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교과 동국역사/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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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편집]

忠宣王의諱ᄂᆞᆫ璋이오字ᄂᆞᆫ仲昻이오初諱ᄂᆞᆫ謜이니在位五年이오壽가五十一이라

충선왕(忠宣王)의 휘(諱)는 장(璋)이고, 자(字)는 중앙(仲昻)이며, 처음의 휘[初諱]는 원(謜)이다. 재위 기간은 5년이고, 51세까지 살았다.


기유[편집]

元年元武宗至大二年○日皇花園二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九年이라春正月에王이元에在ᄒᆞ다○三月에延慶宮을重修ᄒᆞᆯᄉᆡ元의制度ᄅᆞᆯ仿ᄒᆞ다○王이遙命ᄒᆞ야僧一萬을壽寧宮에셔施飯ᄒᆞ고其宮을捨ᄒᆞ야寺ᄅᆞᆯ삼으니母后의冥福을祈ᄒᆞᆷ이러라王이恒常閉戶焚香ᄒᆞ고浮屠ᄅᆞᆯ酷嗜ᄒᆞ야番僧으로ᄒᆞ여곰佛經을繙譯ᄒᆞ고佛戒ᄅᆞᆯ受ᄒᆞ다

충선왕 원년【원(元) 무종(武宗) 지대(至大) 2년 ○ 일황 화원(花園) 2년 ○ 서력 기원 1309년】이었다.

봄 정월에 왕이 원나라에 있었다.

○ 3월에 연경궁(延慶宮)을 중수할 때 원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 왕이 멀리서 명을 내려 수녕궁(壽寧宮)에서 승려 1만 명에게 음식을 베풀고, 그 궁을 바쳐서 절로 삼았는데, 이는 모후(母后)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왕이 항상 문을 닫고 향을 피우며 불교를 매우 좋아했으므로, 번승(番僧)으로 하여금 불경을 번역하게 하고 불계(佛戒)를 받았다.


계축[편집]

五年元仁宗皇慶二年○日皇花園六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十三年이라時에元이王을歸國ᄒᆞ라ᄒᆞ거ᄂᆞᆯ王이辭謝키難ᄒᆞ야子江陵大君燾의게傳位ᄒᆞ니燾ㅣ燕京에셔卽位ᄒᆞ야王을尊ᄒᆞ야上王이라ᄒᆞ고上王은自稱瀋陽王이오兄의子暠으로ᄡᅥ瀋世子삼다ᄅᆞᆯ○夏六月에王이上王과밋公主ᄅᆞᆯ奉ᄒᆞ고回國ᄒᆞ다時에上王이避位ᄒᆞ고留燕코ᄌᆞᄒᆞ나元이不聽ᄒᆞᄂᆞᆫ고로不得已還國ᄒᆞ다

충선왕 5년【원 인종(仁宗) 황경(皇慶) 2년 ○ 일황 화원 6년 ○ 서력 기원 1313년】이었다.

이때에 원(元)나라가 왕에게 귀국하라고 하니, 왕이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아들 강릉대군(江陵大君) 도(燾)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도가 연경(燕京)에서 즉위하고, 왕을 높여서 상왕이라 하였으며, 상왕은 스스로 심양왕(瀋陽王)이라 칭하였다. 형의 아들 고(暠)를 심왕의 세자로 삼았다.

○ 여름 6월에 왕이 상왕과 공주를 모시고 귀국하였다. 이때에 상왕이 왕위를 피하여 연경에 머물고자 하였으나 원이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귀국하였다.


충숙왕[편집]

忠肅王의諱ᄂᆞᆫ燾오字ᄂᆞᆫ宜孝니忠宣王의第二子오在位가前後凡二十五年이오壽ㅣ四十六이라

충숙왕(忠肅王)의 휘(諱)는 도(燾)이고, 자(字)는 의효(宜孝)이니, 충선왕(忠宣王)의 둘째 아들이다. 재위 기간은 전후로 모두 25년이었고, 46세까지 살았다.


갑인[편집]

元年元仁宗延祐元年○日皇花園七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十四年이라春正月에白頤正으로ᄡᅧ評理ᄅᆞᆯ拜ᄒᆞ다頤正은文節의子라時에程朱의學이東方에未及ᄒᆞ엿더니頤正이元에在ᄒᆞ야其學을得ᄒᆞ고東還ᄒᆞ니李齊賢朴忠佐ㅣ몬져師受ᄒᆞ니라○楊廣今京畿道忠淸兩道ᄅᆞᆯ合ᄒᆞ야楊廣道ᄅᆞᆯ삼고慶尙晉安道ᄅᆞᆯ改ᄒᆞ야慶尙道라ᄒᆞ고交州道春川金化等로ᄡᅥ淮陽道ᄅᆞᆯ삼다○上王이元에如ᄒᆞ다上王이萬卷堂을燕京에置ᄒᆞ고李齊賢으로ᄒᆞ여곰元의大儒閻復과姚燧와趙孟頫와虞集等을迎致ᄒᆞ야書史ᄅᆞᆯ考究ᄒᆞᆯᄉᆡ復等이齊賢의著述을見ᄒᆞ고다稱歎不置ᄒᆞ더라○夏六月에博士柳衍等을江南에遣ᄒᆞ야經籍一萬八百卷을購來ᄒᆞ다

충숙왕 원년【원 인종 연우(延祐) 원년 ○ 일황 화원 7년 ○ 서력 기원 1314년】이었다.

봄 정월에 백이정(白頤正)을 평리(評理)에 임명하였다. 백이정은 백문절(白文節)의 아들이다. 이때에 정주학(程朱學)이 동방에 미치지 않았는데, 백이정이 원(元)나라에 있으면서 이 학문을 배워서 돌아오니, 이제현(李齊賢)과 박충좌(朴忠佐)가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 양광(楊廣)【지금의 경기도】과 충청 두 도(道)를 합쳐 양광도로 삼고,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를 고쳐서 경상도라 하였으며, 교주도(交州道)【춘천(春川), 금화(金化) 등】를 회양도(淮陽道)로 삼았다.

○ 상왕이 원에 갔다. 상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연경(燕京)에 설치하고 이제현으로 하여금 원나라의 대유(大儒) 염복(閻復)과 도수(姚燧), 조맹부(趙孟頫), 우집(虞集) 등을 초청하여 경서와 역사를 연구할 때 염복 등이 이제현의 저술을 보고서 모두 칭찬해 마지않았다.

○ 여름 6월에 박사 유연(柳衍) 등을 강남에 보내 경적(經籍) 1만 8백 권을 사 오게 했다.


병진[편집]

三年元仁宗延祐三年○日皇花園九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十六年이라春正月에王이元에如ᄒᆞ다○三月에上王이瀋陽王位ᄅᆞᆯ世子暠의게傳ᄒᆞ고太尉王이라自稱ᄒᆞ다○秋七月에王이元의營王女亦憐眞八剌公主ᄅᆞᆯ聘ᄒᆞ야妃ᄅᆞᆯ삼고冬十月에公主로더브러回國ᄒᆞ다○口傳으로李敞을拜ᄒᆞ야堂后官을삼으니口傅授職이自此始러라

충숙왕 3년【원 인종 연우 3년 ○ 일황 화원 9년 ○ 서력 기원 1316년】이었다.

봄 정월에 왕이 원(元)나라에 갔다.

○ 3월에 상왕이 심양왕(瀋陽王)의 자리를 세자 고(暠)에게 넘겨주고, 태위왕(太尉王)이라 스스로 칭하였다.

○ 가을 7월에 왕이 원나라 영왕(營王)의 딸 역련진팔랄공주(亦憐眞八剌公主)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고, 겨울 10월에 공주와 함께 귀국하였다.

○ 구전(口傳)으로 이창(李敞)을 당후관(堂後官)에 임명하니 이때부터 구전으로 관직을 내리는 것이 시작되었다.


경신[편집]

七年元仁宗延祐七年○日皇後醍醐二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二十年이라夏六月에士子ᄅᆞᆯ試取ᄒᆞᆯᄉᆡ李齊賢과朴孝修가試官이되야詩賦法을罷ᄒᆞ고策問을用ᄒᆞ다○冬十二月에元이上王을吐蕃에流ᄒᆞ다先是元國에伯顔禿古思라ᄒᆞᄂᆞᆫ者ㅣ有ᄒᆞ니곳本國人朱冕의家奴라其身을自宮ᄒᆞ고元仁宗을藩邸에事ᄒᆞ야佞險不法이多ᄒᆞ거ᄂᆞᆯ上王이크게嫉恨ᄒᆞ야元太后의게告ᄒᆞ고그人의게奪ᄒᆞᆫ田土와藏獲을索還ᄒᆞ엿더니밋仁宗이崩ᄒᆞ고太后ㅣ別宮에退居ᄒᆞᄆᆡ禿古思ㅣ百計誣譖ᄒᆞ거ᄂᆞᆯ上王이避禍쿄ᄌᆞᄒᆞ야元主의게請ᄒᆞ야江南에降香ᄒᆞᆯᄉᆡ潤州金山寺에至ᄒᆞ니元主ㅣ使者ᄅᆞᆯ遣ᄒᆞ야上王을執還ᄒᆞ야刑部에下ᄒᆞ엿다가旣而오ᄯᅩ吐蕃에流ᄒᆞ니元京과相距가萬五千里라上王이流所에至ᄒᆞᄆᆡ禿古思ㅣᄯᅩ讒構不已ᄒᆞ야禍가거의不測ᄒᆞ더니元丞相拜住ㅣ營救ᄒᆞ야得免ᄒᆞ다時에王의隨從宰臣等은다逃匿ᄒᆞ고오쟉直寶文閣朴仁幹과大護軍張元祉等이從行ᄒᆞ며李凌幹은金을驛吏의게附與ᄒᆞ야從臣이乏絶ᄒᆞᆫ患이無ᄒᆞ고朴景亮은上王이不免ᄒᆞᆯ가恐ᄒᆞ야自殺ᄒᆞ다○權漢功과蔡洪哲等을遠島에流ᄒᆞ다初에漢功等이元에在ᄒᆞ야怙勢納賂ᄒᆞ거ᄂᆞᆯ王이憎惡ᄒᆞ다가밋上王이吐蕃에去ᄒᆞᄆᆡ王이漢功等을流ᄒᆞ니漢功等이配所에往치아니ᄒᆞ고洪州界에聚集ᄒᆞ야民間을侵擾ᄒᆞ더라

충숙왕 7년

【원 인종 연우 7년 ○ 일황 후제호(後醍醐) 2년 ○ 서력 기원 1320년】이었다.

여름 6월에 사대부[士子]를 시험을 통해서 뽑을 때 이제현(李齊賢)과 박효수(朴孝修)가 시관(試官)이 되어 시부법(詩賦法)을 없애고 책문(策問)을 사용하였다.

○ 겨울 12월에 원(元)나라가 상왕을 토번(吐蕃)으로 유배 보냈다. 이에 앞서 원나라에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나라 사람 주면(朱冕)의 종이었다. 스스로 거세하여 원나라 인종(仁宗)을 번저(藩邸) 때부터 모시면서 아첨하고 법도를 어기는 일이 많았다. 상왕이 그를 매우 미워하여 태후에게 고하고 그가 사람들에게 빼앗은 전토와 노비를 찾아서 돌려주었다. 인종이 돌아가시고 태후가 별궁으로 물러나자 백안독고사가 온갖 계책으로 모함하였다. 상왕이 화를 피하고자 원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강남으로 가서 향을 올리려고 윤주(潤州)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렀다. 이때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상왕을 잡아 와 형부(刑部)에 가두었다가 얼마 후 토번으로 유배 보내니, 원나라의 수도와 거리가 1만 5천 리나 떨어져 있었다. 상왕이 유배지에 도달한 후에도 백안독고사가 모함하기를 그치지 않아서 화가 어떻게 미칠지 예측할 수 없었는데, 원나라의 승상(丞相) 배주(拜住)가 변호해 구해 주어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에 왕을 수행하던 재신(宰臣)들은 모두 도망가 숨고 오직 직보문각(直寶文閣) 박인간(朴仁幹)과 대호군(大護軍) 장원지(張元祉) 등이 수행하였다. 이능간(李凌幹)은 역리(驛吏)에게 금을 주어서 왕을 수행하는 신하들에게 공급이 끊어질 걱정이 없도록 하고, 박경량(朴景亮)은 상왕이 죄를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권한공(權漢功)과 채홍철(蔡洪哲) 등을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 보냈다. 처음에 권한공 등이 원나라에 있을 때 세력을 믿고 뇌물을 받으니 왕이 이들을 증오하다가 상왕이 토번으로 가자 그들을 유배 보냈다. 권한공 등은 유배지로 가지 않고 홍주(洪州) 지역에서 사람을 모아 민간을 침범하고 소란스럽게 하였다.


신유[편집]

八年元英宗至治元年○日皇後醍醐三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二十一年이라五月에王이被召ᄒᆞ야元에如ᄒᆞ다時에瀋陽王暠이元에有寵ᄒᆞ야本國을窺覦ᄒᆞ야元主의게譖曰王이元의詔書ᄅᆞᆯ手裂ᄒᆞ엿다ᄒᆞ니元主ㅣ怒ᄒᆞ야王을京師에執留ᄒᆞ니이에王의從臣柳淸臣吳祁等이王을叛ᄒᆞ고도로혀暠의게附ᄒᆞ야詭謀가日出ᄒᆞ고權漢功等도ᄯᅩᄒᆞᆫ暠의黨이라至是에赦還ᄒᆞ야其親信ᄒᆞᆫ人等으로더브러百官을會集ᄒᆞ고장ᄎᆞ元에請ᄒᆞ야瀋王을立고ᄌᆞᄒᆞ거ᄂᆞᆯ執義尹宣佐ㅣ曰臣子가되야君上을誣訴ᄒᆞᆷ은狗彘도不爲ᄒᆞ겟다ᄒᆞ고其面에唾ᄒᆞ고去ᄒᆞ니이에臺翰이다不從ᄒᆞ거ᄂᆞᆯ漢功이다시百官을勒逼署名ᄒᆞ야元에送ᄒᆞ더니元이ᄯᅩᄒᆞᆫ不納ᄒᆞ니宣佐ᄂᆞᆫ瓘의七世孫이러라

충숙왕 8년【원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 ○ 일황 후제호 3년 ○ 서력 기원 1321년】이었다.

5월에 왕이 부름을 받아 원(元)나라에 갔다. 이때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의 총애를 받아 우리나라를 넘보다가 원나라 황제에게 모함하여 말하기를, “왕이 원나라의 조서를 손으로 찢었습니다.”라고 하니 원나라 황제가 노하여 왕을 원나라의 수도에 잡아 두었다. 이에 왕을 따르던 신하 유청신(柳淸臣)과 오기(吳祁) 등이 왕을 배반하고 오히려 고에게 붙어서 날마다 음모를 꾸몄다. 권한공(權漢功) 등 또한 고의 무리이므로 이때에 이르러 사면을 받고 돌아와서는 친한 사람들과 함께 백관(百官)을 모아 장차 원나라에 청하여 심왕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집의(執義) 윤선좌(尹宣佐)가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 왕을 모함하는 일은 개, 돼지도 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얼굴에 침을 뱉고 갔다. 이에 모든 어사대와 한림원 관리들이 따르지 않았다. 권한공이 다시 백관을 협박하여 서명하도록 하고 원나라에 보냈으나 원나라 또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선좌는 윤관(尹瓘)의 7세손이다.


계해[편집]

十年元英宗至治三年○日皇後醍醐五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二十三年이라春二月에元이上王을朶思麻에量移ᄒᆞ다時에李齊賢이元에在ᄒᆞ야元丞相府에移書ᄒᆞ야本國이累世로歸附ᄒᆞᄂᆞᆫ勤을歷序ᄒᆞ고且曰我老瀋王은卽元世祖의親甥이라其姻親이甚近且舊ᄒᆞ거ᄂᆞᆯ今에吐蕃에遠竄ᄒᆞ야顚崖絶險에十步九折ᄒᆞ고層氷積雪과嵐瘴이薰蒸ᄒᆞᆫ處에革船으로渡河ᄒᆞ고牛箱으로夜宿ᄒᆞ다가間關ᄒᆞᆫ지半年에其域에方至ᄒᆞ야麥飯土屋에辛苦가莫狀ᄒᆞ니此ᄂᆞᆫ行路가聞ᄒᆞ야도오히려於悒ᄒᆞᆯ지라其臣下된者ㅣ何如ᄒᆞ리오此ᄂᆞᆫ僕이當食忘味ᄒᆞ고已臥復起ᄒᆞ며淚盡血繼ᄒᆞᆷ이니伏願丞相은此狀을深察ᄒᆞ라ᄒᆞ고ᄯᅩ元丞相拜住의게致書ᄒᆞ니屢千百言이라다惻怛誠懇ᄒᆞ니拜住ㅣ크게感歎ᄒᆞ야곳元主의게言ᄒᆞ야量移ᄒᆞ거ᄂᆞᆯ齊賢이上王을往謁ᄒᆞ고還ᄒᆞ다旣而오元英宗이崩ᄒᆞ고泰定帝가卽位ᄒᆞ야大赦ᄒᆞᆯᄉᆡ上王을召還ᄒᆞ거ᄂᆞᆯ淑妃ㅣ이에群臣으로ᄒᆞ여곰禿古思ᄅᆞᆯ元의게言ᄒᆞ야誅ᄒᆞ다○冬十一月이라柳淸臣吳潛等이이믜暠을立고ᄌᆞᄒᆞ다가不成ᄒᆞ고元의게告訴ᄒᆞ야本國國號ᄅᆞᆯ罷ᄒᆞ고行省을立ᄒᆞ야內地ᄅᆞᆯ作ᄒᆞ라ᄒᆞ거ᄂᆞᆯ上王이元京에至ᄒᆞ야李齊賢으로ᄒᆞ여곰元政府에致書ᄒᆞ야其不可ᄒᆞᆷ을極言ᄒᆞ니이에事가寢息ᄒᆞ다

충숙왕 10년【원 영종 지치 3년 ○ 일황 후제호 5년 ○ 서력 기원 1323년】이었다.

봄 2월에 원(元)나라가 상왕을 타사마(朶思麻)로 옮기게 하였다. 이때 이제현(李齊賢)이 원나라에 머물면서 원나라 승상부(丞相府)에 서신을 보내 우리나라가 여러 세대에 걸쳐 귀부(歸附)한 성실함을 모두 적고 또 말하기를, “우리 늙은 심왕(瀋王)은 바로 원나라 세조(世祖)의 친조카입니다. 그 인척 관계가 매우 가깝고 또한 오래되었는데, 지금 토번(吐蕃)으로 멀리 쫓겨나서 위험한 절벽 꼭대기에서 열 걸음 걷다가 아홉 번 넘어지고, 층층이 언 얼음과 눈 쌓인 곳을 지나 바람과 열기가 푹푹 찌는 무더운 곳에서 가죽 배를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밤에는 소가죽으로 만든 천막에서 자고 험한 길을 떠난 지 반년 만에 그곳에 막 도착하였습니다. 흙으로 지은 집에서 보리밥을 먹으니 그 고생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길을 가는 사람이 들어도 오히려 슬퍼서 기가 막히는데, 그 신하 된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며, 눈물이 메마르고 피가 멈추지 않고 흐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이 상황을 자세히 살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또 원나라의 승상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리니 모든 말이 측은하고 슬펐으며 정성이 간절하였다. 배주가 크게 감탄하여 곧 원나라 황제에게 말하니, 가까운 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제현이 상왕에게 가서 뵙고 돌아왔다. 얼마 후에 원나라의 영종(英宗)이 돌아가시고 태정제(泰定帝)가 즉위하여 대사면을 할 때 상왕을 소환하였다. 이에 숙비(淑妃)가 여러 신하를 시켜서 원나라에 고하여 백안독고사를 죽였다.

○ 겨울 11월이었다.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 등이 고(暠)를 왕으로 세우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원나라에 고소하여 우리나라의 국호를 폐지하고 행성(行省)을 세워 내지(內地)로 만들라고 하였다. 상왕이 원나라의 수도에 가서 이제현으로 하여금 원나라 정부에 글을 올려서 이것이 불가함을 힘써 말하도록 하니, 그 일이 조용해졌다.


을축[편집]

十二年元泰定帝二年○日皇後醍醐七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二十五年이라夏五月에王이公主로더브러還國ᄒᆞ다○上王이燕京에셔崩ᄒᆞ니諡曰忠宣이오德陵에葬ᄒᆞ다○冬十一月에李齊賢으로ᄡᅧ政堂文學을拜ᄒᆞ고功臣號ᄅᆞᆯ賜ᄒᆞ다

충숙왕 12년【원 태정제(泰定帝) 2년 ○ 일황 후제호 7년 ○ 서력 기원 1325년】이었다.

여름 5월에 왕이 공주와 함께 귀국하였다.

○ 상왕이 연경(燕京)에서 돌아가시니 시호는 충선(忠宣)이라 하고, 덕릉(德陵)에 장사 지냈다.

○ 겨울 11월에 이제현(李齊賢)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하고 공신 칭호를 내렸다.


경오[편집]

十七年元文宗至順元年○日皇後醍醐十二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三十年이라春二月에王이世子禎의게傳位ᄒᆞ니時에世子ㅣ元에在ᄒᆞ야燕京에셔卽位ᄒᆞ고王을遙尊ᄒᆞ야太上王이라ᄒᆞ다○三月에王이元關西王焦八의女德寧公主ᄅᆞᆯ聘ᄒᆞ야妃ᄅᆞᆯ삼다秋七月에上王은元에如ᄒᆞ고王과公主ᄂᆞᆫ還國ᄒᆞ다○擧子ᄅᆞᆯ令ᄒᆞ야律詩四韻百首와小學卽字學이니漢時에謂之小學이라五聲字韻을誦ᄒᆞᆫ後에야赴試ᄅᆞᆯ許ᄒᆞ다

충숙왕 17년【원 문종(文宗) 지순(至順) 원년 ○ 일황 후제호 12년 ○ 서력 기원 1330년】이었다.

봄 2월에 왕이 세자 정(禎)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이때 세자가 원(元)나라에 있었으므로, 연경(燕京)에서 즉위하고 왕을 높여서 태상왕(太上王)이라 하였다.

○ 3월에 왕이 원나라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 덕녕공주(德寧公主)에게 장가들어 비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상왕은 원나라에 가고 왕과 공주는 귀국하였다.

○ 과거 응시자에게 영(令)을 내려 율시 4운(律詩四韻) 1백 수와 『소학(小學)』【즉 『자학(字學)』이니, 한(漢)나라 때에 그것을 『소학』이라 하였다.】과 5성 자운(五聲字韵)을 암송한 후에 비로소 시험을 보도록 허락하였다.


충혜왕[편집]

忠惠王의諱ᄂᆞᆫ禎이오在位가前後凡六年이오壽가三十이라

충혜왕(忠惠王)의 휘(諱)는 정(禎)이고, 재위 기간이 전후하여 모두 6년이었으며, 30세까지 살았다.


신미[편집]

元年元文宗至順二年○日皇後醍醐十三年○西歷紀元後一千四百三十年이라夏四月에王이延福亭에幸行ᄒᆞ야水戲와擊毬ᄅᆞᆯ觀ᄒᆞ고淫佚游畋ᄒᆞ야虛月이無ᄒᆞ더라○秋七月에僉議中贊大寧府院君崔有渰이卒ᄒᆞ다有渰은冲의後라爲人이恬退ᄒᆞ야名利ᄅᆞᆯ不求ᄒᆞ고忠直ᄒᆞᆷ으로ᄡᅧ得罪ᄒᆞ다가後에大用ᄒᆞ야四朝ᄅᆞᆯ歷事ᄒᆞ고國家元老가되야朝野ㅣ倚望ᄒᆞ더니卒ᄒᆞ니年이九十三이오諡曰忠憲이라ᄒᆞ다○八月이라畿內에給田充祿ᄒᆞᄂᆞᆫ科ᄅᆞᆯ罷ᄒᆞ다

충혜왕 원년【원 문종 지순 2년 ○ 일황 후제호 13년 ○ 서력 기원 1331년】이었다.

여름 4월에 왕이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물놀이와 격구(擊毬)를 구경하였다. 왕이 음란하고 게으르며, 사냥을 좋아하여 사냥을 하지 않는 달이 없었다.

○ 가을 7월에 첨의중찬(僉議中贊) 대녕부원군(大寧府院君) 최유엄(崔有渰)이 죽었다. 최유엄은 최충(崔冲)의 후손으로, 사람됨이 조용하고 겸손하며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고 충직했기 때문에 죄를 받았다. 후에 크게 기용되어 네 조정에서 대대로 벼슬하고 나라의 원로(元老)가 되었다. 조야(朝野)의 신망을 받다가 죽으니, 나이가 93세이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 8월이었다. 기내(畿內)에 전토를 지급하여 녹봉을 충당하는 과(科)를 폐지하였다.


충숙왕[편집]

임신[편집]

後元年元文宗至順三年○日皇後醍醐十四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三十二年이라春二月에王이游戲無度ᄒᆞ다ᄒᆞ야王을召去ᄒᆞ고上王이燕京에셔復位ᄒᆞ다

충숙왕 후 원년【원 문종 지순 3년 ○ 일황 후제호 14년 ○ 서력 기원 1332년】이었다.

봄 2월에 왕이 노는 데에 법도가 없다고 하여 원(元)나라에서 왕을 소환해 가서 폐위시켰다. 상왕이 연경(燕京)에서 다시 즉위하였다.


계유[편집]

二年元順帝元統元年○日皇後醍醐十五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三十三年이라夏六月에王이公主로더브러回國ᄒᆞᆯᄉᆡ瀋王暠이從還ᄒᆞ다○冬十一月에王이夢兆로ᄡᅧ卍音은이라改名ᄒᆞ고榜을貼ᄒᆞ야人民을知喩ᄒᆞ다

충숙왕 후2년【원 순제(順帝) 원통(元統) 원년 ○ 일황 후제호 15년 ○ 서력 기원 1333년】이었다.

여름 6월에 왕이 공주와 함께 귀국하였는데 심왕(瀋王) 고(暠)가 따라 돌아왔다.

○ 겨울 11월에 왕이 꿈에 나타난 징조 때문에 이름을 만(卍)【음은 만(蠻)】으로 바꾸고 방(榜)을 붙여 백성들에게 알렸다.


병자[편집]

五年元順帝至元二年○日皇後醍醐十八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三十六年이라冬十月에王이元에如ᄒᆞ다○十二月에元이廢王을遣ᄒᆞ야還國ᄒᆞ다○贊成事元忠이卒ᄒᆞ다忠의爲人이誠慤不撓ᄒᆞ야王이元에被留ᄒᆞᆯ時에侍從大臣이라携貳ᄒᆞ되忠은終始가一節이러라

충숙왕 후5년【원 순제 지원(至元) 2년 ○ 일황 후제호 18년 ○ 서력 기원 1336년】이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원(元)나라에 갔다.

○ 12월에 원나라가 폐왕(廢王)을 보내 귀국하도록 했다.

○ 찬성사(贊成事) 원충(元忠)이 죽었다. 원충의 사람됨이 성실하고 지조가 있어서 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시종대신(侍從大臣)이었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지만 원충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무인[편집]

七年元順帝至元四年○日皇後醍醐二十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三十八年이라王이還國ᄒᆞ다○元이遣使ᄒᆞ야宦者와童女ᄅᆞᆯ求ᄒᆞ거ᄂᆞᆯ時에典衣副令李穀이元에在ᄒᆞ야御史臺에言ᄒᆞ야其事ᄅᆞᆯ請罷ᄒᆞ고ᄯᅩ元主의게上書ᄒᆞᆯᄉᆡ辭意가懇明ᄒᆞ니元主ㅣ聽納ᄒᆞ더라

충숙왕 후7년【원 순제 지원 4년 ○ 일황 후제호 20년 ○ 서력 기원 1338년】이었다.

왕이 귀국하였다.

○ 원(元)나라가 사신을 보내서 내시[宦者]와 어린 여자[童女]를 구하니, 이때 전의부령(典衣副令) 이곡(李穀)이 원나라에 있다가 어사대(御史臺)에 말하여 그 일을 없애도록 청하였다. 또 원나라 황제에게도 글을 올렸는데, 그 뜻이 매우 간절하고 분명했으므로 원나라 황제가 이를 들어주었다.


을묘[편집]

八年元順帝至元五年○日皇後村上元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三十九年이라春三月에王이崩ᄒᆞ니諡曰忠肅이오毅陵에葬ᄒᆞ고廢王이卽位ᄒᆞ다○夏六月이라王이荒淫無度ᄒᆞ야其庶母壽妃權氏ᄅᆞᆯ烝ᄒᆞ고ᄯᅩ忠肅王妃慶華公主ᄅᆞᆯ逼淫ᄒᆞ며左右諸臣妻妾의姿色이有ᄒᆞᆫ者ᄅᆞᆯ다奪取ᄒᆞ거ᄂᆞᆯ政丞曹頔이廢立코ᄌᆞᄒᆞ야瀋陽王暠을元에遣入ᄒᆞ야元의力을借ᄒᆞ라ᄒᆞ고드ᄃᆡ여兵士로ᄡᅧ王宮을圍ᄒᆞ야王의肩을射中ᄒᆞ더니이윽고頔이被執ᄒᆞ야見殺ᄒᆞ고暠은其後에元에셔死ᄒᆞ다

충숙왕 후8년【원 순제 지원 5년 ○ 일황 후촌상(後村上) 원년 ○ 서력 기원 1339년】이었다.

봄 3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충숙(忠肅)이라 하고 의릉(毅陵)에 장사 지냈다. 폐위되었던 왕이 즉위하였다.

○ 여름 6월이었다. 왕이 음탕하고 법도가 없어서, 서모(庶母, 아버지의 첩) 수비(壽妃) 권씨(權氏)를 간음하고, 또 충숙왕(忠肅王)의 비 경화공주(慶華公主)를 강제로 간음하였다. 좌우 신하들의 처와 첩 가운데 자색이 뛰어난 사람을 빼앗았다. 정승(政丞) 조돈(曹崸)이 왕을 폐위시키고자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원(元)나라에 보내 원나라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왕의 어깨에 화살을 쏘아 맞혔다. 결국 조돈은 잡혀서 죽었고, 고는 그 후에 원나라에서 죽었다.


충혜왕[편집]

경진[편집]

後元年元順帝至元六年○日皇後村上二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四十年이라順天君蔡洪哲이死ᄒᆞ다洪哲의爲人이貪鄙ᄒᆞ나才性이精巧ᄒᆞ야詞章技藝가다其能을各盡ᄒᆞ고活人堂을構ᄒᆞ야藥物을施ᄒᆞ며權溥以下國老八人을邀請ᄒᆞ야耆英會ᄅᆞᆯ作ᄒᆞ고紫霞洞의歌曲을製ᄒᆞ야樂府에傳ᄒᆞ더라○星山君李兆年이致仕ᄒᆞ다時에王이淫縱이日甚ᄒᆞᆯᄉᆡ松崗에步出ᄒᆞ야雀을彈ᄒᆞ거ᄂᆞᆯ兆年이跪諫ᄒᆞᆫᄃᆡ王이不聽ᄒᆞᄂᆞᆫ지라兆年이歎曰君惡을匡救치못ᄒᆞ니事君ᄒᆞᄂᆞᆫ道가아니라ᄒᆞ고明日에匹馬還鄕ᄒᆞ다○成均祭酒禹倬이卒ᄒᆞ다倬은丹山人今丹이라經史ᄅᆞᆯ通ᄒᆞ며易學이深奧ᄒᆞ고忠宣의게上書極諫ᄒᆞᆫ後에禮安縣에退老ᄒᆞ거ᄂᆞᆯ忠肅王이其忠義ᄅᆞᆯ嘉ᄒᆞ야再召ᄒᆞ되不起ᄒᆞ더라

충혜왕 후 원년【원 순제 지원 6년 ○ 일황 후촌상 2년 ○ 서력 기원 1340년】이었다.

순천군(順天君) 채홍철(蔡洪哲)이 죽었다. 채홍철의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야비했으나 재주가 정교하여 문장과 기예에 모두 그 재능을 발휘하였다. 활인당(活人堂)을 세워서 약제를 나누어 주었으며, 권부(權溥) 이하 나라의 원로 여덟 명을 초청하여 기영회(耆英會)를 만들고, 『자하동(紫霞洞)』이란 가곡(歌曲)을 지어 악부(樂府)에 전하였다.

○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이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때에 왕이 음란하고 방탕함이 날로 심해졌는데, 송강(松崗)에 걸어 나가 참새를 쏘자 이조년이 무릎 꿇으며 간언하였다. 그러나 왕이 듣지 않으므로 이조년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니 왕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고 다음 날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성균 제주(成均祭酒) 우탁(禹倬)이 죽었다. 우탁은 단산(丹山)【지금의 단양(丹陽)】 사람으로 유교 경전과 역사에 능통했으며, 역학(易學)에도 심오하였다. 충선왕(忠宣王)에게 글을 올려 힘을 다해 간청한 후에 늙었다는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예안현(禮安縣)에 머물렀다. 충숙왕(忠肅王)이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서 거듭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계미[편집]

四年元順帝至正三年○日皇後村上五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四十三年이라春三月에王이東郊에幸ᄒᆞ야彈丸으로ᄡᅥ人을射ᄒᆞ니行路가다避走ᄒᆞ더라○夏五月에星山君李兆年이卒ᄒᆞ다兆年이自少力學ᄒᆞ고밋立朝ᄒᆞᄆᆡ堅確敢言ᄒᆞ야ᄆᆡ양王을入見ᄒᆞ면王이其履聲을聞ᄒᆞ고必曰兆年이來ᄒᆞᆫ다ᄒᆞ고左右를屛ᄒᆞ고整容以俟ᄒᆞ니其見憚이如此러라諡曰文烈이라ᄒᆞ다○冬十一月에元이王의狂虐이愈甚ᄒᆞᆷ을見ᄒᆞ고王을執去ᄒᆞ야揭陽縣에流ᄒᆞ다

충혜왕 후4년【원 순제 지정(至正) 3년 ○ 일황 후촌상 5년 ○ 서력 기원 1343년】이었다.

봄 3월에 왕이 동쪽 교외로 행차하여 탄환으로 사람을 쏘니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모두 피하여 달아났다.

○ 여름 5월에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이 죽었다. 이조년이 어려서부터 배움에 힘쓰고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명확하고 과감하게 말을 하였다. 왕을 알현하여 들어갈 때마다 왕이 발소리만 듣고도 반드시 말하기를, “이조년이 오고 있구나.”라고 하고 좌우를 물리치고 용모를 가지런히 하며 기다렸다. 왕이 그를 보기를 삼가는 것이 이와 같았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라고 하였다.

○ 겨울 11월에 원(元)나라가 왕의 포학함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보고 왕을 잡아서 게양현(揭陽縣)으로 유배 보냈다.


갑신[편집]

五年元順帝至正四年○日皇後村上六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四十四年이라春正月에王이揭陽縣에往ᄒᆞ다가未至ᄒᆞ고岳陽縣에셔崩ᄒᆞ니諡曰忠惠오永陵에葬ᄒᆞ다○二月에世子昕이元에在ᄒᆞ다가歸國ᄒᆞ야卽位ᄒᆞ니年이八歲러라○李齊賢이建議ᄒᆞ야先朝弊政을革罷ᄒᆞᆯᄉᆡ內乘鷹坊과밋寶興德寧二庫에屬ᄒᆞᆫ土田奴婢ᄅᆞᆯ査核ᄒᆞ야本主의게還ᄒᆞ다○六月에書筵을置ᄒᆞ고蔡河中과韓宗愈와李齊賢과朴忠佐와金倫과裴佺과盧永瑞와李蒨과辛裔와李仁復等四十八人으로ᄡᅧ四番을分ᄒᆞ야更日侍讀ᄒᆞᆯᄉᆡ王이일즉李杜詩ᄅᆞᆯ觀코자ᄒᆞᆫᄃᆡ宗愈ㅣ曰古人의詩句ᄂᆞᆫ治道에無益ᄒᆞ다ᄒᆞ고맛ᄎᆞᆷᄂᆡ進納지아니ᄒᆞ더라

충혜왕 후5년【원 순제 지정 4년 ○ 일황 후촌상 6년 ○ 서력 기원 1344년】이었다.

봄 정월에 왕이 게양현(揭陽縣)으로 가다가 도달하지 못하고 악양현(岳陽縣)에서 돌아가셨다. 시호는 충혜(忠惠)라 하고, 영릉(永陵)에 장사 지냈다.

○ 2월에 세자 흔(昕)이 원(元)나라에 있다가 귀국해 즉위하니, 나이가 8세였다.

○ 이제현(李齊賢)이 건의하여 전대 왕의 잘못된 정치를 혁파할 때, 내승(內乘)과 응방(鷹坊), 그리고 보흥고(寶興庫)와 덕령고(德寧庫)에 속해 있던 토지와 노비를 모두 조사하여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 6월에 서연(書筵)을 열고 채하중(蔡河中)과 한종유(韓宗愈), 이제현, 박충좌(朴忠佐), 김윤(金倫), 배전(裴佺), 노영서(盧永瑞), 이천(李蒨), 신예(辛裔), 이인복(李仁復) 등 48명을 4번(番)으로 나누어서 하루씩 번갈아 가며 시독[侍讀]하도록 하였다. 왕이 한 번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를 보고자 하였는데, 한종유가 말하기를, “옛 사람의 시구(詩句)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고는 끝내 이를 올리지 않았다.


충목왕[편집]

忠穆王의諱ᄂᆞᆫ昕이니在位四年이오壽가十二라

충목왕의 휘(諱)는 흔(昕)이니, 재위 기간은 4년이고, 12세까지 살았다.


무자[편집]

四年元順帝至正八年○日皇後村上十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四十八年이라十二月에王이崩ᄒᆞ니諡曰忠穆이오明陵에葬ᄒᆞ다王이無嗣ᄒᆞ거ᄂᆞᆯ忠惠王의妃德寧公主ㅣ奇轍과王煦로ᄡᅧ國事ᄅᆞᆯ權任ᄒᆞ다

충목왕 4년【원 순제 지정 8년 ○ 일황 후촌상 10년 ○ 서력 기원1348년】이었다.

12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충목(忠穆)이라 하고, 명릉(明陵)에 장사 지냈다. 왕이 후사가 없었으므로 충혜왕(忠惠王)의 비 덕녕공주(德寧公主)가 기철(奇轍)과 왕후(王煦)에게 임시로 국사를 맡겼다.


충정왕[편집]

忠定王의諱ᄂᆞᆫ㫝니在位三年이오壽가十五라

충정왕의 휘(諱)는 저(㫝)이니, 재위 기간은 3년이고, 15세까지 살았다.


기축[편집]

元年元順帝至正九年○日皇後村上十一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四十九年이라夏四月에忠穆王의庶弟慶昌院君㫝ㅣ立ᄒᆞ니時年이十二라鐵城君李君俊을命ᄒᆞ야國政을聽斷ᄒᆞ다○冬十月에江陵大君祺ㅣ元의魏王女魯國公主ᄅᆞᆯ聘ᄒᆞ니祺ᄂᆞᆫ忠惠王의母弟러라

충정왕 원년【원 순제 지정 9년 ○ 일황 후촌상 11년 ○ 서력 기원 1349년】이었다

여름 4월에 충목왕(忠穆王)의 이복동생 경창원군(慶昌院君) 저(㫝)가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가 12세였으므로, 철성군(鐵城君) 이군해(李君侅)에게 명하여 나랏일을 결정하게 하였다.

○ 겨울 10월에 강릉대군(江陵大君) 기(祺)가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맞아 장가가니, 기는 충혜왕(忠惠王)의 동생이었다.


경인[편집]

二年元順帝至正十年○日皇後村上十二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五十年이라春二月에日本이南邊을侵ᄒᆞ다日本이元의攻ᄒᆞᆷ을忿恨ᄒᆞ야恒常我의게釋憾코ᄌᆞᄒᆞ나元을畏ᄒᆞ야敢發치못ᄒᆞ더니至是ᄒᆞ야元의政事가衰弱ᄒᆞᆷ을見ᄒᆞ고固城等處ᄅᆞᆯ來侵ᄒᆞ거ᄂᆞᆯ合浦在今昌原千戶崔禪이擊破ᄒᆞ니自此로日患이不絶ᄒᆞ더라

충정왕 2년【원 순제 지정 10년 ○ 일황 후촌상 12년 ○ 서력 기원 1350년】이었다.

봄 2월에 일본(日本)이 남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일본이 원(元)나라가 공격했던 것에 원한을 품고 항상 우리에게 분함을 풀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를 두려워하여 감히 드러내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원나라의 정사(政事)가 쇠약해진 것을 알고 고성(固城) 등지를 침략하니, 합포(合浦)【지금의 창원(昌原)에 있다.】의 천호(千戶) 최선(崔禪)이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의 침략이 끊이질 않았다.


신묘[편집]

三年元順帝至正十一年○日皇後村上十三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五十一年이라冬十月에江陵君祺ㅣ王位에卽ᄒᆞ니元의力을藉ᄒᆞᆷ이오王은遜位ᄒᆞ야江華에居ᄒᆞ다

충정왕 3년【원 순제 지정 11년 ○ 일황 후촌상 13년 ○ 서력 기원 1351년】이었다.

겨울 10월에 강릉군(江陵君) 기(祺)가 왕위에 오르니, 원(元)나라의 힘을 빌린 것이었다. 왕은 왕위에서 물러나 강화(江華)에 머물렀다.


공민왕[편집]

恭愍王의諱ᄂᆞᆫ顓이오初諱ᄂᆞᆫ祺니在位二十三年이오壽가四十五라

공민왕의 휘(諱)는 전(顓)이고, 처음의 휘[初諱]는 기(祺)이다. 재위 기간은 23년이고, 45세까지 살았다.


임진[편집]

元年元順帝至正十二年○日皇後村上十四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五十二年이라春正月에贊成事柳濯으로ᄡᅧ全羅道萬戶ᄅᆞᆯ拜ᄒᆞ야日本을防備ᄒᆞ라ᄒᆞ니濯이持軍이嚴整ᄒᆞ고士卒로더브러甘苦ᄅᆞᆯ同ᄒᆞ며日本이萬德社에入ᄒᆞ야剽掠ᄒᆞ거ᄂᆞᆯ濯이輕騎로ᄡᅧ追捕ᄒᆞ야其俘ᄅᆞᆯ索還ᄒᆞ니自此로日本이다시敢犯치못ᄒᆞ더라○王이廢王을酖殺ᄒᆞ고諡曰忠定이라ᄒᆞ고聰陵에葬ᄒᆞ다○成均生員李穡이上書ᄒᆞ야時事ᄅᆞᆯ言ᄒᆞ니一曰經界ᄅᆞᆯ正ᄒᆞ고二曰日寇ᄅᆞᆯ禦ᄒᆞ고三曰武備ᄅᆞᆯ修ᄒᆞ고四曰學校ᄅᆞᆯ崇ᄒᆞ고五曰異端을抑ᄒᆞᆷ이라王이다嘉納ᄒᆞ니穡은穀의子라先是穀이元에仕ᄒᆞᆯ時에穡이元의國子生員이되야三年에學業이大進ᄒᆞ더라○夏五月에僧普虛ᄅᆞᆯ召ᄒᆞ야佛法을問ᄒᆞ고王師ᄅᆞᆯ拜ᄒᆞ니普虛ㅣ王을勸ᄒᆞ야敎化ᄅᆞᆯ修明ᄒᆞ고佛法을勿信ᄒᆞ라ᄒᆞ나其實은權勢ᄅᆞᆯ招攬ᄒᆞᆷ이러라○冬十月에趙日新이伏誅ᄒᆞ다初에日新이燕京의隨從舊恩으로功臣號ᄅᆞᆯ賜ᄒᆞ엿더니日新이跋扈ᄒᆞᆯ志가有ᄒᆞ야王宮의宿衛臣僚ᄅᆞᆯ殺ᄒᆞ고스ᄉᆞ로右政丞이되거ᄂᆞᆯ王이金添壽ᄅᆞᆯ命ᄒᆞ야執斬ᄒᆞ다○李齊賢과曹益淸으로左右政丞을拜ᄒᆞ다

공민왕 원년【원 순제 지정 12년 ○ 일황 후촌상 14년 ○ 서력 기원 1352년】이었다.

봄 정월에 찬성사(贊成事) 유탁(柳濯)을 전라도 만호(全羅道萬戶)에 임명하여 일본(日本)의 침략을 막도록 하였다. 유탁이 군사를 지휘함이 엄정하였고 병사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였다. 일본이 만덕사(萬德社)에 침입하여 약탈하니, 유탁이 빠른 기병으로 추격하여 붙잡았다. 잡혀 간 포로들을 찾아서 돌아오니, 이후로 일본이 다시는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 왕이 폐왕에게 독주를 먹여 죽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라 하고, 총릉(聰陵)에 장사 지냈다.

○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이색(李穡)이 글을 올려 당시에 할 일을 말하기를, “첫째 경계(經界)를 바르게 하고, 둘째 왜구[日寇]를 방어하고, 셋째 군비를 정비하고, 넷째 학교를 높이고, 다섯째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쁘게 모두 받아들였다. 이색은 이곡(李穀)의 아들이다. 이에 앞서 이곡이 원(元)나라에서 벼슬을 할 때 이색이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이 되어 3년간 학업이 크게 진전하였다.

○ 여름 5월에 승려 보허(普虛)를 불러서 불법에 대해 묻고 왕사(王師)로 삼았다. 보허가 왕에게 권하여 교화(敎化)를 닦아 밝히고 불법(佛法)을 믿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권세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 겨울 10월에 조일신(趙日新)이 처형되었다. 처음에 조일신이 왕을 모시고 연경(燕京)에 간 옛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 칭호를 받았다. 그런데 조일신이 제멋대로 할 뜻을 품고 왕궁의 숙위 신하들을 죽이고 스스로 우정승(右政丞)이 되었다. 왕이 김첨수(金添壽)에게 명하여 잡아서 목을 베도록 하였다.

○ 이제현(李齊賢)과 조익청(曹益淸)을 좌정승(左政丞), 우정승에 임명하였다.


갑오[편집]

三年元順帝至正十四年○日皇後村上十六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五十四年이라秋七月에柳濯等을遣ᄒᆞ야軍士ᄅᆞᆯ率ᄒᆞ고元에赴ᄒᆞ다時에元의政事가陵夷ᄒᆞ야盜賊이蜂起ᄒᆞ고天下ㅣ大亂ᄒᆞ야我의게遣使ᄒᆞ야徵兵ᄒᆞ거ᄂᆞᆯ王이이에軍士二萬餘人을發ᄒᆞ야濯等으로ᄒᆞ여곰元丞相脫脫을往會ᄒᆞ야張士誠을高郵에伐ᄒᆞ다가不利ᄒᆞ고淮安을移防ᄒᆞ야前後數十戰에將軍崔瑩이가장力戰ᄒᆞ다가數槍을被ᄒᆞ고殺獲이甚多ᄒᆞ며明年에師ㅣ還ᄒᆞ다

공민왕 3년【원 순제 지정 14년 ○ 일황 후촌상 16년 ○ 서력 기원 1354년】이었다.

가을 7월에 유탁(柳濯)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원(元)나라로 가게 하였다. 당시 원나라의 정사가 쇠퇴하여 도적이 봉기하고 나라가 크게 혼란스러워지니,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징발하였다. 이에 왕이 군사 2만여 명을 선발하여 유탁 등으로 하여금 원나라의 승상(丞相) 탈탈(脫脫)을 만나 고우(高郵)에 가서 장사성(張士誠)을 토벌케 하였으나, 불리해져서 회안(淮安)으로 옮겨 방어하였다. 전후 수십 번을 싸우는 가운데 장군 최영(崔瑩)이 가장 힘써 싸우다가 여러 번 창을 맞았고, 죽이고 포로로 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듬해에 군사가 돌아왔다.


을미[편집]

四年元順帝至正十五年○日皇後村上十七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五十五年이라冬十二月에我桓祖大王이雙城今永으로브터來朝ᄒᆞ시다桓祖의姓은李氏오諱ᄂᆞᆫ子春이오蒙古諱ᄂᆞᆫ吾魯思不花니系ᄂᆞᆫ全州오新羅司空諱翰의苗裔오三世祖ᄂᆞᆫ曰

穆祖大王이니諱ᄂᆞᆫ安社라全州로브터三陟에徙ᄒᆞ시고ᄯᅩ三陟으로브터宜州今德에徙ᄒᆞ시니朝廷이宜州防禦使ᄅᆞᆯ拜ᄒᆞ고高原에屯ᄒᆞ야元人을禦ᄒᆞ라ᄒᆞᆯᄉᆡ時에元人이雙城에來屯ᄒᆞ야穆祖ᄅᆞᆯ請ᄒᆞ야協力고ᄌᆞᄒᆞ거ᄂᆞᆯ穆祖ㅣ不得已ᄒᆞ야蒙의게歸ᄒᆞ시고ᄯᅩ斡東今慶興地에徙ᄒᆞ시니蒙이南京五千戶所達魯花赤을拜ᄒᆞ니此ᄂᆞᆫ高宗四十一年이오穆祖의子ᄂᆞᆫ曰

翼祖大王이니諱ᄂᆞᆫ行里오元의五千戶所達魯花赤을襲封ᄒᆞ시더니忠烈王時에元이日本을伐ᄒᆞ거ᄂᆞᆯ翼祖ㅣ元主의命으로忠烈을來見ᄒᆞ실ᄉᆡ因謝ᄒᆞ사曰先臣이北去ᄒᆞᆷ은實노虎狼의口ᄅᆞᆯ脫ᄒᆞᆷ이오國恩을背ᄒᆞᆷ이아니로소이다ᄒᆞ신ᄃᆡ忠烈이曰卿은可謂不忘本이라ᄒᆞ더라翼祖의子ᄂᆞᆫ曰

度祖大王이니諱ᄂᆞᆫ椿이라忠肅王時에來朝ᄒᆞ시고度祖ㅣ桓祖ᄅᆞᆯ生ᄒᆞ시니桓祖ㅣ騎射ᄅᆞᆯ善ᄒᆞ고士卒이樂附ᄒᆞ며于是에ᄯᅩ來朝ᄒᆞ시다初에雙城의地가沃饒ᄒᆞ야東南人民이歸附ᄒᆞᄂᆞᆫ者ㅣ多ᄒᆞ거ᄂᆞᆯ朝廷이行省郞李壽山을遣ᄒᆞ야元의中書遼陽二省官員으로더브러民의新舊籍을區分ᄒᆞ야三省이라稱ᄒᆞ더니其後에撫綏가失宜ᄒᆞ야稍稍히流徙ᄒᆞᄂᆞᆫ지라王이桓祖ᄅᆞᆯ命ᄒᆞ야主管ᄒᆞ라ᄒᆞ니民人이이에其業을安ᄒᆞ더라

공민왕 4년【원 순제 지정 15년 ○ 일황 후촌상 17년 ○ 서력 기원 1355년】이었다.

겨울 12월에 우리 환조대왕(桓祖大王)이 쌍성(雙城)【지금의 영흥(永興)】으로부터 와서 왕을 알현하셨다. 환조의 성은 이(李)씨이고 휘(諱)는 자춘(子春)이다. 몽고(蒙古)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고, 계통은 전주(全州)이며, 신라(新羅)의 사공(司空) 휘는 한(翰)의 먼 후손이다. 3대조는 목조대왕(穆祖大王)이라 하니 휘는 안사(安社)이다. 전주에서 삼척(三陟)으로 옮겨 가 살았고, 또 삼척에서 의주(宜州)【지금의 덕원(德源)】로 이사하였다. 조정에서 의주 방어사(宜州防禦使)로 임명하고, 고원(高原)에 주둔하여 원(元)나라 사람을 막으라고 하였다. 그때 원나라 사람이 쌍성에 와 주둔하여 목조에게 협조하기를 청하니 목조가 부득이하여 몽고에 귀부하였다. 또 알동(斡東)【지금의 경흥(慶興) 지역】으로 이주하시니, 몽고가 남경(南京) 5천호소(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하였는데, 그때가 고종(高宗) 41년이었다. 목조의 아들은 익조대왕(翼祖大王)이라 하니 휘는 행리(行里)이고, 원의 5천호소 다루가치에 세습하여 봉해졌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나라가 일본(日本)을 정벌하자 익조가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충렬왕을 알현하였는데, 그때 물러나면서 말하기를, “선친[先臣]이 북쪽으로 간 것은 실상은 호랑이와 이리의 입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지 나라의 은혜를 배반한 것이 아니옵니다.”라고 하셨다. 충렬왕이 말하기를, “경은 근본을 잊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익조의 아들은 도조대왕(度祖大王)이라고 하니, 휘는 춘(椿)이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와서 왕을 만나 뵈셨다. 도조가 환조를 낳으시니, 환조는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잘하고 병졸이 잘 따랐는데, 이번에 또 왕을 만나 뵈셨다. 처음에 쌍성의 땅이 비옥하여 동남쪽 백성 가운데 귀부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조정에서 행성랑(行省郞) 이수산(李壽山)을 보내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과 요양성(遼陽省) 관원과 함께 백성의 신구 호적을 구분하여 3성이라 칭하였다. 그 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일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자 점차 흩어져 떠나므로, 왕이 환조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니, 백성이 생업에 안정을 얻게 되었다.


병신[편집]

五年元順帝至正十六年○日皇後村上十八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五十六年이라夏五月에奇轍權謙盧頙等이伏誅ᄒᆞ다初에轍의妹弟ㅣ元에選入ᄒᆞ야元帝의第三皇后ㅣ되야太子愛猷識理達을生ᄒᆞ거ᄂᆞᆯ元이이에奇氏三世ᄅᆞᆯ封ᄒᆞ야王을삼으니轍이自此로驕橫ᄒᆞ야王의게稱臣치아니ᄒᆞ고ᄯᅩ謙과頙은元帝와밋元太子의게女ᄅᆞᆯ納ᄒᆞ고三人이聲勢相倚ᄒᆞ더니至是ᄒᆞ야天下ㅣ亂ᄒᆞᆷ을見ᄒᆞ고自全키難ᄒᆞᆯ가恐ᄒᆞ야셔로期會ᄒᆞ야大逆을圖謀ᄒᆞ거ᄂᆞᆯ王이密直姜仲卿等을命ᄒᆞ야甲士로ᄒᆞ여곰擊殺ᄒᆞ다○元이征東行中書省理問所ᄅᆞᆯ罷ᄒᆞ다○王이舊疆을收復고ᄌᆞᄒᆞ야印璫과柳仁雨等을命ᄒᆞ야鴨江以西八站과밋雙城等諸城을取ᄒᆞ다○秋七月에舊日官制ᄅᆞᆯ復ᄒᆞᆯᄉᆡ文宗舊制ᄅᆞᆯ多取ᄒᆞ다○九月에桓祖로ᄡᅥ太僕卿을拜ᄒᆞ고第宅一區ᄅᆞᆯ賜ᄒᆞ거ᄂᆞᆯ桓祖ㅣ因ᄒᆞ야開京에留居ᄒᆞ시다○冬十月에元이遣使ᄒᆞ야來ᄒᆞ니是時天下에兵亂이大起ᄒᆞ야元이故地收復ᄒᆞᆷ을暇치못ᄒᆞᆷ이러라○冬十一月에李齊賢으로ᄡᅧ侍中을拜ᄒᆞ다○李穡으로ᄡᅧ吏部侍郞兼兵部郞中을拜ᄒᆞ다時에穡이時政八事ᄅᆞᆯ陳ᄒᆞᆯᄉᆡ其一은吏兵部의選擧ᄅᆞᆯ復ᄒᆞᆷ이라王이嘉納ᄒᆞ야是職을授ᄒᆞ다○十二月에僧普虛ㅣ道詵의讖說로ᄡᅧ王을說ᄒᆞ야曰漢陽에都ᄒᆞ면三十六國이來朝ᄒᆞᆫ다ᄒᆞ거ᄂᆞᆯ王이其言을惑ᄒᆞ야漢陽宮을修葺ᄒᆞ고遷都코ᄌᆞᄒᆞ다가不果ᄒᆞ다

공민왕 5년【원 순제 지정 16년 ○ 일황 후촌상 18년 ○ 서력 기원 1356년】이었다.

여름 5월에 기철(奇轍), 권겸(權謙), 노책(盧頙) 등이 처형되었다. 처음 기철의 누이동생이 원(元)나라에 뽑혀 들어가 원나라 황제의 제2 황후가 되어 태자 애유식리달(愛猷識理達)을 낳았다. 이에 원나라가 기씨 3세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니 기철이 이후로 교만하고 횡포하여 왕에게 신하라 칭하지 않았다. 또 권겸과 노책은 원나라 황제와 태자에게 딸을 시집 보냈는데, 세 사람이 서로 세력을 의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천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스스로 보전하기가 어려울까 두려워 서로 기일을 정해 만나 대역을 도모하였다. 왕이 밀직(密直) 강중경(姜仲卿) 등에게 명하여 갑사(甲士)로 하여금 그들을 쳐서 죽이게 하였다.

○ 원이 정동행중서성 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였다.

○ 왕이 옛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인당(印璫)과 유인우(柳仁雨) 등에게 명하여 압록강(鴨綠江) 서쪽 8참(站)과 쌍성(雙城) 등 여러 성을 취하였다.

○ 가을 7월에 옛날 관제(官制)를 회복할 때 문종(文宗) 당시의 옛 제도를 많이 도입하였다.

○ 9월에 환조(桓祖)를 태복경(太僕卿)에 임명하고 집 한 채를 하사하였다. 환조가 이로 인해 개경(開京)에 살게 되셨다.

○ 겨울 10월에 원나라가 사신을 보내 왔다. 이때에 천하에 병란(兵亂)이 크게 일어나자 원나라가 우리가 옛 땅을 회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 겨울 11월에 이제현(李齊賢)을 시중(侍中)에 임명하였다.

○ 이색(李穡)을 이부 시랑 겸 병부 낭중(吏部侍郞兼兵部郞中)에 임명하였다. 이때 이색이 시정(時政)에 관한 여덟 가지 일을 올렸는데, 그 하나는 이부와 병부의 관리 선발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왕이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이색에게 그 직책을 제수하였다.

○ 12월에 승려 보허(普虛)가 도선(道詵)의 참설로 왕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한양(漢陽)에 도읍을 하면 36개국이 찾아와서 조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에 현혹되어 한양궁(漢陽宮)을 수리하고 천도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유[편집]

六年元順帝至正十七年○日皇後村上十九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五十七年이라九月에政堂文學安輔ㅣ卒ᄒᆞ다輔ㅣ剛直廉潔ᄒᆞ고臨事에大體ᄅᆞᆯ務存ᄒᆞ고依違顧望이無ᄒᆞ며밋卒ᄒᆞᄆᆡ家에擔石의儲가無ᄒᆞ더라諡曰文敬이라ᄒᆞ다○冠과服色을改ᄒᆞᆯᄉᆡ文武百官은黑衣靑笠이오僧은黑巾이오女ᄂᆞᆫ黑羅러라○忠烈王以上의게尊號ᄅᆞᆯ加上ᄒᆞ다○冬十月에비로소三年喪을行ᄒᆞ니諫官李穡의言을從ᄒᆞᆷ이러라

공민왕 6년【원 순제 지정 17년 ○ 일황 후촌상 19년 ○ 서력 기원 1357년】이었다.

9월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안보(安輔)가 죽었다. 안보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 결백하였고, 일을 처리할 때는 큰 틀을 보존하려고 힘썼으며, 우물쭈물하며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죽었을 때 집에는 한 섬의 곡식도 없었다.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

○ 의관과 복색을 바꿀 때에 문무백관은 검은 옷과 푸른 갓을 쓰고 승려는 검은 두건을 두르도록 했으며, 여자는 검은 비단을 입게 하였다.

○ 충렬왕(忠烈王) 이상의 왕에게 존호를 더 올렸다.

○ 겨울 10월에 비로소 삼년상을 행하니 간관(諫官) 이색(李穡)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무술[편집]

七年元順帝至正十八年○日皇後村上二十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五十八年이라夏五月에方國珍이遣使來聘ᄒᆞ니時에國珍이中原의亂을因ᄒᆞ야台州ᄅᆞᆯ據ᄒᆞ더라○六月에張士誠이遣使ᄒᆞ야沈香과水晶과玉帶等物을獻ᄒᆞ니時에士誠이杭州ᄅᆞᆯ據ᄒᆞ야太尉라自稱ᄒᆞ더라○秋八月에西江에城을築ᄒᆞ야日本을防禦ᄒᆞ다○李氏ᄅᆞᆯ納ᄒᆞ야惠妃ᄅᆞᆯ封ᄒᆞ니妃ᄂᆞᆫ齊賢의女러라○時에紅巾賊이有ᄒᆞ야天下에遍滿ᄒᆞ고其魁關先生等이元의上都元故都니長城以外라ᄅᆞᆯ陷ᄒᆞ고ᄯᅩ鴨綠을渡ᄒᆞ야剽竊ᄒᆞ거ᄂᆞᆯ慶千興으로ᄡᅧ西北面元帥ᄅᆞᆯ拜ᄒᆞ고安祐로ᄡᅧ副元帥ᄅᆞᆯ拜ᄒᆞ야往討ᄒᆞᆯᄉᆡ時에賊衆이四萬이라鴨綠을渡ᄒᆞ야義在今義州等州ᄅᆞᆯ連陷ᄒᆞ거ᄂᆞᆯ다시李巖으로ᄡᅧ西北面都元帥ᄅᆞᆯ拜ᄒᆞ야千興과祐와밋崔塋金得培李春富等으로더브러防禦ᄒᆞ더니이윽고巖이賊을畏ᄒᆞ야進兵치못ᄒᆞ거ᄂᆞᆯ李承慶으로ᄡᅧ代ᄒᆞ다

공민왕 7년【원 순제 지정 18년 ○ 일황 후촌상 20년 ○ 서력 기원 1358년】이었다.

여름 5월에 방국진(方國珍)이 사신을 보내 내빙(來聘)하였다. 당시 방국진이 중원(中原)의 난을 틈타서 태주(台州)를 점거하였다.

○ 6월에 장사성(張士誠)이 사신을 보내 침향(沈香)과 수정(水晶), 옥대(玉帶) 등의 물건을 바쳤다. 당시 장사성은 항주(杭州)를 점거하고 스스로 태위(太尉)라고 칭하였다.

○ 가을 8월에 서강(西江)에 성을 쌓아 일본(日本)을 방어하였다.

○ 이씨(李氏)를 받아들여 혜비(惠妃)로 봉하였으니, 혜비는 이제현(李齊賢)의 딸이다.

○ 이때 홍건적(紅巾賊)이 일어나서 천하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 우두머리 관선생(關先生) 등은 원(元)나라의 상도(上都)【원나라의 옛 도읍으로 만리장성의 밖에 있다.】를 함락하였다. 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약탈과 도둑질을 하니, 경천흥(慶千興)을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에 임명하고, 안우(安祐)를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여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적의 무리가 4만 명이었다. 적이 압록강을 건너서 의(義)【의주】, 정(靜)【지금의 의주에 있다.】 등 주(州)를 연이어 함락하였다. 다시 이암(李巖)을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삼아서 경천흥과 안우, 그리고 최영(崔塋), 김득배(金得培), 이춘부(李春富) 등과 함께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암이 적을 두려워하여 진격하지 못하므로 이승경(李承慶)으로 대신하였다.


경자[편집]

九年元順帝至正二十年○日皇後村上二十二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六十年이라春二月에安祐ㅣ上將軍李芳實로더브러紅巾賊을咸從에셔大破ᄒᆞ니賊이遁去ᄒᆞ다是役에祐等이九戰皆捷ᄒᆞ고三月에班師ᄒᆞ다○夏五月이라忠定以來로日本이來侵ᄒᆞ야虛日이無ᄒᆞ더니于是에全羅道로브터楊廣道畿忠淸兩道ᄅᆞᆯ進侵ᄒᆞ야列邑을焚掠ᄒᆞ거ᄂᆞᆯ이에柳濯으로ᄡᅥ兵馬都統使를拜ᄒᆞ고李春富와밋桓祖로ᄡᅧ東西江兵馬使ᄅᆞᆯ拜ᄒᆞ야防禦ᄒᆞᆯᄉᆡ日本이江華ᄅᆞᆯ侵掠ᄒᆞ고去ᄒᆞ더라○八月에三年喪制ᄅᆞᆯ除ᄒᆞ니時에四方에兵興ᄒᆞ야用人이爲急ᄒᆞᆷ이러라

공민왕 9년【원 순제 지정 20년 ○ 일황 후촌상 22년 ○ 서력 기원 1360년】이었다.

봄 2월에 안우(安祐)가 상장군(上將軍)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을 함종(咸從)에서 크게 물리치니 적들이 도망갔다. 싸움에서 안우 등이 아홉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3월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 여름 5월이었다. 충정왕(忠定王) 이래로 일본(日本)이 침범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때에 전라도에서부터 양광도(楊廣道)【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두 도】까지 쳐들어와서 여러 지역을 불태우고 약탈하였다. 이에 유탁(柳濯)을 병마 도통사(兵馬都統使)에 임명하고 이춘부(李春富)와 환조(桓祖)를 동서강 병마사(東西江兵馬使)에 임명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일본이 강화(江華)를 쳐들어와 약탈하고 돌아갔다.

○ 8월에 삼년상 제도를 없앴는데, 이때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 사람을 쓰는 일이 매우 급했기 때문이다.


신축[편집]

十年元順帝至正二十一年○日皇後村上二十三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六十一年이라春二月에桓祖로ᄡᅧ東北面兵馬使를拜ᄒᆞ엿다가다시戶部尙書ᄅᆞᆯ加ᄒᆞ다○我桓祖ㅣ卒ᄒᆞ시니王이遣使ᄒᆞ야弔慰致賻ᄒᆞ고士大夫ㅣ다驚歎ᄒᆞ야曰東北面이無人ᄒᆞ다ᄒᆞ더라○秋九月에禿魯江在今江界萬戶朴儀ㅣ叛ᄒᆞ거ᄂᆞᆯ我

太祖大王을遣ᄒᆞ야執誅ᄒᆞ다太祖ᄂᆞᆫ桓祖의子라諱ᄂᆞᆫ오字ᄂᆞᆫ君晋이니初諱ᄂᆞᆫ成桂오字ᄂᆞᆫ仲潔이라忠肅王後四年乙亥에永興黑石里私邸에셔誕降ᄒᆞ시니隆準龍顔이오奇偉絶倫ᄒᆞ시더니밋長ᄒᆞ시ᄆᆡ寬仁大度오濟世安民ᄒᆞᆯ才略이有ᄒᆞ시더라先是에李達衷이東北面兵馬使가되엿다가還朝ᄒᆞ거ᄂᆞᆯ桓祖ㅣ餞送ᄒᆞ실ᄉᆡ太祖ㅣ侍立ᄒᆞ시다가行酒ᄒᆞ시니達衷이恭敬이跪飮ᄒᆞᄂᆞᆫ지라桓祖ㅣ怪異ᄒᆞ야問ᄒᆞ신ᄃᆡ答曰此人은異人이라公의及ᄒᆞᆯᄇᆡ아니오公의家業을此人이能히大興ᄒᆞ리라ᄒᆞ고因ᄒᆞ야子孫으로ᄡᅧ付屬ᄒᆞ니達衷은元來識鑑이有ᄒᆞᆫ人이러라至是ᄒᆞ야太祖ㅣ金吾衛上將軍으로東北面上萬戶가되시더니會에朴儀ㅣ作亂ᄒᆞ거ᄂᆞᆯ太祖ㅣ親兵一千五百으로往討ᄒᆞ시니儀ㅣ江界에逃入ᄒᆞᄂᆞᆫ지라太祖ㅣ窮追ᄒᆞ야盡誅ᄒᆞ시다○冬十月에紅巾賊魁首潘誠沙와關先生等이ᄯᅩ軍士數十萬을率ᄒᆞ고鴨綠을渡ᄒᆞ야安州ᄅᆞᆯ襲ᄒᆞ니官軍이敗績ᄒᆞᄂᆞᆫ지라王이다시平章事金鏞과參知政事鄭世雲等을遣ᄒᆞ야岊嶺在今瑞興一名慈悲嶺을守備ᄒᆞ다가ᄯᅩ賊의襲擊을被ᄒᆞ야軍士가大潰ᄒᆞ고京師ㅣ震動ᄒᆞ거ᄂᆞᆯ王이이에太后ᄅᆞᆯ奉ᄒᆞ야南幸ᄒᆞ니賊이곳京城을陷ᄒᆞ다十二月에王이福州今安에至ᄒᆞ야世雲으로ᄡᅧ摠兵官을拜ᄒᆞ야諸軍을督率ᄒᆞ야紅賊을擊ᄒᆞ라ᄒᆞ니世雲이承命ᄒᆞ고慷慨憂忿ᄒᆞ야討賊興復ᄒᆞᆷ으로ᄡᅥ己任을삼더라

공민왕 10년【원 순제 지정 21년 ○ 일황 후촌상 23년 ○ 서력 기원 1361년】이었다.

봄 2월에 환조(桓祖)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더하였다.

○ 우리 환조께서 돌아가시니 왕이 사신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부의를 내렸다. 사대부들이 모두 놀라며 탄식하기를, “동북면에 인물이 없다.”고 하였다.

○ 가을 9월에 독로강(禿魯江)【지금의 강계(江界)에 있다.】 만호(萬戶)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키니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을 보내 잡아서 죽였다. 태조는 환조의 아들로 휘(諱)는 단(旦)이고, 자(字)는 군진(君晋)이며, 처음의 휘[初諱]는 성계(成桂)이고, 자는 중결(仲潔)이다. 충숙왕(忠肅王) 후 4년 을해(乙亥)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 사저에서 태어나셨다. 코가 우뚝 솟고 용안(龍顔)에 용모가 매우 뛰어났다. 장성하시자 너그럽고 어질며 도량이 크고, 세상을 구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할 재략이 있으셨다. 이에 앞서 이달충(李達衷)이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다가 조정으로 돌아갈 때 환조가 환송연을 베풀었는데, 그때 태조께서 모시고 서 있다가 술을 올리셨다. 이달충이 공경하며 무릎을 꿇고 술을 마시므로 환조가 괴이하게 여겨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므로 공이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공의 가업을 이 사람이 크게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자신의 자손들을 부탁하였으니 이달충은 원래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태조는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으로서 동북면 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셨다. 마침 박의가 난을 일으키자 태조께서 직접 병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니, 박의가 강계(江界)로 도망갔으나 태조께서 끝까지 쫓아가 모두 죽였다.

○ 겨울 10월에 홍건적(紅巾賊) 우두머리 반성사(潘誠沙)와 관선생(關先生) 등이 또 군사 수십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안주(安州)를 습격하니, 관군이 패하였다. 왕이 다시 평장사(平章事) 김용(金鏞)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세운(鄭世雲) 등을 보내 절령(岊嶺)【지금의 서흥(瑞興)에 있으며, 일명 자비령(慈悲嶺)이라고 한다.】을 수비하게 했으나, 또 적의 습격을 당하여 군사가 크게 무너지고 수도가 크게 동요했다. 이에 왕이 태후를 모시고 남쪽으로 행차하니, 적이 곧 도성을 함락하였다. 12월에 왕이 복주(福州)【지금의 안동(安東)】에 이르러 정세운을 총병관(摠兵官)에 임명하여 여러 군대를 감독하고 인솔하여 홍건적을 물리치라고 하였다. 정세운이 명을 받들고 강개하면서 분한 마음이 북받쳐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임인[편집]

十一年元順帝至正二十二年○日皇後村上二十四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六十二年이라春正月에摠兵官鄭世雲과都元帥安祐等이紅賊을大破ᄒᆞ고京城을收復ᄒᆞ다賊이이믜京城에入ᄒᆞ거ᄂᆞᆯ安祐崔瑩等이軍士二十萬을率ᄒᆞ야東郊에屯ᄒᆞ고世雲은諸軍을督ᄒᆞ야進圍ᄒᆞᆯᄉᆡ寧海人朴强이守門ᄒᆞᆫ賊을斫殺ᄒᆞ고諸將이馳入ᄒᆞᄂᆞᆫ지라太祖ㅣ麾下親兵二千人을率ᄒᆞ시고先登大破ᄒᆞ야賊十餘萬을斬ᄒᆞ시니賊魁河劉와關先生等이다死ᄒᆞ고餘黨破頭潘等十餘萬이鴨綠을渡ᄒᆞ야遁ᄒᆞ더라○金鏞이佞幸으로ᄡᅧ王의게得寵ᄒᆞ야鄭世雲을忌嫉ᄒᆞ고ᄯᅩ安祐金得培李芳實等의成功ᄒᆞᆷ을惡ᄒᆞ야主旨ᄅᆞᆯ矯ᄒᆞ야祐等으로ᄒᆞ여곰世雲을殺케ᄒᆞ고ᄯᅩ謀泄ᄒᆞᆯ가恐ᄒᆞ야드ᄃᆡ여王의게告曰祐等이主將을擅殺ᄒᆞ니此ᄂᆞᆫ君上을慢視ᄒᆞᆷ이라ᄒᆞ고곳祐等을盡殺ᄒᆞ다時에祐와芳實의子ㅣ年이다十餘歲라市街에游ᄒᆞᆯᄉᆡ人民이食物을爭饋ᄒᆞ야曰今에我輩가獲安ᄒᆞᆷ은다三元帥의功이라ᄒᆞ고泣下ᄒᆞᄂᆞᆫ者ㅣ有ᄒᆞ더라○秋七月에太祖ㅣ元丞相納哈出을咸興洪原等地에셔大破ᄒᆞ시다納哈出이中原의亂을因ᄒᆞ야瀋陽等地ᄅᆞᆯ據在ᄒᆞᆯᄉᆡ時에雙城今咸賊趙小生과卓都卿等이雙城을旣失ᄒᆞᄆᆡ本國을深怨ᄒᆞ야納哈出을引ᄒᆞ야東北邊을入寇ᄒᆞ거ᄂᆞᆯ王이太祖로ᄡᅧ東北面兵馬使ᄅᆞᆯ拜ᄒᆞ야出禦ᄒᆞ라ᄒᆞᆯᄉᆡ時에納哈出이兵士數萬을率ᄒᆞ고小生과都卿等으로더브러洪原에屯ᄒᆞ고賊의驍將一人이鐵鎧ᄅᆞᆯ戴ᄒᆞ고槊을揮ᄒᆞ니衆이對敵ᄒᆞᆯ者ㅣ無ᄒᆞ거ᄂᆞᆯ太祖ㅣ與戰ᄒᆞ시다가거짓敗走ᄒᆞ시니其人이奮前ᄒᆞ야槊을注ᄒᆞᆷ이甚急ᄒᆞ거ᄂᆞᆯ太祖ㅣ飜身ᄒᆞ사馬䪜에俯着ᄒᆞ시니其人이太祖ᄅᆞᆯ擊지못ᄒᆞ고槊을隨ᄒᆞ야倒ᄒᆞ거ᄂᆞᆯ太祖ㅣ곳射殪ᄒᆞ시니賊이大敗奔北ᄒᆞᄂᆞᆫ지라太祖ㅣ進擊ᄒᆞ야日暮ᄒᆞᆫ後還ᄒᆞ시다時에納哈出의妻ㅣ納哈出다려謂曰公이天下ᄅᆞᆯ周行ᄒᆞ엿스나如此ᄒᆞᆫ將軍을엇지見ᄒᆞ엿스리오맛당히速避ᄒᆞ라ᄒᆞᆫᄃᆡ納哈出이不從ᄒᆞ고角戰不已ᄒᆞ거ᄂᆞᆯ太祖ㅣᄯᅩ其將을屢殺ᄒᆞ시고奇兵을伏ᄒᆞ야大破ᄒᆞ시니納哈出이不可敵ᄒᆞᆷ을知ᄒᆞ고散卒을收拾ᄒᆞ야遁去ᄒᆞ니於是에東北鄙가悉平ᄒᆞ다○八月에王이淸州에至ᄒᆞ다○耽羅牧胡古禿不花等이星主高福壽로ᄡᅧ叛ᄒᆞ야元에依附ᄒᆞ다○冬十月이라初에元后奇氏ㅣ奇轍等을爲ᄒᆞ야報仇코ᄌᆞᄒᆞ고崔濡ᄂᆞᆫ元에在ᄒᆞ야后의旨ᄅᆞᆯ承望ᄒᆞ야王을元主의게構誣ᄒᆞ니元主ㅣ이에德興君譓로ᄡᅥ高麗王을삼으니譓ᄂᆞᆫ忠宣王의子라於是에濡ㅣ左政丞이되고國人의在元ᄒᆞᆫ者ᄂᆞᆫ다僞官을署ᄒᆞ더라

공민왕 11년【원 순제 지정 22년 ○ 일황 후촌상 24년 ○ 서력 기원 1362년】이었다.

봄 정월에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과 도원수(都元帥) 안우(安祐) 등이 홍건적[紅賊]을 크게 물리치고 도성을 수복하였다. 적이 이미 도성에 들어와 있었으므로 안우, 최영(崔瑩) 등이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동쪽 교외에 주둔하고, 정세운은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나아가 포위하였다. 이때 영해(寧海) 사람 박강(朴强)이 성문을 지키던 적을 베어 죽이자 여러 장수가 재빠르게 들어갔다. 태조(太祖)께서 휘하의 친병(親兵) 2천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크게 물리쳐서 적 10여만 명의 목을 베었다. 적의 우두머리 하유(河劉)와 관선생(關先生) 등이 모두 죽고 나머지 무리 파두번(破頭潘) 등 10여만 명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도망갔다.

○ 김용(金鏞)이 아첨하여 왕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정세운을 시기하고 미워하였으며, 또 안우,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 등이 공을 세운 것을 싫어하였다. 이에 왕의 뜻이라고 속여서 안우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였다. 또 그 모의가 누설될까 두려워서 드디어 왕에게 고하기를, “안우 등이 주장(主將)을 멋대로 죽였으니 이는 왕을 업신여긴 것입니다.”라고 하고 곧 안우 등을 모두 죽였다. 이때에 안우와 이방실의 아들은 나이가 모두 10여 세로 길거리를 떠돌았다. 백성이 다투어 음식을 가져다 주며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들이 편안해진 것은 모두 세 원수의 공 덕분이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 가을 7월에 태조께서 원(元)나라 승상(丞相) 납합출(納哈出)을 함흥(咸興)과 홍원(洪原) 등지에서 크게 물리치셨다. 납합출이 중원(中原)의 난을 틈타 심양(瀋陽) 등지를 점거하고 있을 때, 쌍성(雙城)【지금의 함흥】의 적 조소생(趙小生)과 탁도경(卓都卿) 등이 쌍성을 이미 잃었는데 우리나라를 매우 원망하고 있다가 납합출을 이끌고 동북 지방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다. 왕이 태조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하여 나아가 방어하라고 하였다. 이때 납합출은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조소생, 탁도경 등과 함께 홍원에 주둔하였다. 적의 날랜 장수 한 명이 철갑을 입고 창을 휘두르니, 무리 가운데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태조께서 그와 함께 싸움을 하시다가 거짓으로 패한 척 도망하시니 그 장수가 더욱 분발하며 전진하여 급하게 창을 찌르려 하였다. 태조께서 몸을 돌려 말 옆구리에 착 달라붙으니, 그 장수가 태조를 치지 못하고 창을 따라서 넘어졌다. 태조께서 곧바로 활을 쏘아 죽이니 적들이 크게 패하여 북쪽으로 도망갔다. 태조께서 추격하시다가 해가 저문 후에 돌아오셨다. 이때 납합출의 아내가 납합출에게 말하기를, “공이 천하를 두루 다녔으나 이와 같은 장군을 어찌 보았겠습니까? 마땅히 신속하게 피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납합출이 듣지 않고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태조께서 적의 장수를 여러 명 죽이시고 기습부대[奇兵]를 매복시켰다가 크게 물리치셨다. 납합출이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도망가니, 이때부터 동북 변방이 모두 평안하였다.

○ 8월에 왕이 청주(淸州)에 이르렀다.

○ 탐라 목호(耽羅牧胡) 고독불화(古禿不花) 등이 성주(星主) 고복수(高福壽)를 내세워 반역을 하고 원나라에 붙었다.

○ 겨울 10월이었다. 처음에 원나라 황후 기씨(奇氏)가 기철(奇轍) 등을 위해 복수하고자 하였다.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황후의 뜻을 받들어 원나라 황제에게 왕을 무고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덕흥군(德興君) 혜(譓)를 고려(高麗) 왕으로 삼으니 혜는 충선왕(忠宣王)의 아들이다. 이때 최유가 좌정승(左政丞)이 되고 원나라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거짓 관직을 받았다.


계묘[편집]

十二年元順帝至正二十三年○日皇後村上二十五年○西歷紀後元一千三百六十三年이라二月에王이京師에還ᄒᆞ다○閏三月에金鏞이德興君의內應이되야王을害코ᄌᆞᄒᆞᆯᄉᆡ其黨五十餘人을密遣ᄒᆞ야宮門을斬ᄒᆞ고寢殿에徑入ᄒᆞ거ᄂᆞᆯ宦官安都赤의貌가王과類ᄒᆞᆫ지라王을伐ᄒᆞ야寢內에臥ᄒᆞ니賊이王이라ᄒᆞ야殺ᄒᆞ고其黨을分遣ᄒᆞ야右政丞洪彦博等을殺ᄒᆞ더니旣而오事敗ᄒᆞ야鏞을密城郡今密에流ᄒᆞ엿다가다시殺ᄒᆞ야京師에傳首ᄒᆞ다時에王은오히러鏞을不忘ᄒᆞ고泣下曰誰ᄅᆞᆯ可恃ᄒᆞᆯ고ᄒᆞ더라時에彦博이勳戚으로ᄡᅧ上相이되야鏞이비록秉權ᄒᆞ니能히逞志치못ᄒᆞᄂᆞᆫ고로몬져殺ᄒᆞ니彦博은重望이有ᄒᆞᆫ人이라밋死ᄒᆞᄆᆡ時人이歎惜ᄒᆞ더라諡曰文正이라ᄒᆞ다

공민왕 12년【원 순제 지정 23년 ○ 일황 후촌상 25년 ○ 서력 기원 1363년】이었다.

2월에 왕이 도성으로 돌아왔다.

○ 윤 3월에 김용(金鏞)이 덕흥군(德興君)과 내통하여 왕을 해치고자 할 때 무리 50여 명을 몰래 보내 궁궐 문을 지키던 자의 목을 베고, 침전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환관 안도적(安都赤)의 용모가 왕과 비슷하므로, 왕을 대신하여2) 침상에 누워 있었다. 적이 왕인 줄 알고 죽인 후, 그 무리를 나누어 보내 우정승(右政丞) 홍언박(洪彦博) 등을 죽였다. 얼마 지난 후에 일이 실패하여 김용을 밀성군(密城郡)【지금의 밀양(密陽)】에 유배 보냈다가 다시 죽인 후에 그의 머리를 도성으로 가져왔다. 이때 왕은 오히려 김용을 잊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 홍언박은 훈척(勳戚)으로서 상상(上相)이었으므로, 김용이 비록 권력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므로, 먼저 죽인 것이다. 홍언박은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어서 그가 죽자 당시 사람들이 한탄하며 애석해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라 하였다.


갑진[편집]

十三年元順帝至正二十四年○日皇後村上二十六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六十四年이라春正月에我太祖ㅣ崔濡ᄅᆞᆯ擊破ᄒᆞ시다先是에元이德興君譓ᄅᆞᆯ我國에納고ᄌᆞᄒᆞ거ᄂᆞᆯ王이慶復興으로ᄡᅥ西北面都元帥ᄅᆞᆯ拜ᄒᆞ야安遇慶等諸將을領ᄒᆞ고往禦ᄒᆞᆯᄉᆡ至是ᄒᆞ야濡ㅣ元兵一萬으로ᄡᅧ鴨綠江을渡ᄒᆞ거ᄂᆞᆯ遇慶이擊却ᄒᆞ엿더니이윽고賊兵이奄至ᄒᆞ니我軍이大敗ᄒᆞ고賊은宣州今宣ᄅᆞᆯ入據ᄒᆞ니人情이더욱恟懼ᄒᆞᄂᆞᆫ지라王이崔瑩으로ᄡᅧ都巡慰使ᄅᆞᆯ拜ᄒᆞ야安州를急趣ᄒᆞ고ᄯᅩ太祖ᄅᆞᆯ命ᄒᆞ야精騎一千을率ᄒᆞ시고赴援케ᄒᆞ니軍勢가稍振ᄒᆞ더라時에賊이隨州今定㺚川에來屯ᄒᆞ거ᄂᆞᆯ翌日에太祖ㅣ手下老將二人으로ᄡᅧ左右翼을삼고奮擊大破ᄒᆞ시니濡와밋譓가겨우免ᄒᆞ야渡江遁去ᄒᆞ니라初에德興君譓가僞立ᄒᆞᆯ時에王이贊成事李公遂ᄅᆞᆯ元에遣ᄒᆞ야陳情ᄒᆞᆯᄉᆡ公遂ㅣ元에至ᄒᆞ니譓ㅣ僞官을授코ᄌᆞᄒᆞ거ᄂᆞᆯ公遂ㅣ不受ᄒᆞ엿더니奇后ㅣ强命ᄒᆞᄂᆞᆫ지라公遂ㅣ慷慨히言ᄒᆞ야曰臣이비록頸血로ᄡᅧ德興의轅을不濺ᄒᆞ나엇지此ᄅᆞᆯ忍從ᄒᆞ리오ᄒᆞ더니至是에公遂ㅣ書ᄅᆞᆯ竹杖中에納ᄒᆞ고가만이遣人ᄒᆞ야濡의起兵ᄒᆞᆷ을報ᄒᆞ니朝延이비로소公遂의不屈ᄒᆞᆷ을知ᄒᆞ더라○夏五月에日賊三千餘人이鎭海ᄅᆞᆯ來侵ᄒᆞ거ᄂᆞᆯ慶尙道巡問使金續命이進擊殲殺ᄒᆞ다○冬十月이라先是에崔濡ㅣ敗還ᄒᆞ야다시大擧코ᄌᆞᄒᆞᆯᄉᆡ元監察御史紐憐等이濡의賣國構釁ᄒᆞᆫ罪ᄅᆞᆯ陳述ᄒᆞ니元主ㅣ곳濡ᄅᆞᆯ械送ᄒᆞ거ᄂᆞᆯ王이誅ᄒᆞ다○李公遂ㅣ元으로브터還ᄒᆞ다

공민왕 13년【원 순제 지정 24년 ○ 일황 후촌상 26년 ○ 서력 기원 1364년】이었다.

봄 정월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최유(崔濡)를 격파하셨다. 이에 앞서 원(元)나라가 덕흥군(德興君) 혜(譓)를 우리나라에 보내고자 하니, 왕이 경복흥(慶復興)을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삼아 안우경(安遇慶) 등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최유가 원나라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자 안우경이 공격하여 물러났으나, 이윽고 적병이 몰래 이르니 우리 군이 크게 패하였다. 적이 선주(宣州)【지금의 선천(宣川)】에 들어가 점거하니, 민심이 더욱 흉흉해졌다. 왕이 최영(崔瑩)을 도순위사(都巡慰使)에 임명하여 안주(安州)로 급히 달려가도록 하고 또 태조에게 명하여 정예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가서 지원하게 하니 군세가 점점 진작되었다. 이때 적이 수주(隨州)【지금의 정주(定州)】와 달천(㺚川)에 가서 주둔하였다. 그 다음 날 태조께서 수하의 노장(老將) 두 사람을 좌우익으로 삼고 힘을 다해 공격하여 크게 물리치니, 최유와 혜가 겨우 화를 면하여 강을 건너 도망갔다. 처음에 덕흥군 혜가 정통성 없이 왕위에 올랐을 때 왕이 찬성사(贊成事) 이공수(李公遂)를 원나라에 보내 사정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공수가 원나라에 이르니 혜가 거짓 관직[僞官]을 제수하고자 하였으나, 이공수가 이를 받지 않았다. 기황후[奇后]가 강제로 명을 내렸으나 이공수가 분격해 하며 말하기를, “신이 비록 목에 흐르는 피를 덕흥(德興)의 수레에 뿌리지는 못하지만, 어찌 이를 차마 따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공수가 글을 써서 대나무 지팡이 속에 넣고 몰래 사람을 보내 최유가 병사를 일으킨 사실을 알리니, 조정이 비로소 이공수가 굴복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 여름 5월에 왜구[日賊] 3천여 명이 진해(鎭海)로 쳐들어오자 경상도 순문사(慶尙道巡問使) 김속명(金續命)이 나아가서 모두 죽였다.

○ 겨울 10월이었다. 이에 앞서 최유가 패하여 돌아가서는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원나라의 감찰어사(監察御史) 유연(紐憐) 등이 최유가 나라를 팔고 불화를 만든 죄를 설명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곧바로 최유에게 형틀을 씌워 보내니 왕이 죽였다.

○ 이공수가 원나라에서 돌아왔다.


을사[편집]

十四年元順帝至正二十五年○日皇後村上二十七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六十五年이라春二月에魯國公主ㅣ崩ᄒᆞ니王이크게悲慟ᄒᆞ야佛事ᄅᆞᆯ大張ᄒᆞ고밋正陵에葬ᄒᆞᆯᄉᆡ儀衛制度가窮極奢侈ᄒᆞ더라○五月에妖僧遍照로ᄡᅥ師傅ᄅᆞᆯ삼다遍照ᄂᆞᆫ本玉川寺婢의子라先是에王이夢中에人이劍으로ᄡᅥ己ᄅᆞᆯ刺ᄒᆞ거ᄂᆞᆯ僧이有ᄒᆞ야救免ᄒᆞ더니밋遍照ᄅᆞᆯ見ᄒᆞ니其貌와如ᄒᆞᆫ지라王이奇異ᄒᆞ야與語ᄒᆞ니ᄯᅩᄒᆞᆫ辯給ᄒᆞ고自謂ᄒᆞ되得道ᄒᆞ엿다ᄒᆞ거ᄂᆞᆯ王이大悅ᄒᆞ야屢次召見ᄒᆞ고其後에遍照ㅣ長髮ᄒᆞ야頭陀가되고改名ᄒᆞ야辛旽이라ᄒᆞ거ᄂᆞᆯ王이師傅ᄅᆞᆯ拜ᄒᆞ고國政으로ᄡᅧ訪問ᄒᆞ야所言을다聽從ᄒᆞ며士大夫의妻妾은神僧이라ᄒᆞ야聽法求福ᄒᆞᆫ다ᄒᆞ고來ᄒᆞ면旽이믄득私通ᄒᆞᄂᆞᆫ지라李齊賢이上言ᄒᆞ되旽의骨格이古昔兇人과如ᄒᆞ야後患을必貽ᄒᆞ리니王은勿近ᄒᆞ소셔ᄒᆞᆫᄃᆡ王이不聽ᄒᆞ더라○秋八月에瑞興君柳淑이致仕ᄒᆞ다時에辛旽이用事ᄒᆞᆯᄉᆡ金蘭과李春富로ᄡᅧ羽翼을삼고李仁復과崔瑩과元松壽等諸名流ᄅᆞᆯ讒逐ᄒᆞ니淑이自己의忠直이旽의所忌됨을知ᄒᆞ고駭骨을乞ᄒᆞ야田里에歸ᄒᆞ니將相以下가다郊外에餞送ᄒᆞ며行路가咨嗟ᄒᆞ더라○冬十二月이라時에王이ᄆᆡ양辛旽을謂ᄒᆞ야屈己救世ᄒᆞ라ᄒᆞ니旽이거짓不肯ᄒᆞ야王의意ᄅᆞᆯ堅케ᄒᆞ고다시王을勸ᄒᆞ야曰王이世間福利ᄅᆞᆯ求코ᄌᆞᄒᆞᆯ진ᄃᆡᆫ願컨ᄃᆡ讒言을無信ᄒᆞ소셔ᄒᆞ니王이이에盟書ᄅᆞᆯ手寫ᄒᆞ야天神에證明ᄒᆞ니旽이自此로더욱顧忌가無ᄒᆞ야威福을大行ᄒᆞ더라이윽고王이守正論道燮理功臣號ᄅᆞᆯ賜ᄒᆞ고都僉議ᄅᆞᆯ領ᄒᆞ고鷲城府院君을進封ᄒᆞ다

공민왕 14년【원 순제 지정 25년 ○ 일황 후촌상 27년 ○ 서력 기원 1365년】이었다.

봄 2월에 노국공주(魯國公主)가 돌아가시니 왕이 크게 비통하여 불사(佛事)를 크게 열고, 정릉(正陵)에 장사 지냈다. 이때 의식과 호위[儀衛制度]함이 매우 사치스러웠다.

○ 5월에 요승(妖僧) 편조(遍照)를 사부(師傅)로 삼았다. 편조는 본래 옥천사(玉川寺) 여종의 아들이었다. 이에 앞서 왕이 꿈에서 어떤 사람이 칼로 자기를 찌르려고 하자 한 승려가 나타나 구해 주었는데, 편조를 보니 용모가 그와 같았다. 왕이 기이하게 생각하여 이야기를 나누니 또한 말을 잘하고 스스로 득도(得道)하였다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여러 차례 불러서 만났다. 그 후 편조가 머리를 길러 두타(頭陀)가 되고 이름을 바꿔 신돈(辛旽)이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사부로 삼고 국정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모두 듣고 따랐다. 사대부의 아내와 첩들이 그를 신승(神僧)이라 하여 법문을 듣고 복을 구한다고 찾아오면, 신돈이 문득 그들과 정을 통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돈의 골격이 옛날 흉인(兇人)과 같아 반드시 후환을 가져올 것이니, 왕께서는 가까이하지 마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 가을 8월에 서흥군(瑞興君) 유숙(柳淑)이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때에 신돈이 마음대로 권세를 부릴 때 김난(金蘭)과 이춘부(李春富)의 보좌를 받고 이인복(李仁復), 최영(崔瑩), 원송수(元松壽) 등 여러 유명 인사를 참소하여 내쫓았다. 유숙이 자신의 충직함을 신돈이 꺼려한다는 것을 알고 사직하기를 청하고 시골로 돌아갔다. 장수와 재상 이하가 모두 교외에서 환송연을 열었으며 길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탄식하였다.

○ 겨울 12월이었다. 이때 왕이 매번 신돈에게 자신을 굽혀 속세의 일을 구하라고 하였으나 신돈이 거짓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체하면서 왕의 뜻을 견고하게 하였다. 다시 왕에게 권유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세상에서 복과 이익을 구하고자 한다면 원컨대 참언을 믿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맹세하는 글을 손수 써서 천신(天神)에게 증명하니 신돈이 이후로 더욱 염려하고 꺼리는 것이 없어지고, 위엄을 보이거나 덕을 베풀어 사람을 복종시키는 일[威福]을 많이 행하였다. 이윽고 왕이 수정론도섭리공신(守正論道燮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도첨의(都僉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를 이끌게 하였으며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으로 높여 봉작하였다.


병오[편집]

十五年元順帝至正二十六年○日皇後村上二十八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六十六年이라夏四月에司議大夫鄭樞ᄅᆞᆯ貶ᄒᆞ야東萊縣令을삼고左正言李存吾ᄂᆞᆫ長沙今茂長郡監務ᄅᆞᆯ삼다時에辛旽이當國ᄒᆞ야不法을行肆ᄒᆞ되敢히斥言ᄒᆞᄂᆞᆫ者ㅣ無ᄒᆞᆫ지라李存吾ㅣ忿怒ᄒᆞ야上疏코ᄌᆞᄒᆞᆯᄉᆡ몬져疏本을同列의게示ᄒᆞ야曰妖物이誤國ᄒᆞ니不可不屛逐ᄒᆞ리라ᄒᆞ니同僚가다畏縮ᄒᆞ야敢應ᄒᆞᄂᆞᆫ者ㅣ無ᄒᆞ고오쟉鄭樞ㅣ從ᄒᆞ야上疏曰臣等이伏見ᄒᆞ오니向日殿內에셔辛旽이敢히殿下와幷坐ᄒᆞ니大抵禮ᄂᆞᆫ上下ᄅᆞᆯ分辨ᄒᆞ고民志ᄅᆞᆯ明定ᄒᆞᆷ이라만일此禮가無ᄒᆞ면엇지君臣父子와밋國家ㅣ有ᄒᆞ리오今에旽이上恩을過蒙ᄒᆞ야國政을專擅ᄒᆞ고無君ᄒᆞᆫ心을懷ᄒᆞ야君上의前에屈膝치아니ᄒᆞ며그在家時에ᄂᆞᆫ宰相이庭下에拜ᄒᆞ니此ᄂᆞᆫ비록崔沆金仁俊林衍等도如此ᄒᆞᆫ者ㅣ無ᄒᆞ엿고至於李資謙ᄒᆞ야ᄂᆞᆫ仁宗의外祖라然이나公論을畏ᄒᆞ야祖孫의私禮ᄅᆞᆯ不行ᄒᆞ엿스니此ᄂᆞᆫ君臣의分이素定ᄒᆞ야萬古不易ᄒᆞᆯ憲法이니殿下가能히變易치못ᄒᆞᆯᄇᆡ오ᄯᅩ殿下ㅣ旽을賢ᄒᆞ다ᄒᆞ야大用ᄒᆞ시나旽이用事ᄒᆞᆫ後로政令이紊亂ᄒᆞ야百姓이怨咨ᄒᆞ니臣等이諫院에處ᄒᆞ야可惜ᄒᆞᆫ者ᄂᆞᆫ殿下ㅣ將且四方에取笑ᄒᆞ고萬世에見譏ᄒᆞᆷ이로소이다ᄒᆞᆫᄃᆡ王이大怒ᄒᆞ야其疏ᄅᆞᆯ焚ᄒᆞ고存吾와樞ᄅᆞᆯ叱責ᄒᆞᆯᄉᆡ時에旽이王으로더브러對牀ᄒᆞ야坐ᄒᆞ거ᄂᆞᆯ存吾ㅣ大叱曰老僧이엇지無禮ᄒᆞᆷ이如此ᄒᆞ뇨ᄒᆞ니旽이惶駭ᄒᆞ야곳下牀ᄒᆞᄂᆞᆫ지라王이더욱怒ᄒᆞ야存吾와樞ᄅᆞᆯ下獄ᄒᆞ고李春富와金蘭과李穡等을命ᄒᆞ야鞫問ᄒᆞ라ᄒᆞ거ᄂᆞᆯ春富等이王意ᄅᆞᆯ承ᄒᆞ야存吾ᄅᆞᆯ欲殺ᄒᆞ니李穡이ᄆᆡ양救護ᄒᆞ야其職을僅貶ᄒᆞ니時에存吾의年이二十五러라○秋七月에文殊會ᄅᆞᆯ宮中에設ᄒᆞ다時에王이無嗣ᄒᆞ거ᄂᆞᆯ旽이此會ᄅᆞᆯ勸設ᄒᆞ야祈子ᄒᆞᆷ이러라○五月에前僉議侍中李公遂ㅣ卒ᄒᆞ다公遂ᄂᆞᆫ益州人이라性이精明謹愼ᄒᆞ야一毫도取予가不妄ᄒᆞ며臨事에剛毅ᄒᆞ야形勢의屈ᄒᆞᆫᄇᆡ되지아니ᄒᆞ더라諡曰文忠이라ᄒᆞ다○다시王氏ᄅᆞᆯ立ᄒᆞ야妃ᄅᆞᆯ封ᄒᆞ니妃ᄂᆞᆫ宗室德豊君의女러라○冬十二月에密直提學李達衷이罷ᄒᆞ다達衷이일즉廣坐中에셔辛旽을責ᄒᆞ야曰人이言ᄒᆞ되公의酒色이過度ᄒᆞ다ᄒᆞ니何故오ᄒᆞᆫᄃᆡ旽이不悅ᄒᆞ야罷官ᄒᆞ다

공민왕 15년【원 순제 지정 26년 ○ 일황 후촌상 28년 ○ 서력 기원 1366년】이었다.

여름 4월에 사의대부(司議大夫) 정추(鄭樞)를 강등하여 동래 현령(東萊縣令)으로 삼고, 좌정언(左正言) 이존오(李存吾)는 장사(長沙)【지금의 무장군(茂長郡)】 감무(監務)로 삼았다. 이때 신돈(辛旽)이 국정을 맡아서 불법을 자행하였으나, 감히 그를 배척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존오가 분노하여 상소하고자 하면서 먼저 상소문을 동료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요물이 나라를 잘못 끌고 가니 물리쳐 쫓아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동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응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정추만이 따라서 함께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 등이 엎드려 바라보니, 지난번 궁궐 안에서 신돈이 감히 전하와 함께 앉았으니, 무릇 예라는 것은 상하를 분별하고, 백성의 뜻을 명확히 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예가 없다면 어찌 군신과 부자와 국가가 있겠습니까? 지금 신돈이 임금의 은혜를 지나치게 받아서 국정을 제멋대로 하고 국왕을 무시하는 마음을 품고 왕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그가 집에 있을 때에는 재상이 마당에서 절을 합니다. 비록 최항(崔沆), 김인준(金仁俊), 임연(林衍) 등이라도 이와 같이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자겸(李資謙)은 인종(仁宗)의 외할아버지였지만 공론(公論)을 두려워하여 할아버지와 손자 간의 사사로운 예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왕과 신하 간의 구분이 본디 정해져 있는 만고불변의 법이니 전하도 이를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 신돈이 현명하다 하여 크게 기용하셨으나, 신돈이 국정을 맡은 이후로 정령(政令)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합니다. 신들이 간원(諫院)에 있으며 안타까운 것은 전하께서 장차 사방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세에 비난을 당할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상소문을 불태우고 이존오와 정추를 질책하였다. 이때 신돈이 왕과 함께 평상에 마주 앉아 있었으므로 이존오가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늙은 중의 무례함이 어찌 이와 같은가?” 하니 신돈이 당황하고 놀라서 곧 평상에서 떨어졌다. 왕이 더욱 노하여 이존오와 정추를 옥에 가두고 이춘부(李春富)와 김난(金蘭), 이색(李穡) 등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이춘부 등이 왕의 뜻을 받들어 이존오를 죽이고자 하나, 이색이 매번 구해 주어 단지 그 직책을 낮추도록 하였다. 이때 이존오의 나이가 25세였다.

○ 가을 7월에 문수회(文殊會)를 궁중에서 열었다. 이때 왕이 후사가 없었는데 신돈이 이 모임을 열어서 아들을 얻기를 빌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 5월에 전 첨의 시중(僉議侍中) 이공수(李公遂)가 죽었다. 이공수는 익주(益州) 사람이다. 성격이 순수하고 밝으며 삼가고 신중하여 터럭 하나라도 받고 주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고, 일할 때에는 의지가 굳고 강직하여 형세에 굴하지 않았다.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 다시 왕씨(王氏)를 세워 왕비로 삼으니, 비는 종실 덕풍군(德豊君)의 딸이다.

○ 겨울 12월에 밀직제학(密直提學) 이달충(李達衷)이 파면되었다. 일찍이 이달충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신돈을 꾸짖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신돈이 불쾌히 여겨 그를 파직하였다.


정미[편집]

十六年元順帝至正二十七年○日皇後村上二十九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六十七年이라春二月에元이高大悲ᄅᆞᆯ遣來ᄒᆞ다時에元主ㅣ濟州에避亂코ᄌᆞᄒᆞ야御府의金帛을輸送ᄒᆞ고濟州로ᄡᅥ다시我의게屬ᄒᆞ다○僧禪顯으로ᄡᅧ王師를삼으니禪顯은旽의昵比ᄒᆞᄂᆞᆫᄇᆡ라王이康安殿에셔邀見ᄒᆞᆯᄉᆡ王이九拜ᄒᆞ니禪顯이立受ᄒᆞ고百官은朝服致賀ᄒᆞ며旽은獨히戎服으로殿上에立ᄒᆞ더라○秋七月에前僉議政丞鷄林府院君李齊賢이卒ᄒᆞ다齊賢이天資ㅣ重厚ᄒᆞ고ᄯᅩ學術이深邃ᄒᆞ야議論과事業에發ᄒᆞᄂᆞᆫ者ㅣ다燁然可觀이오平生에疾言遽色이無ᄒᆞ고ᄯᅩ虛懷下人ᄒᆞ야他人의事ᄂᆞᆫ비록片善이라도不聞ᄒᆞᆯ가惟恐ᄒᆞ며自號曰益齋라國人이景仰ᄒᆞ야老少貴賤을無論ᄒᆞ고다益齋先生이라稱ᄒᆞ더라所著ᄒᆞᆫ益齋亂藁十卷이有ᄒᆞ니高麗以來로金富軾李奎報等이다文名이大著ᄒᆞ나齊賢으로ᄡᅧ第一을삼더라諡曰文忠이라ᄒᆞ다○冬十月에前侍中慶復興과知僉議吳仁澤과三司使安遇慶等이辛旽을謀除ᄒᆞ다가事覺ᄒᆞ야다南裔에杖流ᄒᆞ다○十二月에李穡으로ᄡᅥ成均大司成을拜ᄒᆞ고鄭夢周로ᄡᅧ博士ᄅᆞᆯ삼다穡이生員을增置ᄒᆞᆯᄉᆡ夢周와金九容과朴尙衷과朴宜中과李崇仁等을擇ᄒᆞ야다他官으로敎官을兼授ᄒᆞ고每日明倫堂에坐ᄒᆞ야經業을分授ᄒᆞ고講을畢ᄒᆞᆫ後에셔로論難ᄒᆞ니於是에學徒가坌集ᄒᆞ야程朱性理學이始興ᄒᆞ더라時에學者의所習ᄒᆞᄂᆞᆫ經書가中國으로브터至ᄒᆞᄂᆞᆫ者ㅣ오쟉朱子集註라夢周ㅣ講說이新意ᄅᆞᆯ自出ᄒᆞᆷ이多ᄒᆞ니聞者ㅣ자못疑訝ᄒᆞ더니밋胡炳文의四書通을見ᄒᆞ니意義가다脗合ᄒᆞᄂᆞᆫ지라穡이亟稱ᄒᆞ야曰達可夢周의字라의論議가豎說堅說이다理致에不當ᄒᆞᆷ이無ᄒᆞ다ᄒᆞ더라○辛旽이前僉議贊成事瑞寧君柳淑을殺ᄒᆞ다時에旽이淑이비록退仕ᄒᆞ엿스나王이復用ᄒᆞᆯ가恐ᄒᆞ야王ᄭᅴ譖ᄒᆞ야曰淑이ᄆᆡ양勾踐으로ᄡᅧ上ᄭᅴ比ᄒᆞ고范蠡로ᄡᅥ自比ᄒᆞ니淑이만일蠡의乘舟ᄅᆞᆯ效ᄒᆞ면반다시燕京을向ᄒᆞ야德興君을謀立ᄒᆞ리니早除ᄒᆞ야後患을以絶ᄒᆞ소셔ᄒᆞᆫᄃᆡ王이命ᄒᆞ야杖流ᄒᆞ라ᄒᆞ거ᄂᆞᆯ旽이곳遣人執殺ᄒᆞ다淑이忠義大節이有ᄒᆞ고臨事決策에識見이卓絶ᄒᆞ더니밋臨死에顔色이平時와如ᄒᆞ더라諡曰文僖라ᄒᆞ다○成均祭酒金文鉉이其父達祥을弑ᄒᆞ다文鉉이淫悖無度ᄒᆞ야其兄의妾을私通ᄒᆞ거ᄂᆞᆯ達祥이法司가按治ᄒᆞᆯ가恐ᄒᆞ야辛旽의게請曰文鉉이不肖ᄒᆞ니置外ᄒᆞ라ᄒᆞᆫᄃᆡ旽이其罪ᄅᆞᆯ問ᄒᆞ거ᄂᆞᆯ達祥이斥言키難ᄒᆞ야但曰狂惑이라ᄒᆞ엿더니文鉉이聞ᄒᆞ고怨恨ᄒᆞ야旽의게言曰吾父ㅣ公의不德을議論ᄒᆞ야曰반다시亡國ᄒᆞ리라ᄒᆞᆫ다ᄒᆞ니旽이怒ᄒᆞ야達祥을遠地에流ᄒᆞ엿다가다시殺ᄒᆞ고文鉉은旽의門客이되더라○明兵이燕京을拔ᄒᆞ니元主ㅣ北으로沙漠에走ᄒᆞ다

공민왕 16년【원 순제 지정 27년 ○ 일황 후촌상 29년 ○ 서력 기원 1367년】이었다.

봄 2월에 원(元)나라가 고대비(高大悲)를 보내 왔다. 당시 원나라 황제가 제주(濟州)로 피난 가려고 어부(御府)의 금과 비단을 실어 보내고, 제주를 다시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 승려 선현(禪顯)를 왕사(王師)로 삼으니, 선현은 신돈(辛旽)과 비견될 만하다. 왕이 강안전(康安殿)으로 불러서 만날 때에 왕이 아홉 번 절하니 선현은 서서 절을 받았다. 백관이 조복(朝服)을 입고 치하하였으며, 신돈은 혼자 융복(戎服, 무신이 입는 군복)을 입고 전각 위에 서 있었다.

○ 가을 7월에 전 첨의 정승(僉議政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이 죽었다. 이제현은 타고난 자질이 점잖고 너그러웠으며, 또 학문의 깊이가 심오하여 의논이나 시행된 사업이 내놓은 것들이 모두 빛나서 볼만하였다. 평생에 말을 빨리 하거나 얼굴에 당황한 빛을 보인 적이 없었고, 또 허심탄회하게 아랫사람을 대해, 다른 사람의 일은 비록 사소한 선행이라도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스스로 ‘익재(益齋)’라 칭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여 노소, 귀천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그를 ‘익재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그가 저술한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이 있으니, 고려(高麗) 이래로 김부식(金富軾)과 이규보(李奎報) 등이 모두 문명(文名)이 높았으나, 이제현을 제일로 삼았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 겨울 10월에 전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과 지첨의(知僉議) 오인택(吳仁澤), 삼사사(三司使) 안우경(安遇慶) 등이 신돈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모두 장형(杖刑)을 받고 남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 12월에 이색(李穡)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하고, 정몽주(鄭夢周)를 박사(博士)로 삼았다. 이색이 생원(生員)의 수를 늘릴 때 정몽주와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을 선발하여 모두 다른 관직과 함께 교관(敎官)을 겸하게 하였다.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경업(經業)을 나누어 가르치고 강론을 마친 후에 서로 토론하니 이에 학도들이 몰려들어 정주 성리학(程朱性理學)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학자들이 배우는 경서(經書)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은 오직 『주자집주(朱子集註)』뿐이었다. 정몽주가 강론할 때 새로운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많아서 듣는 사람들이 자못 의아해 하였는데,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을 보니 그 의미가 모두 들어맞았다. 이색이 매우 칭찬하며 말하기를, “달가(達可)【정몽주의 자(字)이다.】의 논의는 세우는 주장이나 지키는 주장이 모두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 신돈이 전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 서녕군(瑞寧君) 유숙(柳淑)을 죽였다. 이때 신돈은 유숙이 비록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왕이 다시 등용할까 두려워하여 왕에게 참소하기를, “유숙이 매번 왕을 구천(句踐)에 비유하고 자신은 범려(范蠡)에 비유하니, 유숙이 만일 범려를 본받아서 배를 타고 떠난다면 반드시 연경(燕京)으로 가서 덕흥군(德興君)을 옹립하려 할 것이니 미리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명령하여 장형을 내린 뒤 유배를 보내도록 하였지만, 신돈이 곧 사람을 보내 그를 잡아 죽였다. 유숙이 충의와 절개가 있었고, 일에 임하여 정책을 결정할 때 식견이 탁월하였는데, 죽음에 임해서도 안색이 평상시와 같았다. 시호는 문희(文僖)라 하였다.

○ 성균관 제주(祭酒) 김문현(金文鉉)이 자신의 아버지 김달상(金達祥)을 죽였다. 김문현이 음란하고 행실이 무도하여 자기 형의 첩과 사통(私通)하자, 김달상이 법사(法司)에서 조사하여 다스릴까 두려워 신돈에게 청하기를, “김문현이 어리석으니 밖으로 보내 달라.”고 하였다. 신돈이 그 죄를 물으니 김달상이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워 다만 말하기를, “미쳐서 정신이 이상합니다.”라고 하였다. 김문현이 이를 듣고 원한을 품어 신돈에게 말하기를, “저의 아버지가 공의 부덕을 논하며 말하기를,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신돈이 노하여 김달상을 먼 곳으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죽였다. 김문현은 신돈의 문객(門客)이 되었다.

○ 명(明)나라의 군사가 연경을 함락하니, 원나라 황제가 북쪽 사막으로 도망갔다.


기유[편집]

十八年明太祖洪武二年○日皇長慶二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六十九年이라夏四月에明太祖ㅣ遣使ᄒᆞ야天下定ᄒᆞᆷ을告ᄒᆞ더라○禮部尙書洪尙載ᄅᆞᆯ遣ᄒᆞ야明에如ᄒᆞ고自是로歲以爲常ᄒᆞ다○六月에官制ᄅᆞᆯ改ᄒᆞ다○秋七月이라先是에日人이投化ᄒᆞᄂᆞᆫ者ㅣ多ᄒᆞ야朝廷이巨濟와南海等處에分居케ᄒᆞ엿더니至是ᄒᆞ야다시諸郡을侵掠ᄒᆞ더라

공민왕 18년【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2년 ○ 일황 장경(長慶) 2년 ○ 서력 기원 1369년】이었다.

여름 4월에 명(明)나라 태조(太祖)가 사신을 보내 천하를 평정하였음을 알려 왔다.

○ 예부 상서(禮部尙書) 홍상재(洪尙載)를 명나라에 파견하고 이로부터 해마다 이를 상례로 하였다.

○ 6월에 관제를 개편하였다.

○ 가을 7월이었다. 이에 앞서 일본 사람[日人] 가운데 귀화하는 사람이 많아, 조정에서 거제(巨濟)와 남해(南海) 등지에 나누어 정착하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들이 다시 여러 군을 약탈하였다.


경술[편집]

十九年明太祖洪武三年○日皇長慶三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七十年이라我太祖ㅣ元의東寧府在鴨江西兀剌城을攻拔ᄒᆞ시다時에王이東寧府ᄅᆞᆯ擊ᄒᆞ야元을絶코자ᄒᆞᆯᄉᆡ太祖ᄅᆞᆯ拜ᄒᆞ야東北面元帥ᄅᆞᆯ삼고池龍壽로西北面元帥ᄅᆞᆯ拜ᄒᆞ야往勦ᄒᆞ라ᄒᆞ거ᄂᆞᆯ太祖ㅣ步騎萬餘ᄅᆞᆯ率ᄒᆞ시고鴨綠江을渡ᄒᆞ야兀剌城에至ᄒᆞ시니其酋高安慰ㅣ險要ᄅᆞᆯ據ᄒᆞ야不降ᄒᆞ거ᄂᆞᆯ太祖ㅣ片箭으로ᄡᅧ射ᄒᆞ시니凡七十餘發에다敵人의面을中ᄒᆞ시ᄂᆞᆫ지라城中이奪氣ᄒᆞ고安慰ᄂᆞᆫ夜遁ᄒᆞ고諸山城이望風歸款ᄒᆞ니於是에東은皇城古女眞皇帝城과北은東寧府와西ᄂᆞᆫ海에至ᄒᆞ고南은鴨綠ᄭᆞ지다遁逃一空ᄒᆞ더라○冬十一月에我太祖ㅣ池龍壽로더브러遼城을攻拔ᄒᆞ시다初에奇轍의子賽因帖木兒ㅣ元에仕ᄒᆞ야平章事가되엿다가元이亡ᄒᆞᄆᆡ平章事金伯顔으로더브러遺衆을招集ᄒᆞ야東寧府ᄅᆞᆯ據有ᄒᆞ고其父의仇ᄅᆞᆯ報코ᄌᆞᄒᆞ야我의北鄙ᄅᆞᆯ來寇ᄒᆞ거ᄂᆞᆯ王이太祖와밋龍壽ᄅᆞᆯ命ᄒᆞ야擊ᄒᆞ라ᄒᆞ니太祖ㅣ遼城에進軍ᄒᆞ실ᄉᆡ驍將處明이恃勇拒戰ᄒᆞᄂᆞᆫ지라太祖ㅣ몬져兜䥐ᄅᆞᆯ射ᄒᆞ시고ᄯᅩ其脚을射ᄒᆞ야曰不降ᄒᆞ면장ᄎᆞ汝의面을射ᄒᆞ리라ᄒᆞ시니處明이下馬叩頭ᄒᆞ고降ᄒᆞ니敵이氣奪ᄒᆞ더라드ᄃᆡ여其城을進拔ᄒᆞ니賽因帖木兒ᄂᆞᆫ遁去ᄒᆞ고伯顔을虜ᄒᆞ시고元의丞相納哈出과밋其餘敵將은招降ᄒᆞ시고班師ᄒᆞ시다後에處明이太祖의恩을感動ᄒᆞ야矢痕을見ᄒᆞ면嗚咽流涕ᄒᆞ더니雲峯戰爭의力戰立功ᄒᆞ다

공민왕 19년【명 태조 홍무 3년 ○ 일황 장경 3년 ○ 서력 기원 1370년】이었다.

우리 태조(太祖)가 원(元)나라의 동녕부(東寧府)【압록강(鴨綠江) 서쪽에 있다.】 올랄성(兀剌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때 왕이 동녕부를 쳐서 원나라과의 관계를 끊고자 하여, 태조를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삼고,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에 임명하여 가서 공격하라고 하셨다. 태조께서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서 올랄성에 이르시니, 적의 추장 고안위(高安慰)가 험한 요새를 점거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께서 편전(片箭)을 쏘았는데 70여 발이 다 적의 얼굴에 명중했다. 성안에 있던 적이 사기가 떨어지고 고안위는 밤에 도망갔다. 여러 산성(山城)이 태조의 명성을 듣고 우러러보면서 복종하였다. 이에 동쪽은 황성(皇城)【옛 여진(女眞) 황제의 성】, 북쪽은 동녕부, 서쪽은 바다에 이르고, 남쪽은 압록강까지 모두 도망가 텅 비게 되었다.

○ 겨울 11월에 우리 태조께서 지용수와 함께 요성(遼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셨다. 처음에 기철(奇轍)의 아들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가 원에서 벼슬하면서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가 원이 망하자 평장사 김백안(金伯顔)과 함께 남은 무리를 불러 모아 동녕부를 점거하고, 자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우리의 북쪽 변방을 침략하였다. 왕이 태조와 지용수에게 명하여 가서 공격하라고 하였다. 이에 태조께서 요성으로 나아갈 적에 적의 날랜 장수 처명(處明)이 자신의 용맹함을 믿고 맞서 싸우고자 하였다. 이에 태조께서 먼저 투구를 쏘고 또 그의 다리에 활을 쏘며 말하시기를, “항복하지 않으면, 너의 얼굴을 쏠 것이다.”라고 하셨다. 처명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니, 적의 사기가 떨어져 드디어 성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기새인첩목아는 도망가고 김백안을 포로로 잡았으며, 원나라 승상(丞相) 납합출(納哈出)과 그의 나머지 장수들을 불러 항복을 받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셨다.【후에 처명이 태조의 은혜에 감동하여 화살을 맞은 상처를 보면서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더니 운봉(雲峯) 전쟁에서 힘써 싸워 공을 세웠다.】


신해[편집]

二十年明太祖洪武四年○日皇長慶四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七十一年이라春二月에女眞千戶李豆蘭이歸化ᄒᆞ니豆蘭의本姓은佟이러라○夏五月에前長沙今茂監務李存吾ㅣ卒ᄒᆞ다存吾ᄂᆞᆫ慶州人이라性이孝友簡重ᄒᆞ고早孤力學ᄒᆞᆯᄉᆡ鄭夢周李崇仁等으로더브러友善ᄒᆞ더니坐貶ᄒᆞᆫ後로브터公州石灘에㝢居ᄒᆞ야旽의勢가益熾ᄒᆞᆷ을見ᄒᆞ고憂憤成疾ᄒᆞ다가밋疾篤ᄒᆞᄆᆡ左右로ᄒᆞ여곰扶起曰旽이尙熾乎아ᄒᆞ니左右ㅣ曰然ᄒᆞ다ᄒᆞᆫᄃᆡ還臥ᄒᆞ야曰旽이亡ᄒᆞ여야吾ㅣ亡ᄒᆞ리라ᄒᆞ고反席ᄒᆞ다가卒ᄒᆞ니年이三十一이라밋旽이誅ᄒᆞᄆᆡ王이其忠을思ᄒᆞ야大司成을贈職ᄒᆞ다○秋七月에辛旽이伏誅ᄒᆞ다時에旽이威福을恣行ᄒᆞ니王도ᄯᅩᄒᆞᆫ自安치못ᄒᆞ더라王의性이猜忌ᄒᆞ야비록腹心大臣이라도밋權勢가盛ᄒᆞ면반다시誅ᄒᆞ거ᄂᆞᆯ旽이見誅ᄒᆞᆯ가恐ᄒᆞ야드ᄃᆡ여不軌ᄅᆞᆯ謀ᄒᆞᆯᄉᆡ其黨으로더브러刻日擧事ᄒᆞ거ᄂᆞᆯ其客侍郞李韌이王ᄭᅴ告ᄒᆞᆫᄃᆡ王이이에其黨奇顯과崔思遠等을誅ᄒᆞ고旽을水原府에流ᄒᆞ엿다가誅ᄒᆞ야京師에梟示ᄒᆞ고其二歲兒ᄅᆞᆯ幷殺ᄒᆞ고慶復興等을召還ᄒᆞ다○李穡으로政堂文學을拜ᄒᆞ고近臣다려謂曰文武兩大官이다第一流라ᄒᆞ니穡과밋我太祖ᄅᆞᆯ指ᄒᆞᆷ이러라○子弟衛ᄅᆞᆯ置ᄒᆞ고年少美貌者ᄅᆞᆯ選ᄒᆞ야屬ᄒᆞ고代言金慶興으로ᄡᅧ管理케ᄒᆞ니於是에洪倫과韓安과權瑨과盧瑄等이다寵幸ᄒᆞ야臥內에常侍ᄒᆞ고ᄯᅩ美壯ᄒᆞᆫ者ᄅᆞᆯ多選ᄒᆞ야禁中에常置ᄒᆞ고號曰東古赤이라ᄒᆞ고子弟衛로더브러幷히有寵ᄒᆞ더라○禑ᄅᆞᆯ封ᄒᆞ야江陵府院大君을삼다先是에辛旽이流ᄒᆞᆯ셔王이侍臣다려謂ᄒᆞ야曰予가일즉辛旽家에셔一婢ᄅᆞᆯ幸ᄒᆞ야子ᄅᆞᆯ生ᄒᆞ니名은牟利奴라善히保護ᄒᆞ라ᄒᆞ더니이윽고太后殿에召入ᄒᆞ야養育ᄒᆞ고侍中李仁任을顧謂曰元子ㅣ在ᄒᆞ니吾ㅣ無憂ᄒᆞ다ᄒᆞ더니至是ᄒᆞ야禑라改名ᄒᆞ고儒臣白文寶와田祿生과鄭樞等으로ᄡᅧ師傅ᄅᆞᆯ拜ᄒᆞ다

공민왕 20년【명 태조 홍무 4년 ○ 일황 장경 4년 ○ 서력 기원 1371년】이었다.

봄 2월에 여진 천호(女眞千戶) 이두란(李豆蘭)이 귀화하니, 이두란의 본래 성은 동(佟)이었다.

○ 여름 5월에 전 장사(長沙)【지금의 무장(茂長)】 감무(監務) 이존오(李存吾)가 죽었다. 이존오는 경주(慶州) 사람으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소박하고 신중했다. 일찍 고아가 되어 학문에 힘써서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교우가 좋았는데, 좌천된 이후로 공주(公州) 석탄(石灘)에서 살았다. 신돈(辛旽)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는 것을 보고 울분을 토하다가 병이 들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좌우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말하기를, “신돈이 아직도 강한가?” 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러하다.”고 하니 다시 누워서 말하기를,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자리로 돌아가다가 죽으니 나이가 31세였다. 그 후 신돈이 처형을 당하자 왕이 이존오의 충성을 생각하여 대사성(大司成) 벼슬을 추증하였다.

○ 가을 7월에 신돈이 처형되었다. 이때 신돈이 위엄을 보이거나 은혜를 베푸는 일을 제멋대로 하니 왕 또한 편안치 못하였다. 왕의 성격이 시기를 잘하여 비록 심복 대신이라고 하더라도 권세가 강해지면 반드시 죽였다. 신돈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반역을 도모하고, 그 무리와 함께 거사 날짜를 정하였다. 그의 문객 시랑(侍郞) 이인(李韌)이 왕에게 알리자, 왕이 그 무리 기현(奇顯)과 최사원(崔思遠) 등을 죽이고 신돈을 수원부(水原府)에 유배 보냈다가 죽여서 도성에 효시(梟示)하였다. 그의 2세 된 아들도 함께 죽였으며 경복흥(慶復興) 등을 소환하였다.

○ 이색(李穡)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하고 근신들에게 말하기를, “문무 양 대관(大官)이 모두 최고이다.”라고 하니, 이는 이색과 우리 태조(太祖)를 가리킨 것이다.

○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고 나이 어린 미소년을 뽑아 소속시키고, 대언(代言) 김경흥(金慶興)에게 관리하게 하였다. 이에 홍륜(洪倫), 한안(韓安), 권진(權瑨), 노선(盧瑄) 등이 모두 총애를 받아 침실 내에서 항상 시중을 들었다. 또 아름답고 건장한 자들을 많이 뽑아 궁궐에 항상 두고 그들을 ‘동고적(東古赤)’이라고 부르며 자제위와 함께 같이 총애하였다.

○ 우(禑)를 봉하여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신돈이 유배 갔을 때에 왕이 시종 들던 신하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서 한 여종을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모니노(牟尼奴)라 하니 잘 보살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후전(太后殿)으로 불러들여 양육하면서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원자(元子)가 있으니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름을 ‘우’라고 고치고, 유신(儒臣) 백문보(白文寶)와 전녹생(田祿生), 정추(鄭樞) 등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갑인[편집]

二十三年明太祖洪武七年○日皇後龜山二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七十四年이라秋七月에崔瑩으로ᄡᅧ楊廣今京畿忠淸兩道等道都統使ᄅᆞᆯ拜ᄒᆞ고諸軍을領率ᄒᆞ고濟州ᄅᆞᆯ伐ᄒᆞ다先是에明國이耽羅의馬二千匹을徵索ᄒᆞ거ᄂᆞᆯ王이評理韓方彦을命ᄒᆞ야往取ᄒᆞᆯᄉᆡ濟州에在ᄒᆞᆫ元人石迭里等이不聽曰吾ㅣ엇지元世祖의放畜ᄒᆞᆫ馬ᄅᆞᆯ明國에送ᄒᆞ리오ᄒᆞ고다만三百匹을給ᄒᆞᄂᆞᆫ지라王이明國의意ᄅᆞᆯ難違ᄒᆞ야瑩等으로ᄒᆞ여곰軍士二萬餘人을率ᄒᆞ고往攻ᄒᆞ니石迭里等이三千餘騎로ᄡᅥ明月浦在濟에셔拒戰ᄒᆞ거ᄂᆞᆯ瑩이進擊大破ᄒᆞ고石迭里ᄅᆞᆯ斬ᄒᆞ고餘黨을盡殺ᄒᆞ니濟州가이에平ᄒᆞ다○九月에明의徵馬使ㅣ還ᄒᆞ거ᄂᆞᆯ王이密直副使金義ᄅᆞᆯ遣ᄒᆞ야護送ᄒᆞᆯᄉᆡ明使ㅣ酗酒ᄒᆞ야ᄆᆡ양義ᄅᆞᆯ殺코ᄌᆞᄒᆞ거ᄂᆞᆯ義ㅣ드ᄃᆡ여明使ᄅᆞᆯ殺ᄒᆞ고其馬三百匹을奪ᄒᆞ야北元에奔ᄒᆞ니義ᄂᆞᆫ本來元人이러라○王이江陵府院君禑의母가賤ᄒᆞ다ᄒᆞ야故宮人韓氏의所出이라稱ᄒᆞ고韓氏의三世ᄅᆞᆯ追贈ᄒᆞ다○宦者崔萬生과幸臣洪倫等이王을弑ᄒᆞ다初에王이倫等으로ᄒᆞ여곰宮掖을汚穢ᄒᆞ야生子ᄒᆞ기ᄅᆞᆯ冀ᄒᆞ더니時예益妃王氏ㅣ有身ᄒᆞ거ᄂᆞᆯ萬生이王ᄭᅴ告ᄒᆞᆫᄃᆡ王이喜曰誰와與合ᄒᆞᆫ고ᄒᆞ거ᄂᆞᆯ萬生이對曰益妃가言ᄒᆞ되洪倫이라ᄒᆞ더이다ᄒᆞᆫᄃᆡ王曰吾ㅣ맛당히倫을殺ᄒᆞ야滅口ᄒᆞᆯ거시오汝도ᄯᅩᄒᆞᆫ不免ᄒᆞ리라ᄒᆞ니萬生이大懼ᄒᆞ야是夜에倫等으로더브러寢殿에入ᄒᆞ야王을擊弑ᄒᆞ거ᄂᆞᆯ太后ㅣ發喪치아니ᄒᆞ고慶復興과李仁任等을召ᄒᆞ야萬生等을誅ᄒᆞ고仁任의議ᄅᆞᆯ從ᄒᆞ야江陵府院君禑ᄅᆞᆯ立ᄒᆞ다王의性이本來嚴重ᄒᆞ고動容이禮節에中ᄒᆞ더니晩年에心疾을得ᄒᆞ야猜暴忌克ᄒᆞ고荒惑이滋甚ᄒᆞ다가此禍ᄅᆞᆯ及ᄒᆞ다諡曰恭愍이오玄陵에葬ᄒᆞ다

공민왕 23년【명 태조 홍무 7년 ○ 일황 후귀산(後龜山) 2년 ○ 서력 기원 1374년】이었다.

가을 7월에 최영(崔瑩)을 양광도(楊廣道)【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두 도】 등의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여러 군대를 이끌고 제주(濟州)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명(明)나라가 탐라(耽羅)의 말 2천 필을 징발하고자 하니 왕이 평리(評理) 한방언(韓方彦)에게 명하여 가서 이를 거두려 하였다. 제주에 살고 있던 원(元)나라 사람 석질리(石迭里) 등이 이를 듣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원나라 세조가 풀어 기른 말을 명나라에 보내겠는가?” 하면서 다만 3백 필을 바쳤다. 왕이 명나라의 뜻을 거스르기가 어려워 최영 등으로 하여금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석질리 등이 3천여 기병으로 명월포(明月浦)【제주에 있다.】에서 맞서 싸웠다. 최영이 진격하여 크게 물리치고 석질리의 목을 베었으며, 남은 무리를 모두 죽이니 이에 제주가 평정되었다.

○ 9월에 명나라의 징마사(徵馬使)가 돌아가므로 왕이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의(金義)를 보내 호송하게 하였다. 그때 명나라 사신이 술주정을 하며 매번 김의를 죽이고자 하므로, 결국 김의가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말 3백 필을 빼앗아 북원(北元)으로 도망갔다. 김의는 본래 원나라 사람이었다.

○ 왕이 강녕부원군(江寧府院君) 우(禑)의 어미가 천하다 하여 죽은 궁인(宮人) 한(韓)씨가 낳았다고 칭하고 한씨의 3대에게 벼슬을 추증하였다.

○ 환관 최만생(崔萬生)과 총애를 받던 신하 홍륜(洪倫) 등이 왕을 시해하였다. 처음에 왕이 홍륜 등으로 하여금 궁중의 여인들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기를 바랐다. 이때 익비(益妃) 왕씨(王氏)가 임신을 하자 최만생이 이를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누구와 잠을 잤는가?”라고 하니, 최만생이 대답하기를, “익비께서 홍륜이라고 말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홍륜을 죽여 그 입을 막을 것이며, 너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만생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날 밤 홍륜 등과 함께 침전에 들어가 왕을 쳐서 시해하였다. 태후가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경복흥(慶復興)과 이인임(李仁任) 등을 불러 최만생 등을 죽이고, 이인임의 의견에 따라서 강녕부원군 우를 왕으로 세웠다. 왕의 성품이 본래 엄중하고 거동과 차림새가 예절에 맞았는데, 만년에 마음의 병을 얻어서 시기하고 난폭하였으며, 허황된 말에 현혹됨이 매우 심하였다가 이런 화를 당하게 되었다. 시호는 공민(恭愍)이라 하고 현릉(玄陵)에 장사 지냈다.


전 폐왕 우[편집]

前廢王禑의小字ᄂᆞᆫ牟尼奴니在位十四年이라

전 폐왕 우의 어릴 적 자(字)는 모니노(牟尼奴)이며, 재위 기간은 14년이었다.


을묘[편집]

元年明太祖洪武八年○日皇後龜山三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七十五年이라春正月에判宗簿寺崔源을明에遣ᄒᆞ야殺使ᄒᆞᆫ事ᄅᆞᆯ剖辨ᄒᆞ다○都城의五部戶數ᄅᆞᆯ改定ᄒᆞᆯᄉᆡ屋의間架가二十以上은一戶가되야軍丁一名을出ᄒᆞ고架가少ᄒᆞ면或四五家ᄅᆞᆯ倂ᄒᆞ야一戶ᄅᆞᆯ삼다

전 폐왕 우 원년【명 태조 홍무 8년 ○ 일황 후귀산 3년 ○ 서력 기원 1375년】이었다.

봄 정월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최원(崔源)을 명(明)나라에 보내어 사신을 죽인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 도성의 5부 호수를 개정할 때 집의 칸 수[間架] 20 이상은 1호가 되어 군정(軍丁) 1명을 보내고, 칸 수가 적으면 혹 4, 5집을 합쳐서 1호로 삼았다.


병진[편집]

二年明太祖洪武九年○日皇後龜山四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七十六年이라春三月에廢王禑의母般若ᄅᆞᆯ臨津에投ᄒᆞ다般若ㅣ太后宮에入ᄒᆞ야啼曰吾ㅣ實노主上을生ᄒᆞ얏거ᄂᆞᆯ엇지韓氏ᄅᆞᆯ母ᄒᆞᄂᆞᆫ고ᄒᆞᄂᆞᆫ지라時에仁任이王을推立ᄒᆞᆫ後로朝政을專擅ᄒᆞᆯᄉᆡ곳般若ᄅᆞᆯ捕ᄒᆞ야下獄ᄒᆞ엿다가맛ᄎᆞᆷᄂᆡ臨津江에投ᄒᆞ다般若ㅣ被鞫ᄒᆞᆯ時에新創ᄒᆞᆫ中門을指ᄒᆞ야曰天이吾冤을若知ᄒᆞ면此門이必然自頹ᄒᆞ리라ᄒᆞ더니이윽고門이自頹ᄒᆞ니世人이크게怪訝ᄒᆞ더라○秋七月에日本이公州等城을陷ᄒᆞ니楊廣道元帥朴仁桂ㅣ敗死ᄒᆞ거ᄂᆞᆯ崔瑩이自請出戰ᄒᆞ야日兵으로더브러鴻山에셔戰ᄒᆞᆯᄉᆡ身先士卒ᄒᆞ며賊의矢가唇을中ᄒᆞ야流血이淋漓ᄒᆞ되神色이自若ᄒᆞ고드ᄃᆡ여奮擊大破ᄒᆞ니由是로威名이大振ᄒᆞ더라

전 폐왕 우 2년【명 태조 홍무 9년 ○ 일황 후귀산 4년 ○ 서력 기원 1376년】이었다.

봄 3월에 폐왕 우(禑)의 어머니 반야(般若)【음은 야(耶)】를 임진강(臨津江)에 던져 죽였다. 반야가 태후궁에 들어가 울며 말하기를, “내가 실제로 주상(主上)을 낳았는데 어찌 한(韓)씨를 어머니라 합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이인임(李仁任)이 왕을 받들어 세운 후 국정을 제멋대로 하였으므로, 곧 반야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마침내 임진강에 던져 죽였다. 반야가 국문을 받을 때에 새로 세운 중문(中門)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하늘이 만약 나의 원통함을 안다면 저 문이 반드시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문이 저절로 무너지니, 세상 사람들이 크게 괴이하게 여겼다.

○ 가을 7월에 일본(日本)이 공주(公州) 등의 성을 함락하니, 양광도 원수(楊廣道元帥) 박인규(朴仁桂)가 패하여 죽었다. 최영(崔瑩)이 출전을 자청하여 왜구[日兵]와 함께 홍산(鴻山)에서 싸울 때에 몸소 앞장서서 군사를 이끌다가 적의 화살에 입술을 맞아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얼굴색이 평소와 같이 태연하였고, 드디어 힘껏 싸워서 크게 물리치니 이로 인해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정사[편집]

三年明太祖洪武十年○日皇後龜山五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七十七年이라春三月에日本이窄梁에入ᄒᆞ야戰船을燒ᄒᆞ고ᄯᅩ江華ᄅᆞᆯ寇ᄒᆞ니京城이大震ᄒᆞᄂᆞᆫ지라禑ㅣ恐ᄒᆞ야鐵原에遷都코ᄌᆞᄒᆞ거ᄂᆞᆯ崔瑩이力諫ᄒᆞ야乃止ᄒᆞ고이윽고賊이ᄯᅩ西江松都西江을進逼ᄒᆞ거ᄂᆞᆯ瑩이邊安烈로더브러擊却ᄒᆞ다○夏五月이라時에日寇ㅣ慶尙道에充斥ᄒᆞ니元帥禹仁烈이濟師ᄒᆞ기ᄅᆞᆯ亟請ᄒᆞᄂᆞᆫ지라禑ㅣ我太祖와金得齊等을拜ᄒᆞ야助戰元帥ᄅᆞᆯ삼고往援ᄒᆞ라ᄒᆞ거ᄂᆞᆯ太祖ㅣ幷日直行ᄒᆞ시다가智異山에셔賊을大破ᄒᆞ시다○秋八月에日賊이西海道今黃海道ᄅᆞᆯ寇ᄒᆞ니元帥羅世巡等이敗績ᄒᆞ거ᄂᆞᆯ太祖ㅣ곳進擊ᄒᆞ야賊을海州에셔大破ᄒᆞ시니餘賊이據險績柴ᄒᆞ야自固코ᄌᆞᄒᆞᄂᆞᆫ지라太祖ㅣ胡牀에踞坐ᄒᆞ사張樂進酒ᄒᆞ시고士卒로ᄒᆞ여곰柴ᄅᆞᆯ焚ᄒᆞ니煙焰이漲天ᄒᆞ고賊이勢窮ᄒᆞ야冒死突圍ᄒᆞ다가矢가太祖의座前酒甁을中ᄒᆞ거ᄂᆞᆯ太祖ㅣ安坐不起ᄒᆞ시고諸軍을令ᄒᆞ사擊殲幾盡ᄒᆞ다○內城을築ᄒᆞ다崔瑩이建議ᄒᆞ되京都外城이闊大ᄒᆞ야守禦키難ᄒᆞ니內城을築ᄒᆞ야不虞를備ᄒᆞᄌᆞᄒᆞᆷ이러라

전 폐왕 우 3년【명 태조 홍무 10년 ○ 일황 후귀산 5년 ○ 서력 기원 1377년】이었다.

봄 3월에 일본(日本)이 착량(窄梁)에 침입하여 전선을 불태우고 또 강화(江華)를 약탈하니 도성이 크게 놀랐다. 우(禑)가 두려워하여 철원(鐵原)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자, 최영(崔瑩)이 간언하여 멈추게 하였다. 이윽고 적이 또한 서강(西江)【송도(松都)의 서강】까지 진격하여 압박하니, 최영이 변안렬(邊安烈)과 함께 격퇴하였다.

○ 여름 5월이었다. 그때에 왜구[日寇]가 경상도에 그득하니 원수(元帥) 우인열(禹仁烈)이 군사를 지원해 주기를 급히 청하였다. 우(禑)가 우리 태조(太祖)와 김득제(金得齊) 등을 조전원수(助戰元帥)에 임명하고 가서 지원하게 하였다. 태조께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바로 가시다가 지리산(智異山)에서 적을 크게 물리치셨다.

○ 가을 8월에 왜구가 서해도(西海道)【지금의 황해도】를 약탈하였는데, 원수 나세순(羅世巡) 등이 패하였다. 이에 태조께서 곧 진격하여 해주(海州)에서 적을 크게 물리치시니, 나머지 적들이 험한 지역을 점거하고 섶나무를 쌓아 방비하였다. 태조께서 호상(胡床, 중국식 의자)에 걸터앉아 계시면서 음악을 울리고 술을 마시며 병사들로 하여금 섶나무를 불태우게 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다. 적이 기세가 궁해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포위를 뚫고 나올 때 화살이 태조 앞에 놓인 술병에 명중하였다. 태조께서 편안히 앉아 일어나지 않으시고 여러 군사에게 호령하여 적을 완전히 섬멸하였다.

○ 내성(內城)을 쌓았다. 최영이 건의하였는데, 도성의 외성이 넓고 커서 수비하기가 어려우므로, 내성을 쌓아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무오[편집]

四年明太祖洪武十一年○日皇後龜山六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七十八年夏四月이라時에日賊이水原南陽等州ᄅᆞᆯ連寇ᄒᆞ고ᄯᅩ窄梁에大集ᄒᆞ야昇天府今豊ᄅᆞᆯ入ᄒᆞ니京師ㅣ大震ᄒᆞᄂᆞᆫ지라禑ㅣ崔瑩과밋贊成使楊伯淵과我太祖ᄅᆞᆯ遣ᄒᆞ야防禦ᄒᆞᆯᄉᆡ賊이ᄡᅧᄒᆞ되瑩의軍을破ᄒᆞ면京師ᄅᆞᆯ可圖라ᄒᆞ고곳瑩軍을急擣ᄒᆞ니瑩이拒敵지못ᄒᆞ고奔ᄒᆞ거ᄂᆞᆯ太祖ㅣ精騎ᄅᆞᆯ率ᄒᆞ시고伯淵으로더브러合擊大破ᄒᆞ시니瑩이ᄯᅩᄒᆞᆫ從傍衝擊ᄒᆞ야賊을盡殲ᄒᆞ다○六月에日本의九州節度使源了俊이僧信弘을遣來ᄒᆞ야日賊을捕ᄒᆞ다先是에禑ㅣ判典校事羅興儒ᄅᆞᆯ日本에遣ᄒᆞ야海賊을禁ᄒᆞ라ᄒᆞ니日本이報稱ᄒᆞ되貴國을侵犯ᄒᆞᄂᆞᆫ者ᄂᆞᆫ我西海道의九州頑民이라本國이바야흐로遣將征討ᄒᆞ야海寇ᄅᆞᆯ禁戢ᄒᆞ리라ᄒᆞ더니其後에賊이오히려寇掠이不已ᄒᆞ거ᄂᆞᆯᄯᅩ鄭夢周ᄅᆞᆯ遣ᄒᆞ야交隣利害ᄅᆞᆯ極陳ᄒᆞ니日人이敬服ᄒᆞ더니至是ᄒᆞ야了俊이信弘으로ᄒᆞ여곰軍士ᄅᆞᆯ率ᄒᆞ고賊黨을來捕ᄒᆞᆯᄉᆡ屢次爭鬪ᄒᆞ다가信弘이引兵歸國ᄒᆞ고翌年夏五月에日本이다시朴居士等을遣ᄒᆞ야海寇ᄅᆞᆯ來討ᄒᆞ더라○禑ㅣ南京에出獵ᄒᆞ다時에禑ㅣ淫荒無度ᄒᆞ야聲色游畋으로ᄡᅥ爲事ᄒᆞ더라

전 폐왕 우 4년【명 태조 홍무 11년 ○ 일황 후귀산 6년 ○ 서력 기원 1378년】이었다.

여름 4월이었다. 이때에 왜구[日賊]가 수원주(水原州)와 남양주(南陽州) 등을 연달아 노략질하였다. 또한 착량(窄梁)에 대규모로 모여 승천부(昇天府)【지금의 풍덕(豊德)】를 침입하니, 도성이 크게 동요하였다. 우(禑)가 최영(崔瑩)과 찬성사(贊成使) 양백연(楊伯淵), 그리고 우리 태조(太祖)를 보내서 방어하게 하였다. 적들이 최영의 군사를 물리치면 도성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최영의 군대를 급하게 공격하였다. 최영이 대적하지 못하고 도망을 가자, 태조께서 정예 기병을 이끌고 양백연과 함께 연합 공격하여 크게 물리치셨다. 최영이 또 옆에서 따라가면서 추격하여 적을 모두 섬멸하였다.

○ 6월에 일본(日本)의 규슈[九州] 절도사(節度使) 미나모토 료순[源了俊]이 승려 신홍(信弘)을 보내 와 왜구를 잡았다. 이에 앞서 우가 판전교사(判典校事)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 해적을 금지하라고 하니 일본이 대답하기를, “귀국을 침범하는 자는 우리 서해도(西海道) 규슈의 완고한 백성들이다. 우리나라에서 곧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 해적을 금지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해적이 오히려 약탈을 멈추지 않았으므로, 또 정몽주(鄭夢周)를 보내서 교류의 이해(利害) 관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니, 일본 사람들이 존경하여 복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미나모토 료순이 신홍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적의 무리를 사로잡도록 하였다. 여러 차례 싸우다가 신홍이 병사를 이끌고 귀국하였다. 그다음 해 여름 5월에 일본이 다시 박거사(朴居士) 등을 보내 해적을 토벌하였다.

○ 우가 남경(南京)【한양(漢陽)】으로 사냥을 나갔다. 이때 우가 음란하고 법도가 없어서 음악과 여색, 사냥만을 일삼았다.


경신[편집]

六年明太祖洪武十三年○日皇後龜山八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八十年이라春正月에太后洪氏ㅣ崩ᄒᆞ니壽가八十三이라后ㅣ賢行이有ᄒᆞ더니臨歿에禑ᄅᆞᆯ戒ᄒᆞ야大臣을咨訪ᄒᆞ고游觀을勿事ᄒᆞ라ᄒᆞ더라○秋八月에禑ㅣ城南에出獵ᄒᆞᆯᄉᆡ禾稼ᄅᆞᆯ蹂踐ᄒᆞ고ᄯᅩ群少로더브러閭巷에驅馳ᄒᆞ야人家鷄犬을射ᄒᆞ고行路婦人을劫掠ᄒᆞ더라○九月에我太祖ㅣ日賊을雲峯에셔大破ᄒᆞ시다先是에羅世巡과沈德符等이日賊을鎭浦在今韓山에셔破ᄒᆞ엿더니賊이懷憤肆毒ᄒᆞ야州縣을連陷ᄒᆞ니三道沿海地가다蕩然一空ᄒᆞ고ᄯᅩ元帥裴克廉鄭地等이沙斤驛在今咸陽에셔敗績ᄒᆞ니於是에賊이雲峯縣을焚ᄒᆞ고引月驛在今雲峯에進屯ᄒᆞ야北上ᄒᆞᆫ다聲言ᄒᆞ니中外가大震ᄒᆞᄂᆞᆫ지라禑ㅣ太祖로ᄡᅧ楊廣今京畿忠淸兩道全羅慶尙三道都巡察使ᄅᆞᆯ拜ᄒᆞ고邊安烈로ᄡᅧ副使ᄅᆞᆯ拜ᄒᆞ야往勦ᄒᆞ라ᄒᆞ거ᄂᆞᆯ太祖ㅣ安烈等으로더브러引兵南下ᄒᆞ야賊陣數十里ᄅᆞᆯ隔ᄒᆞ야太祖ㅣ道左의險徑을見ᄒᆞ시고曰賊이必然此道ᄅᆞᆯ由ᄒᆞ야我ᄅᆞᆯ掩襲ᄒᆞ리라ᄒᆞ시고諸將을令ᄒᆞ야大路ᄅᆞᆯ進ᄒᆞ고太祖ㅣ親히其險徑에入ᄒᆞ시더니賊兵이果然其地에埋伏ᄒᆞ엿거ᄂᆞᆯ太祖ㅣ賊五十餘人을射殺ᄒᆞ시고三戰皆捷ᄒᆞ시니賊이據險自固ᄒᆞᄂᆞᆫ지라太祖ㅣ諸軍을麾督ᄒᆞ야仰攻ᄒᆞ실ᄉᆡ流矢가太祖의左脚을中ᄒᆞ거ᄂᆞᆯ太祖ㅣ矢ᄅᆞᆯ抽ᄒᆞ시고意氣가益壯ᄒᆞ시니將士ㅣ感勵ᄒᆞ고人人이死戰ᄒᆞ더라賊中에阿只拔都라ᄒᆞᄂᆞᆫ者ᄂᆞᆫ年이겨우十五六이라驍勇이無比ᄒᆞ고舞槊馳突ᄒᆞ야所向에披靡ᄒᆞ거ᄂᆞᆯ太祖ㅣ그堅甲과銅面을被ᄒᆞᄆᆡ可射ᄒᆞᆯ隙이無ᄒᆞᆷ을見ᄒᆞ시고偏將李豆蘭다려謂ᄒᆞ사曰我ㅣ其兜ᄅᆞᆯ射ᄒᆞ야頂子가落ᄒᆞ거ᄂᆞᆯ汝ㅣ곳射ᄒᆞ라ᄒᆞ시고躍馬ᄒᆞ야阿只拔都의兜ᄅᆞᆯ射中ᄒᆞ시니頂子가落ᄒᆞᄂᆞᆫ지라豆蘭이곳射殺ᄒᆞ니賊이氣挫ᄒᆞ거ᄂᆞᆯ因ᄒᆞ야奮擊大破ᄒᆞ시니殭屍가遍野ᄒᆞ고川流가盡赤ᄒᆞ며餘賊은智異山으로奔去ᄒᆞ더라凱還ᄒᆞ시니崔瑩이百官을率ᄒᆞ고天壽寺前에셔迎接ᄒᆞᆯᄉᆡ太祖로더브러再拜ᄒᆞ고執手流涕曰三韓의再造ᄒᆞᆷ이在此一擧라ᄒᆞ더라日本이自此로太祖ᄅᆞᆯ畏ᄒᆞ야敢近치못ᄒᆞ고ᄆᆡ양我人을虜ᄒᆞ면반다시問曰李萬戶가今에何在오ᄒᆞ더라

전 폐왕 우 6년【명 태조 홍무 13년 ○ 일황 후귀산 8년 ○ 서력 기원 1380년】이었다.

봄 정월에 태후 홍씨(洪氏)가 돌아가셨는데 나이가 83세였다. 태후는 행실이 어질었는데, 임종 시 우(禑)에게 대신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구경 나가는 것을 삼가도록 훈계하였다.

○ 가을 8월에 우가 도성 남쪽으로 사냥을 나가서 곡식을 짓밟았으며, 또 나이 어린 사람들과 어울려 마을에서 말을 타고 달리고, 민가의 닭과 개를 활로 쏘며, 길가는 아녀자를 겁탈하였다.

○ 9월에 우리 태조(太祖)가 왜구를 운봉(雲峯)에서 크게 물리치셨다. 이에 앞서 나세순(羅世巡)과 심덕부(沈德符) 등이 왜구를 진포(鎭浦)【지금의 한산(韓山)에 있다.】에서 쳐부수자, 왜구가 울분과 독기를 품고 주현(州縣)을 연달아 함락하여 삼도의 연해 지역이 모두 텅 비었다. 또 원수 배극렴(裵克廉), 정지(鄭地) 등이 사근역(沙斤驛)【지금의 함양(咸陽)에 있다.】에서 패하였다. 이에 적이 운봉현을 불태우고 인월역(引月驛)【지금의 운봉에 있다.】에 나아가 주둔하며 북상한다고 큰소리치니 안팎이 크게 동요하였다. 우가 태조를 양광(楊廣)【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두 도】, 전라, 경상도의 삼도 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렬(邊安烈)을 부사(副使)로 삼아 가서 토벌하라고 하였다. 태조께서 변안렬 등과 함께 병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적진과 수십 리 떨어져 있었다. 태조께서 길 왼쪽에 있는 험한 길을 보시며 말하시기를, “적이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해서 우리를 기습할 것이다.”라 하시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큰길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태조께서 직접 그 험한 길에 들어가셨는데, 적군이 과연 그 길에 매복하고 있었다. 태조께서 적 5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이시고 세 번 싸워 모두 이기시니, 적이 험한 곳을 점거하여 지키고 있었다. 태조께서 여러 군사를 지휘하고 독려하며 위로 공격하실 때에 날아든 화살이 태조의 왼쪽 다리에 명중하였다. 태조께서 화살을 뽑으시고 의기가 더욱 강해지시니,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감동하여 각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적 가운데 아지발도(阿只拔都)라는 자는 나이가 겨우 15, 16세였다. 그러나 날쌔고 용맹함이 비교할 자가 없었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돌격하여 향하는 곳마다 부수고 쓰러뜨렸다. 태조께서는 그가 견고한 갑옷과 투구[銅面]를 쓰고 있어 화살을 맞출 틈이 없음을 보시고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투구를 쏘아 투구의 꼭지가 떨어지면 네가 곧바로 화살을 쏘도록 하라.”고 하시고 말에 뛰어 올라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명중시키니 꼭지가 떨어졌다. 이두란이 곧바로 화살을 쏘아 그를 죽이니 적의 기세가 꺾였다. 이로써 더욱 분발하여 공격해 대파하시니 시체가 들에 널리고 냇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으며, 나머지 적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갔다. 승리하여 돌아오시니 최영(崔瑩)이 여러 백관을 거느리고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영접하였다. 최영이 태조와 함께 두 번 절을 하며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삼한(三韓)을 다시 세운 것은 이 한 번의 싸움이다.”라고 하였다. 일본(日本)이 이로부터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고, 매번 우리나라 사람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묻기를, “이 만호(李萬戶)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임술[편집]

八年明太祖洪武十五年○日皇後龜山十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八十二年이라春二月에禑ㅣ南郊에出獵ᄒᆞ거ᄂᆞᆯ崔瑩이泣諫曰忠惠王은好色ᄒᆞ되반다시夜로ᄡᅧᄒᆞ고忠肅王은好游ᄒᆞ되다時ᄅᆞᆯ失치아니ᄒᆞ야民怨이無ᄒᆞ더니今에主上은游戲가無度ᄒᆞ야墮馬傷體ᄒᆞ거ᄂᆞᆯ臣이宰相에備位ᄒᆞ야匡救치못ᄒᆞ니何面目으로見人乎잇가ᄒᆞᆫᄃᆡ禑ㅣ不悛ᄒᆞ더라○日賊이竹嶺在今豊基丹陽을踰ᄒᆞ야丹陽을寇ᄒᆞ거ᄂᆞᆯ元帥邊安烈이韓方彦으로더브러擊敗ᄒᆞ다○秋九月에禑ㅣ漢陽에遷都ᄒᆞ다先是에書雲觀이言ᄒᆞ되變怪가屢見ᄒᆞ니請컨ᄃᆡ遷都避災ᄒᆞᄌᆞᄒᆞ더니至是에崔瑩이ᄯᅩ言ᄒᆞ거ᄂᆞᆯ이에遷都ᄒᆞ고侍中李子松으로ᄒᆞ여곰開京을留守ᄒᆞ다○趙浚으로ᄡᅥ慶尙道體覆使ᄅᆞᆯ拜ᄒᆞ다時에日寇가嶺南에充斥ᄒᆞ야人民이다逃竄ᄒᆞ거ᄂᆞᆯ崔瑩이浚을薦擧ᄒᆞ니浚이至ᄒᆞ야都巡問使李居仁의玩寇ᄒᆞᆫ罪ᄅᆞᆯ責ᄒᆞ고兵馬使兪益桓을斬ᄒᆞ니諸將이다股慄力戰ᄒᆞ야一道가賴安ᄒᆞ니浚은宰相仁規의後오大志가有ᄒᆞ더라

전 폐왕 우 8년【명 태조 홍무 15년 ○ 일황 후귀산 10년 ○ 서력 기원 1382년】이었다.

봄 2월에 우(禑)가 남쪽 교외에 사냥을 나갔는데 최영(崔瑩)이 울면서 간하기를, “충혜왕(忠惠王)은 여색을 좋아하였으나 반드시 밤에 하였고, 충숙왕(忠肅王)은 돌아다니기를 좋아했으나 모두 때를 잃지 않아 백성의 원망이 없었습니다. 지금 주상께서는 유희에 법도가 없어서 말에서 떨어져 몸을 상하셨습니다. 신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를 바로잡지 못하니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우는 뉘우치지 않았다.

○ 왜구가 죽령(竹嶺)【지금의 풍기(豊基)와 단양(丹陽) 지역에 있다.】을 넘어서 단양을 노략질하자 원수 변안렬(邊安烈)이 한방언(韓方彦)과 함께 싸워 대파하였다.

○ 가을 9월에 우가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에 앞서 서운관(書雲觀)에서 말하기를, “변괴(變怪)가 자주 보이니 청컨대 도읍을 옮겨 재난을 피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최영이 또 말하니, 이에 도읍을 옮기고 시중(侍中) 이자송(李子松)으로 하여금 개경(開京)에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 조준(趙浚)을 경상도 체복사(慶尙道體覆使)에 임명하였다. 당시 왜구가 영남(嶺南) 지방에 가득 있어 백성이 모두 도망가 숨었다. 최영이 조준을 천거하니 조준이 그곳에 이르러 도순문사(都巡問使) 이거인(李居仁)이 왜구를 경시한 죄를 꾸짖고, 병마사(兵馬使) 유익환(兪益桓)의 목을 베었다. 여러 장수가 두려워 떨다가 힘을 다해 싸우니, 경상도 전체가 믿고 안심하였다. 조준은 재상 조인규(趙仁規)의 후손으로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계해[편집]

九年明太祖洪武十六年○日皇後小松元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八十三年이라秋八月에我太祖ㅣ女眞人胡拔都ᄅᆞᆯ吉州에셔大破ᄒᆞ시다先是에胡拔都ㅣ東北諸城을侵掠ᄒᆞ거ᄂᆞᆯ禑ㅣ太祖의威信이素著ᄒᆞ시다ᄒᆞ야門下贊成事東北面都指揮使ᄅᆞᆯ拜ᄒᆞ고往撫ᄒᆞ라ᄒᆞ거ᄂᆞᆯ時에胡拔都ㅣ端州今端等地ᄅᆞᆯ寇ᄒᆞ니萬戶陸麗等이屢戰皆敗ᄒᆞᄂᆞᆫ지라太祖ㅣ胡拔都ᄅᆞᆯ吉州에셔遇ᄒᆞ야李豆蘭으로ᄒᆞ여곰몬져進戰케ᄒᆞ셧더니豆蘭이大敗ᄒᆞ니胡拔都ㅣ太祖ᄅᆞᆯ輕視ᄒᆞ고單騎로來戰ᄒᆞ거ᄂᆞᆯ太祖ㅣ其馬ᄅᆞᆯ射ᄒᆞ시니馬ㅣ倒ᄒᆞᄂᆞᆫ지라太祖ㅣ因ᄒᆞ야縱擊大破ᄒᆞ시니拔都ㅣ겨우遁去ᄒᆞ더라太祖곳安邊策ᄅᆞᆯ禑에게陳ᄒᆞ시다

전 폐왕 우 9년【명 태조 홍무 16년 ○ 일황 후소송(後小松) 원년 ○ 서력 기원 1383년】이었다.

가을 8월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여진(女眞) 사람 호발도(胡拔都)를 길주(吉州)에서 크게 물리치셨다. 이에 앞서 호발도가 동북의 여러 성을 침범하여 약탈하자 우(禑)가 태조의 위엄과 신뢰가 뛰어나다고 여겨 문하찬성사 동북면 도지휘사(門下贊成事東北面都指揮使)로 삼고 가서 진압하게 하였다. 당시 호발도가 단주(端州)【지금의 단천(端川)】 등지를 노략질하니, 만호(萬戶) 육려(陸麗) 등이 여러 차례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태조께서 호발도를 길주에서 마주치자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먼저 나아가 싸우게 하셨는데, 이두란이 크게 패하니 호발도가 태조를 가볍게 보고 혼자 말을 타고 와서 싸웠다. 이때 태조께서 그 말을 쏘시니 말이 쓰러졌다. 태조께서 이로 인해 추격하여 크게 물리치시니 호발도가 겨우 도망을 갔다. 태조께서 곧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우에게 진언하였다.


갑자[편집]

十年明太祖洪武十七年○日皇後小松二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八十四年이라政堂文學鄭夢周ᄅᆞᆯ明國에遣ᄒᆞ다時에明이朝廷과有釁ᄒᆞ야我使金庾와洪尙載等을流竄ᄒᆞ니人이다憚行ᄒᆞ고權貴ᄅᆞᆯ賂遺ᄒᆞ야規避ᄒᆞ거ᄂᆞᆯ이에夢周ᄅᆞᆯ遣ᄒᆞᆯᄉᆡ禑ㅣ召見面諭ᄒᆞᆫᄃᆡ夢周ㅣ曰君父의命을敢避乎잇가ᄒᆞ고遂行ᄒᆞ야明帝ᄅᆞᆯ進見ᄒᆞ고陳對가詳明ᄒᆞ니明帝ㅣ優待ᄒᆞ고드ᄃᆡ여庾와尙載等을放還ᄒᆞ더라○九月에宦官金實로ᄡᅧ門下贊成事ᄅᆞᆯ拜ᄒᆞ니宦官의拜相은前此未有러라○先是에德宗이國子試ᄅᆞᆯ設ᄒᆞ엿다가恭愍王에至ᄒᆞ야廢止ᄒᆞ고至是에다시成均館을復設ᄒᆞᆯᄉᆡ代言尹就가掌試ᄒᆞ야다勢家乳臭童子ᄅᆞᆯ取ᄒᆞ니時人이譏弄ᄒᆞ야曰紅紛榜이라ᄒᆞ니其兒童이紅衣ᄅᆞᆯ喜着ᄒᆞ고面에傅粉ᄒᆞᆷ이러라○冬十月에北元北元은卽元이北方에避ᄒᆞᆫ後稱謂라이遣使ᄒᆞ야來ᄒᆞ거ᄂᆞᆯ不納ᄒᆞ다

전 폐왕 우 10년【명 태조 홍무 17년 ○ 일황 후소송 2년 ○ 서력 기원 1384년】이었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몽주(鄭夢周)를 명(明)나라에 보냈다. 이때 명나라가 우리 조정과 사이가 벌어져 우리 사신 김유(金庾)와 홍상재(洪尙載) 등을 유배 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리고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바쳐 피하였다. 이에 정몽주를 보낼 때 우(禑)가 직접 불러 면전에서 타이르자 정몽주가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명을 감히 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곧바로 명나라로 갔다. 명나라의 황제를 뵙고 대면하여 설명하는 것이 매우 상세하고 명확하였으므로 명나라 황제가 특별히 우대하고, 드디어 김유와 홍상재 등을 풀어 줘 돌아오게 하였다.

○ 9월에 환관 김실(金實)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임명하니, 환관을 재상으로 임명한 것은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 이에 앞서 덕종(德宗)이 국자시(國子試)를 시행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르러 폐지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성균관(成均館)을 설치하였다. 이때 대언(代言) 윤취(尹就)가 시험을 관장하면서 권세가 있는 집안의 어린아이만을 뽑으니 당시 사람들이 조롱하며 ‘분홍방(粉紅榜)’이라 하였다. 이는 그 아이들이 붉은색 옷을 즐겨 입고, 얼굴에 분을 발랐기 때문이다.

○ 겨울 10월에 북원(北元)【북원은 즉 원나라가 북쪽으로 피해 간 이후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이 사신을 파견하여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을축[편집]

十一年明太祖洪武十八年○日皇後小松三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八十五年이라秋九月에我太祖ㅣ日兵을咸州今咸에셔大破ᄒᆞ시다先是에日兵이端州咸州等을連寇ᄒᆞ거ᄂᆞᆯ元帥沈德符等이拒戰ᄒᆞ다가皆敗ᄒᆞ니賊勢가益張ᄒᆞᄂᆞᆫ지라太祖ㅣ自請往擊ᄒᆞ사咸州에至ᄒᆞ시니賊이螺聲을聞ᄒᆞ고大驚曰李萬戶가至ᄒᆞ엿다ᄒᆞ더라太祖ㅣ護軍李豆蘭等百餘騎ᄅᆞᆯ率ᄒᆞ시고徐行ᄒᆞ야賊陣에至ᄒᆞ시니賊이大驚錯愕ᄒᆞ거ᄂᆞᆯ太祖ㅣ胡牀에坐ᄒᆞ사譯人으로ᄒᆞ여곰賊을呼謂曰今에主將은李萬戶라汝가速降ᄒᆞ라ᄒᆞ니賊酋ㅣ曰諾다ᄒᆞ고바야흐로議降ᄒᆞ다가未定에太祖ㅣ曰맛당히其怠ᄅᆞᆯ因ᄒᆞ야擊ᄒᆞ리라ᄒᆞ시고몬져伏兵을設ᄒᆞ야豆蘭等으로ᄒᆞ여곰賊을誘入ᄒᆞ고太祖ᄂᆞᆫ單騎로ᄡᅥ衝突ᄒᆞ야賊을大殺ᄒᆞ시고伏兵이ᄯᅩ起ᄒᆞ니呼聲이天地ᄅᆞᆯ震動ᄒᆞ더라이에賊徒가大潰ᄒᆞ야僵屍가川渠ᄅᆞᆯ蔽塞ᄒᆞ고一人도得脫ᄒᆞᆫ者ㅣ無ᄒᆞ니라○冬十二月에李仁任의婢鳳加伊ᄅᆞᆯ封ᄒᆞ야肅寧翁主ᄅᆞᆯ삼고妓七點仙으로寧善翁主ᄅᆞᆯ封ᄒᆞ엿다가後에다시鳳加伊ᄅᆞᆯ封ᄒᆞ야德妃ᄅᆞᆯ삼고ᄯᅩ妓少梅香과鷰雙飛ᄅᆞᆯ封ᄒᆞ야다翁主ᄅᆞᆯ삼고ᄆᆡ양出遊ᄒᆞᆯ時에幷騎馳聘ᄒᆞ더라先是에仁任婢의壻趙英吉이有女ᄒᆞ니曰鳳加伊라禑ㅣ仁任第에至ᄒᆞ야寵幸ᄒᆞ고自是로其第에日往ᄒᆞ야仁任을稱ᄒᆞ야曰父라ᄒᆞ고仁任의妻朴氏ᄂᆞᆫ母라ᄒᆞ니仁任의權勢가더욱盛ᄒᆞ더라○李穡으로ᄡᅧ門下侍中을拜ᄒᆞ고師傅禮로待ᄒᆞ다

전 폐왕 우 11년

【명 태조 홍무 18년 ○ 일황 후소송 3년 ○ 서력 기원 1385년】이었다.

가을 9월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왜구[日兵]를 함주(咸州)【지금의 함흥(咸興)】에서 대파하셨다. 이에 앞서 왜구가 단주(端州)와 함주 등을 연이어 노략질하자 원수(元帥) 심덕부(沈德符) 등이 맞서 싸웠으나 모두 패하니 적의 기세가 더욱 강성해졌다. 태조께서 자청하여 공격에 나서 함주에 도착하시니 적이 고둥 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 만호가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태조께서 호군(護軍) 이두란(李豆蘭) 등 1백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천천히 나아가서 적진에 이르시니 적이 크게 놀라 당황하였다. 태조께서 호상에 걸터앉아 통역으로 하여금 적에게 소리쳐 말하길, “지금 주장(主將)은 이 만호이다. 너희는 빨리 항복하라.”고 하였다. 적의 우두머리가 “그러하겠다.”고 말하고 항복할 것을 의논하다가 정하지 못하자 태조께서 다시 말하시기를, “망설이고 있으므로 공격할 것이다.”고 하시고 먼저 병사를 매복시키고 이두란 등으로 하여금 적을 유인하게 하였다. 태조께서는 홀로 말을 타고 돌진하여 적을 많이 죽였다. 매복병이 또 일어나 함성을 지르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이에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져 시체가 냇물을 뒤덮었으며 한 사람도 빠져 나가지 못했다.

○ 겨울 12월에 이인임(李仁任)의 여종 봉가이(鳳加伊)를 봉하여 숙녕옹주(肅寧翁主)로 삼고 기생 칠점선(七點仙)을 영선옹주(寧善翁主)에 봉하였다가 후에 다시 봉가이를 봉하여 덕비(德妃)로 삼았다. 또 기생 소매향(少梅香)과 연쌍비(鷰雙飛)를 봉하여 모두 옹주로 삼고, 매번 놀러 나갈 때마다 항상 말을 달려서 방문하였다. 이에 앞서 이인임의 여종의 사위 조영길(趙英吉)이 딸이 있었는데 봉가이라고 불렀다. 우(禑)가 이인임의 집에 갔다가 총애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그 집에 날마다 가서 이인임을 ‘아버지’라 부르고, 이인임의 처 박씨(朴氏)를 ‘어머니’라 부르니 이인임의 권세가 더욱 강성해졌다.

○ 이색(李穡)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고 사부(師傅)의 예로 대하였다.


정묘[편집]

十三年明太祖洪武二十年○日皇後小松五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八十七年이라夏六月에百官의官服制ᄅᆞᆯ改定ᄒᆞ다先是에本國이元의服制ᄅᆞᆯ用ᄒᆞ더니至是ᄒᆞ야鄭夢周와李崇仁과河崙과姜淮伯等이變制ᄒᆞ기ᄅᆞᆯ請ᄒᆞ야明國의紗帽團領等을仿用ᄒᆞᆯᄉᆡ一品以下ᄂᆞᆫ다紗帽團領을服ᄒᆞ고其品帶도ᄯᅩᄒᆞᆫ差別이有ᄒᆞ며오쟉禑와宦官近幸이不用ᄒᆞ더라

전 폐왕 우 13년【명 태조 홍무 20년 ○ 일황 후소송 5년 ○ 서력 기원 1387년】이었다.

여름 6월에 백관의 관복 제도를 개정하였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는 원(元)나라의 복제(服制)를 사용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몽주(鄭夢周)와 이숭인(李崇仁), 하륜(河崙), 강회백(姜淮伯) 등이 제도를 바꾸기를 청하므로, 명(明)나라의 사모단령(紗帽團領) 등을 모방하여 사용하였다. 1품 이하는 모두 사모단령을 입고 품대(品帶) 또한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오직 우(禑)와 환관, 총애를 받던 신하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무진[편집]

十四年明太祖洪武二十一年○日皇後小松六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八十八年이라春正月에林堅味와廉興邦과都吉敷와李成林과潘福海等을誅ᄒᆞ고李仁任은京山府今星에安置ᄒᆞ다仁任이國柄을久竊ᄒᆞᄆᆡ堅味로ᄡᅧ腹心을삼고ᄯᅩ興邦等四人을引用ᄒᆞ야樞要에布列ᄒᆞ고賣官鬻爵ᄒᆞ며人의土田奴婢ᄅᆞᆯ占奪ᄒᆞ니中外가切齒ᄒᆞ더니會에興邦이ᄯᅩ密直使趙胖의田을奪ᄒᆞ거ᄂᆞᆯ胖이憤怒ᄒᆞ야其奴ᄅᆞᆯ捕殺ᄒᆞ니興邦이大怒ᄒᆞ야胖을謀叛ᄒᆞᆫ다誣ᄒᆞ고鞫問ᄒᆞᄂᆞᆫ지라崔瑩이곳禑ᄅᆞᆯ勸ᄒᆞ야胖을釋ᄒᆞ고堅味興邦等을誅ᄒᆞ고仁任은有功ᄒᆞ다ᄒᆞ야免死安置ᄒᆞ다○崔瑩으로ᄡᅥ門下侍中을拜ᄒᆞ고我太祖ᄂᆞᆫ守侍中을拜ᄒᆞ고李穡은判三司事ᄅᆞᆯ拜ᄒᆞ다時에瑩이林堅味의廉興邦의所用ᄒᆞᆫ人을盡黜코ᄌᆞᄒᆞ거ᄂᆞᆯ太祖ㅣ曰林廉이執政ᄒᆞᆫ지日久ᄒᆞᄆᆡ士大夫가다其擧薦이니今에다만才能賢否만問ᄒᆞᆯ지라엇지旣往을咎ᄒᆞ리오ᄒᆞ신ᄃᆡ瑩이不聽ᄒᆞ더라○二月에明帝ㅣ鐵嶺以北은本來元國에屬ᄒᆞᆫ地니다遼東에歸屬ᄒᆞ라ᄒᆞ고鐵巓衛ᄅᆞᆯ遼東에立ᄒᆞ다○三月에侍中崔瑩의女로ᄡᅥ寧妃ᄅᆞᆯ封ᄒᆞ고判事申雅의女로ᄡᅥ正妃ᄅᆞᆯ封ᄒᆞ다初에王이瑩의女ᄅᆞᆯ納ᄒᆞᆯᄉᆡ瑩이辭謝曰臣女ㅣ卑陋ᄒᆞ니至尊을奉配치못ᄒᆞᆯ지라主上이必納코ᄌᆞᄒᆞ실진ᄃᆡ老臣이맛당히剃髮入山ᄒᆞ리이다ᄒᆞ고涕泣으로ᄡᅧ繼ᄒᆞ되禑ㅣ不聽ᄒᆞ더라○夏四月에禑ㅣ平壤에次ᄒᆞ야遼東을攻ᄒᆞ다初에禑ㅣ明國이鐵嶺以北을佔奪ᄒᆞᆷ을怒ᄒᆞ야崔瑩으로더브러密議ᄒᆞ야明을攻ᄒᆞ고元과續好코ᄌᆞᄒᆞᆯᄉᆡ西海道今黃海道에如ᄒᆞ야諸道兵을徵集ᄒᆞ고我太祖ᄅᆞᆯ召ᄒᆞ야曰寡人이遼陽을欲攻ᄒᆞ노니卿等은盡力ᄒᆞ라ᄒᆞ거ᄂᆞᆯ太祖ㅣ曰今에出師ᄒᆞᆷ이四不可가有ᄒᆞ니以小攻大가一不可오夏月發兵이二不可오擧國遠征ᄒᆞ면日本이我虛ᄅᆞᆯ乘ᄒᆞ리니三不可오今에暑雨ᄅᆞᆯ當ᄒᆞ야弓弩ㅣ膠가解ᄒᆞ고大軍이疾疫ᄒᆞ리니四不可ㅣ니이다ᄒᆞ신ᄃᆡ禑ㅣ不聽ᄒᆞ야曰이믜興師ᄒᆞ엿스니中止치못ᄒᆞ리라ᄒᆞ거ᄂᆞᆯ太祖ㅣ退ᄒᆞ사涕泣曰生民의禍가自此로始ᄒᆞ엿다ᄒᆞ시더라禑ㅣ平壤에至ᄒᆞ야徵兵을督責ᄒᆞ야浮橋ᄅᆞᆯ鴨江에作ᄒᆞ고崔瑩을加ᄒᆞ야八道都統使ᄅᆞᆯ拜ᄒᆞ고曹敏修로左軍都統使ᄅᆞᆯ拜ᄒᆞ고太祖로右軍都統使ᄅᆞᆯ拜ᄒᆞ야各其諸將을率ᄒᆞ고進發ᄒᆞ니左右軍이合三萬八千六百餘人이라號曰十萬이라ᄒᆞ고禑ㅣ瑩으로더브러平壤에留駐ᄒᆞ고節制ᄅᆞᆯ遙授ᄒᆞᆯᄉᆡ다시國人으로ᄒᆞ여곰胡服ᄒᆞ야元의舊制ᄅᆞᆯ從ᄒᆞ니時에明國이藍玉을遣ᄒᆞ야北元을擊滅ᄒᆞ거ᄂᆞᆯ朝廷은不知ᄒᆞ더라五月에左右軍이威化島在今義州鴨江西에進屯ᄒᆞ고元帥洪仁桂ㅣ몬져遼境에入ᄒᆞ야殺掠ᄒᆞ고還ᄒᆞ니禑ㅣ喜ᄒᆞ야金帛을賞賜ᄒᆞ더라○六月에我太祖ㅣ諸軍으로ᄡᅧ京城에還入ᄒᆞ사崔瑩을執ᄒᆞ야流ᄒᆞ시다時에太祖ㅣ曺敏修로더브러禑의게上言ᄒᆞ사攻遼가不便ᄒᆞᆫ狀을極陳ᄒᆞ신ᄃᆡ禑ㅣ不納ᄒᆞ거ᄂᆞᆯᄯᅩ崔瑩의게貽書ᄒᆞ야利害ᄅᆞᆯ極言ᄒᆞ시니瑩이ᄯᅩᄒᆞᆫ不聽ᄒᆞᄂᆞᆫ지라太祖ㅣ드ᄃᆡ여諸將을諭ᄒᆞ사曰今에만일遼東을攻ᄒᆞ면生民의禍ㅣ立至ᄒᆞ갯거ᄂᆞᆯ王이不省ᄒᆞ고瑩도ᄯᅩᄒᆞᆫ老耋ᄒᆞ야國家存亡을不恤ᄒᆞ니今에公等과갓치上을入見ᄒᆞ야禍福을親陳ᄒᆞ고君側의惡을除ᄒᆞ야生靈을奠安케ᄒᆞᆷ이何如오ᄒᆞ신ᄃᆡ諸將이皆曰敢히公에命을不從ᄒᆞ리오ᄒᆞ거ᄂᆞᆯ이에回軍ᄒᆞ야鴨綠江을渡ᄒᆞ실ᄉᆡ太祖ㅣ白馬에彤弓白羽箭을執ᄒᆞ시고岸上에立ᄒᆞ야軍士의畢渡ᄅᆞᆯ遲待ᄒᆞ시니軍中이望見ᄒᆞ고相謂曰古今來에如此人이安有ᄒᆞ리오ᄒᆞ더라時에童謠가有ᄒᆞ야木子가得國ᄒᆞᆫ다ᄒᆞ고軍民老少가다歌誦ᄒᆞᄂᆞᆫ지라漕運使崔有慶이太祖의還軍ᄒᆞ심을禑에게奔告ᄒᆞ니禑ㅣ瑩으로더브러京師에馳還ᄒᆞ야拒戰코ᄌᆞᄒᆞ거ᄂᆞᆯ左右軍이곳入京ᄒᆞᆯᄉᆡ敏修ㅣ瑩軍의게敗ᄒᆞ더니이윽고太祖ㅣ黃龍大旗ᄅᆞᆯ建ᄒᆞ시고花園을八圍ᄒᆞ시니花園은禑의所在ᄒᆞᆫ處라諸軍이大呼ᄒᆞ야瑩을出ᄒᆞᆷ을請ᄒᆞ니禑ㅣ瑩의手ᄅᆞᆯ執ᄒᆞ고泣別ᄒᆞ더라瑩이出ᄒᆞᄆᆡ太祖ㅣ謂ᄒᆞ사曰如此事變은我의本心이아니라然이나攻遼ᄒᆞᄂᆞᆫ事ᄂᆞᆫ國家興亡이係ᄒᆞᆫ고로不得已至此ᄒᆞᆷ이니好去好去ᄒᆞ라ᄒᆞ시고相對泣下ᄒᆞ시다가드ᄃᆡ여瑩을高峯縣今高에流ᄒᆞ시니時에明이擧兵코ᄌᆞᄒᆞ다가還軍ᄒᆞᆷ을聞ᄒᆞ고乃止ᄒᆞ더라○禑ㅣ廢ᄒᆞ고禑의子昌이立ᄒᆞ다初에我太祖ㅣ還軍ᄒᆞ실ᄉᆡ典校副令尹紹宗이軍前에詣ᄒᆞ야霍光傳을獻ᄒᆞ거ᄂᆞᆯ太祖ㅣ趙仁沃으로ᄒᆞ여곰讀게ᄒᆞ시니仁沃이因ᄒᆞ야極言ᄒᆞ되今王은王氏가아니오辛旽의子라맛당히王氏ᄅᆞᆯ復立ᄒᆞᆷ이可타ᄒᆞ거ᄂᆞᆯ太祖ㅣ心然之ᄒᆞ시니이에諸將이禑ᄅᆞᆯ請ᄒᆞ야江華에如ᄒᆞ니禑ㅣ寧妃와밋燕雙飛로더브러下殿ᄒᆞ야去ᄒᆞ더라이윽고曹敏修ㅣ力議ᄒᆞ야昌을立고ᄌᆞᄒᆞᆯᄉᆡ李穡은名儒라ᄒᆞ야其言을欲藉ᄒᆞ야就問ᄒᆞᆫᄃᆡ穡曰맛당히前王의子ᄅᆞᆯ立ᄒᆞ라ᄒᆞ거ᄂᆞᆯ敏修等이드ᄃᆡ여定妃恭愍王妃安氏의敎로ᄡᅧ昌을立ᄒᆞ니時年이九歲러라○明이鐵嶺衛ᄅᆞᆯ罷ᄒᆞ다○八月에李穡으로ᄡᅧ門下侍中을拜ᄒᆞ고我太祖로ᄡᅥ守侍中을拜ᄒᆞ다時에昌이書筵을開ᄒᆞ고穡을命ᄒᆞ야書筵事ᄅᆞᆯ領ᄒᆞ고鄭夢周鄭道傳으로侍讀을拜ᄒᆞ야更日入侍ᄒᆞ다○大司憲趙浚이建議ᄒᆞ되田柴科가廢ᄒᆞ야私田이됨으로브터兼幷ᄒᆞᄂᆞᆫ弊가甚ᄒᆞ니請컨ᄃᆡ革罷ᄒᆞ소셔ᄒᆞ니我太祖ㅣ奏行ᄒᆞ시다○楊廣等道都指揮使鄭地ㅣ日寇ᄅᆞᆯ大破ᄒᆞ다時에日賊이楊廣全羅慶尙三道ᄅᆞᆯ入寇ᄒᆞ야州郡을屠燒ᄒᆞ거ᄂᆞᆯ地ㅣ諸將을領ᄒᆞ고南原에셔戰ᄒᆞ야大破ᄒᆞ니人이謂ᄒᆞ되此戰이아니면三道民이盡ᄒᆞ리라ᄒᆞ더라○我太祖로ᄡᅥ中外諸軍事ᄅᆞᆯ摠督ᄒᆞ다○九月에廢王禑ᄅᆞᆯ驪興에遷ᄒᆞ다○冬十一月에金文鉉이伏誅ᄒᆞ다廢王禑의時에言官이文鉉의弑父ᄒᆞᆫ罪ᄅᆞᆯ正코ᄌᆞᄒᆞ거ᄂᆞᆯ禑ㅣ不聽ᄒᆞ고全義에杖流ᄒᆞ엿더니至是ᄒᆞ야遣人縊殺ᄒᆞ다○十二月에前侍中崔瑩을殺ᄒᆞ다瑩이이믜流ᄒᆞᄆᆡ다시鞫問ᄒᆞᆯᄉᆡ於是에典法判書趙仁沃等이瑩의罪ᄅᆞᆯ請正ᄒᆞ거ᄂᆞᆯ昌이드ᄃᆡ여瑩을斬ᄒᆞ니瑩은惟淸의五世孫이라爲人이戇直ᄒᆞ고學術이少ᄒᆞ나忠淸剛正ᄒᆞ고膂力이過人ᄒᆞ며臨陣對敵에神氣가安閑ᄒᆞ고矢石이交前ᄒᆞ되懼色이略無ᄒᆞ고戰士가一步ᄅᆞᆯ却退ᄒᆞ면곳斬徇ᄒᆞᄂᆞᆫ고로大小百餘戰에一次도敗衂치아니ᄒᆞ고平常에生産을不事ᄒᆞ야居第가甚히陋醜ᄒᆞ되處ᄒᆞᆷ이怡然ᄒᆞ며비록將相을兼任ᄒᆞ야兵權을久典ᄒᆞᄂᆞ關節이不到ᄒᆞ더라至是에死ᄒᆞ니年이七十三이라臨刑에辭色이不變ᄒᆞ고首가已斷ᄒᆞ되오히러移時토독植立ᄒᆞ고死ᄒᆞᆫ日에都人이罷市ᄒᆞ고遠近이다流涕ᄒᆞ더라後에贈諡曰武愍이라ᄒᆞ다

전 폐왕 우 14년【명 태조 홍무 21년 ○ 일황 후소송 6년 ○ 서력 기원 1388년】이었다.

봄 정월에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도길부(都吉敷), 이성림(李成林), 반복해(潘福海) 등을 죽이고, 이인임(李仁任)은 경산부(京山府)【지금의 성주(星州)】에 안치(安置)하였다. 이인임이 오랫동안 나라의 통치권을 훔쳐 휘두를 때 임견미를 심복으로 삼고, 또 염흥방 등 네 사람을 등용하여 주요 직에 배치하였다. 관직과 직위를 돈을 받고 팔았으며, 사람들의 토지와 노비를 강제로 빼앗으니, 안팎이 분하여 이를 갈았다. 때마침 염흥방이 밀직사(密直使) 조반(趙胖)의 밭을 빼앗으니, 조반이 분노하여 그의 노비를 잡아 죽였다. 염흥방이 크게 화를 내며 조반이 “모반한다.”고 거짓으로 고하여 국문하였다. 최영(崔瑩)이 곧 우(禑)에게 권하여 조반을 풀어 주고 임견미, 염흥방 등을 죽였다. 이인임은 공이 있다고 하여 목숨만은 살려 주고 안치하였다.

○ 최영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고 우리 태조(太祖)는 수시중(守侍中)에, 이색(李穡)은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하였다. 이때 최영이 임견미와 염흥방이 등용한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하자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임견미와 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사대부가 모두 그들이 천거한 자들이니 지금은 다만 재능이 있는지, 현명한지 여부만 물어 보십시오. 어찌 지난 일을 책망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최영이 듣지 않았다.

○ 2월에 명(明)나라 황제가 철령(鐵嶺) 이북이 본래 원(元)나라에 속한 지역이니 모두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라 하고 철령위(鐵嶺衛)를 요동에 세웠다.

○ 3월에 시중 최영의 딸을 영비(寧妃)로 봉하고, 판사(判事) 신아(申雅)의 딸을 정비(正妃)로 봉하였다. 처음에 왕이 최영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일 때에 최영이 거절하며 말하기를, “신의 딸은 비루(鄙陋)하여 지존을 받들 배필이 되지 못합니다. 주상께서 반드시 맞아들이고자 하신다면 노신(老臣)은 마땅히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으나 우가 듣지 않았다.

○ 여름 4월에 우가 평양(平壤)에 행차하여 요동을 공격하였다. 처음에 우가 명나라가 철령 이북을 강제로 빼앗은 것에 분노하여 최영과 함께 비밀히 의논하여 명나라를 공격하고 원나라와 계속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이에 서해도(西海道)【지금의 황해도】에 가서 여러 도의 군사들을 징집하고 우리 태조를 불러서 말하기를, “과인이 요양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지금 군사를 출병시킬 수 없는 네 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고, 둘째는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며, 셋째는 온 나라가 원정을 떠나게 되면 왜구가 우리의 빈틈을 노릴 것이며, 넷째는 지금 더위와 장마를 맞아서 화살촉의 아교가 풀어지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가 듣지 않고 말하기를,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태조께서 물러나서 눈물을 흘리시며 말하시기를, “백성의 재앙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우가 평양에 이르러 징병을 독촉하고 압록강(鴨綠江)에 부교(浮橋)를 만들었다. 최영에게 추가로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를 제수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에, 태조를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에 임명하였다. 각기 장수들을 이끌고 진격하니 좌⋅우군이 합쳐 3만 8천 6백 명이었으나, 10만이라 하였다. 우가 최영과 함께 평양에 머물며 주둔하고 멀리서 지시를 내리면서 다시 나라 사람들에게 호복(胡服)을 입게 하고, 원나라의 옛 제도를 따랐다. 당시 명나라가 남옥(藍玉)을 보내 북원을 공격해 멸망시켰으나 조정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5월에 좌⋅우군이 위화도(威化島)【지금의 의주(義州)와 압록강 서쪽에 있다】에 주둔하고 원수(元帥) 홍인계(洪仁桂)가 먼저 요동 경계로 들어가 죽이고 약탈하여 돌아오니, 우가 기뻐하며 금과 비단을 내렸다.

○ 6월에 우리 태조께서 여러 군사와 도성으로 돌아와 최영을 잡아서 유배 보내셨다. 이때 태조께서 조민수와 함께 우에게 글을 올려 요동 공격이 쉽지 않은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였으나, 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최영에게도 서신을 보내 이해득실을 적극 설명했으나, 최영 또한 듣지 않았다. 태조께서 결국 여러 장수를 설득하여 말하시기를, “지금 만일 요동을 공격하면 백성에게 화가 미치게 될 것이다. 왕이 살피지 않고 최영 또한 늙고 약해져서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지 않으니 지금 공들과 같이 왕을 찾아 뵙고 화복(禍福)을 직접 설명하고, 왕 주변의 악을 없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셨다. 여러 장수가 일제히 “감히 공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려서 압록강을 건너실 때 태조께서 백마를 타고 빨간 활에 흰 깃털 화살을 잡고는 언덕 위에 서서 군사들이 모두 강을 건널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리셨다. 군사들이 우러러 보며 서로 말하기를, “예부터 저와 같은 사람이 어찌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는 동요가 있었는데, 병사들과 민간의 노소가 모두 이 노래를 불렀다. 조운사(漕運使) 최유경(崔有慶)이 태조께서 군사를 돌렸다는 것을 우에게 급히 알리니, 우가 최영과 함께 도성으로 달려 돌아와서 맞서 싸우고자 하였다. 좌⋅우군이 곧 도성으로 들어오다 조민수가 최영의 군대에게 패하였으나, 이윽고 태조께서 황룡대기(黃龍大旗)를 세우고 화원(花園)으로 들어가 포위하셨다. 화원은 우가 있는 곳으로, 여러 군사가 큰소리로 외치며 최영을 보내라고 청하니 우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다가 이별하였다. 최영이 나오자 태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은 사변(事變)은 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국가의 흥망과 관련되므로 부득이 이에 이른 것이니,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라고 하시고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시다가 드디어 최영을 고봉현(高峯縣)【지금의 고양(高陽)】으로 유배 보냈다. 이때 명나라가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다가 군사를 돌렸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중지하였다.

○ 우를 폐위하고 우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세웠다. 처음에 우리 태조께서 군사를 돌리실 때에 전교시 부령(典校寺副令) 윤소종(尹紹宗)이 군사들 앞에 나아가서 『곽광전(霍光傳)』을 바치자, 태조께서 조인옥(趙仁沃)으로 하여금 읽게 하셨다. 조인옥이 이로 인해 상세히 극진하게 말하기를, “지금 왕은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므로, 마땅히 왕씨를 다시 왕위에 세우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께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시니, 이에 여러 장수가 우에게 강화(江華)로 가도록 청하였다. 우가 영비(寧妃), 연쌍비(燕雙飛)와 함께 대궐에서 나와 강화로 갔다. 이윽고 조민수가 힘껏 의논하여 창을 왕으로 세우고자 할 때, 이색이 이름 있는 유학자였으므로 그의 말을 빌리고자 하여 그에게 가서 물었다. 이색이 말하기를,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조민수 등이 드디어 정비(定妃)【공민왕(恭愍王) 비 안씨(安氏)】의 교지로 창을 왕으로 세우니, 그때 나이가 9세였다.

○ 명나라가 철령위를 폐지하였다.

○ 8월에 이색을 문하시중에 임명하고 우리 태조를 수시중에 임명하였다. 이때 창이 서연(書筵)을 열고 이색에게 명하여 서연과 관련한 일을 관장하도록 하고,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을 시독(侍讀)에 임명하여 번갈아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이 건의하여 “전시과(田柴科)가 없어져 사전(私田)이 되면서 겸병(兼幷)하는 폐해가 심하니 청컨대 혁파하소서.” 하니 우리 태조께서 아뢰어 시행케 하셨다.

○ 양광도(楊廣道) 등의 도지휘사(都指揮使) 정지(鄭地)가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왜구가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에 들어와 노략질하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살상하고 불태우니, 정지가 여러 장수를 이끌고 남원(南原)에서 싸워 크게 물리쳤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전투가 아니었으면 삼도의 백성들이 모두 없어졌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우리 태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군대의 일을 총 지휘하도록 하였다.

○ 9월에 폐왕 우를 여흥(驪興)으로 옮겼다.

○ 겨울 11월에 김문현(金文鉉)을 처형하였다. 폐왕 우 시절에 언관이 김문현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죄를 바로잡고자 했으나, 우가 듣지 않고 장형을 가하고 전의(全義)로 유배 보냈다가 이때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목 졸라 죽였다.

○ 12월에 전 시중 최영을 죽였다. 최영이 이미 유배되었는데 다시 국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전법사 판서(典法司判書) 조인옥(趙仁沃) 등이 최영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는데, 창이 드디어 최영의 목을 베었다. 최영은 최유청(崔惟淸)의 5세손으로. 사람됨이 고지식하고 학문적 소양이 적으나 충직하고 청렴 강직하며, 힘이 남보다 강했다. 전투에 나아가서 적과 싸울 때에는 정신과 기운이 태연하고 여유가 있어서 화살과 돌이 날아들어도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싸우던 병사가 한 발자국 물러서면 곧 목을 베어 보이므로 크고 작은 1백여 차례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재산을 늘리는 데 힘쓰지 않아서 거주하는 집이 매우 누추하였으나 태연히 살았으며, 비록 장수와 재상을 겸임하여 권력을 오래 잡았으나 뇌물을 주고 청탁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가 73세였다. 처형에 임하여 말과 얼굴빛이 변하지 않고 머리가 이미 잘렸는데도 옮겨질 때까지 몸이 나무처럼 서 있었다. 그가 처형된 날 도성 사람들이 시장을 파하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후에 시호를 ‘무민(武愍)’이라 내려 주었다.


후 폐왕 창[편집]

後廢王昌在位一年이라

후 폐왕 창의 재위 기간은 1년이었다.


기사[편집]

元年明太祖洪武二十二年○日皇後小松七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八十九年이라春二月에慶尙道元帥朴葳ㅣ日本對馬島ᄅᆞᆯ擊破ᄒᆞ다葳ㅣ日本을擊ᄒᆞ야戰功을屢立ᄒᆞ더니至是에戰艦百隻을率ᄒᆞ고對馬島에至ᄒᆞ야日艦三百艘와밋傍岸의廬舍ᄅᆞᆯ焚燒殆盡ᄒᆞ다○秋七月에李穡으로判門下府事ᄅᆞᆯ拜ᄒᆞ고李琳으로門下侍中을拜ᄒᆞ고ᄯᅩ鄭夢周의言을用ᄒᆞ야穡과琳과밋我太祖ᄅᆞᆯ命ᄒᆞ야劍履로上殿ᄒᆞ고贊拜에不名ᄒᆞ니琳은昌의外祖러라○八月에琉球國이遣使ᄒᆞ야方物을獻ᄒᆞ거ᄂᆞᆯ昌이典客令金允厚로ᄒᆞ야곰報聘ᄒᆞ다○昌이廢ᄒᆞ고定昌府院君瑤ㅣ立ᄒᆞ다時에崔瑩의甥前護軍金佇ㅣ驪興에潛往ᄒᆞ야禑ᄅᆞᆯ見ᄒᆞ니禑ㅣ泣曰엇지鬱鬱히居此ᄒᆞ리오다만一力士ᄅᆞᆯ得ᄒᆞ야李侍中을害ᄒᆞ면吾志ᄅᆞᆯ可濟라ᄒᆞ고因ᄒᆞ야一劍을授ᄒᆞ야親信ᄒᆞ든判書郭忠輔로ᄒᆞ야곰圖謀ᄒᆞ라ᄒᆞ거ᄂᆞᆯ忠輔ㅣ我太祖ᄭᅴ告ᄒᆞ야佇ᄅᆞᆯ鞫問ᄒᆞ고太祖ㅣ鄭夢周와趙浚과鄭道傳等으로더브러定議ᄒᆞ시되禑昌이다王氏가아니니宗祀ᄅᆞᆯ奉키難ᄒᆞ니맛당히廢假立眞ᄒᆞ리라ᄒᆞ시고드ᄃᆡ여定妃ᄭᅴ白ᄒᆞ야昌을江華에放ᄒᆞ고神宗七世孫瑤ᄅᆞᆯ迎立ᄒᆞ니時年이四十五라王이卽位ᄒᆞᄆᆡ禑昌을降ᄒᆞ야庶人을삼고李琳과밋其子貴生等을流ᄒᆞ고李穡으로ᄡᅥ判門下府事ᄅᆞᆯ拜ᄒᆞ고邊安烈로ᄡᅧ鎭三司事ᄅᆞᆯ拜ᄒᆞ고沈德符로ᄡᅥ門下侍中을拜ᄒᆞ고我太祖로ᄡᅧ守門下侍中을拜ᄒᆞ고鄭道傳으로ᄡᅧ三司使ᄅᆞᆯ拜ᄒᆞ다王의爲人이昏弱ᄒᆞ야卽位ᄒᆞᆫ日에所爲ᄅᆞᆯ莫措ᄒᆞ고오쟉泣歎ᄒᆞᆯᄲᅮᆫ이러라

후 폐왕 창 원년【명 태조 홍무 22년 ○ 일황 후소송 7년 ○ 서력 기원 1389년】이었다.

봄 2월에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박위(朴葳)가 일본(日本) 쓰시마 섬[對馬島]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박위가 일본을 쳐서 전공(戰功)을 여러 번 세웠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함 1백 척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에 이르러 일본 전함 3백 척과 바닷가의 집을 거의 모두 불태웠다.

○ 가을 7월에 이색(李穡)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임명하고, 이임(李琳)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였다. 또한 정몽주(鄭夢周)의 말에 따라 이색과 이임, 그리고 우리 태조(太祖)에게 명하여 칼을 차고 신을 신고서 전에 오르며, 왕을 뵙고 절을 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하였다. 이임은 창(昌)의 외할아버지였다.

○ 8월에 유구국(琉球國, 현재의 오키나와)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자 창이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로 하여금 보빙하게 하였다.

○ 창을 폐위하고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요(瑤)를 왕으로 세웠다. 이때 최영(崔瑩)의 조카인 전 호군(護軍) 김저(金佇)가 여흥(驪興)에 몰래 들어가서 우(禑)를 만났다. 우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어찌 우울하게 여기에 머물 수 있겠는가! 다만 역사(力士) 한 명을 구해 이성계[李侍中]를 제거하면 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며, 칼 한 자루를 주면서 신뢰하던 판서(判書) 곽충보(郭忠輔)에게 일을 도모하라고 하였다. 곽충보가 우리 태조께 와서 알리자 김저를 국문하였다. 태조께서 정몽주,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의논하기를, 우와 창이 모두 왕씨(王氏)가 아니어서 종사(宗祀)를 받들기 어려우니, 마땅히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를 세우자고 하셨다. 드디어 정비(定妃)에게 아뢰어 창을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신종(神宗)의 7세손 요를 맞이하여 왕으로 세우니 당시 나이가 45세였다. 왕이 즉위하자 우와 창을 강등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이임과 그의 아들 이귀생(李貴生) 등을 유배 보냈다. 이색을 판문하부사에, 변안열(邊安烈)을 진삼사사(鎭三司事)에, 심덕부(沈德符)를 문하시중에, 우리 태조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정도전을 삼사사(三司使)에 임명하였다. 왕의 사람됨이 혼미하고 유약하여 즉위하던 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오직 울면서 탄식할 뿐이었다.


공양왕[편집]

恭讓王의諱ᄂᆞᆫ瑤니在位四年이라

공양왕의 휘(諱)는 요(瑤)이며, 재위 기간은 4년이었다.


기사[편집]

元年【明太祖洪武二十二年○日皇後小松七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八十九年】이라十二月에臺官이上言ᄒᆞ야李穡曹敏修李崇仁等의禑昌을右袒ᄒᆞᆫ罪ᄅᆞᆯ論ᄒᆞ거ᄂᆞᆯ이에敏修ᄅᆞᆯ廢ᄒᆞ야庶人을삼고穡과崇仁을流ᄒᆞ고遣使ᄒᆞ야禑昌父子ᄅᆞᆯ誅ᄒᆞ니禑의妻崔氏ㅣ大哭曰妾의至此ᄒᆞᆷ은吾父의過라ᄒᆞ고日夜哭泣ᄒᆞ야十餘日不食ᄒᆞ고夜에ᄂᆞᆫ禑의屍ᄅᆞᆯ抱宿ᄒᆞ며粒米ᄅᆞᆯ得ᄒᆞ면곳精舂供奠ᄒᆞ니時人이哀憐ᄒᆞ더라○官制ᄅᆞᆯ改ᄒᆞ다○功臣을錄ᄒᆞᆯᄉᆡ我太祖로ᄡᅧ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和寧郡開國忠義伯을封ᄒᆞ고沈德符鄭夢周以下ᄂᆞᆫ다以次授爵ᄒᆞ니時에九功臣이라稱ᄒᆞ더라

공양왕 원년【명 태조 홍무 22년 ○ 일황 후소송 7년 ○ 서력 기원 1389년】이었다.

12월에 대관(臺官)이 왕에게 아뢰어 이색(李穡), 조민수(曺敏修), 이숭인(李崇仁) 등이 우(禑)와 창(昌)의 편을 들었던 죄를 논하였다. 이에 조민수의 관직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이색과 이숭인을 유배 보냈으며, 우와 창 부자를 죽였다. 우의 처 최씨(崔氏)가 큰 소리로 곡을 하면서 말하기를, “소첩이 이에 이른 것은 우리 아버지의 잘못 때문이다.”라고 하고 밤낮으로 크게 소리 내어 울면서 10여 일 동안 먹지 않았다. 밤에는 우의 시체를 끌어안고 잠자며 쌀알을 얻으면 곧 잘 빻아서 제사상에 올리니 당시 사람들이 애처롭고 가엽게 여겼다.

○ 관제를 고쳤다.

○ 공신의 녹을 정할 때 우리 태조를 분충정난 광복섭리 좌명공신 화녕군 개국충의백(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和寧郡開國忠義伯)으로 봉하고, 심덕부(沈德符)와 정몽주(鄭夢周) 이하는 모두 등급에 따라 관직을 내리니, 이때 이들을 ‘9공신’이라고 칭하였다.


경오[편집]

二年明太祖洪武二十三年○日皇後小松八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九十年이라春正月에我太祖로ᄡᅥ八道軍馬ᄅᆞᆯ領ᄒᆞ고軍營을置ᄒᆞ야分番更宿ᄒᆞ다○三月에門下注書吉再ㅣ棄官ᄒᆞ고歸ᄒᆞ다再ᄂᆞᆫ海平今善人이라理學을攻ᄒᆞ야鄭夢周ᄅᆞᆯ師事ᄒᆞ고廢王禑時에注書가되엿다가至是ᄒᆞ야國家ㅣ將亡ᄒᆞᆷ을知ᄒᆞ고母老로ᄡᅧ辭官ᄒᆞ고善山에歸ᄒᆞ다○李穡等을遠地에流ᄒᆞ다初에曹敏修ㅣ昌寧에謫在ᄒᆞ거ᄂᆞᆯ糾正田時等을遣ᄒᆞ야立昌ᄒᆞᆫ事ᄅᆞᆯ鞫問ᄒᆞ고ᄯᅩ時ᄅᆞᆯ長湍에遣ᄒᆞ야穡을鞫問ᄒᆞᆯᄉᆡ獄卒로ᄒᆞ여곰左右에執杖ᄒᆞ야晝夜逼迫ᄒᆞ고ᄯᅩ敏修의獄詞ᄅᆞᆯ示ᄒᆞ니穡이誣服ᄒᆞ야曰立昌ᄒᆞᆯ時에敏修ㅣ主將이된고로穡이敢違치못ᄒᆞ엿스나擅立을首勸ᄒᆞᆷ은穡의情이아니라ᄒᆞ더니至是ᄒᆞ야臺官이다시二人을論劾ᄒᆞ고ᄯᅩ李琳과李貴生과李乙珍과鄭地와禹仁烈과李庚道와王安德과禹洪壽와元庠이黨禑ᄒᆞᆫ罪ᄅᆞᆯ請ᄒᆞ거ᄂᆞᆯ王이我太祖와밋沈德符ᄅᆞᆯ命ᄒᆞ야曰敏修ᄅᆞᆯ已罪ᄒᆞ엿스니卿等이臺諫을諭ᄒᆞ야다시論執지말라ᄒᆞ고드ᄃᆡ여穡을咸昌에流ᄒᆞ고琳과貴生等九人도다科罪流配ᄒᆞ다○閏三月에知申事李行을淸州에流ᄒᆞ다初에臺諫이李穡의罪ᄅᆞᆯ論ᄒᆞ니行이啓曰臺諫의論劾이엇지功臣의意가아니리오ᄒᆞ거ᄂᆞᆯ我太祖와밋功臣等이上書辨白ᄒᆞ고因ᄒᆞ야避位弭謗ᄒᆞᆷ을請ᄒᆞ니王이視事ᄒᆞ라命ᄒᆞ고行을流ᄒᆞ다○鄭道傳으로ᄡᅥ政堂文學을拜ᄒᆞ고金士衡으로ᄡᅥ密直使ᄅᆞᆯ拜ᄒᆞ고我太宗으로ᄡᅧ右副代言을拜ᄒᆞ니太宗은我太祖의第五子라英睿가絶人ᄒᆞ시고高麗의政亂民離ᄒᆞᆷ을憫迫ᄒᆞ사慨然히濟世ᄒᆞᆯ志가有ᄒᆞ시더라○漢陽에徙都ᄒᆞ다時에書雲觀이道詵秘記에地理衰旺의書을進ᄒᆞ야是擧가有ᄒᆞ니라○冬十一月에我太祖로ᄡᅥ領三司事ᄅᆞᆯ拜ᄒᆞ고鄭夢周로ᄡᅧ守門下侍中을拜ᄒᆞ고池湧奇로ᄡᅧ判三司事ᄅᆞᆯ拜ᄒᆞ다○西京千戶尹龜澤이我太祖ᄭᅴ告ᄒᆞ야曰金宗衍이沈德符와池湧奇와朴葳諸人으로더브러公을謀害ᄒᆞᆯᄉᆡ德符ㅣ趙裕로ᄒᆞ야곰勒兵ᄒᆞ엿다ᄒᆞ거ᄂᆞᆯ太祖ㅣ德符의게告ᄒᆞ시니德符ㅣ裕ᄅᆞᆯ下獄ᄒᆞ야對辨코ᄌᆞᄒᆞ거ᄂᆞᆯ太祖ㅣ王ᄭᅴ白ᄒᆞ사曰德符ㅣ臣으로더브러猜貳가無ᄒᆞ니請컨ᄃᆡ勿問ᄒᆞ소셔ᄒᆞ야이에裕ᄅᆞᆯ釋ᄒᆞ엿더니於是에憲府ㅣ疏爭ᄒᆞ야맛ᄎᆞᆷᄂᆡ裕ᄅᆞᆯ絞殺ᄒᆞ고德符等을流ᄒᆞ고宗衍은支解ᄒᆞ다

공양왕 2년【명 태조 홍무 23년 ○ 일황 후소송 8년 ○ 서력 기원 1390년】이었다.

봄 정월에 우리 태조(太祖)로 하여금 팔도의 군마(軍馬)를 지휘하고 군영(軍營)을 설치하여 번(番)을 나누어 번갈아 가며 숙직하게 하였다.

○ 3월에 문하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가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길재는 해평(海平)【지금의 선산(善山)】 사람이다. 성리학[理學]을 공부하여 정몽주(鄭夢周)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폐왕 우(禑) 시절에 주서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노모(老母)를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선산으로 돌아갔다.

○ 이색(李穡) 등을 먼 곳으로 유배 보냈다. 처음에 조민수(曺敏修)가 창녕(昌寧)에 유배 가 있었는데, 규정(糾正), 전시(田時) 등을 보내서 창(昌)왕을 세운 일을 국문하였다. 또 전시를 장단(長湍)에 보내어 이색을 국문할 때 옥졸로 하여금 좌우에서 곤장을 잡고 매질하며 밤낮으로 핍박하면서 또 조민수의 자백서를 보여 주었다. 이색이 거짓으로 자백하며 말하기를, “창을 세울 때 조민수가 주장(主將)이 되었으므로 내가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나 멋대로 왕을 세우는 데 앞장선 것은 내 본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관(臺官)이 다시 두 사람의 죄를 논하고 또 이임(李琳), 이귀생(李貴生), 이을진(李乙珍), 정지(鄭地), 우인열(禹仁烈), 이경도(李庚道), 왕안덕(王安德), 우홍수(禹洪壽), 원상(元庠)이 우의 무리가 된 죄를 묻기를 청하였다. 왕이 우리 태조와 심덕부(沈德符)에게 명하기를, “조민수는 이미 죄를 받았으니 경 등이 대관들을 설득하여 다시는 논의치 말게 하라.”고 하였다. 드디어 이색을 함창(咸昌)에 유배하고 이림과 이귀생 등 아홉 명도 죄를 물어 유배 보냈다.

○ 윤 3월에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을 청주(淸州)에 유배 보냈다. 처음에 대간이 이색의 죄를 논하니 이행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대간이 죄를 논하는 것이 어찌 공신의 뜻이 아니리오?”라고 하였다. 우리 태조와 공신 등이 글을 올려서 시비를 명확히 하고, 이행을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며 비방을 중지하게 할 것을 청하니, 왕이 “정사를 돌보라.”고 명하고 이행을 유배 보냈다.

○ 정도전(鄭道傳)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김사형(金士衡)을 밀직사(密直使)에, 우리 태종(太宗)을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임명하였다. 태종은 우리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영리하고 재주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고려(高麗)의 정치가 어지러워 민심이 떠난 것을 근심하여 의기롭게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셨다.

○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서운관이 『도선비기(道詵秘記)』에 있는 지리(地理)의 흥망성쇠에 관한 글을 올려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

○ 겨울 11월에 우리 태조를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임명하고, 정몽주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하였으며, 지용기(池湧奇)를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하였다.

○ 서경 천호(西京千戶) 윤귀택(尹龜澤)이 우리 태조께 고하기를, “김종연(金宗衍)이 심덕부, 지용기(池湧奇), 박위(朴葳)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공을 해칠 모의를 하면서 심덕부가 조유(趙裕)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께서 심덕부에게 말하시니, 심덕부가 조유를 하옥하여 대면해서 옳고 그름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에 태조께서 왕께 아뢰시기를, “심덕부는 신과 함께 서로 시기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니, 청컨대 이를 묻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조유를 풀어 주었는데 이때 헌부(憲府)가 소를 올려 다투므로 마침내 조유를 목매어 죽이고 심덕부 등을 유배 보냈으며 김종연은 사지를 찢어 죽였다.


신미[편집]

三年明太祖洪武二十四年○日皇後小松九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九十一年이라春正月에我太祖로ᄡᅧ三軍都摠制使ᄅᆞᆯ拜ᄒᆞ고裴克廉趙浚鄭道傅은中左右軍摠制使ᄅᆞᆯ拜ᄒᆞ다○二月이라王益富라ᄒᆞᄂᆞᆫ者ㅣ有ᄒᆞ니池湧奇妻族이라湧奇家에出入ᄒᆞ야自謂ᄒᆞ되忠宣王의曾孫이라ᄒᆞ거ᄂᆞᆯ捕鞫絞殺ᄒᆞ고幷히湧奇ᄅᆞᆯ流ᄒᆞ다○王이還都ᄒᆞ니刑曹判書安瑗의言을從ᄒᆞᆷ이러라○私田을革罷ᄒᆞ고給田法을定ᄒᆞᆯᄉᆡ文宗舊制ᄅᆞᆯ依ᄒᆞ야科田을京畿에置ᄒᆞ고各各其科ᄅᆞᆯ隨ᄒᆞ야受케ᄒᆞ니第一科ᄂᆞᆫ大君으로브터門下侍中ᄭᆞ지百五十結을給ᄒᆞ고其下ᄂᆞᆫ次次로遞減ᄒᆞ야十八科에至ᄒᆞ니凡田租가ᄆᆡ양水田一結에ᄂᆞᆫ糙米가三十斗오旱田一結에ᄂᆞᆫ雜穀이三十斗오此外에橫斂ᄒᆞᄂᆞᆫ者ᄂᆞᆫ贓으로ᄡᅧ論ᄒᆞ다結字ᄂᆞᆫ麗時에創用ᄒᆞ니卽古昔一頃이라○秋七月에暹羅國이遣使來聘ᄒᆞ다暹羅ㅣ中國南海中에在ᄒᆞ야我로더브러相通치아니ᄒᆞ더니至是에其王이奈工等八人을遣ᄒᆞ야致書ᄒᆞ고方物을獻ᄒᆞᆯᄉᆡ其人이或袒或跣ᄒᆞ고尊者ᄂᆞᆫ白布로ᄡᅧ髮을韜ᄒᆞ고僕從이尊者ᄅᆞᆯ見ᄒᆞ면脫衣露體ᄒᆞ며三譯ᄒᆞᆫ後에其意ᄅᆞᆯ達ᄒᆞ더라○侍中鄭夢周ㅣ上言ᄒᆞ되臺官이다만彈劾을專事ᄒᆞ야禍가非辜에及ᄒᆞᆫ다ᄒᆞ고곳裴克廉等으로더브러立昌迎禑等五罪의輕重을分定ᄒᆞ고ᄯᅩ啓ᄒᆞ야曰今後에다시論劾ᄒᆞᄂᆞᆫ者ㅣ有ᄒᆞ면誣告로論ᄒᆞ소셔ᄒᆞ더라○八月에日本源了俊이遣使ᄒᆞ야方物을獻ᄒᆞ고被擄人을歸ᄒᆞ다○九月에我太祖로ᄡᅧ判門下府事ᄅᆞᆯ拜ᄒᆞ고沈德符로ᄡᅧ門下侍中을拜ᄒᆞ다○省憲과刑曹ㅣ上書ᄒᆞ되鄭道傅이奸惡을內懷ᄒᆞ고忠直을外施ᄒᆞ야國政을染汚ᄒᆞ니極刑에置ᄒᆞ소셔ᄒᆞ거ᄂᆞᆯ王이功臣이라ᄒᆞ야宥ᄒᆞ고鄕里에放歸ᄒᆞ다○都評議司使ㅣ上言ᄒᆞ되銀銅이本來我國國産이아니니銀甁의貨가復行키難ᄒᆞᆫ지라맛당히古今을參酌ᄒᆞ고本國에通行ᄒᆞᆯ楮貨ᄅᆞᆯ置ᄒᆞ야印造ᄒᆞᆫ後流布ᄒᆞ야五綜布와갓치兼行ᄒᆞ소셔ᄒᆞ더라○李穡과李崇仁을召還ᄒᆞ다

공양왕 3년【명 태조 홍무 24년 ○ 일황 후소송 9년 ○ 서력 기원 1391년】이었다.

봄 정월에 우리 태조(太祖)를 삼군 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에 임명하고,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은 중좌우군 총제사(中左右軍摠制使)에 임명하였다.

○ 2월이었다. 왕익부(王益富)라는 자가 있었는데, 지용기(池湧奇) 아내의 친족이었다. 지용기의 집에 출입하면서 스스로 “충선왕(忠宣王)의 증손이다.”라고 하였다. 그를 잡아서 심문하여 목매어 죽이고 아울러 지용기는 유배 보냈다.

○ 왕이 옛 수도로 돌아오니, 형조 판서(刑曹判書) 안원(安瑗)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급전법(給田法)을 정할 때에 문종(文宗)의 옛 제도에 의거하여 과전(科田)을 경기에 설치하고 각각 과에 따라서 받게 하였다. 제1과는 대군(大君)에서부터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150결(結)을 주었고, 그 아래는 점차 조금씩 줄여서 18과에 이르렀다. 무릇 전조(田租)가 매번 수전(水田) 1결에는 조미(糙米)가 30말[斗]이고, 한전(旱田)은 1결에 잡곡 30말이었다. 이외에 함부로 거두어 들이는 것은 훔친 것으로 논하였다.【결이란 글자는 고려(高麗) 때 새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니, 곧 옛날의 1경(頃)이다】

○ 가을 7월에 섬라국(暹羅國)이 사신을 보내 내빙(來聘)하였다. 섬라는 중국 남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어서 우리와 교류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그 나라의 왕이 나공(奈工) 등 8명을 보내어 서신을 전하고 방물을 바쳤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상의를 벗고 어떤 사람은 맨발이었으며, 높은 사람은 흰 천으로 머리를 가렸다. 따르던 시종이 높은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 보였다. 세 번 통역을 거친 뒤에야 그 뜻을 전할 수 있었다.

○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아뢰기를, “대관(臺官)이 다만 탄핵을 일삼아 화가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라고 하고 곧 배극렴 등과 함께 창(昌)을 세우고 우(禑)를 영입한 것 등 5가지 죄의 경중을 나누어 정했다. 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 다시 논핵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誣告)로 죄를 논하소서.”라고 하였다.

○ 8월에 일본 미나모토 료순[源了俊]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붙잡힌 포로를 돌려보냈다.

○ 9월에 우리 태조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임명하고 심덕부(沈德符)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였다.

○ 성헌(省憲)과 형조(刑曹)가 글을 올려 “정도전이 간악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충직한 체하여 국정을 오염시키니 극형에 처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이 공신이라 하여 용서하고 향리로 내쫓았다.

○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가 왕에게 아뢰기를, “은과 동이 본래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은병(銀甁) 화폐를 다시 발행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땅히 고금을 참작하여 우리나라에서 통용될 저화(楮貨)를 만들어 인쇄한 후 유포하여 오종포(五綜布)와 같이 사용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 이색(李穡)과 이숭인(李崇仁)을 불러들였다.


임신[편집]

四年明太祖洪武二十五年是歲高麗亡○日皇後小松十年○西歷紀元後一千三百九十二年이라夏四月에趙英珪ㅣ守侍中鄭夢周ᄅᆞᆯ殺ᄒᆞ다初에夢周ㅣ我太祖의器重ᄒᆞᆫᄇᆡ되야薦擢ᄒᆞ시고夢周도ᄯᅩᄒᆞᆫ太祖의功業을深推ᄒᆞ야歌詠에形ᄒᆞ더니戊辰廢立ᄒᆞᆫ後로브터夢周ㅣ비로소太祖ᄅᆞᆯ圖ᄒᆞᆯ志가有ᄒᆞ야迎禑立昌等五罪ᄅᆞᆯ定ᄒᆞ야彈駁을抑制ᄒᆞ고王으로ᄒᆞ여곰舊人을召用ᄒᆞ라ᄒᆞ며ᄯᅩ金震陽等을引薦ᄒᆞ야諫職에布列ᄒᆞ더니맛ᄎᆞᆷ太祖ㅣ海州에셔畋ᄒᆞ시다가墜馬病篤ᄒᆞ시니夢周ㅣ聞ᄒᆞ고喜色이有ᄒᆞ야震陽等으로ᄒᆞ여곰몬져其羽翼을除ᄒᆞ라ᄒᆞ니於是에震陽이右常侍李擴等으로더브러上疏ᄒᆞ야三司左使趙浚과前政堂文學鄭道傳과前密直副使南誾과前判書尹紹宗과前判事南在와淸州牧趙璞等을論劾ᄒᆞ니王이이에浚等六人을遠地에流ᄒᆞ고ᄯᅩ金龜聯李幡等을其貶所에分遣ᄒᆞ야장찻鞫殺ᄒᆞᆯᄉᆡ時에太祖ㅣ碧瀾渡在今松都에還至ᄒᆞ시니太宗이馳迎ᄒᆞ시고本邸에急歸ᄒᆞ사夢周ᄅᆞᆯ謀去ᄒᆞ실ᄉᆡ太祖兄의壻卞仲良이夢周의게告ᄒᆞᆫᄃᆡ夢周ㅣ事가不濟ᄒᆞᆷ을知ᄒᆞ고太祖邸에至ᄒᆞ야問疾을稱ᄒᆞ고觀變ᄒᆞ거ᄂᆞᆯ太祖ㅣ接待가如初ᄒᆞ시더라이에趙英珪等이夢周의還ᄒᆞᆷ을伺ᄒᆞ야路上에셔擊殺ᄒᆞ다夢周의爲人이豪邁絶倫ᄒᆞ고忠孝大節이有ᄒᆞ며自少로好學不倦ᄒᆞ야깁히性命의奧理ᄅᆞᆯ透得ᄒᆞ고時에國家ㅣ多故ᄒᆞ야機務가浩繁ᄒᆞ거ᄂᆞᆯ夢周ㅣ聲色을不動ᄒᆞ고左酬右應에다其當에適合ᄒᆞ니時人이王佐才라稱ᄒᆞ더니밋國事가益艱ᄒᆞᄆᆡ慨然히扶持全安ᄒᆞᆯ志가有ᄒᆞᆯᄉᆡ一山僧이踵門獻詩ᄒᆞ야其去ᄒᆞᆷ을諷喩ᄒᆞ거ᄂᆞᆯ夢周ㅣ執詩流涕曰嗚呼晩矣라ᄒᆞ더니至是ᄒᆞ야맛ᄎᆞᆷᄂᆡ國家에殉死ᄒᆞ니年이五十七이러라後에我朝ㅣ贈職賜諡ᄒᆞ고文廟에從祀ᄒᆞ다所著ᄒᆞᆫ詩文이豪放峻潔ᄒᆞ며圃隱集이有ᄒᆞ야世上에傳ᄒᆞ더라○鄭夢周ㅣ旣死ᄒᆞᄆᆡ我太宗이麗王의게啓ᄒᆞ사金震陽等을鞫問ᄒᆞᆯᄉᆡ李穡禹玄寶李崇仁李種學趙瑚의게辭連ᄒᆞᄂᆞᆫ지라이에몬져震陽崇仁種學과밋徐甄權弘等을遠地에流ᄒᆞ다震陽의爲人이慷慨不群ᄒᆞ고屬文이善ᄒᆞ며鄭道傳으로더브러李穡을師事ᄒᆞᆯᄉᆡ才名이道傳에過ᄒᆞ니道傳이忌嫉ᄒᆞ다가至是에體覆使黃居正을嗾ᄒᆞ야杖殺ᄒᆞ고種學은穡의次子라長沙今茂에流ᄒᆞ더니ᄯᅩᄒᆞᆫ道傳의縊殺ᄒᆞᆫᄇᆡ되다○王이李穡을淸州에放ᄒᆞ다王이穡다려謂曰卿의子ㅣ이믜朝廷에得罪ᄒᆞ엿스니卿은去ᄒᆞ라然이나兩江ᄡᅥ外에ᄂᆞᆫ오작卿의意ᄅᆞᆯ從ᄒᆞ야適ᄒᆞ라ᄒᆞᆫᄃᆡ穡이對曰臣이田宅이無ᄒᆞ니安歸乎잇가ᄒᆞ더라○沈德符로ᄡᅧ判門下府事ᄅᆞᆯ拜ᄒᆞ고我太祖로ᄡᅧ門下侍中을拜ᄒᆞ다○六月에前判三司事禹玄寶와밋宗室南平君和와前節制使王承貴等을遠地에流ᄒᆞ고鄭道傳南誾等을召還ᄒᆞ다玄寶의爲人이忠厚ᄒᆞ고居官에淸白ᄒᆞ며子洪壽等五人이다登科ᄒᆞ고孫成範은王女ᄅᆞᆯ尙ᄒᆞ니尹紹宗等이其宗支가疆ᄒᆞᆷ을忌ᄒᆞ야去코ᄌᆞᄒᆞ더라玄寶ㅣ夢周等으로더브러王室을謀奬ᄒᆞ더니밋夢周ㅣ死ᄒᆞᄆᆡ屍가道傍에在ᄒᆞ야敢近ᄒᆞᄂᆞᆫ者ㅣ無ᄒᆞ거ᄂᆞᆯ玄寶ㅣ山僧을密敎ᄒᆞ야收瘞ᄒᆞ고麗가亡ᄒᆞᄆᆡ中國에逃入ᄒᆞ엿다가다시歸國ᄒᆞ거ᄂᆞᆯ我太祖ㅣ召見ᄒᆞ사功臣爵號ᄅᆞᆯ賜ᄒᆞ시니不受ᄒᆞ고卒ᄒᆞ니諡曰忠靖이오洪壽等은鄭道傳의微賤을侮ᄒᆞ야其告身에署名치아니ᄒᆞ니道傳이깁히挾憾ᄒᆞ다가革命時에構捏私殺ᄒᆞ니라○趙浚으로ᄡᅧ京畿左右道節制使ᄅᆞᆯ拜ᄒᆞ고南誾으로ᄡᅧ慶尙道節制使ᄅᆞᆯ拜ᄒᆞ야各各其道兵馬ᄅᆞᆯ掌ᄒᆞ다○秋七月에鄭道傳으로ᄡᅥ奉化郡忠義君을拜ᄒᆞ다○王이原州에遜位ᄒᆞ다時에太祖威德이日盛ᄒᆞ시니衆心이推戴ᄒᆞ야稠人廣坐中에셔揚言曰天命과人心이이믜所屬이有ᄒᆞ니엇지勸進치아니ᄒᆞᄂᆞᆫ고ᄒᆞ더니十二日辛卯에右侍中裴克廉等이王大妃安氏ᄭᅴ白ᄒᆞ야曰今王이昏闇ᄒᆞ야生民의主가되지못ᄒᆞ리이다ᄒᆞ고드ᄃᆡ여妃의敎로王을廢ᄒᆞ야原州에放ᄒᆞ니高麗ㅣ太祖開國ᄒᆞᆷ으로브터王에至ᄒᆞ기ᄭᆞ지凡三十四王이오歷年이四百七十五年에亡ᄒᆞ니我太祖ᄭᅴ오셔卽位ᄒᆞ신後에王을恭讓君으로降封ᄒᆞ셧다가後三年에君이崩ᄒᆞ거ᄂᆞᆯ王을追封ᄒᆞ시다

공양왕 4년 【명 태조 홍무 25년 이 해에 고려가 망함 ○ 일황 후소송 10년 ○ 서력 기원 1392년】이었다.

여름 4월에 조영규(趙英珪)가 수시중(守侍中) 정몽주(鄭夢周)를 죽였다. 처음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정몽주의 재주를 중하게 여기시어 천거하여 발탁하셨다. 정몽주 또한 태조의 업적을 깊이 받들어서 시를 읊을 때 이를 묘사하였다. 무진(戊辰, 1388)년 왕을 폐위한 후부터 정몽주가 비로소 태조를 도모하려는 뜻이 있어 우(禑)를 맞아들이고 창(昌)을 왕으로 세운 것 등 5가지 죄를 정하여 탄핵을 억제하면서 왕으로 하여금 옛 사람을 맞아들여 등용하라고 하였다. 또 김진양(金震陽) 등을 추천하여 간(諫)하는 직에 배치하였다. 마침 태조께서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시다가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자, 정몽주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김진양 등에게 먼저 태조의 측근들을 제거하라고 하였다. 이때 김진양이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 등과 함께 상소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준(趙浚), 전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도전(鄭道傳),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남은(南誾), 전 판서(判書) 윤소종(尹紹宗), 전 판사(判事) 남재(南在), 청주목(淸州牧) 조박(趙璞) 등의 죄를 탄핵하였다. 이에 왕이 조준 등 여섯 명을 먼 지방으로 유배 보냈다. 또 김구련(金龜聯), 이번(李幡) 등을 유배지에 나누어 보내서 장차 국문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께서 벽란도(碧瀾渡)【지금의 송도(松都)에 있다.】에서 돌아오시니 태종(太宗)이 재빨리 나가 맞이하시고 본가로 급히 돌아가서 정몽주를 제거할 모의를 하였다. 태조의 형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정몽주에게 알렸다. 정몽주가 일이 성공할 수 없음을 알고 태조의 집에 이르러 문병을 칭하고 사태를 살피니, 태조의 접대에 변함이 없었다. 이에 조영규 등이 정몽주가 돌아가는 것을 엿보다가 길에서 쳐 죽였다. 정몽주의 사람됨이 호방하고 뛰어났으며 충효와 절개가 높았고,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을리하지 않아 사람의 천성과 천명의 심오한 이치를 깨달았다. 당시에 나라에 변고가 많아서 기무(機務)가 크고 번거롭게 많았으나, 정몽주는 목소리와 얼굴색에 변함이 없이 응대하여도 처리하는 일이 모두 적합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왕을 보좌할 인재다.”라고 칭하였다. 나랏일이 더욱 힘들어졌으나 의기 있게 나라를 지키고 편안하게 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한 승려가 대문에 들어서서 시(詩)를 바치며 그의 죽음을 미리 알려 주니, 정몽주가 시를 보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호라! 늦었도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니, 나이가 57세였다. 후에 우리 조정에서 시호를 내렸으며 문묘(文廟)에서 제사를 지냈다. 지은 시문이 호방하면서 엄숙하고 정결하였으며, 『포은집(圃隱集)』이 있어 세상에 전하였다.

○ 정몽주가 죽자 우리 태종이 고려(高麗) 왕에게 아뢰어 김진양을 국문하게 하였다. 이때 이색(李穡), 우현보(禹玄寶), 이숭인(李崇仁), 이종학(李種學), 조호(趙瑚) 등이 연루되었다. 이에 먼저 김진양, 이숭인, 이종학, 서견(徐甄), 권홍(權弘) 등을 먼 지방으로 유배 보냈다. 김진양의 사람됨이 강개하고 소인배와 어울리지 않았으며, 글을 잘 지었다. 정도전과 함께 이색을 스승으로 섬길 때 재주와 명성이 정도전보다 뛰어났다. 정도전이 그를 미워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을 사주하여 때려 죽였다. 이종학은 이색의 둘째 아들로 장사(長沙)【지금의 무장(茂長)】에 유배 갔다가 또한 정도전에게 목을 졸려 죽었다.

○ 왕이 이색을 청주(淸州)로 추방하였다. 왕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경의 아들이 이미 조정에서 죄를 얻었으니 경은 떠나라. 그러나 강을 두 개 건너서는 오직 경의 뜻에 따라가라.”고 하였다. 이색이 대답하기를 “신이 논밭과 집이 없으니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심덕부(沈德符)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임명하고 우리 태조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였다.

○ 6월에 전 판삼사사(判三司事) 우현보와 종실 남평군(南平君) 화(和), 전 절제사(節制使) 왕승귀(王承貴) 등을 먼 곳으로 유배 보내고 정도전과 남은 등을 소환하였다. 우현보의 사람됨이 충성스럽고 후덕하여 관직에 있을 때 청렴결백하였다. 아들 우홍수(禹洪壽) 등 다섯 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손자 우성범(禹成範)이 왕의 딸을 배필로 맞았는데, 윤소종 등이 그의 집안이 대단한 것을 꺼려 제거하고자 하였다. 우현보는 정몽주 등과 함께 왕실을 도우려고 하였는데, 정몽주가 죽어 시신이 길가에 놓여 있어도 감히 가까이 가는 사람이 없자 승려에게 몰래 이야기하여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냈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중국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귀국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불러서 공신의 작호를 내렸으나 받지 않고 죽었다.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였다. 우홍수 등은 정도전이 미천한 것을 멸시하여 그의 고신(告身,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았다. 정도전이 깊이 원망하다가 혁명 시에 죄를 억지로 씌워서 사사로이 죽였다.

○ 조준을 경기 좌우도 절제사(京畿左右道節制使)에 임명하고, 남은을 경상도 절제사(慶尙道節制使)에 임명하여 각각 그 도의 병마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 가을 7월에 정도전을 봉화군(奉化郡) 충의군(忠義君)에 임명하였다.

○ 왕이 원주(原州)에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때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하니, 대중이 한마음으로 추대하여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소리 높여 말하기를,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따르는 바가 있으니 어찌 나아가 왕위에 오르시지[勸進]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12일 신묘(辛卯)에 우시중(右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 안씨(安氏)에게 아뢰기를, “지금의 왕이 어리석어 백성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왕대비의 교지로 왕을 폐하여 원주로 쫓아내었다. 고려는 태조가 개국한 이후 지금의 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34명의 왕이 있었고, 왕업을 이어 온 햇수가 475년 만에 망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신 후에 왕을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하여 봉하였다가, 3년 후에 공양군이 돌아가시니 왕으로 추증하여 봉하였다


歷史編輯之始本欲自檀君以迄本朝通爲八編故上三編先行之日作序述其意矣其後議論稍異編至高麗而止纔爲五篇願世之君子幸母以前後矛盾而見怪焉圭桓識

역사 편집을 시작했을 때에는 본래 단군으로부터 조선 왕조[本朝]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덟 편(篇)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상(上) 세 편을 먼저 집필한 날에 서문을 작성하여 그 뜻을 서술하였다. 그 후 의논이 점차 달라져서 편찬이 고려에 이르러 중지되어 겨우 다섯 편이 되었다. 원컨대 세상의 군자들이 다행히 전후의 모순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규환(李圭桓) 지(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