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동명왕/제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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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常[편집]

1[편집]

왕이 예랑과 유리와 만나서 유궁으로 돌아와 좌정하매 국 상 오이가 왕의 앞에 부복하여,

『상감마마, 오늘의 크신 기쁨을 하례하오. 이러한 일은 천 고에 드무오니 모두 상감마마 성덕이신 줄 아뢰오.』

하고 하례하는 말씀을 아뢰이니 왕도 만족하여 고개를 끄 덕이며 웃음을 머금고,

『내 두 소원 중에 이제 한 소원을 이루었소. 첫째는 예랑 과 다시 만나는 소원이요, 둘째는 선비족과 한족을 쳐물리 고 단군의 옛 강토를 회복하는 것인데, 이제 첫 소원을 이 루었으니 기쁘오. 앞에 남은 것은 둘째 소원. 자 다들 술 한 잔을 들어 이 몸의 기쁨을 같이하여 주오. 이봐라, 잔 가득 술 부어라.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빠짐 없이 한잔 가득 부어라.』

하고 음성조차 더욱 웅장한 것 같다.

『젛사오대 소인은…….』

하고 오이가 머리를 조아리며,

『상감마마, 먼저 소인의 벼슬을 갈아 주시고, 소인의 불충 을 벌하여 주시옵기 바라오. 소인의 불충한 죄 둘이오니, 하 나는 살아 계오신 예랑마마를 돌아 가신 줄로 아뢰온 죄이 요, 또 하나는 오늘 유리마마 궁문 앞에 오신 것을 물리친 죄오니, 그중에 한 죄만 하와도 죽어 마땅 하옵거든 하물며 둘이오리까. 원하옵나니 소인의 관직을 삭탁하시옵고 내려 비어 주시옵기 바라오.』

하고 일어나지 아니한다.

왕은 웃으며,

『어, 그 일인가. 예랑의 무덤에 술 부어 놓고 울어 준 것 이 고마우니 한 죄는 용서하고, 유리를 물리치기로 말하면 이몸이 한 일이니 그대 탓이 아니라. 어서 일어나 술 마시 라. 이봐라, 국상에게는 그중 큰 잔에 철철 넘도록 술을 부 어라. 하하하하, 그게 벌이야.』

하고 왕은 손수 오이의 소매를 잡아 일으킨다.

『황송하오.』

하고 오이는 마지 못하여 일어난다.

동남 동녀가 술을 붓고 다들 고개를 젖혀서 술을 마신다.

오이도 술을 다 마시고, 다시 엎드려,

『죽을 죄를 사하시니 천은이 망극하오. 백 번 죽어 상감 마마를 섬기려 하오. 그러하온 바 예랑마마와 유리마마 이 제 오시오나 신하와 백성의 무리 이 두 분을 무엇이라 여쭈 어 부르올지? 인륜으로 부부시요, 천륜으로 부자시니 마땅 히 예랑마마를 왕후마마라 삷고, 유리마마를 태자마마라 삷 을 것인가 하오. 총망 중에 미처 백관과 의논할 사이는 없 었사와도 다들 소인의 뜻과 한뜻인 줄 아뢰옵고 지급한 분 부를 내리시기를 바라오.』

하고 고개를 들어 좌우에 벌려 앉은 대관들을 돌아 보아 동의를 구하니 모두 이구 동성으로,

『그러하오. 소인네 뜻도 국상의 뜻과 같소.』

하고 아뢰인다.

2[편집]

왕은 백관의 청함을 가납하야,

『그리하리라. 예랑을 왕후로, 유리를 태자로 봉하되 따로 날을 정하여 책립하는 예식을 행하려니와 즉각으로 그리 시 행하여라.』

하고 왕은 예랑과 유리를 부른다. 백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읍한다. 예랑은 나와 왕의 바른편 자리에 앉고, 유리는 왕의 왼편 한걸음 앞에 읍하고 서니 백관이 일제 두 번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어 절하여 왕후와 태자에게 예하고,

『어아 어아 왕후마마!』

『어아 어아 태자마마!』

하고 일제히 불러서 경의를 표한다.

이리하여 예랑과 유리는 각각 제자리를 찾아 왕후가 되고 태자가 되었다.

며칠 후에 좋은 날을 받아서 왕후와 태자를 책립하는 큰 예식과 큰 잔치를 베풀고 이를 천하에 발표하니 상하가 다 기뻐하였다.

왕은 참으로 만족하였다. 왕은 잠시도 예랑의 곁을 떠나기 를 싫어할 만큼 예랑을 사랑하였다. 이십년래 그립던 정은 앞으로 이십년에도 다 풀 수 없는 것 같았다.

예랑과 유리가 온 후로 왕의 정신은 물론이어니와 몸의 건 강까지도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사에도 더욱 열심 하여 일변 토지를 개간하고 목축을 장려하여 식량 증산을 도모하고, 일변 도로를 개척하여 치안과 국방과 물자의 교 역에 편하게 하는 정책을 세워 착착 시행하였다. 그중에도 동부여에서 돼지를 구하여 농가에 돼지를 치게 하고 또 한 나라에서 좋은 누에 씨를 얻어 양잠업을 권장한 것은 왕의 산업 정책 중에 주요한 것이었다.

또 공업에 있어서는 우선 흙으로 하는 공업─기와·벽돌·도 기·자기 굽는 것을 장려하고, 한편 금·은·동·철의 광업을 진 흥하니, 유명한 고구려의 자기와 도검 공업도 동명왕 때에 싹이 트고 기초가 놓인 것이었다.

왕은 날마다 이러한 정사에 잠심하였다. 이리하여 정치의 성적은 부쩍부쩍 올라서 백성들이 한 곳에 자리 잡고 편안 히 사는 기풍이 차차 멀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지가 있으면 응달이 있듯이, 좋은 일이 있으면 궂은 일이 있었다.

예랑 모자를 만나 기쁜지 얼마 아니하여서 조시누 삼 모자 의 문제가 생겨 왕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다.

이 문제는 어차피 아니 일어날 수 없는 문제이지마는 그것 을 이렇게 급히 또는 불쾌한 형식으로 일으킨 장본인은 조 시누의 맏아들 비루였다. 그는 자기가 태자가 될 것으로 알 고 있다가 유리가 태자가 되매 자못 불평하여 조시누와 온 조를 괴롭게 하였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상감을 돕지 않았소? 그 런데 이제 이것이 무슨 꼴이요? 어머니는 무슨 명목으로 또 우리는 무슨 명목으로 이 궁중에 있소?』

하는 것이었다.

비루의 말이 옳지 아니한 것도 아니었다.

3[편집]

조시누는 왕이 삼 모자의 은인인 것을 말하고 왕께 대하여 불평을 품는 것이 옳지 아니함을 타일렀으나 비루는 어머니 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온조만은 어머니와 뜻이 같았다.

비루는 원래 성미가 급하고 욕심이 많고, 욕심이 많은지라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 있어서, 사람을 사귀어도 옳은 말 하 는 사람보다 듣기 좋은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저보다 나 은 이보다 저만 못한 이를 골랐다. 그와 반대로, 온조는 마 음이 온화하고 관후하여 제 욕심을 채우려기보다도 남을 위 하여 덕과 지혜 있는 사람을 사귀기를 좋아하나, 형 비루 모양으로 사생을 같이하기로 맹세하는 당파를 짓지 아니하 였다.

세상에는, 왕이 친아들이 없고 또 병이 있으니 비루와 온 조 둘 중에서 어느 하나가 뒤를 이으리라 하여 권세를 따르 는 자들이 혹은 비루의 편이 되고 또 혹은 온조를 따랐다.

비루는 형이니 태자가 될 가능이 많다고 보고, 온조는 왕이 가장 사랑하는 모양이니 아우이지마는 왕위는 그에게 돌아 가리라 하여 양론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옳은 사람은 옳 은 편을 따르는 것이매 자연히 비루의 당과 온조의 당이 판 연히 갈려 있던 것이다. 만일 오래 이 상태가 계속하였다면 형제 두 패 당간에 피 흘리는 싸움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것 이었다.

이때에 유리가 나타난 것이다. 유리는 진실로 위태한 시기 에 나타났다 할 것이다. 비루가 유리에게 대하여 어떠한 생 각을 가졌을까는 생각하기 쉬운 일이다. 필요하면 부하를 동원하여 유리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

이 위험과 이 기미를 알아차린 것이 오이의 총명이었다.

유리 모자가 나타난 날 즉시로 왕으로 하여금 왕후와 태자 가 누구인 것을 선명하게 한 것은 알고 보면 진실로 명철한 일이었던 것이다.

유리가 태자로 선포되니 비루는 용수할 틈을 잃어버렸다.

이제라도 제 심복을 시켜서 유리를 제거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나라가 제게로 아니 돌아 올 것은 분명하였다. 백 성들은 결코 유리를 죽인 비루를 따르지 아니할 것이었다.

이리되니 비루는 고구려에 더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나도 어디 가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겠소. 주몽이가 하는 일을 나는 왜 못하오.』

하고 비루는 조시누 앞에서 불평 삼아 뽐내었다. 조시누는 비루의 박덕함을 알았다. 재주 없이는 왕이 되어도 덕이 없 이는 못될 줄을 조시누는 알았으나, 그렇다고 다 자란 아들 을 보고 너는 덕이 없으니 안된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워서,

『그래, 너의 형제가 일심하면 왕업도 이룰 수 있지.』

하고 일변 비루의 불평을 누르고 일변 그 뜻을 장하게 여 겼다. 혹시 그럴지도 몰라 하는 어버이의 마음이었다.

4[편집]

비루와 온조는 마침내 고구려를 떠나게 되었다. 그날 왕은 왕후와 태자와 문무 제신을 데리고 동대문 밖까지 나와서 두 사람을 왕자의 예로 전송하였다.

왕은 문무관을 앞에 불러 놓고 먼저,

『비루를 따라가기 원하는 자는 나서라.』

하니, 나서는 자 열이었다.

다음에 왕은,

『온조를 따를 자는 나서라.』

하니, 백이었다.

비루는 수참도 하고 분개도 하여 평소에 자기의 부하이던 자를 보고 낱낱이 이름을 불렀으나 응하지 아니하매 더욱 분하여 칼을 빼어 그중에 하나를 찔렀다. 온조가 황망히 비 루를 붙들며,

『형님, 나를 따르는 자가 다 형님의 사람이 아니요?』

하고 말렸다.

왕은 비루와 온조를 따르는 자에게 다 말과 양식과 칼과 활과 갑옷을 주라 하였다.

온조는 왕의 앞에 꿇어,

『상감마마, 지난 이십년 우리 삼 모자를 거두어 주신 은 혜는 하늘같이 넓고 땅과 같이 두텁소. 그 은혜 갚을 길 없 이 떠나오니 죄만하오.』

하고 눈물을 흘렸다.

왕은 온조의 손을 잡으며,

『내 아들 온조야, 가서 부디 큰 나라를 세워라. 그리고 유 리의 자손과 네 자손이 영영 서로 친하여 원수가 되지 말렷 다.』

하고 태자를 불러 온조와 서로 손을 잡고 자손 대대로 적 이 안될 것을 맹세하게 하였다.

그러나 비루는 왕께 고별의 인사도 없이 열 사람 쫓는 자 를 데리고 뒤도 아니 돌아보고 떠나 버렸다.

온조는 왕께 하직한 뒤에 왕후의 앞에 하직하였다. 그 어 머니 조시누와 이모 작은 공주와 누이 보슬아기는 왕후와 뫼셔 있었다. 온조는 왕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상감마마 소인을 사랑하시와 아들로 부르시니 소인은 중 전마마를 어마마마라 아뢰오.』

하니 왕후는 온조의 손을 잡으며,

『내 아들 온조야. 부디 큰 나라 세워 큰 임금 되어라.』

하고 축복하였다.

온조는 자기 손을 잡은 왕후의 손을 두 손으로 받들고,

『어마마마, 소인의 어미와 누이 두고 가오.』

하고 조시누와 보릇을 돌아 보니 왕후는,

『글란 염려 말아. 조시누 공주는 이몸과 형제요, 보슬은 이 몸의 딸이니 염려 말아. 네 큰 임금 되어 태후의 예로 맞을 때까지 조시누 공주는 고구려 왕궁에서 왕후와 꼭 같 은 대우를 받으시는 줄 알아라.』

이러한 왕후의 말에 듣는 사람이 모두 감격하였으니 조시 누와 온조의 감격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온조가 백 사람을 거느리고 떠날 때에는 왕명으로 풍악이 울고 보내는 사람들은 떠나기를 아끼면서 「어아 어아 온조 아기」를 높이 불렀다. 일년 후면 백제 나라 시조가 될 온 조는 고구려 국민의 축복하는 눈으로 보냄을 받아 동으로 동으로 말을 달렸다.

5[편집]

구월, 아람도 다 쏟아지고 국화 잎도 새벽이면 까맣게 얼 때, 유궁의 버들 잎이 누렇다가 거무스름하여지면서 떨어지 기 시작한 때, 풀 숲 벌레 소리도 인제는 없고 중방 밑 귀 뚜라미 잠 못 드는 사람의 시름을 자아낼 때, 강물고기도 깊은 곬을 찾아 들 때 천지는 마치 이것으로 마지막인 듯 소조하기 짝이 없다. 단풍조차 물이 날아 버리면 메와 들은 온통 죽은 빛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마다 한번씩 돌아 오는 가을의 풍경이다.

겨울을 지나면 또 꽃 붉고 잎 푸른 봄이 오지 않나. 천지는 이렇게 젊은 듯 늙고 늙는 듯 젊어.

그러나 사람의 일생은 그렇지도 못하고 늙으면 고만이요 죽으면 고만이다. 다시 젊을 수 있나, 다시 살아 날 수 있 나?

사람이 다 늙어서 죽어도 좋으련마는 한창 시절에 죽는 이 도 있고 젖 끝에서 스러지는 이도 있다. 할 일을 다 하고 죽으면 무슨 한이리마는 시작해 놓은 일이 이로부터 자리가 잡힐까 할 때에 죽는 것은 죽는 당자나 옆에서 보는 자나 진실로 통곡할 일이다. 나라의 힘으로도 가는 목숨을 붙들 수는 없는 것이다.

고구려 왕 주몽이 병들어 누운 지가 벌써 거의 한 달. 유 궁에 옮아 온 것도 벌써 사오일이 넘었다. 천대 만대 자손 이 왕으로 앉을 대궐이 부정한 시체를 보지 말게 하리라는 이유로 왕은 굳이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유궁으로 떠나 온 것이지마는 예랑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에 유궁이 그리운 마 음도 있던 것이다.

왕의 이번 병의 직접 원인도 유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 리하던 칠월 늦장마도 지나고 팔월 보름의 하늘 맑고 달 밝 은 밤에 왕은 굳이 왕후를 이끌어 뱃노리를 하였다. 팔월 보름달은 이십년 전 가섬벌에서 왕과 예랑이 처음 겸 마지 막으로 배 위에서 서로 안고 보던 달이다.

왕후는 밤바람이 찬 것을 이유로 간절히 만류하였으나 왕 은 듣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왕후와 함께 강상에 배 띄우고 옛이야기를 하며 달을 즐겼던 것이다.

왕은 이날 밤에 참으로 행복을 느꼈다. 달도 좋고 하늘도 좋고 물도 좋았다. 달빛에 보는 예랑은 이십년 전과 다름이 없었다.

왕후는 솔솔 불어 오는 강바람이 병약한 왕의 몸을 상할까 하여 조바심을 하였으나 왕의 모처럼 좋아하는 마음을 깨뜨 리고 싶지 아니하였다.

끝없는 이야기도 그칠 때가 있어서 잠시 두 사람이 말이 없을 때면 물고기 뛰는 소리가 땀방거리는 것도 들렸다. 여 염에 개 짖는 소리도 들렸다.

가만히 하늘을 우러러 보던 왕은,

『내년이면 내 나이 마흔이야.』

이런 말도 하고,

『명년 이달도 이렇게 볼 수가 있을까?』

이런 말도 하였다.

왕후는 그런 말을 듣기가 눈물겨웠다. 정말 이것이 마지막 인 것 같아서.

6[편집]

『좀 추워.』

왕은 마침내 이런 말을 하였다.

『인제 들어 가시지.』

하고 왕후는 왕을 재촉하였다. 왕의 손은 싸늘하게 식고 얼굴은 달빛 때문이겠지마는 죽은 사람의 것과 같이 해쓱하 였다.

『괜찮아. 아직도 밤이 그때만큼은 안 깊었는데. 그대로 돌 아 갈까, 버들 숲에서 거닐어 볼까. 강월이가 물가에서 기다 리고 섰는 것 같아. 강월이가 혼이 있으면 여기 와 있을 거 야. 가서 술이나 한잔 따라 놓아야.』

왕은 이런 소리를 하며 노를 저었다. 왕후는 강월이란 말 에 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피를 뿜고 쓰러진 강월의 모습 이 왕이 가리키는 물가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배가 버들 밑 물가에 닿으니 거기는 괴유 모녀가 나와 있 었다. 왕은 예랑을 다시 만난 것이 모두 괴유 모녀의 은공 이라 하여 그들을 궁중에 두고 우대하였던 것이다.

왕은 배에 내려 괴유 모녀를 보며,

『이 물가에 강월이가 섰는 것 같아.』

하고 또 한번 뇌었다.

괴유 모녀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왕은 이밤을 유궁에서 지냈다. 더운 술로 추운 기운을 막 고 등골이 오싹오싹하는 것을 참으면서 왕후 예랑과 괴유 모녀와 실컷 지나간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였다.

왕의 짐이란 정사 일에 바빠서 사사로운 정담을 할 기회도 드물다는 것이다. 이날 왕은 오래간만에 한낱 사람으로 돌 아 가서 피차에 겪은 이십년의 파란을 회고하는 낙을 맛본 것이었다.

『인제 고만 주무시지.』

왕후는 여러 번 왕의 피로를 근심하였으나 솟는 흥을 누를 생각이 없었다. 평생에 처음으로 유쾌한 것 같았다.

대단히 밤이 깊어서야 왕후와 함께 침실에 들었다.

『일생에 가장 즐거운 밤이요.』

왕은 자리에 누워서도 얼른 잠이 들지 아니하고 오래도록 왕후를 애무하였다.

밖에서는 활 메고 창 든 군사들이 달빛 속에 왕궁을 지키 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대기는 싸늘하게 식어서 군 사의 갑옷에 서리가 맺히고 달빛을 타서 남쪽으로 돌아 오 는 기러기 소리가 들렸다.

괴유는 대소를 죽여 누이 강월과 예백·예도 부자의 원수를 갚을 것을 생각하였다. 왕이 강월을 생각하여 술을 부어 놓 고 강월의 혼을 부른 것을 고맙고 기쁘게 생각하였으나 대 소의 간을 내어 강월의 무덤 앞에 제를 드리기 전에는 강월 의 원혼은 잠이 들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아까 왕이 강월의 혼을 부를 때에 괴유는 왕께,

『누이의 원수를 갚기를 허하여 주시오.』

하고 청할 적에 왕은,

『때가 있다.』

한 것을 생각하고 그때가 언제일까 하면서 잠이 들었다.

7[편집]

이튿날 왕은 환궁하였으나 그날부터 신열이 나서 거의 한 달이나 일지 못하였다.

『이몸을 유궁으로 옮겨라.』

하여 왕은 유궁으로 옮아 온 것이다.

본래 부여의 옛 풍속에는 사람이 죽은 집에는 다시 사람이 살지 아니하고 불을 놓아 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차차 집을 짓게 되면서부터는 집을 태울 수가 없어서 죽게 된 병인을 위한 집을 새로 지어 거기서 죽게 하고 그 집을 태워 버리 게 되었다. 죽는 것을 부정으로 여겨서 사람이 죽은 집에서 는 천지 신명을 모시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가 가지고 있던 의복이나 기구와, 심지어는 그 처첩과 비복까지도 죽은 주인과 함께 장사하여 버렸다.

지금 와서는 그러한 일은 없지마는 왕은 나라가 소중하고 자손이 소중한 마음에 궐내에서 죽지 아니할 결심을 하고 유궁으로 옮은 것이었다. 왕도 자기가 일어나기 어려울 것 을 알았던 것이었다.

왕이 유궁에 옮아 올 때에는 태자 유리와 국상 이하 중신 을 불러 자기가 병으로 있는 동안 군국의 정사를 태자에게 맡긴다고 선언하였다. 태자는 총명이 있었으나 기우에 있어 서는 그 아버지를 따르기 어렵겠다고 왕도 생각하고 중신들 도 생각하였다. 인물로 보면 온조만 못한 것같이 백성들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태자 유리는 얼굴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노래도 잘하고 풍류 를 좋아하였다.

구월도 얼마 안 남고 날씨는 차차 추워 가는데 왕의 병세 는 더욱 침중하여 갈 뿐이었다. 머리맡에는 왕후와 조시누 가 번갈아 모셔 간호하고, 낙랑 왕녀와 작은 공주도 이를 도왔다. 날마다 약을 달이는 것과 굿을 하고 제사를 드리는 일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왕의 손으로 멸망한 나라가 넷이다. 졸본·송양·행인·옥저, 그리고 쳐부순 큰 도적의 소굴이 이십여, 사형에 처하여 목 을 자른 왕이 둘, 행인 옥저 도적 두목이 이백여, 그중에도 반역죄로 처자까지 참멸한 공신 무골이 죽던 광경은 왕의 눈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아니하였다. 그 밖에 왕과 그 군사 의 활과 창과 칼에 맞아 죽은 자는 이로 헤일 수가 없을 만 큼 많은 것이다.

왕이 열이 높아 정신이 황홀할 때에는 이러한 사람의 모양 들이 여러 가지 무서운 모습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이었 다. 원래 장력이 세인 왕이 아니라면 미칠 지경으로 그러한 허깨비가 난동하였고, 무당의 무꾸리에는 그러한 것들이 나 타나는 것이었다.

옛사람의 믿음에 의하면, 사람이 운수가 뻗쳐서 높은 신령 의 도움을 받을 때에는 잡귀가 범접을 못하나, 운수가 진하 면 눈 한번 흘겼던 원혼들까지도 원수를 갚으려 덤비어 든 다는 것이다. 마치 개미와 구더기가 병든 용이나 호랑이의 몸을 무엄하게 뜯어 먹듯이.

8[편집]

앓는 왕이 헛소리를 하거나 가위가 눌릴 때면 옆에 모신 사람들은 곧 모여 드는 원혼을 연상하여서 이것을 물리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왕의 머리맡에 천하가 다 두려워하던 일 월기를 걸고 그리고 유명하던 왕의 활에 살을 메워 세우고 몸에는 모든 짐승이 무서워하는 호피를 덮고─그러나 아무 러한 위엄도 왕의 꿈을 괴롭게 하는 허깨비를 물릴 수가 없 었다.

왕후는 태자에게 명하여 졸본과 송양과 행인과 옥저에 제 관을 보내어 그 멸망한 나라들의 왕의 조상의 혼령들과 산 천의 귀신들을 위하여 큰 굿을 베풀게 하고, 흘승골 성에도 큰 굿을 베풀어 무골의 원혼과 기타 왕께 원망을 품었을 모 든 원혼들을 불러 음식과 풍악과 노래와 춤으로 원망을 풀 게 하고, 조시누는 몸소 모둔골에 가서 남편 을두지와, 눈을 빼고 죽은 현암과, 그날 싸움에 활 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 은 한 나라 군사들과, 그리고 싸움이 끝난 뒤에 강변에서 왕의 손에 목이 잘린 반장 고미의 원혼들을 불러 위로하고 왕의 병이 낫게 하기를 빌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아무 효험이 없었다.

왕은 마침내 태자와 제신을 부르라 하였다. 왕은 최후의 유언을 하자는 것이었다.

유언의 자리에는 태자 유리, 국상 오이, 원임 국상 재사 이 하로 마리·합보·묵거 그리고 태자를 따라 온 세 사람 옥저· 구주·도조 등이 모두 수심을 띤 얼굴로 모이고 왕후와 조시 누도 모셔 있었다.

왕은 일월과 용을 수놓은 황포에 세 봉우리가 분명한 왕관 을 쓰고 상 위에 기대어 앉아서 태자와 제신의 절을 받았 다. 말 못되게 수척한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검은 기운조차 돌았으나, 왕은 위엄을 잃지 아니하려고 애를 썼다. 그것이 도리어 차마 볼 수 없듯이 가여웠다.

『이몸은 다시 일지 못할 것 같다.』

하는 말이 왕의 탄 입술에 흘러 나올 때에는 왕후와 태자 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그것이 왕의 눈에 아니 띄도록 다들 꿀꺽 참고 터지려는 울 음을 삼켰다.

『인제 이몸의 명은 진하였다. 선비족과 한족을 쫓고 단군 의 옛터를 통임하여 살기 좋은 큰 나라를 꼭 이루고 죽잤더 니─.』

하고 왕은 목이 메인 듯이 말을 끊더니 다시 기운을 내어,

『그러나 이제는 이몸의 명이 다야. 못 이룬 뜻을 유리야, 네게 남긴다. 네 부디 아비의 뜻을 이으렷다.』

할 때에는 왕의 눈이 번쩍 빛났다.

9[편집]

태자는 왕의 유명을 받잡고 왕의 발 앞에 엎드려,

『이몸이 어리오니 아직 어찌 아바마마의 뜻을 이으오리 까. 어서 회춘하시와 나라를 더욱 힘있게 하시옵소서.』

하고 울었다.

『듣거라. 네 진실로 스스로 어린 줄을 알면 좋은 임금이 될 것이다. 임금은 몸소 일하는 자가 아니요, 사람을 골라 일을 시키는 자다. 네 마음대로 하면 나라를 잃을 것이요, 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좇으면 나라를 크고 힘있게 하리 라.』

『어진 사람을 고르는 법은 어떠하오니까?』

『면전에서 감히 임금의 말을 거슬리는 자는 충성 있는 자 요,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 아첨하는 자는 제 욕심을 채우려 고 임금과 백성을 깎는 소인이니라.』

『나라이 힘있게 하는 법은 어떠하온지?』

『백성이 배곯고 헐벗지 않으면 나라의 힘이 있고, 백성이 임금과 그 신하들을 믿으면 나라의 힘이 있고, 군사가 죽기 를 두려워 아니하고 잘 장수를 믿으면 나라의 힘이 있나니 라. 요는 백성이 임금을 믿음에 있나니라.』

『백성이 나라를 믿게 하는 법은 어떠하온지?』

『백성을 속이지 아니하고, 백성의 것을 빼앗지 아니하고, 백성이 사랑하는 자를 상주고, 백성이 미워하는 자를 벌하 면 백성이 믿나니라.』

『백성이 사랑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며 백성이 미워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온지?』

『백성은 제 욕심이 없이 저희를 위하는 자를 사랑하고 저 희를 해하는 자를 미워하나니, 백성을 위하는 자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백성을 해치는 자에게 엄한 벌을 주면 백성이 믿나니라.』

『이몸을 가지는 법은 어떠하온지?』

『한 일도 제 마음대로 말고 어진 사람과 일 맡은 사람에 게 물어 하고, 백성이 배 부른 뒤에 배부르고, 백성이 즐거 운 뒤에 즐겁고, 궁궐을 높이 짓지 말고, 재물을 탐하지 말 고, 여색을 가까이 말고, 간사한 무리를 멀리하고, 네게 잘 못하는 자는 너그럽게 용서하되 백성에게 해롭게 하는 자는 용서 없이 법대로 벌하고, 술 취하지 말고, 놀이로 밤 새우 지 말고, 항상 몸이 편할까 저퍼하고, 마음이 게으를까 두려 워하면 하늘과 신명이 너를 도우시리라. 조심하고 조심하여 라.』

하고 왕은 왕과 고락을 같이 하여 온 제신들을 가리키며,

『너는 이 사람들을 존경하고 만사에 물어 하여라. 그러나 한 사람에게 오래 큰 권세를 맡기면 맡는 자는 교만한 마음 이 나고 다른 사람들은 이를 시기하여서 편당과 알력이 생 기나니 조심조심하여라.』

하고, 끝으로 조시누를 어머니와 같이 대접할 것과 괴유 모녀를 우대할 것을 부탁하여 유언과 공명을 마치었다.

장시간 힘들인 긴장에 왕의 몸에서는 허한이 흘렀다.

『이제 다 물러 가거라.』

하고 특히 오이·재사 등 다섯 사람을 가까이 불러,

『평생에 이몸을 도운 뜻이 못내 고맙소. 이제 마지막 작 별이니 앞으로는 나를 잊고 태자를 도와 주오.』

하고 영결하는 인사를 하니 다섯 사람은 왕의 앞에 엎드려 목을 놓아 울었다.

이런지 사흘 만에, 새벽 닭이 울기 바로 전에 왕이 붕하니 왕후 예랑과 태자 유리와 조시누와 국상 오이 등 다섯 사람 과 괴유 모녀가 옆에 모셨다. 용산에 장례하고 동명 성왕(東 明聖王)이라고 일컬었다. 밝을명 자는 해와 달을 한데 모은 것이었다.

(檀紀四二八二年十二月十七日夕陽 서울孝子洞에서)

後記. 東明聖王의 손자 大武神王 無恤 때에 마침내 東扶餘王 帶素는 怪由의 손에 죽고 東扶餘는 滅亡하고 말았다.

因果應報의 昭然한 자취라 할까.

<끝>