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동명왕/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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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亡[편집]

1[편집]

세 사자의 말을 다 듣더니 주몽은,

『오냐, 알았다. 내 도우리라고 너희 태수께 돌아가 아뢰어 라.』

하였다. 주몽의 이 말을 듣고 세 사자 중에 하나는 길을 인도할 차로 주몽의 진중에 남고, 둘은 다시 말을 달려서 모둔골로 돌아 갔다.

주몽은 즉시 군중에 명하여 오늘 밤 행군을 할 터이니 군 사와 말을 먹이고 또 내일도 쉬일 새 없이 싸울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고 명령한 뒤에 여섯 사람(오이·마리·합보와 새 로 얻은 재사·무골·묵거)을 불러 군사 회의를 열었다.

여섯 사람이 모인 자리에 주몽은,

『모둔골 태수의 청을 들어야 하겠고 이 싸움은 꼭 싸워야 하겠소. 태수 을두지와 부인 조시누가 다 백성을 사랑하는 의인이라하니 이들은 도와야 하고, 고미는 역적이요, 낙랑 왕 최 낙은 남의 나라 여색과 재물을 탐하는 불의인이니 쳐 야 하겠소. 태수 부처 생명이 경각에 달리고 모둔골 수만명 백성이 어육이 될 위험이 있으니 이 밤으로 행동을 일으켜 하루 안에 목적을 달하도록 의논하오.』

하여, 전략 전술을 의논할 것을 명한 뒤에,

『아무쪼록 인명 살상 적도록, 태수 부처의 생명이 안전하 도록, 낙랑 왕은 사로잡도록.』

하는 세 가지 주의할 것을 일렀다.

의논이 벌어졌다. 모두 지혜 있는 여섯 사람이요, 큰 나라 를 이룩하는 일군이 될 여섯 사람이었다. 주몽은 나이 젊으 나 지혜는 여섯 사람보다 높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호랑이 가 발톱을 감추듯 제 지혜를 감추어서 좀처럼 드러내지 아 니하고 대개는 부하의 의견과 공론을 좇았다. 비록 주몽 자 신의 의견이라도 넌지시 오이·마리·합보 등의 의견을 만들어 가지고 다시 제가 채택하되 그러한 눈치를 보이지 아니하였 다. 그렇게 함으로 주몽의 부하는 저마다 제 책임이 중한 것을 느끼고 저마다 주몽과 저와가 둘이 아니요 하나인 것 을 느꼈다. 언제나 보면 주몽은 자기네에게 물어서 하는 것 같은데 지내 놓고 돌아 보면 주몽은 자기네를 이끌고 갔다 고 생각될 때에 주몽의 부하는 더욱 주몽을 사모하고 그 앞 에 무릎을 꿇지 아니할 수 없었다.

여섯 사람 군사 회의의 결론이 나왔다. 주몽은 몇 가지 수 정과 몇 가지 주의를 더하고 그 계획을 채택하였다.

군사와 말이 든든하게 저녁을 먹고 밤참과 아침과 점심 먹 을 것까지 싸서 말게 달고 나서 주몽은 군사를 셋에 노나 서, 일대는 무골을 주어 멀리 앞서 가서 음술물의 하류를 막아서 낙랑 왕의 함대의 물러갈 길을 끊게 하고, 일대는 재사와 묵거에게 맡겨 모둔골 성의 한 나라 군사를 대적하 게 하고, 일대는 오이와 마리에게 맡겨 유격이 되게 하였다.

지금 아는 대로의 사정으로는 주전장이 어디가 될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모둔골 성과 강을 막은 데와의 사이에 힘있고도 날쌘 유격 부대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편집]

모둔골 태수의 마을(아문)은 성중 북쪽 산 기슭에 있어서 망대에 오르면 시가를 건너 음술물을 굽어 볼 수가 있었다.

태수라 하지마는 벌써 사오대나 세습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 문에 제후와 같아서 마을이자 곧 태수의 집이요 관속과 군 사가 곧 태수의 신하였다. 지금 태수 을두지는 이름을 도마 미(刀馬味)라 하여, 아직 스무 살을 얼마 넘지 아니한 소년 이었다. 그는 키가 훨쩍 크고 얼굴이 동탕하여 어디 가도 번쩍 눈에 뜨이는 장부요, 또 마음이 인자하여 백성을 사랑 하지마는 정치와 군사에는 흥미가 없고 노래와 춤 같은 향 락을 즐겨하였다. 그리고 정치는 늙은 신하 현암(絃岩)에게 맡기고, 군사는 고미에게 맡겨 버렸다. 현암은 전대부터 오 는 늙은 충신이었으나 인제는 무력하였고, 고미는 무예도 능하고 야심도 있는 인물이어서 을두지의 자리를 엿보는 자 였다.

태수 을두지가 졸본 왕의 아름다운 공주를 아내로 삼은 것 은 얼른 보면 복 같으나 다시 보면 화였다. 을두지가 만일 고미의 무예와 야심을 가졌다면 졸본의 왕이 될 수도 있었 으니 대개 졸본 왕은 이미 늙고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 러나 을두지는 아름다운 아내와 날마다 밤마다 잘 먹고 마 시고 놀기를 재미로 알 뿐이요 왕이, 되려는 야심도 없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야심가 고미는 을두지를 집어 치어 아름다 운 왕녀와 모둔골을 제 것을 만들고 나서 군사를 길러 졸본 을 들이칠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에 고미는 바깥 세력과 결합할 필요를 느꼈으니 대개 여 러 대 백성들의 인심을 산 끝이라, 제 힘만 가지고는 을두 지를 집어 치우기가 어려웠던 까닭이다.

해마다 얼음이 풀릴 때와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이 될 때면 물건을 싣고 올라 오는 한 나라 배는 고미에게 제 야심을 달하는 기회를 주었다.

놀기를 좋아하는 태수 을두지는 또한 화려한 물건들을 샀 다. 그래서 을두지 내외는 한 나라 비단을 입고 한 나라 술 과 한 나라 약과 한 나라 향 같은 것을 썼다. 장사치들은 태수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을 선사하 였고, 지난 해에는 태수 부처를 배에 청하기까지 하였다. 이 리하여서 태수의 아내 조시누가 천하 일색이란 것이 낙랑 왕 최 낙에게까지 알려진 것이었다.

이에 최 낙은 한번 조시누를 보기를 원하여서 장삿배를 가 장한 병선을 끌고 태백에 얼음 녹는 봄 물을 이용하여 모둔 골에 온 것이었다.

최 낙이 을두지의 궁에서 조시누를 한번 보매 혼이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낙랑 왕의 자리와 조시누와 바꾸자면 두 말 없이 바꿀 것이었다. 그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조시누를 제 것을 만들 것을 결심하였다.

3[편집]

최 낙은 옥과 비단과 한 나라 계집 하나를 고미에게 선물 하고 서로 돕는 약속을 할 것을 청하여 고미의 허락을 얻었 다. 한 나라 계집으로 첩을 삼는 것은 그때에는 큰 호강으 로 아는 일이었는데, 최 낙이 고미에게 선물한 계집은 그 여러 첩 중에 하나로서 그 아름다움이 매우 고미의 마음을 끌었다. 최 낙의 뜻이 조시누에 있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 으나 최 낙의 도움을 아니 받고는 제 목적을 달할 수 없는 줄을 아는 고미는 참고 쓸개를 삼켰다. 이리하여서 고미와 최 낙과 배가 맞아 가지고 고미는 제 군사를 일부러 성 외 로 분산시키고 한병이 태수의 마을을 에워 싸기를 허한 것 이었다.

태수는 저녁을 먹고 나서 사랑하는 아내 조시누와 어린 두 아들의 재롱을 보고 즐기고 있었다. 그는 술을 좀 먹으나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방에는 한 나라 걸상과 와상을 놓고 한 나라 기명에 한 나라 과자와 과일들이 담겨 있었다.

어린애는 다섯 살 되는 계집애를 머리로 세 살, 한 살 되 는 두 아들 합하여 셋이 있었고, 세 유모도 다 젊고 아름다 운 사람들이어서 방안은 모두 아름답고 평화로왔다. 은으로 만든 촛대에 굵은 촛불이 토하는 불빛이 이 행복된 사람들 의 웃는 얼굴을 비추는 동안에 봄 밤은 흐르고 있었다.

이때에 문득 계하에서,

『사또 안전에 아뢰오.』

하고, 외치는 급한 소리가 들렸다. 그 급한 소리도 이때 이 방 안에 들어 와서는 화평한 음악 소리로 아니 변할 수가 없었다.

첫 소리에도 대답이 없고, 둘째 소리도 들은 체 만체 하다 가, 셋째 소리에야 을두지가 와상에서 고개를 들며,

『그 누구냐? 무슨 일이 있거든 밝는 날에 들라 하여라.』

하고, 귀찮는 듯이 분부하였다.

『사또 안전. 큰일 났소. 지금 한 나라 군사가 마을을 둘러 쌌는데 창검이 별 겯듯 하였소. 그러고 한 나라 장수 하나 가 나타나서 이 글발을 사또 안전께 올리고 곧 답장 받아 오라고 성화같이 재촉하고 있소.』

이렇게 아뢰는 것은 마을에 번을 든 호위대의 장수였다.

태수 을두지는 벌떡 와상에서 일어나서 창을 열어 제치며,

『이봐라. 네가 정신이 있느냐. 이곳이 모둔골이 분명하거 든 한 나라 군사가 웬 일이란 말이냐. 귀신이 아니어든 한 나라 군사가 소리 없이 어찌 오며, 한 나라 군사가 왔기로 서니 모둔골 천명 군사는 다 어디 가고 이 밤중에 한 나라 군사가 여기를 온단 말이냐. 이봐라, 어디 이 불빛에 네 얼 굴을 보여라. 네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사람이면 정신이 있 느냐 없느냐. 좀 보자. 이리 나와.』

하는 호령에 중년 장수 하나가 칼을 떼어서 받들고 창앞으 로 나선다.

『젛사오되 소인은 귀신도 아니옵고 정신 없는 놈도 아를 배오고 익혔다. 례백의 말 대로 순종하여서 앉음앉음이, 걸 음걸이 모도 그하라는 대로 하였다곧곧. 하게 하게 앉고, 무 겁게 걷고 느릿느릿 말하고 눈은 똑 바로 보고 손은 읍하고 웃어도 이를 안보이고 성내지 말고 기뻐하지 말고 화내지 말고 자냥을 하되 알 품은 새와 새끼 밴 즘생을 잡지 말고 이 모양으로 수없이 배우고 익혔으나 대소는 그것이 모도 억지오 거북스러웠다. 그래도 례백의 잔 소리에 못 이기어 서 그가 보는 앞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일부 페이지 원본에서 낙장-------

그러나 대소는 차차 예가 구찮아지고 따라서 례백을 보면 또 그 잔 소린가 하고 진저리가 났다. 점잖을 빼다가도 례 백 만 물러나가면 얽혔다가 풀린 즘생모양으로 막 날치고 막 굴렀다. 싫건 소리를 내어 웃고 네 활개 뺏고 자빠저서 팔다리를 마음대로 버둥거려 보았다. 무겁게 걷는 것이 가 깝해서 앙금질도 하고 다름박질도 하였다. 알 품음새는 더 욱 잡기 쉽고 재미나고 새끼 다리고 가는 노루나 사슴을 잡 는 것은 더욱 재미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도 주몽이가 꼭 꼭 예를 지켜서 대소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미웠다.

차차 나이를 먹어 턱에 수염발이 잡히ㄴ매 대소는 례백의 가르침에 반항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지키는 것은 섬기는 자의 일이다. 다스리는 자는 예를 만들어서 아랫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는 것이다. 다스리는 자는 예의 주인이기 때문에 예를 만들 수도 있는 것과 같이 마음 대로 깨트릴 수도 있는 것이다」

대소는 이러한 이론을 만들어서 례백과 논쟁도 하였다. 대 소가 이렇게 대어를 때에는 례백은 대소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대소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은 그의 천품이라 고도 하 겠으나 그의 무예의 선생 무구(無懼)의 영향도 적지아니하였 다. 그는 오직 힘과 재조 만을 숭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미워하는 것은 예였다. 그는 그가 기운이 센것과 칼을 잘 쓰는 것을 자랑 삼아서 가섬벌에서 그를 두려워하지 않 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대소가 가장 사랑하여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라 아무도 그를 거스릴 자가 없었다.

대소는 무구가 좋았고 저도 무구처럼 살고 싶었다.

대소는 하로 바삐 임금 될 날을 기다렸다. 임금이 되는 날 이면 아무도 꺼릴 것없이 싫건 제 마음대로 살 수가 있는 것이었다.

대소의 아버지 금와왕은 성품이 인자하고 또 한나라 글을 숭상하여서 그 문화를 존중하였다. 대소는 그 아버지의 인 자한 성품을 닮지아니하고 그 우유부단한 것과 여색에 방종 한 약점 만을 닮았다.

비길 데 없이 팔자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 금 손에 든 낙랑 왕의 편지도 심상치는 아니하나 대수롭지 는 않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을두지는 편지를 읽었다. 그것은 간단한 문귀였다.

『네 어젯밤의 네 죄를 알지라, 항복하면 네 목숨을 살리 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네 성을 불사르고 네 백성을 잡아 가리라. 곧 대답하라.』

하는 것이었다. 그 얼마나 오만 무례한 말인고! 을두지는 낙랑 왕의 편지를 불끈 꾸겨 쥐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에게는 아직도 용감하던 조상의 피가 어느 구석에 살아 있 던 것이다. 「윽」하고 이를 악물고 숨을 소리 높이 내어 쉬었다. 아내 공주도 새삼스럽게 놀라고 어린애들까지도 눈 이 둥그레해서 평생에 보지 못하던 아버지의 무서운 상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울먹울먹하였다.

그는 낙랑 왕의 편지를 또 한번 읽었다. 어젯밤 일이 생각 났다. 그것은 낙랑 왕의 사관에 청함을 받아 갔을 때에 술 을 권하는 한녀의 손을 잡은 것과 그가 취하여 쓰러졌을 때 에 옆에서 구원하는 그 한녀를 끌어 당기었다는 것이다. 그 러나 그 전날 밤 태수의 집에 청함 받았을 때에 낙랑 왕도 버릇없이 공주의 손을 잡지 아니하였는가.

6[편집]

아무리 스스로 변호하여 보아도 어젯밤 일을 생각하면 대 수의 마음이 편안하지 아니하였다. 그 한녀라는 것이 아름 답기도 하고, 왕비라고는 하나 행지 거동이 왕비는 아닌 것 같았다. 첩인가 하였다. 아무리 취중이라 하더라도, 또 한녀 가 첩이라 하더라도 어젯밤 일은 발명할 길이 없는 허물은 허물이었다 하고 태수는 풀이 죽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 나 「그만 일로?」하고 그는 억지로 되살아 보았다.

다음에 그는 어젯밤의 허물 대신에 요구되는 항복의 뜻을 생각하여 보았다. 항복을 한다는 것은 「請爲臣, 妻爲妾」이 다. 자기는 낙랑 왕의 신하가 되고 아내는 그 첩이 되는 것 이다. 만일 항복을 한다면 태수는 머리를 풀고 제 몸을 결 박을 짓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 아리면서,

『죽여 줍소사.』

하고 빌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가 자기의 눈앞에서 낙랑 왕의 품에 안기는 양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생각만 하여도 정신이 아뜩아뜩하였다.

『안될 말이다. 안될 말야! 차라리 내가 죽는다. 내가 죽 어!』

태수는 미친 듯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칼자루에 손을 대었다.

이것을 보고 공주가 놀라 일어나 태수의 칼을 빼려는 팔에 매어 달리며,

『참으시오, 대감. 대체 무슨 일인지 알기나 합시다. 그 편 지에는 무에라고 하였소?』

하고, 태수의 손에 들린 편지를 빼앗으려 하나, 태수는 그 것을 공주의 손에 아니 가도록 높이 쳐든다. 어젯밤의 죄라 는 것도 알리고 싶지 않고 항복이라는 말도 들리고 싶지 아 니한 것이었다. 어차피 이따가는 알더라도 그 아는 동안을 조금이라도 늘이고 싶은 것이었다.

아내와 어린 세 아이! 그들이 한없이 불쌍하였다. 태수가 죽으면 아내는 낙랑 왕의 첩이 되고 아이들은 살육을 당하 거나 살아 나더라도 종이 될 것이었다. 아무리 하여서라도 한병은 물려야 할 것이었다. 모둔골 군사를 다 쓰기만 한다 면야 요만한 한병쯤은 문제도 안될 것이 엄마는 고미는 어 찌 되었길래 한 병이 마을을 싸도록 모르는 체할까. 고미도 낙랑 왕의 편이 되었나? 이렇게 태수는 평생에 처음으로 부 하를 의심하여 보았다.

『여보아라, 네 이름이 무에라 하였지? 이름은 무에면 대 수냐. 대관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고미는 대체 어디 갔단 말이냐. 네 고미더러 곧 들라고 일러라.』

태수의 말은 귀뚱개뚱한다.

『황송하오.』

『무엇이 황송하단 말이냐. 어서 고미를 불러. 우리 군사들 은 다 어찌 되었단 말이냐. 고미는 한병과 싸우다가 군사들 과 함께 죽었단 말이냐.』

『황송하오. 고미는 믿지 마오. 고미는 벌써 태수마마를 배 반하고 낙랑 왕에게 붙었다 하오.』

『무엇이?』

하고, 태수는 놀라더니 곧 코웃음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7[편집]

『그래, 고미가 나를 배반하고 낙랑 왕에 붙었단 말이지?

이놈, 너는 아직 낙랑 왕에게 붙지 아니 하였느냐?』

하고, 태수는 무돌을 노려 본다.

『사또, 크게 말씀 마시고 가만가만히 말씀하시오. 벌써 마 을 안에 번든 군사도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소.』

『마을 안에 번드는 놈들도 다 한 나라에 붙었단 말이지?

그래 너는 어떠냐? 너도 낙랑 왕에게서 한녀 선물을 받고 거기 붙었느냐, 아직 안 붙었느냐? 어디 똑바로 말을 해보 아라. 천하에 한 놈쯤은 믿을 만한 놈이 있어도 좋지 아니 하냐?』

『젛사오대 음술물이 마를 날은 있어도 소인의 맘이 변할 날은 없은 줄로 아뢰오.』

『참말 그러냐?』

『어찌 거짓말 하오리까.』

『그도 그렇겠다. 지금 내게 아첨해서 무엇을 먹겠다고 거 짓말을 한단 말이냐. 기특하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 오냐 무돌이. 이름이야 무엇이든지 지금 내가 그것을 알아 무엇 하겠느냐. 응 무돌이. 네 이름이 무돌이지. 기특하다. 너를 좀더 일찍 알았더면 너를 호위 대장을 시키는 걸 그랬다.

지금 아니 쓸데 있느냐. 저놈들 왜 저리 아우성을 하는고.

저렇게 까닭이 없이─옳지 어젯밤 허물이랐것다. 허, 이놈들 나를 술을 먹여 취케 해놓고 저희놈들이 모두 꾸며 놓고 더 러운 소리를 내게 뒤집어 씌운단 말이지? 그래 그놈들 할 대로 하래라. 그렇지만 태수 을두지는 열 번 죽어도 한 나 라 놈의 앞에 항복은 아니한다고 일러라. 옳다, 무돌아─네 이름이 무돌이랬지─네 나가서 한 나라 도적놈들에게 그렇 게 일러라, 졸본 나라 모둔골 태수 을두지는 조상적부터 항 복이란 것을 배운 일이 없다고. 배운 건 칼 쓰기뿐이니 내 일 날이 밝거든 나와 칼로 겨루자고. 낙랑 왕 최 낙이란 자 가 몸소 나와 나와 겨루어 승부를 결하자고. 만일 그것이 두렵거든, 모가지가 아깝거든 목을 늘이고 내 말 앞에 항복 하라고. 이것이 태수 을두지의 회답이라고 일러라. 무돌아 그렇게 일러!』

『안되오, 사또. 그것은 안될 말씀이요. 아무리 마마께서 칼을 잘 쓰시고 영웅이시라도 혼자서 한 나라 군사와 싸우 신다는 것은 안될 말씀이요. 사또, 그것은 안될 말씀이요.』

『내가 칼을 잘 써? 내가 영웅야? 이놈, 나를 비웃는 게 냐? 나는 칼로 토끼 한 마리 찍어 본 일 없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칼이다. 가만 두어도 며칠 못 살 것을 왜 일 부러 칼로 찔러 죽인단 말인가. 나는 죽이는 것은 싫다.』

『그러면 어떻게 낙랑 왕과 싸우신단 말씀이요.』

『필경 내가 죽는 게지. 내가 죽으면 다들 속이 시원할 것 아니냐. 내 처자와 함께 다 죽는 게야. 안 그러냐?』

태수의 얼굴은 비창하게 되고 그 처자를 돌아 보는 눈에는 눈물이 빛난다.

『태수마마, 그리하시면 이 백성들은 다 어찌하오? 이 나 라는 어찌하오?』

하고, 무돌은 두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다.

8[편집]

『그러면 어찌하느냐. 낸들 죽고 싶어 죽으며, 저 어린 것 들인들 죽이고 싶어 죽이겠느냐마는, 살아 있자니 욕이로구 나. 아무렇기로 을두지가 적장의 앞에 항복을 하겠느냐. 항 복은 아니한다. 그러니 잔말 말고 어서 한 나라 사자에게 이렇게 일러라. 내일 해 뜨거든 낙랑 왕 최 낙더러 나와서 백성들 다 모인 자리에서 승부를 겨루자고.』

이렇게 말하는 을두지의 얼굴에는 결단성 있는 장수와 같 은 모습이 나타났다. 조상 적 용감한 기질의 자취가 남았다 가 번쩍 빛이 나는 것이었다.

『아니 돼요, 사또 그래서는 아니 되오.』

하고, 무돌은 이제는 다만 말을 전하는 한 사자가 아니요, 주인 태수를 감독하고 보호하는 선배와 같았다.

『그럼 어떻거란 말이냐 무돌아? 네게 무슨 좋은 수가 있 거든 일러다오. 그런데 이 늙은이는 어찌 안들어 온단 말이 냐. 현암을 부를 수 없을까. 현암은 마음이 변하지는 아니하 였을 것을. 그 늙은이 말을 들었더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을. 한 나라 놈들을 가까이하지 말고, 고미에게 병권을 맡기 지 말라고 그처럼 늙은 눈에 눈물을 흘려 가며 간하던 것 을. 또 어저께만 해도 낙랑 왕의 사관에 그렇게 가지 말라 고 나를 붙들던 것을. 인제 그런 생각을 한들 무엇하느냐.

모두 내 잘못이야. 어진 사람을 멀리하고 간사한 무리를 믿 은 것이 내 잘못이야. 그러나 인제 내 후회도 늦었어. 인제 는 현암의 말을 들어 그대로 좇고 싶건마는, 현암이 어디 있느냐. 저 보아, 저놈들의 아우성을. 저놈들이 북까지 두들 기지 않느냐. 무돌아, 그래 무슨 꾀가 있느냐? 네 말을 들으 마. 어디 말해 보아라.』

태수는 무돌을 물끄러미 바라 본다.

『어리석은 소견이오나 이렇게 하면 어떠하올지?』

『그래, 어떻게?』

『주몽아기 말씀을 들으셨소? 동부여에서 나왔다는 주몽 말씀요.』

『응 들었지. 저 주몽아기라고도 하고 주몽 장군이라고도 하는 그 도적 떼 말이지?』

『아니요. 주몽아기는 도적 떼가 아니라 도적 떼를 쳐서 백성의 환을 덜어 주는 의인이요.』

『응, 도적 떼는 아니야? 의인야? 활이 용하다지?』

『예, 그러하오. 주몽 장군이 의인이요. 그리고 활이 백발 백중이요. 그러고도 바위를 뚫고 쇠를 꿴다 하오. ??자를 누 르고 약한 자를 돕고 백성들의 억울한 것을 반드시 들어 준 다 하오. 그러하되 백성의 것은 추호 불법이라 하여 지금 천하에 주몽아기의 일월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오.』

주몽의 명성은 자연 민간에 높았고, 왕이나 세력 있는 자 들은 의심스럽고 무시무시한 도적의 떼로 꺼리고 있었던 것 이다.

『그래, 그 주몽이란 의인이 지금 어디 있단 말이냐? 그 사람이 의인이라면 나를 도와서 최 낙과 고미를 쳐 줄 법도 하다마는. 그래그래, 그 주몽아기라는 큰 도적이 어디 있느 냐?』

주몽을 도적 두목으로 알던 입버릇이었다.

9[편집]

『지금 주몽 장군의 군사가 우리 모둔골을 향하고 온다하 오. 사흘 길 밖에 왔다고도 하고 이틀 길 밖에 와 있다고도 하오.』

하는 무돌의 말에 태수는,

『우리 모둔골을 향하고?』

하고 놀란다.

『예. 그러하오나 모둔골을 치러 오는 것은 아니요, 주몽아 기는 도적의 떼가 웅거하는 소굴을 쳤지, 고을이나 여염을 엄습한 일은 한번도 없다 하오.』

『주몽이란 사람이 그렇게 의인이냐? 그래 주몽이를 어떡 헌단 말이냐?』

태수는 좀 안심하는 빛을 보인다.

『주몽아기께 사자를 보내어서 구원을 청하는 것이 어떠하 올지?』

『옳아, 그게 좋다!』

하고 태수는 무릎을 친다.

『그 사람이 그렇게 의인이라면 반드시 우리를 도와 줄게 다. 세상에는 승냥이를 쫓노라고 호랑이 밥이 되는 일도 있 지마는, 저 한 나라 놈들만 쫓아 버렸으면 뒤야 어찌 갔든 지. 그럼 그 사람을 청해 보아라. 체면에 내가 도적 두목에 게 친히 편지를 보내어서 청할 수야 있느냐. 네가 네 의사 대로 좋도록 말하려무나. 만일 그 도적 두목이─주몽아기가 주몽 장군인가가 왜 내 청병하는 편지가 없느냐고 트집을 잡거든 내가 활에 맞았다거나 좋도록 핑계를 하려무나.』

이렇게 태수가 말하는 것을 듣고 공주는 섬뜩하였다.

『왜 저 어른이 저렇게 방정맞은 말을 할까?』

하고, 오싹 소름이 끼쳐서 안았던 애기를 유모에게 주면서,

『아니 무돌, 그렇게는 말을 마오. 사또께옵서 활을 맞으셨 다는둥 돌아 가셨다는둥 그런 불길한 말은 마오. 사또께서 청병하신다는 말이 창피하거든 내가, 공주가 청하더라고 하 오. 그러고 신표로 예물로 이 가락지와 비녀를 주오. 주되 이것을 만나는 길로 턱 내어 놓지 말고 주몽아기라는 도적 두목의 눈치를 보아서 얼른 응하거나 아주 아니 응할 눈치 어든 이것을 내어 놓을 것 없고, 만일 할까말까 망설이는 눈치어든 그때에 이것을 주어 보오.』

하고, 공주는 손에 꼈던 금가락지와 머리에 꽂았던 금비녀 를 빼어 무돌에게 내어 준다. 봉채를 빼니 공주의 구름 같 은 머리가 가냘픈 허리에 수루루 풀려 내렸다.

무돌은 공주의 비녀와 가락지를 받아 주머니에 간직하고 일어나 절하며,

『갔다 오리다. 사또, 부디 소인이 청병하여 돌아 올 때까 지 진중하시오. 공주마마, 사또께 아무 일이 없도록 지혜를 쓰시오. 그러면 소인 무돌 하직이요.』

하고, 눈물이 솟는 눈을 들어 태수와 공주를 바라보았다.

『휭 나는 듯이 댕겨 오렷다. 네 공은 태수 을두지 지하에 서라도 아니 잊을 것이다. 네가 돌아 올 때까지 내가 못 살 더라도 부디 내 원수라도 갚고 공주마마와 이 아이들을 네 가 잘 맡아 다고.』

하는 태수의 말 끝에 공주도 일어나 무돌 가까이 와서 엎 드린 무돌을 굽어 보며,

『아무리 하여서라도 주몽 장군인가 한 사람을 불러 가지 고 오오. 나는 태수 모시고 꼼짝 아니하고 여기서 청병 오 기만 기다리겠소. 그럼 부디 잘 다녀 오오. 충신 무돌을 하 늘이 도우소서.』

무돌은 비창한 중에도 황공하여서 이마를 땅에 굴린다.

10[편집]

무돌은 낙랑 왕에게 주는 대답을 더 태수에게 물으려 아니 하였다. 묻더라도 태수는 내일 해가 뜨면 승부를 결하자는 한 마디를 반복할 것이었다. 그래서 무돌은 이렇게 태수에 게 진언하였다.

『한 나라 군사에게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어떠하올지?

내일 해 뜰 때라고 마시고 모레 해 뜰 때에 만나자고, 이렇 게 대답하심이 어떠하올지. 모레 해 뜰 때가 멀다 하오면 내일 해 질 때까지에 대답하마고 하면 어떠하올지. 그렇게 대답을 써 주시면 소인이 낙랑 왕께 가서 그럴 듯하게 말을 꾸며 대어 보오리다.』

『그래, 옳아. 청병이 올 때까지는 늘여야 할 것이야. 그래 그러자. 이렇게 중대한 일을 갑자기 결단할 수 없으니 모레 아침으로 기약 삼자 하고 쓰랴? 무돌이 네 생각에 어떠 냐?』

『그것이 좋을 줄 아뢰오. 아무쪼록 체면 상하지 아니할 만큼 저쪽의 마음을 늦추는 것이 좋을 줄 아뢰오.』

『그래, 참 옳은 말이다. 이쪽 체면 상하지 않을 만치, 그 리고도 저놈의 마음을 늦추도록─참 지혜로운 말이다.』

이렇게 말하고 태수는 손수 붓을 들어,

『이러한 큰일을 갑자기 결정하기 어려우니 모레로 기약하 고 몸소 탑전에 나아가 대답하오리다. 자세한 말씀은 사자 무돌이 사뢰오리이다.』

하고, 태수 을두지라고 서명하고 인을 찍어 무돌에게 내어 주었다.

무돌은 태수의 답장을 받아 가지고 심복 부하들과 말을 타 고 삼문 밖에 나아가,

『우리는 태수가 낙랑 왕께 보내는 답장을 가지고 가는 사 자다.』

하여, 마을을 에워 싼 한 나라 장수의 물금패(勿禁版)를 얻 어 가지고 낙랑 왕의 사관으로 달려 가서 문을 지키는 장수 에게 태수의 편지를 전하였더니, 왕 최 낙이 보고 무돌을 부르라 하여 친히 만났다.

무돌이 낙랑 왕의 앞에 나아가니 옆에는 고미가 앉아 있었 다. 무돌은 분이 치밀어 당장에 달려 들어 치고 싶었으나 큰일을 위하여 참고, 낙랑 왕께 절한 뒤에 좋은 낯으로 고 미에게 상관에 대한 예로 읍하였다.

낙랑 왕은 크게 성을 내는 모양으로,

『그래, 너희 태수가 오지 아니하고 어찌해 네가 왔어? 모 레까지 기다리라는 것은 괘씸한 말이고, 또 편지 언사가 불 공하거든.』

하고 호령한다.

『대왕마마, 노여우심을 참으시옵고 소인의 말씀을 들으시 오. 태수 사또께서는 대왕의 엄명을 받으시고 황망하여 몸 을 떨으시고─.』

왕은 무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래, 너희 태수가 내 글발을 보고 황망하여 떨더냐?』

『예.』

『하하하 그렇겠지. 못난 놈이다. 너희 태수가. 그래 또 말 을 해라.』

『우리 태수께서는 황망하여서 떠시면서, 곧 달려 와 대왕 께 뵈옵고 사죄를 하신다 하시나 이렇게 밤이 깊고 또 태수 께서 신양이 있으시와 병든 몸으로 대왕께 와 보입기도 황 송하옵고 그래하와서 모레 아침에는 꼭 대왕께 나아와 죄를 사하신다 하오.』

이 말에 왕은 다시 쇠며,

『요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해! 너희 태수의 편지 속에는 병이란 말은 없는데.』

하고 발을 구른다.

11[편집]

왕이 발을 구르고 성내는 양을 보고 무돌은 더욱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소인이 어찌 감히 거짓말을 아뢰오리까. 여기 계신 소인 의 상관 고미 장군이 소인의 우직하온 줄을 증명하시리 다.』

하고 눈을 들어 고미를 보니 고미가 빙그레 웃으며,

『이놈은 우직한 놈이요, 못난 놈이요.』

하고 왕의 앞에 증명한다.

고미가 증명하는 말을 듣고 나서 무돌은 말을 계속한다.

『우리 태수는 어젯밤 연회에서 촉상하시와 본래 병석에 누워 계시던 차에 대왕의 엄명을 받으시고 너무 황망하시와 긴 글을 못 쓰시옵고 소인보고 자세한 말씀 대왕께 아뢰이 라 분부하셨소.』

낙랑 왕은 무돌의 말이 그럴 듯한 모양이어서 태수의 청을 들어 줄 마음이 동하여서 고미에게 눈짓하는 것을 무돌은 고개를 숙인 채로 훔쳐 보았으나 고미의 눈대답이 분명치 아니하였다.

왕은 고미가 동의 아니함을 보고 설레설레 고개를 두세 번 천천히 흔들더니,

『태수가 병으로 못 오면 공주도 못 보낼까. 네 곧 돌아 가서 냉큼 공주더러 대신 와서 항복하라고 일러라.』

하고는 고개를 슬쩍 돌려 고미를 보고 씩 웃고 나서 다시 무돌을 보고 거만하게 빈정대는 낯으로,

『내행이 밤에 혼자 올 수 없다고 하거든 군을 보내어 묶 어 온다 하여라. 호랑의 수염을 건드린 토끼라, 체면이 무슨 체면이냐. 너희 공주더러 냉큼 오라고 일러라. 밤이 깊어서 못 온다고 너희 공주가 말하거든 여기 푸근한 잠자리도 마 련되어 있다고 일러. 내가 잡아 오려면 금방이라도 잡아 오 겠지마는 특별히 제발로 걸어 오기를 허한다고 일러라. 한 시간 안에 아니 오면 용서 없이 태수는 죽이고 공주는 잡아 온다고 일럿!』

하고, 최후의 단안을 내렸다고 눈을 부릅뜨고 입을 한일자 로 힘을 준다.

『대왕마마, 소인이 아뢰는 말씀에 거짓이 있으면 소인이 금시에 고미 장군의 칼에 죽겠소.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공 주마마는 어제부터 보일 것이 보여서 자리에 누워 계시고, 기동을 못하오. 공주마마를 뫼시는 소인의 누이 나인에게 들었사오니 적실하오. 그러하오니 우리 태수의 글발대로 하 룻밤만 늦추시와 대왕의 너그러우신 인덕을 보이옵소서.』

하고 무돌은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최 낙도 탐재 호색은 하나 본래가 포악한 사람은 아니었 다. 고미의 꼬임이 아니었더면 이런 일까지는 아니 꾸몄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인덕」이라는 말에 약간 마 음도 흔들려서,

『그래라. 너희 태수의 원을 들어 주니 다시 기약을 어기 지 말라.』

하고 낙랑 왕의 쾌락이 있을 때에 고미가,

『대왕마마.』

하고 팔을 들어 막는 시늉을 하며,

『다시 생각하시오. 그렇게 기약을 늦추었다가 그동안에 무슨 음모가 있으면 어찌하오. 인덕도 좋소마는 다 잡던 꿩 을 놓치신가 저허하오. 태수는 숙맥이어니와 공주는 그렇지 아니하여 꾀가 있는 줄로 아오.』

하고 말리는 것을 낙랑 왕은 껄껄 구레나룻을 쓸고 뚱뚱한 몸집을 흔들어 웃으며,

『꾀? 까투리의 꾀가 매 잡겠나. 고미 장군 당할 장수가 졸본 부여를 다 떨기로 또 있겠나. 어젯밤에도 너무 늦도록 마셨으니 오늘은 그만 자지. 장군도 오희에게 신정이 미흡 일 것이라 돌아 가 자오. 조롱에 든 새가 달아날 리 만무하 지. 안 그런가? 하하하하.』

하고 된 일 다 된 것같이 소리를 크게 하여 웃고 나서 무 돌을 대하여,

『임금의 말은 땀과 같아서 한번 나온 것은 도로 주워 담 지를 못하는 법이야. 내가 한번 그래라 한 것을 다시 거두 겠느냐. 모레 아침까지 너무 머니 내일 해 지기까지 늦추어 준다 하여라.』

하고 무돌의 절도 못 본 체 자리에서 일어선다.

12[편집]

낙랑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매 무돌이 고미를 향하여,

『소인 물러 가오.』

하고 하직하고 나오려 할 때에 고미는 주저하다가,

『무돌아.』

하고 불렀다.

『예.』

하고 무돌은 되돌아섰다.

고미는 달래는 낯으로,

『너 태수께 나를 여기서 보았노라고 하지 말렷다.』

하고 당부하였다.

무돌은 이 경우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주몽한테 갈 길이 바빠서 참았다. 또 고미와 같은 불충 불의한 놈하고 말을 한댔자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 칼로 고미놈의 배때기를 찔러 그놈의 창자를 꺼내어서 개와 돼지 밥을 만들고 싶었으나 지금 그런 짓을 하다가는 큰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었다. 그래서 무돌이는 꿀꺽 참고 간단하게,

『예.』

하고 대답하였다.

『이봐라.』

『예.』

『태수가 나를 찾더냐?』

『예. 간절하게 찾으셨소.』

『무에라고 찾더냐?』

『고미가 웬 일일까? 고미가 왜 안 보일까? 고미가 설마 날 배반할 리는 없으려든, 그러시오. 웬만하면 태수마마께로 한번 찾아가 뵈이시오.』

하고 무돌은 마침내 고미를 미워하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쉬!』

고미는 손을 들어서 무돌의 말을 막았다. 차마 무돌의 말 을 듣기도 거북하였거니와 누가 문 밖에 오는 인기척이 들 렸던 것이다. 고미는 거의거의 졸본 부여 왕이 다된 것같이 생각하고 있어서 지금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여서는 아니 되 는 것이었다.

『어떻게 공주까지 가질 수 없을까.』

하고 고미는 그 어여쁜 공주를 낙랑 왕 최 낙의 돼지같이 뚱뚱한 품에 안겨줄 것을 생각하면 피가 끓어 올랐다. 최 낙은 고미를 이용하고 먹이고 계집까지 주어서 주는데는 부 족이 없지마는 사람 대접이 부족하였다. 그 거만, 그 무례, 지금까지 을두지의 인정 있는 대우를 받아 온 고미로서는 참으로 거북하였다. 최 낙은 고미 같은 것은 사람으로 아니 여기는 모양이어서 옆에 고미를 놓고도 못하는 일이 없었 다. 이러한 아니꼬운 꼴도 고미는 제 일을 위하여서 참는 것이었다. 최 낙의 발바닥보다 더한 것을 핥으라 하여도 핥 을 작정이요, 최 낙이 구역하여 토해 놓은 것을 들여마시라 하여도 마실 작정이었다.

『나는 왕이 된다. 이 좋은 판에 왕이 된다. 왕만 되면 내 발바닥 막 핥으게하고 나 토한 것 막 먹이게 한다. 하고 싶 으면 학정도 마음대로 하고 심심해서 마음이 나면 선정도 해본다.』

하면서도 태수를 생각하면 고미의 마음 한편 구석에 찜찜 한 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아직 사람의 심장을 다 잃어 버 린 것은 아니었다.

13[편집]

기연가 미연가로 무돌을 떠나 보내고 태수는 시시각각으로 한병의 침입을 고대하다시피, 바싹하는 소리만 나도 소스라 쳐 놀라면서 밤을 보내었다.

공주는 공주대로 잠든 어린것들을 무시로 들여다 보고는 이 어린것들의 운명이 장차 어찌 되는가 하고 생각에 잠겼 다. 만일 태수와 세 아이를 건질 길만 있다면 저 한 몸 버 려도 좋고 죽어도 좋다고도 생각하였다. 공주는 자기의 존 재가 이 불행의 근원인 것을 짐작하였다. 태수가 지난 밤 낙랑 왕의 사관에서 한녀와 동침하였다는 말을 들을 때에 여자의 본능으로 질투의 불길이 일지 아니함은 아니었으나 지금 처지에 그런 것을 교계할 수 없다고도 생각하여 미안 하게 여기는 태수를 친절하게 위로하였다.

태수는 공주에게는 결코 만족한 남편은 아니었다. 공주는 남편이 좀더 사내답기를 바랐다. 지금 천하가 주인을 잃고 백성이 새로운 큰 임금의 출현을 갈망할 때에 남편이 왜 거 기 응하여 일어나는 사람이 못되는가 하고 안타까왔다. 을 두지의 아버지만 해도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졸본 나라를 침범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 러한 공로로 졸본 왕의 신임을 받아서 모둔골 태수인 채로 졸본 나라의 막리지(莫離支)가 되어서 임금에 다음 가는 높 은 지위에 앉아 임금의 권세를 대신 부리기를 십년이나 하 였다. 그래서 막리지는 일변정사를 개혁하고 군비를 정비하 여서 졸본 부여로 삼 부여를 통일할 야심까지 가지고 일하 였으나, 첫째로는 왕이 기백이 없고 또 늙었고, 둘째로는 귀 족들이 부패하여서 나라 일을 잊고 제 몸과 제 집의 안락만 을 탐하여서 잘났거나 못났거나 제 족속과 비위에 맞는 자 를 중요한 벼슬에 쓰고 심지어는 아무 재주도 없는 자를 장 수로 삼으려 하여 일마다 막리지의 정치에 반대하고 막리지 를 몰아 내려고 음모하였다. 늙고 착하기만 한 왕은 귓문이 넓어서 아침에는 이 사람의 말에 저녁에는 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막리지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막리지도 다른 것은 좋으나 용단력이 부족하여 옳지 아니 한 자를 죽이거나 물리칠 용기가 없어서 뱀을 설죽이는 일 이 많았다. 숫제 안 죽이거나 죽이거든 아주 죽여 버리지를 못하고 반쯤 죽이다가 놓아 주기 때문에 그 뱀이 상처가 나 아서 다시 움직이는 날에는 저를 죽이려던 자에게 대어들었 다. 말년이 될수록 막리지의 이 약점이 더욱 커졌다.

국운이 진한 나라가 되어서 그러한가. 새로운 인물이 나오 지 아니하고 또 쓸 만한 인물이 나더라도 썩은 귀족들이 국 정을 농단하기 때문에 나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곧은 사람 은 미움을 받아 법에 걸리거나 산으로 들로 물러가 몸과 이 름을 숨기고, 아첨하고 추세하는 무리들이 조정에 차게 되 었다.

왕은 연일 풍류로 소일하였고 권문 세가에서도 주색의 향 락으로 일을 삼아서 졸본은 태평 연월의 풍류 도시가 되고 말았다.

14[편집]

중앙이 그러하기 때문에 태수와 같은 지방 장관들도 그러 하였다. 군인들 조차 무예는 아니 배우고 백성의 재물과 아 내와 딸을 엿보기로 일을 삼았다. 딸을 바치고 벼슬을 구하 는 자와 아내를 주고 죄를 면하는 자가 있으나, 이것을 바 로 잡을 법이 없었다. 막리지마저 죽은 뒤에는 왕은 백성의 질고를 들을 길이 없었다. 왕은 날마다 꼭 같은 사람만 만 나서 꼭 같은 소리를 듣기 때문에 세상 일을 몰랐다. 왕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왕이 듣기 싫어할 일은 쉬쉬하고 감 추었다. 왕의 귀에 들어 가는 말은 모두 좋은 말뿐이었다.

그래서 늙은 왕은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가 태평성세라고 생 각하고 있었다. 지방에 도적이 일어나 백성들이 삼 슬듯 죽 고 동네들이 추수 마당에 티검불 같이 타버려도 왕은 알지 못하였다.

이러하는 동안에 권세 잡은 소수 귀족의 전지는 넓어가도 나라 영토는 해마다 줄어들고 탐관오리의 몸에는 살이 너무 쪄도 백성들의 뱃가죽에는 주름이 잡혔다. 외국 사람 주몽 의 수백명 부대가 자유로 국내에 횡행하여도 이것을 막을 생각을 하는 자가 없을뿐더러 졸본 조정에서는 다만 하잘 것 없는 한 초적의 떼로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왕은 이러 한 초적의 떼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모둔골은 이러한 졸본의 한 고을이요, 을두지는 이러한 졸 본의 팔십여 명 태수 중에 하나였다.

이럭저럭 무서운 밤이 새벽에 가까웠을 때에 공주는 태수 의 침실에 들어 와서 태수를 보고,

『어떻게 이 밤은 무사히 지내나 보오.』

하고 빙그레 웃었다. 하염없는 웃음이요 애써 남편의 마음 을 편하게 하려는 웃음이었다.

『좀 잤소?』

『온조(溫祚)에게 젖을 물리고 자리에 누웠다가 잠이 들었 더니 이상한 꿈을 하나 꾸었소.』

『무슨 꿈이요? 이판에 좋은 꿈이 있을 리도 없겠지마는 어디 말해 보오.』

태수도 공주가 빙그레 웃는 양이 대견도 하고 귀엽기도 하 여서 손을 잡으며 물었다.

『아주 큰 대궐인데─졸본 대궐보다도 더 큰 대궐인데, 온 조가 끼끗한 장부가 되어서 쌍룡을 수놓은 비단 황포를 입 고 용상에 걸터 앉아서 백관의 조회를 받고 있는 꿈이요.』

『글쎄. 그렇게 되었으면 작히나 좋겠소마는 그야말로 꿈 같은 소리요. 그런데 비류(沸流)는 어떠오? 몸이 좀 덥다더 니, 잘 자오?』

젊은 태수도 아버지다운 걱정을 한다.

『과히 보채지는 않아요. 나보기에는 온조가 비류보다 잘 난 것 같은데 대감 생각에는 어떻소?』

『나 보기에도 그래. 살아나기만 하면 다 무엇이 될 것 같 소마는 무돌이가 빠져나가서 과연 주몽을 불러 올는지. 인 제 날도 새는 모양인데 오늘 안으로 주몽이 아니 오면 다 허사가 아니요. 비류나 온조나 주몽이가 아니면 살릴 사람 이 없지 아니하오? 무돌의 말 같으면 주몽은 의인이니 내가 죽더라도 공주는 아이들을 데리고 주몽에게 의탁하시오. 공 주가 주몽에게 시집을 가도 좋아. 자손이나 살려야 하지 않 소.』

하고 태수는 천연하여진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우리들이 다 살아서 온조가 큰 임금이 되는 것을 보아야지.』

하고 공주는 남편의 목을 껴안는다.

15[편집]

태수도 공주를 얼싸 안았다. 서로 안은 두 사람의 마음은 뜨거웠으나 촛불에 비추인 두 얼굴은 얼음장같이 찼다. 열 일곱 살 동갑으로 혼인한지 육년, 이제 서로 스물 세 살이 되기까지 태수와 공주와 두 내외의 금실도 좋았다. 고생이 라 할 만한 고생도 없이 길고 긴 봄날과 같은 즐거운 세월 을 보냈었다.

근래에 와서 공주는 남편이 좀더 사나이답고 영웅다왔으면 하는 은근한 불만이 생겼으나 그것을 제하고는 내외간의 정 분에는 실 만한 틈도 없었다. 그러다가 천만 뜻밖에 당한 이 불행, 원래 주변 없는 태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매양 지혜로운 꾀를 내는 공주도 이번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고 두 사람은 무돌이 주몽을 끌고 돌아 오기만 기다리 고 있는 판이라, 더욱 아무 요량도 없어지고 사공이 뜨는 바람과 물결이 끌어다 주기를 바라고 앉았는 배탄 손님과 같은 심사로 있었다. 그렇다고 터억 마음이 놓이는 것도 아 니다. 불안과 초조는 있으면서도 앙탈을 한댔자, 몸부림을 한댔자 쓸데 없는 줄 알아서 사지에 맥을 풀고 있는 그러한 상태였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모든 욕심 근 심을 다 떠난 맑고 무인지경을 보아 마음의 때가 일시라도 벗겨지고 맑은 하늘 깨끗한 땅을 보는 것이다. 태수와 공주 는 바야흐로 이러한 심경 속에 있어서 서로 안고 서로 사랑 하는 참된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맛볼 수가 있었다.

『사또.』

『공주.』

이렇게 서로 외마디 소리로 부를 뿐이요 더 말이 없었으나 그 속에 모든 말이 다 있었다. 태수는 공주의 눈을, 공주는 태수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면 그것은 깊은 하늘과도 같고 고운 꽃과도 같아서 전에는 의식하지 못하던 알 수 없 는 정다움과 아름다움이 안개와 같이 피어 올랐다.

『여보시오.』

『예.』

『즐겁소.』

『꿈 같아.』

『언제까지나 이랬으면.』

지아비 지어미 두 사람은 한없는 애정을 느꼈다.

주몽이 오나? 주몽이 아니 오면 오늘이 마지막일는지 모른 다. 제 운명의 길을 한치 앞도 못 내다 보는 사람의 가엾음!

태수에게 또 공주에게 오늘 하루가 무엇을 가져 오려나.

창에 푸른 빛이 돌고 바지런한 참새 소리 나면 밤이 새는 게다. 후원 고목에서 무엇에 놀랐는고, 까치와 까마귀 요란 하게 짖는다.

공주는 까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태수는 까마귀 소리에 한숨을 쉬었다.

『사또. 까치가 짖소. 반가운 손님이 오나 보오. 주몽 장군 이 오려나. 혹시 졸본에서라도 무슨 도움이 오려나. 깎깎깎 깎 요란히도 짖소.』

『까마귀는 왜 저리 울까? 뱀을 보았나?』

16[편집]

이 순간에 태수와 공주를 생각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것은 옥중에 갇힌 현암이었다. 고미가 낙랑 왕의 앞이 되어 태수에 대하여 모반을 일으키려 할 때에 먼저 습격한 것이 현암의 집이었다. 현암은 충성 있는 사람이요 또 고미의 가 지가지 죄상을 다 아는 사람이어서 고미가 항상 눈에 가시 와 같이 미워하던 사람이라 이런 기회에 없이해 버리자는 생각도 생각이려니와, 충성된 사람으로 백성의 공경을 받는 현암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백성들이 그를 따라서 고미를 적 으로 할 것이 두려워, 현암을 잡아 옥에 가두고 심복 군사 를 명하여 이를 지키게 한 것이었다.

현암은 칠십을 바라보는 늙은 몸으로 축축한 흙방 오줌 똥 냄새 나는 감방에 갇혔다. 분격과 태수 내외에 대한 걱정과 또 나라를 위하는 근심으로 밤을 새웠다. 가끔 고미의 군사 가 와서는 현암을 조롱하고 후욕하고 현암이 못 들은 체하 면 손으로 쥐어 박고 발길로 질러 굴리고 각가지로 욕을 보 였다. 그것은 아마 현암이 잠이 들지 못하게 하려는 고미의 심사인 것 같았다.

현암은 고미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빌었다. 제 나라 제 임 금을 배반하고 어진 사람을 모해하는 자에게는 천벌이 내리 기를 빌고 또 그러할 것을 현암은 믿었다.

새벽녘에 또 군사 하나가 현암의 감방에 왔다. 그는 다른 군사들이 의례히 현암에게 하는 욕설도 아니하고 김이 나는 미음 한 그릇을 들고 들어 와서,

『얼른 자시오.』

하고 현암 앞에 내밀었다.

『이건 무에냐. 먹고 죽으라고 고미가 보내는 거냐?』

하고 현암은 미음 그릇 든 군사를 노려 보았다.

미음 든 군사는 깜짝 놀라는 듯이 손을 벌려서 현암의 입 을 막는 시늉을 하며,

『소리 내지 말고 이걸 자시오. 미음이요.』

하는 어성이나 낯빛이나 참되었다. 현암은 그 젊은 사람의 정성에 감동되고 호의 가진 사람을 의심한 것이 미안도 하 여, 미음을 받아서 마셨다. 그러고 그릇을 젊은 군사에게 돌 려 주며,

『잘 먹었다마는 너는 뉘길래 다른 군사 모양으로 나를 욕 설도 아니하고 구타도 아니하고 이렇게 따뜻한 먹을 것까지 갖다가 주느냐. 내가 밤새 몇 십 번인지 수없이 욕을 당한 끝에 혼곤히 잠이 들어서 이것이 꿈이란 말이냐. 너는 꿈에 나타난 사람이란 말이냐. 그렇지 아니하면 귀신이란 말이냐.

세상에 아직도 너 같은 사람이 한 둘은 남아 있단 말이 냐?』

하고 반쯤 정신 없는 사람과 같이 지절대었다.

젊은 군사는 허리를 굽신하며,

『황송하오. 소인은 꿈에 나온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 요. 늙으신 어른이 춥기도 하고 허기도 지신 듯하길래 내가 먹을 조반을 좀 갈라 드렸소.』

하고 심상하게 대답하였다.

17[편집]

현암은 아직도 이 젊은 군사를 꽉 믿을 수는 없었다. 혹은 고미의 염탐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처음 에 미음을 물리친 것도 그 속에 독약이 있을 것을 의심함이 었다. 그러나 목마른 자에게 물 먹이기 쉽듯이 지금 처지의 현암으로는 사람을 얼른 믿기가 쉬웠다.

『얘. 다들 나를 욕하는 데 왜 네가 내게 인정을 두노?』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지 않소? 꿀 먹는 벌레가 있으면 쑥 먹는 벌레도 있지 않소?』

현암과 젊은 군사와 사이에 이 모양으로 회화가 시작되었 다. 한가하다면 무척 한가한 회화다. 귀신도 잠이 든다는 닭 울녘에 침침한 옥 속에서 단 두 사람의 하염없는 담화다.

그러나 긴장하다고 보면 이 이상 더 긴장한 광경도 없을 것 이다. 피차에 목숨을 내걸고 하는 교섭이다.

『그래 너는 쑥 먹는 벌레로구나.』

하고 현암의 주름 잡힌 얼굴에는 웃음이 떴다.

『어떻게 되었느냐?』

『무엇이요?』

『대관절 무슨 일이 생겼느냐?』

『소인네도 무엇인지 모르겠소. 한 나라 군사들이 골목골 목 지키고 큰 집들을 뒤져서는 젊은 여자와 재물을 막 가져 가는 모양이요. 그 오라질 한 나라 군사놈들이 남의 안방에 막 뛰어 가서 자리에서 자는 아낙네를 막 끌어낸단 말요.

소인넨 못 보았으나 벌써 음술물 가에 낸 한나라 배에는 더 싣지 못할 만큼 우리 나라 여자와 재물을 실었다 하오. 제 길할, 나 같은 놈은 나이 삼십이 넘어도 여지껏 애꾸 계집 구경 하나 못하는데 아끼고 아끼던 큰 애기들을 모두 한 나 라 놈헌테 빼앗긴단 말야, 제길할.』

『마을은 어찌 됐느냐? 태수마마 어찌 되신지 아느냐?』

『마을에는 한병이 꼭꼭 둘러 싸서 쥐 한 마리 꼼작 못한 다 하오.』

『그럼 공주마마 태수마마 안부는 모르느냐?』

『소인네야 알 수가 있습니까.』

『내 집 소식도 모르느냐.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누구신지 아오. 모둔골에서 현암 대공형(大公兄)을 모르 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영감마님이 이런 데를 오시니 세상 은 뒤집혔는가 하오.』

『내 집은 어찌 되었느냐?』

『며느님 따님네는 다 한병에게 잡혀 가시고 댁은 불을 놓 아서 다 타버렸다 하오. 이런 말씀은 안 드릴 말씀을 드렸 나 보오.』

현암은 이 젊은 군사의 말을 듣고 삼연히 눈물을 흘리며 한참 말이 없었다.

이윽고 현암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젊은 군사의 손을 잡으며,

『네가 내 아들이다. 나를 아비로 알고 내 부탁을 하나 들 어 주려느냐. 내가 살아 나가면 내 몸으로 네 신세를 갚고 내가 여기서 죽으면 신령님께 네 신세를 갚으셔지이다고 빌 터이니 이 늙은 것의 원을 네가 들어 주려느냐?』

『무슨 부탁이시오? 말씀해 보시오. 소인네가 할 것이면 사양 아니하겠소.』

『너 말 탈 줄 아느냐?』

『말 타기는 밥 먹기 담에는 가게 좋아하오. 졸본 이백리 당일 댕겨 온 일이 있소. 그까진 졸본 이백리쯤은 떡싸 허 리에 차면 걸어서라도 아침 먹고 떠나서 해 전에는 들어 가 서 볼 일 보고 이튿날 해뜨게 돌아 오기쯤 식은 죽 먹기 요.』

『정말 그러냐?』하고 현암의 눈은 기쁨으로 빛났다.

『정말이지, 소인이 무엇하러 거짓말 하겠소?』

18[편집]

『그러면.』하고 현암은 갑자기 기운을 얻어서,

『내 아들아. 너 그럼 졸본 좀 댕겨와 주랴.』

하고 젊은 군사를 껴안았다.

『아마 그런 일인가 하였소.』

『네 어찌 알았는고?』

『한병은 태수부를 둘러 싸고 모둔골은 어육이 되는 판이 니 이제 졸본에 사람을 보내어 상감님께 주달할 길 밖에 없 지 않소?』

『네, 어찌 그렇게 잘 아는고?』

『큰 벼슬하시는 양반님네는 호강에 겨워서 얼떨떨하여서 모르지마는 소인네와 같이 배 고름하게 먹고 정신 말짱한 놈들이야 왜 모르겠소? 우리네는 벌써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소.』

『너 같은 사람이 있는 줄을 모르고 쓰지 아니하였으니 모 두 내 죄다. 이 무딘 눈은 두어서 무엇하리.』

하고 현암은 번개같이 손가락으로 제 눈을 후비어 두 눈알 을 뜯어낸다. 젊은 군사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현암의 눈에 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얼마 후에야 현암은,

『내 아들아. 그럼 어서 졸본으로 가거라. 가서 할 말은 내 가 이를 것도 없이 네가 잘 알 것이다. 이제 나는 글발도 쓸 수 없으니 네가 가서 좋도록 아뢰어라. 될 수 있거든 상 감께 뵈옵고 모둔골이 망한다고, 공주 태수 두 마마 생사를 알 수 없나이다고. 곧 천병(天兵) 나리시와 한병 물리치시고 반신(叛臣) 버입소사고. 어리석은 신하 현암은 사람 못 알아 보아 나라를 욕되게 하온 죄로 두 눈알을 뽑아서 죄를 상감 앞에 사하나이다고. 네 그럼 부리나케 댕겨 오렷다. 알았느 냐?』

『다 잘 알았소. 여태껏 가라고 명하는 이가 없어서 못간 내요. 영감의 눈알을랑 소인네게 주시오.』

『그것 무엇에 쓰는고. 멀쩡하게 살아서도 볼 줄을 모르던 눈알, 이제 그것은 해서 무엇하려는고. 네 집 고양이에게 먹 이려는가.』

『아니요. 편지 대신 가지고 가려오. 가서 그 두 눈알을 당 로 대관들께 보이고 금방 영감마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려 오. 그러면 아마 소인이 돌아 올 때에는 사람 잘못 보는 눈 알을 수 백 알, 한 짐 지고 돌아와서 집 잃은 모둔골 고양 이에게 한바탕 포식을 시킬 것 같소. 그러면 소인 가오. 부 대 성급히 돌아 가실 생각은 마시오. 흙을 쥐어자시고라도 살아서 악한 놈들이 천벌을 받는 양을 보고 돌아갈 생각을 하시오. 그러면, 아버지 댕겨오겠소.』

『그래, 부대 중로에 고미놈의 군사에 붙들리지 말고.』

『그걸랑은 염려마오. 고미가 내 손에 잡힐지언정 고미의 손에 잡힐 사람이 아니요.』

하고 젊은 군사는 현암의 눈알을 현암의 옷자락을 뜯어서 싸서 허리에 차고 감방에서 나간다.

『다라미? 네 이름이 다라미더냐?』

하고 현암이 두어 걸음 나가며 외치나 벌써 그는 나가고 없었다.

19[편집]

다라미는 한편 허리에 현암의 눈알 싼 것을 차고 다른 편 허리에 떡 뭉치를 차고 일변 먹어 가면서 휭하게 졸본 이백 리 길을 달렸다. 개울가에는 버들 푸르고 산 이마에는 진달 래 붉었다. 바쁜 다라미언마는 버들피리를 불며 흥겨워하기 도 하였다.

석양의 비낀 빛 자욱한 아지랑이 속에 다라미의 눈앞에 졸 본 서울이 나타났다. 버드나무 장림 있는 졸본 물의 서쪽 언덕, 비록 쇠하였다 하더라도 오백년 옛 고읍이라 고루 거 각도 있고 잘나고 잘 차린 사람들도 길로 다니고 있었다.

다라미는 졸본 물가 버들 장림 그늘 길로 성문 있는데를 향하고 올라 갔다. 바람결에 둥둥하고 울려 오는 풍악소리 가 들렸다. 물굽이 돌아서서 바라보니 강상에는 사오척 배 가 연복하여 떠 있는데, 그 배에는 붉은 빛과 누른 빛으로 색동을 이은 장막이 둘려 있고, 배 돛대에는 높이 청·황·적· 백·흑 오색 깃발이 기다랗게 봄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장 막이 터진 틈으로 춤추는 여자의 오색 한삼이 펄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성밖 강가에는 이것을 구경하는 군중이 사람 성을 쌓고 각 색 음식 가게가 벌어져 있었고 술이 취하여 비틀거리는 군 사들과 한량들도 보였다.

『봄굿이요. 산에서 사흘 물에서 사흘 상감님께서 거동납 셔서 봄굿이요.』

다라미가 구경군에게 물을 때에 얻은 대답이 이것이었다.

『언제 이 굿이 끝나오?』하면,

『산굿이 끝나고 오늘이 물굿 첫날이요. 상감마마와 만조 백관이 사흘 밤 나흘 낮은 배에서 아니 나리시오.』

하는 것이었다.

봄에는 삼월, 가을에는 시월, 이 모양으로 나라에 큰 굿이 있는 것은 어느 부여에도 있는 일이었으나, 세상이 말세가 되매 굿으로 신명의 은혜를 갚는다는 본의는 잃어 버리고 남녀가 한데 어울려 진탕 먹고 놀고 하는 것이 굿이 되고 말았다. 산굿 사흘 물굿 사흘에는 정사도 다 폐해 버리고 오직 음탕으로 지내는 것이었다.

다라미는 큰일 났다고 생각하였다. 오늘이 물굿 첫날이라 면 내일 모레까지 기다리고 글피라야 마을에서 정사를 볼터 이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다.

다라미는 그 아버지 친구로서 대궐을 지키는 호위대에 백 부장으로 있는 개마(盖馬)라는 늙은이를 찾아 갔다. 그는 대 궐에서 가까운 호위대 영문 옆에 살고 있었다.

『너, 이놈, 어째 왔느냐. 무슨 일저지리를 하고서 도망을 왔느냐?』

하고 개마는 다라미를 보고 반겨하였다.

『그렇기나 했으면 좋겠소마는, 일저지리기는 낙랑 왕 놈 이 하고 뛰기는 다라미 제가 뛰었으니 걱정이요.』

하고 다라미는 허리에서 현암의 눈알 꾸러미를 끌러서 개 마의 앞에 내어 놓으면서,

『모둔골은 큰일 났소. 한병이 온통 태수 마을을 에워싸고 공주마마나 태수마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쥐 한 마리, 새 한 마리 얼씬 못하니 알 수 있소? 그나 그뿐인가. 한병은 민가에 다니면서 예쁘장한 젊은 아낙네 막 잡아 가고, 쓸만 한 재물 막 실어 가서 배에다 처싣는데, 아마 공주마마도 잡혀 가서 낙랑 왕의 장중에 들어 갔다는 말이 있소.』

개마는 놀라며,

『모둔골 천명 군사는 무엇하고?』

하고 분개한다.

20[편집]

『그것 참 이상하오. 모둔골 천명 군사는 부지거처요. 듣건 댄 고미 장군이 어디다가 감추었다 하오.』

『고미는 어디 있고?』

『고미는 낙랑 왕 모시고 잘 노나 봅데다. 세상 모두 거꾸 로 되었소.』

『현암 대공 형은 어찌 되었니?』

『인제는 벌써 뻗었겠소. 옥에 매운 몸은 올 수가 없어서 눈만이 여기 왔소. ?소, 끌러 보시오. 바로 이 싼 헝겊이 현 암 대공 형의 옷자락이요. 아자씨가 한번 물어 보시오. 현암 대공 형 왜 그 꼴이 되었느냐고.』

개마의 손에 매듭이 풀려서 헝겊 속에 눈알 둘이 나온다.

아직 썩지는 않은 모양이어서 비린내가 홱 품긴다.

『이게 무에냐?』

하고 개마는 징그러워 뒤로 물러 앉는다.

『그게 눈알이요. 사람 몰라본 죄로 자기 손가락으로 막 후벼서 뜯어내인 눈알이요. 글발 대신으로 신표로 가지고 왔소.』

『사람을 몰라 보닷게?』

『바른 사람 버리고 왼 사람 골라 써서 나라 망쳤단 말이 지요.』

『허, 그런 눈깔 뺄 양이면 소바리·뱃짐이 될 것이다.』

하고 개마는 현암의 눈알 싼 것을 두 손으로 받들고 그 속 에서 무엇을 알아 보려고나 하는 듯이 물끄러미 들여다 보 고 있더니, 빈정대는 어조로,

『그래 이것은 갖다가 파묻기나 하지 무엇하러 졸본까지 차고 왔니? 지금 졸본에 이런 것 알아볼 눈깔 있는 줄 아 니?』

『그래도 졸본서 구원병이 내려 가기 전에는 공주나 태수 나 모조리 잡혀 가지 않소? 그러니 이 소식을 속히 상감께 아뢰이도록 아자씨께서 힘을 쓰셔야겠소.』

『그거 하늘에 별 따기 만큼 어려운 일이지.』

『왜요?』

『네나 내나 무슨 재주로 상감께 뵙니?』

『우리가 직접은 못 뵈와도 상감께 뵈올 수 있는 큰 벼슬 아치는 볼 수 있지 않소?』

『높은 벼슬아치는 무슨 재주로 만나니? 그것도 하늘에 별 따기지.』

『그럼 이 기별을 어떻게 상감께 알려 드리오?』

『글쎄 말이다. 나도 생각이 안 난다. 듣기 좋은 기별같으 면 우으로 올라갈 수도 있는가 보더라마는, 네가 가지고 온 것 같은 흉한 기별은 하늘에 올라가기만치나 힘이 드는거 야. 까딱 잘못하다가는 그 기별 가지고 온 녀석의 모가지가 거꾸로 달리기가 십상이야. 지금 세상에는 천하 태평이요, 태평 성세요 하는 말만이 행세를 한단 말이다.』

『그럼 어떡허오?』

『어떻게 해? 할 수 없지. 게다가 오늘이 물굿 첫날이니 사흘 안에는 무가내하다.』

『그럼 모둔골은 망하지 않소? 어떻게 좀 방책을 생각해 보오.』

다라미의 눈에는 현암의 눈 빠지고 피 흐르는 얼굴이 어른 거렸다.

21[편집]

다라미는 이 사람 저 사람과 의논해도 쓸데 없을 것을 알 았다. 첫째로는 좋지 아니한 기별을 상감께 전할 길이 없었 고, 둘째로는 이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아까와하는 이가 없었 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이 무너져 가는 늙은 나라와 못나고 제 욕심만 채우려는 벼슬아치들에게 지긋지긋하게 진력이 난 것이었다.

『좋다.』

『잘 논다.』

『얼씨구.』

강상에서 치는 굿거리 장단이 바람결에 들려 오면 거리의 사람들은 이렇게 흥에 겨운 듯이 춤을 추었으나 그 끝에는 코웃음하고 입을 삐쭉하였다.

군사들이란 것도 맨 늙은이들이요, 간혹 젊은 놈이 있더라 도 날탕패로 놀기를 좋아하고 권세 부리기에 재미를 붙일 뿐이지 적과 싸울 마음도 기운도 재주도 없었다.

『모둔골 기별을 상감의 귀에 들리게 한댔자 별수 없다.

군사가 몇 명 안되기도 하거니와 모둔골 이백리를 가는 동 안에 다 달아나고 말고 더러 적 있는 데까지 간댔자 모두, 살려 주오 하고 항복을 하거나 뛰다가 개죽음 할 것이 뻔한 걸. 그까진 것들은 청병해 가서 무엇하는 거야. 청병을 할테 면 주몽이를 청하는게 좋지 않아? 주몽이네 군사는 당해낼 수도 없거니와 추호 불범이래. 인제 며칠 안해서 졸본에도 들어 올 걸. 벌써 한 패가 졸본에 들어 와 있는지도 몰라.

저렇게 굿에나 미쳐서 지랄하는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아나.』

이것이 졸본 서울이 다라미에게 일러 주는 말이었다. 다라 미는 낙심하였다. 그는 그래도 졸본에만 오면 무슨 좋은 일 이 생길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에 제일 좋은 데 가 졸본이요, 천하에 가장 힘있는 이가 상감으로 알았던 것 이다. 그런데 백성들의 마음은 벌써 그 임금을 떠난 것이었 다. 백성의 마음을 잃은 임금은 한 필부다. 그에게는 힘이 없을뿐더러, 천하의 미움이 있었다. 실상 졸본의 임금은 착 한 늙은이였다. 그의 밑에 그 둘레에 있는 벼슬아치들이 백 성의 미움을 받기 때문에 임금도 미움을 받는 것이다. 왜 그런 나쁜 신하들을 내어 쫓지 못하느냐고, 왜 좋은 사람들 을 골라 쓰지 못하느냐고, 이렇게 임금은 원망을 받는 것이 었다. 이렇게 인심 잃은 임금을 위하여서 재물을 바칠 마음 도 아니 나려든, 하물며 목숨을 바치랴.

다라미도 화가 나고 속이 상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듣고 보면 제가 앞장을 서서 이런 나라를 둘러 엎고도 싶었다.

그러나 다라미는 현암을 생각하였다. 모둔골을 생각하였다.

아무리 하여서라도 제가 맡은 일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 었다. 가지고 온 기별을 벼슬아치들과 상감께 전하지 아니 하면 아니 된다. 어느 벼슬아치 하나에게만 전하여서는 아 무 것도 안되는 줄을 안 그는 여러 벼슬아치와 임금께 한꺼 번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2[편집]

다라미는 이 일에 대하여서 사람의 도움을 얻을 수 없는 것을 알았다. 다라미가 하려는 일을 중요하게 아는 이도 없 고 또 그 기별이 임금께까지 올라가서 군대가 모둔골로 가 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밤이 들기를 기다려서 다라미는 옷을 벗고 현암 눈알싼 것 을 목에 매고 졸본 물에 뛰어 들어서 임금의 배를 향하여 헤었다. 아직 물은 찼다. 비록 죽기를 결단한 다라미요, 또 젊고 기운찬 다라미언마는 물 속에서 흑흑 느껴지고 팔다리 에 자개바람이 일 것 같았다.

배에서는 밤굿 한 거리를 하노라고 막 치고 불어서 다라미 가 배 곁으로 헤어 오는 것을 아는 이가 없었다. 아직 달이 아니 오른 봄 밤은 칠을 부운 것 같았다.

다라미는 뱃전을 붙잡고 몸을 추어 올랐다. 배가 움찍할 때에 웬일인가 하던 사람들은 다라미의 벌거벗은 몸뚱이가 배 위에 나타날 때에, 춤을 추고 장단을 치던 무당들은,

『아, 물 귀신이다!』

하고 악 소리를 치고 나가 자빠지거나 남자의 품 속으로 기어 들고, 수염이 허연 높은 벼슬아치들도 입을 딱 벌리고 몸이 한편으로 쏠렸다. 그래도 늙은 임금과 그의 막내딸 비 오라(比烏羅)만은 태연하게 다라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오 라는 조시누의 동생이요, 임금이 눈알과 같이 사랑하는 딸 이었다.

『상감마마께 아뢰오.』

하고 다라미는 힘껏 소리를 질렀으나 몸이 얼어서 소리는 약하고 떨렸다. 그것이 더욱 귀신의 소리와 같았다.

사람들이 자기를 귀신으로 여기는 것을 한껏 다행하게 여 겼다. 만일 자기를 사람으로 알 양이면 단박에 죽거나 입을 틀어 막아서 제가 할 말도 다하지 못하고 말 것을 겁냈기 때문이다.

『상감마마께 아뢰오.』

다라미는 몸을 푸르르 떨며 한번 더 소리를 질렀다.

『네 어떠한 귀신인지 모르거니와, 할 말이 있거든 하여라.

임금은 사람과 귀신의 임금이라 하였으니, 네 무슨 억울한 일이 있어서 나타났느냐?』

왕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였다. 왕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대신들도 정신을 차리고 쓰러졌던 몸들을 일으켰다.

『황송하오. 간밤에 한병이 모둔골을 에워 싸서 태수 부중 에 쥐도 새도 통치 못하오니 공주마마 소식도 묘연하옵고 낙랑 왕이 거느리고 온 한병들은 민가에 침입하와 젊은 아 낙네와 재물을 막 겁탈하여서 음술물에 닿인 배에 싣고 있 소. 호위 대장 고미는 낙랑 왕과 통하였삽소 대공형 현암은 고미의 손으로 옥에 갇혀 있소. 고미 같은 놈 알아 보지 못 한 눈깔이라 하와 현암 대공형이 제 손으로 두 눈알을 후비 어 낸 것이 여기 있소. 이 보자기는 대공형의 웃옷자락이요.

상감마마, 곧 청병을 보내시지 아니하시면 공주마마께서도 낙랑 왕에게 붙잡혀 가실 것 같소.』

하고 현암의 두 눈알을 끌러 내어 놓으니 죽은 두 눈알이 촛불 빛에 빛을 낸다.

23[편집]

다라미의 말에 왕이나 신하들이나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서 한참 동안 말 없이 다라미를 바라볼 뿐이었다. 바라보면 바 라볼수록 다라미는 귀신인 것만 같았다. 촛불에 비추인 다 라미의 몸을 보고 있는 동안에 자꾸 커져서 어두운 하늘까 지 올라 가는 것만 같았다. 몸에 묻은 물 방울이 불에 번쩍 이는 것이 용의 비늘인가 싶었다.

막리지 이무기(莫離支伊牟只)는 다라미의 모양과 번쩍거리 는 현암의 눈알이 무서워서 허연 수염을 덜덜 떨며, 그러나 대신의 위엄을 잃지 아니하려고 억지로 몸을 펴고,

『듣거라. 네 어떠한 귀신인지 모르거니와 상감마마와 공 주아기 앞에 감히 뻘거벗은 몸으로 나타나니 그만 하여도 죽을 죄여든, 태평 성대에 밤에 개 한 마리 아니짖고 날 짐 승 길 벌레도 상감마마 하늘 같으신 은혜 손에 서로 다투는 일이 없거든 모둔골 같은 큰 고울이 한병에게 싸였다는 허 무 맹랑한 말을 지어내어 상감마마를 놀라시게 하고 민심을 소란케 하니 네 죄 백 번 죽어 마땅하다. 그나 가뿐인가, 나 라에서 하시는 거룩한 큰 굿대감 마노라, 여러 신상 마노라 즐거이 노시는 자리에 감히 부정한 것을 들고 들어와 굿자 리를 더럽히니 네 죄 첫 번 죽어 마땅하다. 네 왕법의 칼과 신명의 벼락이 무섭지 아니하냐. 네 어떠한 귀신인지 모르 거니와 이 부정한 것을 집어 가지고 냉큼 물러나렷다. 하늘 로 오르거나 물 속으로 나리거나 썩 스러지지 못할까.』

하고 제 호령에 점점 기운을 얻어서 되살아나며 눈을 부릅 떠 그 귀신과 눈알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나 눈알은 더욱 빛 나고 귀신은 스러지기는커녕 더욱더욱 험상을 나타내었다.

막리지의 말에 기운을 얻은 두상 대감 도 가비(加非)는 그 래도 대장군다운 위엄을 나투며,

『상감마마 젛사오되 막리지 말씀이 옳소. 모둔골에 고미 의 군사 천명이 있거든 낙랑 왕이 아니라 한 나라 황제가 오기로니 까딱이나 하오리까.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소인 의 목에 칼을 얹으시오. 설사 한병이 물밀 듯 들어오더라도 소인의 한 칼로 이렇게 물리치겠소. 상감마마, 아예 저런 요 괴의 말에 경동하지 마시오.』

하고 허리에 찬 호피 칼집에서 긴 칼을 쭉 빼어 들고 현암 의 두 눈알과 다라미를 번갈아 노려 본다.

다라미는 어이 없어,

『허허허허.』

하고 큰 소리를 내고 몸을 흔들며 웃었다.

다라미가 무서워하는 빛이 없이 도리어 몸을 흔들며 웃는 통에 두상 대감의 손에 비껴 들린 칼이 덜덜 떨리며 내려오 고 으쓱하였던 몸이 움츠러진다.

왕의 낯빛이 파랗게 질리고 공주 작은아기(小阿只)가 왕의 등 뒤로 몸을 숨긴다.

이에 검은 긴 옷에 검은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조의 대선 두루미(?衣大仙豆留彌)가 나서며,

『상감마마.』

하고 나앉는다.

24[편집]

막리지는 정사를 맡은 머리요, 두상 대감은 군사를 맡은 머리요, 조의 대선은 학문을 맡은 머리로서 졸본 나라의 세 머리다. 동부여의 예백에 상당한 것이 조의 대선 두루미다.

주의 대선은 평거에는 세력이 없지마는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는 그의 지혜를 빌게 되기 때문에, 왕의 등 뒤에 숨었던 작은아기까지도 두루미의 붉은 얼굴 흰 수염 속에서 무슨 신통한 말이 나오나 하고 잠시 무서움도 잊고 나앉는다.

조의 대선 두루미는 옴팡눈을 반짝반짝하고 말이 나오다가 걸릴 것을 두려워하는 듯이 두 손으로 수염을 가르면서 말 을 시작한다.

『상감마마께 아뢰오. 그것이 그렇지 아니하오. 저기 나타 난 것이.』

하고 손을 들어 다라미를 가리키며,

『저기 나타난 것이 사람이 아니면 귀신이요, 귀신이 아니 면 사람이 옵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닐 리는 없을 줄 아뢰오.』

이 말에 막리지 이무기는 못마땅한 듯이 미간을 찡기고 두 상 대감 도 가비는 더욱 못마땅한 듯이 고개를 돌린다. 또 조의 두루미의 잔소리가 나온다 하고 진저리를 내는 것이었 다. 두루미는 잔소리는 하나 또한 귀에 거슬리는 바른 소리 를 하여서 큰 권세를 가진 두 사람을 각죽각죽 긁고 핀잔을 주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두루미는 말을 이어,

『두 분 대감은 내 말에 매양 낯을 찡기고 고개를 돌리지 마는 내 말이 못마땅한 것이 아니라 대감네들 생각이 못마 땅한 것이요. 대감네는 상감마마의 귀요 눈이요 손이요 발 이니, 천하의 소리를 다 들어서 상감마마께 아뢰어야 하고 상감마마의 거룩하신 뜻을 받자와 천하 백성의 아픈 데를 만져 주고 가려운 데를 긁어 주어야 하오. 그러하거늘 대감 네는 귀에 달가운 소리만 들으려 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 를 안 들으려 하여서 듣기 좋은 말씀만 상감마마께 아뢰고 듣기 거북한 말씀은 아니 아뢰이니, 이것은 위로 임금을 속 이고 아래로 백성을 업신여기는 것이요. 어디 이래서야 나 라가 되겠소? 이래서 임금은 백성의 마음을 모르시고 백성 은 임금의 뜻을 받잡지 못하게 하면 임금과 백성이 서로 떨 어지니, 이러고 나라가 되는 법이 없소. 대체 천하에 백성 아니 사랑하는 임금이 없고 나라 사랑 아니하는 백성이 없 소. 이 사이를 떼는 것은 옳지 못한 신하들이요.』

하고 두루미는 더욱 목소리를 가다듬어서,

『지금 저기 나타난 것으로 말하여도 저것이 귀신이 아니 면 사람이요, 사람이 아니면 귀신인 것은 분명한 일인데, 만 일 저것이 사람이라 하면 저렇게 추운 것과 죽을 것을 무릅 쓰고 밤 강물을 헤어서 여기까지 왔으니 무슨 중대한 일이 있을 것이 분명하고, 또 만일 귀신이라 하면 더구나 큰일인 가 하오. 조상님네 혼령이 나라에 무슨 큰일이 있을 것을 알리시려고 보내신 것이 아니겠소? 게다가 저렇게…….』

하고 현암의 눈을 가리키며,

『충신이 눈을 빼어 신표를 삼아서 보낸 사자를 이렇게 대 접해서 쓰겠소? 젛사오대 지금 상감마마께오서는 필시 그 인자하오신 마음에 저 충성된 사자가 추울 것을 어여삐 여 기시와 벗은 몸에 옷을 덮어 주시고 저 충신의 두 눈알을 쟁반에 받들어 그 충혼을 위로하고 싶으실 것으로 아오.』

하고 한번 왕의 앞에 절한 뒤에 이에 대한 계책을 아뢰인다.

『젛사오대.』

하고 조의 대선 두루미는 바닥에 이마를 조아리며,

『저기 나타난 것이 귀신이 아니면 사람이요, 사람이 아니 면 귀신이오니, 그것을 사람으로 봅시고 그 말을 사실로 들 읍시고 성단을 내리시오셔 즉각으로 두상 대감을 명하시와 이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화같이 모둔골로 가게 하오시고, 고주 대감을 명하시와 낙랑 왕의 옳지 아니함을 책망하게 하오시오. 병귀신속(兵貴神速)이라 하오니 일각을 지체할 수 없는 줄 아뢰오.』하였다.

왕은 조의 대선 두루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조의 대선의 말대로 하라. 저 사람에게 옷을 주고, 저 충 신의 눈알을 정한 종이를 깐 쟁반에 담아 내 앞에 올리어 그 눈으로 뉘가 충신인가 알아 내게 하리라. 두상 대감은 졸본에 있는 삼만명 군사를 반을 갈라 거느리고 즉각으로 모둔골로 가고, 고주 대감도 같이 가 낙랑 왕과 만나 말하 라. 이 봄물 굿은 이것으로 끝내고 모둔골이 평정되고 군사 가 개선하거든 큰아기 조시누도 함께 큰물 굿을 다시 베풀 리라. 배를 뭍으로 저으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