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08
고조본기(高祖本紀)
[편집]고조(高祖)는 패현(沛縣) 풍읍(豐邑) 중양리(中陽里) 사람으로 성은 유(劉), 자는 계(季)라 했다. 아버지는 태공(太公)이며 어머니는 유온(劉媼)이라 했다. 그 어머니 유온이 일찍이 큰 연못가에서 휴식을 취하다 꿈에서 신을 만났다. 이때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번쩍 하더니 하늘이 캄캄해졌다. 태공이 가서 보니 교룡(蛟龍)이 그 몸 위를 올라타고 있었다. 그러고는 임신이 되어 마침내 고조를 낳은 것이다.
고조는 콧날이 오똑하고 이마가 튀어나온 것이 용의 얼굴 같았으며, 멋진 수염을 길렀다. 왼쪽 허벅지에는 검은 점이 72개나 있었다. 어질고 사람을 좋아했으며 베풀기를 즐겨하고 마음이 트여 있었다. 늘 넓은 도량을 갖고 있었으나 집안의 생산 작업을 돌보지 않았다. 장년에 시험을 쳐서 관리가 되었는데 사수정(泗水亭)의 정장(亭長)이 되었다. 관아의 관리들치고 그의 놀림감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여 늘 왕온(王媼)과 무부(武負)의 술집에서 외상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드러누웠는데 무부와 왕온이 그 위에 늘 용이 서리는 것을 보고는 괴이하게 생각했다. 고조가 매번 술을 마시는 날에는 술이 몇 배나 더 팔렸다. 이런 괴이한 일들을 보고는 연말이면 두 술집은 늘 외상 장부를 찢어버렸다.
고조가 일찍이 함양에서 요역할 때 볼 기회가 주여져 진황제의 행차를 보았는데 한숨을 내쉬며 “오호! 대장부가 저래야지”라고 감탄했다.
단보(單父) 사람 여공(呂公)이 패현 현령과 친하여 원수를 피하여 현령의 빈객이 되어 패현으로 집을 옮겼다. 패현의 호걸과 향리들은 그들 현령에게 귀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가서 축하를 드렸다. 소하(蕭何)가 말단 관리인 주리(主吏)로서 예물을 주관했는데 여러 대부들에게 “예물이 1천 전을 넘지 않으면 당 아래에 앉으시오”라고 했다. 고조는 정장으로서 평소 여러 관리들을 업신여겼는데 명첩에다 거짓으로 ‘축하금 1만 전’이라 썼지만 실은 한 푼도 갖고 오지 않았다. 명첩이 전해지자 여공은 크게 놀라며 일어나 문까지 나와 맞이했다. 여공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는데 고조의 모습을 보고는 몹시 공경스럽게 그를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소하가 “유계는 언제나 큰소리만 치지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라고 했다. 고조는 여러 손님들을 무시한 채 상석에 가서 앉는데 사양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여공이 눈짓으로 고조를 남게 했다. 고조가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남았다. 여공이 “신이 어려서부터 사람 관상 보기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의 관상을 보았는데 유계 당신만한 상은 없었습니다. 스스로를 더욱 아끼시길 바라며, 제가 딸자식이 있는데 유계 당신에게 시집을 보낼까 합니다”라고 했다. 술자리가 끝나자 여공의 아내가 여공에게 화를 내며 “당신은 전부터 늘 우리 딸이 남다르다며 귀인에게 주겠다 했습니다. 패현의 현령이 당신과 친분이 있어 딸을 달라고 할 때는 주지 않더니 어찌 하여 유계에게 자기 멋대로 주려고 하십니까”라고 했다. 여공은 “이는 아녀자가 알 바 아니오”라며 끝내 유계에게 주었다. 여공의 딸이 바로 여후이며, 효혜제(孝惠帝)와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았다.
고조가 정장으로 있을 때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와 밭에 간 적이 있다. 여후는 두 아이와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물이 마시고 싶다 하여 여후가 먹을 것까지 대접했다. 노인이 여후의 관상을 보더니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 되실 상이오”라고 했다. 두 아이의 관상을 보게 하자 효혜를 보고는 “부인이 이 아이로 귀하게 될 것이오”라고 했고, 노원을 상을 보고는 역시 귀하다고 했다. 노인이 떠난 뒤 고조가 마침 곁방에서 나왔다. 여후가 객이 지나가다가 우리 모자의 관상을 보고는 모두 크게 귀하다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 고조가 (노인의 행방을) 묻자 “멀리 못 갔을 겁니다”라고 했다. 바로 뒤쫓아가 노인에게 물으니 노인은 “조금 전 부인과 아이들이 모두 당신과 비슷합니다. 당신이 상은 뭐라 말할 수 없이 귀합니다”라고 했다. 고조는 “정말 노인 말대로라면 은혜를 잊지 않겠소”라며 감사했다. 고조가 귀한 몸이 되었으나 노인이 간 곳을 알 수는 없었다.
고조가 정장으로 있을 때 대나무 껍질로 모자를 만들기 위해 구도(求盜)를 설현(薛縣)까지 보냈다. 늘 이 모자를 썼고, 귀한 몸이 되어서도 늘 썼다. 이른바 ‘유씨관’이 바로 이것이다.
고조는 정장으로 현을 위해 여산(酈山)으로 죄수들을 호송한 적이 있는데 도중에 도망간 자들이 많았다. 스스로 헤아려 보니 도착할 때 즈음이면 다 도망가고 없을 것 같았다. 풍읍 서쪽 늪에 이르자 가던 길을 멈추고 술을 마셨다. 밤이 되자 호송해가던 죄수들을 풀어주고는 “당신들 모두 가시오. 나도 여기서 사라질 것이오”라고 했다. 죄수들 중 장사 10여 명이 따르길 원했다. 고조는 술을 더 마신 다음 밤중에 늪지의 좁은 길을 지나면서 한 사람을 앞장 세워 가게 했다. 앞서 가던 자가 돌아와 보고하길 “앞에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으니 돌아가십시오”라고 했다. 술에 취한 고조가 “장사 가는 길에 무엇이 두려우랴”며 앞으로 가서는 검을 뽑아 뱀을 베었다. 뱀은 둘로 갈라졌고 길은 열렸다. 몇 리를 걷다가 취해서 누웠다. 뒤따라오던 사람이 뱀이 있던 곳에서 한 노파가 한밤에 우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이 왜 우냐고 묻자 노파는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였기에 우는 것이오”라 했다. 그 사람이 “노파의 아들이 어째서 죽은 것이오”라고 물었다. 노파는 “내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로 뱀으로 변신하여 길을 막고 있었는데 지금 적제(赤帝)의 아들에게 베임을 당한 것이고 그래서 울고 있던 것이오”라고 했다. 그 사람은 노파가 황당한 말을 한다고 여겨 일러 주려고 하는데 노파가 갑자기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뒷사람이 도착하니 고조가 술에서 깨었다. 뒷사람이 고조에게 이를 고하자 고조는 속으로 기뻐하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따르는 사람들이 갈수록 고조를 더 두려워했다.
진시황제는 일찍이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면서 동방 순시를 통해 이를 누르고자 했다. 고조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도망쳐 숨었는데,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사이 늪지 깊은 골짜기로 숨었다. 여후는 사람들과 고조가 있는 것을 늘 찾아냈다. 고조가 괴상하게 여겨 물었더니 여후는 “당시 있는 곳에는 늘 구름 같은 기운이 있어 그것을 따라가면 언제나 당신을 찾을 수 있었지요”라고 답했다. 고조가 속으로 기뻐했다. 패현 자제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따르고자 하는 자들이 많았다.
진 2세 원년(기원전 209) 가을, 진승(陳勝) 등이 기현(蘄縣)에서 봉기하여 진현(陳縣)에서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장초(張楚)’라 했다. 여러 군현에서 그 장관들을 죽이고 진섭에게 호응했다. 패현 현령도 겁이 나서 패현을 들어 진섭에게 호응하고자 했다. 옥연과 주리 벼슬에 있던 조참과 소하가 “공은 진의 관리인데 지금 배반하여 패현의 자제들을 이끌려 한다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공이 밖에 도망가 있는 자들을 부르면 수백 명은 얻을 것입니다. 이들로 무리들을 겁주면 무리들은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이에 현령은 번쾌(樊噲)에게 유계를 부르도록 했다. 유계의 무리는 이미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에 번쾌가 유계를 데려왔다. 현령이 후회하며 저들이 변고를 일으키지 않을까 겁을 먹었다. 성문을 닫고 성을 지키면서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 했다. 소하와 조참이 겁이 나서 성을 넘어 유계에게 갔다. 유계는 비단에 글을 써서 활로 성 안으로 쏘아 패현의 부로(父老)들에게 “천하가 진나라 때문에 고통을 받은 지 오래 되었다. 지금 부로들이 패현의 현령을 위해 성을 지키고 있으나 제후들이 함께 일어나 곧 패현을 도륙할 것이다. 패현이 이제 함께 현령을 죽이고 자제들 중에서 세울 만한 골라 세워서 제후에 호응한다면 집은 온전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가 함께 죽임을 당할 것이니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일렀다.
부로들이 바로 자제들을 이끌고 현령을 죽이고는 성문을 열어 유계를 맞아들여 패현의 현령으로 삼고자 했다. 유계는 “천하가 바야흐로 소란스러워 제후들이 너나할 것 없이 들고 일어나는데 지금 못한 장수를 두면 단 한번의 패배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 것이오. 내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능력이 부족하여 부모형제들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입니다. 이 큰 일은 서로 돌아가며 추천하여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소하와 조참 등은 모두 문관으로 몸을 사렸다. 일을 성취하지 못하면 진에게 집안이 멸족당할까 두려워 모두 유계에 양보했다. 여러 부로들도 모두 “평소 듣기에 유계에게는 기이한 일들이 있다고 들었소. 귀한데다 점을 쳐보니 유계가 가장 길하다고 나왔소”라고 했다. 유계도 몇 차례 사양했으나 아무도 하려는 자가 없어 유계를 패공으로 세웠다. 유계는 패현의 뜰에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 지내고, 짐승의 피를 북과 깃발에 바르는 의식을 행하고 깃발은 모두 붉은색으로 했다. 전에 죽인 뱀이 백제의 아들이고, 죽인 사람이 적제의 아들이라 해서 붉은색을 숭상하게 된 것이다. 이에 소하, 조참, 번쾌 등과 같은 젊고 걸출한 패현의 자제 2, 3천 명을 거두어 호릉(胡陵)과 방여(方與)를 공격한 다음 돌아와 풍읍을 지켰다.
진 2세 2년, 진섭의 부장인 주장(周章)이 거느리는 군대가 서쪽 희수(戲水)까지 갔다가 돌아갔다. 연, 조, 제, 위가 모두 자립하여 왕을 세웠고, 항량과 항우는 오에서 봉기했다. 진의 사천군(泗川郡) 군감 평(平)이 병사를 거느리고 풍읍을 포위했으나 이튿날 나가 싸워 격파했다. 옹치(雍齒)에게 풍읍을 지키게 하고 병사를 데리고 설현으로 갔다. 사주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설현(薛縣)으로 진격했다. 사천군 군수 장(壯)이 설현에서 패하여 척현(戚縣)으로 도망쳤다. 패공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이 사천군수 장을 잡아 죽였다. 패공은 항보(亢父)로 군대를 돌려 방여에 이르렀고 (주불이 방여를 공격하기까지) 싸움이 없었다. 진왕(陳王, 진승)은 위의 주불(周市)에게 풍읍을 공격하게 했다. 주불은 옹치에게 사람을 보내 “풍웁은 옛날 양(위)의 도읍이었다. 지금 위 땅으로 평정된 곳이 수십 개 성에 이른다. 옹치 네가 지금 위에 항복하면 위는 옹치를 후에 봉해 풍읍을 지키게 할 것이다. 항복하지 않으면 풍읍을 도륙할 것이다”라고 했다.
옹치가 평소 패공 밑에 있고 싶지 않았는데 위의 회유를 받자 바로 돌아서 위를 위해 풍을 지켰다. 패공이 병사를 이끌고 풍읍을 공격했으나 취하지 못했다. 패공이 병이 나서 패현으로 돌아갔다. 패공은 옹치와 풍읍 자제들이 배반한 것을 원망하여 동양현(東陽縣)의 영군(寧君)과 진가(秦嘉)가 경구(景駒)를 임시 황으로 삼아 유현(留縣)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경구에게로 가서 병사를 빌려 풍읍을 공격하고자 했다.
이때 진의 장수 장한(章邯)은 진왕(진섭)을 추격하고, 별장 사마인(司馬인)은 병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초 땅을 평정한 다음 상현(相縣)을 함락시키고 탕현(碭縣)에 이르렀다. 동양 사람 영군과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소현(蕭縣) 서쪽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여 병사를 수습하여 유현으로 돌아와 다시 모아 탕현을 공략하니 3일 만에 탕현을 취했다. 이에 탕현의 병사들을 거두니 5,6천에 이르렀다. 하읍(下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군을 풍읍으로 돌렸다. 항량이 설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병 100여 명을 데리고 가서 만났다. 항량은 패공에게 병졸 5천과 오대부 장수 10명을 더 보태주었다. 패공이 돌아와 병사들을 이끌고 풍읍을 공격했다.
패공이 항량을 따른 지 한 달여 항우는 이미 양성(襄城)을 함락시키고 돌아왔다. 항량은 별장들을 모두 설편으로 소집했다. 진왕의 죽음이 정말이라는 소식을 듣자 초의 후손 회왕의 손자 심을 초왕으로 세우고 우이에 도읍을 정했다. 항량은 무신군d이라 불렀다. 몇 달 뒤 북으로 항보를 공격하여 동아(東阿)를 구원하고 진의 군대를 격파했다. 제의 군대가 돌아가자 초의 군대가 홀로 북으로 추격했고, 패공과 항우에게는 별도로 성양을 공격하게 하여 도륙하고, 복양(濮陽) 동쪽에 주둔하여 진의 군대와 싸워 격파했다.
진의 군대가 다시 병력을 정비하여 복양을 지키고 해자를 팠다. 초군은 이동하여 정도를 공략했다. 정도는 함락되지 않았다. 패공은 항우와 서쪽 땅을 공략하며 옹구에 이르러 진의 군대와 싸워 대파하고 이유(李由, 이사의 아들)의 목을 베었다. 군을 돌려 외황(外黃)을 또 공격했지만 외황은 함락되지 않았다.
항량은 재차 진의 군대를 격파하자 교만한 기색을 띠기 시작했다. 송의(宋義)가 충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진은 장한에게 병력을 충원하여 밤에 (병마들에게) 하무를 물리고 항량을 공격하여 정도에 그를 대파하니 항량은 전사했다. 패공과 항우는 진류를 공격하고 있다가 항량의 죽음을 듣고는 병사를 이끌고 여신(呂臣) 장군과 함께 동쪽으로 이동했다. 여신의 군대는 팽성 동쪽에, 항우 군사는 팽성 서쪽에, 패공의 군대는 탕현에 주둔했다.
장한이 항량의 군대를 격파하자 초 지역 병사를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겨 바로 황하를 건너 북으로 조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당시 조는 조헐(趙歇)이 왕이었는데 진의 장수 왕리(王離)가 거록성(巨鹿城)에서 포위하니, 이들이 이른바 하북군(河北軍)이었다.
진 2세 3년, 초 회왕은 항량의 군대가 패하자 겁이 나서 우이에서 팽성을 도읍을 옮기고, 여신과 항우의 군대를 합쳐 자신이 이끄는 한편 패공을 탕군의 군장으로 삼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해 탕군의 병사들을 이끌게 했다. 항우는 장안후(長安侯)에 봉하고 노공(魯公)이라 부르게 했으며, 여신은 사도(司徒)에, 그의 아버지 여청(呂靑)은 영윤(令尹)에 임명했다.
조에서 계속 구원을 요청하자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에, 항우를 부장에, 범증을 말장으로 삼아 북으로 조를 구하게 했다. 패공에게는 서쪽을 공략하여 함곡관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러면서 장수들과 약조하길 관중에 먼저 들어가 평정하는 사람을 왕으로 삼겠다고 했다.
이 무렵 진의 병력은 강력한데다 승세를 타고 추격해오던 상황이라 장수들은 관중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롭다고 여기지 않았다. 항우만이 진이 항량의 군대를 격파한 것에 원한이 맺혀 분통을 터뜨리며 해공과 함께 서쪽 함곡관으로 들어가길 원했다. 회왕의 여러 원로 장수들은 모두 “항우는 사람이 사납고 교활하고 잔인합니다. 항우가 양성을 공략했을 때 영성에는 남은 것이 없이 없었습니다. 다 파묻어서입니다. 가는 곳마다 살아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초가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진왕과 항량 모두 패한 전력이 있습니다. 차라리 장자로 교체하여 인의를 베풀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진의 부형들을 회유하느니만 못합니다. 진의 부형들은 그들의 군주에게 오래 고통을 받아왔기 때문에 지금 장자가 가서 진정으로 포악하게 굴지 않는다면 함락시키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항우처럼 사나운 자를 지그 보내는 것은 안 됩니다. 패공처럼 원래 너그러운 장자라야 보낼 만합니다”라 했다.
마침내 항우를 허락하지 않고 패공을 보내어 서쪽을 공략하게 하니 진왕과 항량의 흩어진 병졸을 수습하였다. 이어 탕현을 따라 성양(成陽)에 이르러 강리(杠里)의 진군과 보루를 끼고 진의 2군을 격파했다. 초의 군대도 출병하여 왕리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다가 창읍에서 팽월과 만나 함께 진군을 공격했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철수하여 율현(栗縣)에 이르러 강무후(剛武侯)를 만나서 그의 군사 4천여 명을 빼앗아서 합쳤다. 위의 장수 황흔(皇欣), 사도(司徒) 무포(武蒲)의 군사와 함께 창읍을 공격했으나 창읍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서쪽으로 고양을 지나는데 역이기(酈食其)가 감문(監門)에게 “여러 장수가 이곳을 많이 지나갔지만 내가 보기에 패공이 대인이고 장자시오”라며 패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패공이 마침 침상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게 하고 있었다.
역생(역이기)은 절을 하지 않고 약간 길에 고개를 숙이면서 “족하께서 무도한 진을 반드시 토벌해야겠다면 그렇게 걸터앉아서 장자를 만나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이에 패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며 사죄하고 상석에 앉혔다. 역이기는 패공에게 진류를 습격하여 진의 양식을 얻으라고 권했다. 이에 역이기를 광야군(廣野君)으로 삼고 역상(酈商)을 장수로 삼아 진류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개봉(開封)을 공격으나 개봉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다시 서쪽으로 전진하여 백마(白馬)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과 싸우고, 또 곡우(曲遇) 동쪽에서 싸워 대파했다. 양웅이 형양으로 도망치니 진 2세가 사신을 보내 (양웅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렸다. 남쪽으로 영양(潁陽)을 공격하여 도륙하고 장량(張良)과 함께 한(韓)의 땅 환원(轘轅)을 공략했다.
이 즈음 조의 별장 사마앙(司馬卬)이 막 황하를 건너 함곡관에 진입하려고 했다. 패공은 바로 북으로 평음(平陰)을 공략하여 황하 나루를 끊었다. 그리고는 남하하여 낙양 동쪽에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회군하여 양성에 이르러 군중의 기병을 수습하여 남으로 남양 태수와 여의(呂齮)와 주현(犨縣) 동쪽에서 싸워 격파했다. 남양군이 공략당하자 남양태수 여의는 달아나 완성(宛城)을 지켰다. 패공이 병사를 이끌고 (완성을) 지나쳐 서쪽으로 가려 하자 장량이 “패공께서 서둘러 함곡관으로 진입하려 하시지만 진의 병사가 아직 많고 험한 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완성을 손에 넣지 못하면 완성이 뒤에서 공격하고 강력한 진이 앞에서 버티게 되니 이는 위험한 방법입니다”라고 직언했다.
이에 패공은 그날 밤으로 병사를 이끌고 다른 길로 돌아 깃발을 바꾼 다음 날이 샐 무렵 완성을 삼중으로 포위했다. 남양태수가 자결하려고 하자 그 사인 진회(陳恢)가 “나중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뒤 성을 넘어가 패공을 만나 “신은 족하께서 함양에 먼저 진입하는 사람이 왕이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족하께서는 완성에 머물러 있습니다. 완성은 큰 군의 도성으로 수십 개의 성이 이어져 있고 인구도 많으며 식량도 많이 비축되어 있습니다. 관리와 인민이 항복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모두 성을 굳게 지키려 합니다. 지금 족하께서 하루 종일 이곳을 공격하게 되면 사상자가 많을 것이 뻔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완성을 떠나시면 완성은 틀림없이 족하의 뒤를 쫓을 것입니다. 족하께서 전자를 따르면 함양의 약속을 잃게 되고, 후자를 따를 경우 완성의 후환이 있게 됩니다. 족하를 위해 계책을 올립니다. 항복을 약속받아 완성 태수를 봉하여 그에게 이곳을 지키게 하고는 족하께서는 병졸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시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아직 함락되지 않은 성들도 이 이야기를 듣고 다투어 성문을 열고 기다릴 것이고, 족하의 통행도 걸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패공은 “좋다”고 답하고 바로 완성의 태수를 은후(殷侯)에 봉하고, 진회에게 1천 호를 봉해 주었다. 이어 병사를 이끌고 서진하니 항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단수(丹水)에 이르니 고무후(高武侯) 새(鰓)와 양후(襄侯) 왕릉(王陵)이 서릉(西陵)에서 투항했다. 다시 돌려 호양(胡陽)을 공략하고 파군(番君)의 별장 매현(梅鋗)과 함께 석현(析縣)과 여현(酈縣)을 항복시켰다. 위 사람 영창(寧昌)을 진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사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때 장한은 이미 조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항우에게 투항했다.
당초 항우는 송의와 북으로 조를 구원하러 나섰다가 항우가 송의를 죽이고 그를 대신해서 상장군이 되었고, 경포 등 여러 장수들이 모두 (항우에) 속되어 진의 장수 왕리를 격파하고 장한을 항복시키니 제후들이 모두 엎드렸다.
조고가 진 2세를 시해한 뒤 사신을 보내 관중을 나누어 각자 왕이 될 것을 약조하려 했다. 패공은 이를 거짓으로 판단하여 바로 장량의 계책대로 역생과 육고(陸賈)를 보내 진의 장수들을 설득하고 이익을 유혹한 다음 바로 무관을 습격하여 격파했다. 또 진의 군대와 남전(籃田) 남쪽에서 싸웠는데, 가짜 병사와 깃발을 늘리고 지나는 곳에서 약탈을 하지 못하도록 하니 진 사람들이 기뻐했고 진의 군사들은 해이해져 대파할 수 있었다. 또 그 북쪽에서도 싸워 대파하고, 승세를 타고 마침내 무찔렀다.
한 원년(기원전 206년) 10월, 패공의 군대가 마침내 제후들에 앞서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진왕 자영(子嬰)은 흰 수레에 흰 말을 타고 목에는 줄을 맨 채 황제의 옥새와 부절을 봉하여 지도(軹道) 근처에서 항복했다. 장수들 중 누군가가 진왕을 죽이자고 했다. 패공은 “처음 회왕께서 나를 보낸 것은 관용을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하셔서였다. 게다가 항복해온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라 했다. 진왕을 관리에게 맡기고 마침내 서쪽으로 함양에 입성했다. 궁중에 머물며 편히 쉬려고 하자 번쾌와 장량이 충고했다. 이에 진의 보물과 재물 창고를 봉쇄한 다음 군을 패상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여러 현의 부로와 호걸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로들께서 진의 가혹한 법에 시달린 지 오랩니다. 비방하면 가족을 죽였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저잣거리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내가 제후들과 약속하길 관중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왕이 되기로 했습니다. 내가 관중의 왕이 되면 부로들과 법을 세 항목으로 줄일 것을 약속하니,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처를 입히거나 훔친 자는 그에 따라 처벌할 것입니다. 나머지 진의 법은 모두 없애겠습니다. 관리와 인민들은 모두 전처럼 편안하게 지내면 됩니다. 대저 내가 온 것은 부로들을 위해 해악을 없애기 위해서이지 포악한 짓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겁먹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군을 패상으로 돌리는 것은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약속을 확정하려는 것일 뿐이오.”
이어 사람을 시켜 진의 관리와 함께 현, 향, 읍을 돌면서 이를 알리게 했다. 진의 인민들은 크게 기뻐하며 앞을 다투어 소와 양, 술과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바치려 했다. 패공은 사양하고 받지 않으며 “창고에 양식이 많아 모자라지 않으니 인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인민들이 더욱 더 기뻐하며 행여나 패공이 진의 왕이 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누군가 패공에게 “진의 부우함은 천하의 열 배나 되고 지형은 강합니다. 지금 듣자하니 장한이 항우에게 항복하고, 항우는 그를 옹왕이라 부르며 관중의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지금 (장한이) 온다면 패공께서는 이곳을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둘러 병사를 보내 함곡관을 지켜 제후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관중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병력을 더 보태서 막으십시오”라고 건의했다. 패공은 그 계책을 옳다고 여겨 따랐다.
11월 중, 항우가 과연 제후의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함곡관에 진입하려 했으나 관문은 닫혀 있었다. 패공이 이미 관중을 평정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경포 등에게 함곡관을 공격 돌파하라고 했다. 12월 중, 마침내 희수에 이르렀다.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이 항왕이 화가 나서 패공을 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항우엑게 “패공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을 재상으로 삼아서 진귀한 보물들을 다 차지하려 합니다”라고 했다.
이런 말로 자리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아보(범증)가 항우에게 패공을 공격하라고 권했다. 이에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날이 새면 한바탕 싸울 준비를 했다. 이 때 항우의 병력은 40만인데 1백만이라 했고, 패공의 병력은 10만인데 20만이라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항백은 장량을 살리려고 밤에 장량을 만나러 갔고, 이어 항우를 말로 이해시키니 항우는 (공격을) 중지시켰다. 패공은 100여 기병을 데리고 홍문으로 달려가 항우를 만나 사죄했다. 항우는 “이 일은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이 한 말 때문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이 항적이 어찌 그럴 수 있겠소”라고 했다. 패공이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벗어나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조무상을 죽였다.
항우는 마침내 서쪽으로 나아가 함양 진의 궁실을 도륙하니 가는 곳마다 파괴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진의 인민들의 크게 실망했으나 두려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우가 사람을 보내 회왕에게 보고했다. 회왕은 “약속대로 하라”고 했다. 항우는 회왕이 패공과 함께 서쪽 함곡관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고 북으로 조를 구원하게 하는 바람에 천하의 약속에 뒤처진 것을 원망했다. 이에 “회왕은 우리 집안 항량 숙부께서 세운 사람일 뿐이다.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약속을 주도할 수 있단 말인가? 본디 천하를 평정한 것은 여러 장수들과 나 항적이다”라 하고는 짐짓 회왕을 의제로 높였으나 실제로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정월, 항우가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자립하여 양, 초의 땅인 아홉 개 군의 왕이 되고 팽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약속을 어기고 패공을 한왕으로 바꾸어 파, 촉, 한중의 왕으로 삼고 남정에 도읍하게 했다. 관중을 셋으로 나누어 진의 세 장수를 세워니, 장한을 옹왕으로 삼아 폐구를 도읍으로 정하고, 사마흔을 새왕으로 삼아 역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예는 적왕으로 삼아 고노를 도읍으로 삼게 했다. 초의 장수 하구신양은 하남왕으로 삼아 낙양을 도읍으로, 조의 장수 사마앙을 은왕으로 삼아 조가를 도읍으로, 조왕 헐은 대 지역으로 옮겨 그곳 왕이 되게 했다. 조의 승상 장이는 상산왕으로 삼아 양국을 도읍으로 삼게 했다. 당양 경포를 구강왕으로 세워 육현을 도읍으로, 회왕의 주국 공오를 임강왕으로 세워 강릉을 도읍으로, 파군 오예를 형산왕에 삼아 주읍을 도읍으로, 연의 장수 장도를 연왕으로 세워 계현을 도읍으로 삼게 했다. 과거 연왕이었던 한광은 요동으로 옮겨 왕으로 삼았으나 한광이 듣지 않자 장도가 그를 공격하여 무종에서 죽였다. 성안군 진여에게는 하간의 세 현에 봉하여 남피에 머물게 하고, 매현에게는 10만 호에 봉했다.
4월, 희수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제후들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한왕이 봉국으로 갈 때 항왕은 병졸 3만을 따르게 했는데 초와 제후들 중에서도 따르는 자가 수만이었다. 두현(杜縣) 남쪽을 따라 식(蝕)으로 들어갔는데 지나온 잔도(棧道)를 불태워 끊어버림으로써 제후와 도적의 습격을 방비하는 한편 항우에게 동쪽으로 갈 뜻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남정(南鄭)에 도착할 무렵 도망쳐 돌아간 장수와 사졸들이 많았다. 사졸들은 모두 노래를 부르며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한신이 한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항우가 장수들 중 공을 세운 사람들을 왕으로 봉했는데 왕만 남정에 머물게 한 것은 내쫓은 것입니다. 우리 군의 장교와 병사들은 모두 산동 출신 사람들로 낮이나 밤이나 발꿈치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그러니 이런 날카로운 기세를 활용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가 평정되고 사람들 모두 안녕을 찾으면 더는 활용할 수 없습니다. 대책을 마련하여 고향이 있는 동쪽으로 나가 천하의 패권을 쟁취하느니만 못합니다.”
항우는 함곡관을 나서자 사람을 보내 의제를 옮기게 하면서 “옛날 제왕들의 땅은 사방 천 리에 늘 강의 상류에 거처했습니다”라 했다. 그리고는 사신으로 하여금 의제를 장사 침현으로 옮기게 하고 의제의 행차를 재촉했다. 신하들이 점점 의제를 배반하자 은밀히 형산왕과 임강왕에게 의제를 공격하게 하여 강남에서 의제를 죽였다. 항우는 전영에게 원한이 있어 제의 장수 전도를 제왕으로 세웠다. 전영이 노하여 스스로 제왕이 되어 전도를 죽이고 초를 배반하고는 팽월에게 장군의 도장을 주어 양의 땅에서 반발하게 했다. 초는 소공 각에게 팽월을 공격하게 했으나 팽월이 그를 대파했다. 진여는 항우가 자신을 왕에 봉하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하열(夏說)에게 전영을 설득하게 해 군대를 요청하여 장이를 공격하게 했다. 제가 진여에게 병사를 주자 상산왕 장이를 격파했고, 장이는 한왕에게로 도망쳐 귀순했다. (진여는) 조왕 헐을 대에서 맞이하여 다시 조왕으로 세웠다. 조왕은 진여를 대 지역의 왕으로 삼았다. 항우는 크게 성이 나서 북으로 제를 공격했다.
8월, 한왕이 한신의 계책을 써서 옛길을 따라 돌아서 옹왕 장한을 습격했다. 장한은 진창(陳倉)에서 한을 맞이하여 공격했으나 옹(장한)의 군대가 패하여 도주했다. 호치(好畤)에서 다시 싸웠지만 또 패하여 폐구로 도망쳤다. 한왕이 마침내 옹 지역을 평정하고 동으로 함양에 이르러 병사를 이끌고 폐구에서 옹왕을 포위했다. 또 여러 장수들을 보내 농서, 북지, 상군을 공략하여 평정했다. 장군 설구(薛歐), 왕흡(王吸)에게는 무관을 나가 남양의 왕릉의 군대와 함께 태공과 여후를 패현에서 모셔오게 했다. 초가 이를 알고는 군대를 내어 양하에서 막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과거 오현 현령이었던 정창을 한왕으로 삼아 한의 군대를 막게 했다.
2년(기원전 205년), 한왕이 동쪽 지역 공략에 나섰다.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 하남왕 신양이 모두 투항했다. 한왕 정창이 말을 듣지 않자 한신에게 격파하게 했다. 그리하여 농서, 북지, 상군, 위남(渭南), 하상(河上), 중지(中地) 등의 군을 두었다. 함곡관 밖에는 하남군(河南郡)을 설치했다. 다시 한태위(韓太尉) 신(信)을 한왕(韓王)으로 세우고, 장수들 중 1만 명의 병사나 군 하나를 바치고 투항하면 만호후에 봉했다. 하상군(河上郡)에 요새를 쌓고 옛날 진의 여러 유원지를 인민들이 농사짓게 해주었다. 정월, 옹왕 장한의 아우 장평(章平)을 사로잡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한왕은 무관을 나가 섬현(陝縣)에서 관 밖의 부로들을 다독이고 돌아왔다. 장이가 와서 인사를 드리자 한왕이 후하게 대우했다.
2월, 진의 사직단을 철거하고 한의 사직단으로 다시 세웠다.
3월, 한왕은 임진관(臨晉關)에서 황하를 건너자 위왕(魏王) 표(豹)가 병사를 이끌고 따랐다. 하내를 함락시키고 은왕을 포로로 잡은 다음 하내군을 두었다. 남으로 평음진(平陰津)을 건너 낙양에 이르렀다. 신성(新城)의 삼로(三老) 동공(董公)이 한왕을 가로막고는 의제가 죽은 상황을 말했다.한왕이 이를 듣고는 왼쪽 어깨를 드러낸 채 크게 통곡하고는 마침내 의제를 위하여 상을 발표하고 사흘 동안 곡하고는 사신을 보내 제후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천하가 함께 의제를 옹립하여 북면하고 섬겼다. 지금 항우가 멋대로 의제를 강남에서 죽이니 대역무도한 짓이다. 과인 몸소 상을 발표하니 제후들은 모두 소복을 입으라. 관중의 병사를 모두 징발하고 삼하(하동, 하남, 하내)의 무리를 거두어 남으로 장강과 한수를 따라 내려갈 것이니 원컨대 제후왕들은 나를 따라 의제를 죽인 초를 공격하라!”
이때 항왕은 북으로 제를 공략하여 전영과 성양에서 싸웠다. 전영이 패하여 평원으로 달아나자 평원 인민들이 그를 죽였다. 제가 모두 초에 항복했으나 초는 그 성곽에 불을 지르고 자녀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에 제 인민들이 초에 반발하니 전영의 동생 전힝이 전영의 아들 전광을 제왕으로 세웠다. 제왕 전광은 성양에서 초에 반기를 들었다. 항우는 한이 동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미 제의 군대와 잇따라 싸우는 이들을 격파한 다음 한을 공격하고자 했다. 한왕이 이참에 다섯 제후의 군대를 겁박하여 마침내 팽성에 입성했다.
항우가 이를 듣고는 바로 군대를 끌고 제를 떠나 노현에서 호릉을 나와 소현에 이르러 한의 군대와 평성, 영벽(靈壁) 동쪽의 수수(睢水)에서 크게 싸워 한의 군대를 대파했다. 많은 사졸들이 죽어 수수가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이어 한왕의 부모와 처자식을 잡아 군중에 인질도 잡아 두었다. 당시 제후들은 강한 초와 패한 한을 보고는 다시 한을 떠나 초 편에 붙었다. 새왕 사마흔이 도망쳐 초로들어갔다.
여후의 오빠 주여후(周呂侯)는 한을 위해 병사를 거느리고 하읍(下邑)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왕이 그곳으로 가서 차츰 사졸들을 수십하여 탕현에 주둔했다. 이어 한왕은 서쪽으로 양 지역을 지나 우현(虞縣)에 이르러 알자(謁者) 수하(隨何)를 구강왕 경포가 있는 곳으로 보내면서 “공이 경포로 하여금 병사를 내서 초를 배반하게 만들면 항우는 틀림없이 그곳에 머무르면서 경포를 공격할 것이다. 몇 달만 머무르게 만들면 내가 천하를 취하는 것은 틀림없어진다”라고 했다. 수하가 가서 구강왕 경포에게 유세했고, 경포는 과연 초를 배반했다. 초는 용저(龍且)를 보내 그를 치게 했다.
한왕이 팽성에서 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사람을 보내어 가족을 찾았으나 가족 역시 도망쳐 만날 수가 없었다. 도망치다가 효혜(孝惠)만 찾아서 6월에 태자로 세우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태자에게 역양(櫟陽)을 지키게 하고, 제후의 자식들로서 관중에 있는 자들도 모두 역양으로 불러들여 지키게 했다. 물을 끌어들여 폐구로 흐르게 하니 폐구는 항복하고 장한은 자살했다. 폐구란 이름을 괴리(槐里)로 바꾸어 불렀다. 이에 제사관에게 천지, 사방, 상제, 산천에 제사 지내도록 명하고 이후로는 때 맞추어 제사드리도록 했다. 관중의 병졸을 일으켜 변방 요새를 지키게 했다.
한편 구강왕 경포는 용저와 싸워 이기지 못하자 수하와 함께 샛길을 통해 한으로 돌아왔다. 한왕은 점차 사졸들을 거두어서 여러 장수 및 관중의 병졸을 더 보태어서 출정하니 형양이 크게 떨었고, 초의 경현과 색성 지역을 격파했다.
3년(기원전 204년), 위왕 표가 부모의 병을 돌보러 귀가를 요청하여 돌아갔는데 도착하자마자 항하 나루를 끊고 초로 돌아섰다. 한왕이 역이기를 보내 표를 설득했으나 표는 듣지 않았다. 한왕은 장군 한신을 보내 공격하여 대파하고 표를 포로로 잡았다. 마침내 위 지역이 평정되었고, 하동, 태원, 상당 세 개의 군을 설치했다. 한왕은 이어 장이와 한신에게 동쪽 정경을 취하고 조를 공격하게 하여 진여와 조왕 헐의 목을 베었다. 이듬해 장이를 조왕으로 세웠다.
한왕은 형양 남쪽에 주둔하면서 황하로 통하는 용도(甬道)를 쌓아 오창(敖倉)의 양식을 거져왔다. 이렇게 항우와 1년 넘게 대치했다. 항우는 일쑤 한의 용도를 침탈하여 한의 군대 식량이 부족해지자 마침내 한왕을 포위했다. 한왕이 강화를 청하여 형양 서쪽을 한으로 땅으로 떼어달라고 했으나 항왕은 듣지 않았다. 한왕이 이것이 걱정이 되어 진평의 계책을 채용하여 진평에게 금 4만 근을 주고 초의 군신 사이를 이간질시켜 멀어지게 했다. 이에 항우는 아보를 의심했다. 이 때 아보는 항우에게 형양을 공격하자고 권했는데 자신이 의심받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서 나이를 핑계로 사직하여 고향을 돌아가길 원했다. 그러나 팽성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한군의 식량이 바닥이 났다. 이에 밤중에 여자들 2천여 명에게 갑옷을 입혀 동문으로 나가게 했고 초는 사방에서 이들을 공격했다. 장군 기신이 한왕의 수레를 타고 한왕인 것처럼 초를 속이니 초는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성 동쪽으로 와서 구경했다. 이 사이에 한왕은 기병 수십과 서쪽 문을 통해 달아났다. (한왕은) 어사대부 주가(周苛), 위표(魏豹), 종공(樅公)에게 형향을 지키게 했는데, 따를 수 없는 장수와 병졸들은 모두 성안에 남아 있었다. 주가와 종공이 서로에게 “나라를 배반한 왕과는 성을 지키기 어렵다”며 위표를 죽였다.
한왕은 형양에서 탈출하여 관중으로 들어가 병사들을 수습하여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려 했다. 원생(袁生)이 한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과 초가 형양을 사이에 두고 몇 년을 지내고 있는데 한이 늘 곤란했습니다. 바라옵건대 군왕께서 무관을 나가시면 항우가 틀림없이 병사를 끌고 남쪽으로 갈 것이니 왕께서는 보루를 높이 쌓은 채 형양과 성고를 쉬게 하십시오. 한신 등에게는 하북 조 지역을 안정시키게 하시고, 연과 제와 연합한 다음 군왕께서 다시 형양으로 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초는 지켜야 할 곳이 많아져 병력이 분산되는 반면 한은 휴식을 얻어 다시 싸우면 초를 격파하는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한왕은 그의 계책에 따라 완성과 섭현 지역을 나와 경포와 함께 다니며 병사들을 수습했다.
항우는 한왕이 완성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과연 병사를 이끌고 남하했다. 한왕은 보루를 견고히 하고 싸우지 않았다. 이때 팽월이 수수를 건너서 항성(項聲), 설공(薛公)과 하비에서 싸우니 팽월은 초군을 대파했다. 항우는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팽월을 공격했고, 한왕도 병사를 이끌고 북으로 올라가 성고에 주둔했다. 항우는 팽월을 격파하고 한왕이 다시 성고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다시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형양을 함락시키고는 주가와 종공을 죽이고 한왕(韓王) 신(信)을 포로로 잡아 드디어 성고를 포위했다.
한왕은 등공만 데리고 수레를 타고 성고의 옥문으로 탈출했다. 북으로 황하를 건너 말을 달려 수무에 묵었다. 스스로를 사신이라 하며 새벽에 말을 몰아 장이와 한신의 보루에 들어가 그들의 군대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장이를 북으로 보내 조 땅에서 병사들을 더 모으게 하고, 한신에게는 동쪽으로 제를 공격하게 했다. 한왕은 한신의 군대를 얻자 다시 사기가 올랐다. 병사를 이끌고 황하에 이르러 남쪽을 바라고보 소수무(小修武) 남쪽에 주둔하여 다시 싸우고자 했다. 낭중 정충(鄭忠)이 한왕을 말리면서, 보루와 참호를 높고 깊게 하고 싸우지 말라고 했다. 한왕은 그 계책에 따라 노관(盧綰), 유고(劉賈)에게 병사 2만, 기병 수백을 이끌고 백마진을 건너서 초 땅으로 들어가서는 팽월과 함께 연현(燕縣) 성곽 서쪽에서 다시 초의 군대를 치게 하여 마침내 양의 땅 10여 성을 다시 함락시켰다.
회음후(淮陰侯, 한신)가 명을 받고 동쪽으로 평원진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한왕은 역생을 제앙 전광에게 보내 설득하여 전광이 초를 배신하고 한과 강화하여 함께 항우를 공격하기로 했다. 한신은 괴통(蒯通)의 계책에 따라 제를 습격하여 격파했다 제왕은 역생을 삶아 죽이고 동쪽 고밀로 달아났다. 항우는 한신이 이미 하북의 병사들을 일으켜 제, 조를 격파하고 초를 치려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용저와 주란을 보내 한신을 치게 했다. 한신이 맞이하여 싸우는데, 기장 관영이 출격하여 초군을 대파하고 요저를 죽였다. 제왕 전광은 팽월에게 도망쳤다. 이때 팽월은 군대를 양 지역에 주둔시켜 놓고 오가며 식량 운반로를 끊는 등 초의 병사들을 힘들게 했다.
4년(기원전 203년), 항우는 해춘후 대사마 조구에게 “삼가 성고를 지켜라. 한이 도전해 오더라도 신중을 기하고 나가 싸우지 말라. 동쪽으로 못 나가게 하면 그만이다. 내가 보름이면 틀림없이 양 지역을 평정하고 다시 장군과 합류할 것이다”라고 일렀다. 바로 진류, 외황, 수양을 쳐서 함락시켰다. 한군이 과연 초군에게 몇 차례 도발했으나 초군은 나오지 않았다. 이에 사람을 보내 대엿새 동안 욕을 해대자 대사마는 화가 나서 병사를 이끌고 사수를 건넜다. 사졸들이 반쯤 건넜을 때 한이 공격하여 초군을 대파하고 초국의 금은보화와 재물을 모조리 얻어갔다. 대사마 조구, 장사 사마흔은 모두 사수에서 스스로 목을 그어 자결했다. 항우가 수양에 이르러 해춘후가 격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한군은 그 때 형양 동쪽에서 종리매(鍾離眛)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항우가 도착하자 모두 험준한 곳으로 달아났다.
한신은 제를 격파하고는 사람을 보내 “제는 초와 붙어 있습니다. 권력이 약하기 때문에 임시 왕 정도로 해주시지 않으면 제를 안정시키지 못할까 걱정입니다”라고 했다. 한왕이 한신을 치고자 하였으나 유후(장량)가 “이참에 임시 왕으로 세워서 알아서 지키기 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장량에게 도장과 끈을 주어 한신에게 보내 제왕으로 삼게 했다.
항우는 용저의 군이 패했다는 소식에 두려움을 갖고 우이 사람 무섭을 보내 한신을 설득하게 했으나 한신은 듣지 않았다. 초한이 서로 오래 대치했으나 결판이 나지 않자 장정들과 병사들은 군 생활을 힘들어 하고 노약자들은 식량 운반에 지쳤다. 한왕과 항우는 광무산(廣武山)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화했다. 항우가 한왕과 단 둘이 싸우자고 도전했으나 한왕은 항우의 잘못을 꼽으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 항우 너와 함께 회왕의 명을 받아 관중을 먼저 평정하는 자가 왕이 되기로 했으나 항우는 너는 약속을 어기고 나를 촉한의 왕이 되게 했다. 이것이 너의 첫 번째 죄이다. 항우 너는 왕명이라 속여 경자관군(송의)을 죽였다. 이것이 너의 두 번째 죄이다. 항우 너는 조를 구원하고 돌아와 보고해야 하거늘 멋대로 제후들을 겁박하여 관중에 진입하게 했다. 이것이 세 번째 죄이다. 회왕이 진에 들어가 폭력과 약탈을 하지 말라 했거늘 항우 너는 진의 궁실에 불을 지르고 시황제의 무덤을 도굴하여 사사로이 그 죄물을 거두어 갔다. 이것이 네 번째 죄이다. 또 항복한 진의 왕 자영을 함부로 죽였다. 이것이 다섯 번째 죄이다. 진의 자제 20만을 신안에서 속여서 생매장하고 그 장수를 왕으로 봉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죄이다. 항우 너는 너와 가까운 장수들은 모두 좋은 땅에 왕으로 봉하고 옛날 주인들은 내쫓아 신하들이 다투어 배반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죄이다. 항우는 너는 의제를 팽성에서 내쫓고 너의 도읍으로 삼고, 한왕의 땅을 빼앗고 양, 초를 병합하여 자신이 차지하였다. 이것이 여덟 번째 죄이다. 항우는 너는 사람을 시켜 강남에서 의제를 살해했다. 이것이 아홉 번째 죄이다. 무릇 신하된 자가 주군을 시해하고, 항복한 사람을 죽이고, 정치를 공평하게 하지 않고, 약속을 하고도 믿을 저버렸으니 천하가 용납할 수 없는 대역무도한 짓이다. 이것이 열 번째 죄이다. 내가 의로운 군대를 내어서 제후들과 도적을 토벌하고 죄를 지은 죄수들로 하여금 너를 죽이게 하면 될 것인데 뭣하러 힘들게 너와 싸운단 말인가.”
항우가 크게 성이 나서 숨겨온 쇠뇌를 쏘아 한왕을 맞추었다. 한왕은 가슴에 부상을 입었으나 바로 발을 어루만지며 “저 도적놈이 내 발가락을 맞추다니”라고 했다. 한왕은 상처 때문에 자리에 누웠더니 장량이 억지로 한왕을 일어나게 하여 군영을 돌며 병사들을 위로하며 사졸을 안심시켜 초가 이 틈에 한과 싸워 승리할 수 없게 했다. 한왕이 나가 군영을 돌았으나 병은 더 심해져 성고로 서둘러 들어갔다.
병이 낫자 서쪽 관중으로 들어가 역양에 이르러 부로들을 위문하고 술자리를 베푸는 한편 새왕 사마흔의 머리를 역양 저자거리에 효수했다. 넉 달을 머무르고 다시 군중으로 돌아와 광무에 주둔시키니 관중의 병사들이 더욱 늘었다.
이때 팽월은 병사를 이끌고 양 지역에 주둔한 채 오가며 초의 군대를 괴롭히며 군량 수송을 끊었다. 전광이 가서 팽월을 따랐다. 항우가 여러 차례 팽성 등을 공격했으나 제왕 한신도 초를 공격했다. 항우가 두려와 한왕과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홍구를 경계로 서쪽은 한이, 동쪽은 초가 갖기로 약속했다. 항왕이 한왕의 부모와 처자식을 돌려보내자 군중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각자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항우가 해산하고 동쪼으로 돌아가자 한왕도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유후(장량)와 진평의 계책에 따라 군대를 진격시켜 항우를 뒤쫓았다. 하양 남쪽에 멈추어 주둔하며 제왕 한신, 건성후 팽월과 날을 정해 합류하여 초의 군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고릉까지 왔으나 이들이 오지 않았다. 초가 한의 군대를 공격하니 대패했다. 한왕이 다시 보루에 들어가 참호를 깊이 파고 수비에 들어갔다.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이니 그제서야 한신과 팽월이 왔다. 유고가 초 지역으로 들어가 수춘을 포위했으나 한왕은 고릉에서 패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대사마 주은을 불러 구강의 군대를 동원하여 무왕(경포)을 맞아들여 성보를 도륙하게 하니 유고를 따라 제, 양의 제후들이 모두 해하에 대대적으로 모여들었다. 무왕 경포를 회남왕으로 세웠다.
5년(기원전 202년), 고조(한왕)가 제후군과 함께 초군을 공격하여 해하에서 항우와 승부를 지었다. 회음후는 30만으로 직접 맞섰고, 공장군(孔將軍)은 그 왼쪽에, 비장군(費將軍)은 그 오른쪽에 진을 쳤다. 황제(한왕)는 뒤에, 강후(주발)와 시장군(柴將軍)은 황제의 뒤에 위치했다. 회음후가 먼저 겨루었으나 불리하여 물러났다. 공장군과 비장군이 협공하자 초의 군대가 불리해졌다. 회음후가 그 틈에 다시 공격하여 해하에서 대파했다. 항우는 한군이 부르는 초의 노래를 듣고는 한이 초의 땅을 다 차지한 것으로 알았다. 항우가 패하여 달아나니 군대를 크게 패했다. 기장 관영에게 항우를 추격하게 하여 동성에서 죽이고 8만의 목을 베니 마침내 초의 땅을 평정할 수 있었다. 노현이 초를 위하여 굳게 지키는 통에 함락시키지 못했다. 한왕이 제후군을 이끌고 북으로 가서 노현의 부로들에게 항우의 머리를 보이자 노현이 바로 항복했다. 노공이란 호칭으로 항우를 곡성에다 장례를 지냈다. 정도로 돌아와 제왕(한신)의 보루를 쳐들어가 그 병권을 빼앗았다.
정월, 제후와 장상들이 함께 모여 일제히 한왕을 황제로 추대하길 청했으나 한왕은 “내가 듣기에 황제는 어진 자가 가지는 것이라 했소. 공허한 이름만 있는 자리는 내가 지켜 낼 수 있는 바가 아니오. 나는 황제 자리를 감당할 수 없소이다”라 했다. 군신들이 모두가 “대왕께서 보잘것없는 몸을 일으키어 포악하고 대역무도함을 토벌하고 사해를 평정하시어 공을 세운 자에게는 땅을 나누어 왕후로 봉하셨습니다. 대왕께 존호를 받들지 않으면 모두가 믿지 않고 의심할 것입니다. 신들은 죽음으로 이를 지켜낼 것입니다”라고 했다. 한왕이 세 번 사양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제군들이 꼭 그렇다면, 나라를 위해 좋다면야”라고 했다. 갑오일, 한왕이 범수(氾水) 북쪽에서 황제 자리에 올랐다.
황제가 “의제에게 후사가 없으니 초의 풍습을 잘 아는 제왕 한신을 초왕으로 삼아 옮기고 하비를 도읍으로 삼으라”고 했다. 건성후 팽월은 양왕(梁王)으로 삼고 정도(定陶)를 도읍으로 정했다. 옛 한왕 신(信)을 한왕으로 삼고 양책(陽翟)을 도읍으러 삼았다.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를 장사왕(長沙王)으로 옮기고 임상(臨湘)에 도읍하게 했다. 파군(番君, 오예를 가리킴)의 장수 매현(梅鋗)이 무관에 입관할 때 공을 세웠으므로 파군에 사례했다. 회남왕 경포, 연왕 장도, 조왕 장오는 모두 전과 같게 했다.
천하가 크게 평정되었다. 고조는 낙양에 도읍했고, 제후들이 모두 신하로 복속했다. 전에 임강왕(臨江王) 공환(共驩)은 항우를 위해서 한에 반기를 들어 노관과 유고에게 포위하게 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으나 몇 달 뒤 항복해와 낙양에서 그를 죽였다.
5월, 병사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제후의 자제로 관중에 남아 있는 자에게는 12년간 부역을 면제해주고, 돌아간 자에게는 6년간 부역을 면제해주고 1년 동안 먹여주었다.
고조가 낙양 남궁(南宮)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제후들과 장수들은 짐을 속이지 말고 모두 마음을 이야기해보라.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가? 또 항씨(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는 오만하셔서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항우는 어질어서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폐하는 사람을 부려 성과 땅을 공략하게 하여 항복시키면 그것을 나누어 주어 천하와 함께 이익을 함께 합니다. 항우는 어질고 유능한 자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공을 세우면 해치고 어질면 의심합니다. 싸워 승리해도 그 사람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땅을 얻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 이익을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가 천하를 잃은 까닭입니다.”
고조가 말했다.
“공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서 천 리 밖에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라면 나는 자방(子房, 장량)만 못하다.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독거리고, 먹을 것을 공급하되 식량 운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몰아 싸웠다 하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것이라면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들이다. 내가 이들을 기용할 수 있었고,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항우에게는 범증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마저 기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내게 붙잡힌 까닭이다.”
고조가 낙양에 오래도록 도읍하려고 했다. 제 사람 유경(劉敬)과 유후(留侯, 장량)가 관중으로 들어가길 권하여 고조는 그 날로 어가를 몰아 관중에 들어가 도읍을 정했다. 6월,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10월,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 지역을 공략했다. 고조는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에 나서 연왕 장도를 잡고 바로 태위(太尉) 노관(盧綰)을 연왕으로 세웠다. 승상 번쾌(樊噲)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대를 공략하게 했다.
이해 가을, 이기(利幾)가 모반했다. 고조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치자 이기는 달아났다. 이기는 항우의 장수였다 항우가 패할 때 이기는 진현의 현령이었는데 항우를 따르지 않고 고조에게 도망쳐와 투항하여 고조가 영천후에 봉했다. 고조가 낙양에 이르러 명부의 제후들을 모두 부르자 이기가 겁을 먹고 반란을 일으켰다.
6년(기원전 201년), 고조는 닷새에 한 번씩 태공(太公, 고조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평민들 부자간의 예와 같았다. 태공의 집안을 돌보는 신하가 태공에게 “하늘에는 해가 둘일 수 없고, 땅에는 왕이 둘일 수 없습니다. 지금 고조가 자식이긴 하지만 인민들의 주인이고, 태공께서는 아비이긴 하지만 신하이시기도 합니다. 어찌 인민의 주인으로 하여금 신하에게 인사를 올리게 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위제대로 서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 뒤로 고조가 인사를 드리러 오자 태공은 빗자루를 든 채 문 앞에서 맞이하면서 뒷걸음을 치니 고조가 깜짝 놀라 어가에서 내려 태공을 부축했다. 태공은 “황제는 인민의 주인이거늘 내가 어찌 천하의 법을 어지럽힐 수 있겠소이까”라고 했다. 이에 고조는 태공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존하고, 속으로 태공 집 신하의 말을 좋게 여겨 금 500근을 내렸다.
12월, 누군가가 변란 사건을 보고하면서 초왕 한신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했다. 주상이 좌우에게 물으니 좌우는 서로 서로 쳐야 한다고 했다. 진평의 계책을 써서 운몽으로 놀러가는 척하여 진현에서 제후들을 불러 모았다. 초왕 한신이 맞이하러 나오자 바로 그를 잡았다. 그날 고조는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전긍(田肯)이 축하를 올리며 고조에게 이런 말을 올렸다.
“폐하께서는 한신을 잡고 또 관중에 도읍을 정하셨습니다. 진은 지리적 형세가 뛰어나 험준한 황하와 효산이 띠처럼 두르고 있는 것이 (다른 나라들과) 천 리나 차이가 납니다. 백 만 군사를 진은 그 절반이면 됩니다. 지세가 편리하여 그 아래 제후들에게 군대를 사용하는 것도 마치 높은 집 처마 끝의 물받이 병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편합니다. 제는 동쪽으로 풍요로운 낭야(琅邪)와 즉묵(卽墨)이 있고, 남으로 험준한 태산이 있으며, 서쪽으로 황하가 가로막고, 북쪽으로 발해(渤海)라는 이점이 있습니다. 땅은 사방 2천 리에 군대는 100만에 천 리 밖에 떨어져 있어 제는 다른 나라 10만일 때 5만이면 됩니다. 그래서 동쪽 진, 서쪽 진이라 합니다. 가까운 자제가 아니면 제왕을 시켜서는 안 됩니다.”
고조가 “좋다”라고 하고는 황금 500근을 내렸다.
10여 일 뒤 한신을 회음후(淮陰侯)에 봉하고 그 땅을 두 나라로 나누었다. 고조는 장군 유고가 여러 차례 공로를 세웠기에 형왕(荊王)으로 삼아 회하 동쪽 지역의 왕이 되게 했다. 동생 유교(劉交)를 초왕(楚王)으로 삼아 회하 서쪽의 왕이 되게 했고, 아들 유비(劉肥)를 제왕(齊王)으로 삼아 70여 성의 왕이 되게 하여 제의 말을 할 수 있는 인민은 모두 제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공을 논하여 여러 제후들에게 부절을 쪼개 제후들에 봉했다. 한왕 신을 태원으로 옮기게 했다.
7년(기원전 200년), 흉노가 마읍(馬邑)에서 한왕 신을 공격하자, 신은 이 틈에 태원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백토(白土)의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도 옛 조의 장수였던 조리(趙利)를 왕으로 세워 모반했다. 고조가 몸소 가서 그들을 쳤다. 때가 겨울이라 사졸들 열에 두 셋은 손가락이 얼어 떨어져 나갔다. 결국 평성(平城)으로 물러났는데 흉노는 고조를 평성에서 포위했다가 7일만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번쾌에세 대 지역에 남아서 평정하게 하고 형님 유중(劉仲)을 대왕으로 세웠다.
2월, 고조는 평성에서 조와 낙양을 지나 장안에 도착했다. 장락궁(長樂宮)이 완공되자 승상 이하 관리들을 장안으로 옮겨 다스렸다.
8년(기원전 199년), 고조는 동쪽으로 한왕 신의 남은 반란군을 동원(東垣)에서 공격했다.
소 승상(소하)이 미앙궁(未央宮)을 축조해 동궐(東闕), 북궐(北闕), 전전(前殿), 무고(武庫), 태창(太倉)을 세웠다. 고조가 돌아와서 대단히 웅장한 궁궐을 보고는 성을 내며 소하에게 “천하가 흉흉하여 몇 년 동안 힘들게 싸웠고 성패를 아직 알 수 없는 어찌 이렇게 궁실을 지나치게 지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소하는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참에 궁실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천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으니 장엄함하지 않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후세에는 이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고조가 좋아했다.
고조가 동원으로 행차하다가 백인(柏人)을 지나게 되었는데 조의 승상 관고(貫高) 등이 고조를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고조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머물지 않았다. 대왕 유중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쳐 스스로 낙양으로 돌아왔기에 왕에서 폐하고 합양후(合陽侯)로 삼았다.
9년(기원전 198년), 조의 승상 관고 등의 사건이 발각되어 삼족을 없앴다. 조왕 장오를 폐하여 선평후(宣平侯)로 삼았다. 이해 초의 귀족 소(昭), 굴(屈), 경(景), 회(懷)씨와 제의 전(田)씨를 관중으로 옮겼다.
미앙궁이 완공되었다. 고조는 제후들과 군신들을 대거 소집하여 미앙궁 전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고조가 옥 술잔을 받쳐 들고 일어나서 태상황에게 축수를 올리며 “처음 대인께서는 늘 신이 무뢰하여 생업을 꾸리지 못하고, 힘도 둘째 형님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놈이 이룬 것과 둘째 형님을 비교하면 누가 더 많습니까”라고 했다. 대전의 신하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고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10년(기원전 197년) 10월, 회남왕 경포, 양왕 팽월, 연왕 노관, 형왕 유고, 초왕 유교, 제왕 유비, 장사왕 오예가 모두 장락궁으로 와서 인사를 올렸다. 봄과 여름, 아무 일이 없었다.
7월, 태상황이 역양궁(櫟陽宮)에서 세상을 떠났다. 초왕 유교와 양왕 팽월이 와서 장례를 치렀다. 역양의 죄수들을 사면하고 여읍(酈邑)을 신풍(新豐)으로 바꿔 불렀다.
8월, 조의 상국(相國) 진희(陳豨)가 대 지역에서 모반했다. 주상은 이렇게 말했다.
“진희가 일찍이 나를 위해 일할 때 아주 믿음이 있었다. 대 지역은 나한테 중요한 곳이라 진희를 제후에 봉해 상국으로서 대를 지키게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왕황 등과 대 지역을 겁탈하려 하다니! 대 지역의 관리와 인민은 죄가 없으니 대의 관리와 인민은 용서하라.”
9월, 주상은 몸소 동쪽으로 진희를 공격했다. 한단(邯鄲)에 이르러 주상은 “진희가 남쪽 한단을 근거로 삼지 않고 장수(漳水)를 방어막으로 삼으려는 것을 보니 그 놈의 무능을 내가 알겠노라”며 기뻐했다. 진희의 부장들이 대개 이전에 장사꾼이었다는 말을 듣자 주상은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알겠다”고 했다. 곧 돈으로 진희의 부장들을 유혹하니 투항하는 진희의 부장들이 많았다.
11년(기원전 196년), 고조가 한단에서 진희 등에 대한 토벌을 끝내기에 앞서 진희의 부장 후창(侯敞)이 1만여 명을 이끌고 유격전을 벌였고, 왕황은 곡역(曲逆)에 주둔했고, 장춘(張春)은 황하를 건너 요성(聊城)을 공격했다. 한은 장군 곽몽(郭蒙)에게 제의 장수와 함께 공격하게 하여 대파했다. 태위 주발(周勃)은 태원의 길로 들어와 대 지역을 평정하고 마읍으로 갔으나 마읍이 항복하지 않자 바로 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진희의 부장 조리(趙利)가 지키고 있던 동원(東垣)을 고조가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한 달 넘게 병졸들이 고조를 욕하자 화가난 난 고조는 성을 항복시킨 다음 욕을 한 자들을 찾아내서 목을 베게 하고, 욕하지 않는 자는 용서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조의 상산 이북을 나누고, 아들 유항(劉恒)을 대 지역의 왕으로 세워 진양(晉陽)에 도읍하게 했다.
봄, 회음후 한신이 관중에서 모반하자 그의 삼족을 없앴다.
여름, 양왕 팽월이 반란을 꾀하자 폐위시키고 촉으로 내쳤다. 다시 반란을 꾀하자 마침내 삼족을 없앴다. 아들 유회(劉恢)를 양왕(梁王)으로 세우고, 아들 유우(劉友)를 회양왕(淮陽王)으로 삼았다.
가을 7월, 회남왕 경포가 반란을 일으켜 동쪽으로 형왕 유고의 봉지를 합병하고 북쪽으로 회하를 건너자 초왕 유교가 설현(薛縣)으로 도망쳐왔다. 고조가 직접 가서 공격하고 아들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세웠다.
12년(기원전 195년) 10월, 고조는 경포의 군대를 회추(會甀)에서 격퇴시켰다. 경포가 달아나자 별장에게 그를 추격하게 했다.
고조는 돌아오는 길에 패현을 지나게 되어 머물렀다. 패궁(沛宮)에서 연회를 베풀어 옛 친구들, 부로, 자제를 모두 불러 마음껏 마셨다. 패현의 아이 120명을 선발하여 노래를 가르쳤다.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고조는 축을 연주하며 직접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큰 바람 몰아치니 구름이 날아오르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찌하면 용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까?”
아이들에게 모두 따라 부르게 하면서 고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는데 감정이 북받치고 회한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패현의 부형들에게 “나그네는 고향이 그립기 마련, 내 비록 관중에다 도읍을 정했지만 만 년이 지나도 내 혼백은 패현을 그리워할 것이오. 그리고 짐이 패공으로서 포악한 역도를 토벌하여 마침내 천하를 가졌으니 패현을 짐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아 모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여 대대로 세금과 부역이 없게 하겠소”라고 했다.
패현의 부형과 부녀자들 그리고 옛 친구들과 날마다 즐겁고 통쾌하게 마시면서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고 웃고 즐거워했다. 열 흘이 넘어 지나자 고조는 떠나려 했다. 패현의 부형들은 한사코 고조를 더 머물게 하려 했다. 고조가 “내 일행이 너무 많아 부형들이 다 접대할 수 없다”며 떠났다. 패현은 비워놓고 모두가 읍 서쪽으로 가서 (예물 따위를) 바쳤다. 고조가 다시 멈추어서는 장막을 치고 사흘을 더 마셨다. 부형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며 “패현은 다행히 세금과 부역이 면제되었지만 풍읍(豐邑)은 그렇지 못합니다. 폐하께서 어여삐 여기시옵소서”라고 간청했다. 고조는 “풍읍은 내가 나고 자란 곳이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다만 예전에 옹치가 위를 위해 나를 배반했기 때문에 그랬을 뿐이다”라고 했다. 패현의 부형들이 한사코 청을 드리자 바로 패현처럼 풍읍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이에 패후(沛侯) 유비(劉濞)를 오왕으로 삼았다.
한의 장수가 별도로 경포의 군대를 조수(洮水) 남ㆍ북쪽에서 공격하여 모두 대파하고 추격 끝에 파양(鄱陽)에서 경포를 죽였다.
번쾌는 따로 병사를 거느리고 대를 평정하고 진희를 당성(當城)에서 죽였다.
11월, 고조가 경포의 군대에서 장안으로 돌아왔다.
12월, 고조는 “진시황제, 초 은왕, 진섭, 위 안리왕, 제 민왕, 조 도양왕은 모두 그 후손이 끊어졌으니 각각 묘지기 10호를 주되, 진시황제에게는 20호, 위 공자 무기(無忌)에게는 5호를 주도록 하라”고 했다. 진희와 조리에게 위협당하고 약탈당한 대 지역의 관리와 백성들을 모두 사면하였다. 투항한 진희의 부장이 진희가 반역을 꾀할 때 연왕 노관이 진희에게 사람을 보내 함께 음모를 꾸몄다고 말했다. 고조는 벽양후(辟陽侯)에게 노관을 손환케 했으나 노관은 병을 핑계 삼았다. 벽양후가 돌아와서 노관에게 반역을 꾀할 조짐이 있다며 상세히 아뢰었다.
2월, 고조는 번쾌와 주발에게 군사를 이끌고 연왕 노관을 공격하게 하고 반란에 가담한 연의 관리와 백성은 사면했다. 아들 유건(劉建)을 연왕으로 세웠다.
고조가 경포를 칠 때 화살에 맞아 도중에 병이 났다. 병이 심해지자 여후가 좋은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들어가 인사하자 고조가 의사에게 (병세를) 물었다. 의사가 “병은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고조는 욕을 하며 “내가 보잘 것 없는 신분을 세 자의 검을 차고 천하를 얻었으니 이것이 천명 아니겠는가? 명은 하늘에 달렸거늘 편작인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했다. 그리고는 끝내 병을 치료하지 않고 금 50근을 내리는 걸로 끝냈다. 이윽고 여후가 “폐하 100년 뒤 상국 소하가 죽으면 누구에게 그를 대신하게 합니까”라고 물었다. 주상이 “조참이면 될 것이오”라고 답했다. 그 다음을 묻자 주상은 “왕릉이며 될 터이나 왕릉이 다소 고지식하니 진평이 도우면 될 것이오. 진평은 지혜가 남아 돌지만 혼자 맡기는 어려울 것이오. 주발이 중후하고 꾸밈이 없으나 유씨 집안을 안정시킬 사람은 분명 주발일 것이니 태위로 삼으면 될 것이오”라고 답했다. 여후가 다시 그 다음을 묻자 주상은 “그 다음은 당신이 알 바 아니오”라고 했다.
노관이 기병 수천과 함께 변경에서 기다리며 주상의 병이 나으면 들어가 사죄할 수 있길 바랐다.
4월 갑진일, 고조가 장락궁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나흘이 지나도록 발상하지 않았다. 여후는 심이기(審食其)와 의논하기를 “장수들은 황제와 같이 다 평민들이었소. 지금 북면하여 신하가 되었지만 늘 불만이었소. 지금 어린 군주를 섬겨야 할 판이니 (그들을) 다 없애지 않으면 천하가 불안하오”라고 했다. 누군가 이 말을 듣고는 역 장군에게 말하자 역 장군은 심이기를 만나 “내가 듣기에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나흘이 지나도록 발상하지 않고 장수들을 죽이려 한다고 하니 정말 그렇다면 천하가 위태롭소이다. 진평과 관영은 10만을 거느리고 형양을 지키고 있고, 번쾌와 주발은 20만으로 연과 대를 평정했소. 이들이 황제가 세상을 떠났고 장수들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군대를 합쳐 돌아와 관중을 공격할 것이오. 대신들은 안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제후들은 밖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가 아니겠소”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역장군(酈將軍)에게 알리자, 역장군은 심이기를 만나
심이기가 들어가 말하자 바로 정미일에 발상하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노관은 고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흉노로 도망쳤다.
병인일에 장례를 치르고, 기사일에 태자를 세워 태상황묘에 이르렀다. 신하들이 모두 “고조께서 미천한 몸으로 일어나시어 난세를 다스리고 바른길을 찾아 천하를 평정하셨기에 한의 태조가 되셨으니 그 공이 최고이십니다. 존호를 고황제라 하옵소서”라고 아뢰었다. 태자가 황제의 호칭을 이어받아 효효제라 했다. 군국의 제후들에게 각자 고조의 사당을 세워 때맞추어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했다.
효혜제 5년(기원전 190년), 고조가 패현을 그리워했던 일이 생각나 패궁(沛宮)을 고조의 원묘(原廟)로 삼았다. 고조가 노래를 가르쳤던 아동 120명에게 모두 (원묘에서) 연주와 노래를 하게 했다. 나중에 인원이 모자라면 바로 보충하게 했다.
고조의 아들 여덟은 이렇다. 장남은 서출 제 도혜왕 유비, 둘째는 여후의 아들 효혜황제, 셋째는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조 은왕(趙隱王) 유여의(劉如意), 넷째는 대왕 유항으로 박태후(薄太后) 소생이자 훗날 효문황제(孝文皇帝)로 즉위, 다섯째 양왕 유회는 여태후가 집정할 때에 조 공왕(趙共王)으로 옮겼고, 여섯 째 회양왕 유우는 여태후 집정 때 조 유왕(趙幽王)으로 옮겼으며. 일곱째 회남의 여왕(厲王) 유장(劉長), 여덟 째 연왕 유건(劉建)이다.
사마천의 논평
[편집]태사공(太史公)은 이렇게 말한다.
“하의 정치는 질박하고 충성스러웠다. 그 병폐는 소인들이 거칠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은은 공경함으로 이어받았다. 공경의 폐단은 소인들이 귀신을 숭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는 예로 이어받았다. 예의 폐단은 소인들이 천박해지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 병폐를 구하는 길은 질박과 충성만한 것이 없다. 삼대의 도는 돌고 돌아 끝나는듯하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주에서 진에 이르기까지는 예로 인한 폐단이었으나 진이 이를 고치지 않고 가혹한 형법으로 정치를 했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랴? 그래서 한이 일어나 그 폐단의 정치를 이었으나 변혁으로 백성들을 피곤하지 않게 하고 하늘의 법통을 얻은 것이다. 매년 10월 제후들이 조회했다. 황제가 타는 수레는 노란 비단 지붕에 쇠꼬리로 만든 깃발을 왼쪽에 장식하게 했다. 장릉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