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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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본기(秦本紀)[편집]

진(秦)나라의 선조[편집]

진(秦)나라의 선조는 전욱제(顓頊帝)의 먼 후손인 여수(女修)다. 여수가 베를 짜고 있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뜨려서 여수가 이 알을 삼키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 대업은 소전(少典)의 딸 여화(女華)를 아내로 맞았다. 여화는 대비(大費)를 낳았고, 대비는 우(禹)와 함께 물과 땅을 다스렸다. 일을 잘 마치자 제순(舜)이 현규(玄圭)를 내렸다. 우가 이를 받으면서 “저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 대비가 도왔습니다”라고 했다. 제순은 “오, 비여! 우를 도와서 공을 이루었으니 그대에게 조유(皁游)를 내리니 그대의 후손이 크게 번창할 것이다”라 하고는 요씨(姚氏) 성의 옥녀를 아내로 삼게 했다. 대비는 절하며 받고는 순을 도와서 새와 짐승을 길들이니 새와 짐승들이 잘 길들여졌다. 이가 백예(柏翳)이고, 순은 그에게 영씨(嬴氏) 성을 내렸다.

대비는 아들 둘을 낳았다. 하나는 대렴(大廉)으로 조속씨(鳥俗氏)의 선조가 되었다. 또 하나는 약목(若木)으로 비씨(費氏)의 선조가 되었다. 그 현손(玄孫)은 비창(費昌)인데, 그 자손이 중국(中國)이나 이적(夷狄) 땅에 살았다. 비창은 하걸 때 하를 떠나 상에 귀의하여 탕을 위해 수레를 몰았고, 명조(鳴條)에서 걸을 물리쳤다. 대렴의 현손은 맹희(孟戲)와 중연(中衍)인데, 새의 몸을 하고 사람의 말을 했다. 제태무(帝太戊)가 이를 듣고는 점을 치고 수레를 몰게 하니 길하여 아내를 얻어 주었다. 태무 이래로 중연의 후손들이 대대로 공을 세우며 은을 도움으로써 영씨 성이 많이 드러나게 되고 마침내 제후가 되었다.

(중연의) 현손은 중휼(中潏)이라 했다. 서융(西戎) 지역에 살면서 서수(西垂)를 지켰다. 비렴(蜚廉)을 낳았고, 비렴은 오래(惡來)를 낳았다. 오래는 힘이 세고, 비렴은 달리기를 잘했다. 이들 부자는 재주와 힘으로 은주(殷紂)를 모셨다. 주 무왕이 은주를 정벌할 때 오래도 함께 죽였다. 이때 비렴은 은주를 대신해 북방에 나가있다가 돌아왔으나 보고할 곳이 없자 곽태산(霍太山)에 제단을 쌓아서 주왕에게 보고하면서 석관 하나를 얻었는데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천제께서 너 처보(處父, 비렴)를 은이 난리 때 죽지 않게 하시고, 네게 석관까지 하사하시어 종족을 번창케 하도다.” 비렴이 죽자 곽태산에 장사 지냈다. 비렴에게는 계승(季勝)이라는 다른 아들이 있었다. 계승은 맹증(孟增)을 낳았다. 맹증은 주 성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바로 택고랑(宅皐狼)이다. 고랑은 형보(衡父)를 낳았고, 형보는 조보(造父)를 낳았다.

조보는 말을 잘 몰아 주 목왕의 총애를 받았다. 목왕은 기(驥), 온려(溫驪), 화류(驊駵), 녹이(騄耳)라는 네 필의 말을 얻어 서쪽으로 순수를 떠났는데 너무 즐거워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 서언왕(徐偃王)이 난을 일으키자 조보는 목왕을 위하여 수레를 몰아 하루에 천리를 달려 주로 돌아와 난을 다스렸다. 목왕은 조성(趙城)을 조보에게 봉읍으로 내리니 이때부터 조보의 집안은 조씨(趙氏)가 되었다. 비렴이 계승을 낳은 이래 5대째인 조보에 이르러서 따로 조에서 살게 되었다. 조최(趙衰)는 그 후손이다.

오래혁(惡來革)은 비렴의 아들인데 일찍 죽었다. 여방(女防)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여방은 방고(旁皐)를 낳았고, 방고는 태궤(太几)를 낳았고, 태궤는 대락(大駱)을 낳았고, 대락은 비자(非子)를 낳았다. 조보가 목왕의 총애를 받은 덕에 모두 조성에 살면서 조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비자(非子)[편집]

비자는 견구(犬丘)에 살았는데, 말과 가축을 좋아하여 잘 기르고 번식시켰다. 견구 사람들이 주 효왕에게 이를 알리자 효왕이 비자를 불러서 견수(汧水)와 위수(渭水) 사이에서 말들을 기르게 했더니 빨리 많이 번식시켰다. 효왕은 비자를 대락의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신후(申侯)의 딸이 대락의 아내가 되어 아들 성(成)을 낳으니 적자로 삼았다. 신후가 효왕에게 말했다.

“옛날 우리 선조인 역산(酈山)의 딸께서 융족(戎族) 서헌(胥軒)의 아내가 되어 중휼(中潏)을 낳으셨는데, 주와 친해져 귀의하여 서수(서쪽 변방)를 지키니 서수가 화목해졌습니다. 이제 제가 다시 대락에게 딸을 시집보내 적자 성을 낳았습니다. 저와 대락이 다시 혼인을 맺어 서융(西戎)을 모두 복속시킴으로써 왕이 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왕께서는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에 효왕이 이렇게 말했다. “옛날 백예가 순을 위하여 가축을 관리하여 잘 번식시켜서 봉토와 영씨 성을 받았다. 지금 그 후손들이 짐을 위해서 말을 번식시켰기에 짐이 땅을 나누어주어 부용국으로 삼고자 한다.”

그리하여 진(秦)에 도읍을 정하게 하고 다시 영씨의 제사를 잇게 하고는 진영(秦嬴)이라 하였다. 또 신후의 딸이 낳은 아들을 폐하지 않고 대락의 적자로 삼아서 서융과 잘 지내게 하였다.

진후(秦侯)[편집]

진영은 진후(秦侯)를 낳았다. 진후는 10년 재위하고 죽었다.

공백(公伯)[편집]

진후는 공백(公伯)을 낳았고, 공백은 3년 재위하고 죽었다.

진중(秦仲)[편집]

공백은 진중(秦仲)을 낳았다.

진중이 즉위한 지 3년, 주 여왕이 무도하여 제후 중 일부가 배반하고, 서융도 왕실에 반발하여 견구의 대락 부족을 없앴다.

주 선왕이 즉위하여 진중을 대부로 삼아 서융을 토벌했는데 서융이 진중을 죽였다. 진중은 23년 재위하다 융 땅에서 죽은 것이다.

장공(莊公)[편집]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장공(莊公)이다. 주 선왕은 장공과 다섯 형제를 불러 7,000명의 병사를 주고 서융을 토벌하게 하여 서융을 격파했다. 이에 진중의 후손에게 다시 선조 대락의 봉지인 견구를 주고 서수의 대부로 삼았다.

장공은 자신들의 옛 땅인 서견구(西犬丘)에 살면서 아들 셋을 낳았다. 큰아들은 세보(世父)라 했다. 세보는 “융이 나의 할아버지 진중을 죽였으니 내가 융의 왕을 죽이지 않으면 봉읍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라 했다. 세보가 융을 치기 위해 아우 양공(襄公)에게 자리를 양보하니 양공이 태자가 되었다. 장공이 재위 44년 만에 죽자 태자인 양공이 뒤를 이었다.

양공(襄公)[편집]

양공 원년, 양공의 여동생 목영(繆瀛)이 풍왕(豐王)의 아내가 되었다.

양공 2년, 융이 견구를 포위하자 세보가 서융을 공격하다가 서융의 포로가 되었다. 1년 남짓 지나자 세보를 돌려보냈다.

7년 봄, 주 유왕이 포사로 인해 태자를 폐하고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삼았다. 또 여러 차례 제후를 속이자 제후가 유왕을 배반했다. 서융의 견융이 신후와 함께 주를 정벌하여 유왕을 여산 밑에서 죽였다. 진 양공이 군대를 이끌고 주를 구원하러 나서 힘껏 싸워 공을 세웠다. 주가 견융의 난을 피해 동쪽 낙읍으로 천도할 때 양공은 군대를 이끌고 주 평왕을 호송했다. 평왕은 양공을 제후로 봉하고 기산(岐山)의 서쪽 땅을 하사하면서 “무도한 서융이 우리의 기(岐)과 풍(豐) 땅을 침탈한 바 진나라가 융을 공격해 물리친다면 그 땅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맹서하고 봉지와 작위를 내렸다. 양공이 이때 처음으로 나라를 갖고 제후들과 사신을 교환하는 등 대등한 예를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붉은 말, 황소, 숫양을 각각 세 마리씩 제물로 삼아 서치(西畤)에서 상제(上帝)께 제사를 올렸다.

12년, (양공이) 융을 토벌하러 기산에 이르러서 죽었다. 문공(文公)을 낳았다.

문공(文公)[편집]

문공 원년, 서수궁(西垂宮)에 거주했다.

3년, 문공은 7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4년, 견수와 위수가 만나는 지점에 이르러 문공은 “옛날 주가 우리 선조 진영에게 여기를 도읍으로 삼게 했고, 그 뒤 마침내 제후가 되었다”라 했다. 그러고는 살 만한 곳인지 점치게 하니 길하다고 나와 바로 도읍을 조성했다.

10년, 처음으로 부치(鄜畤, 제천단)를 만들어 삼뢰(三牢, 소, 양, 돼지 세 종류의 가축을 제물로 하는 제사)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13년, 처음으로 사관(史官)을 두어서 일을 기록했다. 많은 백성들이 교화되었다.

16년, 문공이 병사를 이끌고 융을 토벌하니 융은 패해 달아났다. 이에 문공은 주의 유민들을 거두어 진나라 백성으로 삼고 영토를 기산까지 넓혀서는 기산의 동쪽을 주에 바쳤다.

19년, 진보(陳寶, 미간에서 제사를 드리는 작은 신)를 얻었다.

20년, 처음으로 삼족(三族)을 멸하는 형벌이 만들어졌다.

27년, 남산의 큰 가래나무를 베자 나무 사이에서 큰 황소가 나와 풍수로 들어갔다.

48년, 문공의 태자가 죽으니 정공(靜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공의 큰 아들이 태자가 되었는데 문공의 손자였다.

50년, 문공이 죽자 서산에 안장했다.

영공(寧公)[편집]

정공의 아들이 등극하니, 이가 영공(寧公)이다.

영공 2년, 평양(平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군대를 보내 탕사(蕩社)를 토벌했다.

3년에는 박(亳)과 싸웠다. 박왕(亳王)은 서융으로 달아났다. 마침내 탕사를 멸망시켰다.

4년, 노나라의 공자 휘(翬)가 자기 군주 은공(隱公)을 시해했다.

12년, 영공은 탕씨(蕩氏)를 토벌하여 땅을 빼앗았다.

영공이 열 살에 즉위하여 재위 12년 만에 죽었고, 서산(西山)에 안장했다.

출자(出子)[편집]

영공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인 무공(武公)이 태자가 되었다. 무공의 동생 덕공(德公)은 무공과 같은 어머니인 노희자(魯姬子)에게서 태어났다. (노희자는) 출자도 낳았다.

영공이 죽자 대서장(大庶長) 불기(弗忌), 위루(威壘) 삼보(三父)가 태자를 폐위하고 출자를 국군으로 옹립했다.

출자 6년, 삼보 등이 다시 사람을 시켜서 출자를 죽였다. 출자는 다섯 살에 즉위하여 재위 6년 만에 죽고, 삼보 등은 원래 태자였던 무공을 다시 옹립했다.

무공(武公)[편집]

무공 원년, 팽희씨(彭戲氏)를 토벌하기 위해서 화산(華山) 아래에 이르러 평양봉궁(平陽封宮)에 머물렀다.

3년, 삼보 등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출자를 시해했기 때문이다. 정(鄭)나라 고거미(高渠眯)가 자기 국군인 소공(昭公)을 시해했다.

10년, 규(邽)와 기(冀) 지역의 융을 토벌하고, 처음으로 현(縣)을 두었다.

11년, 처음으로 두(杜)와 정(鄭) 지역을 현으로 삼았고, 소괵(小虢)을 멸했다.

13년, 제나라 사람 관지보(管至父)와 연칭(連稱) 등이 자기들 국군인 양공(襄公)을 죽이고 공손무지(公孫無知)를 세웠다. 진(晉)나라는 곽(霍), 위(魏), 경(耿)을 멸망시켰다. 제나라의 옹름(雍廩)이 무지(無知)와 관지보 등을 죽이고 제 환공을 세웠다. 제나라와 진나라가 강국이 되었다.

19년, 진나라의 곡옥(曲沃)이 처음으로 진후(晉侯)가 되었고, 제 환공이 견(鄄)에서 제후의 우두머리인 방백(方伯)이 되었다.

20년, 무공이 죽어 옹읍(雍邑)의 평양에 안장했다. 처음으로 사람을 산채로 묻는 순장(殉葬)을 했는데, 순장한 사람이 모두 66명에 이르렀다.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을 백(白)이라 했다. 백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평양에 봉해졌으며, 무공의 동생인 덕공(德公)이 자리에 올랐다.

덕공(德公)[편집]

덕공 원년, 처음으로 옹성의 대정궁(大鄭宮)에 거주했다. 소, 양, 돼지의 희생을 각각 300마리 올려, 부치(鄜畤)에서 천지에 제사 드렸다. 옹성에서 거주하는 것이 적합한가를 점치니, "후대 자손들은 황하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게 될 것이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해 양백(梁伯)과 예백(芮伯)이 와서 조회했다.

2년, 처음으로 복날을 정해, 개를 잡아서 열독(熱毒)을 제거했다. 덕공은 33세에 자리에 올랐으나 2년 만에 죽었다. 아들 셋을 낳았다. 큰아들이 선공(宣公), 둘째 아들은 성공(成公), 막내아들이 목공(繆公)이다. 큰아들 선공이 뒤를 이었다.

선공(宣公)[편집]

선공 원년, 위(衛)나라와 연(燕)나라가 주를 공격해 혜왕(惠王)을 내쫓고 왕자 퇴(穨)를 세웠다. 3년, 정백(鄭伯)과 괵숙(虢叔)이 왕자 퇴를 죽이고 다시 혜왕을 맞아들였다. 4년, 밀치(密畤, 제천단)를 세웠고, 진(晉)과 하양(河陽)에서 싸워서 이겼다. 12년, 선공이 죽었다. 선공은 아들을 아홉이나 두었지만, 모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선공의 동생인 성공을 세웠다.

성공(成公)[편집]

성공 원년, 양백과 예백이 조회했다. 제 환공은 산융(山戎)을 토벌하고 고죽(孤竹)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성공은 재위 4년 만에 죽었다. 성공은 아들 일곱을 두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동생인 목공(繆公)을 세웠다.

목공(繆公)[편집]

목공 임호(任好) 원년(기원전 659년), 목공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모진(茅津)을 토벌해 승리했다. 4년, 목공이 진(晉)나라에서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그녀는 진의 태자 신생(申生)의 누이였다. 이해 제 환공은 초나라를 정벌하러 나서 소릉(邵陵)에 이르렀다.

5년, 진(晉) 헌공(獻公)이 우(虞)나라와 괵(虢)나라를 멸망시키고 우의 국군과 대부 백리 혜(百里傒)를 포로로 잡아왔다. 백옥(白玉)과 좋은 말을 우의 국군에게 뇌물로 주었기 때문이다. 백리혜를 포로로 잡아온 다음 딸을 목공에게 시집보낼 때 종으로 딸려 보냈다. 백리혜는 진(秦)나라로 오던 중 완(宛)으로 도망쳤다가 초나라 변경 사람에게 잡혔다. 백리혜가 어질다는 것을 안 목공은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데려오려고 했으나 초나라 사람이 내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초나라에 사람을 보내 “나의 잉신(媵臣, 예물로 딸려온 신하)인 백리혜가 거기에 있는데, 검정 숫양의 가죽 다섯 장을 몸값으로 치르고자 한다”라고 전하게 했다. 초나라 사람이 이를 받아들여 백리혜를 내주었다. 이때 백리혜의 나이는 70이 넘었다. 목공은 백리혜를 풀어주고 그와 함께 국사를 의논하려 했다. 백리혜는 사양하며 “저같이 망한 나라의 신하에게 무엇을 물으신단 말입니까”라 했다. 목공은 “우나라 국군이 그대를 기용하지 않아서 망한 것이지 그대 죄가 아니잖소”라며 한사코 질문을 했는데 사흘을 나누었다. 목공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국정을 맡기고 오고대부(五羖大夫)로 부르려 했다. 백리혜는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은 신의 친구인 건숙(蹇叔)만 못합니다. 건숙이 현명한데도 세상은 모릅니다. 신이 일찍이 벼슬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제나라에서 곤경에 빠져 질(絰)이란 곳의 사람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건숙이 신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제가 제나라 국군 무지(無知)를 섬기려하자 건숙이 말렸습니다. 이 덕분에 신은 제나라의 난리에서 벗어나 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주의 왕자 퇴(穨)가 소를 좋아한다기에 신은 소 기르는 재주로 만남을 청했습니다. 퇴가 신을 기용하려고 했으나 건숙이 신을 말려서 떠나는 바람에 죽지 않았습니다. 우나라의 국군을 섬기려 할 때도 건숙이 신을 말렸습니다. 신은 우나라 국군이 신을 기용하지 않으리라는 알았지만 녹봉과 자리가 탐나 잠시 머물렀습니다. 두 번은 그의 말을 들어서 재난에서 벗어났고, 한 번은 듣지 않아서 우나라에서 재난을 당했습니다.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현명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목공은 사람을 보내 후한 예물을 갖추어 건숙을 맞아들여 상대부(上大夫)에 임명했다.

가을, 목공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진(晉)나라 정벌에 나서 하곡(河曲)에서 싸웠다. 진나라의 여희(驪姬)가 난을 일으키는 통에 태자 신생이 신성(新城)에서 죽었고,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는 도망했다.

9년, 제나라 환공이 규구(葵丘)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

진나라 헌공이 죽고 여희의 아들 해제(奚齊)를 세웠으나 그의 신하인 이극(里克)이 해제를 죽였다. 순식(荀息)이 탁자(卓子)를 세웠으나 이극이 또 탁자와 순식을 죽였다. 이오는 진(秦)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진(晉)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목공은 이를 받아들여 백리혜에게 군대를 이끌고 이오를 호송하게 했다. 이오는 “내가 자리에 오른다면 우리 진(晉)나라 하서(河西) 지역의 성 여덟 개를 주겠소”라 했다. 이오는 귀국하여 즉위한 후, 비정(丕鄭)을 진나라에 보내어 감사의 뜻을 전했지만 약속을 어기고 하서 지역의 성을 주지 않았다. 이오는 이극을 죽였다. 비정은 이를 듣고는 겁이 나서 목공과 대책을 논의했다.

“진(晉)나라 사람들은 이오가 아니라 사실은 중이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 진(秦)나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이극을 죽인 것은 모두 여생(呂甥)과 극예(郤芮)의 계략입니다. 국군께서는 재물로 이들을 급히 불러들이고 다시 중이를 입국시키는 것을 좋을 것입니다.”

목공이 이를 허락하고 사신과 비정을 돌려보내 여생과 극예를 급히 소환했다. 여생과 극예 등은 비정이 이간질을 한다고 의심하여 이를 이오에게 보고한 다음 비정을 죽였다. 비정의 아들 비표(丕豹)가 진(秦)나라로 도망와서 목공에게 “진(晉)나라 국군은 도리를 몰라 백성들이 멀리 합니다. 정벌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목공은 “백성이 정말 탐탁지 않게 여긴다면 어찌 대신을 죽일 수 있는가? 자기 신하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백성이 협조하기 때문 아닌가”라며 비표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몰래 비표를 기용했다.

12년, 제나라의 관중(管中)과 습붕(隰朋)이 죽었다.

진(晉)나라가 가뭄이 들자 식량을 요청해왔다. 비표는 목공에게 식량을 주지 말고 굶주림을 틈타 정벌하라고 했다. 목공이 공손지(公孫支)에게 물으니 공손지는 “기근과 풍년은 번갈아 일어나는 일이니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백리혜에게 물으니 백리혜는 “이오가 국군(목공)께 죄를 진 것이지 그의 백성이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답했다. 그리하여 백리혜와 공손지의 말에 따라 식량을 내주었다. 배와 수레로 운반했는데 옹(雍)에서 강(絳)까지 이어졌다.

14년, 진(秦)나라에 기근이 들어 진(晉)나라에 식량을 요청했다. 진나라 국군이 신하들과 이 일을 상의했다. 괵석(虢射)이 “기근을 틈타 토벌하면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자 진나라 국군이 그 말을 따랐다. 15년, 진나라 국군이 군대를 일으켜서 진(秦)나라를 공격했다. 목공도 군대를 동원하여 비표를 장수로 삼아 몸소 공격에 나섰다. 9월 임술일, 진나라 혜공 이오와 한나라 땅에서 싸웠다. 진나라 국군은 자신의 군대를 뒤에 남겨둔 채, 목공의 군대와 재물을 다투고 돌아오다 말의 발이 묶여 나아가지 못했다. 목공과 그의 부하가 진나라 국군을 추격했으나 잡지 못하고 도리어 진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했다. 진나라 군사들이 목공을 공격하니 목공이 부상을 당했다.

이때 기산 아래에서 목공의 좋은 말을 훔쳐서 잡아먹었던 300명의 백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나라 군대로 돌진하여 포위를 풀었다. 목공는 위기에서 벗어나 거꾸로 진나라 국군을 사로잡았다. 예전에 목공이 좋은 말을 잃은 적이 있는데, 기산 아래 촌사람들이 말을 잡아서 300여명에게 먹였다. 관리가 이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려고 하자 목공은 “군자는 짐승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듣기에 좋은 말고기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사람이 상한다고 했다”라면서 모두에게 술을 내리고 용서해주었다. 이들 300명은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목공을 따르던 중 목공이 궁지에 몰리자 너나할 것 없이 무기를 들고 필사적으로 싸워 말을 잡아먹고도 용서를 받은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이에 목공은 진나라 국군을 포로로 잡아 돌아와서는 전국에 “모두들 목욕재계하라. 내가 진나라 국군을 제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릴 것이다”라고 명했다. 주 천자가 이 소식을 듣고는 “진나라는 우리와 같은 성의 나라이다”며 진나라 국군을 위해 용서를 청했다.

이오(진나라 국군 혜공)의 누이가 목공의 부인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상복을 입고 맨발로 달려와 “소첩이 평소 형제를 제대로 가르치지 군주로 하여금 이런 치욕스러운 명을 내리게 했습니다”라고 했다. 목공이 “내가 진나라 국군을 잡아 공을 이루나 했는데 지금 천자는 용서를 청하고 부인은 걱정을 하는구려”라고 말한 뒤 진나라 국군과 맹서를 한 다음 그를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했다. 다시 숙소를 좋은 곳으로 옮기게 하고 소, 양, 돼지 각각 일곱 마리씩을 보내주었다. 11월, 진나라 국군 이오를 돌려보냈고, 이오는 하서 지역을 바치는 한편 태자 어(圉)를 진나라에 인질로 배냈다. 진나라는 종실의 딸을 어의 아내로 삼게 했다. 이 무렵 진나라의 땅은 동쪽으로 황하에까지 이르렀다.

18년, 제 환공이 죽었다. 

20년, 진(秦)나라가 양(梁)과 예(芮)를 멸망시켰다.

22년, 진(晉)나라 공자 어가 진나라 국군의 병 소식에 “양(梁)은 우리 어머니의 나라인데 진(秦)나라가 멸망시켰다. 나한테는 형제가 많아 국군이 돌아가시면 진(秦)나라가 틀림없이 나를 억류할 것이고, 진(晉)나라도 나를 업수이 여겨 다른 아들로 바꾸어 세울 것이다”라 하고는 도망쳐서 진(晉)나라로 돌아갔다. 

23년, 진 혜공이 죽고 자어가 국군이 되었다. 진(秦)나라는 어가 도망친 것을 원망하며 초나라에서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를 맞아들이고 어의 아내를 (중이에게) 아내로 삼게 했다. 중이가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나중에는 받아들였다. 목공은 더욱 후한 예물로 중이를 예우했다. 

24년 봄, 진(秦)나라가 사신을 보내 진(晉)나라의 대신들에게 중이를 귀국시키겠다고 알리자, 진(晉)나라가 이를 받아들여 중이를 호송했다. 2월, 중이가 진나라 국군으로 즉위하니 그가 문공(文公)이다. 문공은 사람을 시켜 자어를 죽였다. 자어가 바로 회공(懷公)이다.

그해 가을, 주 양왕(襄王)의 동생 대(帶)가 적(翟)의 군대로 양왕을 공격하자, 양왕은 도망해 정(鄭)나라에 머물렀다. 25년, 주 양왕이 사신을 보내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에 난리가 났음을 알렸다. 진 목공은 군대를 내어 진 문공을 도와서 양왕을 귀국시키고 양왕의 동생 대를 죽였다. 28년, 진 문공이 성복(城濮)에서 초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30년, 목공이 진 문공을 도와 정나라를 포위했다. 정나라가 목공에게 사신을 보내 “정나라가 망하면 진(晉)나라가 강대해지므로 진(晉)나라에는 득이 되지만 진(秦)나라에는 이익이 없습니다. 진(晉)나라의 강함은 진(秦)나라의 걱정입니다”라고 하자 목공이 곧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진(晉)나라도 군대를 철수시켰다. 32년 겨울, 진(晉) 문공이 죽었다.

정나라 사람이 진(秦)나라에 정나라를 팔아넘기면서 “내가 성문을 주관하고 있으니 정나라를 습격할 수 있다”고 했다. 목공이 백리혜와 건숙에게 물으니 “여러 나라를 거쳐 천리 길을 넘어 습격하는 일은 득이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누군가 정나라를 팔아넘기려는 것이라면 우리 쪽 사람이 우리 정세를 적에다 고하지 말라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안 될 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목공은 “그대들은 모르오. 내가 이미 결정했소이다”라 하고는 군대를 발동시켰다. 백리혜의 아들 맹명시(孟明視), 건숙의 아들 서기술(西乞秫)과 백을병(白乙丙)에게 군사를 이끌게 했다. 떠나는 날, 백리혜와 건숙 두 사람이 통곡을 했다. 목공이 이를 알고는 노하여 “내가 출병하는데 그대들은 통곡을 하며 군심을 흩어놓다니 왜 그러오”라고 했다. 두 노인은 “신들이 어찌 감히 국군 군대의 군심을 흩으려 하겠습니까? 군대가 움직이면 신들의 자식들도 가게 되는데 말입니다. 신들은 늙어서 자식들이 늦게 돌아오면 서로 볼 수 없을까 걱정이 되어 우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했다. 두 노인이 물러나와 그 자식들에게 “너희 군대가 패한다면 틀림없이 효산(殽山)의 험난한 요충지일 것이다”라 했다. 

33년 봄, 진나라 군대는 동쪽을 나와 진(晉)나라를 거쳐 주의 도성 북문을 지났다. 주 왕손만(王孫滿)은 “진(秦)나라 군사들이 무례한 걸 보니 분명 패할 것이다”라고 했다. 진나라 군대가 활(滑)에 도착했을 때, 정나라의 상인 현고(弦高)가 소 열두 마리를 끌고 주로 팔러 가다가 진나라 군대를 보고는 죽거나 포로가 될까 두려워서 자기 소를 바치면서 “듣기에 큰나라가 정나라를 토벌한다 하여 정나라 국군이 방비를 단단히 하고는 신에게 이 소 열두 마리로 병사들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진나라의 세 장군이 서로에게 “정나라를 습격한다는 정나라가 이미 알아챘으니 가봤자 얻을 게 없을 것 같소”라 하고는 활을 멸망시켰다. 활은 진(晉)나라 변경의 읍이다.

이때 진 문공이 죽었으나 장사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 태자 양공이 성을 내며 “진(秦)나라는 아비 잃은 나를 능멸하는구나. 상중을 틈타 우리 활을 깨부다니”라 하고는 상복을 검게 물들이게 한 다음 군대를 이끌고 효산에서 진(秦)나라 군사를 막아 공격을 가하여 대파하니 한 사람도 도망치지 못했다. 진(晉)은 진(秦)의 세 장군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문공의 부인은 진(秦)나라 여자였기에 포로로 잡혀 온 진(秦)의 세 장수를 위하여 “목공이 이 세 사람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사무쳐 있을 것이니, 이들을 돌려보내 우리 국군(목공)으로 하여금 직접 삶아 죽이게 하시지요”라고 청했다. 진(晉)의 국군이 이를 허락하여 세 장수를 진(秦)으로 돌려보냈다. 세 장수가 오자 목공은 소복을 입고 교외로 나가 세 사라믈 맞이하면서 “내가 백리혜와 건숙의 말을 듣지 않아 세 사람이 굴욕을 당했다. 세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대들은 설욕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하라”며 통곡했다. 세 사람의 관직과 녹봉을 전처럼 회복시키고 더욱 후하게 대했다.

34년, 초나라 태자 상신(商臣)이 아버지 성왕(成王)을 시해하고 왕 자리에 올랐다. 이 무렵 목공은 다시 맹명시 등에게 군대를 이끌고 진(晉)을 공격하게 하여 팽아(彭衙)에서 교전했다. 진(秦)나라 군대는 전세가 불리하자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왔다.

융(戎)의 왕이 유여(由余)를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유여는 그 선조가 융으로 망명한 진(晉)나라 사람이었기에 진나라 말을 할 줄 알았다. (융왕은) 목공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유여를 보내 진(秦)나라를 살피게 한 것이다. 진 목공은 궁실과 쌓아 놓은 재물을 보여주었다. 유여는 “귀신에게 이렇게 만들아 하여도 힘들어 할텐데 사람에게 하라 하면 인민들이 일들 것입니다”라고 했다. 목공이 괴이하게 여겨 “중국은 시(詩), 서(書), 예(禮), 악(樂), 법도(法度)로 나라를 다스리지만 늘 수시로 혼란이 일어난다. 지금 융은 이런 것들이 없는데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나? 어렵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유여는 웃으며 “그것이 바로 중국이 혼란스러운 이유입니다. 무릇 저 옛날 성인 황제(黃帝)께서 예악과 법도를 만들어 몸소 앞장섰기에 겨우 다스려진 것입니다. 그 후세는 날로 교만하고 음탕해져 법도의 위세만 믿고 아랫사람을 문책하고 감독하니 아랫사람은 극도로 피폐해져 윗사람이 인의가 없다고 원망합니다. 상하가 서로 다투고 원망하며 서로 죽이니 종족이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융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는 덕으로 아래를 대하고, 아래는 충성과 믿음으로 위를 모시니 한 나라의 정치가 한 사람을 다스리는 것 같으니, 어떻게 다스려지는 지도 모르게 다스려지는 것 이것이 진짜 성인의 다스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목공은 물러나 내사(內史) 왕료(王廖)에게 “내 듣기에 이웃 나라에 성인이 있으면 적국으로서는 걱정거리라 하오. 지금 유능한 유여 때문에 과인이 걱정이오.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물었다. 내사 왕료는 “융왕은 후미진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음악은 모를 겁니다. 국군께서 시험삼아 춤과 노래에 뛰어난 미녀들을 보내 그 의지를 꺾어 보십시오. 그리고 유여를 더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그들 사이가 멀어지게 하십시오. 유여를 돌아가지 못하게 체류시켜 놓으면 시기를 놓치게 되고, 그러면 융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유여를 의심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군주와 신하 사이에 틈이 생기면 그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융왕이 음악에 빠지면 정사를 게을리 할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목공은 “좋다”고 하였다. 이에 목공은 유여를 나란히 자리에 앉히고 같은 그릇에 음식을 먹게 하면서 융의 지형과 병력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그런 다음 내사 왕료에게 가무에 능한 16명의 기녀를 융왕에게 보내라고 명령했다. 기녀들을 받은 융왕은 무척 기뻐하며 한 해가 다가도록 쾌락에서 헤날 줄 몰랐다. 이때 진(秦)나라는 유여를 돌려보냈다. 유여는 여러 차례 융왕에게 충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목공은 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유여를 이간하니 유여는 마침내 융왕을 떠나 진(秦)나라에 투항했다. 목공은 빈객에 대한 예우로써 그를 우대하고 융을 정벌할 형세에 대해 물었다.

36년, 목공은 맹명시 등을 더욱 후하게 우대하고 그들에게 군대를 이끌고 진(晉)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황하를 건넌 다음 타고 온 배를 태워버리더니,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여 왕관(王官)과 교(鄗)를 빼앗아 효산(殽山)에서의 패전을 설욕했다. 진(晉)나라 사람들은 모두 성을 지키며 감히 나와지 못했다. 이에 목공은 모진(茅津)에서 황하를 건너 효산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서 봉분을 쌓아 장례를 치르고 3일 동안 곡을 했다. 그리고는 군사들에게 “아, 병사들이여! 조용히 내 말을 잘 들어보라. 내가 너희에게 맹세하겠다. 옛사람들은 일을 꾀할 때 백발노인과 의논하였기에 잘못이 없었다”라고 맹서했다. 그 때 건숙과 백리해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은 것을 깊이 반성하며 이렇게 맹서함으로써 후세에 자신의 과실을 기억하게 한 것이다. 군자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 “오호! 진 목공이 사람을 두루 잘 대했기에 결국 맹명시의 경사가 있었던 것이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37년, 진은 유여의 계책을 받아들여 융왕을 토벌하고 12개의 나라를 합병하여 천 리에 이르는 땅을 넓히니 마침내 서융 지역의 패주가 되었다. 주 천자는 목공에게 소공(召公) 과(過)를 보내 축하하며 쇠북을 선물했다. 39년, 목공이 죽자 옹(雍)에 안장했다. 177명을 순장했는데, 진(秦)나라의 좋은 신하였던 엄식(俺息), 중항(仲行), 침호(鍼虎)라는 자여씨(子輿氏) 세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애도하며 ‘황조(黃鳥)’라는 시를 지어 노래했고, 군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진 목공이 땅을 넓히고 나라를 늘렸다. 동쪽으로는 강력한 진(晉)나라를 굴복시켰고, 서쪽으로는 융 지역을 제패했다. 그럼에도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죽은 뒤 백성을 돌보지 않고 좋은 신하들을 순장시켰으니 말이다. 그의 선왕들은 세상을 떠날 때 좋은 제도와 법을 남기려 했거늘, 하물며 착한 사람과 좋은 신하를 산 채로 죽였으니 백성들이 그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겠는가? 이로써 진나라가 더는 동방을 정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겠노라.”

목공에게는 아들이 40명 있었다. 태자 앵(罃)이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가 강공(康公)이다.

강공(康公)[편집]

강공 원년(기원전 620년), 한 해 전 목공이 죽었을 때, 진(晉)나라 양공도 죽었다. 양공의 동생 옹(雍)은 진(秦)나라 여자의 소생으로 진(秦)나라에서 살았다. 진(晉)나라의 조순(趙盾)이 그를 옹립하기 위해서 수회(隨會)를 보내 맞아들이니 진(秦)나라는 군대를 보내 영호(令狐)까지 호송했다. 그러나 진(晉)나라는 양공의 아들을 옹립하고 도리어 진(秦)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진(秦)나라 군대는 패했고, 수회는 도망쳐 왔다. 

2년, 진(秦)나라가 진(晉)나라를 공격해 무성(武城)을 뺏암으로써 영호(令狐)에서의 패배를 되갚았다. 4년, 진(晉)나라가 진(秦)나라를 공격해 소량(少梁)을 빼앗았다. 

6년, 진(秦)나라가 진(晉)나라를 공격해 기마(羈馬)를 빼앗고 하곡(河曲)에서 맞붙어 싸워 진(晉)의 군대를 대파했다. 진(晉)나라 사람들은 수회가 진(秦)나라에서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 위수여(魏讐餘)로 하여금 거짓으로 진(晉)나라를 배반한 것처럼 꾸며서 수회를 만나 함께 진(晉)나라로 돌아갈 계획을 논의하게 했다. 수회는 마침내 진(晉)나라로 돌아왔다. 강공은 재위 12년 만에 죽고, 아들 공공(共公)이 즉위했다.

공공(共公)[편집]

공공 2년, 진(晉)나라의 조천(趙穿)이 자신의 국군 영공(靈公)을 시해했다.

3년, 초나라 장왕(莊王)이 강력한 군대로 북으로 진격하여 낙읍(洛邑)에까지 이르러 주의 구정(九鼎)에 대해 물었다.

공공이 재위 5년 만에 죽고, 아들 환공(桓公)이 즉위했다.

환공(桓公)[편집]

환공 3년, 진(晉)이 우리 진(秦)나라 장수 한 명을 잡아갔다. 

10년, 초나라 장왕이 정나라를 정복하고, 북쪽 황하 근처에서 진(晉)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당시 초나라는 패주로서 제후를 불러 모아 회맹(會盟)했다. 

24년, 진(晉)나라 여공(厲公)이 막 즉위하여 진(秦)나라 환공과 황하를 사이에 두고 회맹했다. 돌아와 진(秦)나라는 맹약을 배반하고 적(翟)과 함께 진(晉)나라를 공격했다. 

26년, 진(晉)나라가 제후를 이끌고 진(秦)나라를 정벌했다. 진(秦)나라 군대가 패하여 달아나자 경수(涇水)까지 뒤쫓은 다음 돌아갔다. 환공이 재위 27년 만에 죽고 아들 경공(景公)이 즉위했다.

경공(景公)[편집]

경공 4년, 진(晉)나라의 난서(欒書)가 자신의 국군인 여공(厲公)을 시해했다. 15년,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나서 역(櫟)에서 진(晉)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이 무렵 진(晉)나라 도공(悼公)이 맹주가 되었다. 

18년, 진(晉)나라 도공이 강력해져 여러 차례 제후와 회맹하고 그들을 이끌고 진(秦)나라를 공격해 진(秦)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 진(秦)나라 군대가 달아나자 진(晉)나라 병사는 이들을 뒤쫓아 경수를 건너서 역림(棫林)까지 갔다가 돌아갔다. 

27년, 경공이 진(晉)나라로 가서 평공(平公)과 회맹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또 배신했다. 

36년, 초나라의 공자 위(圍)가 초왕을 시해하고 자립하니 이가 영왕(靈王)이다. 

경공의 친동생 후자침(后子鍼)은 총애를 받고 부를 누렸다. 누군가 그를 모함하자 죽지는 않을까 두려워 진(晉)나라로 달아났는데 수레가 천 대나 되었다. 진(晉)나라 평공(平公)이 “후자침 당신은 이렇게 부유한데 왜 도망쳤는가”라고 물었다. 후자침은 “진(秦)나라 국군이 무도하여 죽임을 당할까 겁이 났습니다.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갈까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39년, 초나라 영왕이 강력해져 신(申)에서 제후와 회맹하고 맹주가 되어 제나라의 경봉(慶封)을 죽였다. 경공은 재위 40년 만에 죽고 아들 애공(哀公)이 즉위했다. 후자침은 다시 진(秦)나라로 돌아왔다.

애공(哀公)[편집]

애공 8년, 초나라 공자 기질(棄疾)이 영왕을 시해하고 자립하니 이가 평왕(平王)이다. 

11년, 초나라 평왕이 사람을 보내 진(秦)나라 여자를 구해 태자 건(建)의 아내로 삼고자 했다. 자기 나라에 도착한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는 자기가 취했다. 

15년, 초나라 평왕이 태자 건을 죽이려 하자 건이 달아났다. 오자서(伍子胥)가 오(吳)나라로 달아났다. 진(晉)나라 공실이 쇠약해지고 육경(六卿)이 강해져 안으로 서로 싸우는 바람에 진(秦)과 진(晉) 두 나라가 한동안 서로를 공격하지 않았다. 

31년, 오나라 왕 합려(闔閭)와 오자서가 초나라를 정벌했다. 초나라 왕은 수(隨)로 달아났고, 오나라는 마침내 영(郢)에 입성했다. 초나라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진秦에) 와서 위급함을 알리며 7일 동안 먹지 않고 밤낮으로 통곡했다. 이에 진(秦)나라는 전차 500대를 보내 초나라를 구하고 오나라 군대를 패퇴시켰다. 오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초나라 소왕(昭王)은 다시 영으로 돌아왔다. 

애공이 재위 36년 만에 죽었다. 태자 이공(夷公)이 일찍 죽어 즉위하지 못했고, 이공의 아들이 즉위하니 이가 혜공(惠公)이다.

혜공(惠公)[편집]

혜공 원년, 공자(孔子)가 노나라에서 재상 직무를 대행했다.

5년, 진(晉)나라의 경 중항씨(中行氏)와 범씨(范氏)가 배반했다. 지씨(智氏)와 조간자(趙簡子)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자, 범씨와 중항씨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혜공이 재위 10년 만에 죽고, 아들 도공(悼公)이 즉위했다.

도공(悼公)[편집]

도공 2년, 제나라 신하인 전기(田乞)가 자신의 국군 유자(孺子)를 시해하고, 유자의 형 양생(陽生)을 세우니 그가 도공(齊悼公)이다. 

6년, 오나라기 제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제나라 사람들이 도공을 시해하고 그의 아들 간공(簡公)을 세웠다. 

9년, 진(晉)나라 정공(定公)과 오왕 부차(夫差)가 회맹하여 황지(黃池)에서 맹주를 다툰 끝에 오왕이 먼저 되었다. 오나라가 강성해지자 중국을 무시했다. 

12년, 제나라 전상(田常)이 간공을 시해한 다음 그 동생 평공(平公)을 세우고 장 자신은 재상이 되었다. 

13년,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진(秦)나라 도공은 재위 14년 만에 죽고, 아들 여공공(厲共公)이 즉위했다. 공자가 도공 12년에 죽었다.

여공공(厲共公)[편집]

여공공 2년, 촉(蜀)의 사람들이 와서 재물을 바쳤다. 

16년, 황하 주변에 참호를 팠다. 병사 2만으로 대려(大荔)를 토벌하여 왕성(王城)을 빼앗았다. 

21년, 처음으로 빈양(頻陽)에 현을 설치했다. 진(晉)나라가 무성(武成)을 빼앗았다. 

24년, 진(晉)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지백(智伯)을 죽이고, 지백의 땅을 조씨(趙氏), 한씨(韓氏), 위씨(魏氏)가 나누어 가졌다. 

25년, 지개(智開)가 읍 사람들과 함께 진(秦)나라로 도망쳐 왔다. 

33년, 의거(義渠)를 토벌하여 그 왕을 포로로 잡았다. 

34년, 일식이 있었다. 여공공이 죽고 아들 조공(躁公)이 즉위했다.

조공(躁公)[편집]

조공 2년, 남정(南鄭)이 반란을 일으켰다. 

13년, 의거가 공격해 와서 위수(渭水) 남쪽에 이르렀다. 

14년, 조공이 죽고 그 아우 회공(懷公)이 즉위했다.

회공(懷公)[편집]

회공 4년, 서장(庶長) 조(鼂)가 대신들과 함께 회공을 포위하자 회공이 자살했다.

회공의 태자 소자(昭子)는 일찍 죽었기 때문에 대신들이 태자 소자의 아들을 세웠다. 이가 영공(靈公)이다. 영공은 회공의 손자이다.

영공(靈公)[편집]

영공 6년, 진(晉)나라가 소량(少梁)에 성을 쌓자 진(秦)나라 군대가 공격했다. 

13년, 진(秦)나라가 적고(籍姑)에 성을 쌓았다. 영공이 죽었으나 그 아들 헌공(獻公)이 즉위하지 못하고 막내 숙부 도자(悼子)가 즉위했다. 이가 간공(簡公)이다. 간공은 소자의 동생이며 회공의 아들이다.

간공(簡公)[편집]

간공 6년, 관리에게 처음으로 칼을 차게 했다. 낙수(洛水) 근처에 참호를 만들었다. 중천(重泉)에 성을 쌓았다.

16년, (간공이) 죽고 그 아들 혜공(惠公)이 즉위했다.

혜공(惠公)[편집]

혜공 12년, 아들 출자(出子)가 태어났다. 

13년, 촉(蜀)을 공격하여 남정을 빼앗았다. 혜공이 죽고 출자가 즉위했다.

출자(出子)[편집]

출자 2년, 서장(庶長) 개(改)가 영공의 아들 헌공을 하서(河西)에서 맞아들여 세우고 출자와 그 어머니를 죽인 다음 연못에 버렸다.

진(秦)나라는 전부터 자주 왕을 바꾸어 군신이 화목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진(晉)나라가 다시 강대해져 진(秦)나라의 하서 지역을 빼앗았다.

헌공(獻公)[편집]

헌공 원년, 순장제도를 폐지했다. 

2년, 역양(櫟陽)에 성을 쌓았다. 

4년 정월 경인일에 효공(孝公)이 태어났다.

11년, 주의 태사(太史) 담(儋)이 헌공에게 인사를 드리러 와서 “주는 옛날 진(秦)과 합쳐졌다가 나누어졌고, 나뉜지 500녀 뒤에 다시 합쳐질 것인데, 합친 지 17년 뒤에 패왕이 출현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16년, 겨울에 복숭아꽃이 피었다. 

18년, 역양에 금싸라기 비가 내렸다. 

21년, 진(晉)나라와 석문(石門)에서 싸워 6만 명의 목을 베니, 천자가 수놓은 예복을 보내어 축하했다. 

23년, 위진(魏晉, 위나라)과 소량에서 싸워서 그 장수 공손좌(公孫痤)를 포로로 잡았다. 

24년, 헌공이 죽고 그 아들 효공(孝公)이 즉위하니 그의 나이 21세였다.

효공(孝公)[편집]

효공 원년, 황하와 효산 동쪽의 여섯 강국인 제나라 위왕(威王), 초나라 선왕(宣王), 위나라 혜왕(惠王), 연나라 도후(悼侯), 한나라 애후(哀侯), 조나라 성후(成侯)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회하(淮河)와 사수(泗水) 사이에는 10여 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초나라와 위나라는 진나라와 가까이 붙어 있었다. 위나라가 장성을 쌓았다. 장성은 정현(鄭縣)에서 시작하여 낙수(洛水)를 따라 북으로 상군(上郡)에 이르렀다. 초나라는 한중(漢中)에서부터 남쪽으로 파(巴)와 검중(黔中)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 왕실이 쇠약해지자 제후들이 힘으로 서로를 정벌하여 합병하기 위해 다투었다. 진(秦)나라는 구석진 옹주(雍州)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제후들과 회맹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 효공은 이에 은혜를 베풀고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며, 전사를 모으고 논공행상을 분명히 했다. 나라에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옛날 우리 목공께서는 기산(岐山)과 옹읍(雍邑) 사이에서 덕을 닦고 무를 떨쳤다. 동으로 진(晉)나라의 내란을 평정하여 황하를 경계로 삼았다. 서로는 융적을 제패하여 땅을 천 리나 넓혔다. 천자가 방백으로 치하하고 제후는 모두 축하를 드렸다. 후세를 위하여 이런 업적을 개척하였으니 정말 빛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지난 여공(厲公), 조공(躁公), 간공(簡公), 출자(出子) 때는 안녕하지 못하고 나라에 우환이 겹쳐 바깥 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삼진(三晉)이 우리의 앞선 국군들의 하서 지역을공격하여 빼앗고, 제후들도 진(秦)나라를 깔보니 이보다 더한 치욕은 없었다. 헌공께서 즉위하여 변경을 안정시키고 역양으로 도읍을 옮겨 다스리면서 동쪽을 정벌하여 목공의 옛 땅을 수복하고 목공의 정치와 명령을 되찾으려 했다. 과인은 앞선 국군들의 의지를 생각할 때마다 늘 마음이 아프다. 빈객과 신하들이 진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기이한 계책을 내준다면 내가 높은 관직을 주고 땅을 나누어 줄 것이다.”

이에 군대를 내어 동으로 섬성(陝城)을 포위하고, 서로 융의 원왕(獂王)을 죽였다. 

위앙(衛鞅)이 포고령을 듣고 서쪽으로 와서 진(秦)나라에 들어왔다. 경감(景監)을 넣어 효공을 만나길 원했다.

2년, 주 천자가 제사 고기를 보내왔다.

3년, 위앙이 효공에게 법령을 바꾸고 형벌을 정비하며, 안으로는 농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사들에 대한 상벌을 분명하게 할 것을 제안했고, 효공은 좋다고 했다. 감룡(甘龍)과 두지(杜摯) 등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고, 서로 논쟁을 벌였다. 결국 위앙의 변법이 채용되었으나 백성은 그 법을 힘들어 했다. 3년이 지나서야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이에 위앙을 좌서장(左庶長)으로 삼았다. 이 사적은 「상군열전(商君列傳)」에 있다.

7년, 효공이 위(魏)나라 혜왕(惠王)과 두평(杜平)에서 만났다. 

8년, 위나라와 원리(元里)에서 싸워 승리했다. 

10년, 위앙이 대량조(大良造)가 되어 병사를 이끌고 위나라의 안읍(安邑)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았다. 

12년, 진나라는 함양(咸陽)에 성읍을 조성했다. 궁궐 문들을 세우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작은 마을 여러 개 합쳐 큰 현을 만들고, 현마다 현령을 두었다. 전국에 총 41개 현이 생겼다. 논밭의 경계를 헐고 땅을 개간하니 동쪽으로 영토가 낙수를 넘어섰다. 

14년, 처음으로 새로운 조세제도를 제정했다. 

19년, 주 천자가 방백(제후의 우두머리)으로 삼았다. 

20년, 제후들이 모두 와서 축하를 드렸다. 진이 공자 소관(少官)에게 군대를 이끌고 봉택(逢澤)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천자에게 인사드리게 했다.

21년, 제나라가 마릉(馬陵)에서 위나라를 패배시켰다.

22년, 위앙이 위나라를 공격해 위나라 공자 앙(卬)을 포로로 잡았다. 위앙을 열후(列侯)에 봉하고 상군(商君)이라고 불렀다.

24년, 진(晉, 위나라)과 안문(雁門)에서 싸워 그 장수 위조(魏錯)를 포로로 잡았다.

효공이 죽고 아들 혜문군(惠文君)이 즉위했다.

혜문군(惠文君) - 혜문왕(惠文王)[편집]

(혜문군이) 이해에 위앙을 죽였다. 위앙이 처음 진나라에서 변법을 시행할 때 법이 시행되지 않았는데 태자가 금지령을 어겼다. 위앙은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귀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군께서 법을 반드시 시행하고자 한다면 먼저 태자부터 하십시오. 태자에게 뜸을 들이는 경형을 내릴 수는 없으니 그 사부에게 경형을 내리시십시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법이 크게 시행되고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다스려졌다.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위앙에게 불만이 많던 종실들이 반역으로 몰니 결국 거열형에 처하고 온 나라에 조리를 돌렸다.

혜문군 원년, 초, 한, 조, 촉나라 사람이 와서 인사를 드렸다. 

2년, 주 천자가 축하했다. 

3년, 혜문군이 20세가 되어 관례(冠禮)를 거행했다. 

4년, 주 천자가 문왕과 무왕 제사에 올린 제사 고기를 보내왔다. 제나라와 위나라가 왕이라 칭했다.

5년, 음진(陰晉) 사람 서수(犀首)가 대량조가 되었다. 

6년, 위나라가 음진을 진나라에 바치자 음진을 영진(寧秦)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7년, 공자 앙이 위나라와 싸워 그 장수 용고(龍賈)를 포로로 잡고 8만 명의 목을 베었다.   

8년, 위나라가 하서 땅을 바쳤다. 

9년, 황하를 건너 분음(汾陰)과 피지(皮氏)를 빼앗고, 위나라 왕과과 응(應)에서 회맹했다. 초(焦)를 포위해 항복시켰다.

10년, 장의(張儀)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위나라가 상군(上郡)의 15 현을 진나라에 바쳤다. 

11년, 의거(義渠)를 현으로 만들었다. 초(焦)와 곡옥(曲沃)을 위나라에 돌려주었다. 의거의 군주가 진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소량(少梁)을 하양(夏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2년, 처음으로 12월 납제(臘祭)를 거행했다. 

13년 4월 무오일, 위나라 국군이 왕을 칭하자, 한(韓)나라도 왕을 자칭했다. 장의에게 섬(陜)을 빼앗고 그곳 사람들을 위나라로 내쫓게 했다.

14년(기원전 324년) 이해를 혜문왕 원년으로 바꾸었다. 

2년, 장의가 제나라와 초나라의 대신과 설상(齧桑)에서 회맹했다. 

3년, 한(韓)나라와 위나라의 태자가 와서 조회했다. 장의가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5년, 혜문왕이 북하(北河)까지 순수했다. 

7년, 악지(樂池)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한, 조, 위, 연, 제나라가 흉노와 함께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는 서장(庶長) 질(疾)을 보내어 수어(修魚)에서 싸워 그들의 장수 신치(申差)를 포로로 잡고, 조나라 공자 갈(渴)과 한나라 태자 환(奐)을 물리쳤으며, 8만 2천명의 목을 베었다. 

8년, 장의가 다시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9년, 사마조(司馬錯)가 촉을 정벌해 멸망시켰다. 조나라의 중도(中都)와 서양(西陽)을 빼앗았다. 

10년, 한나라 태자 창(蒼)이 인질로 왔다. 한나라의 석장(石章)을 공격해 빼앗았다. 조나라 장수 이(泥)를 패퇴시키고, 의거의 성 25개를 빼앗았다. 

11년, 저리질(樗里疾)이 위나라의 초(焦)를 공격해 항복시켰다. 안문(岸門)에서 한나라를 패배시키고 1만 명의 목을 베니 그 장수 서수(犀首)가 달아났다. 공자 통(通)을 촉에 봉해졌다. 연나라 국군(왕)이 그 신하 자지(子之)에게 선양(禪讓)했다. 12년, 진나라 왕이 양(위나라) 왕과 임진(臨晉)에서 회맹했다. 서장 질이 조나라를 공격해 조나라 장수 장(莊)을 포로로 잡았다. 장의가 초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13년, 서장 장(章)이 초나라를 단수(丹水) 북쪽에서 공격하여 그 장수 굴개(屈丐)를 포로로 잡고 8만 명의 목을 베었다. 또 초나라의 한중을 공격해 6백 리의 땅을 빼앗고 한중군을 두었다. 초나라가 옹지(雍氏)를 포위하자, 진나라는 서장 질을 보내 한나라를 돕고 동으로 제나라를 공격했으며, 도만(到滿)에게는 위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14년, 초나라를 토벌하여 소릉(召陵)을 빼앗았다. 단(丹)과 여(犁)가 신하가 되었고, 촉나라의 상국인 장(壯)이 촉후(蜀侯)를 죽이고 투항해 왔다.

혜왕이 죽고 아들 무왕(武王)이 즉위했다. 한, 위, 제, 초, 월나라가 모두 진나라에 복종했다.

무왕(武王)[편집]

혜왕이 죽고 아들 무왕(武王)이 즉위했다. 한, 위, 제, 초, 월나라가 모두 진나라에 복종했다.

무왕 원년, 위나라 혜왕(惠王)과 임진에서 회맹했다. 촉나라의 상국인 진장(陳壯)을 죽였다. 장의와 위장(魏章)이 진나라를 떠나서 동쪽 위나라로 갔다. 의거, 단, 여를 토벌했다. 

2년, 처음으로 승상을 두었는데, 저리질과 감무(甘茂)가 각각 좌승상과 우승상이 되었다. 장의가 위나라에서 죽었다. 

3년, 한나라 양왕(襄王)과 임진 밖에서 회맹했다. 남공(南公) 게(揭)가 죽고 저리질이 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무왕이 감무에게 “내가 좁은 길을 길로 다니는 수레를 타고 삼천을 지나 주의 도성 낙양을 구경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 했다. 그해 가을, 감무와 서장 봉(封)을 보내어 의양(宜陽)을 공격하게 했다. 

4년, 의양을 점령하고 6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황하를 건너 무수(武遂)에 성을 쌓았다. 위나라 태자가 와서 조회했다.

무왕은 힘이 세어 힘겨루기를 좋아하여 역사(力士) 임비(任鄙), 오획(烏獲), 맹열(孟說)이 모두 큰 자리에 올랐다. 무왕이 맹열과 세발솥 정(鼎)을 들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8월, 무왕이 죽자 맹열은 멸족당했다. 무왕은 위나라 여자를 왕후로 삼았지만 아들이 없었다.

소양왕(昭襄王)[편집]

무왕의 이복동생이 즉위하니 이가 소양왕(昭襄王)이다. 소양왕의 어머니는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 미씨(羋氏)이며 선태후(宣太后)라고 불렀다. 무왕이 죽을 당시 소양왕은 연나라에 인질로 있었는데 연나라 사람이 돌려보내 즉위했다.

소양왕 원년, 엄군질(嚴君疾)이 승상이 되었다. 감무가 진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다. 

2년, 혜성이 나타났다. 서장 장과 대신, 제후, 공자 등이 반역하자 모두 죽였다. 함께 얽힌 혜문후(惠文后)도 모두 좋게 죽지 못했다. 죽은 무왕(武王)의 왕후는 위나라로 돌아갔다. 

3년, 소양왕이 20세가 되어 관례를 올렸다. 소양왕은 초나라 왕과 황극(黃棘)에서 회맹하야 상용(上庸) 땅을 초나라에 돌려주었다. 

4년에는 포판(蒲阪)을 빼앗았다. 혜성이 나타났다. 

5년, 위나라 왕이 응정(應亭)으로 와서 조회했다. 다시 위나라에 포판을 돌려주었다.  6년, 촉후 휘(煇)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초가 촉을 평정했다. 서장 환(奐)이 초나라를 토벌하고 2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경양군(涇陽君)이 제나라에 인질로 갔다. 일식이 일어나 낮에도 어두웠다. 

7년, 신성(新城)을 점령했다. 저리질이 죽었다. 

8년, 장군 미융(羋戎)에게 초나라를 공격하여 신시(新市)를 빼앗게 했다. 제나라는 장자(章子)를, 위나라는 공손희(公孫喜)를, 한나라는 포연(暴鳶)을 보내 함께 초나라의 방성(方城)을 공격해 당매(唐眛)를 죽였다. 조나라가 중산(中山)을 공격하했다. (중산의) 군주는 달아났다가 결국 제나라에서 죽었다. 위나라 공자 경(勁)과 한나라 공자 장(長)이 제후가 되었다. 

9년, 맹상군(孟嘗君) 설문(薛文, 전문田文)이 진나라에 와서 승상이 되었다. 환이 초나라를 공격해 성 여덟 개를 빼앗고 그 장수 경쾌(景快)를 죽였다. 

10년, 초 회왕(懷王)이 진나라에 와서 조회하자 진나라는 그를 억류했다. 설문이 돈을 뇌물로 받아 면직되고, 누완(樓緩)이 승상이 되었다. 

11년, 제, 한, 위, 조, 송, 중산 다섯 나라가 연합해 진나라를 공격하여 염지(鹽氏)까지 왔다가 철수했다. 진나라는 한나라와 위나라에게 황하 이북 및 봉릉(封陵)의 땅을 주고 강화를 맺었다. 혜성이 또 나타났다. 초 회왕은 조나라로 달아났으나 조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자 다시 진나라로 돌아왔다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초나라로) 돌려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 

12년, 누완이 면직되자 양후(穰侯) 위염(魏冉)이 승상이 되었다. 식량 5만 석을 초나라에 주었다.

13년, 향수(向壽)가 한나라를 정벌하여 무시(武始)를 빼앗았다. 좌경(左更) 백기(白起)가 신성을 공략했다. 오대부(五大夫) 예(禮)가 진나라에서 위나라로 도망쳤다. 임비가 한중의 태수가 되었다. 

14년, 좌경 백기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이궐(伊闕)에서 공격하여 24만 명의 목을 베고 공손희를 포로로 잡았으며, 다섯 개 성을 함락했다. 

15년, 대량조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원(垣)을 빼앗았다가 다시 위나라에 돌려주었다. 초나라를 침공해 완(宛)을 빼앗았다. 

16년, 좌경 사마조가 지(軹)와 등(鄧)을 빼앗았다. 위염이 면직되었다. 공자 불(市)을 완(宛)에, 공자 회(悝)를 등(鄧)에, 위염을 도(陶)에 봉하야 제후로 삼았다. 

17년, 성양군(城陽君)이 입조했고 동주의 군주도 와서 조회했다. 진나라는 원(垣)을 나누어 포판과 피지에 편입시켰다. 진나라 왕이 의양(宜陽)으로 갔다. 

18년, 좌경 사마조가 원(垣)과 하옹(河雍)을 침공해 다리를 끊고 두 지역을 빼앗았다. 19년, 진 소왕(昭王)이 서제(西帝)를, 제 민왕(閔王)이 동제(東帝)를 칭했다가 자로 취소했다. 여례(呂禮)가 스스로 투항해 왔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침공하자 송왕은 위나라로 도망쳤다가 온(溫)에서 죽었다. 임비(任鄙)가 죽었다. 

20년, 진나라 왕이 한중으로 갔다가 다시 상군(上郡)과 북하(北河)로 갔다. 

21년, 좌경 사마조가 위나라 하내(河內)를 침공했다. 위나라가 안읍(安邑)을 진나라에 바치자, 진나라는 안읍의 주민을 내쫓고 진나라 사람들을 모아 하동(河東)으로 옮겨 작위를 주었다. 죄인을 사면하여 이주시키기도 했다. 경양군을 완에 봉했다. 

22년, 몽무(蒙武)가 제나라를 정벌했다. 하동에 아홉 개 현을 두었다. 진나라 왕은 초나라 왕과는 완에서, 조나라 왕과는 중양(中陽)에서 회맹했다.

23년, 도위 사리(斯離)가 삼진(한, 조, 위),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정벌해 제수(濟水) 서쪽에서 격파했다. 진나라 왕은 위나라 왕과는 선양(宣陽)에서, 한나라 왕과는 신성에서 회맹했다. 

24년, 진나라 왕이 언(鄢)과 양(穰)에서 초나라 왕과 회맹했다. 진나라가 위나라 안성(安城)을 빼앗고 대량에 이르자, 연나라와 조나라가 위나라를 구원하러 나섰고 진나라 군대는 철수했다. 위염이 승상에서 면직되었다. 

25년, 조나라 두 개 성을 점령했다. 진나라 왕이 한나라 왕과는 신성에서, 위나라 왕과는 신명읍(新明邑)에서 회맹했다. 

26년, 죄수들을 사면시켜 양(穰)으로 옮겼다. 양후 위염이 다시 승상이 되었다.    27년, 좌경 사마조가 초나라를 공격했다. 죄수들을 사면시켜 남양(南陽)으로 이주시켰다. 백기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대(代)의 광랑성(光狼城)을 빼앗았다. 또 사마조에게 농서(隴西)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촉을 지나 초나라의 검중(黔中)을 공격하게 하여 점령했다. 

28년, 대량조 백기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언(鄢)과 등(鄧)을 빼앗고 죄인들을 사면시켜 이주시켰다. 

29년, 대량조 백기가 초나라를 공걱하여 영(郢)을 빼앗고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초나라 왕은 도망쳤다. 주나라 군주가 진나라에 왔다. 진나라 왕은 초나라 왕과 양릉(襄陵)에서 회맹했다. 백기를 무안군(武安君)에 봉했다. 

30년, 촉의 군수 약(若)이 초나라를 토벌해 무군(巫郡)과 강남(江南)을 점령하고 검중군(黔中郡)을 설치했다. 

31년,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두 개의 성을 빼앗았다. 초나라 사람이 강남에서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32년, 승상 양후가 위나라를 침공하여 대량에까지 이르러 포연(暴鳶)을 무찌르고 4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포연은 달아나고 위나라는 세 개의 현을 바치며 강화를 요청했다. 

33년, 객경(客卿) 호양(胡陽)이 위나라의 권성(卷城), 채양(蔡陽), 장사(長社)를 공걱하여 빼앗았다. 화양(華陽)에서 망묘(芒卯)를 공격하여 물리치고 15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위나라는 남양을 바치며 강화를 청했다. 

34년, 진나라는은 위나라와 한나라에 상용(上庸) 땅을 주어 군 하나를 만들고 항복한 남양 백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35년, 한, 위, 초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했다. 처음으로 남양군(南陽郡)을 설치했다. 

36년, 객경 조(竈)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剛)과 수(壽) 두 곳을 빼앗아 양후에게 주었다. 

38년, 중경(中更) 호양(胡陽)이 조나라의 연여(閼與)를 공격했으나 취하지 못했다.   40년, 태자 도(悼)가 위나라에서 죽어서 돌아오니 지양(芷陽)에 안장했다. 

41년 여름, 위나라를 공격하여 형구(邢丘)와 회(懷)를 빼앗았다. 

42년, 안국군(安國君)이 태자가 되었다. 10월에 선태후가 죽어 지양의 여산(酈山)에 안장했다. 9월에 양후(위염)가 도(陶)로 도망갔다. 

43년, 무안군 백기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9개 성을 함락하고 5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44년, 한나라의 남양을 공격해 빼앗았다. 

45년, 오대부(五大夫) 분(賁)이 한나라를 공격하여 10개 성을 빼앗았다. 섭양군(葉陽君) 괴(悝)가 도성을 떠나서 봉지로 가다가 도착하지 못하고 죽었다. 

47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상당(上黨)을 공격하자 상당이 조나라에 투항했다. 이 때문에 진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가 군대를 내서 진나라를 공격하니 서로 대치했다. 진나라는 무안군 백기를 보내 공격하여 장평(長平)에서 조나라를 대파했다. 40여만 명을 모두 죽였다. 

48년 10월, 한나라가 원옹(垣雍) 땅을 바쳤다. 진나라는 군대를 삼군(三軍)으로 나누었다. 무안군이 돌아왔다. 왕흘(王齕)이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의 피뢰(皮牢)를 공격하여 차지했다. 사마경(司馬梗)이 북으로 태원(太原)을 평정하고, 한나라의 상당을 모두 차지했다. 정월, 군대가 쉬게 하다가 다시 상당 지역에 집결시켰다. 그해 10월, 오대부 능(陵)이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했다. 

49년 정월, 병사를 더 징발하여 능을 돕게 했다. 능이 전투에 서툴러 면직시키고 왕흘로 장수를 대체했다. 그해 10월, 장군 장당(張唐)이 위나라를 공격했다. 채위(蔡尉)가 진지를 지키지 못하고 버리고 돌아오자 목을 베었다. 

50년 10월, 무안군 백기가 죄를 짓자 사병으로 강등시키고 음밀(陰密)로 보냈다. 장당이 정(鄭)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12월, 병사를 더 징발하여 분성(汾城) 부근에 주둔시켰다. 무안군 백기의 죄를 물어 죽였다. 왕흘이 한단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하자 철수하여 분성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로 돌아왔다. 두 달쯤 뒤에 진(晉, 한,조,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6천 명의 머리를 베었고, 황하에 떠다니는 진(晉)과 초(楚)나라 군의 시신이 2만에 이르렀다. 분성을 공격하고 장당을 따라서 영신중(寧新中)을 함락하고, 영신중을 안양(安陽)으로 개명했다. 처음으로 하교(河橋)를 설치했다.

51년, 장군 규(摎)가 한나라를 공격해 양성과 부서(負黍)를 빼앗고 4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조나라를 공격하여 20여 개의 현을 빼앗고 9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서주의 군주가 진나라를 배신하여 제후들과 합종(合縱)해서는 천하의 정예병들을 이끌고 이궐을 나와 진나라를 공격하니 진나라는 양성과 통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진나라는 장군 규에게 서주를 공격하게 했다. 서주의 군주가 진나라로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인정하며 36개 성읍과 3만 명을 바쳤다. 진나라 왕은 바친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를 주나라로 돌려보냈다. 

52년, 주의 인민들이 동쪽으로 도망쳤고, 주의 보물인 구정(九鼎)을 진으로 들여왔다. 주는 이로써 쇠망했다.

53년, 천하가 진나라에 복속해왔다. 위나라가 가장 늦자 진나라는 규를 시켜 위나라를 토벌하여 오성(吳城)을 빼앗았다. 한나라 왕이 입조했고, 위나라 왕도 진나라에 나라를 맡기고 명령을 들었다. 

54년, 진나라 왕은 옹성의 남쪽 교외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올렸다. 

56년 가을, 소양왕이 죽고 아들 효문왕(孝文王)이 즉위했다. (생모) 당팔자(唐八子)를 당태후(唐太后)로 추존하고 선왕(소양왕)과 합장했다. 한나라 왕이 소복을 입고 조문했고, 제후들도 모두 장군이나 승상을 보내 조문 드리고 장례에 참가했다.

효문왕(孝文王)[편집]

효문왕 원년, 죄인을 사면하고 선왕 때의 공신을 표창했다. 친척들을 후대하고 왕가의 원림인 원유(苑囿)를 개방했다.

효문왕이 상을 마치고 10월 기해일에 즉위했으나 3일 만인 신축일에 죽었다. 아들 장양왕(莊襄王)이 즉위했다.

장양왕(莊襄王)[편집]

장양왕 원년, 죄수들을 대대적으로 사면하고 선왕 때의 공신들을 표창했다. 덕을 베풀어 골육들을 대우하고, 인민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동주의 군주가 제후들과 진(나라를 배반하려 하자 진나라는 상국 여불위(呂不韋)를 보내 토벌하고 그 땅을 모조리 편입시켰다. 진나라는 주의 제사를 끊지 않고 양인(陽人) 땅을 주의 군주에게 주어 그 제사를 받들게 했다. 몽오(蒙驁)에게 한나라를 토벌하게 하니 한나라는 성고(成皐)와 공(鞏) 땅을 바쳤다. 진나라 국경이 대량(大梁)에까지 이르니 처음으로 삼천군(三川郡)을 두었다. 

2년, 몽오를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여 태원을 평정했다. 

3년, 몽오가 위나라의 고도(高都)와 급(汲)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조나라의 유차(楡次), 신성(新城), 낭맹(狼孟)을 공격하여 37개 성을 취했다. 

4월, 일식이 있었다. 왕흘이 상당을 공격하여 처음으로 태원군을 설치했다. 위나라의 장수 무기(無忌)가 5개 국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해오자 진나라는 황하 이남으로 물러났다. 몽오가 패하여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5월 병오일, 장양왕이 죽고 아들 정(政)이 즉위하니 이가 진시황제(秦始皇帝)이다.

진시황제(秦始皇帝)[편집]

진왕 정이 즉위 26년에 처음으로 천하를 병합하여 36개 군을 두고 시황제라 칭했다. 시황제가 51세에 세상을 뜨고 아들 호해(胡亥)가 즉위하니 이가 2세 황제이다. 

3년, 제후들이 일제히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있어나니 조고(趙高)가 2세를 죽이고 자영(子嬰)을 세웠다. 자영이 즉위한 지 한 달여 만에 제후가 그를 죽이고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이 사적은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있다.

사마천의 논평[편집]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진나라 선조의 성은 영씨(嬴氏)이다. 그 후손들을 각지에 봉하여 그 봉국을 성으로 삼았다. 서씨(徐氏), 담씨(郯氏), 거씨(莒氏), 종려씨(終黎氏), 운엄씨(運奄氏), 도구씨(菟裘氏), 장량씨(將梁氏), 황씨(黃氏), 강씨(江氏), 수어씨(修魚氏), 백명씨(白冥氏), 비렴씨(蜚廉氏), 진씨(秦氏) 등이다. 그러나 진나라는 그 선조 조보(造父)가 조성(趙城)에 봉해졌기 때문에 조씨(趙氏)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