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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동명왕/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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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子

[편집]

가섬벌칠월이면 벌써 서늘하였다. 한개울 물은 소리없이 흐르는데 뒷산 모퉁이 늙은 버들 그늘에 단둘이 손을 마주 잡고 차마 떠나지 못하는 젊은 남녀 한쌍, 그들은 활 잘 쏘 는 주몽과 얼굴 잘난 예랑이었다. 보름을 지나 약간 이지러 진 달이 솟은 것을 보니, 밤은 적지 않이 깊은 것이었다. 달 빛 때문에 그 많던 반딧불이 그늘진 데서만 반짝반짝하고 있었다. 달빛을 담고 흐르는 강물이나 엷은 안개와 달빛에 가리워진 벌판이나 모두 사랑과 젊음에 취한 두 사람의 마 음과도 같았다.

『인제 그만 가셔요, 내일 또 만나게. 어른님네 걱정하시 지.』

하는 예랑의 음성은 아름다웠으나 어느 구석에 적막한 울 림이 있었다.

『그래, 내일 또. 내일 밤에는 이 버드나무 밑에 배를 대고 기다리리다.』

하는 주몽의 말은 참으로 씩씩하였다. 그렇기도 할 것이, 큰 나라를 세울 시조가 아닌가.

주몽이 집에 돌아 왔을 때에는 어머니 유화 부인의 부르는 전갈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이라는 것은 유화 부인이 거처 하는 이궁이었고, 주몽도 이궁 안에 한 채를 차지하여 살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금와왕이 때때로 행차하여서 하루 이틀을 쉬어 가는 일이 있었다.

『어머니 아직도 일어 계시오?』

주몽은 유화 부인이 기대어 달을 바라고 앉았는 난간 가까 이로 갔다.

『오! 네더냐. 이리 올라 오너라. 오늘 밤 달이 유난히도 밝고나. 땅 위에 뽀얀 안개가 흐르는 것이 더욱 달빛을 밝 게 하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어디를 그렇게 늦도록 나가 댕기느냐. 네 나이가 벌써 스물, 너는 인제는 장난군의 소년 이 아닌데.』

인제 나이가 사십을 바라 보는 유화 부인의 달빛에 나뜬 얼굴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청초하다. 아름답기로 말하 면 세상에 소문 높은 그여니와, 그의 옥 같은 피부 밑에는 더운 피가 돌기를 그친 모양으로 인정도 번뇌도 다 식어 버 린 것같이 싸늘하였다. 그것은 유화 부인이 본시 청초한 때 문도 될 것이요, 나이 사십이 된 때문도 될 것이요, 또 달밤 인 때문도 될 것이지마는, 그로 하여금 그렇게 싸늘하게 보 이게 하는 가장 큰 까닭은 근심으로 평생을 살아 온 일이다.

『너희들 다 물러 가거라. 다시 부르지도 않을 터이니 마 음 놓고들 자거라.』

유화 부인은 시비들을 물렸다.

주몽은 평상과 다른 어머니의 태도에 약간 근심이 되었다.

비록 곰과 범이 한꺼번에 덤비어 들더라도 눈도 깜짝 아니 할 나이요 마음이지마는, 주몽에게도 숨은 슬픔과 숨은 근 심이 없지 아니하였다.

『선선하니 방으로 들어 가자. 조용히 할 말이 있어.』

유화 부인은 몸을 일으켰다.

『너 요새에 밤이면 어디를 나가서 늦도록 댕기느냐?』

달빛을 모으로 받고 앉았는 유화 부인은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아들의 동탕한 젊은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때에 부인은 주몽의 얼굴에서 부인 혼자만이 아는 어떤 모 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이십년 전, 부인이 십 팔세의 처녀 적에 이러한 달밤에 처음으로 만났던 해모수(解慕漱)의 모습 이었다. 그때의 해모수도 지금 주몽만한 나이였다. 스무 살 을 넘었을락말락한 해모수는 푸른 베옷에 검은 관을 쓰고 활을 메고 칼을 차고 이마에 흰 점이 박힌 말을 타고 있었다.

그날 밤 유화는 동생들과 달을 보고 있었다. 문득 터벅터 벅 말발굽 소리가 나며 난데 없는 젊은 사람이 나타나더니, 길을 묻고 먹을 물 한 그릇을 빌었다. 그때에 달빛을 받은 그 남자의 얼굴이 지금 주몽의 얼굴 모습 그대로라고 유화 부인은 생각하면서 지난 이십년을 회고하였다.

그날 밤 유화는 그 젊은 사나이를 집에 들여 재우니, 이때 에 든 아기가 주몽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젊은 해모수는 반드시 유화 를 맞으러 올 것을 약속하고 밝는 날 아침에 가버렸으나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뱃속에 든 주몽은 날로 자라서 유화는 웅심산 오리골(熊心山?綠谷) 그 아버지 하백(河伯)의 집에서 실행한 계집애라 하여 쫓겨 나서 태백산 앞 우발수(太伯山南優渤水)가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굳은 약속을 어기고 해모수가 유화를 찾아 오지 아니한데 는 이유가 있었다. 해모수는 해부루(解扶婁)가 내버리고 간 자리를 점령하여서 북부여 왕이 된 것이다. 나라를 세우는 일이 끝나면 해모수가 유화를 찾음직도 하건마는, 운명은 그때까지를 기다리게 아니하였다. 사냥을 나왔던 동부여 왕 금와는 유화를 보고는 놓지 아니하고 가섬벌 서울로 데리고 돌아 갔다. 이렇게 되니 유화와 해모수와의 인연은 아주 영 영 끊어진 것이었다.

뱃속에 든 아이가 누구의 씨냐고 금와왕이 물을 때에 유화 는 속이지 않고 해모수의 씨라고 대답하였다. 해모수는 금 와왕 편에서 보면 국토의 절반을 잘라서 감히 왕을 칭하는 역적이었다. 그래서 금와왕은 찼던 칼을 빼어 당장에 유화 의 배를 갈라서 그 속에 든 해모수의 씨를 죽여 버리고 싶 었으나, 칼자루를 잡았던 그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유화 부 인의 아름다움에 반한 것만도 아니었다. 막비 천명이었다.

이때에 금와왕의 칼이 한번 번뜩였다면(그것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주몽은 세상에 없었을 것이요, 따라서 그로 말미암 아 알려진 모든 일도 아니 생기고 말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때에 유화 부인의 뱃속에 들어 있던 핏덩어리 하나에서 고구려라는 큰 나라가 생기고 또 금와왕의 아들 대소(帶素) 를 죽이고 그 나라를 빼앗을 무휼(無恤)이 나올 줄을 아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달이 좋아서 강가에 달 구경을 하느라고 밤 깊은 줄을 몰랐습니다.』

주몽은 이렇게 어머니 묻는 말에 대답하였다. 예랑과 만났 다는 말은 아니하였다.

『너는 네 몸에 위태한 일이 가까워 오는 것을 모르느 냐?』

유화 부인의 음성은 무거웠다. 주몽도 심상치 아니한 무엇 이 있는 것을 느꼈다.

『위태한 일이라고 하오면?』

하고 주몽은 몸을 도사렸다.

『너를 살해하려고 네 뒤를 밟는 사람이 있단 말이다.』

『내 뒤를 밟아요?』

『그래 네 뒤를 밟아.』

『나를 죽이려고요?』

『그래 너를 죽이려고.』

『내가 남을 해할 마음이 없거든 뉘가 나를 해합니까?』

하고 주몽은 자기의 거리낌 없는 속을 보이려는 듯이 눈을 들어 창 밖으로 밤하늘을 바라본다. 가을 하늘과 같이 흐림 이 없는 그의 마음이었다.

『그야.』

하고 유화 부인은 자기도 아들의 속과 같이 활달해진 것 같았다.

『대장부의 마음이 그러해야지. 남이 나를 해하지나 아니 할까 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대장부의 마음은 아닐 것이 다. 그러나, 또 남이 나를 어떻게 엿보는 것을 모르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일이 아니다. 옆에 살이 오는지 칼이 오는 지 모르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일이 아니겠느냐. 너는 ─너는 나면서부터─나면서부터 죽이려는 자의 엿봄을 받았 다. 아직 네게 말은 다 아니했다마는, 너는 날아 드는 화살 속에서 접어 드는 칼날 속에서 스무 살 되는 오늘날까지 살 아 온 셈이야.』

하고 유화 부인은 한숨을 내어 쉰다.

『어머니.』

하고 주몽은 놀라는 모양으로 어머니 곁으로 한 무릎 다가 앉는다. 어머니의 말 속에는 심상치 아니한 무엇이 있는 것 을 주몽은 깨달은 것이었다.

『어머니, 대관절 나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내가 아버지라 고 불러 온 금와왕이 아버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 니다. 그러면 정말 내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그이는 어디 계십니까? 세상에 살아 계십니까, 벌써 세상을 떠나셨습니 까? 나는 어머니께 아버지 일을 물은 일이 없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들으면 어머니는 필시 괴로워하실 것이라고 생각하 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지금 내 목숨을 노리 고 내 옆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시니, 그렇다면 더구나 나는 내 아버지가 누구며, 나를 죽이려고 따르는 자가 누군 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찾을 아버지는 찾고 갚을 원 수는 갚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벌써부터도 어머니께서 내게 하실 말씀이 있는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 말씀을 내게 하실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 씀이 심히 하시기 어려우신 말씀인 줄도 압니다. 그러나 어 머니, 오늘은 그 말씀을 해 주셔요. 아버지가 누구십니까?

그리고 원수는 누굽니까?』

주몽의 말에는 명령적인 힘이 있었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던 유화 부인은 주몽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들어 아들의 맺힌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 었다.

『그래, 말을 해야지. 한번은 말을 해야 돼. 더구나 너와 나와 모자가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이 마 지막일 것이다. 너는 이 나라를 떠나야 하고 나는 이 나라 에 남아 있어야 하니 안 그러냐.』

하고 유화 부인은 말을 하려다가 말고 깜짝 놀라는 모양으로,

『아니다. 네가 네 처소에 가서 먼저 길 떠날 차비를 시켜 라. 마지막 떠나는 차비다. 혹시 너를 잡으려고 뒤를 따를 군사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런 줄 알고 차리렷다. 일행이 많 은 것이 도리어 거추장거리고, 아는 사람이 많으면 말이 나 기 쉬우니, 네가 믿는 심복 몇 사람만 거느리고 가도록 하 여라. 천명을 받은 영웅이 가는 곳에 자연 도울 자가 있을 것이야. 그럼 빨리 가서 차비를 시키고 차비하는 동안에 틈 이 있거든 한번 더 이 어미를 보고 떠나려무나. 내가 네게 할 말을 짧게짧게 몽똥그렸다가 그때에 삽시간에 다 하도록 나도 차비를 하마. 자, 어서, 주저할 때가 아니다.』

『네.』

하는 한 마디 대답을 남기고 주몽은 어머니의 처소를 떠나 자기의 처소로 왔다.

주몽의 처소는 유화가 거처하는 이궁과 연복해 있는 일종 의 궁이었다. 주몽도 금와왕의 왕자로 대우를 받고 있었으 니, 이것은 금와왕이 유화의 뜻을 기쁘게 하려 함이어니와, 그 밖에도 주몽이 북부여 해모수왕의 씨라는 것이(비록 금 와왕과 유화 부인과 두 사람 밖에 모르는 비밀이지마는) 자 연히 금와왕으로 하여금 주몽을 괄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었다. 북부여 왕이 동부여의 힘있는 적이기 때문에 북부여 왕의 아들인 주몽을 죽이지 아니하면 우대하는 수 밖에 없 는 것이었다. 그래서 금와왕은 주몽을 다른 일곱 왕자와 다 름 없이 표면만은 왕자로 대우하여 온 것이었다. 다만 유화 부인 왕후가 아니기 때문에, 주몽이 서자의 대우를 받을 뿐 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금와왕의 마음뿐이요, 태자 대소는 주몽의 재주와 기상이 비상하여서 칼 쓰기·활 쏘기·말 달리 기, 기타 슬기로나 힘으로나 자기보다 우월한 것이 분하고 시기 날뿐더러, 금와왕이 죽는 날이면 주몽에게 임금의 자 리를 빼앗길 우려도 없지 아니하여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주몽을 제해 버리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더구나 지난 번 오리골 사냥에 금와왕은 주몽의 힘을 누르기 위하여 말도 활도 화살도 다 대소 이하 다른 왕자들 보다 못한 것을 주 몽에게 주었건마는 종일 사냥한 결과를 보면, 주몽의 소득 이 다른 일곱 왕자의 소득을 합한 것보다도 많았다. 어떤 말이든지 주몽을 등에 얹으면 나는 것 같고, 비록 버들가지 나 쑥대 화살이라도 주몽의 활에 메우면 무서운 힘을 발하 였다. 주몽의 활 솜씨는 일곱 살 적부터 유명하였던 것이다.

그 이름 추모(雛牟) 또는 주몽은 활 잘 쏜다는 부여말이었다.

이러한 사냥의 결과가 대소 이하 여러 왕자들의 미움을 산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금와왕도 주몽의 재주에 대하여 미움과 무서움을 느끼게 되었다.

『주몽은 큰 화근입니다. 큰 적입니다. 지금 없이하지 아니 하면 후회 막급이 됩니다.』

하는 태자 대소의 말을 늘 거절하던 금와왕도 이번에는 근 심이 된 것이었다. 갈수록 늘어 가는 주몽의 힘과 재주, 그 의 슬기. 이번 사냥에 나타난 모양으로 일곱 왕자가 다 합 하여도 주몽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 도 심상하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주몽으로 태자를 삼아서 그에게 나라를 맡기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죽이거나,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택할 길 밖에 없 었다. 힘있는 주몽을 천대받는 자리에 두는 것은 호랑이를 성내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리하여서 주몽을 집어 치우자 하는 의논이 은밀한 속에 궁중에서 결정되었다는 것 이 유화 부인의 귀에 들어온 것이었다.

주몽이 민간 젊은 사람에게 인망이 높듯이, 유화 부인도 궁중에서 인심을 얻고 있었다. 그의 용모와 행동은 다만 남 자의 마음만을 끌 뿐이 아니라, 여자의 마음도 끌었다. 궁중 에 모시는 궁녀들 중에도 유화 부인을 사모하여 그를 위하 고 돕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궁중에 돌아가는 비밀한 소 문도 대개는 유화 부인에게 들려 왔다. 유화 부인은 특히 사람을 놓아서 염탐하거나 수소문하는 일은 아니하지마는, 아들을 염려하는 그의 귀는 모든 소리에 자연 빨라서 하나 도 아니 놓치려 하였다.

주몽을 어떤 모양으로 죽인다는 것까지는 유화 부인도 몰 랐다. 그러나 주몽을 죽이는데 몇 방법이 있을 것을 유화 부인은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사냥을 나갔 다가 짐승을 쏘는 체하고 쏘는 것이다. 깜쪽같이 죽이면 좋 아도 주몽을 누가 죽였다는 소문이 나면 세상에서는 필시 다른 왕자들을 의심할 것이므로 흔적 없이 죽일 길을 벼르 는 것이었다. 또 한 길은 주몽에게 무슨 죄를 넘겨 씌워서 국법에 의하여 죽이는 것이니, 이것이 가장 정당하고 확실 한 법이지마는 슬기로운 주몽은 조그마한 허물이라도 저지 르는 일이 없다. 금와왕과 그 왕후에 대하여서는 극히 공손 하게 자식과 신하의 예를 다하였고, 태자 대소와 기타 왕자 에 대하여서도 책 잡히는 일이 없도록 정성을 다하였다. 왕 자의 몸으로 말을 먹이는 일을 맡으라 하여도 왕명이면 순 종하였고, 대소가 오만 무례한 언사나 행동으로 짐짓 욕을 보일 때에도 주몽은 결코 반항하는 빛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주몽은 일반 백성이나 미천한 노예에 대하여서도 항상 덕 을 베풀었다. 그러기 때문에 주몽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이 없고 다 그를 사랑하고 아꼈다.

다만 한 가지 주몽에게 책 잡힐 것이 있다 하면, 그것은 태자 대소가 어르고 있는 예랑의 사랑을 먼저 얻은 것이었 으나, 피차에 솟는 인연의 사랑은 주몽도 어찌할 수 없을뿐 더러, 사냥이나 사랑에 사양하는 것은 비굴하다고 주몽은 생각하였다.

주몽은 처소에 돌아 와서 세 사람을 불렀다. 세 사람이란 임금이나 귀한 사람을 모셔서 돕는 가장 믿고 친근한 사람 이었다. 단군 때에 신지(神誌)·팽우(彭虞)·고시(高矢) 세 사람 이 있던 것을 본받아서 부여에서도 임금이나 귀인은 세 사 람을 두었던 것이다. 첫 사람은 천지신명을 모셔서 굿과 무 꾸리를 맡고, 둘째 사람은 싸움을 맡고, 셋째 사람은 살림을 맡으니, 오늘날 말로 설명하면, 첫 사람은 교화, 둘째 사람 은 국방, 셋째 사람은 산업·경제를 맡는 것이다. 주몽의 세 사람은 오이(烏伊)·마리(摩離)·합보(陜父)였다. 이들은 다 나 이 지긋한 사람들로서, 주몽의 덕을 사모하고 그의 장래를 믿어서 따르는 심복들이었으니, 그들이 주몽의 막하에 들어 오게 된데도 다 복잡 미묘한 사정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것 이 모두 인연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사정 저 사정으로 주 몽과 운명을 같이하지 아니하지 못하게 인연으로 몰린 사람 들이었다.

『어찌 이렇게 밤 늦게 불러 계시오?』

그중 나이 많은 오이가 세 사람을 대표하여 물었다.

『그리들 앉으오.』

세 사람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린다.

『나는 이 밤으로 가섬벌을 떠나야 하겠소. 그동안 그대네 세 사람은 나를 잘 가르치고 잘 도와 주셨소. 그 신세는 잊 지 아니하겠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이 정처없는 길이니, 그 대네더러 따라 오랄수는 없소. 신세를 갚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서운하나 명이라 무가내하오. 좋은 영웅을 만나 다들 큰 공을 세우시오.』

이렇게 말하는 주몽의 음성은 장히 비장하였다.

오이가 무릎을 꿇고 나와 앉으며,

『나으리, 무슨 일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거니와, 우리 세 사람은 나으리 뒤를 따르오리다. 따라서 나으리께서 큰 뜻 을 이루시는 양을 보지 않고 이몸들이 가기를 어디로 가오 리까. 그러하온즉 우리더러 떨어져 있거란 분부는 마시오.』

한즉 마리도 무릎 걸음으로 한 걸음 나앉으며,

『이몸의 마음도 오이의 마음과 같소. 어디를 가시거나 이 몸은 나으리의 뒤를 따라 모시오리다. 나으리께서 물러 가 라 하시면 차라리 이 칼로 이몸의 목숨을 끊어 버리리다.』

하고 눈물을 떨군다.

『고맙소. 합보는?』

하는 주몽의 물음에 합보는,

『오이와 마리 두 사람이 말하였으니 더 할 말이 없소. 우 리 세 사람은 살거나 죽거나 한 마음 한 뜻으로 나으리를 모시기로 맹세하였으니, 산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산이 되 어도 우리 뜻은 변하지 아니하오.』

『고맙소. 기쁘오. 그러면 나와 가기로 차비하오. 나는 어 마마마께 하직하러 갈 터이니, 차비 다 되거든 내게 알리오.

우리 길떠나는 것을 쥐도 새도 모르도록 잘 알아하오.』

하고 주몽은 유화 부인 처소로 갔다.

『네 아버지는 북부여 왕 해모수마마.』

하는 유화 부인의 말에 주몽은 크게 놀랐다.

『어머니, 그런데 어떻게 어머니와 내가 이렇게 동부여에 와 있소?』

『오, 그것이 내가 한번은 네게 말해야 할 말이라는 것이 야. 네가 떠날 차비가 될 때까지 대충대충 말해 볼까. 그동 안 지내 온 말을 다 하자면 이 밤이 새더라도 부족할 것이 지마는 네가 말께 뛰어 오를 때까지 띄엄띄엄 말해 볼까.』

하는 유화 부인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금부터 스무 해 전, 내가 열 여덟 살 되던 해 칠월 보 름 달 밝은 밤에 웅심산 오리골(熊心山?綠谷) 집에서 동생들 을 데리고 물가에 달 구경을 하고 있을 때에 어떤 젊은 사 람 하나가 활을 메고 말을 타고 지내다가 나를 보고 길을 묻고 물을 청하기로 부모 몰래 집으로 불러 들여 한밤을 드 새어 보내니, 그가 해모수 네 아버지시다. 그 얼굴을 보려거 든 거울에 네 얼굴을 비추어 보아라. 그때 네 아버지 나이 도 지금 네 나이만했다. 이튿날 새벽에 오리골을 떠날 때에 는 다시 오마 하더니만, 그후에는 영영 소식이 없고 말았다.

성씨를 물었더니, 네 아버지는 하나님의 아들 해모수라 하 고, 만일 애기가 나면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으랴 하였더니,

「河伯之孫 日月之子」라고 부르라 하였다. 하백은 네 외할 아버지시오, 햇님 달님은 네 아버지편 조상님이시다. 네 아 버지는 그 길로 가셔서 북부여 나라를 세우시노라고 바쁘셨 으니 나를 찾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네가 내 뱃속 에서 자라서 부모님 눈에 띄니 중매와 예법 없이 아이를 배 었다고 나를 내어 쫓으셔서 오리골 집을 떠나 우발수 가에 숨어 있게 되었다.

그해 늦은 가을 어느 날, 금와왕이 사냥을 나오셨다가 나 를 보시고 이리로 데려 오셨어. 그래서 이 궁중에 들어와서 너를 낳았다. 네가 나던 날은 온종일 바람이 불고 비가 오 다가 번쩍 개인 날. 나는 네가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고 만민이 편안히 살 새 세상을 만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하 늘에 빌고, 해와 달에 빌고, 별에 빌고, 산에 물에 빌었다.

네가 땅에 뚝 떨어져 으아하고 첫소리로 울 때에 지붕에는 혼하게 빛이 올려 뻗쳤다고도 하고, 하늘에 큰 별빛이 지붕 에 내리 뻗쳤다고도 하여서, 왕께서도 무꾸리를 시켜서 길 흉을 보셨다고 한다. 점하는 사람과 상 보는 사람들의 말이, 너는 비범한 사람이어서 나중에는 천하를 뒤흔들 큰 임금이 될 아이라고 하니, 왕께서는 그것이 겁이 나서 너를 내다 버리라 명하셨다. 그래서 너를 들어 내어 갈 때에 나는 왕 께 빌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으나, 약한 여자의 몸으로 한 나라의 힘을 당할 수가 있느냐. 그래서 나는 천지 신명께 빌었다. 머리를 끊고, 손톱 발톱을 자르고, 섬거적을 깔고 땅바닥에 누워서 사흘 밤 사흘 낮 나를 죽이고 너를 살려 달라고 햇님·달님·별님 모든 신명님께 빌었다.』

유화 부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십 이년 전 일을 추억한다.

『그랬더니 신명님이 도우셔서 사흘만에 네가 고스란히 내 품에 돌아 왔구나. 들으니, 너를 돼지 우리에 던지면 돼지가 북데기로 싸고, 말 먹이는 데 던지면 말이 너를 밟지 아니 하고, 들에 던지면 큰 새가 와서 날개로 덮어 춥지 않게 하 고, 이래서 왕께서도 너를 하늘이 아시는 아이라고 하여서 죽일 생각을 그만두고 내게 돌려 주신 것이라고 한다. 네가 일곱 살 되던 해에 네 손으로 활을 메워서 나는 새를 쏘는 것을 보고 왕께서는 크게 놀라시며, 저 애가 내 씨면 얼마 나 좋을까 하고 한탄하시는 것을 보고 나는 왕이 또 너를 해할 마음이나 아니 일으킬까 하여서 낳은 자도 부모요 기 른 자도 부모라 하였사오니, 이 아이가 상감마마의 아들이 아니면 뉘 아들이 되오리까 하였더니, 고개를 끄떡끄떡하시 고 그후부터는 너를 미워하는 양을 아니 보이셨다. 그러나 네가 열 두 살 되던 해 네 아버지께서 북부여 왕이 되신 소 문을 듣고서부터는 왕께서 또 너를 의심하기 시작하셨다.

너를 의심하면 나도 의심할 것이 아니냐. 왕후가 나를 미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의 말을 들어서 왕자들도 너를 그렇게 미워하였고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왕께서는 네 아버지가 누구신 줄을 아시거든. 이런 일을 모두 생각하 면 네 목숨이 풍전 등화 같음직도 하건마는 역시 하늘이 도 우시는 것이야. 그러길래 우리 모자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것 이 아니냐. 그렇지마는 이번에만은 심상치를 않은 모양이다.

저번 사냥에 네가 너무 많이 짐승을 잡은 것이 빌미가 되어 서 이번에야말로 태자 대소가 기어이 너를 없이 하고야 만 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네 잘못도 있다. 그렇게 재주를 다 내보이는 것이 아니야. 재주란 보물 이니까, 싸고싸서 감추어 두지 아니하면 남의 시기를 받는 법이야. 사람이란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대하여서는 무서워 서 굴복하지 아니하면 미워서 죽이는 법이야. 그런데 태자 가 네게 굴복할 수 없으니, 너를 죽이려 들 것이 아니냐. 그 러니까 내가 너더러 이밤으로 이곳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 다. 너 같은 재주에 어디를 간들 나라 하나 못 세우겠느냐.

예로부터 일러 오기를, 동방으로 동방으로 가면 큰 바닷가 에 좋은 땅이 있다 하니, 동으로 동으로 가서 부디부디 큰 나라를 하나 세우려무나.』

이렇게 말하고 유화 부인은 갑 속에서 갑옷 한 벌과 칼 한 자루를 꺼내어 주몽에게 준다. 갑옷은 검은 바탕에 은실로 달, 금실로 해를 수놓은 일월갑이요, 칼은 호피칼집에 금장 식을 한 것이었다. 유화 부인은 갑옷과 칼을 두 손으로 받 들어 아들에게 주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칼은 네 아버지께 받은 유일한 신표요, 이 갑옷은 너 를 줄 양으로 어미가 손수 만든 것이다. 이 어미의 소원은 너와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태후의 예로 나라의 제사를 받는 것이다.』

『나의 소원은 너와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태후의 예 로 제사를 받는 것이다.』

하는 어머니의 말에 주몽은 무거운 고개가 저절로 숙여짐 을 깨달았다. 뜻이 큰 주몽도 이날까지 제가 왕이 되겠다고 꼭 생각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 말에 저는 큰 나라를 세워서 거룩한 임금이 되어야 할 것을 깨닫고 결심 하였다.

주몽은 유화 부인에게서 받은 신표인 칼을 가지고 북부여 로 가서 해모수왕을 찾으면 부자 상면할 수도 있고 또 태자 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몽은 그렇게 쉬운 길을 갈 생 각은 없었다. 그 아버지 해모수가 제 손으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 모양으로, 저도 제 힘으로 제 나라를 세우고 싶다 고 생각하였다. 유화 부인이 주몽이더러 북부여에 가라 하 지 아니하고 동으로 동으로 가라 한 것도 이 뜻이었다.

우리 민족의 진로는 동으로 동으로 향함이었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동으로 동으로 흐르기 시작하였는지 분명치 아 니하나,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그 아들 온조가 백제를 세울 때까지, 또 우리 민족의 일파 가 동해를 건너 일본을 세울 때까지도 동으로 동으로라는 우리 진로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빛을 찾는 민족이었다.

주몽은 유화 부인께서 받은 갑옷을 입고 칼을 찼다. 새로 운 정신과 새로운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주몽은 칼을 빼 어서 한번 보았다. 달빛에 번쩍하는 칼날에서는 푸른 무지 개가 났다.

『어머니.』

주몽은 칼을 집에 꽂고 유화 부인의 앞에 꿇어 앉으며 불 렀다.

『어머니, 부디 안녕히 계시오. 소자가 큰 나라를 세우고 태후의 예로 모시러 올 때까지 부디 안녕히 계시오. 어머니 가르치는 대로 동으로 동으로 가오리다.』

이렇게 하직 인사가 끝날 무렵에 인마가 문 밖에 둥대한다 는 마리의 전갈이 들어 왔다.

주몽은 유화 부인 쪽을 한번 돌아 보았으나 부인은 벌써 문을 닫고 아니 보였다. 눈물에 젖은 어미의 얼굴로 아들의 뜻을 무디게 하려 아니함이었다. 어머니의 그 마음이 아들 에게 통하여 더욱 감격을 주었다.

주몽은 오이·마리·합보 세 부하와 십 수명의 종자를 거느리 고 개울가 버들 그늘 길로 동으로 동으로 달렸다. 축축하고 도 돌도 모래도 없는 길에는 말 발굽 소리도 나지 아니하였 다. 그들은 어느덧 서울을 벗어나서 수수와 피가 길길이 자 란 밭 사이로 접어 들었다. 이만해도 따라 잡힐 한 고비는 벗어난 것이었다. 이제 굿터 나루라는 나루만 건너면 주몽 일행은 좀더 안전할 것이었다. 주몽이 가섬벌을 빠져 나와 서 어디로 달아난 줄만 알면 태자 대소는 필시 많은 군사를 늘어 놓아서 사방으로 찾을 것이다. 굿터 나루를 건너 또 오백리 길이나 달려서 암체물이라는 강을 건너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