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산 C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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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번 준 편지는 받아 읽었소. 허나 워낙 붓 들기를 싫어하는 나요. 더구나 답서 같은 것은 염직해서는 아니하는 괴별한 버릇이 있는지라 이때까지 한 장의 글월을 아끼었소만 그렇다고 결코 군을 잊은 것은 아니었소. 고향의 그 달을 생각하였고 또한 군의 얼굴을 머리에 그려보았소. 그러니 이 붓을 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겠소 그려.

빠르오. 군과 내가 두견산에 올라 멀리 불타산을 바라보며 문담(文談)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일년이 되었소 그려. 그 동안 군은 몇 번이나 두견산에 올라 그 달을 바라보았소? 군! 나는 이 붓으로 일년 전 그때를 그려 보려 하오.

우리들이 가지런히 서서 두견산을 향하여 올라가오. 긴 풀들이 옷가를 스쳐 실실 소리를 내었고 짙은 풀내를 띄운 무르익은 흙내가 구수하였소. 우리들의 발끝이 잔디 속에 포근포근 파묻히매 꼭 시냇물 속에 들어선 듯한 감촉이었고 그곳에 벌레소리 명주실끝같이 오리오리 뽑히었으며 메뚜기 푸르릉 날았소.

우리들이 바위 위에 올라앉으니 불타산은 여전히 높았고 들은 휘영청 멀었소.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들의 땀 배인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는데 기운이 버쩍 났소. 돌아보니 다방솔 포기가 자욱히 우리를 둘러쌌으며 그리로부터 풍기는 찬바람을 우리는 냉수 마시듯 하였소.

금방 해가 진 뒤라 그런지 멀리 불타봉에는 붉은 빛이 은은하였고 산 밑으로 뽀오얀 안개가 몽실몽실 피어오르오. 그곳엔 아마 온갖 새들이 나래를 접고 포근히 잠들어 있을 듯하였소. 숲속으로 흐르는 시냇물만이 돌돌 소리를 낼 게요. 이 모든 것을 폭 덮어 나간 하늘엔 흰 조개 같은 구름장이 오글오글 엎드려 있고 그 사이로 파란 하늘이 꼭 호수와 같소. 까뭇거리는 해변가에 섰는 듯, 속을 뻔했소.

대지는 검어가오. 불타산 아래로 파도같이 넘실거리는 오곡이 가슴이 턱 나오게 가득 들어차 있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흰 옷자락이 나비같이 날고 있소. 시커먼 벌을 뚫고 흐르는 저 시냇물은 어떤 이국에 가는 길인가…… 도 싶으오.

어느덧 시가에는 전등불이 흩어져 화단인 양 싶었고 하늘엔 별들이 박꽃처럼 피어나오. 깜짝 놀라게스리 컴컴한 저 동산, 숲속은 환하였소. 숲속에 반쯤 가리인 그 달은 부끄러워 아미를 숙인 처녀의 얼굴 같고 어찌 보면 오래 그립던 벗의 얼굴을 대한 듯하오.

달이야 여기서도 볼 수 있건만 내 고향 뒷숲에 숨어 오르는 그 달 같겠소?

달려가면 쥘 듯하고 소리치면 대답이 있을 듯한 그 달! 그 빛이 희고 맑음이 오 서리같이 찬 듯하건만 오히려 다정한 감을 갖게 하고, 그 모양 둥글어 모짐이 없음이오 무심할 듯하건만 온갖 정서를 한 가슴 폭 담은 그로다. 군은 견디다 못해서 벌떡 일어나 휘파람을 끊어질 듯 불지 않았소.

군 여기까지 쓰고 보니 붓끝이 딱 막히오. 나머지 생각나는 것이 있거들랑 이 벗의 부족한 글을 보충해주오.

군의 건강을 빌며 그만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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