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07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항우본기(項羽本紀)[편집]

항적(項籍)은 하상(下相) 사람이다. 자를 우(羽)라 했다. 처음 봉기했을 때 나이 스물넷이었다(기원전 209년). 그의 작은아버지는 항량(項梁)이라 했고, 항량의 아버지가 초의 장군 항연(項燕)으로 진(秦)의 장수 왕전(王翦)에게 죽임을 당했다. 항씨는 대대로 초의 장군으로 항(項) 지역에 봉해졌으므로 성을 항씨라 삼았다.

항적은 어렸을 때 글을 배웠으나 끝내지 못했고, 검술을 배웠는데 이 또한 마치지 못했다. 항량이 성을 내자 항적은 “글은 이름만 쓸 줄 알면 되고, 검은 한 사람만 상대하는 것이니 배울 것이 못 됩니다. 만인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을 배우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항량은 항적에게 병법을 가르쳤더니 항적이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대략 그 뜻만을 알고는 역시 끝까지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항량이 일찍이 역양현(櫟陽縣)에서 체포당한 적이 있었는데, 기현(蘄縣)의 옥연(獄掾) 조구(曹咎)에게 역양의 옥연 사마흔(司馬欣)에게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하여 일을 무마시켰다. 항량이 사람을 죽이고 항적과 함께 원수를 피해 오중(吳中)으로 가자 오중의 뛰어난 사대부들이 모두 항량 밑에서 나왔다. 오중에 큰 일과 장례가 있을 때면 항량이 늘 주관하면서 몰래 병법으로 빈객과 자제들을 배치하여 그들의 재능을 파악했다.

진시황제가 회계산을 유람하고 절강을 건널 때 항량과 항적이 함께 구경했다. 항적이 “저 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겠습니다”라 했다. 항량이 그 입을 막으며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라. 삼족이 죽는다”라고 했다. 항량은 이 일로 해 항적을 달리 보게 되었다. 항적은 키가 8척이 넘고 힘은 세발솥을 들어올렸다. 용기가 남달라 오현의 자제들이 모두 항적을 두려워했다.

진 2세 원년 7월, 진섭 등이 대택에서 봉기했다. 그해 9월, 회계의 군수 은통(殷通)이 항량에게 “강서 지역은 모두가 반란을 일으켰다니 이 또한 하늘이 진을 망하게 하려는 때가 아니겠소? 내가 들으니 먼저 움직이면 남을 제압하고 늦으면 남에게 제압당한다고 하더이다. 내가 병사를 모아 그대와 환초(桓楚)를 장수로 삼고자 하노라”고 했다. 이때 환초는 대택에 도망가 숨어 있었다. 항량은 “환초는 도망가 있어 있는 곳을 아무도 모고 항적만 압니다”라고 했다. 항량이 바로 나와 항적에게 검을 가지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항량이 다시 들어가 군수와 마주 앉아서는 “항적을 불러 환초를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받들게 하십시오”라 했다. 군수가 “그렇게 하시오”라고 하자 항량은 항적에게 들어오라고 불렀다. 순간 항량이 항적에게 눈짓을 하며 “손을 써라”라고 하자 항적은 검을 뽑아 군수의 머리를 베었다. 

항량이 군수의 머리를 들고 그의 도장을 찼다. 군수의 부하들이 깜짝 놀랐고 소란한 와중에 항적이 백 명을 쳐 죽였다. 군이 온통 놀라 모두 땅에 엎드려서는 감히 일어질 못했다. 항량은 바로 전부터 알고 있는 힘깨나 쓰는 관리들을 불러서 대사를 일으킨 까닭을 이야기하고 마침내 오중의 군대로 거사했다. 사람을 보내 (군에 속해 있는) 현들을 거두어 정예병 8천을 얻었다. 항량은 오중의 호걸들을 교위(校尉), 후(侯), 사마(司馬)에 배치했다. 기용되지 못한 한 사람이 항량에게 말하자 “전에 장례 일을 그대에게 주관하게 했더니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대를 기용하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다. 사람들 모두가 탄복했다. 이에 항량은 회계군 군수가 되었고 항적은 부장이 되어 속현들을 다스렸다.

이 무렵 광릉(廣陵) 사람 소평(召平)이 진왕(진섭)을 위해 광릉을 뺏으려 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진왕이 패하여 도망치고 진의 군대가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듣자 (소평은) 강을 건너 거짓말로 진왕의 명령이라 하여 항량을 초왕의 상주국(上柱國)에 임명한 다음 “강동은 이미 평정되었으니 서둘러 병사를 이끌고 강서의 진을 공격하라”고 했다. 항량은 바로 8천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다.  진영(陳嬰)이 이미 동양(東陽)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 합류하여 함께 서쪽으로 가려고 했다. 

진영은 과거 동양의 영사(令史)로 현에 살았는데 평소 믿음이 있고 진중하여 장자로 불렸다. 동양의 젊은이들이 그 현령을 죽이고 수천 명을 모아 우두머리로 삼을 사람을 찾았으나 마땅치 않자 진영에게 요청했다. 진영은 못한다며 사양했으나 억지로 진영을 우두머리로 세우니 현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2만 명이었다. 젊은이들은 진영을 왕으로 삼으려고 다른 군과는 달리 푸른 천으로 만든 모자를 쓰는 특별한 창두군(蒼頭軍)을 일으켰다. 진영의 어머니가 진영에게 “내가 너희 집안에 시집을 온 이해 네 선조 중에 귀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지금 폭력으로 큰 명성을 얻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차라리 남의 밑에 있는 것이 낫다. 일이 성공하면 제후로 봉해질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세상이 지목하는 이름이 아니니 도망치기도 쉬울 것이다”라고 했다. 진영이 감히 왕이 될 마음을 먹지 못하고 그 군관에게 “항씨는 대대로 장군의 집안에다 초에서도 명성이 있다. 지금 큰일을 일으키려면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이름있는 집안에 의지하면 진을 틀림없이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 했다. 이에 무리들이 그 말을 따르자 군대를 항량에게 소속시켰다. 항량이 회수를 건너자 경포(黥布)와 포장군(蒲將軍)도 군대를 이끌고 항량에 밑으로 들어가니 총 6,7만 명이 하비(下邳)에 주둔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진가(秦嘉)는 진작에 경구(景駒)를 초왕으로 세운 다음 팽성 동쪽에 주둔하며 항량의 군대를 막고자 했다. 항량이 군관에게 “진왕이 맨 먼저 거사했으나 전세는 불리해졌고 소재지도 모른다. 지금 진가가 진왕을 배반하고 경구를 세운 것을 대역무도한 짓이다”라 하고는 바로 군대를 진가에게로 진격시켰다. 진가의 군대는 패주했고, 항량은 호릉까지 그를 뒤쫓았다. 진가가 군대를 되돌겨 하루를 싸웠으나 진가는 죽고 군대는 항복했다. 경구는 도망쳐 양(梁) 땅에서 죽었다. 항량은 진가의 군대를 합쳐 호릉에 주둔한 다음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갈 준비를 했다.

장한(章邯)의 군대가 율현(栗縣)에 이르자 항량은 별장 주계석(朱鷄石)과 여번군(餘樊君)에게 맞서 싸우도록 했으나 여번군은 전사하고 주계석의 군대는 패하여 호릉으로 도망갔다. 항량은 바로 군사를 이끌고 설현(薛縣)에 들어가 주계석을 죽였다. 항량은 그에 앞서 항우에게 따로 양성을 공격하게 했으나 양성이 단단히 버티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나 결국 함락시키고 모두를 파 묻어버리고는 돌아와 항량에게 보고했다. 항량은 진왕이 진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별장들을 불러 설현에서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이때 패공도 패현에서 봉기한 다음 건너왔다. 

거소(居鄛) 사람 범증(范增)은 나이 70이었는데 평소 집에 기거하면서 기이한 계책을 잘 냈다. 그가 항량에게 가서는 이렇게 유세했다.

“진승의 패배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진이 6국을 멸망시킬 때 초는 가장 죄가 없었습니다. 회왕(懷王)이 진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못한 것을 초 사람들은 지금도 가엾게 여깁니다. 그래서 초의 남공(南公)은 ‘초에 세 집만 남아 있어도 진을 멸망시킬 자는 틀림없이 초일 것이다’라 했습니다. 진승이 먼저 거사하고도 초의 후손을 세우지 않고 자립했으니 그 기세가 오래가지 못한 겁니다. 지금 당신이 강동에서 일어나자 초의 장수들이 벌떼 같이 앞을 다투어 당신에게 달려간 것은 당신이 대대로 초의 장수로서 초의 후손을 다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항량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민간에서 양을 치고 있던 회왕의 손자 심(心)을 찾아 다시 초 회왕으로 세우니 인민들이 바라던 바를 따른 것이다. 진영을 초의 상주국으로 삼아 다섯 개 현에 봉하고 회왕과 함께 우이(盱台)에 도읍을 정했다.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했다.

몇 달 뒤, 항량은 병사를 이끌고 항보(亢父)를 공격하고, 제의 전영(田榮), 사마용저(司馬龍且)의 군대와 동아(東阿)를 구원하러 나서 동아에서 진의 군대를 대파했다. 전영은 즉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 그 왕 전가(田假)를 내쫓았다. 전가는 초로 도망쳤고, 전가의 상국 전각(田角)은 조로 도망쳤다. 원래 제의 장군이었던 전각의 동생 전간(田閒)은 조에 머물며 감히 돌아가지 못했다. 전영은 전담(田儋)의 아들 전불(田市)을 제의 왕으로 세웠다. 항량이 동아의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진군을 추격하면서 제의 병영에 몇 차례 사신을 보내 함께 서쪽을 치자고 재촉했다. 전영은 “초가 전가를 죽이고, 조가 전각과 전간을 죽이면 바로 군대를 내겠다”고 답했다. 항량이 “전가는 같은 편의 왕이었다. 상황이 궁하여 내게 몸을 맡겼으니 차마 죽일 수 없다”고 했다. 조 역시 전각과 전간을 죽여 제와 흥정하려 하지 않았다. 제는 끝내 군대를 보내 초를 돕지 않았다. 

항량은 패공과 항우에게 따로 성양(城陽)을 공격하여 도륙하고, 서쪽으로 진의 군대를 복양(濮陽)의 동쪽에서 격파하니 진은 병사를 거두어 복양으로 들어갔다. 패공과 항우가 바로 정도(定陶)를 공격했으나 정도가 함락되지 않자 그곳을 떠나 서쪽을 공략하여 옹구(雍丘)에 이르러 진군을 대파하고 이유(李由)의 목을 베었다. 이어 군사를 돌려 외황(外黃)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항량은 동아에서 일어나 서쪽 정도에 이르기까지 진의 군대를 두 차례 격파했고, 항우도 이유의 목을 베자 진을 더욱 가볍게 여기며 교만한 기색을 드러냈다. 송의(宋義)가 항량에게 “전투에서 이겼다고 장수는 교만해지고 병졸이 나태해지면 패합니다. 지금 병졸들이 다소 나태해진데다 진의 군대는 날이 갈수록 늘고 있으니 당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신은 두렵습니다”라고 충고했다. 항량은 듣지 않았다. 

그러고는 송의를 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도중에 제의 사신인 고릉군(高陵君) 현(顯)을 만났다. 송의가 “공께서 무신군을 만나시려는 겁니까”라고 물으니 “그렇소”라고 답했다. 송의가 “신은 무신군의 군대가 틀림없이 패한다고 봅니다. 공께서 천천히 가시면 죽음을 면할 것오, 급히 가면 화를 당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과연 진은 병사를 총동원하여 장한을 지원하여 초의 군대를 공격하여 정도에서 대파했고, 항량은 전사했다. 패공과 항우는 외황을 떠나 진류를 공격했으나 진류가 단단히 지키는 통에 함락시킬 수 없었다. 패공과 항우가 서로 “지금 항량의 군대가 격파당해 병사들이 두려워 하고 있다”고 상의하고는 여신(呂臣)의 군대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해서는 여신은 팽성 동쪽에, 항우는 팽성 서쪽, 패공은 탕(碭)에 주둔했다. 

장한은 항량의 군대를 격파한 뒤 초의 군대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황하를 건너 조를 쳐서 대파했다. 당시 조헐이 왕이었고 진여(陳餘)가 장군, 장이(張耳)가 상이었는데 모두 거록성(巨鹿城)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장한은 왕리(王離)와 섭간(涉閒)에게 거록을 포위하게 했다. 장한은 그 남쪽에 주둔하고는 양옆으로 담장을 가진 용도(甬道)를 축조하여 양식을 운반했다. 진여는 장군으로서 병졸 수만을 이끌고 거록 북쪽에 주둔하니 이것이 이른바 하북군이었다.  

초군이 정도에서 격파당한 뒤 회왕은 겁이 나서 우이에서 팽성으로 옮긴 다음 항우와 여신의 군대를 자신이 이끌었다. 여신을 사도(司徒)로 삼고, 그 아비 여청(呂靑)을 영윤(令尹)에 임명했다. 패공은 탕군의 군장에 무안후(武安侯)으로 봉해 탕군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

당초 송의를 만났던 제의 사신 고릉군 현이 초군에 있다가 초왕을 보고는 “송의가 무신군의 군대가 틀림없이 패할 것이라고 했는데 며칠 뒤 (무신군의) 군대가 정말 패했습니다. 군대가 싸우기도 전에 패배의 낌새를 알았으니 이는 병법을 안다는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송의를 불러 일을 논의해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상장군에 임명했다. 항우는 노공(魯公)에 봉해져 차장으로, 범증은 말장으로 조를 구원하게 했다. 여러 별장들이 모두 송의에게 속하게 되었고, (송의를) 경자관군(卿子冠軍)이라고 불렀다. 군의 행렬이 안양(安陽)에 이르러 46일을 체류하도록 전진시키지 않았다. 항우가 “내가 듣기에 진의 군대가 조왕을 거록에서 포위하고 있다고 하니,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넌 다음 초는 그 바깥을 공격하고 조가 그 안에서 호응한다면 진의 군대를 틀림없이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 했다.

송의는 “그렇지 않소. 소의 등짝에 붙은 등에는 손바닥으로 쳐서 죽일 수 있지만 털 속에 있는 이를 죽일 수는 없소. 지금 진이 조를 공격하여 전투에서 이긴다 해도 병사들은 지칠 것이오. 우리는 그 피곤함을 틈타면 되고. 이기지 못하면 우리가 군대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서쪽을 치면 진의 군대를 틀림없이 뽑을 수 있소. 그러니 먼저 진과 조가 싸우게 하느니만 못하오. 대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로 싸우는 것은 이 송의가 그대만 못하지만 않아서 책략을 짜는 일은 그대나 이 송의만 못하오”라고 했다.

이어 군중에 “사납기가 호랑이 같고, 제멋대로이기가 양 같고, 탐욕스럽기가 승냥이 같고, 부릴 수 없을 정도로 고집이 센 자는 모두 목을 벨 것이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어 그 아들 송양(宋襄)에게 제를 돕게 했는데 몸소 무염(無鹽)까지 전송하면서 거창한 술자리까지 베풀었다. 날은 춥고 비까지 많이 내려 사졸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렸다. 항우가 말했다.

“힘을 다해 진을 공격해야 하거늘 오래도록 체류하며 행동에 나서지 않는구나. 올해는 흉년이 들어 인민은 굶주리고 사졸들은 토란과 콩으로 끼니를 떼우고 있다. 군에는 양식도 없는데 거창한 술자리를 벌이고 있다. 병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조의 식량을 먹고 진을 공격하려고는 하지 않고 그저 ‘그들이 지친 틈을 타면 된다’라고만 한다. 무릇 강한 진이 새로 만들어진 조를 공격할 경우 그 기세는 조를 뽑고도 남을 것이고, 조가 뽑히면 진은 더 강해질 것인데 무슨 지치기를 틈탄다는 말인가! 게다가 우리 나라 군대가 막 격파당해 왕께서 좌불안석인 상황에서 경내를 모조리 긁어모아 전부 장군의 소속으로 만들었으니 나라의 안위가 이번 거사에 달려 있다. 지금 사졸은 돌보지 않고 그 사사로움만 앞세우니 사직을 위하는 신하가 아니다.”

항우는 새벽에 상장군 송의를 찾아가 그 막사 안에서 송의의 머리를 베고는 군중에 호령하길 “송의가 제와 함께 초를 배반하려 해서 초왕께서 은밀히 내게 그를 죽이게 하셨다”라 했다. 당시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 저항하지 못하고 다 같이 “처음 초를 세운 것은 장군의 집안입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난신을 죽인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서로서로 항우를 임시 상장군으로 세우고 사람을 송의의 아들에게 보내 제까지 따라가서 그를 죽였다. 환초에게 회왕께 보고하도록 하자, 회왕은 항우를 상장군으로 삼고 당양군(當陽君)과 포장군을 항우에 속하게 했다.

항우가 경자관군(송의)을 죽이자 그 위세가 초나라를 울렸고 명성이 제후들의 귀에 들어갔다. 바로 당양군과 포장군에게 병졸 2만을 이끌고 장하(漳河)를 건너 거록을 구원하게 했다. 전투가 다소 유리해지자 진여가 다시 구원병을 요청했다. 항우가 바로 병사를 있는 대로 이끌고 장하를 건넌 다음 배를 물에 가라앉히고 (취사용) 솥과 시루를 깨버렸다. 막사도 불태우고 사흘 양식만 지니게 하여 사졸들에게 필사의 각오로 돌아올 마음이 전혀 없음을 보였다. 이렇게 도착하자마자 왕리를 포위하고 진의 군대에 맞서 아홉 번을 싸워 그 식량 운송 도로를 끊는 등 대파했다.

소각(蘇角)을 죽이고 왕리는 포로로 잡았다. 섭간은 초에 투항하지 않고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다. 당시 초의 군대는 제후들 군대 중에서 으뜸이었다. 거록을 구하려고 온 제후군이 열을 넘었으나 감히 군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초의 군대가 진을 공격할 때 장수들은 모두 군영에서 내려다 볼 뿐이었. 초의 전사들은 1당 10이 아닌 전사가 없었다. 초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면 하늘을 울렸고, 제후군은 두려워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윽고 진의 군대를 격파하고 항우는 제후군의 장수들을 불렀다. 그들이 전차를 세워 만든 원문(轅門)으로 들어오는데 무릎을 꿇고 기이서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었고, 감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항우는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었고, 제후군은 모두 그에게 속하게 되었다.

장한은 극원(棘原)에 주둔하고, 항우는 장하 남쪽에 주둔하여 서로 대치한 채 싸우지 않았다. 진의 군대가 몇 차례 퇴각하자 2세는 사람을 보내 장한을 꾸짖었다. 장한이 겁을 먹고 장사 사마흔을 보내 보고를 청했다. 함양에 이르러 사마문(司馬門)에 사흘을 머물렀으나 조고는 만나주지도 않고 믿지 않는 마음을 보였다. 장사 사마흔은 두려워 자기 부대로 돌아오면서 왔던 길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고가 사람을 시켜 그를 추격하게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사마흔이 군영에 도착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조고가 궁중에서 일을 자기 멋대로 처리하고 있고 그 밑으로는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면 조고는 틀림없이 우리 공을 시기 질투할 것이고,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장군께서 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진여 역시 장한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백기는 진의 장수로 남으로 (초나라 수도인) 언(鄢)과 영(郢)을 정벌하고, 북으로 마복(馬服)을 땅에 묻는 등 성과 땅을 공략한 것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끝내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몽염 또한 진의 장수로 북으로 오랑캐(흉노)를 내쫓고 유중(楡中) 땅 수천 리를 개척하였으나 끝내는 양주(陽周)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왜 입니까? 공이 많아 진이 그 공을 모두 감당할 수 없기에 법을 구실로 죽인 것입니다. 지금 장군께서 진의 장수가 된 지 3년입니다. 잃어버린 병사가 10만을 헤아리고 제후들이 우르르 일어나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저 조고는 평소부터 내내 아첨만 일삼다가 지금 일이 급해지자 2세가 자기를 죽일까 겁을 먹고는 법을 구실로 장군을 죽여 책임을 틀어막고 사람을 보내 장군을 대신함으로써 화를 면하려는 것입니다.

장군께서 밖에서 머문 지 오래 되어 조정과 틈이 많아 공이 있어도 죽음이요 공이 없어도 죽음입니다. 게다가 하늘이 진을 망하게 하려는 것은 어리석건 지혜롭건 다 압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안으로는 직언할 수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망하게 한 장군이 되어 고립되었는데 유독 홀로 서서 살아 보려고 하시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습니까? 장군께서는 어째서 군대를 돌려 제후군과 함께 진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하고, 그 땅을 나누어 남면하여 왕이 되려 하지 않으십니까? 그것과 몸이 형틀 위로 쓰러지고 처자식이 죽는 것 중 어느 쪽이 낫습니까?”

장한은 주저하다가 몰래 항우에게 후시성(侯始成)을 보내어 협약하려고 했다. 협약이 성사되기 전에 항우는 포장군에게 밤낮으로 병사를 이끌고 삼호(三戶)를 건너서 장하 남쪽에 주둔하게 하고는 진과 싸워 다시 격파했다. 항우는 모든 병사를 이끌고 오수(汙水)에서 진을 공격하여 대파했다.

장한이 (다시) 사람을 보내 항우를 만나 협약하고자 했다. 항우는 군리들을 불러서 “군량이 적어 협약을 받아들일까 한다”라고 했다. 군리들 모두가 “좋습니다”라 했다. 항우는 바로 원수(洹水)의 남쪽 은허(殷虛)에서 보자고 기약했다. 맹서가 끝나고 장한은 항우를 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조고 이야기를 했다. 항우는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세우고 초의 군중에 두고, 장사 사마흔은 상장군으로 삼아 진군의 선봉에 서게 했다. 

신안(新安)에 이르렀을 때 과거 제후군의 장병들이 부역과 수자리에 징발되어 진을 지날 때 진의 장별들이 그들을 무례하게 취급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 진의 군대가 제후군에 항복하자 제후군의 장병들이 승리한 기세로 진의 장병들을 마구 노예처럼 부리고 욕을 보였다. 진의 장병들이 몰래 “장한 장군 등이 우리를 속여 제후군에 항복하게 했다. 지금 관중에 들어가 진을 격파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제후군은 우리들을 포로로 삼아 동쪽으로 도망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은 분명 우리 부모와 처자식을 다 죽일 것이다”며 속닥거렸다. 제후군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는 항우에게 보고했다. 항우는 경포와 포장군을 불러 “진의 장졸들이 아직 수가 많은데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관중에 이르도록 말을 듣지 않으면 일이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하니 쳐죽이는 것만 못할 것이다. 장한, 사마흔, 도위 동예만 데리고 진으로 들어가자”라는 계책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초군은 밤에 진의 병졸 20여 만 명을 신안성 남쪽에다 파묻었다. 

진의 땅을 공략하여 평정했으나 함곡관은 수비병이 지키고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또 패공이 이미 함양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자 항우는 크게 노하여 당양군에게 함곡관을 공격하게 했다. 항우가 함곡관에 들어가 희수 서쪽에 이르렀다. 패공은 패상(覇上)에 주둔하고 있어 항우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패공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이 사람을 시켜서 항우에게 “패공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을 모두 다 가지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항우가 크게 성을 내며 “내일 사졸들을 잘 먹이고 패공의 군대를 격파하리라”라고 말했다. 당시 항우의 병사는 40만에 신풍(新豐) 홍문(鴻門)에 있었고, 패공의 병사는 10만으로 패상에 있었다. 범증이 항우에게 “패공이 산동에 있을 때만 해도 재물과 여색을 탐냈는데 지금 관중에 들어가서는 재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그 뜻이 작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시켜 그 기운을 보게 했더니 모두 용과 호랑이에 오색인 것이 천자의 기운이었습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서둘러 공격하셔야 합니다”라고 권했다.  

초의 좌윤(左尹) 항백(項伯)은 항우의 작은아버지로 평소 유후(留侯) 장량(張良)과 사이가 좋았다. 장량은 이때 패공을 따르고 있었다. 이에 항백은 밤에 패공의 군영으로 달려와 개인적으로 장량을 만나서는 이 일을 알리면서 장량에게 함께 떠나자며 “함께 따라 죽지 마시고”라고 호소했다. 장량은 “신이 한왕(韓王)을 위해서 패공을 따르고 있는데 패공이 지금 위급하다고 도망치는 것은 의리가 아니니 말하지 않을 수 없소”라고 했다. 장량이 바로 들어가서 패공에게 모든 것을 알렸다. 패공이 크게 놀라며 “이를 어찌 해야 좋겠소”라고 묻자 장량은 “당초 누가 대왕께 그런 계책을 냈습니까”라고 물었다. 패공은 “웬 잡놈이 ‘함곡관을 막고 제후들을 들이지 않으면 진의 땅이 다 왕의 것이 됩니다’라고 하길래 그에 따랐지”라고 했다. 장량이 “생각해보십시오. 대왕의 군대가 항왕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패공이 잠시 말이 없다가 “물론 그렇지 않지. 그러니 어쩌면 좋겠소”라고 했다. 장량은 “항백을 불러 패공이 어찌 감히 항왕을 배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십시오”라고 했다. 패공이 “당신은 항백과 어떤 관계요”라고 물었다. 장량은 “진에서 신과 함께 어울릴 대 항백이 사람을 죽였는데 신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지금 급한 일이 생기자 달려와 이 장량에게 알린 것입니다”라고 했다. 패공이 “당신과 그 사람 누가 연장자요”라고 물었다. 장량은 “ (항백이) 신보다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했다. 패공은 “당신이 나를 위해 부르시오. 내가 형으로 모시겠소”라고 했다. 장량이 나가 항백을 찾자 항백이 바로 들어와 패공을 만났다.

패공은 술잔을 올리며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고 혼인을 약속하며 “내가 입관한 뒤 추호도 물건에 손대지 않았고, 호적을 챙기고 창고를 봉쇄한 뒤 장군을 기다렸소. 장병을 보내 관문을 지킨 까닭은 다른 도적의 출입과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소. 낮밤으로 장군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어찌 감히 반란을 꾀하겠소? 바라건대 항백께서 신이 감히 배은망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시오”라고 했다. 항백이 이를 받아들이고는 패공에게 “내일 일찍 오셔서 항왕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라 했다. 항백은 그날 밤으로 다시 군영으로 돌아가 패공이 한 말을 죄다 항왕에게 보고했다. 그러면서 “패공이 먼저 관중을 격파하지 않았다면 그대가 어찌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큰 공을 세운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니 잘 대해주는 것만 못할 것 같소”라고 했다. 항왕이 허락했다.

패공이 이튿날 아침 기병 백 여 명을 데리고 항왕을 만나러 왔다. 홍문에 이르러 사죄하며 “신은 장군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해 진을 공격했습니다. 장군은 하북에서, 신은 하남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먼저 관중에 들어와 진을 격파하고 다시 이곳에서 장군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 어떤 소인배의 말 때문에 장군과 신의 사이에 틈이 생겼습니다”라고 했다. 항왕은 “이는 패공의 좌사마인 조무상이 한 말이오. 그렇지 않고서 이 항적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겠소”라고 했다. 항왕은 이날 패공을 머무르게 하여 함께 술을 마셨다.

항왕과 항백은 동쪽을 향해 앉고, 아보(亞父, 범증)는 남쪽을 향해 앉았다. 아보란 범증을 말한다. 패공은 북쪽을 향해 앉고, 장량은 서쪽을 향해 배석했다. 범증이 몇 차례 항왕에게 눈짓을 하며 차고 있던 옥결(玉玦)을 들어 보이길 세 차례, 항왕은 말없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범증이 일어나 밖에서 항장(項莊)을 불러 “군왕이 차마 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들어가서 축수를 올려라. 축수가 끝나면 검무를 청해서는 자리에서 패공을 찔러 죽여라. 그렇지 못하면 앞으로 모두들 그에게 붙잡힐 것이다”라고 일렀다.

항장이 바로 들어가 축수를 올렸다. 축수가 끝나자 “군왕과 패공이 함께 술을 드시는데 군중에 즐길 거리가 없습니다. 검무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항왕이 “그렇게 하라”라 하니 항장은 검을 뽑아 춤을 추었다. 항백 역시 검을 빼서 춤을 추는데 계속 몸으로 패공을 막아주니 항장이 찌를 수가 없었다. 이에 장량은 군문으로 가서 번쾌를 만났다. 번쾌가 “오늘 일이 어떻게 되갑니까”라고 물었다. 장량은 “몹시 위급하오. 지금 항장이 검을 뽑아들고 춤을 추는데 아무래도 그 의도가 패공에게 있는 것 같소”라 했다. 번쾌가 “이거 급하게 되었소. 신이 들어가서 함께 운명을 하겠소”라고 했다.

번쾌는 바로 검을 차고 방패를 앞세워 군문으로 들어갔다. 창을 든 위병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번쾌가 방패 모서리로 내리쳐 위병을 땅에 쓰러뜨렸다. 번쾌가 마침내 들어가서 장막을 젖히고 서쪽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서서는 항왕을 노려보는데, 머리카락은 하늘로 곤두서고 눈꼬리는 찢어질 것 같았다. 항왕이 검을 짚고 무릎을 세워 앉아서는 “객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장량이 “패공의 참승 번쾌라는 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항왕이 “장사로다. 술을 내려라”라고 했다. 큰 잔으로 술이 나왔고 번쾌는 고맙다고 절을 한 다음 일어나 선 채로 마셨다. 항왕이 “돼지 다리를 주어라”라고 하자 바로 생 돼지 다리가 나왔다. 번쾌가 방패를 땅에 엎어 돼지 다리를 올려놓고는 검으로 베어 먹었다.

항왕이 “장사로다. 더 마실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번쾌가 “신은 죽음도 피하지 않거늘 술을 어찌 사양하로리까? 진왕이 호랑이와 이리 같은 마음으로 사람 죽이기를 다 죽이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듯 죽이고, 다 사용하지 못하면 어쩌나 할 정도로 형벌을 가하니 천하가 모두 그를 배반했습니다. 회왕께서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길 ‘먼저 진을 깨고 함양에 들어가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패공께서 먼저 진을 격파하고 함양에 들어가셔서 추호도 물건에 가까이 하지 않고 궁실을 봉쇄한 다음 패상으로 물러나 주둔하며 대왕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장병을 보내 관을 지키게 한 것은 다른 도적의 출입과 비상사태를 대비한 것입니다. 수고와 공이 이렇게 크거늘 제후로 봉하는 상은 고사하고 소인배의 헛소리를 듣고 공을 세운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요. 이는 진의 망조를 따르는 것으로 대왕께서 하셔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했다. 항왕은 응답없이 “앉으라”고 했다. 번쾌가 장량을 따라 앉았다. 번쾌가 앉은 지 얼마 뒤 패공이 측간에 간다며 일어나 번쾌를 밖으로 불러냈다.

패공이 나간 뒤 항왕은 도위 진평(陳平)에게 패공을 불러오게 했다. 패공이 “지금 나오면서 인사도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좋겠소”라고 물었다. 번쾌는 “큰일을 할 때는 자잘한 것을 돌아보지 않고, 큰 예절에는 작은 양해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저쪽은 칼과 도마요, 우리는 물고기나 고기 같은 신세인데 무슨 인사입니까”라고 했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며 장량을 남겨서 사죄하게 했다. 장량이 “대왕께서 오실 때 뭘 갖고 오셨습니까”라고 하자 패공은 “내가 흰 벽옥 한 쌍을 갖고 왔는데 항왕에게 드리려는 것이고, 옥두 한 쌍은 아보에게 드리려고 했는데 성난 모습을 보고는 감히 드리지 못했소. 공이 나 대신 드리시오”라고 했다. 장량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때 항왕의 군대는 홍문 아래에 주둔하고 있었고, 패공의 군대는 패상에 주둔하고 있어 서로 40리 떨어져 있었다. 패공은 수레와 말을 놔둔 채 몸만 빠져나와서 혼자 말을 타고 번쾌, 하후영(夏侯嬰), 근강(靳彊), 기신(紀信) 등 네 사람은 검과 방패를 들고 걸어서 여산을 내려와 지양으로 통하는 샛길로 갔다. 

패공은 장량에게 “이 길로 우리 군영까지는 20 리에 불과하니, 내가 군영에 도달할 즈음 공도 들어가시오”라고 일러 두었다. 패공이 떠나 샛길로 군영에 이르렀을 무렵 장량이 들어가 사죄하며 “패공께서 취기를 이기지 못해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삼가 신에게 흰 벽옥 한 쌍을 대왕 족하께 공손히 바치게 했고, 옥두 한 쌍은 대장군 족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항왕이 “패공은 어디 계신가”라고 물었다. 장량은 “대왕께서 잘못을 나무라려고 하시는 것을 알고는 몸을 빼서 혼자 가셨은니 이미 군영에 도착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항왕은 벽옥을 받아 자리 위에 두었지만, 아보는 옥두를 받아 땅바닥에 놓고 검을 뽑아 그것을 내리쳐 깨뜨리며 “아이고! 어린애하고는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닌데. 항왕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패공이다. 이제 우리는 죄다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라고 했다. 패공은 군영에 도착하자 즉시 조무상을 베어 죽였다.

며칠 뒤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 함양을 도륙하고 항복한 진의 왕 자영을 죽였다. 진의 궁실을 불태웠는데 불은 석 달 동안 꺼지지 않았다. 재물, 보석, 보녀자를 거두어 동쪽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항왕에게 “관중은 산과 강이 사방을 막고 있고 땅이 기름지니 도읍으로 삼아 패주가 될 만한 곳입니다”라 했다. 항왕은 진의 궁실이 다 불타 무너진 것을 본데다 동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부귀를 이루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주겠는가”라고 했다. 그 말을 한 자가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은 목욕한 원숭이가 모자를 쓴 꼴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라고 했다. 항왕이 그 말을 듣고는 그 말을 한 자를 삶아 죽였다. 

항왕이 사신을 보내 회왕에게 보고하고 명령을 기다리자 회왕은 “약속한 대로 하라”라고 했다. 곧 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였다. 항왕은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먼저 장상들을 왕으로 삼으면서 “천하에 당초 난이 일어나자 임시로 제후의 후손들을 세워 진을 토벌했소이다. 그러나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먼저 거사하여 들판에서 노숙하길 3년, 진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한 것은 모두 장상 여러분과 이 항적의 힘입니다. 의제께서 공은 없지만 당연히 땅을 나누어 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옳습니다”라 했다.

곧 천하를 나누어 여러 장수들을 제후와 왕으로 세웠다. 항왕과 범증은 패공이 천하를 차지할까 의심이 들긴 했지만 이미 강화했고, 또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 싫은데다 혹 제후들이 배반할 것이 두려워서 몰래 모의하길 “파, 촉은 길이 험하고 진의 유배자들도 모두 촉에 산다”라면서 “파, 촉도 관중 땅이다”라고 했다. 이에 패공을 한왕(漢王)으로 삼아 파, 촉, 한중의 왕이 되게 하고 남정(南鄭)을 도읍으로 삼게 했다. 이어 관중을 셋으로 나누어 진의 장수들을 왕으로 삼아 한왕을 틀어막게 했다. 항왕은 이에 장한을 옹왕으로 임명해 함양 서쪽의 왕이 되게 했고, 도읍은 폐구(廢丘)로 정했다.

장사 사마흔은 전에 역양의 옥연으로 있을 때 항량을 도운 적이 있고, 도위 동예는 본래 장한에게 초에 투항할 것을 권한 바 있다. 이에 사마흔은 새왕(塞王)으로 삼아 함양의 동쪽에서 황하에 이르는 지역의 왕이 되게 하고 역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동예는 적왕(翟王)으로 삼아 상군(上郡)의 왕이 되게 하고 고노(高奴)를 도읍으로 정했다. 위왕 표(豹)를 서위왕(西魏王)으로 바꾸어 하동의 왕이 되게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하구(瑕丘)의 신양(申陽)은 장이가 총애하는 신하로서 맨먼저 하남을 함락시키고 황하에서 초군을 맞이한 바 있다. 이에 신양을 하남왕으로 삼아 낙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한왕 성(成)은 옛날 도읍을 그대로 양책을 도읍으로 정했다.

조의 장수 사마앙(司馬卬)은 하내를 평정하는데 몇 차례 공이 있으므로 앙을 은왕(殷王)으로 삼아 하내의 왕이 되게 하고 조가(朝歌)를 도읍으로 정했다. 조왕 헐(歇)은 대왕(代王)으로 옮기고, 조의 재상 장이는 평소 유능했고 또 관중에 들어올 때 함께 했다. 이에 장이를 상산왕(常山王)으로 삼아 조 땅의 왕이 되게 하고 양국(襄國)을 도읍으로 정했다. 당양군 경포는 초의 장수로 전공이 늘 으뜸이었다. 이에 경포를 구강왕(九江王)으로 삼아 육(六)에 도읍하게 했다. 파군(鄱君) 오예(吳芮)는 백월(百越)을 이끌고 제후군을 도왔으며 또 관중에 함께 들어갔다. 이에 오예를 형산왕(衡山王)으로 삼고 주(邾)에 도읍하게 했다. 의제의 주국(柱國) 공오(共敖)는 군사를 이끌고 남군을 공격하는 등 공이 많았다. 이에 공오를 임강왕(臨江王)으로 삼아 강릉(江陵)에 도읍하게 했다. 연왕 한광(韓廣)은 요동왕(遼東王)으로 옮기고, 연의 장수 장도(臧荼)는 초군을 따라서 조를 구원했고 관중에 함께 들어왔다. 이에 장도를 연왕으로 삼고 계(薊)에 도읍하게 했다. 제왕 전불은 교동왕(膠東王)으로 옮기고, 제의 장수 전도(田都)는 제후군과 함께 조를 구원하고 함께 관중에 진입했다. 이에 전도를 제왕으로 삼아 임치(臨菑)에 도읍하게 했다.

전에 진에게 멸망한 제왕 전건(田建)의 손자 전안(田安)은 항우가 막 황하를 건너서 조를 구원할 때 제의 북쪽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그 군대를 이끌고 항우에 투항했다. 이에 전안을 제북왕으로 삼고 박양(博陽)에 도읍하게 했다. 전영(田榮)은 여러 번 항량을 배반했고, 또 군사를 이끌고 초를 따라 진을 치려고 하지 않았기에 봉하지 않았다. 성안군 진여는 장군의 도장을 버리고 떠나 관중에 함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 그 유능함과 조에 대한 공로가 있어 남피(南皮)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근처 세 개 현에 봉했다. 파군의 장수 매현(梅鋗)은 공이 많아 10만 호의 후에 봉했다.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하여 아홉 개 군의 왕이 되고 이라고 하고 팽성(彭城)에 도읍을 정했다.

한(漢) 원년 4월, 제후들이 희수 아래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각자의 나라로 갔다. 항왕은 자기 나라로 와서는 사람을 보내 의제를 옮기게 하면서 “옛 제왕들 땅이 사방 천 리에 반드시 강의 상류에 기거했습니다”라 하고는 곧 의제를 장사(長沙)의 침현(郴縣)으로 옮기게 했다. 의제를 재촉하자 그 신하들이 조금씩 의제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이에 몰래 형산왕과 임강왕에게 장강에서 그를 죽이도록 했다. 한왕 성은 군공이 없어 항왕은 그를 자기 나라로 가지 못하게 하고는 함께 팽성으로 데려갔다가 왕에서 폐하여 후로 삼았다가 다시 죽였다. 장도는 자기 나라로 가서 한광을 요동으로 내쫓으려 했으나 한광은 말을 듣지 않다. 장도는 한광을 무종(無終)에서 쳐죽이고 그 땅에서 왕 노릇을 했다.

전영은 항우가 제왕 전불을 교동으로 옮기고 제의 장수 전도를 제왕으로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크게 성을 냈다. 전영은 제왕을 교동으로 보내려 하지 않고 제를 근거지로 해 반란을 일으켜 전도를 맞이하여 싸웠다. 전도는 초로 도망쳤고, 제왕 전불은 항왕이 겁이 나 교동으로 도망가서 나라를 일으켰다. 전영이 화가 나서 (전불을) 추격하여 즉묵에서 죽였다. 전영은 자립하여 왕이 되었고 서쪽으로 제북왕 전안을 쳐서 죽이고 세 개의 제를 병합한 왕이 되었다. 전영은 팽월(彭越)에게 장수의 도장을 주고 양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진여는 몰래 장동(張同), 하열(夏說)을 보내 제왕 전영에게 “항우가 천하를 주재하는 것은 공평치 않습니다. 지금 옛날 왕에게는 나쁜 땅의 왕으로 삼고 자기 신하들과 장수들을 좋은 땅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또 옛 조왕을 내쫓아 북방 대에 거주하게 했으니 이 진여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기병하셨고 또 불의를 따르지 않는다 하시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 진여에게 병사를 대어 주십시오. 상산을 공격하여 조왕을 다시 회복시키고 그 나라를 방패로 삼으십시오”라고 권유했다. 제왕은 이를 허락하고 병사를 조로 보냈다. 진여는 세 개 현의 병사를 모두 징발하여 제와 힘을 합쳐 상산을 공격하여 대파했다. 장의는 도주하여 한에 귀의했다. 진여가 조왕 헐을 대에서 맞이하여 조로 다시 돌아오게 하니 조왕은 진여를 대왕으로 삼았다. 

이 무렵 한왕(유방)은 다시 나와 삼진을 평정했다. 한왕이 관중을 이미 차지하고, 동쪽으로 제와 조가 배반했다는 소식을 접한 항왕은 크게 화가 났다. 바로 과거 오현의 현령 정창(鄭昌)을 한왕으로 삼아 한을 막게 하고, 소공(蕭公) 각(角) 등에게는 팽월을 치게 했으나 팽월은 소공 각 등을 물리쳤다. 한은 장량에게 한(韓)을 돌아보게 하고는 항왕에게 편지를 보내 “한왕은 자리를 잃었고, 관중을 얻으면 약속대로 멈추고 감히 동쪽으로 더 나가지 않을 것이오”라고 전했다. 또 제와 양의 배반을 알리는 편지를 항왕에게 보내 “제가 조와 함께 초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알렸다. 초는 이 때문에 서쪽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북으로 제를 쳤다. 항왕이 구강왕 경포의 군대를 징발하려 하자 경포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고 장수에게 수 천 명을 주어 보냈다. 항왕은 이 때문에 경포를 원망했다. 

한) 2년 겨울, 항우가 마침내 북으로 성양(城陽)에 이르자, 전영 역시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 맞싸웠다. 전영이 이기지 못하고 평원(平原)으로 달아나자 평원의 인민들이 그를 죽였다. (항우는) 마침내 북진해 제의 성곽과 집들에 불을 지르고 항복한 전영의 병졸들을 파묻었다. 노약자와 부녀들은 포로로 잡았다. 제를 거쳐 북해까지 토벌하니 많은 곳이 없어지고 부서졌다. 제 사람들은 다시 사람을 모아 반발했다. 이에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제의 도망친 병졸 수만을 거두어서는 성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항왕이 이곳에 머무르며 잇따라 싸웠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봄, 한왕이 다섯 제후 병사 총 56만 명을 거느리고 동으로 초를 토벌하라 나섰다. 항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여러 장수들에게 제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정예병 3만 명을 이끌고 노에서 호릉으로 나왔다. 

4월, 한왕이 팽성에 입성하여 재물과 보화 그리고 미녀들을 거두어서는 매일 술자리를 크게 베풀었다. 항왕은 서쪽 소현에서 새벽을 틈타 한군을 공격하고 동진하여 팽성에 이른 다음 정오 무렵 한군을 대파했다. 한군은 죄다 도망치자다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 빠졌는데 여기서 죽은 한의 병졸이 10만이 넘었다. 한의 병졸들이 다시 남쪽 산으로 도망쳤고, 초군도 추격하여 영벽(靈壁) 동쪽 수수(睢水)에까지 이르렀다. 한군이 퇴각하다가 초군에 밀려 많은 병사들이 죽었는데, 한의 병졸 10만 이상이 수수에 빠지는 통에 수수가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한왕을 삼중으로 포위했는데, 큰바람이 서북에서 불어오더니 나무를 부러뜨리고 집을 날렸다.

이에 모래와 돌이 날고 낮인 데도 사방이 깜깜해지더니 초군 쪽으로 들이닥쳤다. 초군이 큰 혼란에 빠져 이리저리 흩어지자 한왕은 이 틈에 기병 수십만 데리고 도망칠 수 있었다. 패현으로 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려고 했다. 초군도 사람을 보내 패현까지 추격해서는 한왕의 가족을 잡으려 했다. 가족들이 모두 도망치는 통에 한왕과 서로 만날 수 없었다. 한왕은 도중에 효혜(孝惠)와 노원(魯元)을 만나 이들을 싣고 갔다. 초의 기병이 한왕을 뒤쫓아오자 한왕은 급한 나머지 효혜와 노원을 밀어 수레 밖으로 떨어뜨렸다. 등공(滕公)이 그 때마다 내려서 태웠는데, 세 번이나 이렇게 했다. 등공이 “다급하고 빨리 몰 수 없다고 하지만 어찌 자식들을 버립니까”라고 했다. 그러다 마침내 벗어나 태공(太公)과 여후(呂后)를 찾았으나 서로 만나지 못했다. 심이기(審食其)가 태공, 여후와 함께 샛길을 따라 한왕을 찾다가 도리어 초군을 만났다. 초군은 이들과 함께 돌아와 항왕에게 보고하니 항왕이 늘 군영에 두었다.

이때 여후의 오라비 주여후(周呂侯)가 한을 위해서 병사를 이끌고 하읍(下邑)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왕이 샛길로 가서 그를 따르면서 조금씩 그 병사들을 거두어 들였다. 형양(滎陽)에 이를 무렵 패잔병들이 다 모였다. 소하(蕭何)는 호적에 없는 관중의 노약자들을 징발하여 형양에 이르니 다시 크게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다. 초가 팽성에서 일어나 그 승세를 몰아 추격하여 형양 남쪽 경읍(京邑)과 색읍(索邑) 사이에서 한군과 싸웠다. 한군이 초군을 물리치자 초군은 형양을 지나 서쪽으로 진격할 수 없게 되었다.

팽성을 구원한 항왕이 한왕을 추격해 형양에 이르니, 전횡도 제를 수습하여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세웠다. 한왕이 팽성에서 패하자 제후들이 죄다 다시 한을 배반하고 초에게로 붙었다. 형양에 주둔한 한은 황하로 통하는 용도(甬道)를 축조하여 오창(敖倉)에서 양식을 조달했다. 한 3년, 항왕이 한의 용도를 계속 침공하여 식량을 빼앗았고, 식량 부족을 걱정한 한왕이 강화를 요청하여 형양 서쪽을 떼어 한의 땅으로 삼고자 했다.

항왕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역양후(歷陽侯) 범증은 “한은 상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지금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항왕은 바로 범증과 함께 서둘러 형양을 포위했다. 한왕은 이것이 걱정이 되어 곧 진평의 계책을 이용하여 항왕을 이간하기로 했다. 항왕의 사신이 오자 (최고의 대접인) 태뢰구(太牢具)를 준비시켜 내놓았다가 사신을 보고는 짐짓 놀란 척 하며 “나는 아보(범증)의 사신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항왕의 사신이었군”라고 했다. 그리고는 상을 물리고 형편없는 음식으로 항왕의 사신을 대접했다. 사신은 돌아와서 항왕에게 보고했고, 항왕은 바로 범증과 한왕이 사사로이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조금씩 (범증의) 권력을 빼앗았다. 범증은 크게 노하며 “천하의 일이 크게 정해졌으니 군왕 스스로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늙어 죽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항왕이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범증은) 미처 팽성에 이르기도 전에 등에 등창이 도져 죽었다.

한의 장수 기신(紀信)은 한왕에게 “일이 이미 급해졌습니다. 제가 왕으로 꾸며 초를 속이면 왕께서는 그 사이에 빠져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한왕은 밤중에 여자들을 형양 동문으로 내보냈는데 갑옷을 입은 2천 명이었다. 초군이 사방에서 공격해왔고, 기신은 (왕이 타는) 황옥거(黃屋車)에 좌독(左纛)을 달고는 “성안에 식량이 다 떨어져서 한왕이 항복한다”라고 말했다. 초군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이 때 한왕도 기병 수십 명을 데니로 성 서쪽 문으로 빠져나가 성고(成皐)로 달아났다. 항왕이 기신을 보고 “한왕은 어디 있느냐”라고 묻자 기신은 “한왕은 이미 빠져 나가셨소”라고 하고 답했다. 항왕은 기신을 불 태워 죽였다.

한왕은 어사대부 주가(周苛), 종공(樅公), 위표(魏豹)에게 형양을 지키게 했다. 주가와 종공은 “나라를 배반한 왕과는 함께 성을 지킬 수 없다”라고 모의하고는 함께 위표를 죽였다. 초가 형양성을 함락시키고 주가를 사로 잡았다. 항왕이 주가에게 이르기를 “나의 장수가 되면 내가 공을 상장군으로 삼고 3만 호에 봉하겠다”라고 말했다. 주가는 욕을 하며 “빨리 한에 항복하지 않으면 한이 당신을 포로로 잡을 것이다. 당신은 한의 적수가 못 된다”라고 했다. 항왕이 노하여 주가를 삶아죽이고 종공도 함께 죽였다.

한왕은 형양을 벗어나 남쪽 완(宛)과 섭(葉)으로 달아나 구강왕 경포를 만나 군을 수습하여 다시 성고로 들어와 지켰다. 한 4년, 항왕이 진군하여 성고를 포위하자 한왕은 (다시) 도망쳤다. 등공과 혼자 성고 북문을 나서 황하를 건너 수무(修武)로 달아나 장이와 한신의 군대를 따랐다. 여러 장수들도 조금씩 성고를 빠져나와 한왕을 따랐다. 초군은 마침내 성고를 함락시키고 서진하려 했다. 한군은 병사를 보내 공(鞏)에서 막아 초군이 서진하지 못하게 했다.

이때 팽월이 황하를 건너서 동아에서 초를 공격하여 초의 장군 설공(薛公)을 죽였다. 이에 항왕이 직접 동쪽으로 팽월을 공격하자 한왕은 회음후(淮陰侯)의 군대를 얻어 황하를 건너 남하하려 했다. 정충(鄭忠)이 한왕에게 유세하여 이를 그만두고 하내(河內)에 방벽을 쌓고 유고(劉賈)에게 병사를 이끌고 팽월을 도와 초의 식량에 불을 지르게 했다. 항왕이 동진하여 이들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팽월을 패주시켰다. 이에 한왕은 병사들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서 다시 성고를 빼앗은 다음 광무에 주둔하며 오창의 양식을 먹었다. 항왕이 동해를 평정하고 서진하여 한군과 더불어 광무에 주둔하고는 서로 몇 달을 대치했다.

이때 팽월이 양(梁) 지역에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켜 초의 양식 운송로를 끊으니 항왕이 이를 걱정했다. 이에 큰 도마를 준비하여 (한왕의 아버지) 태공을 그 위에 올려 놓고 한왕에게 “지금 바로 항복하지 않으면 내가 태공을 삶아버리겠다”라고 했다. 한왕은 “내가 항우 너와 북면하여 회왕의 명을 받들 때 ‘형제가 되길 약속합니다’라고 했으니 내 아버지가 곧 네 아버지다. 꼭 네 아버지를 삶아 죽여야겠거던 나한테도 국 한 그릇 나눠주기 바란다”라 했다. 항왕이 성이 나서 태공을 죽이려 하자 항백이 “천하의 일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천하를 꾀하는 사람은 집안을 돌보지 않습니다. 죽여봤자 이익될 게 없고 화만 더 커질 뿐입니다”라고 하여 항왕이 그에 따랐다.

초군과 한군이 서로 오래도록 대치하며 결판을 못내자 장정들은 군대 일이 힘이 들고 노약자들은 물자 운반에 지쳤다. 항왕이 한왕에게 “천하가 여러 해 동안 고통을 당한 것은 단지 우리 두 사람 때문이었다. 한왕에게 도전하여 자웅을 가려 천하 인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한왕이 웃으며 “나는 지혜를 다투지 힘으로 싸우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항왕이 장사들에게 나가 싸움을 걸게 했다. 한에서 활을 잘 쏘는 누번(樓煩)이 있어 초군이 세 번 도전해올 때마다 누번이 바로 활을 쏘아 죽였다. 항왕이 크게 화가 나서 직접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는 도전했다. 누번이 활을 쏘려고 하자 항왕은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질렀다. 누번은 감히 쳐다보지 못한 채 화을 쏘지도 못하고 진지로 도망쳐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한왕이 사람을 시켜 몰래 물어보니 바로 항왕이었다. 한왕은 크게 놀랐다. 이어 항왕이 한왕과 광무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왕을 나누었다. 한왕이 (항왕의 죄목을 하나하나) 지적하자 항왕은 화가 나서 한바탕 싸우려 했으나 한왕이 이에 응하지 않자 항왕은 숨겨온 쇠뇌를 쏘아 한왕을 명중시켰다. 한왕이 부상을 입고 성고로 달아났다.

항왕은 회음후가 이미 하북을 함락시키고 제와 초를 격파한 다음 초를 공격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는 용저(龍且)에게 가서 그를 공격하게 했다. 회음후가 더불어 싸우고 있는데 기장(騎將) 관영(灌嬰)이 공격하여 초군을 대파하고 용저를 죽였다. 이에 한신은 제왕(齊王)으로 자립했다. 항왕은 용저의 군대가 격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운 나머지 우이(盱台) 사람 무섭(武涉)에게 회음후를 설득하게 했으나 회음후는 듣지 않았다. 이때 팽월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양 지역을 함락시키고 초의 양시로를 끊었다. 항왕은 바로 해춘후 대사마 조구 등에게 “성고를 잘 지키기만 해라. 한이 도전을 해와도 신중을 기하며 더불어 싸우지 말고 동쪽으로 못오게만 하면 된다. 내가 보름이면 팽월을 충분히 죽이고 양 지역을 평정한 다음 다시 장군과 합류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동쪽으로 가서 진류와 외황을 공격했다.

외황은 함락되지 않다가 며칠이 지난 뒤에야 항복했다. 항왕은 화가 나서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성 동쪽으로 데려와서 파묻으려 했다. 외황 현령 사인(舍人)의 열 세 살난 아들이 항왕에게 가서는 “팽월이 외황을 겁박하여 외창이 두려움에 우선 항복하고 대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오셔서 또 모두를 파묻으려 하니 백성이 어찌 마음을 주겠습니까? 여기부터 동쪽으로 양의 땅 10여 개 성들이 모두 두려워 항복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유세했다. 항왕이 그 말이 옳다고 하여 바로 외황의 파묻으려 한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동으로 수양에 이르는 지역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모두 앞을 다투어 항왕에게 항복했다.

한군은 예상대로 여러 차례 싸움을 걸어왔다. 초군이 나오지 않자 사람을 시켜 대엿새 동안 욕을 퍼부었다. 대사마가 화가 나서 병사를 이끌고 사수를 건넜다. 사졸들이 반쯤 건넜을 때 한군이 공격을 가해 초군을 대파하여 초의 재물들을 모조리 가져갔다. 대사마 조구, 장사 동예, 새왕 사마흔이 모두 사수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대사마 조구는 과거 기현에서 옥연을 지냈고, 장사 사마흔도 옛날 역양의 옥리였다. 두 사람은 일찍이 항량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항왕이 이들을 신임했던 것이다. 이 때 항왕은 수양에 있었는데 해춘후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한군은 막 영향 동쪽에서 종리매(鍾離眛)를 포위하고 있다가 항왕이 이르자 초군에 겁을 먹고는 모두 험준한 곳으로 달아났다.

이때 한군은 먹을 것이 풍족한 반면 항왕의 병사들을 식량이 떨어져 있었다. 한이 육고(陸賈)를 보내 항왕에게 태공을 풀어주라고 설득했으나 항왕은 듣지 않았다. 한왕이 다시 후공(侯公)을 보내어 항왕을 설득했다. 이에 항왕은 한과 천하를 정확하게 둘로 나누어 홍구(鴻溝) 서쪽은 한의 땅으로, 홍구 동쪽은 초의 땅으로 한다고 약속했다. 항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한왕의 부모와 처자식을 돌려 보내닌 한군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한왕이 바로 후공을 평국군(平國君)에 봉하고는 몸을 숨기고 다시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천하의 변사로 그가 머무는 나라를 좌우할 수 있다. 그래서 평국군이라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항왕은 맹약을 마친 뒤 바로 군대를 해산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

한도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장량과 진평은 “한이 천하의 반을 차지했고 제후도 모두 따르게 되었습니다. 초는 병사들이 지치고 먹을 것도 다 떨어졌습니다. 이는 하늘이 초를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 이 기회에 쫓아가 취하느니만 못합니다. 지금 놓아주고 치지 않는다면 이런 경우를 일러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후환을 남기는 것’이라 합니다”라고 권했다. 한왕이 그 말을 들었다. 

한 5년, 한왕이 항왕을 양하 남쪽까지 추격하여 군을 멈춘 다음, 회음후 한신, 건성후 팽월과 시간을 정해 함께 초군을 치기로 했다. 고릉(固陵)에 이르도록 한신과 팽월의 군대가 오지 않자 초가 한군을 공격하여 대파했다. 한왕은 다시 진지로 들어가 참호를 깊이 파고 수비에 돌입했다. 장자방(張子房, 장량)에게 “제후들이 약속을 따르지 않으니 어쩌면 좋겠소”라고 하니 “초 군대를 격파하고도 한신과 팽월은 땅을 나눠 갖지 못했으니 그들의 오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군왕께서 그들과 함께 천하를 나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군왕께서는 진현 동쪽에서 바다까지는 모두 한신에게 주고, 수양 이북에서 곡성까지는 팽월에게 주어 각자 자신들을 위해 싸우게 하면 초를 물리치는 일은 쉬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한왕은 “좋다” 하고는 바로 사신을 뽑아 한신과 팽월에게 보내 “힘을 합쳐 초를 쳐라. 초를 격파하면 진현 이동은 제왕에게 줄 것이고, 수양 이북에서 곡성까지는 팽월에게 줄 것이다”라 했다. 사신이 오자 한신과 팽월은 모두 “지금 진군하기를 청합니다”라 대답하고는 한신은 즉시 제에서 떠났다. 유고의 군대는 수춘(壽春)에서 함께 행군하여 성보(城父)를 도륙하고 해하(垓下)에 이르렀다. 대사마 주은(周殷)이 초를 배신하여 서현(舒縣)의 군사로 육현(六縣)을 도륙하고, 구강(九江)의 병졸을 동원해 유고와 팽월을 따라 모두 해하에서 합류하여 항왕에게로 향했다.

항왕의 군대는 해하에 방어벽을 구축했지만 병사는 적고 양식은 다 떨어져 한군과 제후 군에 몇 겹으로 포위당했다. 밤이 되자 한군의 사방에서 초의 노래가 들렸다. 항왕이 크게 놀라며 “한군이 이미 초를 손에 넣었던 말인가? 어찌 이리도 초 사람들이 많단 말인가”라고 했다. 항왕은 밤중에 일어나 군막에서 술을 마셨다. 우(虞)라는 이름의 미인이 있어 늘 사람을 받으면 함께 따라 다녔고, 추(騅)라는 이름의 준마를 타고 다녔다. 항왕은 침통한 심경으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건만

때가 불리하고 추 또한 달리려 하지 않는다.

추가 달리려 하지 않으니 이를 어쩔거나?

우여, 우여! 그대는 또 어쩔거나?

몇 번이고 노래를 부르니 미인도 이에 화답했다. 항왕이 눈물을 흘리며 울자 좌우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어 차마 서로를 쳐다보지 못했다.

이윽고 항왕이 말에 올랐고, 휘하 장사 800여 명도 말에 올랐다. 그 날 밤으로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달려갔다. 날이 밝은 뒤 한군이 이를 알고는 기장 관영에게 5천 기병으로 추격하게 했다. 항왕이 회수를 건널 때 남은 기병은 300여 명 정도였다. 항왕이 음릉에 이르러 길을 잃어서 농부에게 물었더니 농부는 왼쪽으로 가라고 속여서 일어주었다. 왼쪽으로 갔더니 큰 늪에 빠졌다. 이 때문에 한군이 추격해왔다. 항왕은 병사를 다시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동성에 이르렀다. 겨우 28기가 남아 있었다. 한의 기병은 수천이 추격해오고 있었다.

항왕은 스스로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는 기병들에게 “내가 군사를 일으키고 지금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맞서는 자는 격파하고 공격하면 굴복시켜 패배라는 것을 모른 채 천하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곤궁한 처지에 몰렸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싸움을 못한 죄가 아니다. 오늘 정말 결사적으로 제군들을 위해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승리를 거둘 것이다. 제군들을 위해 포위를 뚫고 적장을 베고 깃발을 쓰러뜨려 제군들로 하여금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싸움을 못한 잘못이 아님을 알게 하리라”라고 했다. 

이어 기병을 넷으로 나누어 사방을 향하게 했다. 한군이 몇 겹으로 포위하자 항왕은 기병에게 “내가 공을 위해 저 장수를 베마”하고는 기병들에게 사방으로 말을 달려 내려가서 산의 동쪽 세 지점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어 항왕은 크게 고함을 지르며 아래로 치고 내려가니 한군은 모두 엎어지고 쓰러졌다. 이어 마침내 장수 하나를 베었다. 이때 기병의 장수 적천후(赤泉侯)가 항왕을 추격했는데 항왕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자 적천후의 사람과 말들이 모두 놀라 몇 리 밖으로 도망쳤다. 항왕은 세 지점에서 기병들과 다시 만났다. 한군은 항왕의 소재를 모르게 되자 군을 셋으로 나누어 다시 포위하게 했다. 항왕이 치고 나와 도위 하나를 베고 백 수십 명을 죽인 다음 다시 그 기병들과 합류하니 기병 둘만 사망했을 뿐이었다. 이에 기병들에게 “어떠냐”라고 물으니 기병들이 모두 엎드리며 “대왕 말씀대로입니다”라고 했다.

이어 항왕은 동쪽으로 오강(烏江)을 건너려 했다.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갖다 대고 기다리다가 “강동이 비록 작지만 땅이 사방 천리요, 무리가 수십 만이라 왕이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대왕께서는 서둘러 건너십시오. 지금 저 한테만 배가 있기 때문에 한군이 와도 건널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항왕이 웃으며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가 어찌 건너겠는가? 또한 이 항적이 강동 자제 8천과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으니 강동의 부형들이 가련하게 여겨 나를 왕으로 삼는데 해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설사 저들이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해도 이 항적이 마음이 부끄럽지 않겠는가”라 했다.

그리고는 정장에게 “내가 보니 그대는 장자다. 내가 타던 이 말은 다섯 살인데 당할 적이 없고 하루에 천 리를 간다. 차마 죽일 수 없으니 그대에게 준다”라 하고는 기병들에게 말에서 내려 걷게 하는 한편 짧은 무기로 싸우게 했다. 항적 혼자 한군 수백 명을 죽였다. 항왕도 몸에 십 여 군데 부상을 당했다. 한의 기사마(騎司馬) 여마동(呂馬童)이 보이자 “옛날 내 사람이 아니더냐”라 하자 여마동이 얼굴을 돌려 보더니 왕예에게 “이 사람이 항왕이다”라고 가리켰다. 항왕이 “내가 듣자니 한이 내 머리에 천금에 만 호의 읍을 걸었다 하니 내가 너를 위해 은혜를 베풀마”라 하고는 자기 목을 찔러 죽었다.

왕예가 그 머리를 취하자 남은 기병들이 서로 항왕을 짓밟으며 싸우니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이었다. 결국 낭중기(郎中騎) 양희(楊喜), 기사마 여마동, 낭중(郎中) 여승(呂勝)과 양무(楊武)가 각각 몸의 한 부분을 가져갔다. 다섯 사람이 모두 몸체를 맞추어 보니 다 있었다. 그래서 땅을 다섯으로 나누어 여마동을 중수후(中水侯), 왕예를 두연후(杜衍侯)에, 양희를 적천후(赤泉侯)에, 양무를 오방후(吳防侯)에, 여승을 열양후(涅陽侯)에 봉했다.

항왕이 죽자 초 지역이 모두 한에 항복했으나  노현(魯縣)만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한왕은 천하의 병사를 이끌고 노현을 도륙하고자 했다. 노현 사람들이 (항왕을 위해) 예의를 지키고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키려 하기에 한왕은 항왕의 머리를 노현에 보여주니 그 부형들이 바로 항복했다. 당초 초 회왕이 항적을 노공(魯公)에 봉했고, 그가 죽고 노현이 마지막으로 투항했으므로 노공의 예로 항왕을 곡성(穀城)에 안장했다. 한왕은 애도를 표하고 울며서 떠났다.

한왕은 항씨 일족들을 죽이지 않았다. 항백(項伯)은 사양후(射陽侯)에 봉해졌고, 도후(桃侯), 평고후(平皐侯), 현무후(玄武侯)는 모두 항씨였지만 유씨(劉氏) 성을 내렸다.

사마천의 논평[편집]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생(周生)에게서 ‘순(舜)의 눈은 눈동자가 둘이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항우도 눈동자가 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고 항우가 순의 후예이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항우가 어떻게 갑자기 일어났겠는가? 진이 정치를 못하자 진섭이 먼저 봉기했고, 이어 호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서로 다투었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항우에게는 아무 것도 없이 그 세를 틈타 민간에서 일어나 3년 만에 다섯 제후를 거느리고 진을 멸망시킨 다음 천하를 나누어 왕과 제후를 봉하니, 정치가 항우에게서 나왔고 이름하여 ‘패왕’이라 했다. 

그 자리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항우가 초 땅이 그리워 관중을 등지고, 의제를 내쫓고 자립했고, 왕과 제후들이 자신을 배신한 것을 원망하기에 이르자 일이 어려워졌다. 자신의 공을 자랑하고 사사로운 지혜만 앞세운 채 지난 일을 배우지 못했다. 이 때문에 패왕의 업을 이루고도 힘으로 천하를 경영하려다가 5년 만에 끝내 그 나라를 망하게 만들고 몸은 동성에서 죽으면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나무할 줄 몰랐으니 이게 잘못이었다. 그러고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못한 죄가 아니다’며 핑계를 댔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