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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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편집]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은 동쪽 바닷가 동해 사람이다. 그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으로 우(禹)를 도와 물과 땅을 정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들은 우(虞, 순 임금)와 하(夏) 때는 여(呂)와 신(申) 땅에 봉해지기도 했고 성을 강씨(姜氏)라 했다. 하와 상 때는 신과 여 땅에 방계 자손이 봉해지기도 하고 평민이 되기도 했는데 여상은 그 후예였다. 본래는 강씨 성이었지만 그 봉지에서 성을 취하여 여상이라 한 것이다.

여상은 곤궁하고 나이가 많았는데 낚시로 주(周)의 서백(西伯)을 만나고자 했다. 서백이 사냥을 나서기에 앞서 점을 쳤더니 “얻을 것은 용도 이무기, 호랑이도 곰도 아니다. 패왕을 보좌할 신하를 얻을 것이다.”라는 괘가 나왔다. 이에 주의 서백이 사냥에 나섰는데 아니나 다를까, 위수(渭水) 북쪽에서 여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는 몹시 기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선군이신 태공(太公) 때부터 ‘성인께서 주에 오시면 주가 흥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당신이 바로 그 분 아니십니까? 우리 태공께서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르며 함께 수레를 타고 돌아와서 사(師)로 모셨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태공은 보고 들은 것이 많았다. 일찍이 주(紂)를 섬겼으나 무도하여 그를 떠났다. 제후에게 유세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서쪽 서백에게 귀의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도 말한다. “여상은 처사로 바닷가에 숨어 살았다. 서백이 유리(羑里)에 갇히자 평소 알고 지내던 산의생(散宜生)과 굉요(閎夭)가 그를 불렀다. 여상 역시 ‘내가 듣기에 서백은 어질고 늙은이를 잘 모신다고 하니 어찌 가지 않으리오’라 했다. 세 사람이 서백을 위해 미녀와 기이한 물건을 구해 주 임금에게 바쳐 죄를 면하게 했다. 서백은 풀려나 나라로 돌아왔다.”

여상이 주를 섬긴 일이 이렇게 말마다 다르지만 요점은 그가 문왕과 무왕의 사(師)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 서백 창(昌)은 유리에서 벗어나 돌아와서는 여상과 은밀히 모의하여 덕을 닦아 상 정권을 무너뜨렸으니 그 일에 용병술과 기이한 계책이 많이 쓰였다. 그래서 후세에 ‘용병’과 ‘주의 은밀한 권모’하면 모두 태공을 원조로 받들었다.

주 서백이 정치를 공평하게 하고, 우(虞)와 예(芮)의 소송을 잘 해결하자 시인들은 서백이 천명을 받은 문왕(文王)이라고 했다. 숭(崇), 밀수(密須), 견이(犬夷)를 정벌하고 풍읍(豐邑)을 크게 세우니 천하의 3분의 2가 주에 귀의했다. 태공의 많은 권모와 계책 덕분이었다.

문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했다.

9년, 무왕이 문왕의 유업을 이어 동방 정벌을 나섰는데 제후들이 모이는지 안 모이는지를 살폈다. 군대가 출정하는데 사상보(師尙父, 강태공)는 왼손에 황색 도끼를, 오른손에 소고리 장식을 한 흰 깃발을 들고 이렇게 맹서했다.

외뿔소여, 외뿔소여.

너희 무리를 모두 모으라.

너희에게 배의 노를 맡기니

늦게 이르는 자 목을 벨 것이다!

마침내 맹진(盟津)에 이르니 서로 기약하지 않고 모인 제후가 800이었다. 제후들 모두가 “주 임금은 정벌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무왕은 “아직 아니오.”라 하고는 군대를 돌렸다. 태공과 함께 이 일을 「태서(太誓)」로 지었다.

2년 뒤, 주 임금은 왕자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가두었다. 무왕이 주 임금을 정벌하기에 앞서 거북점을 쳤는데 징조가 불길하게 나오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공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오직 태공만 무왕에게 강하게 권하니 무왕이 마침내 정벌에 나섰다.

11년 정월 갑자일, 목야(牧野)에서 맹서하고 상의 주를 정벌하니 그 군대가 무너졌다. 주 임금은 녹대(鹿臺)로 올라갔고, 이를 끝까지 쫓아가 주 임금을 베었다.

다음날, 무왕은 사직(社稷)에 서고 공들은 맑은 물을 받들었다. 위(衛) 강숙(康叔) 희봉(姬封)은 여러 색의 자리를 폈고, 사상보는 제물로 쓸 짐승을 끌고 왔다. 사관(史官) 일(佚)이 축문으로 주 임금의 죄를 토벌한 일을 써서 하늘에 아뢰었다.

녹대의 돈과 거교(鉅橋)의 식량을 풀어 가난한 인민을 구제했다. 비간의 무덤에 봉분을 씌우고, 갇혀 있던 기자를 풀어 주었다. 구정(九鼎)을 옮기고 주의 정치를 다듬어서 천하와 함께 다시 시작했다. 사상보의 계책에 따른 것이 많았다.

이렇게 무왕은 상을 평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었고, 사상보를 제(齊)의 영구(營丘)에 봉했다. (사상보가) 동쪽 봉국으로 가던 중 길에서 묵느라 행차가 더뎠다. 여관 주인이 “제가 듣기에 시간이란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고 하던데, 손님은 아주 편히 주무시는 것을 보니 봉국으로 가는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태공이 이 말을 듣고는 밤중에 옷을 입고 나서 날이 밝을 무렵 봉국에 이르렀다.

내(萊) 제후가 공격해와 서로 영구를 다투었다. 영구는 내와 가까웠다. 내 지역 사람들은 오랑캐였는데 상 주왕의 혼란과 주 정권이 막 들어서 먼 곳까지 힘이 미치지 못하는 틈에 태공과 나라를 다툰 것이다.

봉국에 도착한 태공은 정치를 고쳐 그곳의 습속에 따라 예를 간소하게 했다.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어업과 소금업의 이점을 잘 살리니 많은 인민들이 제로 와서 제가 큰 나라가 되었다. 주 성왕(成王)이 어릴 때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난을 일으키고 회이(淮夷)가 주를 배반하자 소강공(召康公)을 보내 태공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황하, 남쪽으로는 목릉(穆陵), 북쪽으로는 무체(無棣)에 이르는 땅에서 다섯 등급의 제후와 아홉 주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정벌권을 부여하노라.”

제는 이렇게 정벌권을 가짐으로써 대국이 되었다. 영구를 도읍으로 삼았다.

태공이 약 백 살 넘어 죽고 아들 정공(丁公) 여급(呂伋)이 즉위했다. 정공이 죽고 아들 을공(乙公) 득(得)이 섰고, 을공이 죽자 아들 계공(癸公) 자모(慈母)가 섰으며, 계공이 죽자 아들 애공(哀公) 불신(不辰)이 즉위했다.

기(紀)의 제후가 주 왕실에 애공을 중상모략하자 주는 애공을 삶아 죽이고 동생을 정(靜)을 세우니 이가 호공(胡公)이다. 호공은 도읍을 박고(薄姑)로 옮겼다. 주 이왕(夷王) 때에 해당한다.

애공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막내동생 산(山)이 호공에게 원한을 품고 그 무리들과 영구 사람들을 이끌고 호공을 기습하여 죽이고는 스스로 자리에 오르니 이가 헌공(獻公)이다. 헌공 원년에 호공의 아들을 모두 쫓아내고 박고에서 임치(臨菑)로 도읍을 옮겼다.

9년, 헌공이 죽고 아들 무공(武公) 수(壽)가 즉위했다.

무공 9년, 주 여왕(厲王)이 도망쳐 나와 체(彘)에 머물렀다.

10년(기원전 841년), 주 왕실이 혼란에 빠져 대신들이 정치를 행사하니 이를 ‘공화(共和)’라 하였다.

20년, 주 선왕(宣王)이 비로소 자리에 올랐다.

26년, 무공이 죽고 아들 여공(厲公) 무기(無忌)가 섰다. 여공이 포학하게 굴자 죽은 호공의 아들이 다시 제로 들어왔다. 제 사람들이 그를 세우려고 여공을 공격하여 죽였다. 호공의 아들도 전사했다. 제 사람들이 여공의 아들 적(赤)을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문공(文公)이다. 문공은 여공을 죽인 자 70명을 죽였다.

문공이 12년 만에 죽고 아들 성공(成公) 탈(脫)이 섰다.

성공이 9년 만에 죽고 아들 장공(莊公) 구(購)가 섰다.

장공 24년(기원전 771년), 견융(犬戎)이 주 유왕(幽王)을 죽이자 주 왕실은 동쪽 낙읍(雒邑)으로 도읍을 옮겼다. 진(秦)이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들었다.

56년, 진(晉)에서 그 국군 소후(昭侯)를 시해하는 일이 있었다.

64년, 장공이 죽고 아들 희공(釐公) 녹보(祿甫)가 섰다.

희공 9년, 노 은공(隱公)이 즉위했다.

19년, 노 환공(桓公)이 형 은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국군으로 섰다.

25년, 북융(北戎)이 제를 공격하자, 정(鄭)이 태자 홀(忽)을 보내 제를 구원했다. 제가 홀에게 딸을 주려 했으나 홀은 “정은 작고 제는 크기 때문에 이 몸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며 사양했다.

32년, 희공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 이중년(夷仲年)이 죽었다. 그 아들인 공손무지(公孫無知)를 희공이 아껴서 녹봉과 옷가지에 대한 대우를 태자와 같게 해주었다.

33년, 희공이 죽자 태자 제아(諸兒)가 즉위하니 이가 양공(襄公)이다.

원년(기원전 697년), 양공은 당초 태자 때 무지(無知)와 싸운 적이 있었던 터라 즉위하자마자 무지의 녹봉과 옷가지에 대한 우대를 강등시켰다. 무지는 원한을 품었다.

4년, 노 환공(桓公)이 부인과 함께 제에 왔다. 제 양공은 예전에 노 부인과 사사로이 간통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노 부인은 양공의 (배다른) 여동생으로, 희공 때 시집가서 노 환공과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환공이 제에 오자 양공이 다시 (그녀와) 사사로이 간통을 저지른 것이다. 노 환공이 이를 알고는 부인에게 화를 냈고, 부인은 이를 다시 제 양공에게 알렸다. 제 양공이 노의 국군과 술을 마시다 그를 취하게 만든 다음 역사 팽생(彭生)에게 노의 국군을 안아 마차에 태운 뒤 늑골을 으스러뜨려 죽게 했다. 노 환공이 수레에서 내려졌을 때 이미 죽은 뒤였다. 노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자 제 양공은 팽생을 죽여 노에 사과했다.

8년, 기(紀)를 공격하자 기가 도읍을 옮겼다.

12년, 당초 양공은 대부 연칭(連稱), 관지보(管至父)를 규구(葵丘)에 주둔시키면서 오이가 익을 때 갔다가 오이가 익으면 교대해 주기로 했다. 주둔한 지 한 해를 넘겨 오이가 익었는데도 양공은 군사를 보내 교대해주지 않았다.

누군가 교대를 요청했으나 양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일로 두 사람은 화가 나서 공손무지와 연계하여 반란을 꾀했다. 연칭에게 양공의 궁녀로서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촌 누이동생이 있었다. (연칭이) 그녀를 시켜 양공의 틈을 살피게 하고는 “일이 성공하면 너는 무지의 부인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겨울 12월, 양공은 고분(姑棼)에 놀러 나갔다가 패구(沛丘)까지 가서 사냥을 했다. 멧돼지를 보았는데 따르던 자가 “팽생입니다.”라고 했다. 양공이 성을 내며 활을 쏘자 멧돼지가 사람처럼 벌떡 서서 소리를 질렀다. 양공이 놀라 겁에 질려서는 수레에서 떨어져 발을 다치고 신발을 잃어버렸다. 돌아와 신발을 담당하는 불(茀)이란 자에게 채찍질 300대를 가했다. 불은 궁에서 나갔다.

한편 무지와 연칭 그리고 관지보 등은 양공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고 바로 무리를 이끌고 양공을 기습하러 가다가 신발을 관리하는 불과 마주쳤다. 불이 “궁궐을 놀라게 하면서 들어가지 마십시오. 궁을 놀라게 하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무지가 믿지 않자 불은 상처를 보여 주었고, 그제야 믿었다. 궁 밖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불을 먼저 들여보냈다.

불은 먼저 들어가 바로 양공을 문 사이에 숨겼다. 한참이 지나자 무지 등은 겁을 먹고 궁으로 들이쳤다. 불이 되레 궁중 사람들, 양공의 측근들과 함께 무지 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무지가 궁에 들어가 양공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누군가 문틈에 사람 발(신발)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열어 보니 바로 양공이었다. 마침내 그를 죽이고 무지 자신이 제의 국군 자리에 올랐다.

환공(桓公) 원년(기원전 685년) 봄, 제의 국군 무지가 옹림(雍林)으로 놀러 갔다. 일찍이 무지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옹림 사람이 무지가 놀러오자 그를 습격하여 죽였다. 그리고는 제의 대부에게 “무지가 양공을 시해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신이 삼가 처단한 것입니다. 대부께서 다시 공자들 중 세워야 할 자를 세우시면 명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당초 양공이 노 환공을 취하게 하여 죽이고, 그 부인과 사사로이 간통했으며, 옳지 않은 일로 여러 사람을 죽였다. 부인들과 음탕한 짓을 저지르고 대신들을 자주 기만했다. 동생들은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웠다. 둘째 동생 규(糾)는 노로 달아났다. 그 어머니가 노 국군의 딸이었고,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이 그를 보좌했다. 다음 동생인 소백(小白)은 거(莒)로 도망쳤는데, 포숙(鮑叔)이 그를 보좌했다. 소백의 어머니는 위(衛) 국군의 딸로서 희공(釐公)의 총애를 받았다.

소백은 어려서부터 대부 고혜(高傒)를 아주 좋아했다. 옹림 사람이 무지를 죽이고 국군을 옹립하는 일을 논의하자 고혜와 국의중(國懿仲)이 앞장서서 거에 있는 소백을 몰래 불렀다. 노나라도 무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보내 공자 규를 호송하고, 관중에게는 따로 병사를 이끌고 거로 통하는 길을 막게 했다. 관중이 소백에게 활을 쏘았는데 허리띠 쇠장식에 가서 맞았다. 소백은 죽은 척하였고, 관중은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게 하여 이를 노에 알렸다. 규를 호송하는 노의 행렬은 갈수록 느려져 엿새 만에 제에 이르렀다. 소백이 벌써 들어와 있었고, 고혜가 그를 세우니 바로 환공(桓公)이다.

환공은 허리띠 쇠장식에 화살을 맞고 죽은 척하여 관중이 오판하게 하고는 잠을 잘 수 있는 수레를 타고 곧장 내달렸던 것이다. 고혜와 국의중 역시 안에서 호응하니 먼저 들어가 즉위하고 군대를 내어 노를 막았다.

가을, 노와 간시(乾時)에서 싸웠다. 노의 군대가 패하여 달아났고, 제의 군대는 노의 퇴로를 막았다. 제는 노에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공자 규는 형제라 차마 못 죽이겠으니 노에서 알아서 죽이길 바란다. 소홀과 관중은 원수이니 잡아다 젓갈을 담가 원한 풀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를 포위할 것이다.”

노 사람들이 걱정되어 공자 규를 생독(笙瀆)에서 죽였다.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관중은 죄수가 되기를 청했다. 환공이 즉위한 다음 군대를 내어 노를 칠 때만 해도 관중을 죽이려는 마음이었다. 포숙아가 이렇게 말했다.

“신이 다행히 주군을 따랐는데 주군께서 마침내 즉위하셨습니다. 주군의 존엄함에 저는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습니다. 주군께서 제를 다스리시려면 고혜와 이 숙아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패왕(覇王)이 되고 싶으시다면 관이오(管夷吾, 관중)가 아니면 안 됩니다. 이오가 머무르는 나라가 큰 나라가 될 것이니 그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이에 환공은 그 말에 따라 행했다. 그래서 바로 관중을 소환하여 분을 풀겠다고 꾸몄던 것인데, 실은 그를 기용하려 한 것이었다. 관중이 이를 알아채고 가길 청했다. 포숙아가 관중을 맞이하여 당부(堂阜)에 이르자 족쇄와 수갑을 풀어주고는 재계한 다음 환공을 만나게 했다. 환공은 한껏 예를 갖추어 대부로 삼고는 정치를 맡겼다.

환공은 관중을 얻고 포숙, 습붕(隰朋), 고혜와 함께 제나라의 정치를 고쳐나갔다. 다섯 가구를 연계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화폐를 주조하고, 어업과 소금업의 이점을 살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편 유능하고 어진 이들을 기용하니 제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

환공 2년, 담(郯)을 쳐서 멸망시키자 그 국군은 거(莒)로 달아났다. 당초 환공이 망명 시절 담을 지날 때 담이 무례했기 때문에 정벌한 것이다.

5년, 노를 쳐서 노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노 장공(莊公)이 수(遂) 땅을 바치며 평화를 청했다. 환공이 이를 받아들여 가(柯)에서 노와 회맹을 가졌다. 노 장공이 맹서하려는데 조말(曹沬)이 비수를 들고 단 위에서 환공을 협박하며 “빼앗은 노의 땅을 돌려주시오!”라고 하였다. 환공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조말은 비수를 던지고 북쪽을 바라보는 신하의 자리에 가서 섰다. 환공이 후회하며 노의 땅을 주지 않고 조말을 죽이려 했다.

관중은 “협박 때문에 허락하였더라도 믿음을 저버리고 죽이는 것은 소소한 분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후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천하의 지지를 잃는 것이니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조말이 세 번 패하여 잃은 땅을 노에 돌려주었다. 제후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 제를 신뢰하며 의지하려고 했다.

7년, 제후들이 견(甄)에서 환공과 회맹했고, 환공이 첫 패주가 되었다.

14년, 진(陳) 여공(厲公)의 아들 경중(敬仲) 진완(陳完)이 제로 도망쳐왔다. 제 환공이 그를 경(卿)으로 삼으려 했으나 사양했다. 그래서 공정(工正)으로 삼으니 전성자(田成子)의 선조이다.

23년, 산융(山戎)이 연(燕)을 공격하자 연이 제에 급히 알려왔다. 제 환공이 연을 구하러 나서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孤竹)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연 장공(莊公)이 환공을 전송하다가 제의 경내에 들어왔다.

환공은 “천자가 아닌 제후끼리는 국경을 벗어나 전송할 수 없소이다. 내가 연에게 무례할 수는 없지요.”라며 연의 국군이 밟은 땅에 도랑을 파서 경계로 삼아 연에 떼어주었다. 연의 국군에게 소공(召公)의 정치를 다시 가다듬고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때처럼 주 왕실에 공물을 바치라고 명했다. 제후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제를 따랐다.

27년, 노 민공(湣公)의 어머니는 애강(哀姜)이라 했는데 환공의 여동생이었다. 애강의 노의 공자 경보(慶父)와 음탕한 짓을 저질렀다. 경보가 민공을 시해하자 애강은 경보를 세우려 했으나 노 사람들은 별도로 희공(釐公)을 세웠다. 제 환공이 애강을 불러들여 죽였다.

28년, 위(衛) 문공(文公)이 적(狄)에게 난을 당해 제에 급하게 알려왔다. 제가 제후들을 이끌고 초구(楚丘)에 성을 쌓고 위의 국군을 세웠다.

29년, 환공이 부인 채희(蔡姬)와 배 안에서 장난을 쳤는데 물에 익숙한 채희가 환공을 흔들었다. 환공이 겁이 나서 말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환공이 화를 내며 채희를 친정으로 돌려보냈지만 (혼인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채후(蔡侯)도 화가 나서 딸(채희)을 시집보내 버렸다. 환공이 이를 듣고는 노하여 군대를 일으켜 정벌에 나섰다.

30년 봄, 제 환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채를 정벌하니 채가 무너졌다. 그리고 초를 정벌하였다. 초 성왕(成王)이 군사를 일으켜 “어째서 내 땅을 짓밟는가?”라 물었다. 관중이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 소강공(召康公)이 우리 선군 태공께 ‘다섯 등급의 제후와 아홉 주의 제후 우두머리들의 잘못을 정벌하여 주 왕실을 도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선군께서 동으로는 바다, 서로는 황하, 남으로는 목릉(穆陵), 북으로는 무체(無棣)에 이르는 땅을 밟게 하셨습니다. 초의 공물인 띠묶음 포모(包茅)가 오지 않아 왕의 제사가 갖추어지지 못하였기에 이렇게 꾸짖으러 온 것입니다. 소왕(昭王)이 남방을 정벌하러 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했기에 그것도 물으러 왔습니다.”

초왕은 “공물이 안 들어간 일은 있으니 과인의 잘못이오. 당연히 바쳐야겠지요. 소왕이 나갔다가 돌아가지 못한 일은 그대가 (소왕이 익사했다고 하는) 한수(漢水)에 가서 물어보시오.”라고 말했다.

제의 군대가 진군하여 형(陘)에 주둔했다. 여름, 초왕이 굴완(屈完)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제에 맞서게 했다. 제의 군대는 소릉(召陵)으로 물러났다. 환공이 굴완에게 군대의 수로 과시하자 굴완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이치를 가지고 따진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초는 방성산(方城山)을 성으로 삼고 장강과 한수를 해자로 삼을 것이니 그대가 무슨 수로 진군할 수 있겠소?”

이에 굴완과 맹약하고 물러났다. 진(陳)을 지나는데 진의 원도도(袁濤涂)가 제를 속여 동방으로 돌아가게 하려다가 들켰다. 가을, 제가 진(陳)을 토벌했다. 이해에 진(晉)은 태자 신생(申生)을 죽였다.

35년 여름, 제후들과 규구(葵丘)에서 회맹했다. 주 양왕(襄王)이 재공(宰孔)을 보내 환공에게 문왕과 무왕께 제사드린 고기와 주홍색 화살, 천자가 타는 수레를 내리면서 이를 엎드려 절하지 않고 받게 했다. 환공은 이에 응하려 했으나 관중이 “안 됩니다.”라고 해서 바로 절을 하고 받았다.

가을, 다시 제후들과 규구에서 회맹했는데 교만한 기색이 더 심해졌다. 주는 재공을 회맹에 보냈다. 제후들 중 반발하는 자가 제법 되었다. 진(晉) 헌공(獻公)은 병 때문에 늦게 오다가 재공과 만났다. 재공이 “제 환공이 교만해졌으니 그대는 가지 마시오.”라고 하자 이에 따랐다.

이해에 진 헌공이 죽자 대부 이극(里克)이 공자 해제(奚齊)와 탁자(卓子)를 죽였다. 진(秦) 목공(穆公)이 부인 때문에 공자 이오(夷吾)를 진(晉)에 들여보내 국군이 되게 했다. 이때 환공도 진(晉)의 난을 토벌한다고 나섰는데 고량(高梁)에 이르러 습붕(隰朋)을 시켜 진의 국군을 세우게 하고 돌아갔다.

이 무렵 주 왕실은 쇠약해지고, 제(齊), 초(楚), 진(晉)이 강했다. 진(晉)이 처음 회맹에 참여했지만 헌공이 죽고 나라 안이 혼란스러웠다. 진 목공은 나라가 멀고 외진 곳이라 중국의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다. 초 성왕은 그 즈음 막 형만(荊蠻)을 차지하고는 이적(夷狄)으로 자처했다. 오로지 제가 중국의 회맹을 이끌었고 환공이 그 덕을 널리 떨쳤기에 제후들이 회맹에 따랐다. 이에 환공은 이렇게 큰소리를 쳤다.

“과인은 남으로 소릉(召陵)까지 정벌하여 웅산(熊山)을 바라보았고, 북으로 산융(山戎), 이지(離枝), 고죽(孤竹)을 정벌했으며, 서로는 대하(大夏)를 정벌해 유사(流沙)를 건넜고, 말발굽을 싸고 수레를 매달아 태항산(太行山)에 오르고 비이산(卑耳山)에 이른 다음 돌아왔소이다. 과인을 거스르는 제후는 없었소. 과인은 전쟁을 위한 회맹 세 차례, 평화를 위한 회맹 여섯 차례, 모두 아홉 차례 제후들과 회맹하여 천하를 한 번에 바로잡았소이다. 옛날 삼대가 천명을 받은 것과 이것이 무엇이 다르겠소? 나도 태산(泰山)과 양보산(梁父山)에 올라 봉선 제사를 올리고자 하오.”

관중이 한사코 말렸으나 듣지 않다가 먼 지방의 진기하고 괴이한 물건들이 와야 봉선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하자 환공이 그제야 그쳤다.

38년, 주 양왕(襄王)의 동생 희대(姬帶)가 융(戎), 적(翟)과 함께 주를 쳤다. 제는 관중을 보내 융과 주에 잘 지내도록 권했다. 주가 관중을 상경(上卿)의 예로 대우하려 하자 관중은 머리를 조아리며 “신은 제후국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라며 세 번을 사양하고는 하경(下卿)의 예로 인사를 올렸다. 39년, 주 양왕의 동생 희대가 제로 도망쳐 왔다. 제는 중손(仲孫)을 보내어 희대를 위해 왕에게 사죄했으나 양왕은 화가 나서 듣지 않았다.

41년, 진(秦) 목공이 진(晉) 혜공(惠公)을 사로잡았다가 다시 돌려보냈다. 이해에 관중과 습붕이 모두 죽었다. 관중의 병이 깊어지자 환공이 “신하들 중 누가 재상이 될 만합니까?”라고 물었다. 관중은 “신하 알기로는 군주만한 사람이 없지요.”라고 답했다. 환공이 “역아(易牙)는 어떻소?”라고 묻자 “자식을 죽여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인정에 어긋나 안 됩니다.”라고 답했다. 환공이 “개방(開方)은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부모를 멀리하고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인정에 어긋나 가까이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답했다. 환공이 “수도(豎刀)는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궁형을 자청하여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친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답했다.

관중이 죽자 환공은 관중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세 사람을 기용하니 세 사람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42년, 융(戎)이 주를 정벌하자 주는 제에 급히 알렸다. 제는 제후들에게 군사를 내서 주를 지키라고 명했다. 이해에 진(晉)의 공자 중이(重耳)가 제에 오자 환공은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43년, 당초 제 환공에게는 왕희(王姬), 서희(徐姬), 채희(蔡姬) 세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모두 아들이 없었다. 환공은 여색을 밝혀 총애한 여자들이 많아 부인 같은 여자만 여섯이었다. 큰 위희(衛姬)가 공자 무궤(無詭)를 낳았고, 작은 위희가 혜공(惠公) 워(元)을 낳았다. 정희(鄭姬)는 효공(孝公) 소(昭)를 낳았고, 갈영(葛嬴)은 소공(昭公) 반(潘)을 낳았다. 밀희(蜜姬)는 의공(懿公) 상인(商人)을 낳았고, 송화자(宋華子)는 공자 옹(雍)을 낳았다.

환공과 관중은 효공을 송(宋) 양공(襄公)에게 부탁하고 태자로 세웠다. 옹무(雍巫, 역아)가 위(衛) 공희(共姬)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내시인 수도를 통해 환공에게 많은 예물을 바쳐 환공의 총애도 받았고, 환공은 무궤를 (태자로) 세울 것을 응낙했다. 관중이 죽자 공자 다섯이 모두 자리에 오르려고 했다.

그해 겨울 10월 을해일, 제 환공이 죽었다. 역아는 (궁중에) 들어와 수도와 함께 총애받던 첩의 측근들과 결탁하여 신하들을 죽이고 공자 무궤를 국군으로 세웠다. 태자인 소는 송으로 달아났다.

환공이 병이 들자 다섯 공자는 각기 당파를 지어 자리를 다투었고, 환공이 죽자 드디어 서로를 공격하니, 이 때문에 궁중이 비어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 환공의 시신은 침상에 67일 동안 방치되어 구더기가 문밖으로 기어 나왔다.

12월 을해일, 무궤가 즉위하여 바로 시신을 수습하고 죽음을 알렸다. 신사일 밤, 염을 하고 빈소를 마련했다.

환공에게는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고, 나중에 (국군의) 자리에 오른 자만 다섯이었다. 무궤는 즉위 석 달 만에 죽어서 시호가 없었고, 그다음이 효공, 그다음이 소공, 그다음이 의공, 그다음이 혜공이었다.

효공 원년(기원전 642년) 3월, 송 양공이 제후의 군대를 이끌고 제의 태자 소를 돌려보내면서 제를 쳤다. 제 사람들이 두려워 국군 무궤를 죽이고 태자 소를 세우려 하자 네 공자의 패거리가 태자를 공격했다. 태자는 송으로 도망쳤고, 송은 제의 네 공자들과 싸웠다.

5월, 송이 제의 공자 네 사람의 군대를 물리치고 태자 소를 옹립하니 이가 효공이다. 송은 환공과 관중이 태자를 자신에게 맡겼기 때문에 와서 그들을 정벌한 것이다. 이 변란 때문에 8월이 되어서야 제 환공을 안장할 수 있었다.

6년 봄, 제가 송을 쳤다. 제에 동맹하러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름, 송 양공이 죽었다.

7년, 진(晉)의 문공(文公)이 즉위했다.

10년, 효공이 죽었다. 효공의 동생 반(潘)이 위(衛)의 공자 개방(開方)과 함께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즉위하니 이가 소공(昭公)이다. 소공은 환공의 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갈영(葛嬴)이다.

소공 원년(기원전 632년), 진(晉)의 문공이 성복(城濮)에서 초를 물리치고 천토(踐土)에서 제후들과 회맹한 다음 주에 인사를 드리니 천자가 진(문공)을 백(伯)으로 칭하게 했다.

6년, 적(翟) 부족이 제를 침입했다. 진의 문공이 죽었고, 진(秦)의 군대가 효산(殽山)에서 진(晉)에게 패했다.

12년, 진(秦)의 목공(穆公)이 죽었다.

19년 5월, 소공이 죽고 아들 사(舍)가 즉위했다. 사의 어머니가 소공에게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 사람이 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공의 동생 상인(商人)은 환공이 죽고 자리를 다투다가 이루지 못하자 몰래 유능한 인재들과 사귀고 백성들을 아끼니 백성들이 좋아했다. 소공이 죽고 아들 사가 자리에 올랐으나 외롭고 약했다.

10월, 상인이 무리와 함께 소공의 무덤에서 제의 국군 사를 시해하고 스스로 자리에 오르니 이가 의공(懿公)이다. 의공은 환공의 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밀희(蜜姬)이다.

의공 4년 봄, 처음 의공이 공자였을 때 병융(丙戎)의 아버지와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감을 다투다 이기지 못한 일이 있었다. 국군으로 즉위하자 그의 발을 자르고 병융은 노복으로 삼았다. 용직(庸職)의 처가 아름다웠다. 의공은 그녀를 궁으로 들이고 용직은 마차를 호위하는 호위병으로 삼았다.

5월, 의공이 신지(申池)에 놀러 나갔을 때 (병융, 용직) 두 사람이 목욕을 하면서 장난을 쳤다. 용직이 “발 잘린 놈의 아들아!”라고 하자, 병융은 “마누라 빼앗긴 놈아!”라고 했다. 두 사람 모두 이 말에 부끄러워하며 (의공에게) 원한을 품었다. 함께 모의하여 의공과 대나무 숲으로 놀러가서는 두 사람이 마차 위에서 의공을 죽이고 대나무 숲에 버리고 도망쳤다.

의공은 즉위하여 교만하게 굴어 인민들이 따르지 않았다. 제 사람들이 그 아들을 폐하고 위(衛)에서 공자 원(元)을 맞아들여 세우니 이가 혜공(惠公)이다. 혜공은 환공의 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위공(衛公)의 딸로 작은 위희라 불렀다. 제의 난리를 피해 위에 가 있었다.

혜공 2년, 장적(長翟)이 침입했으나 왕자 성보(城父)가 쳐서 수령을 죽이고 목을 북문에 묻었다. 진(晉)의 조천(趙穿)이 그 국군 영공(靈公)을 시해했다.

10년, 혜공이 죽고 아들인 경공(頃公) 무야(無野)가 자리에 올랐다. 처음에 최저(崔杼)는 혜공의 총애를 받았는데, 혜공이 죽자 고(高), 국(國)의 두 일족은 핍박이 두려워 최저를 쫓아냈다. 최저는 위(衛)로 달아났다.

경공(기원전 598년) 원년, 강력해진 초 장왕(莊王)이 진(陳)을 정벌했다.

2년, 초 장왕이 정(鄭)을 포위하여 정백(鄭伯)이 투항했으나 얼마 뒤 그 나라를 회복시켜 주었다.

6년 봄, 진(晉)의 사신 각극(卻克)이 제에 왔다. 제는 (경공의 어머니인) 부인에게 장막 안에서 그를 구경하게 했다. 각극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부인이 웃었다. 각극은 “이 치욕을 갚지 못하면 다시는 황하를 건너지 않겠다!”라 했다. 귀국하여 제를 정벌하자고 청했다. 진의 국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제의 사신이 진(晉)에 오자 각극은 제의 사신 넷을 하내(河內)에서 잡아 죽였다.

8년, 진(晉)이 제를 공격하자 제는 공자 강(强)을 인질로 보냈고, 진은 군대를 물렸다.

10년 봄, 제가 노(魯)와 위(衛)를 정벌했다. 노와 위의 대부들이 진(晉)에 가서 모두 각극을 통해 군대를 요청했다. 진은 각극을 전차 8백량의 중군장으로 삼고, 사섭(士燮)을 상장군, 난서(欒書)를 하군장으로 삼아 노와 위를 구하기 위해 제를 쳤다.

6월 임신일, 제의 군대와 미계산(靡笄山) 아래서 마주쳤고, 계유일에 안(鞍) 지역에 진을 쳤다. 방추보(逄丑父)가 제 경공의 오른쪽을 호위했다. 경공이 “쳐들어가서 진의 군대를 깨부수고 모여서 밥을 먹자!”고 했다.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 각극은 신발에까지 피가 흘렀다. 각극이 진지로 돌아가려 하자 마부가 “이 몸은 처음 쳐들어가 부상을 두 번 당했지만 감히 아프다는 말조차 못했습니다. 사졸들이 겁먹을까 두렵습니다. 장군께서는 참으십시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싸웠고, 제는 다급해졌다. 방추보는 경공이 잡힐까 걱정되어 자리를 바꾸었다. 경공이 오른쪽 자리를 잡았으나 전차가 나무에 걸려 멈추고 말았다. 진의 소장 한궐(韓厥)이 경공의 전차 앞에 엎드려서는 “저의 국군께서 신에게 노와 위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라며 놀렸다.

방추보가 경공에게 마실 물을 떠오게 하여 경공은 도망쳐 나와 자신이 군대로 돌아갔다. 진의 각극이 방추보를 죽이려 하자 방추보는 “군주를 대신하여 죽으려 한 자가 죽임을 당한다면 훗날 신하된 자로 군주에게 충성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각극이 그를 놓아주었고, 방추보는 도망쳐 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의 군대가 제를 마릉(馬陵)까지 추격했다. 제 경공이 보물을 바치며 사과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은) 각극을 비웃은 소동숙(蕭桐叔)의 딸을 반드시 내놓을 것과 제의 밭 사이로 난 길을 모두 동서 방향으로 내라고 요구했다. 제는 이렇게 답했다.

“동숙의 딸은 제 국군의 어머니이다. 제 국군의 어머니라면 진 국군의 어머니와 같은데 당신들이 그녀를 어찌 한단 말인가? 또 그대들은 정의를 내걸고 정벌에 나서서 이렇게 포악하게 굴다니 말이 되는가?”

이에 진은 요구를 받아들이고 제에게 노와 위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도록 했다.

11년, 진(晉)이 처음으로 육경(六卿)을 두었는데 안(鞍) 전투에서 세운 공에 대한 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제 경공이 진(晉)에 가서 경공(景公)을 왕으로 높이고자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로 돌아왔다.

돌아온 경공(頃公)은 국군의 놀이터인 원유(苑囿)에 대한 금지를 풀고, 세금을 줄이고, 홀로 병든 사람을 구제하고, 창고를 털어 인민을 구제하니 인민들이 크게 기뻐했다. 제후들에게도 예를 다했다. 경공이 죽을 때까지 백성들이 따랐고 제후들도 거스르지 않았다.

17년, 경공이 죽고 아들 영공(靈公) 환(環)이 섰다.

영공 9년, 진(晉)의 난서(欒書)가 국군 여공(厲公)을 죽였다.

10년, 진(晉) 도공(悼公)이 제를 공격하자 영공은 공자 광(光)을 진에 인질로 보냈다.

19년, 공자 광을 태자로 삼고 고후(高厚)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여 제후들과 종리(鍾離)에서 회맹하게 했다.

27년, 진(晉)이 중항헌자(中行獻子)에게 제를 정벌하게 했다. 제의 군대가 패하자 영공은 임치(臨菑)로 달아났다. 안영(晏嬰)이 영공을 막았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안영이 “국군께서는 정말 용기가 없으십니다!”라 했다. 진의 군대가 임치를 포위했고, 제는 임치성을 지키며 나오지 못했다. 진이 바깥쪽 성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28년, 당초 영공은 노 공실의 딸을 취하여 광을 낳아 태자로 삼았고, 중희(仲姬)와 융희(戎姬)를 더 두었다. 융희가 사랑을 받았고, 중희가 아들 아(牙)를 낳아 융희에게 맡겼다. 융희가 아를 태자로 삼자고 청하자 영공이 이를 허락했다. 중희는 “안 됩니다. 광이 태자가 되어 제후의 반열에 섰는데 지금 별다른 이유없이 폐한다면 국군께서는 틀림없이 후회하실 겁니다.”라고 했다. 영공은 “내가 결정하면 그만이다.”라며 태자 광을 동쪽으로 보내고 고후에게 아를 보좌하게 하여 태자로 삼았다.

영공의 병이 나자 최저가 원래의 태자 광을 맞이해 세우니 이가 장공(莊公)이다. 장공은 융희를 죽였다.

5월 임진일, 영공이 죽고 장공이 즉위하자 태자 아를 구두(句竇)라는 언덕에서 잡아 죽였다.

8월, 최저가 고후를 죽였다. 진(晉)이 제의 난리를 알고는 정벌에 나서 고당(高唐)에 이르렀다.

장공 3년, 진(晉)의 대부 난영(欒盈)이 제로 도망쳐 오자 장공은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안영과 전문자(田文子)가 말렸으나 장공은 듣지 않았다.

4년, 제 장공이 난영을 몰래 진(晉)의 곡옥(曲沃)으로 침투시켜 내응하게 하면서 군대를 딸려 보내 태항산(太行山)에 올라 맹문산(孟門山)으로 들어가게 했다. 난영은 패했고, 제의 군대는 돌아오면서 조가(朝歌)를 빼앗았다.

6년, 당초 대부 당공(棠公)의 아내가 아름다웠는데 당공이 죽자 최저가 그녀를 취했다. 장공이 그녀와 사통하러 자주 최저의 집에 갔고 최저의 모자를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했다. 시종이 (장공에게) 안 된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최저가 노하여 (경공이) 진(晉)을 정벌할 때 진과 함께 제를 습격하려 했으나 틈을 얻지 못했다.

장공이 일찍이 환관 가거(賈擧)에게 채찍질을 가한 적이 있었다. 가거가 다시 장공을 모시면서 최저를 위해 틈을 엿보면서 장공에게 원한을 갚고자 했다.

5월, 거(莒)의 군주가 제에 인사를 드리러 오자 제는 갑술일에 연회를 열어 그를 초청했다. 최저는 병을 핑계로 일을 돌보지 않았다. 을해일에 장공이 최저를 문병한 뒤 최저의 아내를 찾았다. 최저의 아내는 방으로 들어가 최저와 함께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장공이 기둥을 안고 노래를 불렀다.

환관 가거는 장공의 수행원들을 막고 들어와 문을 잠갔다. 최저의 무리들이 무기를 들고 안에서 뛰쳐나왔다. 장공이 대에 올라가 화해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맹서를 하겠다고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종묘에서 자살하겠다고 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두가 “국군의 신하인 최저는 병이 깊어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여기는 궁궐과 가깝기 때문에 최저의 신하인 저희들이 음탕한 자를 붙잡으려는 것일 뿐 다른 명령은 모릅니다.”라고 했다.

장공이 담을 넘으려고 하자 활을 쏘아 허벅지를 맞추었다. 장공이 거꾸로 떨어지자 바로 죽였다. 안영이 최저의 집 대문 밖에 서서 “군주가 사직을 위해 죽으면 신하는 그를 따라 죽고, 군주가 사직을 위해 도망가면 그를 따라 도망간다. 만약 군주가 자신을 위해 죽거나 도망치는 것이라며 그와 가까운 측근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일을 책임진단 말인가?”라고 했다.

문이 열리자 들어가 장공의 시신에 엎드려 곡을 한 다음 세 번 펄쩍 뛰고는 나왔다. 누군가 최저에게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라고 했다. 최저는 “인민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다. 놓아주면 인민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정축일, 최저가 장공의 이복동생 저구(杵臼)를 옹립하니 이가 경공(景公)이다. 경공의 어머니는 노 숙손선백(叔孫宣伯)의 딸이다. 경공은 즉위하여 최저를 우상(右相)에, 경봉(慶封)을 좌상(左相)에 임명했다. 두 재상은 난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국인(國人)들과 “최씨(崔氏), 경씨(慶氏)와 같이 하지 않는 자는 죽는다!”라고 맹서하게 했다.

안영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 안영이 오로지 군주에 충성하지 않고 나라의 이익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하늘이 나를 벌할 것이다!”라며 맹서를 거부했다. 경봉이 안영을 죽이려 하자 최저는 “충신이니 놓아줍시다.”라고 했다. 제의 태사(太史)가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라고 기록하자 최저가 그를 죽였다. 그 동생이 똑같이 쓰자 최저가 그까지 죽였다. 작은 동생이 똑같이 쓰자 최저가 그를 놓아주었다.

경공 원년(기원전 547년), 당초에 최저는 아들 최성(崔成)과 최강(崔彊)을 낳았다. 그 어머니가 죽자 동곽녀(東郭女)를 취하여 최명(崔明)을 낳았다. 동곽녀는 전남편의 아들 당무구(棠無咎)와 그녀의 동생 동곽언(東郭偃)으로 하여금 최저를 돕게 했다.

최성이 죄를 짓자 두 사람은 서둘러 그 죄를 다스리고 최명을 후계자로 세웠다. 최성이 최읍(崔邑)에서 늙기를 청하자 최저는 그것을 허락했으나 두 사람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서 “최읍은 최씨 종가가 있는 읍이라 안 됩니다.”라 했다. 최성과 최강이 화가 나서 경봉에게 이 일을 알렸다. 경봉은 최저와 틈이 벌어진 터라 최저를 망하게 하려고 했다. 최성과 최강이 당무구와 동곽언을 최저의 집에서 죽이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도망쳤다. 최저는 화가 났으나 사람이 없어 환관 하나에게 수레를 몰게 해서는 경봉을 만났다. 경봉은 “그대를 위해서 그자들을 죽이겠소!”라 하고는 최저의 원수 노포별(盧蒲嫳)에게 최씨 집을 치게 하여 최성과 최강을 죽이고 최씨 집안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최저의 부인은 자살했고, 최저도 갈 곳이 없어 자살했다. 경봉은 상국(相國)이 되어 권력을 멋대로 휘둘렀다.

3년 10월, 경봉이 사냥을 나갔다. 당초 경봉이 최저를 죽인 뒤로 더욱 교만해져서 술과 사냥을 즐기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아들) 경사(慶舍)가 정치를 맡았지만 이미 안에서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문자(田文子)가 아들 전환자(田桓子)에게 “곧 난리가 날 것이다.”라고 했다. 전씨(田氏), 포씨(鮑氏), 고씨(高氏), 난씨(欒氏)가 함께 경씨(慶氏)를 없애자고 도모했다.

경사가 군사로 경봉의 궁을 포위하자 네 집안의 무리들이 함께 공격하여 깨뜨렸다. 경봉은 (사냥에서) 돌아오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노로 달아났다. 제 사람들이 노를 나무라자 경봉은 오(吳)로 달아났다. 오는 주방(朱方)의 땅을 그에게 주고 가족을 데려와 살게 하니 제에 있을 때보다 더 부유했다. 그해 가을, 제 사람들은 장공을 이장하고 최저의 시신을 조리를 돌려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9년, 경공이 안영을 진(晉)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안영이 숙향(叔向)에게 사적으로 “제의 정권은 결국 전씨(田氏)에게 돌아갈 것이오. 전씨에게 큰 덕은 없지만 공권력을 사사로이 행사하여 인민에게 덕을 베푸니 인민들이 그를 사랑합니다.”라고 했다.

12년, 경공이 진(晉)에 가서 평공(平公)을 만났는데, 함께 연(燕)을 정벌하고 싶어서였다.

18년, 경공이 다시 진에 가서 소공(昭公)을 만났다.

26년, 경공은 노의 도성 교외로 사냥을 나갔다가 간 김에 노에 들어가 안영과 함께 노의 예법을 물었다.

31년, 노 소공(昭公)이 계씨(季氏)의 난을 피해 제로 도망쳐 왔다. 제가 그에게 2만 5천호에 해당하는 1천 사(社)로 봉하려 하자 자가(子家)가 소공을 말렸다. 소공은 제에게 노를 정벌해달라고 청했고, 제는 노의 운읍(鄆邑)을 취하여 소공을 그곳에 살게 했다.

32년, 혜성이 나타났다. 경공이 백침대(柏寢臺)에 앉아 있다가 “당당하구나! 장차 누가 이 나라를 가질는지!”라고 탄식했다. 신하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우는데 안영만 웃자 경공이 화를 냈다. 안영이 “신은 다른 신하들의 아첨이 하도 심해서 웃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경공이 “동북방에 나타난 혜성이 우리 제나라 쪽이라 과인이 걱정되었을 뿐이오.”라 했다. 안영은 “국군께서는 누대를 높이 쌓고 연못을 깊이 파고는 세금을 거두지 못하지는 않을까, 형벌이 안 무섭지는 않을까를 걱정하십니다. 앞으로는 불성(茀星)도 나타날 판인데 혜성 따위가 뭐 그렇게 두렵단 말입니까?”라고 했다. 경공이 “제사로 없앨 수 있소?”라고 묻자 안영이 “축원을 드려 귀신을 부를 수 있다면 제사로 없앨 수 있지요. 그러나 백성의 고통과 원망은 수만 가지이니 군주 한 사람의 기도로 없애려 해봤자 수많은 입들을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 때 경공은 궁실을 즐겨 짓고 사냥개와 말을 많이 기르는 등 사치스럽게 생활하였고, 무거운 세금과 가혹한 형벌을 즐겨 했다. 그래서 안자(안영)가 이 일로 경공에게 충고한 것이다.

42년, 오왕(吳王) 합려(闔廬)가 초(楚)를 정벌하여 (도읍인) 영(郢)에 들어갔다.

47년, 노의 양호(陽虎)가 그 국군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해 제로 도망쳐 와서 노를 정벌해달라고 요청했다. 포자(鮑子)가 경공에게 간하여 양호를 구금했으나 양호가 도망쳐 진(晉)으로 달아났다.

48년(기원전 500년), 노의 정공(定公)과 협곡(夾谷)에서 우호를 위한 회맹을 가졌다. 이서(犁鉏)가 “공구(孔丘, 공자)는 예는 알지만 겁쟁이입니다. 내(萊) 사람들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그 틈에 노의 국군을 잡는다면 뜻하는 바를 이룰 것입니다.”라고 했다. 경공은 공자가 노의 재상이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고, 또 노가 패주가 될까 두려워 이서의 계책에 따랐다. 회맹이 진행되고 내 사람들이 들어와 연주를 시작하자 공자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담당 관리를 시켜 내 사람을 잡아 목을 베게 한 다음 예로써 경공에게 따졌다. 경공이 부끄러워 빼앗은 노의 땅을 돌려주며 사과하고는 회맹을 마치고 떠났다. 이해에 안영이 죽었다.

55년,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가 진에서 국군 정공(定公)에 반역했으나 진이 서둘러 공격하자 제로 와서 식량을 청했다. 전걸(田乞)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이들 역신들과 패거리를 짓고는 경공을 설득하길 “범씨와 중항씨는 우리 제에 여러 차례 덕을 베풀었으니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곧 전걸을 시켜 구원하게 하고 식량을 보냈다.

58년 여름, 경공의 부인 연희(燕姬)가 낳은 적자가 죽었다. 경공이 아끼는 첩 예희(芮姬)가 낳은 아들 도(荼)가 있었으나 도가 어리고 그 어미는 천하고 행실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대부들이 도가 계승자가 될까 두려워 여러 아들들 중 나이가 많고 어진 이를 태자로 삼길 원한다고 말했다.

나이가 든 경공은 후계자 문제를 말하고 싶지 않았다. 또 도의 어미를 사랑하여 도를 세우고 싶었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여러 대부들에게 “즐기구려. 나라에 설마 국군이 없을까 걱정이겠소?”라고 했다.

가을, 경공이 병이 나자 국혜자(國惠子)와 고소자(高昭子)에게 작은아들 도를 태자로 세우게 명하고 여러 공자들을 내 땅으로 옮기게 했다. 경공이 죽고 태자 도가 즉위하니 이가 안유자(晏孺子)이다.

겨울, 경공을 묻지도 않았는데 공자들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모두 도망쳤다. 도의 이복형들 중 공자 수(壽)와 공자 구(駒) 그리고 공자 검(黔) 등은 위(衛)로 달아났고, 공자 서(駔)와 양생(陽生)은 노로 도망쳤다. 내(萊) 사람들이 이를 두고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경공의 죽었건만 시신도 묻지 않고

삼군의 일 또한 함께 도모하지 않으니

이 사람들아, 이 사람들아

어디가 그대들의 안식처일까?

안유자 원년(기원전 489년) 봄, 전걸이 고씨와 국씨를 섬기는 척하면서 조회에 갈 때마다 참승(驂乘)으로 마차 좌우를 호위하고는 “당신이 국군의 신임을 얻으니 모두 위기를 느끼고 난을 꾀하려 듭니다.”라고 했다. 또 여러 대부들에게 “고소자는 무서운 사람이니 그가 손을 쓰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 하오.”라고 했다. 대부들이 그 말에 따랐다.

원년 6월, 전걸과 포목(鮑牧)이 대부들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공(안유자)의 궁으로 들어가서 고소자를 공격했다. 고소자가 소식을 듣고는 국혜자와 함께 공을 구원하러 나섰다. 공의 군대는 패하고, 전걸의 무리가 국혜자를 추격하자 그는 거(莒)로 달아났다. 전걸의 무리는 되돌아와 고소자를 죽였다. (안영의 아들) 안어(晏圉)가 노로 달아났다.

8월, 병의자(秉意玆)가 (노로 도망쳤다.) 전걸은 두 재상을 패배시키고 바로 사람을 노로 보내 노 소공의 아들 양생(陽生)을 불렀다. 양생이 제로 와서 몰래 전걸의 집에 숨었다.

10월 무자일, 전걸이 대부들에게 “상(常)의 어미가 제사를 지냈는데 모두들 오셔서 술과 음식을 드시기 바랍니다.”라고 청했다.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전걸은 양생을 자루에 씌워 자리 중앙에 놓아두었다가 자루를 열어 양생을 꺼내며 “이분이 바로 제의 국군이십니다!”라고 했다. 대부들이 모두 엎드려 인사를 올렸다. 대부들과 맹서하고 양생을 세우려는데 포목이 술에 취하자 전걸은 대부들에게 “나와 포목이 함께 꾀하여 양생을 옹립하기로 했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포목이 화가 나서 “당신은 경공의 명을 잊었소?”라고 했다. 여러 대부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후회하는 듯하자 양생이 앞으로 나서 머리를 조아리며 “된다면 세우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이지요.”라고 했다. 포목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모두가 경공의 자제분들인데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했다. 곧 맹서하고 양생을 세우니 이가 도공(悼公)이다.

도공이 궁에 들어와 사람을 시켜 안유자를 태(駘)로 옮기게 하고는 도중에 장막 안에서 죽였다. 이어 안유자의 어머니 예희(芮姬)를 내쫓았다. 예희가 천한 신분이고 안유자는 어렸기 때문에 권력을 가지지 못한 데다 국인들이 그들을 가벼이 여겼다.

도공 원년(기원전 488년), 제가 노를 쳐서 환읍(讙邑)과 천읍(闡邑)을 빼앗았다. 당초 양생이 노에 망명해 있을 때 계강자(季康子)가 여동생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돌아와 국군으로 즉위하자 그녀를 모셔오게 했다. 계희(季姬)가 계방후(季魴侯)와 사사로이 간통하고 있다가 그 진상을 말하자 노는 감히 보내지 못했다. 그러자 제를 노를 정벌하여 끝내 계희를 모셔간 것이다. 계희가 총애를 받게 되면서 제는 빼앗은 노의 땅을 돌려주었다. 포목과 도공의 사이가 벌어져 관계가 좋지 않았다.

4년, 오와 노가 제의 남방을 공격했다. 포목이 도공을 시해하고 오에 부고를 냈다. 오왕 부차는 군문 밖에서 사흘을 곡하고 바다를 통해 제를 토벌하러 나섰다. 제 사람들이 물리쳤고, 오의 군대는 물러갔다. 진(晉)의 조앙(趙鞅)이 제를 공격하여 뇌읍(賴邑)까지 이르렀다가 물러갔다. 제 사람들이 모두 도공의 아들 임(壬)을 세우니 이가 간공(簡公)이다.

간공 4년 봄, 예전에 간공이 그 아버지 양생과 노에 있을 때 감지(監止, 자아(子我))의 사랑을 받았다. 즉위하자 (감지에게) 국정을 맡겼다. 전성자(田成子)가 그를 꺼려하여 조정에서 몇 차례나 감지를 돌아보곤 했다.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 전앙(田鞅)이 간공에게 “전성자와 감지를 함께 기용할 수는 없으니 국군께서는 선택을 하십시오.”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자아가 저녁에 조정에 들어갔다가 전역(田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를 잡아서 조정으로 들어갔다. 서로 사이가 좋던 전씨들은 전역에게 병을 핑계대게 하고, 간수에게 술을 보내 취하게 만든 다음 간수를 죽이고 도망치게 했다. 자아는 전씨 종가에서 전씨들과 맹서했다.

이전에 전표(田豹)가 자아의 가신이 되고자 대부 공손(公孫)에게 자신에 대해 잘 말해 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전표가 상을 당하는 바람에 중지되었다. 후에 결국 가신이 되어 자아의 총애를 받았다. 자아가 “내가 전씨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너를 세우려는데 가능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전표가 “제가 전씨와는 먼 친척뻘입니다. 그리고 거슬리는 자가 몇몇에 지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다 쫓아내야 합니까?”하고는 전씨에게 알렸다. 자행(子行, 전역)이 (전상에게) “그(감지)는 국군의 총애를 얻고 있으니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화가 틀림없이 당신에게 미칠 것입니다.”라 했다. 자행은 궁궐에 머물렀다.

여름 5월 임신일, 전성자 형제들이 네 대의 수레를 타고 간공에게로 갔다. 자아가 장막 안에 있다가 맞이하자 바로 쳐들어가 문을 잠갔다. 환관들이 막자 자행이 환관들을 죽였다. 간공은 부인은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전성자가 들어와서는 침전으로 자리를 옮기게 했다. 간공이 창을 들고 그를 찌르려 하자 태사 자여(子餘)가 “불리한 일이 아닙니다. 해악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전성자가 빠져나와 무기 창고에 머물러 있다가 간공이 아직 화가 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도망치려 하면서 “어디 간들 국군을 모실 곳 없을까!”라 했다. 자행이 검을 빼들고 “머뭇거림은 큰일의 화근입니다. 전씨 종족 아닌 자 누구입니까?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전씨가 아닙니다.”라 했다. 이에 그만두었다. 자아는 돌아가 무리들을 모아 궁중의 문과 대문을 공격했지만 모두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전씨들이 뒤쫓았다. 풍구(豐丘) 사람들이 자아를 잡고 이를 알리니 곽관(郭關)에서 자아를 죽였다. 전성자가 대륙자방(大陸子方)을 죽이려 하였으나 전역의 청으로 살려 주었다.

(대륙자방이) 간공의 명령을 빙자하여 길에서 마차를 얻어 옹문(雍門)을 나갔다. 전표가 마차를 주려 했으나 받지 않으면서 “전역이 나를 위해 부탁했는데 전표까지 내게 마차를 준다면 내가 사사로운 은혜를 너무 많이 입는 것이다. 자아를 섬기면서 그 원수에게 사사로운 은혜를 입는다며 어찌 노와 위의 선비들을 볼 수 있겠는가?”라 했다.

경진일, 전상이 간공을 서주(徐州)에서 붙잡았다. 간공이 “과인이 진작 전앙의 말을 따랐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텐데!”라고 했다."

갑오일, 전상이 서주에서 간공을 죽이고 간공의 동생 오(驁)를 세우니 이가 평공(平公)이다. 평공이 즉위하여 전상을 재상으로 삼으니 전상은 제의 정치 좌우하면서 제의 안평(安平) 동쪽을 전씨 봉읍으로 떼어 가졌다.

평공 8년(기원저 473년), 월이 오를 멸망시켰다.

평공이 재위 25년 만에 죽고, 아들 선공(宣公) 적(積)이 즉위했다.

51년, 선공이 죽고, 아들 강공(康公) 대(貸)가 뒤를 이었다. 전회(田會)가 늠구(廩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강공 2년(기원전 403년), 한(韓), 위(魏), 조(趙) 세 나라가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19년, 전상의 증손자 전화(田和)가 처음으로 제후가 되었고, 강공을 해변으로 옮기도록 했다.

26년(기원전 379년), 강공이 죽음으로써 여씨(呂氏)의 제사가 마침내 끊어졌다. 전씨가 드디어 제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제 위왕(威王) 때는 천하의 강자가 되었다.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제에 갔는데 태산부터 낭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북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기름진 땅이 2,000리였다. 사람들은 활달하고 꾀를 많이 감추고 있었는데 그들의 천성이었다. 태공의 성스러운 덕으로 나라의 근본을 세웠고, 환공의 강성함으로 선정을 닦아 제후들과 회맹하여 패자라 칭했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한없이 넓구나, 참으로 큰 나라의 기풍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