 했으나, 나아자의 혈육임을 생각할 때 마음의 거리가 가까움을 느꼈고, 무엇보다도 나아자의 하는 정성스런 태도에 마음 이 움직였다.
꽃을 갈아 꽂고 등속에 촉을 불 켜놓고 나더니 합장하고 한참이나 기도를 드린 그 뒷모양이 한없이 맑고 정성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는 적막한 속에서 한 폭의 옛 그림 같이도 생각된다.
기도를 마치더니 나아자는 돌아서서 고개 숙인 일마를 보면서 ── 눈에 눈물이 어리운 듯하다.
“오랫동안 와 보지 못했더니 이 꼴이랍니다. 흡사 주인 없는 무덤같이.
땅속에서래두 ── 얼마나 쓸쓸해 하구 노여 하실까를 생각하면⋯⋯”
사실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눈물을 닦은 손수건으로 나아자는 비석을 훔치기 시작했다. 먼지를 떨고 글자를 닦는다. 흡사 귀중한 물건을 손질하 는 듯, 얼굴을 닦는 듯 ── 그런 알뜰한 솜씨이다.
비석의 기록에 의하면 세상을 떠난 지가 여러 해 전이다. 그 여러 해동안 에 조금도 변하지 않은 혈육의 애정이 일마의 가슴을 찔렀다.
문득 스며드는 감상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몇 걸음 그 자리를 떠나 뒤 편 벤치에 앉았다. 이윽고 나아자도 묘지에서 나와 일마의 앞에 섰다. 눈물 을 보이지 않으려고 닦은 얼굴에 자국이 어른거린다.
“이곳을 떠난대두 맘속에 남는 것이 없어요. 생활두 친척두 하나두 맘을 댕기지는 않아요. 다만 땅속의 어머니만이 언제까지나 추억 속에 살아 있으 면서 속에 걸려요.”
“영원히 못 올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니 귀한 추억을 더듬으면서 가끔 다 녀가면 좋지 않으우.”
“내 없는 동안에 또 몇 달이구 몇 해구 외로운 속에서 거칠어 가겠죠 ─ ─ 불은 꺼지구 꽃은 마르구 잡풀은 우거지구⋯⋯”
벤치에서 일어나서 두 사람은 지름길을 되돌아섰다.
슬픔에는 단념이 필요하다. 어느 때까지나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나 아자는 어머니의 추억을 등뒤에 남기고 곧게 앞을 내다보았다.
묘지는 공원이다. 늦은 해가 등에 따뜻하다. 낙엽이 우수수 발아래 새로 떨어졌다.
넓고 깊은 구내에는 어느 구석에 무엇이 숨었는지 헤아릴 수 없다. 지름길 을 두어 고비 채 돌았을 때, 문득 나무 아래에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일마 는 선뜻해졌다.
후리후리한 그 젊은이 또한 오후의 묘지를 산보하는 셈인지, 혹은 고인의 추억 속에 잠겨 있는 셈인지 묵묵하고 조용한 자태이다.
공교롭게도 나아자의 아는 사람이었다. 가까이 갔을 때, 젊은이는 손을 들 었다. 나아자는 약간 놀란 듯한 입을 열었다.
“오, 이봐놉 아니오. 웬일예요.”
“아버지 무덤에 꽃을 드리러 왔죠. 여기서 만나기는 의외구려.”
이봐놉이 일마를 찬찬히 바라보는 것을 보고 나아자는 민첩하게 두 사람을 자기 입으로 소개하고 인사시켰다.
낙엽 속이래서 그런지 이봐놉의 차림이 한결 쓸쓸해 보인다. 여름이 다 간 뒤의 부연 보라양복은 철늦은 느낌을 주면서 허름하기 짝없다. 얼굴도 윤택 있지 못하고 둥그런 커다란 눈이 멀뚱하게 세상을 노린다. 그 눈이 원래 냉 정한 것이 아니라 냉정한 세상에 대해서 자연히 가지게 된 지극히 무관심한 눈매였다.
나아자와는 각별히 친한 모양이었다. 익숙한 어조로 말을 주고받는 두 사 람의 태도가 자연스럽다. 재빠른 그들의 회화가 일마에게는 대략 이해 되었 으나 모르는 동안에 넘어가는 구절도 있었다.
초면인 처지에 회화 속에 휩쓸려 들 수도 없어서 잠잠히 섰으려니 멋쩍은 생각에 일마는 먼저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미안히 여겨서인지 나아자는 곧 뒤를 따라왔다. 이봐놉은 손짓하며 지름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었다.
“수우라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청년이예요. 아저씨가 육군 소장이었을 시 절에 사관으로 있었다나요. 아저씨와는 각별한 사이인 모양 같아요.”
나아자는 설명하면서 일마와 나란히 섰다.
“묘지에서는 모두 쓸쓸해 보이는구료. 쓸쓸하지 않은 사람이 묘지에 올 리두 없지만.”
“이 속의 수많은 무덤이 거리에다 무수한 고아들을 남겨 놓았어요. 의지 가지없는 고아들을 가난 속에 남겨 놓았어요. 누구의 죄인지 모르겠어요.”
나아자의 어세에는 얼마간 비분하는 투도 섞였다.
“이봐놉두 그 한 사람이란 말요?”
“저래 뵈어두 음악간데 이 넓은 거리에서 한 곳두 그 재주를 팔 데가 없 다나요. 카바레두 만원이구 호텔에서두 거절이구요⋯⋯자동차가 한 대 있으 면 그것으로나 벌어먹으련만 ── 자동차가 한 대가 어디게요. 거리에서는 큰 재산인데요.”
흔한 택시 운전수가 되겠다는 말이다. 숨은 음악가의 측은한 생각이라고 여기면서 일마는,
“무슨 까닭으로 천재에게는 세상사가 항상 불여의한지.”
탄식하는 듯이 지껄였다.
“차라리 거지 노릇이나 할까 하면서 농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하는군요.”
“⋯⋯⋯⋯”
“내가 조선을 가겠다니까 행복스럽게 됐다구 말하면서 쓸쓸하게 웃어요.”
하면서 웃는 나아자의 표정이야말로 더없이 쓸쓸한 것이었다.
일마는 공연한 이봐놉을 알고 공연한 소리를 들은 셈이다.
생면부지의 그였만은 그런 사정 이야기를 들은 것이 쓸데없이 마음을 우울 하게 하고 귀찮게 했다 . 행복스런 사정과 달라 불행한 사정이란 듣는 사람 의 마음을 고달프게 할 뿐이다. 일마는 마음속에 공연한 우울을 한 폭 더 포개게 되었다. 이유 없이 답답하고 울가망해졌다.
묘지를 나와 일마는 벌써 공공연히 나아자와 함께 호텔에 들리고 거리를 거닐고 하는 것이었으나 묘지에서 받은 감상이 쉽사리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가슴속에 배어 들면서 거리의 풍경이 어제와는 판이한 인상으로 눈에 어리 우기 시작했다.
한 몸의 행복이 금시 사라져 버린 것은 물론 아니었으나, 어제까지 온전히 개인의 행복 속에서 정신없이 춤추고 날뛰고 하던 것이 오늘 이상하게도 낙 엽 속에서 시작한 감상이 마음을 파고들면서 싸늘한 반성이 솟기 시작했다.
웃던 끝에 별안간 우는 아이의 심정도 그러한 것일까. 그 우는 심정도 따져 보면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라 웃던 때의 행복의 연장인지도 모르듯이 오늘 의 일마의 심정도 뼈를 찌를 듯이 불행한 것은 아니기는 했으나 한 가지의 반성이 줄기차게 솟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행복스런 사람보다도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더 많은가. 열 곱 백 곱 더 많은고.”
하는 생각이었다. 이 평범한 생각을 반드시 지금 처음으로 알아낸 것은 아 니었으나 어느 때보다도 쯔릿한 실감으로 맺혀 왔던 것이다.
거리에 나서면 태반이 가난한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다. 일마는 특히 여 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으나, 거리거리에는 사람의 씨가 필요 이상으 로 많고 그 대부분이 불행한 편이다. 무엇하자고 흡사 불개미 떼같이 그렇 게 많이 생겨나서 불행 속에서 허덕이고 수물거리는 것일까. 인간은 고귀하 기는커녕 미천하기 짝없다. 뭇 동물과 고를 바 없이 흔하고 천하고 누추하다.
물 위에 뜬 해꺼운 쭉정이다. 무겁고 단단한 것만이 아래에 가라앉고 찌그 러지고 빈 쭉정이 베씨는 위에 떠서 할 일 없이 빙 돌고 헤매인다. 인간의 대부분은 그 쭉정이다. 어느 도회가 그렇지 않으랴만 하얼빈은 어디보다도 심한 쭉정이의 도회이다. 거리는 국제적 쭉정이의 진열장이다. 삶에 쫓겨 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 헤매인다. 어제까지 그것을 느끼지 않았던 일마가 아니언만 오늘 불현듯이 그 사상이 줄기차게 솟았다.
거지가 오고가면서 소매를 잡는다. 푼전을 쥐어 주면 그것을 보고 또 다른 거지가 와서 매달린다. 거지는 늙은이와 여자뿐이 아니다. 젊은이도 있고 아이도 있다. 쥐어 주면 기뻐하나 안 쥐어 주어도 그만이다. 픽 웃고 더 조 르는 법 없이 시원스럽게 떨어져 버린다. 제일 핫질 가는 쭉정이는 슬퍼하 지 않고 인생을 낙관하는 것이다. 그 낙관하는 양이 한층 뼈저리게 느껴진다.
꽃 파는 여자는 남루하게 입은 품이 거지와 조금이나 고를 바가 없다. 머 리수건을 치고 거리 모퉁이에 서서 굳이 꽃을 권하는 법 없이 무표정한 얼 굴로 먼 전을 보고 섰다. 때묻은 맨발에 신은 낡은 구두가 누더기같이 썩었다. 구두가 아니다. 썩은 누더기인 것이다. 하루에 몇 묶음의 꽃이 팔리는 지 ── 쭉정이는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맞은편 벤치에는 장님 음악가가 앉아서 수풍금을 타고 있다. 지난날에 육 군 장교였던 그는 전장에서 눈을 잃었다는 것이다. 검은 안경을 펀득 거리 고 몸짓을 하면서 그 좋은 허울을 뭇시선 앞에 맡기고 제 흥에 겨워 즐기는 곡조를 쉴새없이 차례차례로 탄다. 먼 다뉴브강을 그리워하는 고향의 노래 일까. 강과 자연과 마을과 이웃 사람과 ── 고향의 그 모든 것을 그리워하 는 망향의 노래일까. 구슬픈 곡조가 가락가락 흘러서 거리의 구석까지 잦아 든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아까운 노래를 길 가는 사람들은 벌써 주의도 하 지 않는다. 분주한 생존경쟁의 그 마당에서 감상은 절대로 금물이라는 듯 아무도 모르는 체하고 제 할 일이 바쁘다는 듯이 무엇들을 하러 어디로들 가는지 제 길만을 걸어간다. 수풍금의 아름다운 노래는 부질없이 사람들의 귀를 스치고 포도 위로 흘러가고 사라진다. 간혹 푼전을 던져주고 가는 사 람이 있어도 음악가는 그가 누구인 줄도 물론 알 바 없이 손을 쉬지 않는다. 온전히 제 흥에 취해 있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자기의 노래를 스스로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 고향을 그리워 하고 세상을 애달퍼 하는 쭉정이다. 일마의 마음은 그 노래로 말미암아 한결 서글퍼졌다.
쭉정이는 이뿐일까. 허름하게 차리고 무엇을 하려는지 분주하게 포도를 지 나는 무수한 사람 ── 또한 쭉정이들이다. 묘지에서 만난 이봐놉도 쭉정이 요, 병든 에미랴도 쭉정이다. 그리고 나아자 ── 그는 쭉정이가 아니던가.
그 역 쭉정이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럼 나는 대체 무엇일까.”
일마는 자기 또한 하나의 쭉정이임을 알았다. 든 돈 일만 오천 원이 생겼 대야 지금 정도의 문화사업을 한대야 기실 쭉정이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쭉정이끼리이기 때문에 나아자와도 결합이 되었다. 쭉정이는 쭉정이끼리 한 계급이다. 나아자와 자기의 그 어느 한편이 쭉정이가 아니었던들 오늘의 결 합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일마는 쭉정이의 신세가 그다지 불행하지는 않았다. 불 행의 행복감이라고 할까 ──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면서 길 떠날 날을 앞 두고 나아자가 한층 살뜰히 여겨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