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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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편집]

주공(周公) 단(旦)은 주 무왕의 동생이다. 문왕 재위 때부터 단은 자식으로서 효도하고, 어질고 독실한 것이 다른 아들들과는 달랐다. 무왕이 즉위하자 단은 늘 무왕을 도우며 일을 도맡았다.

무왕 9년(기원전 1048년), 동방 정벌에 나서 맹진(孟津)에 이르렀을 때 주공도 무왕을 보필하여 나섰다.

11년, 주왕(紂王)을 정벌하여 목야(牧野)에 이르렀을 때 주공은 무왕을 보좌했고 「목서(牧誓)」를 지었다.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궁에 들어갔다. 주왕을 죽이고 주공은 큰 도끼를, 소공(召公)은 작은 도끼를 들고 무왕의 양 옆에서 희생의 피로 토지 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주왕의 죄를 하늘에 고하여 은나라의 백성들이 알게 했다. 갇혀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 주었다.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를 제후로 봉하고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사부로 삼아 은의 제사를 잇게 했다. 공신들과, 같은 성을 가지 인척들을 두루 제후로 봉했다. 주공 단은 소호(少昊)의 옛 땅인 곡부(曲阜)에 봉하여 노(魯) 지역의 공(公)으로 삼았으나 주공은 봉지로 가지 않고 남아서 무왕을 보좌했다.

무왕이 은을 이기고 2년이 지나도록 천하는 안정을 찾지 못했다. 무왕이 병이 나서 편치 않자 대신들이 모두 몹시 두려워했다. 태공(太公)과 소공이 조심스럽게 점을 봤는데, 주공은 “우리 선왕을 걱정시켜 드려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이에 주공은 바로 자신을 제물로 삼아 세 층의 단을 마련했다. 주공은 북쪽을 향해 서서 벽옥(碧玉)을 머리에 이고 홀을 손에 들고 태왕(太王), 왕계(王季), 문왕(文王)에게 고했다. 사관이 축문을 읽었다.

“오, 당신들의 현손인 국왕 발(發)이 국사에 지쳐 병이 나서 힘들어 하나이다. 당신들 세 왕께서 자손을 하늘에 바치려 하신다면 이 단(旦)이 국왕 발의 목숨을 대신하겠나이다.

이 단은 영민하게 일을 처리하고 다재다능하여 귀신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허나 국왕 발은 이 단만큼 다재다능하지 못하여 귀신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명을 받아 두루 사방을 지키고 이 세상에 당신 자손들을 정착시키니 천하 백성들이 다 존경하고 두려워합니다.

하늘이 내리신 고귀한 명령을 저버리지 않아야만 선왕들도 돌아와 종묘의 제사를 영원히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단이 바로 큰 거북으로 명을 받들겠습니다. 당신들께서 저를 받아 주신다면 벽옥과 홀을 가지고 돌아가 당신들의 명을 기다릴 것이고, 당신들께서 저를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벽옥과 홀을 감출 것입니다.”

주공이 사관에게 태왕, 왕계, 문왕께 무왕 발을 대신하겠다는 축문을 고하게 하고는 바로 세 왕을 향해 점을 쳤다. 점을 담당한 복인(卜人)들이 모두 “길조입니다.”하고는 점을 친 글을 보이며 길조를 확인케 했다.

주공이 기뻐하며 상자를 열어 글을 보고 길조를 확인했다. 주공이 들어가 무왕에게 축하를 드리며 “왕께는 어떤 재해도 없을 것입니다. 이 단이 세 왕께 새로운 명을 받았사오니 오로지 ‘어떻게 하면 오래 통치할 것인가?’ 이 생각만 하십시오. 이 길은 오로지 천자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주공은 축문을 금실로 묶은 금등궤(金縢匱)에 간직하고 이를 지키는 자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주의를 주었다. 이튿날 무왕의 병이 모두 나았다.

그 후 무왕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성왕은 어려서 아직 강보에 싸여 있었다. 주공은 무왕이 세상을 떠난 소식을 천하 사람들 모두가 알고 배반할까 두려웠다. 주공은 바로 동쪽 섬돌에 올라서서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했다. 관숙과 그 동생들은 나라 안에 “주공은 성왕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퍼뜨렸다. 주공은 바로 태공망과 소공 석(奭)에게 “내가 피하지 않고 섭정하는 것은 천하가 주(周)를 배반하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왕들이신 태왕, 왕계, 문왕께 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 왕께서 오래도록 천하를 걱정하고 애를 쓰셨기에 지금과 같은 성취가 있게 된 것입니다. 무왕이 일찍 세상을 뜨셨고 성왕께서는 어립니다. 주의 대업을 완수해야 하기에 내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함께 성왕을 돕기에 이르렀고, 아들 백금(伯禽)을 봉지인 노(魯)로 대신 가도록 했다. 주공이 백금에게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었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며, 성왕의 숙부로서 천하에 낮은 신분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한 번 목욕하다가 머리카락을 세 번 움켜쥐고, 한 번 밥을 먹다가, 세 번 뱉어내면서 일어나 인재를 맞이하면서도 천하의 유능한 인재를 잃을까 걱정했다. 네가 노로 가거든 나라를 가졌다고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굴지 않도록 하여라.”

관숙, 채숙, 무경 등이 과연 회이(淮夷)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은 바로 성왕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동방 정벌에 나섰고, 「대고(大誥)」를 지었다. 마침내 관숙을 베어 죽이고, 무경을 죽이고, 채숙을 추방했다. 은나라의 유민을 거두어들이고 강숙(康叔)을 위(衛)나라에,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봉하여 은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회이 동쪽 땅을 정벌한 지 2년 모두 평정되었다. 제후들은 모두 복종하여 주를 주인으로 받들었다.

하늘이 복을 내려 당숙(唐叔)이 볍씨를 얻었는데, 두 이랑의 벼가 한 이삭으로 팼다. 이를 성왕에게 바치니 성왕은 당숙에게 동쪽의 주공에게 보내도록 하고, 「궤화(餽禾)」를 지었다. 주공은 하사한 벼를 받고 천자의 명에 감사하며 「가화(嘉禾)」를 지었다. 동쪽 땅이 안정되자 주공은 돌아와 성왕에게 보고하면서 시를 지어 왕에게 바치니, 「치효(鴟鴞)」라고 이름을 지었다. 왕은 또한 주공에게는 감히 훈계하지 못했다.

성왕 7년(기원전 1037년) 2월 을미일에 왕이 주(周, 호경)에서 도보로 풍(豐)까지 가서 문왕의 사당을 참배하고는 태보(太保) 소공(召公)을 먼저 낙읍(雒邑)으로 보내어 땅을 살피도록 했다. 그해 3월에 주공이 가서 성주 낙읍을 조성하고자 점을 치니 길한 것으로 나와서 드디어 그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성왕이 성장해 국정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주공은 바로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주니 성왕이 조회에 임했다. 주공이 성왕을 대신하여 통치할 때에는 도끼를 수놓은 병풍을 뒤로 하고 남향으로 제후들의 인사를 받았다. 7년이 지나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북쪽을 바라보고 신하의 자리에 섰는데 마치 두려운 듯 공경하는 모습이었다.

당초 성왕이 어렸을 때 병이 났는데 주공은 바로 자신의 손톱을 잘라 황하에 던지며 “왕이 아직 어려서 식견이 없습니다. 신의 명을 어긴 자는 이 단이옵니다.”라고 축원하였다. 그리고 축문은 보관소에 간직했다. 성왕의 병이 모두 나았다.

성왕이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자, 누구가가 주공을 중상했고, 주공은 초(楚)나라로 달아났다. 성왕이 보관소를 열어 주공의 축문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주공을 돌아오게 했다.

주공은 돌아와 젊고 혈기왕성한 성왕이 방탕하게 나라를 다스릴까 걱정이 되어 바로 「다사(多士)」와 「무일(毋逸)」을 지었다. 「무일」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모로서 오랜 세월 업을 이루어 놓았거늘, 자손들이 교만과 사치로 그것를 잊고 집안을 망친다. 그러니 자식된 자로서 어찌 신중하지 않으리오!

그래서 옛날 은(殷)나라의 중종(中宗)은 천명을 엄숙하고 경건하게 받들었으며, 스스로 법을 삼가 지키며 백성들을 다스렸다. 삼가 두려워 정치를 엉망으로 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75년 동안 왕의 자리를 누릴 수 있었다.

고종(高宗)은 오랫동안 민간에서 힘들게 일하며, 하층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즉위하자 상을 당해 3년 동안 말하지 않고 지냈다. 입을 열자 모두 기뻐했고, 정치를 엉망으로 하거나 게을리하지 않고 은나라를 안정시켰다. 크고 작은 일에 원망이 없었기에 고종은 55년 동안 왕의 자리를 누릴 수 있었다.

조갑(祖甲)은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민간으로 도망쳐서 오랫동안 하층민으로 지냈다. 하층민이 바라는 바를 알았기에 하층민을 보호하고 은혜를 베풀 수 있었다. 홀아비와 과부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33년 동안 왕의 자리를 누릴 수 있었다.”

「다사」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탕(湯)에서 제을(帝乙)까지 제사를 받들고 덕을 밝히지 않은 사람은 없었고, 하늘의 뜻을 어긴 제왕도 없었다. 그 뒤 주왕(紂王)은 말도 못하게 제멋대로 굴고 향락에만 빠져 하늘과 백성의 바람을 전혀 돌보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그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문왕은 새벽부터 해가 중천에 뜨고,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밥 먹을 겨를도 없었기에 50년 그 자리를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지어 성왕을 훈계한 것이다.

성왕이 풍에 머무르면서 천하는 안정되었지만 주의 관직과 정책은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이에 주공이 「주관(周官)」을 지어 관리의 직책을 나누고, 「입정(立政)」을 지어 백관들을 편안하게 하니, 백관들이 기뻐했다.

주공이 풍에서 병이 들어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나를 성주(成周)에 묻어서 내가 감히 성왕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해다오.”라고 했다. 주공이 죽자, 성왕 역시 겸양의 마음에서 “주공을 필(畢) 땅에 묻어 문왕을 따르게 함으로써 이 어린 내가 감히 주공을 신하로 여기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라.”고 했다.

주공이 죽은 뒤 가을걷이를 하지도 않았는데 우레와 폭풍우가 몰아쳐 벼가 모두 쓰러지고 큰 나무가 다 뽑혔다. 주나라가 큰 공포에 싸였다. 성왕과 대부들은 조회 때 입는 옷을 입고 금등서(金藤書)를 열었다. 왕은 바로 주공이 무왕을 대신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글을 찾았다.

두 공(태공망과 소공)과 왕이 사관과 관리들에게 물으니 “분명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날 주공께서 저희들에게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답했다.

성왕이 책서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후 더 이상 이처럼 경건한 기도문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옛날 주공께서 왕의 집안을 위하여 힘들게 노력하셨건만 내가 어려서 알지 못했다. 지금 하늘이 신의 위엄을 발휘하여 주공의 덕을 표창하려 하니, 짐이 신을 맞이하되 국가의 예로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왕이 교외로 나가 제사를 드리자 하늘이 바로 개고 바람은 방향을 바꾸니 벼가 모두 일어섰다. 두 공이 국인들에게 큰 나무들을 모두 세우고 흙으로 다지게 했다. 이해에는 풍년이 크게 들었다. 그리하여 성왕은 노나라에 명하여 하늘에 지내는 교(郊) 제사로 문왕께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노에 천자의 예악이 생긴 것은 이로써 주공의 덕을 칭송했기 때문이다.

주공이 죽고, 아들 백금(伯禽)은 앞서 봉지를 받았으니 이가 노공(魯公)이다. 노공 백금이 노에 봉해지고, 3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주공에게 국정을 보고한 적이 있었다. 주공이 “어째서 늦었느냐?”라고 묻자, 백금은 “그 풍속과 예의를 바꾸고, 삼년상을 치르느라 늦었습니다.”라고 했다. 태공도 제후에 봉해졌는데 다섯 달 만에 주공에게 국정을 보고했다. 주공이 “어째서 이렇게 일찍 왔습니까?”라고 묻자, “저는 군신 간의 예를 간소화하고 그 풍속에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나중에 백금의 늦은 국정 보고를 듣고는 바로 “어허, 훗날 노가 제를 섬기게 될 것이다! 무릇 정치란 간소하고 쉽지 않으면 백성이 가까이하기 힘들다. 쉽고 백성에 가까우면 백성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다.”며 탄식했다.

백금이 즉위한 후 관숙, 채숙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회이(淮夷)와 서융(徐戎)도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백금은 군대를 이끌고 힐(肹)에서 그들을 정벌하면서 「힐서(肹誓)」를 지어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의 갑옷과 투구를 준비하라.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와 말이 상하지 않도록 하라. 절대 마구간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달아난 말과 소, 도망간 노예가 있더라도 군대를 벗어나 뒤쫓지 말고,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라. 재물을 약탈하지 말고 담을 넘어 재물을 훔치지 말라. 성 밖에서 사는 백성들은 마른 풀과 식량 그리고 담장 쌓는 데 필요한 나무를 비축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 나는 갑술일에 보루를 쌓고 서융을 정벌할 것이니 제대로 준비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내릴 것이다.”

이렇게 「힐서」를 지었고, 끝내 서융을 평정하고 노를 안정시켰다.

노공 백금이 죽고 아들 고공 추(考公酋)가 섰다. 고공이 4년 만에 죽고 동생 희(熙)가 서니 이가 이른바 양공(煬公)이다. 양공은 모궐문(茅闕門)을 세웠다. 6년 만에 죽고 아들 유공(幽公) 재(宰)가 섰다.

유공 14년, 유공의 동생 비(沸)가 유공을 시해하고 자립하니 이가 위공(魏公)이다. 위공이 50년 만에 죽고, 아들 여공(厲公) 탁(擢)이 즉위했다. 여공이 37년 만에 죽자 노 사람들은 동생 구(具)를 세우니 이가 헌공(獻公)이다. 헌공이 32년 만에 죽고 아들 진공(眞公) 비(濞)가 들어섰다.

진공 14년(기원전 842년), 주(周) 여왕(厲王)이 무도하게 굴다가 체(彘)나라 땅으로 도망치고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29년, 주 선왕(宣王)이 즉위했다.

30년, 진공이 죽고 동생 오(敖)가 즉위하니 이가 무공(武公)이다.

무공 9년 봄에 무공이 큰아들 괄(括), 작은아들 희(戱)와 함께 서쪽의 주 선왕을 조회했다. 선왕이 희가 마음에 들어 노의 태자로 세우려 했다. 주의 번중산보(樊仲山父)가 선왕에게 이렇게 간언했다.

“장자를 폐하고 작은아들을 세우는 것은 순리가 아닙니다. 순리에 어긋나면 왕명을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왕명을 어기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명이 내리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이 집행되지 않으면 정치가 바로 서지 못합니다. 집행하되 순리에 따르지 않으면 백성들이 군주를 버립니다. 무릇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고, 젊은이가 나이 든 이를 섬기는 것은 순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자께서 제후를 세우면서 작은아들을 세우려는 것은 백성들에게 순리를 어기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만약 노가 그 명령을 따르고 제후들이 그것을 본받으면 왕명은 통할 길이 없습니다. 따르지 않는다고 벌을 내리면 스스로 왕명에 벌을 내리는 것이 됩니다. 벌을 내려도 잘못이고 벌을 내리지 않아도 잘못이니 왕께서는 잘 헤아리십시오.”

선왕이 듣지 않고 끝내 희를 노의 태자로 세웠다. 여름에 무공이 귀국한 뒤 죽자 희가 들어섰는데 이 사람이 의공(懿公)이다.

의공 9년에 의공의 형인 괄(括)의 아들 백어(伯御)가 노 사람들과 함께 의공을 시해하고 백어를 국군으로 세웠다. 백어가 즉위한 지 11년이 되던 해에 주 선왕이 노를 정벌하여 국군 백어를 죽이고는 노의 공자들 중 제후들을 이끌 수 있는 계승자가 될 만 한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번목중(樊穆仲)이 “노 의공의 동생 칭(稱)이 사람이 무겁고 공손하고 총명하며 나라의 원로들을 존경할 줄 압니다. 임무를 나누고 형을 집행할 때는 반드시 선왕의 유훈과 과거의 사례를 따릅니다. 모든 자문은 이처럼 옛 선례에 따라 그에 맞추어 실행해야지 서로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선왕이 “그렇군. 그라면 인민들을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있겠군.”라 하고는 바로 칭을 이궁(夷宮)에서 즉위케 하니 이가 효공(孝公)이다. 이후 제후들이 왕명을 어기는 일이 많아졌다.

효공 25년(기원전 771년)에 제후들이 주를 배반하고 견융(犬戎)이 유왕(幽王)을 죽였다. 진(秦)이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들었다.

27년에는 효공이 죽고 아들 불황(弗湟)이 들어서니 이가 혜공(惠公)이다.

혜공 30년에 진(晉) 사람이 자기들의 국군 소후(昭侯)를 시해했다.

45년에는 진 사람들이 또 그들의 국군 효후(孝侯)를 시해했다.

46년에 혜공이 죽고 서자의 맏이인 식(息)이 섭정하여 국군의 일을 행사하니 이가 은공(隱公)이다. 처음부터 혜공의 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공의 천한 첩인 성자(聲子)가 식을 낳았다. 식이 자라서 송(宋)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했다. 도착한 송나라의 여자가 아름다워 혜공이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고는 아들 윤(允)까지 낳았다. 송나라 여자를 부인으로 올리고, 윤을 태자로 삼았다. 혜공이 죽고 윤이 어렸기 때문에 노나라 사람들이 모두 식에게 섭정하게 했지만 즉위를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은공 5년에 당(棠)에서 고기 잡는 것을 즐겨 구경했다.

8년에는 천자를 모시고 태산에 제사 지내던 정(鄭)의 팽읍(祊邑)과 허전(許田)을 바꾸니 군자들이 이를 비웃었다.

11년 겨울에 공자 휘(揮)가 은공에게 “백성들이 군을 좋아했기에 군께서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제가 군을 위하여 자윤을 죽일 테니 저를 재상으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아첨을 떨었다.

은공이 “선군의 명령이 있었다. 윤이 어렸기 때문에 내가 대신 섭정한 것이다. 이제 윤이 성장했으니 나는 토구(菟裘)에다 집을 짓고, 늙어 갈 것이며 윤에게 정권을 돌려 줄 것이다.”라고 했다. 휘는 자윤이 이 말을 듣고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 도리어 자윤에게 은공을 모함하길 “은공이 기어이 자리에 오르려고 그대를 제거하려 하니 그대는 잘 생각하십시오. 그대를 위해 은공을 죽이도록 해주시오.”라 했다. 자윤이 허락했다.

11월에 은공이 종무(鍾巫) 제사를 지내고 사포(社圃)에서 재계한 다음 위씨(蔿氏) 집에 머물렀다. 휘가 사람을 위씨 집으로 보내 은공을 살해하고 태자 윤을 국군으로 옹립하니 이가 환공(桓公)이다.

환공 원년에 정(鄭)이 벽옥과 천자가 (노나라에) 내린 허전을 바꾸었다.

2년에는 송나라가 뇌물로 바친 정(鼎)을 주공의 사당인 태묘(太廟)에 두었다. 군자들이 이를 비웃었다.

3년에 휘를 제나라로 보내 제나라 여자를 (환공의)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6년에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환공과 생일이 같아 이름을 동(同)이라 했다. 동이 성장해 태자가 되었다.

16년에는 조(曹)나라에서 회맹하고 정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의) 여공(厲公)을 입국시켰다.

18년 봄에 환공이 외국에 가고 싶어 부인과 함께 제나라로 가려고 했다. 신수(申繻)가 그만둘 것을 간언했지만 환공은 듣지 않고 끝내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 양공(襄公)이 환공의 부인과 간통했다. 환공이 부인에게 화를 내자 부인은 제나라 양공에게 이 사실을 일렀다.

여름 4월 병자일에 제나라 양공이 환공을 위해 술자리를 베풀었다. 환공이 취하자 공자 팽생(彭生)을 시켜 노나라 환공을 부축케 하면서 늑골을 부러뜨리라고 명령하니 환공이 수레에서 죽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제나라에 아뢰길 “우리 국군이 그대의 위엄을 두려워 하여 편히 계시지 못하다가, 가서 우호의 예를 차렸습니다. 예를 다하고도 돌아오지 못했거늘 책임을 추궁할 곳이 없습니다. 팽생을 잡아 제후들 사이에 퍼져 있는 추문을 없애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제나라 사람들이 팽생을 죽여 노나라의 기분을 맞추었다. 태자 동이 자리에 오르니 이가 장공(莊公)이다. 장공의 어머니는 제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감히 노나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장공 5년 겨울에 위(衛)나라를 정벌하고 위나라 혜공을 돌려보냈다.

8년(기원전 686년)에 제나라 공자 규(糾)가 도망쳐왔다.

9년에 노나라가 공자 규를 제나라로 돌려보내려 했으니, 환공(桓公)에 뒤처졌다. 환공이 병사를 일으켜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는 급하게 공자 규를 죽였다. 소홀(召忽)은 자살했다. 제나라가 노나라에 관중(管仲)을 산 채로 보내라고 통고했다. 노나라 사람 시백(施伯)은 “제가 관중을 얻으려는 것은 그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기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를 기용하게 되면 노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죽여서 시체로 보내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했다. 장공은 듣지 않고 관중을 (죄수를 싣는 수레에) 가두어 산채로 제나라로 보냈다. 제나라 사람들이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다.

13년에 노나라 장공과 조말(曹沫)이 가(柯)나라에서 제나라 환공과 회맹했다. 조말이 제나라 환공을 협박하여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요구했다. 맹서하자, 환공을 풀어주었다. 환공은 약속을 어기려 했지만 관중이 충고하여 빼앗은 땅을 마침내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15년에 제나라 환공이 처음으로 패자(覇者)가 되었다.

23년에 장공이 제나라로 가서 토지신 제사를 참관했다.

32년에 처음에 장공이 대를 쌓다가 당씨(黨氏) 집에 들렀는데, 맹녀(孟女)를 보고는 좋아하게 되었다. 부인을 삼겠다고 약속하니 (맹녀는) 팔을 그어 (장공과) 맹서했다. 맹녀와 아들 반(斑)을 낳았다. 반이 자라서 양씨(梁氏) 딸을 좋아하여 그녀를 보러 갔는데 사육사 낙(犖)이 담 밖에서 양씨의 딸과 놀고 있었다. 반이 화가 나서 낙에게 채찍질을 했다. 장공이 이 말을 듣고 “낙은 힘 있는 자이니 죽여라. 채찍질하고 그냥 두면 안 된다.”라고 했지만 반은 죽이지 못했다.

마침 장공이 병이 들었다. 장공에게는 동생이 셋 있었는데, 첫째가 경보(慶父), 둘째가 숙아(叔牙), 막내가 계우(季友)였다. 장공은 애강(哀姜)이라는 제나라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했지만, 애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애강의 여동생 숙강(叔姜)이 아들 개(開)를 낳았다. 장공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그가 맹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 반을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 장공은 병이 나자, 동생 숙아에게 후계자에 대해 물었다. 숙아는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형이 죽으면 동생이 뒤를 잇는 것이 노나라의 정해진 법입니다. 경보가 있어 뒤를 이을 수 있거늘 무엇을 걱정하십니까?”라고 했다. 장공은 숙아가 경보를 세우려 하는 것이 걱정되어 그가 물러가자 계우에게 물었다. 계우는 “죽음으로 반을 세우겠습니다.”라고 했다. 경공이 “일전에 숙아는 경보를 세우려 하던데 어찌하면 좋겠느냐?”라고 했다. 계우는 장공의 명령을 받고 숙아를 침무씨(鍼巫氏) 집에서 대기하게 하고는 침계(鍼季)를 시켜 숙아에게 독주를 마시도록 겁박했다. 그리고는 “이것을 마시면 후손으로부터 제사를 받게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후손도 없이 죽을 것이다.”라 전하게 했다. 숙아는 마침내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노나라 숙아의 아들을 숙손씨(叔孫氏)로 삼았다.

8월 계해일에 장공이 죽고, 계우가 마침내 반(斑)을 군주로 옹립하니 장공이 명령한 대로였다. (반은) 당씨 집에 머무르며 상을 치렀다.

이보다 앞서 경보는 애강과 사사로이 간통을 저질러 왔고, 애강의 여동생의 아들인 개를 세우려 했다. 장공이 죽고 계우가 반을 옹립하자, 10월 기미일에 경보는 사육사 낙을 시켜 공자 반을 당씨 집에서 살해했다. 계우는 진(陳)나라로 달아났다. 경보는 마침내 장공의 아들 개를 세우니 이가 민공(湣公)이다.

민공 2년(기원전 660년)에 경보와 애강의 간통이 잦아졌다. 애강과 경보는 민공을 죽이고 경보를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경보는 복의(卜齮)를 시켜 민공을 무위(武闈)에서 습격했다. 계우가 이 소식을 듣고 진(陳)나라에서 민공의 동생 신(申)과 함께 주(邾)로 가서 노나라에 입국을 요청했다. 노나라 사람들이 경보를 죽이려 하자 경보가 겁을 먹고 거(莒)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계우가 신을 받들고 들어와 그를 옹립하니 이가 희공(釐公)이다.

희공도 장공의 작은아들이다. 애강은 겁을 먹고 주(邾)나라로 도망쳤다. 계우는 뇌물을 가지고 거나라로 가서 경보를 요구하며 그를 귀국시켜서는 사람을 시켜 죽이려 했다. 경보가 망명을 청했지만 계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곧바로 대부 해사(奚斯)를 시켜 울면서 지나가게 했다. 경보가 해사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바로 자살했다.

제나라 환공은 애강과 경보의 음란함이 노나라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을 애강을 주(邾)나라에서 불러 죽인 다음 그 시신을 노나라로 보내 조리를 돌렸다. 노나라 희공이 그녀를 묻어 주자고 청했다.

계우의 어머니는 진(陳)나라 여자였기 때문에 (당초 계우는) 진나라로 도망쳤고, 진나라는 이 때문에 계우와 신을 호송했다. 계우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노나라 환공이 사람을 시켜 점을 치니 “사내아이이고 그 이름은 우(友)이다.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공실을 위해 도움을 줄 것이다. 계우가 없으면 노나라는 번창하지 못한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태어난 다음 보니 손바닥에 ‘우(友)’자 같은 무늬가 있어 마침내 그것으로 이름을 삼고 호를 성계(成季)라 했다. 그는 훗날 계씨(季氏)가 되었고, 경보의 후손은 맹씨(孟氏)가 되었다.

희공 원년에 계우를 문양(汶陽)과 비(鄪)에 봉했다. 계우가 재상이 되었다.

9년에 진(晉)의 이극(里克)이 자기 군주 해제(奚齊)와 탁자(卓子)를 시해했다. 제나라 환공은 희공을 데리고 진나라의 난을 성토하면서 고량(高梁)까지 갔다가 돌아와 진나라 혜공惠公)을 옹립했다.

17년(기원전 643년)에 제나라 환공이 죽었다.

24년(기원전 636년)에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즉위했다.

33년에 희공이 죽고 아들 흥(興)이 서니 이가 문공(文公)이다.

문공 원년에 초나라의 태자 상신(商臣)이 아버지 성왕(成王)을 시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3년에 문공이 진(晉)나라 양공(襄公)을 조회했다.

11년 10월 갑오일에 노나라가 함(鹹)에서 적(翟)을 무찌르고 장적(長翟)의 교여(喬如)를 잡았다. 부보종생(富父終甥)이 창으로 교여의 목을 찔러 죽이고 그의 머리를 자구문(子駒門)에 묻고는 (이를 기념하여) 선백(宣伯)에게 교여라는 이름을 주었다.

당초, 송나라 무공(武公) 때 수만(鄋瞞)이 송나라를 공격해오자 사도(司徒) 황보(皇父)가 군대를 이끌고 이를 막았는데 장구(長丘)에서 적(翟)을 무찌르고 장적의 연사(緣斯)를 잡았다. 진(晉)나라는 노(路)나라를 멸하고 교여의 동생 분여(棼如)를 잡았다. 제나라 혜공(惠公) 2년에 수만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나라의 왕자 성보(城父)가 그(교여)의 동생 영여(榮如)를 잡아 머리를 북문에 묻었다. 위(衛)나라 사람들이 그 막내동생인 간여(簡如)를 잡았다. 수만은 이로써 망했다.

15년, 계문자(季文子)가 진(晉)에 사신으로 갔다.

18년 2월에 문공이 죽었다. 문공에게는 비가 둘 있었는데, 큰 비는 제 여자인 애강으로 아들 오(惡)과 시(視)를 낳았다. 작은 비인 경영(敬嬴)은 사랑을 받았고 아들 퇴(俀)를 낳았다.

퇴는 양중(襄仲)과 내통했는데, 양중이 그를 옹립하려고 하자 숙중(叔仲)이 안 된다고 했다. 양중은 제나라 혜공에게 도움을 청하자, 막 즉위한 혜공은 노나라와 친해지려고 이를 받아들였다.

겨울 10월에 양중이 오와 시를 죽이고 퇴를 세우니 이가 선공(宣公)이다. 애강은 제나라로 돌아가서 시장 바닥을 울면서 돌아다니며 “하늘이시여! 양중이 무도하게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웠습니다.”라고 했다. 사장 사람들이 모두 우니, 노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애강(哀姜)’이라고 불렀다. 노나라는 이로부터 공실(公室)이 약해지고 삼환(三桓)이 강해졌다.

선공 퇴 12년에 초나라 장왕(莊王)이 강대해지더니 정(鄭)나라를 포위했다. 정백(鄭伯)이 항복하자 나라를 다시 회복시켰다.

18년에 선공이 죽고, 아들 흑굉(黑肱)이 서니 이가 성공(成公)이다. 계문자가 “우리가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움으로써 큰 도움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양중 때문이다.”라 했다. 양중이 선공을 옹립하자 공손귀보(公孫歸父)가 선공의 총애를 받았다. 선공이 삼환을 제거하기 위해 진(晉)나라와 모의하여 삼환을 토벌했다. 선공이 죽자 계문자가 이렇게 원망하니 공손구보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성공 2년 봄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해 융(隆)을 취했다. 여름에 성공이 진(晉)나라의 각극(卻克)과 함께 안(鞍)에서 제나라 경공(頃公)을 물리쳤다. 제나라가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4년에 성공이 진(晉)나라에 갔다. 진나라 경공(景公)이 노나라를 존중하지 않았다. 노나라가 진나라을 배반하고 초나라와 연합하려고 하자 누군가가 말려서 그만두었다.

10년에 성공이 진(晉)나라에 갔다. 진나라 경공이 죽자 머무르고 있던 성공이 장례에 참석하였지만 노나라는 이를 꺼려 입에 올리지 않았다.

15년에 오왕(吳王) 수몽(壽夢)과 종리(鍾離)에서 처음으로 회맹했다.

16년에 선백(宣伯)이 진(晉)나라에 계문자를 죽이겠다고 통보했다. 계문자는 의리 있는 사람이라 진나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년에 성왕이 죽고 아들 오(午)가 즉위하니 이가 양공(襄公)이다. 이때 양공의 나이 세 살이었다.

양공 원년(기원전 572년)에 진(晉)나라 도공(悼公)이 즉위했다. 지난 해 겨울에는 진(晉)나라의 난서(欒書)가 자신의 국군 여공(厲公)을 시해했다.

4년에 양공이 진(晉)나라에 조회했다.

5년에 계문자가 죽었다. 집에는 비단 옷을 입는 아내가 없고, 마구간에는 곡식을 먹는 말이 없고, 창고에는 금과 구슬이 없었다. 그러면서 세 군주를 보좌했던 것이다. 군자들이 “계문자는 청렴하고 충성스럽도다.”라고 했다.

9년에 진(晉)나라와 함께 정을 정벌했다. 진나라 도공이 위(衛)나라에서 양공(襄公)의 성인식을 행했는데, 계무자(季武子)가 따르면서 의례를 도왔다.

11년에 삼환씨(三桓氏)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각각 가졌다.

12년에 진(晉)에 입조했다.

16년에 진(晉) 평공(平公)이 즉위했다.

21년에 양공이 진나라 평공을 조회했다.

22년(기원전 551년)에 공구(孔丘, 공자)가 태어났다.

25년에 제나라의 최저(崔杼)가 자신의 국군 장공을 시해했고, 장공의 동생 경공(景公)을 세웠다.

29년에 오나라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노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주(周)나라의 음악에 대해 묻고 그 뜻을 모두 알아차리니 노나라 사람들이 존경했다. 31년 6월에 양공이 죽었다. 그해 9월에는 태자가 죽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제귀(齊歸)의 아들 주(裯)를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소공(昭公)이다.

소공은 나이가 열아홉인데도 어린아이 같았다. 목숙(穆叔)이 그를 세우고 싶지 않아 “태자가 죽을 경우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가 있으면 옹립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자들 중 맏이를 세울 수도 있다. 나이가 같으면 현명한 사람을 택하고, 인품이 같으면 점을 친다. 지금 주(裯)는 적손이 아닌 데다 상중인데도 슬퍼하기는커녕 기뻐하는 기색이다. 정녕 그를 세운다면 분명 계씨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계무자는 듣지 않고 기어이 그를 옹립했다. (소공이) 장례 기간에 상복을 세 번이나 바꾸어 입었다. 군자들이 “이 사람은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공 3년에 진(晉)나라에 조회하러 가다가 황하에 이르렀을 때 진나라 평공이 (조회를) 사양하여 되돌아오자 노나라가 수치스러워했다.

4년에 초나라 영왕(靈王)이 신(申)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는데 소공은 병을 핑계로 삼아 가지 않았다.

7년에 계무자가 죽었다.

8년에 초나라 영왕이 장화대(章華臺)를 완공하고 소공을 불렀다. 소공이 가서 축하를 드리자 소공에게 보물을 내렸다. 그러나 바로 후회가 되어 속임수를 써서 도로 가져갔다.

12년에 소공이 진나라에 조회하러 가다가 황하에 이르렀을 때 진나라 평공이 사양하여 다시 돌아왔다.

13년에 초나라의 공자 기질(棄疾)이 자기 군주 영왕을 시해하고 뒤를 이어 즉위했다.

15년에 진나라에 조회하러 가자, 진나라 소공의 장례를 치르고 가라며 붙잡았다. 노나라에서는 이를 부끄러워했다.

20년에 제나라 경공(景公)과 안자(晏子)가 노나라의 변경에서 사냥을 하다가 노나라에 들어온 김에 예에 대해 물었다.

21년에 진나라에 조회하러 가다가 황하에 이르렀을 때 진나라에서 사양하여 되돌아 왔다.

25년 봄에 구욕조(鸜鵒鳥)가 날아와 둥지를 틀었다. 사기(師己)가 “문공(文公)과 성공(成公) 때 ‘구욕조’가 날아와서 둥지를 틀면 국군은 간후(乾侯) 땅에 있고, 구욕조가 날아와 잠을 자면 국군은 들판에 있다네’라는 동요가 있었다.”라고 했다.

계씨(季氏)와 후씨(郈氏)가 닭싸움을 벌였다. 계씨는 닭 날개에 겨자를 뿌렸고, 후씨는 발톱에 쇠를 씌웠다. 계평자가 화가 나서 후씨를 침범하자 후소백(郈昭伯)도 평자에게 화를 냈다.

장소백(藏昭伯)의 동생 회(會)가 장씨를 거짓으로 모함하고는 계씨 집에 숨으니 장소백이 계씨 사람을 가두었다. 계평자도 화가 나서 장씨 집안의 가신을 가두었다. 장씨와 후씨가 이 분란을 소공에게 아뢰었다.

소공이 9월 무술일에 계씨 정벌에 나서 (계씨 궁궐로) 진입했다. 평자가 누대에 올라가 “국군께서는 모함만 듣고 신의 죄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저를 죽이려 하십니다. 저를 기수(沂水)로 내쫓아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다시 비(鄪)나라 땅에 구금해달라고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수레 다섯 대만 가지고 망명하겠다고 요청했지만 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자가구(子家駒)가 “국군께서는 그것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정권이 계씨에서 비롯된 지 오래고 무리도 많으니 그 무리들이 일을 꾸밀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후씨는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라 했다. 숙손씨의 가신 여(戾)가 그 무리에게 “계씨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어느 쪽이 유리한가?”라고 하니, 모두들 “계씨가 없으면 숙손씨도 없다.”라 했다. 여(戾)가 “그렇다. 계씨를 구하자!”라 하고는 마침내 공실의 군대를 물리쳤다.

맹의자(孟懿子)는 숙손씨가 이겼다는 소식을 듣자 후소백을 죽였다. 후소백이 소공의 사신으로 맹씨 집에 갔기 때문에 맹씨를 잡아 죽일 수 있었다. 세 집안이 함께 소공을 치니 소공은 급기야 달아났다.

기해일헤 소공이 제나라에 이르렀다. 제나라 경공이 “1,000사(社) 규모의 읍으로 국군을 대우하리다.”라고 했다. 자가구가 “주공의 위업을 버리고 제나라의 속국이 되라는 말씀인데 될 말입니까?”라고 하자 바로 그만두었다. 자가구가 “제나라 경공은 신의가 없으니 서둘러 진(晉)나라로 가는 것만 못하겠습니다.”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숙손(叔孫)이 소공을 만나고 돌아와 평자를 만나자 평자가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 숙손이 소공을 맞이하려 했으나 맹손씨와 계손씨가 후회하자 바로 그만두었다.

26년 봄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여 운(鄆)을 빼앗고 소공을 살게 했다. 여름에 제나라 경공이 소공을 귀국시키려고 노나라의 뇌물을 받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신풍(申豐)과 여고(汝賈)가 제나라의 대신 고흘(高齕)과 자장(子將)에게 곡식 5,000유(庾)를 주겠다고 하자 자장이 제나라 경공에게 “신하들이 노나라의 국군을 섬기지 못하겠다고 하니 이상한 일입니다. 송나라 원공(元公)이 노나라를 위해 진(晉)나라에 가서 소공을 귀국시키려 하였으나 도중에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숙손소자(叔孫昭子)가 자기 국군을 귀국시키려 하였으나 병도 없는데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늘이 노나라를 버린 것입니까, 아니면 노나라의 국군이 귀신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까? 국군께서는 잠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제나라 경공이 그 말에 따랐다.

28년에 소공이 진(晉)나라에 가서 귀국을 도와달라고 했다. 계평자가 진(晉)나라의 6경과 내통하고 있었다. 6경이 계씨의 뇌물을 받고는 진나라의 국군(경공)에게 간하자 진나라의 국군이 바로 논의를 그만두고 소공을 간후(乾侯)에서 살게 했다.

29년에 소공이 운(鄆) 땅으로 갔다. 제나라 경공이 사람을 시켜 소공에게 편지를 보내 스스로를 ‘주군(主君)’으로 칭했다. 소공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화를 내며 간후로 되돌아갔다.

31년에 진나라가 소공을 귀국시키려고, 계평자를 불렀다. 평자는 베옷에 맨발로 와서는 6경을 통해 (노나라 소공에게) 사죄했다. 육경이 그(계평자)를 위하여 “진나라가 소공을 귀국시키려고 해도 무리들이 따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진나라에서 그만 두었다.

32년(기원전 510년)에 소공이 간후에서 죽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모두 소공의 동생 송(宋)을 국군으로 삼았다. 이가 정공(定公)이다.

정공이 즉위하고 조간자(趙簡子)가 사묵(史墨)에게 “계씨가 망하겠는가?”라고 묻자 사묵은 이렇게 답했다.

“망하지 않습니다. 계우가 노나라에 큰 공을 세워 비(鄪)나라 땅을 받고 상경(上卿)이 되었고, 계문자와 계무자에 이르도록 대대로 그 업을 늘렸습니다. 노나라 문공이 죽자 동문수가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우니 이에 노나라의 국군이 정권을 잃었습니다. 정권이 계씨에게 넘어간 뒤 지금까지 네 명의 있었지만 백성들은 군주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찌 나라를 얻는단 말입니까? 그래서 국군은 벼슬과 작위를 신중하게 관장해야지 남에게 함부로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공 5년에 계평자가 죽었다. 양호가 개인적으로 화가 나서 계환자(季桓子)를 가두었으나 맹서하자 바로 풀어 주었다.

7년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여 운 땅을 빼앗아 노나라의 양호로 하여금 자신의 읍으로 삼고 정치에 간여하도록 했다.

8년에 양호가 삼환(三桓)의 적자를 모두 죽이고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서자로 바꾸어 세우려 했다. 계환자를 수레에 태운 다음 죽이려 했으나 환자가 속임수로 탈출했다. 삼환이 양호를 공격하자 양호는 양관(陽關)을 점거했다.

9년에 노나라가 양호의 토벌에 나서자 양호가 제나라로 달아났다가 얼마 뒤 진(晉)나라의 조씨(趙氏, 조간자)에게로 달아났다.

10년에 정공과 제 경공이 협곡(夾谷)에서 회맹했는데 공자(孔子)가 (정공을) 수행하면서 행사를 도왔다. 제나라가 노나라 국군을 습격하려 하자 공자가 예에 어긋나지 않게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제나라의 음탕한 기악 연주대를 죽이니 제나라 경공이 겁을 먹고는 바로 그만두고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며 사과했다.

12년에 중유(仲由)를 시켜 삼환의 도성을 무너뜨리고 그 무기를 거두어들였다. 맹씨가 도성에서 물러나지 않으려 해서 토벌에 나섰으나 이기지 못해 중지했다. 계환자가 제나라의 여자 가수와 무용수를 받아들이자 공자가 노나라를 떠났다.

15년에 정공이 죽고 아들 장(將)이 즉위하니 이가 애공(哀公)이다.

애공 5년에 제나라 경공이 죽었다.

6년에 제나라의 전걸(田乞)이 자기 국군 유자(孺子)를 시해했다.

7년에 강대해진 오왕 부차(夫差)가 제나라 정벌에 나서 증(繒)나라에까지 이르러서는 노나라로부터 소, 양, 돼지 100뢰(牢, 총 300마리)를 거두었다. 계강자(季康子)가 자공(子貢)을 시켜 오왕과 태재(太宰) 비(嚭)에게 예로 설득케 했다. 오왕이 “나는 문신을 하고 있다. 예를 가지고 내게 말하지 말라.”고 해서 바로 그만 두었다.

8년에 오나라가 추(鄒)나라를 위해 노나라를 정벌하러 나서, 도성 밑에까지 왔다가 맹서하자 돌아갔다. 제나라가 (다시) 노나라를 정벌하여 세 읍을 빼앗았다.

10년에 노나라가 제나라의 남쪽 변경을 정벌했다.

11년(기원전 484년)에 제나리가 노나라를 정벌했다. 계씨가 염유(冉有)를 기용했는데 염유가 공을 세우자 계씨는 공자를 생각했다. 이에 공자가 위(衛)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왔다.

14년에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자신의 국군 간공(簡公)을 서주(徐州)에서 시해했다. 공자가 전상을 정벌하자고 청했으나 애공이 듣지 않았다.

15년에 자복경백(子服景伯)을 사신으로, 자공을 그 보좌로 삼아 제나라로 보내자 제나라가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전상이 재상이 되어 제후들과 화친하려 했다.16년(기원전 479년)에 공자가 죽었다.

22년에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를 멸망시켰다.27년 봄에 계강자가 죽었다. 또한 여름에는 애공이 삼환을 근심거리로 여겨 제후들을 이용해 그들을 위협하려고 하자, 삼환 역시 애공이 난을 일으킬까 근심했다. 이 때문에 군신 사이에 틈이 많이 벌어졌다. 애공이 능판(陵阪)으로 유람을 갔다가 길에서 맹무백(孟武伯)을 만나 “내가 제명에 죽겠는가?”라고 물으니 “모르겠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애공이 월나라을 이용하여 삼환을 토벌하려고 했다. 8월에는 애공이 (노나라의 대부) 형씨(陘氏, 유산씨)에게 갔다. 삼환이 애공을 공격하자 애공은 위(衛)나라로 달아났다가, 그곳을 떠나 추(鄒)나라로 간 다음 마침내 월나라로 갔다. 국인이 애공을 맞아들여 복귀시켜 했지만 애공은 유산씨(有山氏)의 집에서 죽었다. 그 아들 영(寧)이 서니 이가 도공(悼公)이다.

도공의 시대에는 삼환이 득세하여 노나라의 국군은 작은 제후와 같아 삼환의 가세보다 약해졌다.

13년(기원전 454년)에 삼진(三晉, 한·조·위)이 지백(智伯)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37년에 도공이 죽고 아들 가(嘉)가 이으니 이가 원공(元公)이다.

원공이 재위 21년 만에 죽고 아들 현(顯)이 즉위하니 이가 목공(穆公)이다.

목공이 재위 33년 만에 죽고 아들 분(奮)이 즉위하니 이가 공공(共公)이다.

공공이 재위 22년 만에 죽고 아들 둔(屯)이 즉위하니 이가 강공(康公)이다.

강공이 재위 9년 만에 죽고 아들 언(匽)이 즉위하니 이가 경공(景公)이다.

경공이 재위 29년 만에 죽고 아들 숙(叔)이 즉위하니 이가 평공(平公)이다.

이 무렵 6국이 모두 왕으로 칭했다. 평공 12년에 진(秦)나라 혜왕(惠王)이 죽었다.

22년에 평공이 죽고, 아들 고(賈)가 즉위하니 이가 문공(文公)이다. 문공 7년에 초나라 회왕(懷王)이 진(秦)나라에서 죽었다.

23년에 문공이 죽고 아들 수(讎)가 즉위하니 이가 경공(頃公)이다.

경공 2년에 진(秦)나라가 초나라의 영(郢)을 점령하자,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이 동쪽 진(陳)나라로 거처를 옮겼다.

19년에 초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여 서주를 빼앗았다.

24년에 초나라 고열왕(考烈王)이 노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경공은 도망쳐서 변읍(卞邑)으로 옮겨 평민이 되니 노나라의 제사가 끊어졌다. 경공이 가(柯)나라 땅에서 죽었다. 노나라는 주공에서 경공까지 모두 34세였다.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공자께서 ‘심하구나, 노나라의 도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이!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사이 사람들이 작은 일로도 서로 다투니’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다. 경보(慶父), 숙아(叔牙), 민공(閔公) 당시를 살펴보니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 은공(隱公)과 환공(桓公) 때의 일, 양중(襄仲)이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운 일, 삼환(三桓)이 북쪽을 바라보는 신하로서 직접 소공을 공격하여 소공이 달아난 일 등이 그렇다. 겉으로 보이는 겸양의 예는 그대로이건만 벌어진 일들은 어찌 정반대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